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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구약성서에서 '땅'과 '복'의 의미

by 은총가득 2021. 5. 18.

구약 역사서에서 “땅”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

구약 역사서 속에 나타나는 땅의 의미는 크게 가나안적 패턴과 이스라엘적 패턴, 두 패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가나안적 패턴을 생각해 보자. 가나안적 패턴에서는 가장 위에는 ‘바로’가 있다. 가나안의 땅은 바로의 소유라는 의미이다. 땅의 주인인 바로가 여러 지역의 왕들, 신전 제사장들에게 땅을 하사한다. 그러면 왕들은 바로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땅을 하사 받은 왕들은 다시 그 밑의 계급인 귀족과 전사들에게 땅을 하사하고 그들에게서 충성의 맹세를 받는다. 땅은 다시 노예나 기술자들, 농노에 의해 경작되고 이들은 왕들에게 곡물을 받친다. 노예들과 농노들은 징용되고 토지세를 왕들에게 받친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하류 계층이 있으니 이들은 바로 사회에서의 소외 계층인 빗진 자요, 눌린 자인 하비루들이 있다. 가나안 패턴에서는 2%가 지배 계층(바로, 왕들, 귀족, 전사)이다. 98%는 노예, 농노, 하비루이다. 이런 가나안의 패턴에서는 소수의 지배 계층에 의해 땅이 다스려진다.


두 번째 땅의 패턴은 이스라엘의 패턴이다. 이 패턴에서 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 되신다. 여기에는 왕도 귀족도 신전 제사장들도 없다. 다만 제비뽑아 땅을 나누어 가질 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여호수아서다.


① 하나님의 선물인 땅
여호수아서는 “선택된 백성”이 “약속된 땅”을 선물로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호수아서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가나안의 땅을 정복한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은 여호와의 땅으로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으로서 그 약속의 성취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것임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는 가나안 토지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온 땅을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주신다. 지파별로, 식구별로, 분배하시는데 여기에는 어떠한 특권 계급도 없다.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서 자유를 주시고 안식할 수 있고 도피할 수 있는 땅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역사서에 있어서 땅의 의미는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의 선택된 백성에게 땅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②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땅
여호와가 노예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땅을 선물로 주었다는 점에서 땅은 이스라엘의 정체성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는 가나안 땅은 원래부터 이스라엘의 소유가 아니라 언약을 지키는 조건 아래서 언약의 백성에게 선물로 하사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체성 의식에 땅이 지니는 신학적 중요성은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들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보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였다. 그러나 땅을 상실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경험을 했던 포로기와 포로기 후기 독자들에게는 땅은 “성취된 약속인” 동시에 “무효화된 유산”이며, “여호와의 신실성의 상징”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비신실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렇게 땅은 “민족적 정체성의 중심”인 동시에 “후회와 희망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땅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채널인 것이다.


③ 언약의 장소인 땅과 언약의 규정인 토라(율법)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땅은 원래부터 이스라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언약에 근거해서 주어진 언약의 장소이다. 따라서 계약을 파기하는 한, 계약의 장소에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여호수아서는 거듭해서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언약 규정(율법)을 지킬 때에만 비로소 왕의 하사로 주어진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에발산 의식”은 땅의 하사를 언약 규정과 연관시키면서 이스라엘과 땅을 율법의 통제 아래 놓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수아서의 결론인 “세겜 언약 갱신 의식”에서 땅을 하사하신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결정한 이들에게 “율법과 법도”를 주었다는 점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땅과 연관된 율법과 법도의 핵심적인 사상은 십계명에서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십계명에서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우상 금지 명령”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탐욕 금지 명령”, 그리고 이 둘 사이 중앙에 위치하는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에 잘 요약되어 있다.


④ 축복의 땅인 동시에 유혹의 땅
가나안 땅은 언약의 장소이기에 언약을 어길 때에는 그 땅에서 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 땅은 단순히 좋은 땅만은 아닌 것이다. 물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안식과 안전과 풍요를 제공하는 땅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스라엘을 여호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의 땅이기도 하다. 땅에 의해 필요가 충족되고 나면 더 이상 여호와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여호와를 사모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⑤ 결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땅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의 선택된 백성에게 땅을 선물로 주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언약 백성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을 언약의 주로 모시고 율례와 법도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만 된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언약을 어기면 더 이상 그 땅에서 살 없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율례와 법도를 따라 사는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이것이 구약 역사서에서 땅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이다.

 

 

구약이 말하는 복

 

서론적 이야기

복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아이러니 하게도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복을 받기위해 기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복신앙”이라는 것에 부담을 갖고 복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이 같은 현상은 성경에 나오는 복의 관점에 대한 이중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물질의 복을 이야기하는 반면, 신약에서는 영적인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주로 구약을 인용하고,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이들은 신약을 인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이 복에 대해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복에 대해 균형잡힌 태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들이 복에 대한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균형잡힌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복 주시는 하나님과 반역하는 인간

구약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끊임없이 묘사되고 있다. 원래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고 갈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복을 갈망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동산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복을 주시려는 창조주의 계획에 지속적으로 어긋나게 불순종하여 저주의 길을 선택하였다. 인간들은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게 되었으며”(창 6:21) 이로써 하나님께 반역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지면에 쓸어버리기로 결심하시고 홍수를 보내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창조 때의 복을 다시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그리고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늘의 무지개를 징표로 삼아 피조물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이제 세상은 새로운 시작의 문턱에 서 있게 되었다. 실제로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열방의 목록은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온 땅에 충만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삶을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로 인해,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열어 놓은 복의 새로운 길로 들어서기 보다는 저주로 향하는 옛길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노아의 후손들이 동방으로 이동하다가 시날 평지에 바벨 요새를 세운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 복의 근워이 되게 하기 위해

이에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인간을 온 땅에 흩으시고,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하는 공동체,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는 공동체를 창조하신다. 나이 든 아브라함과 불임인 사라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개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에게만 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서, 죄로 인해 생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인간 창조의 원래 목적을 달성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세상 가운데 여호와의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을 맡은 셈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으로 인해 세상이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한글 개역에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번역한 구절을 직역하면 명령형으로 “너는 복이 되라”이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복이 되어야 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에게 복이 되는 모습을 보였다. 동방의 네 왕이 결성한 연합군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패하여, 그들의 재물과 양식은 물론 모두가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은 사병 318명을 거느리고 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다”(창 14:16).

아브라함은 세상에 복이 되고 있다. 이에 소돔 왕이 왕곡(사웨 골짜기)까지 나와 아브라함을 극진하게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어디 그 뿐인가? 소돔 왕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하였을 때에,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살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며 거부하였다. 세상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복이 되고 있으니 이 어찌 믿음의 공동체의 표상이 아닌가!

그러나 오늘 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복을 끼치기는 커녕 세상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 안달하고 있으니, 이래서야 어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 재앙이 되지 않도록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이 항상 세상에 복이 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세상에 재앙이 된 경우도 있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애굽에 내려가게 되었을 때, 두려움으로 인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바람에 애굽왕 바로는 사라를 바로의 궁으로 취하게 되었다. 이 일로 여호와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창 12:17).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여호와의 보호하심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무사하였지만, 아브라함은 이 일로 인해 세상에 복이 되기는 커녕 재앙이 되는 우(愚)를 범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의 복이 되기도 하지만, 재앙이 될 수 도 있다는 사실에서, ‘복의 근원’으로서 우리의 소명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주변에서 복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재앙이 되고 있는가? 옛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삶에서 오늘 우리의 자화상을 비추어보고, 우리와 경계로 삼았으면 한다.

 

 

복에 대한 설교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

 

위에서 살펴본 이야기들은 우리가 복에 대한 설교에서 무엇을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첫째, 우리는 복에 대해 균형된 태도로 설교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기복적인 태도르 가져서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부정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서도 안된다. 물질적인 복만을 강조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물질적인 복을 경멸하는 우도 범하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인 복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물질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위선적인 목회자의 인상을 주게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추복은 크게 네 가지인데, 겉으로 보면 물질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1)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번영의 복, (2) 네게 복을 주리라: 복지의 복 (3)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명예의 복 (4)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리라: 안전의 복.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주시려고 의도한 원래의 복이다.

 

둘째, 우리는 복을 이야기할 때 개인적 관점에서 다루어서는 안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이유는 열방의 복의 채널이 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재산이 늘어나고, 사업이 잘 되고, 자식들이 건강해지는 복을 받는 것을 단순히 개인적인 복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복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복이 되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복을 받는 것은 복인 동시에 위험이기도 하다는 점을 잘 가르쳐야 한다. 복을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가르쳐야 한다.

 

셋째, 구약이 이야기하는 복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전인격적이며, 사회적이며, 더 나아가 우주적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위에 구현하는 대리자로 부름을 받았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달해야 할 복의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대리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기 보다는, 물질적인 복만을 복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만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된다는 편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넷째, 하나님의 복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날 한구교회에서 목회자가 신경써서 가르쳐야 할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 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돈과 권력과 번영과 명예와 안전을 하나님의 복으로 생각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인간이 복을 받을 수 있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친척 아비 본토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순례자의 길을 갔던 것에 있었다. 아브라함처럼 오직 하나님 만을 신뢰하며 섬기는 순례자의 삶, 나그네의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고, 이 세상에 ‘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구약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오직 성부 하나님 만을 신뢰하며 죽기까지 순종하신 삶을 사신 그리스도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은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 복에 대한 한 가지 전체 그림을 분명하게 그리고 있다.

 

설교자들은 구약을 설교할 때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지금도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복을 전달하는 채널의 역할’을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감당했는지를 전하는 말씀의 조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진정한 복을 누리지 못하는 가련한 이 한국 민족에게, 한구교회 목회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널리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새해에 하나님의 복이 설교자들에게 넘치길 기도한다.<김지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