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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시 104편 주해 [월터 브루그만] 2

by 은총가득 2021. 5. 23.

 

 

창조라는 성경적 믿음의 주제가 현시대에 사용될 때, 설명을 하는 방식들로 편향되어 있다는 점은 큰 불행이다.

"창조설" (또는 "지적 설계")를 통해 과학과 경쟁하려는 근대주의적 시도는 그 자체의 용어로는 결코 설명하지 않지만 영광송의 특징을 가진 신학적 주제가 밝히고자 하는 요지를 놓쳐버린다. 이스라엘은 찬송시의 방식으로 생성적이고 생명을 주는 창조의 힘에 반응하고, 창조의 경이로움을 창조주의 신실한 능력을 참조하여 언급한다. 시편 104편은 바로 이방법의 대표적인 예이다. 비록 이 시편이 이집트 시와 병행점이 있으며 오래 전부터 유래되어 오던 일반적인 창조 신학을 반영하지만, 전승화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다듬어져서 형성되어왔다.

 

Who Stretches Out the Heavens (104:1)

Barbara Wolff

PSALM 104 IS NOW IN THE PERMANENT COLLECTION OF THE MORGAN LIBRARY & MUSEUM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1절

이 시편은 소환 명령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자아 (영혼)를 야훼를 송축하는 일에 마지 못해 참여하더라도 확증적으로 양보하고 (1절), 그 자아를 야훼에게 온전하게 돌이키라 (“축복하라”)는 소환한다. 시편은 축복하고 감사하라는 동일한 소환 명령으로 매듭을 짓는다 (35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그 소환 명령 이후에, 야훼는 “나의 하나님”으로 명명되고 생동감 넘치게 확증된다.

 

A

nd the Mountains Rose (104:5-8)

Barbara Wolff

 

1절에서 야훼의 이름을 부른 후, 이 시편은 창조주 하나님의 공헌으로 간주되는 창조의 모든 측면을 비교적 길지만 기꺼이 열거하며 그 목록을 제시한다 (2~23절). 창조를 묘사하는 바로 이 긴 단락에는 창조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이 단락은 영광송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1절과 24절에서 일종의 괄호 부호처럼 처음과 끝에 야훼를 지칭하며 일괄적으로 묶어서 분류되어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예외적으로 16절에서 “야훼의 나무”에 대한 언급이다. 하지만 야훼를 그렇게 언급하는 것은 시에서 수사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시편 기자는 창조자가 보증하고 있는 창조의 아름다움, 경이로움, 관대함, 질서있는 일관성에 매료되었다. 모든 것이 일관되고 생명을 체계의 일익을 담당하며 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Among the Branches They Sing (104:12)

Barbara Wolff

1.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야훼, 나의 하나님, 실로 웅장하십니다. 영화도 찬란히 화사하게 입으시고

2. 두루마기처럼 빛을 휘감았습니다.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

3. 물 위에 궁궐을 높이 지으시고,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4. 바람을 시켜 명령을 전하시고 번갯불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며,

5. 땅을 주춧돌 위에 든든히 세우시어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6. 깊은 물로 땅을 입히셨더니 산꼭대기까지 덮은 물결은

7. 꾸짖으시는 일갈에 움찔 물러나고 천둥 소리, 당신 목소리에 줄행랑을 칩니다.

8. 물들은 산을 넘고 골짜기로 내려가 당신께서 정하신 그 자리로 흘렀습니다.

9. 당신께서는 금을 그어 넘지 못하게 하시고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0. 계곡마다 샘물을 터뜨리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시니

11. 들짐승들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나귀들도 목을 축입니다.

12. 하늘의 새들이 그 가까운 곳에 깃들이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귑니다.

13. 높은 궁궐에서 산 위에 물을 쏟으시니 온 땅이 손수 내신 열매로 한껏 배부릅니다.

14. 짐승들이 먹을 풀을 기르시고 사람이 농사지어 땅에서 양식을 얻도록 곡식을 또한 가꾸셨습니다.

15.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도 내시고 얼굴에 윤기 내는 기름도 내시고 힘을 돋우어주는 양식도 내셨습니다.

16. 야훼의 나무들은 배부르게 마시니, 손수 심으신 레바논의 송백은

17.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고 그 꼭대기엔 황새가 집을 짓사옵니다.

18. 높은 산은 산양들의 차지, 바위틈은 오소리의 피신처.

19. 때를 가늠하도록 달을 만드시고 해에게는 그 질 곳을 일러주셨습니다.

20. 어둠을 드리우시니 그것이 밤, 숲 속의 온갖 짐승들이 움직이는 때,

21. 사자들은 하느님께 먹이를 달라고 소리지르며 사냥을 하다가도

22. 해가 돋으면 스스로 물러가 제자리로 돌아가 잠자리 찾고

23. 사람은 일하러 나와서 저물도록 수고합니다.

24. 야훼여, 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사오나 어느 것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합니다.

공동번역

 

To Bring Forth Bread (104:14)

Barbara Wolff

 

이 목록은 창조의 기본 구조가 창조자의 놀라운 능력에 기인한다고 인정하는 일련의 "당신" 진술을 표현하는 2-9절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을 해낸 분은 바로 “당신”입니다! 이 구절들은 고대 세계에서 통습적인 우주관을 반영한다. 위의 하늘, 아래의 물, 올바르게 할당된 산과 계곡으로 잘 정리된 땅. 땅이 혼돈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되는 안전한 곳이 되도록 물에 경계를 설정하신 분은 야훼이시다. 경계의 설정은 렘 5:22에 반영되지만, 예수가 창조자의 일을 한 것으로 인정받는 막 4:34에서도 반영되어 있다.

 

 

Wine that Maketh Glad the Heart of Man (104:15)

Barbara Wolff

 

온 세상의 거시적 구조를 정교하게 다듬어 표현한 이후에, 시편 기자는 샘물과 개울에 물이 잘 공급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두고 창조 세계의 풍성함에 대해 숙고한다 (10-19절). 성경은 건조한 기후를 무대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런 이유로 풍부한 물은 참으로 야훼의 놀라운 선물이다. 물이 넉넉한 땅은 모든 생물에게 환영받는 서식지이다: 소를 먹일 수 있는 풀, 새 둥지를 위한 나무, 야생 염소가 풀을 뜯을 수있는 산 등.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을 생산하여 내는 것은 기름, 포도주, 빵을 지구의 가장 기본적인 생산물로 칭송하는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물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 칼빈은 이러한 농산물을 “하나님의 넘치도록 풍부한 후덕함”이라고 언급한다. [J. Calvin, Commentary on the Psalms, vol. 4 (1979), 155.]

 

Who Appointed the Moon for Seasons (104:19-20)

Barbara Wolff

 

이렇게 장황한 목록은 “때와 절기” (19-23절)의 올바른 정리정돈을 칭송하며 매듭을 짓는다.

“때에 따르는 모든 것”은 낮과 밤의 태양과 달의 궤도에 반영된다. 그 결과 동물은 인간 공동체가 잠자는 동안 야간에 움직이기 때문에 먹이감이 되는 동물과 인간 존재가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이 긴 목록의 서정적 효과는 창조 세계의 거시 구조 (2-9절), 풍성한 피조물 (10-18절), 잘 정돈된 때와 절기 (19-23절)를 기억하고 칭송하는 것이다. 창조의 화려함을 이렇게 열거하며 읊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두 번째로 거명하는 “오 주여!”(24절)로 이어진다. 이 구절은 창조의 충만함을 회고하듯이 표현한다.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24b절

 

The Earth is Full of Thy Creatures (104:24)

Barbara Wolff

 

이렇게 애초부터 창조 세계의 목록을 영광송으로 절정에 이르게 한 이후에, 시편은 세 가지 매우 구체적이고 주목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25-30절).

25.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

26.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놉니다.

27.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28. 주님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 먹고, 주님께서 손을 펴 먹을 것을 주시면 그들은 만족해 합니다.

29 그러나 주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님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30.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새번역

. Leviathan Whom Thou Hast Formed (104:25-26)

Barbara Wolff

 

첫째, 바다 (6절의 큰 “깊음”)는 생물, 배, 그리고 거대한 바다 괴물인 리월야단으로 가득 찬 완전한 장소이다 (25-26 절). 구약 성경은 혼돈과 무질서의 매개체로서의 바다의 위협을 미심쩍어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무질서의 사악한 괴물은 길들여져 야웨의 즐거움을 위한 장난감으로 축소된다 (26절). [J. D. Levenson,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 (1988), 17 쪽 참조.] 야훼는 혼돈의 위협을 받지 않고, 야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전달 구구로 축소해버리신다 (욥 40:15-24 참조). “많은 물”을 이렇게 장난기있는 태도로 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창조 질서가 위협을 받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You Renew the Face of the Earth (104:30)

Barbara Wolff

 

둘째, 27~28절은 창조 세계의 생식성을 입증하여 준다. 모든 창조물에 먹이를 공급하시는 것은 야훼의 선하신 손이다. 여기서는 “모두” (????)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진술은 시편 145:15~16과 밀접하게 병행한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이 구절은 식탁 기도에 해당한다.

야웨께서 공급하시는 음식으로 인해 감사를 드린다.

최고의 창조 신학은 생명을 유지하는 모든 음식이 선물이라는 것을 숙고하는 기도에서 정확하게 표현된다고 볼 수 있다.

 

I Will Sing Unto the Lord (104:33)

Barbara Wolff

 

셋째, 29~30절은 세계가 하나님의 숨결로 살아가고 있다고 단언한다.

29절에서 “호흡”이라는 용어와 30절에서 “영”이라는 용어는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인 ????? (루아흐)이다.

이 두 용어를 병치해 놓는 것은 세계가 순간 순간 야훼의 생명을 주는 현존하심과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강하게 주장하기 위함이다. 창조주는 세계가 의존하는 생성의 힘을 견고하게 가지고 계신다. 왜냐하면 세계는 그 자체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훼가 호흡하신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안으로 여기고 있다. 이는 야훼의 위대함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마치 야훼가 강철로 만든 폐를 가지고 있는 듯이 표현한다. 이 단락의 마지막 두 가지 주제, 즉 27~28절의 식량과 29~30절의 숨결은 창조세계가 창조주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음을 입증하여 준다.

31. 야훼의 영광은 영원하소서.

손수 만드신 것이 야훼의 기쁨 되소서.

32 굽어만 보셔도 땅은 떨고 다치기만 하셔도 산들은 연기를 뿜는구나.

33 나는 한평생 야훼를 노래하리라.

숨을 거둘 때까지 악기를 잡고 나의 하느님을 노래하리라.

34 나의 이 노래가 그에게 기쁨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야훼님 품안에서 즐겁기만 하구나!

35 죄인들아,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려라!

악인들아, 너희 또한 영원히 사라져라!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할렐루야.

공동번역

 

 

시편은 야훼에게 바치는 즐거운 영광송으로 매듭을 짓는다.

야훼는 땅을 보시고 산에 손길을 미치신다. 이들 땅과 산들은 야웨의 피조물로서 반응한다 (31~34절).

시편 기자는 이 모든 것의 경이로움에 압도당하는데, 모두가 야훼에게 그 근본 윈인이 있다. 이 구절들에서 시편은 1절이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는 1인칭 단수 동사로 되돌아간다. 그렇지만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히 확증하는 것은 35절에서 “죄인과 악인”에 대한 경고로 인해 덜컥 충격을 받아서 중단된다. 우리는 이러한 서정적 영광송에 그러한 결론으로 마무리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죄인과 악을 언급하는 것은 아마도 이집트에서 유래한 옛 시를 이스라엘 신앙의 궤도로 끌어들인 결과인 듯이 보인다. 창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자율적인 실체가 아니라 야훼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들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토라가 요구하는 조건에 속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지막 구절은 창조주의 뜻과 의도를 무시하고 창조세계를 착취하듯이 사용하는 것에 경고로 간주된다 (35절). 매우 은유적인 방식으로, 이 구절은 환경을 돌보라는 명령과 사려없이 파괴적으로 창조세계를 사용하는 행위에 반하여 엄격한 제한을 제시한다.

 

지평의 융합 1:

포도주, 기름l 그리고 빵

15절에서 명명된 창조 세계의 일차적인 선물들 ? 포도주, 기름, 빵 ?은 이 시편에서 선별되어 있으며, 어쩌면 “식량”에 관한 27-28절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포도주, 기름, 빵과 같이 동일한 삼총사가 교회의 예전적 관행에서 성례적 생명을 구성하는 특징적인 요소라는 점도 주목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성례전은 창조의 가장 기본적인 표징을 사용하여, 창조세계가 그 충만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생명의 선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입증하여 준다.

 

지평의 융합 2:

환경보호

J. Clinton McCann이 지적했듯이, 이 시편은 환경보호주의의 토대를 제공한다:

 

시편 104 편을 쓴 시인은 환경보호주의자였다. 시편 필자는 인간을 포함한 공기, 토양, 물, 식물 및 동물의 복잡한 상호 연결성과 미묘한 상호 의존성에 대해 알고있었다. 시편 기자는 “인간성”(???’ ?d?m)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땅”(????’ ?d?m?h)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어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관성에서 드러난 진리를 잘 알고있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사실상 땅의 피조물이다. 영어 단어 'human'과 라틴어 'humus'는 그 어원이 “흙”이라는 뜻으로, 어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동일한 진리가 드러난다. 그렇지만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망각하여 왔는데, 그 어원학적 뿌리뿐 아니라 물질적인 뿌리도 잊고 있었다.

[J. C. McCann, Jr., “Book of Psalms,”, L. E. Keck et al. (eds.), The New Interpreter ’s Bible, vol. 4 (1996), 1099.]

 

 

또한 McCann이 관찰하듯이, 이 환경보호주의는 불안하게 자신에 대해 병적인 염려가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찬송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로 이것은 환경론은 신학적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편 기자를 하나로 본보기로 취하면, 환경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확실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런 가망도 없이 단순하고, 과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순진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러한 출발점은 세계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확신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렇게 신학적 확신에 근거한 출발점은 마치 세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오만한 가정을 타파할 유일한 출발점이다! 성경적 의미에서 구원은 생명을 의미하며, 성경적 의미에서 세계는 구원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하셨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세계의 생명을 위해서 모든 배열과 공급을 이미 하셨다고 단언한다. . . . 환경 위기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 인간 자신을 낮춤으로써 해결될 것이다.

[J. C. McCann, Jr., “Book of Psalms,” L. E. Keck et al. (eds.), The New Interpreter ’s Bible, vol. 4 (1996), 1100.]

 

지평의 융합 3:

피조물로서의 자연

최근 연구에서 앨리스터 맥그라스 (Alister McGrath)는 "자연"은 "창조세계"이며, 창조주에게 의존하며 창조주와 다시 관련지어서 이해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창조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존재 사이에 상응점이 있다는 결론으로 ??직접 연결된다.

물론 이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는 명료한 설명이 필요하다.

창조와 구속은 구원의 경륜 내에서만 단지 상호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각각 하나님의 성품을 구현한다고 주장 할 수 있다. . . .

기독교의 창조 교리는 창조 세계의 도덕적 질서 (그 창조 세계의 최고봉으로서 인류를 포함)와 하나님의 마음 사이의 일치점이 있음을 확증하여 준다.

[Alister E. McGrath, A Scientific Theology: I Nature (Grand Rapids, MI : Eerdmans, 2001),]

 

 

더욱이 McGrath 이전에 칼빈은 창조 신앙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분명하게 밝혔다:

“세계는 그 자체에서 유래하지 아니하였다. 그에 따른 당연한 귀결은 자연의 전체 질서는 각 요소가 그 자체의 특정한

특성을 가지고 있도록 창조주가 지명하여 주신 것 외에는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J. Calvin, Commentary on the Psalms, vol. 4 (1979), 149.]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분명하게 목회적 의제가 무엇인지를 규정하여 준다.

바로 위안과 확신을 가지고, 불안스러운 위협에 처한 세상에 한 가지 보물이 되어야 한다:

 

 

예언자의 언어는 단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권고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또한 미래와 관련하여 우리의 확신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제시되었다.

우리가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의 상태로 이 세계 속에서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

만일 그렇게 두려움과 불안을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땅을 사람에게 거주 곳으로 주셨다고 증언하지 않은 듯이 우리가 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J. Calvin, Commentary on the Psalms, vol. 4 (1979),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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