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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by 은총가득 2021. 5. 10.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비교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비교


◑ 스토아 학파(Stoikoi School)



B.C. 315년경 키프로스섬 출신의 제논에 의해 창립되었는데, 그가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킬레라는 건물에서 가르쳤다 하여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학풍은 이후 아테네, 타르수스, 셀레우케이 아, 로도스 등지에 계승되고, B.C. 2세기경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에서 통속적인 도덕 철학으로서 환영을 받아, 세네카, 아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펠리우스와 같은 대표적인 철학자가 배출되었다.

스토아학은 윤리학·자연학·논리학으로 되어 있는데, 그 근본 사상은 이 우주의 만물은 일정한 이법(理法 : 로고스) 에 의해 생성 유전되는 근본 물질인「불」에 지배되고, 그「블」은 또 신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므로 전 자연은「불」의 필연성, 즉 이성적인 신의 섭리에 의해 합목적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 기에게 주어진 이성을 가지고 이 자연의 이성과 법칙을 통찰하며, 굳은 의지와 체념을 가지고 감정과 쾌락을 물리치며, 그리하여 자기의 내면적 독립을 지켜나가는 가운데 덕이 생기며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고 하였다.


또 이 학파는 하나의 법(자연법)에 의한 세계 국가를 내세워 이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시 민이 될 수 있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특정 국가의 속박을 배격하는 세계시민주의를 취하였다. 이것이 로마의 중심 철학이 되었다.


◑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 School)

스토아 학파와 아울러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 철학 학파로 에피쿠로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은 개인주의적이면서 세계주의적인 인생관이 강하였는데, 죽음의 공포를 제거하여 마음의 평 화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국가와 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허전했던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 복음처럼 퍼져 갔다.



외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마음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점에서는 그 시대에 유행했던 스토아 학파와 같지만, 스토아 학파가 덕을 덕 그 자체를 위하여 추구한 데 비하여, 그는 마음의 평화, 즉 행복을 위하여 추구했던 것이다. 이 철학은 사후(死後)의 존재를 부정하고 현세에 있어서의 최대의 개인적 쾌락이 최고의 덕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에피쿠로스(B.C.342-270)는 쾌락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육체적 쾌락이 아닌 마음의 행복이었다.
로마의 루크레티우스에 의하여 더욱 보급되어 기원 후 4세기까지 존속되었으나, 이 학파가 소멸된 후에도 그 사상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금욕주의와 쾌락주의
출처 : Tong - exin님의 철학/사상통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우리는 흔히 쌍둥이는 겉모양도 비슷하고 한느 행동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쌍둥이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하는 행동도 아주 다르다면 어떻게 할까?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서,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이 둘은 모두 인간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일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즉, 행복은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전혀 달랐다. 스토아 학파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행복을 얻는다고 보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는 욕망을 충족시킬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일까? 서양철학사에서 이 두 쌍둥이가 내세운 전혀 다른 해결책을 직접살펴보기로 하자.


 
1.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윤리학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의 패권은 아테네가 차지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영광은 얼마 가지 않았다. 아테네의 독주는 많은 폴리스의 반발을 초래했고, 결국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세력에 아테네가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스파르타 역시 곧 테베에게 패권을 넘겨 줄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그리스는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상승 일로를 걷고 있던 로마는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이탈리아 전역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최후의 경쟁자인 카르타고마저 제압함으로써 지중해의 패권마저 거머쥐게 되었다. 그 후 로마는 계속 팽창하여 영국으로부터 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그리스 역시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정치적 측면을 부각시킬 때에만 타당하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도리어 로마가 그리스에 정복당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는 군사적․정치적으로는 로마에 패배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로마의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사상 역시 예전 모습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 거대한 로마 제국의 정신적 스승이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한 일이 없다. 다만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쳤을 뿐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계승되어 각기 다른 종류의 윤리학 체계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의 사상을 고도로 세련된 지식의 체계 속에 담았다.

이것은 지식 자체를 위해서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그들의 사상이 쉽게 이해되기 어려운 난점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실천에 옮기기도 쉽지 않았고, 그 호소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화된 지식에 대해 가장 강하게 반발한 학파는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였다. 그들은 우선 지식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식이란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적인 목적에 얼마나 이바지하느냐에 따라 그 유용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자연을 연구하는 것도 근거 없는 공포와 불필요한 미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간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있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삶의 본질과 윤리적 가치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소크라테스의 후계라 자처하였다.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이겨 내고 삶을 완성시킨 이상적 인간상으로 비쳤던 것이다. 다만 그들은 각기 소크라테스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소크라테스의 자유 분방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흠모한 데비해, 스토아 학파는 소크라테스의 근엄하면서도 소박한 고행주의적 특징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두 학파간의 견해 차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하는 가운데 그대로 나타났다.


 
2.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
 
에피쿠로스 학파는 기원 전 306년 아테네의 네 학원 중 하나인 가든(Garden)의 우두머리였던 에피쿠로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그는 쾌락(快樂)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지극히 검소하고 절도 있는 생활을 했다. 빵과 물 정도의 단순한 식사를 하고 육체적인 욕구를 최소한으로 충족시킬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쾌락은 오늘날 물질 만능주의에 현혹되어 사치 풍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세속적 쾌락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쾌락이란 외부로부터 괴로움을 받지 않고 마음의 동요를 제거 했을때 얻는 즐거움을 가리키는 아타락시아(ataraxia)였고, 그것이 삶의 궁극적 목표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순간적이고 육감적인 쾌락을 추구한 '키레네 학파 또는 키레네의 쾌락주의'와 구분해야만 한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고통을 수반하는 '역동적(力動的) 쾌락'이며, 다른 하나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수동적(受動的) 쾌락'이다. 성적 욕구, 과식, 명예욕, 음주, 결혼 등은 역동적 쾌락에 속하며, 참다운 우정과 철학적 대화 등은 수동적 쾌락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선(善)은 후자, 즉 수동적 쾌락을 뜻한다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하였다. 물론 성욕이나 식욕, 명예욕이나 결혼 생활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의 충족에는 반드시 절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본능을 억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른다. 이런 까닭에 에피쿠로스는 역동적 쾌락을 삼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종류의 쾌락도 선(善)임에는 틀림없으나, 지나친 추구의 결과로 쾌락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더 많이 초래하여 악(惡)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이다.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윤리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밝혀 냄과 동시에,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역동적 쾌락보다는 수동적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쾌락주의는 윤리적 쾌락주의(Ethical Hedonism)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자연의 산물인 인간은 당연히 즐거움 혹은 쾌락을 추구한다. 쾌락은바람직한 삶의 필요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쾌락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 그 문제를 극복하느냐 하는 데에서 그 한계가 분명해진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마음의 평온과 무관한 쾌락은 윤리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다. 쾌락은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정신적 평형을 유지할 때 비로소 이상적인 삶의 충분 조건이 될 수 있다. 에피쿠로스가 더 큰 쾌락을 얻기 위해 작은 고통을 감수해야 된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에피쿠로스가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더욱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던 이유는 명백해진다.
쾌락과 고통을 느낄 뿐, 정신적인 위안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육체적인 쾌락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쾌락주의자인 그가 '나에게 빵과 물만 있으면 행복을 얻으려 제우스 신과 다투는 것도 불사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에피쿠로스가 구상했던 바람직한 삶은 즐거운 삶이다. 내세를 믿지 않았던 그에게 그러한 삶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여기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진정으로 강조하는 것은 욕구의 충족보다는 오히려 극기(克己)의 삶이다. 여기에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일종의 고행주의로 볼 수 있는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이다.

 
3.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
 
스토아 학파는 키프로스의 제논에 의해 기원 전 300년에 창설되었다. 그리고 스토아주의라는 이름은 아테네 시장 북쪽에 있는 스토아 포이킬레(Stoa Poikile)라는 건물에서 그가 강의하였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제논 이외에도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가운데에는 널리 이름을 떨친 사람이 많다. 우선 제논의 수제자요 후계자인 클레안테스(Cleanthes) 와 클레안테스의 후계자요 스토아 학파 제2의 창설자로 알려진 크리시 포스(Chrysippos)가 있다. 여기에서 소개할 에픽테토스(Epictetos)는 재상이었던 세네카(L,A.Seneca)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urelius Antonius)와 함께 로마의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이다. 에픽테토스는 노예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어머니 역시 노예였다는 사실만 밝혀져 있을 뿐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따뜻한 마음씨와 자상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어려서부터 놀라운 재능과 명석함을 보여 주어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의 생애는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참고 또 참으라.'는 생활 신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으며, 마침내 외딴 귀양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철인이었다.


한 번은 그가 주인으로부터 모진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에픽테토스는 '주인님, 그렇게 하시면 다리가 부러집니다요'라고 말했다. 주인은 매질을 계속하였고, 결국 에픽테토스의 다리는 부러졌다. 그러자 그는 ‘그것 보십시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요?’라고 하였다 한다. 도대체 이같은 삶을 정당화하는 그 자신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에픽테토스는 우주가 완전히 합리적인 이성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우연이나 요행도 있을 수 없으며, 인간 존재나 그 행위까지도 모두 우주의 필연적 법칙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극히 미세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저자가 선택한 대로 그러한 종류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하나의 배우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해 두라. 짧으면 단편에 나오는 것이고, 길면 장편에 나을 뿐이다. 그대가 가난뱅이의 역할을 라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라면 그 역할을 잘해 내도록 주의하고, 불구자나지배자 혹은 일반 시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역할을 잘해 내는 것이 그대의 임무이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인격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저자(著者)'란 '자연의 섭리' 혹은 '우주의 운행 법칙'을 말하며, 결국인간의 도리란 이 법칙에 순응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에픽테토스에 의하면, 우리는 욕망에 현혹되어서 이 법칙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며, 감정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이행해 낼 수가 없다. 그러면서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부동심(不動心,apatheia)의 상태, 즉 '감정이 완전히 억제된 상태'라고 말하고, 이러한 경지야말로 인간이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혹은 신의 의지와 합일된 모습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는 우리들이 감정적인 혼란에 대처하고 그것을 완화시킬 수 있는 처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만약 우리들이 격렬하게 분노하는 성격을 갖지 않으려면 그런 습관을 기르지 않아야 한다.


분노를 증가시키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내지 않는 날을 헤아리도록 해야 한다. 나도 매일같이 화를 내곤 했지만, 차츰 하루 건너 한 번씩, 사흘 건너 한 번씩, 그리고 나흘 건너 한 번씩 화를 내다가‥‥‥ 드디어는 화내는 습관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에픽테토스는 교육에 의해서 인간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교육을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교육을 통해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확인하고, 그리고 그것을 반드시 해냄으로써 부동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할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갈등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되었고, 그러다 결국은 고뇌와 불안 속에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그에게 인내와 체념의 미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내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한 숙명론이나 패배주의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것을 가르치며,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해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것은 할 수 있는 것까지 포기하고 좌절과 낙망에 젖어 방관만하고 있는 소극적 운명론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할 수 없는 것도 해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무엇에든 마구 덤비는 무분별한 행동주의가 아님도 분명하다.


요컨대 에픽테토스가 제시한 바람직한 삶은 자연적인 것 혹은 이성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서 비롯된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 것은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자연적인 것은 선한 것 혹은 바람직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에픽테토스는 이 점을 강조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두 운명이며 동시에 신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므로, 그것을 기탄 없이 받아들이도록 권유하였던 것이다.

 

4. 에피쿠로스와 에픽테토스의 비교
 
에픽쿠로스와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상태를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는 윤리관은 너무나 이질적 이다.
그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바람직한 삶에 도달하는 방법이나 태도에서 나타난다.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에 이르기 위해 우선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에픽테토스는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의지의 힘으로 욕망의 씨앗을 마멸시켜야 아파테이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마음의 평온 상태는 비슷한 것일지 모르나, 그 방법은 이처럼 상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또 다른 몇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낸다.
첫째, 에피쿠로스 학파는 경험적인 차원에서 감성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적인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 머물렀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는 합리적인 차원에서 이성의 힘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서는 세계와 우주 속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파악하는 경지에까지 확대되었다.


둘째, 윤리적 관점에서, 에피쿠로스의 경우 윤리란 개인적인 수양이나 사회적인 처세술을 제시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에픽테토스에게 그것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고 세계 국가를 가능하게 하는 의무의 법 칙 이었다.


셋째, 따라서 그들에게는 국가가 윤리적 이상을 실현하는 하나의 형태로 이해될 때 전혀 이질적인 국가관이 형성된다. 에피쿠로스의 국가관은 일종의 사회 계약 이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개인의 이익이 보장되고 확장되는 기구로서만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와는 달리 에픽테토스에게는 개인의 이익이 희생되더라도 인류의 선과 자연의 법칙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가 존재해야 된다. 이러한 여러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에피쿠로스와 에픽테토스는 중세는 물론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사고 방식을 지배해 온 중요한 윤리 사상의 모태가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대립 속에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쾌락주의와 고행주의,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윤리적 의무론과 행복론, 그리고 국가의 계약론과 이성론 등의 원형을 추적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Stoïcisme) (ms 20/03/02)
Elisabeth CLEMENT, Chantal DEMONIQUE, Laurence HASEN-LØVE, Pierre KAHN, Pratique de la philosophie de A a Z, Hatier, 1995(1994), pp. 340-341. (P. 384).
* 어원: 그리스어 stoa는 회랑(portique)을 의미하며 제논(Zénon)은 회랑 아래에서 아테네인들을 가르쳤다.
* 넓은 의미에서: 스토아 학파는 고통과 불행을 용기있고 확고하게 견디는 사람의 태도를 말한다.
* 좁은 의미에서: 스토아 학파는 철학의 한 학파로서, 거의 5세기 동안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수정되면서 지탱해 온 것이며, 이 학파를 일반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한다.


먼저 고대 스토아학파는 BC 315년 경에 키티움(Cittium)출신의 제논(Zénon)에 의해 세워졌으며, 제논은 퀴니크(Cynique)학파의 제자였다. 아소스의 클레안테스(Cléanthe d'Assos)와 크리시포스(Chrysippe)에 의해 전승된다.
다음으로 중기 스토아학파는 BC 2세기와 1세기 경으로 안티파테르(Antipater de Tarse)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d'Apanée)등의 철학자가 있다.
마지막으로 로마 제국 시대의 스토아 학파는 기원 후 1세기와 2세기 경에 성행하였다. 본래 로마에서 성행하였으며, 유명 철학자로는 세네카(Sénèque), 에픽투테스(Epictète),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Aurèle) 등이 있다.



스토아 학파의 학설

1. 스토아 학파는 우선 자연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고,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산다"는 계율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스토아 학파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몰락 순간에 정치적인 형식으로 생겨났다. 스토아의 자연주의는 문화적 삶과 정치적 삶으로부터 관심의 이탈에서 나온다. 그 현자는 정치적 삶과 연관으로부터 은퇴할 것을 권하고 인간을 진실한 조국으로 여기는 우주 가운데 재정립 할 것을 설교한다. 이 우주는 이 학파의 두 번째 특징이며 물질적이다.



2. 스토아 학파는 유물론이다.
물질만이 존재하며 물질은 그 자체 물체처럼 정의되며 작용할 수 있는 것 또는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스토아 학파의 유물론은 그 결과로서 도덕론을 갖는다. 예를 들면 정념은 비난을 받는다. 왜냐하면 정념은 헛된 노력으로 영혼을 소진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정념은 후회하면서 과거로 향해 있고, 걱정과 희망 속에서 미래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비형체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물들의 배열은 어떤 총체적 일치를 형성하는 우주 속에 묘사되어 있다.



3. 사실상 스토아 학파는 합리주의이다.
물질은 스토아 학파가 때로는 영혼이나, 이성 또한 원인이라 불리는 형체적 원리(principe corporel)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 세계의 영혼은 미묘하게 형체적 요소의 총합(집합)에 스며들고, 이 형체적 요소로부터 우주도 구성되고, 그것으로부터 물리적 응집과 정합성도 확인된다. 세계는 하나의 체계이며, 거기서 각 부분은 전체와 연관도 있고"공감(sympathie)"도 있다. 따라서 우주는 어떤 변화에도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 필연성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일어나야 할 것이고, 일어나야 할 모든 것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영혼은 운명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아 학파는 숙명론이 아니다. 이 우주 안에는 행동과 자유를 위한 자리가 있고 도덕론은 행위와 자유에 대한 규칙과 조건을 세운다.





스토아 학파의 도덕론

"자연과 조화롭게 산다"는 것은 인간이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인간만이 표상의 능력을 부여받았고, 따라서 우주적 이성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하여 스토아 학파의 현자는 자신의 정념 즉, 상상의 환영(fantôme)에 의해 놀라서 헛되이 영혼을 압축시키는 정념을 지배해야 하며, 친구나 부모의 죽음과 같은 조화와 아름다움에 반대되는 것을 포함하여, 일어난 모든 것이 우주의 질서에 부합된다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런 우주적 질서에 동의하면서 스토아 학파의 현자는 스스로 우주의 대리자가 된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것(사건)이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판단은 우리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에게 낯선 것 즉, 사건(événement)을 우리의 고유한 능력(이성)에 의하여 사건에 우리의 동의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 운명에 동의는 현자에게 자유와 평화를 제공한다. 자신에 할당된 지위를 수용하는 현자는 인간들 가운데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도, 남편도, 군인도, 노예도, 황제도 된다. 그는 공무(offices)에 관한 한, 내적 무관심[자기 이익에 무관하게]을 보존하면서 사회적 의무 즉, 공부를 실행한다. 그러나 문화적 개별성과 사회적 입장들이 비본질적이라면 이런 것들을 넘어서 인간들 사이에 자연적 공동체, 즉 평등과 자연권이 기초하는 공동체가 존재한다.



거부, 정념의 지배, 인간들 사이의 공동체 등과 같은 스토아 학파의 몇 몇 도덕론의 주제는 그리스트교 도덕론에 공감을 일으켰고, 교부 철학자들에 의해 다시 거론되었다. 칸트에 따르면 행복을 덕의 실행에 둔 준엄한 도덕론은 서구 그리스트교 문화의 토대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지혜의 모델은 수세기를 통하여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몽테뉴(Montaigne)와 같은 작가들과 데카르트(Descartes), 스피노자(Spinoza)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계속적인 영감을 주었다.



* 주요 문헌: 세네카『현자의 항상심에 대하여』, 『영혼의 고요함에 대하여』, 『류클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에픽테투스의 『지침서』, 『대담』; 아우렐리우스 『수상록』
* 상관언어: 퀴니코스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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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목적이 행복이고 미덕으로 성취될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내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없다.죽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이 두 학파는 비교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학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계승)

 
① 이성 중시
 
​ ● 이성 : 인간의 본성, 신과 세계의 본성


●​ 이 우주에는 *만물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이성(logos)이 있고 인간 개개인의 본성에도 이러한 이성이 있음(→ 이성 을 통해 우주적 인과 관계와 자연법칙을 제대로 깨달으면, 개개인의 이성은 보편적인 이성과 하나가 됨)
 
② 금욕주의
 
​ ● ​감각이나 욕망이 아닌 이성이 인간 정신을 지배할 때 진 정으로 자유롭게 됨
●​ 인간, 세계, 신의 본성인 이성(logos)에 따르는 삶만이유 일한 선(善)
 
③ 아파테이아(apatheia) 추구 : ​모든 정념으로부터의 해방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부동심, 무정념의 상태(감정이 억제되어 모든 욕구나 고통을 이겨낸 상태)
 

④ 범신론, 운명론적 경향
 
​ 우주가 신이며 이 신은 곧 자연이며, 인간은 신의 예정에 따라 생활해야 함
 
⑤ 만민 평등주의 : ​인간은 이성(logos)을 가지고 있는 한 모두 평등함
→ 로마 만민법, 근대 자연법, 스피노자, 칸트에게 영향을 줌


(자연법 :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 성찰에 바탕을 둔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법률 및 규범. 실정법과 대비되는 개념) ​


☆운명론, 결정론적 경향을 보이지만 '정신의 덕'(logos)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logos : 보편 이성, 우주 이성, 세계 이성, 자연 이성, 신적 이성
** 신 : 스토아학파가 말한 신이란,
인격신이 아닌 자연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소피스트 계승)
 
① 감각적 경험 중시
​​→경험론, 공리주의에 영향​
 
② 쾌락주의
​ ㉠쾌락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 목표
㉡쾌락이란 몸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불안이 없는 상태. 즉 육 체적으로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는 상태
㉢정신적, 지속적인 쾌락 중시


※쾌락의 역설 : 순간적, 감각적 쾌락만을 지나치게 추구하 면 오히려 고통이 올 수 있음. 그러므로 허황된 욕심이나 감 각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쾌락을 추구해야 함
 
③ 아타락시아(ataraxia) 추구 : ​허황된 욕심을 갖지 않음의 로써 마음에 불안이 없고 몸에 고통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
 

④ 바람직한 삶
 
㉠ 검소와 절제 생활 강조
(☆스토아학파 역시 검소와 절제 강조, 스토아학파는 100% 에피쿠로스 학파는 고통과 불안이 없는 정도)
㉡ 작은 공동체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삶
 
⑤ 스토아학파의 운명적 필연성 인정하지 않음​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불안과 동요 없이 살아갈 것을 강조.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죽음을 절대적인 소멸로 인정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함
 
* ​쾌락을 신중하게 추구하였으며 소극적 쾌락이라고도 불림.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비교

구분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공통점 절제를 통한 마음의 평온을 추구함, 개인적인 안심입명을 추구함
대표자 제논 에피쿠로스
특징 금욕주의:이성에 따르는 삶 → 이성 중시
이성 → 아파테이아 → 행복
세계 시민주의 → 만민 평등사상
쾌락주의:쾌락은 선(善)임 → 감각·경험 중시
아타락시아 → 행복
소극적 쾌락주의:고통과 근심 제거
영향 로마의 만민법, 근대의 자연법사상
스피노자와 칸트의 윤리 사상

근대 경험론
공리주의 윤리 사상

 

스토아학파의 사상가들

키프로스 섬 태생의 창시자 제논, 그 제자 소아시아의 클레안테스,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크리시포스, 로마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파나이티오스,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을 들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사상가들

키프로스 섬 태생의 창시자 제논, 그 제자 소아시아의 클레안테스,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크리시포스, 로마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파나이티오스,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을 들 수 있다.

 

클레안테스(Cleanthes)의 송시(頌詩)

…… 아 우둔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언제나 재화를 소유하는 데만 급급하여
온 자연을 다스리시는 신의 뜻을 어기고 있나니,
실로 자기가 복종만 한다면 행복한 삶과 지혜를 누가 하사해 줄 것인가를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도다.
마침내 그들은 그 어디서나 모든 선한 것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 버릴 뿐이니,
…… 비천한 물욕(物慾)을 채워 줄 소득에만 눈이 어두워 버린 채,
마침내 명성과 감미로운 욕정의 씨앗만을 탐내는가 하면
또한 하찮은 욕망만을 충족시키려고 애태울 뿐이라네.

…… 영원토록 대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에 알맞도록,
이것을 말과 행동으로 찬양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찬송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스토아학파 사상가 클레안테스가 제우스 신에게 바친 송시

→ 스승 제논을 이어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인정받는 클레안테스가 제우스 신을 기리는 시이다. 그는 의지력을 중시하여 모든 덕(德)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시를 통해서 하찮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집착하는 사람들을 지적하며, 신과 자연과 우주의 이성에 일치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 철학」,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 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pp. 343-457. (P. ).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기를 헬레니즘이라 한다. 다른 앙글로 색슨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로서 여기지 않는다. 나는 이런 헬레니즘이란 명칭이 우리나라에 전염된 것은 일제잔재라고 여긴다. 일본이 영국 독일을 빌러왔고 해방후에는 미국이 그러하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과 실증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라. / 나로서는 이상한 개념 두 가지 언급하자. 왜 이시대의 천문학(astrologie)가 점성술이 되고 나중에 천문학(astronimie) 철자 속에 로고스가 들어 있지 않음에도 학문이 되었는가? 그리고 연금술(alchemie)에서 알짜가 빠지면 화학(chenmie)가 되는 것은 카이로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프리카를 배척하는 백인이데올로기 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이데올로기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염되었다. (50NMD)

 

**미리 하는 이야기 이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마지막 사상가는 플로티노스이다. 그의 중심을 누스(Nous)로 둔 것은 어쩌면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전통에서 이뭣꼬의 중심일 것이다. 이것을 로고스(Logos) 바꾼 것은 크리스트교일 것이고, 그 로고스를 말씀으로 바꾼 유태-크리스트교가 정태적 종교의 근원일 것이다. 동태적 종교는 누스가 생명 또는 영혼이며 불일 것이다. / 중심 불에서 원주 처럼 주위에 흩어져 있는 것이 개별적 영혼(생명)이다. 이 생명들을 모두 합한다고 중심 불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의 티끌들 먼지들이 불의 모습의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왜 '이뭣꼬'를 생명이라 하지 못했을까? 실증이 약했기 대문일 것이다. 그 생명의 기억을 총체를 해명하는 19세기에서 다른 사유가 등장할 것이다. / 땅(지구)의 기억도 있다. 그런데 고고학은 땅의 추억들과 사실들 사이의 접합을 실증적으로 보는 것도 19세기 전반이 아닌가? 이제 그 추억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억현상과 비슷하게 여길 때 들뢰즈의 “만년전”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50NME)

*****

[제1권] 고대편 33-457

제1부 소크라테스 이전 35-145

제2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147-342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철학을 헬레니즘이라기보다 알렉산드리아학파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북아프리카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마케도니아의 계승이며, 파라오와 관계없다. (50MME)]

 

제3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 철학 343-457

제25장 헬레니즘 세계 345-358

[왜 알렉산드리아 시대라고 하지 않을까? 아테네가 중심이 아니고 알렉산드리아가 중심인데 말이다. 그 알렉산드리아가 얼마나 융성했으며, 팔루스 신앙이 강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글을 읽었다. 아마도 시대 비교 상 한나라 수도 장안(전202-후9년: 전한)보다 더 융성하며, 문물의 교역상 당나라 수도 장안(618년-904년)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50nmb)]]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한 지역의 역사는 세 시기로 나누어서 구분할 수 있다. 처음은 자유도시국가시대 .. 다음은 마케도니아 퉁치시대[알렉산드리아 시대] ... 로마제국 시대이다. 이 세 시기 가운데 첫째 시기의 특질은 자유와 무질서이며, 둘째 시기는 그 굴종과 무질서이고, 셋째 시기는 굴종과 질서이다. (345) [러셀의 견해는 로마의 제국이 질서라고 본 것인데 무리하다. 일반적으로 사유의 다양성, 일의성의 사유, 실용의 사고로 나눌 수도 있다. 일의성은 보편성이란 의미보다 방향에 대한 일의성이다. (50NMC)]

 

철학에서 이 같은 세계주의적 견해는 스토아 철학에서 시작되었지만 실제는 이미 알렉산더부터 시작되었다. (347) [나로서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혼혈인 안티스테네스(퀴니코스학파)에서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특히 후자는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50NMC)]

 

알렉산더가 죽자, ... 유럽 지역[마케도니아 본토]은 결국 안티고누스(Antigonus, Ἀντίγονος)의 후손이 차지하고[왕위 계승전쟁 이후],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Πτολεμαῖος)는 이집트를 차지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셀레우쿠스(Seleucus, Σελευκος)는 여러 해 동안 전쟁을 한 끝에 아시아를 차지하였으며, .. 안티오크에 도읍하였다. (349-350)

 

 

헬레니즘과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첫 충돌은 ?매카비 서(The Book of Maccabees)?에 나와 있다. 이것은 마케도니아 제국의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재미있는 사적이다. 나는 이것을 나중에 ‘기독교 기원과 성자’에서 동시에 다루려고 한다. 그리스인은 다른 어디서도 그처럼 완강한 저항을 받지 않았다. (351)

 

기원전 3세기에 가장 훌륭한 성공은, 헬레니즘 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알렉산드리아였다. ..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은 학문의 수호자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수학은 주로 알렉산드리아인들이 숭상하였다. (351) [러셀의 수학에 편중이다. 알렉산드리아 3학파가 공존했는데, 하나는 수학(천문학, 점성술), 다른 하나는 의학(연금술), 그리고 이집트 전통의 판관이다. 이 판관은 로마에까지 저항하다가 사라지고 문자도 사장된다. (50NMC)] [에라시스트라(fr. Erasistrate de Ceos ou Erasistrate de Julis(Ioulis), 전310경- 전250경), 별명 "l'infaillible"(화타: 다고침) 그리스 의사. 헤로피로스(Herophile)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치하 의학 알렉산드리아 학파 창설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ène, Ἐρατοσθένη, 전284-전192)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도서관 관장이었다. (352)

그들은 선배들과 달리 ... 보편적인 철학을 내세우지 못하였다. .. 유클리드(Εὐκλείδης 전330-270경), 아리스타르코스(Ἀρίσταρχος, 전310경–230), 아르키메데스(Ἀρχιμήδης, 전287경-212), 아폴로니우스 등은 저마다 수학가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철학에서는 독창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352)

이집트에서는 관개사업이나 배수사업에 있어서 놀라운 업적이 고용된 전문가들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군인, 행정가, 의사, 수학자, 철학자들이 있었으며, 아무도 혼자서는 동시에 이 모든 전문 부분을 겸하여 해낼 수 없었다. (353)

헬레니즘의 세계에서는 신전들이 은행 일을 대신하였다. 그들은 금을 보유하고, 신용 대부를 하였다. 기원전 3세기 초에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에서는 10퍼센트의 이자로 돈을 꾸어 줬다. 그 전에는 더 비싸게 받았다. (354)

그리스인들의 마음 속에 가장 깊은 인상을 주게 된 것은 바빌론과 칼데아인(Chadean)들의 종교 였다. ... 그들에게서 받아들인 것은 주로 점성술과 마술이었다. (356-357)

 

552 공자(孔子, 전552-전479) 성인(聖人) 유가의 창시자.

55? 노자(老子 ?-?) 도가의 창시자.

521 안회(顔回, 전521-전490)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아성(亞聖) 안회지락(顔回之樂)

506 증삼(曾參, 曾子, 전506-436)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유학자. 자는 자여(子輿) 효심이 강하다.

492 자사(子思 B.C. 492-432) 중국 전국 시대 노(魯)나라의 유학자. 공자의 손자, 이름은 급(伋).

478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가 죽은 다음해 공자의 옛집을 묘(廟)로 개축하여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480 묵자(墨子, BC 480-BC 390)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 [약간은 스토아적 발상이 있다.]

440 양주(楊朱, BC 440 ?~BC 360 ?)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 자기 혼자만이 쾌락하면 좋다는 위아설(爲我說), 즉 이기적인 쾌락설을 주장했다. -[에피큐로스적 발상이 있다.]

395 상앙(商鞅, 기원395경-338년)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유학자이자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372 맹자(孟子, BC 372 ?-BC 289 ?) 이름은 가(軻) - 양주와 묵자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369 장자(莊子, BC 369-BC 289?) 맹자와 거의 같은 시기이다.

343 굴원(屈原, BC 343?-BC 278?) 전국시대 초나라 정치가, 비극시인.?어부사(漁父辭)?.

298 순자(荀子, BC 298?-BC 238?) 이름은 순황(荀況),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유학자. -

280 한비자(韓非子, 280?~BC 233)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 -순자의 제자. - 이사(李斯:BC 280경~208)도 순자의 제자였다. ]]

 

제26장 견유학파(Cynics)와 회의주의학파(Sceptics)[키니코스학파와 회의주의학파] 359-357

어떤 시대에는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태도를 저마다 각각 달리 취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19세기 초에 괴테(Goethe, 1749-1832)는 온건파이고, 벤담(Bentham 1748-1832)은 개혁가, 셸리(Shelley, 1797-1851)는 혁명가, [이탈리아 시인] 레오파르디(Leopardi, 1798-1837)는 염세주의자였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위대한 작가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공통된 경향이 있으니, 예컨대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의 치하와 18세기에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프랑스에서는 1750년경에 혁명적이었으나, 독일에서는 1813년 이후로는 국가주의적인 책체가 짙었다. (359)

철학에서 네 가지 학파가 창설된 것은 알렉산더 시대였다. 그 중에서 유명한 두 학파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다. .

.. 이 장에서는 퀴니코스 학파와 회의주의 학파에 대해 논하려고 한다. (361)

[퀴니코스학파]

[444 안티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 Antisthénês, 기원전 444-365)(79살)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제자(25살 어렸다, 플라톤보다 17살 많다), 키니코스 학파 창설자. (스토아의 제논보다 109년 즉 한 세기 앞섰다.)

견유학파[퀴니코스학파]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던 안티스테네스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디오게네스가 실질적 창시자이다. 안티스테네스는 플라톤보다 나이가 약 20세 쯤 더 많았다. 그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어느 면에서 톨스토이와 비슷한 사람이다. (361)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함’을 믿고 있었다. (362)

 

[413 디오게네스(Diogène le cynique, Διογένης / Diogénês, 413-327; 87살) 시노페(Sinope)출신 탄생 (소크라테스 사망시 14살) 고대철학자, 키니코스학파의 대표철학자.

알렉산더가 그(디오게네스)를 찾아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단지 나의 햇빛이 가려지지 않도록 비켜 달라’고 한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363) [이 이야기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전해진 이야기 인데 검증 안 된 이야기라 한다.]

이 학파에 속하는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이던 텔레스(Teles)는 ‘내 아들이나 아내가 죽었다고 해서, 살아남은 나를 소홀히 할 까닭이 어디 있으며, 또 내 재산을 간수하기를 그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말한 것이다. (364) [시지프스 설화는 죽음을 재주로 표현하다가 신들에게 벌을 받은 설화이다. 장자(莊子, 전370-300년경)는 현실의 덧없음과 죽음을 과장하지 않으려 했다. 퀴니코스는 죽음 이후를 믿음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50MMD)]

 

[퀴레네 학파]

[435 아리스티포스(Aristippe de Cyrène, Ἀρίστιππος, 435-356)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제자. 전399년에 퀴레네 학파를 창설했다. 이 학파는 즐김주의(l'hédonisme)를 학설의 본질로 삼는다. 그의 딸 아레테(Arété de Cyrène Ἀρετή)도 이 학파 학자이며 아들 아리스티포스(Aristippe le Jeune)도 학자이다.]

 

[* 회의학파]

[365 회의학파의 퓌론(Pyrrhon, Πύρρων 기원전 365-275) (90살)가 태어나다.

이 네 학파 중의 하나인 회의주의는, 처음에 피론(Pyrrhon)이 제창하였다. 그는 알렉산더의 군대에 나가 있었으며, 인도까지 진출하였다. (365)

피론의 제자인 티몬(Timon, 전325경-전235)은 그리스인의 논리적 입장에서는 답변하기 힘든 지적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인정한 논리는 단지 연역적인 논리였다. 그리고 모든 연역은 유크리트의 기하학과 같이 자명한 어떤 일반 원리[공리]에서 시작하여야 했다. 그런데 티몬은 그런 원리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 (366)

[315 아르케실라오스(Arcésilas de Pitane, Arkesilaos 전315-241) 신아카데미학파에 속하며, 아카데미의 제5대 학교장 되었다. / en.Wiki 그는 중기아카데미 창설자이다. 그는 크라테스(Crates)를 계승하여 264년경에 제6대 학장이 되었다.]

[219 카르네아데스(Carnéade Καρνεὰδης, Karneadēs, 전219-128) 신플라톤주의에 속하며, 아카데미의 제10대 학교장이 되었다. <아래와 차이를 참조하라.> / 214 카르네아데스(Carnéades 전214?- 129?) 그리스의 회의학파(懷疑學派) 철학자. 스토아 철학을 연구, 그 철학을 논박하여 진위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하한 인식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전137년까지 아카데미아 학장으로 있었다.]

 

[80 아니네시데모스(Enésidème ou Ænésidème, Αἰνησίδημος / Ainêsídêmos, 전80-후10) 고대회의주의 학파. 피론주의 학파 창설자. ]

철학으로서 회의주의는 한갓 의심(doubt)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 의심(dogmatic doubt)이라고 할 수 있다. ... 과학자는 ‘나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지적 호기심을 가진 자는 ‘나는 그것이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아내려고 한다’고 말한다. 회의주의 철학자는 말하기를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 것도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366)

 

[카르네아데스의] 강연이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원로 카토(Cato)이며 그는 대담하고 엄격하며 경직되고 잔인한 도덕규범을 주장하였고, 그리하여 로마는 이것으로 카르타고를 패배시킬 수 있었다. (369)

카르네아데스 다음으로 ‘아카데미아’의 학장이 된 사람은 하스트루발(Hasdrubal)이라는 카르타고 사람이었다. .. 자기 자신이 클레이토마코스(Clitomaque, Κλειτόμαχος 186-109)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400권이 넘는 책을 저술... (371)

 

클레이토마코스 이후 ‘아카데미아’는 회의주의적이 아니었다. ... 그러나 회의주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크레타인 에네시데무스(Aenesidemus, s.d.)에 의해 다시 대두되었다. (372)

고대 세계는 회의주의자들의 논의에 대해 아무 답변도 하려고 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버렸다. 올림푸스의 신들이 신임을 잃게 되자 동방 종교가 침투될 길이 크게 열려 있었다. (374) [그리스가 통일된 전체(전제정)을 만들지 못하여 신들의 통합의 중심을 만들지 못했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 함으로서 제국의 중심 축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신앙자들은 다른 중심축을 만들 것이다. 크리스트교가 성립할 것이다. (50NMC)]

 

제27장 에피쿠로스 학파 375-391

[[341 에피쿠로스(Epicure, Ἐπίκουρος, Epicuros. 전341-270; 71살) 탄생 플라톤이 죽은 후 6년이 지나 태어났다. 알렉산더가 죽을 때 18살이었다.

323 에피큐로스 18살 경에 플라톤주의자 팜필(Pamphile)에게 배움 - 알렉산더가 죽는 해 아테네의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난다. [이민족의 추방도 반마케도니아 운동의 일부이다]

322? 그는 타오스에서 나우시파네스(Nausiphanes)에게 철학을 배웠다.

[데모크리토스의 학설을 배웠을 것인데 그 자신은 그런 언급이 없다고 한다]

311 에피큐로스 30살, 레스보스의 미틸렌에서 가르침; 이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함

310 에피큐로스 람프사크(Lampsaque, 고대 리디Lydie 지역, 현 터키)에서 학교를 개설하다.

306 에피큐로스 아테네에서 학교(Jardin)을 열다.

186 로마의 원로원은 186년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책들을 없애버렸으며, 그러고 나서 173년과 161년에는 에피큐로스 사상도 쾌락주의와 정치적 포기를 함축하고 있다는 이유로 금지하였다. 이후 스토아학파가 중심이 되다. (스키피오 가문이 스토아를 수용한다)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 “그들(분명히 스토아학파의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모친과 함께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정화주문(淨化呪文)을 외워, 비참한 몇 푼의 돈으로 초급 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부친을 도왔다.” (375-376) [라에르티오스가 스토아를 빌어 악평한 것이다. / 자기 사상의 정당화가 잘 안될 때, 반대파를 반대파의 반대자를 들먹여 악평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특히 도덕론자들(또는 amoraliste)이 이런 짓을 잘 한다.]

에픽테투스는 에피쿠로스에게 “먹고, 마시고, 성교하고, 배설하고, 코고는 것 – 이것을 당신이 값있는 생활이아라고 생각하는 전부였다.” - 에픽테투스 ?논문집? 제2권 20장. (376)

그는 한 채의 집과 정원을 갖고 있었으며(이 정원은 집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곳에서 강의도 하였다.

 

(377) - [정원(jardin, Graten) 유치원은 이 이름에서 유래한다.]

학원을 아테네로 옮긴 후 .. 제자, 친구들, 그들의 자식, 노예, 창기(娼妓)도 있었다. ... / 이 집단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다. .. 그들이 먹고 마신 것은 주로 빵과 물이었다. 에피쿠로스는 그것으로 완전히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377)

에피쿠로스는 한 평생 건강이 좋지 못해 시달려 오면서도 큰 인내력으로 참아나가는 것을 배웠다. 인간은 고문대 위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것은 스토아가 아니라 에피쿠로스였다. (378)

에피쿠로스가 쓴 300권의 저서가 분실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이 모자랄 수밖에 없으며, 저서 중에는 몇 장의 편지와 단편들 및 ‘기초원리’에 관한 설명문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루크레티우스를 이용하여 보충할 수 있다. (379-380)

 

에피쿠로스 철학은 ... 첫째 목적은 마음의 평정(ataraxia)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쾌락을 선이라고 보았으며... “쾌락은 축복된 삶의 처음이자 나중이다” ..

“모든 선의 시초요, 근원은 위의 쾌락이며 지혜와 문화까지도 이 쾌락에서 비롯된다.” (380)

 

에피쿠로스는 능동적 쾌락과 수동적 쾌락, 동적인 쾌락과 정적인 쾌락을 구별 .. 후자를 추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 육체가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에는 아무 고통도 일어나지 않는다. (380-381)

그러므로 실제로 적극적인 쾌락을 취하는 것보다 고통을 피하는 것을 현인의 목표로 간주했다. (381) - 베일리(Cyril Bailey), ?그리스 원자론자와 에피쿠로스(The Greek Atomists and Epicurus, 1928)?, 249쪽

그가 공적(公的) 생활에서 떠나라고 충고한 것은 그의 원칙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말이라고 하겠다. 누구나 권력을 얻게 되면, 자연히 그를 부러워하며, 따라서 그를 해치려고 하는 자의 수도 점점 늘어갈 터이니 말이다. (381)

 

에피쿠로스의 이론 철학은 공포를 피하는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 공포에는 두 가지 큰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종교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다. 이 두 원인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종교는 죽음이 불행임을 고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신이 인간사에는 간섭하지 않으며, 또 영혼은 육신과 함께 멸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형이상학을 세웠다. (383)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에서는 필연성의 개념이 종교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 원자는 무게를 갖고 있으며,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자는 때로는 자유의지[우연]와 같은 작용을 받아, 조금씩 빗나가서 직선적인 하향궤도에서 떠나게 된다[오늘날에도 에딩톤(Eddington)은 이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하여 비결정론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다른 원자와 충돌을 일으키며 여기서 점점 발전하여 와동운동(渦動運動)[clinamen]이 된다. 이것은 데모크리토스의 주장과 비슷한 것이다. (384) [데모크리토스의 선회운동(旋回運動, cyclic motion), (이 책, 129)]

영혼은 물질이다. 숨결이나 열의 분자와 같은 그런 분자들로 되어 있다(에피쿠로스는 숨결이나 바람은 신체에 있어서 공기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운동하고 있는 공기는 아니었다). 영혼의 원자는 신체 전반에 걸쳐서 퍼져있다. (394)

 

에피쿠로스는 신들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그러나 신들은 존재하지만, 인간사에 관여하여 스스로 괴롭히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다. ... 물론 점이나 전조 또는 이와 유사한 것들은 전혀 미신에 지나지 않으며, 섭리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385)

그러므로 신들의 진노를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으며, 사후(死後)에 저승에 가서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까닭도 없다. (385)

에피쿠로스는 매우 유명한 제자[계보]를 두었다. 시인 류크레티우스(Lucretius, 전99-55)가 바로 그이다. ...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고대의 도덕과 종교의 부흥을 일으켰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은 인기를 잃게 되었으며, ... (386)

 

에피쿠로스 철학이 ‘르네상스’ 이후 독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주로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통해서였다. 독자들에게 인상적인 것은, 그의 사상이 유물론을 주장하고, 신의 섭리와 영혼 불멸을 반대하여 기독교와 상치되는 점이었다. (389) [러셀은 이 책을 쓰던 시절(전쟁시)에 이미 크리스트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28장 스토아 철학 392-418

 

[[335 제논(Zenon, Ζήνων, 전335-264) 퀴프로스(Chypre (Chypre, Κύπρος,)의 키티움(Cition, gr. Κίτιον, lat. Citium) 출신,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크라테스에게 배웠다. (아리스토텔레스 사망시 제논은 13살, 디오게네스(87살에 사망) 사망시 제논 8살 정도였다.)

312 스토아학파의 제논 아테네에 오다.

301 스토아학파 제논(34살), 회랑(Portique) 학교 세움 ]]

스토아 철학은 에피쿠로스학파와 같은 시대에 대두되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보다 그 역사는 더 길며, 그 학설도 에피쿠로스학파처럼 고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초 이 학파의 창설자인 제논(Zenon)의 가르침은, 서기 2세기 후반기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가르침과는 같지 않다. 제논은 유물론자로서 주로 그의 학설을 퀴니코스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을 결합한 것이다. (392)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은 거의가 시리아 인들이었으며, 후기 스토아철학자들은 거의 로마인들이었다. (392)

소크라테스는 스토아 철학의 전 역사를 통하여 주요한 성자였다. 재판정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 도망가라는 권고의 거절,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침착성,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를 당하는 자보다 더 많을 해독을 스스로 받게 마련이라는 주장 등, .. 그리고 더위나 추위에 대한 그의 무관심[무감동], 음식물과 의복의 검소함, 육신의 안락을 완전히 초월한 점 등도 다 그러하다. (393)

 

이 학파에서 한결같이 주장해 온 주요한 학설은 우주적인 결정론(決定論)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것이다. 제논은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기의 길은 자연법칙에 의해 완전히 고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오직 불(火, 화)만이 있었고, 나중에 다른 원소들이 – 공기 물 흙 등의 순서로 – 점점 생겨난다. (394) [자연에 우연이 없다는 필연은 어쩌면 플라톤의 아낭케와 연관있을 것이다. 왜 스토아가 소크라테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느냐에 관한 점에서 아낭케가 소크라테스에서 기원인지도 모른다. 영혼이 아낭케 아닐까? / 이 결정론과 필연은 스피노자에게 이른다. (50NMD)]

 

신은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세계의 영혼이다. 우리는 각자가 다 각각의 신의 불(神火, 신화)의 일부분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만물이 모두 각각의 자연이라고 부르는 단일한 체계의 한 부분이다. 각 개인의 삶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에 선이 되며, 어느 의미에서는 모든 생활이 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395) [플라톤이 국가에서 우주발생론으로 다음에 법률로 가는데 비해, 스토아는 우주론에서 개인으로 간다.

 

악한 자들은 강요에 의해 신의 법에 따르긴 하지만,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클레안테스(Cleanthes)의 비유에 의하면, 그들은 마치 수레에 매어 놓은 개와 같아서, 그 수레가 가는 곳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396)

다른 사람은 다만 나의 외적(外的)인 것에 대해서만 영향력을 갖는다. 덕이야 말로 유일한 참된 선이며, 이것은 오로지 그 개인에게 [내적 필연성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저마다 지상의 욕망에서 벗어나게만 되면, 각자 완전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396) [러셀이 악의 문제를 끌어들이는데, 악은 내적 필연성에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연의 필연성이 아니라 외적(사적) 이익에서 악(목적)이 생겨난다. ]

덕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개념에는 일종의 냉담(冷淡, apatheia)이 포함되어 있다. .. 모든 감정을 다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감정 배격]. 성자는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 우정에 대해서는 에피쿠로스가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아리스토텔레스도], 여기서는 다만 용인될 뿐이다.(397)

 

스토아 철학자들도 원리로서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리는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취했을 것이다. (398) [지혜에 대한 열망으로써 사랑, 즉 자아와 타인의 정체성을 완전성으로 향하는 열망으로써 사랑은 소크라테스의 것이다. 퀴니코스를 거쳐서 스토아로 전승된 것이다.]

제논은 신(神)을 불(火, 화)과 같은 ‘세계 정신’이라 정의 한 것 같다. 또 신은 하나의 물체이며 실체인데, 이 우주 전체가 신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398)

 

제논은 신들을 위해 신전이 필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신전을 지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신전은 별로 큰 가치를 가진 것도 아니며, 거룩한 것도 못 되기 때문이다. 건축가나 기술공들이 만든 것이 그렇게 큰 가치가 있고 거룩할 수 없다.” 키케로에 의하면 제논은 별들이 어떤 신령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399) [키케로의 해석으로 제논이 점성술을 믿었다고 하나, 점성술이라기보다 미비한 우주발생론의 관심에서 별을 불과 연관지어 생각했을 수 있다.]

제논의 후계자인 아소스의 클레안테스(Κλεάνθης, 전331경-전232)는 주로 두 가지 일로 유명하다. 첫째로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Ἀρίσταρχος, 전310경-230)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지 않고,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본다고 해서, 그 불경건에 대하여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요. 둘째로 제우스에게 바친 그의 ‘성가’이다. .. “오 제우스[신 불]여, 운명[숙명]이여, 날 인도하소서! / 당신이 무슨 일로 날 보내시든지, 날 인도하소서, /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따르겠나이다./ 설사 의혹을 느끼더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따르렵니다.” (399-400) [나로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연상하게 한다. 그는 오류가 있더라도 믿는다고 했지만 말이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연관있는 학자들이 천문학과 기하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덕분이 아닌가 한다. ]

 

클레안테스의 뒤를 물려받은 크리시포스(Chrysippos)는 705권이나 되는 많은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스토아 철학을 조직적으로 또 현학적(衒學的)으로 만들었다. 그에 의하면, 제우스, 즉 “최고의 불(Supreme Fire)만이 불멸이며, 다른 신들은 해와 달도 포함하여,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400)

인간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남아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클레안테스는 모든 영혼이 다음에 오는 대화재(大火災) 때까지 살아남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크리시포스는 이것은 단지 현인의 영혼에 대해서만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400)

 

크리시포스는 실상 논리학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가언적(假言的) 삼단논법과 선언적(選言的) 삼단논법은 ‘선언(選言)’이라는 말과 함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문법에 대한 연구와 명사 변화의 ‘격’[declinaison]을 알아낸 것도 그들이었다. (400)

 

[크리시포스(또는 제논)에 의하면] 철학을 한 과수원이라고 본다면, 논리학은 그 과수원의 울타리 같고, 자연학은 과수원과 같으며, 윤리학은 열매와 같다고 한다. 철학을 계란에 비유하면, 논리학은 계란의 껍질과 같고, 자연학은 흰자와 같으며, 윤리학은 노른자 격이라고 한다(바르트, 앞의 책). (401)

 

[안티파트로스(Antipatros ou Antipater de Tarse, Ἀντίπατρος, 전성기 전150-129) 스토아 철학자. 창시자 제논의 사상을 잘 표현하고자 시도한 자. 디오게네스 드 바빌론(Diogène de Babylone)의 제자, 파네티오스(Panétios de Rhodes)의 스승, 카르네아드(un adversaire de Carnéade)의 반대자. ?세계에 관하여(Sur le Monde (7 livres)?, ?존재에 관하여(Sur l'être)?, ?영혼에 대하여(De l'Âme)? [스토아 4대학당장] ]] [(레셀이 빠뜨린 인물이다.)] [여기까지 전기 스토아]

 

크리시포스 이후에 스토아 철학은 두 중요한 인물, 즉 파네티우스와 포시도니우스에 의해 상당히 변모되었다. 파네티우스는 플라톤주의의 요소들을 많이 도입하고 유물론을 버렸다. 그는 스키피오의 친구로서, 키케로에게 영향을 끼쳤다. 스토아 철학은 즈로 키케로를 통하여 로마인들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키케로는 로도스에서 포시도니우스로부터 철학을 공부했으며, .. 포시도니우스는 파네티우스에게 배우고.. (401) [이로부터 중기 스토아 철학이라 부른다.]

포시도니우스(Ποσειδώνιος, 전135-전51)는 시리아의 그리스인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이 멸망했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서방지역으로 여행 .. (401) / ... 태양의 거리에 대한 그의 추산은 고대에서 가장 정확한 것이었다. ... (402) / 그는 역사가 이기도 하였으며, 폴리비오스(Polybios)의 역사를 계속해서 써 나갔다. (402)

 

영혼과 사후의 삶에 대한 .. 파네티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흔히 주장하듯이 영혼은 신체와 함께 소멸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포시도니우스는 이와 반대로 영혼은 계속해서 공중에서 생존한다고 하였다. 영혼은 대체로 세계의 다음번 대화재 때까지 하늘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402)

비반(Bevan)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오르페우스교 개념의 이런 재생이나 신피타고라스주의(Neo-Pythagorean) 신앙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포시도니우스는 그노시스주의(Gnosticism)에 대한 길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402-403)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철학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초기의 스토아철학자들 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세 사람이 있다. ... 세네카, 에픽테투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들이다. 한 사람은 관리이고 다른 한사람은 [해방]노예이며, 또 한 사람은 황제였다. (403)

 

[[65 네로의 스승 세네카(Sénèque, Lucius Annaeus Seneca, av. 4.-ap. 65)와 세네카의 조카 루칸(Lucain, 39-65) 처형.

50 노예출신 에픽테토스(Epictète, Ἐπίκτητος, 50-125/30) 노예출신 스토아 철학자. 그의 제자 아리아노스(Arrien, en lat. Flavius Arrianus Xenophon, en gr. Ἀρριανός, 85경-146경)이 ?Les Entretiens(διατριϐαί [diatribaí])?, ?Le Manuel d'Épictète(Ἐγχειρίδιον Επικτήτου [Enchiridion Epiktetou])? 두 권을 펴냈다.

121 아우렐리우스(Marc Aurèle,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121–180), 로마 황제, 스토아철학자. 재위(161-180)]]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공적(公的)으로는 부(富)를 멸시하였지만, 많은 재물을 모았다. .. 그는 이 돈을 다 영국에서 고리대금으로 벌었던 것이다. 디오(Dio)에 의하면 그가 받아들인 비싼 이자가 그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403)

시인인 그의 조카도 함께 같은 죽음을 당하였는데, [네로의 스승인] 그도 자기의 시를 읊으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404)

 

에픽테토스(Epictetus, 후60?-100?) .. 그는 에파프로디토스의 노예였으며, 후에 네로의 자유인이 되어 장관까지 지냈다. .. 그 후에 도미티나투스 황제는 지식인을 싫어하고 철학자는 모조리 귀양을 보냈다. 그리하여 에픽테토스는 에피루스의 니코폴리스에 숨어 살면서, ... (40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 그의 치세하에는 많은 재난, 즉 지진, 유행병, 어려운 전쟁, 무력 폭동 등이 계속해서 밀어닥쳤다. .. ?명상록(Meditations)? .. 그의 아들 코모두스(Commodus)는 최악의 황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405)

 

스토아의 윤리는 에픽테투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의 시대에 적합하였다. 그 이유는 이 철학이 가르치는 복음은 희망의 복음이라기 보다 인내(忍耐)의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406-407)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농촌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도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시에도 심한 빈곤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빈민들이 있었으며, 거기에느 거대한 노예 계급도 있었다. (407)

에픽테투스는 “너는 시체를 메고 다니는 한 작은 영혼이다. (407)

에픽테투스의 가르침을 기록한 글에서 우리는 진지함과 동시에 단순성을 찾아볼 수 있다. (410)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의 신의 도성은 부분적으로 이교도인의 황제[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411)

 

스토아 철학자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한가지 난점이 있다. 그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융화시키는 문제이다. ..// 우주는 결정론인 하나의 전체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 앞에 생긴 원인들의 결과이다. 그러나 한편 개인의 의지는 자율적이다. 따라서 아무도 외적 원인에 강요되어 죄를 범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412)

 

그는 아래와 같이 답변하였을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단일한 생명체이다. 그리하여 한 영혼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또한 한 이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존재자는 전체로서는 자유롭고, 신은 처음부터 그 자신이 고정된 일반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결정해 놓았다. .. 인간의 한 부분은 불(火)이고 또 한 부분은 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흙이다. 그가 불의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신의 부분이다. .. 신의 의지는 자유로우므로, 그 경우에는 인간의 의지도 자유로운 것이다. (413)

우리는 이제 둘째 모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스토아 철학자는 한편으로 남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하면서 이론적으로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두드러진 모순으로, 또한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일종의 기독교 도덕주의자까지도 포함하여) 독특한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이 두 가지 체계의 윤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을 위한 최상의 윤리와 ‘율법 없는 비천한 자’들을 위한 저급한 윤리가 그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주로 생각할 때에는, 행복이나 그 밖의 세속적인 선(善)은 무가치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복을 원하는 것은 자연에 위배될뿐더러, 신의 뜻에 복종치 않음을 뜻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415) [러셀뿐만 아니라 크리스트교인들의 견해인 것 같다. 스토아에게 자연에 따르는 것은 선과 악의 구별이 있기 이전이다. 즉 행위자체에 선악이 없다. 선과 악은 개별적 이해관계에서 생기는 것이다. 베푸거나 은총은 자연의 자기 법칙에 맞는 것이며, 자연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 스토아의 행복(지고지선)이다. / 종교적 의미에서 지성적 사고에 대해 자연적(본능적) 사유가 인성을 창발하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자연적 사유의 일부이다. (50NME)]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소중한 것은 주로 윤리문제였지만, 다른 분야에서 그들의 가르침이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식론(認識論)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법과 자연권(natural right)에 관한 학설이다.

인식론에서, 플라톤과 반대로[전복(顚覆)], 그들은 지각을 용인하였다. (416)

 

제논의 직접 제자이던 스토아 철학자 스페루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왕이 베푸는 연회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왕은 그 학설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초로 만든 석류를 내놓았다. 그러자 그 철학자가 그것을 집어먹으려고 하였다. 왕이 이것을 보고 껄껄 웃자, 이 철학자는 대답하기를, 자기는 그것이 참된 석류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런 궁중에서 베푸는 식탁에 먹을 수 없는 것은 놓여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 했다. (416-417)

그들의 인식론에는 또 한 가지 주장이 있다. ..

 

그것은 본유(本有)관념과 본유원리에 대한 그들의 신조이다. 그리스 논리학은 완전히 연역적이었다. 거기서 첫째 전제가 언제나 문제된다. 이 전제는 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일반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자명한 것이며, 누구나가 다 인정하고 있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417) [생명의 원리 같은 것이다. / 스토아학파는 직관주의 수학의 공리같은 일반성 또는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자연법(Jus naturale)과 인간법(Jus gentium)을 구별하게 된 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이었다. 자연법은 모든 일반적인 지식의 기초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는 제일원리에서 파생된 것이다.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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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아 학파의 특징 1

 

▲ 스토아학파의 자연주의(naturalism) : 자살에 대한 관점

 

- 기존의 철학은 현실적인 대상과 격이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여겼는데, 스토아학파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개별적 사물들 간에 그러한 위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의 이분법을 거부했다. 현대의 기계론적 자연주의와는 달리, 인간도 섭리의 한 조각이라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의 색채를 가졌다. 자연, 우주는 최종적인 것이고 사물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정치, 사유, 권력은 허망하고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유교나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자살을 비난하지만, 스토아적 세계관에서 보면 자살은 그 자체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행위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살하는 인간을 비난하지만 스토아학파에서는 그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당시에는 자살이 유행하기도 했다. 우주가 불(일종의 에너지나 기氣)이라면 우리는 불티들이다. 불티가 불로 돌아가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잠시 떨어져 나왔던 전체와 합일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자살은 소(小)카토의 죽음이다. 카이사르에 맞섰던 인물이자 성실성(誠實性)의 화신과도 같았던 카토는 독재자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했다. 카토는 어느날 저녁 친구들과 스토아 철학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으면서 목숨을 끊었다. 제논 역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테네인들은 제논이 자살했을 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고 한다.

 

▲ 형이상학의 배제

 

- 제논은 철학을 자연철학(physica), 논리학(logica), 윤리학(ethica)의 세 분과로 나누었다.

비유하기를 자연철학은 노른자이고, 윤리학은 흰자이고, 논리학은 껍질이라고 하였다. 스토아학파의 사유는 추론적, 연역적이지 않으며 형이상학적인 물음은 경시되었다. 추상적, 계산적이기보다는 깨달음의 사유를 중요시했다. 논리학은 우리가 지금 ‘인식론’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포괄한다. 언어철학도 물론 포함한다. 제논에 따르면, 인식은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표상에서 유래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철학에 따르면, 진정한 인식은 우리의 감각을 버리고 형상/본질을 볼 때 성립한다. 감각이란 우리를 속이는 것,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논은 진정한 의식은 감각에 기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스토아의 인식론을 ‘감각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경험론, 실증주의, 현상론, 현상학 등의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은 소피스트들의 인식론과도 구분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피스트 사이에서 중용적인 입장을 취한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적인 표상에는 주관적인 표상도 있고 객관적인 표상도 있다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처럼 감각의 주관성, 상대성을 근거로 해서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가는 것도 아니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감각적 인식을 폄하하는 입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감각을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겼다.

 

▲ 표상(representation)

 

- 플라톤적 맥락에서는 ‘모방(mimesis)’, ‘재현’으로 번역되나 근대의 철학에서는 ‘표상’이라고 한다.

주체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표상이다. 표상되는 결과는 이미지image나 인상, 관념 등 이라고 한다. 오늘날 ‘표상’이라는 말이 혼동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표상이 표상작용과 과정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고, 표상결과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표상한 그것과 그것에 대해서 표상했다고 믿는 사물이 일치하는가?” 이러한 질문에서 인식론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도출된다.

 

▲ 스토아학파의 포착적 표상(판타지아 카탈로티케 phantasia )

 

- 제논은 확실한 표상, 객관적인 표상을 ‘포착적 표상’이라고 부른다. ‘phantasia’는 표상이다.

‘환타지’라는 지금의 뜻과는 전혀 다르다. 이 말을 환타지라는 뉘앙스로 쓴 사람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환타지로 보았다. ‘katalptik’는 에서 온 말로서 “꽉 붙잡다”를 뜻한다. 독일어 ‘Begriff’와 비교가 된다. 또 우리말의 “파악(把握)한다”는 말이 연상된다. 물론 제논의 경우는 개념의 수준이 아니라 표상의 수준이다. 인식 주체는 표상이 포착적 표상일 때, 그 표상을 수용한다. 객관적 표상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이 수용을 ‘sygkatathesis’라고 부른다. 그래서 인식은 표상과 수용을 기초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와 소피스트주의의 양극단으로 가지 않고, 비교적 건전한 형태의 경험주의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자연철학에서도 제논은 플라톤주의와 대립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질료 자체는 궁극적 실체가 아니다. 궁극적 실체는 형상이다. 다만 형상은 일정한 터에 자리잡음으로써만 현실적인 사물로서 구현될 수 있고, 이 터전이 질료이다. 그래서 플라톤주의에서 질료란 늘 형상의 상관자로서 파악된다. 이에 반해 스토아학파는 이 세상에 가장 궁극적인 존재는 ‘smata’라고 말한다. 맥락에 따라 ‘물질’로 번역할 수도 있고 ‘물체’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 우주는 타오르는 불(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이다

 

- 제논에 따르면, 우주는 타오르는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한번 거대하게 불타올랐다가(라고 한다) 다시 잦아드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른바 ‘영원회귀’(니체의 영원회귀와 구분하여, ‘영겁회귀’라고 할 수도 있겠다)라고 불리는 매우 역동적 세계관이다. 그렇다고 이 세계가 질서가 없는 곳은 아니다. 제논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도 오히려 더 극단적인 결정론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불을 또한 ‘로고스’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얼핏 들으면 불이라는 말과 로고스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식으로 말해 제논이 말하는 불을 기(氣)로 해석하고 로고스를 이법(理法)으로 해석해 이 기 자체가 이법을 내포한다고 보면 이해가 간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이 불-로고스의 조각들이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스토아의 철학은 완벽하게 결정론적이고 일원론적인 형태를 띤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이 결정론이 근대적인 형태의 기계론적 결정론이 아니라 목적론적 결정론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 결정론은 ‘메커니즘’이나 ‘법칙’이 아니라 ‘섭리’이다. blog.naver.com/min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