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아라비아의 옛왕국
아랍인들 사이에는 예로부터 아라비아 반도에 거주하는 아랍을 남과 북의 2개 그룹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남아라비아를 기원으로 하는 그룹으로 “참 아랍”이라고 불리며 카프탄이라는 족장의 자손이라고 한다. 카프탄(Captan)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욕단(Joktan)과 동일 인물이며, 또 다른 이름인 야만(예멘)으로도 불린다.
아라비아 반도는 아랍어로 아랍인의 섬이라 불린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내륙으로 통하는 드넓은 사막이다. 한마디로 같힌 섬이며, 고립된 세계인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아라비아의 남쪽과 북쪽은 사막을 사이에 두고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여 왔다. 이 아라비아 반도에 우리가 잘 모르는 이슬람 이전의 고대 문명이 숨어 있다.
북부 아라비아인들은 오아시스 주변의 정착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목생활을 했다. 사막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집단으로 뭉쳐 살았으며, 베두인의 부족 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이 집단의 결속력은 가부장적인 혈족 관계를 바탕으로 생겨난 강력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물을 찾아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의 생활 영역은 어느 정도 한정되었으므로 이것이 그들의 영역이라 생각되었고, 그 영향권 아래 들어오는 것은 침입으로 간주되어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궁핍하였으므로 낙타 대상이나 오아시스의 정착민을 습격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이 약탈은 경제적 궁핍에서 나오므로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보지 않고 사냥의 연속으로 생각했다.
반대로, 남부 아라비아는물이 많은 산악지역이며 비교적 땅이 비옥하였기에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여 정착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예멘과 오만에 해당한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이곳을 “아라비아펠릭스(Arabia Felix)”, 즉 “행운의 아라비아”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기후가 쾌적하고 농산물과 향신료가 풍부하기로 평판이 높았었기 때문이었다.
고대의 아라비아 펠릭스 지도
이들은 군주제라는 정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에는 실크로드에 버금가는 인센스로드(향료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이로 인해 국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왕국들이 크게 번창하였으며, 아라비아 반도의 가장 부유한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 이유는 이 시기 최고의 무역 상품인 유향은 오직 남부 아라비아에서만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향나무
특히 유향은 지중해 세계, 특히 이집트 주변에서 상당히 중요시 되었다. 왜냐하면 이 향은 신에게 제사 지낼 때 필요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 제사는 정치와 동일시 되었으며, 이 때문에 유향은 금과 같은 가치로 거래될 수 밖에 없었다.
유향
아랍의 낙타상인들인 카라반들이 아라비아 남부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인센스 로드를 개척했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남동부 아라비아의 고대 도시인 우바르(Ubar)에서 시작되어 예멘의 마리브를 거쳐 수요지인 이집트, 시리아, 로마로 가는 길목인가자까지 2,400킬로미터의 무역로가 형성됐다. 이길을 둘러싸고 기원전1,000년부터 서기 500년까지 남부 아라비아에 걸쳐 사바(Saba), 마인(Main), 카타반(Qataban), 아우산(Ausan), 하드라마우트(Hadramaut), 힘야르(Himyar) 등의 수많은 고대 왕국들이 거의 같은 시대에 공존하면서 흥망을 거듭했고 찬란한 문명을남겼다. 그러나 이 왕국들은 거대한 부를 갖추었음에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견제가 심하여, 어느 왕국도 이 지역 전체를 지배할만한 제국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고대 남부 아라비아 6개 왕국의 지도
1. 사바 왕국
사바 왕국은 아라비아 반도의 남서쪽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았으며, 기원전 1,000년부터 서기 700년까지 약 1,700년을 존재했다. 이슬람이 생기기 전의 왕국 중 최초의 문명국으로 기원전 7세기경에 가장 크게 번성하였다.
사바 왕국에는 향료와 농산물이 풍부했으며 육로를 통한 대상무역과 해상무역이 활발했다. 왕성한 국제무역으로 왕국의 수도인 마리브는 아랍 세계를 통해 번창하는 부자 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여러 세기 동안 홍해에 이르는 해협을 지배했으며 아비씨니아(Abyssinia) 왕국 (오늘날에는 이디오피아로부터 독립한 에리트레아) 등의 아프리카 연안에 여러 식민지를세웠다. 새로운 식민지 건설은 간간히 계속되었으며 실제로 아프리카 해안의 일부 지역들은 기원전 1세기까지 사바 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사바 왕국의 지도
사바 왕국의 수도는 마리브(Marib)로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장남인 셈(Shem혹은 Sam)이 발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대의 낙타 대상들은 남동부 아라비아(지금의 오만)에서 지중해로 무역 여행을 떠났으며 사막 한가운데 있는 마리브라는 오아시스를 거쳐야만 했다.
마리브의 유적
마리브는 지금은 황폐하고 건조한 사막이지만, 기원전 1,000년경에는대추야자나무로 푸르게 우거진 오아이스였다. 기원전 750년경, 무역과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사바인들은 고대 세계의 놀라운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마리브 댐을 건설하였다. 높이 15미터, 폭 60미터, 길이 600미터의 댐은 1,000년이상 약 5만명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역활을 해왔다.
마리브 댐 (1)
마리브에 설치한 댐을 통해 넓은 지역에 효과적으로 물을 공급한 관개시설로 유명한 이 왕국은 한때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벌집 모양의 벽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마리브의 거대한 댐은 기원전 8세기를 시작으로 1천년 동안 지면의 정교한 관개시설과 더불어 사막을 푸르게 만들어 주었다.
마리브 댐 (2)
시바 왕국은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이나 튀니지의 카르타고에 못지않게 매혹적인 고대문명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파라오가 다스린 이집트는 아라비아 반도의 이 구석진 땅을 푼트의 땅(신의 땅)이라 불렀고, 히브리인들은 질 좋은 금 산지라는 뜻의 오빌(Ophir) 이라 불렀다. 드넓게 퍼져 있는 현무암 고원이 화산암과 모래성 형태를 이루며 우뚝 솟아오른 이곳은 오아시스끼리 연결고리가 형성돼 있어 늘 사람이 북적거렸다.
사바 왕국의 수도 마리브
사바 왕국은 비옥한 토양을 기반으로 유향나무 같은 특용 작물 재배에 성공하였고, 향료 수출을 통해 일찍부터 거대한 부를 이룩하였다. 유향나무에 상처를 내면 젖과 같은 수액이 흘러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유황이다. 영어로는 프랑킨센스(Frankincence) 혹은 인센스(Incense)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연기가 피어 오르는데 주로 왕궁이나 신전의 제단 위에 올려 놓고 유향을 피웠다. 이 유향은 값비싸고 귀한 향료로 선물이나 진상품으로 사용되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준 선물이기도 하였으며, 고대사회의 부와 권위의 상징인 귀한 물건이었다. 이 유향의 주요 원산지가 바로 사바 왕국이었다는 것이다.
향로
사바 왕국은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만큼, 가장 크고 웅장한 이슬람 이전 시대의 신전인 마흐람 빌키스(Mahram Bilqis)를 기원전 7세기경에 건설하였다. 빌키스는 사바 왕국의 여왕으로 코란에도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성경에는 시바의 여왕으로 알려져있다. 마리브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이 신전은 달의 신에게 바쳐졌으며, 여덟 개의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홀 뒤에는 비문이 새겨진 석회암 벽이 있는데 아직도 대부분이 모래에 파묻혀 있다.
마흐람 빌키스 (1)
마흐람 빌키스 (2)
마리브에는 또한 "빌키스의 옥좌"라는 뜻의 "아르시 빌키스(Arsh Bilqis)"가 있다. 우아하며 균형잡힌 다섯 개의 기둥이 있는 이것 역시 달의 신전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기원전 8세기 말에 건설되었다.
아르시 빌키스
[출처]초원의 유목민 (역사/여행)시바(Sheba)왕국 - 예멘(B) |작성자효림
사바 왕국은 수도인 마리브에건설한 거대한 댐을 통해 넓은 지역에 효과적으로 물을 공급한 관개시설로 고도의 농업을 영위하였으며 시리아, 이라크 등과 활발히 교역하면서 한때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사바 왕국은 인도양과 지중해를 잇는 대상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동부 아라비아로 운반된 인도 토산물, 특히 향료와 희귀 동물들(원숭이나공작등)은 기원전 10세기에는 오만으로부터 아라비아만까지의 육로를 거쳐, 그곳에서 해상을 통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운반되었다. 하드라마우트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막의 대상로는 마리브를 지나 페트라를 경유, 지중해 연안의 가자로 이어졌다. 교역의 중심지로서 누렸던 사바 왕국의 번영은 육로를 통해 이루어지던 향료 교역이 수로쪽으로 변경될 때까지계속되었다.
시바 여왕의 솔로몬 왕국 방문 시의 화려한 행렬
그러나, 기원전 1세기에 무역이 육로대신 하드라마우트의 해안을 따라 통과하는 해상로로 거점을 옮기게 됨에 따라 사바 왕국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였다. 거기에다 마리브댐이 무너지고 전역을 휩쓸어 그 황폐함이 극에 달하면서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황폐화된 마리브
2. 마인(Ma’in) 왕국
지금의 북예멘 지역에 위치한 마인(혹은 미네아) 왕국은기원전 1,200년에 세워진 남부 아라비아의 첫 번째 왕국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특히 기원전 4세기부터 2세기 사이에 큰 번영을 누렸다. 주요 도시로는 바라키쉬(Baraqish)와 카르나우(Qarnaw)가 있으며 아주 오래 전부터 바빌로니아와 무역을 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기원전 4세기에는 이집트와의 농산물 교역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이 고대 왕국은 일찍이 도시형태의 평화적인 무역 공동체로서 특히 유향, 후추 등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소비되던 농산물 재배 및 독점적인 무역을 통해 번성하였다.
마인 왕국과 그 수도인 바라키쉬의 지도
왕국의 수도였던 바라키쉬는 북부 예멘 와디 파르다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번창한 중심지였음을 반영하듯 57개의 망루와 2개의 성문이 있는 14미터 높이의 거대한 도시 성벽이 정착지를 둘러싸고 있다.
바라키쉬(마리브 댐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
오늘날에는 남아 있는 도시 성벽만을 볼 수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사막화되어 황폐하다. 성에는 57개의 망루와 2개의 문이 있었다. 미네안 글자가 새겨진 오래된 돌은 도시 성벽을 보수하는 데 사용되었다. 1960년 이후로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황폐화되었다. 사나에서 동쪽으로 120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다.
바라키쉬의 성벽
마인 왕국의 두 번째 수도인 카르나우(Qarnaw)는 바라키쉬에서 낙타로 2-3시간 걸리는 곳에 위치해있다. 바라키쉬보다 2-3년 후인 기원전 4세기경에 지어졌다. 수많은 비문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돌로 쌓은 성벽을 보면 그 때의 화려했던 도시를 짐작케 한다.
카르나우
마인 왕국은 무역을 매우 중시하는 공동체로 약 2개월이 걸리는 남부 아라비아로부터 이집트와 지중해로 가는 무역로를 독점하였으며 안정적인 무역과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북서 아라비아 사막의 오아시스인 데단(Dedan)을 식민지화 하였다. 데단은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 북부의 알울라(Al Ula)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잘 알려진 왕국이었다.이집트의 여러 사원에서 필요한, 그리고 로마 제국에서 주문한 왕국산 유향, 향료 등이 수출되었다. 그러나 이 무역로를 독점하기 위한 분쟁이 사바와 마인 왕국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졌다. 마인 왕국도 드디어 사바 왕국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 기원전 2세기 말에 함락되었다.
마인왕국의 수도였던 바라키쉬
3. 카타반 왕국
카타반 앙국은기원전 8세기 경에 생긴 고대 왕국으로 바이한(Baihan) 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사바, 남쪽으로는 아우산, 동쪽으로는 하드라마우트 왕국과 닿아있다. 오래전부터 마인 왕국과 동맹을 맺어 상업을 주도해왔다.
바이한 계곡
기원전 5세기경사바 왕국의 힘이 약해지자, 카타반 앙국은 주변국들과의 동맹에서 뻐져 나와독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관개용 댐과 수로를 건설하면서 체계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지었으며 바이한 계곡에서 뻗어나간 수로는 25킬로미터에 달했다.
인센스로드의 요충지인 카타반 왕국은 향료무역으로 크게 번창하였으며 아프리카, 인도 등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홍해로 연결되는 예멘 해안의 많은 지역을 차지하였다. 카타반 왕국의 수도인 팀나(Timna), 혹은 탐나(Tamna)는 마리브 다음의 대도시로 커졌다.가장 크게 번성했던 기원전 3세기에 카타반 왕국은 무역과 관련된 법, 규정, 벌칙 등을 제정하기도 했다.
카타반 왕국의 지도, 그리고 왕국의 수도인 팀나의 성벽과 성문이 그려진 스케치
팀나의 현재 이름은 하자르쿨란(Hajar Kuhlan)이며, 마리브에서 동남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바위산 위에 있다. 팀나는 인센스로드의 허브로 지중해와 팔레스타인의 가자, 그리고 페트라까지 카라반으로 연결되었다. 바이한 계곡에서 큰 도시로 성장한 팀나는 마인, 사바, 하드라마우트 왕국을 연결하는 무역 요충지에 있었으며 카타반 왕국은 무역대상들을 보호하는 대가로 세금을 걷었다.
하자르 산
카타반 왕국에는인센스 로드의 요충지였다.해발 380미터 높이의 마블라카(Mablaqah) 산과 바이한 계곡을 돌로 연결한 산악 도로는 향료와 몰약을 싣고 가는 대상들의 경유지였으며 만남의 장소였다.길이 약 4.8킬로미터, 폭 3.5에서 4.5미터의 마블라카(Mablaqah) 산악도로는아직도팀나에서 남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하자르 빈 하미드(Hajar Bin Hamid) 마을에그 흔적을 남겼다.
카라반 행렬
이 시기에는 아라비아 남서부의 왕국들 사이에서 동맹과 적대 관계가 수시로 바뀌는 양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드디어 카타반 왕국도 서기 150년 새롭게 등장하는 하드라마우트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4. 아우산 왕국
아우산(Ausan 혹은 Awsan) 왕국은 기원전 8세기부터 유향로드를 둘러싸고 경합을 벌였던 6개 왕국 중의 하나로 카타반 왕국의 남동쪽에 위치한 소국이었다. 왕국의 수도인 하자르 야히르(Hajar Yahirr)는 와디 마르카(Wadi Markha)의 입구에 위치하였다.
아우산 왕국의 수도인 하자르 야히르의 지도
당시의 와디 마르카는 비옥한 토지로 봄과 여름에는 풍부한 물로 농업이 발전하였으며 아직도 수로와 둑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1세기경부터는 가뭄으로 샘물이 사라지면서 농경지는 황폐화되었으며 인구는 급감하였다.)
와디 마르카
벽으로 둘러싸인 수도의 면적은 약 16만 평방미터나 되었으며,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큰 규모였다. 수도는 흙벽돌집 주거단지로 둘러 싼 궁전과 사원을 갖추었으며 그 안에는 시장과 낙타대상 숙소들도 있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아우산 왕국의 수도, 하자르 야히르
기원전 8세기에 부흥했던 왕국으로 북쪽으로는 카타반 왕국의 땅과 해안 지역을 지배하였고 해상 무역을 가능케 했으며 아덴을 중요한 항구로 만들었다. 또한 아프리카와의 무역을 하면서 그 지역을 식민지화했다.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물품들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까지 수출되었다.
기원전 7세기경 아우산 왕국은 아덴을 무역항으로 처음 사용하였다. 해발 300미터의 화산 분화구로 이루어진 만은 항상 바다와 파도로부터 보호받는 천혜의 자연 항구로 자리잡았으며 계절풍에 따라 항해하는 상선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출발점이었다. 아덴은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를 잇는 매우 중요한 무역항으로 발전하였으며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자연적인 항구중 하나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아덴항
지금의 아덴 항구 모습
가장 작은 왕국이었던 아우산은 사바 왕국과의 분쟁은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7세기에 당시의 사바 왕인 카리빌(Karibil)은 수차례의 공격을 통해 아우산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켰으며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아덴을 흡수하였다. 이로써 아우산 왕국은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까지 고대 왕국들 중 가장 짧은 200여년을 지속하고는 사라졌다.
사바왕국의 카리빌왕이 아우산 왕국을 공격할 당시의 지도 (기원전 685년경)
5. 하드라마우트 왕국
하드라마우트(Hadramawt 혹은 Hadramout) 왕국은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존재하였으며, 주변왕국들과 공존하면서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 남았다. 남부 아라비아의 동쪽, 지금의 예멘 동남부와 오만 지역을 차지한 하드라마우트 왕국은 320킬로미터에 이르는 남쪽 해안과 동서로 뻗은 협곡인 와디 하드라마우트로 되어 있다. 고대의 이곳은 토양이 비옥하고 규칙적인 강우를 동반하는 인도양 몬순의 영향으로 농업에 알맞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며, 언어·민속·종교 등 여러 면에 있어서 고유하고 강한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하드라마우트 왕국의 지도
하드라마우트라는 이름은 최초로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실제 뜻은 “우리들 사이의 죽음”이며, 또한 와디 혹은 카라반 루트를 따라 형성된 근거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이름만으로도 그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음을 암시한다.
북동부 내륙에 위치한 하드라마우트 계곡은 하천의 침식작용에 의해 깊이 팬 석회암 언덕을 이루면서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160킬로미터의 험준한 협곡을 만들었다. 이 계곡은 아덴만에서 마실라 계곡과 오만 국경까지를 포함하며 대규모 와디 지형이 있어 농업이 발달되었다.
와디 하드라마우트
하드라마우트 왕국은 유향나무가 자라는 동쪽의 도파르(Dhofar) 지역을 소유하게 되면서 엄청난 경제적인 부를 획득하였으며 기원전 4세기에는 대상 무역로를 지배하고 있던 마인 왕국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인센스 로드를 따라 하드라마우트 내의 와디와 사막에도 도시들이 생겨났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물이 점차 말라가면서 한정된 와디지역에서만 농사를 지었으며, 계곡의 낮은 지역에서는 양과 염소를 이동하면 키우는 가축업이 발달하였다.
도파르
기원전 1세기에 왕국은 자파르(Zufar)와 마흐라(Mahra)에서 생산된 유향을 왕국의 수도인 샤브와(Shabwah)까지 유향을 바다를 통해 운반하기 위하여 카나(Qana) 항구, 지금의 비르 알리(Bir Ali)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리하여 1세기 중반에는 해상무역이 카라반 무역을 앞지르게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왕국은 단일 언어와 종교, 문화적으로 통합되었다 번영을 구가했다. 수세기 동안 다른 왕국들과 리아벌 전을 벌였으며, 기원전 1세기 말에는 힘야르 왕국이 침공하였으나 격퇴시켰다.
하드라마우트 왕국의 수도인 샤브와
비르 알리 항구. 하드라마우트 왕국 당시의 이 항구 이름은 카나(Qana)였다.
샤브와는 카라반 대상들에게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남부 아라비아 각처에서 거둬들인 향료는 낙타에 실려 유일하게 개방된 사브와로 운송되었다. 밀수 행위 그리고 낙타 대상들이 다른 길로 가는 것은 범죄 행위였으며 사형에 처해지는 죄로 다스렸다. 세금 형태의 십일조는 무게가 아닌 양으로 책정되었으며 하드라마우트 왕국이 믿고 있는 위대한 신 사비스(Sabis)를 위해 성직자에게 바쳐졌다. 샤브와는 60개의 사원을 품고 있는 당시에는 가장 큰 성벽 마을이었다.
샤브와의 유적지
하드라마우트 왕국의 중심도시 중의 하나로 코카반 산자락 분지에 위치하고 있는 쉬밤(Shibam)은 이색적인 성곽도시다. 왕국이 번성할 때 동서의 교역품이 인도양의 무칼라를 통해 샤브와, 쉬밤 또는 타림(Tarim)으로 운송되었다. 400미터 높이의 코카반 산에서 내려다 보는 쉬밤의 전경은 일품이다.
쉬밤의 전경
현재 쉬밤의 건축물은 옛날 하드라마우트 왕국의 것은 아니다. 갈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8층 이상의 고층건물은 16세기에 만들어졌다. 아라비아 반도의 가장 큰 규모의 계곡에 위치한 쉬밤은 홍수에 자주 시달렸기 때문에 높은 빌딩 형식의 전통가옥이 탄생했다. 이 가옥들은 6-10층 높이로 구성되었으며 1층은 현관 및 축사, 2층은 식량창고, 3층부터 가족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쉬밤은 '모래 위의 맨하탄', 또는 '세계 최초의 마천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것은 모래 위에 흰색의 고층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1984년 쉬밤을 문화유산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쉬밤은 기원후 3세기경 힘야르 왕국의 침입으로 샤브와가 파괴되면서 보다 번성하게 되었다.
쉬밤, 모래 위의 맨하탄
하드라마우트의 실제 뜻은 “우리들 사이의 죽음”이라고 한다. 기원전 3세기에 빈라덴 가문의 조상인 유목민 킨다(Kinda) 부족이 와디 도안(Wadi Doan)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사우디 최대의 건설회사의 설립자이며 오사마의 부친인 모하메드 빈라덴이 1908년에 태어났으며, 그가 거주했던 2층짜리 흙 벽돌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이 곳은 산악과 사막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땅으로, 주민들은 주로 농업과 무역에 종사하였으나 살기가 어려워 사우디 아라비아로 이주해 성공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30년에 제다로 이주한 빈라덴 가문은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와디 도안
유향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던 하드라마우트는 2세기 중반에 힘이 약해지면서 카타반 왕국의 종속이 되었다. 이 시기에 하드라마우트 왕국은 계속적으로 힘야르와 사바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심지어 사바 왕국은 225년에는 수도인 샤브와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또한 악숨 왕국은 내정 간섭을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서해안에서부터 힘야르의 수도인 자파르(Zafar)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하드라마우트 왕국은 300년에 힘야르의 왕에 의해 정복당하고 흡수되었다.
6. 힘야르왕국
건국 당시 힘야르 족은 사바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기원전 115년 페르시아 제국의 아르사케스(Arsaces) 왕조에의해독립하였다. 힘야르 왕국은 2세기경 공존관계에 있던 사바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수도를 마리브(Marib)에서 자파르(Zafar)로 옮겼다. 이후 남서부 아라비아 일대를 통일하면서 인도양과 홍해의 해상무역을 독점하였으며, 유향과 몰약 등의 교역을 통해번영하였다.
유대 왕국 힘야르의 지도
해안지방과 고지대에 본거지를 둔 힘야르 왕국의 수도 자파르는 아라비아 남부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자파르는 사나에서 남서쪽으로 130킬로미터 떨어진 2,800미터의 고지에 위치한 도시로 5개의 왕궁과 고급 주거시설이 있었으며, 특히 3세기부터는 지중해와 동아프리카를 오가는 교역상들로 북적거리하는 국제 도시가 되었다. 서기 70년 로마 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함에 따라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넘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함야르 왕국의 수도인 자파르의 한 마을
힘야르 왕국은 유향과 몰약을 수출함으로써 오랫동안 동아프리카와 지중해 세계에 관계를 맺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를 가져다 로마 제국에 팔았으며, 함리야 왕들은 로마제국과 돈독한 친구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와인, 가축, 섬유, 고기, 생선, 소스 등을 수입하여 국제 무역을 발전시켰다. 힘야르의 상선들은 동아프리카 해안을 정기적으로 운항했으며, 이 나라들에게 문화, 종교,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왕국은 3세기부터 부족간의 내부 분쟁으로 틈이가기 시작했으며, 서기 340년에는 이디오피아의 악숨(Aksum) 왕국이 최초로 침공한 적도 있었했다. 4세기경에는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다수의 기독교인과 유대인로 뒤섞인 왕국이 되었다. 4세기 중반 경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개종하면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찾아 들었으나, 힘야르 왕국은 선교사들을 살해하는 등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했다.
교회가 있는 도시가 표시된 힘야르 왕국의 지도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던 그 시대에, 힘야르는 그리스도교의 비잔티움 제국과 조로아스트리아교의 페르시아 왕국사이에 놓여져 있었다. 양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위한 중립을 지켜야 했으며, 그 방법으로 유대교를 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드디어 5세기에 왕은 개종하면서 유대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유적에서 발견된 왕관을 쓴 왕의 조각상, 그리고 테플린을 들고 있는 힘야르 왕국의 유대인
왕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호전적인 왕에 반대하는 내부 부족간 싸움으로 힘야르 왕국은 불안정해졌다. 마찬가지로 비잔틴 황제 역시 유향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힘야르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히자즈(Hijaz) 북쪽의 나베테이안 (Nabetaean)이 유향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하였으며, 로마는 이집트, 시리아, 히자즈 북부를 점령하자 마자 해상로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부를 가져다 주었던 유향로의 변경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약화의 길을 걸었다. 더구나 450-451년에 마리브댐이 대홍수로 붕괴되면서 왕국은 쇠락의 길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힘야르 왕국은 종교 분쟁으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되었다. 518년에 왕좌를 차지한 힘야르 왕국의 마지막 왕 두 알누와스(Dhu Al-Nuways)는 나즈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이 대학살은 주변의 그리스도 왕국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결국 525년에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도움을 받은 홍해 건너편의 그리스도 왕국인 악숨에 의해 멸망되었다.
악숨왕국이 지배할 당시의 함야르 왕국
서기 523년에서 525년까지 함리야와 악숨 왕국간의 전쟁으로 자파르는 황폐화되었으며 수도는 사나로 옮겨졌다. 이어 고원 지대에 살던 사람들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성기때의 자파르의 면적은 120헥타 규모였으며, 마리브 다음의 두 번째로 큰 유적지로 기록된다. 가까운 마을로는 북서 방향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야림(Yarim)이 있다. 575년에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영토가 되었으며, 곧 이어 아라비아 반도에 불어닥친 이슬람에 의해 쇠퇴되었다. 힘야르 왕국의 소멸과 이슬람의 등장 이후 자파르는 점차 사라져갔다. (끝)
이집트 콥틱 청년들이 부활절 예배에서 기도문을 낭송하고 있다. 콥틱 교회에는 유독 성화가 많다. ⓒ노석조_Hanging Church, Cairo
이집트엔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가 대표적 종교다. 공식적으로 국민의 90%는 이슬람 교도인 무슬림이고, 10%정도를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10%라고는 하지만 실제 기독교인 수는 1000만명을 웃돈다고 한다. 이집트 전체 인구는 8천만이다. 때문에 이집트를 이해하는데 있어 이집트기독교, 즉 콥틱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에서 기독교는 2천년 동안 뿌리 내려 왔으며 이슬람 들어 온 7세기 이후로는 14세기 동안 이슬람과 공존해 왔다. 쉽게 눈에 띠는 건축물만 봐도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 양식이 구분되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집트 사람들의 생활 양식, 언어 표현, 교육방법 등 또한 종교에 따라 사뭇 다르다. 공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이집트를 비롯해 아랍 국가들을 공부할 때 으레 이슬람만 알면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필자는 보다 공정한 시각으로 중동을 바라 보기 위해 우선 '이집트 기독교, 콥틱'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놓고자 한다.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고대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인들이 이천년 전부터 믿어 온 콥틱기독교를 들여다 보는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아직 한국에는 콥틱에 관한 책이 없다. 교회 및 선교 관련 된 사람들이 논문 위주로 외국 서적을 일부 번역한 요약본이 전부다. 필자 또한 콥틱에 관해 부족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열의를 품고 시도하는 바이다.
교회 예배당 앞에 십자가 문양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등불(상드리제라고 해야 하나?;;)과 예수 및 열두제자의 성화가 있었다. 성화 테두리의문자는 이집트 콥틱어인데 7세기 이슬람 침략후 10세기 무렵 사라졌다. 콥틱 예배를 드릴 때 그리고 수도원에서 사용하며 명맥을 이어나가고있지만 일상에서는 이집트기독교인 모두 아랍어를 모국어로서 사용한다. 위 사진의 가운데가 예수이며 12명 중 사진에 안 보이는 6명은좌측편에 같은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노석조_Hanging Church, Cairo
◇콥틱(Coptic orthodox Egyptian Church)이란.
콥틱 이집트 정교회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용어 설명이 우선 필요하다. 콥틱Coptic의 콥트Copt란 말은 아랍무슬림들이 641년 이집트를 침략하면서 이집트를 지칭하며 부르던 Qibt킵트 란 말에서 유래한다. Qibt라고 부른 이유는 이집트인들은 그리스어로 이집트를 지칭하는 Aigyptios를 축약해 Qibt라고 부르며 사용했기 때문이다. 7세기 아랍무슬림들이 이집트를 침략할 때 이집트인들은 공식적으로 기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Qibt란 말은 당시엔 기독교인인 이집트인 민족 자체를 칭하는 용어 였다. 하지만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집트 기독교인 중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집트인 사이에 종교적 분립이 생긴 것이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으로 말이다.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면서 Qibt란 말은 어느새 이집트인들 중에서 기독교인들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용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콥트라 함은 이집트의 정통 기독교인을 말하며, 이집트의 독자적인 정교회(orthodox)를 의미하게 됐다.
◇어떻게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해 졌나.
콥틱 정교회에 따르면 이집트에 기독교가 정식으로 전해지게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마가Mark에 의해서라고 한다. 기원후61년 무렵 마가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알렉산드리아에는 성 마가 교회가 존재하며, 이집트 콥틱 정교회의 초대 교황은 마가로 돼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유대인들이 다수 알렉산드리아에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걔중 유대인 구두 수선공이 마가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됐으며 이를 시작으로 전파가 진행됐다고 한다.
이집트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해지고 부흥하게 된 이유로 여러 가지 중 Holy Family Tradition를 꼽기도 한다. 즉 성경 마태복음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 폭군이던 헤롯왕을 피해 아기예수와 요셉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가 이집트에 왔는데, 그 Holy Family가 이집트에 머물었던 흔적이 이집트에 기독교 전파의 토양을 만들었다는 것. 그래서 추정상 4~7년 동안 이집트에 머문 아기예수 가족과 발자취를 기리고 축복하는 의미에서 매년 관련 행사와 예배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추후 Holy Family Tradition에 대해 소개 하겠음)
부활절 예배, 대표자가 나와 성경을 대독하고 있다. 예배 용어나 정해진 기도문은 콥틱어로 하지만 성경은 아랍어로 되어 있다. 콥틱 기독교인도 아랍어를 모국어로 오늘날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석조_Hanging Church, Cairo
◇녹록치 않았던 콥틱.
200년부터 300년 무렵까지 여러 차례 이집트 콥틱 교회는 로마 황제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박해로 인해 더러는 기독교를 포기하기 했지만 콥틱 교회는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그 와중에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콥틱 교회는 성장세를 탔다. 오랜 기간 박해를 받은 초대 콥틱교회에는 그리하여 여러 Saint와 Saint관련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박해로 순교한 인물 그리고 관련 이야기를 그린 성화를 콥틱 교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이유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많은 이집트 기독교인들의 이름은 미나, 비쇼이 등과 같은 전해오는 Saint의 이름으로 지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와 친한 이집트 기독교인 친구 이름도 '미나'다.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교회는 서방과 동방으로 나뉜다. 콥틱교회는 동방교회쪽에 속하는데 서방교회의 압력에 시달렸다. 이러한 교회의 분열은 결국 교회의 힘을 약화시켰고 많은 신자들을 수도원에 들어가 침거하게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는 아랍에서 밀고 들어 오는 이슬람 세력을 쉽게 받아들이는 형국을 야기시켰다. 동방교회에 시달리고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슬람군을 받아 들인 것이다. 이집트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처럼 교회간 분열로 이슬람세력은 이집트 땅에 무혈입성시킨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슬람은 이슬람대로 타국의 분열된 시기와 정세를 이용해 쉽게 정복한 것이다. 이 때가 바로 638년이다. 이슬람은 이집트를 정복하게 되면서 기독교인인 이집트인들에게 서방교회로부터 보호해주는 대가로서 무거운 세금을 물었다. 이에 대항하는 반란이 있었지만 실패하고 전부 죽임을 당했다. 무거운 세금을 피하고자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집트 인구90%가 무슬림이 된 시발점인 것이다. <글: blog.daum.net/hswis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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