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 105
내 발에 등과 내 길에 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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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편 말씀 (시119:105)-찰스 브리지스 지음 서문강 역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은 어둔 밤에 이동할 때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출13:21,22). 하나님께서는 불기둥을 통하여 그들의 길을 제시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간섭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민9:15-23)
이 본문은 길이 어둡고 험할 때 말씀을 자기의 등과 빛으로 삼는 자의 행로를 지시합니다. 그렇습니다. 등이 꺼지면 흑암이 왕 노릇하듯이, 말씀을 가르치시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바로 그런 상태로 들어갑니다. 말씀을 읽을 때에, 그 말씀 속에서 우리 마음의 총명과 체험과 섭리로 주어진 우리의 길을 위한 빛을 얻지 못하면 결코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 쉬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 말씀을 통하여 빛을 받고 그 빛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려 하였다면, 우리가 가는 길이 복잡하다고 그렇게 자주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적 행보 속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우리 나아갈 길을 결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제넘게 그 일을 게을리 하면 옛적 이스라엘 같이 대번에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민14:44-45)
하지만 우리가 영적 은혜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참된 빛의 인도를 받고 있는지 그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우리 현안의 필요에 맞게 적용시키는 것 같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말씀을 등불' 삼은 일인지, 아니면 자기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자로부터 온 속임수가 아닌지의 여부를 어떻게 결정해야 합니까? 또 '내 양심을 압박하는 위협적인 생각' 이 '형제를 참소하는 마귀'의 음성인지 나를 하늘을 향해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경고인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먼저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뚜렷한 죄에 빠져 살고 있거나 정해진 나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내 심령이 방심하거나 내 행보가 견실하지 못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내게 맞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마음을 흥분시켜 약간의 기쁨을 유발한다 하여도 그 말씀을 내게 바로 적용시키는 일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이런 경우 "하나님의 말씀의 등"은 위로의 빛보다는 죄를 깨닫게 하는 각성의 빛을 쏠 것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와 장소에서 위로를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대로 우리를 다루실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 침륜에 바지는 백성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징계를 하신다는 언약의 조항대로 하신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89:30-32)
그러나 자기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는 경우에 주시는 격려의 말씀은 나의 나아갈 길을 지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등불"로 받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감정의 상태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회복하고 인도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분명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사57:18)
그러니 우리는 약속의 말씀의 조항들과 그 성격을 유심히 관찰해야 합니다.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그러니 자기 마음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겸손한 마음을 갖기 시작하거든 자연스럽게 자비하시고 항상 깨어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 속에서 주님을 보는 독특하고 체험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면,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미쁘심과 사랑을 신뢰할 용기를 더 얻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분명 위로부터 온 빛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약속의 말씀의 의도와 내가 정한 목표가 서로 맞아 들어간다 합시다. 그래서 그 약속의 말씀이 지금 내가 주님 앞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도리를 위해 힘을 내도록 도전하고 용기를 준다 합시다. 그 때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으로 작용하여 내 길을 인도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호수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수1:5)라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가 그 말씀을 받을 때에 '현안의 필요를 따라 맞추어 주시겠다.'는 말로 곡해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약속이 역시 교회에도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분명합니다. 그 말씀은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질 세상적이며 감각적인 것들에 지나친 집착을 말라고 경계함과 더불어 용기를 내어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의도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더 나아가, 말씀이 이끌어내는 실질적인 효과는 우리로 하여금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적 상상이나 근거 없는 짐작 등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거짓된 망상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빛으로 착각하지 않게 합니다.
로마로 가는 바다의 여정에서 만난 난국에서 바울 사도는 '배에 탄 사람들이 하나도 죽지 않고 다 살아남을 것이라.'는 확고한 주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행27:24). 그 약속을 의지하여 사도는 안전을 위해 모든 방도들을 활용했고 그 약속의 결과가 드러났습니다(행27:31).
히스기야는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다가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는 하나님의 확약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도 히스기야에게 실천적인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약속을 받은 히스기야가 자기의 병 낫기를 위하여 정하여 주신 방편을 주밀하게 활용했다는 말입니다.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사38:5,21)
에스라와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약속의 보장에 의지하여 "금식하며 그들의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응답 받았습니다.
"그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스8:21-23)
이상의 예와 성경에 나오는 여러 경우에 사람들 속에서 근면과 단순함과 기도의 정신을 끌어내어 능력을 드러냄으로 그 적용된 말씀이 하나님의 인도임을 드러내었습니다. 만약 신적인 기원이 아닌 다른 줄기에서 온 안전의 확신이었다면 그것은 게으름과 부주의함과 주제넘음을 도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어둡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말씀이 '내 발의 등이 되고 내 길에 빛'이 되어 '나의 발을 평안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주제넘는 생각에 빠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본질에서 비롯도니 안전에 대한 믿음이 나태와 부주의와 헛된 기대를 낳는 점을 감안한다면, 흑암과 곤경 속에서 영혼을 소생케 하시는 말씀이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등불이라는 확신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일한 기준을 말씀의 위협적인 요점들에 적용하여 보겠습니다. 깨어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는 중에서 만난 위협들은 즉시 영혼의 큰 원수인 마귀의 암시로 생각해야 합니다. 원수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낙담하게 하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의뢰하여 자기도취에 빠져 있을 때 경고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주목하며 지체하지 말고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경고의 말씀을 대항하여 자기의 불안정한 상태를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그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깊이 탐구하여' 더 깨어져서 더 겸손히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6:23) 그래서 주의 말씀을 '하늘을 향하여 나아가는 나의 행보 하나 하나를 지도하는 등불"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마저 한 길로 가지 못하고 여러 갈래 길로 잘못 접어들었던 일은 어찌된 영문이냐고 묻고 싶겠지요? 말씀은 선명한 빛을 발하는데 말씀의 빛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여전히 어둠이 존재합니다. 영적으로 전혀 오점이 없는 완전한 분별력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류에 빠질 가능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말씀의 빛은 호기심을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우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흠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목회의 직무가 첨가됩니다. 목회직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고 세우기 위하여 주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규례입니다(말2:7 ; 엡4:11-14) 그 규례의 목적은 목사로 하여금 성도들을 주관하게 하려 함이 아니라 말씀의 빛으로 판단하여 인도하게 하려 함입니다(고후1:24 ; 벧전5:3 ; 고후 13:10 ; 엡4:13 ; 살전3:10)
그러니 이 규례를 존중하는 것이 빛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규례를 무시하면 자기 고집대로 하면 미숙한 판단과 모든 악에 노출될 것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
주여, 저의 매일의 행보는 하늘을 향하든지 지옥을 향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오, 주님의 말씀이 가르치시는 길에서 벗어나는 악에서 구하소서. 저로 하여금 믿음과 신중함과 청결함을 위하여 부단히 연습하게 하시되, 주님 말씀의 빛을 활용하는 가운데서 그리하게 하소서.
시편 119편 말씀 (시119:107)-찰스 브리지스 지음 서문강 역
시편 119:107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이 거룩한 성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려고 애를 쓰던 그 시절은 매우 깊은 고난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탄원에 반드시 응답하실 거라는 담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거리를 하나님의 귀에 쏟아 놓도록 허락받은 것은 정말 큰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시어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아니, 하나님께서 친히 환난을 부여하셨습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햄하신 까닭이니이다."(시39:9) 그보다 더 유념할 일은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사63:9)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였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하늘에 계신 우리의 '친구'되시는 분께 우리의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우리를 그렇게까지 위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 우리의 하늘 친구 되신 분께 하듯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환난의 때에 모든 종류의 궁핍과 슬픔과 무거운 짐들을 다 싸가지고 그분께 가면 특별한 위로를 얻습니다. 환난의 고통 중에서도 안위하며 우리의 부족과 슬픔과 모든 무거운 짐을 한 데 모아 그분게 드립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 중에 받은 위로는 세상에 속한 이들의 경우와 아주 큰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매우 깊은 고난의 때에 영혼이 '사망에 가까운 것'을 알지만 피난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근심으로 터질 것 같습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그런 '세상 근심'은 완화되지도 않고 위로를 받지도 못합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고난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7)
'영적인 성전'을 짓는데 쓰임 받은 돌들 중에 망치로 다듬지 않은 돌이 없습니다. 다듬지 않은 돌들은 성전에서 들어갈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정금도 반드시 용광로에서 제련을 거칩니다. 포도나무도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반드시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2)
성도들 각자가 받는 연단의 분량은 무한하게 다양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그것을 제어하려면 많은 고난이 자주 주어져야 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그러나 환난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부과할 연단의 분량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욥34:23) 그분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시103:13,14).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자식을 징계하는 육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시는 아버지십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12:10)
그리고 우리가 환난 받을 때에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마음의 고통이 줄어듭니다. 곧 우리가 받는 환난이 어떠해도 우리의 됨됨이에 비하면 무한히 가벼운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스9:13) 또 우리가 영원히 받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리 큰 고난도 "가볍고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고난을 참아 견딤으로 주어지는 위로는 고통이 제거됨으로 누리게 될 위안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힙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8-10) 결국 받는 연단의 시련을 인하여 고통의 무게보다 훨씬 '더 무거운 위로'의 열매를 받게 됩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시8:15,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우리의 받는 환난의 시련이 고난 받으신 주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니 크게 높여 자랑할 거리가 아닌가요?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우리는 어느 날 환난의 시련들 속에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신 사랑의 사자와 같은 '사령장'이 들어 있는 것을 반드시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주신 "결말"을 아주 확실하게 받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심과 자비하심이 너무 충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말을 보게된다는 말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1)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욥42:10-12)
지금 당장 환난 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매우 큰 고난이 지금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군사는 전쟁이 멈춘 시간에도 자기의 무기를 빛나게 닦습니다. 그와 같이 믿음의 싸움을 위하여 우리의 무장을 새롭게 정비하는 것은 의무이자 지혜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왕상20:11) 왜냐하면 "악인들은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기"때문입니다(시55:19).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계속 변화하면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할 필요'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야 준비되지 않은 정신에 빠져 거룩한 십자가의 복락을 상실하는 위험에 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 중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에브라임의 이름을 가졌습니까!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창41:52) 때로 그들은 현재의 좋은 것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환난이 와서 그 좋은 것들을 상실할까봐 무서워하는데, 아직 체험이 없는 미숙한 신앙고백자들이 환난이 올까 겁내는것보다 더 무서워하기도 합니다.
큰 번영은 큰 환난만큼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철저한 신앙고백으로 다른 이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또 자신들도 만족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역경의 날을 맞으면 그 힘이 작고 미약함'을 드러내고 맙니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 욘4:5-9참조) 그리하여 연단의 학교에서 거의 배운 적이 없는 사람 같이 흔들리고 당황하고 부서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찌르는 채찍으로 정신을 차리게 하여 지방같이 둔한 마음을 갖지 않고 낙심하지 않게 하시는 은혜를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징계의 채찍이 법적으로 벌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사랑하시어 주시는 것임을 알면 그 아픔을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지는 않았습니까?(히12:5)
"주여,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겸손히 엎드려 주의 깊게 들으려는 마음의 자세로 주의 거룩한 십자가의 복된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주의 손의 치심으로 내가 낙심하지 않게 하소서."(시39:10 ; 38:1-3)
그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동하시어 조급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범하는 죄를 짓지 않게 우리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 겸손함과 원망 없는 기꺼운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를 치시는 막대기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도 훈계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믿음을 동반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치시는 손이 가하는 고통과 약속하신 긍휼의 은혜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동시에 느끼게 할 것입니다(미7:8,9).
심연의 고통에 처함 우리를 지탱해주는 최고의 방편은, "주의 말씀대로 살아나게 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연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누가 하나님의 징계 중 작은 부분이라도 잘못된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어떤 의미입니까?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이상의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드리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사소서."(시71:20,21) 그러한 환난의 시련처럼 나중에 돌아보며 주님의 위로에 감사할 것이 무엇입니까? 설령 육체는 고통스러웠어도 우리의 심령을 부수고 의지를 꺾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는 순전함을 강화시켜주는 환난의 시련 같은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시편 119편 말씀 (시119:109,110)-찰스 브리지스 지음 서문강 역
시편 119:109,110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니."
건강이 악화되거나 어떠한 위험에 직면하면, 본문의 말씀을 특별하게 주목하게 됩니다(삿12:3과 욥13:4를 비교 참조). 다윗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공생에 초기부터 줄곧 원수의 공공연한 위협과 간교한 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삼상19:5 ; 28:21 ; 삼상 18:10,11 ; 19:9,10). 그는 사냥 당하고 있는 "산의 메추라기"와도 같았고(삼상26;20), 자신을 잡으려고 원수들이 쳐놓은 올무에 걸릴 뻔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삼상18:1 ; 19:11-17). 그일라 사람들과 십 사람들이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에게 가르쳐 주어 죽을 뻔하기도 하였습니다(삼상23:11,12,19 ; 26:1) 또한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고(삼상20:3), 또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라."고 말하고픈 유혹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삼상27:1). 나중에 다윗은 자신의 왕좌와 목숨을 훔치려는 아들의 손을 피해야만 했습니다(삼하15:13,14 ; 17:1-3).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어떤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법도에 밀착하여 충성하는 다윗의 마음을 흔들어 대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시119:87)
이 땅에 오셨던 우리 주님의 생애는 어떠하였습니까? 원수들의 증오와 갖은 모략, 이를 위한 그들의 결속 등으로 주님의 생명은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9눅23:12) 그러나 광포한 사자와 날뛰는 개와 으르렁 대는 늑대와 같은 그들에게 둘러싸여서도 주님은 마음의 평온과 고요함을 견지하고 계셨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시22:16,20,21)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은 분량에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다 이와 같은 심령의 자세를 가지기 마련입니다. 이는 결코 본성에서 나는 용기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선물이신 '능력의 성령께서 능하게 하심'으로 주님의 법도의 길에서 행하여 "악한 날에 원수를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게"하시려고 주어진 마음입니다(딤후1:7 ; 엡5:17).
자, 이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들이 겪었던 시련들 속에서 이 확신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사도 바울을 주목합니다. 그는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신다." 고 하면서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0:23,24 ; 21:13)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당도하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위험을 스스로 감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용사답게 믿음의 승리를 확신하였습니다. 그런 확신으로 자신과 함께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그를 움츠러들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진정 아무 것도 그가 등 돌리고 도망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붙잡고 있었던 원리와 그 어느 것에도 위축되지 않음이 시련의 때에 드러났습니다. 물론 본성의 마음의 힘으로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다윗이 이러한 두려움 없는 믿음의 자세로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한 것 아닙니까?
다니엘의 삶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배도를 유도하려는 은밀한 간계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함을 다시 보여줍니다. 대적 원수들이 '그를 고발할 근거를 찾으려'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덫으로 사용하여 그를 사로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단6:5) 이에 이 숭고한 믿음의 영웅은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를"올렸습니다(단6:6-10). '의롭고 좁은 길'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날까 두려워하는 것에 비하면 그의 앞에 있는 사자 굴은 두려움의 대상도 될 수 없었습니다(눅12:4,5). 그에게 있어서 천 번 죽음을 당하는 것 보다 더 나쁘게 여기고 무서워 피할 것은 죄짓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라고 그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만일 '아히도벨의 모략'을 하나님께 여쭈어 받은 '신탁의 말씀'으로 받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이용하였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여 '미련함'과 손을 잡은 것이 되고(삼하15:31 ; 16:23 ;17:14), 교회의 위대한 머리시요 보호자이신 주님께서 항상 깨어 지키시는 은혜를 받은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인 다윗의 입장은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27:3)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간계를 뒤엎으심으로 그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견고히 서게 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시76:1) 또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실 것입니다.(욥5:3 ; 고전3:19).
그러나 역경의 날은 교회에는 '위험한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12:10) 어려운 때에 견고하게 서서 하나님의 율법과 법도를 부여잡고 충격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부단히 견지하는 가운데 환난의 고통을 견뎌왔습니까?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119:51,69)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가 주리라."(계2:10) 그 때야말로 순전한 믿음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치를 발할 때입니다.
다윗이 그런 환난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는 복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구름이 모여 흑암을 이루고, 영적으로 낙심하게 하는 일들에 온통 둘러싸여 있어도 믿음은 여러분을 지키며 모든 풍성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다윗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 도우시는" 분이시며(시42:11), 우리를 인도하시고(시48:14,), 우리를 구원하시는(시68:20) 하나님 아닙니까? 다윗이 가진 이 확신이 우리의 것이 될 때까지 쉬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56:3)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을 검증하고 확고하게 세워주는 십자가와 같은 고난은
가짜 신앙고백자를 겨와 같이 날려 버릴 것입니다. 믿음의 견실한 원리가 아니고는 어느 것도 박해를 견디거나 올무를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0,2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그가 타고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왕상13:11-19)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자가를 지고 범사에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십자가로 나아가게 하는 길 아닌 다른 길에서 자기들의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두려워 할 것은 이러한 엉거주춤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분개함으로 그런 정신을 물리쳐야 마땅합니다. 그런 자세는 '하나님께 속한 향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음성입니다. 사탄은 육신적 평안의 베개를 베고 자게 해주겠으며 꽃길을 걷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가 약속하는 바로 그 길은 사망의 잠을 자게하고 기만당하고 결국 파멸을 맞는 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히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2,23)
고난의 때 일수록 우리 모두가 더욱 손에 쥐고 있어야 할 것, 곧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있는 진정한 본질은 바로 살아있는 믿음에서 나오는 참된 확신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매우 가까이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 '육체와 마음이 쇠잔해 질 때 흔들리지 않도록 만세 반석 위에 마음을 굳게 세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73:26)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 생명이 경각에 달렸고 이제 곧 몸을 떠나 나를 판단하실 재판장 앞에 서려하네."라고 외치게 될 때가 얼마나 빨리 당도할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이씅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13:35,36)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눅12:35-37)
시편 119편 말씀 사모하여 헐떡이는 사람(시119:124,125)-찰스 브리지스 지음 서문강 역
시편 119:124,125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에 대한 의식이 생기고 "주의 율례들을 배우고 누리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합시다. 그러면 그것은 주의 종이 "피곤할 정도로 사모하고, 주의 확실한 의로운 말씀을 의뢰하며 기다려 온 그 구원"이 가까움을 보여주는 전조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은 매일 두 가지 소원, 곧 "주의 인자하심대로 나에게 행하여 주시고,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쳐 주소서."라는 간구를 올립니다. 그 둘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더 깊이 의식하면 할수록 "주의 율례들"에 대해 더 강하게 집착하게 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14) 한편 "주의 율례들을 영적으로 더 배우면 배울수록" 죄의식이 더 깊어지고 겸손하게 되어 "주의 인자하심"의 필요를 더욱 크게 의식하게 됩니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렘31:19)
"주의 인자하심" 시편 기자는 아룁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특별하게 필요한 죄인이 있다면 주의 종인 제가 바로 그런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자가 의무들을 대단히 훌륭하게 감당할 때보다 가장 파리한 상태에서 간절하게 주님의 인자하심을 소원하는 신앙고백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풍성하게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자들이 명백한 허물을 보이며 섬길 때나, '세상에 악인들이 내 놓고 범죄하는 경우'보다, 이 시편 기자 다윗이 죄를 범할 때에 죄성의 도발적 성격이 훨씬 더 크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장 친근한 자세를 보이는 순간마저 자기 마음의 동기와 생각과 정서를 정밀하게 탐사하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조차도 주님께서 베푸신 모든 자비와 빛과 지식을 망가지게 하는 죄의 오염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동료 죄인들과 비교할 때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딤전1:15)라고 진심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근거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뿐임을 알았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무엇을 한다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인자하심의 세계'가 필요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의 세계가 요청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감히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소서."라고 아뢰는 것입니다.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우리는 죄인일 뿐 아니라 무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지 않다니요!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얻기까지 많이 시간을 들여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니요! "주의 인자하심"과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복락이 함께 작용하여 단번에 복음의 샘으로 우리를 끌어 들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과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인도하십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주의 가르치심"은 성령님의 직무에 해당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주의 인자하심"이 첫번째 복락입니다. 중요성 뿐 아니라 순서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구주 예수님을 구주로 아는 일이 예수님을 나의 선생님으로 신뢰하는 일 보다 앞서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소서."라는 간구를 하나님이 받으셨다 확신하면 간구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면 우리는 지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119:32) 우리가 잊지 말 것은, 우리가 저주에서 구속(redemption)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말은 '율법을 섬김'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저주에서 구속되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2:19)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하셨도다."(눅1:74,75) 하나님의 '종'이 된 관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겠다는 서약이 함축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시119:94)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시143:12)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다면" 주의 집에 속한 우리는 "주께서 그 언약을 가르쳐 주시는 인자하심"의 은혜를 간구해야 마땅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시119:64) 주님의 종된 사람이 그 뜻을 행하기 위하여 언약을 아는 일은 정말 중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119:33,3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86:11)
"나의 주의 종이오니." 그러면 어떻게 내가 주의 종이 되었습니까? 나는 이전에 다른 상전을 섬기며 다른 일에 마음을 쓴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고 마음이 산란해 질 정도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저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롬6:16,20)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3:3)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로 죄의 지배와 사탄의 사슬과 세상의 결박 아래 있는 우리를 불러내시어 당신 자신께로 이끄셨습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행27:23)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그러므로 "주의 종"은 주 하나님께서 "주의 인자하심대로 행하실 것"을 확신하고 자신을 "주의 인자하심"에 맡깁니다. 아니 내가 "주의 뜻대로 구한 것" 중에 거절당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에게 '내 종'이라 하지 않으시고 '내 친구'라 부르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더 나아가 우리를 '내 형제'라 부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엿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요20:17)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2;11,12)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주여, 주께서 제게 이 위대한 은총과 은혜를 베푸시어 종 삼으셨나이다. 이제 저는 영원히 주의 것이 되었나이다. 저는 주님을 섬기는 종이 된 것이 너무나 좋아 이 영예를 빼앗기고 싶지 않나이다. 그러나 제 자신의 우둔함과, 주의 뜻을 행하여 말씀의 길로 행하는 일에 더딤을 인하여 애통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오 제게 주의 율례들을 '더 분명하고 풍성하게'가르쳐 주소서. 저로 '깨닫게하사' 주의 율례들이 가진 하늘에 속한 단맛과 거룩한 자유를 분별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더 순전한 마음으로 주의 율례들에 헌신하며 순종하리이다. 그런 중에 하늘의 성전에서 주의 얼굴을 뵈옵고 주의 종으로 더 섬기게 되리니 더 이상 그 자리를 벗어나 나가지 못하게 저를 지키소서."
시편 119편 말씀 사모하여 헐떡이는 사람(시119:127)-찰스 브리지스 지음 서문강 역
시편 119: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주의 계명들"을 조롱하고 능멸하는 것을 보면, 믿는 우리 눈에는 그 계명들이 갑절로 더 귀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주의 계명들"을 찌꺼기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나는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오직 금을 얻을 소망과 기대감에서 우상을 섬깁니다. 금을 사랑함이 천만인을 멸망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3:14,15)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금고를 여시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우리 영혼을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마음에 떠올리면 수전노가 생각납니다. 그가 보물로 여기고 마음에 두는 것은 금입니다. 쌓인 금을 헤아려 만져 보면서 얼마나 기뻐하며, 그 금을 지키는 일에 얼마나 간절합니까! 얼마나 안전하게 관리하는지, 자기에게는 생명보다 더 애착하는 금을 도둑맞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그래야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령한 수전노'여야 합니다. 자기들의 부요가 얼마나 큰지를 헤아리며, 그것을 "순금보다 더 귀하게 여겨 마음에 숨겨 두어야"합니다. 큰 약탈자 마귀의 손이 미치지 못할 곳에 숨겨 안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수전노의 금고에 있는 것 보다 그대들에게 주어진 분깃이 얼마나 훨씬 더 큰지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신령한 일들에 욕심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의 보고에 영적인 것들이 더 쌓이기를 위해서 '간절하게 탐해야'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영적인 것을 의존하여 살며 그것안에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의 폭이 더 확장되고 더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독자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전에 내가 애착하던 무가치한 대상들에서 마음을 떼어 오직 진정한 만족을 주는 것만을 사랑합니까?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세상은 잠시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그러나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 보다 더 가치가 있다 여겨 내가 붙들고 있는 주의 계명들이 존귀한 이유를 설명해주려 한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세상과 내 마음이 합세하여 나를 촐싹거리게 높여주는 척 하나, 주의 계명들은 내 실상을 드러낸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자신을 속이는 자요(롬7:9) , 죄가 있으며(약2;10), 죄의 오염으로 더러워진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주의 계명들이다. 또 그것들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요 내 영혼의 유일한 안식처다. 그래서 나는 '주의 계명들을 사랑'한다. 주의 계명들은 내가 자주 방황할 때에 건전하게 책망하며,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 분명한 길을 제시한다. '나는 주의 계명들을 살아한다.' 그 계명들이 패망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돌아서도록 제어하기 때문이다. 주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나를 향기로 받으시기' 때문이다(겔20:41;사44:5). 그러니 내가 어떻게 주의 계명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순금'이 내게 그와 같은 복락들을 제공할 수있는가? 순금이 내 상한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가? 그것이 내 상처난 심령의 고통을 어루만져 순화시켜주나? 내 운명의 병상에서 평안과 위로와 하늘의 소망을 줄 수 있나?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 무서운 시련의 때에 무엇을 못하겠으며, 무엇이 모자라겠으며, 무엇에 능하지 못하겠는가?"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의 계명들을 차갑게 대한 잘못과, 주의 계명들이 내 행실에 미친 영향력이 적은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닌 대상들에 마음을 빼앗겼던 모든 일들이 부끄럽습니다. 오, 제 마음을 다하여 습관적으로 주의 계명들을 따라 행하는 경건의 연습을 하게 하시어 이 말씁의 진리를 더 알아가게 하옵소서.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32:17)
시편 119편 말씀 사모하여 헐떡이는 사람(시119:130)-찰스 브리지스 지음 서문강 역
시편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증거들은 너무나 놀라워' 증거들의 깊은 속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저 초입을 넘어서기만 해도 우리 마음은 빛을 얻고 총명을 만납니다. 청결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금세 말씀이 새벽 빛 같이 우리 영혼에 비췹니다. 그 빛만으로도 우리 마음에서 어둠을 몰아내기에 충분할 때가 많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4:18) 실로 어둔 세상에 알려진 모든 신령한 빛은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말씀을 깊이 연구하면 마치 햇빛같이 영혼에 빛을 쏟아내어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보게 합니다. 이 말씀은 차원이 기이하게 높고 하늘의 신비를 담고 있으면서도 길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무식한 자라도 그 길을 알아 그리로 행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35:8)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비하시어 우리를 향하여 자세를 낮추신 결정적인 실례입니다.
실로 아는 것도 없고 교양도 없는 사람이 말씀을 열면 생각이 커지고 높아집니다. 그것은 사람이 본래의 영광으로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짐입니다. 본래 사람은 정신적인 면 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엡3:19와 골 3:10참조). 하늘의 빛이 가진 능력이 이렇게 놀라우니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지능이 낮은 사람이라도 하늘의 가르침을 받으면, 가장 명석하다는 철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교훈보다 더 큰 교훈에 이르게 됩니다!아니, 아주 여러 해 동안 줄기차게 성경 연구에 전념하면서도 하나님의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보다 지능은 낮지만 하늘에 속한 가르침을 받은 이가 성경이 말하는 교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헌들의 보고를 섭렵하면서도 죄인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전혀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역설은 그 비밀을 풀어 줍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3:18) 지혜를 무시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지혜를 앞세워 복음의 단순성을 대항하는 교만에 빠져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악은 행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그런 교만이 들어오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아는 지식 보다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을 가르치게 됩니다(고전2:1-4). 또 그런 교만이 배우는 자에게 들어오면 진리의 빛과 사랑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 비추는 빛이 그렇게 많은데도 우리 마음에는 한 점의 빛도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그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인간의 교만과 죄를 사랑하는 본성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19,20)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3)
빛과 어둠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에 대한 안복이 열리면 정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제어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시어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느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고후4:6). '광명을 배반하는'(욥24:13) 교만과 그 광명을 차단하는 냉담에 대항하여 얼마나 세심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영혼에 비추는 빛을 더 밝혀야 하며, 하늘에 속한 가르침을 바라고 깨어 기도하는 열심을 버리지 말고, 공적 예배를 통하여 증거되는 말씀을 듣는 일에 얼마나 진실해야 하는지요!
그러나 광신자는 말씀의 빛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의 허망한 속임수가 자기 속에 있는 빛을 꿈꿉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과 상관없이 성령님의 즉각적인 계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빛과 성령님의 빛을 분리시키는 것은 안전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성령님이 함께 움직입니다. 성령님의 빛을 말씀과 분리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한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을 읽으면 즉각적으로 성령님의 빛이 항상 비추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으로만 성령님의 빛이 나타납니다. 말씀은 성령님의 빛의 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도 성령님께서 비추는 소재입니다. 성령께서 즉각적인 빛을 비추시어 바른 도리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다 할지라도, 그 길은 필연적으로 이전에 말씀의 빛으로 지시하여 준 바로 그 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과 말씀은 하나가 되어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은 성령님의 빛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다른 등불이 필요 없고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의 등불만 있을 임마누엘의 나라에 기쁨으로 당도하기까지 그 둘이 함께 감동을 주는 일이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의 등불이 완전하게 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영원히 비칠 것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미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21:23)
그러나 독자들이여,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부어주신 빛의 분량으로 만족하지는 마십시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1) 진정 영적으로 진보한 신자는 아직도 자기 앞에 얼마나 많은 말씀이 탐험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지를 기꺼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단순성을 계발하십시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의 단순성을 계발하는 말입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어떤 깨달음을 주시더라도 기꺼이 받고 환영하며 복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믿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은 이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이 정신을 가진 자만을 위하여 하늘에 속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19:7)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25:9)
솔로몬을 보세요. 그는 큰 지혜의 마음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왕상4:29-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자기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왕상3:7). 그리고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며 오직 위로부터 오는 가르침을 구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보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겸손하지 않고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가르침의 유익이 얼마나 놀라운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학생에게는 항상 닫혀져 있는 어두운 책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 자체가 믿음을 갖지 않고 항상 의문을 제기하는 정신을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늘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지식은, 영적인 빛의 통로를 차단하여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알지 못하게 하니 복은커녕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보다 단순해 보이는 말씀이 얼마나 더욱 영광스러운지요!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10:21)
시편 119: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거룩한 소욕의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만족할만한 근거는 전혀 아닙니다. 높은 수준의 거룩에 올라간 신자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 자기가 서야할 자리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항상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사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항상 필요함을 의식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께 대한 높은 사랑을 표현한 다음에 곧장 자기에게 오시어 긍휼의 은혜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탄원하십니다. 실로 그 은혜를 받아야 그에게서 은혜를 빼앗아가려는 세상과 지옥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주는 위로를 느끼는 일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그 은혜를 구하고 믿음으로 순전하게 기다리는 자에게만 내려지는 선물입니다. 실로 이는 세상에서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모든 자원을 다 합해도 비교되지 않는 복락입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6,7)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 복락이 없이 세상의 모든 풍부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나 영혼 속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작은 자리를 내어 드릴만 하면 아무리 궁핍하여도 그 궁핍은 찬란한 궁핍입니다. 하늘에 가득하게 빛나는 별들이 태양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자기의 어둠을 물리치시고,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심을 믿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그 상태를 '애굽을 덮던 흑암'의 상태로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출10:21)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몫을 받는 것이 장엄한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처럼 우리의 제물을 받으시고, 에녹과 동행하셨던 것 같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아브라함과 교제하시던 것 같이 우리와 교제하시고, 모세에게 특권을 주시어 행하게 하신 것 같이 우리에게도 그리하게 하시며, 거룩한 사도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게 하시고, 구주 그리스도의 피로 산 은택에 참여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종들의 유업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구하던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우리의 모든 구원과 우리의 모든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시106:4,5)
그러나 참 안타깝습니다! 죄의 세력과 기만성이 우리를 생명력 없는 상태로 얼마나 자주 내던지는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이 몫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복을 누리지 못하며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지 아닌지도 알지 못한 때 안식이 있을 수 있나요?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하나님 당신의 처소로 돌아가 계시는 것"이 이상합니까?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사57:17)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5: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면 죄에 대한 예리한 각성을 주시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마음이 냉담하고 메마른 상태임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탐문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서글픈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행하는 자들을 비교하며 다시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겸손하게 인내하면서 드리는 기도는 진실성 여부를 검증받는 잠깐의 기간을 거칠 수는 있으나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30:18)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수는 없다 해도(시138:5),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시며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것을 중단하지 맙시다(시90:14).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돌아보시고 자애로우신 얼굴을 보여주는 통로는 오직 하나 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곧, 우리 마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시되 '우리 안에 있는 불의'를 보지 않으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보십니다(민23:21 ; 엡1:6 ; 골2:10).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잠깐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한 때에 응답하여 주셨다 합시다. 그러면 그 일이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행차하심"의 결과인지(시68:24), 하나님의 사랑이 더 은밀하게 드러난 결과이든지 간에(마6:6 ; 요14:21-2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어나 빛을 발해야"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얻은 그 얼굴의 광채를 세상에 비추어 여러분의 믿음의 진정성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주 하나님이시여,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너무 미약하고 차갑고 너무 희미하여 우리 마음에 끼치는 거룩한 인상이 전혀 남지 않나이다. 오직 주 하나님께서 자비와 권능으로 우리에게 계속 하감하시옵소서. 우리를 돌아보시어 사랑하시는 구주의 손과 발과 마음을 찌른 우리의 죄와 불신앙과 불순종을 기억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우리를 돌아보시며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통회하는 심령으로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어렴풋이 알기만 하여도 우리 영적인 원수들을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 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86:17) 오, 하나님 얼굴의 해와 같이 빛나는 광채가 우리 영혼에 구원을 선포할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80:19)
시편 119:133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의 형상을 본받으려는 간절한 소원에 일관성 없이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속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많은 만상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 유한 특성은 죄의 형벌에서 건짐 받는 것 못지않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열심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 뿐 아니라 자신의 성결을 위하여도 울부짖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돌이키시어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식이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기도,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까지 자신이 '가련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의식을 떨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흔히 죄의 세력과 시험의 권세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죄악이 우리를 주관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확실하게 알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밀려와 우리 생각이 그리로 기울어 시험에 빠지지 않았을지라도 우리 마음에 그 시험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고 허용하였다면, 그것이 바로 시험의 영향이 아닙니까? 죄가 우리를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것을 보여주는 표증은 의지가 실제로 그 일에 동의할 때입니다. 빛과 지식과 양심이 성결의 통로를 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가 거부하는데도 왕노릇 하는 죄의 세력은 나가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계속 존재합니다.
어찌하였든 우리 행위들의 근원을 아주 세심하고 사심없이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의지가 어디로 기울어졌는지 정확하게 판별하고, "어떤 죄악이 우리를 주관하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당황하고 갈등하기 쉬운 영혼이 "죄악이 주관하는 것"을 물리친다고 한 것이 그만 잘못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쪽으로 계속 가는 것을 막는다 하면서도 불의가 계속 마음에 인상을 끼쳐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특별한 죄를 이기겠다는 현재의 결심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그 죄를 사랑하는 마음의 습관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게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알아내어 죄를 버리고 난 다음에 죄를 항상 미워하지 않는 경우가 그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마땅한 도리를 실제 행하겠지만 항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상적으로 각성한 신앙고백자가 죄를 대적하는 마음을 자기가 정직하다는 증거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죄를 대적하는 것은 흔히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에 대해 본성적인 양심을 깨우치는 수준이라서 결국 죄를 이겨내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양심의 빛과 힘은 얄려진 모든 죄를 정죄하고 많은 죄를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모든 얄려진 의무를 본보기로 행하고, 외적으로 많은 도리를 일관성 있게 수행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주관하는 죄악의 지배력은 하나도 상하지 않고 건재합니다.
구약 시대의 아합 왕과 신약 시대의 가룍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를 보여 주는 사례들이 아닙니까? 그들이 잘못을 뉘우친 후에도 여전히 '죄가 그들을 저주하는 지배력'은 여전히 건재하였습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왕상 21:27 ;22) "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3-5)
발람을 보세요. 그는 자기의 모든 지식으로 진실함을 사랑하고 본받으려는 본성의 소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를 지배하는 세력에서 구원받을 마음, 바로 그 사실 하나가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벧후2:15)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10:21,22) 발람에게 갑작스럽게 악하고 신성모독적인 생각들이 일어나 혐오스런 정욕으로 급격하게 힘을 쓴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정서 속에 '득세하던 죄의 세력,' 즉 왕 노릇하던 권세가 영향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왕의 보좌에는 한 사람의 통치자만 앉는 법입니다. 비록 은혜와 죄악이 마음속에 공존하기는 하나, 주권을 부리는 일을 둘이 함께 하지는 못합니다. 죄악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가장 악한 원수들의 손에 왕의 규를 들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찬탈자를 세우는 것은 의로운 주권자를 보좌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죄에 복종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입니다.
우리 속에 왕 노릇하던 그 저주스런 지배권에서 벗어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보배롭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복을 누리는 사람은 "마음에 간사함"이 없습니다(시32:1,2). 그 사람은 자기 속에서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구주는 완전하신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십니다(고전1:30) 그 사람은 정결하게 하는 샘으로 나옵니다. 그는 죄의 저주에서 이중적으로 벗어납니다. 죄의 책임으로부터 뿐 아니라 죄의 세력에서 정결함을 입는 효력을 받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
우리는 다윗이 자기를 보호하던 모습을 면밀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는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곤 하였습니다.(시119:11) 그리고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바로 그 점을 유의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119:9) 그러면서 자신도 그 중요한 요점을 망각하는 연약을 의식하고 자신의 생활 법칙을 기도의 소재로 삼습니다.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이 기도를 드리는 그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내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세워주시는 은혜를 입지 않고는 죄악이 다시 나를 주관할 것이다."
우리 중에 매일 자신을 제어하는 법칙을 지키지 않아도 될 사람이 있습니까? 그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것이 엉클어집니다. 우리의 정서들이 분산되지 않기 위하여 말씀의 지시를 따라서 이 중심원리 안에서 '하나로 모아져야'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86:11) 이 법칙을 고수함으로 받는 감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말씀은 우리가 가야할 길로 가도록 격려할 뿐 아니라 우리가 바르게 걷도록 조정해 줍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시17:4)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19:11)"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6:23) 하나님 앞에서 바른 도리를 행할 때마다 하늘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고, 이리 저리로 벗어나게 하는 유혹을 이기게 합니다. 유혹에 끌려 곁길로 가면 알아차리기 힘든 위험이 사방에 도사리고, 사냥꾼들이 쳐 놓은 덫이 널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청결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시하신 길은 얼마나 복된 길인지요!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잠4:25,26)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영적인 길을 가기 위하여 마음을 반만 쓰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망각하거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각인시키는 영적인 인상을 건성으로 받는 잘못을 범할 때가 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 자신의 지혜에 호소합니다. 그럴 때마다 "죄악이 우리를 주관할 힘을 다시 얻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이 경건하고 사려 깊은 행보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하루 동안은 하늘로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자주 우러르며, 하늘가는 길을 지시하는 주님의 말씀을 자주 들여다보았는가? 결국 정말 말씀이 명하는 대로 마음과 행실을 돌이켰는가?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는 사람"만이 영적 안전을 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1) 그러므로 세상으로 한 걸음을 떼어 놓을 때에 자문해야 합니다. '내 걸음이 하나님의 말씀안에 굳게 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나의 완전한 본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걸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성품과 행실을 오염되지 않은 본에 따라 지어 나갈 수 있습니다.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는 이 기도가 복음의 특별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 응답이 얼마나 보장된 기도인지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2,14) 율법 자체로는 죄를 더 자극하여 죄의 힘을 더 북돋습니다. 그래서 율법만으로는 죄를 이기려 아무리 결심하고 주의하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죄가 우리를 조롱하고 이전보다 더 세력을 부리며 폭군처럼 굽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8)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6)
그러나 갈보리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죄를 새롭게 보고 죄를 혐오하게 만들며, 두려움 없이 담대한 확신으로 거룩하신 하니님을 숙고하게 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교만과 패역과 이기심과 적대감을 제압할 수 있게 합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전능하신 정복자로 신뢰하며, 그 분 안에서만 우리 자신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자"로 만듭니다(롬8:37)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그분의 직무와 가시 면류관과 영광을 표시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그러므로 그 이름 안에 의심과 죄에 대한 두려움, 죄를 보고도 나약함으로 신음하는 것을 불식하고 소성함을 입는 비밀, 궁극적 승리의 오직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가 어떤 죄악을 이기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끝까지 지배력을 되찾으려고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우러르고 의지하면 죄를 이겨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의 승리는 그만큼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지배력을 제어하는 능력을 계속 공급하시어 날마다 죄가 발호하지 못하게 '제압하실'것입니다. 매일 죄가 발호하려 하니 그만큼 매일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함으로 결국 죄의 발호를 억제하여 우리 신실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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