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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

시편 119편 1-8절 / 찰스 브리지스

by 은총가득 2021. 4. 26.

시편 119편 1-8절 / 찰스 브리지스

 

1. 복 있는 자의 행로

 

  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5. 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1.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2.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3.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편 119:1

  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시편 전체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 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합니다. "복 있는 자는..." 너무나 흥미롭고 교훈적인 이 시편 119편도 역시 그렇게 문을 엽니다. " ...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그리하여 시편 119편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행복에 이르는 길을 즉각 제시하십니다. 사람들은 방식은 다르나 다 행복을 얻으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또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임할 수 있는 비참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비참이 죄의 열매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에서 구원받고 다시 죄에 빠지지 않게 자신을 보전해야 하는 데도 말입니다.

 

이 구절이 묘사하는 '행위 온전한 정결한 성품'을 예수님께서는 나다니엘을 보시며 지적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사도 바울도 자기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24:16)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없는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롬7:15)라고 진실한 마음으로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마음 자세로 '자기들의 행로'를 결정합니다. 곧"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은 주님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슥10:12) 그런 이들은 항상 자기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30:2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의로운 백성들에게 인쳐 주신 특권들이 무엇입니까?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들에게 전가하시어 의롭다 선언하셨고(시32:1,2:롬 4:6-8), 하나님의 양자됨과 성도들과 교제하게 하시는 은혜를 허락하시며(요일1:7), 섭리와 은혜로 보호하여 주시다가(대하16:9,욥1;8,10), 결국 영원한 복락에 대한 영광의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의구심도 가질 수 없습니다.

현세에서 번영하게 하시고(수1:7,8;딤전 5:8;대하17:4,5), 영적으로 충만하며 새롭게 하시고(시1:2,3), 신령한 지각을 크게 하시고(요7:17), 구주와 생명의 교제를 누리게 하시고(요14:23;15:14,15),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시119:165;갈6:16;사32:17). 그러다가 영원토록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을 권리를 부여하셨습니다.(계22:14). 성도에게 주신 이러한 특권들의 가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유쾌함과 평안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도다."(시73:1)

우리 자신에게 각자 물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길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인가? 그 길이 항상 온전하게 정결한 길인가? 불의가 내 마음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가? 아니 내 마음의 길이 죄다 하나님께서 항상 미워하시고 슬퍼하시며 버려두신 길은 아닌가?'"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진정 나의 '행위'가 어떠한가? 나의 행위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명의 원리로부터 나온 것인가? 그 생명의 원리만이 영적 생명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처음 살리심을 받을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습니다. 그 후 우리는 그 안에서, 또 그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오, 내 행위가 견고하고 일관성 있고 진보를 보일 수 있기를 원하나이다. 오, 내 아버지의 음성,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라는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그 행위가 온전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 '온전하지 못한 더러움'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법을 따라 그 '행위'가 온전한 일관성을 보인다 하여도 그 속에 일관되지 못한 '만연한 연약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를 위하여 복음이 얼마나 은혜로운 선언을 하는지요!"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시편 119:2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단수로 '증거(testmony)라고 표현하면 보통 영감된 정경(Canon)으로서의 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신 계시의 말씀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표준입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8:20) 그런데 복수로

'증거들'(testmonies)이라 하면 주로 성경의 '교훈적인 대목,' 곧 하나님의 사람이 항상 '신령한 기쁨과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방식'을 알려주는 부분을 가리킵니다.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시119:138)"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14절)"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시119:138)"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14절)"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111절) 어쨌든 이 복은 단순하게 겉으로 순종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은 간절함'과 그것을 알려고 늘 애쓰는 실천적인 습관에 걸려 있는 복입니다. 이러한 습관은 하나님의 약속에 감동받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7) 믿는 자는 "하나님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를 견지합니다.

 

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구하고 찾으나 찾지 못하고 헛수고만 합니까! 그것은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마음은 나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호10:2) 신앙고백자가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겔 33:31) 믿음의 바른 자리에서 뒤로 물러가 패역에 빠진 자가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렘3:10) 충성되고 정직한 신자만이 자기 마음을 전체로 주님께 드립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로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78:8) 이는 그 사람만이 자기 온 마음을 채워 사로잡는 대상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해 마음 전부를 집중시킵니다. 그가 천개의 마음을 가졌어도 하나님 한 분은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길 안에서 계속 찾습니다. 그 온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더욱 더 사랑하는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어야 복을 누리고 약속을 선용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3)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들을 지킬 때에" 억지로 하는가? 아니면 사랑함으로 하는가? 내 자신의 본성적인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향이 있음을 압니다. 겉모양으로 주님을 섬기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식의 자기기만에 잘 빠지는 내 자신의 악함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처지임을 고백합니다. "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36절)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125절) '전심으로' 주를 구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면, 나는 어떠한 자세로 주님을 구하고 있는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내가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오, 내 영혼아,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105:4)

 

주여, 저를 탐사하시고 가르치사 제 마음의 길을 주장하시고 붙드소서. 저를 도우사 주님의 은혜의 약속을 따라 간구하게 하소서.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24:7)

 

 

시편 119:3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이러한 성향은 결코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불의밖에 행한 것이 없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가진 '본성의 샘 근원에서 나는 것 외에는 다른 물이 섞여 들어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에 대하여 본문은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전에 그들은 "마음의 원하는 대로 행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고, "악한 행실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엡 2:2,3 ; 골1:21).

 

 

그러나 이제 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정말 지금 그들의 마음은 고상한 특권을 부여받은 상태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9) 전에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대적했지만 이제는 죄를 미워하여 멀리하는 성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죄를 전혀 짓지 않는 완전한 성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완전하게 되리라.' 고 꿈꾸는 것은 비성경적인 자기기만입니다.(전7:20; 욥9:20; 빌3:12 참조). 하늘을 계신 우리의 친구되시는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대언의 간구를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지상생애가 끝나기 전에는 여전히 '죄가 내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매일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십사."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마6:11-13). 그렇습니다.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사실 우리는 아직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리로다! 주께서 우리로 '죄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게 하시고, 죄의 소욕을 이루지 않게'하심을 인하여 찬미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믿는 자들)속에서 '죄의 동작'은 돌이 위로 날아오르는 것 같이 부자연스런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상태가 '죄'의 왕을 아주 쫓아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한 상태는 아니라 할지라도 더 이상 죄는 왕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죄의 왕 노릇 아래 즐겁게 순종하는 족속'이었으나 이제는 '죄에 대항하고 투쟁하는 포로들'과 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우리 위에 '권세를 부리지' 못합니다.

 

여기에 복음이 주는 거룩한 자유가 있습니다. 물론 그 자유가 어떤 이가 너스레를 떠는 것같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계속 죄에 거할" 자유는 아닙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그 자유는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어 우리를 괴롭히던 죄책과 정죄함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주하는 죄에서 자유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전한 뜻으로 그 죄를 아주 쫓아버리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니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우리에게 책임을 물어 정죄하시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죄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꿀같이 달콤한가요?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성공적으로 버티어냄이 그 영적 싸움의 완전한 승리의 보증으로 여겨집니까? 진정 예수님을 찬미하리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어 구속하심으로 우리를 죄책과 저주에서 완전하게 자유하게 하셨고, 더 나아가 우리가 영화로운 상태에 이르면 더 이상, 아니 영원히 그 '지겨운 손님과도 같은 죄'가 우리와 동거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오, 우리는 매일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 속에 주님의 죽으심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습관을 따라 "새 생명 가운데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부활의 권능"을 알아가야 합니다. (롬6:4,5; 빌3:10).

 

 

시편 119:4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개역한글)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성품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순종하라 명하시는 권위에 주목합시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만으로 족합니다. 그 명령이 자기의 뜻과 맞지 않아도 주님이 명하신 것이니 순종합니다. 그 명령의 멍에를 불평할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로 '구약의 경륜 아래 태어난 세대'라도 그 명령에 순종할 마땅한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5:29. 참조할 성구는 신6:17,18;28:1,2) 하물며 '신약의 사랑의 세대'에 속한 우리가 주님의 명하심에 순종할 동기가 부족할 리가 있겠습니까? 매일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면서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116:2) 더 풍성한 은혜의 자비하심을 인하여 "산 제사로 하나님께 올려야" 마땅합니다(롬12:1).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고후5:14) 우리를 사신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를 생각하고,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부요하심을 상기하고,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하신 말씀이 합당함을 인식합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을 볼지어다."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리시면서 드린 간구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받고 아픔의 절규를 발하시던 주님의 음성, 운명하시면서 괴로워하시며 발하신 큰 소리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지불하신 대가를 늘 상기하자는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복음적인 순종의 성경적인 특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사랑할 능력'을 갖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벧전1:22).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요지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1:4,5) '진리를 사랑하는지의 여부'가 우리의 신앙이 참된지를 알아보는 유일하고 충분한 시금석입니다(마12;33;요14:15,21).

 

아침에 일어나는 즉시 내게 물어야 할 질문은 , "주여, 주께서 제가 무엇하기를 원하시나이까?"입니다(행22:10)."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186:11) 저로 하여금 제게 주신 은사를 다 동원하여 주님의 길을 추적하게 하옵소서. 항상 깨어 있어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게 하옵시고, 제 마음의 생각과 입술과 성미와 소욕을 지키는 파수꾼을 세우시어"주의 법도를 근실히 지키게" 하옵소서, 아무 것도 그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런데 어째서 주의'법도'가 내게 무겁게 느껴집니까? 게으름에 빠진 결과는 아닙니까? "내 마음에 불의를 품은 것" 때문은 아닌지요? 아니면 믿음과 합할 수 없는 어떤 원리가 내 속에 들어와 두 주인을 섬기게 되어 주님께 마음을 집중하지 못한 연고가 아닌지요? 오로지 "주님만 온전히 따라야" 마땅한데도 말입니다. 오! 하나님의 '법도들'을 지키려면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는 경건한 진지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근신하며 헌신하는 마음의 '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뜨겁고 줄기찬 사랑이오니 그것을 제게 주옵소서. 오! "위로부터 난 지혜"를 주옵소서. 그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이다."(약3:15)

 

 

시편 119:5

"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법도를 근실히 지키라." 공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습니까? 사탄은 너희가 연약하니 그리 힘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하고 믿음을 행사할 정당한 이유를 생각하게 가르치십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바르다면, "하나님의 율법의 선함"을 인정할 것입니다. 또한 "속사람을 따라서 그 율법을 즐거워할 " 것입니다(롬7:16,22). 그런 사람은 자신의 뜻에 맞추려고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가감하거나 마음대로 지워버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의 길로 가는 것을 용인하고 정당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거룩의 표준을 목표로 삼고 거기에 이르려고 최선을 다하는 순간 그러기에는 자신이 턱 없이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탄식하지 않습니까? 자신 앞에 하나님의 제시하신 길이 열려 있음을 보면서도 행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받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에 자신이 온전히 무능하다는 것을 지각하게 되면, 그 의식을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기회로 삼으세요, 능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위하여 늘 깨어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세요, 그 속에서 여러분은 믿음으로 자신의 철저한 무능함과 하나님의 완전한 전능성을 항상 변함없이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느니라."(고후3:5)

 

그리고 그런 자세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우리의 영광스러운 머리로 내세우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지금과 이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한 순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하게 공급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골 1:18,19). 우리의 일은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렸거나, 우리 '혼자의 힘'으로 해낼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니(말2:15) 은혜가 부족한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12:9)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3) 버러지 같은 야곱이라도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들 것은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사41:14,15).

 

시편 119편의 5절과 4절을 연관지어 생각할 때, "주의 율례를 지키기에" 자신이 충분하다고 인식하거나, "주의 율례를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할 정당한 구실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정도를 지키려면 얼마나 면밀한 주의가 필요한지요! 영적인 순종을 주님께 드리려는 시도를 하자마자 대번에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접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마음속에서 영적인 생명의 첫 고동을 내는 일은 불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무능을 구실삼아 마땅한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가 우리의 능력을 빼앗아 버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실 권리를 상실한 것이겠습니까? 종이 술에 취하였다고 주인의 법에서 해방되겠습니까? 사람이 죄 때문에 자기 의무를 감당할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그것을 구실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도리어 그 입장이 더욱 더 악화된 셈이지요. 그러니 우리의 연약함이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 마음은 육체적이라서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바를 행해야 할 책임은 조금도 감해지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를 무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죄와 죄책과 정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단번에 우리는 그 명령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서 간절한 간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순종하라 요구하신 그 '율례를 우리 마음에 '기록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주의 법도를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4절-한글 개역) 주님, 우리는 주님이 명하신 바를 마땅히 지켜야 할 당위성 아래 있음을 인정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불능을 의식합니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어거스틴은 주님께 아뢰었습니다.'주께서 명하실 바가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대로 명하시옵소서. 마치 복음의 약속들이 충분하고 합당함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그는 주님께 그리 아뢰었습니다. 주께서 명하신 것들을 기도와 함께 하늘로 가져가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소성하게 하고 인도하는 은혜의 약속들'과 함께 그 명령들을 우리에게 돌려보내십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목적에 완전히 부합하게 행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실 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마음을 돌려 명령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전적으로 무능함을 인식하여 우리 자신을 주님앞에 던지게 하시려고 명령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구하는 자를 기뻐하시며, 구하는 자를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실로 이것이 '경건의 비밀'입니다. 곧'우리의 의되신 주님답게' 당신 자신을 의뢰하는 것에 비례하여 거룩을 추구하는 우리의 소욕과 능력을 더 해 주실 것입니다.그리하여 우리의 기도도 더욱 더 힘이 있어집니다.

 

우리가 마땅히 행할 바를 명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하심을 다 아십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느끼는 이는 자기 구주의 권능을 의뢰할 담력을 온전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은 복음적 순종의 원리요, 주님 은혜의 약속들은 우리로 마땅하게 행할 일을 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명령받은 즉시 그 은혜의 약속들은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아뢰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명하소서, 믿음으로 그 명령을 받으리이다.'

 

이러한 관점 속에는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지존과 권위, 피조물의 전적 불충분성, 구주 그리소도의 구속의 완전성, 곧  '은혜의 하나님의 완전 충분성'이 함께 녹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하나 없는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구합니다. 또 우리에게 주시어 갖게 된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또 약속된 것을 주실 것을 인하여 주님께 의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 그래서 '은혜가 왕 노릇하여 이기는 '것입니다. 기초가 은혜 안에 놓여 있습니다. 백성들이 크게 외치는 중에 '머릿돌'이 들어와 내려 앉혀집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슥4:7)

 

구주의 일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관을 쓰시고 영원히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시편119: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순종하되 '근실히 모든 일에'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계명의 아주 작은 부분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무시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순종의 정신을 배우지 못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이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하나님께서 하나도 불비함이 없이 온전한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름 아니라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려"(골1:10)하심입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한 가지 정욕만 가지고도' 폭군같은 욕심으로 소유에 집착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다른 이들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헤롯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음란한 아내를 버리지 않고 계속 품고 있는 것이야말로 죄가 그를 사로잡아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드러낸 것입니다(막6:12-20).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을 다 죽이고 오직 '한 사람'만 남겨 두었습니다. 바로 그 '한 사람을 살려 둔 것' 이 그가 순종하여 행한 모든 일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하여 왕위를 잃는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삼상15:12-23).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 둔 한 가지 부패'가 온 몸을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막9:43-48). 신속하게 순종하지 않고 미루어 두는 것이 결국 경건한 진실함을 죽이는 종창으로 작용합니다. '혀 밑에 넣고 굴리는 달콤한 사탕같이' 은밀하게 탐닉하는 것이 있거나, '드릴 것 중에 얼마를 떼어 몰래 감추어 둔 것 같이'하면(행5:1,2), 주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헌물을 제물로 받지 않으시고 강도가 도적한 것으로 낙인찍으십니다. 어떤 의무를 지킬 때에 대부분 근실하고 진지하고 간절하게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쓴 뿌리가 하나만' 있어도 그것이 전체를 가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고백이 참됨을 증거하는 '근실함'(sincerity)의 인장이 찍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완전한 순종'을 도저히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나의 '소원과 목적'은 '모든 계명을 다 존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계명들 중에 큰 계명들만 지키고 작은 계명들은 무시하는 모험을 결코 더 이상은 저지르지 않겠나이다.' 어떤 계명을 어기더라도 다른 계명을 잘 순종하면 계명을 어긴 잘못이 상쇄되리라는 생각은 더 더욱 삼가야 합니다. 참 계명들이 많습니다. 그 많은 계명들은 다 이어져 하나의 사슬을 이룹니다. 그래서 그 모든 계명들이 '단 하나의 율법'을 이룹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 이 말씀을 하신 분이 누구신지 저는 압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사람에 대한 의무를 지시하는 둘째 돌판에 기록된 계명을 정말 충실하게 지키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마치 첫 번째 돌판에 기록된 계명들은 예배의식에 관한 것이거나 이제는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거나 겉 사람에 관한 규례라도 되는 것 같이 여겨). 그러나 저는 두 돌판에 기록된 십계명 모두를 주목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내 속에서 늘 성가시게 말썽을 부리는 부패의 요소들을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안위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행9:31).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3:19)

 

그러나 내가 아무리 엄격하게 행한다 할지라도 내 행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리라는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모든 의를 이루시어"(마3:15) 순종을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분 안에서 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은 내 대신 죽으시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분입니다(갈3:13). 그분이 아니었다면 내가 회개하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려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거룩한 길 안에서만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께 가납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요일1:7; 2:5; 3:21,24). 이 세상의 즐거움에 사로잡힌 마음은 하늘에 속한 기쁨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늘의 기쁨의 밝은 광채가 거룩하지 못한 세상의 분위기 속에서 희미해지고, 신선함이 잦아들고, 생명력이 마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경건한 확신도 자신에게 빠져 영적인 근신을 잃고 은밀한 죄를 즐기거나 은밀한 의무들을 태만히 여기면 반드시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지혜자는 말합니다.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욥22:23,26)

 

그러니 우리는 '구원의 확신'의 특성을 주의하여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이 단순하고 절대적으로 복음의 약속에만 근거한 것입니까?하나님의 말씀의 시금석을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까? 살아있는 양심과 영적인 각성과 용의주도한 행실의 산물로 나온 것입니까? 그 구원의 확신 때문에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려는 간절함을 가지게 되어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얻게 되었습니까?(벧후1:5-11) 경건의 길에서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인의 담력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이렇게 아뢸 수 있습니까?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시119:31) "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들에 완전하게 하사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시119:80)

 

 

시편 119: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은 하나님 말씀의 계시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그 계시를 척도 삼아 우리의 현재 상태를 판단하시고, 나중 최후의 선고도 하실 것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12:48) 여기에 비추면 다윗은 자기가 이룩한 업적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보였습니다. 다만 "주의 판단을 배우게 될 때"를 내다보면서 지금은 마치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같이 보였습니다. 다윗은 뒤에 가서 소리칩니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시119:96) 바울 사도는 복음과 함께 20여년을 살고 나서 자기 마음의 간절한 소원 한 가지 소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알려는 소원'을 항상 견지하였습니다(빌3:10-14).

 

 

분명하게 말하면 바울 사도는 높은 수준의 업적을 이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겸손한 관점을 항상 견지하였으며,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으나 점점 자기 앞에 진면모를 드러내는 보배의 가치를 아는 것을 아주 큰 것으로 높여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성도들은 '하나님의 학교'에서 졸업하지 않고 항상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배우더라도' 그 지식을 그들의 '교리의 틀과 정신'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6:17) 자기가 안다고 뽐내는 것은 더 배우는 일을 막는 가장 큰 적수요, 아직도 알지 못함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갈6:3)

 

"내가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신자로 하여금 이 '거룩한 배움' 에 열심내게 하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사람의 칭찬을 받는 분위기 속에서 살기 위해서입니까? 오히려 "정직한 마음으로 주를 찬송하려고"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어두우면 우리 입을 봉한 채 말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주님께서 주님의 판단을 배우는 총명을 열어주시면, " 그 다음에는 "내 입술을 열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51:15. 119:27,171 도 참조) 실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으신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것을 위하여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하셨습니다(벧전2:9). 우리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매일의 틀 속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을 찬미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여야 합니다. '정직한 마음의 찬미가 거룩한 성품과 행실 속에서도 나타날 것'입니다.(시116:12-14)

 

우리는 우리의 찬미가 마음으로 주님의 "의로운 판단들"을 배운데서 '풍성하게'흘러나오는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은밀하게 자신을 높이며 우쭐거리는 심사로 우리 구주에 대하여 말하는 일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섬기고 그 명예를 위하는 척 하면서 우리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습니까? 이기심은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찬미라도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 이기심을 극복해야만, 주님을 찬미하는 세계를 향한 갈망을 일깨워 섬김의 불꽃을 능동적으로 밝히고 꺼지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드리는 헌물에 오염이나 막힘이나 지침이나 한정이 없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게 될 것입니다.

"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4:8)

 

시편 119:8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다." 이 결심은 "주의 의로운 판단들을 배움"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순종이 내포하는 '경건한 진지함'과 '의존의 단순성'을 얼마나 복되게 조화시키는지요! 그는 단호하게 결심하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결심하고 나서 즉시로 자신의 힘으로는 그 결심대로 행할 수 없음을 상기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순간, 아니 거의 동시에 그 결심을 기도로 승화시킵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오!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려할 때 자신을 의뢰하는 일을 얼마나 삼가야 하는지요! 우리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여부에 따라서 넘어질 지 나아갈 지가 달려 있습니다. 때에 맞게 징계하시려고 주님께서 영적인 무모함에 우리를 잠시 방임해 두실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은혜가 주어졌는데 그만 그 은혜를 신중하게 높이지 않거나, 그 은혜를 근실히 활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의 경우가 그러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그 여인의 간청에 따라서 그 사랑하는 자가 문을 두드리나 신부는 '잠이 들어' 있습니다. 신부는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응답이 와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잠들었던 자가 일어났으나 너무 늦게 일어났습니다. 자기 마음으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나 벌써 자기를 내버려 두고 가버린 상태였습니다.(아4:16-5:6).

 

우리는 시험에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시30:6,7).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식어 '촛밀이 차갑게 굳어 버린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찾는 열심이 희미해질 때도 있습니다(아3:1-4). 그럴 경우 우리가 잠시 주님께 버림을 받은 것 같이 느끼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기도 하는데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행사로 우리에게 그런 상태에 복종하고 있으라 요구하시는 것 같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경우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데, 보통 자기 의존이나 방심이나 어떤 욕심을 은밀하게 탐닉하는 일이 원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욥15:11-한글개역) 다윗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통회하는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똥안에 "괘씸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무거운 손이 자신을 심하게 누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32:3,4) 때로 우리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가는 길을 음침하게 한 적은 없습니까? "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9)

 

그러나 주님의 영원한 언약은 믿음의 보장을 얼마나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까! 기도할 용기를 갖게 하는 말씀들이 얼마나 풍성합니까! " 주여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다윗은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미쁨심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알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 보다 잠시라도 자기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더 무서워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은혜로운 진리를 천명하면서 하나님께 아뢸 수 있었습니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시89:32-34)

 

우리는 은혜의 약속들을 구실로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약속들을 값없이 받았고 주권적인 선포로 확증 받았다는 사실은 확고한 터에 불가분적인 요소입니다. 얼마나 많은 쇠약한 영혼들이 확증하시는 약속의 말씀들을 통하여 확신을 갖고 다시 힘을 얻었는지요! "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54:7,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속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우리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와 주님을 의뢰하는 심령으로 "주 안에서 자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34:2) "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그리고 위로가 우리에게서 물러가 있는 것 같은 기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말해야 합니다.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8:17)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어둠속에 있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하여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우리 영혼에 악하고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주 황당한 처지에 빠져 있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가는 길이 옳지 않은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생활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인도하심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안내 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참고 인내하며 그 길을 믿음으로 가면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될 것을 보여주는 안내 표지판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사42:16) 오! 안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반드시 이행하신다는 점을 내적으로 확신하고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실 수'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처럼 "아주 버리시지는" 않습니다(시30:7;삼상28:6,16). 베드로가 버림받은 것 같을 때가 있었으나 가룟 유다와 같이 "아주" 영원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마26:75;27:3-6).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린 것 같다는 어떤 불길한 생각이 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언제라도 주님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다시 돌이키시는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바라는 애통하고 갈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습니까? "너희가 망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대하15:2. 대상29:9참조)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버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마음으로 말하십시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저는 주님을 기다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로 나아가려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루시는 여러 방식들을 주목하십시오. 주님의 여러 방식들을 자세히 숙고하시고, 주님의 경륜에 자신을 복종시키세요. 만일 '주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주님이시여, 저에게 다시 돌아와 주세요.'라고 간청하세요. 오직 여러분을 '잠깐 버려두시기도 하시는'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그가 나를 살해하신다 하여도 나는 그를 믿으리라) (욥13:15)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나를 위로하던 것이 물러가고 먹구름이 내게 덮일지라도 주님께 대한 내 소망은 여전히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열망, 마음속에 살아있는 이 확신이야말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행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그 손으로 하신 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138:8)

 

 하늘과 땅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보다 복음의 신실한 약속들이 파기되는 일이 더 어렵습니다. < 자기부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