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돌이 머릿돌로 (시 118:22)
김 정 우 (총신대 교수 /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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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22절)라는 말씀은 건축에서 나온 격언이다. 쓸모 없는 돌로 여겨진 것이 아주 중요한 자리에 놓여졌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돌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었다는 데 있다. 건축자는 돌을 보는 데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온갖 돌의 가치를 아는 자이다. 이들은 돌의 모양, 결, 강도를 전문적으로 알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은 거의 틀릴 수 없다. 이들은 못쓰는 돌과 귀한 돌을 구별하는데 숙련된 전문가들이다. 이들이 버린 돌이면 사실 쓸모 없는 돌일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도 잘못 판단할 수 있다.
세상의 전문가들도 얼마든지 편견이 많을 수 있다. 세상의 과학자들이라고, 객관적이고 확고한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설이 없으면 이론이 설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이론은 가설 위에 서있다. 게다가 세상 과학자들은 현상 세계에 대해서만 분석할 뿐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 보이지 않는 세계, 하나님의 세계와 계시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알 뿐이다. 그들의 말은 최후의 말이 아니다. 명문대학이 버린 학생이 인생 우등생이 될 것이다. 세상 전문가들은 이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는 눈이 없다.
이 버림받은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 돌은 주로 기초와 연관되어 나타난다(렘51:26; 욥38:6). 그렇다면, 이 돌은 건물의 초석으로서 건물의 모든 기초를 하나로 묶어 주는 큰 모퉁이 돌을 가리키게 된다. 이 돌은 두 방향으로 물리게 되며, 양쪽에서 오는 압력을 받는다. 이 돌이 빠지면, 모든 건물이 내려앉는다. 성경에서 "머릿돌"은 주로 시작과 근원을 말한다. 그 동안은 가문이나, 학벌이나, 지역이 머릿돌 역할을 하였는데, 주님께서 외모로 판단치 않고 그 속을 보고 바른 사람을 찾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23절). 이런 역설적인 일들을 하나님은 즐겨 행하신다.
예수님도 자주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나보다 뒤에 믿었는데 더 열심히 잘 믿는다. 예수께서 처음 행하신 기적도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이었다. 사람들은 "뒤에 나온 포도주가 첫 포도주 보다 낫다"고 말했다. 노년의 신앙이 청년 시절의 신앙보다 깊어진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상식적 진리가 아니라, 역설적 진리를 말하고 있다. 주님의 은혜는 늘 역설적이다. 주님 자신이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왕궁으로 오시지 않고, 구유에 오셨다. 그는 영광의 보좌에 앉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로 가셨다. 하나님은 역설의 하나님이다.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 돌"이 된 것은 하나님의 역설이다. 이 버림받은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이 성경의 역사요 가르침이다.
이 시편 말씀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신 분은 바로 예수였다. 주님은 바로 이 시편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마21:42; 막12:10; 눅20:17). 마가복음 11:1을 보면, 예수께서 감람산에 도착하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이 후에 예수께서는 시편 118편을 가지고 성전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논쟁하고 계신다. 주님은 "무슨 권세로" 성전 청소를 했느냐는 질문을 받으신 후, 자신이 메시야임을 말씀하기 위해 이 시편을 가져온다. 먼저 주님은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포도원을 정성스럽게 만든다. 그는 좋은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 모든 일을 다한다(1절).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담을 쌓는다. 망대도 세운다. 주인은 자기 포도원을 보호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한다. 포도원 주인은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고 이제는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먼 나라로 갔다(2-5절).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에는 수많은 부재지주들이 있었다. 주인은, 추수 때가 되어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낸다.
마가복음을 보면, 주인은 한 종, 다른 종, 또 다른 종, 그 외 많은 종들을 보낸다. 종에 대한 농부들의 행동도 점차 악화된다. 첫째는 "잡아 때렸다"(12:3). 둘째는 "머리를 깨고 모욕했다" (4절). 셋째는 "죽임을 당했다" (5절). 넷째는 "더러는 얻어맞고, 더러는 죽임을 당했다" (5절). 마지막으로 주인은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아들"을 보내었다. 마가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한다 (6절). 아들을 보낸 사건은 새로운 기대를 야기시킨다. 과거의 실망을 잊고, 최종적인 파송을 한다. 여기에 위기감이 있다. 주인-아버지의 최후 대책이다.
왜 군대를 보내지 않았나? 다른 종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아들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7절). 예수께서는 잠깐 숨을 돌리면서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묻는다 (9절). 마태에 따르면,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22:41).
이 비유를 들을 때마다 주인이 너무 바보같다. 그는 바보처럼 계속 종을 보내고,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보낸다. 9절의 질문은 주인이 어떻게 할 것이냐 뿐 아니라,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냐?를 묻게 된다. 비유에서 놀라운 요소는 아들을 죽인 데 있지 않다. 소작인들이 잔인한 것을 이미 알았다. 아들을 보낸 아버지는 너무나 천진난만하다. "그들이 내 아들을 존경하리라" (6절)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은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주인은 "그들이 내 아들을 존경하리라"고 생각하나, 소작인들은 "기업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어리석은 주인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우리 눈에 어리석어 보이나 구약의 배경에서 보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사람을 찾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반응을 바란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사랑과 성실이 많은 분"으로 묘사한다 (출 34:6). 예수께서는 갑자기 이 비유를 결론 맺으면서,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11절)고 묻는다. 아주 엉뚱하다. 왜 갑자기 버림받은 돌에 대해 말씀하실까? 히브리어에서 "돌"(eben)은 "아들"(ha-ben)과 거의 소리가 같다. 구약과 이 당시 랍비들의 문헌에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돌들"로 그려진다 (출 28:9-10; 39:6, 7, 14; 애 4:1-2; 수 4:6-7; 슥 9:16; 마 3:9). 예수와 당대의 사람들은 "버려진 돌"이 "버려진 아들"과 동일시되었다. 또한 당대 유대 지도자들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메시아를 가리킨다고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시편은 다윗 시이다.
따라서 메시아를 가리킨다. 다윗은 구속자의 패턴이다. 다윗은 막내였지만, 선택되어 불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건진다. 사무엘과 다윗 가문과 골리앗과 사울과 다른 사람들이 그를 몰라보았고 외면하였고 버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선택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솔로몬 성전을 지은 자는 다윗이었다. 그가 유대 나라를 완성시킨 자이다. 마가는 버림받은 돌의 비유를 첨가함으로써, 이 비유는 명백하게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을 말해준다. 역설적으로 예수는 새 성전의 모퉁이 돌이다. 이 성전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막 14:62).
이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주님 자신이 참된 이스라엘의 대표라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아니라, 그가 버림받고 세움받을 참 돌임을 밝혔다. 사실 주님은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기 백성들은 지속적으로 그를 거부했다. 그가 참 메시아라는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수많은 기적과 놀라운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이 그를 버렸다. 나라의 지도자들도 그를 버렸다. 백성들 뿐 아니라, 지도자들이 그를 버렸다. 그들은 건축자들이었다. 영적 건축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공한 자들이었다.
예루살렘에 모인 무식한 무리들이 버린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인 제사장, 사두개인과 빌라도가 버렸다. 그 버림은 또한 격렬했다. "그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온갖 모욕을 다 퍼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버림이었고 거부였다. 그러나 주님은 높아졌다. 높아져 가장 존귀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모든 돌을 잇는 머릿돌이 되었다. 모든 돌들이 그를 통해 이어진다. 머릿돌이 없는 건축물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잇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벽과 이방인의 벽을 다 잇는다. 남자와 여자, 헬라인과 유대인, 종과 주인을 하나로 잇는다. 또한 하늘과 땅을 잇고, 시간과 영원을 잇는다.
이 후에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한다 (행 4:10-12). 아마 예수께서 처음 이 비유를 말씀했을 때, 그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을 계속 붙잡고 생각했던 것 같다. 베드로는 여러 중요한 사건들과 특히 그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예수께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크신 계획 속에서 모통이돌이 되었음을 믿게 되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사, 그를 정말 중요한 사람으로 세웠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런 베드로의 확신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무의미한 증언으로 일축할 수가 없다. 베드로는 막강한 재판관들인 안나와 가야바,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 가문이 함께 모여있는 자리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했다고 감히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이 다시 그를 위협하고, 아무에게도 다시는 예수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할 때에도 "저는 제게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부활 전에 베드로는 두려움에 자주 빠졌다. 그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베드로는 도망쳤다. 부활 후에 그는 용기로 가득 찼다. 그는 큰 능력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견고한 신자로서 삶을 산다. 어떤 위협과 투옥도 그가 예수를 증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예수는 자기 나라의 건축자들이 멸시하고 버렸지만, 이 세상의 사회 구조의 확실한 기초로 나타났음을 그는 확실히 믿고 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는 항구성이 없다. 어지럽게 변한다. 우리 지도자들이 모퉁이 돌이 아니라, 거침돌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 후에 베드로는 예수가 "모퉁이 돌"임을 깊이 붙든다. 이 돌은 "항구성"을 뜻한다. 이 후에 베드로는 그의 첫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산 돌"이시며 우리도 "산 돌"이 되어야한다고 권면한다 (벧전 2:4-8). 여기에서는 절마다 "돌"이 나타난다. 그는 돌을 통해 신앙생활을 설명한다.
베드로는 예수를 "산 돌"(livqon zw'nta)이라고 한다. 어떻게 돌이 "산 것"이 될 수 있는가? 베드로는 "산 것"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는 1:3에서 예수께서 부활하사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다고 말한다. 1:23에서는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는 "산 말씀"을 말한다. 베드로는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어떻게 돌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 "돌"은 무생물이며 하나님(행 17:29), 아브라함의 아들들(마 3:9; 눅 3:9), 혹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눅 19:40)과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베드로는 역설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와 돌"은 우상을 상징한다(신 4:28; 28:36 등).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산 돌"이라고 말할 때, 그는 참 하나님임을 말한다. 베드로는 "산 소망," "살아 계신 하나님," "살아 있는 말씀," "산 돌"을 통해 당대 이방종교의 절망과 우상과 대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산 돌"이다. 이 돌에게 나아와야 한다. 이 돌은 "산 돌"일 뿐 아니라, "생명을 주는 돌"이시다. 우리가 산 돌이신 그리스도와 이어질 때, 생명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생수" (요 4:10)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51).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리스도는 산 돌일 뿐 아니라 "선택되고 보배로운 돌"이라고 베드로는 말한다. 남녀가 결혼을 할 때, 보석을 예물로 주고받는다. 이것은 아주 세심하게 선택한 보배로운 돌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부부는 기쁨을 느낀다. 이것은 부분의 특별한 연합을 말해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올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특별한 보배가 된다. 비록 사람들이 우리를 거부해도,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베드로는 이제 우리가 "산 돌"이 되라고 권면한다 (5절). 이리하여 우리는 신령한 집, 즉 성전으로 세워지라고 말한다. 우리는 산 돌이신 그리스도와 이어진 산 돌들이다. 그 동안 죽은 돌들이었던 우리가, 버림받았던 우리가, 쓸모 없이 인생을 낭비하고 탕진하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 은혜로 산 돌들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 한 명 한 명이 "산 돌"로서 홀로 열심히 살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이어져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라"고 말한다. 이 집은 바로 "성전"을 가리킨다. 솔로몬의 성전이 여러 보배로운 벽돌로 이어진 것처럼, 우리들이 서로에게 이어져 살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거룩한 집을 짓고 싶어하신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 데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이다. 6절에서 그리스도는 이제 "택함받은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로 소개된다. 그리스도의 중요성이 삼중적으로 강조된다. 그는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이시다. 그와 이어지면, 결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이어진 사람을 귀하게 보신다. 그리스도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이어지면, 인생에 지혜와 능력을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돌"이시다. 따라서 믿는 자에게는 "보배"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될 것이다(7-8절). 그가 내 인생의 모퉁이 돌이 될 것인가, 혹은 내 인생의 거침돌이 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가 그의 말씀을 사모하며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경건한 삶을 발전시키지 않을 때 그를 버리는 것이다 (벧전 1:13-16). 우리가 교회는 다니지만 삶으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그를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집을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세우지 않으면,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이 된다. 베드로의 시야는 이제 훨씬 넓어진다 (9-10절).
이제 베드로는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 우리를 소개하고 있다. 더 이상 옛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는 신약 성도가 새 언약의 백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인생에 모퉁이 돌이 되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세상의 전문가들이 버린 돌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귀중한 모퉁이 돌이 된다. 베드로는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아마 주후 64년경에 순교했다고 한다. 오리겐은 그가 스스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겠다고 하였다. 그는 자기 주님과 같은 방식으로 죽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를 우리 인생의 모퉁이 돌로 받아들였는가? 그가 우리 인생의 모퉁이 돌이 될 것인가, 아니며 우리가 걸려 넘어지고 거침돌인가?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이 산 돌을 우리 인생의 모퉁이 돌로 만들자. 우리의 가치와 생활이 그와 연결될 때, 우리는 참된 모퉁이돌과 이어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집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산 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제는 모퉁이 돌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을 주님은 우리에게 맡기셨다. 우리가 이제는 책임을 질 때이다. 우리가 헌신할 때이다. 우리가 이제는 모퉁이 돌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성도의 책임을 잊고 살았다. 이제는 주님 앞에 우리의 책임을 살피고, 어디에 심어지든지 산 돌로서 책임을 다 할 수 있길 빈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이 버린 사람을 모퉁이 돌로 만드는데 힘써야 한다. 이 시편은 버림받은 자로 주님을 찬양하게 한다. 하나님은 병자, 지체 부자유자, 가난한 자,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를 사랑하시며, 회복하는 분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약한 자에게 있다. 약자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에게 주로 관심을 갖지만, 교회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새 삶을 살게 하는 데 있다. 이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길 바란다. cafe.daum.net/eillm
시편 118편 22절
예수님을 상징하는 돌과 그 의미를 살펴보자.
번호 | 상징하는 것 | 담겨 있는 뜻 | 관련 성구 |
1 | 흔들리지 않는 반석 | 성도를 견고하게 세우시는 예수님 | 시 62:2, 6 |
2 | 건축자의 버린 돌 |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 |
시 118:22 |
3 | 영원한 반석 | 성도를 만족시켜 주시는 예수님 |
사 26:4 |
4 | 부수는 돌 | 세상을 정복하시는 예수님 | 단 2:34 |
5 | 머릿돌 | 교회를 세우시는 예수님 | 슥 4:7 행 4:11 |
6 | 기초 석 |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예수님 |
고전 3:11 |
7 | 신령한 반석 | 성도에게 신령한 양식을 공급하시는 예수님. |
고전 10:4 |
8 | 모퉁이 돌 | 성도와 연합하시는 예수님 | 엡 2:29 |
9 | 택함 받은 돌 | 성부에 의해 구원자로 세움 받은 예수님 |
벧전 2:4 |
10 | 산(生) 돌 | 성도를 살리시는 예수님 | 벧전 2:4 |
11 | 보배로운 돌 | 여호와와 성도들에게 가장 귀하신 예수님 |
벧전 2:4, 7 |
12 | 부딪치는 돌 | 불신자에게 거리낌이 되시는 예수님 |
벧전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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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33~42절
본문에서 포도원 농부들은 아주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옵니다
우리도 포도원 농부처럼 이기적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하는 농부들을 위해 주인은 포도원의 모든 시설들 만들었습니다
포도원은 주인의 것이고 농부들은 잠시 주인을 대신해 맡아서 책임지는 임무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포도원이 자기의 소유라고 착각하여 이것을 차지하여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내쫓고 죽이고 주인의 아들마저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지금 가지고 있는 물질, 가정, 직장,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들이 내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기에 이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고 있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에게 많은 종들을 보냈고 아들까지 보내셨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시고 이들이 바뀌기 위해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셨습니다
나중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바뀌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 형벌에 처해 자신의 이득권에 지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본문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십자가 죽음 이후 부활로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 죄많은 인간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전세계 교회가 세워집니다
건물의 머릿돌은 건물의 상징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변화 받아야했지만 오히려 정치적인 시각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갑자기 굴려떨어져 박힌 돌로 취급한 것입니다
마치 건축자가 내다버린 돌처럼 바라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으로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 전세계 사람을 죄에서 건지시는 구원자로 거듭나셨습니다
건물 모퉁이의 머릿돌같은 교회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십니다
우리도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쓸모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머릿돌처럼 귀히 쓸때가 다가올것입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주인은 죽은 아들로 인해 오히려 원만한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농부들을 향한 주인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원만한 관계를 맺기른 원하고 죄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하심은 측량할 수 없이 위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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