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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

시편 1편 해설-시편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하는 시편 1편 ]

by 은총가득 2021. 4. 17.

시편 1편 해설-시편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하는 시편 1편 ]

서론

시편 1편은 시편 2편과 더불어 전체 시편에서 서론 역할을 합니다. 시편 1편의 초점은 “토라에 대한 순종이며,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와 악한 자를 구분”에 둡니다. 토라에 대한 순종은 거룩한 모임(회중)에 속할지 배제될지를 결정짓는 기준이 됩니다. 시편 1편은 레위인의 문지기 같이 서 거룩한 무리의 들어올 자와 배제될 자를 갈라냅니다. 브루그만(Brueggemann)에 따르면, 시편의 기도가 토라의 경건과 순종에 근거하며 의존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시편을 낭송하거나 부르며 묵상할 때,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을 이 둘 가운데 하나로 동일시하였을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이 시편을 어떻게 적용하며 어떤 인식 속에서 묵상하고 찬송으로 불러야 할까요? 구약과 신약은 그 형식에 있어서 시행의 차이를 갖지만, 본질에 있어서 동일합니다. 즉, 구약은 예표요 신약은 성취라 할 때, 구약은 율법 체계와 의식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신약은 율법이 가리키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모든 것을 밝히 보고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이나 구약이나 모두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도들은 신약의 빛에 비추어 구약의 시편을 해석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들이 의인의 모임(회중)에 들거나 들지 못하는 기준으로서 토라에 대한 신앙과 순종을 돌아볼 때, 우리는 그 율법, 토라가 바라보던 그러나 우리에게는 역사 속에 찾아와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구약 전체, 시편 전체는 토라를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신약의 빛에 비추어 시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예표하던 토라가 구약 백성의 정체성을 규정 짓 듯, 새 언약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토라가 바라보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본질이 같은 은혜 언약으로 신약의 빛 아래 시편 1편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순종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도 이 시편을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 보며, 이 시편의 의도는 옛 언약, 곧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방식이었던 “율법”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전체의 핵심은 율법을 통해 하늘의 지혜 추구에 자신의 마음을 쏟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임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예표적 성격을 띤 율법을 통해서, 신약에서는 율법이 예표하던 바가 성취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자들만이 복된 자가 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될 것을 시편은 요약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 의인에 대한 축복 (1:1-3)

a. 복 있는 사람 (1-2절)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절과 2절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교훈합니다. 1절과 2절에서 시편 기자는 먼저 복 있는 사람이 취하는 삶의 태도를 밝힙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나타난 근원을 밝힙니다. 복 있는 사람들이 맺는 삶의 열매는 여호와의 율법을 깨닫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구약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조건으로 구원받았거나 율법에 순종하는 공로로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옛 언약의 특징인 “율법” 안에서 예표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던 자들은 옛 은혜 언약에서 용서와 성령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던 자들은 율법을 통해 바라보던 그리스도의 구속적 은총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간 의인들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구약 백성들에게 임한 복이고 열매입니다. 오늘날 새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용서와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갑니다. 본문의 말씀과 동일하게 성도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죄책을 용서받고 자녀로 용납되어 하나님과의 파괴된 관계가 회복된 칭의 받은 백성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맺게 되는 열매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의 열매는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증거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수 많은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불경건성을 분별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살고,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지만, 세상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불경건성과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지만 우리는 그들과 언약을 함께 나눌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 때도 그들의 불경건을 따라가거나 수용하거나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잠시 머물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시민권자요 세상에 대하여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 저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교훈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복 있는 사람”은 “행복함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복 있는”에 해당하는 단어는 rv,a,(에쉐르)에서 온 것으로 “행복”, “복”을 의미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행복함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 욕정을 따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정욕을 따르고 자신의 욕구를 채울 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성도들로 하여금 그러한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행복은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순종할 때 찾아오는 것이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서지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참한 사람들, 복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의 특징을 본문은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비참한 사람들은 악한 길을 걷고, 악한 길에 서며, 악한 길에 앉습니다. 비참한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으로 살지 않고, 순종으로 살지 않습니다. 빛에 거하지 않고 어두움에 거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성도가 피하고 경계할 것은 이러합니다.

첫째,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꾀”는 “충고”, “조언”, “의논”, “결의” 등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공공연하게 드러나지 않은 사악”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만연한 악한 풍속과 방식을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성경을 떠난 사상과 철학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사악함에 물든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나온 권모술수나 삶의 자세를 배워서는 안 됩니다. 악한 자의 충고와 조언과 의논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꾀는 부패한 지혜와 같은 것입니다. 부패한 삶의 방식과 철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갈지 물어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해야 합니다. 부패한 사상과 얄팍한 꾀로 삶을 도모하려는 불경건한 벗들의 충고와 조언에 들어있는 해악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와 셋째,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악한 꾀로 사는 삶이 축적되면, 더 심각한 상태가 됩니다. 그는 죄인의 길에 서게 됩니다. 마음과 삶의 방식에 선한 길이 놓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악인의 마음과 삶에는 사악한 길이 고착됩니다. 길은 습관적인 생활 방식이나 양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길”은 &r,D,(데레크)인데, 길이란 단어에는 길, 도로라는 뜻도 있지만, 오랜 반복된 생활의 축적이 만드는 태도와 습관이란 뜻도 담겨 있습니다. 악한 꾀를 버리지 않고 반복하고 살아가다보면, 악한 꾀들은 고착된 삶의 태도와 습관을 만듭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에 서다”는 의미는 악한 생활의 태도와 습관이 고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삶이 죄인의 길에 서게 되는 것을 완악하다고 말합니다. 오만한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처럼 악한 꾀를 따르고 이것이 고착되어 사악한 길이 마음에 놓여 질 때, 그 절정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지극히 완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마지막 단계, 오만한 자리에 앉는 것을 “절망적인 고집의 단계”에 다다른 것이라 표현합니다. 이처럼 꾀를 따라 걷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는 표현은 불신 속에서 불경건하게 사는 삶의 태도와 결과들을 점층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마지막 단계까지 이를 때 이런 사람들의 비참을 칼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모두 팽개쳐버린 나머지 벌을 받지 않고 피할 수 있다는 속셈으로 거침없이 죄를 범하고 자신들은 마치, 결코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행실을 설명하라는 부름을 받지 않을 사람들인 양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이 없이 그의 심판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을 가리켜 ‘조소자들’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편 구절은 그리스도를 떠난 불경건한 무리들과 사악한 삶의 태도와 방식들을 성도들이 분별하고 그러한 무리들로부터 스스로 떠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편 사회에 나아가 살아가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러한 사상 속에 속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를 반대로, 곧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예배자들로서 성도들은 자기 생활의 틀을 올바르게 잡아 가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어 성경적 삶의 태도와 습관을 길들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악인들과 다른 길을 내고 그 위를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경과 성령께서 선한 길을 내어주신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성도의 삶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이 2절의 답변입니다. 구약은 그것을 “율법” 칼빈은 다윗이 말하는 율법이 성경의 다른 부분을 제외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는 율법에 대한 하나의 해설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머리격인 이 율법 밑에 전체 몸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옳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율법을 칭송하면서 영감으로 된 나머지 글 모두를 거기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라 표현합니다. 신약의 빛에 비추어 이 말씀을 재해석하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용서가 임하고, 새로운 마음이 임하고, 열매가 맺혀질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과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신앙을 추구하지 않고 유일한 경건의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율법을 사모함을 갖고 묵상하는 자에게 생명의 열매가 맺힙니다.

b. 의인의 복된 상태 (3절)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절은 앞에서 언급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복된 상태가 무엇인지를 은유법을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복된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이 복됨은 덧없고 허황되고 일시적인 기쁨 속에 있는 사람들과 대조적인 의미에서 바람직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복되기 원하지는 진정 복된 상태가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시편 기자는 복됨의 상태를 나무라는 비유를 통해 묘사합니다. 일시적인 외형에 있어 동일하게 보이는 나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두 나무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경건한 성도를 나무라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심겨진 상태가 중요합니다. 그 나무는 모래밭도 아니요, 돌작밭도 아니요 가시밭도 아닌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라고 묘사합니다. 동일한 두 묘목이 하나는 불모지에 심겨지고, 하나는 시냇가에 심겨질 때, 몇 칠은 두 묘목이 동일해 보일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 금새 서로 다른 상태를 보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동일해 보이던 묘목들이, 불모지에 심겨진 묘목은 얼마 못가서 시들고 초라한 모습으로 말라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든든히 자라가 풍성한 잎사귀를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어디에 심겨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들도 묘목처럼 인생 속에서 무엇인가에 뿌리를 내리고 삽니다. 인생은 그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인생의 뿌리를 하나님 말씀에 깊이 내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생명의 근원인 마음을 세상에 둡니다. 그들은 인생의 뿌리를 일시적이고 쾌락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에 깊이 내리고 삽니다. 하나님 아닌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물 근원이 없는 불모지에 뿌리를 내려 일시적으로 잔존하는 수분에 만족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은 현실적이고 쾌락적인 행복에 만족해합니다. 재물과 명예와 쾌락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생명의 근원이 없습니다. 뿌리를 내리려 하지만, 소량의 수분도 얻을 수 없고, 척박한 땅에서 영양분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심겨진 나무는 불모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서, 곧 수분과 양분이 부족하여 말라 죽게 됩니다. 어떤 잎사귀도 꽃도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척박한 땅이란 세상이고 성경이 이렇게 묘사한 가치관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26).

마음을 세상에 두고 인생의 뿌리를 세상에 내린 불경건한 자들이 상태는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씨 뿌리는 비유”와 너무도 흡사합니다.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1-12).

불경건한 자들의 상태는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와 대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고 인생의 뿌리를 내린 사람들은 생명 없는 곳에 심겨졌기에 결코 생명에 이르는 뿌리를 내릴 수 없고, 뿌리가 조금 나온다 하여도 수분도 양분도 얻을 수 없어 말라져 시들어 버립니다.

시냇가는 무엇을 비유합니까? 경건한 자의 상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모신 상태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마음을 두고 인생의 뿌리를 내리지 않고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을 두고 인생의 뿌리를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내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심겨진 곳은 생명의 땅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인생의 뿌리를 내릴 때,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수분을 얻고 양분을 풍성하게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성령의 은총을 통해 수분과 양분을 풍성히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뿌리를 내린 신앙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꾸준히 번창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번창이란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경건한 사람들에게 은밀한 영향력으로 항상 공급받게 하셔서 모든 상황과 모든 일들 속에서도 구원에 유익하게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이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인생의 뿌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내리고 살 때, “철을 따라” 곧, 모든 계절에 생명력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뿌리를 옥토에 든든히 내리고 있어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깊게 내린 뿌리로 시내라는 물 근원으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 모진 비바람에도 견디고, 가뭄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나 불모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비바람이 불면 곧 넘어져 뽑히고,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말라 버립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2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가운데 생명의 진액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매튜 헨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모든 선한 말과 일에 더욱 적합한 자가 되어간다”고 교훈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을 두고 사는 경건한 사람들의 신앙과 삶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입었다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의도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의 기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라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들의 특성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할 것이라 했으니,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을 두고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자신들의 연약함과 환경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오점을 남기거나 망하는 길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말씀에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깊이 내린 뿌리로 하나님의 은총, 곧 수분과 양분을 빨아 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다스리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과오와 멸망을 피할 수 있습니다.

2. 악인의 말로 (4-5절)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시 1:4-5).

앞 구절들이 의인의 실상을 밝힌 것과 대조적으로 4-5절은 악인의 실상을 밝힙니다. 앞에서는 의인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로 비유되어, 그들에게 내려진 복된 삶이 생명력과 안정감에 있다고 묘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에 비유됩니다. 의인의 삶이란 항상 푸른 잎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생명력을 지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리 새 찬 바람이 불어오더라도 신앙적으로 결코 넘어지지 않는 안정감을 보입니다. 그들은 세파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복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겨와 같이 산들 바람처럼 약한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흩어집니다. 악인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생명력이 없고, 안정감이 없어 평강이 없습니다.

악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의 기준과 생활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이고, 그의 전반적인 삶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어그러진 방향으로 치우친 사람들입니다.

시편 기자가 “겨” 혹은 “쭉정이”이로 그들의 생명 없음과 안정 없는 삶을 비유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악인들이 결코 항상 그 환경에서나 소유에 있어서 불안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악행 속에서도 환경적, 가정적,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부요한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악인들이 잠시의 번창을 누리더라도, 하나님 없는 인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사는 삶은 결코 생명에 속한 열매들을 맺을 수 없을뿐더러, 작은 세파와 바람에도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그들은 “겨”처럼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삶은 어떠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그들의 생은 하나님께 뿌리내리고 있어서 모든 세파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뿌리를 시냇가에 내려 때가 되면 열매를 냅니다. 깊은 뿌리를 내려 큰 바람이 불어와도 뽑히지 않습니다. 복음과 은총은 성도를 끝까지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러나 불신과 패역은 심판과 함께 궁극적으로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은총에 뿌리를 박고 있는 성도와 교회는 결코 흔들리지 않지만, 불신 속에 사는 사람들은 진노의 거센 바람을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겨(모츠, $mo)는 알맹이가 없습니다. 겉은 화려해도 그 안은 허무하기 그지없는 삶입니다. 겨는 그런 의미에서 쓸모없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가치를 상실한 자의 삶입니다. 겨는 알곡을 거두어 들이는 농부를 성가시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키질을 하여 겨를 알곡으로부터 떨어 냅니다. 세례 요한은 악인의 말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1:5)

그러므로 4-5절이 성도들에게 교훈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성도가 받은 최고의 복은 이 심판을 피할 수 있게 만드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늪에서 건짐을 받아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성화의 길에 서게 하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복음의 은혜,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시키시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길을 걷게 하시는 성령의 성화의 은총이 성도의 복입니다. 복 있는 자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같다고 했는데, 성도는 용서 받아 하나님 안에 거하며,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순종의 삶을 시작하고 걷는 자들입니다. 이 모든 은혜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누립니다.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할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의(義)를 힘입어 양심의 자유를 누립니다. 성도들은 새 마음을 받아 용서 안에서 매일 회개하며 순종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중에도 용서에 힘입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려 그분의 생명의 진액을 받아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최고의 복은 선한 양심을 은혜로 소유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용서 안에서 선한 것을 추구하는 생명력을 갖게 되었고, 험한 시험 속에서도 그리스도와 신앙으로 연합한 자는 시냇가에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결코 뽑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바람에 나는 겨를 분리시킵니다. 악인과 의인을 구분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바람이 불면 겨는 날리고,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는 뽑혀집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 때, 견디는 나무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린 나무로 판정을 받습니다. 악인과 의인의 정체성을 심판이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궁극적 심판이 아직 임하지 않았고, 악인들의 형통이 만연할 수 있으니, 양과 염소의 완전한 드러남은 최종 심판을 통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자신의 양심이 자신의 사악성을 정죄하고 그들을 심판으로 소환하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번영도 그들의 마음에 안식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불신과 악행이 불러오는 현재적 심판과 종말적 심판이 악인을 언제나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합니다. 의인의 회중에 속한 것이 복입니다. 회중의 무리에 들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정결케 하는 보혈의 능력으로 씻음을 받지 않은 영혼은 회중의 무리에 들 수 없는 것입니다. 믿고 회개하여 성령을 모신 자만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3. 중립지대는 없다! 인생은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이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6절의 한글 번역은 “무릇”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키”(yKi)를 번역한 영어 “for”을 다시 번역한 것입니다. “무릇”은 “따라서”, “그래서”, “결국” 등 결과적 용법을 따른 것입니다. “키”는 악인의 심판의 확실성과 확고함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것입니다. 악인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속성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구원은 그분의 공의와 관련된 것입니다. 의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심판을 받으시고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그들에게 전가하여 그들을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의롭게 된 자들에게 성령을 주사 그들이 용서 안에서 순종의 완전을 향해 순례할 수 있도록 생명과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를 만족하시는 방식으로 죄인을 구원하시고, 구원하신 자들이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한 생활을 하도록 성령을 통해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구원을 결정합니다. 죄인은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믿음이 낳는 순종의 열매를 하나님 앞에 올려 드려 우리의 구원의 진정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인정 하신다”는 말의 뜻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정하신다”는 말은 “[d'y:”(야다)입니다. 이 말은 “알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지 지적으로, 사변적으로,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인격적이고 관계적으로 아는 앎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아십니다. 인격적으로 관계적으로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고,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주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시고, 우리를 그 안에서 아십니다. 여기서 아신다함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시고 성령을 주사 당신을 따라오게 하신 자로서 우리를 아시고 관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신앙과 회개 나타낸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리고 자녀로 관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시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주신 자들을 아시고 관계하십니다.

그러나 불신자들도 아십니다. 그들은 그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부하며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을 아시고 패역함을 아시어 심판자로 관계하십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부인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도 부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향해 그들을 도무지 모르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신을 인해 그들을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 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 우리에게 신앙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구원의 감사의 열매로 순종을 추구해야 합니다. 의인의 회중에 들게 하신 것이 은혜인줄 알아 교만하지 말고 자기 자랑을 말아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의인을 인정하시고 악인을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기억하며, 더욱 신앙으로 살며, 순종으로 살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by 박동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