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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내용요약 및 묵상 가이드

by 은총가득 2021. 4. 25.

저자 : 사도요한


사도요한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계시록의 환상적인 비전을 연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초기 제자 시절,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받았다(막 3:17).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는 것을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 하므로(눅 9:49) 요한이 중지시키려고 했다. 또 한 번은 사마리아를 거쳐 여행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쉴 자리를 제공하려 하지 않자 요한과 야고보는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어보기도 했다(눅 9:51-55). 또 이후에는 이 형제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다가올 예수님의 왕국에서 예수님 옆에 앉는 권위 있는 지위를 아들들에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마 20:20, 28).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세 장면에는 예수님의 깊은 이해심과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님을 지상의 지배자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말년에 에베소 교회를 지도하던 요한의 모습은 크게 변화돼 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의 사랑처럼 단순하고 이기심 없는 사랑에 대해 말한다. 초대 교회 전통에 의하면 노년의 요한은 아주 약해지고 걸을 수 없어서 교회 모임에도 들 것에 실려 왔는데, 언제나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계속해서 속삭이고 했다고 전한다.

 

예수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또 초대교회 지도자로서 여러 해를 지낸 요한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기본적인 중심 메시지만을 전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는 이렇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는지, 또 왜 자신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는지 이해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사랑을 소유하고 계신다. 이 사랑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사랑이며,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 동일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마 22:37 -40) 이 단순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무엇이 요한을 이처럼 변화시켰는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다. 이것이 천둥처럼 요한의 영혼을 바꾸었고 그의 공격성과 교만을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을 사 랑하는 것으로 변화시켰다.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변화되었으며 나이가 들수록 주님을 향한 열정이 더해갔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신비주의자요, 공복()이었던 시에나의 캐더린(Catherine of Siena)의 통찰력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요한과 또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 잘 조명해 준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에 대해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의(여기서 나는 하나님을 가리킴) 선함이 다른 방법으로는 너희와 가까워질 수 없음을 보았을 때, 나는 그를 십자가의 나무 위로 들어 올렸다. 나는 그 십자가를 모루로 삼아 이 인자(사람의 아들)를 망치질하여 인류를 죽음으로부터 풀어 주고, 은혜의 삶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도구로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그분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그분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고,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사랑에 끌려오고 있다. 그분 은 당신을 위해서 그분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보일 수 없었다(요 15:13). ....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는(요 12:32) 말씀은 두 가지 면에서 사실이다. 우선, 내가 말한 대로 인간의 마음은 사랑과 모든 사랑의 능력에 끌린다. 만일 기억, 이해, 의지, 이 세 가지 능력이 내 이름과 조화롭게 연합하면, 네가 하는 그밖에 모든 일들은 실제로 행하거나 또는 생각에 머물러 있거나, 사랑의 운동을 통해 평화 속에서 나와 연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사랑을 추구함으로써 들림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캐더린은 마음의 능력을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로 나눈다. 요한의 생애에서 그의 마음을 이루는 이 요소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끌려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 그를 바꾸어,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많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요한복음에 기록하고 있다. 그의 복음서에는 믿는다 라는 단어가 90회 이상 나온다. 요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께로 다른 사람을 인도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함으로써 예수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서신들은 오직 사랑에 머물러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당부한다. 요한은 복음서에서는 믿으라고 강하게 말한다. 그리고 요한 서신에서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요일 2:6)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요일4:21) 권면한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계시록에서 만세에 영원하신 왕을 만났을 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계1:3) 기록했다. 요한의 의지는 온전히 예수님께 의탁되었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일은, 자신과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아마 예수님은 제자 가운데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신 것 같다. 확실히 요한은 예수님과 특별한 경험들을 나누었던 야고보, 베드로와 함께 핵심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요한은 선택된 것은 물론 십자가 사건 이후에 마리아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했다(요 19:25-27).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들을 포함해서 그분을 따르는 누구라도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하셨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놀랍고 끝이 없는 우리 구세주의 사랑을 진실로 경험할 수 있다. 그렇듯 요한 역시 능력 있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라고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1. 요한일서 내용 요약  묵상 가이드

 

요한은 비록 교회가 갈등을 겪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빛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첫 번째 편지를 썼다. 교회 내에 분열이 생기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이고 어떤 것과는 타협해서는 안 되는지 무척 혼란스럽다. 요한은 편지 수신인들에게 명백함과 소망, 기쁨을 주기 위해 믿음의 기초가 되는 생명의 말씀으로(1:1) 되돌아가야 한다고 적고 있다.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생명의 말씀을 숙고해 분별력을 키우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머물러 있을 것을 권면한다.

 

역사적 배경

초대교회 전통에 의하면 요한 서신은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이 썼다고 전한다. 서신서와 복음서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제와 집필 양식이 많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학자들이 그 주장이 합당한지를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 등장하는 그 장로를 동일인으로 볼 수는 있지만, 사실 서신에는 저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많은 학자들은 요한 서신과 요한복음의 공통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랑받는 제자 요한이 양쪽 모두를 쓴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또 하나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서신이 쓰여진 지역과 시기에 대한 주장이다. 요한 서신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1세기 말에 쓰였다는 것이다. 저자 요한은 거대한 지역 사회에 대해 목회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한 교회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동시에 다른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경고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믿음과 영성 그리고 실천에 관한 것들이 주된 내용이다.

 

십자가의 길

 

요한일서

 

불일치의 시대에는 다음 두 가지 잘못된 방법 가운데 어떤 것이든 한 가지가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나타난다. 곧 진리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분간할 수도 없는 것이라 여기고 도덕상의 방종이나 값싼 은혜로 반응한다. 아니면 자기 의라는 자만심에 빠져 마치 자신이 진리의 소유자인양 반응한다.

요한 서신은, 불일치에는 오직 이런 선택 방법 밖에는 없다고 믿게 만드는 절망의 베일을 걷어 낸다. 베일 뒤로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세 번째 방법이 계시된다. 바로 십자가의 방법으로,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극단적인 정죄이자 동시에 극단적인 은혜의 방법이다. 큰 희생에 힘입어 어둠이 영원한 빛을 대면하게 된다. 빛에 드러나면 우리는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던 어둠의 실체를 알게 되고, 나아가 이것들이 빛이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힘을 잃고 쫓겨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영원히 임재하시면서 우리 삶에 빛을 비추시어 우리를 인도하고 죄를 용서해 주신다. 또한 능력을 공급해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주변 세상과는 구별되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요한 서신을 보면 인간의 존엄성은 깨어지고, 또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계속해서 도전받고 있다. 하지만 악이 부인되거나 그 힘이 최소화되고, 하나님이 정결케 하시고 부르신 자들과 우리가 끊임없이 교제한다면 악이 확산되어 가는 와중에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빛이신 하나님

 

요한일서

 

어떤 혼란과 갈등 가운데 있더라도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면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서신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관하여 일깨워 주고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요일 1:5), 하나님의 성품에는 어둡거나 잘못되거나 사악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완전히 공의로우시며 사랑이시고 올바르시다. 실제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과 전적인 신실하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사랑은 자신을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이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하고(1:7), 그분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자신을 죽는 자리에 내 어 주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이것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고립에서 사랑의 사귐으로, 죄에서 의로 옮긴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는 것이다(3:9).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인 빛과 사랑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비록 자녀가 부모의 성품을 그대로 닮을 수는 없지만 그들이 부모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닮기 위해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 빛과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 빛과 사랑 안에 거하도록 허락하고 초청하고 계신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이 온 세상을 위한 선물임을 알게 하셔서 그 선하신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도록 우리를 능력으로 덧입혀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방식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요한 서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기를 계속하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한 화해자가 되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기록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중재자이신 주님의 역할을 신뢰하는 것이다(2:1). 그것은 또한 우리는 자주 실패하며,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정결케 되어야 하며, 또한 예수님과 같아지기 위해 늘 새롭게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또한 아버지 하나님도 소유하지 못한다. 구원은 아들을 통해 맺는 아버지와의 역동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랑하는 방식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치 온 세상이 감지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눠 주는 것을 의미하며, 말로써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을 주는 사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 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삶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지속성과 신실함과 서로에 대한 헌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빛 가운데서 행함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이미 고정된 상태의 완성에 도달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3). 거함(abiding)과 행함 (walking)이라는 상징 속에 나타나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에 역동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부름을 받았다. 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녀들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아들이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빛 안에서 행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내재하심을 확증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능력을 입히시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요일 5:20)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한 서신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한다.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의 삶과 명령에 따라 빚어 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다(요일 5:15).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을 안다(요일 4:4). 또한 우리의 새로운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겸손하게 나타내라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도 안다.

- 케리 디어본(Kerry Dearborn)

 


요한이서 내용 요약 묵상 가이드

 

요한일서와 마찬가지로 요한이서는 독자들에게 초대교회의 도전과 관행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신앙과 정체성의 핵심을 강화해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방황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나아가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거짓 교사들을 멀리하라는 경고도 담겨 있다. 저자는 사랑하는 선한 목자로서 자신의 양 떼에게 단단한 음식을 먹인다. 또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과 그리스도인 간의 교제에 독약이 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 그는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좋은 소식을 왜곡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요한이서 주석

 

하나님의 선물에 관한 약속들

이 편지의 수신인은 가정 교회를 인도하는 여인이거나, 아니면 선택받은 귀부인 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된 교회일 수도 있다. 장로 라는 명칭에서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향한 친밀한 사랑이 느껴진다(1:1). 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그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들이 영원히 가지게 될 공통의 진리라는 유산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세상의 지식처럼 언젠가는 퇴색되어 버릴 명제로 이루어진 원칙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영원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창조적인 힘을 가리키는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다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역동적으로 나타내면서 살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기뻐한다. 그는 그들이 함께 살아 가는데 있어서 무엇이 핵심이 되어야 하는지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이다. 진리는 사랑 속에서 나타나며, 흔들리는 감정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영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행동(actions)과 관계(relationships)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

 

요한

 

사랑이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리에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한다. 많은 거짓 교사들 이 시대적인 가치와 견해에 맞게 진리의 모양을 바꾸려고 했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심을 부인하는 어떤 이들이 있었다. 만일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시라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공허한 개념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완전히 동일화되시지도 않았고,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로부터 정결케 하신 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우리에게 온전히 게시하지도 않으셨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 힘만으로는 삶에서 이기심을 극복할 수 없게 되고, 사랑이 무엇인지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 희생적인 삶이 우리에게 준 약속들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 요한은 거짓 교사들이 이런 큰 해를 부르는 거짓말을 더 이상 퍼뜨리지 못하게 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가진 은혜와 긍휼, 하나님의 평강, 사랑의 빛 가운데서 행하는 자유,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영생의 선물 등을 잃지 않기 바랐다. 장로 요한은 그들에게 거짓 교사가 집(혹은 가정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라고 명령한다. 진실과 사랑은 가장 높은 부름이며 절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어두움에 빠지거나 혹은 그 어두움을 믿음의 공동체 속으로 끌어들이면 사랑은 힘을 잃는다.

 

장로는 수신인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과 직접 만나 교제하기를 바란다. 서로 함께하는 것은 어떤 대화나 인간관계보다도 사랑을 더욱 성숙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갈망하는 완전한 기쁨이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본질이다.

- 케리 디어본(Kerry Dearborn)

 


요한삼서 내용 요약 묵상 가이드

 

신약에서 가장 짧은 책인 요한삼서의 쟁점은 순전함과 사랑이다. 장로 요한은 자신이 사랑하는 가이오가 진리 가운데 행하고 있음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 또한 손님을 대접하는 방법과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행 중인 사람들을 환영하라고 일러준다. 한편 또 다른 지도자 디오드레베에 대해 고민했는데, 그는 장로의 권위를 거역할 뿐 아니라 그가 보낸 사신도 대접하지 않았다. 또 그들을 환영하는 교인들을 교회에서 출회(船會)하기까지 했다.

 

분별할 것을 부탁함

여관이 없었던 초대교회 시절, 손님 접대는 선교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을 파송했을 때에 나타났던 것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숙소와 음식을 제공해 주는 사람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다(마 10장; 막 6:10, 11). 저자는 요한이서에서 거짓 교사를 영접하지 말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했다. 한편 그리스도인이라면 환영하라고 분명히 밝혔다. 곧 순회 전도자들을 잘 분별하여 그들을 환영할 것인지 아니면 문을 닫아 걸 것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이런 것을 분별하는 열쇠는 성품(character)과 내용(content)이다. 요한의 성품은 사랑의 성품이었으며, 그는 친구 가이오의 영혼과 육체가 잘되고 강건해지는데 관심을 가졌다. 장로에게 기쁨은, 그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순전하게 행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이다. 그의 권면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사랑과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이오는 다른 사람의 증언을 들어 보건대 성품이 좋은 사람이다. 그는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에 나타난 메시지를 몸소 실천한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알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처럼 그는 사랑이 넘치며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그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자신의 집에 영접한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단순히 접대만이 목적이 아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손님을 대접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후한 접대와 사랑을 받는 것이다. 장로는 사랑을 표현하고, 또 자신의 친구를 무척 칭찬한다. 또한 교회를 거짓 가르침과 행동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며 교회를 굳건히 세워 나가고 있다.

 

성품과 메시지에 대한 관심

 

대조적으로 디오드레베는 이런 은혜와 지혜를 갖추기에는 성품이 따라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장로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를 내세운다. 장로에 대해 거짓말을 퍼뜨리고, 장로가 보낸 사람들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영접하는 것까지 금지한다. 만일 그들이 지시를 어기고 선교사들을 영접하면 교회에서 출회한다. 그는 여행객들로부터 어떤 내용이 전해지는지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욕심과 권력에만 몰두해 있으며, 따라서 서로 사랑하며 교회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복음의 진수를 나타내는 일에는 실패한다.

 

장로 요한은 친구 가이오에게 분별력 있게 행동하여서 악한 것이 아니라 선을 위한 모범을 보이라고 권면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과 방법을 따라 선한 일들에 전적으로 충성하라고 권면한다. 더불어 뭇 사람에게 성품이 선하고 가르침이 훌륭하다는 데메드리오를 본받으라고 독려한다. 요한이서에서와 같이 저자는 자기 친구들을 직접 만나 보고 싶어 한다. 또한 가이오에게 평화의 복을 보내면서 그곳에 있는 친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안부를 전해 달라고 당부한다.

- 케리 디어본(Kerry Dearborn)


유다서 내용 요약 묵상 가이드

 

유다는 누구인가? 그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1절)라고 말한다. 모든 가능성을 종합해 볼 때 야고보는 마태복음 13:55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가룟인 아닌 유다의 아버지가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눅 6:16; 행 1:13),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야고보도 유다의 형제로 소개된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유다는 예수님의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유다서, 진리를 위한 싸움

 

거짓 교사를 조심하라

유다는 언제 이 편지를 썼을까? 편지 내용을 토대로 하면 1세기 중반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유다는 예수님의 재림과(1,14, 21, 24절) 교회에 침투한 무법주의적인 이단의 본질에 대해(4, 8, 10, 12, 13, 16절) 언급했다. 그와 같은 상황은 1세기 중엽에 벌어진 일들이다.

 

한편 1절에서 야고보 이름 앞에 선한 아니면 복받은 이라는 수식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야고보는 아직 순교하지(AD 60년) 않았을 것이다. 이상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보면 AD 50년대 말경인 듯싶다.

 

유다서를 기록한 목적은 아주 단순하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성령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행한다면서 오히려 재앙을 퍼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다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독자들에게 어떤 것이 진정한 영성인지 잘 생각해 보라고 초청한다.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요삼 1:19). 간단히 말하자면, 유다는 짧은 편지에 간결하면서도 직접적인 말을 적어 그리스도의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을 향해 경고하고 있다. 비록 유다가 편지를 쓴 표면적인 이유가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라고 나타나지만, 사실 그는 편지의 독자들에게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요삼 1:3)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다의 편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유다는 복음이 독자들에게 성실하게 전해졌고, 모두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둘째,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퍼뜨리는 구원의 개념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랑이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곧 복음의 핵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표시에는 무엇이 있는가?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거짓 교사는 우리가 몸으로 행하는 일들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인 구성을 이루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처럼 행하면서 자신들의 야만성을 종교라는 베일로 가리고 있다. 그들은 속이 텅 빈 천박한 사람들이며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다(요삼 1:12). 그런 이유 때문에 유다는 독자들에게 권면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짓 가르침이라는 바이러스가 교회 깊숙이 파고들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다서를 읽는 그리스도인은 거짓 교사들의 교만과 이색적인 모습에 대항해 말씀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일찍이 사도들은 후대에 이같이 잘못된 사고와 삶이 팽배할 것이라고 예언해 왔다(17절). 유다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 안에 기초를 닦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권면한다(20-21절).

- 크리스토퍼 A. 홀(Christopher A. Hall) |


요한계시록 내용 요약 묵상 가이드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적게 읽히지만 가장 많은 두려움을 주는 책이다. 이곳엔 사악한 괴물들이 가득하며, 선한 인물들조차도 기괴한 생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4장에서는 각기 6개의 날개와 사방에 귀를 가진 사자, 황소, 인간의 얼굴, 독수리가 등장한다(계 4:7-8). 게다가 본서의 배경들 가운데 일부인 유리 같은 바다, 무저갱, 피의 강들도 예전엔 우리가 전혀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괴물들의 행동은 자주 일관성이 없고 각 행동들 간에 서로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한순간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의 합창 소리를 듣다가, 다음 순간에는 천사들이 이 땅과 그 거민들에게 무서운 재앙들을 선언하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늘 그려 오던 예수님마저도 이 환상 속에서는 이상한 모습으로 변형된다. 피에 젖은 죽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예를 들어, 5:6) 나타나며, 이후에는 눈이 불꽃 같으며, 피 뿌린 옷을 차려 입고, 입에서는 예리한 칼이 뻗어 나오는 용사로 나타난다(19:11-16).

그러나 요한이 황량한 화산섬 밧모의 감옥에서 그랬던 것처럼, 만약 당신이 환상을 목격한다 해도 그 내용을 취사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디오 가게에 가서 당신의 취향과 기분에 맞는 영화를 고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타이밍

 

요한계시록

 

요한의 환상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인 아시아 교회들이나 오늘날의 많은 비서구 문화권 사람들보다는 서구권 사람들에게 더욱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서구인들은 시간을 연속적이며, 뒤로 돌이킬 수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움직임으로 이해하고 있다. 연속적으로 째깍거리는 시계 없이 이 땅에서의 인간 실존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요한의 환상에 나오는 사건들은 줄에 꿰인 구슬들처럼 정연하게 배치되어 한 장면 다음에 또 다른 장면이 순서적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 보좌 중앙에 계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꼴라쥬(collage, 종이나 천 같은 것을 그림에 붙이는 기법)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요한이 본 이 환상이 말하는 동심원적인 이야기 양식은 우리 내면에 있는 영적 시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표 (time line)를 먼저 배열해 놓고 그 다음에 계시록을 풀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로써 초현실주의적 뒤범벅 상태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을 우리가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 결과 계시록은 상징 속에 감추어진 비밀들을 풀 수 있는 열쇠를 가졌노라고 고백하는 개인이나 그룹들의 사적인 영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계시록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당시 이 편지 수신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간단했다. 상황을 받아들이든지 포기하든지 둘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삶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충성을 다짐했던 분인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셔서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사악한 권력들을 굴복시켜 주실 것인지에 대해 절실하게 알고 싶어 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우리의 시계나 달력에 좌우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이 점을 이해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 베드로후서에서도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영원 속에서, 이 땅에서의 시간은 하나님이 품고 계신 현실 속으로 모두 용해되어 버린다.

 

하나님께 통제권을 이양하기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인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는 통제권을 하나님께 넘기는 것이 기다림이라는 훈련을 의미했다.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부활하신 메시아가 자신들의 압제자를 물리치러 다시 오실 마지막 때를 갈망하고 있었다. 요한처럼 그들도 투옥 또는 그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실제로 버가모 교회의 한 성도는 이미 처형된 상태였는데, 로마 황제인 도미티안(Domitian)에게 바쳐진 제단에 분향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계 2:13).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보다는 황제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공문서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들로 언급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요한의 편지를 받게 될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영적 타협의 유혹에 직면해 있었다. 요한은 자신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메시아의 재림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체됨으로써 동료 신자들이 품게 되는 고통스러운 의문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시편에서도 메아리치고 있는 의문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또한 선지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심지어는 예수님에게서도 제기되는 의문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 나이까(막 15:34). 그

 

교회 지도자가 요한의 편지를 읽어 주던 때에 사람들은 지치고 낙심해 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견뎌 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자신들을 위해서 별로 해 주는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께 운명을 걸기로 한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늘에서 경배를 드리고 있는 요한의 환상은, 하나님이 그들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공의를 구하는 그들의 간구를 금대접에 담아 쌓아 두고 계신다는(계 5:8)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 준다. 참으로 그들은 이 땅에서 경배를 드릴 때조차도 그 우주적인 합창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아시아 교회들에게 쓴 편지는 수세기 동안 종말의 때를 예측하는 것으로 수없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측된 수많은 그 마지막 때는 왔다가 사라졌고, 그로 인해 암호를 해독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고난받는 자들을 격려 하고 지친 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했던 목회 서신으로서의 계시록이 지닌 본래 역할이 과소평가되었다.

 

통제권의 이양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통제하라는 사상을 옹호하고 있다.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용해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른 종류의 훈련이 필요하다. 파스칼(Pascal)은 우리가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 모든 인간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시간이라는 베일을 쓰고 있는 우리가 천국을 조금이나마 감지해 보려면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방 안에 또는 나무 등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법을 배워 안팎에서 들려오는 수천 가지 재잘대는 소리들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점점 더 그 나라안에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고요한 침묵은 시간에 얽매인 우리 피조물들이 예배를 위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연한 보좌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천사들과 천사장들 및 모든 천군들의 찬양에 목소리 높여 합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한 경배는 이 땅에서의 여정을 감당해 나갈 힘을 회복시켜 주며, 또한 그 여정의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상기시켜 준다.

 

심판을 기록한 책

 

심판의 예언

 

그러나 계시록이 우리에게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 시대와 문화에 깊은 갈등을 일으키는 주제인 심판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불의를 보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분노의 파도를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공의의 개념은 인류 전체에 퍼져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꼬마들까지도 부모나 교사에게 형평성을 유지해 달라고 호소할 때 그건 공평하지 않아요!라고 외친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공의가 이행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보편적인 바람은 없다. 그것은 나이나 성 또는 문화와 상관없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심겨 있다.

 

불의나 폭력을 겪을 때, 우리는 하나님은 과연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기 원하시는지 알고 싶어 한다. 만약 우리도 숨을 죽여야 할 처지에 놓인다면 시편 기자가 했던 것처럼 오 하나님이여 언제까지, 언제까지니이까?하고 읊조렸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럴 때 불신자들조차도 자신들이 믿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가운데서 요한이 돌보던 아시아의 양 떼처럼, 신앙 때문에 언젠가는 순교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의 재난은 대부분 개인적이며 결혼 관계의 파탄이나 실직, 실업, 치명적인 질병 또는 젊고 전도유망한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는 자녀들의 타락 같은 형태로 찾아온다. 하지만 비록 우리의 삶에 순교의 드라마나 영웅주의 같은 건 없지만 우리가 겪는 고뇌 또한 순교에 못지않게 크다.

 

그럼에도 요한의 환상은 최후의 해방전쟁과 악에 대한 처벌로 시작하지 않는다. 도리어 의인들에 대한 평가로 시작하고 있다. 요한의 첫 환상에서(1:9-3:22)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는 로마 황제나 그의 앞잡이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심판하신다. 충성, 인내, 오래 참음, 사랑과 같은 그들의 자산과 함께 결점들도 보여 주고 있는 영적 보고서들이 제출된다. 일곱 교회는 이 불확실한 상황에 각각 어떻게 대처했는지 밝혀 주는 개별적인 설명을 하나하나 듣고 있다.

 

그와 같은 내적 평가를 수용할 때 우리의 영성은 견고한 토대 위에 놓이게 된다. 현재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정직하게 검토해 보는 것, 잘못에 대해서는 회개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것들을 교정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다. 우리 자신의 소홀함이나 자기기만의 부스러기들을 깨끗이 치우지 않는다면 이후의 모든 조치들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가게 할 것 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풀지 않으면 안될 판단주의(judgementalism)라는 매듭이 남아 있다. 시간에 얽매인 피조물인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해도 공의를 갈망하고 있다(비록 평화를 갈구하는 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런 태도에는 나름의 좋은 면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마 7:1). 따라서 우리도 남을 판단하려는 태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6-18장에 나오는 혹독한 핏빛 장면들은 우리에게 물리적 거부감을 주고 도덕적인 균형 감각을 잃게 만든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사실, 시편에서도 때로는 분노에 찬 복수의 요구가 찬양 속에 배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기에 수용할 수 있었던 시편에서의 분노와 복수가 계시록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계시록의 이 기괴한 중간 부분을 건너뛴 채, 장례식에서 가장 흔히 읽히는 계시록의 마지막 위로의 장으로 넘어가고 싶어진다. 아직도 코에는 지옥의 유황 불 냄새가 자욱한데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요한의 마지막 환상을 충분히 그리고 거리낌 없이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피와 심판의 장면과 열광적 예배 장면들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어린양이다.

 

어린양의 승리

먼저 5장에서 그리스도는 피에 젖은 어린양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는 각 조소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 위한 그분의 희생 때문에(계 5:9)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선포한다. 계속되는 장들에서 출애굽기를 연상시키는 자연 재앙들과 우주적 전쟁 장면들은 어린양에 대한 경배와 맞물려 있다. 그 이유는 피 묻은 어린양이 반전의 위치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의 희생은 피조물 구속의 원천이 된다. 일단 우리가 천국에서 안전해지고 난 다음에는 어린양의 희생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아득한 악몽인 양 잊혀지리 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 속에서 볼 때 그 희생의 행동은 영원하다. 어린양의 피는 결코 무효화될 수 없다. 세상을 위한 전투는 갈보리에서 승리하셨다.

 

그 승리는 우리가 어린양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갈 때 계속 보장된다. 요한은 역사의 종말 때까지 우리가 정사와 권세들과 싸워 나가면서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야 함을 결코 듣기 좋은 말로 꾸미지 않는다. 어린양은 그의 이름으로 인해 우리가 겪는 고난 및 모든 피조물의 신음에 의미를 부여한다(롬 8:22-23). 구속하시는 재판관으로서의 어린양은 심판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님을 확증해 준다. 그 일은 양과 염소를 나누기에 합당하신 분에게(마 25:31-46) 속해 있는데, 이는 그분이 그들의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환상은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그 싸움은 계속 승리를 거두어 왔으며, 여전히 맹렬하게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임을 알려 준다.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은 마술을 부린 듯 일순간에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에 얽매인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영원을 향해 열린 문틈 사이로 비취는 빛의 조명을 받고 있음을 본다. 그 빛은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우리의 기대를 정결하게 해 준다. 우리가 할 일은 기억하고 견디며 기대를 갖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있던 것들이 무엇이었든지 영원의 빛이 그 위에 비취게 되면 그것들은 오래 진열되어 퇴색한 가짜 상품들처럼 보인다. 따라서 지상에서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들은 더욱더 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향해 다가간다.

 

지금까지 우리가 기반을 두고 치열하게 살아오던 삶의 헛된 소망을 뿌리 뽑고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에(요 1:9) 우리 몸을 녹여야 한다. - 버지니아 스템 오웬즈(Virginia Stem Owens)

  by 공부하는 OTFre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