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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벧전 4:7-11)

by 은총가득 2021. 4. 15.

 

 

말세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
(벧전4;7-11)

서론:

1.말세에 대한 사람들의 주장들
1) 말세는 없다.

2) 말세는 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3) 말세는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말세지말이다.

본론:

1. 말세의 뜻
1) 만물의 마지막 ( 4;7전)

(지구의 종말, 세상 문명의 종말 )

2. 말세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말세인가?
1) 예수님 초림부터 예수님 재림까지이다.

( 히.1;1-2,9;26, 벧전,1;20, 4;7전, 고전.10;11, 약.5;3)

3. 말세가 있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성경 말씀의 기록때문이다.

 

4. 말세에 관한 성경 용어들

 


1) 정한 때 끝 (The appointed time of the end )( 단.8;17,19)

2) 이 모든날 마지막 (In these last days) (히.1;2)
3) 마지막 때 (the latter of period) (단.8;23)
4) 세상 끝 ( The consummation of the ages ) (히.9;26)
5) 이 말세 ( These last times) (벧전.1;20)
6) 만물의 마지막 (The end of all things) (벧전.4;7)
7) 말세 ( The ends of the ages) ( 고전.10;11)
8) 말세 ( The last days (약.5;3, 행.2;17 딤후.3;1, 벧후.3;3)
9) 마지막 때 (The last hour) (요일.2;18)
10)마지막 때 ( The last time) (유.1;18)
11)마지막 날 ( The last day) (요.6;39,40,44,54.11;24, 12;48)
12)말세 (The last time) (벧전.1;5)
13)후일 (Later times ) (딤전.4;1)
14)세상 끝 (The end of the age) (마.13;39,40.49. 24;3)
15)끝 ( The end) ( 마.24;6.14)
16)세상 끝날 (The end of the age) (마.28;20)
17)끝날 (The last days) (겔.38;16)
18)마지막때 (The end of time) ( 단.12;4)
19)마지막 때 (The end time) (단.12;9)

 


5. 말세 성도에게 주신 명령 (4;7하- 11)
(말세를 살아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1) 자신의 영혼을 지킴을 위한 명령 (4;7하)


가) 정신을 차리라( Be of sound mind )
바른 마음을 가지라. 바른 영혼을 가지라. 바른 마음, 바른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라

나) 근신하라( Sober spirit)
(기도를 위해서) 취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라. 영적으로 민감하라.
세상에 취해서 살지말라.
(예; 마.24;42-51)

다) 기도하라 (For the purpose of prayer)
마.26;41:
약.5;3 :
살전.5;17

2) 성도 상호간 영혼을 지킴을 위한 명령 (4;8-11)


가) 서로 사랑하라 (agape) ( 4;8중)
고전.13;4-7 :

나) 서로 대접하라 ( philoksenoi) ( (4;9)
환대하다. 친절하다.
갈.5;22 : 자비- 친절,
벧후.1;7: 형제 우애- 형제 친절

다) 서로 봉사하라 (diakoneo) ( 4;10)
사역하다.섬기다. 대우하다. 시중들다. 모시다.

3) 명령 수행 지침 ( 4;8-11)


가) 열심으로 ( 4;8전)
나) 원망 없이 (9후)
다) 은사를 받은 대로 (10전)
라) 각양 은혜를 밑은 선한 청지기 같이 ( 10후)
마)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11 전)
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11후)

결론: 왜 말세성도로서 이 명령들을 순종해야하는가?
1.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하기 위함이다.(11하)
2. 오직 하나님 에게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으시다. 아멘 (11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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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벧전4:7-11)

 

서론

 

신자들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은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어느 시점에 있으며,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어리석은 신자들도 많습니다. 또는 그냥 건강하고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없이 행복하게만 살아도 족하다는 식의 소시민적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도 하나의 역사관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역사관을 가지고 있고 이 역사관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보통 현재가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을 많이 하는데, 거꾸로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종말 신앙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요? 천년만년 아무런 변화 없이 흘러 갈 것인가? 아니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지상 천국을 이루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핵무기, 공해, 자원의 고갈 등으로 인해서 파국으로 치달을 것인가? 만약에 이 세상이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평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진보를 믿는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겠지요? 반면, 비극적인 역사관을 가진다면, 그 비극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노력하든지, 아니면 아예 자포자기의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은 독특한 역사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끌고 계신다는 사상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역사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기초적인 역사관에 더하여, 한 가지 중요한 역사관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신자들이 만물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역사관이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하나님의 최종 목적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 전체는 신자들에게 분명히 우리들이 세상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독인들은 여러 가지 상이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가르침과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께서 한 참 뒤에 오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쓴 지가 2000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님이 오신다고 생각하면서 세상 일을 다 포기하고 어떤 장소에 모여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둘 다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담이 살았던 시절은 세상이 처음으로 생겼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세상 역사로 치자면, 중간 쯤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2000년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각각 삶의 태도가 다릅니다. 아담은 주어진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했고, 아브라함과 다윗은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면서 살아야 했고, 베드로와 요한 오신 예수님을 전파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마지막은 단순한 종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지막’1)은 최종 목적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하셨는데, 그 세상이 이제 최종적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세상이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표를 향해 내 인생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과 무관하게 나는 내 일을 고집하면서 갈 것인가? 예수님께서 공생에 사역을 하면서 가장 처음 외쳤던 메시지가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웠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기도를 위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

 

성경은 종말이 가까웠다고 분명히 가르치지만, 그것을 가지고 신자들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또는 어떤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종말이 금방 올 것이니까 이 세상의 삶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일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한 채 살아갑니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상충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세상이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신자가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종말론적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가의 여부는 기도생활을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위 지식인들, 합리주의적인 자들은 기도생활을 그다지 하지 않는 경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 자체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지침입니다. 종말을 강조하는 집회에 가보면, 그곳에 참석한 이들이 정말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는 방식은 전혀 성경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없이 기도합니다; 근신없이 기도합니다. 실제로 무슨 기도를 하는지도 모르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라는 표현은 거의 같은 표현인데, 미친것, 졸리는 것과 반대되는 뜻입니다. 근신이라는 단어는 5장 8절에 보면, “깨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어 있습니다.

 

아주 중대한 일이 가까웠다고 칩시다. 그럴 때 일수록 허둥대어서는 안 됩니다.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면서 침착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마지막, 즉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세상의 목적을 바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마지막일수록 우리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를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일을 앞두고 게세마네에서 제자들과 기도하였습니다. 몇 시간 후면 잡혀서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런 큰일을 앞두고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3명만 데리고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였으나 제자들은 큰 일이 가까이 왔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깨어서 근신하여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밤새도록 여러 차례 기도하였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하였지만,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야 말로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깨어 근신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력 있는 기도야 말로 참된 종말 신앙의 지표라 할 것입니다.

 

2. 열심히 사랑하라!

 

두 번째로 사도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권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 보다 뛰어난 영적 덕목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방법도 언급하고 있는데, “열정적으로” 혹은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1장 22절에 보면, 이미 베드로는 여기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케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열심히”라는 단어가 1장에서는 “뜨겁게”라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들은 이미 진리를 순종함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는 그들에게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좀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지금 베드로는 세상의 마지막과 관련해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갑자기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좀 더 잘 해 줄 걸”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 못한 점들을 계속 생각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다 잊어버리게 하는 것은 죽은 이와 함께 했던 아름다웠던 추억들입니다. 한 순간이지만, 열심히 사랑을 나누었던 그 일이 자신의 잘못을 다 잊어버리게 하지요.

 

이 점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은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순전히 감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라”는 명령은 불가능하지요. 얼굴만 쳐다보아도 짜증이 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랑은 감정뿐만이 아니라 의지의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기 쉽지 않지요. 그러나 마지막이 있다는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합니다.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 앞에는 우리가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 봉사하라: 각자의 은사대로 청지기 같이

 

세 번째로 바울이 권하는 것은 봉사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앞에서 말한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봉사 혹은 섬김은 “사랑하라”는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여기서 대접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 특히 나그네를 자기 집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 마다 자기 집으로 들여서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천사를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여러 집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 당시 사도와 복음 전하는 자들은 성도들의 가정에서 묵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원망없이” 혹은 “불평없이” 서로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이전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집에서 대접하는 문화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손님 대접을 너무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옛날에는 여관이 없었기 때문에, 부흥 강사들을 멀리서 모시면, 이들은 보통 성도들의 집에서 묵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자기 친척이나 가족들을 집에서 대접하는 것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심방도 부담스러워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심방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접하는 것도, 대접받는 것도 부담스럽게 여기는 오늘날 우리는 베드로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없는 대접은 “뜨거운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어느 순간엔가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 마음이 생기면, 언젠가는 자기 집으로 초청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는 봉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별히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은사, 즉, 선물을 받은 청직이입니다. 청직이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이 은사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말씀과 섬김입니다.

 

말씀을 맡은 자, 즉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말해야 합니다.

또한 섬기는 자, 특별히 집사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섬겨야 합니다. 목사는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집사는 자기의 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급하다는 말에는 풍성히 주신다는 의미가 함의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자신의 말, 자신의 사상을 전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집사가 자기의 힘이나 재산으로 교회를 섬겨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면, 목사가 영광을 받고, 집사가 영광을 받게 됩니다.

 

결론: 하나님의 영광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대한 송영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다시 본문의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울이 여러 가지 권면을 했는데, 그렇게 권면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가까웠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하고,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하고, 청직이 같이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만물의 마지막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지막은 단순히 종결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최종 목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만약 종말이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다면, 지금부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한 지가 2000년이 넘었으니 이제 세상의 마지막이 훨씬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요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평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열심히 서로 사랑하고, 청직이 같이 서로 봉사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하십시오. 물론 이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 이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진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호 목사>

 

 

 

 

베드로전서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기도는 영혼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증거이다. 운동을 하면서 심호흡을 하게 되면 뇌 속에 산소가 많이 공급되므로 정신이 맑아지고 활기를 얻게 되듯이, 기도는 우리의 영을 맑게 하고 활기를 얻게 한다. 그러므로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변화가 많은 세대 속에 살면서 우리의 심령이 정화되고 안정과 평안이 회복될 뿐만아니라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 가운데 들어가려면 우리에게는 진지한 기도가 필요하다.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진지한 기도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러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간단한 원칙을 한 번 정리해 보자!

 

1. 기도의 자세

 

1) 하나님께 회개하는 심정으로

"사무엘이 가로되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 . .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 . .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 . . "(사무엘상 7:5-6).

2) 받은 은혜 감사하는 심정으로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사무엘상 2;1).

3) 하나님의 약속을 구하는 심정으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기도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사무엘하 7:27).

 

2. 기도의 방법

 

마태복음 6:5-15에 보면 예수님께서 참된 기도에 대하여 설명하시다가 기도하는 방법을 말씀하신 내용(주기도문)이 나온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에 의하면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도 아니요, 성령님도 아닌, 하늘에 계신 아버지(성부)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아버지께 상달하도록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 다음 성령님의 역할은 우리의 마음 속에 깨달음과 감화를 주셔서 회개하게 하시며, 감사하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신다. 즉,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실 만한 참된 기도가 될 수 있도록 성령님이 도우신다. 그래서 성령님을 가리켜서 기도의 영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 속에 동시에 개입하실 뿐만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기도를 도우시는 분(성령), 기도가 하늘에 상달하게 하시는 분(성자), 기도를 받으시는 분(성부)질서이다. 이 질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높고 낮은 지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각자가 가지시는 본질과 속성과 권능과 영광은 다 동일하다. 삼위가 한 분 하나님(삼위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동일하게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인데, 다만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인간에게 하시는 목적과 역할이 다르실 뿐이다. 목적과 역할이 다른 세 인격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가 되어 "한 하나님(three-in-oneness)"을 이루신다는 삼위일체는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속성이다. 하지만 성경이 그 사실을 증거하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1) 성령 - 기도를 도우시는 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유 1:20).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 . . " (엡6:18).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 . . " (롬8:26).

2) 성자 - 기도가 하늘에 상달하게 하시는 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 . " (요14:13-14)).
". . .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6).
". . .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16:23-24).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 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3) 성부 - 기도를 받으시는 분
"너는 기도할 때에. . .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 .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 . . . . . " (마6:6-13).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16:23-24).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6).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3;14-15).

 

 

3. 기도의 응답

1) 응답의 종류
즉시 오는 응답 (출15:2-25)
오랜 후에 오는 응답 (눅18:1)
다른 것으로 오는 응답 (고후12:8-9)
응답이 없는 응답 (약4:33)


2)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기도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요9:31, 사59:12, 행8:22)
악한 생각을 품고 기도하기 때문에 (시66:18)
함부로 기도하기 때문에 (행8:18-23)
정욕에 사용하려고 기도하기 때문에 (약4:3)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신1:45, 잠28:9)
부부간에 불화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벧전3:7)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기도하기 때문에 (마5:23, 막11:25)
http://www.voamonline.com/truth-1/004_seriousprayer/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할 때

베드로전서 4:1-11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받게 될 고난의 의미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육체로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육체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어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 육체로 고난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선물은 바로 죄와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죄 짓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를 탐하지 않고, 그렇게 맛있었던 죄의 맛이 이제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유래가 재미있습니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피난살이에 지친 선조 임금이 한 어부가 바친 “묵”이라는 생선을 피난 도중에 먹고는 너무 맛이 있어 감격을 했습니다. 전쟁 중에 임금님 밥상에 그것도 신선한 생선이 올라왔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그 생선에게 금은 할 때 은(銀)자를 쓰서 “은어”라는 제법 품위 있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궁궐로 돌아가서 예전에 피난길에서 먹었던 그 생선을 내오라 해서 먹었더니 피난 때처럼 맛이 없었습니다. 화가 난 선조는 그 생선을 은어라고 하지 말고 “도로 묵이라고 하여라.” 해서 “도루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피난 때 먹었던 음식하고 궁궐에서 호위호식하며 먹는 음식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에서 즐기는 모든 것들은 “은어”라는 이름을 가진 “도루묵”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너무 좋아하는 것들은 한 때는 맛있었지만 지금은 별 것 아닌 도루묵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여러분, 예수 믿기 이전에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아직도 세상에 매여 살던 그때가 그리우십니까?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우상숭배에 빠져 살던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아직 충분히 세상 쾌락을 맛보지 못했기에 세상에서 좀 더 즐겨야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청산할 것을 빨리 청산해야 삶이 가벼워집니다. 끊어버리는 아픔 없이 우리는 결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죄의 맛이 끊어진 삶을 아주 강하게 요구하십니다. 죄악을 탐닉하며,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던 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하니 이제 그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해답이 바로 본문 7절에 나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어찌 보면 협박처럼 들립니다. 아직도 살아가야 할 날이 창창한데, 꼭 그렇게 말해야 합니까? 하지만 우리의 살날을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성도란 어떤 사람입니까?

성도는 내일 삶이 끝날 것 같은 준비를 하면서도, 오늘 하루를 영원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7~10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꼭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저는 여기서 “정신을 차리라”는 말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뭔가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슴은 먹먹하고 머리는 복잡하고 무겁기만 합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는데, 딱히 그 문제가 뭔지 잘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확고하게 세워져 있는 사람은 머리가 무겁지도 않고, 마음이 뒤숭숭하지도 않습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확고한 존재가 계신다면 지금처럼 방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이라도 깨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똑 같은 삶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깨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내 생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풀어달라고 요구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나를 향한,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열망이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한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본문은 정신 바짝 차리고 기도하며 살아야 할 이 때 꼭 해야 할 일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8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잘 알기에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해야 하는 사랑과 차이가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까지 사랑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까지 사랑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 성경은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것은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도 기쁨이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더 큰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허물을 알면서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의 범위를 의지적으로 점점 넓혀 나갈 때, 우리의 삶은 새로워지고, 영적인 자유와 더불어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 기쁨이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선물인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 삶의 불꽃과 같아서 우리가 어둠 가운데서 더 이상 길을 헤매지 않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 불꽃같은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더욱 바짝 차리게 합니다.

 

둘째, 원망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9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저는 대접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동유럽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입니다. 체코 프라하 남서쪽으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인근에 체스키크롬로프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중세기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마치 동화의 세계에 온 듯, 도시 전체가 관광지요 박물관인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숙소에 도착하는 순간, 긴 여행에 지쳐 있는 저희 일행들에게 피로회복제와 같은 역할을 해 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숙소 주인 부부였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 책과 한국에서 온 물건들을 보여주며, 어린 아이처럼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악기를 연주해 주는 등 정성을 다해 이벤트를 열어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팁을 드렸더니, 거듭 사양하면서 “이것은 체코식 환대”라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낯선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그 따뜻한 마음이 참 흐뭇했고 지금도 그들의 미소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3: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접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환대의 공간입니다. 무정한 세상에서 냉대 받던 사람들도 교회만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서럽고 쓰린 마음으로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와 위로의 장막을 쳐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특히 성도들 간에도 서로 대접하되 원망 없이 하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대접하되 불편한 마음 없이 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순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처럼 말이 많은 곳도 없습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수군거림과 비방과 원망과 불평이 공동체의 일치와 협력을 해친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목사로서 온유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하지만, 때때로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저 사람 왜 저래?”라고 마음속에 불편함을 가지고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면 그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다는 알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걸 다 이해하고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의 자리에 서 보지 않은 채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원망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역지사지의 심정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중등학교 교사가 쓴 글에 보면 교사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교사입니다. 그가 학생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단순합니다. ‘공부를 한다, 하지 않는다, 단정하다, 지저분하다, 교사의 지도에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그런 교사는 교단에서 받은 인상으로 학생들을 평가합니다. 둘째는 아이들이 앉은 자리로 찾아가는 교사입니다. 그 자리에 가보면 사나울 것 같았던 아이의 천진한 모습도 보게 되고, 모범생처럼 보였던 아이의 자폐적인 내면을 보게도 된답니다.

셋째는 교실 바깥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는 교사입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속한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가 그들과 어울립니다. 그때 비로소 교사는 학생들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이고 정확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사가 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교사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 어떤 교사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참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우리는 교단 위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교사처럼 타인을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강단 위에서 교인들을 바라보며, 교인들을 판단했던 저에 대해 호되게 질책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사람을 대접하되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없이 하라는 베드로의 질책이 오늘 이 시간 천둥처럼 들려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서로” 라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서로 사랑하라”

9절에서 “서로 대접하라”

10절에서 “서로 봉사하라”

그렇습니다. “서로 함께” 북돋는 관계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갈등으로 나아가게 하는 악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서로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서로 발을 씻겨줄 때 교회 공동체는 든든히 서 가게 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평화롭게 사는 법을 익히라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셋째는 믿음 안에서 일을 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주위에서 봉사하다가 낙심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너무 무리하게 봉사하다가 실족하는 경우를 봅니다. 일을 너무 안 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의 영적인 역량을 벗어날 정도로 일하는 것도 덕 스럽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때로는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봉사를 더 잘 하기를 원한다면, 11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성도는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손발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도의 시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이것은 제가 누구를 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대합니다. 그러니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생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로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혼미한 때 악한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깨어 있으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귀하고 소중한 동행자로 여기십시오. 내가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집니다. 이 소망을 품고 새로운 삶을 향해 힘차게 길 떠나십시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정신을 똑 바로 차려야 합니다. 인생의 겨울, 우리들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난 날 붙들고 있었던 것들,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잡아야 할 것은 굳게 잡으십시오. 이전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봉사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는 길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 거듭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중심을 잃어버린 체 부평초처럼 떠돌며 살았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살기를 원합니다.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 가다듬고 주님을 우러러 보오니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손과 발을 주님께 봉헌하오니

하나님,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blog.daum.net/morningworld>    -cafe.daum.net/correcttheology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베드로전서 4:7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7.The end of all things is near. Therefore be clear minded and self-controlled so that you can pray. - 1 Peter 4:7, NIV

8.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9. Offer hospitality to one another without grumbling.
10. Each one should use whatever gift he has received to serve others, faithfully administering God's grace in its various forms.
11. If anyone speaks, he should do it as one speaking the very words of God. If anyone serves, he should do it with the strength God provides, so that in all things God may be praised through Jesus Christ. To him be the glory and the power for ever and ever. Amen.

 

7. παντων δε το τελος ηγγικεν σωφρονησατε ουν και νηψατε εις τας προσευχας

8. προ παντων δε την εις εαυτους αγαπην εκτενη εχοντες οτι η αγαπη καλυψει πληθος αμαρτιων
9. φιλοξενοι εις αλληλους ανευ γογγυσμων
10. εκαστος καθως ελαβεν χαρισμα εις εαυτους αυτο διακονουντες ως καλοι οικονομοι ποικιλης χαριτος θεου
11. ει τις λαλει ως λογια θεου ει τις διακονει ως εξ ισχυος ης χορηγει ο θεος ινα εν πασιν δοξαζηται ο θεος δια ιησου χριστου ω εστιν η δοξα και το κρατος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των αιωνων αμη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