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베드로 전서 2장 해석 및 연구

by 은총가득 2021. 4. 14.

2장: 성도의 특권과 의무

 

1-10절,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1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모든 . . . 모든 . . . 모든 . . .'이라는 표현은 '온갖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은 악한 생각과 뜻을 가리킨다. '궤휼'은 거짓과 속임을 가리킨다. '외식'은 겉으로 선하게 보이나 속에는 악독한 것이요,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를 괜히 깍아내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비방'은 다른 사람에 대해 정당하지 않게, 왜곡되게, 악하게 비난하거나 평론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은 성도들이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옛사람의 성질들이며 마귀적인 성질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이런 죄성들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이런 악들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마땅히 이런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2절]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아이들은 엄마의 젖을 사모한다. 아기들은 엄마의 젖맛을 알기 때문에 배가 고플 때 그 젖을 못빨면 마구 울어댄다. 아기들은 아프거나 몸이 안좋으면 젖을 잘 안먹으려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정상적이면 엄마의 젖을 사모할 것이다. 갓난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아기들은 이렇게 엄마의 젖을 잘 먹을 때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된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는 말(토 로기콘 아돌론 갈라)은 '거짓 없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단 사설들, 인본주의적 생각들이나 말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흥미만을 위주한 예화나 이야기들 등과 구별시킨 말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의 바른 교훈을 늘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는 자라기 위해서이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장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씀했다(13-16절). 히브리서 5장에는 신앙 안에서 어린 아이와 장성한 자를 구별하였다(13, 14절). 우리는 주 안에서 자라야 한다. 그런데 신앙 성장의 정상적 방법은 순수한 성경 말씀을 섭취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들에는 없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노력하고 행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로, 중생(重生)과 칭의(稱義)의 구원은 우리가 이미 받았다.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둘째로, 영화(榮化)의 구원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베드로전서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얻었나니."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다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12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이미 받은 구원, 장차 영화롭게 완성될 구원을 현실 가운데서 다 드러내라는 것이다. 즉 온전한 경건 생활과 도덕 생활을 하라, 의와 선과 진실을 다 행하라는 뜻인 것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법적으로 이미 얻은 의(義)를 실제로 우리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성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순수한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거룩한 신앙 인격으로 점점 자라 가는 것이다.

 

[3절]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주의 인자하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과 은혜와 인자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자, 죄 없는 자,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마땅한 것이다.

 

[4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의로운 자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들은 자기 동류들이나 좋아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시고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배이시다. 또한 그는 보배로운 산 돌이시다. '산 돌'이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심을 뜻한다. 그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5절]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본문은 우리도 산 돌같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할 것을 말씀한다. '신령한 집'이라는 단수명사(오이코스 프뉴마티코스)는 성도들이 모여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교회를 돌들로 지은 건물에 비유한 것이다. '신령한' 집이라는 말은 교회가 단순히 물질적인 건물이나 육체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 곧 성령의 전인 것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신약 시대의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신령한 집이다. 에베소서 2:21, 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신약 교회는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온 세계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교회이다. 지금도 이 영적 교회의 건축 소리가 온 세계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지고 있다. 이 영적 건축, 즉 한 명의 영혼 구원을 통해 벽돌 한 장이 쌓여가는 이 건축은 물질적 예배당 건축보다 수천배 더 큰 의미가 있고 더 중요한 건축이다. 우리 모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이 영적 건축, 곧 전도의 일을 크게 여기고 이 일에 힘써야 한다.

 

또 본문은 지어진 이 신령한 집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제사장'이라는 원어(히에라튜마)는 '제사장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들을 드려야 한다. 그 신령한 제사란 우리의 의롭고 착하고 거룩한 삶,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속임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므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이다.

 

[6-8절]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시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버린 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신다. 많은 이들이 그 돌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열심히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중적이다. 그가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셨으나, 다른 이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정하셨다. 죄 가운데서 멸망받을 자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왠 은혜요 왠 사랑인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받은 것은 인생에게 가장 큰 복이다.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권들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족속이 되었다. 선택받은 증거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회개와 순종이다.

 

둘째로,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왕 같은'이라는 원어(바실레이오스)는 '높은 특권을 가진'이라는 뜻이다. 성도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는 높은 특권이 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셋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 세상 나라는 부정과 불법으로 가득한 나라, 속이고 속으며 죽이고 죽는 나라, 음란하고 부도덕한 나라, 슬픔과 탄식과 고통이 가득한 나라, 죽음과 절망의 나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의의 나라, 진리의 나라, 사랑의 나라, 평강의 나라, 기쁨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이다. 성도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이다.

 

넷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세상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지만, 우리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하나님의 것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셨던지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귀한 보배들이 되었다. 또 하나님의 것은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이 안전하게 보장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특권을 동반한 구원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기이한 빛'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의와 생명을 가리킨다.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했던 우리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죄악들 가운데 깊이 파묻혀 살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값없이 완전한 의(義)를 얻게 되었고, 죽음과 영원한 멸망의 그늘진 세상에 살던 우리가 영원한 생명, 다시 죽지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생명을 은혜로 얻게 된 것이다. 이 지식과 의와 생명은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기이한 빛'이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그 기이한 은혜와 사랑과 의와 지혜와 능력을 마땅히 찬송하며 증거하고 선전해야 할 것이다.

 

[10절]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얻은 자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귀한 진리들과 교훈들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모든 악독과 모든 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다 옛사람에 속한 것들이며 마귀의 그리고 마귀와 함께 지옥에 던지울 죄인들의 성질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순수한 성경 말씀을 사모하여 열심히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셋째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신앙 인격에 있어서 자라가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어린 아이와 철부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영적으로 장성한 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교회는 영적인 건물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지는 신령한 집, 곧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 우리는 이 영적 성전 건축 곧 전도의 일을 외적 예배당 공사보다 더 크게 여기고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이 성전에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들을 드릴 거룩한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건하고 거룩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여섯째로, 우리는 성도의 특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일곱째로, 우리는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하며 심히 죄악되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빛, 곧 참 지식과 의와 생명을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찬송하고 증거하며 선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11-12절, 육신적 욕망을 제어하라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판단을 받아 내세에서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고 인간에게는 돌아갈 영원한 처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인생은 내세를 준비할 것이다. 내세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가운데 정신 없이 살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믿는 자답게, 성도답게 사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육신적 욕망들은 바로 죄악된 욕망들이다. 거기에서 음란과 방탕이 나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짓지 않고 바르게 살기를 힘써야 마땅하다.

 

[12절]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선하게 살므로써 그들에게 바른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그릇되이 비방하는 일이 많다. 심지어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은 교인들을 교묘하게 궤계로 자기 사람을 삼는다는 비난을 받았었다(고후 12:16). 구약의 느헤미야도 예루살렘성을 건축하여 바사왕 아닥사스다를 모반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었다(느 6:6).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착한 종들이었다. 성도들이 악한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면 그것이 세상에 빛이 되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날 그들이 깨닫고 성도들에게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가르쳐주셨다(마 5:16).

 

13-17절, 인간의 제도에 순복하라

 

[13-14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선한 삶은 여러 면에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가 왕과 그의 보낸 방백들 즉 관리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를 위하여'라는 원어(디아 톤 퀴리온)는 '주님 때문에'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세속 사회의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뜻 때문에 인간의 제도들에 순종해야 한다.

 

로마서 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15절]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원문에는 "왜냐하면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무지하고 잘못된 말들로 성도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하지만, 성도가 범사에 선하게 처신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에게 아무런 바난할 말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직 선행에 힘써야 한다.

 

[16절]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성도는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완전한 의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것은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귀한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 일, 즉 악을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일에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도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가르쳤다. 로마서 6:17, 18, 22,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7절]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성도들의 선한 삶은 세상에서의 인간 관계에서 나타난다.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이며, 또 주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만일 주께서 그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다면, 우리는 그를 얼마나 존중해야 하겠는가?

또 베드로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라고 교훈했다. 왕을 공경하라는 교훈은 사실상 10계명 중 제5계명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 속에는 가정에서 부모님에 대한 공경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장로들에 대한 존경, 이웃의 노인들에 대한 공경, 학교에서 선생들에 대한 존경, 직장에서 상사들에 대한 존경, 나라에서 대통령이나 관리들에 대한 존경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다.

 

18-25절, 종들은 주인에게 순복하라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사환들'이라는 원어(오이케타이)는 '집안의 종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종들에게도 선한 삶을 교훈한다. 그것은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라는 원어는 '모든 두려움으로, 온전히 두려워함으로'라는 뜻이다. 종들은 주인들을 조금 두려워하지 말고 범사에 두려워하고 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한다. 종들은 또한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만 순종할 것이 아니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

 

[19-20절]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는 말하기를, 종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 주인에게 매를 맞으면 칭찬받을 것이 없지만, 그가 선하게 행함에도 불구하고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고난과 슬픔을 잘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라는 말은 '이렇게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과 슬픔을 다 보고 계시고 다 판단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종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는 것은 미덕(美德)이다.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성도들은 이런 고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그것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다.

 

[22-24절]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 구주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그는 마침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죄의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25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전통사본에는 "너희가 길 잃은 양들과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과거에 길 잃은 양들이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황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것이 참된 회개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인도, 그의 간섭, 그의 보호, 그의 돌보심을 받게 되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25절까지의 요점은 우리가 죄악된 육신적 욕망들을 제어하고 오직 선행을 힘쓰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 될 것이다. 성도들의 선한 삶은, 구체적으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복하는 것,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 종들이 주인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에게만 아니고 까다로운 자에게도 순종하는 것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받는 삶의 본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선을 행하다가 고난과 핍박도 받을 각오를 하면서 선행을 힘쓰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김효성 목사>


악독과 외식에의 반대 (베드로 전서 2:1-3) <메튜헨리 주석>

 

경건한 사도 베드로는 상호간에 이루어져야 할 사랑을 권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썩지 아니할 씨"라 칭하며 이 말씀의 탁월성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세세토록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의 말을 계속하는 중 "그러므로 모든 악독을 바리라"라는 말을 아주 적합한 시기에 충고하기에 이른다. 이것들은 사랑을 파괴하며, 말씀의 효과를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중생을 방해하는 죄들이다.

 

Ⅰ. 그의 충고는 마치 낡고 썩은 옷을 벗어버리듯이 악한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곧 "분개하여 집어 던져 다시는 그것을 더 입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1. 벗어 던져 버려야 할 죄는 이런 것들이다.

첫째, "악독"이다. 이는 모든 종류의 사악함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약 1:21; 고전 5:8). 그러나 제한된 의미로 생각할 때 어리석은 자의 심중에 거하고 있는 분노, 즉 넘치는 격분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악의를 계획하고 행하도록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악독을 기뻐하도록 하기까지 유리되는 것이다.

 

둘째, "궤휼"이다. 말하는데 있어서 속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첨, 거짓, 그리고 망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무지와 나약함을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다.

 

셋째, "외식"이다. 복수로 되어 있는 이 말은 모든 위선적인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거짓된 경건이다. 시민적인 행위에 있어서 외식은 거짓된 우정이요, 그 우정은 그들이 믿지 않는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과 그들이 결코 행하려 하지 않는 것들에 관해서 약속을 하는 또는 악의가 그들 마음 가운데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가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행하여지고 있다.

 

넷째, "모든 시기"이다 "시기"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 즉 선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복지와 그들의 능력과 번영, 명성, 혹은 그들의 성공적인 수고에 대해 한탄하는 모든 것이다.

 

다섯째, "비방"이다. 이것은 비난이며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이며 또는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즉 "중상"을 의미하고 있다(고전 12:20; 롬 1:30).

 

2.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

(1)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들도 최악의 죄 곧 악독, 외식, 그리고 시기와 같은 것들에 대해 주의받고 경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일면 성화 되었으나 아직도 그들은 시험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최선의 봉사는 만일 우리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의식하지 못하였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죄는 두 번째 식탁에 대한 반대이다. 이것들은 버려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

 

(3)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은 우리들의 영적 유익과 영원한 복지를 방해할 것이다.

(4) 악독, 시기, 증오, 외식, 그리고 비방은 대개 병행한다. 비방은 그의 마음 가운데 악독과 궤휼이 자리 잡고 있는 표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지는 유익을 방해하기 위하여 합세한다.

 

Ⅱ. 현명한 의사와 같이 사도 베드로는 악의에 찬 농담을 없이 할 것을 서술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위생적이며 규칙적인 식사를 권유한다. 권고된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렬하고도 부단한 사모이다. 그 말씀은 여기서 "신령한 젖"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구절은 영어로는 적당한 표현이 아닌데, 번역자는 그것을 "말씀의 젖"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들은 영혼이나 이성적인 인간을 위해 합당한 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으로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 영양을 공급받고 강건해진다. 말씀의 젖은 "순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어른들의 혼합물에 의하여 질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간혹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킨다. 고후 2:17). 그들이 신령한 하나님의 젖을 사모하는 태도는 이렇게 나타나 있다.

 

갓난아이들같이" 사모하라고 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들의 중생을 상기시키고 있다.

새로운 생명은 합당한 음식을 요구한다. 새로운 존재로 탄생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만 한다. 유아들은 합당된 젖을 갈망한다. 그들의 젖에 대한 갈망은 강렬하며 자주 일어난다. 마치 굶은 사람이 참을 수 없는 감정으로 먹을 것을 탐하듯 유아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젖을 사모한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망은 이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구원에 달하도록 성장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 주님과 구세주의 지식과 은혜 가운데서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벧후 3:18).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렬한 갈망과 애정은 그 사람이 중생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만일 그들이 어린애가 젖을 사모하듯 하는 갈망이 있다면 그 갈망은 그 사람이 거듭 났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의 증거이지만 그 증거는 확실하다.

 

2. 지혜와 은혜에 있어서 성장과 증진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포부와 욕망이 된다.

모든 영적인 수단은 교회와 발전을 위한 것이다. 옳게 사용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 발견한 상태의 사람을 그대로 남겨 놓지 않고 그를 좀더 증진시키며 훌륭하게 이룩한다.

 

Ⅲ. 사도 베드로는 그들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논쟁을 추가하고 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절).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의심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너희들은 악한 죄를 버리라"(1절). 너희가 이미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니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낸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게 매우 인자하시다.

그는 그 자신 안에 무한한 선량하심을 지니고 계시며, 그는 매우 친절하고 자유하며 불쌍한 죄인들에 대해 인자하시다. 그는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자비롭고 선량하시다. 그 안에 은혜가 충만하시다.

 

2. 우리의 구속자의 인자하심은 그것을 맛본 사람들에 의하여 발견된 회상의 것이다.

미각 기관에 대한 대상물의 즉각적인 반응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보고 듣고 냄새를 맛보는 것처럼 멀리서는

맛을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경험적으로 맛보려면 믿음으로써 그와 연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모든 섭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시험에서 그리고 매일 그의 말씀과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서 우리는 그의 선하심을 맛보게 된다.

 

3. 하나님의 종의 최상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 삼은 적다. 그것은 한껏 마시는 것이 아니며 흡족하지 아니하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위로는 이와 같다.

 

4.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그 은혜를 인간들에게 나타내시며 전달하는 크나큰 도구이다.

신령한 말씀의 젖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그의 최상의 은혜를 맛보며 경험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의 은혜를 더욱 더 이해하고 경험하기를 항상 힘써야 한다.

 

산 돌 되시는 예수 (베드로 전서 2:4-12)

 

Ⅰ.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산 돌로 묘사하고 있다.

변덕스러운 재치군이나 신앙심 없는 불신자들은 그들의 장엄한 성전에 신앙적인 비중을 많이 두고 있으며, 예언자적인 칭호를 잘 이해하고 메시야를 "돌"로 명명하는 유대인들에게까지도 (사 8:14; 28:16) 이 묘사는 거칠고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주 우아하고 품위있게 나타났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가운데 그의 강대하심과 영구한 지속성을 나타내며 그리스도는 그들의 보호와 안전, 그리고 그들이 세워질 토대로 그들의 모든 적에게 거치는 반석이 된다는 것을 그의 종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도는 돌이라고 일컫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산 돌이시며, 그의 백성에게 생명의 왕이 되신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다루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평판과 존경이 전혀 다르다. 그는 인간들에게 버림을 당했으며 그

자신의 나라인 유대인들에 의하여 또한 모든 인간에 의해 비난을 받거나 거부를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기호가 되도록 구별되어 미리 정해졌고(1:20), 하나님의 관점에서나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보배로우며 가장 존귀하며 선택되고 귀하신 품위를 지니신 분이다. 산 돌로 묘사된 그리스도에게 우리들은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 나가는 것"은 편협한 행동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믿음으로만 나갈 수 있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최초로 그와 연합이 되고 이후에도 믿음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들의 소망과 행복의 초석이 되신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전하신다(마 11:27).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갈 수 있다(요 14:6). 그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영적 축복을 함께 나누게 된다(엡 1:3).

 

(2)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며 거부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싫어하며 반대하고 또한 거절한다(사 53:3).

 

(3)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는 사악한 세상에 의해 버림을 당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보배로우신 분이다. 그는 세상의 주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그의 백성의 구세주가 되시며 그리고 세상의 심판자로서 선택함을 받으셨다. 그는 그의 탁월한 본성에 있어서나 그의 직무의 권위, 또는 그의 봉사의 기쁨에 있어서 뛰어나신 분이다.

 

(4) 이 은혜로우신 구속자로부터 자비를 기대하는 자들은 그에게 나가야만 한다.

비록 은총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만 그에게 나가는 것은 우리의 행위, 육체가 아닌 영의 행위, 열매 없는 소원이 아니라 진실한 노력인 것이다.

 

2. 그리스도를 기초로 묘사한 후 사도 베드로는 건축물과 그리스도 위에 세움을 입은 재료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5절에 너희들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졌다"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는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법규를 소개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장엄한 성전도 그리고 많은 제사장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휘를 반대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교회의 제도는 빈약하고, 유대 교회의 예배와 제물과 같이 장엄하고 화려한 맛이 없었다. 여기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교의 성전보다 더 고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산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산 돌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산 돌이시며 이 산 돌이 신령한 집을 이루며 그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그들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그들은 더욱 좋고 더욱 귀하게 열납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그들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제단을 또한 가지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거룩한 열납될 수 있는 희생의 제물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1) 모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진 영적인 생활의 원리를 그들 안에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산 돌로 일컬어지는 것처럼 그들도 활기있고 생명있는 돌로 일컬어지게 된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지 않고 중생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생명있는 자가 된다.

 

(2)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신령한 집이다. 그 기호는 그리스도이시다(엡 2:20).

건축자는 목회자들이며(고전 3:10), 거기에 거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엡 2:22). 하나님의 집은 견고하고 아름다우며 모든 면이 다양하며 만민에게 유용한 것이다. 교회는 그 터에 있어서 신령하며, 그리스도는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재료로써 거룩하며, 그 집의 가구는 성령의 은혜요, 교회에서의 상호 관계는 하나님의 영과 믿음으로 이룩된 것이며, 그 집의 용도는 신령한 역사로 영적인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이 집은 매일 이루어지고 있다. 그 집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은 나날이 발전되어 가고 있으며, 전체는 모든 연령층의 새로운 사람들이 첨가됨으로 충만해진다.

 

(3)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거룩한 제사장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은 모두 선택된 사람들이요, 하나님 앞에 성별된 자들이며,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고 거룩한 은사와 은총을 부여받았었으며 하나님께 선하게 쓰여질 수 있는 자들이다.

 

(4) 이 거룩한 제사장은 하나님께 영적인 희생 제물을 드려야만 하며 또한 드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영적인 희생 제물은 그들의 몸, 영혼, 애정, 기도, 찬양, 긍휼,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의무이다.

 

(5) 최선의 사람들이 드려야 할 가장 귀중한 영적인 희생 제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다. 곧 그는 우리와 우리들의 예배가 그를 통해서만 상달될 수 있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야하며 그에 의하여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Ⅱ. 사도 베드로는 이사야 28장 17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는 산 돌이 되신다"고 재차 강조한다.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가 책이나 장, 절을 인용하지 아니한 성서의 인용 방법을 주시해 보자. 이는 그 당시 성경에 이러한 구분이 이루어져 있지 않았음으로 사도행전 13장 33절에 나타난 바 특별한 시편에서 한 번 언급되어진 것외에는 모세나 다윗 혹은 선지자들에 관한 언급 이상의 것은 없었다. 이런 경우 선지자들에게 있어 이야기된 바가 어떠한 것인지를 의미하듯이 그들은 그들의 성경 인용에 있어서 성경의 구절보다 그 의미를 고수하려 하였다. 그는 성서를 인용할 때, 히브리어 성경이나 70인 역을 구구절절이 인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당하고 참된 인용을 할 수 있었다.

성서의 참된 뜻은 성서 가운데의 구절보다는 다른 말을 더 올바르고 충분하게 나타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기록되었다"는 말 가운데서 동사 "있다"는 능동형이지만 우리들의 번역자들은 이런 경우에 과거 주석 자들이 자주 혼돈을 이루었던 바 주격을 찾기 곤란함을 피하기 위해 수동형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용구의 내용은 이러하다. "보라 내가 시온에 둔다."

 

1. 종교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은 전적으로 성서적 증명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모세, 다윗 그리고 고대 선지자들에게 호소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규범이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분한 규범이며 그리고 놀랍고도 확실한 규범이다.

 

2. 하나님께서 성서 안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주신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각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두노니." 세례 요한도 동일한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요 1:29).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관심의 요청은 그 문제의 탁월성, 그 문제의 중요성, 그리고 우리들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나타내 준다.

 

3. 교회의 머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심은 "나는 시온에 놓는다"란 말과 같이 하나님의 뛰어난 역사이시다. 교회의 머리로 교황을 제정하는 일은 인간의 고안물이요, 거만스러운 자만이다. 즉 그리스도는 유일한 터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의 영적인 건축물에 놓여진 크나큰 모퉁이 돌이다. 모퉁이 돌은 건물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보좌하며, 연합하고, 그 건물을 꾸민다.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한 교회와 자신의 영적인 점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다.

 

5.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이가 아니라 그의 신실한 백성들의 보조와 구원을 위한 모퉁인 돌이 되신 것이며 결코 바벨론과 그의 원수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실된 믿음은 인간의 극심한 혼란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세 가지

사실들이 인간을 크나큰 혼돈에 빠지게 한다. 곧 실망과 죄와 심판이다. 그러나 믿음이 이 모든

것들을 방지한다. 믿음은 이것들을 위한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

 

Ⅲ. 사도 베드로는 7절에서 중요한 추론을 유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신다.

사도 베드로는 선량한 사람들이 대한 경의를 표하고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요, 또한 존귀하신 분이다. 고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면류관이며 영광이시다.

 

믿는 너희들은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를 영원히 영화롭게 함으로 부끄러움도 당치 아니하리라."

사악한 사람들과 같이 불순종의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변격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모퉁이의 머리돌로 삼으실 것을 결정하셨다.

 

1. 정당하고 필요한 결말에 의해서 성서로부터 추론해 낸 것은 무엇이든지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말씀처럼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도 베드로는 선지자의 증거로부터 추리해내고 있다. 선지자는 속단하여 그와 같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결말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구세주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의심하였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성서를 연구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는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 되심을 언급한 곳이 성서 가운데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러한 성경은 왕권이 유대 나라를 떠나기 전에 두 번째의 성전이 존속하던 기간, 그리고 다니엘의 70주가 지난 뒤에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야 했던 그가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결론을 얻기 위하여 인간은 이성과 역사를 보는 눈과 경험을 사용해야 한다. 더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오류가 없는 성서적 결론이다.

 

2. 신실한 목회자의 임무는 일반적인 진리를 그의 청취자들의 특수한 조건과 상태에 적용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6절). 그리고 그 말을 어느 면에서 좋은 사람에게나 나쁜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지혜와 용기와 신실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청취자들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가장 보배로우신 분이다. 그의 인격의 위엄과 우아함, 그의 직분의 권위, 그의 친밀한 관계, 그의 놀라운 역사, 그의 무한한 사랑, 이 모든 것이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경의와 존경을 가지게 한다.

 

4.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참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설득되지 아니하며 쉽사리 믿으려고 하지 않는, 그리고 회개치 않는 자들임을 알자. 이러한 견해가 다소 타당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진실한 믿음은 찾아 볼 수 없다.

 

5. 그리스도의 교회에 건축자들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최악의 원수들이 되고 있다. 구약에 있어서 거짓 선지자들은 가장 큰 불행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당한 가장 큰 반대와 잔인함은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 그리고 로마의 성직자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최악의 원수가 되기까지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보호하는 척"하는 자들이었다.

 

6. 하나님은 거짓된 친구들의 허위와 그의 최악의 원수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자신의 역사를 수행하시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도와주실 것이다.

 

Ⅳ. 사도 베드로는 8절에서 돌에 대한 비유를 견지하면서 좀 더 서술을 첨가하고 있다.

그 말씀은 이사야 8장 13,14절에서 인용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그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른 반석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군의 주 그리고 가장 높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 건축자들과 대제사장들은 그를 거부했으며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를 따랐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넘어지며 상처를 입었다.

이에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권능한 돌과 반석으로 임했으며 그들을 멸망으로 벌하셨다. 마태복음 21장 44절 말씀에 의하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가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다.

 

(1) 불순종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넘어지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의 교리, 그리고 그의 훈계의 정결성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학자들은 그리스도 출현의 초라함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만을 신뢰하자는 제의에 특별히 주저한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은 얻을 수 없었고 기록된 대로

율법의 행위로써만 가능했다. 이는 로마서 9장 32절에 있는 바와 같이 "부딪힐 돌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2) 어떤 자에게는 예수께서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반면 또 다른 어떤 자들에게는 그들의 죄와 멸망의 근거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소생과 멸망을 위하여 세우심을 입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의 창시자는 아니며, 다만 그 죄를 유발케 하는 동기가 되신다. 그들 자신의 불순종이 그리스도에게 부딪히게 하며 그를 거부함으로 그리스도는 심판자로서 그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가하신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들은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질 것이다.

 

(3) 하나님 자신이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넘어지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멸망을 정하였다. 복음에 결정적으로 불성실하며 경멸하는 모든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멸망당할 자들이 누구임을 아셨다.

 

(4)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전반적으로 거부하고 모든 연령층의 무리들이 그를 경멸하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과 의무를 이행함에 실망을 줄 수는 없다.

이는 이미 선지자들에 의하여 오래 전에 예언된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성서와 메시야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를 영립하는 자는 크나큰 특권을 갖는다(9절).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으로 인해 특권을 얻었으며 세상에 남은 자들로부터 분리되어질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은 각별히 그들의 고전적 특권을 귀중히 여기었다. 유대인들은 "자, 만일 우리들이 복음의 제정을 수락한다면 우리는 이 모든 특권을 상실할 것이며 이방인들과 똑 같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 이 반대의 이유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만약 그들이 복음의 제정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파멸되었다(7,8절)고 말한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였다면 그들은 실제적 이익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고 있었던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가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1]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택하신 족속"이다.

곧 그들은 모두 한 가족을 이루며 일반 세상과는 구분된 사람들이며,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고 그의 성령에 의하여 성결되어지지 못하였더라면 이룩할 수 없었던 새로운 영과 원리 그리고 행위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2] 그리스도의 모든 진실한 종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들과 그들의 영적인 모든 원수들에 대한 그들의 그 능력에 있어서 왕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그들의 진보와 탁월성에서, 그리고 그들의 소망과 기대에 있어서 왕과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죄와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었으며 하나님께 성별되어 하나님께 열납되어질 수 있는 영적인 예배와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하나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한 통치자 밑에 모이어 같은 방법과 관습에 동의하며, 동일한 법에 의해 통치를 받는 하나의 국민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성별 되어지고 헌납되어졌으며 그의 성령에 의하여 새롭게 성화 되어졌으므로 거룩한 백성들이다.

 

[4]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됨은 그리스도의 종의 영광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획득하고 선택하고 보호하며, 기뻐하시는 백성들이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이 네

가지 위엄은 그들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본래 그들의 처음 상태는 무서운 어둠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다행히 어둠에서 놀라운 빛과 기쁨, 즐거움, 그리고 번영의 상태로 부름을 입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으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한다.

 

(2) 이 백성들을 만족케 하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이룩된 크나큰 긍휼과 권위에 대해 감사토록 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전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비교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린 때에는 긍휼도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버림을 받고 이혼을 다한 상태였다(렘 3:8; 호 1:6, 9). 그러나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긍휼하심을 힘입어 얻은 바 되었다.

 

[1]훌륭한 백성들은 과거의 그들 상태를 가끔 회상해 보아야 한다.

[2]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백성들이다. 나머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그들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3]하나님의 백성의 수에 들어가는 것은 가장 큰 자비이며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Ⅴ.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육체의 정욕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11절).

"택하신 족속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선량한 사람들일지라도 사도 베드로가 그들을 향하여 열심히 또는 사랑스럽게 그들을 권고하고 있는 바, 죄악을 제어하기 위한 권고가 필요하다. 베드로는 어려움과 의무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최대의 관심을 표시한다. 즉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간청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의무는 우선 육체적 정욕의 경향과 발등을 제어하고 억누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본성의 부패에 기인하고 있으며 육체적 성적 욕망과 육욕을 만족시키고 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것들을 기피하는 까닭은 하나님과 선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존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자들이다."

2. 그들의 세상에서의 상태가 "나그네와 행인들" 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통과하는 나라의 사악과 정욕에 빠져 그들의 여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3. 이러한 죄악이 이루는 불행과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그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1) 죄가 인간에게 행하는 가장 큰 불행은 "영혼을 거스려 사우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도덕적 자유를 파괴하고 영혼의 기능을 약화하며 쇠약하게 한다. 그것은 영혼의 위로와 평화를 앗아간다. 그것은 영혼의 위엄을 떨어뜨리며 파괴한다. 그리고 영혼의 현재의 번영을 방해하며 영혼을 영원한 불행으로 몰아 넣는다.

 

(2) 죄의 모든 것 중 "육체의 정욕"보다 영혼에 더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은 없다.

육체적 정욕, 음탕 등은 하나님께 추악한 것이며,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파괴적이다. 이와 같이 그러한 죄악들에 넘겨지는 것은 혹독한 심판이다.

 

Ⅵ. 사도 베드로는 그들로 하여금 깨끗한 행실로 그들의 고백을 진실되게 하라고 권고한다. 모든 기회와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행실과 행위는 정결하여야 한다. 이것은 선하고, 사랑스럽고, 향기가 나며, 호감을 주는 것이며, 비난받을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에게 상습적인 원수가 되고 있으며 항상 그들을 중상하고 "악을 행하는 자"라고 비방하는 이방인들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정결해야 한다.

 

"결백하고, 의롭고, 선한 행실은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함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될 때 그들이 여러분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들은 지금 여러분들을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한 일을 행함으로 그들에게 여러분들 자신을 변호하는 이것이 그들에게 확신시키는 방법이다. 권고의 날이 임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 말씀과 은혜로써 그들을 부르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장 68절의 말씀대로 그들이 여러분들의 훌륭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여러분들을 칭찬하게 될 것이다. 복음이 그들에게 이르고 그리고 효력을 거둘 때 좋은 그들의 행위를 고무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쁜 행위는 그들의 행위를 방해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은 빌립보 4장 8절에서 나타난 대로 정결한 행실을 수반해야 한다.

2.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비방을 받는 것은 선량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통된 운명이다.

3. 하나님의 자비로운 권고 아래 있는 자들은 선한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즉시로 바꾸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전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 비방을 받던 자들을 칭찬하게 한다.

 

윗 사람들에 대한 순복 (베드로 전서 2:13-25)

 

그리스도인의 행실의 일반적 원칙은 정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상관적인 의무의 양심적 이행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특별히 명백하게 다루고 있다.

 

Ⅰ. 순복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에 있어서 소문난 개혁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행정 관리들에게 순복해야 하는 규칙과 규범을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서술하고 있다.

 

1. 요청되는 의무는 순복이며, 이는 그들의 사람들에 대한 충성과 존경, 그들의 정당한 법률과 명령에 대한 복종, 그리고 정당한 처벌에 대한 순복을 내포하고 있다. 이 순복이 이루어져야 할 사람들과 대상은 아래와 같다.

 

(1)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세운 모든 제도"에 대한 순복이다. 행정 관직은 분명히 신성한 권리이다. 그러나 정부의 특별한 형태, 관직의 권력, 그리고 이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인간의 제도의 하나이며 특수한 각 국가의 법과 제도에 의하여 통치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국가를 하나로 묶는 일반적 규범으로써 어떠한 형태이든지간에 정부의 형태를 이룩케 하는 것이다.

 

(2) 특별히 권위에 있어서 으뜸이요 놀라운 지위에 속한 "위에 있는" 왕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왕은 법인이지 폭군은 아니다. 또는 "방백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대리자이며,총독 대리이며, 지압 통치자를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사람들은 "왕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즉 왕에 의해서 통치하도록 임명을 받은 자이다.

 

2.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주를 위해서"이다. 이는 인류의 선한 사람들을 위한 행정관으로 정해진 자들이며, 그들은 순종과 순복을 요구하고 있다(롬8장). 그리고 그들의 존귀는 그들의 군주에 대한 신하들의 의무적인 처신에 관여해 있다.

 

(2) 행정관의 임무의 목적과 용도는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한 사회를 위하여 임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과오는 그들의 기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행에 있는 것이다.

 

[1] 참된 종교는 시민 통치의 최고 지지자이며 주님과 양심을 위하여 순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 모든 처벌과 모든 세상의 법정관들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세상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

[3] 행정관이 자기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세상을 바르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정당하게 형벌을 가하며, 정당하게 상을 주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이 행정관에게 순복해야 할 다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악의에 찬 중상을 못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대문이다(15절).

[1] 선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의무를 수행하는데 가장 유력한 판단 기준이 된다.

[2] 행정관들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무 중 중요한 일부분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불합리한 비난을 받지 않도록 처신하도록 힘써야만 한다.

[4] 신앙과 신앙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이다.

 

(4)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영적인 본질을 상기시키고 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17장 15절에서 나타난 대로 군주가 아닌 그들의 "형제 중에서 택한 한 사람에게"순종할 것이라고 결론을 줄이고 있으며, 개종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그러한 복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오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유하나 무엇으로부터 자유한가를 말해 주고 있다. 결코 시민 행정관에게 순복을 요구하는 율법에 대한 의무나 복종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죄와 사탄의 압박으로부터 또한 형식적 율법으로부터 영적인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 데나 혹은 하나님이나 그들의 윗 사람에게 대한 어떤 의무를 게을리 하는데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인이다(요 8:36). 그들은 사탄의 지배로부터 자유하며,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정죄, 임무의 무거운 짐, 그리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하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함부로 남용하지 아니하도록 단단히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해 악을 가리거나 윗사람에게 대해 불복종을 가리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사도 베드로는 네 가지의 찬탄할 만한 순복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마치고 있다.

 

(1) "뭇 사람"을 공경하라는 것이다. 적당한 존경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것을 말한다.

가난한 자가 멸시를 받아서는 안 된다(잠 17:5). 사악한 무리들이 공경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들이 사악함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또 다른 기질 곧 재질, 신중함, 용기, 고용의 우월성, 혹은 백발의 머리 때문에 공경을 받아야 한다. 아브라함, 야곱, 사무엘,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은 선량치 못한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공경을 베푸는 일에 주저하지 아니했다.

 

(2) "형제를 사랑하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이다. 그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고,

거의 같은 자격을 부여받았으며,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같은 본향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한 애정으로써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

 

(3) 최고의 공경과 의무와 순복으로써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면 다른 세 가지 임무의 어느 하나도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해야 할 임무는 수행되지 않는다.

 

(4) 어느 다른 사람에게 보라. "왕에게 해당한 최상의 공경을" 그에게 드려야 한다.

 

Ⅱ. 종들의 경우에 대해서도 백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도적인 결론을 격려하고 있다.

이는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그들의 불신앙적이며 잔인한 주인들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도는 "종들아!순복하라"(19절)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가 의미하는 종은 고용되었거나 돈으로 팔려 온자, 혹은 전쟁에서 잡혀 온 자, 집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면 계약에 의해서 견습자로 얼마 동안 섬기는 자들을 말한다. 아래의 사실들을 주시해 보자.

 

1.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임무를 성실하게 그리고 결백하게 이행하도록 하급자가 해야 하듯이 존경과 애정으로 회신하며, 고난과 불편에도 인내로 "순복하도록" 복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사환들은 그들의 주인들에게 마땅히 순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주인이 사람들의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 곧 그들을 잘 대하면서 조금씩 그들의 권리를 감사하는 자에게 뿐만 아니라 전혀 기쁘게 해 주지 아니하는 왜곡되고 심술궂은 자에게도 순복하라는 것이다. 아래 사항을 알아두자.

 

(1) 사환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순복함으로 그들을 혹시나 기분 상하게 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그들의 주인에게 처세해야 한다.

(2) 어느 한 관계의 죄 많은 비행은 또 다른 관계에 대한 죄 많은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사환은 비록 그 주인이 몹시 까다롭고 사악하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수행하여야 한다.

(3) 선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환과 아래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온순하여야 한다.

우리들의 경건한 사도 베드로는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가난한 사환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명백히 그들의 경청자들 중 좀 더 가난한 자와 그 외의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할 목회자들이 사도 베드로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

 

2. 사환들에게 순복할 임무를 부여한 사도베드로는 그것에 관하여 정중히 이야기를 계속 펴 나간다.

 

(1) 그들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고, 고집이 센 주인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계속하며 고난을 감수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생각함으로 겪었던 고난에 상급을 더 하실 것이다. 그들이 정당하게 벌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견디는 것이라 해도 칭찬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19,20절). 아래의 사실을 알아두자.

 

[1] 세상에 천박한 상태란 없다. 다만 거기에서 인간은 양심적으로 살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2] 가장 양심적인 사람은 종종 크나큰 고난을 겪는 자가 된다.

"하나님께 대한 양심 때문에 그들이 최악의 고난을 당하고, 그들이 선을 행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고난받는 자는 칭찬받을 만하며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신앙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는 그들의 최상의 소망이요, 만족이다.

 

[3]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고난을 인내로써 견디어야 한다.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참아야 한다. " 이 세상에서의 고통은 언제나 우리들의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곧 만일 아이들과 종들이 예의가 없고 불성실함으로 이로 인해 받는 고통은 하나님께 용납될 수도 없거니와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도 없다.

 

(2) 부정당한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인 종들이 참아야 할 것을 격려하는 몇 가지의 이유를 더 하고 있다(21절).

[1]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를 위하여" 부름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며,"우리의 "본"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아래의 몇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받은 사람이라 일컬어질 종류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을 기대해야만 한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는 자기를 스스로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도록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과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예비된 은총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부름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마땅히 고난을 받도록 되어 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하여 아니 "우리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성결케 하신 그가 고난을 받으신 것이며,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육과 함께 영이 고난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의 선함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24절).

 

셋째,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가장 부당하고 잔인한 고통에도 우리로 하여금 잠잠케 하실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선의 준비와 온전한 인내로써 우리를 위하여 자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 이 모든 고난은 그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God-man)이심에 당하신 것이다. 따라서 최악의 징벌을 당해야 할 우리 인간들이 후세에 말할 수 없는 상급을 이루게 하는 이생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리스도의 순복과 인내의 본에 대해서 여기에 보충 설명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 "

 

(1) 그리스도는 불법적으로 까닭없이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22절).

"그는 아무에게도" 폭력이나 불의, 혹은 "악을 행하신 바가 없다. " 그는 어떠한 종류의 죄악도 행하시지 않았다.

"그의 입에는 궤사도 없으셨다"(사 53:9). 그의 말씀과 그의 행동이 모두 진실하고 의롭고 올바르다.

 

(2) 인내하셨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다"(23절). 그들이 주님을 비방하고, 욕하며,

망령되이 불렀으나 그는 "잠잠하고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 "그들이 계속 상처를 입히고 때리며 그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웠으나 그는 "위협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로지 때가 이르러 그의 순결성을 밝히시며 그의 원수들을 갚아 주시며 "의롭게 판단해 주실" 하나님께 자신과 모든 문제를 위탁하셨다. 우리는 아래 몇 가지 사항을 알 수 있다.

 

[1] 우리의 축복 받은 구속자는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며 죄에서 해방되시었으므로 어떠한 시험도, 비난도, 그로 하여금 최소한의 죄악된 또는 예의에 벗어난 말을 저지르도록 할 수 없었다.

[2] 죄에 대한 비난도 그것의 임무를 정당화할 수 없다. 따라서 원수들의 무례함과 잔인함 그리고 불의함을 비난 복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정당화해 주지 않을 것이다. 죄에 대한 이유는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파하기 위한 강력한 이유를 항상 간직하고 있다.

[3]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과 모든 문제에 대해 정당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들은 인내와 순종으로 우리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4. 21-23절을 미루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순히 고난 가운데 인내의 본보기만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죽음에 대한 더 영광된 계획과 효력을 첨가하고 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아래와 같다.

 

(1) 고난받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친히"라고 하는 말은 "몸소"라는 의미이다.

친히"라고 하는 표현은 강력한 표현이며 그가 모든 고대 예언을 입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그리스도를 레위 제사장들(그들은 다른 짐승의 피를 드린 자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몸소 피를 흘리신 분이다. 히 1:3)과 구분하며, 인간 구원을 위한 역사에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참여를 배제하는 것을 보여 주기에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몸으로"라고 하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마음으로 받는 고통이 아니었다(마 26:38). 마음의 고통은 내적인 것이요, 감추어져 있는 것인데 반해 몸의 고통은 본을 보이기 위한 이 고난받는 종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더욱 명확한 것이다.

 

(2) 그가 받은 고난은 "벌거 벗기움"과 상처와 죽음, 곧 가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 이었다.

(3) 그가 고난을 받으신 까닭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다. 이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1]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시키심으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신 분과 같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사 53:6).

[2] 그리스도는 그들의 징벌을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켰다.

[3]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제하시며 우리로부터 멀리 하셨다. 이는 마치 속죄양이 사람들의 죄를 머리에 지고 상징적으로 담당하였고 그 죄를 먼 광야로 내어쫓은 것과 같이(레 16:21, 22) 하나님의 어린양은 몸소 우리의 죄를 단번에 담당하시고 세상 죄를 없이하셨다(요 1:29).

 

(4) 그리스도의 고난의 열매는 이러하다.

[1]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룩된 성화와 죄의 극복, 그리고 의의 거룩한 신생이다. 이에 대한 본보기와 능력있는 동기와 권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타났다.

 

[2] 의롭다하심이다. 그리스도는 속죄 제물로서 장사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되었으며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 " 여기에서 알아야 할 점은 이런 것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들을 속죄하셨다.

둘째,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의 죄를 속죄하셨으므로 그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죽기까지는 그리스도께 안전하게 의지할 수 없다.

 

5.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이런 상태와 현재 상태의 다른 점을 상기시킴으로 그리스도인 된 사환들에게 대한 그의 충고를 마치고 있다(25절). "저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하는 말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1)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는 길을 잃는다. 이는 인간 스스로의 행동이며 그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떠나 길을 잃은 것이다.

(2) 그의 비극은 바로 이것이다. 그가 목장을 떠나며 목자와 양떼들을 떠나 크나큰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3) 중생함으로 이러한 상태에서 회복을 얻는다. "돌아왔느니라" 하는 이 말은 수동형으로써 죄인이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실수와 방황에서 그의 양떼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참된 목자이시며 부지런한 목자요, 감독이요, 그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배울 바 몇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중생하기 이전의 죄인들은 항상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삶은 과오와 실수로 일관된 삶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의 양떼와 함께 거하며 그들을 돌보는 영혼의 목자장이며 감독이시다.

[3] 이 절대적인 목자의 사랑과 보호를 기대하는 자들은 그에게 돌아와야만 하며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만 한다.

 


성 경: [벧전2:1]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영적 성숙]
ꃨ 그러므로...버리고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혤라어 '운'(*)은 결과를 유도하는 접속사로 본절이 1:23-25의 결론임을 시사한다. 본절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자가 취하여야 할 행동들을 나타낸다. 한편 '버리고'는 2절의 '사모하라'와 대조되어 믿음으로 갓 태어난 자들이 성숙한 삶을 위해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생활 태도를 제시한다(슥 3:3,4; 엡 4:22,23; 골 3:8,10; 약 1:21).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버려야 할 악덕들을 '모든'을 사용하여 세 범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있다.


ꃨ 모든 악독(*, 파산 카키안) - 이것은 단순한 '악의'와는 다른 것으로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모든 악들을 의미한다(행 8:22; 롬 1:18; 엡4:31; 골 3:8, Michaels, Lightfoot, Selwyn, Stibbs, Lenski).


ꃨ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 판타 돌론 카이 휘포크리세이스 카이 프도누스) - '궤휼'의 헬라어 '돌론'(*)은 '미끼로 끌어들이다'라는 의미의 '델로'(*)에서 유래한 단어로 3절의 '순전'과 반대되는 '속임'을 의미하며, '외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크리세이스'(*)는 '아래'를 의미하는 전치사 '휘포'(*)와 '심판'을 나타내는 '크리시스'(*)의 합성어로 겉과 속이 다르게 판단하는 죄를 가리킨다. 또한 '시기'는 자기 우월감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타인이 잘 되는 것을 방해(妨害)하는 죄악을 의미한다.


ꃨ 모든 비방하는 말(*, 파사스카탈랄리아스) - 본문은 복수로 표현되어 남을 향해 무고히 '중상 모략'하거나, 악담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죄악은 악의에 찬 마음에서 비롯된다(12절; 롬 1:30; 고후 12:20).

성 경: [벧전2:2]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영적 성숙]
본절은 부정적인 금지 명령을 한 앞절과는 달리 긍정적인 명령문으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것을 제시한다.
ꃨ 갓난 아이들같이 - '갓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겐네타'(*)는 '아르티'(*, '방금')와 '겐나오'(*, '되다', '나다')의 합성어로 방금 태어난 상태를 묘사해 준다(Lenski, Robertson). 그리고 '아이들'(*, 브레페)은 문자적로 '아직 출생하지 않은 아이'를 의미하지만(눅 1:41,44) 본문에서는 '네피오이'(*, '유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눅 2:12). 이 '갓난 아이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자에 대한 비유로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간절히 찾듯이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다(마 18:3; 막 10:14,15).


ꃨ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 '순전하고'의 헬라어 '아돌론'(*)은 부정접두어 '아'(*)와 '유인하다'라는 의미의 '돌로스'(*)의합성어로 '궤휼'(1절)과 반대되는 거짓이 없는 순수함을 의미한다. 한편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콘'(*)은 '말씀', '이성', '교리' 등으로 해석되는 '로고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말씀의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V, Calvin,Bigg, Caffin, Bengel, Keil, Lenski). (2) 혹자는 '사리에 맞는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SV, Vincent, Hort). 두가지 해석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로 앞장에서도 '말씀'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1:23-35) 본절 후반부에서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하고 신령한 젖'은 가감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한편 '사모하라'의 헬라어 '에피포데사테'(*)는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상태를 나타낸다(빌 2:26). 베드로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이 성장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말씀을 갈망해야 함을 강조한다(시 119:20, Michaels, Blum,Calvin).

 

ꃨ 이는 이로 맡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말씀의 젓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성장하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야 하는 과제이다. 성장하고 성숙해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가능해진다(히 5:11-14). 본문의 '구원'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화의 완성(完成)을 시사한다. 이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계속적인 성장으로 나타내 보여야 할 미래의 목표이기도 하다(1:5,9; 고전 3:1-4, Stibbs, Caffin).

성 경: [벧전2:3]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영적 성숙]
ꃨ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리라 - 본절은 시 34:8의 인용으로 '에이'(*, '만약')로 시작되는 조건문이다. '인자하심을 맛본다'라는 것은 마치 갓난 아이가 젖의 맛을 알게 되는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기 위해 말씀을 더욱 사모하여 그 능력 안에서 성숙해 가야 한다.

성 경: [벧전2:4]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산 돌이신 예수]
ꃨ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 저자는 본문에서 '버린'과 '택하심을 입은'을 대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배척당한 진정한 메시야임을 드러낸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는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여야 할자칭 건축자들인 유대인들이 오히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가리킨다(막 8:31; 눅 9:22; 행 4:11). 예수께서는 비록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을지라도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았다. '택하심을 입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크톤'(*)은 '인정받다'라는 의미를 가진 '도키몬'(*)에서 파생된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존귀함을 받았음을 시사한다(행 2:22-24).

 

ꃨ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 '보배로운'의 헬라어 '엔티몬'(*)은 문자적으로 '존경을 받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영광을 가리킨다(1:19; 눅 7:2; 14:8; 빌 2:29).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순종으로 인해 배척 당하셨으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교회의 영원한 기초가 되게 하셨다. '산돌'은 실제로 유대인들 사이에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의 머릿돌'(마 21:42), '생명수의 반석'(고전 10:4), '기초석'(고전 3:11), '심판의 돌'(단 2:34)로 비유되었다(Blum, Stibbs, Leighton, Selwyn). 이러한 비유와 마찬가지로 메시야이신 예수를 비유하는 '산 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한 사실이며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교회의 초석이 되심을 시사한다. 한편 '나아와'의 헬라어 '프로스 혼 프로세르코메노이'(*)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인이 예수께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 한 번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끈임없이 나아와야 함을 강조한다(Robertson, Lenski, Caffin).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반석에서 물을 마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는 언제든지 그로 말미암아 신령한 물을 마실 수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전 10:4,Hort, Bigg, Reicke). 본절은 예수께서 비록 사람에게는 버림받았을지라도 메시야로서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의 구원의 반석이 되심을 시사한다.

성 경: [벧전2:5]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산 돌이신 예수]
ꃨ 너희도 산 돌같이 - 베드로는 앞절에서 그리스도를 산 돌에 비유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산돌을 그리스도인들에 비유하고 있다. '산 돌'에 해당하는 헬라어 '리도이 존테스'(*)는 복수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산돌이 되며 생명의 근원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야 할 존재임을 시사한다(Lenski, Leighton, Robertson).

ꃨ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 '신

령한 집'은 저자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을 제사직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아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한다(시 69:9;사 56:7; 막 11:17, Blum). 한편 '세워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스데'(*)는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실때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나아올 때 그리스도인이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돌이 되며 거듭난 자들과의 연합을 통해 교회를 이루게 됨을 강조한다(롬 12:1;15:16; 고전 3:16: 엡 2:21-22; 3:6, Alford, Vincent, Stibbs, Leighton, Selwyn,Mi-chaels).


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에 비유하고 있다. '제사장'의 헬라어 '히에라튜마'(*)는 '제사장의 직분'이나 '제사장의 단체'를 의미한다(눅 1:8, Hort, Meyer).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가진 산 돌이라는 사실에서 진일보하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사직을 수행하는 제사장이 되었음(만인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제사장적 역할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Blum, caffin, Alford, Selwyn, Reicke).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이어야 했던 것을(출 19:6) 이루지 못했으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교회가 그이상(理想)을 실현했으며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그 직무를 감당하게 되었다(롬 12:1;빌2:17; 히 13:15; 계 1:6; 5:10; 20:6, Lightfoot, Calvin, Stibbs).

성 경: [벧전2:6]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산 돌이신 예수]
ꃨ 경에 기록하였으되 - 베드로는 앞서 진술한 자신의 가르침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증명한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티 페리에케이 엔 그라페'(*)는 문자적으로 '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라는 뜻으로 이제까지 논증한 진술 곧 그리스도께서 산 돌이신 것과 그에게 나아가는 자도 누구든지 산 돌인 것이 성경 안에 이미 확증(確證)된 사실임을 시사한다(사 28:16; 롬9:33).

 

ꃨ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 본절은 사 28:16의 인용이다. 모퉁이 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온'(*)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현관의 돌이라고 주장한다(Jeremias). (2)혹자는 건축물의 현관이나 기초를 닦는데 필요한 돌이라고 주장한다(Grant). (3) 혹자는 건축물의 벽과 벽 사이를 잇는 건물의 기초요 중심되는 돌이라고 주장한다(Lloyd,Calvin, Stibbs). '아크로고니아이온'이 '가장 높은'이란 의미를 가진 '아크로스'(*)와 유대인의 건축 양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요 중심인 '모퉁이 돌'을 의미하는 '고니아이오스'(*)의 합성어인 것으로 보아 세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이것은 '모퉁이 돌'이 벽과 벽을 연결하여 건축물을 지탱하는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퉁이 돌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도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셔서 교회를 이루심을 시사한다(엡 2:20, Blum,Stibbs, Michaels). 한편 '시온에 두노니'는 요긴한 모퉁이 돌로서의 그리스도의 독특한 위치가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확정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두노니'의 헬라어'티데미'(*)가 본절에서는 현재 능동태로 사용되고 8절에서는 부정과거수동태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의 역할이 이미 확정되었으며 지금도 수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지위가 생명을 주는 역할을하며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된다(8절; 마 21:42,44; 롬 9:33).


ꃨ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피스튜온에프 아우토 우 메 카타이스퀸데'(*)는 문자적으로 '저를 믿는자는 다급한 일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의미로 두려움과 공포로 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서게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는 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현재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Bengel). (2) 혹자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Mey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성 경: [벧전2:7,8]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산 돌이신 예수]
베드로는 본문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비교하여 각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어떤 가치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Wiesinger, Caffin).
ꃨ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 '보배이나'의 헬라어 '헤 티메'(*)에서 관사 '헤'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는 자신과 연합한 그리스도인에게 크나큰 영광이요 보배가 되심을 시사한다(Blum). 한편 베드로는 믿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지니는 가치에 대해 두 가지 인용문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1)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 본문은 시 118:22의 인용이다. '버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도키마산'(*)은 문자적으로 '거절당한'이란 의미로(고전 9:27,RV)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거부당하신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을 뿐만 아니라(시 118:22) 예수께서도 친히 그 예언을 확인하셨다(마 21:42;눅 20:17,18).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버렸으나 하나님은 배척당한 예수를 영광의 자리로 높이셨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는 사 28:16을 반영하는 것으로(6절 주석참조; 마 21:42; 막 12:10; 눅 20:17; 행 4:11) 하나님님에 의해서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심을 시사한다(Blum). (2)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 본문은 사 8:14의 인용이다. '부딪히는 돌'은 길가에 있는 불필요한 돌들처럼 보행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방해물을 암시하며 '거치는 반석'은 덫이나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나 덫이 되며 심판의 돌이 된다(Origen, Caffin, Delitzch, Selwyn, Stibbs). 그러나 그리스도 자체가 장애물이나 덫이 되는 것은 아니다.단지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불신앙함으로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덫이나 장애물'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이다(Beare, Blum).

 

ꃨ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본문 역시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진술이다.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의 헬라어 '프로스코프투신 토 로고 아페이둔테스'(*)는 문자적으로 '순종치 않아 말씀에 넘어진'이라는 의미로 믿지 않는 자들이 넘어지는 원인이 순종치 않는 불신앙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에서 '이렇게'는 '넘어지나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문은 믿지 않는 자들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 예정되었음을 시사한다(Blum, Hort, Bigg, Caffin,Beare).

성 경: [벧전2:9]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거룩한 백성]
베드로는 본절에서 7, 8절과는 달리 믿는 자들의 신분적인 특권에 대해 네 가지로 언급한다((Caffin, Calvin).
ꃨ 택하신 족속이요 - 본문은 사 43:20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신분을 시사한다. '족속'의 헬라어 '게노스'(*)는 '혈통' 혹은 '출생'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혈통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다고 자랑하나 진정한 택함을 받은 족속은 혈통이나 민족의 차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의 연합을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영적 이스라엘'을 나타낸다(1:23; 신7:6-7; 사 44:1-2, Robertson, Blum, Selwyn).


ꃨ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본문은 출19:6의 인용으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혹자는'왕정의 제사장' 곧 왕에게 속하여 왕을 섬기는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Stibbs). (2) 혹자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롬 5:17,Clement, Bigg, Stibbs, Blim).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그리스도인은 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서 만국 통치하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이다.


ꃨ 거룩한 나라요 - 본문 또한 출 19:6이 인용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직책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거룩한'은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린것을 나타내는 말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선별하신 존재들임을 시사한다(blum, Stibbs).


ꃨ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 본문 출 19:5; 사 43:21; 말 3:17의 인용이다. '소유된'의 헬라어 '페리포이에신'(*)은 특별한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된 것을 나타낸다(행 20:28; 엡 1:7; 살전 5:10, Robertson, Stibbs).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사셔서 그의 자녀로 삼으신 언약의 백성이다.


ꃨ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위의 네 가지 신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하신 이유이다.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과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이전에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신' 사실을(롬 8:29,30; 엡 1:4) 시사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구원하여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신분을 부여하신 목적은 덕을 전하게 하는 것이다. '덕'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스 아레타스'(*)는 '찬미', 혹은 '탁월함'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만이 갖는 온갖 종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실제적 행동들을 시사한다(stibbs, Calvin).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과 역사를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성 경: [벧전2:10]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거룩한 백성]
본문에서 베드로는 호 1:6,9,10; 2:23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상태와 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상태를 비교한다.
ꃨ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후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롬 9:25,26, Bengel).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삼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부르셨음을 암시한다(Caffin).


ꃨ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얻지 못하였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엘래에메노이'(*)에서 '엘레에메노이'는 '엘레에오'(*, '불쌍히 여기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방인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 못했음을 암시한다(Stibbs, Robertson, Caffin). 이와는 반대로 '얻은'의 헬라어 '엘레에덴테스'(*)는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로 하나님의 긍휼을 오랫동안 얻지 못하던 이전의 상태에서 단회적인 회개 사건으로 구원을 받았음을시사한다(Hort, Michaels, Stibbs).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했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 복종하던 종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 빛 가운데 있어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다.

성 경: [벧전2:11]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행실]
ꃨ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베드로가 본서와 베드로후서에서 모두 7회나 언급한 애정어린 호칭이다(4:12; 벧후 3:1,8,14,15,17). 이 호칭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사용된 호칭이며(롬 12:19; 살전 2:8, Blum, Caffin) 본서와 베드로후서에서는 간곡한 권면이나 무엇을 환기시킬 때 사용되었다.


ꃨ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 '나그네'의 헬라어 '파로이쿠스'(*)는 일시적으로 거주하여 법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를 가리키며 '행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데무스'(*)는 거쳐가는 길손으로 정착자가 아닌 자를 나타낸다. 베드로는 이 용어들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 시민으로 신령한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빌 3:20)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나그네나 행인처럼 잠시 머물렀다 가는 유한(有限)한 것임을 시사한다(시39:12; 히 11:13, Stibbs, Lenski).


ꃨ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육체'의 헬라어 '사르키콘'(*)은 단순한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육체에서 비롯된 정욕은 영혼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셔서 그리스도인이 소유하고 있는 영적인 삶을 어렵게 한다. 본문에서 언급된 '육체'와 '영혼'은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신분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합당한 영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락된 악한 본능과 대적하여 싸워야만 한다(롬 6:6; 7:23; 고전 9:27; 갈 5:16,17; 골 3:5, Stibbs, Caffin, Blum, Leighton).

성 경: [벧전2:12]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행실]
ꃨ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 '이방인'은 본래 육체적 혈통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은 비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을 간과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욕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물론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잡히지 않는 선한 행동을 해야한다. '선하게'의 헬라어 '칼렌'(*)은 나타나는 행위 뿐만 아니라(마 13:8) 그 본성까지 옳은 것을 의미한다(히 13:18).


ꃨ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가운데서 선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프튜온테스'(*)는 '감시자'를 의미하는 '에포스테스'(*)에서 유래한현재 능동태 분사로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심하게 관찰함을 시사한다(3:2, Meyer). 한편 '권고하시는 날'은 눅 19:44을 반영한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위로와 해방을 주시는 날'(출 3:16; 삼상 2:21), '심판과 형벌의 날'(출32:34; 시 58:6)을 의미했다. 이러한 '권고하시는 날'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방인들이 회개하는 날이라고 주장한다(Kuhl, Calvin, Hunter). (2) 혹자는 마지막 심판날이라고 주장한다(Hart). (3)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는 날이라고 주장한다(Moffatt).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이방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방편(方便)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첫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Lenski, Stibbs, Blum).

성 경: [벧전2:13]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대한 순복]
ꃨ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 '제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세이'(*)는 본래 '토대'나 '창조물'을 의미한다(막 13:19; 롬 1:25;고후 5:17; 골 1: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제정한 법과 질서에 대해 '크티세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제도들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암시하며(롬 6:1),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 윤리 생활을 사회 제도내에서 충실하게 이행해야 함을 시사한다(Meyer, Calvin). 그러나 인간이 세운 제도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는 '주를 위하여'라는 분명한 기준이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Bigg, Clark, Hoffmann). 본문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에 징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인간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동해서는 안 됨을 시사한다.


ꃨ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 '위에 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휘페레콘티'(*)는 '위에 서다'(*, 휘페레코)의 능동태분사로 '보다 높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위에 있는 왕'은 신적 왕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통치자' 곧 당시의 로마 황제를 나타낸다(롬 3:1,Stibbs, caffin). 베드로는 당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나 왕이 잔악한 폭군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복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요 19:11).

성 경: [벧전2:14]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대한 순복]
ꃨ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 본문은 롬 13:3,4을 반영한 것으로 위정자들의 임무를 나타낸다. 위정자나 혹은 통치자의 역할은 악행하는 자를 징계하고 처벌하며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포상하는 것이다. '그의 보낸'의 헬라어 '디 아우투 펨포메노이스'(*)는 문자적으로 '그를 통하여 보내어진'을 의미한다. 여기서 대명사 '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lvin, Hort, Robertson). (2) 혹자는 로마 황제가 속주들을 다스리기 위해 총독들을 파송한 것을 근거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ffin, Bigg, Clark).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방백들은 범법자를 처벌하고 선행자를 포장(褒獎)하라는 황제의 뜻을 수행할 책임을 갖고 있는 지방총독이나 식민지 총독들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그들은 황제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방백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 통치자라고도 할 수 있다(롬 13:1-7).

성 경: [벧전2:15]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데한 순복]
ꃨ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 '어리석은 사람들'의 헬라어 '텐 톤 아프로논'(*)는 이성이 없을 정도로 몰지각한 사람을 의미하는데(고전 15:36) 본절에서는 위정자나 혹은 비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또한 '무식한'에 해당하는 '아그노시안'(*)은 단순히 지식이 결핍된 것만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거나 수용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나타낸다(고전 15:34).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속에서 선행을 행하고 위정자들이나 법에 순복함으로 이방인 곧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잡히지 않아야 한다(12절, Stibbs, Caffin,Leighton).

성 경: [벧전2:16]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대한 순복]
ꃨ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 '자유하나'의 헬라어 '호스 엘류데로이'(*)는 문장 구조상 독립 주격구문으로 앞절의 '선행으로'에 연결된다(Alford).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자유를 방종이 아닌 합법적인 권위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으로 나타내야 한다. 한편 '악'은 온갖 종류의 '악덕'을 의미한다(12,14절).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소유했다고 해서 그 자유를 오용하여 악덕을 행하는 구실을 삼거나 혹은 방종하는 구실을 삼아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 자유를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ꃨ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와 사단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에서 해방된 진정한 자유이다(요 8:32,36; 롬 6:15; 갈 5:13). 그러한 자유를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에 자유를 사용하는 죄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롬 6:16-23).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앞서 언급한 방백이나 법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외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로 순복해야 한다(Stibbs).

성 경: [벧전2:17]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관한 순복]
ꃨ 뭇 사람을 공경하며 - '공경하며'의 헬라어 '티메사테'(*)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강조성을 띤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Caffin, Blum,Stibbs).
ꃨ 형제를 사랑하며 - '사랑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파테'(*)는 '아가파오'(*, '사랑하다')의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자들을 계속적으로 사랑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독특한 특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자들의 지속적인 우애를 가리킨다(1:22; 3:8; 4:8; 5:14, Stibbs, Caffin, Selwyn).


ꃨ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 '두려워하며'(*, 포베이스데)와 '공경하라'(*, 티마테)는 모두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행동의 지속성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중해야 하나 하나님과 왕을 섬기는 자세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왕을 존중하고 순복한다 할지라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멸할 수 없는 그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마 10:28). 따라서 하나님과 왕에 대한 태도는 상충(相衝)될 수 없으며 왕을 공경하는 것은 형제 사랑이니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어긋나지 않게해야 한다(Alford, Blum).

성 경: [벧전2:18]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주인에 대한 종의 순종]
ꃨ 사환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케타이'(*)는 문자적으로 '집의 것'이라는 의미로 '가정에 소속된 하인'을 나타낸다(눅 16:13; 행 10:17; 롬14:4, Robertson, Caffin).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신분이 천한 '종'(*, 둘로스)과는 다른 의미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종속된 자들을 가리킨다(엡6:5-7; 골 3:22-25; 딤전 6:1; 딛 2:9).


ꃨ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 '두려워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는 존경심을 가지고 경외하는 마음을 의미한다(17절).이는 형벌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환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들의 권위를 중시해야 함을 시사한다(엡 6:5, Lenski, Stibbs, Robertson). 한편 '순복하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탓소메노이'(*)는 '휘포탓소'(*, '순종하다')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주인에 대해 순종해야 함을 시사한다(3:1; 롬 12:16, Robertson, Michaels).


ꃨ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러하라 - 사환들의 순종은 주인의 인격의 좋고 나쁨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과 '까다로운 자들'에는 관사 '토이스'(*)가 연결되어 주인들의 인격을 암시한다. 여기서 '관용하고'의 헬라어 '에피에이케신'(*)은 '양보한다'는 의미를 가진 '에이코'(*)에서 파생된 말로 법같이 엄하지 않고 쉽게 용서하는 마음을 의미하며 '까다로운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스콜리오이스'(*)는 '마음이 뒤틀린 자'란 의미로 성품이 온당치 못해 하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자들을 가리킨다(Alford, Robertson. Leighton). 사환들은 주인의 인격을 불순종의 변명거리로 삼지 말고 주인의 인격이 어떠하든지간에 순복해야 한다.

성 경: [벧전2:19]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면]
주제2: [주인에 대한 종의 순종]
ꃨ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 본절은 사환들이 까다로운 주인을 만나 부당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경우를 나타낸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는 인간의 행동이 의무감에서 마지 못해 하는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Caffin, Bigg). 사환들은 까다로운 주인에게 부당하게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주인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인내해야 한다. 한편 '이는 아름다우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토 가르카리스'(*)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감사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AV) 혹은 '이러한 것은 인정받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마 5:10-12에 대한 반영으로 종이 주인의 부당한 처사를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으면 그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은혜받을 증서가 됨을 시사한다(Caffin, Stibbs, Selwyn, Blum).

성 경: [벧전2:20]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주인에 대한 종의 순종]
ꃨ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 '죄가 있어'의 헬라어 '하마르타논테스'(*)와 '매를 맞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콜라피조메노이(*)는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죄를 짓고, 그 죄의 결과로 반복되는 응당한 벌을 받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생활 곧 사환들 자신에게 과오가 있어서 주인에게 매를 맞고 참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ꃨ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 본문은 19절에 대한 확대 해석이다. 고난을 받음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죄의 결과라면 수치스러운 것이나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은혜로 받을 가치가 있다(Caffin, Moffatt).

성 경: [벧전2:21]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개역성경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호티'는 본절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아야 하는 이유임을 시사한다.
ꃨ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 '부르심'은 본래 구원에 초대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암시한다(롬 8:28-30, Blum, Hort).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엡 4:1; 빌 3:12-14).


ꃨ 그리스도도...하셨느니라 -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ꃨ 너희를 위하여 - '위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대신 당하신 것으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순수하게 타인을 향한 목적에서 행동하셨음을 암시한다(요 10:11. Stibbs, Michaels).


ꃨ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속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난의 참된 본보기를 제시하시고 따라오도록 하셨다(마 20:28; 26:28; 눅 24:25-27,44-47, Bengel, stibbs, Blum,Leighton).

성 경: [벧전2:22]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ꃨ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 베드로는 사 53:9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누죄하심에도 불구하고 고난당하심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께서 애매히 고난받는 자의 참된 모범이 되심을 확증하고 있다(마 26:60; 요 18:38; 19:4,6). '궤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로스'(*)는 '거짓'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종들이 많이 저지른 죄악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고난받는 종들과는 달리 거짓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죄가 없으신 무흠하신 존재이셨다(Caffin, Stibbs, Leighton).

성 경: [벧전2:23]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ꃨ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본절은 사 53:7을 암시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친히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마 26:64).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법정에서 아무런 죄 없이 우리를 대신하여 심문과 고난을 당하시는 가운데서도 위협하거나 욕하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셨다.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의 헬라어 '우크 안텔로이도레이'(*)와 '위협하지 아니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에페일레이(*)는 모두 미완료 시제로 그리스도께서 시종일관 죄를 타인에게 돌리지 않는 습관적 태도를 나타내 보이셨음을 시사한다(Robertson, Michaels).


ꃨ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자에게 부탁하시며 - 본문에는 목적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목적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한다(Bigg, Caffin, Robertson). (2) 혹자는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눅 23:34, Alford). (3) 혹자는 주님에 관해 열리고 있는 재판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Vincent, Hart, Bengel). 세가지 견해 중 첫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부탁하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디두'(*)가 미완료 시제로 계속적인 위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눅 23:46에서도 주님의 죽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Stibbs).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대신하여 수많은 고통을 당하시는 가운데 침묵하시고 도리어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자기 자신과 모든 결과를 맡기셨다(Bengel, Selwyn, Blum).

성 경: [벧전2:24]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ꃨ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친히...그 몸으로'의 헬라어 '호스 아우토스...엔 토 소마티'(* ... )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와 강조적 재귀 대명사 '아우토스'(*)가 연결되어 자발적인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한편 '담당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넹켄'(*)은 '제단에 희생 제물을 두다'는 의미를 가진 '아나페로'(*)의 부정과거로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죄인에 대하여는 제물을 대신하였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공의를 만족시켰다(사 53:12; 골 2:14;히 9:28, Kuhl, Bigg).


ꃨ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십자가상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이유이다. '죄'의 헬라어 '타이스 하마르티아이스'(*)는 복수로,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디카이오쉬네'(*)는 단수로 표현되어 죄인이 갖는 죄의 속성과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법정적인 측면을 나타낸다(롬 6:1-23; 갈 2:20).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동참하여 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ꃨ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본문은 사 53:5의 인용이다. '채찍'의 헬라어 '몰로피'(*)는 본래 매질로 말미암은 자국이나 흔적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사 53:5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드러냄으로(Lumby)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범을 바라보면서 순종하고 인내해야 함을 강조한다(Caffin, Leighton, Calvin).

성 경: [벧전2:25]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ꃨ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 본문은 사 53:6의 인용으로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 구원받기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길을 인식치 못하고 습관적인 방황에 빠져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Blum, Leighton).
ꃨ 이제는 너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베드로는 상반절의 '전에'와 본문의 '이제'(*, 뉜)를 대비시켜 구원받기 이전의 죄의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던 영적 죽음의 상태와 생명을 얻은 현재의 상태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목자'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었으며(시 23:1; 사40:11; 겔 34:23)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자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마 25:32; 요 10:14; ; 13:20). 또한 '감독'은 '목자'와 거의 같은 의미로 목자의 기능적인 면, 곧 돌보고 감찰하는 면을 나타낸다(행 20:28).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죄인으로서 죄의 종노릇을 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목자와 감독되신 그리스도에게 그 영혼을 보호받는다(4:19; 겔34:23, Bengel, Bigg, Leighton).

모퉁이의 머릿돌은 무엇인가(벧전 2:7)

 

이 돌은 건물의 모퉁이의 머릿돌, 곧 주춧돌을 가리킨다. 이 돌은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초석이고 가장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찮게 여겨버렸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셨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왕 같은 제사장(벧전2:9)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망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매일 부딪히는 현실적인 삶에 필요한 지혜의 상당 부분이 이러한 근원적인 고민에 대한 답을 기초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분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두 가지 해석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왕 같은 재사장들’ 로 번역된 부분은 헬라어 성경에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 라고 나옵니다,(벧전 2:9)

이 구절은 ‘왕의 제사장’ 혹은 ‘왕과 같은 제사장’ 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실레이오스라는 형용사와 관련하여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로는 이 단어가 ‘왕과 관련된’ ‘왕의’ 라는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고려하면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는

‘왕의 제사장’ 혹은 ‘왕에게 속한 제사장’ 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왕’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우리는 왕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는 바실레이오스를 ‘왕과 같은’ 혹은 ‘왕적인’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 같은 제사장들’ 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에서 올바르게 번역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루터의 발견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이 구절에서 종교개역의 횃불을 높이 들게 했던 중요한 고리를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른 바 ‘만인 제사장 교리’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카톨릭교회의 사제들만이 제사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 되었다는 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이것은 우리가 동일하게 율법을 지킴으로써나 다른 이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복음의 발견이었습니다.(빌3:9) 그래서 모든 신자는 누구의 공로나 중보 없이 오직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4;16)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카톨릭의 사제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곡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 27:51) 이로써 모든 중보의 직을 취하셨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며 따라서 우리는 제사장의 도움 없이 그리스도 한 분에 대한 신앙으로써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사장 나라의 은유

칼빈(1509-1564)은 본문의 ‘왕 같은 제사장들’ 이라는 표현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의 나라’라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19:6)

 

하나님의 특별한 민족적 선택

첫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겔 20:5)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진리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은 민족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섬김을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회복하게 되기를 바라며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중재자의 역할을 맡기셨습니다.(겔 38:16)

이것은 구약 시대에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롬 5:12)

인간이 자신의 어떠한 능력과 선함으로도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였습니다, (사 59:2)

제사장의 주요 직무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고 이로써 죄로 말미암아 불결해진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레 4;3. 20)

이와 동일한 원리로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제사장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출 19:6)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

셋째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이라는 것입니다.(신 4:3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민족에게는 주시지 않는 남다른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사 2;3, 미 4:2)

이것은 이스라엘에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4:6)

 

하나님을 향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경건입니다.

따라서 경건은 단지 삶의 모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이것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존재의 울림입니다.

만약 교회에 이러한 율법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진리보다 세속적 시류에 더 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교회를 본받는 대신 교회가 세상을 본받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신약의 왕 같은 제사장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와 하나님 사이에 제사장 나라가 되었듯이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 교회는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되었습니다. (마 18:18)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구원받지 못한 나라와 민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야야 합니다. (마 5:44, 눅 6:28)

자신들에게 주신 많은 하늘의 신령한 자원과 이 땅의 자원들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일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인데 왕과 같은 제사장입니다. (벧전 2: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동등한 왕의 지위를 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우 만물의 왕이심

첫째로 하나님의 만물 위에 뛰어난 통치주이시라는 사실입니다.(고전 15:24)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시는 통치주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그분의 우주적 통치를 완성할 도구인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십니다.(엡 1:22)

 

왕국은 왕을 중심으로 모든 질서들이 세워진 나라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백성들이라면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왕이 가지고 있는 선한 통치 이념이 나라 구석구석에까지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까?

모든 백설들이 거기에 복종하고 그 통치 아래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왕의 통치가 다른 나라에까지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저들의 행복이 결국 불행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맛보지 못한 진리를 맛보았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행복을 알기 때문입니다.(벧전 2;3)

그래서 우리는 이 참된 행복을 그들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 사랑을 힘입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고자 합니다.(롬 14:8, 고후 5:16)

 

신자로서의 존재의 울림은 바로 이렇게 사명을 따라가는 삶과 인격 속에서 울려 퍼집니다.

이것은 어떤 행사나 거대한 구호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십자가의 은혜와 구원의 비밀을 알아감으로써 삶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변화될 때 비로소 신자로서의 존재의 울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 하나님을 위한 봉사의 공동체

둘째로 교회가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의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엡 3:10, 골 1;25)

교회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분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섬겨야 할 대상은 크게 하나님, 세상, 그리고 교회 자신입니다.

첫째로는 교회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시 99:5, 요 4:29)

둘째로는 교회는 세상을 섬깁니다.(마 5;13∼14)

셋째로는 교회는 교회 자신을 섬깁니다. (엡 4:11-12)

 

신자를 통해 세상이 구원받게 하심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통해 이 세상이 구원받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눅 19:10, 행 1:8, 롬 1:14)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에 홀로 감당하시기에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의 경륜을 펼침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과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노래하였습니다. (미 4:2)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제대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의 통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삶으로써 성경 진리를 보여주는 한에 있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아는 지식을 세 저장고에 두셨습니다.

성경과 목회 사역, 그리고 신자의 마음입니다.

성경이원천적 보고라면 목회 사역과 신자의 마음은 거기서 발견된 지식을 풍성하게 하고 적용하는 저장고입니다.

 

신자의 탁월한 지위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롬 8:16-17, 11;13, 엡 1:8)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탁월한 신분을 부여받고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의 성취에 이바지 하게 됩니다.

그것은 천사도 살펴보기를 흠모할 만한 값진 것이었습니다. (벧전 1:12)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삶을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과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경륜은 너무 위대해 보여서 실제 우리의 아주 사소한 삶과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세상의 뛰어난 권세를 가진 정치가도 아니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종교 지도자도 아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기껏해야 랍비나 선지자로 여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요 1:38, 49, 4:19)

그러나 그분의 삶 전체는 존재의 우림의 연속이었습니다.(마 7:28-29, 막 1:22)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 어중간한 태도로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는 존재의 울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어중간한 삶이 무난하게 사는 요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구원해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닐뿐더러 끝내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길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결국이 무엇이겠습니까?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단지 세상의 행복을 누리게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단지 세상의 행복을 누리게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히3;1, 12:22)

그 행복을 누리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승리의 확신

성경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섬겼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히 12:1)

그것은 그들이 발견한 하늘나라의 가치가 너무나 높고 고귀하기 때문이었습니다.(히 11:6)

잠시 고난 가운데 눈물을 흘릴지라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빌 3:18-21)

왜냐하면 진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 편에 서 있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복음 때문에 박해를 당할지라도 이 세상이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잠시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신이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번성하는 악인들은 들판 위에 베인 풀처럼 잠시 있다 사라지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번성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시 37:2, 90:6)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현재적인 삶 속에서 복음으로 말미암는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불안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진리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보다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이 세상을 행해 들려주어야 할 존재의 울림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들려주는 존재의 울림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신자는 온 땅과 만물 위에 높고 뛰어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움으로써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함으로써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란 무엇인가?

 

베드로 사도는 핍박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지만 자기의 권리부분만 알고있지 주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은 쏙 빼고 알고있습니다.이 부분을 집중 질문하여 보면 정말 각각 대답이 다릅니다.오해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무엇이고 왕이며 제사장인가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고난 당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성도’라 합니다. ‘聖徒’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거룩’을 ‘코데쉬’라고 하는데 “잘라낸다”,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서는 ‘성도’라는 말 대신 ‘선민’이란 말을 썼습니다. “선택받은 백성”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택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짚어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받은 자가 되었다면 아브라함 이외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모두 버림받은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선택에는 배타성이 있느냐는 소리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하나님께서 노아를 선택하셨을 때는, 노아 가족을 제외한 당시 사람들 중 누구도 선택받은 무리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노아의 가족들만이 선택받아 홍수의 심판을 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머지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사실 이 물음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인간들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살았습니다. 홍수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배타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선택하려 하심)을 소홀히 여기고 응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하지 않았기에 선택받은 자의 무리에 속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잘못된 것에 선택되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되느냐, 사탄에게 선택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택하셨을까요?

 

[벧전2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신분을 말씀합니다.

주님이 택하여 주셨고,

신분을 높혀주셨고,

주님나라에 백성삼아 주셨고,

주님과 화목하여 가까히 갈 수 있는 제사장 직분을 주셨습니다.

 

① ‘택하신 족속’ 이란 말은

‘게노스’라는 말로 ‘혈통’또는 ‘출생’을 가리키는 말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진정으로 택함을 받은 족속은 혈통이나 민족의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선택된 자들입니다.이런 자들이 천국 갈자로 택함 받은 자입니다.혈통으로 따지면 우리는 택하시 족속이 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제물되시고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늘 자성소에서 단번에 제사를드려 나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또 나를위해 기도하심을 믿고 신인하면 믿는 자가 택하신 백성입니다.

 

② ‘왕 같은 제사장’ 이란 말은

그리스도인은 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서 만국을 통치하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왕은 다스릴 나라와 백성이 있어야하며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고난만 격고 오히려 도망만 다녀야 했던 것처럼 성도는 오히려 고난을 다스려야 합니다.

 

다스릴 것이 또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셋째로 자기에게 있는 달란트를 다스려야 합니다.

 

③ ‘거룩한 나라요’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현 직책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룩한’은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린 것을 나타내는 말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선별하신 존재들임을 시사합니다. 그중에 제사장역을 잘 수행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의 중계자 입니다. 나의 죄를 예수로 제물삼고 하나님께 피를 드려서 매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물과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예수의 피로 제사를 잘드려야 죄인이 죄를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상대도 하지않습니다. 상대하는 것은 피를 가진 제사장입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한생명을 죽인 피를 하나님앞에 보여주어야 죄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곧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바라보십니다. 예수안에서 거룩해 지시길 원합니다.

 

④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소유된’ 의 헬라어 ‘페뤼포이에신’이란 말은

특별한 값을 지불하고 획득한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그의 자녀로 삼으신 언약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인간대표 아담이 마귀와 도박을 하여서 자신뿐 아니라 후손 모두를 마귀에게 소유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을 원래대로 복귀할 값이 없어서 영원한 마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인간몸을 입고 오셔서 마귀에게 죽으심으로 그값을 치루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죄와 마귀의 종에서 자유인이되게 하셨고 믿는자에게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인류의 대표로 죽고 피흘리시고 다시살아 나셨습니다.이제 그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였는데 자기가 죄의종에서 벗어난 것과 예수께서 마귀를 박살 낸것을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가 이켜서 우리는 자유자라고 외쳐야 합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950년대나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필리핀이나 오지의 밀림 속에서 일본 패잔병들 가운데 그 때까지 동굴 속에서 몇 년, 혹은 십여 년씩 숨어서 지나던 사람들이 발견되곤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기사는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에 누더기가 된 옷차림을 한 이들이 구식 소총을 들고 동굴 앞에 서 있는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패잔병들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숨어서 극도의 불안한 생활을 하며 때때로 마을에 몰래 내려와 식량을 훔쳐먹거나 도마뱀을 잡아먹고 열매로 배를 채운 것입니다. 쓸모 없게 된 녹슨 소총을 소중하게 간직한 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불행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항복을 했습니다. 그 동굴에서 나오세요. 밝은 곳으로 나오세요" 분명하게 복음을 알려 주어야 할 소명(召命)자들이 바로 우리들 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맡겨준 사명과 책임을 잘 감당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때 "왕같은 제사장"이란 단어만 보고 다음에 있는 핵심단어를 보려고도 않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위의 네 가지 신분을 주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두운데서 불러내어’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과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권리만 보지마시고 우리가 해야 할 사명과 책임을 보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값없이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하여서 소리만 쳐주면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내 가슴판에 깊히 새기고 밑줄을 쳐놓으셔서 주님의 부르시에 영광돌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지냈었으나, ‘만세전에 예정하신 뜻대로’ 불러내셨다는 사실과 불러내시고 네 가지 신분을 부여하신 목적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스” “아레타스”라는 말인데 ‘찬미’ 또는 ‘탁월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속성과 그 사역을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다음 번에 귀한 손님을 모시고 다시 갑니다. 혹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데리고 찾아갑니다. 왜 그 곳에 다시 갑니까? 전에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맛을 알기 때문에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움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자주 배반하고 그 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자신의 자비로움과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주십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 마냥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학생이 자신의 신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게 될 때 청소년 범죄가 생겨나게 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게 될 때 그 가정에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산돌로 세워진 신령한 가정의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제사장입니까? 구약에는 택한 레위족속이 있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과거 구약시대 때 제사장들이 했던 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없이도 우리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제사장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장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그 제사장의 신분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언제든지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놓고 그분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 분은 여러분을 만나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9절에서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왕같은 권세와 권위와 능력을 함께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몸을 드려라 그런데 구약시대 제사장은 소나 양을 잡아 피를 제단에 뿌리고,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제사장인 우리는 무엇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가?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시대 제사장의 의무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특권만 생각하고 책임은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사장되게 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큰 특권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특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책임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책임이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안에서 부름받은 거룩한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뿐만아니라 거룩한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이제 세상을 살면서 고난이 오고 슬픔이 있어도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log.daum.net/h1068 .   <cafe.daum.net/correcttheolog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