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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신의 성품에 참여 하는 자

by 은총가득 2021. 3. 16.

 

 

신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가?(벧후 1:4)

 

"이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 1:4)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인간 구루(Guru)들을 신의 화신으로 간주한다. 근래에 와서 새 시대의 교주들은 저마다 자기가 신이며 또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주변에 몰몬교 역시 힌두교와 유사점이 있으며 하나님도 원래는 다른 별 세계에서 인간이었다가 훌륭하게 산 결과 부활하여 지구의 하나님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심지어 인간은 신이 되기를 배우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 자신도 한 번 지금의 우리와 같았으며 하나의 높아진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살과 뼈가 있다고 가르친다.1) 또 헬라 철학에서도 세계가 신에게서 유출된 것으로 보아 결국은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한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본문은 오해하기 쉬운 구절 중에 하나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정말 종국에 가서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인가?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사람이 하나님께 흡수되거나 하나가 되어 버린다는 뜻인가? 만일 베드로 사도가 이런 이교의 주장이나 헬라의 철학 그리고 이단파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면 어떤 뜻으로 이 말씀을 했는가?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두 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

1. 이 구절을 중생, 입양 그리고 성령의 은사와 같은 개념의 구절과 연관시키거나 또는 성례 신학과 연관시킨다. 그래서 신성에의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개종과 세례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Chaine, Sqicy, Reicke, Green).

 

2. 다른 학자들은 종말론적 조망으로 간주하여 죽음에서나 재림 때 얻게 되는 것으로 본다(Moffatt Schelkle, Kelly).2)

그러므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시기에 대해서 두 견해는 크리스천이 되기 시작하면서라는 입장과 그 신자의 죽음에나 재림의 종국에 가서야 된다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후에 밝히기로 한다.

여기서는 먼저 신의 성품이 무엇을 가리키며 그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신의 성품에 참여는 하나님으로 흡수된다거나 신성과 연합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사상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만 아니라 헬라 사람들도 대부분은 다신론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죽음 후에 지속적인 삶(인격적 존재)을 기대했으나 하나님과 연합되거나 그분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헬라나 유대 저자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죽지 않으심과 썩지 않으심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켰다. 바울은 적어도 이 개념을 가졌으며 그렇게 볼 때 그것은 죽을 때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가서야 있을 것이다.3)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썩지 않는 씨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생하였으며(벧전 1:23) 그 결과 우리의 죄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면 의와 거룩과 지식이다(엡 4:24; 골 3:10). 여기서 의와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그것들이 우리를 신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우리를 신의 성품으로 만든다. 이것은 신비이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갈 2:20). 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빌 1:21)라고 한 바울의 고백이나 네가 내 안에 그리고 내가 너희 안에 있겠다(요 15:4-5)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으로서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교제의 결과이기 때문에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지금 그렇게 되는 것이다.4)

그러므로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진정한 연합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전서에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자요(벧전 4:13) 나타날 영광에 참여자라고 하였다(벧전 5:1). 전 신약은 회개하고 믿으며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으므로 온전히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신자가 이미 신성에 참여하였다고 옳게 주장하였다.5)


1. John H, Gerstner, The Teachings of Mormonism(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0), pp.18-19
2. Richard J. Bauckham, Jude, 2 Peter(Waco: Word Book, 1983), p.181
3. Peter H. Davids, More Hard Sayings of the New Testament, pp.181-182
4. R.C.H. Lenski , I and II Epistle of Peter, The Three Epistles of John, and the Epistle of Jude, p.252
5. Michael Green, 2 Peter and Jude(Grand Rapids: Eerdmans, 1989), p.74

http://revdavidsuh.com/bbs/view.phpid=2Peter&page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라(벧후1:1-10)

 

컴퓨터를 오래 사용하다보면 속도가 떨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전원이 갑자기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컴퓨터가 그런지 이유를 모르는 초보자들은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그런 줄 압니다. 그러나 컴퓨터를 아는 전문가들이 살피면 큰 고장이라기보다는 프로그램을 깔았다가 지웠다가 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스크러치가 생겨 속도가 떨어지며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감염이 되어 작동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합니다. 이럴 때 전문가들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완전히 삭제한 후 다시 프로그램을 깔아 사용하면 컴퓨터가 새 것처럼 잘 작동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후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처럼 세례를 받을 때나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한 순간 우리의 속사람이 달라지는 성화가 일순간에 이뤄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례 받는 순간에 생각과 가치관이 일순간에 변화되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 성화가 특별한 사건이나 거룩한 예식을 통해 한 순간에 이뤄진다고 한다면 아마도 교회 다니지 않던 남편이 아내가 세례 받는다고 한다면 꽃다발을 사가지고 축하할 것이며, 자녀들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는 부모들이 줄을 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설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현대인들의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지 않는가? 생각이 됩니다. 복음은 분명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말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삶을 보여주지 못하므로 세상으로부터 복음이 외면당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오늘 말씀을 살피면 보배롭고 존귀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교훈하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 성도들이 ‘믿음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자 오늘은 ‘성화’를 다루려고 합니다.

 

성화는 구원의 서정 가운데 일곱 번째 속한 구원의 서정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성령에 내적 변화와 설득을 통해 회개하며 신앙을 갖게 된 이후 자신이 의롭게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양자된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으로 신앙생활이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은 이제부터 주님이 부르시는 순간까지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주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온전히 닮게 하는 성령에 내적 사역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칭 의

성 화

단회적인 일

지속적인 일

법적인 지위를 부여함.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루지 못함.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

인간의 협력을 통해 이뤄진다.

회심한 자녀들에게 동일한 약속을 갖게 함.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음

 

하나님의 피조물인줄 알지 못했던 사람이 성령의 내적 부르심과 역사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다가오셨음을 깨닫게 된 성도들은 그 순간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백성답게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신앙의 열의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 앞에 감동되어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행하신 구속의 사건 앞에 회개하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죄에 정죄와 심판으로 구원받게 된 것을 감격하게 됩니다. 이런 내적 변화와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된 성도들은 내적인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나 그렇지 않았을 때나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믿음의 고백을 갖게 된 성도에게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옵니다.

 

세상이 결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며, 그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기 자신도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변화가 인간의 노력이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사역에서 제자들에게 앞으로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후 만나게 될 사건과 함께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미리 언급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그런 행보를 하셔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16:13-15).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성령이 오시는 것이 좋은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에야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들과 동일한 육체를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다른 보혜사가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한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도덕적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진 다른 피조물과 다를 것이 없으나 인간은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할 수 있는 영적 존재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격적 교류의 수단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배울 수 있도록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남다르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인간이 하나님의 영으로 도덕적 존재로 지음받지 않았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다른 피조물과 다를 것이 없으나 인간은 하나님의 영으로 지으심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타락하므로 이러한 관계가 깨어졌으며 전적으로 부패하며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존재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타락하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혀 의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부패한 본성을 따라 오직 육체의 소욕만을 채우며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노예로 전락하며 살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의 허물과 죄책에 대한 형벌을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악의 담장을 허물어 버리시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거듭난 성도들의 몸을 성전 삼아 내주하심으로 우리의 영이 성령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신 그 목적인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 곧장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광야로 끌고 들어가 40년을 연단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이 신앙의 여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거듭나게 하신 후 우리의 성품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인도하시는 삶이 신앙의 삶이며, 믿음의 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화란 무엇인가?

 

성화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되어 하나님의 자녀 됨을 깨달은 후 육체의 부패한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본분이 아님을 깨달아 성령의 내적 조명과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적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칭의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성화는 칭의와 같이 일순간에 회득되어 단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일생을 걸쳐 힘써야 할 사역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완전 성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주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고자 하는 이 싸움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성도의 삶이며, 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이 부족하거나 미달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선행을 하여 완전한 구원을 이루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의 길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성화는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사역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끊임없이 요구하며 촉구하지만, 억지로 강요하거나 협박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끊임없이 “죄가 너희 몸을 주관하지 못하게 하라!”이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신분이 달라졌으므로 죄를 멀리하며 너희 몸을 죄의 도구로 전용되지 않도록 죄와 싸워 이기라는 것이다.

 

성도는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알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도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여된 거룩한 의무와 특권인 성화의 삶을 힘쓰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 믿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은 이 땅을 위한 한시적이며, 의무 없는 삶을 위한 종교와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나라, 영원한 가치, 영원한 삶을 위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준비하며 살라고 우리에게 이 귀한 삶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것이다.

 

성화는 일생을 걸쳐 힘써야 할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로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의무인 것이 성화의 사역이다.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해 성령 하나님은 우리 몸을 당신의 거처 삼으시고 내주하시면서 이 성화의 사역을 도우신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어느 날 잘 곳이 없다고 방문했는데, 마침 아들 혼자 있으니 같이 지내시라고 하면 하룻밤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 아들딸이 날 리가 납니다. “엄마 불편해 죽겠어!”저 사람 내 보내지 않으면 나 친구 집에 자고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내 놓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이 우리 몸을 성전 삼으시고 함께 하시기가 좋겠는가?

 

정말 성령 하나님은 불편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은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으신 채 일생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는 나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길 원해 인내하며, 하나님의 도덕적 가치를 닮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것인가를 깨닫도록 지속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

 

성도들이 거룩한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연락에 취해 살아갈 때 성령 하나님은 깊이 탄식합니다. 그러나 주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길 원하지만, 의지가 약해 넘어질 때는 성령께서 다가와 우리의 연약한 손을 붙잡고 일으켜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화는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독립적인 사역이 아닐 뿐 아니라 그렇다고 하여 우리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만 의존하는 사역도 아닙니다. 성화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인간의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사역입니다.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해 성령 하나님은 성도 안에서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또한 성도들이 자신의 본분을 바로 알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귀히 여기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비록 이 땅의 삶이 곤고하며 시험과 유혹으로 주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피할 수 없는 광야의 인생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하나님의 성품, 도덕적 성품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걷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성화에서 우리의 역할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 도덕적 기질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의 장입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역할이 무엇일까요? 성화에서 우리 인간의 역할을 웨인 그루뎀 박사는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을 인식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소극적 측면이라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는 먼저 ‘성화’가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측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6:!9).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로 죄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없으므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성령의 역사에 철저히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소극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철저히 의지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힘쓰고 노력해야 할 인간의 의지까지 제한하거나 막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적극적인 측면에서 주님이 주신 믿음에 자신의 의지를 발동시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여한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1:5-7).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아 의롭게 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 그 이후의 삶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성화의 삶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화를 이루는 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평생을 걸쳐 주님이 부르시는 순간까지 힘쓰다 가야 하는 것이 신앙의 길이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에게 주신 과제입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인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내 생각, 내 감정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 성령께 붙잡힌 삶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훈과 책망을 끊임없이 받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권면하시며, 자신을 통해 영광 받으시길 원하시는 뜻을 깨닫게 하실 때 그 음성 앞에 순종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행동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생각과 판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실 때 그 음성 앞에 돌이키며 순종하므로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 신앙의 길을 갈 때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것만큼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천국을 소망하며,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이 속한 교회와 가정과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살아야 할 과제입니다.

 

이 삶을 지속할 때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어떤 일이 어떤 생각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시는지 깊이 깨닫게 되면서 성화의 과정이 힘든 과정이기 보다는 주님과 아름다운 동행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의미인데,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 경배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인생은 ‘믿음의 여정’이며, ‘신앙의 여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 신앙의 길을 하나님이 걷게 하시는 이유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하나님의 도덕적 기질을 닮게 하시고자 우리의 육체를 당신의 처소 삼으시고 함께 동행 하며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배우도록 조력하고 계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와 같은 이 땅에 삶이 때로는 힘들고 어려움이 많지만,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갈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인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신앙의 여정을 통해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나와 여러분의 의지를 말씀 앞에 복종시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원합니다. <blo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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