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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신약에 나타난 믿음과 행함/변 종 길

by 은총가득 2021. 3. 8.

 

신약에 나타난 믿음과 행함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믿음과 행함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 것일까? 아니면 행함도 있어야 하는 것일까? 로마가톨릭에서처럼 ‘믿음과 행함’(믿음 +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일까? 또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현재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행함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소위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논란이 많다. 특히 소위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엉망인 목사들과 성도들 때문에 상처받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신교를 비난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행함’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행함을 강조한다. ‘믿음’만 있어서는 안 되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신학자들은 ‘믿음’뿐만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으며 ‘행함’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듣고 배운 것은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어린이 복음성가가 말해 주듯이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인데, ‘행함’이 있어야 천국에 간다고 하니 우리의 신앙에 큰 혼란이 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은가? 무엇이 진리인가? 이에 대해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가 무엇인지, 종교개혁의 구원 교리가 무엇인지, 칼빈의 성화론이 무엇인지 등등 교의학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평신도들에겐 너무 어렵고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래서 필자는 성도의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성경’에서 주석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믿음과 행함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는 대표적인 몇 구절을 택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I. 마태복음 7장 21절

 

마태복음 7:21은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인용하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기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 +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여기의 “주여 주여”란 표현을 긍정적으로 보고 ‘믿음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앞뒤 문맥을 보면 “주여 주여”란 말은 매우 부정적이다. 우선 “주여 주여”란 반복이 그것을 시사한다(흐로쉐이드). 그리고 앞 구절들에 보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뿐 아니라 그와 같은 모든 위선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며, 거짓 믿음의 사람들이다. 처음에 믿음이 있었는데 나중에 행함이 없어서 천국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다(23절). 여기에 우리말 성경은 “도무지 알지 못하니”로 현재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원문은 “우데포테 에그논”(oudepote egnon)으로 아오리스트(과거)이다. 따라서 “결코 알지 못하였다” 즉 “너희를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는 뜻이다. 영어 성경에는 다 과거로 번역되어 있다(I never knew you). 즉,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한 번도 안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전에는 알았다가 이제는 모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안 적이 없다고 하신다. 곧, 처음에는 ‘믿음’이 있어서 알았는데 나중에 ‘행함’이 없어서 모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몰랐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참) 믿음’이 없었으며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참 믿음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 참 믿음이 있는 자는 거짓 선지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행함은 믿음의 열매요 믿음의 증거이며 믿음의 표현이다.

 

II. 로마서 2장 13절

 

로마서 2:13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다’(dikaithēsomai, 미래)는 표현은 로마서 3:24, 28의 ‘의롭다 함을 얻는다’(diakioomai, 현재)는 표현과 가리키는 바 내용이 다르다. 앞의 것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 받을 것을 말하지만(미래 칭의; cf. 롬 2:16), 뒤의 것은 현재 이 세상에서 의롭다 함 받는 것을 말한다(현재 칭의).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한다(롬 5:1).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는 원리와 근거는 같다. 둘 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현재 칭의는 ‘믿음’으로 받고, 미래 칭의는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하는 자’란 율법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 곧 참 믿음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 참 믿음이 있는 자는 율법을 행하게 된다. 물론 100% 다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함에 휩싸여 있다), 최소한 율법을 지켜 행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럴 때에도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는 그 사람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과거), 현재 의롭다 함을 받은 존재가 되었으며(현재), 또 앞으로 마지막 날에 의롭다 함 받을 것이다(미래). 이런 사람이 율법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말할 때에 단지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를 가리켜 말할 때에 성경에서 다르게는 ‘의인’, ‘의로운 자’, ‘정직한 자’, ‘겸손한 자’, ‘선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내적 관계는 ‘믿음’이며, 눈에 보이는 외적 모습은 ‘행함’이다.

 

이처럼 우리가 경우에 따라 여러 관점에서 다르게 말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의롭다 함 받고 구원받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이며, 그 공로를 받는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따라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행 15:11; 엡 2:8; 딤후 1:9; 딛 2:11; 3:7; 롬 3:24).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게 된다. 100% 다 지킨다는 말이 아니라 지켜 행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살려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심으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대적하고 ‘선한 일’을 원하게 된다(갈 5:16-17). 따라서 이런 사람은 차츰 차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갈 5:22-23). 이것도 순전히 나의 노력으로 맺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맺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된다.

 

III. 로마서 3장 28절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8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정하다’(logizomai)는 것은 ‘생각하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바 내용을 직역하면 “사람은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가 된다. 율법의 행위들을 배제하고서, 율법의 행위들이 전혀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allein durch den Glauben)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원어에 ‘오직’에 해당하는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라고 했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오직 믿음으로’의 뜻은 우리의 행위들이 배제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공로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곧, 의롭다 함 받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행 15:11; 엡 2:5, 8; 딤후 1:9; 딛 3:7).

 

IV. 야고보서 2장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는 서신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너무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행함’이 소홀히 여겨지는 경향이 있어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하는 서신을 써서 보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로마서보다 후에 기록되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이신칭의 때문에 행함이 약해졌다는 근거도 없다. 오히려 야고보는 믿음과 동떨어진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 곧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것을 2장 1절에서 알 수 있다. 우리말 성경(개역개정판)에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우리말 번역에 의하면 이제 ‘믿음’은 있으니 ‘올바른 행함’을 가지라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외모 취함으로 가지지 말라.”가 된다. 즉, 야고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여전히 ‘믿음’이다. 올바른 믿음은 ‘외모 취함’ 곧 사람 차별로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13절은 “외모로 취하지 않는 믿음”(차별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 말하고 14-26절은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에 대해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야고보서 2장에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14절에서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 사이의 대비에 대해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이 있노라 하고”에서 ‘하고’(legē)는 ‘말하고’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대비는 ‘믿음’과 ‘행함’의 대비가 아니라 ‘말함’과 ‘행함’ 사이의 대비이다. 즉, ‘말뿐인 신앙’과 ‘행함 있는 믿음’ 사이의 대비인 것이다. 참된 믿음은 말만 하고 마는 신앙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나는 신앙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21절에서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21절)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행함으로’(ex ergōn) 의롭다 함을 받았다니?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이 강조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 곧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pistei, ek pisteōs) 된다는 것(롬 3:28; 5:1)과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야고보는 바울과 다르게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고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두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用語)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dikaioomai)는 단어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바울과 야고보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 단어로써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이 사실을 바로 파악하는 것이 야고보서와 로마서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그러면 그 개념의 차이란 무엇인가? 먼저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의미이다(롬 3:25-26). 그러나 야고보는 이 용어를, 어떤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다’는 의미로, 곧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믿음이 이 행동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창 22:12). 이처럼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행함’(erga, 행위들, 일들)의 개념도 서로 다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의 ‘행위’ 또는 ‘행함’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 받으려고 하는 노력으로서의 인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곧,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노력들을 가리키는데, 이런 것들은 의롭다 함을 받는 데 있어서 아무런 공로가 될 수 없다. 이에 반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행하는 행위들, 곧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함이며, 이것이 있어야만 참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가 동일한 ‘행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그 담고 있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행함의 ‘시점(時點)’도 서로 다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라고 말할 때의 ‘행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기 전(前)의 모든 인간의 노력들을 가리키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後)에 행하는 모든 믿음의 행위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야고보는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 문장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함께 일하였다’는 말은 마치 ‘신행합력설’(synergism)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만일 처음 믿을 때에 칭의의 근거로서 믿음과 행함이 함께 역사했다면, 그것은 신행합력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함께 일하였다’(sunērgei)는 동사의 시상(時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시상은 ‘미완료’로서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낸다. 곧, 믿은 순간부터 그 후로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시간의 경과’가 요구된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부분이다. 여기서 ‘온전케 되었다’(eteleiōthē)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해 남아의 플로어(L. Floor) 교수는 ‘충만한 발전에 이르렀다’고 해설하였다(Jakobus, 110). 전에도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있었지만 아직 초보적인, 유아적인 믿음에 불과했는데, 이제 이러한 순종을 통하여 그의 믿음이 성숙한 단계, 견고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야고보는 하나님을 처음 믿는 그 순간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 그 믿음이 성장하는 전(全) 과정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23절에서 다시 말하고 있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먼저 야고보가 창세기 15:6의 말씀 곧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을 알고 있었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바울이 그의 이신칭의 교리를 위해 즐겨 사용하던 것인데, 야고보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야고보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몰라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23절에서 또한 엿볼 수 있는데, 야고보는 여기서 창세기 15:6의 말씀이 창세기 22장의 사건에서 ‘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응하였다’(eplērōthē)는 말은 ‘충만해졌다’는 의미로, 앞의 ‘온전케 되었다’(eteleiōthē)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곧, 창세기 15:6의 ‘의롭다 함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의 순종으로 ‘충분히 드러나고’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야고보에게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된 구절은 창세기 22:12이라고 생각된다. 곧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말씀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내가 아노라”(yadatti)라는 단어를 가지고 야고보가 오랫동안 묵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곧, 야고보는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드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창세기 15:6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전개한 바울의 주장이나 창세기 22:12에 근거하여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한 야고보의 주장이나 둘 다 근거가 있고 옳으며, 각각 나름대로 진리의 측면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 모두에게 감사해야 하며, 이 두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풍부하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V. 구원받은 자의 행함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우리의 행함은 믿음에서 나오는 열매가 된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마 7:17)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선한 일을 하게 된다. 빛이 자연스레 양사방으로 비춰나가듯이 세상의 빛 된 우리는 주위에 선한 일을 행하게 된다(마 5:14).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엡 5:9).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하게 된다(마 5:16).

 

이것을 다르게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갈 5:6).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役事)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총괄이며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참된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 번 구원 받은 자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런 자들은 자기에게 참된 믿음이 없으며 자기가 ‘나쁜 나무’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7:16).

 

물론 우리의 선행도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으며 여전히 허물과 부족함이 많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114문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답한다. “하나님께 회개한 사람들은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아니오. 이생에서 가장 거룩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이 순종의 조그만 시작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뿐이 아니다. 우리가 행하는 조그만 순종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령이 도우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를 인도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갈 5:22-23). 따라서 개혁주의 교의학에서는 ‘성화(聖化)’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맺는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지극히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율법을 다 이루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의 공로(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롭다고 칭함 받았다(법적 의미). 우리 자신이 의롭게 변화된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의롭다고 칭함(선언)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 받은 우리가 성화(聖化)의 노력을 기울일 때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루는 성화는 지극히 작고 구원 얻기에는 턱 없이 모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화’(거룩하게 됨)의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깨끗하게 하신 목적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같은 맥락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따라서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내가 잘 났다는 교만이 아니라 또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정죄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조그만 성화도 다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임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건강,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해야 한다. 따라서 ‘교만’이 들어올 공간이 전혀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행해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날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큰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살리신 하나님의 큰 은혜에 보답하여 드리는 조그만 감사의 표시이다. 예수님의 탕감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일만 달란트(약 3~6조원) 빚진 종이 갚을 것이 없는 고로 주인이 불쌍히 여겨 빚을 다 탕감해 주었는데, 그런 큰 은혜를 받은 종이 100 데나리온(500~1,000만원) 빚진 동료 종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한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큰 은혜에 대해 ‘빚진 자’의 심정으로 드리는 조그만 보답이고 감사의 표시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해 다룰 때에 ‘우리의 감사’라고 제목을 달았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여기에 우리의 공로는 전혀 없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값없이 우리에게 전가(轉嫁)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의 의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우리의 행함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은 ‘믿음 + 행함’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 천국이든 미래 천국이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감사함’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큰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감사함으로 행한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구원받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처럼 우리가 미래에 구원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 행함이란 것도 순전히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행한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가며, 천국에 가서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이다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

 

[본문] 야고보서 2:1, 14-17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은 ‘행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맞습니다. 야고보는 성도의 실생활에 대해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믿음과 분리된 행함, 믿음과 관계없는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관심은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참 믿음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디서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하게 네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I. 야고보서 2장의 주제(1절)

 

1절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도 비슷합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그러나 이런 번역은 오해를 초래하기 쉽습니다. 너희는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행함’에 대해 말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은 ‘행함’에 대해 말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외모로 취함으로 가지지 말라.”가 됩니다. 여기서 ‘믿음’이 목적어입니다. 곧, 야고보는 여기서 우리가 ‘믿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외모로 취함으로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차별함으로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아공화국의 L. 플로어(Floor) 교수가 1-13절을 ‘외모로 취함이 없는 믿음’, 14-26절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본 것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1-13절은 “faith without ...”, 14-26절은 “faith with ...”가 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2장은 “참 믿음이 무엇인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외모로 취함이 없는 믿음 곧 차별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가난한 자라고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II. 말함과 행함의 대비(14절-17절)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을 ‘믿음’과 ‘행함’의 대비라고 생각합니다. 14절의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씀에 대해, ‘믿음’과 ‘행함’이 대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안 되고 ‘행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곧 <믿음> + <행함>이 야고보가 말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게 아닙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levgh/, 말하고) 행함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믿음이 있노라고 ‘말함’과 실제로 ‘행함’ 사이의 대비입니다. 말하는 것은 거짓될 수 있고 속일 수 있습니다. 말뿐인 믿음, 거짓된 믿음, 죽은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고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16절 끝에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ei[ph/, 말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에서도 ‘말함’과 ‘줌’의 대비입니다. 곧 ‘말뿐인 믿음’과 실제로 ‘행함이 있는 믿음’ 사이의 대비인 것입니다.

 

III. 그 자체가 죽은 것(17절)

 

17절에 보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 자체가’(kaq! eJauthvn)는 ‘자기 안에서’(in itself), ‘스스로’, ‘원래부터’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죽은 것’(nekrav)은 형용사로서 죽은 상태(dead)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중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속 죽은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믿음이 있었는데, 나중에 행함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보태지지 않아서, 첨가되지 않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죽은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곧 원래부터 참 믿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거짓 믿음이요 헛된 믿음이며 말뿐인 믿음이었습니다.

 

26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 ‘죽은 것’(nekrav)도 형용사로서 계속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은 처음부터 죽은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곧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던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처음부터 죽은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참 믿음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것은 ‘믿음’에 ‘행함’을 플러스 하라는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IV. 용어의 개념 차이

 

21절에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여기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았다”고 하니 참 당혹스럽습니다. 어찌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고 누누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왜 서로 다르게 말하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안 좋게 보았습니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신칭의’를 주장하고, 야고보는 ‘이행칭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서로 주장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바울과 야고보는 각기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이 다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어는 같지만 그 의미가 다릅니다.

 

우선, ‘의롭다 함 받는다’(dikaiovomai)는 용어의 개념이 서로 다릅니다. 바울은 이 용어를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법정적 용어입니다. 이에 반해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 곧 의롭다 함 받은 사람이 그의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는다, 분명히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22절 끝에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했는데, 이것을 야고보는 ‘의롭다 함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둘째로, ‘행함’ 또는 ‘행위’(e[rga)의 개념도 다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 받으려는 노력, 공로라는 의미로 ‘행위’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야고보는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함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행함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며, 믿음의 열매가 드러나는 것으로서의 행함입니다. 그래서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각자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상의 차이를 무시하고, 단어가 같다고 의미도 같은 것으로 보면 큰일 납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아기가 ‘마마’라고 하면 어머니(mother)란 뜻입니다. 그러나 궁중에서 임금을 보고 ‘마마’라고 하고, 중전과 왕자를 보고 ‘마마’라고 부르면 다른 뜻입니다. 왕족이나 궁중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또 의사가 어떤 사람을 보고 ‘마마’ 걸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천연두’란 뜻입니다. 이처럼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뜻이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마마’라는 단어가 나타나면 무조건 ‘어머니’란 뜻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전혀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역사학자가 조선실록을 보고서 조선시대에는 대신들이 임금을 보고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말이며 그런 사람은 학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여기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들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의미상의 차이를 고려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합니다. 큰일 납니다.

 

사랑하는 우리 원우 여러분,

 

우리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바울과 다른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와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바울에게 단지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했습니다. 가난한 자 구제에 힘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구제에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구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 돕는 일을 힘썼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 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바로 이해하고 굳게 붙들고 힘 있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제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서민들을 돕는 일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곧 야고보가 강조했던 것이고, 또한 바울이 힘써 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곧 참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이며 참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미래의 한국 교회를 짊어지고 나갈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담당할 한국 교회는 바울이 힘써 행했고 야고보가 강조하였던 바대로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고 돌아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한국 교회는 다시금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서 우리 사회를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희망과 꿈을 가지고 힘써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경건회 설교. 변종길 목사)


이신칭의와 행위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서 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개신교의 핵심 교리에 속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행함으로 또는 믿음과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는 교리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는 교리를 가르쳤다. 따라서 ‘오직 믿음(Soal fide)’은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함께 종교 개혁의 핵심 교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이러한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아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굳게 붙들고 지켜왔다. 이 교리는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고 하는 한국의 전통 종교들과 사상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큰 기능을 발휘하였으며, 한국 개신교 특히 장로교의 굳건한 토대를 이루었다. 이러한 교리는 또한 박윤선 박사의 주석과 이상근 박사의 주석에도 반영되어 그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이러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해 최근에 한국 교회 일각에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신약학자들 중에서는 총회신학대학원의 이한수 교수가 “이신칭의와 선행의 윤리”라는 논문을 썼다. 여기서 그는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윤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알버트 슈바이처(A. Schweitzer)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어떻게 이신칭의가 신자의 선행을 가능케 하는가를 잘 논증해 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소유이다. 이신칭의와 성령 안에서의 삶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사람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선행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신칭의와 더불어 죄의 통치로부터 은총의 통치로 ‘주권 변경(change of lordship)’이 일어난다(롬 5:17-21).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이제 혼자 내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와 능력에 개방되어 있다.” 따라서 “윤리가 형식적으로 이신칭의 자체에 연관된 것은 아닐지라도 칭의가 윤리적 행위에 아무런 함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오류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한수 교수는 결론적으로 “바울의 사상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가 본질적으로 서로 붙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고 한다.

 

같은 총회신학대학원의 정훈택 교수도 이 주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쓴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라는 여섯 편의 논문은 이 주제에 대한 총괄적인 논문으로서 의의가 있다. 이 논문은 한국 교회의 윤리 부재 또는 약화 현상의 원인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하고, 그 중요한 원인으로 한국 교회의 대표적 신학자들의 행위 강조 약화를 들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은 이신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행위가 가지는 ‘구원론적 의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로 그는 박윤선 박사를 꼽고 있으며, 특히 그의 산상설교 주석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해석의 표준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강조하신 행위의 중요성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상보훈에 나타나는 팔복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해석에 대해, “구원론에 짜맞추는 식으로 본문을 주석하면서 동시에 팔복의 윤리적 색채를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고 비판한다. 그는 박윤선 박사의 성경해석 방법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하였는데, 박윤선 박사가 사용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리 곧 ‘종합적 방법’에 의해 그의 해석은 “어쩔 수 없이 본문에 신학적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주관적 해석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박윤선 박사가 “구원론에 더 없이 강렬하게 집착한 것이 그로 하여금 행위에 관한 성경 말씀을 100% 정당하게 설명하거나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올무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고 평가한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박윤선 박사의 성경해석을 비판한다. “믿음으로의 구원론과의 관련성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가 평생 목표로 지향하고 있던 바 말씀이 주도하는 신학을 세우기보다는 신학이 주도하는 성경해석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규범적 내용의 가치와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 곳에서는 윤리, 행위, 삶의 문제는 살아나기 어렵다.”

 

이러한 평가와 주장은 상당히 충격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 믿어왔던 이신칭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박윤선 박사의 신학과 성경해석에 과연 그만한 중대한 오류와 실수가 있다는 것인가? 나아가서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치고 주장했던 이신칭의 교리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가르침이란 말인가? 뿐만 아니라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의롭다 함 받으며 어떻게 구원받는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단지 몇몇 신학자들의 신학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원이 걸려 있고 나아가서 한국 교회의 장래가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이러한 주장의 핵심이 무엇이며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고 나서, 이와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본 주제는 너무나 중요하고 광범위한 주제이기 때문에 짧은 지면에 다 논할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현금에 한국 교회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는 몇몇 신학자들과 몇몇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본 논문의 논의 범위를 제한하고자 한다.

 

본 론

 

I. 이신칭의와 관련한 최근의 논의

 

1. 박윤선 박사의 해석

 

박윤선 박사는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에 과연 차이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분명한 의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산상보훈을 주석할 때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또한 “산상보훈(山上寶訓)의 구원론”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성경신학」이란 책에 별도로 다루어져 있다.

 

그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는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바울과는 달리 행함으로 구원받는 교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어떤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는 “결단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곧 “팔복은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을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그와 반대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논리가 미흡하고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곧, 팔복에 대해 처음 네 가지 복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義)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들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고, 다음 네 가지 복은 사람이 그리스도 신자가 된 후 신자로서 할 바 책임과 의무를 가르치신 것으로 보는 구별은 기계적이고 피상적인 구별로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태복음 5:17-7:29의 ‘율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부족함을 드러내 준다. 곧, “그것은, 참된 율법의 표준은 높기 때문에 사람이 지키기 어려운 것을 보여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기대하게(믿게) 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율법의 제2 효용 곧 정죄적 기능 또는 몽학선생적 기능을 말하는 것으로서, 정훈택 교수에 의해 이것은 ‘루터주의적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비판은 물론 좀 강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박윤선 박사의 주석에 이런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단지 박윤선 박사만의 문제는 아니고 오랫동안 한국 교회가 가졌던 산상보훈에 대한 이해의 문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곧,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산상보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교훈에서 천국백성 곧 신자의 ‘삶의 표준’을 제시한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기능을 하는 말씀으로 보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산상보훈의 가르침에서 우리의 실생활에 대한 교훈 곧 율법의 제3 효용을 보지 못하거나 덜 강조하는 부작용을 낳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훈택 교수의 비판은 아래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지나친 것이 많으며 박윤선 박사의 의도를 오해한 것도 많이 있다.

 

그리고 산상보훈 중에서 마치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처럼 말씀하신 구절들(마 5:29,30, 7:13, 19, 21)에 대해 박윤선 박사는,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교훈은,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강조한 바울의 교훈과 다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행위 계약에 의한 구원을 말씀하시고, 바울은 은혜 계약에 의한 구원을 말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 네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1) 은혜 계약은 행위 계약의 요구가 측림(側臨)한 장면에서만 그 의의(意義)를 명백히 함. ... 그와 같이, 성경에 은혜 계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 계약은 그 고소를 계속하고 있다.

2) 행위 계약이 폐지되지 않은 것만큼 그것은 언제든지 어디서나 말하고 있다.

3) 우리는, 산상보훈을 보고 그것이 예수님의 계시의 완료 형태인 줄로 생각하면 안 된다.

4) 예수님의 명령 속에는 그 명령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들은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상당히 미흡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윤선 박사는 산상보훈에 나타난 행위들에서 율법의 제3 효용 곧 천국백성의 삶의 표준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2. 정훈택 교수의 견해

 

1) 박윤선 박사 비판

 

이러한 박윤선 박사의 견해는 정훈택 교수에 의해 여러 모로 강하게 비판받았다. 물론 그는 박윤선 박사가 행위, 윤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들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행위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이런 긍정적 평가는 그의 주석과 작품들 전체에서 비춰볼 때 극히 적은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행위를 말하는 성경 구절들을 가능한 한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이 그의 신학과 신앙 태도였다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면서 그는 산상보훈의 여러 구절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해석이 이신칭의론에 짜맞추는 해석이었다고 비판한다. 박윤선 박사의 팔복(5:3-10)에 대한 설명, 빛과 소금의 비유(5:13-16)에 대한 설명, 마태복음 5:19-20에 대한 설명, 22절, 26절에 대한 설명 등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에는 물론 타당한 점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그 문제점을 일일이 다 지적하고 다시 비판하는 것은 또 다시 매우 많은 논의를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그의 주장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 탐구

 

정훈택 교수는 이처럼 박윤선 박사의 성경 해석을 비판한 후에, 신약성경에서 ‘행위’가 가지는 의미, 특히 ‘구원론적 의미’ 또는 ‘구원론적 가치’를 탐구해 나간다. 여기서 우선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라는 제목이 이상하게 보인다. 행위가 어떻게 ‘구원론적’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물론 전통적 조직신학에서는 ‘구원론’이라는 제목하에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함께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화’가 구원론적 의미를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차원에서 ‘성화’를 다룰 따름이다. 그런데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러한 의문이 제기될 것을 정훈택 교수 자신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이런 의문을 스스로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과 행위에 어떤 구원론적 가치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얘기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분명히 행위가 구원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비판하고 거부하고 있다. 성경은 윤리 교과서가 아니며, 기독교는 윤리학이나 윤리적 종교가 아님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것을 보면 정훈택 교수는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를 신봉하고 있으며 조금도 벗어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는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덧붙인다. “그러나 성경은 행위, 삶을 언제나 믿음이나 믿는 자와 함께 다룸으로써 행위를 구원론적으로 취급하도록 허용, 권고하고 있다. 아니 행위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자와 격리되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행위가 구원론적으로 취급될 때에야 비로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명제를 바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설명은 우리의 의문을 푸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도리어 의문이 쌓여 간다. “행위와 삶을 믿음이나 믿는 자와 함께 다룬다”는 것과 “행위를 구원론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이 서로 어떻게 연결된다는 말인가? 정훈택 교수는 지금 여기서 ‘구원’과 ‘윤리’를 포함한 넓은 의미로서 ‘구원론’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그가 말하는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 ‘구원론적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이어서 나오는 그의 논의를 통해, “선행이 칭의받은 신자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활에 성화의 과실로서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라는 박형룡 박사의 글이나, 그와 같은 맥락의 신앙고백서의 글들을 인용하고 나서, “이 행위에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중대한 구원론적인 의의와 가치가 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것을 보면 정훈택 교수는 ‘구원론적’이란 용어를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여태까지의 일반적인 의미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칭의에 뒤따라오며 칭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맥락에서 선행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 발견되면 곧장 그것을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구원론’이란 용어를 임의로 쓰고 있거나 아니면 칭의와 선행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사실일까?

 

3) 인간측의 반응

 

정훈택 교수는 과연 어떤 의미에서 ‘구원론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이에 대해 그의 논문 다섯 번째 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를 논하려는 것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 의미로 인간의 행위와 구원을 연결하는 것은 성경에 걸맞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그는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 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힌다. “이 글을 쓰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 편에서 독자적으로 계획되고 집행되었으며, 하나님의 일방적 사역에 의하여 그 결과가 현대인에게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구원은 그냥 하나님의 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격과 그 인격체가 만들어 내는 삶의 모든 유형에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구원의 결과, 효과 혹은 신적 사역의 흔적들을 다루려는 것이다.” 이로써 정훈택 교수의 의도는 상당히 분명해진 것 같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하나님 일방의 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며 무언가 인간측의 반응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나타나는 구원의 결과, 효과 혹은 신적 사역의 흔적들’을 다루면서 이것을 ‘구원론적’이라고 명명하니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처럼 ‘감사’나 또는 ‘윤리’ 등의 이름으로 다루었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훈택 교수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굳이 ‘구원론적’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인간의 행위를 ‘구원’과 결부시키려는 강한 의지가 있는 것 같다. 앞의 글에서 인간의 반응을 ‘믿음’으로 보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성경은 한결 같이 구원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요 1:12, 3:16, 5:24, 행 16:31, 롬 1:17, 3:22, 25, 27, 28, 4장, 5:1, 10:9, 갈 3:5, 6-14, 22, 24, 엡 2:8 등 많은 곳). 물론 정훈택 교수도 인간의 응답에 대해 ‘믿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인간의 응답을 요청한다. 인간의 긍정적 반응 즉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믿음’에만 머물지 않고 여기서 슬그머니 인간의 삶 전체로 넘어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삶의 한 부분인 믿음을 통하여 수용한다. 믿음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의 실제적 부분인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의지 그리고 이 모든 기능들을 사용하여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행동도 기독교인의 삶의 진정한 한 부분이다. 이런 인생을 다루는 하나님의 뜻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신학의 이름으로 행위의 구원론적인 의미를 다룰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여기서 정훈택 교수가 어떻게 ‘구원론’으로 넘어가는지 주목해 보자. 믿음이 삶의 한 부분인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모든 행동도 삶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행위의 ‘구원론적인 의미’를 다룰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매우 엉성하고 이상하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위가 삶의 한 부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왜 ‘구원론’이 되는가? 또는 왜 ‘구원론적 의미’를 가지는가? 인간의 모든 행위, 모든 윤리가 다 ‘구원론적’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윤리학, 기독교 문화론, 기독교 예술론, 기독교 정치학, 기독교 경제학 등 인간의 모든 행동이 다 ‘구원론적’이란 말인가? 그런 것들이 다 ‘구원론적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정훈택 교수는 단순히 용어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4) 미래 천국과 행위

 

따라서 정훈택 교수의 근본 의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와 윤리’를 다룰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 모두를 말하면서 천국의 양면성과 윤리 문제를 논한다. 여기서 그는, “천국의 현재성과 관련하여 행위는 이미 얻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결과, 열매, 증거, 표식 혹은 하나님의 통치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보는 반면, “미래의 천국과 관련하여 행위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미래의 천국 곧 앞으로 들어갈 천국과 관련해서는 행위가 구원의 ‘전제조건’이라고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직도 천국의 완성이 남아 있는 현시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보상, 영원한 축복의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미래의) 천국에 들어갈 전제조건이 아니라 ‘행위’가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정훈택 교수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역사의 종국에 천국과 천국에 얽힌 하나님의 축복은 윤리적 삶을 제대로 산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윤리적 삶에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충분히 발휘한 사람에게 덧붙여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주목하여 읽어보자. 미래의 천국은 ‘윤리적 삶을 제대로 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미래의 천국이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삶을 제대로 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믿음’이 아니라 ‘윤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이 되고 있다. 그는 이것을 또 다른 곳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한편으로는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결과요 열매며 증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필요조건을 마련하는 나그네의 삶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윤리가 하나님의 아들직,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종말론적 선물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신자의 삶 곧 윤리가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는 ‘필요조건’ 또는 ‘전제조건’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현재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과 ‘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구별해서 서로 다르다고 보고 있으며, ‘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인간의 삶 곧 윤리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는 ‘믿음의 선행성’을 말하며, ‘전제된 믿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말한다. “신약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열쇠는 어디서나 - 즉 믿음이 문자적으로 말해지지 않는 곳에서도 - 이 믿음을 전제하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배후에는 지상사역을 마치신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 대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윤리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바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동기가 되어 윤리적인 사랑을 낳는다. 윤리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가능하게 되고 또 실행된다. 윤리적 사랑은 신적 사랑의 열매요 그 사랑에 대한 인간적인 응답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이라고 한 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믿음’이고 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행함’이라는 주장이 과연 성경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성경은 과연 그렇게 현재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과 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현재 천국’에는 들어갔지만 ‘미래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현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라고 아무리 말한다 할지라도 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이 인간의 행함이라면, 결국 인간이 구원받고 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비록 정훈택 교수는 부인하겠지만, 사실상 ‘인간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정훈택 교수는 “미래의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근본 이유는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늘 변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훈택 교수는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를 미래의 천국에 들어갈 전제조건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 미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미래의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아직 죄도 의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미래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에게는 아직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이기 때문에 - 하나님의 은총에 주도되고 자극되는 -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의 은총의 전제조건으로 표현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그 목표나 결과로 표현된다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을 일으키지 않는다.”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의 은총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록 그 행동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도되고 자극되었다 할지라도, 그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의 ‘전제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정훈택 교수가 왜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라고 말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는 단지 ‘구원론’이란 말을 인간의 윤리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님이 분명해졌다. 그가 논문의 서두에서 행위를 믿음과 “함께 다룬다”고 말했던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행위를 “구원론적으로 취급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분명해진 것이다. 그것은 행위를 단지 믿음의 열매라든가 자연스런 결과,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것 정도로 이해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으로 이해한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는 행위 ‘구원론적 의미 또는 가치’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II. 이신칭의와 관련된 몇몇 구절들

 

그러면 이제 이신칭의의 가르침과 관련한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에 맞지 않는 듯이 보이는 몇몇 구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지면으로 인하여 관련된 수많은 구절들을 다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본 논문의 논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본주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구절들 몇 개를 택하여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 왜 잘못된 이해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 핵심을 파악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1.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나은 의(마 5:20)

 

이신칭의 교리와 관련하여 산상보훈 중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는 마태복음 5:20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혹시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 구절에 대해 우리는 정확하게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박윤선 박사도 이 구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귀절은, 산상보훈에 있어서 중요하니 우리의 심각(深刻)한 사색(思索)을 요하는 깊은 귀절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윗 귀절까지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구원관을 마음에 두시고 거기에 부합하는 율법론을 가르치시다가 갑자기 여기서는 행함으로야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설치하시려는 듯이 말씀하신 까닭이다.”

 

그러나 정훈택 교수에 의하면, “해석이 점점 어려워지고 더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하는 것은 본문이 그렇게 되어 있다기보다는 애당초 박윤선의 문제제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당시 표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것보다 제자들의 의는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정훈택 교수는 당시 표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주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깨끗하게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고, 보존하고, 해석하고, 지키며 가르치는 일이 그들의 주임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전력했으며, 그 세부적인 사항까지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최고의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이 사람들을 지명하시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너희는 적어도 그들보다는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웨슬리안들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존 웨슬리는 이 구절에 대해, 당시 바리새인들의 의(義)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고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의는 이보다 더 높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웨슬리는 바리새인들은 위선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일부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수는 신실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바리새인의 의보다 못하지 않다. 둘째, 하나님의 계명과 관련하여 당신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못하지 않게 하라(금식 기도와 성경 읽기 등). 셋째, 선행에 있어서 바리새인보다 못하지 않게 하라(구제와 자선 등). 넷째, 나아가서 당신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게 하라. 그래서 웨슬리의 설교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라.’ 그리하면 당신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예수님의 평가와 정반대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외식(外飾)하는 자’라고 하셨으며,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며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다(마 23:25, 28). 칼빈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오직 외적 의무들에만 국한시킴으로써 그들은 자기 제자들을 원숭이들처럼 위선으로 교육시켰다. 나는 물론 그들이 악하게 살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참으로 그들은 그들이 가르친 것보다 더 악하게 살았다. 나는 여기서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 외에도 그들의 위선적 선을 거짓되게 보이는 것을 기꺼이 포함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박윤선 박사의 이 구절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박윤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란 것은, 외식이 그 특색이므로 인본주의의 가장 하등품에 속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본주의(인간의 방법으로 인간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면서도 외식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인본주의도 진리가 아니거니와 외식은 더욱 가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義)는 실질(實質)에 있어서 불의(不義)요, 죄악인 것이다. 그런즉 그들의 의보다 좋은 의는, 그들의 의와 같은 종류의 의의 연장이나 확대가 아니고 그것의 말살(抹殺)이고 온전히 새 종류의 의이다. 이 새로운 종류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난 자의 의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신 말씀과 같다. 중생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박윤선 박사가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낮은 것이요 악한 것으로 보았으며, 또한 이에 대비되는 천국백성의 의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의요 질적으로 우수한 의라고 본 것은 옳은 것이다.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에 대해 ‘새 종류의 의’ 또는 ‘거듭난 자의 의’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전가된 의’ 곧 ‘칭의의 의’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실제적 의’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의 ‘너희 의’를 ‘전가된 의’ 곧 ‘칭의의 의’로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의’라고 하지 않았으며 ‘너희 의’라고 했다. 둘째, 바로 앞절(19절)에서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이라고 했다. 즉 천국백성의 행함과 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셋째, 마태복음 5:13-20의 전체 문맥이 천국 백성의 세상에서의 역할 또는 사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성도들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20절의 ‘너희 의’를 ‘칭의의 의’로 볼 수 없고 마땅히 천국백성의 ‘실제적 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무엇일까?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위는 믿음 없는, 또는 믿음과 유리된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이 ‘천국 백성들’인 사실에서 분명하다. 그런데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곧 천국 백성의 일반적 생활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마땅히 더 나아야 하고, 또 더 나을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결코 높은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는 외적인 것이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된 사람은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므로, 비록 외적으로는 아직 덜 세련되고 미숙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낮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본적인 마음의 성결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천국 백성이 된 사람은 최소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는 월등히 높은 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의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룬 의가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어진 실제적 의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씻으시고(칭의), 성령을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성취해 주신 의이다(실제적 의). 이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이요(칭의의 시점에), 불완전하지만 성령 안에서 자라가는 의이다(계속적 성화).

 

2. 지옥불에 들어가리라(마 5:22)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당혹감을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옛 사람의 가르침인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하신 말씀에 한 술 더 떠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말씀인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된다. 형제에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욕 한 마디 했다고 해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면 도대체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구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다음 몇 가지 해석을 생각할 수 있다.

 

1) 실제로 지옥에 들어간다고 보는 견해. 문자 그대로 보면 이렇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이 사실은 성경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문자 그대로만 보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놀랍게도 정훈택 교수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표현된 대로 이해한다면 이런 말씀이 됩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고, 하나님께서 죄로 정하시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나오는 그의 설교를 다 읽어보아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 이상의 설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2) 형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위협하신 것으로 보는 견해. 그러나 아무리 목적이 선하다고 해도 진실에 기초해 있지 않는 것은 옳은 말씀이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지옥에 들어가지 아니할 줄 뻔히 알면서 괜히 사람들을 위협하고 겁주시는 분이 아니다.

 

3) “지옥 불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로 이해하는 견해. 이 해석은 헬라어의 ‘에노코스(enochos)’를 “··· 할 위험성이 있는(in danger of)”으로 번역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에노코스’를 그렇게 번역하는 것은 이 구절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집어넣은 신학적 설명으로 생각된다. 이 단어의 원래 뜻은 어디까지나 “subject to, liable, answerable, guilty”이다.

 

4)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이 말씀을 “원칙적으로는(in principle)” 그러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형제를 대하여 화를 내거나 욕을 한 것은 형제를 미워한 것이기 때문에 제6 계명을 범한 것이요(요일 3:15 참조),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율법을 따라 판단하자면”, 율법을 범한 자로서 죽어 마땅하다는 뜻이다(약 2:10,11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 원칙적으로는, 하나님의 용서가 없었더라면 - 지옥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보여주며,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다 예수님께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신 이가 예수님이시며,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 예수님의 강조는 유대인들의 형식주의, 외식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참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있으며, 그것이 율법(제6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드러내시고, 또한 마음으로라도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경고하신 것이다.

 

3. 천국에 들어갈 자(마 7:21)

 

마태복음 7:21은 우리의 현 논의에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얼핏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마치 우리의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듯이 말씀하신다. 따라서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만큼 중요하다.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그러나 여기 이 귀절들은, 구원의 이법(理法)을 말함이 아니고 심판 곧 정죄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정죄의 원리가 있고서 그 후에 사죄의 규례가 생긴 것이다. 이 귀절들이 말하는 심판의 원리는, 후일에 구원의 원리를 말씀하실 준비 계단인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예수님은 속죄자로서 속죄의 교훈을 그 백성에게 주시기 전에 먼저 율법을 가르치셨다고 보는 그의 해석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및 해석 원리가 옳지 않음은 길게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산상보훈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 곧 천국백성들에게 주신 교훈이며, 예수님은 사역의 초기부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다(마 4:17, 23, 막 1:14 등).

 

한편, 정훈택 교수는 이 구절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우선 “주여 주여 하는 것”은 형식적인 고백, 위장된 믿음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긍정적 의미와 의도로 ‘주여!’하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염두에 두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물론 진정한 신앙고백적 외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필자는 정훈택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니, 우리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여 주여” 하는 것 자체가 꼭 부정적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문의 표현도 ‘전체 부정’이 아니라 ‘부분 부정’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이 바로 이어서 나오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표현과 대비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주여 주여 하는 것”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서로 대비되어 있다. 따라서 “주여 주여” 하는 것은 그저 외적인 믿음 현상을 의미한다. 이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에서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는 ‘믿음’과 ‘행함’이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형식적인 믿음’과 ‘참 믿음’이 서로 대비되고 있다. ‘참 믿음’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의 형식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뒤따라야 한다. 야고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함이 있는 믿음’ 곧 ‘산 믿음’을 가진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약 2:14-26).

 

4. 행한 대로 보응하심(롬 2:6-8)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말하기에 앞서, 2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2장 6-8절에서는 하나님의 보응(報應)에 대해 말하면서 이 보응은 ‘각자 행한 대로(kata ta erga autou)’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각자 행한 대로, 행위를 따라 행해진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마 16:27, 고후 5:10, 벧전 1:17, 계 2:23, 20:12, 22:12 등). 이 하나님의 심판(보응)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7절),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실 것이라고 한다(8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선행을 통해 영생을 얻는단 말인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삶 또는 행위에 의존한다는 말인가? 따라서 이 구절에 대한 조심스러운,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1) 홀데인(Haldane)은 이 구절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을 가리킨다고 본다. 즉, 율법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준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 구절에 근거하여 행함에 의한 칭의를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이 장은 오히려 사람이 선행으로는 의롭다 함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도 이와 비슷하게 본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선행은 은혜로 영생이 주어진 사람들 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evidence)이다. 둘째, 바울은 지금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설명한다. 율법에 의하면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희망을 공격하고 있다.

 

위 두 사람의 견해는 말 그 자체만 떼어서 볼 때는 다 맞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바울은 지금 한 그룹(영생 얻는 그룹)에 대해서는 하나마나 한 빈말을 한 셈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런 선행을 통해 영생 얻을 자는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율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견해는 로마서 3-5장의 이신칭의 교리에 너무 얽매여서 그것으로 모든 것을 보려고 하는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2) 고데(Godet)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본다. 바울은 여기서 어느 누구도 ‘선행을 떠나서(apart from the doing of good)’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끈질긴 욕구를 가진 사람은 언젠가 인생의 여정에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결과를 얻는 수단을 발견하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이 수단은 곧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

고데는 여기서 구원과 선행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데, 어떤 관계인지가 궁금하다. 물론 고데는 구원의 근거로서 선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선행을 행하는 사람이 또는 행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노력 끝에 마침내 ‘믿음’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아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마침내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 곧 믿음에의 길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3) 한국의 이한수 교수는 이 구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많이 하였다. 그의 견해는 다음의 자신의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로마서 2장과 9장에 나타난 바울의 논지는 행위의 조건에 기초해서 구원의 실재를 결정짓는 방향이 아니고 행위의 실재를 통해서 신분 정체성을 추론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믿음은 선한 행실로 논증되고 표현되는 실재이다. ... 왜냐하면 선한 행위들은 그들이 구원 얻을만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삶과 행위 속에서 표현하고 논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한수 교수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는 필자 자신의 말로 좀 더 설명하기를 원한다.

 

4) 필자의 견해. 이것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행함으로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여기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란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묘사한 것이다. 곧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성도들의 일상적 모습은 곧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고 살아가는 자들은 다르게 표현하면 10절에 있는 바와 같이 ‘선을 행하는 자(ho ergazomenos to agathon)’이다. 선(善)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에 감사하여 선(善)을 행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으로 갚아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5:29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선한 일을 행한 자(hoi ta agatha poiēsantes)’는 곧 바울이 말한 바 ‘의인(dikaioi)’에 해당하는 표현이며(행 24:15), 이는 곧 예수님을 믿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선한 일을 행한 자’라고 하니 마치 사람이 행한 바 ‘선행’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표현은 ‘의인’ 또는 ‘성도’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이는 곧 성도들의 삶은, 전체적으로 불신자들의 삶과 비교하여 볼 때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삶은 ‘악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로마서 2장 7절에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말하며, 8절에서는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아니한다(oukh hamartanei)”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요일 3:6,9).

 

5. 야고보서의 칭의 개념(약 2:21-24)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고 논란이 많이 되는 서신은 야고보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여기서 대담하게 아브라함이 “행함으로(ex ergōn) 의롭다 함 받았다.”고 말하며(2:21),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2:24). 이것은 바울의 주장 곧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pistei, ek pisteòs)’ 된다는 것(롬 3:28, 5:1)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1) 박윤선 박사의 견해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 안에서 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이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올바른 답을 주고 있다. 야고보서 2장 21절에 대한 주석 중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에 대한 칭의 선언(稱義宣言)은 그가 독자(獨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순종 사건이 있기 전에 벌써 있었다(창 15:6). 그것을 보면, 칭의는 믿음에만 관계하고 행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칭의는 선한 행실(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일)을 그 증거로 나타낸다.” 여기서 박윤선 박사는 선한 행실을 ‘칭의의 증거’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4절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칭의는 일면 행함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신앙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영적 생명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야고보의 사상을 오해하지 않아야 된다. 야고보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공로가 된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는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代贖)뿐이다. 신자의 선한 행실은 믿음 있는 증거이며, 그 믿음의 생명이니만큼 그 선행은 중요하다. 그 의미에서 칭의는 일면 행함으로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야고보의 의미한 바이다.” 우리는 여기서 박윤선 박사가, 야고보가 말한 칭의의 의미를 간단하지만 바로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2) 정훈택 교수의 비판

 

그러나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이러한 설명에 대해 “그는 법정적 칭의 개념을 완벽하게 전개하지도 못하고, 본문을 제대로 살려주지도 못했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야고보서의 논지는 아주 분명하다. 칭의와 순종의 행위를 결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작동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정훈택 교수의 이러한 견해는 야고보가 말한 의미를 주석한다기보다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취하면서 칭의와 행위를 무조건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믿음과 행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건전한 설명을 무시하고 행위를 칭의에 결합시키려는 시도로 여겨진다. 이러한 것이 한편으로는 매우 성경적이고 문자에 충실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저자가 말하는 의도를 무시한 해석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되고 만다.

 

3) 야고보가 말하는 칭의의 의미

 

따라서 우리는 야고보가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야고보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와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먼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첫째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dikaioomai)”는 단어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바울과 야고보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각자가 이 단어로써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이 사실을 바로 파악하는 것이 야고보서와 로마서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그 개념의 차이란 무엇인가? 먼저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이다. 곧 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가 이제 하나님과 화목되고 사랑받는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용어를, 어떤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다’는 의미로, 곧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 때 비로소 처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의미(바울적 의미)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믿음이 그의 이 행동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뿐만 아니라 ‘행함(erga)’의 개념도 서로 다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의 ‘행위’ 또는 ‘행함’은 하나님 앞에서 처음에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노력으로서의 행위를 가리킨다. 곧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모든 노력들을 가리키는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함을 받는 데 아무런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행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함이며, 이것이 있어야만 참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보건대, 바울과 야고보가 동일한 ‘행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그 담고 있는 ‘내용’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행함의 ‘시점(時點)’도 서로 다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라고 말할 때의 ‘행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기 전(前) 또는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의 모든 인간의 노력들을 가리키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後)에 행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 사건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 이 결론 문장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함께 일하였다’는 말은 마치 ‘신행합력설(synergism)’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만일 처음 믿을 때에 칭의의 근거로서 믿음과 행함이 함께 역사했다면, 그것은 신행합력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함께 일하였다(sunērgei)’는 동사의 시상(時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시상은 ‘미완료’로서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낸다. 곧 믿은 순간부터 그 후로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시상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의 경과’가 요구된다. 이에 비해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할 때의 ‘행위’는 인간의 공로로서의 행위를 말하며,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순간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행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시간의 경과가 없으며 ‘시간(time)’이라는 변수가 없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부분이다. 여기서 ‘온전케 되었다(eteleiōthē)’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해 남아공화국의 플로어 교수는 “충만한 발전에 이르렀다(kwam tot volle ontplooiing)”고 해설하였다. 곧 전에도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있었지만 아직 초보적인, 유아적인 믿음에 불과했는데 이제 이러한 순종을 통하여 그의 믿음이 성숙한 단계, 견고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야고보는 하나님을 처음 믿는 그 순간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 그 믿음이 성장하는 전(全) 과정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23절에서 다시 말하고 있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느니라”(23절). 여기서 우리는 먼저 야고보가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 곧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바울이 그의 이신칭의 교리를 위해 즐겨 사용하던 것인데, 야고보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야고보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몰라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23절에서 또한 엿볼 수 있는데, 야고보는 여기서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이 창세기 22장의 사건에서 ‘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응하였다(eplērōthē)’는 말은 원래 ‘충만해졌다’는 의미로 앞의 ‘온전케 되었다(eteleiōthē)’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곧 창세기 15장 6절의 ‘의롭다 함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의 순종으로 충분히 드러나고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야고보에게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된 구절은 창세기 22장 12절이라고 생각된다. 곧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말씀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내가 아노라(yadatti)”라는 단어를 가지고 야고보가 오랫동안 묵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곧 야고보는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드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창세기 15장 6절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전개한 바울의 주장이나, 창세기 22장 12절에 근거하여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한 야고보의 주장이나 둘 다 근거가 있고 옳은 것이며, 각각 나름대로 진리의 측면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 모두에게 감사해야 하며, 이 두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풍부하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23절 하반절을 통해 야고보의 이해를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여기서 ‘하나님의 벗’이란 칭호(대하 20:7, 사 41:8)는 구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다 적용되는 일반적인 칭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특별한 칭호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울적 의미에서의 단순한 ‘칭의’ 이상의 것이며, 온전히 순종한 아브라함에 대한 칭찬과 특별한 사랑이 담긴 칭호이다. 이로 보건대 야고보는 창세기 22장 12절에 와서 아브라함이 비로소 구원에 이르는 칭의(바울적 의미에서의 칭의)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창세기 15장에서 이미 일어났음을 야고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22장에서의 ‘인정’은 창세기 15장의 ‘믿음’이 행함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며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인정받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러한 미묘한 구별보다도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순종하는 행위를 통해 그가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었다는 사실이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야고보는 24절에서 앞서 논한 것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 당돌한 야고보의 선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껴 왔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에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 3장 28절을 번역하면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allein durch den Glauben)”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야고보의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과 표면상으로는 정면충돌하고 있다. 그래서 루터와 그 후의 독일 신학자들은 바울 편에 서서 야고보서를 좋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늘 있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도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 주장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바울과 야고보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dikaioomai)”는 용어와 ‘행함(erga)’이라는 용어를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가 여기서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할 때의 ‘믿음’이란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할 때의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형식적인 믿음’이며 그 자체로서 ‘죽은 믿음’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상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헛된 믿음’인 것이다.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이신칭의와 관련한 주장과 본문들을 조금 살펴보았다. 지면관계상 극히 제한된 본문들만 다루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다음 기회에 더 많은 본문을 다루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여기서 다룬 본문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깊이 있게 논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이신칭의 교리에서 벗어날 이유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더 많은 본문을 살펴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곧 신약성경은 한결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구원론은 사도 바울의 구원론과 다르지 않으며, 또한 야고보의 구원론도 바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단지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개념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서로 다를 뿐, 구원 또는 칭의에 대한 근본 사상은 동일하다. 얼핏 보아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도 우리가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할 때, 또한 그것들도 이신칭의 교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박윤선 박사의 성경 해석은 올바른 방향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산상보훈 해석은 천국백성의 ‘삶의 표준’을 제시하는 말씀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지나치게 ‘정죄적 기능’ 또는 ‘몽학선생적 기능’에 치우쳤으며,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루터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요소가 있다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박윤선 박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 전파에 전심전력하였던 선교 1세기 동안의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전반적인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박윤선 박사도 산상보훈 해석에서 지나치게 이신칭의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점들은 인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성경 해석은 건전한 원리 위에 서 있으며 올바른 방향의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전체적으로 볼 때 칼빈주의(개혁주의) 성경 해석 원리에 굳게 서 있었으며, 그의 성경 주석은 화란에서도 가장 뛰어난 개혁주의 주석가로 인정받고 있는 흐레이다너스(Seakle Greijdanus)와 흐로쉐이드(F. W. Gosheide)의 주석을 대거 참조하고 있다. 한국 교회 역사상 박윤선 박사만큼 올바른 신학노선에 서서 성경해석을 한 신학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서 2장의 ‘행함’에 대한 그의 주석도 전체적으로 올바른 방향의 것이며, 간단하지만 본문의 의도를 잘 드러내었다고 생각된다. 그에 대한 비판은 종종 그를 잘못 이해했거나 아니면 성경 본문을 오해한 데서 말미암는 오류인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인간의 행위를 칭의 또는 구원의 근거나 공로나 전제조건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자신의 행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현재 천국이든 미래 천국이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줄로 믿는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은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의로는 도무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현재 천국이든 미래천국이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은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 행함이 필요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참된 믿음에서 참된 행함이 나온다고 가르친다. 선행은 믿음의 증거이며 열매이며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했으며(롬 3:3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목적은 우리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딛 2:14).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사람 안에는 무엇보다도 성령이 거하시며(롬 8:9,11,15) 그에게 선한 일을 하도록 충동하고 힘을 주신다(갈 3:5, 5:16,17).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며(갈 5:25), 그의 삶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갈 5:22,23).

 

따라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윤리를 약화시켰다는 주장은 큰 오해이다. 이신칭의는 오히려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게 하며, 감사함으로 순종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 받은 자들은 늘 ‘빚진 자’의 심정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려고 힘쓰게 되며(롬 8:12), 받은 바 구원을 확신하면서 기쁨으로 순종하려고 애쓴다(롬1:5과 16:26의 ‘믿음의 순종’).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가톨릭 교회 성도들은 구원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으로” 선행을 하려고 애쓰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은 개신교 성도들은 “감사함과 기쁨으로” 선행을 행한다. 성령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고 인 치셨기 때문에(고후 1:22, 엡 1:13,14, 4:30),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찬송하며 나아간다. 따라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행의 참된 동기를 부여하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된 선행을 행하게 한다. 이신칭의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을 찬송하는 것이요, 인간의 무능과 전적 부패를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신칭의 교리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우리 인간을 가장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변종길)


믿음과 행함 순종과 열매에 대하여

 

본인은 그동안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해결 되지 않는 가운데 몇 년 동안 조금씩 배우며 왔습니다. 조금 안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고 거기에 참여해서 끼어들고도 싶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내놓고 싶어도 실력이 모자라 그냥 묵인하고 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모든 것이 다 이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알게 된 것들 깨닫게 된 것들을 통해 여러분과 소통하고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고 부족하지만 공개하면서 저 나름대로 실력을 쌓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중의 저보다 훨씬 앞서서 복음을 깨닫고 먼저 가시는 몇 몇 분들을 알게 되면서 나의 앎은 너무나 부족한 것이구나를 깨달으면서 할 말이 없더군요. 그런 가운데 왜 이분들은 인간의 실상인 죄만 강조하지 은혜는 강조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약간의 불만이 있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은혜를 말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보다 은혜를 더 강조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죄로 오염된 인간의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는 그만큼 축소되고 약화 된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알고 이 은혜를 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오게 되는 자연스런 행함이 있는데 왜 그런 것은 강조하지 않느냐는 불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행함이 나오고 반응해야 할 것들 중 기본적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고 모임을 중시하며 세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해야 할 지향성이 강조 되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생략되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이 마음을 힘들게 했는데 그런 의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해결 되었다고 봅니다. 위에서 열거한 몇 가지 불만 사항들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에 대한 것을 쓰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왜 인간의 죄성을 강조해야만 했는지는 은혜가 아니면 설명 되지 않는 것이기에 은혜를 강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은혜를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나와야 할 자연스런 반응으로서 행함에 대하여 그분들이 강조하지 않는 이유는 강조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것이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에 강조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과 은혜만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신앙에서 중요한 믿음과 행함 순종과 열매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씁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믿음과 행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믿음도 있어야 하고 신앙적인 행함도 있어야 한다는 그런 주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노파심에서 경계의 말로 신자에게 나타나야 할 행함도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복음을 듣고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 안일한 사람들에게 반응으로서 자연스런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지 거기에 따른 어떤 특별한 행위의 주문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행함을 믿음과 분리해서 이야기 할 때 문제는 그 행함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다른 말로 복음을 안다면 기쁨 감사 찬송 봉사 헌신 헌금 선교 전도 이와 같은 것들이 나와야 할 행함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복음을 모르는 일반적인 신앙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요. 이와 같은 행함의 반응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하고 설득력도 있어서 흔히 우리가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어떤 자들에게서는 그와 같은 행위가 나올 수도 있으나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반응과 행함이 없는 사람은 믿음도 없는 사람이거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잘 모르겠지만 이것이 믿어지고 맞는 것 같아서 묵묵히 이 길을 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막힘없이 잘 설명하는 실력자와 유창하게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실력도 없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신앙의 모습도 없는 것 같지만 말없이 이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행함이 없는 사람이겠습니까? 묵묵히 간다 함은 이런 말씀 모임에 참여하고 들으면서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공로를 믿는다면 그들이야 말로 행함이 있고 믿음이 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나와야 할 모습으로서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은 단편적인 주장입니다. 지금 내 주위에도 사실 그러한 사람이 몇 몇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은 그런 행함이 없는 것 같고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믿음이 없는 것도 같고 복음을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는 그러한 반응의 행함이 있다는 말인가?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나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이 진리로 성립이 되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모두 나와야겠지만 나 자신을 보아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도에게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말에는 원론적으로는 동의하나 다른 행함을 말한다면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성도에게 나와야 할 행함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하거나 틀렸다고 반증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경적인 이해는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로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탁드리는 것은 나의 이해가 정답이라는 주장은 아니니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나의 이런 이해에 대하여 동의가 된다면 동의하면 되고 동의가 안 된다면 동의 안 해도 괜찮습니다.

 

신앙은 믿음과 행함과 순종과 열매가 있을 것이나 그중에 제일은 믿음도 행함도 순종도 열매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공로와 은혜입니다

내 믿음이 아니고 내 행함도 아니며 내 순종도 열매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은 내가 믿고자 해서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믿음을 말합니다

그 믿음에 의해 행함도 나오고 순종도 나오고 열매도 있겠으나 행함이나 순종 열매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의한 행함이며 순종이고 열매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믿음도 내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만일 당신과 나에게 그 믿음이 있다면 신앙의 행위나 순종 열매까지도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행함의 공로가 믿어질 때 믿음을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또한 예수님의 믿음이고 예수님의 행함과 순종과 열매이며 그 공로를 믿는 것이 신자의 행함과 순종과 열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나타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따로 행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따로 순종과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있어야 할 행함이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고 믿음에 의한 행함과 순종과 열매입니다

그 행함은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어서 신자에게 나타나는 행함과 순종과 열매는 믿음과 은혜에 의한 것이고 의지적인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이끄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와 같은 것들이 외부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여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확인하고 싶은 것은 육신을 따라 알려고 하는 것이고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적 의미를 간과한 것이며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언약과 그 언약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완료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7,18)

 

문장대로 보면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하겠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함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나타내는 것이지 반드시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하겠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무슨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신자에게 있어야 할 그 행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무슨 행함이 나오면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간과한 것이 믿음과 행함을 둘로 나누는 것이고 이것을 육체를 따라 보는 관점과 영을 따라 보는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보는 관점은 사람의 관점이나 영을 따라 보는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육체를 따른 관점은 무엇을 하고 보아도 다 죄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모양일지라도 육체를 따라 한 것이라면 죄입니다. 인간에게는 모두 죄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한 가지 뿐입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이지 행함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중시하고 목적으로 사는지를 보면 믿음과 은혜에 의한 삶인지 아닌지는 분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믿음과 은혜에 의한 삶이 어떤 것이고 기준은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하루 종일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이 그 기준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믿음과 은혜에 의한 삶이 아니게 됩니다. 어떤 사람도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이고 죄로 오염된 인간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존재가 못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행함이란 그 무엇으로도 기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공로 그 행함만을 믿는 것뿐이고 그 믿음이 없는 것이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내놓아야 할 행함이란 살아도 죽은 자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자요 전적인 믿음과 은혜로 사는 자임을 믿는 것뿐이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공로를 믿는 것이 동시에 행함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무엇을 해도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끌려가며 그분의 처분에 맡기며 주어진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 세상 종교는 나의 믿음과 행함이고 나의 순종과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믿어야 하고 내가 해야 하고 내가 순종해야 하고 내가 열매를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믿음을 수단으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되는 것이고 믿음이 한다는 말입니다. 그 믿음은 내가 가질 수 있거나 행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은혜에 의하여 믿음과 행함과 순종과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이 말씀의 의미는 영혼 없는 죽은 자는 행함이 나올 수 없지만 영혼 있는 산 자에게만 있는 믿음은 행함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그것이 영혼이 없다는 것이고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된 자들이 산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행함이 나옵니다

그 역시 은혜에 의한 것이기에 믿음이 없는 자는 죽은 자이기에 반응, 행함이 없지만 믿음이 있는 자는 반응으로서 나타나는 행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이지 행함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야고보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에 대한 반응도 없는 것들이 믿는다고 하는데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의 진의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행함이라는 반응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에게 행함의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 없음의 증명이지 행함의 증명이 아닙니다.

 

앞에서 여러 가지로 행함에 대한 질문을 던졌지만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이것이 행함이다. 라고 할 것이 있다면 말해보십시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행함은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이 곧 행함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행함입니다. 종교적 육신의 행함이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그 믿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고 그 믿음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혹 주실지 아십니까? 이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취사선택이 아닙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나님의 선물이라(엡2:8)

 

<다운의 산골짜기에서 전하는 편지 - 믿음과 행함 순종과 열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