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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요한1서 2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5. 19.

1. 메튜헨리 주석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1) (요한 1서 2:1,2)

 

이 구절은 사도 요한이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죄를 언급하고 있는 1장의 결론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아울러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말하고 있다.

 

Ⅰ. 첫째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죄지을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이 서신의 의도와 목적, 즉 나와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불신앙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사귐을 파괴시킴에 대해 언급한 의도는 저희로 하여금 죄를 금하고 떠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애정에 넘치는 사도의 권고를 들어 보라! "나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바된 자녀들, 또한 연령과 경험에 있어서 사도 보다 좀더 어린 자녀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들, 이렇게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의 사랑이 가장 충만하게 흘러 넘치고 있는 곳에 또한 그러한 때에 확실히 복음은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되었다. 아마도 사려 깊은 독자는 이러한 금지와 경고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의도는 바로 아래와 같은 말에서 찾아 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 한 말씀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죄의 확실한 용서에 대한 언급을 다시 돌이켜 보게 할 것이다. 곧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9)란 말씀이다.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에 대한 남용을 방지하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통회 자복을 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이를 씀은 죄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곧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함이다. " 한편 사도는 죄인들을 위한 대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다. 즉 예상할 수 는 대로 그것은 실수와 의식적으로 짓는 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씀은 너희가 죄를 짓게 하려 함이 아니다. 너희로 하여금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 그러나 아래와 같이 잘못된 생각(마치 어느 학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을 하고 있는 자들도 있다. 곧 "그러나 사람은 죄를 짐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치유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Ⅱ. 죄 가운데서 믿는 자가 받을 도움과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리고 "만약 누가 죄를 범하면(우리 중 누가 혹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사귐이 있는 자가)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1절)라는 말씀을 주시해 보자. 구원의 복음 가운데 속해 있는 신도자신들도 아직은 죄 가운데 있다. 그러나 세상의 죄인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세상에는 기독교화된 자(그리스도의 신비적이며 영적인 몸에 대해 거룩한 구원의 특권 아래 있는 자)와 비기독교화되어 있는 자, 즉 중생한 죄인과 중생하지 못한 죄인들이 있다. 진실로 죄를 범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 비하여 죄를 짓지 않은 자로 간주되어진 사람들이 있다(3:9). 곧 신도들은 용서와 의롭다하심을 입게 하는 하늘의 대언자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죄 중에 있는 신도들에게(혹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과 속죄 그리고 피난처가 되신다. 곧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 "

 

언자란 말은 간혹 성령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이 성령은 보혜사(위로자)로 호칭되기도 하며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심령에는 기쁨을, 입에는 변론을 가져다주신다. 그가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심으로 우리들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 대언자의 맡은 바 사명과 책임은 심판자를 향한 것이다. 심판자 앞에서 그는 소송 의뢰인의 소송 사유를 변호해 준다. 심판자는 아버지 곧 그의 아버지가 되시며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는 복음의 법정(범법자를 다스리는 법정) 곧 하늘나라 법정 또는 은혜의 법정에 서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의 왕좌와 심판석은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자리가 된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현세에 있어서나 생사 문제 또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최고의 심판자가 되신다. "너희는 만민의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이르렀느니라"(히 12:23). 신도들은 그들의 소송 사유가 성립되면 대언자는 그들에게 힘이 되도록 아래의 몇 가지 신분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신다.

 

1. 대언자의 인격과 그 이름으로 나타내 주고 싶다. 곧 그는 중보의 절대적 사명과 구원의 온전한 역사 그리고 중재자와 대언자의 사명 성취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2. 그는 사명 수행을 위한 적격자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심판대에서 또한 심판자의 면전에서 유일한 의인이 되신다. 다른 어느 대언자(혹은 다른 법정에서의 대언자)는 이 불의한 자일 것이며, 그리고 여전히 변호할 만한 정당한 이유(이러한 경우 정당한 사람에 대한 소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이에 따라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송받은 죄인은 범죄자이다. 즉 그들의 무죄와 법적인 정당성은 변론될 수 없다. 그들의 죄는 고백되어지거나 또는 필히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로운 대언자만이 죄인들을 변호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위해 의로우셨다. 그는 영원한 의로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점을 심판자는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의지하고 대언자는 죄인들의 죄가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변호한다.

 

3. 그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즉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2절). 그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요, 그의 위엄과 계명, 그리고 그의 권위에 대해 우리가 범한 모든 죄를 위해 심판자에게 드리어진 화목 제물이시다. 로마의 신앙 고백자들은 공연히 구속자로서의 대언자와 또는 중재자로서의 대언자 혹은 각기 상이한 임무에 대한 중보자를 구별하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중재자를 위한 중보자 혹은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곧 구속자로서의 중보자 또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 그의 변호는 곧 그가 화목 제물이 됨을 말해 주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피를 흘린 이후 하늘에 있는 중보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면 그 피의 가치와 효능이 상실되었다고 생각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중재자로서 위대한 대언자(검찰 총장)의 사명을 계속한 이상 지금 우리는 그 피의 귀중함을 알게 된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을 휘한 중재를 이룩하기 위하여 그는 일찍이 살아 역사하고 있다.

 

4. 대언자의 변호 대상과 화목 제물의 영향이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밝혀 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거나 하나님이 택하신 옛날 이스라엘에게 만 특별히 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다. 즉 그는 우리의 죄뿐만이 아니라(유대인인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다시 말해서 육신을 따라 아브라함의 씨가 다니 우리의 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이며(2절) 단순히 과거나 현재에서 믿는 우리만을 위함이 아니라, 그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자들과,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자들의 죄를 위한 것이다. 중보자의 죽음은 모든 족속과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나라에 이르는 것이다. 그가 유일한 존재인 것같이 그는 하나님에게 부름을 입어 그의 사랑과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속죄물과 또는 화목 제물이 되신다.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2) (요한 1서 2:3-6)

 

이 구절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1장 7절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나타난 구절들과 1장 7절 말씀 사이에는 죄중에 있는 신도의 의무와 구원에 관한 토론이 대두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신도의 특권 즉 중보자의 피로 말미암아 죄에서 깨끗게 함을 얻는 특권이 언급되었다. 이 구절에서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서 행함으로 얻는 유익한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면, 이러한 거룩한 사귐과 친교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특권이 된다. 여기서 빛과 사랑을 따르는 데에는 또한 증거가 따라야 한다.

 

Ⅰ. 빛에 대한 시험.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3절), 하나님의 빛과 지식은 마음의 아름다움과 진보를 말한다. 지혜와 지각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중보자)의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새로운 빛을 과대 평가하며, 그들 자신이 갑자기 짧은 기간에 얻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쉽다. 그리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만족할 만큼 충분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쉽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으며 복음의 많은 내용을 알고 있다고 큰 소리를 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지식만이 우리들의 지식이 건전하고 완전하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온전함이 그의 권위를 이룩케 한다. 즉 지혜로운 생각과 풍성한 은혜 그리고 위대한 그의 역사가 그의 율법과 나라를 권위 있게 만든다. 주의 깊게 그의 계명에 의식적으로 순종함은 하나님의 권위를 이룩케 한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영혼 속에 은혜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4절)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진리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가끔 그들의 무지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때로는 그 진리를 소유했다고 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한다. 곧 그들은 간혹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부한다. "네가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자요…"(롬 2:19). 그러나 하나님을 보다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의 대상이 됨을 깨닫지 못하는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러한 지식이 나타나고 알려진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마음을 순종으로 이끌지 못하게 될 때 이 지식은 얼마나 헛되며, 또한 피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가! 순종하지 않는 생활은 거짓된 신앙적인 지식에 대한 면박과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이러한 자신의 자랑과 구실에 대해 거짓말임을 폭로하며 또한 여기에는 어떠한 신앙이나 진실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Ⅱ. 사랑에 대한 증거.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5절).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일은 곧 삶의 길과 동기를 거룩하게 만든다. 말씀을 지키므로 이러한 삶이 이루어지며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그의 말씀을 실제로 지키지 아니하고서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케(또는 그 사랑의 온전한 의도와 열매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들은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며 부끄러움이 없는 자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우리는 선한 일을 이루도록 특별한 백성으로 구별되었다. 즉 거룩하신 성령으로부터 좀 더 완전한 성화에 참여하도록 용서함을 받고,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우리들은 거룩과 복종의 길을 행하도록 성결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건히 접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사랑의 온전한 경건과 결과 내지는 효과를 이룩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즉 15절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라고 하신 3장 17절의 말씀에서 나타난다. 지금 빛은 사랑의 촛불을 켜들고 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며, 또한 지키게 될 것이다. 그는 항상 기뻐하며, 섬김을 받고, 하나님의 선포된 뜻을 지키기를 기뻐하며, 또한 섬기기를 즐긴다.

 

여기에서 사랑은 활용되어지며 또한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게 된다. 이로써 사랑은 자태를 나타내게 되며, 사랑의 완전한 효능과 힘, 그리고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이로써(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뜻에 충실히 따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안에 있음을 알게 되며, 5절) 우리로 하여금 복종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에 의하여 그와 함께 연합되어 있음을 인정한다면 아래와 같이 우리에게 강권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주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거하시는 분이요, 또한 이 곳에서 행하시는 분이시다.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의 편에 서서 그와 함께 거하는 자들은 그와 더불어 행하며, 또한 그가 보여 준 표본과 모범을 따라 행해야 한다. 옛날 몇몇 철학파에 속해 있던 무리들은 그들의 존경할 만한 선생들과 학파의 요원들의 가르침과 행실에 대해 크나 큰 존경을 했다. 그리스도 안에 또한 그와 함께 거하기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보다 그의 변치 않는 주와 대장을 닮도록 하며, 그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신(요 5:4) 말씀대로 그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

 

 

세상의 사랑(1) (요한 1서 2:7-10)

 

7절은 바로 앞서 기록한 바(여기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옛 계명으로 나타나있는 바 그리스도를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하며 또한 사도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이끌어 온 것을 확실히 가르치고 있음을 말한다.)를 돌이켜 보거나, 또는 사도가 말하려 하고 있는 것과 형제애에 대한 법을 미리 예견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케 하는 귀절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전하여진 메시지이며(3:10), 옛 계명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권고를 시도하면서 아래와 같은 사랑에 넘치는 칭호로써 교훈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 곧 너희에게 간청하는 바 사랑으로 피차 결속되어진 것 가운데 있는 사랑스러운 자들이여!" 이러한 칭호로 시작해서 그들에게 형제애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Ⅰ. 옛 계명으로써의 교훈.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7절). 사랑의 교훈은 인간의 본성이 오래된 것과 같이 옛 것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몇 가지의 규율과 시행(enforcement) 그리고 동기를 수락해야 한다. 만일 순수한 가운데 인간의 본성이 전달되었다면, 인간들은 한 피를 나눈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 위에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죄의 상태에서 또한 그 죄를 사함 받으리라는 약속 안에서 그들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자로서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피를 나누고 그들과 동일한 소망을 나누는 자로서 서로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히브리인들은 각별히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언약과 선택함을 받고 그들로부터 메시야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나신 바 특권이 부여된 민족으로서 피차간 사랑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랑의 법은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해 새로운 의무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옛 계명 혹은 복음적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처음부터 들은 바 있는 말씀이다(7절).

 

Ⅱ. 새로운 계명. "또 다시 저희에게 이러한 의무를 더욱 일깨워 주기 위해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 즉 저희에게도 참되며 그 공동체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가장 참다니 새로운 공동체 혹은 기독교 공동체의 법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다. 곧 새로운 공동체의 진리는 그 안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며 또한 풍부하게 있었다. 그가 교회를 사랑했으며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다. 그것은 너희에게 참된 것이다. 이 법은 너희 마음 안에 얼마간 이미 기록되어 있는 법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배웠다. 이는 더구나 이미 어두움이 즉 저희의 중생하지 못한 마음(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비참할 정도의 무지가 지나갔고, 진리의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8절). 복음적인 계시의 빛이 생명과 크나큰 힘으로 저희의 마음에 비치었다. 기독교의 사랑의 탁월성을 안 이상에는 이로써 기본적인 의무를 안 것이 된다. " 기독교의 기본적인 것(특별히 기본적인 교훈)을 알게 되면 새로운 것이거나 옛 것이거나 간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개혁 교회에 있어서 개혁된 교리 또는 개혁된 신앙은 새 것이며 동시에 옛 것에 속하는 것이다. 새 것이라 함은 지루한 어두움 후에 개혁의 빛으로 말미암아 깨우쳐진 것이요, 로마의 변조된 것으로부터 깨끗해짐을 받은 바 새 것을 이름이다. 그러나 옛 것은 처음부터 배웠고 또한 들은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었던 은혜와 능력은 또한 우리 안에서도 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의 머리에 일치될 수 있다. 어두움이 지나갈수록 또한 복음의 빛이 우리에게 비치면 비칠수록 옛 것이든 새 것이든 간에 하나님의 계명에 더욱 더 순종하기에 이르게 된다. 빛은 적당한 열을 발산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빛에 대한 하나의 시련이 있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인정함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인정함을 받아야 한다.

 

1. 이러한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자는 그의 빛을 헛되이 받은 자들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다"(9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이루신 일들을 수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교회(visible church) 안에는 사실 이상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자들이 종종 있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며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감화를 미쳤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믿는 형제들을 계속 미워하며, 적의에 찬 행동을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형제를 대하도록 감동을 입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중생함을 입은 척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어두운 상태에 머물러 있다.

 

2. 이러한 사랑으로 지배를 받는 자는 그의 빛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증거 한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형제로서) 빛 가운데 거하게 된다"(10절). 그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근본과 동기를 알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구원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깨닫는다. 그리스도가 사랑한 자들을 우리도 사랑해야 함이 마땅함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안에 거리낌이 없게 된다(10절). 그는 그의 형제에게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형제를 죄짓도록 유도하지 않으며, 신앙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도록 항상 의식적으로 주의할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형제의 영혼을 귀중히 다루도록 하며, 그의 순결성과 평화로움을 해치게 될 모든 것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쳐 준다.

 

3. 두려워함은 영적인 어두움의 표징이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이다(11절). 심령의 빛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스며들며, 성령의 첫 열매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믿는 형제들에 대해 악의를 품는 자는 영적인 빛의 결핍 상태에 있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그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게 된다"(11절). 그의 생활은 어두운 마음과 양심에 일치하게 되며,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며, 이 어두운 영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보지 못한다.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으므로(11절)" 어두운 영은 그를 극심한 암흑의 세계로 이끌어 갈 것이다. 악한 영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죄의 암흑은 생명의 빛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곧 어두움이 거하는 곳에는 마음, 판단 그리고 양심이 어두워지게 되며, 거룩한 생명의 길을 잃어버리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사도는 맹렬하고도 불에 타는 듯한 그의 감정의 치유함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입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무지한 사마리아인들이 제자들을 영접지 아니한 때 사도 요한은 하늘로부터 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기를 구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자신의 감정(기분)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 감정이 결과적으로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선한 뜻과 또한 모든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었다. 사랑으로 충만된 위대하신 주(Master)는 주 예수이시다. 사랑의 학교는 그의 학교(교회)이다. 그의 제자들은 사랑의 제자들이며, 그의 가족은 사랑의 가족임에 틀림이 없다.

 

 

세상의 사랑(2) (요한 1서 2:12-17)

 

 

거룩한 사랑에 대한 자극적인 어조로써 이루어진 이 새로운 지시는 여기에서 언급되어진 바 제자들의 몇 가지 계층에 대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카톨릭 교회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피차간 신성한 사랑 안에서 결속을 유지해 온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생명력 있는 신앙이 아니고서는 결속될 수 없기에, 서로 지켜야 할 중요한 금지와 권고가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학교(교회)에서 사랑을 몇 가지 형태의 교훈으로 우선 정정당당히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어린아이나 미성년자, 성인 또는 연장자(teleioi)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주고 있다.

 

Ⅰ.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형태와 계층에 따라 주어지는 권고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위치와 신분에 있지 않다. 즉 그리스도 안에는 애기들이 있는가 하면 성숙된 사람들과 노년층이 있다. 이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상태에 있는 것같이,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직분을 가지고 있다. 각별히 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하는 가운데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교훈과 상응하는 복종이 주어지고 있다. 현명한 목회자는 주의 깊게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주고 그리스도의 권속들에게 그들이 차지할 몫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자녀들과 아비들 그리고 청년들인 너희에게 편지하노라." 이렇게 계층에 따라 사도는 아래와 같은 권고를 하고 있다.

 

1. 기독교 학교(교회)에서의 초보자.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12절), 여기에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 단계에 이르고 있다. 초보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들과 같은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먼저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연소자들에게 일러 준 말을 귀담아 듣는 것도 성숙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보여진다. 초보적인 원리는 반복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모든 것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자녀에게 말하고 있다.

 

(1) 사도 요한이 그들에게 말하는 이유는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 가장 순진하고 진실한 제자는 용서함을 받는다. 성도의 친교는 죄의 용서로 이루어진다. 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용서되고(그의 온전하심은 용서에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구원의 능력과 더불어 그의 이름으로 용서함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상의 사랑을 단호히 끊어 버려야만 한다.

 

(2)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로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12절),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같이 쉽게 깨달아 알 수는 없다. 기독교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만하고 또한 알게 된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나를 앎이라"(히 8: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됨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함이 그들의 지혜가 된다. 우리들은 아버지를 아는 자만이 참 지혜로운 자식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중생 되어지고 그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아버지를 아는 자는 이 세상의 사랑을 미련 없이 버리게 될 것이다. 사도는 아래와 같이 그의 말을 계속하고 있다.

 

2. 사도 요한이 존칭을 사용하리만큼 보다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교회 안에 있는 연장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즉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13,14절)이라든가, "오래된 제자, 나손에게 쓴다"(행 21:16)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사도는 교회 안에 있는 밑바닥에서부터 높은 데까지, 또한 가장 낮은 신분에서부터 가장 높은 신분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직접 다루고 있는데 이는 중간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배운 바를 기억하고 또한 그들이 이르러야 할 목표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비들아 내가 쓰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학교에 오래 머물러 있는 자들일수록 더 많은 권고와 교훈이 필요하다. 가장 오래된 제자는 그의 손에 책 곧 성경을 가지고 하늘나라(하늘에 있는 대학)에 가야만 한다. 곧 아비들은 그곳에서 등록되어야 하며 또한 배워야 한다. 누구나 너무 나이가 많아서 배울 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른 자는 없다. 사도는 그들이 이미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쓴 것이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로부터 계신 이를 아는 까닭"(13,14절)이라는 것이다. 노인들은 지식과 경험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존경받기를 기대한다. 사도는 노인들에 대한 지식과 이에 대해 노인들을 축하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태초로부터 있는 주 그리스도에 대해(1:1) 특별히 알고 있다. 그리스도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것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지식에 대해 처음과 마지막이 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 그가 이 세상이 생기기 전 곧 태초부터 계신 분임을 아는 자들은 이로써 용이하게 이 세상을 포기하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3. 한창 중에 있는 중년층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젊은 너희에게 쓰는 것은"(13,1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건전한 정신과 마음으로 선악을 식별할 수 있는 성숙한 단계에 이른 성년들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1) 그들의 훌륭한 전공(戰功)으로 그들을 칭찬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 편에 있는 모범적인 병사들이다.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13절). 계속적으로 사람들에게, 특별히 주의 제자들에게 도전적인 "악한 자"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도장에서 잘 교육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무기를 활용하여 악한 자를 섬멸하게 된다. 악한 자를 섬멸할 수 있는 자들은 마귀의 크나큰 도구인 세상을 또한 섬멸시킬 수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2) 성공을 이룩한 그들의 강함 때문에 그들을 칭찬하고 있다.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14절). 젊은이들은 보통 자신의 힘을 자랑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 안에서 강함은 젊은이의 자랑이 될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기쁨이요 마귀를 이기는 힘이 된다. 만일 그들이 마귀를 대항하기에 어렵지 않다면 마귀는 그들을 대항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다. 활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을 정복하는데 힘을 나타내시라! 마귀정복을 위해 활용되었던 힘이 또한 세상을 정복하는 데에도 쓰여져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음을 칭찬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있음이라"(14절). 하나님의 말씀은 성숙한 제자들 안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영양소와 힘이 된다. 이로써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는 무기로 삼게 된다. 성령의 검, 곧 이것으로 마귀의 맹렬한 공습을 막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는 자들은 세상 정복을 위한 힘을 공급받게 된다.

 

Ⅱ. 생명적인 종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경고가 되는 훈계와 충고가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15절). 세상에 대해 못 박히고 물욕과 세상의 향락을 억제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 이 교훈 안에서 합치되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이 합리 되었다면 그들은 즉시 또 다른 동기에 일치하게 된다. 즉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세상을 위해 사랑을 소비하지 말라. 여기에서 이러한 충고와 주의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권고의 필요성은 불가피하다. 제자들 스스로가 세상에 대한 사랑을 금하도록 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권고의 동기는 아래 몇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15절), 인간의 마음은 좁아서 두 가지 사랑을 모두 포함할 수 없다. 세상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 사랑을 끌어내린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더하면 더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감소하며 시들어 버린다.

 

2. 세상적인 사랑이나 정욕에 대한 금지로써 이러한 충고와 훈계는 불가피하다. 즉 세상적인 사랑이나 정욕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가 아니다. "이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다"(16절). 하나님은 세상적 사랑과 정욕으로부터 우리를 부르셨다. 그러나 세상적 사랑과 정욕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강요한다. 세상은 사랑의 약탈자이다. 십자가에 못박고 거부하여야 할 세상에 대한 온당한 견해와 관점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육체적인 면으로 생각해 볼 때 세상은 선하며 하나님의 작품과 그의 완전하심이 비치는 거울로써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 부패된 상태에 있는 우리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의 연약함을 조장하며 우리의 사악한 애착심을 자극하고 불을 지른다. 이 세상과 육신간에는 크나큰 유사성과 동일성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육신을 침투하며 부식케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대항하는 하나의 파당을 이룬다. 그러므로 세상의 일들은 부패된 본성에 대해 뚜렷한 경향에 따라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육신의 정욕"이 있다. 여기서 육신은 "안목"과 "이 생"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육체(body)를 의미하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은 내적으로 탐욕적인 욕신의 기질과 욕망을 이름이다. 이 정욕은 일반적으로 "쾌락"이라고도 일컬어진다.

 

(2) "안목의 정욕"이 있다. 눈은 물질로 기쁨을 삼는다. 부(富)와 부의 소유는 쾌락적인 눈에 의하여 갈망되어진다. 이것은 탐욕적인 정욕이다.

 

(3) "이 생의 자랑"이 있다. 허황된 마음은 모든 사치와 화려한 장신구와 그리고 헛된 이생의 쾌락을 추구한다. 이것은 욕망을 이름이며, 항상 명예와 칭찬만을 바라고 있다. 어느 점에서 이것은 귀가 병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허황된 마음은 감탄과 칭찬에 의하여 움직여지게 된다. 이러한 욕망의 대상은 스러짐을 당하고 포기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애착과 욕망을 독차지하는 바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다"(16절). 무리한 정욕이나 욕망은 제어되어야 하며 또한 감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욕에 빠지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혹적인 세상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3. 이러한 것들을 만류하는 세 번째 이유는 이 세상 것들의 허무성 때문이다.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이다"(17절). 정욕 그 자체와 정욕을 즐기는 기쁨은 시들어 없어질 것이다. 정욕적인 모든 것은 끊어지게 될 것이다(전 12:5). 무덤에서 지금 썩어져 누어 있는 모든 자들의 향락과 기쁨은 어찌 되었는가?

 

4. 네 번째의 이유는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 때문에 이러한 훈계와 주의를 주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이나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자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된다(17절). 없어질 정욕과는 반대로 그의 거룩한 열정과 사랑은 영원히 살아남게 된다. 사랑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로 현세에서 내세로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구절을 통해 우리들은 사도적인 교훈의 순수성과 영적인 면을 통찰할 수 있다. 동물적인 삶은 거룩한 신적(神的)인 삶에 복종해야 하며 육체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순복해야 한다. 또한 영혼은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승리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배되어야 한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고 (요한 1서 2:18,19)

 

Ⅰ. 여기에서 "때"에 대한 예시가 나타나 있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18절). 우리들은 여기에서 사도 요한이 다시 한번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항상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신앙에 있어서 어린 상태에 있는 아이들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타이르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경고를 주기 위한 호칭이 될 수 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곧 교회나 국가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모든 무리는 마지막을 재촉하고 있다. 모세의 제도와 교훈은 사라져가는 중이다. 또한 다니엘의 때(weeks)는 끝나 가고 있으며 히브리인들의 성읍과 성소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그의 종말은 홍수에 밀려남 같을 것이며, 또한 전쟁이 있으리니 크게 황폐할 것이다"(단 9:26). 제자들이 때의 종말에 대해 경고하며 예언적인 종국을 설명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Ⅱ. 이 마지막 때의 징조는 무엇인가? 이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18절).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과 나라를 대적한다. 적그리스도가 용납되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섭리 중에 하나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를 경우 제자들이 적 그리스도를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목회자들은 이스라엘 집을 지키는 파수군들이다. 이러한 적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타격이나 손실이 될 수 없다.

 

1. 적 그리스도의 도래는 이미 예언된 바로 "적 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바와 같다"(18절).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지속적이며 숙명적인 적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났다(살후 2:8-10). 그러므로 이에 대한 많은 전조와 증거가 나타났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지금 악한 일을 이루고 있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

 

2. 적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의 징조로써 이미 예언된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이러한 것들은 유대인의 나라와 민족 그리고 종교의 몰락에 대한 전조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로써 마지막 때가 이르렀음을 알게 된다"(18절).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미혹자들이 있음을 이미 알았으므로 이러한 예견으로 모든 미혹자를 대항해 싸울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강화하자.

 

Ⅲ. 미혹자들 또는 적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1. 좀 더 적극적인 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한 때 사도적인 교훈을 받아들이며, 또한 이 교훈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우리들의 동료와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 교회로부터 나갔다"(19절). 가장 순수한 교회는 배교자와 배신자를 가지게 된다. 사도적 교훈이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2. 소극적인 면을 들어 생각해 보자. "그들은 우리들과 같은 자가 아니었다. 즉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바 건전한 교훈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즉 머리대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한 자였다."

(1)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고, 진실하지 못했다는 결혼을 얻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배신적인 행위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을 것이다."(19절). 만일 거룩한 진리가 그들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면 그 진리가 그들과 우리를 하나로 묶어 놓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이로써 진실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편으로부터 떠나 배교의 상태에 이른 자들은 배교 이전의 신앙이 위선적이었음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은 파괴적인 죄로부터 보호함을 받게 된다.

 

(2) 이와 같이 그들이 사도적인 교훈과 친교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이유는 그들의 불성실함에 기인된다. "저희가 이런 일을 행함은(저희가 나간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다"(19절). 교회는 누가 그의 진실하고 생명적인 성원인지 아닌지를 잘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내적으로 성화된 상태를 점검하게 된다. 여기에서 위선자는 드러나게 되며, 그들이 죽을죄를 짖지 아니하였다든가, 타인에 대해 귀찮은 존재나 경계를 요하는 인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진리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부드러운 점이나 덕스러운 점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7,

 

적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 (요한 1서 2:20-27)

 

Ⅰ. 사도 요한은 미혹자들이 성행하는 위태로운 시대에 그의 편지를 받고 있는 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즉 배교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기 위해 격려하고 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제자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기름으로 말미암아 부요해지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너희가 기름 부음을 받았느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며 그들의 이름은 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은혜의 기름과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와 온갖 영적인 선물로써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들로서 주님의 사명과 흡사한 것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성령은 불과 물이라고 비유될 수 있는 것같이, 기름으로도 비유될 수 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심은 곧 기름 부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신 이는 거룩하신 자로 이러한 축복은 거룩하신 자, 성령 혹은 두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다(계 3:7). 두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하심에 있어서 탁월하신 자다. 주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신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그 자신과 같도록, 또한 그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그의 제자들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2. 기름 부음의 효과는 안약과 같다. 기름 부음은 이해의 눈을 밝혀 주며 또한 이를 강화한다.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신앙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약속되어지고 또한 부여된 것이다(요 14:26). 주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제자들을 똑같이 취급하지 않았다. 어떤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 보다 더 많은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와 같이 기름 부음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진실하지 못하게 되므로 오히려 적 그리스도에게 돌아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와 영광에 반역하는 자리에 이르게 될 위험이 있다.

 

Ⅱ. 사도는 본서를 기록한 의도와 뜻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1. 첫째로 부정적인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가 본서를 기록한 의도가 그들의 지식을 의심하거나 복음의 놀라운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다(21절).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너희의 안전을 충분히 보장할 수도 없으며 또한 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것도 경하할 만한 것이 못된다." 믿는 형제에 관해 심사숙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들의 추측을 뒤엎을 때까지 우리는 그들을 주시해야 한다. 즉 신앙인들에 대한 정당한 신뢰는 그들의 신실성을 더하게 하며 고무시키는 결과가 된다.

 

2. 확신과 인정의 방법으로써 사도는 본 서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너희가 예수 안에 진리를 앎을 인함이니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점에서든지 진리를 아는 자들은 이로써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 무엇임을 식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Rectum e stindex sui et obligui - 즉 목 바른 줄은 삐뚤어진 줄이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참과 거짓은 혼합되거나 함께 어울릴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이로써 적 그리스도의 죄악과 미혹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힘을 강화하게 된다. 거짓말은 자연 종교나 계시 종교 어느 것에도 속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거짓을 저주한다. 그리고 그들의 교훈과는 모순됨을 폭로했다. 만일 거짓말로 진리를 전파했다면 사도들은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멸망케 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기독교가 자연 종교와 일치하고 있음은 기독교를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인데 기독교는 자연 종교의 기초가 되며 기독교의 요소와 원리를 지니고 있는 유대교와도 곧잘 일치하고 있다.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즉 사기와 협잡은 진리를 선포하는데 가장 부적합한 도리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부적합한 방법이 사용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종교의 상태가 보다 낫게 되었음을 상상해 보자. 사기와 협잡의 부적합한 방법을 사용한 결과가 우리들의 어지러운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예로부터 이루어진 사기와 사악한 행위에 대한 탐색이 무신론과 불신앙 가운데 있는 우리의 세대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보다 크게 공헌을 이룩한 사람들은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Ⅲ. 사도는 새로 일어난 미혹자들을 또 다시 소추(訴追)하며, 고발하고 있다.

 

1. 그들은 거짓말쟁이며, 거룩한 진리에 대해 지독한 반대자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누가 거짓말쟁이, 아니 누가 악명 높은 거짓말하는 자이겠는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닌가?" 하나님은 거짓되며 거짓말하는 자들의 아버지라고 세상에 유포된 낭설은 가장 유해하며, 오래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허위와 거짓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완전 무결하게 증명되어진 진리는 없다. 오히려 혹자들은 진리에 반대하며, 또한 진리를 부인한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은 하늘과 땅 그리고 지옥에 의하여 증거 되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어떤 자는 강한 미혹에 버려짐을 당한 자가 있는 것 같다.

 

2.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는 아버지의 증거와 증언을 거부하며,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 대해 나타낸 확증을 거부한다(22절). "즉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임을 거부한다(요 6:2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버지의 증거와 증언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계시와 세상과 화해를 이룩하는 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특별한 계시를 저버리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추론하고 있다(23절). 즉 그는 아버지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이다. 그 이유는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최선의 계시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 그의 호의와 은혜 그리고 구원에 대해 무관심한 자다. 이는 "아무도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타난 대로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과 같이 양자간에는 교훈과 지식 그리고 관심사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동일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아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계시를 고수하는 자들은 그 위에 자연 종교에 대한 능력과 축복을 얻게 된다.

Ⅳ. 여기에서 사도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들리어진 옛 교훈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24절). 진리는 오류보다 더 오래 된 것이다. 성도들에게 맨 처음으로 주어진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는 어떤 새로운 사건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받은 바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는 가장 확실한 것이며 이 진리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 끝에 얻어진 것으로 길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진리는 옛 것을 변호하며 이로써 또한 권고할 수 있다. 권고는 이러한 면에서 강화되어진다.

 

1. 기본적인 진리와 믿음을 고수함으로써 참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24절).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함은 죄를 멀리하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하는 수단이 된다"(요 15:34). 아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연합하게 하는 매개체 또 매개자가 된다. 이러한 복음의 진리에 우리들은 어떠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2) 이로써 그들은 영생의 약속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까지도, 5:11)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것이다"(25절). 하나님이 그를 진실하게 따르는 자에게 이루시는 약속은 실로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능력과 선하심에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축복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위대한 가치와 진리를 부여하신다. 그들이 진리 안에(진리의 빛과 능력과 그 영향권 안에) 거하게 될 때 하나님은 영생을 약속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2. 본문 기록의 목적을 말하는 바 앞에서 언급된 권고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본 서신은 미혹하는 자들을 대항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강화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26절). 그러므로 처음부터 들은 것에 거하지 아니하면 본서의 기록과 또한 모든 봉사는 헛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모든 서신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의미하며 열매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 8:12).

 

3. 하늘로부터 받은 유익한 축복으로 그의 권고를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니"(27절),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받아들인 바 거룩한 진리에 대한 내적인 확증을 가지고 있다. 즉 성령이 그들의 마음과 심령에 진리에 대한 내적인 확증을 나타내셨다. 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의 심령에 계속적인 증거를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신실한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쏟아 부어 주는 은사 곧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교훈에 대한 하나의 징표(seal)이다. 이 징표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이 거룩한 성유(聖油) 또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권유할 만한 것이다.

 

(1) 그것은 지속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기름이나 연고는 물과 같이 쉽게 말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거하는 것이다. 너희 안에 확실한 것을 위해서 거룩한 조명은 지속적이며 영구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시험과 올무 그리고 미혹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기름 부음은 영원히 존속하게 된다.

 

(2) 기름 부음은 인간의 교훈보다 월등하다. 즉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27절). 주어진 사명이 없이는 당신에게 기름 부음으로 해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기름 부음으로 당신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면 기름 부음이 우리들 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을지라도 기름 부음으로 해서 당신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27절). 당신들이 기름 부음을 받기 전에 우리들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나 우리의 가르침은 기름 부음에 족히 비교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청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욥 36:22) 거룩하게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부수적인 교훈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케 한다.

 

(3) 기름 부음은 명확한 진리이며, 그것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성령은 진리의 영임이 틀림없다(요 14:17). 그가 주신 교훈과 모든 가르치심은 진리 안에 있는 것이며 또는 진리에 속한 것임이 확실하다. 즉 진리의 영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현세에서 필요한 모든 것과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4) 거룩한 기름은 보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거룩한 기름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유혹자들과 그 유혹들로부터 보존함을 받도록 할 것이다.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기름 부음은 당신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인도하듯이 또한 당신을 구원할 것이며 그리스도를 반역하지 않도록 당신의 마음과 심령을 주장할 것이다. "우리에게 기름을 붓고 또한 인을 치고 우리의 심령에 순수한 성령을 부어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고후 1:21).

 

 

그리스도의 강림 (요한 1서 2:28,29)

 

거룩한 기름 부음 받음에 대한 축복을 언급한 다음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라는 충고와 권고를 하고 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28절). 사도는 "어린 자녀"란 친절한 칭호를 반복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칭호는 작은 자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자녀"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는 사랑으로 타이르고 이성으로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너희에 대한 사랑이 너희에게 인내를 가르치도록 우리를 강권한다. 이는 그의 인격을 말하고 있는 진리 안에와 그와 연합된 가운데 그리고 그에 대한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복음적인 특권은 복음적인 의무를 수반한다. 주 예수에 의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어떠한 반대에도 저항하여 그와 함께 살아야 할 크나큰 의무를 지닌다. 시련기에 있어서 참고 견뎌야 할 의무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강조되어진다.

 

1. 이는 주의 재림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8절).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은 여기에서 당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사실이다. 그가 다시 오시게 될 때,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하면 그의 탄생은 은밀한 중에 이루어졌다. 그는 태초로부터 나와 조용히 마구간에 누이셨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열려진 하늘로부터 임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시험 중에도 그와 함께 거하는 자들은 그를 봄으로써 담대함과 확신,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로부터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으므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머리를 들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를 저버린 자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자처하고 구세주의 영광을 저버린 가운데 불신앙과 배신, 만용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를 저버림으로 소망과 기대에 반해 비겁과 위선과 모든 불의의 삶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함이다." 사도는 자기 자신도 그들의 수에 포함시키고 있다. "너희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있게 하려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m,n aivscunqwmen avpV autou/). 그가 공공연하게 나타나서 그를 저버린 모든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며,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함으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 것이며,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임을 선포하면서, 그들을 어둠과 마귀와 끝없는 절망의 구렁이로 내던질 것이다(막 8:38). 사도는 동일한 충고와 권고를 계속하고 있다.

 

2. 시련기에 있어서 참고 견뎌야 할 의무는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어질 권위와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9절).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시는 또 다른 명성을 얻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법과 사랑에 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그에게 충성하며 복종하는 생활에 이르기 때문이다.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역사하고 실천하며, 의와 복음의 능력을 행하여야 한다. 이렇게 행하는 자는 "그에게서 난 자임이 틀림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주 그리스도가 의로우신다는 것(그의 본질과 성품에 있어서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자요 우리에게 성결함이 되시는 의로우심)을 안 이상 믿음의 행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는 이것이 당신에게 있어서 유일한 관심이 되는 그리스도로 난 자임을 알게 된다. 새로운 영적인 성품은 주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다. 시련기에 있어서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계속 힘쓰는 자는 위에 계신 주 그리스도로부터 난 자임을 나타내는 좋은 확증을 얻게 된다. 주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아버지시다. 그에게서 난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과 권위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말씀은 3장의 문맥과 연결이 되어지고 있다.


요한1서 2장 주석

 

성 경: [요일2:1]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성 경: [요일2:2]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마르티온'(*)은 복수형이다. 이는 범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의로우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화목 제물'임을 제시한다.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모스'(*)는 제의적인 용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혹자는 '속죄'(expiat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Dodd).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속죄의 근원이 된다. (2) 혹자는 '달램'(propi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ill). 이 해석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의 대상이 되셔서 희생 제사를 받으신다. 이 두가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Barker, Smalley, Stott, Law).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받으셨다(레 16:3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의럽다고 선언하신다(롬 3:21-26). 즉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속죄의 수단을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을 통하여 원수되었던 인간과 자신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홀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인류 전체에서 미친 것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요 3:16;4:42).

 

성 경: [요일2:3]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계명을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계명'(*, 타스엔톨라스)은 구약성경에서 십계명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출 20:2-17)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 되었다(마 22:37-40;롬 13:8-10;갈 5:14). 이러한 계명에의 순종은 비록 하나님을 아는 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징이며, 앎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Bultmann, Smalley).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도덕적인 행위를 동반하게 된다(Barker).

?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우리가...알 것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코멘'(*, '지식')는 본서나 요한복은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비한 지식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도덕 폐기론을 염두에 둔 듯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절대로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취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은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동사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역동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일련의 사고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적인 관계이다(Smalley). 그래서 요한은 '아는 줄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완료 시상인 '에그노카멘'(*)으로 표현하여 과거에 알았던 경험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멸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도덕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Stott) 보다 세밀하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성 경: [요일2:4]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본절은 앞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다. '저를 아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영생을 소유하였음을 나타내는 주장이다(요 17:3).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요구인 계명에 순종하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한다. '지키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론'(*)은 3절의 '테로멘'(*, '지키면')과 같이 현재 시상이다. 이는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저를 아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이 없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고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그는 거짓말장이일 뿐만 아니라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1:6). 여기서 '진리'는 요한이 '구원의 복음'이나 '참된 것'을 나타낼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본문의 '진리'는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이다. 즉 '하나님을 아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난 도덕을 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요한은 이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도덕폐기론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다.

 

성 경: [요일2:5]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개역성경에는 '드'(*,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과 연결된 상반된 측면의 진술임을 시사한다.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 '그의 말씀'(*, 아우투 톤 로곤)에서 '그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 더욱이 요한은 본절에서 앞절의 '계명' 대신에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신 도덕적인 계명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신 모든 복음의 내용에 대한 순종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Barker). 한편 '지키는'의 헬라어 '테레'(*)는 현재 시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속적인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데우'(*)에서 나타난 속격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주격으로 해석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Houlden, Bultmann). (2) 혹자는 목적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3) 혹자는 특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일종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본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견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한편 '온전케 되었나니'의 헬라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전과 성숙의 개념을 내포한다(Barker). 더욱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는 완전과 성숙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지속되어 성숙의 과정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 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어가며 완전하여져 간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순종함으로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고 온전해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 내주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성 경: [요일2:6]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저 안에 거하는 자는. - '저'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tott) 문맥상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그러기에 '저 안에 거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시사한다. 이 내주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비한 지식을 획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즉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성취된다(5절).

? 그의 행하신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 - 본문은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자들의 삶 속에 윤리적인 행위가 동반되어야 함을 나탸낸다. 여기서 지시 대명사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노스'(*)는 상반절의 '저'와는 달리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Stott, Smalley, Barker). 왜냐하면 본서에서 '에케이노스'는 그리스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3:3, 5, 7, 16;4:17). 한편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텐센'(*)은 부정과거 시상으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신 삶을 가리킨다.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함으로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신 것과 같이 생활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윤리적인 계명은 물론 복음에 대해 순종함이 그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드러나야 한다.

 

성 경: [요일2:7]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약 2:8;벧전 2:17).

?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는 단수이다. '엔통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성 경: [요일2:8]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셨다(4:9;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성 경: [요일2:9]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 '...하는 자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 레곤'(*)은 문자적으로 '말하는 자'를 의미한다. '호 레곤'은 '하나님을 아는 자'(6절;요 15:4), 그리고 본절의 '빛 가운데 있는 자'(요 12:46)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세 가지 주장이 하나의 주장,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빛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는 윤리적인 계명에 대해서만 아니라 복음 전체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빛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않는다는 것은 모순된 주장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편 본절의 '형제'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신자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본서를 쓰면서 기본적으로 수신자 공동체의 문제와 관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형제'를 일차적으로 수신자 공동체를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으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을 배제시키지 않고 있다(8절, Barker, Smalley).

성 경: [요일2:10]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두운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과는 반대로 진정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빛 가운데 거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절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 '사랑하라'는 윤리적 계명에 순정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 '자기 속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토'(*)에서 대명사 '아우토'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빛 가운데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속에'를 의미한다(Barker, Haas). (2) 빛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빛 안에'를 의미한다(Schnackenburg, Smalley).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될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며,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는 사람들로 걸림돌이 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한편 '거리낌'의 헬라어 '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서 배교나 범죄토록 하는 유혹을 가리킨다(고전 1:23). 이러한 '스칸달론'의 대상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빛 가운데 거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 자신이며(Brooke, Westcott, Barker)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이다(Stott). 본문은 두 종류의 대상을 모두 내포하는 듯하다. 빛 가운데 거하며 셩젤마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뿐더러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 다.

 

성 경: [요일2:11]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본절은 9절에 언급된 진술의 부연 설명이다.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눈이 멀어서 스스로의 실체를 본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자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구분하는 분별력을 상실하여 어두움에 속해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함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였으며, 실상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두움 가운데 헤메고 있다.

 

성 경: [요일2:12]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자녀들아...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본문은 1, 2절과 1:9을 반영한다. '죄사함'은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렘 31:34;겔 36:22-25).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 1;21;행 4;12;10:43;딛 2:14).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Smalley).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죄사함이 그리스도께서 하목 제물이 되심으로(1, 2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Stott). 한편 '사함을 얻음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온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처음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죄사함을 경험하였음을 시사한다.

 

성 경: [요일2:13]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아비들아...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uce, Dodd). 이 들에 의하면 본문은 시대에 상관 없이 전혀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2) 혹자는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3)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arker, Westcott, Brooke).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의 '아이들을' 향한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 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 즉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 안에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리가 흔하던 수신자 공동체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앎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테'(*)는 현재 완료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선재하신 말씀이셨음을 알았고 그 앎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 청년들아...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악한 자'의 헬라어 '톤 포네론'(*)은 남성 명사이다. 이는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사단은 빛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둠의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한다(14절;3:12;5:18, 19;요 17;15;엡 6:16;살후 3:3).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단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네니케카테'(*)도 현재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승리하였으며(눅 10:18;골 2:15;계20:2),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단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Stott, Smalley).

 

성 경: [요일2:14]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아이들아...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12절에서는 '테크니아'(*, '자녀들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파이디아'(*, '아이들아')로 부르고 있다. '테크니아'와 '파이디아'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별하면 '테크니아'는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아이가 약하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반면에 '파이디아'는 아이의 미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과 지도가 필요함을 나타낸다(Westcott, Stott). 한편 '아버지를 알았음이요'에는 13절의 아비들을 향한 말씀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완료 시상이 사용되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12절) 개종할 때부터 지도자 아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Barker).

? 청년들아...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본문은 13절과 병행된다.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로이'(*)는 육체의 강함보다는 영적인 강건함을 의미한다(엡 6:10;계 18:8). 청년들아 영적으로 강건해서 악한 자, 곧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영적으로 강건케 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악한 자에 대한 승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Smalley).

 

성 경: [요일2:15]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세상'이란 단어가 6번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4:3-5;5:19;요 16:11, Barker, Stott). 이러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요 15:18, 19;17:25). 한편 본문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호'나 '매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Bultmann). 그러나 사실상 사랑과 매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기호나 매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기에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의 방향과 동기가 문제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나 매력,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타인에 대해 올바르고 창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된다(Smalley).

 

?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본문은 요한이 수신자 공동체에서 세사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파트로스'(*)에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적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도록 만든다. (2) 혹자는 주격으로 보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 두 가지 견해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성 경: [요일2:16]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1)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2)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3)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성 경: [요일2:17]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세상은 한시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세상과 세상을 사랑한 모든 사람은 공동의 운명으로 파멸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죄를 미워하며 오직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이다(3;14;5:11, 12;고후 4:18).

 

성 경: [요일2:18]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소유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며, 열국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온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입증될 날을 기대하였다(사 2:2, 3;겔 38:14-23).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박해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이러한 메시야 대망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파루시아 때의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마지막 때'(*, 에스카테 호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엄은 의미의 말세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거나 혹은 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말세에 나타나는 포괄적인 징후나 성격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ooke, Dodd). (2) 혹자는 좁은 의미로 이해하여 마지막 날들 중의 마지막 때, 곧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요한복음에서 '시간'이 구속을 성취시키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요 2:4;4:21; 7:30; 8:20;12:23)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내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Barker).

 

?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적그리스도'로 번역된 헬라어 '안티크리스토스'(*)는 관사가 없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본문의 '적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대적하거나 반대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에 나타난 '안티크리스토 폴로이'(*, '많은 적그리스도')가 복수인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안티크리스토스'에서 접두어 '안티'(*)를 '적'이 아니라 '거짓'의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거짓말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w, Stott, Dodd). 요한이 이러한 '적그리스도'가 당시에 많이 나와 있음을 언급한 것은 당시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완전한 인간이심을 부정함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하였다(요이 1:7, Smalley).

 

성 경: [요일2:19]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본문은 앞절에 언급된 '적그리스도'가 다른 종교를 가진 자가 아니라 수신자 공동체 일원으로 있다가 거짓 교리에 빠진 자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나갔으나'는 수신자 공동체에서 강제로 출교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신자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스스로 나간 것을 보고 요한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수신자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지만 사실상은 전혀 공동체에 일원이라 할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은 스스로 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님을 증명하는 행위였다(Barker).

 

?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개역성경 본문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문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자들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앞의 진술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참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수신자 공동체의 교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공동체를 떠났다. 그들의 이탈은 자신들이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임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티 우크 에이신 판테스 여스 헤몬'(*)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서이 가능하다. (1) '에이신'의 주어를 '적그리스도'로 볼 때 본문은 '적그리스도 모두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다'(that they all are not of us, RSV)의 뜻이다. 이 경우에 '모두'를 의미하는 '판테스'(*)는 강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에이신'의 주어를 '수신자 공동체'로 볼 때 본문은 '공동체 회원들 모두가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that not all in our company truly belong to it, NEB)라는 의미가 된다. 이 경우에 본문은 수신자 공동체 내에 사이비 일원들이 있음을 나타내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이제까지의 문맥과는 달리 주어가 바뀌기 때문이다(Smalley).

 

성 경: [요일2:20]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 성경에서 '거룩하신 자'라는 칭호는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1) '하나님'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시 78;41;사 1:4;합 3:3). (2)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요 14:18;15:26;16:7;행 2:27;3:14).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한편 '기름 부음을 받고'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닫고 기름 부음을 받는 성유식(聖油式)을 행한 것을 반영한다(Dodd, Schnackenburg).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의식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기름 부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눅 4:18;요 14:17;15:26;16:13;행 4:27;10:38;고후 1:21, 22, Barker, Stott, Smalley).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영지주의자들처럼 단순히 성유식을 행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자신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러기에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달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안에 내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임이 분명하며 진정한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그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

 

? 모든 것을 아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테 판테스'(*)는 '너희 모두가 안다'(you all know, RSV)나 '너희 모두가 진리를 안다'(all of you know the truth, NIV)를 의미한다. 두 가지 중 후자에서 '진리를'이 삽입된 것은 다음절과의 연관성을 나타낸 해석이다. 요한은 본문은 통해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극소수만이 하나님과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주장을 수신자 공동체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진술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교리를 공격하고 있다(Smalley). 또한 극소수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요한은 '너희 모두'라고 진술하여 수신자 공동체 중 일부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영지주의자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요일2:21]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 본절은 세 개의 '인함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티'(*)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 사용된 '호티' 중에서 처음 두 번에 대해 혹자는 선언이나 진술을 나타내는 서술격(that,'...것')이라고 주장한다(Blutmann, Haas, Schnackenburg). 그러나 세 번 중 처음 두 번의 '호티'는 원인격(because, '때문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왜냐하면 요한은 본절에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을 더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이 모두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아 진리를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본서를 기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세번째 '호티'에 대한 해석의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원인격으로 보아 본문이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2)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쓴 것'과 연결시킨다(Schnackenbu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나는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 (3)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너희가...앎을'과 연결시킨다(Dodd, Smalley).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거짓이 진리에게서 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앞에 나타난 두 번의 '호티'를 원인격으로 기술함으로 수신자 공동체가 기름 부음을 받아 온전히 진리를 식별할 수 있음을 밝히고, 마지막'호티'를 서술격으로 사용함으로 '거짓이 진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성 경: [요일2:22]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앞절에서 진리가 '거짓'에서 나올 수 없음을 선언한 요한은 본절에서 '거짓'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란 예수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땅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4:2, 3;요이 1:7). 이들은 예수께서 참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것이며,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요 12:44, 45).

 

성 경: [요일2:23]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본절은 앞절의 결과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이다. '없으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에케이'(*)와 '있느니라'의 헬라어 '에케이'(*)에서 '에케이'는 문자적으로 '가지다'란 뜻이다. 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영적인 경험을 시사한다. 또한 본장에서 '에케이'는 '거하다'의 헬라어 '메노'(*)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여(24, 27, 28절) 확신의 동기를 제공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할 뿐 아니라 상호간의 내주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셨으며(요 1:18;14:9)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관계를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1, 2절;요 14:6).

 

성 경: [요일2:24]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리라. - (*, 휘메이스 호에쿠사테 아프 아르케스 엔 휘민 메네토). '처음부터'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수신자들이 처음 복음을 듣고 개종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2) 혹자는 사도들이 초대 교회에 처음 복음을 선포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들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선포된 복음을 들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과거에 사도들이 선표했던 복음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리라고 명령한다.

 

?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안 엔 휘민 메이네 호 아프 아르케스 에쿠사테'(*)이다. 본문의 헬라어 어순과 본절 상반절의 헬라어 어순을 살펴보면 두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너희 안에'에 해당하는 '엔 휘민'(*)이 상반절에서는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앞에 기술되어 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20절) 수신자 개인의 삶에 거하고 있는 복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상반절에서는 '에쿠사테'(*, '들은')가 '아프 아르케스'(*, '처음부터')보다 앞에 기술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아프 아르케스'가 '에쿠사테' 보다 앞에 진술되어 있다. 이는 본문과 상반절에 교차 대구법을 사용하여 복음이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 22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기술되어 '아버지'가 '아들'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기술되어 있다. 이는 요한의 강조점이 아들에 있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임을 시인할 때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고 상호간의 내주가 성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거하리라'의 헬라어 '메네이테'(*)는 상반절에서 현재 시상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미래 시상이다. 이것은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를 통한 현재의 영적 경험이 미래의 온전한 구원을 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Smalley).

성 경: [요일2:25]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2)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oulde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한편 '약속'은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나 성경 전체에서는 자주 나타난다. 성경은 구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메시야이신 예수 안에서 완성되며(행 13:23;롬 15:8;고후 1:20-22)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대치할 것이라고 말한다(갈 3;16;엡 2:12;히 10:23;11:13, 39, 40). 또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구속받은 자들이 약속된 성령에 의한 새 시대, 즉 메시야 시대의 종말론적 축복을 공유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눅 24:49;행 1:4, 5;2:33). 목회 서신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이 영생임을 진술하고 있다(딤전 4:8;딤후 1:1;딛1:2).

 

?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복음을 굳게 견지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아들을 알지 못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인 영생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성 경: [요일2:26]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 '미혹케 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플라논톤'(*)은 현재 분사이다. 이는 앞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들의 특성이 거짓말로 미혹하는 마귀의 특성을 닮고 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요한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적그리스도의 미혹행위가 지속적인 것으로서 현재에 볼 수 있는 실제적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썼노라'의 헬라어 '에그랖사'(*)는 서간체 부정 과거이다. 이 '에그랖사'는 본서의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의 시점, 즉 수신자 공동체가 본서를 받아보면서 요한의 기록 시점을 생각하는 당시 표현 방식이다.

성 경: [요일2:27]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 24절에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수신자 공동체에게 권면한 것과 같이 본절에서도 요한은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수신자들이 거룩한 자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름 부은'은 성령을 가리킨다(20절 주석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진리이시다(5:7). 여기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는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교사직에 대한 언급(행 4:18;5:28, 42;고전 12:29;엡 4:11;딤후 2:24)과 상치되는듯 보인다. 그러나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직분을 받은 교사들은 진리이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진리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4:1, 5;요이 1:9, 10, Schnackenburg). 즉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각 개인에게 가르쳐져야만 한다. 그런 반면에 당시에 이단적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권고하여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Brooke, Houlden). 한편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는 요한복음에 언급된 보혜사 성령의 성격과 병행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셔서(요14:17; 15:26)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요16:13)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요14:26). 이런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과 대조를 이룬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은 지적인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영적 지식을 소유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그 안에 거하게 한다.

 

?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데스 에스틴 카이 우크 에스틴 프슈도스'(*)는 문자적으로 '그것은 참되고 거짓이 아니다'란 뜻이다. 여기서 '에스틴'(*, '이다')의 주어인 그것은 기름 부음에서 비롯된 가르침보다는 기름 부음 자체를 가리킨다(Smalley). 기름 부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그는 물론 그의 가르침 전체가 참되며 거짓이 없다. 한편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의 주어는 '기름 부음'으로 보기 보다는 '예수'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더욱이 '가르치신'의 헬라어 '에디닿센'(*)은 부정 과거 시상이어서 예수께서 지상 사역 때에 행하신 가르침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Smalley). 성령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신다(요14:26).

 

성 경: [요일2:28]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 본문은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신의 권면을 요약한 것이다. '그 안에 거하라'는 본장에서 자주 언급된 권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주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며 '사랑하라'는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동반한 그리스도인의 내주는 그리스도인들로 약속된 영생을 소유하게 한다.

 

?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이다. 즉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다. '나타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로데'(*)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역사 위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파네로데'와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아'(*)를 연결시켜서 그리스도게서 눈에 보이게 광채를 입고 재림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Barker). 한편 '담대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신약성경에서 31번이나 나타나며 그 중에서 13번이 요한이 쓴 책들에서 나타난다. '파르레시안'은 헬라 세계에서 '자기의 의견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민의 권리'를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나(행4:29; 고후7: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딤전3:13; 히10: 19) 담대함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성 경: [요일2:29]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거듭나고 영생을 소유한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할 표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의'이다. 여기서 '그'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나(Smalley)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Law, Barker, Stott). 왜냐하면 다음 절인 3:1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언급되어 있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만 한다. 그래서 요한은 본장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어두움에 있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3-6절).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순종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아버지에게서 난 자라고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