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에 대한 분별 (요한 1서 4:1-3)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우리와 함께 거하심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려질 수 있음을 말한 다음부터 성령은 식별되고 구분되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Ⅰ. 사도 요한은 성도들로 하여금 영들과 한참 성행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계와 세심한 조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1. 조심할 것을 이르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라. 하나님의 영에 대해 가식적인 것을 취하고 있는 모든 영들에 대해 또는 환상, 영감, 혹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모든 신앙 고백자들을 관심도 두지 말고 믿지도 말며 따르지도 말라." 진리는 허위와 거짓에 대한 반증이 된다. 진리는 언제나 성령과 더불어 참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이에 반(反)한다. 비록 악용되어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선하신 방법을 취하신다. 비록 다른 자들이 마치 동일한 자격을 가진 것처럼 심히 교만하고 악할지라도 하나님은 세상의 영감을 받은 선생들을 보내셨으며, 우리들에게 초자연적인 계시를 나타내 주셨다. 성령과 영감을 빙자한 모든 거짓된 것과 이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믿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악을 행한 경우는 영적인 사람이 패역해 있을 때였다(호 6:7).
2. 세심한 조사를 해야 한다.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바인가를 시험해야 한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1절).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가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믿을 만하고 신뢰할 수 있는 영을 따르며 거짓과 참을 식별하는 자들에게만 성령을 허락하신다. 이성은 이러한 식별을 위해 주어졌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왔음이니라"(1절). 구세주의 강림의 시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데 이스라엘의 구속자에 대한 유대인 중의 일반적인 기대와 구속자가 받는 치욕과 정신적인 혁명, 그리고 그의 고난은 구세주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예견하신 대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메시야로 행세하였다(마 24:23, 24). 거짓 선생들이 교회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미혹의 영이었으며 그들 자신이 선지자와 영감받은 전도자로 자처하며, 큰 소리를 쳤으니 어찌 용납될 수 있겠는가?
Ⅱ. 사도 요한은 제자들이 이러한 거짓 영에 대한 시험을 시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거짓 영들은 선지자와 의사, 그리고 신앙의 군주로 군림하는데, 그들은 스스로 교리를 만든다. 사도 요한이 살고 있던 당시의 시험은(여러 시대 여러 교회에서 시험하는 기준이 다양하다) 이러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2절), 즉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영원한 생명, 그리고 말씀으로써 고백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유한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나중에는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신앙적으로 단련되어지고 교화된 마음으로써 이 사실을 고백하고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이를 행한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알게 하신 주동자가 되신다. 이와 반대로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3절). 비록 지금은 하늘에 계실지라도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우리의 몸과 동일한) 이 세상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은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증거를 보여 주심은 이에 상반되는 어떠한 충동이나 거짓 영감은 모두 하늘이나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계시종교의 전모는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 그리고 사명에 대한 설명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명에 대한 더욱 악화된 조직적인 반대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세상에 있느니라"(3절).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그의 진리를 대적하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알려 주신 바다. 또한 유력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 영광을 대항하는 세상에서의 장기간의 지루한 싸움이 있을 것이 예언되었다. 무서운 적 그리스도는 그의 길을 예비하게 되며 그의 도래는 그의 보다 작은 적 그리스도들과 그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역사를 이룩할 악령에 의하여 촉진될 것이다. 즉 적 그리스도는 일찍이 사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적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에게 나타내신 모든 증거에 대적함으로 어두움과 미혹에 내던져짐을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무섭고도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이러한 대적이 일어날 것은 이미 예언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격정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들은 그 말씀의 진리를 더욱 더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의 대한 식별 (요한 1서 4:4-6)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이 미혹하는 적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한 두려움과 위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1. 사도는 그들 안에 좀더 거룩한 원리가 있음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즉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4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6절)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하나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으며, 그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고 악한 미혹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치명적인 미혹을 받지 아니하도록 그의 택한 자들을 보호하고 계신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소망을 부여하신다.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4절). 여러분들은 이로써 이 미혹하는 자들과 그들과 그들의 시험을 극복했으며 지금도 계속 증거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승리할 수 있는 소망의 두 가지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여러분 안에 든든한 보호자가 계신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4절).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그는 사람들이나 마귀보다 더욱 권능이 크시다.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심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2) 여러분들은 미혹하는 자들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합당하도록 지으셨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 안에 있는 영은 세상으로 그들을 인도한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 허영과 쾌락과 세상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한다. 그들은 세속적인 메시야와 구세주를 믿는다. 또한 그들은 세속적인 생각과 통치를 계획한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적 것이 아님을 잊고 세상의 재물과 보화만을 탐한다. 이러한 세속적인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변절자들을 낳게 한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5절). 세상은 이러한 것들을 따르게 된다. 즉 세상은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세상의 것은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는 자는 크나큰 상처를 입게 하는 미혹을 이기게 된다.
3. 사도는 믿는 무리의 수가 비록 적을지라도 보다 나은 점이 그들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보다 신성하며 거룩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하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진리와 신실하심,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 하나님의 징후와 증거를 아는 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우리에게 속하고 또한 우리와 함께 거하게 된다. 자연 종교에서 원만하게 육성된 자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한층 더 침착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본성과 도덕적 우월성 계시와 역사에 관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6절). 반대로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아니한자(자기 자신의 본능적 성향을 따라 행하는 자)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종으로부터 비롯된 자들이다. 이 세상에 더 깊이 몰두해 있는 자들은 누구보다도 기독교 정신에서 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다. 이와 같이 우리와 다른 이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6절).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여러분을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르침은 진리의 영의 표시이며 이는 미혹의 영에 대해 적대관계에 놓여 있다. 교훈이 순수하고 거룩하면 할수록 이는 더욱 하나님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형제애 (요한 1서 4:7-13)
진리의 영이 교의(敎義)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듯이, 사랑에 의하여 또한 밝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7절). 그는 피차간 사랑으로 연합하도록 하기 위해 사랑 안에 그들을 결속시키려 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사랑함으로 피차간 영원한 사랑을 나누도록 간청하노라!" 이러한 권고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Ⅰ. 사랑은 가장 높고 귀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요, 창시자요, 부모요 명령자이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과 복음의 총체이다. 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7절). 하나님의 영은 사랑의 영이시다. 하나님의 자녀의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그 성품의 성격과 외형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갈 1:22). 사랑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Ⅱ. 사랑은 거룩한 성품에 대해 참되고 바른 이해를 나타낸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7절).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8절).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을 온 세상에 비추신다.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나타내고 있는 그의 지혜와 위대함, 그리고 광대한 창조의 유용성은 동시에 그의 사랑을 보여주며 증명해 준다. 그리고 자연과 절대자의 탁월성에 대하여 생각하며 추리하도록 주어진 이성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추리하고 발견해 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건전하고 온전한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즉 그의 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완전하심 가운데 빛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며 그의 본성과 본질이 또한 그의 끗과 역사 하심이 본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기념은 단지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과 아울러 빛이 되심을 알게 된다(요일 1:5).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본래 사랑이시며 사랑으로 비롯된 완전함을 소유하고 계심과 같이 그는 필연의 실재성과 탁월성과 영광을 지니셔야만 한다. 오직 사랑은 거룩한 전능자의 본성이며 속성이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1. 그가 우리를 사랑함은 이렇게 나타났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3절), 곧 반역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이 더럽고 헛되며 악하고 먼지와 재같이 쓸모 없는 자들을 사랑해 주심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2.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리 만큼 우리들을 사랑해 주신 까닭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다"(9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각별히 따로 세움을 받은 자이다. 그는 독생자이다. 만일 우리가 그를 하나의 피조물 혹은 창조된 존재로 간주한다면 그는 독생자가 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를 하나님의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실재 또는 본질로부터 비롯된 자연적인 필연의 방사(放射)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독생자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아들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 주심은 거룩한 사랑의 신비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놀랍고도 기이하며 엄청나게) 사랑하사"란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3.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흔히 예측할 수 없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10절).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죄와 비참과 피 아래 있을 때, 또한 용납될 수 없고 부패하고 더럽고 거룩한 피로 우리의 죄씻음 받을 자격조차 없었던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4. 하나님은 아래와 같은 사명과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셨다.
(1) 그의 임무는 우리의 죄를 사해 주는 것이었다. 즉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의 율법과 저주 아래 죽고 그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그의 영혼의 상처를 입고 그의 옆구리에 창이 박히고 우리를 위해 장사되시는 것이다"(10절).
(2)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주신 목적은 우리에게 선하고 유익한 목적, 그를 통해 우리를 살리려 하시고(9절), 그를 통해 영원히 살고, 하늘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며 그와 함께 영원한 영광과 축복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Ⅲ. 형제에 대한 거룩한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강권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큰 관심을 가지고 내가 말하는 바 사랑을 기억해 주기를 간청하노라)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이 말씀은 저버릴 수 없는 논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자녀로서 그의 제자(혹은 모방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영원한 하나님이 사랑하신 그들을 어찌 우리가 사랑하기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의 사랑을 숭배하는 자 또는 그의 사랑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 안에 있는 자비심과 만족함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가 사랑한 자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은 전 인류 가운데에 보편적인 사랑을 강권하고 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교회와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은 단 하나의 각별한 사랑을 이룩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Ⅳ.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거룩한 임재의 보증이 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12절). 하나님은 가시적인 임재로 우리의 눈에 직접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12절) 그의 성령으로(13절) 우리 안에 거하신다. 곧 하나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자신을 나타내거나 우리의 직관에 나타내 보이지 않으신다. 또한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아니하신다. 다만 그는 받을 만하고 요구할 만 한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사랑을 요구하시며, 기대도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그의 사랑을 모든 교회 특별히 교회의 형제들과 성도들에게 주셨음을 예증하는 것이 된다. 그들 안에 그들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전이된다. 전능자는 특별히 그 안에 거하신다."
Ⅴ. 여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은 우리 안에 이루어진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12절).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와 우리 위에 온전히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신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와 우리와 더불어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사랑은 결코 우리 안에서 헛되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참된 목적과 초점은 이로써 성취되어짐으로 그 사랑은 온전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믿음의 역사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며, 사랑은 그 사랑의 수고로 말미암아 온전케 된다. 거룩한 사랑이 하나님과 형제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사랑을 이룩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사랑이 현세에서 비록 불완전하고 또한 우리에게 사랑의 높은 목적이 부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며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이루신 자신의 사랑을 평가한다면 이 형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사랑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에 대한 크신 사랑을 언급한 다음 아래와 같은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3절). 확실히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일은 우리들이 알고 증거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고귀하고 위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안에 거하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라고 하신 말씀 중에 나타나 있다. 거하심에 대한 온전한 의미는 축복받은 세계에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상호적인 내재의 뜻을 알게 된다고 사도는 말한다. 곧 그가 우리 마음속에 그의 성령의 형상과 열매를 이룩하셨고(13절),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그의 것 혹은 그에게 속한 능력과 관대하심 그리고 왕국에 대한 사실을 바로 일깨워 주는 혁명과 이해력을 부여하시는 분이시다(딤후 1:7).
거룩한 사랑(1) (요한 1서 4:14-16)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이룩하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불길로 옮겨져야 하므로 사도는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초석으로써 사랑을 말하고 있다.
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조항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14절)라고 하신 말씀 중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아래와 같다.
1. 주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즉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이 아들과 같은 또 다른 이는 없으며 하나님도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유일한 분이시다.
2.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계와 사명은 세상의 구주란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죽음과 모범과 중재와 성령, 그리고 구원을 방해하는 대적을 대항하는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3. 그가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신 목적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또한 그는 아들의 동의를 얻어 이후에 이뤄질 재림을 선포하셨다.
4. 이 근거에 대한 확증은 사도와 그의 형제들이 본 바에 의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실한 성품과 그의 경건한 행실과 역사, 변화 산상의 모습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 하늘로 승천하심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그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이었음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없었다.
5. 이에 대한 사도 요한의 증거는 아래에서 나타난다. 즉 "우리가 없었고 또 증거하노니"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다. 이 진리에 대한 증거가 우리로 하여금 그 사실을 증거하도록 강권한다. 세계의 구원은 이 진리에 의존된다. 이 진리의 명확성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증거가 정당함을 입증한다.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손은 그 진리의 증거자가 되었다.
Ⅱ. 사도 요한은 이 진리를 시인함으로써 주어지는 탁월성 혹은 탁월한 특권을 말하고 있다. 즉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4절). 이러한 신앙 고백은 신앙 고백의 기초로써,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입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시인함과 세상의 모든 아첨과 비난에 대항해서 생활과 행위로써의 신앙 고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성령이 아니고서는, 또는 성령의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역사가 없이 주라고 할 수 없다(고전 7:3).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되고 그에게 사로잡힌 바되며, 하나님에 대한 만족할 만한 지식과 그로 더불어 누리는 크나큰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Ⅲ. 사도 요한은 거룩한 사랑의 고취를 위한 목적으로 아래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고 그 안에서 시행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16절), 우리에게 꼭 알려져야 할 계시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계시다. 우리들에게 계시된 신조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조항이 가장 많다. 주 그리스도의 역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역사이다. 그의 아들 안에서 또한 그와 더불어 이룩하신 모든 사건은 우리를 위한 그의 사랑의 증거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끄시려는 수단일 따름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화해를 이룩하셨다"(고후 5:19)> 우리는 여기에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16절). 즉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한한 사랑이시다. 그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사명과 중재로써 세상에 있는 우리를 위해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주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매우 생소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진다면 이는 기독교 계시에 대한 가장 큰 장애와 그릇된 생각이 된다. 그렇게 위대한 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아들의 영원성과 신성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그것은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말할 수 없는 풍요함이 있다." 거룩한 사랑의 방대함이 사랑에 대한 계시와 믿음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크나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온전한 사랑의 극치를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에 못이루실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그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시고자 하셨을 때 이와 같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당신의 보다 큰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셨을 때 보좌 앞에 섬기는 무리들을 위해 하늘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 곧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그 자신이 사랑이심과 그 사랑은 그의 영원한 본성에의 가장 밝고 사랑스러우며 초월적이고도 역동적인 탁월성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 무엇을 하실 수가 없겠는가. 이러한 일은 우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세계와 하늘의 주권자들과 능력자들을 위해 나타내시며, 잠시동안 우리를 놀랍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영원토록 그의 능력에 대한 존경과 찬양 그리고 축복을 위해 나타내심이 아닌가? 하나님이 이루시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들을 세우셨다는 것보다 우리를 위해 영원한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 그의 사랑의 목적과 위엄 그리고 풍성함에 더욱 부합되는 표현이 된다. 우리를 위해 독생하신 영원한 아들을 주심 같이 섭리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분부하신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위탁하시고 하늘과 땅과 지옥의 면전에서 사랑을 분부하시며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위탁하시고, 최고의 진리와 사랑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실 때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거룩한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결과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면, 이로써 섬기는 자들에게 나타날 하늘의 영광과 이 세상의 구원의 기쁨의 근거와 반면 지옥의 고통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 결과는 가장 기이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그의 율법과 나라와 사랑 그리고 영광 가운데서 자신이 사랑이심을 확신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이 받을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1)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한 것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이다.
(2) 약속하신 사랑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3)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만족과 기쁨의 대상이 되기에 부적합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과 보다 높은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통해 영원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위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2.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게 된다"(16절). 사랑의 하나님과 사랑하는 인간 사이에 놀라운 교통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계와 그의 용납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룩된다. 거룩한 사랑에 거하며 그의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소유하고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되고 인침을 받은 자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명상과 감명 그리고 취향 속에 살게 되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거룩한 사랑(2) (요한 1서 4:17-21)
사랑의 근원과 동기를 이루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권유한 사도 요한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좀 더 사랑을 권장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형제애 혹은 그리스도인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Ⅰ. 하나님에 대한 사랑-모든 사랑할 만한 존재와 대상들 중에 첫째가 되며 으뜸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그는 모든 아름다움과 탁월성 그리고 사랑의 총체가 되시며 모든 인간들에게 선과 사랑을 부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영혼의 평정과 만족이 요구되는 그 날 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기쁨이요 축복이 되는 그 날에 우리에게 심령의 평안과 만족을 주게 될 것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17절), 우주적인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그에 신앙적인 담대함을 가지고 얼굴을 들고 주님을 대면하고 그가 그들의 친구와 대변자가 되심을 알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복될 것인가? 그 날을 대망하는 가운데 거룩한 담력과 확신을 가지며 그날과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는 복된 자다.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복되고 복된 자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케 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구 되심을 확신케 할 것이다. 즉 그가 우리의 사랑을 알고 계심을 확신할 때 우리의 친구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며 그의 약속에 신실하신 것과 같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심을 아신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의 사랑을 쉽게 따라갈 수 있으며 그의 사랑의 기쁨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룩된 우리의 소망은 결코 우리를 멸망시키지 아니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롬 5:5).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부은 바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소망의 기초가 되며 우리의 소망이 드디어 아름답게 성취되리라는 확신의 기초가 된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의 의미와 확실성은 그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부은 바 되었다. 이로써 우리들은 그에 대한 신뢰와 그 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그는 그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일치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 즉 "그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17절). 사랑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간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한 것처럼 그는 또한 우리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변치 아니할 것이다. 그의 사랑은 우리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가르칠 것이다. 우리는 그를 위해 그와 더불어 고난을 당하며 그와 함께 영광에 참예할 것을 바라며 신뢰하지 아니할 수 없다(딤후 2:12).
2. 사랑은 크나큰 두려움으로부터 생기는 불쾌한 결과를 방지해 주거나 또는 제지해 준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18절). 사랑이 넘치는 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내 생각으로는 두려워하는 것과 불안해하는 것 혹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불안해하는 것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써 언급되어지고 또한 지시되었다(벧전 2:17; 계 14:7).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의 권위와 통치에 대해 지극히 높은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온전한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한편 죄책감과 복수의 감정으로 비롯되는 하나님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있다. 이러한 경우에 하나님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감정은 공포하는 한 마디 말로 대치될 수 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가장 선하며 우월하고 귀엽고 사랑할 만한 존재로 생각한다. 사랑은 하나님을 가장 선하신 존재로 생각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가장 귀한 존재로 생각게 하며 두려움을 내어쫓고 그 대신 우리 안에 기쁨을 이룩한다. 사랑이 상징하는 것만큼 기쁨도 따라 증가된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내어쫓는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성품과 언어와 서약 중에서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며 인간에 대한 공포심에서 온전히 해방을 받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진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의 사랑으로 승리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사실을 사도는 이와 같은 말로 재치 있게 언급하고 있다. 즉 형벌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내어쫓는다. 그 이유는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기 때문이다(18절). 두려움은 특별히 복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의 불안해하는 고통스런 감정이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 완전한 복종과 만족을 이루게 함으로, 형벌을 내어쫓는다. 이와 동시에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18절). 곧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나 염려는 우리의 사랑이 아직 온전한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다. 온전한 사랑을 간구하며 이를 이룩하도록 힘쓰자. 여기에 우리의 마음의 평정과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정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3.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의 기초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절). 그의 사랑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극과 동기가 되며 도덕적 근원이 된다. 사랑할 줄도 모르며 받을 수도 없던 우리를, 최초의 사랑의 행위자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의 사랑을 애타게 기대하며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피흘리시게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낮추며 우리와 화해하기를 원하셨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온 하늘과 땅들은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의 사랑은 우리에게 모든 풍성함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의 뜻(그의 사랑하시고자 하시는 자유 의지에 의하여) 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태어났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롭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아 알도록 선택함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그의 거룩한 사랑의 인을 쳐주셨다. 이는 주께서 우리의 마음이 그만을 향해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살후 3:4).
Ⅱ.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지고 있다.
1.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 안의 신앙 고백에 가장 부합되며 일치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이름과 집과 예배를 사랑하는 자로 자처하면서 사랑해야 할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이다"(20절). 이로써 그의 고백이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함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의해 쉽게 드러나고 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20절). 보이는 것이 심령에 미치는 바 영향이 크다. 곧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과 심령에 미치는 바 영향이 크지 못하다. 하나님에 대한 한계성은 그의 불가시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는 자신 안에 하나님에 대한 가시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인간)을 미워하는 자가 어떻게 근원적이며 불가시적인 하나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2.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에 가장 부합한 것이며 정당한 전제가 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절).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의 사랑을 확신시키도록 하셨다.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형제들은 하나님에게 기원을 두었고 그에 의해 용납된 자들이며 하나님이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이므로 하나님 안에서 다른 형제들도 사랑함이 마땅하다. 우리 믿는 형제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성품과 놀라운 특권이 주어졌고, 하나님은 우리들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형제도 또한 사랑해야 함은 당연한 의무가 아닐 수 없다.
성 경: [요일4:1]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저자 요한이 진술하고자 하는 주체로 수신자들의 관심을 전환시키기 위한 호칭이다. 요한은 본절 외에도 이와 같은 표현을 본장에서 두 번 더 사용하여 수신자들의 관심을 야기시키고 있다(7,11절, Brooke).
? 영을 다 믿지말고. - '믿지 말고'의 헬라어 '메...피스듀에테'(*)는 '진실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시험하라'와 연결되어 모든 영을 대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잘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시사한다.
?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타'(*)는 복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악한 자의 영이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언급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가리킨다(Marshall). 한편 '시험하라'는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Stott).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바울에 따르면 영들을 시험하여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특별한 은사이다(고전12:10).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하는 분별력을 가리킨다(Westcott). 요한은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스스로 영감을 받았다고 자장하던 이단자들을 염두에 두고 수신자들이 이들을 시험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함으로 무조건 따르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 본문은 수신자들이 영들을 시험해야 할 이유이다. '거짓 선지자'는 신약성경에서 '진실한 선지자'를 대적하는 자나(눅6:26; 벧후2:1), 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마7:15; 24:11,24; 행13:6).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은 종말론적 현상이다(2:18; 막13:22, Barker).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그리스도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나 교리로 미혹하는 자들로서(마24:11; 살후2:3; 계20:10)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유혹한다.
성 경: [요일4:2]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 '하나님의 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3절; 3:24, Stott).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하심을 의미한다. (2)혹자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B, Smalley). 이들은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나은 듯하다. 한편 '알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케테'(*)에 대해서 혹자는 명령법으로 해석하나(Law), 본서 어디에서도 명령법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Westcott, Smalley, Brooke). 요한은 본문네서 수신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신자들이 알고 경험했던 영적인 사실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있다(13절; 3:16; 5:2)
?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본문은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영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인정 여부이다.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공동서신 개론의 "공동서신의 이단 사상" 참조). 요한은 본절에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오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요이1:7에서 현재 시상으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1:1,2; 3:1; 5:1; 요1:12-14, Westcott).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이셨다(Marshall, Smalley).
성 경: [요일4:3]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 비록 '육체로 오신'이 생략되어 있다 할지라도 본문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반대로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거짓 영에게 지배를 당하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된 성령의 도움으로 성육신을 시인하는 것과 거짓 영의 지배를 받아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절대로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다(Law). 오직 양극만이 존재할 뿐이다.
?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투 안티크리스투'(*)는 헬라어 어순상 앞절의 '토 프뉴마 투 데우'(*, '하나님의 영')와 대조를 이루어 '프뉴마'(*, '영')가 생략되어 있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토 투 안티크리스투'가 거짓 영을 의미하나(Law) 문맥상 본문은 거짓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 즉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심을 부인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단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이제 벌써'는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종말에 출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했고(2:18) '이제 벌써'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함을 밝힘으로 종말의 긴박성을 암시하고 있다(Smalley). 한편 '세상에'는 1-6절 사이에 무려 6번이나 나타나며 모두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며 통제하는 곳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지칭한다.
성 경: [요일4:4]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 요한은 본문에서 다시 '자녀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수신자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그들을 이기었음을 확신시키고 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는 수신자들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세상과 연합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기었나니'의 헬라어 '네니케카테'(*)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승리가 과거에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효과가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Houlden). 이 승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리가 거짓임이 판명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본서에서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승리는 지식적인 면에서 거짓된 교리에 대한 분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통해서 거짓된 교리를 정복하고 있음을 시사한다(Smalley).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교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수신자들이 세상을 이긴 이유이다. '너희 안에 계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엔 휘민'(*)에서 '이'를 의미하는 '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3:20, Haas). (2)혹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2:14; 3:24; 요14:20,23, Westcott). (3)혹자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6절; 2:20,27; 요14:16,17; 16:13-15, Stott, Houlden). 이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가운데 역사하셔서 사단의 영향력 하에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며 그 결과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있는 이'는 사단이나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2:13,14; 3:12; 5:18,19) 그는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아니하고 세상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며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오직 세상에 속한 자들에 한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그 세력을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단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루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그 승리에 동참하기 때문이다(6절; 요16:33; 롬8:31, Stott, Calvin).
성 경: [요일4:5]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 '저희'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훈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킨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속한 고로'의 헬라어 '에크 투 코스무'(*)에서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세상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한다. 또한 '세상'을 지칭하는 '코스무'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복음과 반대되는 사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하던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상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그러한 사상에 미혹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치되는 당시 사상에 탐닉했고 그것에 빠져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려 했다.
성 경: [요일4:6]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 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절의 '아는'은 현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 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14:17; 15:26; 16:13, Marshall, Stott). (2)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하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단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청종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성 경: [요일4:7]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사랑하는 자들아'는 본서에서 6번 나타난다(1,11절; 2:7; 3:2,21). 이 호칭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도로서 수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서로 사랑해야 함을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사랑하자'의 헬라어 '아가포멘'(*)은 현재 시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요구임을 시사한다. 이 명령은 예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3:11; 요13:14-17,35).
?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 본문은 다음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와 연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근거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는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으로서 그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셨다(Westcott, Marshall, Barker).
?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는 사랑하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혹자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나(Bultmann)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Schnackenburg, Smalley). 한편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행위를 내포한다(3:18).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낸다(Law). 곧 행위를 동반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내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요일4:8]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메 아가폰'(*)에는 앞절의 '사랑하는 자마다'(*, 파스 호 아가폰)에 삽입되어 있는 '파스'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파스'가 생략된 것은 본절의 사랑이 개인적인 권면을 가리키는 앞 절과는 달리 일반적인 의미임을 암시한다(Smalley). 한편 '알지'의 헬라어 '에그노'(*)는 부정 과거로 현재 시상을 사용한 앞절의 '기노스케이'(*, '알고')와 대조를 이룬다. '기노스케이'가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본절의 '에그노'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전혀 알거나 경험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Marshall). 사랑하는 자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앞절과의 대조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본문은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보다 더 발전된 표현이다. 요한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심을 밝힌데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선언한다. 즉 이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 중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사랑임을 시사한다. 요한은 본서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행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한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 경: [요일4:9]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 '우리에게'로 번역된 헬라어 '엔 헤민'(*)에 대한 해석은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 사이에'(among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Stott). (2)혹자는 '우리 안에'(in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Westcott). (3)혹자는 '우리게게'(to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4)혹자는 '우리를 위하여'(for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Barker). 한편 '나타난 바 되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네로데'(*)는 '파네로오'(*, '나타내다')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요한은 '파네로오'를 예수의 사역(1:2; 3:5,8),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심(요21:1,14), 그리고 예수의 강림(2:28)에 사용하고 있다. 본절에서 사용된 부정 과거 '네파네로데'는 명확한 역사적 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음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성육신을 가리킨다(Law, Smalley). 요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현시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 '독생자'의 헬라어 '모노게네'(*)는 히브리어 '야히드'(*)를 번역한 것이다. '야히드'는 70인역에서 두 가지로 번역된다. (1)'사랑하는'(beloved)을 의미한다. (2)'유일한'(uni- que)을 의미한다. 본절에서의 '모노게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보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이 지속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신다.
?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 본문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나타낸다. '살리려 하심이라'는 인간이 전에 '죽은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시고 이루심으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셨다(3:14).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성 경: [요일4:10]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 '여기 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에스틴'(*)은 앞서 기술된 내용, 즉 9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3:16). 한편 '우리가...사랑한 것'(*, 에가페카멘)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시상의 변화가 있다. '에가페카멘'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에가페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적인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시사하는데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9절). 요한은 이러한 시상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사랑이 지속적이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Law, Smalley). 반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되어 사랑의 궁극적인 기원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Hou- lden).
?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본문은 앞 절의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와 병행을 이룬다. 9절에서의 '보내심'(*, 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인 반면에 본절의 '보내셨음이니라'(*, 아페스테일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부정 과거 시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구현된 특별한 속죄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화목제'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몬'(*)은 본래 '달래는 것'(propiti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의미는 단순히 성난자를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속죄(expiation)를 전제로 한다(Dodd, Westcott).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속죄함이 없이는 죄로 인해 형성된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절의 '힐라스몬'은 '속죄'(expiation)의 의미와 '화목'(Propitiation)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제로 보내심으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9절, Barker, Stott).
성 경: [요일4:11]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은즉'의 헬라어 '에이'(*)는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이다.
성 경: [요일4:12]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본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유대적인 사상으로(출33:20,23; 신4:12)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본문에 대해 혹자는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그러나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은 수신자들 사이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기 때문이다(Schnackenburg, Barker). 영지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아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사랑의 계명을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리스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14절; 1:1-3; 요1:18; 12:45; 14:9; 17:24).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 요한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았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격하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비록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행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품 속에 독생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사랑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자신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거하시고'의 헬라어 '메네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지속적인 친근한 관계를 나타낸다(요15:1-10). 하나님의 내주와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메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내주와 지속적인 관계로 인해서 이루어 진다(Stott). 즉 하나님의 내주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랑의 행위의 근거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그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아우투'(*)에 대한 이해는 그 안에 나타난 속격과 관련하여 세 가지가 가능하다. (1)혹자는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Brooke, Wengst). (2)혹자는 목적격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odd, Lewis). (3)혹자는 속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Schnackenburg, Law).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온전히 이루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테텔레이오메네'(*)는 완료 시상으로 지속적인 성취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랑의 성취에 대한 요한의 주장은 2:5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요한은 2:5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암시한다(Smalley).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서, 즉 인간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Barker, Westcott, Stott).
성 경: [요일4:13]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는 '호티'(*, '왜냐하면')로 시작하는 절로서 본문 하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의 근거가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1-3절; 고전12:3).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한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즉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할 수 있도록 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3:24). 한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내는 '거하고'(*, 메노멘)와 '아느니라'(*, 기노스코멘)는 현재 시상이다. 이 현재 시상은 믿는 자가 경험한 내주의 확신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이 '기노스코멘'을 사용한 것은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성령을 공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며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제함으로써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한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이러한 교제, 즉 상호간의 내주(內住)는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을 가리킨다(3:24; 요3:5,6; 갈5:6).
성 경: [요일4:14]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 아들의 칭호인 '구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라'(*)는 예수께서 승귀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2:22,23)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음을 시사한다. 이 역시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그들은 구원을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죄보다는 무지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육체로 오신 예수께서 구주이시며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언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있다(2,10절; 1:7; 2:2; 5:6, Schnackenburg). 한편 '보내신'의 헬라어 '아페스탈켄'(*)은 9절과 같이 완료 시상이다. 이는 과거에 아들을 보내신 성육신 사건과 그의 구속 사역의 효력이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Stott).
?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을 직접 지켜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ooke, Schnackenburg, Wengst). (2)혹자는 기본적으로 사도들을 의미하며 그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Westcott). (3)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애를 지켜 본 목격자들과 연합한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Dodd).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할지라도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보았고'(*, 테데아메다)는 완료 시상이며 '증거하노니'(*, 마르튀루멘)는 현재 시상이다. 비록 둘 사이에 시상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과거에 보고 응답한 믿음과 현재에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연속적이며 지속적인 효과를 시사한다. 성령을 수여받은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12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되신 예수를 알게되며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깊이를 더해 갈 뿐만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요15:26).
성 경: [요일4:15]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 '누구든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가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신들만이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하나의 전제 조건,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외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한편 '시인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세'(*)는 부정 과거이다. 영역 성경에서는 이 과거 시상을 표현하기 어려워 두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1)미래 시상으로 번역한다(shall confess, KJV). (2)현재 시상으로 번역한다(acknowledges, NIV, NEB; confess, RSV). 그러나 본문의 '호몰로게세'는 미래 시상이나 현재 시상이라기 보다는 비록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을지라도 공적으로 고백하는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봄이 훨씬 더 타당하다(Stott, Smalley).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내주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13절).
?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본문은 13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처럼 상호간의 내주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고 확신하게 된다(3:1,2).
성 경: [요일4:16]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본절이 속한 단락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절이 11-15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본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Marshall, Schnackenburg). (2)혹자는 앞절과 연결되어 11-16절까지 한 단락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Law, Stott, Bark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문맥상 13,15절에서 언급된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진술이 본절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텐 아가펜 헨 에케이 호 데오스 엔 헤민'(*)은 문자적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사랑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Law, Marshall, Westcott, Smalley). 한편 '알고 믿었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카이페피스튜카멘'(*)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사도들은 물론 모든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미 과거에 경험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알고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다. 요한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지하는 믿음에 달려있음을 선포하고 있다(9,10,14절).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본문은 8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주장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는 자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속성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 본문은 13,15절에서 전술된 바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보다 발전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며(13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 성취된다(15절).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나타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Smalley, Dodd).
성 경: [요일4:17]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이로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가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문 다음에 언급되는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2)혹자는 16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Marshall).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본문은 앞절과 이어지는 단락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 '사랑'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2)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tott). (3)혹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aas). (4)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Houlden). 이러한 네 가지 견해 중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2:5에서 온전히 성취된 사랑과 연결되어 '순종'으로 묘사되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담대함이 믿음과 결과로 나타난다(요3:18; 5:24). 이러한 사실은 사랑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지속적인 내주를 이루며, 그 내주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됨을 시사한다. 즉,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이룬다(Smalley, Westcott).
?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호티 카도스 에케이노스 에스틴 카이 헤메이스 에스멘 엔 토 코스모 투토). - 이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그가 어떠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1)예수의 영원한 순수성, 사랑, 의로우심,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한다(Brooke, Westcott, Haas). (2)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유혹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할 것을 암시한다(Barker, Smalley, Stott).
성 경: [요일4:18]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한다(행9:31; 롬3:18; 고후5:11; 7:1; 엡5:21). 그러나 본절에서의 '포보스'는 앞절의 담대함의 반대 개념으로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가리킨다(요19:38; 20:19; 롬8:15). 이러한 '포보스'는 사랑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해질 수 있다. 비록 죄는 두려움을 유발시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소유한 자들에게 사랑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본문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형벌'에 대해서 혹자는 마지막 날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며(Schnackenburg), 혹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Bultmann).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Haas, Marshall). 즉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마지막 날에 죄로 인한 정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갖는 담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반의 접속사인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데'는 본문이 17절 상반절의 내용, 즉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진술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로 인하여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Westcott, Law). 그러기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약 누구든지 담대함이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성 경: [요일4:19]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요한은 10절을 반복하여 진술함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20,21절에서 형제 사랑의 문제로 요약하고 있다.
? 우리가 사랑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목적어가 없다. 목적어의 부재로 인해 '사랑'의 대상인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tott, Houlden). 이들은 앞절의 진술과 연결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2)혹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이들은 20,21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된 것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3)혹자는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전후 문맥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어느 하나를 제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호티'(*, '왜냐하면')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거를 나타낸다. '사랑하셨음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센'(*)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시상은 전순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을 가리킨다(9,10절, Law, Smalley).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삶은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성 경: [요일4:20]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 '누구든지'의 헬라어 '에안 티스'(*)는 본서에서 거짓 이단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 방법이다(1:6,8,10; 2:4,9). 본문 역시 수신자 공동체 내에 팽배해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공동체 내에서 신비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고 다른 일원보다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져 타인을 돌보지 않았다. 요한은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게 됨을 강조한다. 여기서 '형제'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7,11,19절). 즉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만을 향한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거짓말하는 자니'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Barker, Smalley). (1)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며, 그 진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이다. (2)거짓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자들이다.
?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문이 상반절에서 언급된 '거짓말하는 자'의 근거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거짓말쟁이인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12절). 즉 그리스도인은 타인에 대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
성 경: [요일4:21]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본절의 헬라어 본문은 '카이'(*, '그리고')로 시작하여 본절이 20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요한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Stott).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막12:29-31) 요한은 이 계명에 대해 본서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으로 진술하고 있다(3:23; 요이1:5,6). 한편 '주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illiams, Stott, Westcott). (2)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며 상호보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여기서 요한은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한다(신 10:20; 잠 1:7). 더욱이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도 하였다(시 2:11). 그러면 성경의 교훈과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이 구절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사랑과 두려움은 우리의 하나님과 관계에서 모순인가? 성경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구절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구절이 함께 있다면 그 두 구절이 서로 모순이 아닐 것이다. 우선 여기서 이 구절의 뜻부터 알아보자.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사랑에는 두려워 할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둘은 기름과 물처럼 상반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두려워할 수 있으나(참고, 히 5:7) 사랑으로 그에게 접근하면서 동시에 두려움으로 그에게서 숨을 수는 없다(참고, 롬 8:14-15; 딤후 1:7).1)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최선의 해석은 하나님과의 관계일 경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런 상호 사랑의 관계에서 두려움의 가능성은 없다. 사랑의 완전한 관계가 있는 곳에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모든 두려움을 쫓아낸다. 실제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관계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에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직 그의 마음에 충만하지 않아서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2)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정죄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기서 두려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정죄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켰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완전한 구원을 기대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옛 계약 아래 있던 신자들에게만 아니라 새 계약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도 해당된다(눅 1:50; 행 10:2, 22, 35; 13:16; 참고, 9:31; 고후 7:1; 엡 5:21; 6:5; 골 3:22; 벧전 1:17). 역시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라고도 하였다(고후 7:15, 엡 6:5, 빌 2:12). 그러나 이 경우들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요한일서 4:18이 말씀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존경의 경외와 심판의 두려움 사이를 구분해야 한다.3) 그것은 구원받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자세이다. 그것은 이사야의 경험과 같은 것이다(사 6:1-5).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 자비와 의로우심 그리고 창조주의 영광과 엄위하심에 부딪히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경외심은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런 선한 두려움이 우리를 악에서 떠나게 하며(욥 28:28), 그의 계명을 행하게 하며(시 111:10), 악을 미워하게 하기 때문이다(잠 8:13).4)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원토록 그를 영화롭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가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와 다른 것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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