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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요한1서 3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5. 19.

메튜헨리 주석

 

아들을 삼으심 (요한 1서 3:1-3)

 

그리스도에게서 나고 이로써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의 권위를 보여 준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또 다음과 같은 찬양과 칭찬을 보여주고 있다.

Ⅰ. 놀라운 축복의 샘인 은총을 찬양하고 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주셨는가?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하나님은 모든 자들을 아들로 삼으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불러 형제로 삼았고,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였다. 본성적으로 죄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으며, 사실에 있어서 불의와 불순종 그리고 배은망덕한 자식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한 아들이라 일컬어질 수 있게 된 것은 영원한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때문이 아닌가! 거룩하신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며 또한 우리를 그의 아들이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심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닌가?

 

Ⅱ. 믿는 자들이 받는 존귀함은 세상 사람들의 인식밖에 있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말한다. 불신자들은 그들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하고 있다"(1절).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기쁨과 행복을 모른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세상과 이 세대의 일반적인 재난을 겪고 있다. 즉 다른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 임한다. 오히려 그들은 더 큰 슬픔을 맛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신앙적인 세상은 보는 대로 행하며, 그리스도인들의 권위와 특권, 그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기쁨과 명예로운 이름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은 이 가난하고 비천하며 경멸을 당하는 자들이 장차 하늘에서 사랑받을 자들이며, 머지 않아 하늘에서 길이 거하게 된 자들임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은 그다지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주님도 그들 이상으로 몰라주는 가운데 살았는데 "이는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절). 하나님의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번 거하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를 세상은 알지 못했다. 유대 세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그들과 한 혈통을 이어받았고 그들의 땅에 거하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가 백성에게 왔으나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그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2:8). 그들이 그들을 알아주지 않는 나그네의 땅에 거하며 또한 그들의 주님이 그들 앞에 그렇게 취급을 받고 계시는 이상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야 마땅하다.

 

Ⅲ. 다음으로 사도 요한은 그들의 위엄과 권위에 대한 확실한 계시를 기다리고 있는 제자들을 칭찬하고 있다. 그들의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러한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이므로 너희는 우리에게도 사랑스러운 자들이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이다"(2절). 우리는 중생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얻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심으로 귀한 이름과 능력 그리고 아들의 기업을 차지할 권리를 얻었다. "이러한 영광은 모든 성도의 것이다."

 

1. 부자지간에 나타날 축복에 대한 계시는 나타나 있지 않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다"(2절). 아들과 양자로 삼으심에 대한 영광은 내세의 것으로 미루어졌고 또한 미래를 위해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영광에 관한 설명은 지금 여기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아니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믿음으로 행하고 또한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

 

2. 적당한 위엄과 특권의 신분 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오실 때 나타나게 된다. 즉 그가 나타나시게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알게 된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만일"이라고 번역되는 바 전치사 eva.n-즉 때라는 말로 생각될 수 있다. 즉 그 이유는 전치사 ~a는 히브리어로 휘트비(Whitby) 박사가 말하는 대로 "때"로 번역해야 한다. 때때로 eva.n은 o]tan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어느 구절에서는, 더구나 여기에서는 o]tan으로 읽혀지는 바 "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 3절의 경우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예비하게 된다면)이란 말은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한 다음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 또는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도록 너희를 이끌리라"(paralhfomai)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적합할 것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교회의 머리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의 지체들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며, 또한 아버지와 함께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의 계시를 믿음과 소망 그리고 진실한 기대 속에 기다려야 한다. 피조물들도 완전해지기를 기다리며 "피조물의 기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임과 같이 그들은 기다려야 한다"(롬 8:19).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들의 하나님과 동일한 점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즉 영광과 권능과 존귀에 있어서 "그들은 그와 동일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더러운 몸은 그의 영광된 몸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생명과 빛 그리고 축복으로 충만 되어질 것이다. 그들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그들도 그와 함께 영광에 임하게 될 것이다"(골 3:4). 그들에 대한 그들의 동일함은 그를 본 것으로부터 언급되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다." 그들의 동일은 그를 보게 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진실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이 보는 것처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하늘에 있는 그들과 같이 그의 계신 그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악한 자는 그의 찌푸린 얼굴과 위엄에 대한 공포, 그리고 무서운 복수를 감행하려는 모습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동일함은 하늘에 복있는 자처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를 보게 됨은 그들이 그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위할 수 있는 동일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를 받게 된다.

 

Ⅳ. 다음으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이루시는 성결함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께서 거룩하시고 깨끗하심을 안다. 그는 어떠한 죄나 불결함도 용납할 수 없는 보다 정결한 마음과 눈을 가지고 계신다. 그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세상과 육신, 그리고 죄로부터 그의 지고한 순결성을 탐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곧 그들은 은혜와 성결함에 있어서 성장해야 한다. 단순히 주님이 그들에게 그렇게 명령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새로운 성품이 이렇게 하도록 이끌며 그들의 하늘에 대한 소망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며, 강요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대제사장이 거룩하고 흠이 없으시며, 정결하심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 하나님과 아버지가 귀하고 거룩하신 분임과 모든 사귐은 순수하고 거룩하며, 그들의 유업은 빛나는 성도의 것임을 안다. 그것은 죄와 더러움에 치우쳐 있는 소망과는 상반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된 것처럼, 또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되어야 한다. 소망으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소망에 대해 성결해져야 한다. 더러운 욕망과 정욕에 만족을 주도록 허락하는 것은 위선자의 소망이요, 하나님의 아들의 소망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표시 (요한 1서 3:4-10)

 

 

하늘의 소망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날,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사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신자들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할 것을 강조한 다음 사도 요한은 죄에 대한 격렬한 논증과 어두움에 대한 불결하고 열매가 없는 일들에 대한 모든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Ⅰ. 그는 죄의 본성과 그 죄의 본질적인 악성에 대해 추론하고 있다. 죄는 거룩한 율법에 대해 상반되는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또는 죄를 짓는 자마다 흉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며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나니) 그 이유는 죄는 불법이며 무법한 것이기 때문이다"(4절). 죄란 세상을 선하게 통치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으며, 인간에게 온전한 성품과 기쁨과 평안의 길을 보여주며, 거룩한 품성과 정결함의 표상인 율법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죄를 범하는 것은 거룩한 율법과 권위를 저버리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Ⅱ. 이 세상에 주 예수께서 오신 목적과 의도는 죄를 없이 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5절). 그는 무서운 형벌과 율법의 저주 아래 자신을 복종시키며 고난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거룩한 율법을 입증하고 완성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하며 그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죄를 사하시며 우리 안에 새로운 성품을 이룩함으로(그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정결케 될 수 있으므로) 죄가 없으신 자신의 모범을 따라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위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바라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최상의 정결을 유지하는 가운데 그와의 교제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이 무엇임을 알고 또한 이를 숙고해야 한다. 즉 그가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다. 곧 너희가 아는 대로(지식은 깊고 실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하고자 오신 것이다.

 

Ⅲ. 사도 요한은 죄와 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크나큰 분수령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6절). 여기에서 죄를 짓는다는 말은 죄를 범한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8,9절). 그리고 죄를 범한다는 것은 죄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행치 않게 된다. 주 예수와의 생명적인 연합이 심령과 성품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권세를 깨뜨린 것과 같이 인간의 삶과 행위에 있어서 죄의 통치와 만연을 방지한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표현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즉 죄를 짓지 않는 자는 순종하며 신실하고 올바르게 그의 생활에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일들을 행한다"(22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와 함께 그들의 언약 안에 거하는 자들이며 결과적으로 죄를 경계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강한 빛과 그의 지식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죄를 진자들은(죄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며(그리스도께 대한 건전한 복음적인 식견이 그의 마음속에 박혀 있지 않는 사람들이며) 그를 알지도 못하며, 그에 대한 아무런 경험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라고 결혼 지을 수밖에 없다. 죄에 대한 실제적인 부정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 계속적인 관계와 구원의 지식에 대한 크나큰 확증이 된다.

 

Ⅳ. 사도는 죄의 행함과 의로운 상태는 모순된 것임을 암시하면서, 의를 행함과 의로운 상태에 대한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것을 추리함은 크나큰 속임수이다.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라. 너희의 새로운 빛과 기독교를 수락함을 찬양하며 너희의 지식, 신앙 고백, 그리고 세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관심과 성실함으로부터 면제함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기 쉽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는 일에 경계하라. 의를 행하는 자만이 의로운 자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마태복음 5장 1절의 말씀대로 성서중 몇 군데서 나타난 바 의로움만이 정당하게 신앙으로 간주되어질 수 있는데, 의를 행함은 믿음을 위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베드로 전서 3장 14절에 "의를 위하여, 신앙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는 말씀이라든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말씀 가운데도 교육한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을 의미하고 있다. 다음으로 의를 행함은 죄를 행하며 범하는 것과는 특별히 반대적인 면에 놓이게 된다. 즉 신앙적인 것을 행하는 자는 의로운 자다. 그는 어느 점으로 보든지 의로운 자다. 그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며 올바른 자다. 신앙의 실천은 하나의 통일과 양심의 원칙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자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에서 나타난 바 죄의 용서와 의로운 삶에서 이룩되는 의를 소유한다. 또한 그의 강림하심을 바라는 자들에게 이룩하신 그의 언약과 약속에 따라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는 의의 면류관을 차지하게 된다. 그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얼마간 의로와 졌으므로 거룩한 법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에 그리스도와 함께 비교적 의로와진 상태에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Ⅴ. 사도는 죄인과 마귀의 관계를 언급하고, 마귀에 대한 주 그리스도의 의도와 사명을 말하고 있다.

1. 우선 죄인과 마귀의 관계를 알아보자. 다른 곳에서 죄인들과 성도들을 구분하는 것처럼(비록 성도들도 넓은 의미에서 죄인이라고 불려지지만) 여기서도 "죄를 행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간주된다. 그의 죄된 성품은 마귀에 의해 영감을 받으며, 또한 마귀와 뜻을 같이 하고 그를 기쁘게 한다. 그는 마귀와 그 일당의 유익을 도모하며 그 왕국에 속해 있다. 죄의 주동자와 후원자와 시행자가 바로 마귀가 인간을 태초로부터 죄로 이르는 유혹자이며 여기에서 사도가 언급한 바를 알아보자.

 

2. 주 그리스도의 목적과 사명은 마귀와 더불어 대항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함이다"(8절). 마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멸하려고 계획하며 힘썼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를 대항하여 거룩한 싸움을 싸웠다. 그는 마귀를 정복하고 섬멸키 위하여 이 세상에 가르쳤을 입고 오셨다. 그는 죄를 완전히 파멸시킬 때까지 죄를 흩어 약화시킬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음을 잊지 말자.

 

Ⅵ. 사도는 죄의 재기와 폐기를 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것은 내적으로 새로워짐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품의 거룩한 통일성과 방향을 회복하게 만들었을 의미한다. "죄를 짖지 아니하는 자"는 그의 새로운 성품과 영에 대해 상반되고 불의나 불순종을 행하지 아니한다. 사도 요한이 첨가해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하기" 대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빛과 능력으로 거하기 때문이다(베드로 전서 1장 23절의 말씀대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하신 말씀과 같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즉 배자(胚子)와 같은 상태에 있는 거룩함의 원리가 그 안에 있다. 새롭게 하는 은혜는 하나의 살아있는 원리다.

 

종교는 그 기원에 있어서 하나의 기술이 아니었으며 습득된 기교나 기술이 아니다. 하나의 새로운 본성이다. 이로써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죄된 행위를 저지를 수 없다는 말은 현명한 해석자에게는 난해한 것으로 취급된다. 죄를 고백함이 우리의 의무로 나타난 1장 9절의 말씀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그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특권은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사도가 말한 바 "저가 범죄치 못한다"는 견해에서 볼 때 분명히 "죄를 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죄의 길을 따라 행할 수 없다. 성도라든가 하나님의 종과는 정반대 되는 죄인이라 명명할 만큼의 죄는 지을 수 없다. 또한 그는 비교적 하나님으로부터 나기 이전 상태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죄를 지을 수 없다. 이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금지 내지는 배제되어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1. 그의 마음에는 죄의 불의함과 악성을 드러내 보이는 빛이 있다.

2. 그의 심령 속에는 그로 하여금 죄를 증오하고 미워하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

3. 죄악된 행위의 힘과 견고성을 파괴할 만한 근원적인 영적 원리 또는 원동력이 존재한다. 이러한 근원적인 영적 원리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의한 절대적인 능력에서 비롯되거나 또는 마음과 영혼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죄악된 행위에 동조하지도 않는다. "영은 육체를 거스린다." 그러므로 죄에 관해서는 "이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서 중에는 인간의 죄가 언급되어 있지 않는데, 다만 마음과 영혼의 경향과 구조는 죄와 대치된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4. 죄를 지었을 경우 죄에 대한 수치심과 후회하는 감정이 있게 다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범죄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성적 또는 도덕적 인간의 무능함을 깨닫게 된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종교적으로 선한 일을 수행할 수 없다. 한편 중생한 사람이 범죄할 수 없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죄지을 수 있는 능력에 억제와 금지(흔히 우리가 말할 수 있듯이)가 가해진다. 이러한 억제와 금지는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해 은밀하게 또는 사려 깊게 거스리도록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흠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일컬어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농담을 하지 않으며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며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란 말씀이 있다. 분명히 죄된 생활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자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Ⅶ.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식별하고 있다. 그들은 객기 특히 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게 된다"(10절). (고전적인 식별 방법에 의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손과 뱀의 자손이 있다. 뱀의 자손은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1. 신앙에 대한 태만으로 뱀의 자손임을 드러낸다. "의를 행치 않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등한히 하며 무관심 하는 자, 즉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로움이나 혹은 하나님께 그의 의무를 시행하는 것인데 누구든지 이를 의식적으로 시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요," 반대로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 마귀는 불의한 자 또는 불신앙인들의 아비다.

 

2.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함으로 그들이 밤의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또한 그리스도로 인해 사랑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 경멸하며, 증오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그들 속에 아직도 뱀의 본성을 머물게 하는 자들이다.

 

 

형제애(1) (요한 1서 3:11-13)

 

Ⅰ. 사도 요한은 마귀의 자녀의 표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사랑의 탁월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실제적 기독교의 기본적 원리를 이루고 있는) 소식 (사명 또는 책임)이니라"(11절). 우리는 주 예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귀히 알고 결과적으로 그 사랑의 대상인 모두를 사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Ⅱ. 사도는 이러한 사랑에 상반되며 형제를 미워하는 모든 악의와 가인의 행위를 저버리도록 하기 위한 기회를 포착하고 있다. 가인의 시기심과 악의는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필히 배제되어야 한다.

 

1. 가인은 최초의 뱀의 자손임을 보여주었다. 최초의 인간의 맏아들인 그는 악한 자편에 있었다. 그는 마귀를 따르고 그를 본받은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2. 그의 악의는 제지를 받지 하니했다. 곧 그의 악의는 인간이 지구상에 가장 희소할 때 최초로 형제간의 살인을 계획하고 성취하도록 했다. "가인은 그의 아우를 죽였다"(12절). 제멋대로 행해지는 죄는 한계를 모른다.

 

3. 악의가 그 안에 마귀를 이끌어드림으로써 그의 아우를 죽이게 했다. 가인은 보다 우월한 제사를 드린 아벨에 대해 분노를 발했으며, 하나님과의 우호 관계에 있는 아벨을 시기했다. 이로써 그는 형제를 살해했다.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12절). 악의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러러보며 모방해야 한 것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도록 자극한다.

 

Ⅲ. 선한 사람이 푸대접을 받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13절). 뱀의 성품이 아직도 세상에 남아 있다. 즉 거대한 뱀이 마치 하나님처럼 자신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연인의 후손인 당신들을 뱀이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형제애(2) (요한 1서 3:14-19)

 

사랑하는 사도 요한은 비로소 거룩한 사랑에 대해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마치 물에 뛰어드는 자처럼 강렬한 논증을 전개하며 사랑의 실천을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Ⅰ. 사랑은 복음적인 칭의(justification)와 생명의 상태로 옮기었다는 표시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14절)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식이요 죽음의 상속자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여기에서 복음은 계약 또는 약속을 뜻한다.) 우리의 상태는 내세를 지향하도록 변화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었고 사망의 죄의 법에서 생명의 법으로 옮기었다. 이러한 변화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요 3:36). 우리는 지금 놀라운 상태로 변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 간 줄을 알거니와"(14절)라고 하신 말씀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된 상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한 확신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의 표시로 생각할 수 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일반 종교에 있어서 파당을 이룩하는데 대한 열심이나 자기와 동일한 교파에 속한 자들이나 자신의 감정에 맞는 자들을 위한 애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 여기에서 말하는 형제애는 인류를 위한 일반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기독교적인 사랑의 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한 인류 사회 안에서의 보편적인 범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인간은 원칙적으로 사랑을 받아야 한다.

 

(1) 첫째,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탁월한 걸작이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놀라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인자에 대한 심판을 가하시는 이유는 인류에 대한 증오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이다"(창 9:6).

 

(2) 둘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the Gens human)는 타락한 천사와 구원받은 백성과 구분되어 있는 하나의 존재 또는 구세주가 계획하고 준비했으며, 그들에게 부여한 바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한 이 세상은 마땅히 우리들에 의하여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 사랑은 부르심을 입지 못한 어두운 세상의 중생과 구원을 위한 간절한 간구와 기도와 사도로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내 마음의 소원과 기대는 그들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이 사랑은 원수에 대한 모든 의무적인 사랑을 포함한다.

 

2.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에 의하여 구원받고 의로와졌으며 성화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로의 지체서의 신앙적 공동체와 일반 교회 더 나아가서 교회의 머리(그리스도)를 위한 각별한 사랑을 내포한다. 이 사랑은 특별히 인격적인 사귐과 피차간 신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일반적인 교회의 성도들에 대해 행해지며 작용한다. 성도들은 그들을 사랑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 스스로가 이룩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들 안에 와 그들을 위해 이루어진 사랑의 가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룩되는 결과이며 이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과정의 표가 된다.

 

Ⅱ. 반대로 형제를 미워함은 죽음의 상태와 사형 선고 아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14절). 그는 아직도 율법의 저주와 형벌 아래 있다. 이 사실을 사도는 명확한 삼단논법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 줄을 알아야 한다"(15절). 한편 14절의 표현대로 "사랑치 않는 자는 사망에 거하는 자요, 그의 형제로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 즉 사람에 대한 미워함이 더하는 것만큼 이는 생명과 복지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며 자연적으로 생명과 복지의 종식을 바라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가인은 그의 아우를 미워함으로 종국에는 그를 죽이고 말았다. 미움은 불쌍한 형제에 대한 연민의 정을 막아 버리며 이로써 그들에게 죽음의 슬픔을 안겨 준다. 형제를 미워함은 어느 때든지 그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추한 평판과 비난을 가하며 종국에는 핍박과 무력을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적 경향과 악하고 맹렬한 정욕을 알고 있으며 한편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온전함을 알고 있는 자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랠 필요가 없다. 마음의 기분과 성향에 따라 살인을 행하는 자는 그 안에 영생이 거할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은 "육신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자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롬 6:6).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이 말씀은 의를 말씀하신 구세주에 의해 주어지는 영생의 내적인 원리의 소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말은(14절) 상대적 변화를 의미함이 아니라 중생으로 이룩된 실제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14절에 언급된 "사망에 거하느니라" 하는 말은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바 영적인 죽음 안에서의 존속 또는 부패된 본성 안에 거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죽음이나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은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씻김을 받는 것은 죄의 부도덕성과 그 힘으로부터 씻김을 받는 것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이상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은 영생의 내적인 원리를 소유하거나 혹은 소유하지 못함에 따라 증명되거나 혹은 반증될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Ⅲ.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모범적인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절).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놓았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씀이 하나님이시었고, 그가 우리를 위해 육신이 되셨다"고 선포하는 한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이 말씀이신 하나님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이다. 생명을 취하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 그 생명을 내어주셨다. 여기에 그 자신의 보혈로 하나님의 교회를 지속하실 거룩한 사랑에 대한 겸손과 이적과 신비가 있다. 하나님이 이처럼 지극히 사랑하신 그들을 우리도 사랑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Ⅳ. 강렬한 사랑의 모범과 그 사랑의 동기를 제시한 사도 요한은 이러한 기독교의 사랑의 성격과 열매는 어떤 것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1. 그 사랑은 교회를 위해 우리로 하여금 죽기까지 고난을 자처하게 하는 최고도의 열렬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라는 말씀과 같이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진흥을 위해 우리보다 더욱 봉사적인 자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우리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마땅하다(16절).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4).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자제하는 생활을 해야 할까! 초연한 생활을 좀더 나은 생활을 하도록 얼마나 준비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좀더 나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2. 그 다음으로 형제들의 궁핍에 대해 동정적이며, 인색하지 않으며 친절해야 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도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17절). 부요한 사람들의 자비와 사랑의 실현을 위해 믿음의 자비와 사정의 실현을 위해, 믿음의 형제들이 가난을 자처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믿는 형제들로 하여금 가난한 성도들에게 자선을 베풀도록 세상의 재물을 쓰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세상의 재물을 소유한 자들은 좀더 하나님과 그들의 선량한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재물을 나누어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형제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곧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곳에는 결코 하나님께 대한 참 사랑도 없다.

 

3. 나는 다음절에서 최하위의 사랑을 암시하려 하였으나 사도 요한은 이 마지막 말만으로, 자선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낮은 사랑임을 암시함으로 나의 의도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또 다른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모든 것에 진실하고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칭찬과 아첨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이루지 못하며 거룩한 애정의 신실한 표현과 사랑의 봉사와 수고만이 그리스도인을 이루게 한다.

 

Ⅴ. 이러한 사랑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의 신실성을 증명해 주며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부여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19절). 믿음 안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이루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다. 견고한 자리에 이른 자들은 하나님께 대해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세상의 비난과 책망을 들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호소하게 된다. 기독교의 진리와 완전에 대한 지식에 이르며 또한 내적인 평안을 얻는 길은 피차간 사랑에 얽히어 믿음의 형제에게 사랑의 수고를 베푸는데 있다.

 

 

양심의 증거 (요한 1서 3:20-22)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확증과 진실한 신앙의 특권이 있음을 암시한 다음 사도 요한은 계속 몇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Ⅰ. 양심의 심판과 그 권위를 말하고 있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20절).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영혼과 기질 그리고 행위를 알 수 있으며 이로써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고 스스로 생각하며 분별할 수 있는 고상한 최상의 능력이다. 이것은 양심, 혹은 도덕적 자아 의식의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은 증인과 심판자 또는 재판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한편 이 능력은 비판과 변호도 하며 정죄와 심판도 한다.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이 주어진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며, 섬세하게 심층부 다시 말해서 인간의 내면과 비밀한 사건들을 탐색하는 하나님의 등불이요, 하나님에 의해 밝혀지는 발광체이다(잠 20:27). 양심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판을 수행하고 하나님을 대행하는 역할을 행한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다"(벧전 3:21). 하나님은 재판장이시다. "우리 믿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의 마음 보다 크시고 능력과 판단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과 양심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일까 보냐?" 그러므로 법정의 결의와 판단은 곧 하나님의 결의와 판단이시다.

 

1. 만일 양심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비교할 수 있겠는가?"(20절)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보다 더 훌륭한 증인이요, 우리들에 대해 양심보다 더 많은 것을 아신다. 그는 양심보다 더 위대한 재판장이시다. 그는 최고의 재판장이므로 그의 판단은 정당한 것이며, 마침내 온전하게 수행될 것이다. 이런 점은 "나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 다른 사도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일치한다. "나는 나의 직무와 사명에 있어서 어떠한 간교도 의식하지 못하며 불성실함도 인정하지 못한다. 이로써 나는 의롭지 못하다. 내가 서며 넘어지는 일도 내 양심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내 양심의 정당성 혹은 의로운 판결로 당신과 나 사이의 논쟁을 종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이럴 경우 당신은 양심의 판결에 호소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 양심의 결정에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가장 온전하게 결정적으로) 판단하실 이는 당신과 내가 끝까지 따라 가야 할 주님뿐이시다"(고전 4:4).

 

2. 만일 양심이 우리를 무죄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 내리실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21절),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시고 마지막 날에 우리를 죄없다 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주제넘은 사람들은 "나는 심판의 날을 기쁨으로 맞이하리라. 나의 마음은 나를 정죄하지 아니하므로 또한 하나님도 나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라고 확신한다"고 할 것이다. 앞의 경우와는 반대로 경건하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나의 마음과 양심은 나를 책망하오나 나는 진정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야만 합니까?"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은 법관의 판결 같은 것으로써 헤아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즉 무지와 오류, 편견, 편파, 그리고 선입관은 재판석의 재판관이나 그의 수행원(마치 마음과 기호, 정열, 성격, 기질 혹은 혼돈된 두뇌 같은 것)과 거짓된 판결을 내리는 배심원의 과오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과오는 재판관 즉 자기 의식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양심(sunei`dhsivj)의 과오가 아니다. 무지와 실수의 행위는 자기 의식의 행위가 아니라 모종의 오류를 범하게 하는 힘에 의한 것이다. 양심의 판정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본질과 과정에 따라 이룩된다. 그러므로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호소하며 열심히 주의를 집중하자.

 

Ⅱ.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향한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특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늘과 하늘의 보좌를 동경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간구는 하늘에 상달된다. 즉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는다"(22절). 간구하는 자들은 보좌의 존귀와 영광 또는 그들 자신이 의도한 영적 선물에 위배되는 것은 구하지도 않으며 구하려는 의도도 전혀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구한 바 선한 것들을 받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들은 그에 대해 합당한 것이며 그들의 자격과 실천력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구한 바 좋은 것들을 받게 되리라는 예측을 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22절). 순종의 사람들은 축복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응답의 약속을 받고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자신을 기쁘게 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시 64:18; 잠 28:9).

 

 

계명의 준수 (요한 1서 3:23,24)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들의 의무로써 계명을 지키는 일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언급한 사도 요한은 또 다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Ⅰ. 기본적이며 요약된 계명이 어떤 것임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할 것이니라"(23절).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아들과 기름 부음을 받은 구세주로서의 그의 인격과 사명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 그가 어떠한 분임을 인식해야 한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요 6:40).

2. 우리들의 판단과 양심 그리고 확신과 지각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택하심을 받은 자로서 그를 인정해야 한다.

3. 또한 그를 믿기 위해서는 그에게 전적으로 동의하고, 구세주로서 또한 하나님께 우리를 회복시킬 자로서 그를 따라야 한다.

 

4. 그가 구속의 사명을 온전하게 이루실 것을 믿고 그에게 응답해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라"(시 9:10). "이를 인하여 내가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니라"(딤후 1:12).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필요 불가결한 요소다. 그 이유는 그를 통해서만 우리는 아버지께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은혜와 의로우심을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용납되고 그의 마음에 부합하게 되며(엡 1:6), 그가 우리를 용납하시므로 우리가 바라는 축복이 이루어지며, 그의 중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고 응답되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꼭 기억해야 할 계명의 첫째 부분이며, 첫째는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절)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항상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가 기도로써 하나님 앞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가 기도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바를 명심해야 한다.

 

(1) 우리를 대적하는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신다"(마 6:14).

 

(2) 불화한 자와 더불어 화해하여야 한다(마 5:23, 24). 인간들을 위한 선한 뜻이 하늘에서 선포된 것같이 특별히 형제들에게 대한 선한 뜻이 하나님과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자들의 마음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Ⅱ. 사도는 이러한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축복을 말하고 있다.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게 된다. 즉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 특별히 믿음과 사랑을 가진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한다(24절). 우리는 하나님의 복된 관계에서 또한 그의 아들을 통한 영적인 연합과 그와 더불어 거룩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 안에 거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의 믿음은 그에게만 의존하며, 그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확고해진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자에 대한 시험은 이로써 드러난다. 즉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된다"(24절).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거룩한 성향과 형태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만 할 것이다.


요한1서 3장 주석

 

성 경: [요일3:1]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데테'(*)는 감탄사의 역할을 하는 명령형으로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복수 형태는 가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어법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음을 암시한다(Smalley, Westcott).

 

?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 '어떠한'의 헬라어 '포타펜'(*)은 신약 성경에서 대개 놀라움이나 경탄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마8:27; 막13:1; 벧후3:11), 본문에서는 '어떠한 정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의미한다(Brooke). 한편 '자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는 실제적인 부자 관계에서의 자녀됨을 강하게 함축하는 단어이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주로 '휘오스'(*, '아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법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Plummer, Wilder).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써 값없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우신 사랑인가를 선포하고 있다(Calvin). 요한은 '우리가 그러하도다'를 부가하여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는 문법적인 연결이 명백하지 않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혹자는 '디아 투토'가 뒷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호티'(*, '왜냐하면') 이하의 절을 설명하는 것으로 본다(Smalley, Stott). (2)혹자는 '디아 투토'가 앞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보고, '호티' 다음에 따라오는 절은 부가적 기능만을 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어느 견해를 취해도 의미상 큰 변화는 없으나 문맥상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모르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단순히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2)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Stott). (3)혹자는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iike). 본문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지만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1:3; 2:1,24). 요한은 세상이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사실 '세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에 속한 자요 어두움에 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한 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알 수가 없다.

 

성 경: [요일3:2]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 본문은 '지금...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 관계(eschatological tension)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을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간에, 혹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모습이 육체의 소욕(所慾)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다(Calvin, Stott). 신자의 미래에 대해서는 구원의 영광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비록 현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특권과 하나님의 성품을 누리며 미래에 주어질 구원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장차 되어질 그리스도인의 미래 상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계시 되지 않았기에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신자는 장래에 자기 자신에게 일어날 구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Stott).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 파네로데'(*)에는 주어가 없어서 이를 해석하는데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를 바로 앞 문장의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가리키는 비인격적 주어로 보면서 바로 뒷 문장에 나타난 '그'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Plummer, Bengel). (2)혹자는 '그'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Stott, Barker, Bru- ce, Smalley). (1)의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부당하다. 첫째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1절) 본서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명백히 구분짓지 않고 있음을 간과하였으며 둘째로, 이어지는 본문의 논의가 하나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발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Smalley). 그러므로 본문에 사용된 '그'는 후자의 견해와 같이 전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우리가 주와 같을 줄 아는 것이 주의 계신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날에 '우리가 새사람을 입고'(엡4:24) '주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게 되어서'(빌3:21) 주와 같이 됨을 의미한다(Stott).

 

성 경: [요일3:3]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 '소망'의 헬라어 '엘피다'(*)는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 서신에는 빈번하게 나타나지만(롬5:4; 8:24; 고후1:7; 벧전1:3)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 중에서는 본문에서 단 한 번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이루리라는 확신에 찬 기대'라는 소망의 개념은 2절에서 명백히 설명되고 있다(Smalley). 따라서 '이 소망'은 2절에 나타난 장래의 일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리킨다(Barker).

 

?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한은 처음으로 예수의 특징을 '깨끗하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깨끗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노스'(*)는 '디카이오스'(*, '의로운')와 거의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의 정결하심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따라야 할 본보기임을 시사한다(2:1,29;3:7, Smalley). 한편 '깨끗하게 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하그니제이'(*)는 '하그노스'(*, '깨끗하심')와 같은 어원을 갖는 동사로 제의적 정결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출19:10,11; 민8:21; 요11:55; 행21:24). 그러나 본문에서는 시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성품으로서 도덕적인 깨끗함을 의미한다(Law, Stott, Smalley, Barker).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는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하여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마5:48).

 

성 경: [요일3:4]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 본문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여 자신들은 죄가 없으며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요한은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가 예외없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영지주의의 거짓 가르침을 배격하고 있다.

? 죄는 불법이라. - 여기서 '불법'(*, 아노미안)은 문자적으로 '율법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이 '율법'(*, 노모스)이란 용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불법'은 율법을 범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인간의 본성적인 불법을 의미한다(Barker). 요한은 자기 자신들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실상 하나님을 배반하는 무서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성 경: [요일3:5]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는 복수형이다. 이는 죄악된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Smalley, Stott). 한편 '나타내신'의 헬라어 '에파네로데'(*)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의 성육신이 역사적 사건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인 실재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예수의 '죄를 없애는 사역'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으며(요1:29), 모든 죄를 친히 자기 몸에 짊어지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이 하셨다(사53:11,12; 히9:28; 벧전2:24, Stott).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죄가 없다'는 말씀은 3절의 '깨끗하심'과 2:29; 3:7의 '의로우심'과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의 무죄성은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후5:21; 히4:15; 벧전1:19). 한편 본문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에스틴'(*, '~이다')으로 현재형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 기간 동안만 죄로부터 자유로우셨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무죄하심을 암시한다(Smalley).

 

성 경: [요일3:6]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 본문은 1:8,10의 진술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해 네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의 인격에 주목하여 그리스도인은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한다(Wesley). (2)혹자는 요한이 신자의 삶의 원리를 선포한 것으로 보고 '범죄치 아니함'을 신자의 이상적 특징으로 해석한다(Alford, Calvin). (3)혹자는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된다(Lange, Smith, Barker, Westcott, Stott). (4)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원리상 이미 범죄하지 않는 자이지만 실제상 아직 범죄하는 자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인이 현재 긴장과 역설의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Smalley, Schn- a ckenburg).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세 번째 견해의 경우 '범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타네이'(*)는 현재형으로서 동작의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상태를 묘사해 주기 때문이며, 네번째 견해의 경우 루터(Luther)가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는 동시에 범죄한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Smalley). 앞 절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죄와 상관없는 깨끗한 분이시기에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 죄를 범한다면 그는 회개함을 용서함을 받고 불법의 생활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지속적이며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죄를 좋아하며 죄 안에 거하길 즐겨한다면 그는 완전히 깨끗하신 그리스도를 알거나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알지도, 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요5:37,38; 8:19; 14:7,9; 요삼1:11, Stott, Barker).

 

성 경: [요일3:7]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 본문은 수신자 내에 있던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니의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靈智)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자유로워져 도덕적인 방종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신학과 윤리의 가르침은 요한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시켰다. 그래서 요한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 이외의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을 멀리하며, 거절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 본문은 2:29의 반복이다. 여기서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로움의 동기와 근거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은 의를 행함이 조건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로서 그의 의로움을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Bruce).

 

성 경: [요일3:8]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 본문은 7절 하반절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대조를 이룬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반면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 요한은 이러한 대조법을 사용하여서 수신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하느냐'란 질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이 방종을 통해 범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요한은 본문에서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으며, 단지 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로서 진리가 그 안에 전혀 없기에(요8:44) 속이는 자이며 사람들로 범죄하게 한다. 이러한 죄의 기원에 대해 바울이 아담에게까지 소급시킨 것과 달리(롬5:12-19), 요한은 그보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Westcott).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마귀의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창3:1-6). 이러한 마귀의 일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그르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죄인을 어둠에서 구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5절; 히9:28; 벧전2:24). 요컨대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죄를 없애고 동시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Plummer).

 

성 경: [요일3:9]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본절은 6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1:8,10에서 믿는 자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범죄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절은 6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습관적으로 마귀와 같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하여는 본문이 수신자들 사이에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향한 경고인을 전제로 할 때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가 되었으므로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죄가 영지를 깨달은 자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으므로 범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부류이다. 요한은 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범죄함을 역설하였고(1:8,10), 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신자들은 범죄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역설하고 있다(6절).

 

?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 '하나님의 씨'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신적인 생명의 원리라고 주장한다(Smith, Marshall). (2)혹자는 집합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ohlenberg, Stott). (3)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Oecumenius, Theophylactus). (4)혹자는 말씀 또는 복음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Dodd). (5)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Calvin). 다섯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Smalley).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말씀이 심기워 있음(시119:11; 렘31:33)과 성령께서 내주하심(롬8:11; 고전3:16)은 동시적이고 불가분리적이다. '하나님의 씨' 즉 말씀과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거할 때 그 그리스도인은 범죄하지 않게 된다.

 

성 경: [요일3:10]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시며 모든 인간들을 낳으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가 아니다. 마귀의 자녀들도 있다(요8:44).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마13:24-30).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 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닮고,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를 닮는다(Stott, Bruce).

?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마귀의 자녀인가를 판별하는 시금석으로 '의와 사랑'을 제시한다. 의와 사랑이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낸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든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에서든간에 '온전함'을 의미하며 '사랑'은 타인에 대한 의로움을 뜻한다(Westcott, Plummer). 이러한 '의와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닮아야 할 하나님의 본성이다.

 

성 경: [요일3:11]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 '사랑할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현재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Smalley).

?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처음부터'는 문맥상 요한의 수신자들이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은 틀림없이 복음의 본질이 사랑이며(요3:16; 15:12; 눅10:27; 고후13:13) 사랑이 태초의 창조 원리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요17:24; 요일4:16)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한편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리아'(*)는 1:5와 동일한 단어이다. 1:5에서의 '소식'은 교리적 내용을 담고 있어 하나님이 빛이심을 드러내는 반면 본절에서의 '소식'은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Stott). 그 윤리적인 내용은 '복음의 본질인 동시에 근원적인 요구인 사랑의 실천을 권면하는 것'이다.

 

성 경: [요일3:12]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 저자는 8절과 10절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마귀의 자녀의 모델로 가인을 제시한다. 요한이 가인을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가인은 동생 아벨의 의로움을 시기하여 죽임으로 자기 자신이 마귀에게 속하였음을 스스로 입증하였다(Burce). 둘재로, 요한 당시의 한 이단 종파인 에비온주의자들은 채식주의자들이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고기를 드린 아벨은 열납되고 농산물을 드린 가인은 거부되는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율법적인 채식주의보다는 사랑의 계명에의 순종이 우선임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Smalley).

 

?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 창4장에 기록된 사건에서는 가인의 살인 동기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가인에 대한 언급(히11:4; 유1:11)을 통하여 추론해보면, 가인은 믿음과 순종과 형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요한은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분명한 살인의 동기를 제시한다. 그 동기는 동생 아벨의 의로움에 대한 시기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물질적 축복이나 안녕보다는 의로움 자체를 더욱 시기하고 증오한다(Stott). 이런 의미에서 가인은 자신의 살인 행위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성 경: [요일3:13]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전후 문맥상 세상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Law).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대립은 아벨-가인, 이삭-이스마엘, 야곱-에서를 통하여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요한은 '미워하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를 현재 시상으로 사용함으로 암시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다는 사실만으로 미워하므로(12절) 양자간의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증오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이김에 기초하여 넉넉히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요16:33; 요일4:4; 5:4, Bruce).

 

성 경: [요일3:14]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 본문에서 요한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간 자의 증거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다. 사랑은 율법의 대강령이요(마22:34-40),율법의 완성이요(롬13:10),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최고 표현이다(요13:35; 고전13:13).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영생의 근거는 아닐지라도 형제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Calvin, Bruce).

?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사랑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폰'(*)에는 목적어가 없다. 이 사실로 인해서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형제'를 목적어로 보아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다(Stott). 다른 하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Plummer, Smalley).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제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6절; 2:2). 한편 '거하느니라'의 헬라어 '메네이'(*)는 현재형으로 사랑치 아니하는 자의 영적 죽음의 상태가 지속됨을 암시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랑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상태처럼 지속적으로 죽음과 진노하에 있는 상태이기에(엡2:2) 사망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사망에 거하고 있는 상태이다.

 

성 경: [요일3:15]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자니. - 요한은 '사랑하지 않음'의 개념에서 '미워함'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진술하고 있다. 본문은 분명히 12절을 반영한 것으로 세 가지 즉 '사랑하지 않음'과 '미워함' 그리고 '살인'이 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다(Plummer). 그러나 여기서 요한이 살인자의 회개와 사죄 가능성을 부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의 사죄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이다(눅23:34, Smalley, Stott). 단지 요한은 본문에서 미움이 잠재적 살인이라는 사실, 즉 살인이 미움과 시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살인하는 자의 현재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우크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엔 아우토 메누산'(*)운 문자적으로 '그 속에 거하는 영생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가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는 현재형으로서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뜻한다(Haas). 이것은 살인하는 자의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움에서 비롯된 살인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영생이 서로 상극임을 시사한다.

 

성 경: [요일3:16]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알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은 완료형이다. 이 단어는 이 서신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현재형으로 쓰였으나(2:5,18,20; 5:15) 본문에서는 특히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알게 된 것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15절에서 미워하는 자의 표본으로서 가인을 내세운 뒤 본절에서 사랑하는 자의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한은 상반절에서 자기 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시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본받아 자기 희생적 사랑을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한다(2:6). 이는 예수께서 친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상토하는 것으로(요15:12,13)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사랑이 자기 부정임을 시사한다.

 

성 경: [요일3:17]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 '재물'의 헬라어 '비온'(*)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삶의 수단으로서의 재물'을 의미한다(막12:44). 또한 '보고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로레'(*)는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가리킨다(Smalley). 본절에서 요한은 생활에서 충분히 실행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랑의 예로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은 생활이 어려운 형제를 보고도 그의 궁핍함을 고와주지 않면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4:10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해석한다(Plummer) (2)혹자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해석한다(Bro- oke, Bengel, Alford). (3)혹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같은 사랑으로 해석한다(Law, Marshall). 본절의 중심 사상이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성 경: [요일3:18]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말과 혀'는 같은 의미로서 실천이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행함과 진실함'은 실천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Smalley). 즉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사랑의 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요한은 본절에서 사랑의 실천을 선언(약2:15-17)함으로써 이제까지 논해온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의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요약하고 있다.

 

성 경: [요일3:19]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 '이로써'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다음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Nauck, Brooke). (2)혹자는 앞에 언급된 내용과 뒤에 언급될 내용 둘 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3)혹자는 앞에서 언급된 10-18절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Sto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문맥상 가장 타당하다. 한편 '굳세게 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소멘'(*)에 대하여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확신케하다', 이 의미로 해석하려면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데 목적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로 앞 문장인 '우리가 진리에 속함'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와(Plummer) 2. 20절 초두의 '호티'(*, '왜냐하면')가 이끄는 절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이다(Bruce). 그러나 양자 모두 무리한 문법적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2)'설득시키다'. 이것은 의미상 본문에 부적절하다. (3)'안심시키다'. 이 의미로 해석할 경우 '우리 마음의 두려움과 염려'라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Westcott). 비록 만족스러운 해석은 되지 못하나 그래도 세 가지 의미중 마지막 의미가 타당성을 지닌다(Stott, Smalley). 본절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진리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20절과 연결하여 주 앞에서 두려움없이 담대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 경: [요일3:20]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절에서 두 번 사용된 '호티'(*, 왜냐하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명사절을 이끄는 접속사(that)로 보고, 두번째 '호티'는 불필요한 반복으로 간주하여 생략한다. 이 해석은 20절 전체를 19절의 '페이소멘'(*, '확신케 하다')이란 동사의 목적어로 본다(Bruce). (2)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왜냐하면'으로 해석한다. 이 경우 19절의 동사 '페이소멘'(*, '안심시키다')의 목적어는 생략된 것으로 본다(AV). (3)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호'(*)와 '티'(*)로 분리시켜서 관계대명사 중성 명사로 보고, '에안'(*, '...이면')과 합쳐서 '...할 때마다'라는 의미로 본다. 이때 두번째 '호티'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의 뜻이 된다(Stott, Smalley).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본서에서 서로 대조되는 구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1:9,10; 2:10,11; 3:8,9) 본절 역시 21절과 대립되는 구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Alford, Wohlenbe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을 보시면 책망할 것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혹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Brooke, Luther).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을 책망할 때마다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문맥상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성 경: [요일3:21]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 문장의 형식상 전절과 본절은 조건문으로서 대조를 이루지만 내용상은 본절이 전절의 결과에 해당한다. 본문은 설사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서 책망할 것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Bruce).

?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위에서 담대함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항상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히10:19).

 

성 경: [요일3:22]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 '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멘'(*)과 '받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바노멘'(*)은 모두 현재 시상이다. 이는 계속되는 기도와 계속되는 응답의 경험을 암시한다(Stott).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상은 신약 여러 곳에 나타난다(마7:7,8; 18:19; 요11:41,42; 15:7). 그러나 이 응답에 대한 약속에는 선행 조건이 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요15:7, Smalley).

?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말한 공적이 아니라 신자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을 드러내는 외면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Law, Stott). 예수께서도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아셨다(요8:28,29; 11:42).

 

성 경: [요일3:23]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 전절에서는 '계명들'(*, 엔톨라스)이라고 하여 복수 형태를 취하는데 본절에서는 '계명'(*, 엔톨레)이라고 하여 단수 형태를 취한다. 이는 본절의 두 가지 내용인 '믿음'과 '사랑'이 사실은 불가분리적인 하나의 계명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여기서 '믿고'의 헬라어 '피스튜소멘'(*)과 '사랑할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시상이 서로 다르다. 즉 '피스튜소멘'은 부정과거형으로서 '단번에 이루신 예수의 역사적 속죄 사역'(히9:28)을 믿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아가포멘'은 현재형으로서 '형제 사랑이 변함없이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믿음은 사랑의 근거요 사랑은 믿음의 증거이다.

 

성 경: [요일3:24]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 헬라어 본문에는 두 번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아우토스'(*, '그')라는 인칭대명사로 나타난다. 이 '아우토스'는 19-23절까지 계속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지칭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Plummer, Stott, Smalley). 그러나 사도 요한의 기독론(Christology) 자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을 뚜렷하게 짓지 않고 오히려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요15:1-7의 말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요17:21) 내용상으로는 '주'가 하나님이든지 예수이든지 같은 의미이다. 앞 절에서 언급된 두 가지 계명, 즉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도 역시 그 안에 거하신다.

 

?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본문에서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로 성령이 제시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 주가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신다는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保證)이다. 23,24절의 연결이 18,19절의 연결처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안다'고 하지 않고 성령을 등장시킨 점은 의미가 있다. 아마도 저자는 주 안에 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사랑'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러한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각종 은사를 주셔서(갈5:22,23)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의롭게 행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Stott).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심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