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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요한1서 5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5. 19.

메튜헨리 주석

 

사랑과 믿음 (요한 1서 5:1-5)

 

Ⅰ. 우리가 앞 장 결론 부분에서 주장한 바 대로 사도 요한은 두 가지 관점 즉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과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언급한 다음 셋째로 아래와 같이 부언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의 뚜렷한 관계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는 형제와 동료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1절)라고 하였다.

 

1. 믿는 형제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묘사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다시 말해서 그가 메시야 되심과 그의 본성과 사명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 모든 세상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 중의 머리되심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모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및 왕들의 머리가 되심을 믿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영원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 온전한 준비와 성장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보호와 지도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이다.

 

2. 또한 그는 혈통으로 말미암아 권위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다"(1절). 이에 대한 믿음의 본질과 이에 따라 이룩되는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기가 넘치게 된다. 하나님의 양자 됨은 육신의 혈통에 의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하나님의 옛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비록 본래 이방의 죄인들일지라도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이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의 아들을 사랑해야 하며, 아버지의 형상을 이어받은 그들에게 있어서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닮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본적으로 사랑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진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Ⅱ. 사도 요한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 중생한 자들에게 베푸는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 혹은 참된 복음적인 성격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준다. 진실성의 근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세속적인 조건 즉 그들이 부하다든가 학식이 많고 우리에게 친절하며, 우리 교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동하는 은혜가 임하며 그의 형상과 모습이 그들에게 나타나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사랑을 받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로써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 것임이 본서에 나타나고 있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와 주 예수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의 사랑이다.

 

2. 다음으로 하나님의 대한 사랑의 진실성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경건한 복종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2절)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이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진실되게 그리고 복음적인 입장에서 사랑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한 영혼으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그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3절).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니" 이로써 그의 계명이 쉽고 기쁜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지키기로 결심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 내가 주의 율례를 사랑하나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사랑과 성령으로 내 믿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2).

 

3. 중상의 결과와 효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이 세상을 지혜롭게 영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4절).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을 위하며 결과적으로 다른 하나의 세계를 위해 태어난 자이다. 또한 보다 높고 나은 세계를 향한 성품과 성향을 지닌 자이다. 그는 무기를 공급받음으로 이로써 세상을 물리치고 정복할 수 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4절). 믿음은 승리의 근본이요 세상을 이기는 수단과 도구며 영적인 갑옷이요 크나큰 무기가 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믿음 안에서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

(2) 믿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안에서 또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며,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철퇴시킨다.

(3)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성결케 하며 세상이 우리를 뒤엎고 정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4)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이 세상의 불평과 아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이끌어낸다.

(5) 믿음은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거하는 자마다 더 크고 은혜로우신 성령 안에 거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6) 믿음은 이 세상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다.

 

Ⅲ.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의 참된 정복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정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딛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세상은 하늘나라로 가는 노정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이로써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또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하늘나라로, 그리고 그곳에서 기쁨이 충만하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오셨음을 믿는다. 이렇게 믿는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겨야만 한다.

 

1. 그 이유는 이 세상이란 그의 영혼과 경건함과 구원 그리고 축복에 대한 맹렬한 대적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내는 일이 구세주의 사명 중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3. 그는 지상에서 주 예수의 생애와 교훈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부인되고 정복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다.

4. 그는 주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이 세상을 정복하셨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도 주 예수의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주님의 승리의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5. 그는 세상에 대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르침과 지도를 받는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4).

6.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산 소망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벧전 1:3).

7.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어서 그곳에서 그의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장소를 예비하고 계심을 믿는다(요 14:2).

8.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며 세상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들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실 것임을 알고 있다(요 14:3).

 

9. 그는 이 세상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이 세상을 넘어서 저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영과 성향에 사로 잡혀 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2)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의 개종자들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부여한다. 기독교의 계시는 세상을 정복하며 가장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복되고 영원한 세상을 얻는데 가장 큰 수단이 된다. 이러한 계시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반격적인 이 세상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전쟁과 다툼이 어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이 세상의 길이나 기질과 본질과는 정반대의 거룩한 원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이 전달되어지고 두루 퍼지는데 있어서 세상의 영의 능력을 능가하며 또한 이에 거스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 세상은 그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또한 지금도 아니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과 구분되어 있으며 천국과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원받은 무리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은 이 세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구원받을 모든 무리들이 그와 함께 항상 거할 수 있도록 또한 만일 이생뿐이라면 그들은 종국에 가서 가장 비참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음을 믿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하늘로 올라가심 같이 그들의 처소를 하늘나라에 예비하기 위해 승천하심을 그들에게 확신시키셨다. 그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영원한 축복의 세계는 가장 명확히 드러났다. 또한 이 세상의 공격과 시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를 소유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이 자신의 화살로 자신을 죽이며 자신의 무기로 자신을 겨냥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반대와 대적과 핍박은 우리들이 세상을 정복하며 무리로 하여금 보다 높은 영원한 세계에 이르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우리들은 각계 각층의 천군 천사들의 도움을 힘입어 이 세상을 이기며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정복하고 놀라운 승리의 기쁨을 맞이하는 영웅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후에 이를 내세가 없으므로 슬퍼하는 일이 없다. 그는 다만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며 또한 예민한 영적인 감각으로 열심히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나간다.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외에 누가 이렇게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을까?

 

 

하늘과 땅의 증거 (요한 1서 5:6-9)

 

신자의 믿음은 이와 같이 강하고 승리적인 것이므로 그 믿음은 튼튼한 기초에서야 하며, 주 예수의 거룩한 사명과 권위 그리고 직무에 대한 뚜렷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고조되어야 한다. 즉 예수는 그가 올 때에 신임장을 가지고 오셨으며, 그 신임장은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Ⅰ. 그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은밀하게 오신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서 당당하게 뚜렷한 증거를 가지고 오셨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이다." 그는 우리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이 사명을 보다 확실히 수행하기 위해 "물과 피로서" 임하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임한 자가 없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임하셨다. 다시 말하거니와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서 임하셨다"(6절). 이 세상을 위한 가장 참된 구세주의 증거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로 임하셨다." 그가 우리를 고치며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물과 피로 임하신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구원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셔야만 했던 사실은 아래와 같은 사실들로 나타난다.

 

1.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부패된 상태에 있다.

(1) 우리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잠재하고 있는 죄의 힘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져 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내적인 불결로부터 정결함을 얻기 위한 신령한 물이 필요하다. 즉 이 신령한 물이 피의 영혼과 힘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선 그에 의하여 중생에 이르게 하는 씻김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이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너희 발을 씻겨 줌이 없이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이러한 사실을 주님이 넌지시 암시해 주셨다.

 

(2) 우리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죄의 행위와 힘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 더러워져 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었으며 그의 귀하고 은혜스러우며, 아름다운 면전으로부터 영원히 쫓김을 당했다. 따라서 우리들은 속죄의 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다"(히 9:22)는 것이 하늘나라 법정의 법이요 판결문이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피를 가지고 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2. 정결케 하는 두 가지의 방법은 옛날 의식에서 나타났다. 사람과 물건은 물과 피로써 정결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임이니라"(히 9:10)한 말씀이 있다. 또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3) 하신 말씀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히 9:22) 하는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불결함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는 두 가지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군사들의 창에 찔려 그의 옆구리에서는 즉시 물과 피가 흘렀다. 사랑하는 사도는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만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사실에 어떤 신비한 요소가 있는 것으로 기록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도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4, 35)고 말하고 있다. 이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필수적이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물로써 우리의 영혼이 빛 가운데서 천국과 성도의 신분에 합당하도록 씻기어지고 정결함을 받게 된다.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의 율법은 존귀하게 되며 그의 용서하시는 탁월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가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은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 26)고 하셨다.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룸으로 의로운 존재로 나타나게 되었다. 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성령이 우리의 성품을 깨끗케 하는 내적인 세척을 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 아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함이라"(14절). 물과 아울러 피는 거룩하신 구속자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에 가장 필요 불가결한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물과 피는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모든 것을 확고히 하고 온전케 하실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죄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물과 피로써 임한 그는 온전한 구주이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무엇을 가지고 임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신임장을 아래와 같은 증거로써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Ⅱ.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케 이루시는 성령이시다(6절). 세상의 구주로서의 사명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지원할 수 있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거룩한 능력이 그와 그의 복음과 그의 종들에게 함께 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왔으며, 무슨 권위로써 보냄을 받았는지를 세상에 알려 줄 수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리스도 자신의 예언에 의하면 "내가 사람들에 의하여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릴지라도 그는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인데 이는 그가 내 것을 받아 위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사명을 그대로 이어받지는 않으실 것이다. 즉 그는 너희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한 다시 살아나시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일을 이어받아 나의 일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수행할 것이며 나의 임무와 진리 그리고 주장을 취하여 이를 너희와 너희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나타내 보이게 될 것이다"(요 16:14).

 

여기서 또한 사도는 이 증인(성령)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점을 부연하고 있다. 즉 "성령은 진리이다"(6절). 그는 하나님의 영이시오, 거짓말할 수 없는 분이다. 어떤 사본은 "그리스도는 진리니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증거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증거하는 자가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그 시대의 진리요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나 한 두 개의 사본이 원본의 의미를 변케 하는 일은 합당치 못하다.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번역이 가장 합당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를 고수하고 있다. "성령은 진리니라." 그는 참으로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시며 모든 뜻을 나타낼 만한 증거자로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권위에 대해 하늘로부터 나타난 모든 증인들 중 한 증인이 되신다. "이는 하늘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니 이들 셋은 하나이니라. 성령의 증거가 참된 서임을 7절에서 가장 적절히 표현되고 있다. 만일 성령이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말씀과 함께" 땅의 증인이 되신다면 그는 참되시고 그 자신이 진리이심이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1. 우리들은 7절에 관한 분분한 논쟁에 접하게 된다. 대부분의 옛 헬라어 사본에는 7절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 점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없다. 어느 사본에 이 구절이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에 대해서는 비평가들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비평가들이 참고하고 있는 사본의 통일성과 진가를 우리들에게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류 투성이의 고전 헬라어 신약 성경과 같이 어떤 사본들은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므로 이로써 비평가들은 바른 독송(讀誦)을 시도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본 수집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라. 거기에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본과 그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합리적인 추론이 있다.

 

(1) 만일 우리가 7절을 빼고 8절을 대신 놓게 된다면 6절의 내용 즉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오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라고 한 내용과 "증거하는 이는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하고 하신 말씀과는 너무나 동일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본문만큼 세 가지 증거하는 자들에 대한 서론으로써 합당하지 못한 것이 된다.

 

(2) 많은 사본들이 "땅 위에"라고 하는 특수한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 즉 "증거하는 이가 땅 위에 셋이니"라고 했다. 이 구절은 다른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몇몇 증거에 대해서는 현저히 어울리지 않는 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분문에 의혹을 품고 있는 자들에 의하면 7절이 누락되어 있는 대부분의 책 중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이유로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6절을 예로 든다면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말씀과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고 한 구절은 만일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오류가 없이 참되시고 진리 자체가 되시는 분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자 할 때 지상에 있는 모든 증거를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했음을 상상하는 길이 없이는 이 구절은 "증거하는 이가 땅 위에 셋이니"라는 말씀과는 자연스럽고도 적당하게 연결될 수 없다.

 

(3) 헬라어 원전에서 7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어떤 사본은 e]n eivsin-즉 하나이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다른 사본은 "한편이라" 혹은 "같으니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8절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evu th/gh/-즉 땅에(on earth) 대신 e,pi, th/g gh,j-즉 땅 위에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단순히 일반적인 라틴어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권위만이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신뢰케 하는 바 어떤 헬라의 권위 있는 문서에 의존하고 있는 듯싶다.

 

(4) 7절은 사도 요한의 서체와 신학에 가장 잘 일치되고 있다.

[1] 사도 요한은 "아버지"란 칭호를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그는 유일한 하나님을 암시하거나 아들로부터 거룩하신 위(位, porson)를 구본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리니 그가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리라."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 11:3).

 

[2] "말씀"이란 칭호는 이 사도에게는 가장 특이한 것(꼭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지라도)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본서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세례의 형식이나 교회의 일반적인 용어로 보아 "말씀"보다 "아들"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며 합당했을 것이다. 터툴리안(Tertullian)과 씨프리안(Cyprian)이 구절을 언급할 때에 "아들"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말씀"이란 말을 피하고 "아들"이란 말을 씀으로 본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씨프리안의 표현은 파컨더스(Facundus)의 인용문에서 명확히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즉 "칼타고의 감독이요, 순교자인 성·씨프리안은 삼위일체에 대해 기술한 서한문과 다른 저서 가운데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사도 요한의 증거를 언급했다. 사도 요한이 주께서 이르시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고 하셨음을 말하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언급한 다음 이 셋은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이들이 하나라고 하는 말은 다른 곳에는 없고 7절에만 나타나 있다. 기억에 의존하든가 혹은 말보다도 사건을 이름보다도 인물을 중요시하던(일반적인 또는 논쟁적 토론에서) 씨프리안은 제 2위를 "말씀"이란 칭호 대신에 "아들"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씨프리안은 성령과 물과 피는 요한이 하나라고 말한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을 의미했다고 하는 파컨더스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요한의 의견에 만족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씨프리안은 모두 명칭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가 기술한 명칭의 순서도 바꾸어 놓았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씨프라안이 두 번째로 놓은 피(아들)란 명칭을 사도는 맨 나중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아들"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로써 사도는 아들 자신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씨프리안은 생각했음을 추론해야 한다. 그 아들은 물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으나, "아들"의 옆구리에서 흐른 물로써 사도 요한은 성령의 위(person)를 나타내려 했고, 6절에서는 진리로 나타나 있으며,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바 성령으로서 사도는 "아버지"의 위(person)를 나타내고 있음을 추론해야 한다. 실은 사도 요한은 "아들"과 "성령"이 연관되어질 경우 자신이 이러한 명칭을 사용한 곳이 아무데도 없다. 우리는 칼타고의 교부가 사도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었던 충분한 증명을 요구하게 된다. 사도를 이렇게 이해하는 그는 역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땅 위에서 세 증거자들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셋째, 씨프리안은 세 증거자들이 되고 이 셋은 하나임을 주장하고 있음을 파컨더스는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만들은 8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7절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 말들은 땅 위에 있는 성령과 룰과 피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에 대해 언급되어지고 있다. 씨프리안과 동시대의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Debaptismo haere ticorum의 저자가 헬라어 사본과 고전 번역물과 일치하고 있는 요한의 말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한이 그의 서신 가운데서 우리 주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는 물과 피로써 임하였는데, 물로만 아니라 물과 피로써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요, 이 셋은 같다." 만일 모든 헬라어 사본과 고전 번역물이 성령과 물과 피에 관해 언급하고 in unum sunt -즉 그들이 같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면 씨프리안 당시의 사본(copies)에 나타난 다양성 즉 그들은 하나(they are one, unum sunt)라고 쓰여져 있다고 씨프리안이 말한 것은 헬라어 사본이나 고전 번역물에 속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씨프리안의 말은 7절에 대한 확고한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원문의 고안자가 하늘의 둘째 증거자이신 "말씀"에 대해 사도적인 명칭을 명확히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암시처럼 보여진다.

 

[3] 이 사도는 구세주의 옆구리에서 흐른 물과 피의 역사를 유일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구세주의 약속과 구세주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증거하고 그의 복음서(요 14:16, 17-26; 15:26; 16:7-15)에 나타난 대로 불신적인 세계에서 그의 의로운 자들에게 확신시키고자 성령이 오시리라는 예언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의 복음서나 그가 인용한 용어로 보아 가장 타당한 것이다.

 

(5) 사본의 가필자가 7절을 고안해서 삽입하기보다는 본문을 베낀 사람이 한눈을 팔거나 혹은 필기를 잘못함으로 말미암

아 7절이 그 책장 맨 윗부분에서나 또는 가장 아랫부분에서 말살되거나 훼손되기가 더 쉬운 일이었다. 창피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필경사는 대단히 대담하고도 뻔뻔스러운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고, 거룩한 책에 당돌하게 첨가를 기도한 자도 또한 불경한 자임이 틀림없다.

 

(6)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하여 그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를 밝혀 주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증거를 말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 9절에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데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최고의 증거를 생략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상에서의 세 가지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증거가 되지 못하며, 어느 누구도 참되시며 온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증인이 될 수 없다. 원본에 있어서 삼위일체 반대론자들은 성령이나 물과 피가 하나님 자신이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으로는 주 예수의 진리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의 증거와 그의 성직수임의 신성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근거와 구주께서 가지고 오신 신임장과 간략히 요약된 설명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철회하고, 있지만 부분은 이에 대한 모든 뜻을 내포하고 있다.

 

2. 이러한 합리적 근거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가 진리 되심을 증거하는 바 성령을 말한 다음, 성령은 하늘에 계시고 그는 진실하실 뿐 아니라, 진리 자체가 되심을 나타내 보여주는 또 다른 자들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면서, 성령도 진리이심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는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신데 이 셋이 하나이니라"(7절).

 

(1) 사명과 자격에 있어서 주 예수의 진실성과 권위를 세상에 증거하고 보증하는 바 거룩하신 삼위되신 자들을 나타내고 있다.

 

[1] 맨 첫 번 순으로 "아버지"가 계시다. 즉 그는 주 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는 동안의 사명을 확증하고 있다.

첫째, 세례 받으실 때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선포하심으로 증거하고 있다(마 3:17).

둘째, 변화산상에서 그의 신분을 확증하고 있다(마 17:5).

셋째, 신비한 능력과 사명을 부여하심으로 증거하셨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 38).

넷째, 그의 죽음에서 증거를 나타내셨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켜보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다섯째,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증거하셨다. 곧 "그는 세상에 의를 확증하실 것이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 16:10; 롬 1:4).

 

[2] 두번째 증거자는 말씀인데 이로써 그는 세상이 있기 전에 존재하였고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아버지와 함께 하신 참된 하나님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가장 높은 품격을 의미하는 신비한 이름이다.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해야만 했다. 이로써 그가 우리를 구속하시고 증거하셨다.

 

첫째, 그가 행하신 놀라운 역사로 나타내셨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둘째, 변화산상에서 그에게 임한 영광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셋째,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나타났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3] 세번째로 증거하는 자는 성신 혹은 성령이시다. 이 이름은 거룩함의 소유자 또는 거룩의 본체이신 자에 대해 가장 적합하고도 신성한 이름이다. 거룩하신 성령께 그의 확증과 유일한 증거를 나타내신 자에 대해 그는 참되시고 미쁘신 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성도의 세계의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께 참되시고 미쁘신 일을 행하셨다.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말할 수 있다.

 

첫째, 동정녀의 몸을 통해 흠이 없는 인간을 출산케 하심에서 나타난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둘째,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뚜렷한 임재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써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2).

셋째, 지옥과 어둠의 영들에 대한 효과적인 정복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셨느니라"(마 12:28).

 

넷째,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세계에 전파할 수 있는 은사와 능력을 그들에게 주기 위해 사도들 위에 임한 뚜렷하고 강력한 임재로 증거하셨다. "사도와 같이 모이라.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요 1:4, 5).

 

다섯째, 휘트비(Dr. Whtby) 박사가 그의 저서 <신약 성서 주석> 제2권 서문에서 언급한 대로 200년 동안 제자들과 교회에 의하여, 또한 그들 위에 임한 놀라운 은사와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과 사랑을 증거하는 가운데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하늘에 있는 증거자들이며 또한 하늘로부터 증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증거하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자들로서 좀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볼 때 거룩한 존재와 본질 면에서 하나가 된다. 만일 "아버지"와 하나이라면 그들은 한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다.

 

(2) 서로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이상에서 말한 하늘에 있는 세 증거자에 반해 아래 말씀대로 땅 위에 세 증거자가 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경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8절).

 

[1] 이 증거하는 이들 중에 첫째가 성령(the spirit)이다. 이 성령은 하늘에 계시는 성신(holy ghost)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도 요한이 말한 바에 의하면) 성령(spirit)으로 난 자는 영(spirit)이라고 말할 수 있다(요 3:6).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제자들도 육으로 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부패된 육신적 성향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났다. 이 육신적 성향은 억제되어지고 또한 분쇄되어야만 할 것이다. 옛 정욕과 죄악은 제거되어야 하며, 참된 제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중생과 새로운 변혁은 주님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된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확실한 최초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하늘에서 비롯된 어떤 놀라운 징조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승리이다. 교회의 중생과 새로워지는 변혁은 이 성령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점진적인 성화와 이 세상에서의 승리, 평화, 사랑, 기쁨과 빛 가운데 성도의 유산으로 합당한 바를 이루게 되는 모든 은혜에 속하는 것이다.

 

[2] 둘째 증거자는 물이다. 이것 앞에서 구원의 방편으로 언급되어진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구세주 자신에 대한 증거자로 또한 그의 정결케 함과 정결케 하는 능력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세상에서의 그의 자신의 성품과 행위의 정결함을 의미한다. "그는 거룩하며 흠이 없고 티가 없었다."

둘째, 구세주에 대해 증거한 세례 요한의 세례의 증거는 구세주에 대해 사람들을 예비시키고 그에 대해 언급해 주었다(막 1:4, 7, 8).

셋째, 사람들이 깨끗케 되고 씻김을 받는 그의 교훈의 정결함을 나타낸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넷째, 그의 제자들의 정결함과 경건함을 뜻한다. 그의 몸은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이룬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다섯째,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고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하신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물로 베푸는 바 세례를 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3] 셋째로 증거하는 이는 피다. 즉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고 이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몸값이었다. 이로써

첫째,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심으로" 구약시대의 희생제는 이미 끝이 났음을 증거하고 있다.

둘째, 그의 모든 예언과 봉사와 교훈의 참됨을 확증해 주고 있다(요 8:37.)

셋째,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0, 31) 하신 말씀대로 피는 하나님께 대한 비교할 수 있는 사랑과 자비와 영광과 존귀를 위하여 세상 죄를 속함으로 희생의 죄물이 되심을 보여주었다.

넷째, 피로써 우리를 위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자를 속이지 않는다(요 14:13-15).

다섯째, 이는 주 예수의 어떤 세속적인 유익과 미득에 사심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여섯째, 주 예수를 위하여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을 각오할 의무를 부여한다. 속이는 자는 자기편으로 개종자들을 유인하여 주 예수께서 행한 바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 하리라"(요 16:2). 그는 그의 종들을 불러 그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오직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이 말씀은 그나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일곱째, 그의 피로 말미암아 얻어진 유익은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세주란 사실을 나타내 보여준다.

여덟째, 이 피의 유익은 그가 말한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나타나고 증명되어졌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이러한 것은 모두 땅 위에서의 증거가 또한 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자에 대한 다양한 증거가 된다. 이러한 확증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을 훼방하는 자라는 판단을 받고 종국에는 죄사함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됨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세 증거하는 자들은 (전자의 세 증거와는 다른) 피차간 서로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며 하늘로부터 나타난 세 증거자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적합치 못하다.

 

Ⅲ. 사도는 정정당당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9절)고 결론짓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앞에서 말한 바에 근거를 두고 하나의 추측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로써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증거하신 바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 확실히 이 증거는 틀림없는 증거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직접적인 증거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그는 자신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하셨다.

 

2. 그의 증거의 권위와 신빙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증거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사건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이러한 증거는 모든 재판소나 모든 나라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큰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진리 자체이며 최상의 권위와 가장 순수한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

 

3. 이러한 기준의 적용은 현재에도 가능하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정거이기 때문에 또한 아버지의 증거뿐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증거이며, 이로써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증거하셨다. "거짓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사랑의 아들이심과, 사명에 있어서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시키고 회복시킬 아들이 되심을 세상에 충분한 확증으로 나타내셨다. 곧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거룩한 근본을 나타내 보이셨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가는 유일한 길이요, 수단이 된다.

 

믿는 자의 특권(1) (요한 1서 5:10-13)

 

이상의 말씀 가운데서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Ⅰ.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안전성.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기 위해 그에게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자로서 "그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10절).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바 외적인 확증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어떠한 것들을 이루어 놓았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발견할 수 있었는가를 말할 수 있다.

 

1. 그는 자기의 죄와 죄된 행위 그리고 참혹함을 깊이 통찰하며 자기 안에 이러한 구세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2.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우월성과 아름다움과 사명 그리고 그의 영적은 궁핍과 불쌍한 환경에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적합한 구세주가 되심을 알았다.

3. 그는 죄와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구속하기 위해 또한 그를 용서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이러한 구세주로 준비하고 보내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보고 감사하게 된다.

4. 그는 그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교만을 꺾기도 하시며, 한편 치유하며, 생기 있게도 하며, 위로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5. 그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발견과 증거가 됨과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불을 키고 그 사랑을 더욱 일깨워 요원의 불길을 일으키게 하는 최적의 능력있는 수단이 됨을 알게 된다.

6. 1절의 말씀대로 그는 그리스도의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자이다. 그는 새로운 마음과 성품, 새로운 사랑과 성향 그리고 기쁨을 소유하게 되며, 그는 이미 이전의 사람이 아니다.

7.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서 자신과 죄와 육신과 세상의 보이지 않는 악한 힘과 더불어 투쟁을 하게 된다.

8.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진 소망과 능력으로 세상을 경멸하며, 극복해 가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음을 안다.

9. 그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또한 그의 중재를 통해 그의 이름으로 드려진 기도로써 하늘에 계신 중보자의 관심사가 무엇임을 알게 된다.

 

10. 그는 새로운 소망에 대해 거듭나고, 하나님과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신뢰하는데 있어서 거듭나며, 양심의 두려움과 죽음과 지옥의 공포로부터 유쾌한 승리를 이룩하는 데에 거듭나며, 간구함으로 그의 생이 부요해지며 구속의 날까지 보장을 받음으로 생명과 영생에 대한 만족할 만한 기대에 있어서 새로 거듭나게 또한 다. 이러한 확신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즉 그는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이루어지게 되며 그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신 혹은 완전하신 형상을 향해 자라게 된다.

 

Ⅱ. 믿지 않는 자의 죄와 불신하는 죄의 악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거짓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0절). 하나님이 나타내신 바 많은 증거를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았다고 믿어야 하며, 혹은 모든 증거가 그에 대해 말하며 확증해 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속이기 위해 또는 이 세상을 죄와 비참함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각처에 순수하고 거룩하며 더렵혀지지 아니한 기관으로 종교를 고안하도록 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되리 만큼 인간에게 허용되었으나 아직도 기만과 거짓으로 차 있고, 그들에게 그의 성령과 능력을 주어 이 세상에 그 기만과 거짓을 나타내도록 강요하는 것임을 믿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거짓의 장본인이요 교사자로 만드는 것이다.

 

Ⅲ.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모든 거룩한 증거의 본질과 핵심과 내용.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11절). 이것이 복음의 총체이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여섯 증거자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증거의 총체와 요약이 된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영생을 계획하셨다. 그는 영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마련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과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특권과 명분을 허락 하셨다.

 

2. "이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 아들은 생명이시다. 영원한 생명이 그 자신의 본질과 그 몸 안에 존재한다(요 1:4; 요일 1:2). 그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영적이며 영광된 생명의 샘이 되신다(골 3:4). 그로부터 이생과 내세에 있어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다. 이로써 아래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1)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12절). 아들과 연합되어 있는 자는 생명과 연합되어 있는 자다. 아들에 대해 명분을 가지고 있는 자는 생명과 영생에 대해서도 명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존귀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허락하셨다. 또한 이러한 존귀를 우리도 그에게 돌려야 함이 마땅하다. 아들 앞에 나아가 입을 맞추자 그리하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12절). 그는 율법의 저주 아래 머물게 된다(요 3:36). 즉 생명 자체가 되시며 생명의 소유자가 되시고 생명의 길이 되시는 아들을 거역한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바를 믿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끝없는 죽음의 자리로 넘기도록 자극한다.

 

Ⅳ. 사도가 믿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목적과 이유,

 

1. 성도들의 기쁨과 위로를 위해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13절). 이 모든 확증과 증거 위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서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하늘로부터 응답되어질 수 있는 증거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하늘에 있는 세 증거자의 보장을 받아야만 한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들은 영생을 복음의 언약 안에서 얻는다. 그들 안에 있는 영생의 첫 열매에서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그들의 주와 머리되시는 그 안에서 얻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되는 것과 영생을 기대하는 가운데 생기를 얻고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 많은 것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2. 믿는 자들의 신앙의 확신과 진보를 위해 전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13절). 그리고 믿는 일을 계속하게 하려 함이다. 믿는 자는 인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일을 떠나는 것은 영생을 포기하는 것이며, 멸망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그들을 고무시키고 격려하기 위하여 믿음에 대한 확신과 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사망에 이르는 죄 (요한 1서 5:14-17)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따르는 특권, 다시 말해서 기도의 응답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14절). 주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간구와 요구를 가지고 어떤 형편 중에라도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응답된다. 우리의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뚜렷한 뜻과 일치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위배되거나 그의 소유요, 그에게 속해 있는 우리 자신의 선함에 상반되는 것을 구하는 일은 합당치 않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는 하늘에 응답되어진다는 담력을 얻어야 한다.

 

Ⅱ. 이러한 특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는 줄을 또한 아느니라"(15절). 구원과 자비와 축복은 경건한 자가 바라는 바 가장 큰 것이다. 그의 간구가 들려지고 응답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 간구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기쁜 일이다.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허용된 것처럼 그는 불쌍히 여김을 받고, 용서와 권유, 성결과 도움 그리고 구원을 얻게 된다.

 

Ⅲ.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기도에 대한 지시.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할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16절). 여기에서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뉘우치고 회개하며 구원을 얻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믿는 형제들로 하여금 신실하며 그들의 죄를 사함 받고 악과 하나님의 징벌로부터 구원함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존함을 받도록 위해 기도해야 한다.

 

2. 흉악한 죄와 일반적인 죄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며"(16절),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7절).

(1)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 죄에 대한 시비와 율법적인 판단으로는 모든 죄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

 

(2)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이 죄는 분명히 생활과 양립하는 신적 혹은 인간적 제정에 따른 모든 죄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제정 안에서는 세속적 혹은 육체적인 생활로 양립되고, 신적인 제정 안에서는 육체적 또는 영적이며 복음적인 생활과 양립하는 모든 죄를 포함한다.

 

[1] 인간의 의로운 제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바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 즉 죽음의 신판에 이르지 않는 여러 가지 다양한 불의와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과는 정반대 되는 죄가 있는데, 의로운 제정에 따라 죽음에 이르는, 혹은 법률상으로 생명을 잃게 되는 죄가 있는데, 이러한 죄를 우리는 치명적인 죄악이라고 부른다.

 

[2] 다음으로 신적인 제정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가 있다. 더구나 육체적인, 혹은 영적이며 복음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첫째, 육체적인 죽음이다. 이러한 육체적인 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와 같이 위선적인 죄를 말할 수도 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죄짓는 성도에게 말한 바와 같이, 믿는 형제에 대한 죄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정죄함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 중 육체적인 죽음에 이를 자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한 바 이러한 죄는 육체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신적인 죄의 형벌은 그리스도의 지체의 보다 많은 보이는 죄를 직접으로 또한 단호하게 죽음으로 위협하지 않고 다만 모종의 복음적인 징벌을 가하고 있다. 즉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 하신 말씀과 같다. 징벌과 채찍을 어떻게 가할까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복음적인 준엄함에 의한다. 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도 때로는 불가피함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신적인 제정에 따라 영적이며 복음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가 있는데 이러한 죄는 영적이며 복음적인 생활과 일치하지 못하며, 영적인 삶과 또한 보다 높은 세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복음적인 진리와도 일치하지 못한다. 이러한 죄는 전혀 뉘우치지 못하며 믿지 못하는 죄이다. 끝까지 뉘우치지 못하며 불신앙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서 증거하신 바 하나님의 영을 모독하고 기독교의 진리의 빛과 그 뚜렷한 명확성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것이 되므로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죽음을 동반하는 죄들이다.

 

Ⅳ. 그 밖의 다른 종류의 죄에 대한 기도의 지시는 이와 같이 구분 될 수 있다. 기도는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될 수 있다. 간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을 허락하실 수 있다.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구해야 할 것이다. 그는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합당한다고 생각될 때에 그의 제정과 섭리에 따라 생명을 취하기도 하신다.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앞에서 언급한 바)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그의 영혼과 육체의 생명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 죽음에 이르는 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도가 허용되지 아니한다. 아마도 바울의 표현은 죽을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너희에게 약속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기도에는 보장이 없다는 정도의 의사를 표현했을 것이다.

 

1. 인류의 보편적인 안전과 유익을 위해 인과응보의 법칙은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범죄한 형제들도 공의의 심판(근본적으로 신성한)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에 맡겨야 한다.

 

2. 복음적인 형벌의 제거(어느 면에서 이렇게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와 죽음의 방지(이 죽음은 어느 특별한 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를 위해 단순히 조건적 혹은 감정적인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데, 복음적인 형벌의 제거는 특별히 이러한 죽음의 방치를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뜻과 영광으로 이룩된다는 조건부에서 행해질 수 있다.

 

3. 회개치 아니하고 믿지 않는 상태에 있는 한 이러한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없으며, 계속 이러한 죄에 머물러 있는 한 죄의 용서를 기대하는 바 생명 혹은 영혼을 위한 어떠한 긍휼도 베풀어지기 위해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회개를 위해,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이 풍성해지기 위해, 또한 이로써 다른 믿는 이들을 위해 이루게 하는 긍휼함을 얻기 위해 기도할 수 있다.

 

4. 성령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의 행위를 행했거나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전적인 배도의 행위를 행했을 경우 전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있으리라"(히 10:27). 이러한 종국이 곧 죽음에 이르는 죄로써 사도 요한이 중점적으로 표현하려는 죄인 것 같다.

 

5. 사도 요한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17절). 그러나 만약 모든 불의가 죽음에 이른다면(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모든 불의를 행하였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이상) 우리 모두는 단호하게 죽음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모든 불의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이상(일반적으로 말해서 믿는 형제들이 삶에 대한 권리를 소유함으로)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음이 틀림없다. 일반적인 견해에서 볼 경우, 용서받을 죄는 없을지라도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할 죄, 즉 용서받을 죄가 있다. 만약 용서받을 죄가 없다고 하면 의로움이나 의로운 상태의 지속은 있을 수 없다. 복음의 제정이나 언약은 죄의 행위를 가볍게 하고 변축하며 철회할 수도 있다

 

믿는 자의 특권(2) (요한 1서 5:18-21)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건전한 신자의 특권과 우월성에 대한 재언급.

1.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로부터, 또한 죄의 전적인 지배와 죄된 행위로부터 구원함을 받는다.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다. 1절)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니"(18절) 범죄하는 자들이 행하는 바(3:6, 7 에서 언급한 대로) 마음과 심령에 넘치는 죄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죄의 행위를 범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을 모면할 수 없는 죄와 그리고 확실히 죄의 삯으로 죄인을 넘기워 버릴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게 된다. 곧 새로운 성품, 거룩한 성령의 안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호를 받게 된다.

 

2. 믿는 자들은 마귀의 파괴적인 도전에 대비할 힘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18절). 이는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중생한 자의 의무나 혹은 행위에 대한 서술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중생한 자들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능력으로써 악한 자들의 치명적인 타격과 비난에 대해 대비하게 된다. 악한 자는 그에 대해 대비하게 된다. 악한 자는 그들의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독약을 주입시키며, 그의 독소 해독제인 중생의 원리를 제거하거나, 복음의 제정에 따라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할 죄로 그들을 유도하지도 못할 것이다. 악한 자는 믿는 자들보다 어떤 악한 행위로 이끌어 가는데 우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중생함이 마귀의 위치와 저주 아래로 그들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의도인 것 같다.

 

3. 믿는 자들은 세상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편과 그의 이권에 서게 된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19절)라고 하신 말씀에서 나타난다. 인류는 두 개의 크나큰 파당과 통치령으로 나뉘인다. 곧 하나님께 속하든지, 악한 것 또는 악한 자에게 속하든지 하게 된다. 신자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들은 그의 것이요, 그로부터 왔으며, 그에게 속해 있고, 그를 위해 있는 자들이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신 32:9) 하신 말씀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옛 이스라엘 백성의 권리와 기회를 이어 받았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나머지의 세상은 악에 처해 있고 악한 자의 입안과 창자 안에 들어 있다. 개별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실 하늘과 공중에는 많은 악한 자들과 악한 영들이 있는데 그들은 악한 본성과 계략과 원리에 함께 연합되어 있으며, 그들은 한 우두머리 아래 연합되어 있다. 마귀의 왕국에는 마귀들 중에 한 동의자가 있다. 악한 세상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그는 세상에서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이 세상의 신"이라고 일컬어진다. 자신의 파멸과 영원한 저주를 모면해야 할 것을 알고 있는 영특한 영이 전능자와 그의 비위를 가차없이 거스리고 있음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악한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이 세상에서 악한 자의 지배를 멸하시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하는 이들의 왕국에 이르도록 하시기를 기원하자.

 

4. 믿는 자들은 진실로 영원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은 자들이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20절).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의 세상에 임하셨고 우리가 그를 보았으며 이미 나타난 증거에 따라 그를 알게 되었다. 그가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었다(요 1:18 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지각에 내적인 광명을 주사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면, 이로써 우리는 참 하나님의 영광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이방의 신들보다 성결과 능력과 완전에 있어서 보다 우월하신 분이시다. 그는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모든 우월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부요함을 지니고 계신다. 모세의 말에 의하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과 특별한 계약으로 우리의 족장들을 택하신 자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며, 애굽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내신 하나님, 곧 우리에게 거룩한 말씀을 주시고, 이방인들도 불러 개종케 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계획과 역사에 의해, 그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그리고 그의 위엄과 심판에 의해, 우리는 오직 그만이 완전한 존재로서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5.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복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아들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고, 두 분의 사랑과 보호 가운데 있으며, 두 분과의 계약과 동맹 관계 안에 있으며,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두 분과의 영적인 합일관계에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놀랍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동시에 참되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생명이 되신다(요 1:1; 요일 1:2). 두 분이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참되신 하나님 곧 영원한 생명과 연합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아래와 같다.

 

Ⅱ. 사도 요한의 결론적 권고.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21절).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 거하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도전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의 빛과 사랑으로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이교도적인 세상의 거짓 신을 떠나라. 그들은 당신의 주인이요, 당신의 섬기고 있는 하나님과는 족히 비교될 수 없다. 어떤 물체나 형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말라. 하나님은 영이시며 이러한 천박한 행위로는 기뻐하시기 않는다.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적인 이웃과 상종하지 말라. 하나님은 질투하는 신이요, 항상 그들로부터 멀리하기를 당신에게 요구하신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기에 합당한 마음의 왕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육신을 제어하고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당신을 창조하신 자요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당신을 구속하신 자요, 당신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자요, 당신의 죄를 용서하신 자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당신에게 영생을 부여하신 자다. 믿음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자.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멀리 하려는 모든 것에 반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속 순종하라.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께영광과 권세가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1서 5장 주석

 

성 경: [요일5:1]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 '믿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형이고 '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겐네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양자의 헬라어 시상에 의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먼저요 믿음은 그 다음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 혹은 증거인 것이다(Smalley, Stott, Barker). '믿음'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4:15; 요9:22)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다.

 

?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본문은 4:21의 반복이다. '내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겐네산타'(*)는 '낳다'러눈 의미의 동사 '겐나오'(*)의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낳으시고 자녀삼아 주셨으며 친히 아버지가 되셨다. 요한이 이같이 하나님을 '내신 이'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을 가족 관계로 유비(類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에게서 난 자'로 번역된 헬라어 '게겐네메논'(*)은 단수형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나(Augustine)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법상 단수로도 집합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 전체를 지칭할 수 있으며, 문맥상 본문이 믿음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또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한다. 요한은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의 불가 분리적 관계성을 강조한다(4:19,20).

 

성 경: [요일5:2]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 본서는 전반적으로 형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본절에서는 그 표현이 반대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역설적 표현의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로써'가 앞절에 설정된 원리를 가리키며, '우리가...사랑하는 줄을'을 '우리가 사랑해야만 한다'로 해석한다(Marshall, Dodd). 그러나 '이로써'가 앞절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이유는 없다. '이로써'는 본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근거함을 나타낸다(4:8,16,19, Smalley).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불가 분리의 관계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형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증된다.

 

성 경: [요일5:3]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순종과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는다. 모든 계명 중 가장 우월한 계명이 사랑 계명인 바 그 안에 하나님의 계명이 내포되어 있으며(Smalley) 그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요14:31; 15:10).

 

?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무거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레이아이'(*)는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는 무거운 또는 가벼운 율법이라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마23:23, Smalley, Schnackenburg).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한 율법과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었던 반면에(마23:4; 눅11:46)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마11:30).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셨고(4:19)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셨으며(Dodd) 설사 그 계명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Calvin)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성 경: [요일5:4]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성 경: [요일5:5]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1절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라는 표현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 계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Marshall).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세상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된다. 한편 '이기는 자'의 헬라어 '니콘'(*)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4절의 '니카'(*, '이기느니라')와 같은 시상이다. 이는 투쟁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승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성 경: [요일5:6]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 본문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옆구리를 창에 찔렸을 때 흘리신 물과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ugustine, Williams) (2)혹자는 요4장과 6장을 근거로 하여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ullmann, Westcott, Luther, Calvin). (3)혹자는 구약 시대의 희생제사와 연관하여 물은 정결케하는 것이며 피는 희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Candlish). (4)혹자는 물은 예수께서 받으신 요한의 물 세례요 피는 십자가의 대속의 보혈이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Alford, Meyer, Barker, Stott, Marshall).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요한 당시에 케린투스(Cerinthus)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임하셨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을 분명하게 설파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상반절의 반복으로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강조한다. 본절 상반절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디'(*, '...을 통하여')를 사용한 반면에 본문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엔'(*, '...안에서')을 사용한다. 본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 안에서 그리고 피 안에서 임하신 자이다'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위치나 장소를 나타내는 두개의 전치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더욱 강도하고 있다(Marshall, Smalley).

 

성 경: [요일5:7]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 개역성경에는 본절이 앞절과 분리되어 또 하나의 절로 기술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본절이 앞절에 포함되어 있다. '증거하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마르튀룬'(*)은 현재 분사로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증거하심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로 오셨음을 믿게 하는 성령께서 믿는 자안에 내주하셔서 지속적으로 예수에 대해 증거하신다(2:20,27; 4:1-6, Stott). 또한 성령은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임하심으로 객관적인 증거를 보이셨다(요1:32).
? 성령은 진리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요14:6)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고 증거하셨다(요15:26; 16:13).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본문에서 성령께서 진리이심을 선언한 것은 진리이신 성령만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증거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Johnson).

 

성 경: [요일5:8]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 '성령과 물과 피'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과 물과 피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세 가지 등급으로 생각하여 예언자와 세례요한, 그리고 요한 일서의 저자인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engel). 그러나 성령을 예언자와만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발살이며 피를 요한 일서의 저자와 연결시키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2)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세례(요3:5-8), 성만찬(요6:54-56), 그리고 성령을 받음(요20:22)의 '신비적인 사건들'에 각각 상응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그러나 이 주장은 상당히 작위적이다. 이 견해는 정당성을 주장키 위해 본절의 세 가지 증거들의 순서를 바꾸고 있으며 더욱이 근거로 제시된 참고 성경 구절들도 예수를 증거한다는 개념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3)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기독교 초기에 존재한 '기름 부음과 세례와 주의 만찬'이라는 예배 의식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Manson, Nauck).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세례 이전에 기름 부음을 실행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4)혹자는 물과 피를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전의 상징으로 보아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된다는 견해를 주장한다(Dodd, Bultmann, Law, Westcott, Barker). 세례와 성만찬 즉 이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여 증거한다. (5)혹자는 '물과 피'를 6절과 같은 의미로 보아 물은 예수의 세례를 상징하고 피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상징하며, '성령'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의 머리 위로 강림하셨고(요1:32),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흘리사 그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요19:30) 영광을 받으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증거하심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요7:39; 20:22, Smalley).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 요한은 본문에서 성령과 물과 피가 같은 결과를 향하여 함께 작용함으로써 한 점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세 가지 증거들이 예수께서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함을 시사한다. 한편 구약 시대 율법에 의하면 증인이 둘 이상이라야 어떤 사실이 입증되었다(신19:15). 요한이 이러한 율법을 염두에 두고 세 가지 증거를 제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Stott).

 

성 경: [요일5:9]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 율법에 의하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증거하는 일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신19:15).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증거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면 더욱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증거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증거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선포되며 물과 피를 통하여 역사 속에 선포된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면(裏面)에서 세 가지 증거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증거이다.

 

?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호티 하우테 에스틴 헤마르튀리아 투 데우, 호티 메마르튀레켄 페리 투휘우 아우투). - 본문은 두 개의 '호티'(*, '왜냐하면')로 구성되어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나타낸다. 그 하나님의 증거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세 가지 증거들,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증거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마르튀레켄'(*)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신 것이 지속적으로 유효함을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신의 아들임을 확증하셨으며(마3:16,17; 요1:33,34) 예수의 고난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증언하셨다(요12:28-30). 이러한 역사적 증언은 성령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증언되고 있으며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의 내증으로 실현되고 있다(Stott, Barker).

 

성 경: [요일5:10]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절). 그 결과 믿는 자들은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소유하게 된다. 이 증거는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여 증거하시는 내적 증거를 의미한다(8절, Brooke, Law, Williams). 이러한 내적 증거는 외적 증거인 '물과 피'와 조화를 이루어 믿는 자들의 믿음을 근원이 됨과 동시에 결과가 된다(Stott).

 

?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란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음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한 인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해 이렇게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증거를 거짓으로 만들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취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극단적으로 확증한다. 한편 본절은 롬1:19,20을 상기시킨다. 우주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들은 도무지 자기의 불신앙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성 경: [요일5:11]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 '영생'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이 생명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가(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현시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신 예수와의 관계성 속에서 믿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과 유일하시며 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고의 생활이다(요17:3, Smalley). 이러한 영생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인간이심을 증거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 들일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그러기에 이 결과인 영생을 알고 소유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가 참되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보정 과거 능동태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통해 구속 사역을 행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이미 주셨으며, 영생을 주신 사실은 불변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생과 아들의 불가 분리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신 예수 안에 현시되어서 그 아들이 행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 즉 '물과 피'의 증거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생명임에도 불구하고(요14:6) 요한이 예수와 생명을 동일시하지 않고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셨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성 경: [요일5:12]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여기서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은 '에코'(*, '가지다')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이다. 요이1:9에서는 같은 뜻의 현재 동사 '에케이'(*, '가지다')가 '모시다'란 말로 번역된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란 현재 아들을 마음 속에 모신 자를 가리킨다. 아들이 생명 자체이며 아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11절; 1:2; 요11:25; 14:6) 아들을 모신 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아들의 말씀에 순종하여 높은 수준의 영적, 도덕적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그러한 삶 속에서 아들의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 아들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삶을 영위하며(3:24) 완전하게 하며(4:12) 영원한 삶을 영위케 한다.

 

?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어떤 길에서도 생명을 찾을 수 없다(요14:6; 행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마음 속에 모시지 못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한편, 본절 상반절에서는 '아들'이라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란 말이 추가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Bengel, Plummer) 혹자는 영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ooke, Marshall).

 

성 경: [요일5:13]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이것을 쓴 것은. - '이것을'의 헬라어 '타우타'(*)는 문자적으로 '이러한 것들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우타'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1-1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malley, William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요20:31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타우타'가 다양한 주제를 가리키는 복수로서 1-12절까지 언급된 영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는 서신체 부정 과거로 비록 요한이 현재 본서를 기록한다 할지라도 본서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행위이기 때문에 단순과거로 기록되어 있다.

 

?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서 본절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임을 나타낸다.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요20:31).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이 요한 일서의 본론이고 14-21절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한다(Bultmann). 본절이 요한 일서의 전체적 결론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성을 가지나 결론적 언급이 꼭 이 편지의 맨 마지막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본절은 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끝맺기 위한 결론적 언급의 서두로 간주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성 경: [요일5:14]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 여기서 '향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는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암시한다(Brooke).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아'(*)는 본서에서 네번 사용되었다. 즉 주의 재림과 심판날에 믿는 자들이 갖는 담대함과(2:28 ;4:17),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3:21,22). 본절에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구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메다'(*)는 중간태로서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요15:7, Marshall).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다(Johnson).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성 경: [요일5:15]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 본문은 14절의 반복이다. 14절의 간구와 응답은 구체적 현실성이 강조된 반면에 본절의 경우는 일반적 원리성이 강조된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는 죄악된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간구는 당연히 제외되며 앞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올바른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요11:42) 믿는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신다.
?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테카멘'(*)은 직설법 완료형으로서 기도자의 객관적 기도 사실과 그 결과를 강조한다.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진정한 간구는 이미 그 결과를 얻은 것이다. 기도의 가시적인 응답이 미래에 나타날지라도 그 기도는 이미 효력을 발생하였다(Plummer, Brooke, Dodd). 한편 본절은 '안즉...아느니라'(*, 오이다멘...오이다멘)로 되어 있어 지도자가 갖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초래하여 기도자의 확신이 더욱더 확실하게 됨을 시사한다(Stott).

 

성 경: [요일5:16]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 본절에 나타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살인이나 간음 혹은 우상 숭배와 같은 특별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그러나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로 분류한 것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이 견해는 적합하지 않다(Stott).

(2)혹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배교나 적그리스도 혹은 거짓 교사들의 죄와 같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부합되지 않는 죄를 가리키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믿는 자들이 유혹에 넘어가 범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Smalley, Johnson, Alford, Clarke). 이 견해는 이제까지 요한이 언급한 문맥과 일치한다.

 

이 두 번째 견해에 대해 혹자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게서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보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반론을 제기한다(Stott). 그러나 이 반론 역시 문맥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즉 지속되는 불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배교를 하도록 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기에 요한은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며 우상을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있으며(18,21절) 초대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배교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히6:4-6, 10:26-31). 한편 요한은 앞에서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진술한 바와 같이 본절에서도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범죄한 형제를 위한 기도는 굶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직접 제공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행위로(3:17)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기도이다(Johnson). 이러한 중재 기도를 통해서 범죄한 형제는 죄의 고백의 필요성과 서로의 용서의 필요성을 확인하며 행하게 된다(요20: 23). 이러한 중재 기도의 권면과는 달리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 즉 배교의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금하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는다.

 

성 경: [요일5:17]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모든 불의가 죄로되. - 여기서 '불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키아'(*)는 '옳지 못한 행실'을 의미한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의 문제를 언급하다가 갑자기 본문을 진술한 것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인간적으로 구분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죄들의 경중을 마음대로 구분함으로써 '죄 자체의 심각성'이 축소되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성 경: [요일5:18]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하나님게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앞절과 관련시켜서 믿는 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Calvin). (2)혹자는 '범죄치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하마르타네이'(*)가 현재에도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시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믿는 자는 계속 반복되는 범죄나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Stott).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우리가 아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멘'(*)은 18-20절에 걸쳐 세 번 사용되고 있다. 이 '오이다멘'은 지식으리 활동 상황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알다')와 달리 주로 지식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절에서 영적 지식의 확실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본절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호겐네데이스 에크 투 데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상반절의 '난자'(*, 게겐네메노스)는 완료 분사형인 반면에 본문의 '나신 자'(*, 겐네데이스)는 부정 과거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2)'나신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만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개념은 신약성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17:12; 벧전1:5; 유1:24). 요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악과 사단의 영향력에서 보전하실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요17:12,15).

 

성 경: [요일5:19]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 본절은 하나님과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단의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비록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사단이 만지지도 못할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성 경: [요일5:20]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며(1:1,2) '참된 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Smalley, Stott, Brooke).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로서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으며(요14:6)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참된 자되신 하나님의 실재를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 본문은 본절 상반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시는 중보자가 되신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은 참된 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예수께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17:21).

 

?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문자적으로 '이 사람'을 의미한다. '후토스'가 가리키는 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tott, Smalley, Brooke). (2)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uther, Calvin, Marshall, Hass, Schnackenburg, Brow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녀서 어느 하나를 지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토스'는 문맥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Johnson).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는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한 것에 대한 요한의 결론적인 공격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영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본서 서두에 언급된 것으로(1:1,2; 요11:25; 1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수신자들이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요한의 결론적 진술이다(Smalley).

 

성 경: [요일5:21]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요한 서신 전체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우상 숭배란 용어 자체가 본서에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 자체가 당시의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음을 볼 때 본절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는 영지주의 사상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을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성령과 물과 피' 세 가지 증거

(요일 5:6-8)

 

사도들은 두 가지 사실을 상세히 설명하고자 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가 반드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 했음을 증언해야 했다. 또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해야 했다. 따라서 요한이 여기서 강조하는 사항들은 바울이 강조한 것들이기도 했다. ‘성령과 물과 피’라고 하는 세 증거들이 그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성령이 어떻게 증언하시는가?

먼저 여러분은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1:33),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목격하고 증거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은 그분의 삶을 증거한다.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역을 살펴보자. 그 대답이 여기 있다.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 그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시며, 자신의 말씀을 하실 수 있고 자신의 사역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롬1:4)고 말한 셈이다.

 

그 다음으로 성령은 오순절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이를 증거하신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특히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 보내신다는 점에서 메시아이심을 보여 준다. 성령은 교회와 교회 생활을 통해 이를 증거하신다. 베드로는 유대인 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 성령의 증언과 증거가 있으며, 이 모든 방법을 통해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했다.

 

그 다음 물, 곧 세례는 어떻게 증거하는가?

우리는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임한 사실을 강조했다. 그분이 요단강에서 세례받으실 때, 비둘기 같은 형체의 성령이 그분에게 임하셨다. 또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세례를 통해 하나님은 그분이 그리스도이고 메시아이며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증언하신다. 성령과 물의 둘의 증거는 동일하며 우리로 똑같은 결론에 이르게 한다.

 

반면에, 마지막 증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이 어떻게 증거하는가?

요한이 그 점을 그토록 강조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로만 아니라 피로도 증거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우리를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 했다는 사실을 이것이 어떻게 증거하는가?

 

그분의 죽음이 부활로 연결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 부활이며, 그분의 죽음은 궁극적 증거가 된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을 볼 때 그리스도요 구주이심을 안다. 유대인은 메시아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정치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그들을 해방시킬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었지만 이로 인해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셨다.(눅24:46)

 

그들이 전한 내용은 주님이 친히 가르치신 바이기도 하다. “이르시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4-49)

 

그것은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종이 되셔야 했고, 세상의 죄악들을 지고서 징벌을 당하셔야 했다. 결국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셈이다. “십자가 죽음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일 뿐이니라”.

 

그러므로 죽음-피-은 그분이 그리스도시요 구원자시며 메시아시라는 사실에 대한 궁극적 확증이다. 예수님이 그 점을 말씀하셨고 또 증거하셨으며, 사도들에게는 그 사실을 전할 책임이 있었다. 그분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왜 죽음을 당하셔야만 하는가?”라고 자문한다. 그 이유인즉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다.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보며 다 이루었다”(19:30)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무엇이 다 이루어졌는가?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하도록 주신 일이 다 이루어졌다. 그 일을 위해 세례를 받으셨고 죽음을 당하셨다. 그 일을 위해 메시아가 되셨다. 메시아, 그리스도, 구주이신 그분의 특별한 사역이 완전히 성취되었다. 셋이 증거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셋이 동의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그리스도가 고난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

(요일 5:16,17)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사망은 육체의 사망이 아니라 영적 사망을 말한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요한이 그토록 강조해 왔던 적그리스도들의 교훈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4:1-5)

 

2장에서도 요한은 말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2:18-19)

 

여기서 요한은 단지 성령을 거스르는 신성 모독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음에 분명한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2장 서두와 히브리서 6장에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성품과 메시아 되심에 관한 성령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진정한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란 바로 그것을 뜻하며, 요한이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는 분명 불신자들 가운데서는 나타날 수 없는 죄이다. 불신자들은 고의적이거나 의도적이지 않다. 그들은 단지 눈이 멀고 무지할 뿐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할 수 없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란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다. 복음에 대한 지식과 관심과 이해력을 지니고 있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히브리서 6장에 묘사된 사람들과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었고 대체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지만 복음에 대해 등을 돌렸다. 그들은 복음을 부인하고 비방하며 “예수는 사람도 아니다. 어쩌면 그는 사기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히6:5) 수준까지 간 후에 그것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안다고 자처하지만 고의로 그 모든 것을 비방하고 거부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성령의 증거를 거절했다. 요한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10). 또한 그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증언하시되 ‘물’과 ‘피’와 ‘성령’을 통해 증거하셨다고 했다.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성령의 증거와 증언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이는 분명히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다.

 

더욱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가? 나는 의도적으로 이를 부정적으로 표현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자신이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분명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 죄를 범했다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그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경멸하고 조롱하며 자만심에 빠져 그분을 비방하며 “이 사람은 마귀이며, 그가 하는 일은 바알세불을 통한 것이다”(마3:22)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일과 관련해 걱정한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자들과 상반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심과 악한 생각들에 시달리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험이다. 마귀가 주님을 시험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4:3)이라고 했다.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이러하다. 이 악한 생각들이 여러분을 괴롭히는가?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 못지 않게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며 진리를 경멸한다. 의심과 악한 생각들에 대해 염려하고 그것들을 미워한다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빠지지 않았다. 그 반대이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미치지 않는 모든 죄-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속에도 있는 죄-에 대해서는 기도하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 그리스도가 구주가 아니라고 하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가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 그리스도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그것만을 가리키며, 거기에 미치지 않는 모든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니다.

 

 

우상숭배를 멀리하라

(요일5: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요한의 최종 조언이며 마지막 경고이다. 권위자들은 성경을 연대기적 순서로 배열할 경우 본문이 전체 성경 중 맨 나중에 해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수신자들의 삶과 장래를 너무도 염려했던 늙은 사도의 마지막 권면이다. 노인의 말은 항상 존중하고 생각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인생의 오랜 경험에 기초한 말이다. 누누구의 말이든지 그것이 마지막 말이라면 중요하며, 위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남긴 마지막 말은 최고로 중요하다.

 

1) 영적 삶을 훼방하는 가장 큰 적이 바로 우상 숭배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행위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우상 숭배의 문제이다. 우리의 행위와 행동은 항상 우리의 태도와 생각에 따른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바로 그의 존재이다”, 행위란 항상 어떤 관점의 표현이며,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난다. 그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사항은 관점, 철학, 믿음 등이다. 성경 어디서나 그 점이 강조된다.

 

바리새인들의 근본적 잘못은 614개에 달하는 율법의 세부 사항들에 전문적 식견을 발휘해 너무도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율법의 위대한 원리들을 줄곧 망각했다는 것이다. 원리는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 점이 선행되면 우리의 행위와 행동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성경은 항상 그 점으로부터 시작하며, 영적 삶에서 항상 우상 숭배가 가장 큰 위험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상 숭배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를 내리면 이러하다. 우상이란 우리 삶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나의 삶과 헌신을 사로잡는 모든 것, 내 삶에서 중심이 되는 모든 것, 중요한 듯이 간주되는 모든 것, 내게 필수적인 모든 것 등이다. 우상이란 내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나를 움직이고 고무시키며 매료시키고 자극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상이다. 우상이란 내가 섬기며 대부분의 시간과 관심과 정력과 재물을 바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내 삶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상이다.

 

내가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나 자신의 개념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다. 적그리스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임하셨다는 가르침을 부인했다. 그런 식으로 주장하고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개념이 성경적이지 않으면, 그분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갖고 그런 개념과 관념들을 섬기고 있다면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우상 숭배라고 말했다.

 

우상 숭배는 형상들 및 로마 가톨릭에서 참된 교리로 간주하는 여러 가지 사항들- 동정녀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및 그들에게 올리는 기도 등- 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만 기도를 드려야 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성 삼위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 우상 숭배는 여러 가지 형태를 띨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자신의 종교를 섬기는 일도 가능하다. 단지 자신의 종교적 의무 이행과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을 섬길 수 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라기보다 이와 같은 의무 이행이다.

 

우상 숭배는 복음주의 진영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자신의 종교뿐만 아니라 교회, 종교 단체, 특별한 공동체, 특별한 교파 혹은 자신의 특별한 관점 등을 섬길 수도 있다. 신학이 우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은 사실상 개념을 섬길 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그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인가! 예를 들어 속죄의 교리 자체에만 머무를 뿐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당하신 고난과 그분의 복되신 인격을 망각하기란 너무도 쉽다.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보다 더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모두 우상 숭배이다.

 

또 자신의 경험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자신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관해 말한다. 그들이 항상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이라기보다 자아이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조국이 우상이다. 조국을 섬기는 자들이 있다. 국가나 민족을 섬기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국가의 힘과 그것이 자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을 섬긴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산다. 그것은 그들의 우상이요 신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우상으로 섬기기 쉽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우상으로 섬길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우상으로 섬길 수 있으며,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그 자녀가 차지할 수 있다. 내 삶에서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한 사람은 누구나 우상이 된다. 내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우상이 되도록 허락했던 셈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과 직업을 섬긴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살아가며,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에서 성공을 거두고 보다 나은 지위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한쪽으로 밀쳐 버린다. 직위는 그에게 삶의 목적이다. 우상 제조자들은 손으로 우상을 만들지만 우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 우리의 죄가 그들보다 더 심각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마도 최고의 우상은 자아일 것이다. 내 생각에 다른 모든 우상이 결국에는 자아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기 조국을 숭배하는 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조국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자녀에게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항상 자아이다. 우리가 각별히 유의해야 하는 궁극적 우상은 바로 이 무서운 자아이다. 자신에 대한 관심,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일 등 ‘나 자신’과 ‘나의’ 관심과 ‘나의’ 위치와 ‘나의’ 발전과 직결되는 것, 곧 나 자신과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 영적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우상 숭배이며, 우리의 모든 활동 속으로 침투한다.

 

2) 우상 숭배에 대항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저희 자신을 지켜”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마치 우상 숭배라는 무서운 대적과 대치하는 요새 속에 있는 것처럼 자신을 지켜야 함을 의미한다. ‘여러분’이 그 일을 해야 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2-13). 구약성경에서 똑같은 것을 발견한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사26:3).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지만 그분을 향한 신자의 심지가 ‘견고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그분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악한 자가 결코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다시금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해야 한다는 단서가 따른다.

 

달리 말해 자신을 지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여러분과 내가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마음을 고정시킨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악한 자가 우리를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응당 하나님께 바쳐야 할 나의 시간과 정열을 우상에게 바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독화살을 내게 쏘는 대적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자각하고 자신을 지켜야 한다. 나의 지각과 생각을 지켜야 하며, 마음과 정신을 경계해야 한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간교한 것이고 제일 심각한 유혹이다. 따라서 부단히 경계하고 기도하며 늘 자신을 지켜야 한다.

 

3) 나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 그 원리들은 간단하다. 먼저 항상 나 자신에 관한 진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사신 바 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운명을 기억해야 하고 살아가고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19절)을 기억해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께 속하고 그리스도께 속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며 다른 어떤 것들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생과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남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내게 선물들을 주셨지만 그것들 중 무엇을 나의 신으로 삼는다면, 나는 그것들을 남용하는 셈이다. 그것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는 것이다. 그 얼마나 큰 비극인가! 그렇게 하지 않는 길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20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내게 주신 ‘지각’을 활용해야 한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하며, 따라서 세상에 속한 그 무엇을 위해 살거나 그것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상들의 진정한 특성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우상 숭배를 피하며 우상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우리가 숭배하고 찬탄하는 경향이 있는 대상들을 주목해 보자. 과연 숭배와 찬탄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숭배와 신앙에 합당한 그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끝을 향해 나아간다.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들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사용하자. 그것을 전적으로 의지할 만한 것으로 간주하지 말자. 돈, 소유, 지위, 성공, 다른 어떤 사람, 자녀, 이생과 세상에 속한 다른 그 무엇을 섬기는 사람의 영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비극적이지 않는가? 그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바로 그것이다. 궁극적으로 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길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기억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우상 숭배에 빠지려는 시험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자. 우리에게 제공된 특권이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알고 그분과 교제와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거룩하신 임재 안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과의 교제 및 교류를 깨닫기 위해 부단히 매진해야 한다. 중국 선교의 위대한 선구자인 허드슨 테일러가 매우 좋아했던 기도문이 하나 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일기장 속에 끼어 있는 종이 조각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이 기도문이 적혀 있었다. 테일러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주 예수여, 당신으로 하여금 내게 생기 넘치고 찬란한 실체가 되게 하시며

외관상 볼 수 있는 그 어떤 사물보다도 믿음의 눈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게 하시며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관계보다도 더욱 사랑스럽고 친밀한 관계이게 하소서.“

 

바로 그렇다. 우리는 그분의 친밀하심과 임재를 자각하며, 그분과 동행함을 깨달으며, 그분과 함께 또 그분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하며, 아무것도 그 누구도 우리와 그분 사이를 가로막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그리고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 ‘하나님의 사랑, 요한일서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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