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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이사야서- 표제와 색인 / 이사야서 정경 해석법

by 은총가득 2021. 4. 22.

 

이사야 성경의 표제와 색인

 

1. 표제

히브리어 사본들과 70인역에서 이사야서의 표제는 “이사야”이다. 눅 4:17에서는 이 책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로 불리워졌고, 행 8:30에도 “선지자 이사야”로 되어있다. 히브리 경전에서는 이 책이 “선지자들”이라 불리우는 항목에 속해 있고, 이 책 바로 전에는 열왕기서가 있으며 이책 다음으로는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 소 선지서”가 나온다.

 

2. 저자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이 책의 저자였다. 아모스의 아들이며 왕족의 후손인 이사야는 그의 젊은 시절, 즉 웃시야(아사랴, 790-739 B.C.)의 통치 말엽이며 요담의 섭정기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 시기는 B.C.750년에서 739년 사이였을 것이다. 그의 봉사 기간은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의 통치 기간에 걸친(사 1:1) 적어도 60년간 계속되었다. 이사야가 B.C. 686년에 단독 통치를 시작한 므낫세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과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한 사람들에 대한 므낫세의 대학살시에 이사야는 “먼저 학살당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왕하 21:16) 사실은 그의 봉사가 B.C.686년 히스기야의 사망 직후에 끝났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의 봉사는 B.C. 745년보다 일찍 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이사야 1-5장의 예언적 기별들은 웃시야의 통치 마지막 해이면서 6장의 계시를 받기 전인 B.C. 745-739년 사이에 주어진 듯하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이상을 보고 그 가운데서 이미 그에게 위탁된 거룩한 임무에 대한 격려와 확증을 깨달은 것은 그 알고 있는 당면할 역경을 고려하여(렘 20:7-9) 그의 선지자 직을 포기하려고 생각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사야는 결혼하여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하는 두 아들이 있었다(사 7:3; 8:3). 그가 주로 활동했던 예루살렘에서 그는 궁중 전도자가 되었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여러 해 동안 그는 그 나라의 정치적,종교적 고문이었다. 그의 선지자적 봉사는 미가의 봉사와 또한 북방 왕국에 속한 호세아의 간접적인 영향과 함께 히스기야의 개혁 사업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므낫세는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개혁들을 폐하고 조부인 아하스의 악한 정치를 따랐으며 참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권장하는 사람의 생명을 취하였다. 탈무드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 영감의 말씀은 이사야의 죽음에 대한 서술(사 1:1)로, 어떤이들은 “톱으로 켜는…것을 당”했다는 히 11:37의 말씀을 확증한다.

 

거의 25세기 동안 이사야서의 저자에 관한 의문은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독일의 고등 비평가들은 이사야의 기원의 일치성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주장은 결국 이사야서가 적어도 두명의 저자, 즉 소위 제1이사야인 1-39장을 기록하고 B.C. 8세기 말엽까지 일한 사람과 바벨론 유배 말기에 제2이사야 혹은 둘째 이사야인 40-66장을 다른 사람에 의하여 기록되었다고 하는 저들의 견해가 거의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바 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위에 언급한 학설을 변형한 것들도 있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사야서의 반이상을 마카비 시대, 곧 B.C. 2세기의 것으로 간주한다.

 

이사야서의 합동 저작에 관한 이들 비평가들의 주요 논쟁들 중 하나는 40-66장은 B.C. 8세기 말엽에 살고 있던 한 저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바벨론 포로가 거의 끝날 무렵에 살았던 한 저자의 견지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고레스의(사 44:28; 45:1) 이름이 언급된 것은 이 장들(역자주: 사 40-66장)이 고레스 시대, 즉 B.C. 6세기 후반에 기록된 결정적인 증거라고 저들은 생각한다. 이 개념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언적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전체 가설에 기초된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가 고레스를 언급한 사실은 이 책에 대한 후기설을 지지하는 논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예지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미래에 대한 예언들이 있다. 예언들 중에는 이스라엘과 시리아 통치자들의 몰락(사 7:7, 8, 16), 두로의 멸망(사 7:23), 앗시리아의 패망(사 14:25; 31:8; 37:6, 7, 29, 33-35), 바벨론의 굴욕(사 14:4-23), 애굽을 신뢰함의 어리석음(30:1-3; 31:1-3), 고레스의 사업(사 44:28; 45:1-4)등에 관한 것들이 있다. 참으로 이사야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웅변적인 증거로 그의 예지를 설명한다(사 41:21-23; 42:9; 43:9; 44:7, 8; 45:11, 21; 46:9, 10; 48:3, 5-8).

 

이 책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들 사이에는 사고(思考)와 표현의 일치성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의 한가지 특성은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이사야서에 25회 나타나고, 구약 다른 곳에서는 6회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 표현이 이사야서 어느 한 곳에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니라 1-39장 사이에 12번, 40-66장까지 13번 나온다. “이스라엘의(혹은 야곱의) 전능자”라는 칭호는 오직 이사야서에만 나타난다(사 1:24; 49:26; 60:16). 이사야서의 처음 부분과 나중 부분 사이의 문체와 언어의 유사성들은 추측된 상이점들 보다 휠씬 더 강한 인상을 준다.

 

사 40-66장에서의 주제 내용과 문체가 사 1-39장의 것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주제는 양쪽 부분에 일관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정치적, 영적 대적들로부터의 구원과 영육간 압제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주는 도움이시다” 혹은 “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사야는 회개와 개혁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는 죄와 수리아와 앗수르, 그리고 다른 적들로부터의 구원을 제시한다. 후반부에서는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과 오실 구주를 믿음으로 마침내 이루어질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을 다루고 있다. 주제 내용에 있어서 명백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와 목적의 한 기본적인 통일성이 책 전체에 걸쳐 흐른다.

 

이 책의 첫 부분은 산헤립 치하의 앗수르 군대들로부터의 구원으로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예언적인 안목으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을 내다본다. 유사한 과정, 곧 B.C.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포로에 대한 예측으로부터 포로에서 회복될 때까지의 과정이 에스겔서에도 나온다. 더우기, 이사야의 처음 장들은 이사야가 그의 젊은 시절에 전한 기별을 기록한다. 이 책의 뒷장들은 예언적인 통찰력과 연령에 따른 문체의 노련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결과 이 책의 첫 부분에 나오는 훌륭한 문장들보다 더욱 사려깊고 위엄있는 표현으로 탁월한 명작을 구성한다.

 

이사야의 앞 부분은 유다에 대한 앗수르의 침략과 관련된 것이고, 뒷 부분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을 예기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명은 북방 왕국이 앗수르의 포로로 추방됨에 따라 남방 유다를 굳게 붙드는 것이었다. 그때의 지도자들은 이사야를 통하여 당시 사건들의 성질과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유다가 북방 왕국의 비참한 운명에서 교훈을 얻고, 그 결과 진정한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앗수르 침략의 추세는 마침내 작은 유다 왕국만을 제외한 모두를 점령하였으며, 하나님의 현저한 역사로 앗수르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문 바로 앞에서 퇴각되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저들의 악한 행위들을 고치지 않으면 비슷한 운명이 저들을 기다린다고 하는 역사의 암시적인 훈계와 더욱 뚜렷한 예레미야의 경고에 유의하는데 실패했다.

 

따라서 이사야는 40장을 시작하면서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이지만 최근 앗수르에서 얻은 경험과 같이 언젠가는 분명히 바벨론으로부터 구출될 것이라는 확신을 예기한다. 더욱이 국가적인 원수들로부터의 구출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죄악의 지배로부터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두 구분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점들은 변모하는 역사적 사건의 배경에 기초하여 예언의 주제 내용면에서 생겨난 변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사야의 문체가 바뀌어질 수 있는 가능성 등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사야서의 상당한 부분을 마카비 시대의 것으로 정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 책 전체가 단권으로 존재했다고 하는 증거가 있다. 집회서(외경서 중의 하나)의 저자 지저스 벤 시라크(Jesus ben Sirach)는 이사야서의 많은 부분을 그 이름이 지니고 있는 선지자의 것으로 돌렸다. 이사야서가 그리스도 이전 수백년 동안 단권으로 간주되었다고 하는 가장 감명적인 증거는 그 시기의 것으로 1947년 사해 부근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고대 성경 사본들에 있다. 이것들 중 “1QIsa”(역자주:이사야 전편)와 “1QIsb”(역자주:이사야 후편)로 알려진 두개의 이사야서 두루마리가 있다. 거기에는 1-39장이 40-66장과 따로 분리되어 그 자체들만으로 존재한 적이 있었다는 어떠한 확증도 없으며 오히려 모든 증거는 그 반대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의 이름을 지닌 책 전체의 저자임을 믿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신약에서 이사야서를 자주 인용하지만 1-39장과 40-66장사이에 어떠한 구분도 짓지 않는다. 신약에 인용된 이사야의 구절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사야서의 언급,

신약에 인용된 절

 

 

1:9

롬 9:29

 

6:9, 10

마 13:14, 15

 

6:9, 10

요 12:40, 41

 

6:9, 10

행 28:25-27

 

9:1, 2

마 4:14-16

61:1, 2

눅 4:18, 19

 

65:1, 2

롬 10:20, 21

 

10:22, 23

롬 9:27, 28

 

11:10

롬 15:12

 

29:13

마 15:7-9

 

29:13

막 7:6, 7

 

40:3

마 3:3

 

40:3

막 1:3

 

40:3

요 1:23

 

40:3-5

눅 3:4-6

 

42:1-4

마 12:17-21

 

53:1

요 12:38

53:1

롬 10:16

 

53:4

마 8:17

 

53:7, 8

행 8:32, 33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사야서를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단권의 책으로 받아들인 것은 확실하며 우리도 그와같이 받아들이는 것이 대체로 안전하다. 특별히 요 12:38-41에 그리스도께서 사 6:9, 10; 53:1을 언급하여 인용하신 것을 보면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책의 양쪽 부분 모두의 저자로서 이사야를 인정한다. 또한 롬 9:27, 29, 33; 10:15, 16, 20, 21에서도 바울은 그와 같이 인정한다.

 

이사야의 주석가들은 현재 이전에 알려진 다른 어떠한 히브리 구약 사본들보다 일천년 이상이나 오래된 이 구약 성경의 히브리 사본 두개를 마음대로 소유하는 다행스런 입장에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사해 두루마리들로 알려진 매우 귀중한 이 문서들은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이것들에 대한 발견, 일반적인 특성 및 중요성과 1947년 이래로 사해 근처의 동굴에서 발견된 다른 히브리 두루마리들에 대해서는 여기서의 설명은 피하기로 한다. 두 이사야의 두루마리들은 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에 가까운 첫번째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공식적인 명칭으로서 “1QIsa,” “1QIsb”와 같은 부호를 받았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수리아 수도원의 소유였으나, 1954년 이스라엘 정부로 넘어가 완전히 보존된 두루마리는 “1QIsa”부호가 주어졌다. 히브리 대학교에 소장돼 있는 다른 단편적인 이사야 두루마리는 공식 부호 “1QIsb”를 받았다.

 

두 사본들은 모두 에세네파에 속한 장서의 일부였다. 이 책들은 그 동굴과 키르벳 쿰란에 대한 과학적 발굴에서 드러난 바와같이 제1차 유대 전쟁(A.D. 66-73)이 종료되기 전, 보존을 위하여 한 동굴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러가지 증거들이 시사하는 바와같이 B.C. 2세기 혹은 1세기 보다 휠씬 이전에 기록되어졌다. “1QIsa”는 “1QIsb”보다 약간 오래된 것 같다.

 

“1QIsa”안에는 이사야서의 첫절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들어 있다. 그것은 밀러 부로우스(Millar Burrows)가 현대 히브리 문자로 음역한 복사판으로 출판되었다 이 두루마리를 다루는 수 많은 학구적 논문이 발표되었으므로 1954년말까지 출판되지 않았던 “1QIsb”보다 이것(역자주:1QIsa)을 다소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대체적으로 “1QIsa”로 알려진 그 두루마리는 알려진 이사야서의 마소라 본문과 상당히 일치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필기사는 전문가가 아니었으며 그 필체도 “1QIsa”의 것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그는 필기상의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어떤 부분에서는 받아쓰기 형식으로 기록된 듯하며, 약간의 오자들은 잘못 청취되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준다. 또한 대본으로 쓰여진 사본에도 어떤 탈문(脫文)이나 공백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따라서 그 필경사는 누락된 구절이 나오면 그의 사본에 공백을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보다 완전한 다른 사본을 보고 그 빠진 부분을 필시하였을 것이다. 때로 그 필경사는 누락된 내용의 양을 실제보다 적게 판단하여 그것을 위해 남겨둔 공백이 충분치 못했다. 그 결과 삽입된 부분들이 가끔 난외로 흘러나갔다. 그 본문(역자주:1QIsa)에서 누락된 몇 귀절들은 필경사, 혹은 받아쓰기 하는 사람의 눈이 어떤 한 낱말에서 조금 뒤에 나오는 같은 낱말까지 뛰어넘어 그 사이의 모든 낱말들을 빠뜨린 것으로 보인다. 필경사들의 이 흔한 실수는 신약 사본들 중에서 빈번한데 이를 호모에오텔류톤(homoeoteleuton)이라고 한다. 본문에 첨가된 것들은 불과 몇 단어를 초과하지 않을 정도로 극소수이며 간단하다. 본문의 상이점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거의가 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며 본문의 의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동일한 책 바로 후에 기록된 히브리 사본보다 일천년 더 오래된 사본에서나 예기될 수 있을 정도로 수천개의 철자상 변형들이 있다.

 

“1QIsb”는 다른 사본들보다 휠씬 불완전하다.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대학교 교수 A.L. 수케닉(A.L. Sukenik)씨가 상인들 혹은(이사야 사해 사본을 발견한:역자주) 아랍 유목민들로부터 그것을 입수했을 때, 그것은 한심한 상태에 있었다. 그것을 펴보니 그 두루마리에는 우리들을 위해 사 10, 13, 16, 19, 22, 26, 28-30, 35, 37-41, 43-66장과 같은 단편들이 보존되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37장까지의 본문 자료를 포함하는 단편들은 매우 작기 때문에 비록 매 페이지마다 양피지에 크고 작은 구멍이 나서 본문에도 역시 구멍이 나 있긴 하지만 비교적 잘 보존된 그 책의 마지막 부분보다 정보 제공에 미흡하다. 이 두루마리의 형편없는 보존 상태가 특별히 안타까운 것은 그 남아있는 것들이 질적인 면에 있어서 “1QIsa”보다 휠씬 우월하기 때문이다.

 

“1QIsb”사본은 필체가 아름답고 필기상의 실수가 거의 없는 노련한 필경사의 작품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루마리의 보존은 그 없어진 부분들이 맛소라 본문과의 현저한 일치성에 있어서 현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확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보존된 부분들은 마소라 본문과 거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비평적 학자들은 저들이 휠씬 후기의 것으로 믿었던 본문상의 특성을 보이는 한 두루마리의 고대성을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둘째 이사야 두루마리는 그 본문이 그리스도 시대 이래로 실제로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전달되어져 왔음을 나타낸다. 좀 부주의하게 필사된 본문도 그 같은 시대에 존재했었다는 것이 동일한 기원의 에세네파 도서에 속한 다른 이사야 두루마리(1QIsa)에 의하여 밝혀진다. 히브리 대학교의 이사야 두루마리(1QIsb)는 엔. 아비가드(N. Avigad)의 편집하에 수케닉씨에 의해서 (그의 사후에) 히브리어 저술(Osar hammegiloth haggenuzoth)로 출판되었다(Jerusalem:The Bible Institute and the Hebrew Uni-versity, 1954).

 

3. 역사적 배경

 

이사야서는 시기가 명확히 정해져 있으며 그 만들어진 기간은 근동 역사에 잘 알려져 있다. 이사야는 제 6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상이 주어지기 전에 그의 선지자 직에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봉사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통치 시대에 수행되었다(사 1:1). 웃시야는 B.C. 739년경에 죽었고 히스기야는 B.C. 686년에 죽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위를 계승하였다. 이 기간동안의 앗수르 왕들은 다음과 같다. 디글랏빌레셀 Ⅲ세(745-727), 살만에셀 V세(727-722), 사르곤 Ⅱ세(722-705), 산헤립(705-681), 에살핫돈(681-669). 이 왕들은 앗수르에서 나온 가장 강력한 통치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앗수르가 곧 동방 세계의 완전한 지배권을 잡을 듯이 보이는 앗수르의 전성기 동안에 그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디글랏 빌레셀 Ⅲ세는 주변 나라들에 대한 일련의 정복을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근동 국가들이 앗수르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앗수르는 세계의 강력한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어떤 나라도 그 세력에 맞설만큼 충분한 힘이 없었다.

 

B.C. 745년 디글랏 빌레셀은 바벨론을 침공하였고 B.C. 744년에는 북동 지방을 향하여 진군하였으며,

 

B.C. 743년부터 B.C. 738년까지는 이스라엘의 므나헴과 또한 “유다의 아사랴”(웃시야일 것임)와의 전쟁을 유발시킨 서북과 서쪽 지방에 대한 거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 아사랴는 앗수르가 지중해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데 목적을 둔 서방 국가들의 대 연합에 있어서 주도적인 정신을 가져온 듯하다.

 

B.C. 737년 디글랏 빌레셀의 원정은 메데 지방을 대적하여 북동쪽으로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는 B.C. 736년에 다시한번 북서쪽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서방 아시아를 완전히 그의 지배하에 두기 위한 필사적인 5년 전쟁에 돌입했다.

 

B.C. 735년 그의 원정은 현재의 아드메리아 지역에 있는 우라르투(Urartu)로 향하여졌으며, B.C. 734년에는 블레셋을 대항하여 싸웠고, B.C. 733년과 B.C. 732년에 다시 다메섹(Damascus)을 대항하여 싸웠다. B.C. 731년 그는 한 번 더 바벨론에 있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B.C. 730년 그는 본국에 체재하였다. 그러나 그는 B.C. 729년 다시 바벨론에 돌아가 “벨(역자주: 바벨론의 주신(主神) 마르둑)의 권세를 취하여,” “불”이라는 칭호로 군림하는 바벨론의 왕이 되었다. B.C. 727년에는 다메섹과의 또 다른 싸움이 있었다.

 

살만에셀 Ⅴ세에 관한 기록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그의 주요 원정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B.C. 725년부터 B.C. 723년에 걸쳐 3년간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으며, 이때 그 도성이 함락되어(723-722 B.C.) 이스라엘 국가는 영원히 사라졌다.

 

사르곤 Ⅱ세는 B.C. 723-722년 사마리아를 함락시킨 군대를 지휘하였을 것이다. 그는 B.C. 722-721년에 통치를 시작하였고, 앗수르 역사상 어쩌면 가장 강력한 군 출신 군주가 되었다. 그는 북동 지방, 바벨론, 북서 지방, 그리고 지중해 연안국들에 대한 일련의 원정을 감행하였다. B.C. 720년, 북서쪽과 서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였고, B.C. 715년에는 한 아랍 족속들을 정복하였으며 알려지지 않은 여러 애굽 통치자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는 B.C. 711년, 아스돗(사 20:1참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시키기 위해 다르단을 파송하였다(왕하 18:17). B.C. 709년 사르곤은 바벨론의 왕이 되었다.

 

산헤립은 B.C. 705년에 통치를 시작하였으며 B.C. 703년에는 바벨론의 므로닥 발라단을 패배시켰다. B.C. 701년에 그는 그 유명한 “제3차 원정”에 돌입하였는데 그것은 베니게와 블레셋과 유다를 대적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모압, 암몬, 그리고 에돔을 포함하는 지중해 지역의 모든 아시아 국가들이 정복 당했으며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되었다. 하지만 그 원정은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은 사실 때문에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산헤립은 분명히, 앗수르의 기록 중에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원정(왕하 18:13)으로 서방에 다시 와서 예루살렘을 위협하였으나 그의 군대가 주의 사자에게 전멸당한 후 앗수르로 강제 퇴각하였다(사 37:36, 37).

 

애굽과 바벨론은 이 시기 동안에 비교적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앗수르의 공격에 대항하여 힘을 썼다. 바벨론의 므로닥 발라단은 사르곤과 산헤립 통치 기간 동안에 특히 활동적이었고 애굽의 디르하가는 유다에 대한 산헤립의 제2차 침공시 그를 대항하는 한 군대를 이끌었다(왕하 18:13; 19:9).

 

4. 주제

 

이사야는 불안한 세상에 살았다. 유다와 이스라엘에게는 모두 위험한 위기의 시대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악의 길로 깊이 타락하였다. 유다의 아사랴(웃시야)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Ⅱ세 치리하에서 두 나라는 강대하게 성장하고 번영하였다. 그러나 물질적인 번영은 영적인 쇠퇴를 가져 왔다. 그 백성들은 하나님과 그의 의로운 길들을 저버렸다. 사회적 도덕적 상태를 두 나라가 모두 더욱 그러하였다. 재판관들은 보수를 위해 재판하고 정치가들은 주로 향락과 사치에 치중하였으므로 도처에 그릇된 판결이 있었다. 욕심과 탐욕과 악덕이 그 당시 유행이었다.

 

부자는 더욱 부하여지고 가난한 자들은 더욱 가난하게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빈곤의 심연에 빠졌으며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되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도덕적 상태들은 이사야와 당대의 선지자들인 미가, 아모스, 호세아에 의하여 생생하게 서술되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저버리고 이방 신들을 좇았다. 그 나머지 사람들도 종교의 외적인 형식에는 집착하였지만 그것의 참된 의미와 능력에는 전혀 무지하였다.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그러한 상태들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의의길을 따르기로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길을 따른 민족으로부터 자신을 돌이키실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아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 그리고 그의 의와 공평과 사랑의 길들에 관한 이상을 받았다. 그는 보좌에 좌정하시어 높임을 받으시는 지고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지상의 일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들이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언제나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지만 악행을 고집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는 그의 의로운 품성을 보았다.

 

의의 길은 생명과 평화와 번영의 길이지만 사악한 길은 고난과 두려움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종교의 참된 의미와 하나님의 진실된 성품을 가르치고자 노력하였다. 좀 더 순결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호소하였다. 그 나라는 악행을 계속함이 급속한 멸망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에 관한 경고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판결을 선고하며 재판에서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빈곤한 자의 권리를 빼앗으며, 과부들을 저들의 희생물로 삼고, 고아를 약탈하는 위선자들의 나라에 대한 심판을 이행하시기 위한 그의 도구로 앗수르 사람들을 사용하실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재난과 황폐의 날이 확실하고도 신속히 임할 것을 명백히 하였다.

 

이사야는 전세계가 한 하나님, 곧 히브리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상 모든 나라에게 의를 요구하시며, 저들의 악행을 고집한 모든 자들을 심판하실 분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주의 심판은 앗수르와 바벨론, 블레셋과 애굽, 그리고 수리아와 두로에 내려질 것이었다. 끝내는 온 지구가 그 죄과로 인해 완전한 멸망을 가져올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실 것이며, 그 백성들은 완전한 기쁨과 평화의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었다.

 

이사야는 선지자요, 또한 정치가였다. 그는 그의 조국을 깊이 사랑하였으며 국가적 이익과 위배되는 여하한 행위에 대해서도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다. 그는 애굽의 도움을 의존하는 어리석음을 보고 유다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애굽 현자들의 조언이 혼란케 되며 도시와 도시들이 서로 싸우고 모든 사람들이 저들의 이웃과 분쟁하므로 애굽 자체가 분열될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였다.

 

이사야는 세력을 위해 세상의 동맹국들에 의존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충고하였다. 그는 인간들의 조언은 실패하게 될 것이며 오직 저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두는 자들만이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저희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가운데서 그 힘을 찾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하심을 거절하였다. 임박한 멸망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주님께 충성하므로 구원받을 한 남은 무리에 관해 계속해서 언급하였다. 이 남은 무리를 제외하고 주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철저하게 소멸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남은 자들은 신뢰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에게 두며 그의 법도 안에서 행하는 것을 배울 것이었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서의 주(主)를 말한다. 그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그와 같이 거룩하기를 요구하시며, 또한 의로우시므로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다.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의의 성읍”(사 1:26)이 될 새 예루살렘을 앞서 바라보았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거룩함이란 의식의 철저한 준수나 종교상의 예법들 이상의 것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것들은 성품의 개혁과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이 수반되지 않으면 여호와께 가증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관한 한 이사야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절박한 멸망을 피할 것이라고 예기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다에 대해서는 임박한 위험으로부터의 도피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약속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유일한 안전의 길은 하나님과 그의 의롭고 거룩한 길로 돌아오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였다.

 

이사야는 그의 책 후반부인 40-66장에서 성경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한 가장 두드러진 소묘(素描)들 중의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난당하시는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사실적인 영감적 해설이 기록되어 있다(사 53장).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대함과 선하심에 관한 성경상의 가장 계시적인 묘사가 여기에 있다. 또한 교회의 위대한 사명을 밝히고 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의 빛”으로 오실 것과 그의 구원의 기별이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게”(사 49:6)될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시온에게 깨어날 것과 그의 아름다운 옷을 입을 것을 명하였으며(사 52:1), 시온이 열방을 얻고 땅의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할 영광스러운 때를 위한 준비로서 그 장막터를 넓히며 처소의 휘장을 널리 펼 것을 요청하였다(사 54:2, 3). 그는 바로 주의 영광이 시온에 임할 것이며 열방은 그의 빛으로, 열왕은 그의 비취는 광명으로 나아올 것이므로 시온에서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명하였다(사 60:1-3).

 

이사야는 메시야적인 선지자로 불리워지는 것이 적절하다. 다른 어떠한 선지자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하심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 사명에 관하여, 그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에 관하여 그처럼 명백한 표현을 갖지 못한 것 같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유명했던 선지자들 중의 거물로서, 그리고 그의 저술이 모든 선지자의 기록들 가운데 걸작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5. 개요

 

Ⅰ. 국가적 배교와 투쟁하도록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음 1:1-6:13

 

1. 서론: 이사야의 선지자적 봉사 1:1

 

2.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호소 1:2-31

(1) 이스라엘의 반역과 하나님의 교정하시는 징벌 1:2-9

(2) 종교적 형식주의의 무익함 1:10-15

(3) 순종에 대한 축복과 계속적인 반역에 대한 심판 1:16-31

 

3.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그 실패 2:1-5:30

(1) 이방인들을 수확함 2:1-5

(2) 유다의 실패 2:6-9

(3) 하나님의 큰날 2:10-22

(4) 유다 지도자들의 실패 3:1-15

(5) 백성들의 상태 3:16-4:1

(6) 의로운 남은 자들에 대한 구속과 회복 4:2-6

(7) 유다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 5:1-7

(8) 이스라엘의 범죄 목록 5:8-25

(9) 하나님의 보복 5:26-30

 

4. 이사야: 배교한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사자 6:1-13

(1) 하나님의 위엄에 관한 이상 6:1-7

(2) 이사야의 부르심과 임무의 확인 6:8-13

 

Ⅱ. 수리아와 앗수르로부터의 구원 7:1-12:6

 

1. 아하스에 대한 이사야의 기별 7:1-7:25

(1) 이스라엘과 수리아로부터의 구원이 약속됨 7:1-9

(2) 구원의 징조 7:10-25

 

2. 유다에 대한 앗수르의 침략이 예언됨 8:1-10:34

(1) 침략의 징조 8:1-8

(2) 유다가 인간이나 권력보다 하나님을 신뢰함 8:9-22

(3) 메시야의 오심을 통한 궁극적인 구원 9:1-7

(4) 계속적인 완고함과 교정하시는 징벌 9:8-10:4

(5)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인 앗수르의 멸망 10:5-34

 

3. 메시야의 왕국 11:1-12:6

(1) 메시야를 통한 구원과 회복 11:1-9

(2) 이방인들과 유다의 포로들을 모음 11:10-16

(3) 구원의 노래 12:1-6

 

Ⅲ. 바벨론과 다른 나라들로부터의 구원 13:1-23:18

 

1. 바벨론에 관한 엄숙한 기별 13:1-14:23

(1) 바벨론의 황폐 13:1-22

(2)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 14:1-3

(3) 바벨론 왕의 몰락 14:4-23

 

2. 앗수르에 대한 엄숙한 기별 14:24-28

3. 블레셋에 대한 엄숙한 기별 14:29-32

4. 모압에 대한 엄숙한 기별 15, 16장

5. 다멕섹(수리아)에 대한 엄숙한 기별 17장

6. 에디오피아에 대한 엄숙한 기별 18장

7. 애굽에 대한 엄숙한 기별 19, 20장

8. 바벨론에 대한 엄숙한 기별 21:1-10

9. 두마(세일)에 대한 엄숙한 기별 21:11, 12

10. 아라비아에 대한 엄숙한 기별 21:13-17

11.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엄숙한 기별 22:1-25

12. 두로에 대한 엄숙한 기별 23:1-18

 

Ⅳ. 사단의 지배로부터의 구원: 하나님의 큰날 24:1-35:10

 

1. 땅의 황폐 24장

 

2.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 25-27장

(1) 찬양과 승리의 노래 25장

(2)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노래 26:1-27:1

(3) 주의 포도원에 관한 노래 27:2-6

(4)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모음 27:7-13

 

3.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엄숙한 경고 28:1-29:24

(1) 에브라임(이스라엘)에 재난 28:1-6

(2)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28:7-29

(3) 다윗성 아리엘(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29:1-17

(4) 야곱의 구속과 회복 29:18-24

 

4. 애굽을 의지함의 어리석음 30:1-31:9

(1) 애굽을 의지하는 자들에 대한 화 30:1-14

(2)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 대한 자비 30:15-33

(3) 애굽과 앗수르의 패배 31:1-9

 

5. 메시야의 왕국 32:1-35:10

(1) 한 왕의 의로운 통치 32:1-33:24

(2) 여호와의 보수의 날 34:1-17

(3) 새 땅의 노래 35:1-10

 

Ⅴ. 역사의 중간 시대 36:1-39:8

 

1. 앗수르의 유다 침략 36:1-37:38

(1) 히스기야에 대한 랍사게의 첫번째 기별 36:1-37:7

(2) 히스기야에 대한 랍사게의 두번째 기별 37:8-13

(3) 히스기야의 애원 37:14-20

(4) 구원의 약속과 그 성취 37:21-38

 

2. 히스기야의 질병과 회복 38:1-39:8

(1) 질병과 건강의 회복 38:1-22

(2) 므로닥 발라단의 사절단 39:1-8

 

Ⅵ. 하나님의 계획이 승리함: 구원과 구원자 40:1-53:12

 

1. 하나님의 목적들을 신뢰하기 위한 확고한 근거 40:1-47:15

(1) 하나님을 신뢰함: 그의 말씀은 영속함 40:1-41:25

(2)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42:1-25

(3)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43:1-44:23

(4) 하나님의 “종” 고레스 44:24-46:13

(5) 바벨론의 몰락 47:1-15

 

2. 이스라엘이 그의 메시야적 역할을 성취하도록 도전받음 48:1-52:12

(1) 포로 생활의 교훈을 배우라는 도전 48:1

(2) 열국 앞에 하나님을 드러내라는 도전 49:1-26

(3) 인간 지혜의 권고들을 버리라는 도전 50:1-11

(4) 하나님의 부르심에 과감하게 응답하라는 도전 51:1-52:12

 

3. 하나님의 고난당하시는 “종” 메시야 52:13-53:12

 

Ⅶ. 이방인들을 수확함 54:1-62:12

 

1.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역할 54:1-56:12

(1) 이스라엘의 기업: 하나님을 위하여 세상을 얻음 54:1-17

(2)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 구원의 기별 55:1-13

(3)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 56:1-12

 

2. 개혁하라는 부르심 57:1-59:21

(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간절한 탄원 57:1-21

(2) 개인적 신앙의 참된 정신 58:1-14

(3) 죄를 버리라는 간절한 탄원 59:1-21

 

3. 열방에게 빛이 되라는 간절한 탄원 60:1-62:12

(1)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운명의 때 60:1-22

(2) 이스라엘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정해짐 61:1-11

(3) 충실한 봉사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상 62:1-12

 

Ⅷ. 메시야의 왕국이 건설됨 63:1-66:24

 

1. 하나님의 큰날 63:1-65:16

(1) 보수의 날 63:1-6

(2)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63:7-19

(3) 변화와 구원을 위한 기도 64:1-12

(4)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책망하시고 용납하심 65:1-16

 

2. 하나님께서 지구를 회복하심 65:17-66:24

(1) 새 땅 65:17-25

(2)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자비 그 대적들에게 임하는 고통 66:1-21

(3) 우주 앞에 드러난 하나님의 공의 만민이 그를 경배함 66: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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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의 정경 해석법

 

구원하시는 하나님

폴 하우스(장세훈 역)

 

이사야서1)는 새로운 신학 사상을 소개함과 아울러 이미 소개된 신학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이사야서의 능력과 견줄만한 구약본문들은 거의 없다. 전략상 후기 선지서의 첫 부분에 위치한 이사야서는 오경과 전기 선지서에 이미 소개된 주요 사상들을 조명한다. 이사야는 언약수여와 언약파괴, 택한 백성을 위로하고 경고해야할 선지자들의 역할,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및 다윗 언약에 대해 논의한다. 동시에 이사야의 예언은 “남은 자”, “미래에 이루어질 다윗 왕국의 영원한 본질”, “다윗 왕국 당시의 죄악들”, “하나님과 이방인 간의 상호교제”를 서로 연결시켜준다. 이사야서는 옛 사상과 새 사상을 서로 조화롭게 엮어냄으로 말미암아 심히 중요한 신학문헌이 된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및 열왕기는 선지자들의 사역을 소개한다. 그러나 저술을 통해 성서신학에 기여한 선지자들의 공헌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12 선지서에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공헌은 여러 국면으로 나타나며, 다양한 특성들과 배경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다양성은 다소의 공통 주제들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함이 옳다.

 

나피에르(B. D. Napier)는 선지자들이 7가지 기본 주제들에 역점을 둔다.2)

  첫째, 선지자들은 그들의 말과 그들의 상징적 행동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장한다. 이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것이며, 그러므로 이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둘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조명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으며, 아브라함, 모세 및 다윗 언약의 상속자로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심으로 그들을 축복하셨다.

  셋째, 선지자들은 이 택한 백성들이 준수해야 할 언약을 파괴함으로써 여호와를 거스려 반역했다고 주장한다.

 넷째, 이러한 언약파괴로 말미암아, 여호와는 레 26장 및 신 27-28장의 약속과 같이, 이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성품은 죄가 계속 만연됨을 허락지 않으신다.

 다섯째, 이러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여전히 이 택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심판은 결코 하나님의 최후선언이 아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긍휼은 구속이 심판의 고통으로부터 일어날 것임을 의미한다. 심판은 항상 갱신을 위해 발생한다. 즉, 심판 이 자체는 결코 마지막이 될 수 없다.

일곱째, 이와 같은 갱신은 온 열방에게로 확대될 것이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창조주가 아닌, 온 열방과 온 인류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완전하고도 필수적인 심판의 결과로부터 흡족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회복은 온 만물을 포함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상들은 수많은 이슈들로 인도한다. 이러한 주제들이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발생할 것인가는 예언들을 통해 여러 방식으로 연구될 것이다. 이 같은 주제들이 배양된 역사적 정황들은 변화한다. 한 정황 속에서 사상을 창출하는 선지자들은 동일한 정황 속에 거하지 않는다. 선지서들이 선지자 개개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과 관련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자연스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예언서의 독특한 신학적 관점은 항상 일정하다. 다양한 역사적 정황, 다양한 저자 그리고 다양한 청중은 사건의 구성, 사건의 본질 및 창조적 활력을 더해줌과 아울러,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제공해 준다.

 

일군(一群)의 후기 선지서는 오경 및 전기 선지서에 기술된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해준다. 이와 같은 해석은 여호수아~열왕기의 관점과 일치한다. 하나님을 대적한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반역은 심판을 초래한다. 그러나 결코 여호와를 저버리지 않는 신실한 남은 자들은 항상 살아남는다(왕하 17:3 참조). 동시에, 후기 선지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미래에 역사 하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를 넘어간다. 선지자들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인식하면서 장차 일어날 미래를 예고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었던 선지자들은 율법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았던 미래 사건들을 미리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에 예고된 바벨론 유수와 같은 미래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사야의 저자권 및 연대문제를 논의한 지 200년이 지난 후, 이 같은 논의의 방향은 20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서로 다른 학자들 간의 신학적 대화를 마련해 준다. 이 시점에서, 비평학자들과 보수주의 학자들 모두는 이사야서를 히브리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본문으로 취급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의 문학적 통일성에 관심을 기울인다.3) 또 다른 학자들은 이사야서의 신학적 통일성에 집중하고 있으며,4) 어떤 신학자들은 이사야의 편집구조에 역점을 둔다.5) 또 어떤 학자들은 정경문헌으로서의 이사야서와 그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6) 저자권 문제에 대한 불일치는 여전히 논쟁의 핵심사안이지만 이와 같은 차이가 이사야의 신학적 통일성을 늰?영하는 요소들을 더 이상 토론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차일즈(Brevard Childs)와 모티어(J. A. Motyer)는 누가 전 이사야를 기록했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나 차일즈는 비록 이사야가 그 책 전체를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해도, 정경은 이사야서를 마치 이사야가 전체를 기록했었던 것 인양 취급하며, 또한 신앙 공동체는 전통적으로 이사야서를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읽고 있다고 기술한다.7) 모티어(Motyer)는 비평학자들이 제기한 이슈들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이 같은 이슈들이 이사야서를 하나의 신학적 통일체로 보려는 견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8) 차일즈와 모티어는 이사야서 전체와 각 장들이 어떻게 통일성을 이루는가를 살펴보면서 이사야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시도해야만 한다고 결론 내린다. 본서는 모티어의 해석에 동조하면서도, 이사야의 정경적 통일성을 추구하는 모든 학자들의 견해를 긍정한다. 이사야서를 여러 부분으로 분리하려는 태도는 본 예언서의 신학적 성과를 공정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다.

 

이사야 신학에 관한 전통적 혹은 비 전통적 해석을 막론하고, 하나의 주목할 만한 일치점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사야의 주 핵심 요지가 “하나님의 거룩”이라고 진술한다.9) 이 “하나님의 거룩”개념으로부터 몇 몇 다른 주요 핵심 사상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예를 들면, 존 오스왈트(John Oswalt)는 “하나님 홀로 위대하시고 거룩하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신을 경배하는 행위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고 말한다.10) 달리 말하자면, 여호와의 거룩, 혹은 그의 유일성은 “다른 신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크리스토퍼 노트(Christopher Noth)의 말처럼, 이사야서, 특히 40-66장은 뚜렷한 유일신 사상을 부여준다.11) 존 스키너(John Skinner)는 “어떤 의미에서 이사야는 가장 철저한 유일신론자이다”고 말한다.12)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존재하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가 되신다. 존 와츠(John Watts)는 포로기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할 때 여호와는 누가 온 만물을 창조하셨는가를 이스라엘에게 상기시켜주신다고 지적한다.13)

 

분명 창조주는 믿음과 물리적 번영을 지속하려는 그 백성들을 계속 유지케 하실 수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속하신 창조주는 그 백성들을 새 출애굽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즉, 창조주는 온 사방으로부터 그 백성들을 불러모아 그 본토로 다시 이끌어 주실 것이다.14) 이 새 출애굽은 예루살렘의 회복―예루살렘의 회복은 하나님의 처소인 시온의 중요성을 더해준다―을 가져다 줄 것이다.15)

 

비록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해도, 또한 여호와는 죄인들을 주의 날에 심판하실 것이다. 여호와를 반역하는 자들로부터 구별된 남은 자들은 시공간 속에 일시적으로 등장하겠지만, 장차 훗날에는 영속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전 역사(과거, 현재 혹은 미래)를 주관하심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와츠는 “‘여호와는 역사의 주재(主宰)이시다’는 주제야말로 이사야 신학의 핵심이다”고 결론짓는다.16)

 

이사야가 강조하는 “도래할 다윗과 같은 구원자”사상은 이 모든 주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 구원자가 왕으로 혹은 종으로 묘사되든 간에, 전 성서신학은 이 구원자에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며, 특별히 신약성서는 이 사람에 깊이 집중한다.17) 이 다윗과 같은 구원자는 이사야서가 고대하는 인물이며, 또한 역사가 완성될 때 온 만물을 다스릴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여러 사상들 속에 나타난 이 사람의 역할은 무시될 수 없다. 그리고 이 구원자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및 다윗 언약을 완성시켜주는 한 맥락을 제공해 준다.

 

이사야서의 주요 사상들에 학문적으로 배열함과 아울러, 어떻게 이사야의 신학 사상들이 서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사야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다른 효과적인 방법들이 존재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다음에 소개될 구조분석은 이사야서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사 1-12장은 책망하시며 호출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예언을 시작한다. 언약을 준행(準行)해야 할 이스라엘의 불성실이 낱낱이 열거되고 있으며, 이사야의 예언 사역이 소개된다. 이사야의 소명이 6장에 이르러서야 소개되고 있음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여호와의 선지자 파송(派送)이라는 그 역사적 패턴을 반영해준다. 또한 본 단락에서, 저자는 자신이 처한 현재와 임박한 미래 혹은 먼 미래를 번갈아 가며 소개하고 있다. 본 단락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사 7-12장에 약속된 다윗과 같은 왕이다. 또한 약속된, 두려운 여호와의 날 혹은 심판의 날은 본 단락의 주요 사건이라 하겠다.

 

그 다음, 사 13-27장은 여호와를, 교만한 열방(列邦)을 파(破)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교만과 그로 말미암은 믿음의 실족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앗수르 같은 족속을 사용하여 택한 백성을 심판하도록 이끌고 만다. 이와 같은 교만과 믿음의 실족은 여호와로 하여금 주변 족속들을 정죄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심판은 여호와와의 맺은 이스라엘의 관계를 역사 속에서 공평하게 처리해 줌과 동시에, 온 만물을 다스리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통치를 알려준다. 현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장차 여호와는 타락한 이들 중 몇 몇을 구속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이사야 28-39장은 사악한 자에게 임할 일련의 화를 선포하면서 심판 주제를 계속해 나간다. 본 단락은 미래 희망 기사를 수반하며, 주전 701년의 위기 때 예루살렘의 구원을 다룬 한 역사적 기술은 본 단락의 결론이 된다(왕하 18-19장 참조). 본 단락의 전체에 걸쳐, 여호와는 신실한 남은 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직 남은 자를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오직 미래에 나타날 희망일 뿐이다. 이러한 희망은 군사적 동맹이나 정치적 전략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호와의 맺은 교제를 통해 생겨난다. 본 단락은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여 정복할 것이라는 끔찍한 경고와 함께 끝을 맺는다. 정경적으로 볼 때, 이 같은 바벨론의 침략과 정복은 이미 열왕기 하에 일어났었던 사건이다.

 

사 40-55장에서,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희망은 계속 교차하고 있다. 여기서, 고난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물리적이고 영적인 포로생활로부터 새 출애굽을 이끌 한 종을 보내신다. 사 28-29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직 여호와를 향한 헌신만이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며 심판으로부터 안전을 가져다 줄 것이다. 본 단락은 가장 철저한 유일신론 사상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종의 정체는 신약에 이르러 중대한 신학적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끝으로, 사 56-66장은 만물을 새롭게 하나님을 소개한다. 이 하나님을 다시 한번 더 신뢰함은 밝은 미래를 위한 촉매가 된다. 다시 새롭게 된 온 만물은 본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 반영되고 있는 바, 이 구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사상(“새 하늘과 새 땅”)은 신약에 이르러 완성된다(계 21-22장 참조). 오직 여호와만이 이러한 변화를 창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창조주시요 유지자시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창조주만이 재 창조주가 되실 수 있다.

 

이사야의 비전은 유일신 사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비록 우상들과 기타 다른 경배의 대상들이 등장하지만, 이것들은 인간사 혹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세이츠(Christopher Seitz)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사야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열방의 다른 신들보다 뛰어난 그의 우월함을 입증하려고 논쟁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열방의 (한 분)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18) 이러한 사상은 모든 남은 자들에게 희망을 던져준다. 그러나 이 사상을 무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그 어둠 속에 사로잡히고 만다.

 

책망하시며 호출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1-12장

비록 이사야에 나타난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가 구원이라 할지라도, 이사야서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관대한 방식을 거의 취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응석받이 혹은 병든 아이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호와는 이사야에게 권능을 입히어 청중들의 심령을 찌르며 그들의 악행에 도전할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열방의 죄악을 선포하시며(1:2-31), 심판의 날 이후에 찾아올 밝은 미래를 알려주신다(2:1-4:6).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나쁜 포도원(5:1-7), 화를 당해 마땅한 전토(5:8-30)에 비유하신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시어(6:1-3) 그 백성들과 왕들에게 믿음과 구원의 기회를 선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제의를 거절할 때도 장차 임할 구원을 제시해야만 한다(7:1-11:16).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구원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은 이사야와 그 외 남은 자들이 처음부터 받아들였던 진리이다(12:1-6). 완악한 반역에 이어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소명―이사야는 백성들을 경고하고 훈계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는다―이 뒤따른다.

 

사 1:2-31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계속해서 책망하신다. 창조주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언약파괴의 증인들로서 하늘과 땅을 호출한다(1:2). 하나님의 징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 이스라엘(출 4:23)은 반역하며 회개를 잘했다(1:2-9).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레위기가 요구하는 제물들을 바친다 해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버림당할 것이다(1:10; 창 19:1-29 비교). 하나님은 용서하기 원하시지만 그럴만한 근거를 찾지 못하신다(사 1:18-19). 현실은 암울할 뿐이다. 홀로 남은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아마도 왕하 18:13-16에 소개된 산헤립의 침략을 암시하는 듯하다.19) 예루살렘은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존속은 한 때 언약백성의 영광스런 거처였던 지난 날을 연상시켜 줄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 작은 처소를 존속하도록 해준다.

 

이와 같은 파멸이 지나고 나면 여호와께서 이루실 멋진 미래가 놀라운 방식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다. “말일”에 예루살렘은 온 열방을 (예루살렘으로) 끌어올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창 12:1-9과 출 19:5-6 이후 줄곧 소개된 그들의 소명, 즉 제사장 나라와 열방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백성들을 판단하실 것이다(사 2:1-5). 그렇지만 이와 같은 새로운 실제는 예루살렘의 복술, 물질주의, 교만 및 우상숭배를 정화시킬 여호와의 날이 임한 후에 찾아 올 것이다(2:6-22). 그 날에, 여호와 홀로 경배 받으실 것이다(2:17).

 

 

오직 의로운 자들만 살아 남을 것이다(3:10; 4:2-6). 그 날에,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다스리실 것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거처가 될 것이며, 신실한 자들은 해(害)로부터 영원히 보호받을 것이다. 이사야가 처한 환경 및 그에 대한 비전은 이사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사건들을 미래의 사건으로 바라보게 한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이러한 사건들이 곧 이루어 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희망은 미래의 맥락에서 실현될 것이다. 앗수르의 침략은 심히 두려운 사건이요 끔찍한 경험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최후 심판은 결코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엄청난 사건이 될 것이며, 이것은 정경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이제 사 5:1-30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본문의 분위기 역시 그리 완화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거친 포도원과 같으며,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피 흘림, 불의 및 우상 숭배로 점철되었다(5:1-7). 그러므로 그 땅은 화를 당할 것이며 택한 백성들은 사나운 대적의 손에 사로잡힐 것이다(5:8-30). 하나님은 거룩한 족속을 만취한 자(5:10, 22), 교만한 자(5:13-17), 악을 사랑하는 자(5:20), 진노 받을 자(5:26-30)로 정죄하신다. 언약 파괴는 이스라엘의 타락을 거의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한다. 이사야 전체를 통해 드러난, 이사야 동시대 백성들을 향한 여호와의 태도는 거의 달갑지 않다. 계속해서 이사야는 이러한 백성들을 범죄한 백성,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들로 소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율법에 이미 예고되었으며, 이들의 운명은 전기 선지서에 분명히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사 1-5장은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정경적 가교 역할을 한다.

 

이사야의 소명은 이사야서 전체에 걸쳐 심히 중대한 신학적 중요성을 내포한다. 웃시야가 죽던 해(주전 742년 경)에, 이사야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비전을 본다(6:1). 여호와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다. 6:1은 여호와의 왕권을 격양시켜주며,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역할에 대한 다른 관점들을 불러일으킨다(사 13-23; 37:23-24; 40:18-22 참조). 이 우주적인 왕은 성전보다 훨씬 충만히 거하시며(6:1), 그의 거룩을 찬양하는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다(6:1-3). 하나님의 거룩은 이사야의 죄악과 직면하며, 이사야는 그의 무가치함을 고백한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사해주신다(6:4-7). 이사야는 은혜의 보답으로 여호와를 위해 그의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려한다(6:8). 이 장면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전형임에 틀림없으나, 사 1-5장에 기술된 행위들과는 극히 대조된다.

 

새로이 지명된 선지자가 사명을 위임받았을 때, 그는 백성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며, 긍정적인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6:9-10). 이사야의 사명은 신실한 남은 자―이들은 성지에서 다시 자라날, 거룩한 백성을 위한 “거룩한 씨”가 될 것이다―를 드러내는 것이다(6:11-13). 달리 표현하자면, 이사야는 아히야, 엘리야, 미가야 및 엘리사가 이미 수행했었던 그와 같은 사역을 감당해야만 한다. 이사야의 임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일은 어려운 사역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후원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후원은 (헌신 자들에게) 결코 쉽사리 제공되지 않았다.

 

이사야의 첫 사명은 유다 왕 아하스(주전 731-715년)에게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이다. 아람 및 북 이스라엘의 침략에 직면한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의존해야만 할 것인가를 결단해야만 했다. 아하스 왕은 아합 왕과 같이, 여호와의 신실한 종을 신뢰하지 못하고 거절한다(7:1-9). 그러므로 이사야는 현재와 미래에 임할 일들을 계시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특별한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바, 이것은 아하스의 헛된 불신을 강조해 줄 것이다. 이사야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선언한다(7:14). 더욱이, 그 땅이 곧 아람과 북 이스라엘로부터 자유할 것이며 앗수르가 유다를 대적할 것이다(7:15-17).

 

학자들은 이 약속이 무엇을 뜻하며 이사야가 이 예언의 성취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대해 격렬히 토론해 왔다.20) 그러나 일치점도 존재한다. 첫째, 여러 학자들은 임마누엘 예언이 삼하 7:1-17 이후 줄곧 다윗의 위(位)에 집중된 그 희망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어떤 학자들은 이 약속된 아이가 바로 히스기야라고 이해한 반면,21) 다른 이들은 약속의 성취로서 이 아이를 “신성한 다윗의 아들”이라 지적한다.22) 어떻든, 삼하 7장에 약속된 영원한 나라는 지금 이곳에 활동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둘째, 대부분 주석가들은 이 약속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의 구원―이와 같은 구원은 택한 백성과 택한 성읍을 향한 여호와의 권능과 사랑을 돋보이게 해준다―을 내포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셋째, 대부분 신학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아하스의 불신을 명백히 비난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오트 카이저(Otto Kais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하스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제의를 거절했기 때묊?에, 그는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이 예언은 죄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 질 것임을 보여주는 (일련의 전 역사에 퍼져있는) 참 징조요 증거가 된다”.23)

 

이와 같은 확신은 여호와가 약속을 지키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며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해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히야와 엘리야 시대와 같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다윗은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고대하는 미래의 희망이며,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가장 안전한 방패가 되신다. 임마누엘은 다윗의 계보―물론 아하스의 계보를 거칠 것이다―로부터 나올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는 미가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진리선포의 막중함을 절감한다. 전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가 처음과 나중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오가던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오로지 세속적인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열왕들은 세속계(世俗界)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눈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시작도 끝도 전혀 알지 못한다.

 

이사야는 “믿음”, “남은 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심판” 및 “도래할 다윗과 같은 왕”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믿음을 저버린 아하스의 불신에 직면한 이사야는 율법의 계명과 증거를 신뢰하며 두려워 말고 담대히 믿으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갈 때도 신뢰할 수 있으며, 어두운 여호와의 날이 지상을 덮칠 때에도 빛의 근원이 될 수 있다(8:11-22). 유다 백성들과 그 왕이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언젠가 그들은 앗수르 인들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와 남은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 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홀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8:11-15).24)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신뢰받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는 현재의 위기를 통해 남은 자의 출현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다윗과 같은 왕은 여전히 고대해야 할 미래의 희망이 된다. 아마도 사 4:2은 다윗과 같은 왕을 가리키는 듯 하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회복된 이스라엘―심판 이후에 이루어 질 것임―의 단면을 “여호와의 싹”으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이 호칭(“여호와의 싹”)은 렘 23:5과 33:15에서 메시야 혹은 다윗과 같은 왕을 구체적으로 암시한다.25)

 

적어도 이 어구는 하나님이 정하신 특정한 한 사람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사람은 장차 이스라엘 회복을 감독할 것이다. 임마누엘은 이러한 기대를 고무시킨다. 왜냐하면 이 아기는 뚜렷한 방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승리와 회복을 이끌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사 9:1-7은 긴장을 경감시켜준다. 장차 임할 다윗과 같은 왕은 지혜로우며 권세가 많으며 영존할 것이며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으며 공평과 공의를 세세토록 보존하실 것이다(9:6-7).

 

사 9:1-7이 도래할 왕에게 신적 호칭을 부여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래할 왕은 단지 전능한 자가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려질 것이다. 그는 사망을 이기며, 세세 무궁히 통치할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사의 범주 속에 있는) 일반적인 통치자들이 지닐 수 없는 특성들이라 하겠다. 이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속성을 소유한다.26) 그는 하나님으로 불려지며 무수한 천사들의 곁에 계신다. 그의 열심이 그의 통치를 보증한다. 이 왕이 통치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여호와의 날의 그 심판과도 같이, 하늘을 뒤엎고 땅을 소멸시켜버릴 것이다.

 

아하스가 처한 위기와 이 왕의 도래 사이에, 하나님의 언약을 거절한 모든 이들이 화를 당할 것이다(9:8-10:4).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해져 여호와의 손에 놓인 도구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하고 심판 받게 될 것이다(10:5-19). 이 모든 일들을 깨닫게 된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의뢰할 것이다(10:20). 이 시점에서, 이사야에 등장하는 남은 자는 분명 여호와를 믿고 의뢰하는 자들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들만이 심판―단기간의 심판이든 혹은 장기간의 심판이든 간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의 선포는 이 남은 자, 즉 그루터기(6:13 참고)를 일으키고 이들을 격려할 것이다.

 

민족 간의 전투가 임박한 이 상황에서, 여호와는 다시 한번 온 세상의 영원한 평화를 선포하신다. 더욱이 다윗과 같은 왕이 이 평화는 중개할 것이다(11:1-9). 여호와의 날 이후에 다윗과 같은 지상의 재판자가 온 열방을 그에게로 이끌어 “안식의 처소”로 인도할 것이다(11:10). 바로 이 안식, 즉 새 출애굽27)은 남은 자를 위한 것이지만 단지 그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다. 온 땅을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정화작업은 온 열방으로부터 남은 자를 모을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가 온 열방을 다스리심을 말해준다(11:12-16).

이사야의 첫 단락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보호하심과 안위하심을 고백하는 찬양시로 끝을 맺는다(12:1-6).

 

정경적 종합: 왕과 남은 자

이사야 1-12장은 이미 소개된 여러 정경적 사상들을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사 8:20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성서의 사상들이 언약 백성들의 죄를 교정해 주는 수단임을 기억하도록 고무시킨다. 이사야는 시작부터 이스라엘의 언약적 상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하나님―출20~레 27장은 거룩한 하나님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음―을 거절해 왔다. 이 백성들은 신명기가 요구하는 마음의 헌신을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시킨다. 바벨론 유수―이 사건은 신 27-28장에 예고되었고 왕하 17장에 기술돼 있음―가 이 불순종의 민족을 기다리고 있다. 택한 사자(使者)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민족에게 하나님의 도를 아는 지식을 전달해주며, 그들이 여호와의 은혜를 거절할 때 이들을 책망한다. 후기 선지서들과 성문서의 일부는 이사야의 주장을 확증할 것이다.

 

또한 사 1-12장은 어떤 정경적 사상들을 명료화시켜준다. 예를 들면, 삼하 7장에 처음 소개된 다윗 언약은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사무엘 상하에 언급된 영원한 나라는 이제 “온 열방”, “전 평화”, “완전한 정의”, “충만한 지혜” 및 “남은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포함한다. 이와 같은 포괄적인 영상들이야말로 창세기~열왕기 그리고 사 1-5장에 묘사된 죄악된 상황 속에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역사를 초월하시는 자만이 역사에 종속된 죄인들을 구속할 수 있다. 오직 다윗과 같은 왕―그의 활동 범위는 역사를 초월한다―만이 역사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위한 성역(聖域)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사 1-12장은 택한 백성의 정체를 명백히 해준다. 여기 민족 이스라엘은 남은 자들과 심령이 완악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6:10-13 참조). 이 두 부류는 여호와의 날에 서로 다른 편에 설 것이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대로 실천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구별될 것이다. 이사야는 이 두 부류의 이스라엘 개념―이 사상은 출 32-34장, 민수기 및 엘리야 기사로부터 유래한다―을 끝까지 확대시켜 나간다. 이전에 이와 같은 신학적 변화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사야 이전의 본문들은 남은 자들과 불의한 자들이 성서에 나타난 인간사에서 어떻게 그들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강조해왔다. 또한 사 1-12장은 라합의 회심, 나아만의 치유와 고백에 나타난 남은 자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하면서 비(非) 이스라엘 백성들을 남은 자들 가운데 포함시킨다. 다른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진다. 반면 여호와를 거절하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거절당한다.

 

또 다른 정경적 발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처음으로 정경은 과거를 넘어 현재로, 그리고 임박한 미래에서 하나님이 온 만물을 구속하실 마지막 날의 영상까지 그려주고 있다. 성서에 소개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구속은 종말론 문헌과 미래의 구체적 사건들을 보여주는 묵시문헌들을 통해 더욱 발전되어 나갈 것이다. 이사야는 마치 자신이 역사의 한 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즉, 이사야는 자신이 서있는 역사의 정점이 구속의 완성과 궁극적 희망을 이루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더 낳은 미래의 희망―이 희망은 역사를 통해 나타나시는 여호와의 성품에 근거한다―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교만한 민족들을 멸하시는 하나님: 사 13-27장

 

이사야가 보았던 현 실제들 가운데, 유다의 부족함이 가장 두드러진다. 이사야가 살았던 유다는 정치적으로 그리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다. 유다는 스스로 방어할 능력도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 외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7:1-9 참조). 또한 이사야 시대에, 신의 능력은 분명히 그 신을 섬기는 민족의 능력에 따라 평가되었다. 사 13-27장에서, 이사야는 이와 같은 신앙관을 두 가지로 피력한다. 첫째, 사 13-27은 장차 유다가 성장 발전하며 회복되며 뛰어난 족속이 될 것이라 소개한다. 둘째, 이사야는 온 열방보다 뛰어나신 여호와의 주재와 온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권과 오만에 빠진 교만한 나라들에 대한 여호와의 대적하심을 단언한다.

 

사 13-27에 열거된 몇 몇 족속들은 이미 사 1-12에 언급되었다. 앗수르, 블레셋, 아람, 에돔, 모압, 암몬 및 애굽 민족들―포로기 후 남은 백성들이 이 민족들로부터 돌아올 것이다28) ―이 11:11-16에 기록돼 있으며, 두로와 같은 타 민족들(23:1-18 참고)도 본 단락에 추가된다. 특히 바벨론의 출현은 가장 의미심장하다. 이사야가 장차 임할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선포할 때, 그의 메시지는 바사 제국―주전 612년 앗수르를 정복한 세계적인 대국―으로 말미암은 바벨론의 붕괴(주전 539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사 13-27장에서, 첫 바벨론 신탁(神託)이 이사야에게 임한다(13:1).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 신탁을 이사야 후대에 발생한 것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앗수르가 쇠약하고 바벨론이 주도하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사 13장은 이사야 당시의 문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주전 720-708년).29) 아마도 바벨론 사절단들은 반 앗수르 동맹을 위해 유다와 제휴할 목적으로 히스기야를 방문한 듯하다(왕하 20:12-19; 사 39:1-8). 만약 그렇다면, 애굽과 바벨론은 유다를 앗수르로부터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애굽처럼 허풍만 늘어놓는 바벨론은 그들의 약속을 지킬 수 없다. 오만은 능력과는 다르다.

더욱이 다른 2본문들도 이사야 당시의 이 같은 상황과 깊이 연관돼 있다. 사 14:28은 두 번째 신탁이 아하스가 죽던 해(주전 715년)에 임했다고 말하는 반면, 사 20:1은 사르곤 통치에 일어난 한 구체적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신탁이 이사야에게 임했다고 소개한다.30) 이러한 기사들은 미래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본 단락에 묘사된 바벨론에 관한 신탁은 다가올 심판을 알려주고 있다. 주의 날이 이르러 여호와는 바벨론의 교만과 오만을 제하기 위해 바벨론과 맞서 싸우신다(13:11, 19). 게하르드 폰 라드(Gerhard von Rad)의 말대로, 전투는 초자연적 요소를 내포한다.

 

여호와는 당신 스스로 전투에 참여하신다. 별들이 빛을 잃고 땅이 요동할 것이며 끔찍한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신탁은 제국의 철저한 폐망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이 전투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 될 것이다. 즉 단지 일개의 전사들이 아닌, 전 민족들이 소집되어 전열을 이룰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전투는 실제 전투 와 유비를 이루고 있다.31)

 

바벨론의 교만은 그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 것이다(14:12-14).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리실 것이다(14:22-23). 하나님은 그들을 물리치실 것이다.

다른 민족들도 더 낫은 바 없다. 앗수르―(하나님의 손에 의한) 앗수르의 멸망은 이사야의 주요 주제이다32)―역시 멸망당할 것이다(14:24-27). 앗수르의 오만은 사 10:5-19에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모압(16:6-7), 애굽(19:11-15), 두로(23:7-9)는 그들 스스로를 높여왔기 때문에, 여호와는 그들의 교만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도처에 일어날 참혹한 멸망을 미리 바라본다(24:1-13).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또한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14:26-27).

오직 남은 자만이 생존할 것이다. 더욱이 남은 자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여호와를 믿는 이방인도 포함할 것이다(14:1).33) 이와 같은 초민족적 그룹은 시온에 거할 것이며(14:32) 하나님의 산에서 향연을 누릴 것이다(24:6-12). 우상은 제거될 것이며(17:7-8; 19:1-4), 이스라엘, 애굽 그리고 앗수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될 것이다(19:23-25). 두로는 여호와를 위해 해운과 무역을 행할 것이며(23:17-18), 이것은 모든 삶의 영역이 여호와를 위해 바쳐질 것임을 시사해준다.

 

마치 바벨론 유수가 이스라엘을 정화시키고 남은 자들로 하여금 여호와 홀로 하나님이심을 인식하도록 인도해 준 것과 같이(26:13; 27:9-11), 여호와의 심판은 세상의 열방 속에 존재하는 남은 자를 밝혀줄 것이다. 비록 “다윗과 같은 왕”의 역할이 사 1-12장만큼 본 단락에 두드러지지 않지만, 이러한 사상이 본 단락에 부재한 것은 아니다. 사 7:14, 9:1-7, 그리고 11:1-10에 소개된 자와 동일한 인물인, 의롭고 신실하며 자애로운 다윗과 같은 왕은 모압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34) 또한, 남은 자가 되려는 애굽의 소망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들의 구원을 위해 보내진 하나님의 “구원자”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이다(10:20-22). 적어도 이 같은 영상들은 도래할 한 왕을 상기시켜준다.35) 비록 교만하고 사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 본 단락이 사 1-12의 설명보다 더 광범위하다 해도, 기본적인 사상들은 여전히 동일하다 하겠다.

 

정경적 종합: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이전 정경본문들은 여호와께서 온 열방을 심판하실 것이며 다 민족의 남은 자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이사야의 주장을 준비시켜왔다. 오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특수한 소명을 위해 선택받은 백성)을 위해 당신이 지으신 한 족속 애굽을 심판하신다. 전기 선지서 역시 이와 동일한 원리를 피력하고 있다. 전기 선지서에서, 여호와는 미약하나 유일한 족속인 이스라엘을 거듭 대적하신다. 여호와께서 수세기에 걸쳐 애굽, 블레셋, 모압 및 그외 다른 족속들을 징벌하셨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 나라들을 다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이사야의 선포는 그리 충격적인 말이 아니다. 그러나 모세의 구스인 아내(민 12장), 라합(수 2:1-24; 6:22-25), 그리고 나아만(왕하 5:1-19)은 하나님의 백성이 오직 인종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한 분 하나님을 향한 헌신에 따라 구별된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계속 연이어 소개될 선지서들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민족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이 민족들은 사 13-23장에 열거된 족속들과 흡사하다. 렘 40-41장, 겔 25-32장, 암 1:2-2:16 및 습 2:1-3:5는 온 세상 위에 뛰어난 여호와의 주재(主宰)를 강조한다. 또한 이 본문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정죄하시며 남은 자를 보호하시며 인류의 교만과 악행을 역겨워하심을 강력히 피력한다. 더욱이 위 본문들은 심판이 인간을 통한 간접적 심판이든 혹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든 간에, 여호와께서 심판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심을 증거해 준다. 이러한 심판은 악한 세상을 정화시켜주며, 그로 인해 온 세상은 처음의 순전한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사 24-27장은 미래의 사건들, 최후 심판, 부활 및 악의 멸망에 깊이 집중한다. 그리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이 본문을 묵시문헌으로 규정한다.36) 묵시문헌은 기나긴 시간을 살피면서 이 시기들을 세대별로 구분한다. 또한 묵시문헌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며 인류의 역사를 선과 악의 투쟁으로 그린다. 때때로 묵시문헌은 저자를 익명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역사의 영역에서 우주적인 영역으로 확대시킨다.37) 이러한 장르적 특성을 고려해 볼 때, 사 24-27장은 “구약 예언사의 새 장을 열어주지만 묵시문헌으로서는 아직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38) 사 24-27장은 전통적 예언과 묵시를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다.39)그러므로 본 단락은 다니엘과 스가랴의 비전 뿐 아니라 외경 및 신약에 등장하는 비전들의 사상적 배경을 마련해 준다.

 

본 단락이 만물의 마지막, 즉 인류역사가 끝날 때 일어날 사건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는 본 단락이 성서신학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절정의 순간이 찾아올 때, 여호와의 유일성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여호와는 온 땅을 정결케 할 것이며, 사악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사망을 영원히 몰아내실 것이며 남은 자로부터 찬송을 받으실 것이다(25:6-9). 이 때에 다른 신은 없다. 여호와 홀로 영원한 삶을 남은 자들에게 베풀어주신다. 비록 여러 다른 본문들이 종말과 죽음 이후의 삶을 다루고 있다 해도, 요한 계시록의 기자는 계시록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 25:6-9 이야말로 이러한 사상들(종말과 죽음 이후의 삶)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계 21:1-8). 이후의 성서기자들은 이사야에 나타난 이러한 사상들을 통해 그들의 종말론적 사상들을 검증해야만 할 것이다. 역사를 창조하신 한 분 하나님은 또한 그 역사 재창조하실 것이다.

 

남은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사 28-29장

 

사 28-29장은 이사야의 현 상황과 미래를 서로 넘나드는 이전의 패턴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사 28-3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여호와를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이방민족을 의지할 것인가를 보여준다.40) 마침내 유다는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헤어 나오기 위해 애굽을 의지한다. 그러나 그들이 항상 여호와를 의지해야만 한다는 진리는 변할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남은 자를 위해 선포하는 이사야는 여호와를 신뢰할 것을 권고한다. 사 39장이 끝나갈 즈음, 이사야의 요지는 확연히 드러난다. 그 이유는 신실한 선지자와 충성스런 왕이 예루살렘을 앗수르로부터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남은 자를 보호하시고 다신론적 정치수단의 허무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러한 기적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사 1-5장이 정죄하는 죄악들을 똑같이 행하는 백성들을 향해 화를 선포한다. 택한 백성들은 술에 취한 자들이 되었고(28:1, 7), 그들의 선지자들, 제사장들 및 현자들은 분명한 비전을 보지 못하며 올바른 조언을 제공하지 못했다(28:7; 29:14). 유다는 에브라임(북 이스라엘)을 여름과실을 먹듯이 쉽사리 멸망시킨 앗수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애굽을 신뢰한다(30:1-7; 31:1-5). 그러므로 유다는 임박한 화―사마리아의 몰락과 산헤드립의 위기는 이러한 재앙의 전형이 된다―를 당하고 말 것이다. 유다를 파괴시킨 자들 역시 이전 본문에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멸망당할 것이다(33:1).

 

이 모든 재난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남은 자들은 시온의 거처를 발견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 남은 자들을 힘과 아름다움과 공평으로 안위하신다(28:5-6). 남은 자들은 오직 여호와 안에서 기뻐 날뛰는 겸손하고 빈핍한 자들이다(29:19). 남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참 자손들(29:22-24)이며, 시온에 그들의 안식처를 발견한다(30:19-33). 남은 자들은 도래할 왕의 인도 하에 피난처를 찾게 될 것이다(32:1-20). 남은 자들은 온 사방으로부터 시온으로 다시 돌아 올 것이다(35:8-10). 사 36-39에서, 남은 자들은 믿음의 왕 히스기야, 노쇠한 신실한 선지자 이사야, 그리고 히스기야의 관료들로 구성된다. 본 단락은 남은 자 사상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와 남은 자의 그 실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정경적 종합: 남은 자와 구원

 

사 28-39장은 구원이 임박했으며, 그 구원이 장기화 될 것임을 보여준다. 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약속은 예루살렘, 시온에 거하던 히스기야와 이사야가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은 주전 701년에 드러난다. 그렇지만 사 25:6-9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영원한 평화는 여호와가 남은 자를 시온으로 모으며 사망을 몰아내실 때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 36-37에 나오는 구원은 여호와의 주도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만이 하나님의 전 사역은 아니다. 즉, 이 구원의 시작은 장차 더 위대한 사건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가 된다.

 

왕권은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주요 이슈가 된다. 리차드 슐츠(Richard Schultz)는 “사 6-11장에 등장하는 아하스 왕은 믿음을 거절하며 사 28-33장에 나오는 익명의 왕은 애굽을 의지하고픈 유혹에 사로잡히지만, 사 36-39장에 나타난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신뢰한다. 이것은 더 위대한 왕의 통치를 보여주는 선취(先取)라 하겠다”고 진술한다.41) 사 32:1-20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사 32:1-20을 이전 왕가본문(王家本文)들과 서로 연결시켜준다.

왕의 통치는 백성들의 보지 못함과 듣지 못함을 종식시킬 것이며(사 6:9-10 참조), 앗수르의 위협이 끝난 후(31:8-9; 30:15과 32:17에 나오는 “잠잠함”과 “확신”에 대한 언급을 참조하라), 의와 화평의 시대를 가져다 줄 것이다(사 9:6-7[5-6] 참조; 11:5-6).42)

 

모티어(Motyer)는 새 왕과 새로운 사회의 이미지가 어두운 시대를 밝게 비쳐줄 궁극적 비전을 제시하는 성서의 종말론 사상과 부합한다고 피력한다.43) 만약 이 왕이 없다면, 밝은 미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사야 본문은 사 7-11에 언급된 다윗과 같은 왕 외 다른 새로운 왕을 소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사야 본문은 남은 자의 미래의 열쇠가 되는 이 새 왕에 집중하고 있다.

 

사 36-39장은 성서에 거듭 언급되는, 그리 길지 않은 구약본문들 중 하나이다. 위 본문은 다른 정경본문에 두 번씩이나 언급됨으로 인해 정경의 기능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 왕하 18-20장에서, 본 단락의 기사는 유다의 생존과 그 몰락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에게 그의 전 나라를 보여주는 바, 대하 32:24-26은 이를 인간적 교만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적어도 히스기야는 악랄한 앗수르 인을 대적하기 위해 반역적인 바벨론 인들과 동맹을 맺으려 한다. 이 같은 히스기야의 치밀한 계산에도 불구하고, 왕하 20:12-21과 사 39:1-8은 장차 바벨론이 유다를 통치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기록한다. 주전 8세기경에 발생한 이 사건은 주전 587년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시해 준다. 열왕기와 이사야서에서, 예언의 정확성은 하나님이 장차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알고 계심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며,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미래를 알려주신다.

 

또한 열왕기와 이사야서는 앗수르로 대변되는, 거만한 악의 세력들을 파하시는 여호와의 구속의 능력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약속대로,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왕하 19:20-37; 사 37:21-35). 여호와는 백성들의 순종여부에 따라 구원하시기도 하고 파멸시키기도 하신다. 이러한 원리들을 입증해주는 역사적 사건들은 이러한 사상들을 담고있는 1-35장의 메시지를 확증해준다.

 

 미국 남 침례교 신학교 구약교수(호주 퀸즈랜드 대학교 Ph.D., Cand)

 

1) 본 아티클은 폴 하우스(Paul R. House)의 구약신학(Old Testament Theology, IVP, 1998) 중 10과를 모두 완연한 것으로, 본서의 출간을 계획 중인 기독교 문서 선교회의 허락을 얻어 기재함을 밝혀준다.

2) Bunyan Davie Napier, "Prophet," in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ed. George Arthur Buttrick, 4 vols. (Nashville, Tenn.: Abingdon, 1962), 3:896-919.

3) Edgar W. Conrad, Reading Isaiah,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Minnepolis: Fortress, 1991)을 참고하라.

4) Christopher R. Seitz, Isaiah 1-39, Interpretation: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Louisville, Ky.: John Knox, 1993), 그리고 Christopher R. Seitz, ed., Reading and Preaching the Book of Isaiah (Philadelphia: Fortress, 1988)을 참고하라.

5) Rolf Rendtorff, Cannon and Theology: Overtures to an Old Testament Theology, ed. and trans. Margaret Kohl,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1993), pp. 146-89을 참고하라.

6) Brevard S.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Fortress, 1980), pp. 311-38; 그리고 Ronald E. Clements, "The Unity of the Book of Isaiah," Interpretation 36/2 (April 1982): 17-129을 참고하라. 비록 Clements가 편집비평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해도, 그의 접근방식은 정경비평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분명한 듯하다.

7)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pp. 325-38.

8) J. A.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3), pp. 9-34.

9) 이사야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뛰어난 연구서로서, John G. Gammie, Holiness in Israel,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1989), pp. 71-101을 참조하라. J. J. M. Roberts는 “만약 전 이사야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서의 여호와의 비전이다”고 진술한다.

10) John 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 1-39,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86), p. 34.

11) Christopher R. Noth, The Second Isaiah (Oxford: Clarendon, 1964), p. 16.

12) John Skinner, The Book of the Prophet Isaiah, 2 vols., Cambridge Bible Commentary (1917; repri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 2:xlviii.

13) John D. W. Watts, Isaiah 1-33, Word Biblical Commentary 24 (Waco, Tex.: Word, 1985), p. lv.

14) North, The Second Isaiah, pp. 12-13, 17-18을 참조하라.

15) R. N. Whybray, Isaiah 40-66, New Century Bible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81), p. 30을 참조하라.

16) Watts, Isaiah 1-33, p. lv.

17) 이러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명백한 예로서 행 8:26-39을 보라. 여기서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53장이 예수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18) Seitz, Isaiah 1-39, p. 125.

19) Hans Wildberger, Isaiah 1-12, trans. Thomas H. Trapp, Continental Commentaries (Minneapolis: Fortress, 1991), p. 21.

20) Hans Wildberger의 Isaiah 1-12 가운데 사 7:1-17과 관련된 문헌들의 목록을 참고하라. Ibid., pp. 279-82.

21) Walter C. Kaiser Jr와 같은 보수주의 학자조차도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인다. Walter C. Kaiser Jr., The Messiah in the Old Testament, Studies in Old Testament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Mich.: Zondervan, 1995), pp. 158-62을 보라.

22)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86.

23) Otto Kaiser, Isaiah 1-12, trans. R. A. Wilson, Old Testament Library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2), p. 105.

24) Joseph A. Alexander, Commentary on the Prophecies of Isaiah (1846; reprint, Grand Rapids, Mich.: Zondervan, 1953); 그리고 Joseph A. Alexander, Commentary on the Later Prophecies of Isaiah, ed. John Edie (New York: Wiley and Putnam, 1847), pp. 190-91; 그리고 Ronald E. Clements, Isaiah 1-39, New Century Bible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80), pp. 98-100을 참고하라.

25) Edward J. Young, The Book of Isaiah, 2nd ed., 3 vol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72), 1:174을 참조하라.

26)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102을 참조하라. 그리고 Wildberger, Isaiah 1-12, p. 404와 대조해 보라.

27) John F. A. Sawyer, Isaiah, 2 vols., Daily Study Bibl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4), 1:125-27.

28) Seitz, Isaiah 1-39, p. 115.

29) Oswalt, Isaiah 1-39, pp. 300-301을 참조하라. 이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려면, John Bright, A History of Israel, 2nd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2), pp. 278-83을 참고하라.

30) 이 사건은 아마도 주전 712년경에 발생했을 것이다. Bright, A History of Israel, p. 280; 그리고 John Haralson Hayes and Stuart A. Irvine, Isaiah, the Eighth-Century Prophet: His Times and His Preaching (Nashville, Tenn.: Abingdon, 1987), pp. 268-69을 참고하라.

31)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trans. David Muir Gibson Stalker, 2 vols. (New York.: Harper & Row, 1962-1965), 2:120.

32) Clements, Isaiah 1-39, p. 146.

33) “이방인”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려면, Sawyer, Isaiah, 1:142; 그리고 Otto Kaiser, Isaiah 13-39, trans. R. A. Wilson, Old Testament Library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4), p. 25을 참고하라.

34) Young, Isaiah, 1:463-64; 그리고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152를 참고하라.

35) Walter C. Kaiser Jr., Toward an Old Testament Theology (Grand Rapids, Mich.: Zondervan, 1978), p. 211.

36) 이에 대한 Clements의 뛰어난 해석을 살펴 보라. Clements, Isaiah 1-39, pp. 196-200.

37) H. H. Rowley, The Relevance of Apocalyptic: A Study of Jewish and Christian Apocalypses from Daniel to the Revelation, 3rd ed. (1994; reprint, Greenwood, S.C.: Attic, 1980), pp. 16-17. 또한 Paul D. Hanson, The Dawn of Apocalyptic: The Historical and Sociological Roots of Jewish Apocalyptic Eschatology, rev. ed.(Philadelphia: Fortress, 1986), p. 11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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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Smart, History and Theology in Second Isaiah, p. 224. 그렇지만 Smart는 이 종을 이스라엘로 간주함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접근은 본서의 접근방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72)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p. 454-55.

73) 그 종에 대한 분석과 종의 노래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살펴보려면, John Goldingay, God's Prophet, God's Servant: A Study in Jeremiah and Isaiah 40-55, Bible Classics Library (Carlisle, U. K.: Paternoster, 1994)을 참고하라.

74) Roberts, "Isaiah in Old Testament Theology," pp. 133-34; 그리고 North, The Second Isaiah, pp. 13-16.

75) McKenzie, Second Isaiah, pp. lviii-lxi; 그리고 Skinner, The Book of the Prophet Isaiah, 2:xlvi-li. Westermann, Prophetic Oracles of Salvation, p. 39를 참조하라.

76) Roberts, "Isaiah in Old Testament Theology," p. 134; McKenzie, Second Isaiah, p. lxvii; 그리고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22을 참고하라.

77) H. H. Rowley, The Faith of Israel: Aspects of Old Testament Thought (London: SCM, 1956), p. 185.

78)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p. 461.

79) Rendtorff, Cannon and Theology, pp. 181-89을 참고하라.

80)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2:280.

81) Rendtorff, Cannon and Theology, pp. 155-60을 참고하라.

82) 사 50-60장이 “빛과 어두움”이라는 주제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살펴보려면, Hanson, Isaiah 40-66, pp. 219-20; 그리고 Clements, "A Light to the Nations."을 참조하라.

83) Westermann은 “이러한 유비는 뚜렷하다”고 말한다(Prophetic Oracles of Salvation, p. 85).

84)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2:280-82을 참고하라.

85) 사 61:1과 사 42:1-4간의 유비를 살펴보려면, McKenzie, Second Isaiah, p. 181을 참조하라.

86) Hanson, Isaiah 40-66, p. 224. 이 사람의 겸손과 사 42:1-4에 나오는 종의 겸손을 주목해 보라.

87) 선택받은 예루살렘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려면, Ronald E. Clements, Old Testament Theology: A Fresh Approach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8), p. 91을 보라.

88) 마치 두 부류의 이스라엘(종/남은 자와 불신자)이 있는 것과 같이, 이방인들 역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사 60:10-11에서, 시온에 찾아올 이방인들은 그 성읍을 향해 기꺼이 예물을 들고 오겠지만, 반역하고 압제하는 이방인들은 심판 당할 것이다(사 60:12-14).

 

<출처: 예림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