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8장 주석
이사야 28장 주석 |
성 경: [사28:1]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 화 있을진저 -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열지파를 가리키며, '에브라임의 취한 자'는 그 방탕한 백성들을, 그리고 '교만한 면류관'은 사마리아 도성을 가리킨다. 사마리아 도성을 '교만한 면류관'이라 부름이 그 위치한 지리적 환경에서 연유한 듯하다(Alexander). 아합 왕의 부친 오므리가 세운 사마리아 도성은 비옥한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의 머리 부분에 자리 하였다(4절;왕상16:24;암 4:1;6:1). 몇몇 학자들은 잔치 때에 술 취한 자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는 고대의 풍습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Lowth, Gesenius, Ewald). 하여튼 이들은 풍부한 물질적 여건을 믿고 지나치게 교만하여, 선지자가 '포도주에 절었다'과 할 만큼, 술과 방탕에 깊이 탐닉하였다. 성 경: [사28:2,3]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 - '주께 있다'(*, 라아도나)는 말은 '주께서 보유(예비)하고 계시다'는 뜻이다(Hendwerk, Ewald, Knibel). 여기서 '강하고 힘있는 자'는 앗수르를 가리킨다(왕하 17:3-6 참조).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진노의 도구요 형벌의 매개체이다(10:4 참조). ꃨ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 밭에 밟힐 것이라 - 일반적으로 '야드'는 능력이나 힘을 상징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발'에 대응하는 의미로 쓰였다. 즉, '손으로 던지고(그것을) 발로 밟는다'(Alexander). 성 경: [사28:4]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 먹으리로다 - '시들은 꽃'으로 비유된 사마리아의 운명이 다시 '처음 익음 무화과'에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에서 사마리아에 대한 적들의 탐욕스러움과 그로 말미암은 파멸의 완전함이 암시되고 있다. 팔레스틴 땅에서 무화과나무가 대개 8-10월 사이에 추수됨을 고려할 때, 본문에 언급된 무화과 열매는 여름이 되기 전인 6월쯤에 숙성되어 나온 것인 듯하다. 이것은 대단히 희귀하고 맛이 있어서 나오자마자 소비되었다(렘 24:2;호 9:10;미 7:1;나 3:12). 본문의 의미는 사마리아 도성이 적들에 의해 게걸스럽고도 신속하게 삼켜질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선지자의 예언처럼, 사마리아의 비옥함과 아름다움은 앗수르의 식욕을 돋구는 자극제가 되어서 포위 3년 만에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왕하 18:9, 10). 성 경: [사28:5]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 화관이 되실 것이라 - 두 면류관이 대조된다. 에브라임이 적에게 삼킴을 당하는 그날에, 교만한 면류관(사마리아 도성)은 스러지고, 대신 영화로운 면류관(하나님 자신)이 햇빛처럼 솟아난다. 그러나 모두가 그 따스함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남은 백성'에게 제한시킨다. '남은 자' 개념은 본서에 현저한 주요 사상들 중의 하나이다(4:2;10:20-22;11:11, 16;14:22;15:9;16:14;17:3;21:17;37:31, 32;46:3). 이 '남은 자들'에 대해 학자들간에 이견이 분분하다-'도성의 파멸에서 살아 남은 열 지파의 생존자'(Jarchi), '멸망에서 구별된 유다와 생존한 에브라임의 일부'(Delitzsch), 멸망한 열 지파와 비교할 때 '남은 자로서의 두 지파, 왕국 즉 유다'(Kimchi, Alexander). 여기서는 맨 나중의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 성 경: [사28:6]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 힘이 되시리로다 마는 - 재판으로 대표되는 내치(內治)에는 '모략'이 필요하며, 대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방비하는 외치(外治)에는 '힘'이 필요하다. 이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심으로써 참된 왕으로서 평화를 누리게 하시며 왕국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시는 것이다(사 11:1-9). 성 경: [사28:7]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이 유다 사람들도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들 또한'(*, - 감-엘레)으로 되어 있다. '이들'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에브라임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주장(Oswalt, J. Watts). (2) 초점이 에브라임에서 유다로 넘어가고 있다는 주장(Alexander, Delitzsch, Lange).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2)를 채택한다. 이 경우, 해석은 '에브라임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자비에 의해서 열 지파와 구별된 유다에도 그와 똑같은 술취함과 방탕의 죄가 만연되어 있다'가 된다. 이와 관련해서 선지자는 특별히 지도적인 두 계층, 제사장과 선지자를 거론한다. ꃨ 옆걸음 치며 ... 비틀거리며 ... 옆걸음 치며 ... 실수하나니 - 술에 취해 제 몸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이 비슷한 음의 반복과 함께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 '...솨구(*) ... 타우(*) ... 솨구 ... 타우 ... 솨구 ... 파쿠(*). 성 경: [사28:8]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모든 상에는 ... 깨끗한 곳이 없도다 - 술취한 광경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술에 절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옆으로 게걸음질할 뿐 아니라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입으로 토하기까지 한다. 성 경: [사28:9]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그들이 이르기를 ...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 선지자의 꾸지람에 대한 술취한 자들의 반응이 기술된다. 그들은 선지자를 조롱하며 비웃는다 : '당신이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드는가? 우리가 누구인지나 아는가? 당신이 우리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를 가르칠 생각일랑 품지 말고 차라리 갓난 아이한테나 가서 떠벌려 보아라'(Jerome, Lowth). 성 경: [사28:10]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 본문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간에 제기되고 있는 여러 가지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조롱할 때 쓰는 무의미한 말들(Cheyne, Duhm). (2) 갓난 아이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칠때 쓰는 유치한 말들(Marti, Lindblom). (3) 술에 취해 주정 부리는 소리(Driver). (4) '키'(*, 토하다)와 '추아(*, 배설물)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말(Skinner, Michaelis). (5) 알파벱을 가르칠 때 쓰는 항목의 일부분(히브리어에서 '차데'(*) 다음에 '코프'(*)가 온다. Houbigant, Procksch, Forher, W.Hallo). 이들 제 견해는 모두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뜻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성 경: [사28:11]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 - 이는 압제자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이다(신 28:49;렘 5:15). 앗수르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셈조 계통의 언어이지만, 그 어휘와 문법 체계가 크게 달라서 유대인에게는 그것이 다른 지방의 방언처럼 들린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이 여호와의 교훈을 더듬거리는 말투로 조롱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더듬거리는 듯한 이방인들(앗수르인들)의 언어로 그들을 조롱하실 것이다. 성 경: [사28:12]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 참된 안식의 길이 이미 그들에게 지시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고 그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다(신 28:1-14). 만약 저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약속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듣지 아니하였다(Alexander). 성 경: [사28:13]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ꃨ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 잡히게 하시리라 -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부드러운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오히려 조소했으므로, 저들은 경험이라는 한층 더 무서운 교사로부터 그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아니된다(Oswalt). '경계에 경계를 ... 저기서도 조금'은 10절의 반복이며, 그 의미는 동일하다. 다만 이전에 저들이 역겨운 소리라고 비난했던 그 소리를 이제는 앗수르인의 생소한 입술을 통해서 듣게 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G.Rawlinson). 성 경: [사28:14]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ꃨ 너희 경만(輕慢)한 자여 - 이는 문자적으로 '비웃음의 사람들'(*,안쉐 라촌)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없는 것으로 조롱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9,10절). 이들은 스스로 진리의 길에서 이탈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도 이탈시키기를 즐겨한다. 이런 사람들이 권위있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로 말미암은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성 경: [사28:15]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ꃨ 우리는 ... 숨겼음이라 - 사망과 언약하였으므로 어떤 재난으로부터도 안저하다는 저들의 자기 확신은 어디에 기초하는 것인가? 그것은 애굽과의 동맹이다. 애굽으로 피난처를 삼고 그곳에 숨는 한, 앗수라의 위협도 무서워할 게 없다고 저들은 자만하였다. 그러나 선지자가 보기에 그것은 착각이었고 오산이었다. 애굽은 결코 그들을 도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사 30:1-7; 36:6-9). 성 경: [사28:16]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ꃨ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 경만한 유다 지도자들의 말(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대조되어 나온다. 여기에 두 그림이 있다. 하나는 거짓과 허위로 기초를 삼은 건물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시온의 돌로 기초를 삼은 건물 그림이다. 전자는 홍수와 채찍이 어우러진 혹독한 재앙이 닥쳐올 때 흔적 조차 없이 소멸되어 버린다. 그러나 후자는 전혀 요동하지 않으며 견고함을 잃지 않는 안정된 모습을 보여준다(마 7:24-27 참조). 이 견고성은 그 건물을 뒷받침하고 있는 시온의 모퉁잇돌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돌은 '시험한 돌' 곧 모든 시험을 다 거친 돌,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돌이다. 이 돌로써 건물의 기초를 삼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돌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에 대해 다양한 대답들이 제시되었다 : 율법(Eichhorn, Umbreit), 상전(Ewald), 하나님의 말씀(Schegg),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Feldmann),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Duhm, Sknner), 다윗 왕국(Delitzsch), 히스기야(Gesenius, Maurer), 참된 신자들(Eichrodt), 시온(Chids, Hktzig, Knobel), 남은 자(Donner), 하나님의 약속(Konig), 신앙 그 자체(Kaiser, Marti, Forher), 하나님 자신(Cheyne), 예루살렘은 불가침이라는 하나님의 확신(G. Smith), 메시야의 구원(von Orelli) 등등. 이중 어느 하나를 확정하는 것은 힘들다. 다만 신약의 빛에 비추어 판단하건대, 이것이 메시야를 미리 가리킨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마 21:42;행 4:11;롬 9:33:엡 2:20;벧전 2:6). 성 경: [사28:17]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ꃨ 나는 공평으로 ... 넘칠 것인즉 - 시온의 모퉁잇돌로 기초를 삼고 '공평'과 '의'로 측량되어진 건물만이 영구한 견고성을 부여받는 반면, '거짓'과 '허위'에 기초한 다른 모든 건물들은 철저하게 붕괴되고 말 것이다. '우박'과 '물'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한 말이다(2절). '피난처'와 '숨는 곳'은 예루살렘의 경만한 자들이 자랑하던 것을 가리킨다(15절, Alexander). 성 경: [사28:18]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ꃨ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 즉 앗수르 군대가 나라를 유린할 때, 그들이 그토록 의지하였던 사망(=음부)과의 언약도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15절). 애굽은 유다를 구하지 못할 것이며, 그날에 유다 백성들은 속수 무책으로 밟힘을 당할 것이다(10:6). 성 경: [사28:19]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ꃨ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대립된다. (1) 새로운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만으로도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Lowth, Leupold). (2) 오직 두려움만이 그들로 하여금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게 할 것이다(Calvin, Alexander). 여기서는 후자를 취한다. 왜냐하면 '전해진 것'이라고 번역된 '쉐무아'(*)가 여기에서와 같이 9절에서도 동일한 명사와 결합되어 쓰였기 때문이다. 성 경: [사28:20]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ꃨ 침상이 짧아서 ...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 유다 백성들이 처한 곤고한 상황이 속담투의 말로 기술된다. 그들은 눕기 위해서 침상을 조달했으나 너무 짧아서 적당치 못하며, 또 덮기 위해서 이불을 재단했으나 너무 좁아서 불충분하다. 이 비유의 초점은 그들의 측정이 그릇되어서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애굽과의 동맹으로 앗수르의 공격을 막아보려는 그들의 인식과 계산이 잘못되었음을 꼬집은 말이다. 성 경: [사28:21]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ꃨ 여호와께서 브라심산에서와 같이 ...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 선지자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의 행사임을 환기시킨다. 즉 하나님께서 전쟁을 지휘하시는 한, 그들의 도모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은 그 옛날, 다윗 왕때 있었던 브라심 산 전투(삼하 5:18-20;대상 14:9-11)와, 여호수아 때 있었던 기브온 골짜기 전투(수 10:10,11)에 비견된다. 다만 그때와 지금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하나님의 원수가 바뀌었다는 것이다(시 139:19-24). 그때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오히려 이스라엘을 대적해서 싸우실 것이다. 성 경: [사28:22]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ꃨ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 우심(尤甚)할까 하노라 - 결론적으로 선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비웃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을 압박하고 있는 결박 상태가 가중될 것이다. 마치 덫에 걸린 동물이 빠져 나오려고 온몸을 뒤틀면 뒤틀수록 더욱더 단단히 조여드는 것처럼, 그들이 이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나가려고 한다면 그럴수록 더욱 큰 재난을 맞게 될 것이다(Calvin). 성 경: [사28:23]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ꃨ 너희는 ...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로서, 지혜 문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전형적인 연설 형태이다(시 49:1;78:1). 성 경: [사28:24]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ꃨ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 고르게만 하겠느냐 - 대답은 자명하다. 즉, 농부는 밭을 기경할 때 무한정 땅을 갈아 엎고 써레질만 하지는 않는다. 밭가는 모습에 대하여는 왕상 19:19을 참조하라. 성 경: [사28:25]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ꃨ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 심지않겠느냐 - 일단 땅을 갈아 고르게 한 뒤에 농부는 파종을 한다. 이때에도 농부는 아무렇게나 하지 않으며 종자의 크기와 특성, 종류에 따라 사려 깊게 행동한다(레 19:19). '소회향'(*, 가 검고 꽃이 푸르며 향기가 나는 미나리과 제비속의 식물의 일종)과 '대회향'(*, 향로로 사용되면 회향풀과 비슷한 미나리과 식물) 같은 종자가 작은 것들은 지면에 뿌리면 되었다. 반면에 이보다 종자가 큰 소맥과 대맥은 줄을 지어 심거나 혹은 구획을 나눠 심었다. 마지막으로 밀의 일종인 '귀리'는 가장자리에 심었는데, 이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사28:26]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ꃨ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 직역하면 '올바른 원리를 따라'(*, 라미쉬파트)이다. 이에서 보다시피, '미쉬파트'(*, 공평)는 단순한 법적 정의를 넘어 물질적, 정신적인 영역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속함을 알 수 있다(Oswalit). 성 경: [사28:27,28]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ꃨ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 타작할 때 보다 가벼운 농작물은 알갱이가 깨어지지 않도록 막대기로 두들겨 탈곡한다. 반면에 보다 단단한 곡식은 수레바퀴와 말발굽을 이용해 타작한다(41:15;신 25:4;미 4:12). 즉, 농사를 지어본 자라면 각 곡식에 따른 적절한 타작법 정도는 이미 지각하고 있다는 말이다(Leupold). |
이사야 28장 메튜헨리 주석
●책망받는 에브라임 (이사야 28:1-8)
여기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이사야 예언자는 열 지파 왕국(북 왕국)에게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그 심판은 그 직후에 앗수르 왕에 의해 시행되었다. 앗수르 왕은 그들의 땅을 황무케 했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갔던 것이다. 에브라임은 그 토양이 매우 비옥하고, 그 소산은 가장 좋은 것들이 풍성했기 때문에 "결실이 많음" 이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들에게는 "기름진 골짜기" 가 매우 많이 있었다(1, 4절).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마리아는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 에 있었다. 그들의 나라는 부유하고 아름다웠으며, 여호와의 동산과도 같았다. 그것은 온 땅의 영광이었음과 동시에 가나안의 영광이었다. 그들의 수확과 소출은 곡식과 포도로 가득 덮인 그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영화로운 관" 이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들은 그들의 풍요함을 얼마나 악용했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섬기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신 것을 그들은 그들의 정욕에 대한 양식과 연료로 악용하고 남용했다.
(1)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교만하게 우쭐거렸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세월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주신 자비 - 그들은 이것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께 찬미의 면류관이 되어야 했다 - 가 그들에게 "교만한 면류관" 이 되었다. 이 세상에 사는 부한 자들은 마음을 높이기 쉽다(딤전 6:17). 그 면류관을 쓴 그들의 왕은 자기가 그처럼 부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그들의 왕성 사마리아는 교만으로 유명했다. 아마도 그들의 축제나 주연을 베풀 때, 그들의 비옥한 나라를 축하하여 꽃과 낟알로 만든 화관을 쓰는 것이 관례였을 것이다.
교만은 보편적으로 그들 가운데 만연된 죄였다. 그러므로 그 예언자는 교만한 자를 대항하시는 그분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교만한 면류관에게 화" 를 선언하고 있다. 면류관을 쓴 자들이 그것 때문에 교만해졌다면, 그들로 하여금 이 화를 피하려는 생각을 갖지 말게 하자. 이처럼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만은 그들의 멸망의 서문이다.
(2) 그들은 관능에 탐닉했다. 에브라임은 술취함과 방탕으로 유명했다. 사마리아,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는 "술에 빠진" 자들(난외에 있는대로) 곧 "술로 쇠잔해진" 자들이 가득했다. 술취한 자들은 얼마나 어리석게 행하는가를 보라. 그들은 그런 죄를 범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를 바보와 짐승으로 만드는 동시에,
[1] 그 죄에 정복되고 만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죄가 그들을 이긴다. 그들은 "그 종이 된다" (벧후 2:19). 그들은 죄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그 사로잡힘은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럽다. 이 비참한 노예 중의 어떤 자들은 폭음(暴飮)보다 더 큰 고역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했다. 그들은 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정복된다.
[2] 결국 그 죄로 파멸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의 체질은 그 죄로 인해 상하고, 건강이 파괴된다. 그들은 직업과 가산에 치명타를 스스로 가하며, 그 가족들은 그것으로 인해 망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화목도 깨어지며, 그들의 영혼은 영원히 멸망할 위험 속에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야비한 정욕을 만족시키려 한 때문이다. "에브라임의 취한 자" 에게 화 있을진저!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의 일반적인 재앙을 구체적 장소와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우리는 "술취한 자에게는 화 있을진저" 하고 말해야 한다. 그들의 상태는 재앙을 받을 만한 상태이다. 그들의 육욕적인 즐거움은 부러움의 대사잉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10). 이 저주는 그들에게 시행된다(신 29:19, 20). 아니 우리는 더 나아가 그들이 듣고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곳의 술취한 자에게 화 있을진저" 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술취한 자를 보면, "그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 하고 말해야 한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에게 특별한 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들이며,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바로 그들이 술취하면 더욱 나쁜 것이 된다. 그들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훌륭한 본을 보여야 한다.
혹자는 "교만한 면류관은" 술취한 자가 가지고 있는 면류관이요, 그것은 술마시기를 하는 사악한 시합에서 승리를 얻은 자에게 씌워주는 화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술마시는 데에 강한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처럼 수치스러운 것을 영예롭게 여기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로다.
2. 그들이 이처럼 남용한 풍성함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자. 그들의 "영화로운 관" 곧 그들이 자랑하던 그 풍성함은 "쇠잔해 가는 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소멸하는 음식이다. 가장 실속있는 과일들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시들어 버리게 하시면 쇠잔해가는 꽃에 지나지 않는다(1절). 하나님은 쉽사리 "그(한창) 시절에도 그들이 곡식을 도로 찾아가실 수 있으며(호 2:9), locum vastatum - 즉 소홀히 여겨져 황무케 된 땅, 곧 그들이 바알을 위해 마련해 둔 그의 재물들을 도로 찾아가실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를 대신하여 차압해 줄 준비를 갖추고 있는 일군을 데리고 있다. 그 과업을 행할 능력이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 곧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질" 앗수르 왕을 마음대로 지휘하신다. 따라서 그는 그들이 자랑하고 기뻐하던 모든 것을 쉽고도 효과적으로 멸하실 것이다(2절). 그는 그것을 강한 손으로, 그들이 대항할 수 없는 손으로 땅에 던져 조각나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그 "교만한 면류관" 과 "에브라임의 취한 자가 발에 밟힐 것이다" (3절). 그들은 멸시를 받게 될 것이고, 스스로를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술취한 자는 어리석게도 교만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이 스스로를 가장 부끄럽게 여겨야 할 때에도 가장 허풍을 떠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그들이 자랑하던 그 골짜기의 아름다움은
(1) "쇠잔해 가는 꽃" 같이(1절에서 처럼) 될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 시들 것이다. 그 내부에 그것을 부패케 하는 원리가 들어 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좀과 녹 때문에, 조만간에 멸할 것이다.
(2) "처음 익은 무화과" 같을 거시다. 발견되자 마자 사람이 따서 먹는다. 이 세상 재물도 저절로 썩기 쉬우며, 간절히 바라던 처음 익은 열매처럼 다른 사람들이 황급히 먹어 버리기 쉽다(미 7:1).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한다" (마 6:19). 속물들이 자랑하던 그 수확물을 "주린 자가 먹는다" (욥 5:5). 그들은 먹이를 보자마자 움켜쥐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그것은 또한 채 자라기도 전에 익었기 때문에, 매우 작고 또 쉽게 먹어치울 수 있는 실파처럼 쉽게 먹히운다. 그리고 남겨둘 가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즉시 사용해 버린다.
Ⅱ. 이사야는 그 다음에 유다 왕국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그는 유다 왕국을 "그 남은 백성" 이라 부르고 있는데(4절), 그 이유는 그것이 다른 열 지파에 대해 두 지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 이사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약속하고 있으며, 에브라임의 아름다움이 짓밟힘을 당하고 먹히우게 될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되리라고 약속하고 있다(5, 6절). "그 날에," 즉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을 황무케 하고, 유다는 그 이웃집에 불이 낚으니 그들의 집도 위험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그 날에, 짓밟힘을 당하고 혼란스러운 그 날에, 하나님은 그의 남은 백성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고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유다 왕국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직을 지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그러할 것이요, 선한 왕 히스기야의 보호를 받기 위해 유다 땅으로 도망한 일부 사람들에게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막강한 왕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쏟아지는 우박같이" 소란스럽게 괴로운 존재요, "파괴하는 광풍같이" 그 앞에 있는 모든 것 - 특히 바다에서는 더하다 - 을 뒤엎으며, "큰 물의 창일함 같이" 그 나라를 "압도한다" (2절). 그 때, "그 날에, 꾸준하게 단독적으로 하나님을 따름으로써 자기 자신들을 구별한 그의 백성을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특유한 은총으로써 구별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자가 친히 되어 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친히 모든 것을 풍족히 해 주시는 하나님이 되실 것을 언약하시면서, 직접 그들이 하나님께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도어 주실 것을 보증하신 그 약속의 가치를 매우 크게 해 주고 있다.
(1)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덕망과 존귀를 부여하시어, 그들을 멸시받지 않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존경과 명성을 얻게 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 이 되실 것이다. 교만의 면류관을 쓴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경멸할 것이며, 짓밟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은 그들을 하찮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그들을 편드는 자로 나타나시사,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들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보다 사람에게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가지고 그들 가운데 나타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입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저들에게 아름다운 화관이 될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성결함이 주는 아름다움보다 더 큰 아름다움이 어디 엤겠는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분이 저들의 영화로운 면류관과 아름다운 화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있어서 왕과 제사장이 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기들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지혜와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는 "재판석에 앉은 자들에게는" 친히 "판결하는 신이 되어 주실" 것이다. 고문관들은 지혜와 분별력의 지도를 받게 되고, 재판관은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림을 받을 것이다. 권세의 자리와 공직에 부름받은 자들이 그 직책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고, 재판석에 앉은 자가 판결의 영, 곧 통치의 영을 지닌 자라면, 그것은 그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큰 긍휼이다.
(3) 하나님은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어려움과 방해를 단호히 물리칠 수 있는 온갖 용기와 대담성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그는 "성문에서," 곧 그들이 포위하고 있는 대적의 성문에서 또는 그들이 자기들을 포위한 대적을 쳐나갈 때 그들 쪽의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 이 되실 것이다. 군대의 힘은 재판장의 지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크게 좌우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두 가지를 주시는 그 백성에게는 친히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어 주실 것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갈대아 의역본도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 날에 메시야가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실 것이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지혜와 의와 힘이신 하나님이 되신다.
2. 이사야는 그들 중에서 발견된 부패함을, 그리고 많은 타락한 사람들을 한탄하고 있다. "이 유다 사람들도," 곧 유다의 많은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 걸음을 치도다(7절)." 에브라임뿐만 아니라 유다에게도 술 취한 자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유다의 영광도 시들게 하지 않으신 그 긍휼은 더욱 더 경탄되어야 한다. 용서의 긍휼이 이처럼 두드러질 때는 우리에게 독특한 의무가 부과된다. 에브라임이 범한 죄가 유다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에브라임이 당한 멸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친다." 그들의 과음은 그 자체로 실제적인 과오이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환상(fancy)을 얻으려 하나, 과음은 오히려 그들의 판단을 그르쳐서 그들 자신을 속게 한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건강을 보존하고 소화를 도우려 하나 그것은 그들의 건강을 빼앗고 질병과 죽음을 재촉한다. 그것은 또한 원칙적인 면에 있어서도 매우 많은 과오를 야기시킨다. 그들의 지각이 가려지고, 그들의 양심이 그것에 의해 더렵혀진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타락한 백성들을 지지하며, 마음으로는 그들의 정욕을 좋아한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의 제건 때에 많이 있었던 포도주와 독주를 사랑함으로 인해서 우상 숭배에 빠졌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압의 딸들을 사랑하여 바알브올과 연합한 이스라엘처럼,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쳤다.
이 죄를 악화시킨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이 여기에 지적되고 있다.
(1) 다른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것을 가르쳐야 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자기 자신이 좋은 본을 보여야 했던 자들이 바로 그런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다. "제사장과 선지자도 포도주에 빠졌다" 고 했다. 그들의 직책은 완전히 술에 빠져 사라져 버렸다. 제사장은 제물을 드리는 자이므로, 율법에 분명히 금주를 명하고 있었다(레 10:9). 그리고 왕과 주권자들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합당치 않았다(잠 31:4). 예언자들은(암 2:11 에 나타난 대로) 나실인이었고, 직무상 남을 책망하는 자이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꾸짖게 되는 죄를 가장 멀리하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이 죄에 유혹된 자들이 많았다.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사역자가 술에 취하다니, 어찌된 일인가! "이 소식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 이러한 치욕이 그들의 옷깃에 붙어다닌다.
(2) 그 죄악의 결과가 또한 매우 해로웠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행실이 나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취해서 "이상(vision)을 그릇 풀었다" 고 했다. 그릇된 예언자들은 술 취하면 본 바탕이 명백히 드러난다.
제사장은 "법을 잊어버리고 공의를 굽게 했다" (잠 31:5). 그는 몸짓뿐 아니라 머리의 작용에 있어서도 매우 비틀거리고 흔들거렸다. 이성(理性)과 덕과 양심, 그리고 값진 모든 것을 독주에 대한 사랑과 같은 비천한 정욕에 팔아버리는 자들에게서 무슨 지혜와 공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대신들이 먹고" 마시되,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력을 위해서" 그리하는 나라는 복되도다.
(3) 그 병이 전염되었다는 것이다. 한 식탁에서 먹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감염되었다. "모든 상에는 토한 것이 가득하다" 고 했다(8절). 술취함의 죄가 얼마나 추악한 죄이며, 그것이 인간 사회에 대해 얼마나 큰 모욕인가를 보라. 그것은 보는 자로 하여금 혐오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조잡하고 흉한 모습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음식을 먹는 그 식탁은 이 죄의 흔적으로 더럽게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그 죄인들이 소돔과 같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의 상에는 토한 것이 가득하다. 따라서 그들을 정복한 승리자는 자기의 면류관을 자랑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술취함과 같이 추잡한 죄가 전국가적인 죄가 될 때, 그것은 그 백성에게는 하나의 흉조이다.
●유다의 타락 (이사야 28:9-13)
이사야 예언자는 여기에서 이 백성의 비참한 어리석음, 즉 그들이 가르침을 받지 않으며 자기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수단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다. 그들은 이전의 상태를 여전히 고집했다. 그들의 잘못은 시정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은 갱생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생활은 개혁되지 않았다.
다음을 살펴보자.
Ⅰ. 그들의 예언자와 사역자들이 의도하고 계획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지식," 곧 여호와의 지식과 그의 뜻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9절).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법이다. 즉, 하나님은 먼저 그의 진리의 지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주고 나서, 그들의 감동을 얻고 그들의 뜻이 그의 법도에 순응하도록 만드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문으로 들어오시나 도적과 강도는 다른 곳을 넘어온다.
Ⅱ. 그들은 이 의도에 준하여 어떤 방법을 택했는가? 그들이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란 없었다. 그들은 아이들, 곧 어머니의 품에서 갓 떠나 배우기 시작한 작은 아이들이 가르침을 받듯이, 가르침을 받았다(9절).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어머니들이 그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그리고 거의 학교에 가기 전까지 양육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자마자 곧 여호와의 선한 지식을 가르치고, 그들이 젖을 갓 뗀 때에라도 가르치는 것이 좋다. 예언자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듯 그들을 가르쳤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언자들이 그들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꾸준했고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큰 수고를 기울였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대로 또 감당해 낼 수 있을 만큼 매우 신중하게 가르쳤다(16절).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도다." 그들은 아이들이 읽기를 배우듯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어떤 것에 대해 조금, 또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조금 하여, 쓰는 것을 가르침 받았다. 그리하여 다양한 교육에 그들이 더 흥미를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이번에는 이것을 조금, 또 다음 번엔 저것을 조금 하여, 그들이 기억하는 데에 부담스럽지 않게 했다. 한 예언자에게서 조금, 또 다른 예언자에게서 조금 하여 각 사람이 그의 친구들이나 자기가 존경하는 자와 함께 즐길 수 있게 했다. 하나님께 관한 것들을 배울 때에는 교훈에 교훈을, 경계에 경계를, 즉 하나씩 차례로 배우고, 따라서 하나씩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의의 교훈은 경건의 교훈에 따르고 자비의 교훈은 정의의 교훈에 따라야 한다. 아니, 똑같은 교훈과 똑같은 주의가 자주 우리에게 반박해서 가르쳐져서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게 될 때, 우리가 그것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쉽게 생각해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사들은 피교육자의 능력에 맞게 해야 하며,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이 잘 감당해 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 번에 조금씩 주어야 한다(신 6:6, 7).
2.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배운 것을 설득하고 강권했다(12절). 하나님은 그의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너희에게 지시하고 가르치는 이것이, 이 도(道)가 너희 안식이요, 유일한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영혼의 상쾌함이니, 너희는 곧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그리고 이것은 너희 나라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전쟁과 다른 재앙으로부터 안식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되 실제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만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죄를 섬기기에 싫증이 나버린 자들에게 유일하고 참된 안식이며, 주 예수의 쉬운 멍에 아래에만 상쾌함이 있기 때문이다.
Ⅲ.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백성에게 준 영향을 지극히 적었다. 그들은 젖을 갓 뗀 아이처럼 배우기를 싫어했다. 그들에게 어떤 짐을 짊어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9절). 아니, 그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두 살 난 아이를 가르치는 편이 더 쉬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배울 능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처럼 그들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은 먹을 수 없었다" (히 5:12).
1. 그들은 "듣지 아니하였다" (12절). 그들은 자기들에게 안식과 상쾌함이 될 것들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진지한 집중을 요구했으나 허사였다. 그들은 그것이 선포되는 장소에 있었으나 그것에 귀를 막거나 아니면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2. 그들은 유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교훈에 교훈이며, 경계에 경계'였다.(13절). 그러나 그들은 계속 형식상의 일을 수행했다. 그들은 예언자의 가르침에 참석하는 옛 관습을 지켰고, 그것은 계속 그들의 귀를 울렸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들은 계율의 의문(儀文)은 지니고 있었으나, 그 능력과 정신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끊임없이 그들에게 부딪쳤으나, 그들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가게 하지는 못했다.
3. 아니, 그들이 그 예언자의 가르침을 조롱했고, 비웃는 것 같았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 말이 히브리 원문에는 운을 밟고 있다. 그들은 예언자의 말로 노래를 만들었고, 술에 얼근히 취했을 때는 그렇게 노래했던 것이다. 다윗도 술취한 자들의 노래거리였다. 이처럼 신성한 것을 희롱하고, 우리를 진지하게 만들어야 할 것에 대해 망령되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불경이요, 지독한 모독이다.
Ⅳ.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주 냉엄하게 그들을 벌하시겠다고 하셨다.
1. 하나님은 명료한 설교라는 특권을 그들에게서 박탈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실 것이다(11절). 명료하고 그들의 능력에 알맞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멸시하는 자들은, 당연히 그들의 수준에 어려운 것을 맛보아야 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군대를 보내시어, 그 나라를 황폐케 하실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안위함을 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징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혹은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능력에 맞게 다루시는 그 은혜로운 겸양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유모가 자기의 어린아이에게 하듯 그들을 만족시키시기 위해 말을 더듬거리면서, 혀짧은 소리를 내실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는 자기 음성을 바꾸실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방법을, 그 다음에는 저러한 방법을 시도해 보실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은총으로 인용하면서(고전 14:21), 그것을 방언의 은사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을 원망했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완전 멸망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불경스럽게도 멸시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멸망을 재촉했고 무르익게 할 따름이었다. 그것은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더 멀리 떠나게 하고, 연속적으로 죄를 짓게 하여 마침내는 그들로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고" 파멸되게 하는 것이다(13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취한다. 그것은 그 말씀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여,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先見)하지 말라 하도다" (30:10).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개심시키기에는 너무 미약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음을 입증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 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향기" 가 될 것이다.
●유다의 타락 (이사야 28:9-13)
이사야 예언자는 여기에서 이 백성의 비참한 어리석음, 즉 그들이 가르침을 받지 않으며 자기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수단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다. 그들은 이전의 상태를 여전히 고집했다. 그들의 잘못은 시정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은 갱생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생활은 개혁되지 않았다.
다음을 살펴보자.
Ⅰ. 그들의 예언자와 사역자들이 의도하고 계획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지식," 곧 여호와의 지식과 그의 뜻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9절).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법이다. 즉, 하나님은 먼저 그의 진리의 지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주고 나서, 그들의 감동을 얻고 그들의 뜻이 그의 법도에 순응하도록 만드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문으로 들어오시나 도적과 강도는 다른 곳을 넘어온다.
Ⅱ. 그들은 이 의도에 준하여 어떤 방법을 택했는가? 그들이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란 없었다. 그들은 아이들, 곧 어머니의 품에서 갓 떠나 배우기 시작한 작은 아이들이 가르침을 받듯이, 가르침을 받았다(9절).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어머니들이 그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그리고 거의 학교에 가기 전까지 양육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자마자 곧 여호와의 선한 지식을 가르치고, 그들이 젖을 갓 뗀 때에라도 가르치는 것이 좋다. 예언자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듯 그들을 가르쳤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언자들이 그들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꾸준했고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큰 수고를 기울였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대로 또 감당해 낼 수 있을 만큼 매우 신중하게 가르쳤다(16절).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도다." 그들은 아이들이 읽기를 배우듯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어떤 것에 대해 조금, 또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조금 하여, 쓰는 것을 가르침 받았다. 그리하여 다양한 교육에 그들이 더 흥미를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이번에는 이것을 조금, 또 다음 번엔 저것을 조금 하여, 그들이 기억하는 데에 부담스럽지 않게 했다. 한 예언자에게서 조금, 또 다른 예언자에게서 조금 하여 각 사람이 그의 친구들이나 자기가 존경하는 자와 함께 즐길 수 있게 했다.
하나님께 관한 것들을 배울 때에는 교훈에 교훈을, 경계에 경계를, 즉 하나씩 차례로 배우고, 따라서 하나씩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의의 교훈은 경건의 교훈에 따르고 자비의 교훈은 정의의 교훈에 따라야 한다. 아니, 똑같은 교훈과 똑같은 주의가 자주 우리에게 반박해서 가르쳐져서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게 될 때, 우리가 그것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쉽게 생각해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사들은 피교육자의 능력에 맞게 해야 하며,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이 잘 감당해 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 번에 조금씩 주어야 한다(신 6:6, 7).
2.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배운 것을 설득하고 강권했다(12절). 하나님은 그의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너희에게 지시하고 가르치는 이것이, 이 도(道)가 너희 안식이요, 유일한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영혼의 상쾌함이니, 너희는 곧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그리고 이것은 너희 나라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전쟁과 다른 재앙으로부터 안식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되 실제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만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죄를 섬기기에 싫증이 나버린 자들에게 유일하고 참된 안식이며, 주 예수의 쉬운 멍에 아래에만 상쾌함이 있기 때문이다.
Ⅲ.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백성에게 준 영향을 지극히 적었다. 그들은 젖을 갓 뗀 아이처럼 배우기를 싫어했다. 그들에게 어떤 짐을 짊어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9절). 아니, 그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두 살 난 아이를 가르치는 편이 더 쉬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배울 능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처럼 그들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은 먹을 수 없었다" (히 5:12).
1. 그들은 "듣지 아니하였다" (12절). 그들은 자기들에게 안식과 상쾌함이 될 것들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진지한 집중을 요구했으나 허사였다. 그들은 그것이 선포되는 장소에 있었으나 그것에 귀를 막거나 아니면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2. 그들은 유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교훈에 교훈이며, 경계에 경계'였다.(13절). 그러나 그들은 계속 형식상의 일을 수행했다. 그들은 예언자의 가르침에 참석하는 옛 관습을 지켰고, 그것은 계속 그들의 귀를 울렸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들은 계율의 의문(儀文)은 지니고 있었으나, 그 능력과 정신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끊임없이 그들에게 부딪쳤으나, 그들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가게 하지는 못했다.
3. 아니, 그들이 그 예언자의 가르침을 조롱했고, 비웃는 것 같았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 말이 히브리 원문에는 운을 밟고 있다. 그들은 예언자의 말로 노래를 만들었고, 술에 얼근히 취했을 때는 그렇게 노래했던 것이다. 다윗도 술취한 자들의 노래거리였다. 이처럼 신성한 것을 희롱하고, 우리를 진지하게 만들어야 할 것에 대해 망령되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불경이요, 지독한 모독이다.
Ⅳ.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주 냉엄하게 그들을 벌하시겠다고 하셨다.
1. 하나님은 명료한 설교라는 특권을 그들에게서 박탈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실 것이다(11절). 명료하고 그들의 능력에 알맞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멸시하는 자들은, 당연히 그들의 수준에 어려운 것을 맛보아야 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군대를 보내시어, 그 나라를 황폐케 하실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안위함을 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징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혹은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능력에 맞게 다루시는 그 은혜로운 겸양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유모가 자기의 어린아이에게 하듯 그들을 만족시키시기 위해 말을 더듬거리면서, 혀짧은 소리를 내실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는 자기 음성을 바꾸실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방법을, 그 다음에는 저러한 방법을 시도해 보실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은총으로 인용하면서(고전 14:21), 그것을 방언의 은사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을 원망했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완전 멸망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불경스럽게도 멸시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멸망을 재촉했고 무르익게 할 따름이었다. 그것은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더 멀리 떠나게 하고, 연속적으로 죄를 짓게 하여 마침내는 그들로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고" 파멸되게 하는 것이다(13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취한다. 그것은 그 말씀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여,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先見)하지 말라 하도다" (30:10).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개심시키기에는 너무 미약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음을 입증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 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향기" 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경작 솜씨 (이사야 28:23-29)
이 비유는 (우리 구주의 여러 가지 비유와 마찬가지로) 농부의 천직에서 빌어온 것으로서, 그 앞에는 "들을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듣고 깨달을지어다라는 주의 집중을 요하는 엄숙한 서언이 제시되고 있다(23절).
Ⅰ. 여기에 나오는 비유 자체는 매우 평이하다. 즉 농부는 secundumartem - 즉 규정대로 매우 수고하면서 신중하게 그의 천직에 전념하며, 자기 판단이 지시하는 대로 일의 방법과 순서를 따르게 된다.
1. 밭 갈고 씨뿌리는 일에 있어서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끊이지 않고 갈겠느냐?" 그렇다 그는 그렇게 한다. 그는 "소망을 가지고 밭을 갈며 소망을 가지고 파종한다" (고전 9:10). 그가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 하겠느냐? 그렇다. 그는 그 땅이 씨 뿌리기에 알맞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리고 그가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씨를, 토질에 알맞는 씨를 뿌리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농부는 진흙 땅에는 어떤 곡식이 알맞고, 모래 땅에는 어떤 곡식이 알맞는 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각 씨를 제 장소에 - (난외에 있는 것처럼) "소맥을 주요한 장소에 심으며" (왜냐하면 그것은 주요 곡물이었고, 가나안의 주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겔 27:17) "대맥을 저한 곳에 심는다." 자연의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은, 이 속에서 즉 그의 피조물에게 다양한 선물을 은혜롭게 주시려고 그 산물들이 각기 다양한 토양에 잘 적응하도록 하신 일 속에서 관찰할 수 있다.
2. 타작하는 일에서(27, 28절), 농부는 곡식을 타작하는 일도 할당해 놓는다. "소회향과 대회향" 은 그 껍질이나 이삭에게 쉽게 빠져 나오기 때문에 "작대기와 막대기" 로 떨어버리기만 해도 된다. 그러나 "곡식" 에는 더 큰 힘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것을 "도리깨" 로 떨어낸다. 그 위를 왔다갔다 하는 쇠를 단 망치가 그 곡식을 떨어낸다. 그러나 그는 곡식의 겨를 흩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기간보다 이상으로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 땅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거나" 으깨지는 "아니한다." 그것을 가는 일은 또 다른 작용에 의한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수고를 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썩는 양식" 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을 위해 더욱 더 수고하기를 마다하겠는가? "곡식은 부수어진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셨다. "여호와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가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53:10).
Ⅱ. 그러나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부분의 해설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도전하는 자들이 앞으로 받을 보응으로 보고 있다. "농부가 항상 밭을 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씨를 뿌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항상 경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그 경고를 실행에 옮기시고, 죄인들에게 온당한 심판을 내리시리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라. 그러나 그는 그들이 멸망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개심하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혜를 가지고 그들의 힘에 알맞게 행하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 비유를 해설하는 데 있어서 그 범위를 더욱 확대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 농부에게 이러한 지혜를 주신 하나님 자신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무한히 지혜로우시다. "농부에게 적당한 방법(분발력)을 가르치신" 분은 바로 그의 하나님이시다(26절). 농부들에게는 자기의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지각이 필요하다. 그들이 어느 정도 자기들의 행사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은 관찰과 경험에 의해 농사에 대한 지식을 증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왕 자신도 밭의 소산을 먹고 살기" 때문에, 농사의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은 대부분의 다른 기술을 함양시키는 것보다 더욱 인류 공통에게 도움을 준다. 농부의 기술은, 훌륭하고 온전한 각 은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벌을 내리사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게 하시면서, 인간에게 땅을 아주 잘 경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은 그 언도된 형에 대한 무게와 두려움을 어느 정도 경감시켜 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가운데 영원히 "바다의 모래를 갈고 있을지" 모르나, 그 수고는 헛되이 돌아갔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일을 할 마음, 그리고 그 속에 즐거움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들이(농부의 지파, 잇사갈처럼) 섭리에 의해서 농업을 위해 구별되고, 그러면서 비록 수고하고 근심하나 그들이 자기들의 장막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들에게는 생명을 부지할 것이 부족되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이 일이나 다른 일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더욱 지각이 있고 현명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농부들은 하나님께서 일을 위해 지시해 주실 것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곡식을 타작하는 농부의 일에 대한 다른 사례에 관해서는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고 적혀 있다(29절). 판단력과 이성의 가장 명료한 지시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을 지혜롭고 사려 깊게 행하는 것이 그로서 난것이라면 우리는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다" 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행사는 자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한 것처럼 결코 자기의 생각과 반대로 행하시지 않으며, 그의 전체 뜻 속에는 모략이 있다. 따라서 그의 모략이 기묘하기 때문에 그의 행사는 놀랍다.
2.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밭이다(고전 3:9). 그리스도께서 참포도나무라면, 그의 아버지는 그 농부이시며(요 15:1) 그는 끊임없이 그의 말씀과 규례로써 그 밭(교회)을 경작하신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끊이지 않고 갈고" 그 땅을 "고르게 하여," 그것이 씨를 받을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을 통해 휴경지를 개간하시지 않겠는가? 파종하는 자가 씨뿌리기에 알맞도록 땅을 만들고 나면, 그 적합한 토양에 씨를 뿌리지 않겠는가? 과연 그렇게 한다. 마찬가지로 위대하신 그의 사역자들의 손을 통해 그의 말씀의 씨를 뿌리신다(마 13:19). 사역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분배하고 각 사람에게 그 몫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토양이 어떠하든지 간에, 말씀 속에서 그것에 적합한 어떤 씨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징계도 이처럼 지혜롭게 사용된다. 고통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우리와 우리의 겨를 분리하고, 우리가 쓰임 받도록 해 놓으려는 하나님의 도리깨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기회가 생길 때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우리 힘에 맞게 할당하실 것이다. 그것은 필요 이상으로 무겁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 막대기가 그 목적을 이룬다면, 그는 그의 수레바퀴와 말굽(더 큰 심판)을 사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곡식을 부술 필요가 있을지라도(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그 겨에서 깨끗이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그것을 떨지 아니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땅의 갇힌 자들을 그의 발 아래 부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는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다" 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사야 28장)
1-13절, 에브라임의 술취함과 교만
[1절]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선지자 이사야는 에브라임 곧 북쪽 이스라엘 나라를 ‘술 취한 자’라고 표현했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나라는 ‘영화로운 관같이’ 상당한 물질적 부요와 권세와 영광을 누리고 있었으나, 술 취한 자가 많았고 또 그들은 전체적으로 교만해 있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 나라에 화가 있을 것이며 그 나라가 쇠해지고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2절]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의 창일함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는 앗수르 나라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앗수르 나라는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의 창일함같이 이스라엘 땅에 덮칠 것이다. 주전 722년에 북방의 이스라엘이 멸망하였을 때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 열왕기하 17장은 북방 이스라엘의 멸망의 사실을 기록했다. 앗수르 나라는 ‘주께 있는’ 자,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도구로 쓰일 수도 있고 이방 나라들도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3-4절]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 영화의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북방 이스라엘 나라는 술취하고 교만한 면류관 같았으나, 그 면류관은 발에 밟힐 것이다. 그 나라는 기름진 골짜기의 꼭대기에 있는 아름다운 꽃이었으나,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를 사람들이 보고 얼른 따서 먹듯이 그 꽃은 떨어지고 쇠잔해질 것이다. 북쪽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그 부귀와 권세와 영광은 곧 사라질 것이다.
[5-6절]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마는.
‘그 날에’는 앞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멸망의 날을 가리킨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자유로이 동원하시는 전능하신 섭리자이심을 증거한다. ‘그 남은 백성’은 남쪽 유다 백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남쪽 유다 나라는 약 136년 동안이나 더 지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유다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과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재판석에 앉은 자들에게 ‘판결하는 신’(루아크 미쉬파트) 즉 ‘공의의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들, 즉 법정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위하여 변론하는 자들에게 힘이 되실 것이다. 유대 사회에는 경건과 도덕성이 지속 혹은 회복될 것이다. 그것은 특히 히스기야나 요시야 왕 때를 가리킨 것 같다.
[7-8절] [그러나](KJV)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그들’(7절)은 ‘그 남은 백성’ 곧 유다 백성을 가리킬 것이다. 남쪽 유다 나라는 상당한 기간 하나님을 믿고 섬길 것이지만, 그들도 마침내 부패될 것을 보이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세상 사랑을 인해 부패할 것이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그러하고 이스라엘 온 땅에 죄악들이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의 옛 백성 이스라엘은 이와 같이 북방이나 남방이나 다 부패하여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9-10절]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유다 백성은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주는 초보적인 말씀이라고 무시하고 조롱했고, 그가 반복된 교훈을 한다고 멸시하며 비방했다. 그러나 그들 속에 하나님의 참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들은 반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할 것이며, 또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받아야 할 것이다.
[11절] 그러므로 [그가] 생소한(라아그)[더듬거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절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방 나라들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다른 방언하는 자들 가운데 거할 것이다.
[12절]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안식과 그것을 받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 참 안식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수고롭고 곤고한 삶을 살고 있다.
[13절]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비방한 말을 하나님께서 되받아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된 교훈을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받지 않고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될 것이다.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어떤 좋은 말씀도 믿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술 취하거나 교만하지 말자. 이스라엘 백성은 술 취하며 교만했다. 하나님께서는 술 취하고 교만한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셨다. 이스라엘의 물질적 부요와 권세와 영광은 쇠잔해가는 꽃같이 되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강하고 힘있는 앗수르 나라를 불러 갑자기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고 그것을 발로 밟고 그 땅을 정복하게 하셨다. 우리는 술 취하지 말자.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또 우리는 패망의 선봉인 교만을 버리자(잠 16:18).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자. 여호와께서는 그 남은 유다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실 것이다. 시편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안식과 상쾌함이 되는 좋은 말씀인 줄 알자.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29절, 유다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14-15절] 이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경만(輕慢)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자들, 곧 유다 지도자들을 ‘너희 경만한 자’라고 부른다. ‘경만(輕慢)한’이라는 원어(라촌)는 ‘비웃는, 조롱하는’이라는 뜻이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교만하여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을 비웃고 조롱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악이다. 또 교만한 그들은 자신들이 사망과 언약을 맺고 음부와 맹약했으므로 넘치는 재앙이 와도 자기들에게 미치지 못하며 자기들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음부’는 무덤을 가리킨다고 본다. 또 그들은 거짓과 허위로 자신을 감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헛된 말을 판단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16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귀한 모퉁잇돌이며 견고한 기초]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주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한 돌을 시온에 두실 것이다. 그 돌은 ‘시험하는 돌’(에벤 보칸)이라고 불린다(BDB). 또 그 돌은 ‘귀한 모퉁잇돌’(핀낫 이크랏)과 ‘견고한 기초’(무사드 무싸드)라고 표현된다. 시편 118:22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 돌은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귀한 모퉁잇돌이시며 견고한 기초이시다. 그는 자신을 ‘건축자들의 버린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표현하셨다(마 21:42-44).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 공회 앞에서,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담대히 증거했다(행 4:11). 또 그를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급절한다’는 원어(야키쉬)는 ‘급히 도망치다(BDB), 당황하다(NASB, NIV)’는 뜻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재앙의 날에 당황치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피할 곳이 있다.
[17-18절]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음부로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운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의 거짓과 불의에 대해 공의롭게,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이 은밀하게 숨은 곳들도 다 찾아내실 것이다.
[19-21절]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유행하고 주야로 유행한즉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나니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 공(功)을 이루시리니 그 공이 기이할 것임이라.
‘공’(功)이라는 원어(아보다)는 ‘일, 행위’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심판 때에 그들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침대가 짧아 몸을 다 펴지 못하는 것과 같고 이불이 짧아 몸을 다 덮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또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일어나 진노하실 것이다. 브라심 산과 기브온 골짜기는 다윗 시대의 승전 사건들을 가리킨 것 같다(대상 14:11, 14-16).
[22절]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輕慢)한 자[비웃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尤甚)할까[더 심할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다면 그들은 이방 나라들에게 포로가 될 것이며 그들의 결박은 더욱 견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멸망하실 일을 작정하셨다. 그는 전에도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신 적이 있었다. 그는 옛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었고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유황불비로 심판하셨었다. 그는 불경건한 이방 나라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도 악을 행하면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에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벧후 3:6-7).
[23-29절]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시라]을 뿌리며 대회향[커민]을 뿌리며 소맥[밀]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보리]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호밀]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소회향[시라]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커민]에는 수레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시라]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커민]은 막대기로 떨며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 타작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과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지만, 그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고 그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한 방편이며 그의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씀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일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창세 전에 세우신 그의 구원 계획을 다 이루실 것이다. 이사야 46:9-10,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요한복음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사야는 하나님의 모략이 기묘하며 그의 지혜가 광대하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기초석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였다. 그를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는 다 구원을 얻는다. 그를 믿는 자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진노의 재앙을 피할 수 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믿었고 보배로우신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석으로 하여 거룩한 집으로 지어져 가야 한다.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의 믿음은 성경말씀과 성령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기도의 교통 속에서 견고해져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만하여 비웃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경만(輕慢)한 자들 곧 교만하여 비웃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쳤다. 그들은 거짓과 허위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경만한 자, 즉 교만하여 비웃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악에 대해 공의로, 철저하게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그들은 다 멸망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으로 그 말씀을 받고 믿고 소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계명들과 교훈들을 지키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의 마땅한 일이다. <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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