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떠나시는 여호와의 영광(에스겔 10:1-22)
[ 성경묵상 ]
10:1-8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 중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기 위하여 의인의 이마에 표를 하였던 서기관 복장의 천사를 향하여 예루살렘 성읍 위에 숯불을 살포하도록 명하신 사실과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한 천사의 일련의 행위들을 보도한다(1,2,6-8절).
특별히 여기서는 지성소의 그룹 위에 머물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으로 이동하신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데(3-5절), 하나님께서 이처럼 지성소 그룹으로부터 성전 문지방으로 이동하신 것은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과 예루살렘성으로부터 떠나가시기 위한 일단계 행동으로써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에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임박하였음을 나타내준다.
10:9-22은 성전 지성소로부터 성전 문지방으로 이동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성전을 나와 그룹을 타고 성전 바깥뜰의 동문으로 이동하신 사실을 보도한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이동 수단으로 삼으신 네 그룹의 면모를 밝히며 그 네 그룹이 에스겔의 소명 당시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바로 그 네 생물임을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에스겔이 네 그룹의 면모를 밝히며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네 생물과의 동일성을 거듭하여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일전에 본 네 생물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였다가 여기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비록 지상 성전을 떠나가시고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은 파괴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지상 성전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우주 만물과 역사와 인생 각자를 섭리하심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 질문 하나 ]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은 성전에 임하는 모습인가? 성전을 떠날 채비를 하는 모습인가?(4절)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려 한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른다(4a절).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성전 뜰에 가득한데, 성소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안타까운 모습이다(4b절).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우상의 집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읍에 가득한 우상숭배가 성전까지 밀려들었고, 가증한 백성은 성전에서조차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했다. 이에 하나님은 성전을 떠난다. 떠나신다기보다 오히려 밀려났다고 함이 정확할 것이다.
[ 질문 둘 ]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움직이는 바퀴에 가득한 눈은 "눈이 가득하다"고 묘사하는데, 무엇을 의미하는가?(12절)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이 베옷을 입은 자에게 불을 챙기라고 명하신다. 우상의 땅 예루살렘에 부을 심판의 불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는 그룹과 특히 바퀴는 어디든 갈 수 있는 기동성을 상징하고, 바퀴 둘레에 가득한 눈(12절)은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상징한다. 온 세상 구석구석이 그분의 눈앞에 있다.
[ 질문 셋 ]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성전은 어떤 모습인가?(15-22절)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에까지 이르는데, 안타깝게도 들어오시기 위함이 아니라 떠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집으로 불리던 성전에서 하나님이 떠나신다. 이제 성전은 주인이 사라진 허울 껍데기요, 벽돌 무더기에 불과하다.
우리의 교회 모습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교회, 상상하기도 싫지만 현실이 될 수도 있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예루살렘 성전을 가득 채운 가증스런 우상 숭배의 모습을 기술하는 8장에 이어지는 9장 이하 11장은 이러한 죄악에 대한 웅보인 하나님의 심판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9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에게 이마에 표를 할 것올 명령하시고 이마에 표가 없는 자들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을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였다.
이어지는 본장의 1-8절에서는 예루살렘의 불심판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숯불 살포 명령 환상을 보도하고 있다. 본장 2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그룹 밑 바퀴 사이에 들어가서 숯불을 취해 그것을 성읍 위에 흩으라고 하셨으며, 6절에 따르면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고 명령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여호와께서 예루살햄을 심판하시되 불같은 심판으로 철저하게 파괴시켜 버릴 것을 암시한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창 19:24,25)와 같이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예루살렘성을 모조리 태워버릴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숯불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 될 것인지를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본단락의 3-5절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의 그룹 위로부터 성전 문 지방으로의 이동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11:22-24에서 분명해지는 사실, 즉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완전히 떠나버리는 사실에 대한 전조가 된다.
제1장의 환상에서 보았던 네 생물의 환상이 본장 9-17절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거듭된 네 생물의 환상올 통해 에스겔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계획하신 바를 행하신다는 사실 및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단행하는 심판이 주권적이어서 그 어느 누구도 중단시키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룹들(cherubim)인 네 생물들이 바퀴 안에 있는 신(17절)의 지시를 따라 행하는 모습은 여호와의 모든 사역자들이 여호와의 명령대로만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읍에 내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주권성을 인정하고 거기에 항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1.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그들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더라
내가 보니, 그룹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 청옥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모양은 보좌의 형상과 비슷하였다.
에스겔 선지자가 성전 뜰에서 궁창 위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형상을 보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본절은 ‘그리고 내가 보았다. 그런데 보라'로 직역되는 본문으로 시작된다. 개역 개정판 성경은 이를 ‘이에 내가 보니’로 번역했지만, 원문에서는 에스겔이 그 환상을 직접 보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이와 더불어 그 놀라운 광경에 대하여 독자들까지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본 것을 그룹들 머리 뒤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났으며 그들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가운데 후자의 진술은 1:26의 진술과 유사하다. 그러나 앞선 1장에서는 그 환상이 그발 강가에서 보였지만,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였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는 여호와의 임재가 이 세상의 어디에서나 경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본문에서는 보좌의 형상이 그룹들 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여기서 ‘그룹들’에 해당하는 ‘학케루빔’의 원형 ‘케루브’는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들올 지칭하는 단어로 쓰였다(창 3:24).
역사적으로 히브리 백성들은 성소 및 성전의 지성소에 모셔 두었던 언약궤 위를 덮는 뚜껑인 속죄소를 만들 때 그 속죄소의 위 좌우에 두개의 그룹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는데(출 25:18 ; 왕상 6:23) 각 그룹은 두 날개를 앞쪽으로 쭉 펴 속죄소를 덮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그 사이에 임재해 계시는 것으로 믿어졌다(삼상 4:4). 그러나 에스겔의 환상 가운데서는 그 그룹들이 궁창을 떠 받들고 있는 모습이었으며, 그 궁창 위에 여호와의 보좌의 형상이 있었다. 이 두 경우 모두 그룹들이 하나님의 영광올 높이며 수종들고 있는 모습인 점은 동일하다.
2.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그 때에 주께서 모시 옷을 입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룹들 밑에 있는 저 바퀴들 사이로 들어가서, 숯불을 두 손 가득히 움켜 쥐어서, 이 성읍 위에 뿌려라." 그러자 그 사람은, 내가 보는 앞에서 그 곳으로 들어갔다.
3.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오른쪽에 서 있고 구름은 안뜰에 가득하며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의 오른쪽에 서 있고, 안뜰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4.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그 때에 주의 영광이 그룹들에게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갔고, 성전에는 구름이 가득 차고, 안뜰은 주의 영광에서 나오는 광채로 가득 찼다.
5.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그리고 그룹들이 날개치는 소리가 바깥 뜰에까지 들리는데, 그 소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과 같았다.
6.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에게 명령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가져 가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주께서 모시 옷을 입은 사람에게 명하셨다. "저 바퀴들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가져 가거라." 그는 안으로 들어가서 바퀴 옆에 섰다.
7. 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그 때에 한 그룹이 자기 손을 그룹들 사이에서 내뻗어,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서, 모시 옷을 입은 사람의 두 손에 넘겨 주니, 그는 그것을 받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8.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라
그룹들의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과 같은 것이 보였다.
1-8절에서는 성전 내부에서조차 우상 숭배에 여념이 없었던 패역한 예루살렘에 불심판을 내리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에게 숯불을 살포할 것을 명령하고 그 사람이 이를 준행하였다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소개되었다.
이제 본절 이하 22절에서는 여호와의 보좌를 호위하는 네 그룹과 네 그룹에 부속된 바퀴들의 면모와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으로부터 떠나 이동한다는 내용의 환상을 소개한다.
그 가운데 9절부터 17절까지는 네 생물들과 그에 부속된 네 바퀴의 면모를 언급하는데 본서 1:5-21에서 제시된 바와 상당히 유사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유사성과 관련하여 일부 학자들은 이같은 내용은 앞선 1장의 내용이 현재의 문맥으로 삽입된 결과로 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본단락의 중복되는 부분은 생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선 1장의 환상은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본 것이며 본단락의 환상은 성전 뜰에서 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본 환상을(15절) 또 다시 성전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시금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앞선 1장과 달리 본단락에서 선지자는 자신이 환상에서 본 생물들이 그룹들(cherubim)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15절).
이와 같은 본단락의 그룹들과 그에 부속된 바퀴에 대한 묘사에서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그룹들과 바퀴에 대 한 묘사가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 긴장 상태를 형성하고 이 환상의 절정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Craigie). 즉 앞선 9장으로부터 이어지는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되는 과정을 상세하고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본단락의 네 그룹과 바퀴의 면모는 그러한 과정에 삽입되어 그 흐름을 지연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떠나가고 마는 광경을 매우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본단락에서 밝혀지는 이 생물들의 정체가 그룹들이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본단락에서 언급되는 그룹은 하나님의 성전 안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에 있는 그룹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전 안 지성소에 있는 그룹의 날개 아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임재의 상징이기도 하다(출 25:22 ; 삼하 6:2 ; 대상 13:6).
그러한 의미에서 앞선 1장에서 그발 강가의 생물들이 그룹이라고 하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든 예루살렘의 성전에 제한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성전의 그룹 위에 좌정하여 계시며 따라서 예루살햄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좌정하시는 보좌와 하나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그룹은 인간의 피조물이 아니다. 지상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은 실체의 반영에 불과하며 참된 실체는 인간의 언어로 감히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단락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결국 예루살렘의 성전이 하나님의 입재의 좌소로서 신성불가침의 것이라 굳게 믿었던 신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예루 살렘의 성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신실한 언약 관계에 있올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성전이 될 수 있음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그룹들이 그발 강가에서 보여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한 순종의 삶을 살 경우 그들은 늘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뵙는 삶을 산다는 사실올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는 장면에서 이 같은 하나님의 그룹과 네 바퀴의 면모를 재언급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파괴와 멸망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조금도 훼손올 입을만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올 버리고 떠나가신 필연적인 결과라는 사실올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게 한 유다 백성의 죄악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성전에서 자행된 온갖 우상 숭배는 능히 용납될 수 있는 다양한 종교적 행위들로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볼 때 네 그룹들과 네 바퀴와 함께 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떠나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심대한 죄악이었던 것이다.
9. ○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 모양은 황옥 같으며
내가 또 보니, 네 바퀴가 그룹들 곁에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바퀴가 하나 있고, 저 그룹 곁에도 바퀴가 하나 있었으며, 그 바퀴들의 모습은 빛나는 녹주석 같았다.
10. 그 모양은 넷이 꼭 같은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그 바퀴들의 모양은 넷이 똑같이 보여서, 마치 바퀴 안에 다른 바퀴가 있는 것과 같았다.
11.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사방으로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나아가되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나아가며
그들이 출발할 때에는, 네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출발하든지 돌 필요가 없었다. 어느 방향이든지 그 곳으로 머리를 두면, 모두 그 뒤를 따라갔다. 그래서 그들은 돌지 않고서도 어느 방향으로든지 다녔다.
12.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의 등과 손과 날개 할 것 없이, 그들의 온 몸과 네 바퀴의 온 둘레에 눈이 가득 차 있었다.
13.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부르며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의 이름은 도는 것이라고 하였다.
14. 그룹들에게는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째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그룹마다 얼굴이 넷이 있는데, 첫째는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는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그룹, 바퀴, 네 얼굴 등 에스겔에는 기이한 형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동행하고 보좌하는 형상들인데, 각각 특정한 무엇을 의미한다고 무리하게 해석하기보다 그것들이 합하여 전달하는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이 지혜롭다.
15. ○그룹들이 올라가니 그들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생물이라
그룹들이 치솟았다. 그들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았던 바로 그 생물들이었다.
16.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바퀴도 그 곁에서 나아가고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땅에서 올라가려 할 때에도 바퀴가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그룹들이 나아가면 바퀴들도 그 곁에서 함께 갔고, 그룹들이 땅에서 떠올라 가려고 그들의 날개를 펼칠 때에도, 그 바퀴들이 그룹들의 곁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17.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올라가면 이들도 함께 올라가니 이는 생물의 영이 바퀴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그룹들이 멈추면 바퀴들도 멈추고, 그룹들이 치솟으면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치솟았다. 그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주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들 위로 가서 머물렀다.
19.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그룹들이 내가 보는 데서 날개를 펴고 땅에서 떠올라 가는데, 그들이 떠날 때에,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났다. 그룹들은 주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무르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머물렀다.
20. ○그것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래에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인 줄을 내가 아니라
그들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환상을 보았을 때에 본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을 떠받들고 있던 생물들이다. 나는, 그들이 그룹임을 알 수 있었다.
21. 각기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으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형상이 있으니
그룹마다 얼굴이 넷이요, 날개가 넷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과 같은 것이 있었다.
22. 그 얼굴의 형상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얼굴이며 그 모양과 그 몸도 그러하며 각기 곧게 앞으로 가더라
또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본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들은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1,12월호 ]
여호와의 영광의 임재 ( 10:1-7 )
(1) 하나님의 장엄하심이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의 존재가 본문에서는 그것의 광채와 아름다움에 대한 어렴풋한 묘사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림이 생명과는 비교될 수 없듯이 진리와 본질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들이다.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위 궁창에(1절). 그 궁창은 그의 '권능의 궁창'이며 조망의 궁창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부터 '인생을 굽어 살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보좌에 앉아 계시다. 하나님의 영화로우심과 통치하심은, 인간의 마음으로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관념도 무한히 초월한다. 그의 영광의 현현은 구름으로부터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성전'과 '안뜰'에는 '구름'과 어두움이 가득 찼으나, 그 바깥 뜰에는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가득하였다'(3,4절). 이렇게 해서 '그의 손에서 광선이 나오는데 그 권능은 그 속에 감취어져 있었다'(합 3:4). 하나님보다 뚜렷한 존재는 없으며 하나님보다 신비로운 존재도 또 없다. 하나님께서는 빛으로 자신을 가리우시며 궁창을 어둡게 만드신다(참조. 겔1장).
(2)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지시가 더 하달된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룹들 사이에서 꺼낸 숯불을 그 성읍 위에 흩어 성을 재로 만들라는 명령을 볼 수 있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4절). 이것은 각 성읍의 문에서 열렸던 재판정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아 계시다.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어라 하시매(2절). 이것은 갈대아인들에 의해 성읍과 성전이 불타는 것을 암시한다. 속죄제가 드려지던 하나님의 단은 경멸되어졌었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 환상을 처음 보았을 때, '숯불과 횃불이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주목하였다(겔 1:13). 그런데 거기서 이 불이 취해진 것이다(7절).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깨끗케 하시는 단련하는 자의 불로 타오르는 영혼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 것이다.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의 영광 ( 10:8-22 )
에스겔이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에 대한 기록이 더 나타나는데, 이는 그 영광이 떠나가는 것을 보여 주려 함이다.
(1) 에스겔은 '그발강 가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에서 빛나고 있는 것을 본다.
에스겔은 현세의 통치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것을 본다. 이 세상사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천사들의 기능은 생물들과 바퀴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마치 병거가 그것을 모는 사람이 하는 대로 움직이듯, 바퀴들은 생물들의 모든 움직임에 따르고 있다. 생물들 가운데 그리고 바퀴들 가운데에 존재하는 신은, 천사들의 직무와 이 현세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 그 자체의 목적을 수행하는 무한한 지혜를 의미한다. 선지자는 이 환상이 그가 그발강 가에서 보았던(15,22절) 것과 같은 환상임에 주목한다. 이 세상은 쉬이 변화한다. 세상사의 추이는 '바퀴'로 묘사되고 있다(9절). 이 바퀴들의 모양은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았다'(10절). 이것은, 바퀴들의 움직임이 뒤얽히고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바퀴들 상호간에 섭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의존하며 그 모두가 단 하나의 공동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는 섭리 가운데는 놀랄 만한 조화와 일치가 있다(13절).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칭하며(한글 개역 난외주에는 '그 바퀴들에게 돌라 하며'로 되어 있다-역주). 바퀴들은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긴 하지만, 하나의 신에 의해 하나의 목표로 유도되므로 그들 모두가 하나같다. 섭리의 움직임들은 한결같고 일정하다. 또한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섭리가 이행한다. 그룹들이 행할 때에는...돌이키지 않고 행하되(11절). 각기 곧게 앞으로 행하더라(22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지시하신다. 모든 사건들은 눈먼 운명의 바퀴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이 가득한 섭리의 바퀴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2)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에서 떠나시는 것을 본다.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오래도록 거하시던 곳이었으므로 이것은 슬픈 광경이었다. 여호와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에 임했었다(4절). 그러나 이제는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에스겔이 지금 환상으로 보고 있는 그룹들 위에 머물렀다(18절). 그리고 이내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19절)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그 곁에 있는 바퀴들은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고 그들 곁에서 함께 행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생물의 신이 바퀴 가운데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 뜰에서 자기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었다. 그룹들이...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19절). 이는 그 전을 곧 떠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돌아오도록 중재하는 자가 혹시 없을까 하고 보시려는 듯 떠나기를 싫어하시며 여러 번 멈추어 서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화나시게 하는 백성이라도 그들로부터 떠나시기를 더디하신다. 그러므로 그가 노여워하시며 떠나시고자 할 때에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기도하기만 한다면 자비하심으로 그들에게 돌아오려 하시는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불 심판 ( 10장 )
제9장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상 숭배와 불법을 행하는 유다 백성에 대한 심판을 천사에 의해 집행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본장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그룹 사이에서 취한 숯불로 유다 백성을 심판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본장은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아 유다 백성이 심판 받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보좌
1) 영광의 광채
살육하는 기계를 가진 심판의 집행자를 부르시어 심판을 준비하시고자 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영광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참조, 겔9:1-3). 숯불 심판을 내리시려 하는 이 시점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영광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한편 이때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은 광채를 발하여 부위를 환히 비추었습니다(참조, 겔10:4). 이것은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하고 공의로우시며 진실되고 영화로우신 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a.광채로 인한 숯불(삼하22:13)
b.해같이 빛나는 얼굴(마17:2)
2) 절대 섭리
하나님의 영광은 그룹들 위에 계셨으며 그룹들의 곁에는 바퀴가 있었습니다(참조, 겔10:9). 바퀴는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바퀴는 곧게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바퀴 주위에는 하나님의 통찰력을 상징하는 눈들이 달려 있었습니다(참조, 겔10:9-12). 이렇게 볼 때 심판의 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섭리는 불변하고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상징적 묘사들은 그러한 의미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a.말씀하신 바를 이루심(민23:19)
b.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심(사37:32)
3) 그룹들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수행자들은 네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얼굴은 황소이며, 둘째 얼굴은 사람, 셋째는 사자이고, 넷째는 독수리였습니다. 이것은 각기 충성, 지혜, 통치권, 민첩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속성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a.속죄소의 그룹들(출25:18)
b.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삼상4:4)
2. 불 심판
1) 숯불
그룹들 곁에 있는 바퀴들 사이에는 맹렬히 타는 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불꽃을 일으키는 숯불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숯불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의에 의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불은 사물을 태워 소멸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나타내는데 종종 사용되며, 특히 숯불은 무엇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태우는 것으로 자주 사용되는 것입니다(참조, 사6:7-8;히10:29;유1:7).
a.여호와의 코에서 나오는 불에 숯이 핌(삼하22:9)
b.숯불 모양의 생물(겔1:13)
2) 성읍 위에 흩음
하나님께서는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명령하여 그룹 밑 바퀴 사이에 있는 불 속에서 숯불을 취해 그것을 가득히 움켜쥐고 예루살렘 성읍으로 가서 예루살렘 성 위에 흩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는 베옷 입은 사람은 겔9장에서 살육하는 기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 천사와 동일시될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자입니다. 그리고 숯불을 예루살렘 성읍에 흩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에 타는 가운데 멸망 당할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불에 타고 그 거민들은 살육 당하였습니다(참조, 왕하25:9;왕하25:18-21).
a.소돔과 고모라 위에 떨어진 유황 불(창19:24)
b.머리 위의 숯불(롬12:20)
3) 교훈
흔히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만 생각하려 합니다. 그래야만 날마다의 범죄 속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지 않는 가운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갈 뿐입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자를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이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도 깨달아 입으로만 믿지 말고 행동으로도 의를 나타내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림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a.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12:29)
b.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17)
3. 영광의 떠나심
1) 성소에서 올라가심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성소 내에 마련된 지성소에 거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지성소에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떠나가심을 의미합니다.
a.사울을 떠나신 여호와(삼상16:14)
b.실로의 장막을 떠나심(시78:60)
2) 성전 문지방에서 떠나 그룹 위에 머무심
하나님의 영광은 지성소에서 떠났을 뿐만 아니라 성소의 문지방에서도 떠나 그룹들 위에 모셨습니다. 바야흐로 하나님에서 성소를 완전히 떠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이 환상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히 지키지 아니하므로 완전히 떠나실 것을 말해 줍니다.
a.그룹을 타고 날으심(삼하22:11)
b.영광의 그룹(히9:5)
3) 바깥 동문에 머무심
성전의 동문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중심 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들을 타고 이 문까지 도달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완전히 성전을 떠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서 떠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참조, 고전6:19).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시고 떠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아니 하시도록 온전하고 거룩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a.사마리아를 떠나지 아니하심(호10:5)
b.의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심(히13:5)
결론
하나님의 영광은 아름답고 밝으며 영화롭고 거룩하여 인간을 그와 같이 만드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떠나고 떠나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심판을 내리시사 멸망케 만드십니다. 이 사실은 부인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부와 성읍을 의지하는 자들(에스겔 11:1-13)
2018. 11. 16.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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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묵상 ]
[ 질문 하나 ]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3절)
주의 영이 에스겔을 성전 동문으로 안내하였는데, 그곳에서 불의한 모임을 목격하였다. 지도자격의 스물 다섯 명이 모여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데,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가마가 울타리가 되어 고기를 지키듯, 자신들이 쌓은 부와 성읍이 멸망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말이다.
주님께서 이들을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미는 자"라고 부르시는 걸로 보아 그들이 쌓은 부는 정당한 부가 아니라 약한 자들에 대한 착취물로 보여진다. 과연 이들의 기대가 이루어질까?
[ 질문 둘 ] 부와 성읍을 의지하는 자들의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5-10절)
부와 성읍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이 성읍은 가마인데 너희는 그 가운데서 끌려 나올 것이라"(7절)고 하였다. 부와 성읍이 결코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임할 때, 그들의 기대가 얼마나 허망했는지를 뼈아프게 깨닫게 될 것이다.
[ 질문 셋 ] 하나님이 예루살렘 백성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이유는 무엇인가?(12절)
에스겔이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스물 다섯 명 중 하나인 블라댜가 죽는다. 이 사람들은 불의한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진심으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했더라면, 성읍을 방패막이 삼기보다 여호와의 말씀과 규례로 돌아갔더라면 구원함을 받았을 것이다.
이들은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방에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12절).
하나님은 이러한 곳에서 돌아서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심판을 내리신다. 새로운 삶을 사는 자들로 돌아서기를 바라며 살아가자.
예루살렘의 사원의 파괴 / Nicolas Poussin / 1673년, 캔버스에 유채, 147ⅹ198.5cm, 빈 미술사 박물관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서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그 문에 사람이 스물다섯 명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라
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리셔서, 주의 성전 동쪽으로 난 동문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 문의 어귀에는 사람 스물다섯 명이 있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백성의 지도자들인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있는 것을 보았다.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첫번째 환상(1:1-3:15)은 에스겔의 선지자 소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4장부터 11장까지에서 제시된 두번째 환상은 성전에서까지 자행되는 우상 숭배의 실상과 이에 대한 여호와의 철저한 심판과 관련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이동이다. 즉 여호와의 영팡이 지성소에서 점점 밖으로 이동하여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떠나는 환상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은 솔로몬 성전 봉헌 이래로(왕상 8:10,11), 지성소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은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행해진 가증스런 우상 숭배의 죄악들(8:5-18)로 인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이동하였으며(9:3), 다시 성전 문지방을 떠나 천상의 그룹과 더불어 여호와의 전 동문으로 이동하였고(10:18,19), 마침내는 그 동문을 떠나 예루살렘 성읍을 가로질러 성읍 동편에 있는 산, 즉 감람 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11:22,23).
본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 감람산으로의 이동은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예루살렘 도시로부터 완전히 떠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떠나버린 여호와의 영광은 에스겔이 나중에 보게 될 영광스런 성전 재건 환상 가운데서 성전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43:2-4), 예루살햄에서 떠나 있게 된다.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나님의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떠나심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는 행위에 있어서 뿐 아니라, 그의 주권에 있어서도 우주적이며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0. Palmer Robertson).
솔로몬의 성전 건축 이래로 여호와의 영광이 거의 400년 가까이 성전 지성소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B.C. 586년 전까지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 대부분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일을 그들에 대한 징계의 차원으로 과감히 단행하셨다(0. Palmer Robertson).
사실 신정 왕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본질적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호와 영광이 성소와 예루살렘을 떠나 버린 것이다. 이는 결국 사무앨 시대 이후 지속되어 온 신정 왕국의 정체성이 사라져 버린다는 슬픈 사실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 떠나버린 이스라엘은 이제 다른 이방 왕국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처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떠나게 한 죄악을 저지른 유다 백성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1 -13절).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이어지는 14-21절 단락에서는 여호와께서 주권적 은혜를 베푸사 택한 백성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여호와께서는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고 남은 자들을 열국에 흩으실 것이나, 그들을 완전히 진멸시키지 않고 다시 회복시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섬기게 하실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진리 하나를 보여준다. 이는 예루살렘이 받은 심판 및 성전의 파괴는 여호와의 구속사마저 중단시키는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근시안적 시각으로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거처로 믿어진 성전까지 파괴해 버린 것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겔과 같이 여호와의 섭리를 아는 자들은 그 파괴 너머에 있는 여호와의 또 다른 계획을 알고 소망을 품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노아 홍수 이전의 죄로 관영한 옛 세계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시고 새로운 세계를 도래시키셨듯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았던 자들을 일소해 버리시고 남은 자들, 즉 이방 열국으로 흩으신 자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그들을 통해 새롭게 섬김을 받는 자신의 새로운 구속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광이 비록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지만, 이방 땅에 흩어져 있던 자들에게 머물러 그들에게 잠깐 동안 성소가 되실 것이다(1절). 즉 여호와의 영광은 예루살햄이라는 지역, 그 곳에 있는 성전이라는 건물을 떠났을지언정, 그가 남겨 두신 남은 자들까지 버리신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의 구속사는 다윗의 뿌리에서 메시야가 나올 때까지 그 남은 자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에스겔이 성전의 동문에서 본 25인은 8:16에 있는 태양신 숭배에 참여했던 자들의 숫자와 동일하지만 다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지도자로 여겨지는 야아사냐는 8:11에 있는 골방에서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에 가담한 70명의 장로들의 지도자였던 야아사냐와 동명이인이다. 그리고 성경 가운데는 ‘블라야’란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대상 3:21 ; 4:42 ; 느 10:22) 본문과 13절의 블라다는 이들과 별개 인물이다. 흑자는 본절에 등장하는 25인이 8:16에 묘사된 제사장 그룹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Plumptre), 본절에서 이들의 지도자로 보이는 자들, 즉 야아사냐와 블라다가 백성의 고관이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예루살렘에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였던 지도자들을 지칭한다는 견해 (Wright, Taylor, Keil)가 설득력이 있다. B.C. 597년에 있었던 바벨론의 2차 포수 때에 유다의 19대 왕 여호야긴을 비롯해 고관들 대다수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없었기 때문에(왕하 24:14-17), 당시 예루살렘 남아 었던 그 지도자들은 최고위층의 지도자들이 아닌, 중간 정도의 신분을 가진 지도자급 인물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Taylor).
한편 그들의 지도자로 여겨지는 야아사냐와 블라다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야아사냐라는 이름은 8:11에서도 나타나지만 그의 부친이 ‘앗술’로서 8:11에 나오는 ‘사반’과 다른 인물이기 때문에, 8:11의 야아사냐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들으신다’ 혹은 ‘여호와께 들으신 바 된 자’ 라는 의미인데, 이는 그의 이름을 지어준 부모의 신앙을 반영한다. 그러나 야아사냐는 그 부모가 여호와를 신실히 의지한 것과 달리 패역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또한 블라다는 ‘여호와께서 탈출시켜 주셨다’, 혹은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셨다’라는 이름 뜻을 가졌다. 블라다 역시 백성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 극심한 패역함으로 인해 여호와의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임을 보여주는 표징으로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13절).
그들은 여기에서 백성의 고관으로 소개된다. ‘고관’에 해당하는 ‘사레’의 원형 ‘사르’는 ‘주권을 소유하다’, ‘주인이 되다’, ‘통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사라르’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흔히 왕에게 통치권을 위임 받아 지방을 통치하는 자를 지칭한다(왕상 20:14 ; 대상 28:1). 혹자는 이 단어가 군대를 통솔하는 장관을 지칭하는 용례에 많이 사용된다는 것(삼상 26:5 ; 왕상 11 1)을 근거로 하여, 본절의 두 인물이 유다 군대의 지휘관들이었다고 추정한다(Brownlee).
그러나 어떠한 견해를 취하든 동문 앞에 있었던 이들은 백성들을 대표하며 백성들을 이끄는 자들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2.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니라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사람들은 이 성읍에서 포악한 일을 꾸며 내며 악독한 일을 꾀하는 자들이다.
3.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
그들은 모두 집을 지을 때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이 성읍은 가마솥이고, 우리는 그 안에 담긴 고기다 하고 말한다.
4.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사람아, 예언하여라."
5.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그 때에 주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셔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하는 말과 너희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나는 잘 안다.
6.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그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
너희는 이 성읍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서, 그 모든 거리를 시체로 가득히 채워 놓았다 하여라.
7.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성읍 중에서 너희가 죽인 시체는 그 고기요 이 성읍은 그 가마인데 너희는 그 가운데에서 끌려 나오리라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할 말은 바로 이것이다. 너희가 이 성읍 가운데서 죽인 시체들은 고기요, 이 성읍은 가마솥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이 성읍에서 내쫓겠다.
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이르게 하고
너희가 두려워하는 것이 칼이므로, 내가 너희에게 칼을 보내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9. 너희를 그 성읍 가운데에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넘겨 너희에게 벌을 내리리니
내가 너희를 이 성읍 가운데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넘겨 주어서, 너희에게 온갖 형벌을 내릴 것이니,
10. 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심판하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너희가 칼에 쓰러질 것이다.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의 국경에서 심판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11. 이 성읍은 너희 가마가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그 가운데에 고기가 되지 아니할지라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 변경에서 심판하리니
이 성읍은 너희를 보호하는 가마솥이 되지 않을 것이며, 너희도 그 속에서 보호받는 고기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의 국경에서 심판하겠다.
12.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너희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 사방에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 행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정하여 둔 율례대로 생활하지 않았으며, 내가 정하여 준 규례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너희의 주위에 있는 이방 사람들의 규례를 따라 행동하였다."
13. 이에 내가 예언할 때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로 내가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하니라
내가 예언하는 동안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었다. 그래서 내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큰소리로 부르짖어 아뢰었다.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마저 완전히 없애 버리려고 하십니까?"
'블라댜'라는 이름이 아이러니하다. 그 뜻이 "여호와께서 피난처를 예비해 두신다"라는 의미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대로 살지 못했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1,12월호 ]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분노의 말씀 ( 11:1-13 )
1. 예루살렘 방백들의 방심(1-3)
선지자는 환상 중에, 이 방백들이 앉아서 회의하고 있던 성전 문에 이르게 되었다.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그 문에 이십 오인이 있는데(1절). 그들은 예배를 타락시킨 것 때문이 아니라 그릇된 정치를 한 것 때문에 비난받는다. 선지자는 여기서 그들 중 두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어떤 학자들은, 예루살렘이 24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위에서 언급된 이들은 각 구역의 총독들로 한 명의 의장과 함께 일종의 의회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2절). 그들은 치안 유지라는 미명 아래, 백성들을 죄 가운데 완악해지게 만들었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 버렸다. 그들은 '이 성중에서 악한 꾀를 베풀었다.' 즉 백성들로 하여금 선지자들을 침묵시키고 바벨론 왕을 반역하여 최후까지 성을 사수하도록 백성들을 선동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한 말로 고발당한다(3절). 그들은 선지자들의 경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토록 자주 선지자들이 경고했던 우리 성읍의 멸망은 가깝지 아니하다." 사단은, 다가올 심판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일로 여기게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을 때에라도, 그 심판을 멀리 떨어져 있는 일로 여기게끔 그들을 설득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달성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결론내린다. "이 성이 멸망할 때가 가깝지 않으니 우리는 집을 건축하도록 하자. 우리가 존속하리라는 것을 확신하자. 왜냐하면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하는 속담투의 표현이다. "이 성 안에서 우리는 끓는 가마 속의 고기처럼 안전하다. 성벽은 우리에게 놋 벽과 같이 될 것이며, 가마가 그 밑의 불 때문에 어떤 손상도 입지 않듯, 성 주위의 포위군에게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으리라." 아마도 이것은 '화목제의 고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고기를 삶고 있는 동안 그것을 가마에서 꺼내는 것은 매우 큰 범죄였다(참조. 삼상 2:13,14). 그러므로 그러한 말은 그들이,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읍이며 자신들은 그 성의 거룩한 백성으로 아무 간섭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더욱 방심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2. 그들을 방심 상태에서 깨우치기 위해 취해진 방법(4-12)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경고로서 그들에게 임하였다(4절).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 "그들의 미망을 깨우쳐 주라. 이 죽어 마른 뼈들 위에 예언하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여. 이렇게 하여 그는 권능과 용기로 충만케 되었던 것이다. 가라사대 너는 말하기를. 즉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계심을 그들에게 알려야 했다(5절).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너희가, 악화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일을 보기 좋게 꾸며대면서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된 은밀한 이유를 나는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에서 나온 것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것도 아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한 것 뿐만 아니라 생각한 것까지도 모두 아신다.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살육하여 그 시체로 거리에 채웠도다(6절). 이제 이 살육당한 시체들이 이 가마 속에 남겨지게 될 유일한 고기가 될 것이다(7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버리실 정도로 그를 노하시게 하였으며, 그가 가버리시더라도 자기들의 정책과 힘으로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는 어떠한 평화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이다. "그들로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죄에 대한 당연한 형벌이며 그들에 대한 나의 공의로운 심판의 계시임을 알게 하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10,12절).
3. 이 각성케 하는 말에 바로 이어진 각성케 하는 섭리(13)
이에 내가 예언할 때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로. 이 일은 환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예언이 공표될 때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보증인 것 같다. 블라댜의 죽음은 이 예언의 완전한 성취에 대한 한 보증이였다. 비록 블라댜의 급사가 에스겔의 예언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지만 에스겔은 그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마치 블라댜가 자신의 친척 또는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몹시 슬퍼하였다. 내가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칼을 피해 남은 자가 하늘의 직접적인 손길로 이렇게 죽어야 하나이까?"
출처 ; 메튜헨리 주석
가마 속의 고기(겔 11:1~13절)
오늘 묵상의 핵심은 3절이 무슨 의미냐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착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11장은 1~13절은 바벨론 침공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범죄하고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포로로 잡혀간 자를 죄인으로 매도하고 스스로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의인으로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뿐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계속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죄를 범해 왔던 것입니다(렘 24:1~10).
그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13절까지의 중심 내용입니다. 14~21절은 그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이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각성하고 새 영을 받으며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 구속사의 주역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25절은 10:18~22절의 연속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범죄한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떠나간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제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를 책망하며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한 경고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 본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 왕국의 다른 어떤 처소보다 우상 숭배와 범죄가 가장 심각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랍고 두려운 사실은 우상 숭배자 대부분이 유다 왕국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스리고 지도해야 할 유다 왕국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이 그들 곁에 있는 한 자신들의 안전과 평안은 확실하다 자부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3절의 고기 가마 비유를 통해 이렇게 가증스러운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1절에서는 다시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올려서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새로운 장면이 시작된 것입니다. 거기에 스물다섯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명이 거론되면서 문제를 말씀합니다.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고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라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유력한 귀족들이 잡혀갔는데 아직 남아 있는 유력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이 3절입니다.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이라는 말은 매우 이해하기 까다로운 말입니다.
이 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 말이 생겨난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시 남 유다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두 번에 걸친 첨략(B. C. 605, 597년)으로 인해 이미 수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상태였습니다. 이런 두 번의 침공 이후에, 그리고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 당하게 될 바벨론의 3차 침공(B. C. 586년)이 있기 전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남유다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할 것이고 멸망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므로 포로지인 바벨론에 집을 짓고 거기서 전원(田園)을 만들고 식물을 심어 그 열매를 먹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렘 29:5).
그러나 당시 남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예레미야의 예언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예언의 말을 왜곡하여 바벨론에서 집 건축할 때는 아직 멀었고, 예루살렘 성은 자신들을 죽이는 끓는 가마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튼튼한 방패가 될 것이라며 참 선지자의 예언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3절에 나오는 이 말은 곧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멸망하고 70년간 포로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하였던 예언을 전적으로 부인하며 조롱하는 말인 것입니다.
더구나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라는 말도 예레미야의 예언을 변조한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이 침공해 오는 날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인해 끊는 가마처럼 되고 말아 그 안에 거하는 거민들은 다 죽게 되리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렘 1:13).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과 불의한 지도자들은 오히려 예루살렘 성은 단단한 가마처럼 그 안에 거하는 백성을 보호할 것이라고 반박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내용마저 변조하여 자신들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묵상을 끌고 가는 핵심은 바로 이들의 이런 교만한 거짓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4절은 에스겔에게 “너는 그들을 쳐서 예언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은 단호하게 대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언하라는 명령이 반복적으로 주어진 것은 에스겔에게 부여된 사명이 매우 중요하고 긴급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교만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그럽니다. 이미 하나님의 많은 눈을 통해서 감찰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마음속의 은밀한 일들까지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6절은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그 거리를 시체로 채웠다고 책망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정복자 바벨론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에 대한 묘사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문맥은 남 유다의 지도자들이 강포한 정치를 통해 백성들을 억압하였던 죄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6절의 주어인 ‘너희’가 5절의 ‘이스라엘 족속‘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고, 6절의 시제가 과거이므로 본문은 남 유다의 지도자들이 과거에 이미 저지른 강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 유다의 방백들이 백성들을 이처럼 살육하고 늑탈한 사실은 에스겔 7:23; 34:1~16; 45:8절 등에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7절의 ’그러므로‘는 본격적인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7절부터 11절까지를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성읍 중에서 너희가 죽인 시체는 그 고기요 이 성읍은 그 가마인데 너희는 그 가운데에서 끌려 나오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이르게 하고 너희를 그 성읍 가운데에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넘겨 너희에게 벌을 내리리니 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심판하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이 성읍은 너희 가마가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그 가운데에 고기가 되지 아니할지라.” 그럽니다.
고기요 가마인데 너희는 끌려 나오게 될 것이라는 조롱 섞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남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선포하셨던 예언의 말씀(렘 1:13)을 왜곡시켜 만들어 낸 거짓말(3절)을 역설적으로 다시 이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읍이 유다의 악한 정치가들에 의해 그 성읍 안에 거하는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아비규환의 장소가 될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핵심 내용은 예루살렘 거민이 이방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물론 그 이전에 거짓 선지자와 불의한 방백들에 의해 먼저 끊는 가마 속에 있는 고기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과 백성들을 죽인 거짓 선지자들과 불의한 방백들 또한 이방인에 의해 찌꺼기처럼 버림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이 성읍이 가마가 될 수 없고 너희가 그 가마 속의 안전한 고기가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칼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칼이 임하게 하고 남 유다 백성들을 성읍에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넘겨 너희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를 이스라엘 변경에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또 말씀합니다. 역시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지 아니라고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이방인의 규례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1~3절에는 하나님의 뜻과 이방인의 뜻을 다르는 사람들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지나간 때에는 이방인의 뜻을 따랐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을 때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 유다 백성들은 육체의 남은 때를 이방인의 뜻을 따랐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루살렘은 든든한 가마이고 우리는 그 가마 속의 고기이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거짓 예언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그렇게 잘못된 신앙을 책망할 때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러자 에스겔이 부르짖습니다.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시고자 하시나이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야아사냐와 블라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정보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야아사냐는 ‘여호와께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블라댜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가마와 고기라는 신앙은 새빨간 거짓말이며 헛된 신앙이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천혜의 요새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성전이 그들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뜻을 따라 온갖 우상 숭배를 하면서 우리는 가마 속의 고기처럼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장로는 반복해서 말씀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름에 부끄러웠던 야아사냐와 블라댜는 부끄러운 남 유다의 자화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외식적인 신앙에 기만당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는 아침이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에스겔 11:14-25)
[ 성경묵상 ]-
하나님의 임재는 장소와 건물 안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가증한 것을 제하고 주님 앞에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면, 내가 선 이곳이 임마누엘 성소입니다.
[ 질문 하나 ] 본토에서 쫓겨나 멀리 흩어진 주의 백성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16-17절)
회복을 선언하시는 하나님(14-17) 하나님의 임재는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본토에서 쫓겨나 흩어진 백성에게, 그곳에서도 함께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쫓겨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성소가 되며, 때가 되면 회복시킬 것입니다. 주의 백성이 어디 있든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어디로 쫓겨났든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다시 본토로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은 특정한 공간에 갇히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주의 백성이 있는 곳이면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멘.
내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어려워도, 주님께 회복의 능력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 질문 둘 ] 회복을 위해 주께서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18절)
가증한 것을제거하라(18-21) 회복을 선포하시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아멘. 하나님의 임재는 더러움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가증한 것이 있다면 주님이 거하실 수 없고, 주님이 거하기를 바란다면 가증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불행히도 우리 스스로는 가증한 것을 제거할 수 없으나, 복음은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새로운 "한마음을 주고 새 영을 주며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다는 진리입니다(롬 8:1-17).
아직도 내 안에 혹 주님이 미워하시는 가증한 것이 있습니까? 제거합시다. 애를 쏩시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여호와의 영광(22-25)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아쉬우면서도 역설적인 희망을 던지는데, 하나님의 임재는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주의 백성이 있는 곳이면, 세상 어디든 찾아가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룹의 날개와 바퀴는 그분의 자유로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어디든 원하시는 곳으로 자유로이 움직입니다. 마음을 닫고 거절하는 자를 단호히 떠날 것이며, 겸손히 마음 열어 주를 영접섭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임할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임재를 향해 겸손히 마음을 열고, 내 삶의 주인 자리률 그분께 내어드립시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1,12월호 ]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13절은 에스겔이 환상 중 예루살렘 성전 동문에서 거짓 평안을 유포하는 25인을 향하여 선민 심판을 예언할 것을 명령 받았다는 사실과 그들에게 전달할 심판 예언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어지는 본단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반부인 본절 이하 21절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하여 이스라엘이 이방 포수로부터 회복될 것을 약속하시는 내용이며 후반부인 22-25절은 여호와의 영광의 감람산 이동과 에스겔의 영의 귀환을 통한 성전 우상 숭배 환상의 종결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중 전반부의 내용은 앞선 13절의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위한 선지자 에스겔의 구원 호소에 대해 여호와께서 대답의 형식으로 주신 예언이라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 멸절시키지 않고 남은 자를 두셔서 언젠가는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심으로 새 왕국을 건설하게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희망과 회복의 메시지는 본서에 들어서 이 단락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회복의 예언은 36:16-38 ; 37:1-28 등에서 부분적으로 다시 예언되고, 제40장부터 48장까지에서 새 성전의 환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펼쳐지지만, 흑암 중에 비추이는 한 줄기 서광처럼 회복의 소망이 예루살렘의 죄악과 그에 따른 필연적 결과인 하나님의 떠나심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여주는 제8장에서 11장의 절망적인 내용 가운데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회복의 예언은 크게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15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파멸되기 전에 남아 있는 주요 인물들이 1차 및 2차 바벨론 포수로 끌려간 자들에 대해 빈정거리면서, 오직 자신들만이 자기들에게 영원한 기업인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안전하게 살 것이라고 속단한 오해를 지적한다. 사실 그들은 한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이었으며, 당시 예루살렘 및 유다에서 예루살렘 심판의 예언을 피를 토하듯 외치던 예레미야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요 매국노로 몰아 붙여 박해하던 악인들이었다. 그들이 심판의 제1대상이 될 것이다.
둘째는, 16-20절에 예언된 내용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그 악인들의 판단과는 정반대로 바벨론으로 쫓겨난 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이고, 훗날 그들을 회복시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으로 충만케 하셔서 자기 율례를 쫓아 행하게 하고 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올 지적한다. 에스겔서가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내용이며, 이는 새 성전 건축의 환상(40-48장)을 통해 절정에 달한다.
셋째는, 21절에 나타난 내용이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회복의 예언을 주신 후에도 여전히 자기 백성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요구는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해당되고, 훗날 고토로 돌아와 새 나라의 주역이 될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때에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15. 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사람아, 예루살렘의 주민이 네 모든 친척, 네 혈육, 이스라엘 족속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 그들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이 땅은 이제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한다.
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 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하여라.
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그러므로 너는 포로가 된 동포들에게 이르기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너희를 모아 들이고, 너희가 흩어져 살고 있는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 하여라.
18.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그들이 그 곳으로 가서, 그 땅의 보기 싫고 역겨운 우상들을 그 땅에서 다 없애 버릴 것이다.
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래서 그들은 나의 율례대로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21.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마음 속으로 보기 싫고 역겨운 우상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갚아 주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은 대체로 우상숭배를 가리키지만, 의미상 주의 백성답지 못한 음란하고 누추한 삶을 포괄한다.
22. ○그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그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펼치고, 바퀴들은 그들 곁에 있었는데,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머물렀다.
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그리고 주의 영광이 그 성읍 가운데서 떠올라, 성읍 동쪽에 있는 산꼭대기에 머물렀다.
24. 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본 환상이 나를 떠나 올라간지라
주의 영이 나를 높이 들어 올려, 하나님의 영으로 환상 가운데 나를,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올 사람들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그런 다음에, 내가 본 환상이 내게서 떠나갔다.
25. 내가 사로잡힌 자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을 말하니라
그래서 나는, 주께서 내게 보여 주신 모든 일을,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포로된 자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 ( 11:14-21 )
시온의 동쪽에 있던 자들을 일깨우기 위한 교훈을 받았던 선지자 에스겔은 이제, 바벨론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애곡하는 자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을 받게 된다.
(1)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을 떠났던 경건한 자들은 예루살렘 거민에게 업신여김과 모욕을 당하였다(15절).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그들은 네 형제요 친속이라. 그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만이 계속해서 성실하였음으로 인하여 그들을 매우 중시하신다. 그들은 에스겔과 한 가족 한 민족 뿐 아니라 한 영에 속한 자들이었다. 편히 지내는 자들이 초라해진 자기 형제들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형제들을 그들 교회의 구성원 가운데서 삭제해 버렸다. 그 형제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였다는 것 때문에 그들은 형제들을 제명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우리는 너희와는 조금도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니라. 너희는 바벨론 왕에게 항복해서 너희 토지를 몰수당하였으므로 우리가 그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니라."
(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로운 약속을 하신다.
그들을 미워하며 내쫓았던 자들은 "여호와께서 영광 나타내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으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기쁨을 보이실 것이다(사 66:5).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이 그들을 쳐서 내쫓았음을 시인하신다(16절).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버림받은 백성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는 그들을 위해 자비를 준비하였도다." 그는 그들에게 성전이 없는 것을 보상하실 것이다(16절).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은 성전을 갖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바벨론에 있던 자들은 비록 성전은 없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환난을 멀지 않아 끝내시고 포로로 잡혀 간 땅에서 그들 혹은 그들의 자녀들을 다시 이끌어내사 그들 자신의 땅에 정착케 하실 것이다(17절). "너희는 족장들이 가졌던 권리를 갖게 될 것이며 너희 뒤를 잇는 자들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리라." 그들의 포로 생활은 우상 숭배라는 병에서 그들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좋은 행동 원리를 심으실 것이며, 그것이 훌륭하게 실행되도록 만드실 것이다(19절). 이것은 복음적인 약속이며, 하나님께서 하늘의 가나안을 위해 계획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일이다. 성결케 된 모든 사람들은 '새 신'을 갖게 된다. 그들은 새로운 원리와 법칙에 따라 행동하며 새로운 목적을 추구하게 된다. 새 이름이나 새 얼굴도 '새 신'이 없이는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약속에 의한 그의 선물이다. 그들의 행동은 그 원리들과 일치할 것이다. "그들이 모든 생활 속에서 내 율례를 좇으며, 신앙적인 모든 예배 의식에 있어서 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20절). 하지만 은총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들의 마음은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좇았다.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마음으로 좇았던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감 ( 11:22-25 )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과 성전으로부터 떠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위임되어 그가 그것을 완전하기 통치받자, 전과 같이(겔 10:19)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었다'(22절). 여호와의 영광은 '성읍 동편 산', 곧 감람산으로 이동하였다(23절). 그들은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과 맞서서 이 산 위에다 그들의 우상을 세웠었다(왕상 11:7). 그 산에서는 성의 전경을 완전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로 움직이사 그가 전에 말씀하셨던 것을 성취하셨다(신 32:20).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끝내 멸망할 것을 예견하사 그 성을 보시고 우셨던 것도 이 산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만일 그들의 날에 그들이 자기들의 평화에 속한 일들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을 알려 줄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계시려고 그리로 이동하셨다. 이 환상이 선지자에게서 떠난다. 이상이 나를 떠난지라(24절). 그는 그것이 하늘의 이상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것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산 위를 바라보았다. 그를 무아지경 중에 예루살렘으로 데려갔던 신이 그를 갈대아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곳이 그가 일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달할 말씀을 하나도 숨김없이 고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으며 바벨론에 거하는 것이, 그의 분노와 저주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것보다 나은 일이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에스겔 11:14-25)
신앙생활의 착각(겔 11:14~25절)
오늘 묵상은 두 가지의 확실한 주제를 말씀합니다. 첫째 14~21절은 남은 자의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슬프게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가신 것입니다.
먼저 14~21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2차 포로가 잡혀가고 남은 예루살렘에 아직 남아 있는 지도자들은 여전히 교만하고 불신앙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예언의 말을 왜곡하여 바벨론에서 집 건축할 때는 아직 멀었고, 예루살렘 성은 자신들을 죽이는 끓는 가마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튼튼한 방패가 될 것이라며 참 선지자의 예언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15절입니다. “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그럽니다.
바벨론의 두 차례에 걸친 예루살렘 침입(B.C.605년, 597년) 때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그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과 너의 형제와 친족과 이스라엘 온 족속, 즉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머물고있는 남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라는 것입니다. 누가 하는 말입니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한 자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자라는 착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착각을 합니까? 우리는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간 자들은 범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자들이 바벨론 포로된 자에게 친족으로서의 친밀한 관계도 무시한 채 ‘너희들은 죄인이므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포기하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막힌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16절부터 선포됩니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그럽니다. 잘못된 확신으로 기고만장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 백성들 중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방 땅에 잠시 흩으신 후 다시 모으실 때 그들이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참으로 자기를 경외하고 의뢰하는 자들을 이방의 땅에 흩으신 목적은 첫째, 그들을 온갖 죄악이 범람하는 예루살렘에서 떠나게 하셔서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에 있는 권력자들의 포악한 행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셋째, 곧 닥칠 이방의 칼에 의한 멸망의 재앙에서 의로운 자들을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넷째 그들을 이방 땅에서 연단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이방 생활 ‘잠깐’으로 끝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잠시 이방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행악자들이 심판을 받은 뒤 회복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즐거운 마음으로 평강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며 그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B. C. 537년 바사 고레스 왕의 1차 귀환 조서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스 1:1, 2). 이처럼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보다 바벨론에 포로 된 자들을 더 사랑하신 것은 당시 예루살렘은 우상의 소굴이 되어 그 땅에 사는 한 도무지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사람들을 그 땅에 내버려 두셔서 멸망에 이르게 하시고, 경건한 자들을 오히려 우상의 처소인 유다 땅에서 열리 내어 보내사 바벨론에 포로 되게 하셔서 바벨론 땅에서 경건히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모두를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의 이 황당한 자부심은 참으로 부끄럽기가 한량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포로의 시간을 믿음으로 잘 견딘 사람들에게 다시 이스라엘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9~21절에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19~21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9절의 한마음은 여로보암(B. C 930-909년)으로 인해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했을 때에는 하나로 연합될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사실은 이사야(사 11:13)와 예레미야(렘 32:37~39)도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실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굳은 마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브 하에벤’은 ‘돌과 같은 마음’을 그리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브바사르’는 ‘살과 같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백성들의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줄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렘 31:31~33). ‘새 영을 준다는 것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된 자들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은 결국 20절에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음으로 쫓는다’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엎드려 경배하는 등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우상을 숭배하는 것만이 우상 숭배인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으로 우상을 숭배하면 그것 역시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며 사람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범죄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14~21절은 예루살렘에 남이 있어 극심한 자기착각에 빠진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가서 믿음으로 살아 포로 귀환한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새 언약을 맺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자기착각에 빠져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으므로 의롭다고 착각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나는 의롭다고 착각하고 나는 믿음으로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짓 믿음에 기만당하지 않으십니다.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것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가시다(겔 11:22~25절).
22절은 “그때에” 그럽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 심판의 말씀이 선포되는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 성읍 동쪽 산에 머물렀습니다. 성읍 동편 산은 감람산(Mount of Olives)을 지칭합니다(삼하 15:30; 슥 14:4).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을 완전히 떠나셨습니다. 따라서 남은 것은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뿐입니다. 그런 후에 에스겔은 다시 델아빕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사로잡힌 자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1차 독자는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도는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확신에 빠져서 내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보다 의롭다는 착각은 심판을 불러올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새 언약을 맺어서 새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율례와 규례를 지키는 것이 사는 길이며 유일한 길입니다. 말씀에 근거를 두지 않은 얼토당토않은 확신으로 나는 의롭다는 착각에 빠져 신앙 생활한다면 그 마지막은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서 하나님은 떠나가십니다.
오늘 우리 삶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잘못된 확신으로 말씀을 떠나 제멋대로 신앙 생활할까 두렵습니다. 잘못된 확신처럼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이 올바른 말씀에 뿌리를 견고하게 내려 깨어 있는 생활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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