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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서

전도서 1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2. 28.

 

전도서 1장

메튜헨리 주석

 

이 책의 목적과 의도 (전도서 1:1-3)

여기에 나오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본서의 필자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솔로몬이다. 그 이유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 된 자는 솔로몬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화평하다"는 뜻의 자기 이름 솔로몬을 감추고 있는데, 이는 그가 죄악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과 자기 나라에 환란을 초래하였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렸으며 자기 양심의 평안을 상실하여서, 그 이상 더 그 이름으로 불릴 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솔로몬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를 마라라고 불러라. "보라. 내게 화평함 대신 큰 괴로움을 취하였노라." 그는 자기 자신을 다음 세 가지로 칭하고 있다.

 

 

1. 전도자. 이것은 그의 현재적 특성을 시사해 주는 칭호이다. 그는 코헬렛(Koheleth)이다.

이것은 "거두어 들인다"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이 말은 여성 어미(語尾)로 되어 있는데, 아마 솔로몬은 자신의 아녀자 같은 유약성을 자책할 심산으로 이 같은 여성 어미를 사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타락은 딴 어떤 요인보다 바로 이 유약함에서 크게 야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상을 세운 것은 자기 아내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느 13:26). 혹은 이 단어는 영혼이란 말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코헬렛은 다음 두 가지로 파악된다.

 

(1) "참회하는 영혼" 혹은 "거두어 들여진 영혼"을 뜻한다. 길 잃은 양과 같이 헤메던 영혼이 이제는 원상으로 복귀하고, 방황으로부터 거두어 들여져서 자기 의무의 본향을 찾게 되며, 마침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천 가지 헛된 것을 쫓아 분산되어 버렸던 심령이, 이제는 한데 모아져서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다. 신의 은총은 큰 죄인들이라도 위대한 회심자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의의 길을 안 후에, 그 길에서 돌이킨 자"들조차 새롭게 하여 회개시키고, 비록 어려운 일이긴 하나 "그들의 재타락을 치료"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것은 오직 회개하는 영혼뿐이다. 갈대처럼 하루 동안만 고개 숙이는 머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을 받아 주시며, 아합의 후회가 아니라 다윗의 회개를 받아 주실 것이다.

 

 

또 참회하여 곁 길에서 돌아오고 그 이상 더 이방인들의 길로 달려 가지 아니하며"(렘 3:13), "연합하여 하나님의 성호를 경외하는" 영혼은 거두어 들여진 영혼뿐이다. "마음 속에 풍성히 차고 넘치면 입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참회자의 말을 대하게 되는 것이며 그 말들이 공포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이 큰 죄악에 빠지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명예와 그들이 그의 나라에 끼친 손해를 복구하기 위해, 자기들의 회개를 공공연하게 증언하려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는 독이 퍼진 만큼 그 해독제도 널리 퍼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 "전도하는 영혼" 혹은 "거두어 들이는 영혼"을 뜻한다. 그 자신이 자기 죄로 인해 뛰쳐 나갔었던 성도로 거두어 들여지고 교회와 화해되었으므로, 그는 자기처럼 방황하고 자신의 본보기를 따라 타락되었을지도 모르는 영혼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려고 노력하였다. 자기 형제를 타락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관여된 자들은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로몬은 전에 성전 봉헌시에 자기 백성의 회중을 전부 모았던 것처럼(왕상 8:2), 이제 자신을 재봉헌하면서도 회중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전자의 집회에서 그는 하나님께 대한 백성의 입이 되어 기도식을 주재하였으나(12절), 후자의 집회에서는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입으로서 설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와 화해되셨다는 징표로 자기 성령을 통해서 그를 전도자로 만드신 것이었다. 임무를 부여하신다는 것은 무언의 용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자기의 어린 양들과 양떼들을 그에게 위탁하심으로써 그의 용서를 충분히 입증하신 것이다. 참회자들은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돌이켜서 생명을 취하도록 스스로 경고를 받아들인 자들은, 타인들에게도 계속 범죄의 길로 가다가 죽음을 당하지 말도록 경고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 전도는 전도하는 영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심령에서 나오는 것만이 심령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以心傳心). 바울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그의 심령으로 " 하나님을 섬겼다(롬 1:9).

 

 

2. 다윗의 아들 그가 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다음 세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그는 다윗과 같이 선한 인간의 아들됨을 크나 큰 영광으로 간주하였고, 이 이름을 매우 귀하게 여겼음을 말해 준다.

 

(2) 그는 그런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로 인하여 자기가 지은 죄를 더 중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자기 부친은 자기를 위해 좋은 교육을 베풀어 주었으며 많은 선한 기도를 쉬지 않았으나 자신은 다윗과 같은 자의 이름과 가문에 먹칠을 하고 치욕을 돌린 것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칼로 에이는 듯하였다. 여호야김이 요시야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 죄를 가중시켰던 것이다(렘 22:15-17).

 

(3)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가 회개하고 자비를 바랄 수 있도록 힘이 되었으니, 이는 다윗도 하나님의 자비로 범죄하지 말도록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빠져 들어갔던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하였고 솔로몬은 이 일에서 그를 본받아, 다윗처럼 자비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대해 말씀하시기를 비록 그가 "지팡이로 그의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의 죄악을 징책"할지라도 그와 맺은 "자기 언약은 파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시 89:32, 34), 그는 바로 이러한 다윗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위대하신 전도자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셨다.

 

 

3. 예루살렘 왕. 그는 이것을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1) 이 이름은 그의 죄를 아주 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많은 일을 베푸셨으며, 자기를 왕좌에까지 나아가도록 높여 주셨건만 그는 너무나 형편없이 그에게 갚음을 하였다. 그의 위엄은 그의 죄의 본보기와 영향력을 더욱 위험하게 하였고, 많은 자들이 그의 해로운 길을 좇게 하였다. 특히 그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왕이었다. 그곳은 하나님의 전과 그 자신의 건물이 있으며, 여호와의 사역자들인 제사장들이 있고, 그에게 더 좋은 일들을 가르치는 그의 예언자들도 있는 곳이었다. 그는 이런 곳의 왕이었다.

 

(2) 또한 이 이름은 자기가 기록한 것에 이득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왕으로서 도전자가 되는 일이 자기에게 하등 명예 훼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백성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그를 전도자로서 더욱 더 존경할 것이었다. 만일 영예를 한 몸에 지닌 자들이 선을 행하는 일에 그들 자신을 전부 바친다면 그들은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솔로몬은 상아로 만든 보좌에 앉아 명재판을 할 때에 못지 않게 세상의 헛됨을 설교하는 강단에서도 위대하게 보였다.

 

갈데아 주석서(이 책에는 매우 광범위한 추가 기사나 상세한 주해를 성서 원문 도처에 달고 있다)는 솔로몬이 이 책을 저술한 데 대한 기술을 함에 있어서, 솔로몬은 예언의 영에 의하여 이스라엘 열 지파가 자기 아들에게서 반역하는 것을 미리 내다 보았으며, 시간이 경과하여 예루살렘의 함락과 지성소의 파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됨까지도 예견하여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란 말을 하였다고 풀이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을 이 책의 여러 부분에서 적용하고 있다.

 

 

Ⅱ. 본서의 일반적 목적과 의도. 이 제왕 설교자가 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목적하는 것은 우리를 진정으로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우리의 존중심과 기대감을 줄이는 일이다. 이를 위해 그가 제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사실(2절)이다. 그가 기록해 놓고 증명하고자 시도하는 명제는 바로 이것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문귀가 아니다. 그의 부왕 다윗도 한 두 번 같은 취지를 말했었다. 여기에서 주장되고 있는 진리 그 자체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에게서 추출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세속적인 일과 향락, "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요 12:16), 현재 상태에서 우리의 감각과 기호에 즐거운 모든 것, 곧 우리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거나 타인들에게 명성을 얻어 주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악용되고 남용될 때뿐만 아니라, 바로 이용할 때에도 "헛된 것"이다. 이런 제반사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인간 자체도 헛된 것이며(시 39:5, 6) 만약 이 생 뒤에 또 다른 생이 없다면 인간의 창조 역시 허사가 아닐 수 없다(시 89:47). 그리고 인간과(그들 자체는 무엇이든 간에) 관련하여 생각할 때 이런 제반사는 헛된 것이다. 그런 세상사는 영혼에게 부적절한 것이며 이질적인 것이고, 영혼에게 대해서 무엇 하나 보태줄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목적에 부합하는 해답을 줄 수도 없으며 진정한 만족도 산출해내지 못한다. 그것들은 그 존속에 있어서도 불확실하여 시들어버리고 멸하며 사라지는 것이어서, 그것들을 신뢰하는 자들을 기만하고 실망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사를 사랑하지" 말고(시 4:4) "우리 영혼을 허탄한 데에 들어 바치지" 말자(시 24:2).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 헛된 것으로는 자신을 피곤케할 뿐이기 때문이다(히 24:4). 이것은 본문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표현되고 있는데, "모든 것은 헛되다(vain)"고 할 뿐만 아니라 추상적으로 "모든 것은 헛된 것(vanity)"이라고도 되어 있다. 이는 마치 헛된 것이 즉 이 세상 사물 중 "제 4의 종류"로서 자연 속에 형체를 띄고 있는 "물질인"것처럼 표현되고 있다. 그것들은 "헛된 것"일 뿐만 아니라 "헛된 것들 중 헛된 것" 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가장 헛된 것이며, 최고로 헛된 것이고, 단지 헛된 것에 불과하며, 많은 헛된 것의 원인이 되는 헛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복을 거듭한 형태로 표현됨은 이 일이 확실 하고도 논란에 여지가 없이 "헛된 일들 중 헛된 일" 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지혜로운 자가 그 자신의 마음으로 이 진리를 완전히 확신하고 이 진리에 크게 감명을 받았음을 암시해 주는 동시에, 그가 타인들도 역시 이 사실을 자기처럼 확실히 깨닫고 공명해 주었으면 하고 소원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인간은 이것을 믿고자 아니하며 생각해 보기 조차 싫어한다는(욥 33:14)것을 알았다. 그것은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됨을 이해하지도 표현할 수도 없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면 이와 같이 세상을 가볍게 평가하여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자기가 말하는 바를 고수할 수 있는 자인가? 그렇다. 그는 그 말에 자기 이름을 명시하고 있다 ─ 즉, "전도자의 말씀이라." 그는 유능한 재판관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여태껏 존재했던 어떤 명제판관보다 한층 더 유능한 재판관이었다. 많은 자들이 이 세상에 대해 멸시하여 이야기한다. 은둔자로서 이 세상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거나, 아니면 거지라서 가진 게 없는 자들이기에 그렇게 세상을 우습게 말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연의 심해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으며, 어느 누구보다 자연에 대해 더 많이 알았을 것이다(왕상 4:33). 그의 머리는 자연의 지식으로 가득찼고 "그의 배"는 자연의 "숨겨진 보물"로 채워졌었다(시 17:14). 이러한 그가 자연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이런 말을 하였는가? 그렇다. 그는 왕의 권세뿐만 아니라 선지자와 전도자의 권세를 가지고 이 말씀을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특별한 실망을 당하고서 성급히 내뱉거나 격정을 이기지 못해 말한 것은 아닌가? 아니다.

 

그는 심사숙고하여 이것을 말하였으며, 자신이 말한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경건한 생활에 꼭 필요한 근본 원리로 삼았다. 그리고 혹자가 생각하듯이 그의 의중에 있는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 다윗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위와 왕국을 딴 세계에 속한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데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허무한 것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영원에 걸친 약 속의 범위는 도저히 이 세상 것 자체로선 부응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솔로몬이 모든 게 헛된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메시야의 나라가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 나라 안에서만 헛된 것이 아닌 속 알맹이를 상속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것들은 우리를 행복하도록 만들어 주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사실을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사람이 취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8절)

 

(1) 여기에는 이 세상의 사업이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수고"이다. 이 단어는 염려와 애씀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일이다. 세상 일에는 항구적인 피로가 존재한다. 그것은 "해 아래서 행하는 수고"이다. 이 말은 본서에 특유한 표현으로 이 전도서에 28회나 나온다. 해 위에는 한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에는 태양이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는 수고로운 일이 없고 크게 유익한 일이 있으니 그것은 곧 천사의 일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해 아래"의 일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수고는 크고 이익은 거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해 아래"에 있으며 그 빛과 열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우리는 낮의 일광으로 혜택을 입듯이 때로는 낮의 수고와 더위로 고통을 당한다(마 20:1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떡을 먹는다." 깜깜하고 차가운 무덤 속에 가서야 피곤한 자는 안식을 누리게 된다.

 

(2) 그 일의 이익이 무엇인가 추궁되고 있다. "사람이 자기의 모든 수고로 무슨 유익을 얻는가?" 솔로몬은 잠언에서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다"고(잠 14:23)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모든 수고에 어떤 유익함도 없다고 부인한다. 이 세상의 우리의 현재 상태로는 우리가 수고를 하면 소위 "이익"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음도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손이 수고한 바를 먹는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부가 흔히는 물질(원 뜻은 본질)이라고 불리우면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듯(잠 23:5) 이것은 "이익"이라고 칭하기는 하나 문제는 실제로 그런가 안 그런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여기에서 그 유익이 유익이 아니며, 실제적인 이익도 항존적인 혜택도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설령 우리가 이 세상 재물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며 이 세상 즐거움을 아무리 많이 누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에는 불충분하며 그런 것들은 우리의 분깃이 되지 못할 것이다.

 

[1] 현재의 신체와 생명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의 모든 수고로 무슨 유익을 얻는가?" "인간의 생명은 그 소유의 풍부함에 있지 아니하다"(눅 12:15). 재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재물에 대한 근심도 늘어나며 "그 재물을 먹는 자도 많아지고", 하찮은 일이 그 재물이 주는 모든 위안을 씁쓸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이 자기의 모든 수고로 "얻은 유익이 무엇인가?" 일찍기 일어나 보아라. 그래도 결코 유익에 더 가까워 지지는 않는다.

 

[2] 영혼과 장차 올 생명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층 더 정당하게 "사람이 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하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수고하여 획득하는 모든 것은 영혼의 부족을 채워주지 못하며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할 것이고, 영혼의 죄를 갚아 주거나 손실을 상쇄시키지도 못할 것이고, 영혼의 죄를 갚아 주거나 손실을 상쇄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영혼이 죽었을 때나 심판당할 때 또는 영원한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영혼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하늘의 일로 우리가 수고하는 열매는 "영생에 이르도록 지속되는 양식"이나 세상을 위해 수고하는 우리 열매는 "썩어 없어질 양식" 뿐이다.

 


세상의 헛됨 (전도서 1:4-8)

해 아래 있는 만물의 헛됨과 그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에는 전혀 불충분함을 증명하기 위해 솔로몬은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제시한다.

 

1. 우리가 이런 사물들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으며 우리가 "그의 날을 삯군으로서 끝마치는" 동안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단지 한 세대만 존속할 따름이며, 또 다른 세대에게 자리를 비워주기 위하여 끊임없이 사라져 가는 세대와 함께 지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세상 재물은 최근에 타인들로부터 우리가 받는 것이지만 우리는 순식간에 그것을 또 딴 사람에게 넘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 세상 소유물도 헛된 것이다. 그것은 세상 소유물의 "하층 토대"(substratum)가 되는 생명 자체가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것은 아니며 단지 허황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없어지는 안개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흐르는 냇물이며, 우리는 그 흐름 중에 몸 담은 한 방울의 물이다. 이 한 방울의 물이 양안(兩岸)을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전개되는 경치를 즐긴다 한들 그 즐거움은 얼마나 사소한 것이겠는가! 우리는 세대가 끊이지 않고 잇달아 가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하다. 그러는 가운데 세계는 지금까지 존속하여 왔으며, 또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 죄많은 종자들을 존속시켜 주시는 그의 인내와 이 다 죽어가는 종자들을 이렇게 존속하도록 해 주시는 그의 능력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또 우리는 우리 세대가 짊어진 일을 부지런히 행하며 충실하게 봉사하도록 바삐 서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대는 곧 지나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전체적인 인류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다음에 오는 세대들의 복지를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좁은 한계 안에서 기대할 게 아니라, 영원한 안식과 영구적인 일관성 속에서 그것을 바라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땅을 우리 뒤에 남겨두고 가나, 땅은 있는 자리에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땅에 있는 것은 장차 올 상태에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땅이 시간의 종말까지 즉 땅과 땅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불살라 없어져 버릴 때까지 존속한다는 것은 인류 전체를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개개의 사람들의 영의 세계로 옮아갈 때에는 땅의 존속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 이와 같은 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상태는 인간보다 하등한 창조물의 상태보다도 못하다.

"땅은 영원히 존속하나," 매일 저녁 지나 아침에는 또다시 밟고 생기있게 떠오르고, 바람은 비록 그 방향을 항상 바꾸지만 어디엔가는 존재한다. 또한 땅 위로 흘러서 바다로 모인 물은 땅 밑으로부터 다시 솟아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 번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욥 14:7, 12).

 

 

4. 이 세상 만물은 가동적이고 가변적이다.

삼라만상은 부단히 수고하고 동요되기 쉬우며 덧없다는 점 이외에는 항구적인 데라곤 털끝만치도 없다. 여전히 유전(流轉)하면서도 휴식은 없다. 해가 정지한 때는 꼭 한 번 있었다(수 10:13). 그러나 해는 떠오르면 지기 위해 재촉하며, 해가 지면 다시 떠오르려고 재촉한다(5절). 바람은 때때로 바뀌며(6절), 물은 끊임없이 순환하는데(7절), 만약 이들이 멎어버린다면 혈액이 체내에서 정체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만물이 이처럼 수고로움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는 휴식을 기대할 수가 있는가? 바다를 보라. 언제나 밀물과 썰물이 있으며, 파도는 부단히 일하여 넘실대지 않는가?

 

 

5. 만물이 비록 계속 움직이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것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게 된다.

해는 "떠나가지만"(난외주에 있는) 동일한 장소로 돌아 온다. 바람은 방향을 바꾸어 불지만 같은 곳으로 돌아오고 물결도 또한 그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인간도 피조 세계에서 만족과 행복을 발견하기 위하여 온갖 수고를 다한 뒤라 해도 결국 원점에 돌아와 있는 것이며, 그런 것을 추구하기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목표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해나 바람이나 강물처럼 그 추구하는 일에 있어 쉬임없이 힘쓰지만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하며 충족을 얻지 못한다. 세상 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더 소유하려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모든 강물이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듯 외부적인 번영의 강물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강물로도(욥 20:17)인간의 욕심은 채우지 못할 것이다.

 

 

6. "만물은 창조 처음 때부터 있던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벧후 3:4).

땅은 있던 그대로 존재하며 해와 바람과 강은 언제나 그랬듯이 동일한 운행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들이 인간에게 행복을 만들어 주기에 충분치 못했었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지금도 과거에 줄 수 있었던 위안밖에는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태양 너머에 있는 만족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며 새 세계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7. 이 세상은 결국 피곤한 땅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헛되니" 그 이유는 만사가 "수고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창조된 모든 것은 인간이 "자기 이마에 흐르는 땀으로 빵을 먹도록" 판결을 받은 이래 이 헛됨이란 철칙을 면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모든 창조 세계를 관찰해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일에 열중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몫이 되거나 인간의 행복이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은 인간을 섬기기 위해 수고를 하지만 인간의 협력자로 판명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의 만물이 얼마나 수고로 가득차 있는지 나타낼 수 없다. 수고하는 것들을 헤아릴 수도 없으며 그 수고를 측량할 길도 없다.

 

 

8. 우리의 감각은 만족하지 못하며, 그 감각의 대상은 만족스러운 것이 못된다.

솔로몬은 이 감각을 가장 적은 수고로 그 역할을 다하여, 비교적 만족되기 쉬운 것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다." 그것은 같은 것을 보는 데에 싫증을 느끼며 신기하고 다양한 것을 갈망한다. 귀도 처음에는 즐거운 노래나 곡을 좋아하지만 곧 그것을 싫어하게 되고 또 다른 것을 원한다. 즉 눈과 귀는 모두 만족할 줄모르고 싫증을 내며, 가장 즐거웠던 것들을 가장 불쾌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 호기심은 계속 진기한 것을 추구하는데 이는 아직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기심은 채워지면 질수록 더 예민하게 되고 투정을 부리게 되어 "달라. 더 달라"하고 부르짖는다.

 


새로운 것이 없는 변화 (전도서 1:9-11)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일에서 지대한 즐거움과 만족을 느끼기 쉽다. 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세상에서 우리가 벌이는 사업과 누리는 향락을 헛되게 하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되기라도 하는양 이것들을 귀중히 여기기 쉽다. 솔로몬은 본문에서 이 두 가지의 사례에 대한 우리 잘못을 제시해 준다.

 

1. 전에는 결코 알려지지 않았던 신기한 발명에 대한 잘못이다.

여태까지 어느 누구도 우리 만치 지식에 있어서 장족의 진보를 이룬 자도 없으며 그 지식을 통해 이토록 눈부신 발견을 해낸 자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 지금까지 우리만큼 재산이나 무역을 향상시키고 그 이익을 누리는 기술이 탁월한 자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발명은 은혜로운 일이 될는지 모른다. 과거의 고안들과 구조물들은 죄다 천대를 받고 낙후돼버리고 말았으며, 우리는 새로운 모형과 새 가설들, 새 방법들과 새로운 표현들을 자랑하게 되었으니, 이 새로운 것들은 옛 것들을 밀어 젖히고 압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결국은 오산이다. "지금 있는 것과 후에 있을 것도" "과거에 있던 것"과 꼭 같은 것이며, 후에 "행해질 것"도 이미 "행해 진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그것은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기"때문이다(9절). 이 말씀은 10절에서 질문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다' 할 것이 있으랴?" 이 말씀은 관찰력 있는 자들에 대한 호소이며, 현대의 학문을 고대의 지식보다 앞세워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도전이다.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열거해 보라. 비록 이전 시대에 관한 기록의 부족 때문에 꼬집어 나타낼 수는 없을지 모르나 우리는 "우리보다 앞선 옛적에 그것이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자연의 왕국에서 "이것은 새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일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아진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히 4:3). 우리에게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 것들은 우리 자손에게도 또한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 즉 그것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늘은 옛적에 있었고 땅은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자연의 힘과 자연의 인과 관계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과 같이 변함이 없다.

섭리의 세계에서는 비록 그 진로와 방법이 자연계와 같이 잘 알려진 확실한 법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동일한 궤도를 따라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언제나 여전히 같은 일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또 그 마음의 부패도 여전히 같다. 그 욕망과 추구하는 것과 불평도 여전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성경 말씀과 인간의 행동에 따라서 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위는 되풀이 된다. 우리에게 놀랍게 보여지는 일도 그다지 놀랄 필요가 없다. 이전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으며 이전에도 그처럼 뜻밖의 진보나 실망이 있었고, 그와 같은 생소한 혁명이나 돌연한 변혁이 있었으며 그 같은 급격한 사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참상은 언제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하며, 인류는 해와 바람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전 무대에 올라서 있어 그 있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 말씀이 주려고 하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것들을 애호하고 그 새로운 것들을 스스로 발견해 낸 것으로 착각하며, 그것들을 즐거워하고 자랑으로 삼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묵은 것들이라면 싫증을 느끼고 이스라엘이 만나를 싫어하던 것처럼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접해 왔던 것은 권태를 느끼는 버릇이 있다. 우리는 아테네인들처럼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고 싶어하거나 듣고 싶어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런 모든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 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이라고 하면 찬탄을 금치 못한다. 아시리아 타티아누스는 그리이스인들이 자기들의 공로인양 뽐내던 모든 기술들도 실은 그들이 야만인으로 간주하던 민족들에게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고 제시하면서 이와 같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치욕스럽게도 그것들을 유레세이스(euvrhseij) 즉 발명품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그 물건들은 미메세이스(mi,mhseij) 즉 모방에 불과한 것이다."

 

(2) 우리가 피조 세계에서 행복을 구하거나 만족을 기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여지껏 아무도 행복이나 만족을 발견하지 못한 곳에서 왜 그것을 찾아야 할까? 이 세계가 우리보다 앞서 간 자들 이상으로 우리에게 더 친절하리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새로운 것은 도무지 없으며 우리 선조들은 이 세계를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깊이 파보지 않았는가? "너희 조상들은 만나를 먹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지 아니 하였느냐? (요 8:8, 9; 6:49 참조)

 

(3) 우리가 영적으로 영원한 축복을 얻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것들을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을 숙지(熟知)하여 새로운 본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에는 "옛 것이 지나가고 만물은 새롭게 된다"(고후 5:17). 복음은 "우리 입에 새 노래"를 머금게 해 준다. 하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우며"(계 21:5) 그 곳은 참으로 새로운 세계이다(눅 20:35). 그곳은 이 세상의 상태와는 달리 처음에도 새롭고 영원토록 새로우며, 언제나 신선하고 언제나 번성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른 죽고 싶어진다. 즉 이 세상에는 몇 번이고 같은 일만 반복될 뿐이며, 우리가 이미 겪은 것에 비하여 더 많고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어서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로 갔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2. 인간들이 행한 업적이 그들의 사후에도 알려지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라는 업적의 기억에 대한 잘못이다.

그들의 이름은 불후한 것이 될 것이고 그들의 후손은 자기들이 이룩한 행위와 자기들이 획득한 명예와 자기들이 불려 놓은 재산을 기념해 줄 것이며, "그들의 집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시 49:11)는 점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셈이다. 당대에 아주 위대하게 보이고 크게 두각을 나타냈던 "이왕지사"와 인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지 않은가!" 그들은 망각 속에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다. 여기 저기서 주목할 만큼 뛰어난 인사나 일은 친절한 역사가를 만나 기록에 남을 수 있는 운을 가지나 동시에 그보다 못지 아니하게 비범하면서도 누락되어 버리고 마는 인물이나 일도 또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올 것들에 대해서도 기억함이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기억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도 사라져 버리거나, 가볍게 여겨지고 말 것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인간의 지혜의 헛됨 (전도서 1:12-18)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체적인 주장을 하고 그에 대한 일반적 증명을 얼마간 하고난 뒤, 이제는 그 주장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1. 그 자신의 경험에 의하여 증명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보았으며 그것이 헛된 것임을 발견하였다.

 

2. 개개인의 귀납적 추리에 의하여 증명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이성을 가진 피조물의 행복이 되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지식과 학문으로 논증을 시작한다. 이 지식이나 학문조차 헛된 것이라면, 그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헛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점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나 있다.

 

 

Ⅰ. 솔로몬은 여기에서 그가 이 문제에 대하여 해본 시험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아주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지식에서 참된 만족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1. 그는 자기의 높은 지위로 인하여 온갖 종류의 학문에 매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특히 정치학과 인간들의 제반사에 통달할 수 있었다(12절). 그는 이 교훈을 "전도하는 자"로서 그 모든 인방 사람들이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백성"이라고 칭찬해 마지 않는(신 4:6)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전성기의 아테네보다도 더 훌륭하게, "세계의 눈"이라는 칭호를 얻기에 모자람이 없던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왕좌를 누리고 있었다. 임금의 마음은 추적할 길이 없다. 그만이 자기 마음 닿는 데를 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서 종종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판결과 같다." 모든 일을 추구하여 밝히는 것은 그의 명예요 그의 일이다. 그의 큰 재산과 존귀로 인하여 솔로몬은 그 조정을 학문의 중심지와 박학다식한 자들의 집합처로 만들 수 있었다. 또 그는 거대한 부귀로 인하여 가장 훌륭한 서적들을 구비할 수 있었고, 당시에 존재하던 모든 현인들이나 지식있는 부류들과 고담준론을 나누며 교류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서 배우기를 의뢰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솔로몬은 스스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식은 장사와 마찬가지여서 모든 이윤이 물물교환을 통해 얻어지듯 지식도 교환과 교류를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타인들을 가르칠 것이 있다면, 남들도 또한 우리를 훈계할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솔로몬이 자기의 위엄과 명예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나 전도자는 왕이다"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내가 지금 무엇이든지간에 나는 왕이었다." 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과거의 일로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세상의 명예는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지혜를 얻음에 있어 이와 같은 자기의 이점과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이는 만약 그가 그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이점이 크고 기회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자기 마음을 다하여 궁구하고 살펴서" 모든 일을 "지혜로써" 알고자 하였다(13절). 그는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섭리로든 인간의 기술과 총명에 의해서든 행해지는 모든 일에 통달하는 것을 그의 일로 삼았다. 그는 철학과 수학, 농업과 상업, 상품과 기계에 관한 지식 등에 대하여 모든 통찰력을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이전 시대의 역사와 다른 나라의 현재 상태 곧 그들의 법률과 풍습, 정책등과 인간의 상이한 기질과 능력, 계획, 그리고 그들을 다루는 방법등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기도 하였다. 그는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탐색하며 세밀히 살피기 위해 전념하였다. 그 일은 극히 복잡다단한 일이었고 최고의 심적 집중과 가장 활발하고도 항구적인 실행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는 제왕의 신분이었지만 스스로 학문이란 고역을 맡았으며, 풀리지 않는 학문의 매듭에서 용기를 잃는 일도 없었고 학문의 깊이를 소홀히 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 일을 해낸 것은 그 자신의 천재적 소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 자신의 세대에서 봉사하기 위한 자격을 갖추고자 함이었으며, 또 지식의 확대가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어디까지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실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3. 그는 그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큰 발전을 이룩하였고,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놀랄 만한 진전을 보았으며, 자기 이전의 어떤 발견보다 더 많은 발견을 성취하였다. 그는 다수인들이 그러하듯 학문이란 정복되지 않으며, 아무리 힘을 들여도 통달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학문 자체를 평론하지 아니했다. 아니, 그는 자기가 하고자 기도했던 것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는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보았다(14절). 상계와 하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의 일, 즉(현대적인 용어를 구사하자면) 태양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이 은하계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과, 그리고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능력에서 인간의 기지가 창조해낸 모든 일을 보았다. 그는 자기의 탐구가 성공함에 따라 어느 누가 느낀 것보다 더 많은 만족감을 맛보았다. 그는 자기 상품을 계수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어느 부자 상인 못지 아니하게 즐거움을 느끼면서 자기가 성취한 지식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심령과 사귀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보라, 나는 지혜를 크게 확대시키고 증가시켰으며 지혜를 내 스스로 더 많이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전하고 평판이 나도록 하기 위해 어느 누구 보다도,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었던 모든 자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하기까지 하였다"라고. 연구성이 있고 지적인 즐거움을 아주 만끽하는 것은 위대한 자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하나님은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크나큰 이점을 주시는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발전을 기대하신다. 한 나라의 통치자나 지도자들이 명예와 지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지혜와 유용한 지식에 있어서도 타인들을 능가하려고 연구 노력하는 것은 그 나라 백성에게 유익한 일이다. 그들은 자기들보다 악조건에 있는 사람들은 불가능하나 그들에게는 가능한 학문에 전념함으로써 학문의 영역에 공헌을 할 수도 있다. 솔로몬은 이 일에 대해 유능한 감식가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기 머리를 이해력으로 가득채웠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은 지혜와 지식을 크게 경험하였고," 지식의 즐거움과 재미뿐만 아니라 지식의 위력과 이득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터득한 것을 모두 알았고, 그것을 활용할 줄도 알았다. "지혜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의 영혼에 즐겁게"되었다.(잠 2:10, 11; 22:18).

 

 

4. 그는 이 연구 결과를 인간 생활의 움직임에 극히 유용하고, 결과적으로 가장 귀중한 학문의 영역에 특별히 적용하였다(17절). "나는 지혜의 법칙과 지령을 알고자 하여 내 마음을 기울이며 어떻게 하면 지혜를 획득할 수 있을까 하여 마음을 썼다. 그리고 나는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기우렸으니, 이는 어떻게 하면 내가 그것들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을까 함이다. 또 미치게 되는 덫과 함정이 무엇이며 교묘히 파고들어 오는 경로가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마음을 기우렸으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피하며 나 자신을 방어하고 그들의 오류를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솔로몬은 지식에 대한 조예를 가지기 위해 이같이 부지런하였으므로 사려깊은 자들의 지혜나 우매한 자의 미친 것에서 다 같이 교훈을 얻었고 "부지런한 자의 밭"에서 뿐만 아니라 "게으른 자의 밭"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Ⅱ. 그는 이러한 실험의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 주는데, 이것은 누가 앞서 말했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1. 그는 지식에 대한 자기의 추구가 육신뿐만 아니라, 그의 심사에도 매우 수고롭고 지치게 하는 일임을 발견하였다(13절).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일에 따르는 "이 쓰라린 고통," 즉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조상이 금지된 지식을 탐낸 데 대한 형벌로서 "인간의 자손에게 주신"고난이다. 육체를 위한 양식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양식인 지식도 "우리 얼굴에 흐르는 땀에서" 얻어야 하고 먹어야 한다. 이 영혼의 양식이나 육체의 빵은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수고하지 않더라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2. 그는 "해 아래서 행해지는 일"을 많이 보면 볼수록 그 허무함을 더 많이 보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니, 때때로 그 광경은 "심령의 헛 수고"를 유발시키기까지 하였다(14절). "나는 잡무(雜務)로 가득찬 세상의 모든 일을 보았고 인간의 자손이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을 관찰해 왔다. 그런데 보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내가 보니 모든 것이 헛되며 심령의 헛수고로구나." 그는 이전에도 모든 것이 "헛되며"공연하고 무익한 것으로 공언하였고,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선언하였다(2절). 여기에서 그는 그 모든 것이 "심령의 성가심"이요 수고로운 것이요 불리한 것이며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덧붙여 말한다. 그것은 호세아에서와 같이 "바람을 먹는 것"이라고 해석한다(호 12:1).

 

(1) 우리가 행해진 것이라고 보는 일 자체도 그 일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헛된 것이며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 업무를 기획하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보살핌과 염려가 뒤따라야 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데에도 굉장한 수고가 수반되며, 많은 곤란과 부닥쳐서 실망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이 심령의 헛수고이다"라는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2) 그러한 모습은 그 일들을 살피는 지혜로운 관찰자에게도 "헛된 일이며 심령의 괴롭힘"이 된다.

우리가 세상을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더욱 더 많이 보게 되며 헤라클리터스와 같이 모든 일을 통곡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솔로몬은 특히 "지혜와 우매"에 대한 지식도 "마음의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지(感知)하였다(17절). 그는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지혜를 사용하지 아니함을 보고 많은 미련한 자들이 자기의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음을 보았을 때 괴로움을 느꼈다. 그가 지혜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지혜와 인간들간의 거리감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목도하는 일이란 그에게 괴로운 일이었고, 또 그가 우행을 보게 되었을 때 어리석음이란 것이 인간의 심중에 얼마나 뿌리 깊게 달라 붙어 있는지를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3. 그는 자기가 얼마간의 지식을 얻게 되었을 때 기대했던 정도의 만족을 얻을 수도 없으며, 그 지식으로써 남들에게 자기가 기대하던 정도의 유익을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15절).

 

(1) 인간의 생활 속에 일어나는 많은 억울한 일들을 구제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결국, 내가 발견하는 것은 굽어진 것은 여전히 구부러진 대로 있을 것이고 바로 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자체는 복잡다단하게 얽혀있고 혼란한 것이어서, 우리가 그것에 도달하자면 멀리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고 아주 광범위한 영역을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로몬은 지식에 이르는 지름길을 찾아 내려고 생각하였으나 왕도(王道)를 발견해 낼 수가 없었다. 학문의 길은 여지껏 그랬던 것과 마친가지로 항상 미로에 휩싸여 있다. 인간의 마음과 태도는 구부러져 있고 편벽된 채 있다.

 

솔로몬은 자기의 지혜와 권세로라면 자기의 왕국을 완벽하게 개혁할 수 있으며, 굽은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바로 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무너졌다. 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정치학으로써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복원시켜서 원래의 정직성을 되찾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는 데에 모두 불충분하다는 것을 받견하게 된다. 학문은 인간의 본성과 기질을 바꾸지도 못할 것이며 인간의 죄 많은 고질병을 치료해 내지도 못할 것이다. 또한 학문은 이 세상 일들의 구조를 변경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은 눈물의 골짜기이며 모든 일이 다 행해지고 난 뒤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이 눈물의 계곡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2) 인생살이 하는 데에 결핍된 많은 위로를 보충하려고 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인간의 삶 속에서 "부족한 것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인간의 지식의 보고(寶庫)에서 모자라는 것도 계산할 수도 없으며 "결핍된" 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완전을 기하여 최선을 다하고 난 뒤 이 생에서 누리는 우리의 모든 향락조차도 절룸발이 즐거움이며 결함있는 것이어서 아무런 도움이 될 수도 없다. 그런 향락들이 현재에도 불완전할 뿐더러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의 지식에서 "모자라는 것은" 너무나 많아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가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보게 된다. "누가 자기의 잘못"과 자기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4. 그러므로 그는 총괄하여 결론 내리기를 위대한 학자들은 스스로 큰 애도자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지혜가 많으면 근심도 많기 때문이다"(18절). 지혜를 획득하려면 아주 많은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도 많은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우리는 아는 게 많아질수록 알아야 할 일들을 더욱 많이 발견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의 작업이 끝없는 것임을 한층 더 분명히 깨닫게 된다. 또한 아는 게 많아질수록 이전에 저지른 과오와 실책을 더욱 더 많이 발견하게 되며 이런 것이 "많은 근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우리가 인간의 다양한 취향과 상이한 견해에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우리 학문이 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한층 어리둥절해져서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 모르게 된다. "지식을 더 하는"자들은 그 지식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 세상의 재난들을 더 한층 신속하고 쉽게 감지하게 된다. 즉, 즐거움을 주는 발견이 하나라면 불쾌한 발견은 열이었으므로 그들은 점점 "근심을 더하게"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용한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서 물러서지 말고 인내를 갖고 지식이 주는 근심을 극복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 안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조심스럽게 이행하는 데서만 참다운 행복을 기대해야 한다. 하늘의 지혜를 "더하고," 경건한 영적인 생활의 원리와 능력과 즐거움의 경건적인 지식을 "더하는" 자는 "기쁨을 더하게" 되는 것이며 그런 기쁨은 오래지 않아 영원한 기쁨으로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됨(전도서 1장)

 

[1-2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는 원어는 원래 ‘수증기’나 ‘입김’이라는 뜻이며(잠 21: 6; 사 57:13) 점차 ‘사라지는 것, 덧없는 것, 무가치한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BDB). 전도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3-4절]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자기에게는 결국 아무 유익이 없고 다만 뒤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유익이 있을 뿐이며, 그 사람도 또 결국 죽을 것이므로 결국은 헛되다는 말이 된다. 이와 같이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온다. 수천년의 인류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

 

[5-7절]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그 강물이 흘러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느니라].

 

자연만물은 날마다 반복된 일을 한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간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다시 증발하여 하늘의 비구름이 된다.

 

[8절]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자연만물의 이런 반복을 생각하면 만물이 피곤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만족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눈은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만 만족함이 없고 귀도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만 들어도 마음의 욕구에 차지 않는다.

 

[9-11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혹은 ‘것들’]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세상의 모든 일들은 반복된다. 물론 과학문명에서 발명이라는 것이 있고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문제, 죄의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종교적 문제, 도덕적 문제,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자기의 욕심을 추구하는 것, 돈 사랑, 육체적 쾌락 사랑, 명예심, 교만 등의 일들은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고 변한 것이 없다. 죄인인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지나가고 우리의 기억에서 희미해진다. 또 다음 세대들도 우리에 대해 똑같이 그러할 것이다.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12-13절]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하늘 아래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결국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셔서 수고하게 하신 것이다. 삶은 괴로운 것이다. 아기를 출산할 때부터 심한 고통이 있고 출산된 아기도 울면서 세상의 삶을 시작하고 인생의 여정 전체가 수고로운 삶이다.

 

[14절]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은 다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사람이 바람을 잡아보려고 해도, 그래서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는 바람뿐인 것처럼, 사람의 모든 행사는 지나고 보면 공허하고 그가 죽고나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이 출생하여 학교에 가고 학교를 나오면 취직하고 결혼하고 또 자녀를 출산하고 기르고 학교에 보내고 졸업하면 취직하고 또 결혼한다. 사람은 이렇게 하다가 하나씩 죽는 공허한 삶을 사는 것이다.

 

[15절]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사람이 늙으면 허리도 구부러지고 그 구부러진 허리는 곧게 할 수 없다. 또 이지러진 것 곧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셀 수 없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 늙으면 없어진 시력을 회복하기 어렵고 없어진 청력도 회복하기 어렵고, 없어진 기억력과 기력도 회복하기 어렵다.

 

[16-18절]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체험했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이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더함이니라].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원문)는 부친 다윗을 포함하여 전 세대의 모든 지혜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지혜를 많이 얻어서 그 지혜의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살펴보고 묵상하였으나 번뇌와 근심만 더할 뿐이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헛됨을 알자.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2절).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헛된 영광과 헛된 만족을 구하지 말고 세상적 지혜와 지식도 구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만 바라자. 이것이 전도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며(전 12:13)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만 헛되지 않으시다. 하나님만 영원하시다. 하나님만 의미가 있으시고 가치가 있으시다. 하나님 안에 참 생명이 있고 참 만족이 있고 참 평안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천국만 소망하고 그의 뜻만 순복하자. 완성될 것이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의 의미는?(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여기 헛되다는 말 헤벨(hebel)은 숨, 공기, 공허, 쓸모 없는 어리석은 무용한 등의 많은 뜻이 있다. 이 말이 이사야 57:13에서는 바람과 병행해서 증기나 호흡의 의미로 쓰였으며 잠언 21:6에서는 불려 다니는 안개로 쓰였다.

이렇게 여기 쓰인 헛되다는 말은 공허하고 일시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을 결합시켰다. 따라서 시편 144:4에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 하였다. 스가랴 10:2에서도 헤벨이란 히브리말을 쓰고 있는데 거기서 우상은 증기 같은 위안을 준다. 다시 말해서 그 위안은 헛된 것이요 신속하게 지나가는 것이요 따라서 거짓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헛되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님은 위에서도 이미 밝힌 대로다. 이 말은 의미가 없다거나 어리석다는 뜻이 있으며 헛되고 헛되다고 이 말을 더하는 경우에는 참으로 중요하지 않는 활동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 전도서에서 의미하고 있는 헤벨이란 말은 모든 것이 변하고 지나가는 것이므로 영구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덫에 잡혔고 헛된 쾌락을 추구한다. 그들은 거짓 위에 그들의 삶을 구축한다(1).

물론 여기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1:14; 2:11). 기쁨(2:1)과 좌절(4:4, 7-8; 5:10) 사는 것(2:17; 6:12; 9:9), 젊음(11:10) 그리고 죽음(3:19; 11:8),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운명(2:15, 19), 부지런함과 게으름(2:21, 23, 26)이다. 모든 지상의 경험이 하나의 연합으로 헛된데 굴복한다(참고, 롬 8:20). 그러나 해아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모든 인간적인 활동을 가리켰다(2).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두 자격을 갖추지 못한 선이라는 것이다(3).

따라서 솔로몬은 3-11절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은 긍정적인 유익의 보장이 없기 때문에 무익하다고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솔로몬의 변론은 죄 때문에 만물이 헛된데 굴복한다고 언급한 로마서 8:20-22의 말씀과 일치한다(4).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은 다 지나가는 것이 헛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일을 하는 것만이 영원한 가치가 있고 헛되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항상 힘써야 한다(벧전 1:25; 고전 15:57).


1. Duane A. Garrett,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Nashville: Brodman, 1993), pp. 282-283
2. Michael A. Eaton, Ecclesiastes(Downers Grove: IVP, 1983), p.56
3. Roland Murphy, Ecclesiastes(Dollas: Word, 1992), p.4
4. J. Carl Laney, Answers to Tough Questions(Grand Rapids: Kregel, 1997),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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