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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서

전도서 2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2. 28.

 

전도서 2장

메튜헨리 주석

 

속세적 줄거움의 헛됨 (전도서 2:1-11)

솔로몬은 여기에서 숨뭄 보눔(summum bonum) 즉 인간의 지복(至福)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기가 헛되이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던 장소로 삼았던 서재, 도서실, 작업장, 그리고 회의실을 떠나 공원이나 극장, 그의 정원이나 정자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철학자들이나 위엄있는 원로 정객들과의 교제를 재사(才士)나 용자(勇者)나 가인(佳人)과의 궁정 교제로 바꾸는데, 이것은 그들과 교제하는 중에 참된 만족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기에서 고귀한 지적인 즐거움으로 부터 비루한 감각적 즐거움으로 그 단계를 크게 낮춘다. 만약 그가 시험을 철저하게 해볼 결심이라면 그는 이러한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인류의 대부분이 이 곳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행복을 자기들이 이미 발견하였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Ⅰ. 그가 시험해 보리라고 결심하였던 것은 환락과 즐거움 재담이 어떠한 소용이 있으며, 만일 그가 타인들로 더불어 쉴사이 없이 유쾌한 이야기나 농담이나 익살이나 해학을 즐길 수 있다면 자기가 행복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온갖 절묘한 재치와 임기웅변할 수 있는 재능을 부여받고 있다면, 그는 웃음을 불러 일으키기에 적합한 재담을 만들어내거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만일 그가 비웃음과 조소를 받기에 적합한 온갖 모순된 말과 실언(失言)과 어리석은 일을 듣는다면 그는 언제나 즐거운 기분으로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1. 그는 이에 대해 행한 실험을 하였다(1절). "지혜가 많으면 근심도 많으며 진지한 자들은 우울을 발견하고 나는 내 심중에 말하기를"(내 마음에게)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겠다. 나는 그것이 네게 만족을 줄지 안 줄지 시험해 보겠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의 심적 기질도 그의 외적 조건도 그를 유쾌하지 못하도록 할만한 아무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다른 모든 이점과 마찬가지로 그의 기질이나 외부적 조건도 그의 즐거움을 촉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식의 삶을 누리기로 작정하고 "낙을 누리라. 그리고 네 마음껏 즐겨보라. 염려는 던져 버리고 즐거워야 하겠다고 결심하도록 하여라"고 말했다. 인간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가질 수도 있으나 여기서 솔로몬이 누리겠다고 시도한 좋은 일들을 하나도 갖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반면에 가난하면서도 매우 쾌활한 자들도 많이 있다. 헛간에 사는 구걸자들도 즐겁게 지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유쾌하다는 것은 허상을 즐기는 마음의 산물이다. 비록 이것에는 이성(理性)이 주는 확고한 즐거움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단순히 육체적이고도 육욕적인 쾌락보다는 우선적이다. 인간을, 아니말 라티오날레(animal rationale) 즉 "이성을 가진 동물"이란 점에서 뿐만 아니라 아니말 리시빌레(animal risibile) 즉 "웃을 줄 아는 동물"이란 점에서도 짐승과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영혼에게 "편히 하여 먹고 마시라"고 말하고 "그리고 즐거우라"는 말을 첨가하였는데, 이것은 먹고 마시는 일도 결국은 즐거움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웃어서 살찌고 웃어서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라"고 솔로몬은 말한다.

 

2. 그는 이런 실험을 해보고 난 뒤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보라, 이 또한 헛된 일이니 그 외의 딴 모든 것과 일반이로구나. 이것도 결코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구나(2절).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혹은 너는 미친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너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희락은(모든 놀이와 오락 그리고 기분 전환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저가 무엇을 하는고 혹은 "네가 무엇을 하는가?" 온건하고 적당하게 그리고 절제하여 사용하는 순수한 환락은 좋은 것이며, 사업이 일시적 휴식이고 인생살이의 수고와 불만을 해소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도가 지나치고 절제하지 못할 때에는 어리석은 것이 되고 무익한 것이 된다.

 

(1) 그것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을 하는가? Cui bono, ─즉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환락은 죄지은 양심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며, 슬픔에 찬 심령을 달래 줄 수도 없을 것이다. "무거운 마음에다 대고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더 역겨운 일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이며 진정한 만족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현재 당하는 고통에 대한 진통제에 불과하다. 큰 웃음소리도 흔히 한숨으로 끝이 나게 마련이다.

 

(2) 그것은 많은 해를 입힌다. "그것은 미친 것이다." 즉 그것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며, 많은 나쁜 행실에 탐익하게 하며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종교에 치욕이 된다.

 

향락 속에 빠져 방종하는 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희락은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과 경건한 일들로부터 소외시키며 종교의 힘을 갉아 먹는다. 환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진지성을 망각하고 그들의 손에 수금과 소고가 쥐어져 있는 동안에는 "우리를 떠나소서" 하고 전능자에게 말한다(욥 21:12, 14). 우리도 솔로몬과 같이 스스로 "희락을 시험"해 보고 이같은 즐거움에 따라 우리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 되는지 판단을 내려 볼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어떻게 즐거움의 영향을 받을까? 우리는 명랑하며 동시에 지혜로울 수 있을까? 우리는 환락을 음식으로서가 아니라 양념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에 대해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이 한 것처럼 향락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지 않을지에 대해 시험해 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직접 시험해보는 대신에 그가 환락에 대해 "그것은 미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하는가?" 라고 한 말을 받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웃음과 쾌락은(윌리엄 템플경이 말하기를) 매우 다른 감정에서 나온다. 인간은 정작 자기들이 매우 기분좋게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웃고자 하지 않으며 별로 즐겁게 여기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웃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Ⅱ. 자기의 기호를 즐겁게 충족시켜 주던 일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는 다음에 자기 취향을 즐겁게 해 주리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시험의 대상을 삼고자 하였다(3절). 피조물이 가지는 지식도 만족을 주지 못하므로 그는 그것을 자유스럽게 사용하면은 만족을 얻을 수 있을지 보고자 하였다. "나는 마음으로 궁리하여 자신을 술에 내맡기기로 하였다." 즉 고량진미와 좋은 술에 집념키로 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마음과 전혀 협의를 하지 않고 이런 일들에 뛰어들며 시야를 넓혀 멀리 바라다 보지 않고 단지 육욕적 미각만 만족시키려 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성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쾌락에 뛰어들었고, 또 단지 실험을 해보기 위해서 그리하였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는 과중한 연구로 스스로를 시험한 후에야 자신에게 감각적인 즐거움을 누릴 자유를 허용한 것이다. 즉 자기 지혜의 증가가 "근심의 증가"로 판명이 될 때까지는 스스로 술에 열중해 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느라 기진맥진하게 되었을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비심으로 우리 자신의 원기를 회복시키며 극히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 감각적 즐거움은 우리가 강심제를 사용한 때와 같이 꼭 필요할 때 사용해야만 바로 사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디모데도 자기 건강을 위하여 포도주를 마셨던 것이다(딤전 5:23). "나는 내 육체를 술과 함께" 혹은 "술에게로 끌어당기려고 생각하였다"(난외주는 이렇게 해득한다). 술마시는 일에 탐닉하는 자들도 처음에는 억지로 마시는 법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몸을 억지로 술에, 그리고 술과 함께 끌어당긴다. 그러나 술마시는 자들은 이 술로 인하여 자취하는 불행이 어떤 것인지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런 뒤에 그는 그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간주하였고, 자기가 그 일에 열중한 것은 마지못해서였다.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이것을 "연약함"이라고 칭하였으며, 자기의 "어리석음"이 용납되기를 원하였다(고후 11:1).

그는 이 어리석움이 어느 정도로 인간을 행복되게 만들어 줄 것인지 그 끝간 데를 알아보기 위하여 "어리석음을 붙잡아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위) 너무 심한 익살을 부렸던 것 같다. 그는 어리석음이 자기를 붙잡게 하거나 지배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으며, 오히려 자기가 어리석음을 주관하며, 그것을 멀리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이 자기에게 너무나 벅찬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3. 솔로몬은 동시에 스스로 "지혜에 통달" 하고자 하였고, 그의 쾌락을 사용함에 있어 현명하게 처신하려고 하였다. 이는 그가 쾌락들로 인하여 어떠한 편견도 갖게 되지 않고, 이들에 대한 유능한 판단을 내리기에 부적합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가 "술과 함께 자기 몸을 끌고 다녔을" 때 그는 "지혜와 함께 자기 마음을 인도" 하였으며(이 말씀은 그런 뜻이다), 지식에 대한 추구를 계속 유지하였고, 술주정뱅이가 되거나 쾌락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 그의 학문과 그의 축연은 서로를 상반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양자를 절충한 것이 자기가 이 두 가지 요소 중 어느 한 가지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인지 그 여부를 시험해 보았다. 솔로몬은 이러한 시험을 꾀하였으나 이것 역시 "헛된 것"임을 발견하였다. 왜냐하면 술에 탐닉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심적으로 지혜에 통탈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는 자들 만큼이나 자신을 기만하는 자들인 것이다. "술은 조롱군"이다. 그것은 큰 사기군이다. 어떠한 자라도 자기가 어느 정도 술에 빠지다가 그 이상은 더 마시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4. 그가 목적한 것은 자기의 미각을 충족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발견해 내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시험해 봐야만 된다. 인간의 행복에 관한 그의 묘사를 관찰해보자. "인생이 천하에서 종신토록 행하는 것은 그들의 선을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1) 우리가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소유해야만 하는 선이 아니라(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우리가 행하여야 하는 선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행하오리이까?" 우리의 행복은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빈둥빈둥 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하고 좋은 일을 하는 데에 있다. 만일 우리가 "좋은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분명코 그 위안을 얻을 것이며 "그 일에 대한 칭찬"을 받을 것이다.

 

(2) "천하에서" 행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여기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며 낮시간이며 우리의 행동이 지속하는 시간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일하고 봉사하는 나라이며, 그것에 대한 보상은 저 다른 세상에서 기대해야 한다. 우리의 일들은 그곳에까지 우리를 따라올 것이다.

 

(3) 그것은 "우리가 종신토록" 행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행하여야 할 선한 일을 끝까지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지속되는 한 "우리 생애의 날들의 수대로"(난외주는 그렇게 되어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생애의 날들은 우리의 시간을 그 손에 쥐고 계신 분이 헤아려 주시는 대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가 명하시는대로 소모되어진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생활방식을 술속에서 찾으려는 생각으로 술에 탐닉해 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과거에 자기의 그와 같은 우행을 자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인간들이 행하여야 할 선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매우 나쁜 일이다.

 

Ⅲ. 술에 젖어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인 줄을 곧 깨달은 다음에, 그는 귀인들이나 위대한 자들이 즐기는 매우 사치스런 향락을 시험해 보았다. 그에게는 굉장한 수입이 있었다. 그의 왕관이 가져다 주는 세금은 심히 많아서, 그는 그것을 투자하여 자기 자신의 기분을 즐겁게 하는 데 사용하였고 자기를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는데 소비 하였다.

 

1. 그는 도성이나 향리 할 것 없이 건축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집권 초기에 하나님을 위한 전을 축조하느라고 그토록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였었다. 그러므로 그 뒤에 그가 자기를 위한 건물을 세워 자신의 기호를 만족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용납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전이 "황폐"해 있는데도 자기집만 "천장과 벽을 판자로 고쳐 만든" 백성들과는 달리(학 1:4)그는 의로운 목적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하였으며(마 6:33), 따라서 그 일은 순탄하게 되어나갔다. 그는 건축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고용하며 후손에게 선을 베푸는 즐거움을 누렸다. 우리는 열왕기 상에서 솔로몬의 건축에 대해 읽어볼 수 있는데(왕상 9:15-19), 여기에 나오는 건축물은 죄다 "큰 역사"이어서 그의 자원과 영혼과 그의 위엄을 나타내 줄 정도였다. 이제 그의 과오들을 살펴보자. 그는 자기가 행해야만 마땅할 "선한" 일들을 탐구하였고(3절), 이것을 추구하느라 "큰" 역사(役事)에 몰두하였다. 선한 일들은 참으로 진실되고 위대한 일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선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위대한 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은혜롭지 못한 많은 일들이 기사(奇事)로 소문이 나있다(마 7:22).

 

2. 그는 정원에 흠뻑 빠져들었는데, 이것은 어떤이들에게는 건축물 만큼이나 매혹적인 것이 된다. 그는 "포도원을 스스로 심었는데" 가나안 지방의 토양과 기후는 포도 농사에 적합하였다. 그는 훌륭한 "동산과 과원을 스스로 만들었는데" 아마 그 원예 기술은 오늘날의 기술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재목나무의 숲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직접 심은 "온갖 종류의 열매를 여는 나무들"도 있었다. 만약 어떤 세속적 사업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 순결하였던 때에 아담이 종사하였던 일밖에 없을 것이다.

 

3. 그는 수도사업과 연못과 운하를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하였는데 이는 오락이나 기분전환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였다(6절). 그는 그것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물도 주었다. 그러나 삼림을 중식케 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겼다.

샘물은 큰 축복이다(수 15:19). 그러나 자연이 그런 복된 것들을 제공해 주더라도 그것들을 유용하게 만들려면 인간의 기술로 그들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잠 21:1).

 

4. 그는 자기 권속을 많게 하였다. "큰 역사(役事)를 하기로 계획하였으므로 그는 수하인들을 많이 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남종들과 여종들을" 돈을 주고 사서 확보하였는데 그들로부터 "종들이 그의 집에서 태어나기도 하였다"(7절). 이처럼 그의 수입은 늘어나기만 하였고 그의 궁정은 한층 화려한 것으로 변해갔다(스 2:58).

 

5. 그는 향리 사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일을 즐기기도 하며 그 일로 부를 벌어 들이기도 하였으며, 학문적 연구나 향락 따위를 찾느라고 이 사업에서 손떼는 일도 없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도 처음에는 양지기였음을 잊지 않고 그의 아버지가 소유했던 것과 같이(대상 27:29, 31) "크고 작은 가축떼," 즉 소떼와 양의 무리를 "크게 소유하였다." 가축을 취급하는 자들은 솔로몬이 "가축을 소유"하는 것을 자기의 "큰 업적"과 쾌락 중의 하나로 치부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직업을 업신여기거나 지겨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그는 점점 부자가 되었고, 건축과 정원가꾸기로 가난하게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일로 가난하게 되어 그것을 후회하고 이 모든 일을 "헛되고 바람 잡는 일"이라고 부르게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재물을 뿌렸는데도 그 재산은 불어났다. 그는 자기 국고를 "은과 금"으로 가득채웠으나, 그것이 거기에만 쌓여있지 않고 자기나라 전체에 유통되게 하여 "예루살렘에서 은이 돌같이" 흔하도록 만들었다(왕상 10:27). 게다가 그는 "세굴라"(Segulla) 즉 "왕들의 특수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물들" 을 소유하였는데 그 보배들은 그 비싼 것과 진귀함에 있어서 "은과 금"보다 한층 값지게 계산되는 물건이었다. 인근의 열왕들과 솔로몬 왕국내의 먼 변방에서도 그의 은총과 지혜로운 교훈을 얻고자 하여 자기들의 소유 중 가장 값비싼 것을 진상품으로 보내왔다.

 

7. 그는 사람을 매혹시키고 기분을 전환케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즉 성악이나 기악 할 것 없이 온갖 종류의 가락과 음악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가 소유한 "남자 가수들과 여가수들"은 그가 선발할 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들이었다. 또 그는 당시에 사용되던 모든 취주악기와 타악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신앙보다는 여흥을 위해 음악을 사용한 아들과는 달리 음악을 신앙을 위해 더욱 많이 사용하였던 것 같이 보여진다.

 

이러한 음악은 "인간의 자손의 즐거움"이라 칭해진다. 왜냐하면 감각적 충족은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즐겨 찾는 것이며 거기서 큰 만족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녀의 즐거움은 전혀 그 성질이 달라서, 순수하고 영적이며 천적(天的)인 것이어서 천사들의 즐거움과 같은 것이다.

 

8.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성적 즐거움과 감각적 즐거움의 복합체를 동시에 즐겼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자기 앞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위대하였고" 그들을 "능가"하였다. 즉 그는 지상의 무수한 즐거움 한가운데서도 자기의 지혜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그의 쾌락조차 그의 판단과 양심을 흐리게 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신기하였고 그와 같은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이러한 오락물들의 와중에서도 "그의 지혜는 그에게 남아 있었다"(9절). 이와 같이 모든 치기(稚氣)어린 즐거움 속에서도 그는 대장부답게 자기 심령을 보존하였고 자신의 영혼을 지켰으며, 관능의 욕망에 대한 이성의 지배를 유지하였다. 그에게는 그토록 무진장한 지혜의 온축(蘊蓄)이 있었기에 이러한 인생 행로에서 여늬 사람들과 같이 그 지혜가 소모되어 버리거나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로 용기를 얻어 자기들도 이와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자기 지혜를 잃지 않을 줄로 생각하고 자기들의 욕망의 목에 굴레를 씌워 보겠다는 만용을 부리는 자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솔로몬이 소유했던 만큼의 지혜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솔로몬조차도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방 아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이방 신들에게 제단을 지어 바칠 정도로 자기 신앙을 상실하였을 때에 "그의 지혜가" 어떻게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지혜는 그에게 남아 있어서" 그는 쾌락의 주인이 될지언정 그것의 종이 되지는 않았고, 그 환락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망명객이 아닌 정탐군으로서 적국에 들어가 "저희 땅의 무방비상태를 살피고자 하였다."

 

(2) 그러나 그의 판단력과 양심은 그의 줄거움을 억제하지 않았고, 그가 감각적 쾌락의 진수(眞髓)를 추출하는 시도에 방해를 주지도 않았다(10절). 만약 "그의 지혜가 그에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면 그가 쾌락에 대한 실험을 통하여 그 정체를 완전히 알게 되기까지에 필요한 자유를 취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것은 쾌락에 대한 그의 판단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 나는 어떤 사람이 취하였던 것보다 더 큰 자유를 가졌다. 내 눈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가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설령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값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합법적 수단으로 달성할 수만 있으면 눈요기를 하였다.

 

나는 또 내 마음이 뜻을 두고 있는 어떤 즐거움도 내 마음으로부터 억제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떤 즐거움에서도 내 마음을 억제하지 않았다. non obstante─즉 내 지혜의 완전한 활동으로 나는 나의 쾌락을 한껏 맛보았으며, 여태까지의 어고 그의 정떤 쾌락주의자보다도 더욱 그것을 즐겼다. 그의 형편과 처지 그리 신적인 기질에는 이 즐거움을 불쾌하게 하거나 입맛쓰게 할 만한 아무런 요소도 없었고, 그의 향락에 불순물을 섞이게 할 아무런 찌꺼기도 없었다. 요약해서 말하면,

 

[1] 그는 지금까지 살았던 어떤 사람보다 그 사업에서 많은 즐거움을 누렸다. "내 마음이 나의 모든 수고를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 수고와 피곤도 그의 즐거움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2] 그는 자기 사업으로 인하여 이익을 덜 보지도 않았다. 그는 사업에서 자기 에게 방해를 줄 만한 어떤 실망도 부딪쳐 본 일이 없었다. "이것은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는 그의 모든 나머지 즐거움에다 이것을 보태었으니, 그 즐거움은 그가 자기 손이 수고한 것을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먹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이었으니 그것은 그가 자기의 수고로부터 기대할 수 있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업을 감미롭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그가 그 사업의 성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그의 즐거움을 더욱 달콤하게 만든 것은 그 즐거움이 그의 사업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세상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자였다.

 

우리는 드디어 그가 이 모든 일을 심사숙고해 보고 난 뒤 내리는 판결에 접하게 된다(11절). 창조주께서 자신의 위대하신 역사를 이루어 놓으시고 난 뒤 피조물들을 살펴보시니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었다." 모든 것이 그를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가 최대의 비용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자기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자신을 편안하고 행복되게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여 행한 모든 수고를" 살펴 보았을 때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보라, 모든 것은 헛되며 마음의 헛된 수고였다." 그는 그러한 일에서 아무런 만족도 이득고 얻지 못하였다.

노동이나 이 세상의 향락으로도 "해 아래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

 


우매함에 대한 지혜의 우월성 (전도서 2:12-16)

솔로몬은 맨 먼저 학문을 배우는 일에서 무슨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시험해 보았고 그 다음에는 감각적 쾌락에서 이를 시도해 봤으며, 또 이 양자를 절충한 것에서 찾아보려 하였다. 이제 여기에서는 이들을 서로 비교해 보고 나서 그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Ⅰ. 그는 지혜와 우행을 아울러 숙고해보려 시도한다. 그는 전에도 이들에 대해 고찰해 본 적이 있었다(1:7). 그러나 그 때에는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될까봐 여기에서 다시 그 일들을 관찰하고 있다. 즉 처음에 그가 고찰했을 때보다 두 번째 관찰과 두 번째 생각을 통하여 더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 그 여부를 알고자 한다. 그는 자기의 향락에 싫증을 느꼈고 그것을 싫어하게 됨에 따라 그 열락에서 등을 돌렸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다시 사색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이 일을 재심해보고 나서도 그 판결이 동일하다면 그 판단은 기필코 명확한 것이 될 것이다.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특히 그 왕은 실험을 위해서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한 자였고 그 실험을 해낼 지혜도 여간 풍부하지 않은 자였다. 시험해 봐야 소용이 없는 것은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어떠한 사람도 솔로몬이 이 세상에서 만족을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은 가질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으며, 선악의 원리에 대한 통찰력을 더 크게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행해진 일"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음 사실에 유의하자.

 

1. 우리 앞에 있던 자들이 잘 행해 놓은 것을 우리가 변개시킬 수 있다고 하는 맹목적인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보다 타인을 더 존중"하고 우리보다 더 우수한 두뇌와 더 훌륭한 손들이 수행해 놓은 것을 개선시켜 보려고 시도하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부적합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며,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존재인지를 인정하도록 하자(요 4:37, 38).

 

2. 솔로몬이 이 세상 일들에 대해 내린 판결을 묵인하고 이런 시험을 다시 해 보겠다는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이런 실험을 할 때 가지고 있었던 유리한 조건을 가질 엄두도 낼 수 없으며 그와 같은 집중력을 구사하여 이 실험을 해낼 능력도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적지 아니한 위험만 불러 일으킬 뿐이기 때문이다.

 

Ⅱ. 그는 우매함보다 지혜로움에 월등한 우선권을 주고 있다.

 

그가 인간의 학문이나 박학다식이 헛되다고 말한다고 해서 마치 그가 역설로써 인간을 재미있게 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었다거나[큰 재사(才士)가 과거 한 때 그랬듯이] 엔코미움 모리애 즉 "우행(愚行)을 칭송하는 찬사"를 쓰려고 한 줄로 오해하는 자가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는 엄숙한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진리가 곡해되지 않도록 수호하는 데에 주의하고 있다. 나는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난 것만치 "우매함보다 지혜에 더 훌륭한 것이 있음"을 곧 "보았다"(고 그는 말한다). 지혜의 즐거움은 비록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 충분한 것이 되진 못하나 술의 즐거움보다는 월등이 낫다.

 

지혜는 놀랄 만한 발견을 할 수 있도록 영혼을 밝혀 주며 영혼을 올바로 관리하는 데에 필요한 방향지시를 해 준다. 그러나 육욕은(여기서 우매라고 하는 뜻은 특히 이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마음을 흐리게 하고 좀먹으며, 암흑천지로 만든다. 또한 인간의 눈을 어둡게 하여 길에서 비틀거리게 만들고 정도에서 일탈(逸脫)하여 방황하게 만든다. 혹은, 비록 지혜와 지식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사도 바울은 여러 은사보다도 "더 훌륭한 길"을 제시해 주는데 그것은 은혜이다) 현재의 우리 안전과 위로와 유용성을 감안한다면 지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자의 눈은 그의 머리에 있기" 때문이며(14절), 바로 이 머리는 피해야 할 위험과 활용해야 할 이점(利點)들을 즉각 간파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언제 자기 이성을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 부심할 필요가 없으나 자기 주위을 돌아보는 즉시 시계(視界)를 포착하여 어디로 발걸음을 떼어야 하며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를 안다. 이에 반하여 "어리석은 자는 어둠 속을 걷는자"여서 때로는 어쩔 줄을 몰라 하거나 불쑥 뛰어들거나 한다. 그들은 어느 길로 가야할지 갈피를 못잡거나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여 당황하는 것이다. 분별있고 신중한 사람은 빛 속을 걷는 자와 같아서 자기 사업을 장악하고 있으며 단정하고도 안전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경솔하고 무지하며 멍청한 자는 계속 실수를 저지르며, 아슬아슬한 위기를 지난다. 그의 계획과 거래는 모두가 어리석기 짝이 없어 그의 사업을 망친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어라," "총명을 얻어라."

 

Ⅲ.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속하는 행복과 만족이란 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지혜가 인간에게 주는 유리한 점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지혜로운 자나 우매한 자가 살아가는 것이 마찬가지이다. "예견과 통찰력이란 점에서 생각하면 현자가 바보보다 아주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큰 확률도 흔히 적중하지 않으므로 나는 내 경험에 의해서 "한 가지 일이 그들 모두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14절). 자기 건강을 극도로 조심하는 자들도 자기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병이 든다. 이같은 일에 대한 커다란 의문은 금할 길이 없다." 다윗은 "현명한 사람들도 죽으며" 어리석은 자나 육욕적인 자와 꼭같은 재난을 당한다는 사실을(시 49:12)관찰하였다. 본서 9장 11절을 참조하라. 더구나 옛부터 관찰된 바로는 "행운이 우매한 자에게 은총을 베풀며" 멍청한 자들이 종종 아주 번창하고 그 반면에 위대한 기획가들이 자신들에게 최악의 결과를 입안(立案)한 셈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질병과 동일한 칼날이 현자나 우자를 다 같이 삼켜버린다.

 

솔로몬은 굴욕을 주는 이같은 관찰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는데(15절) 이는 자기가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었을 망정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음이 지혜를 자랑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확실한 것인 줄 믿기 시작하였을 때 "나는 내 심중에 이르기를" "그 일이 우매한 자에게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심지어 나에게까지도 일어나는구나"라 하였다. 이 말씀이 원문에서는 이와 같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일은 내게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내가 부자인가? 나만치 호화스럽게 살아가는 많은 나발도 역시 부자가 아닌가? 어리석은 사람은 병이 나고 넘어져 멸망하는가? 나도, 나 조차도 그렇게 된다. 내 재산도 내 지혜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때에 지혜로웠던가? 이 생에 대하여 그 지혜가 내게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내가 그런 지혜를 얻으려고 그와 같은 고심을 하여야 했던가?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다. 이 말은 이전에 말한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현자와 우자가 같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어리석음이다(시 77:10)"라는 말에 대한 정정이라고 이해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지사를 생각하면 그들이 그와 같이 매일반인 것같이 보여지며, 따라서 이 말은 오히려 자기가 이전에 했던 말, 즉 인간은 심오한 철학자나 정치가는 될 수 있으나 행복한 인간은 되지 못한다는 말에 대한 확증이다.

 

2. 현명한 자들과 우매한 자들은 다 같이 망각된다(16절).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의인들에게는 "그들이 영원한 기억을 얻을 것이며" "그들의 기억은 복될 것이고," 그들은 곧 "별처럼 빛날 것"이라는 게 약속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그들의 이름이 끊임없이 계속되리라는 약속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하늘에 기록된" 이름들만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지 못한 이름 즉 이 세상의 지자나 현자의 이름들은 우매한 자들의 이름과 더불어 티끌 속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현재 있는 것은 장차 올 날에는 모두 잊혀질 것이다." 한 세대에서 무척 많이 논의되던 것도 그 다음 세대에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잊혀진다.

 

새 인물과 새로운 사물은 묵은 것을 떼밀어 버리고 등장하나, 그들조차도 곧 경멸당하게 되고 급기야는 망각 속에 완전히 매장되어 버리고 만다. "지혜로운 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의 변론가는 어디에 있는가?"(고전 1:20) 그리고 "지혜로운 자는 어떻게 죽느냐? 우매한 자와 같지 않는가?" 고 그가 묻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경건한 자의 죽음과 사악한 자의 죽음에는 큰 차이가 있으나 현자의 죽음과 우자의 죽음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우매한 사람은 매장되면 잊혀지기 마련이다(8:10). "자기 지혜로 도성을 구출해 낸 가난한 사람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9:15). 그와 같이 지혜자나 우매자에게 있어서 무덤은 "망각의 땅"이다. 지혜롭고 박학다식한 사람도 일단 시야에서 벗어나면 마음에서 사라져 버리고, 곧 그들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가 일어난다.

 


불만족의 원인 (전도서 2:17-26)

사업은 지혜있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가지는 일이다. 그들은 사업에 열중하고 있는 때에는 그들의 영역에 있으나, 만약 자기들에게 일거리가 없으면 불평하게 된다. 그들은 때때로 그 사업으로 피로해질 수도 있지만 싫증을 내는 일이라곤 없으며 그만두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이 행할 만한 좋은 일을 발견하였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솔로몬이 이미 시험대에 올려놓았던 일이다. 그는 사색하는 생활과 육욕에 빠진 생활을 겪어 본 뒤에 활동적인 생활에 몰두해 보았지만 역시 딴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큰 만족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것 역시 모두가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일이다. 그는 이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보자.

 

Ⅰ. 그가 시험한 사업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해 아래서" 하는 사업이었으니(17 - 20절) 곧 이 세상의 일이었고 지상의 일이었으며 부귀와 명예와 이 현재 시간에 갖는 즐거움이었다. 또 그것은 왕이 하는 사업이었다. "해 위에서도" 행하는 사업이 있으니, 그것은 영속적 사업이며 끝없이 복됨을 누리는 일이다. 우리가 그 사업을(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일") 따라서 행하며 그 복됨을 추구하여 행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수고를 싫어할 만한 이유가 없으며 실망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여기에서 거의 만족을 얻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해 아래서 하는 수고" 즉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하는 수고에 (요 6:27; 사 55:2)대한 것이다. 그것은 더 나은 종류의 사업이어서 "삼림을 벌목하고 물을 빼는 치산치수(治山治水)사업" 이 아니었고(만약 사람들이 이런 수고를 싫어한다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지혜와 지식과 재주로" 하는 사업이었다(21절).

 

그것은 이성을 사용하는 사업이었고 자기 왕국을 통치하는 일과 국가의 이익을 신장시키는 일에 관련된 사업이었다. 그것은 지혜의 명령으로, 그리고 선천적 지식과 후천적 지식의 명령으로 통제되는 수고였고, 정의의 지시에 의해 지배되는 수고였다. 그것은 나라 일을 논하는 회의실과 공의를 세우는 법정에서 하는 수고였다. 그것은 그가 "자기의 지혜를 과시" 하는 과정에서 당하는 수고였는데(19절), 이것은, 우리가 천사들의 동류라고 자부케 하는 정신적 재능이, 우리가 짐승과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신체의 재능을 능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단지 자기들의 힘셈을 자랑하는 수고보다 훨씬 뛰어난 수고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사업을 수행해 나가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의중에 두는 것은 "스스로 지혜로운 자임을 나타내는 일"이며, 재간있는 자요, 분별력과 열심이 있는 자라는 평판을 얻는 일이다.

 

Ⅱ. 그러나 그는 이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이 일에 곧 싫증을 내게 된 것이다.

 

1. 그는 "자기의 모든 수고를 싫어하였는데," 이는 그가 이 일에서 자기가 기대하던 만족을 얻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그는 훌륭한 집과 정원, 그리고 좋은 급수시설을 소유한 지 얼마되지 않아, 그것들을 싫어하고 업신여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몹시 가지고 싶어하던 장난감을 갖게 되면 처음에는 좋아하나, 잠시 놀다가는 곧 싫증을 느껴 던져버리고 또 다른 장난감을 가지려고 떼를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것들에 대한 은혜로운 증오심, 즉 하나님과 종교보다 이 세상 사물들을 덜 사랑하도록 하라는 우리의 의무를(눅 14:26)표현하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 것에 대한 죄된 증오심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 것을 무조건 혐오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정해 주신 장소와 그 장소에서 하는 일을 지겹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가 그의 모든 수고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받는 실망감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증오의 표현인 것이다.

 

2. 그는 "자기의 모든 수고에 대하여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다"(20절). 그는 세상사의 허무성을 깊이 인식하려고 애썼다. 즉 그것은 자기가 이전에 세상 일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장담한 유리한 것과 만족이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마음은 피조 세계에서 굉장한 일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단념하기 싫어한다.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그러한 그들에게 어디를 가든 이 세상에는 우리가 기대하기 쉽고 소망을 걸기 쉬운 그런 일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 우리는 만족이란 풍부한 광맥을 찾아 이 땅을 파고 들어가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런 표적이나 징후조차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 탐사에서 언제나 실패만 하였으니 이제 우리도 우리 마음을 평안히 해주고 그 발견작업을 포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는 마침내 "삶 그 자체를 싫어하게" 까지(17절) 되었으니, 이는 삶이란 것이 그토록 많은 수고와 고난 그리고 끊임없는 실망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심히 넓은 마음과 아주 광활한 마음의 능력을 주셨기에, 그는 이 삶 속의 모든 사물이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과, 세상만사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하다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체험을 하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토록 귀중하고 선량한 자에게는 그처럼 축복이 되는 생명 그 자체가 사업에 얽매인 자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

 

Ⅲ. 그가 생명과 수고에 대하여 반론을 벌이게 된 이유를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이 그에게 싫증을 느끼게 하였다.

 

1. 그의 사업은 자신에게 너무나 큰 수고가 되었다. "그가 해 아래서 행한 일이 그에게는 괴로움이 되었다"(17절). 그 사업에 대한 생각과 염려, 그리고 빈틈없고 끊임없이 집중해야 하는 마음은 일에 꼭 필요했지만, 그에게는 부담과 피로를 안겨다 주었고, 그가 노령에 접어들면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것은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저주의 결과이다. 우리 사업은 "우리 손이 하는 일과 수고"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창 5:29)이며, 우리 작업의 수단이 되는 여러 기능의 약화(弱化)때문이고 "우리는 우리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빵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결선언 때문이다. 우리 수고는 "우리 마음에 애쓰는 것"이라고(22절) 불리운다.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애쓰는 것은 압력이 되므로,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업가는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다 불안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23절).

 

(1) 그는 주간에도 자기 즐거움을 박탈당한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낡은 근심"이기 때문이다. 그의 날들은 근심될 뿐만 아니라, 근심 그 자체이기도 하며, 많은 근심들과 다양한 근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노고나 수고는 온종일 비탄 투성이다. 사업가들은 자기들을 괴롭게 하며 그들에게 분노와 슬픔의 원인이 되는 일들을 자주 만난다. 초조해하기 쉬운 자들은 세상에서 자기들의 거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욱 빈번히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 세상은 많은 것을 가진 자들에게까지도 "눈물의 골짜기" 이다. "수고하는" 자들은 "무거운 짐을 졌다"고 표현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와서 쉼을 얻으라는 부름을 받는다(마 11:23).

 

(2) 그는 "밤에도" 그 휴식의 방해를 받는다. 낮의 분주한 일들에 녹초가 된 그는 휴식를 찾자는 희망에서 자리에 드나, 거기에서도 그의 기대는 무너지고 만다. 근심 걱정이 "그의 눈을 깨어 있도록 만들며" 설사 그가 잠이 든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깨어 있으니 "밤에도 아무런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악착같이 세상의 고역을 다 행하면서 하나님을 자기 안식으로 삼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아라. 그들은 밤낮으로 편안할 수 없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모두 헛된 일"이다(17절). 개별적으로 "이것은 헛된 것이며"(19, 23절) "헛된 일" 일 뿐만 아니라 "큰 해"이다(21절). 그것은 하나님께는 큰 모독이요 그들 자신에게는 큰 손해이기 때문에 "큰 해악"(害惡)이다. 이러한 세상의 재물을 추구하여 "아침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은 공연한 헛수고이니, 그것은 세상의 재물(goods)은 결코 우리의 최고선(good)으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그가 벌인 사업의 이득은 모두 타인에게 남겨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익에 대한 기대는 행동의 원천이며 산업에 박차를 가하는 촉진제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은 그 수고를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희망이 좌절된다면 수고하려는 기력도 맥이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자기가 이룩했던 모든 업적과 위대한 일들에 대하여 반론을 펴는데, 이는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어떤 영구적 이익도 가져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 그는 그 일들을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죽을 때 그것들을 가지고 갈 수 없고 나누어 가질 수도 없으며, 그것들에게로 돌아가지도 못하고(욥 7:10),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었다(눅 16:25). 그러나 그는 "내뒤에 올 자에게 모든 것을 남겨 주지않으면 안 되며, 사라져 버리는 자의 자리에 오는 다음 세대에게 모든 것을 물려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앞에도 많은 자들이 있었으며, 우리가 사는 집들도 그들이 지었던 집들이고 그들이 사다놓은 것, 그들이 수고해 놓은 것 안에 우리는 들어갔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우리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고 우리가 구입해 놓은 것이나 수고한 것의 열매를 즐기게 될 것이다. 상속자가 없어서 땅이 망실(亡失)당하는 일은 결코 없다. 은혜로운 영혼에게는 이 일이 하등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이 세상의 즐거움을 향유한 차례가 타인에게 돌아간다고 해서 불평해야 하는가? 오히려 우리가 가고난 뒤 우리 뒤에 오는 자들이 우리의 지혜와 부지런함 때문에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피조물 속에서 그 행복을 찾는 세상적인 마음은 자기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재물을 이런 불확실 속에 남겨 둔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여간 애가 타는 것이 아니다.

 

(2) 그가 남겨야 할 모든 것들은 그다지 수고하려 하지도 않았던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그로 인해 어떤 고생도 하지 않게 될 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는 "지혜와 지식과 재주로(혹은 공평) 수고"하여 재산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며 소비하는 자는 "그 일에서 수고하지도(21절) 않았으며"(21절), 더욱이 앞으로도 수고하지 않을 것이다. 벌은 날개에서 붕붕거리는 소리가 끊기지 않을 정도로 수고하여 꿀을 만든다. 그러나 이같은 부조리는 그를 시험해 보는 올무이다. 그것은 그가 신뢰하고 감수하여야 할 몫으로 "업으로" 그에게 남기어진 것이다. 그것을 업으로 잡지 못하고 놓치는 자는 불행하다. 반면에, 만일 재산이 이처럼 쉽사리 그에게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가 근면함과 동시에 경건하였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어리둥절해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이 사실이 다른 식으로 판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잘벌어 들인 것은 재물을 잘 사용하고 그것으로 선을 행한 사람에게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그는 누구에게 그것을 남겨 주어야 하는지를 모른다(상속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기 때문에). 아니면 그는 최소한 자기가 남겨 주는 자가 어떤 사람으로 판명될지 모른다.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받은 것을 더 많은 것으로 불어나게 할 현명한 자인지 아니면 받은 것도 모두 없애 버릴 우매한 자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모든 수고의 결과를 다 관리할 것이며 그 아비가 지혜롭게 행하였던 것을 어리석게도 파멸시켜 버릴 것이다. 아마 솔로몬은 르호보암이 꼭 그럴 것만 같아 이 글을 쓸 때 매우 감명깊게 썼을 것이다. 성 제롬(St. Jerome)은 이 구절에 대한 그의 주해에서 이것을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로움을 나타낸 책들이 누구의 수중으로 들어갈지 알지 못하였으며, 아마 우매한 자의 손에 들어가서 잘 기록된 것이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에 따라 그릇되게 사용되리라고 생각했었다고 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그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2절). "인간이 자기의 모든 수고에서 얻는 소득은 무엇이냐?"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혼자만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저 다른 세상에 가지고 갈 어떤 것을 그는 가지고 있는가?

 

Ⅳ. 그러므로 이 세상 재산에 대한 최선의 활용법은 그것을 즐겁게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위안을 얻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으로 그는 이 장을 끝맺는다(24 - 26절). 이런 세상의 물건들에게 진정한 행복은 발견할 수 없다. 그것들은 "헛된 것"이며 만약 그것에서 행복을 기대한다면 실망으로 인해 "심령의 애"만 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점에서 세상의 사물을 가장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고 자기가 관찰한 불편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추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위안조차 빼앗아가면서까지 과중한 수고를 해서는 안 되며, 우리 뒤에 올 자에게 부를 남겨 주기 위해 우리가 가진 즐거움의 향유를 상실해서도 안 된다. 그 즐거운 위안물을 우선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1. 여기에서 우리에게 권장하는 선이란 것은 무엇인가? 또 우리가 이 세상의 사업과 이익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고 추출해낼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과 이익은 어떤 것인가? 또 이 세상의 일에 잠재해 있는 "허무성과 성가심" 을 면하기 위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어디인가?

 

(1) 우리는 그 재물로써 우리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되며 재산을 늘리거나 증가시키는 방법에 골몰하기 보다 우리에게 위탁된 목적을 위하여 어떻게 그 재산을 잘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26절에 암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시기" 에 선한 "자들"만 이 생의 위안을 얻는다고 되어 있는데 그들은 즉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있는 의인으로 여기셨던" 노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참으로 선량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고 모든 일에 있어 그를 시인하도록 열성과 근면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갈데아 주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자기 앞에 있는 의로운 길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으로 하여금 선을 누리도록" 해야 하며 또(25절) "율법의 말씀을 연구하며 장차 올 큰 심판 날에 대해 염려함"으로써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

 

(2) 우리는 세상 것이 주는 안락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 영혼에게 행복이 되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세상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신체를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몸을 편안하게 지탱시키기 위해 이것들을 이용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영혼에 좋은 봉사를 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하는데에 영혼과 더불어 좋은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된다면, 그런 경우에는 세상 것들이 주는 안락도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지위와 신분에 따라 온건하고도 명랑하게 이 세상 것들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게 없다." 자기와 그 가족과 친구들이 먹고 마실 것을 이들에게서 취하고 그래서 자기의 감각을 즐겁게 하며, 그 "영혼"으로 하여금 "낙을 누리게," 즉 이 세상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즐기게 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다. 세상 것에서는 도저히 얻지 못할 낙을 추구하여 이렇게 누릴 수 있는 것조차 상실 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을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만드신 분이, 인생에게 사업을 포기하거나 손을 묶어 둔 채 편안히 앉아 있으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점을 포착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수고한 낙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이들을 사양하지 말고 이용해야 하며 우리의 세속적 사업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행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용해야 한다.

 

(3) 우리는 이들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 임을 볼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1] 우리가 즐기는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하는 능력이 만든 산물일 뿐만 아니라, 그의 풍성하신 섭리가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손에서 직접 그것들을 받고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주시는 그의 지혜를 보며 그것을 따를 때, 그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맛보고 좋아하며 감사할 "때에라야" 그것들은 우리에게 참으로 기분좋은 것이 된다.

 

[2] 그것들을 즐기는 마음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자기 섭리 가운데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을 우리가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고, 우리가 이 세상 웃음 속에 담긴 하나님 은총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양심의 평안도 주셨다. 만약 이 지혜와 양심의 평화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 것에서 어떤 낙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2. 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처세에 있어 이 점을 명심해야 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쳐다 보아야만 할까?

 

(1)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던 솔로몬 자신은 더 이상 목표삼을 게 없었고 더 나은 것을 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25절). "누가 이 일에 있어 나보다 승하랴? 이것은 내가 야망을 품었던 바로 그것이다. 나는 더 이상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가진 것과 비교하면 거의 가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들도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고 자기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그 낙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많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없이는 그의 뛰어난 지혜로도 이 심령의 낙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에서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 기도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2) 큰 부(富)도 그것을 소유하는 자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소유자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선량한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어" 그의 상으로 삼는 동시에, 이것을 즐겁게 누리게 하며, 또 자선심을 통해 남들에게도 전달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량한" 자들, 곧 그 마음이 착하고 정직하며 그 하나님을 공경하고 모든 인류에게 자애로운 관심을 표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지혜와 지식을 주실 것이며 장차 올 세상에는 의로움과 함께 희락을 주실 것"이다. 갈데아 주석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혹은, 그는 자연적이고 도덕적, 정치적, 신적인 것 등에 관련된 일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주실 것이니 그것은 그들에게 항구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는 그 재물에게서 위로받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재물을 오히려 그 악인에게 대한 형벌로 삼으신다. 왜냐하면 재물은 단지 그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죄인에게는 하나님이 노고를 주시사" 그를 그 자신이 우둔한 분별 속에서만 내버려 두셔서 그것을 "모으고 쌓게" 놔두신다. 그렇게 모아서 쌓아놓아 봐야 그 자신에게는 "두터운 진흙덩이"처럼 무거운 짐이 될 뿐만 아니라(합 2:6) "자기를 치는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자기 살을 먹는 것"이 될 것이다(약 5:3). 한편 하나님은 자신의 강력한 섭리로 그것을 "자기 앞에서 선량한" 자에게 주시도록 계획하신다. "죄인의 재산은 공정한 자를 위해 저축되어 있는 것"이며,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길 자를 위해 끌어모여진 것"이다.

 

첫째, "경건은 만족스러운 큰 소득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들만이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또 하나님 안에서 그 기쁨을 얻는다.

 

둘째, 불경건은 흔한 불만족과 충족을 모르는 탐욕으로 벌을 받으며, 이 같은 불평과 탐욕은 그 자체가 징벌이 되는 죄악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풍성한 것을 주시는 것은 그가 총애하시는 자녀들이 적령기에 다달아서 그것을 인수할 준비가 되면 그 악인들에게서 강제로 되돌려 받으시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가나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이 침입하도록 정해진 시기까지만 그 좋은 복지를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과 부합된다.

 

[3] 그럼에도 고통의 노래소리는 여전하다. "이 또한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선량한 사람에게 조차 그것은 헛된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죄인이 긁어모은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는 때에도 다른 무엇이 없으면 그것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죄인으로서는 자기가 저축해 온 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자들"이 향유하게 되는 것을 볼 때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쪽 길을 택하든 그 결론은 확고부동하다. "모든 것은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쾌락도, 지혜도, 수고도 헛됨(전도서 2장)

 

[1-1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道)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은 육신의 즐거움이 헛됨을 말한다. 그는 웃음을 미친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술을 마시며 각종 사업을 크게 벌렸다. 집들을 짓고 포도원, 동산, 과원을 만들고 각종 과목을 심고 못을 파고 소와 양떼를 많게 하고 은금과 보배를 쌓고 노래하는 자들과 첩들을 많이 두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모든 것들이 헛되고 무익함을 깨달았다.

 

 

[12-17절]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12절의 ‘망령됨’이라는 원어(홀렐로스)는 ‘미친 것’이라는 뜻으로(madness)(KJV, NASB, NIV) 전도서에만 나온다(1:17; 2:12; 7: 25; 9:3; 10:13). 솔로몬은 지혜가 우매함보다 나으나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며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며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이기 때문에 결국 다 헛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시적인 것, 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에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우리의 일생이 손 넓이만큼밖에 안되고 그림자 같다고 말한다(시 39:5-6). 바울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며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했다(고후 4:18).

 

 

[18-23절]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싫어하였나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도 헛되다. 본문에는 ‘수고’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온다. 모든 수고가 헛된 까닭은 그가 수고하여 이룬 모든 결과를 그의 뒤에 오는 사람이 누리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많이 수고하지만, 그 결과를 즐기는 시간은 너무 짧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의 마음으로 실망했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자기가 별로 쓰지 못하고 다음 사람에게 유업으로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밤에도 쉬지 못하는 사람의 수고는 수고한 당사자에게 헛되고 큰 해가 되는 일일 뿐이다.

 

 

[24-26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樂)(토브 בוֹט)[좋은 것,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솔로몬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말한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즐거움에 대해 반복해 말한다(3:13; 5:18; 8: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육신의 쾌락의 헛됨과 사람의 지혜과 지식의 헛됨과 세상의 모든 수고가 헛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하고,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이 세상의 일들에만 힘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29).

우리는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만 바라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면서 먹고 마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감사하게 누릴 수 있다.<김효성>


먹고 즐기는 것보다 더 나은 생은 없는가? (전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전 2:24)

위의 구절 때문에 전도서가 쾌락주의를 추천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그것은 쾌락주의의 철학이 먹고 마시고 결혼하라 왜냐하면 한번 온 인생은 이제 죽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쾌락주의를 정죄하고 있다(눅 12:19-20; 고전 10:7).
그러면 위의 구절이 과연 쾌락주의를 추천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구절은 쾌락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이 구절의 의미를 바로 파악한다면 그런 오해나 문제는 쉽게 풀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전도자는 생의 즐거움을 조언한다. 그러나 먹고 즐기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는 말도 엄격하게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생의 목적이 마치도 음식과 소유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사람이 노동과 노동의 결실에 관하여 인생을 조망해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그러므로 그는 높은 가치에 대한 귀중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에서 얻는 보상을 즐기기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로 생을 즐기고 생의 선한 것들을 사용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1).

여기서 먹고 마심과 그 즐거움은 선한 삶에 대한 상징이다(R. Smend). 그러나 생의 쾌락을 궁극적 선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선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대하심의 이유로서만 그렇다는 것이다(2). 따라서 하나님이 없고 내세가 없는 현생에서의 쾌락을 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쾌락주의와 여기 전도자가 말씀하고 있는 생의 즐거움은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도덕적 선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기능적인 행위 즉 생의 행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최선한 길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3). 그러므로 어리석은 부자가 되기를 추천하지 않고 방종이나 회의주의를 추천하지도 않는다. 다만 만족하기를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의 구절이 신약에도 있다(딤전 4:4; 6:6-8).

이 구절의 요점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신다. 따라서 참다운 기쁨과 만족 그리고 즐거운 삶을 살려면 그 모든 원천이 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26절에서 전도자는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죄인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되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발견한 것과 똑같은 생의 모든 면에서 기쁨을 발견할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4).

그러므로 이 구절은 쾌락주의를 권장하거나 세속적이 되라고 조언하지도 않는다. 또 쾌락이 생의 목적이라고도 말씀하지 않는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므로 얻는 소득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알아 감사함으로 누리라는 것이다.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손에서 온 것이니 즐기되 오는 사후의 삶의 빛에서 그것을 누리라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을 즐길 수 있으나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줄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한다(전 11:9).


1. Duane A. Garrett,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Nashville: Broadman,1993), p.296
2. Roland Murphy, Ecclesiastes(Dallas: Word, 1992), p.26
3. J. Stafford wright, Ecclesiastes, E. B. C. Vol.5.(Grand Rapids: Zondervan, 1991),p.116
4. Qalter C. Kaiser, Jr.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88), p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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