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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서

전도서 3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2. 28.

  전도서 3장

메튜헨리 주석

 

인간사의 가변성 (전도서 3:1-10)

이들 성귀가 나타내고자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변화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시간이 자아내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인간 생활의 여러 조건은 각각 무척 판이하며 또한 무차별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날(日)과 해(年)가 윤회하듯 끊임없이 그런 일을 지나치며 산다. "생의 바퀴"에서는(약 3:6) 하나의 수레바퀴 살대가 맨 꼭대기에 오는 때가 있는가 하면 가장 아래쪽으로 오는 때가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들고 나는 만조와 간조가 있으며 부단히 차고 기우는 만월과 신월이 있다. "이 세상의 유행"은 하나의 극단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변화" 해가며, 이제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2. 때와 철을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최고의 권력에 의하여 변경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으며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가오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지정돼 있는 것을 변경시키는 일은 우리 권한 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형통할 때 펀안해야 하면서도 왜 안심해서는 아니 되는지의 이유로써 등장한다. 즉 우리는 변화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으며,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제일 낮은 계곡이 최고의 산정(山頂)에 접합된다] 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편안해야 하는 이유도 된다. 그가 권면한 대로(2:24),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겸손히 의존하여 "우리가 수고한 낙을 즐기되 희망으로 한껏 고개를 쳐들지도 말며, 두려움으로 풀 죽지도 말고, 한결같이 평정된 마음으로 모든 사태를 맞아 들여야 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한 일반적 명제가 기록되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다"(1절).

1. 상호간에 극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형세가 순환함에 따라 각기 제 차례를 찾아 활동하게 될 것이다. 낮은 밤에게 제 자리를 양보하며, 다시 밤은 또 낮에게 제 자리를 내어 준다. 여름인가 하면 곧 겨울이 되고 겨울인가 하면 머지않아 여름이 될 것이다. 모든 목적은 그것을 이룰 때가 있다. 아무리 청명한 하늘에도 구름은 낄 것이니, ─Post nubila phoebus─ 즉 기쁨 뒤에는 슬픔이 따라오는 법이다. 극히 구름이 많은 하늘도 쾌정하게 될 것이니 즉 태양은 구름 뒤로부터 뛰쳐 나올 것이다.

 

2. 우리에게는 극히 우연한 것처럼 보이고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로 보이는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예견(豫見)에서 정확하게 결정된 일이며, 그 시간까지도 정확하게 정해져 있어서 한 순간도 앞당겨지거나 연기될 수 없다.

 

Ⅱ. 개개 사실의 귀납에 의한 그 명제의 증명과 해설이 있다. 그 사례들은 보름과 초하루 사이에서 항상 차고 기우는 달의 공전주기의 날수대로 그 수가 스물 여덟 개다.

이 다양한 변화들 중 일부는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이고 일부는 인간의 의지에 한층 더 의존하고 있지만, 모두가 다 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천하에는 모든 것이 이처럼 변전무상하나 천상에서는 모든 것이 불변하는 상태에 있으며, 이들 사물에 대한 계획도 불변하다.

 

1.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이 일들은 신의 계획에 의해 결정된다. 정한 시각에 우리가 태어났듯이 정한 때에 우리는 죽어야 한다(행 17:26). 본문에는 "날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나 살 때는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자들도 있다. 살 때는 너무나 짧아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즉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듯이 다시 살아날 때도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무덤 속에 누워있는 자들이 기억함을 입는 때이다(욥 14:13).

 

2.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에 심듯 하나님께서 민족을 "심을 때가 있고," 또 이를 위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도록 하시려고 그곳에 "심어져 있던" 일곱 민족을 "뽑아 내실 때"도 있다.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불의가 가득차서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 대해서도 역시 "뽑아버리고 멸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때가 있었다(렘 18:7, 9).

사람들에게도 일년 중 한 때, 저희 일생 중 한 때는 "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심었던 것"이 열매가 없고 쓸모가 없을 때에는 "그것을 뽑아 버릴 때"인 것이다.

 

3.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 널리 퍼져 모든 것을 황폐시키는 때는 "죽이는 때"이다. 그러나 그가 자비의 길로 돌아오시는 때는 "그가 찢으신 것을 치료하는 때요"(호 6:1, 2) 그가 "백성을 환란"케 하신 후에 그들을 위로하시는 때이다(시 90:15). 가혹한 방법을 사용하는 게 지배자의 지혜가 되는 때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한층 온건한 방침을 취하고 부식제가 아닌 완화제를 적용하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다.

 

4. "헐 때와 세울 때"가 있다. 가정이나 재산이나 나라를"헐 때"는 그것이 너무 성숙하여 멸망하는 때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돌아와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무너뜨린 것을 재건할 "때"를 찾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울 정한 시기"가 있었다(시 102:13, 16). 사람들이 가옥을 "헐 때"가 있고 장사를 그만 둘때가 있으며, 따라서 "세우는 일"에 분주한 자들은 "헐 때"가 있는 것을 예기(豫期)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하나님의 섭리가 "울고 슬퍼하도록" 요구하는 "때"가 있다. 인간의 지혜와 온손한 마음씨는 이 요구에 순응하여 일반적인 재난과 위험의 시기에 "울고 슬퍼"한다. 그러한 때에 "웃고 춤추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사 22:12, 13; 겔 21:10).

그러나 한편 하나님께서 명랑함을 명하시는 때가 있으니, 그 때는 "웃고 춤추는 때"이며 우리가 "마음의 기쁨과 마음으로 그를 섬기도록" 기대하시는 때이다.

애도와 통곡의 시기가 웃음과 춤의 시기보다 먼저 나와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인데, 이것은 우리가 처음에는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다음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6. "돌을 던져 버릴 때"와 "돌을 거둘 때"가 있다. 요새를 철거하고 헐어버림으로써 생긴 "돌을 던지는 때"는 하나님께서 국경에 평화를 주셔서 더 이상 그것들이 필요없는 때이다. 그러나 성채(城砦)를 쌓기 위하여"돌을 거둘 때"가 있다(5절). 실로암에 있던 망대처럼 오래된 탑이 무너지고(눅 13:4) 성전까지도 "돌 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당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국세를 떨치게 되어 탑들과 전승기념비가 세워질 때도 있는 것이다.

 

7. "안을 때가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다. 우리 친구가 진실함을 발견하는 때는 우리가 그 친구를 "안는 때"이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거나 진실하지 못할 때는 그를 꺼리게 되어 포옹을 삼가는 때이다. 그럴 때에는 그를 피하고 멀리하는 것이 사려깊은 행동이다.

이러한 포옹은 고린도 전서 7장 3 - 5절과 요엘서 2장 16절에 설명된 대로 흔히 부부간의 포옹에 적용된다.

 

8. "찾을 때와 잃을 때"가 있다. 기회가 미소짓는 때는 돈을 벌고 승진하고 값싼 흥정을 얻고 많은 이익을 보는 때이며 지혜있는 자가 "찾는 때"이다. 그가 세상에 나가 일하고 자기 가족이 불어갈 때나 그가 한창 때를 맞아 번영하며 사업을 영위하는 때는, 그가 분주할 때이며 햇볕이 비취는 동안 건초를 만들 때이고 기회를 활용해야 할 때이다. 자기 손에 재물이 있는 때는 지혜와 지식과 은혜를 "얻을 때"이다. 그러나 그는 나중 소모할 때가 올 줄 예견해야 할 것이니, 그 때는 자기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할 때이다. 아니, 쉽사리 획득할 수 있었던 것들이 쉽사리 흩어져 버리고 꽉 붙잡아 둘 수가 없는 때, 즉 "잃을 때"가 올 것이다.

 

9. "지킬 때"가 있으니 그 때는 우리가 이미 획득해 놓았던 것을 사용하는 때이며, 양심을 걸고 모험하는 일이 없어도 지킬 수 있는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도록 요구하는 때 곧 "버려야 할 때"가 올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고수하려고 한다면(마 10:37, 38)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리 양심을 그르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앙의 파선을 당하느니보다 가진 모든 것의 파선을 당하는 것이 차라리 나으므로 그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또는 요나가 탄 배의 선원들이 바다로 짐을 내던진 때와 같이, 우리 자신에게 대한 사랑이, "우리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것을 던져 버리도록 요구할 때가 올 것이다."

 

10. 큰 슬픔을 당하는 경우에 하듯이 의복을 "찢을 때"가 있으며, 그 슬픔이 끝났다는 표시로 다시 그것을 "기울 때"가 있다. 우리가 행하였던 것을 철회할 때가 있으며 우리가 취소하였던 것을 다시 행할 때도 있다. 성 제롬은 이것을 유대 교회의 파멸과 복음 교회의 형성으로 해석한다.

 

11. "침묵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는 "때"가 있고, 우리 지혜가 되고 우리 의무가 되는 때가 있다. 곧 그것은 악한 때요(암 5:13), 우리가 말하는 것이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이 되는 때요, 우리가 잘못 얘기할 위험 속에 있는 때(시 39:2)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교화를 위해 말해야 할 때도 있으니, 그 때는 침묵이 의로운 주장을 배신하게 되는 때이며, 입으로써 하는 고백이 구원을 이루게 되는 때이다. 말해야 할 때와 잠잠해야 할 때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분별 중 큰 몫을 차지한다.

 

12. "사랑할 때"가 있으며 우호를 나타내고 자유스럽고 명랑해야 할 때가 있으니 그 때는 즐거운 때이다. 그러나 "미워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으니, 그 때는 우리가 좋아하던 자들과 모든 친밀감을 끊어버릴 명분을 보게 되는 때요, 사랑의 감정이 용납하기 싫어하는 혐의를 둘 만한 이유를 발견함으로써 사랑을 보류해야 하는 때이다.

 

13.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칼을 빼어 들고 삼키리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전쟁의 때"가 있으며, 사람들이 정의와 자기 권리의 유지를 위해 칼을 빼어드는 "전쟁의 때"가 있으며, 열방들이 전쟁을 즐겨 전쟁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의 때"를 희망할 수도 있다. 그것은 여호와의 칼이 칼집에 들어가는 때이며, 그가 "전쟁을 휴전"시키는 때이며(시 46:9), 종전이 되고 사방 팔방에서 평화를 원하는 추세가 보이는 때이다. 전쟁은 언제나 계속되지는 않으며, 이런 측면에서 어떤 평화도 영원한 평화라고 불리우지도 않는다.

이처럼 이 모든 변화에 있어서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다른 한 가지와 대조시키는데, 이는 우리가 "마치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기뻐하고, 마치 울지 않는 것처럼 울도록 하게 하려함이다."

 

Ⅲ. 이러한 관찰에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있다.

 

1. 만일 우리의 현재 상태가 그런 영고 성쇠의 변천에 복종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에서 우리의 몫을 기대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좋다는 것들도 아무런 확실성이 없고 계속성이 없기 때문이다(9절). "일하는 자가 무슨 이익을 가지느냐?" 완성되리라고 생각하고 심으며 세웠던 것이 그토록 빨리 또 확실하게 뽑히고 헐린다면 그가 심고 세우는 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모든 수고와 염려는 사물 그 자체의 가변성이나 그 사물에 대한 신의 계획의 불가변성을 변경시킬 수 없다.

 

2.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시험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로 "우리가 수고하는 일에는" 아무 이익이 없다. 물건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때에라도 우리에게 거의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한 섭리의 처분을 정당하게 사용한다면 그 일에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10절). "하나님이 인생들에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것은 그 일을통해 우리는 행복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단련을 받고" 다양한 사건의 단련을 통해 여러 가지 은혜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변화에 의한 시험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심을 소유하게 하려는 것이며, 그로 훈련을 받고 "비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빌 4:12)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에 유의하라.

 

(1) 인간의 자손들 사이에서는 아주 많은 수고와 고생을 볼 수 있다. 이 세계를 신고(辛苦)와 슬픔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2) 이 수고와 고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활당해 주신 것이다. 그는 이 세계가 우리의 안식처가 되도록 의도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편안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으셨다.

 

(3) 많은 자들에게는 이 수고와 고난이 선물이 된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주듯, 하나님은 인간에게 유익하게 하시려고 이런 것을 주신다. 이 노고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영원한 안식을 소원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우리가 계속 활동하고 언제나 해야할 일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빈둥거리며 놀라고 보내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변동은 우리를 어떤 새로운 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우리는 변화 그 자체보다도 이 새로운 일에 더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신의 계획의 불변성 (전도서 3:11-15)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변화들이 있는지 살펴보았고, 타인들보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세계를 발견하겠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여기서 솔로몬은 그 모든 변화들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 모든 피조물이 우리에게 나타난 현재 그대로의 모습을 만드신 분은 그분 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눈길을 항상 그분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Ⅰ. 우리는 현재 존재하는 것을 최고도로 선용해야 하며, 현재로서는 그것을 잘 믿고 그것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그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11절).

그러므로 시간의 지속하는 한 우리는 그것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즐거워해야만 한다.

 

1. 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대로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신 대로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2. 우리에게 가장 기분 나쁘게 보이는 것도 제때가 되면 아주 어울리는 것이 된다. 더위가 여름에 어울리는 것처럼 추위는 겨울에 어울린다. 제 차례가 되어 돌아오는 밤은 캄캄한 아름다움이고, 제 차례가 돌아온 낮은 밝은 아름다움이다.

 

3. 신의 섭리와 그 모든 경륜에는 놀라운 조화가 있어서, 섭리 안에서 되어지는 사건들은 그 시기와 함께 관련성이나 경향성을 고려해 보면 매우 아름답게 나타날 것이며, 하나님께는 영광이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섭리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금은 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신비가 완성되는 때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모든 것이 가장 적당한 때에 행하여진 것으로 보일 것이요. 그것은 영원한 경이로움이 될 것이다(신 32:4; 겔 1:18).

 

Ⅱ. 우리는 "하나님이 태초로부터 종말까지 만드시는 일을 알아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지금 얽히고 설켜서 뒤죽박죽된 것 같이 보여지는 것에 대해 완전한 발견을 할 수 있기 위하여는 인내로써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간 전까지는 아무 판단도 내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창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섭리에 있어서도 만사는 잘 행해진다. 그래서 종말이 올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림이 그려지고 있고, 집이 세워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가가 그의 마지막 손질을 가하고 완성시키는 화필을 대고 난 뒤에라야 그 전체가 매우 훌륭하게 나타나 보이는 법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에 대해서 보는 것은 단지 그 중간 부분이어서 그 처음부터 보지도 못했으려니와(만약 보았다면 그 계획이 신의 의향 속에 얼마나 훌륭히 담기어져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었다) 그 행동의 절정을 이루는 마지막 또한 보지 못할 것이다(만약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 작품이 얼마나 영화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휘장이 걷힐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하나님의 진행과정을 나무라거나 판결을 내리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은밀한 일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저희 마음 속에 두셨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상이하게 이해되고 있다.

 

1. 혹자는 이 말씀을 우리가 왜 하나님의 업적에 대해 보다 많이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로 삼는다. 이에 대한 펨블(Pemble)씨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롭고 공평하고 아름다운 사물의 배열에 대한 증언을 하시지 않으신 채 내버려 두신게 아니라, "세계"라는 책 속에서 관찰되도록 그것을 나타내셨고 이것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두셨다. 즉 인간사의 진행과 함께 자연의 역사를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염원과 능력을 인간에게 주셔서, 만일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 열중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대상 가운데에서 놀랄 만한 질서와 편리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그처럼 모르는 것일까에 대한 이유로 내세운다. 이에 대해 레이놀즈(Reynolds) 주교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우리는 세상 일에 너무나 많이 마음을 두며, 세속된 생각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세상 일들에 대한 우리 수고에 너무 매여 있어서 그 세상 일속에 뻗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정신도 없다." 이 세상은 인간의 마음을 소유해 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가리우는 편견까지도 형성하였다.

 

Ⅲ.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얻는 우리 분깃을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묵묵히 따라야 하며 그 뜻에 순응해야 한다. 이 일들 가운데는 확실하고도 지속적인 "선이 없다." 그러나 그 일들에는 어떤 좋은 것이 있는지 여기에 나타나 있다(12, 13). 우리는 그들을 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타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들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우리 가족에게, 우리 이웃에게 가난한 자와 대중에게 그리고 대중과 종교의 이익을 위해 선을 행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몇 가지 유용한 봉사를 하는 일을 제외한다면 무엇때문에 우리는 우리 존재와 기능과 지위를 가지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들만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것은 틀린 생각이며 "선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본업이다. 가장 참된 즐거움은 선을 행하는 데에 있으며, 그렇게 행한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저축이며 또한 가장 훌륭히 인정될 것이다.

"선을 행하는 시간"은 바로 짧고도 불확실한 "이 생"에서이다.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시간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을 행하는 장소는 바로 "이 생에서"이다. "이 생에서" 우리는 저 다른 생을 위한 시험과 견습의 상태로 존재한다. 모든 사람의 생은 자기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어 줄 것을 행하는 기회인 것이다.

 

2. 우리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편안히 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선물인 우리 수고의 낙을 즐기자." 그래서 우리가 수고한 낙 안에서 하나님을 즐기며, 그의 사랑을 맛보고 그에게 감사를 돌리며, 그를 우리 기쁨의 중심으로 삼자. "먹고 마시는 것"도 그의 영광이 되도록 하며 "모든 것이 풍부한 가운데 마음의 기쁨으로 그를 섬기자." 만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토록 불확실한 것이라면, 자기 뒤에 올 자를 위해 모든 것을 저축하려고 현재에 있어서 그것을 아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즐겁게 살고 유용하게 살며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도록"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은혜와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은 좋은 선물로서 그의 섭리의 무한한 은혜가 주시는 선물 중 으뜸가는 좋은 선물인 것이다.

 

 

Ⅳ. 우리는 신의 섭리가 개인적 관심사나 공공의 관심사에 대해 내리시는 모든 처분을 전적으로 흡족히 여겨야 하며 그 점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통틀어 우리에게 지정된 일을 수행하시며, 그의 뜻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시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1. 그 계획은 변경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그것에 복종하여 행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이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하나님께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고 하는 자는 누구나가 이것을 안다)(14절). "그는 단 한 가지 마음이신데 누가 그를 돌일킬 수 있는가?" 그의 방침은 꺾이는 법이 없고 새 계획을 더하게 되지도 아니하며, 그가 의도하신 일은 시행될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것을 좌절시키거나 취소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되어지게 하소서"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우리 계획과 이해(利害)에 어긋나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은 그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2. 그 계획은 변경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 안에 잘못이 없으며 수정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일목요연하게 그 광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완전한 것일 것이다. "그것에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는 그 안에 아무런 결함이 없기 때문이며, 또 "그것으로부터 털어낼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니" 이는 그 안에 불필요하거나 남아 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일도 그 어느것 하나라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우리가 더하거나 뺀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시 4:2). 따라서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게로 끌어올리는 것은 우리의 이득인 동시 의무가 된다.

 

Ⅴ. 우리는 신의 모든 섭리에 나타난 그의 목적에 응답할 수 있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를 경건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할 모든 일을 행하시는데," 이것은 인간들 위에는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과 그들의 모든 길은 그의 처분 아래 있고, 시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모든 사건도 그의 수중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항상 하나님께로 그 눈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를 경배하고 찬양하며, 저희 모든 길에서 그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인간들이 만사에서 그를 기쁘게 하기에 세심한 배려를 하게 되고 어떤 일로든 그를 화나시게 하는 것을 두렵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기 처분을 변경시키시지만, 그의 의향에는 변화가 없으셔서 우리를 혼란시키지 않으신다. 더구나 그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실 리는 없으며, 오히려 자기에게 대한 우리의 의무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이 세상의 통치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종교를 고무시키고 진전시키는 일이다.

 

Ⅵ.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고 느끼는 변화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범접(犯接)할 수 없는 일관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가 뜨고 지며 달은 차고 기울지만 다 그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며, 그 운행은 "하늘의 법도"를 따라서 태초로부터 동일한 방법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이다(15절). "이미 있어 왔던 것이 지금도 있다." 하나님이 이 방법을 최근에 와서 사용하기 시작하신 것은 아니다. 사물들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한 것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항상 그러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장차 있을 것도 이미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히 세상은 지금만치 나쁘진 않았을 거야" 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우리가 겪는 실망만큼 허무한 것을 경험한 자는 여태껏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거나, "시대는 결코 고쳐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지각없는 말이 된다. 시간은 우리를 개선시켜 줄 수 있으며, 슬퍼하는 시간이 지나면 기뻐할 시간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공통된 성격과 공통된 운명에 빠지기 쉽다. 세계는 옛날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기 쉽다는 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요구하신다." 즉 하나님은 자기가 이전에 행하신 것을 반복하시며, 그가 지금까지 선량한 사람들을 다루어 오던 것과 꼭같이 우리를 대하신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땅을 버리며 바위를 제 자리에서 옮겨갈 것인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며, 그로 인하여 어떤 특별한 유혹이 우리를 사로잡은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은 "단지 사람들에게 마찬가지일" 뿐이다.

우리는 형통한 중에 있다고 해서 안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지나간 고통을 다시 부르실 수 있으시며, 옛 고생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우리의 환락을 빼앗고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시 30:7). 그러나 역경 속에 있다고 하여 낙담하지도 말 것이니 하나님은 욥에게 행하신 것 같이 과거의 위안도 다시 대령시킬 수가 있으신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 행동과 환경변화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의 태도에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하여서도 우리를 문책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로운 환경 속으로 들어갈 때는, 번영하였든지 고생을 당하였든지간에 우리의 이전 상황 속에서 저지른 죄에 대해서도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한다.

 


인간성의 한계 (전도서 3:16-22)

솔로몬은 여전히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경외를 갖지 않는다면 헛된 것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종교가 없어진다면 인간사이에서 귀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며, 지혜로운 자가 이 세상에서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 귀절에서 그는 권력과 (인간이 야심을 품고 얻으려는 것 중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생명 그 자체도 (인간이 좋아하고 시기하는 것 중 이보다 더 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Ⅰ. 강력한 힘을 가진 자의 허무가 있다. 최고 신분과 최대의 토지를 가진 자와 권위에 대하여 뭇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왕좌에 앉은자의 허무가 여기에 있으며, 지혜와 정의에게 호소하는 자리 곧 재판석 위에 앉은 자의 허무가 있다. 만약 그가 종교적 율법의 다스림을 받는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신들은 신들입니다"라는 말을 듣는 자들 중에 속하는 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다면 그것도 "헛된"것이다.

 

1. 경외심을 상실한 재판관은 올바로 재판하지 못할 것이며, 자기 권력을 잘 사용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것을 남용하고 오용하게 될 것이다. 그 권력으로 선을 행하기는커녕 해를 끼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헛된 것일 뿐만 아니라 거짓이기도 하며, 자기 자신에게 대한 기만일 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16절). 솔로몬은 이전 시대에 대한 기록을 읽고 딴 나라에 대한 풍문을 들음으로써, 또 이스라엘 땅에서도 있었던 몇몇 부패한 재판관들의 사례를 통하여 선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그임에도 불구하고, "재판하는 곳에는 악"이 있음을 알았다. 해위에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불의를 자행하고 정의를 왜곡시키신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하다. 그러나 "해 아래서"는 억압당하는 무죄인에게 피난처가 되어야 마땅한 곳이 감옥으로 되는 수가 종종 있다. "존귀한 데 있으면서도" 무엇을 해야 마땅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극히 게걸스레 먹는 맹수과 같이 "멸망하는 짐승처럼 된다"(시 49:20). 재판정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악이 나왔지만" 재판이 겉치례로 행해지고 의로움이 기대되던 곳에도 "불의는 있었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정의를 위해 피신해 들어갔던 법정에서 최대의 악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헛된 일"이며 "괴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1) 백성들에게는 그런 자들을 재판관으로 삼느니 차라리 재판관이 없는 게 나을 뻔 했기 때문이다.

 

(2) 재판관들로서는 권력을 가지고 그런 나쁜 목적으로 사용하느니 보다 차라리 권력을 갖지 않는게 나을 뻔하였다.

2. 재판관은 올바로 판결하지 못한 데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솔로몬이 인간들 사이에서 얼마나 비뚤어진 재판이 자행되는지 보았을 때 그는 대심판관되신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의 심판 날을 기대하였다(17절). "나는 내 심중에 이르기를 이 불의한 재판은 양편이 받아 들여야 하는 것처럼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재판에 대한 검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다. 비록 현재는 의인의 주장이 묵살당하지만 그가 의인을 위해 재판하고 변호해 주실 것이며, 악인에게는 심판을 내려 그들이 규정한 모든 불의한 법령과 괴롭힘을 의도하실 것이다(사 10:1)."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교만하고 잔인한 압제자의 종말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형벌도 볼 수 있다(시 92:7). 압제받는 자에게는 그들의 주장이 이와 같이 재고된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내로 기다려야 할 것이니 "또 다른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고난의 날이 오래 지속되긴 하나 해 아래서 행해진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을 "심사할 때" 즉 정해진 때가 가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날을 누리고 있으나 하나님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시 37:13). 비록 우리가 아직까지는 여기서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호소를 다시 듣고 불평을 시정하며 불공평한 법령을 번복시킬 "때가 있다"(욥 24:1).

 

Ⅱ. 죽어야 할 숙명을 지닌 인간의 허무함이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고 땅 위에서 존재하는 "인생들의 신분에 대하여"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게 되며, 종교와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갖지 못한다면 인간의 이성도 인간을 짐승보다 낮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1. 그가 인간의 지위에 대한 이 설명에서 노리는 목적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이 명예스럽게 되시고 정당하고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기 위해서다. 즉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명백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난외주는 그렇게 해독한다)이다.

또한 만약 인간들이 허무와 괴로움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불안한 생활을 영위하더라도 저들로 하여금 자기 탓으로 돌리며 하나님께 비난을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들은 그의 결백을 믿어야 하며, 그가 이 세상을 인간의 감옥으로 지으셨고 인간의 삶을 자기의 고행으로 삼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명예와 위안이라는 양면에서 인간을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창조하셨다. 만약 인간이 천하고 비참하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과실 때문이다. "혹은 하나님께서(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밝혀내시도록 하기 위하여 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스스로 발견케 하셔서, 자신이 인간의 성질에 대한 "신속하고도 강력한" 심판관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지식과 심판에 맡겨져 있는지는 깨달을 수 있다.

(2) 인간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되고 비천하게 되며 굴욕을 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즉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짐승에 불과함을 보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설명을 하고 있다.

교만한 자들에게 그들이 인간에 불과함을(시 9:20) 납득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악인들에게 "그들이 짐승"이며, 종교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총명을 갖지 못한 말이나 노새"처럼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일은 한층 더 어렵다. 교만한 압제자들은 "우는 사자와 어슬렁거리는 곰"과 같은 짐승들이다. 자기 몸만 생각하고 자기 영혼은 유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금수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존재로 만들고, 따라서 짐승과 같은 죽음을 원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것이다.

2. 그가 이 설명을 검증하는 태도를 살펴보자.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속물 근성이 있고, 육욕적인 그리고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인간은 짐승보다 우월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인데, 이것은 인간이 마음을 두고 신뢰하며 행복을 기대하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19절).

혹자는 이것을 무신론자의 말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의 불법을 정당화시키고(16절), 장차 올 심판에 대한 논란을 회피하여(17절), 이 삶 뒤에 또 다른 삶은 없으므로 한 번 죽으면 그로서 끝장나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을 동안에는 자기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게 좋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솔로몬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가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어서 시편 49편 14절에 "저희가 양같이 음부에 두어진다"고 한 그 아버지의 말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그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사람과 짐승이 단지 외적인 관점으로는 (레이놀즈 감독이 설명하듯)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세상의 부귀와 공명도 헛된다는 것이다.

 

(1) 인간과 짐승에 대한 일은 무척 흡사한 것같이 보여진다(19절). "인간의 자손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짐승들에게 임하는"일과 다를 바 없다.

인체에 관한 그 많은 지식은 동물의 몸을 해부함으로써 얻어지고 있다.

홍수가 옛 세계를 휩쓸었을 때, 짐승들은 인류와 더불어 멸망당하였다. 전장에서는 군마와 사람이 같은 무기로 살륙을 당한다.

 

(2) 지각있는 안목으로 보면 이 양자의 종말도 역시 흡사하게 보인다. "그들은 다 동일한 호흡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공기를 마신다. 그래서 "코로 생물의 지식을 호흡하는 것"이라는 말은(창 7:22) 이 양자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는다." 그들의 호흡에는 눈이 보이는 차이가 없으며, 죽음은 짐승과 사람에게 극히 동일한 변화를 일으킨다.

 

[1] 인간과 짐승의 신체에 일어나는 변화는 살아남은 자들이 표하는 경의(敬意)의 차이를 제외하면 똑 같다. 사람이 나귀와 함께 매장된다고 한다면(렘 22:19) "짐승보다 우월한" 점이 무엇인가? 모세 율법에 의하면 사람의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불결한 짐승이나 새의 사체를 만지는 것보다 의식적(儀式的) 오염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여기에서 "모든 것이 다 한 곳으로 간다"고 관찰하고 있다. 인간과 짐승의 시체는 다 같이 부패한다. "모든 것은" 원래 "티끌에서 나왔"으니 이는 우리가 보건데 썩으면 "모든 것이 다시 티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이 죽어서 극히 짧은 시간 내에 흙으로 환원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짐승과 한 곳에 묻혀야 하고, 그 짐승들의 티끌과 섞어야 한다면, 우리 몸이나 우리의 몸이 가지고 있는 재주를 뻐길 만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2] 그들이 영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차이다(21절). 인간이 죽으면 그 "영"이 올라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의 영은 그 영을 지으신 영들의 하나님께로 "올라가" 서 그 영들의 세계에 연합한다. 즉 그 영은 신체와 함께 죽지 않고, "음부의 권세로부터 구속(救贖)된다"(시 49:15). 그것은 "위로 올라가서" 심판을 받으며 하나의 불변의 상태로 결정된다.

 

"짐승의 영이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 같다. 짐승의 영은 몸과 함께 죽는다. 즉 몸이 죽으면 그 영도 멸망하고 없어진다. 짐승의 영혼은 훅 불어서 끈 촛불처럼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영혼은 어두운 초롱에서 꺼낸 촛불과 같아서 촛불이 없는 초롱은 실로 쓸모없는 빈 껍질로 남게 되고 촛불 그 자체는 더욱 밝게 타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큰 차이가 인간과 짐승 사이에는 있다. 또 이것은 왜 인간들이 "자기 애착을 위에 있는 일들에 두어서" 그곳으로 영혼을 끌어 올려야 하고, 자기들의 영혼이 짐승의 영혼과 같이 이 땅에 집착하도록 허용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 차이를 "누가 아는가?" 우리의 신체적 눈으로써는 우리의 영혼이 올라가는 것과 짐승의 영혼이 내려가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육욕적 감각주의자들처럼 감각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저희 눈에 보이는 대로 걸어가고," 자기 자신의 판단 법칙에 의해 다른 어떤 발견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짐승보다 뛰어난 게 없다."

 

"누가 알랴?" 즉 누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하는가?(사 53:1) 그러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더 잘 살핀다면 이 세상은 모든 점에 있어서 한층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처럼, 혹은 마치 자기들이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짐승들과 같이 죽으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짐승처럼 살아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으며 그런 자에게 있어서는 이성의 존귀한 여러 기능들이 완전히 소실되고 없어지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3. 이상의 것으로부터 이끌어 낸 추론은(22절)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일들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며 부귀와 공명에서도 이보다 나은 것을 얻어 낼 수는 없다. 즉 자기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지켜야 한다. 즉

 

(1) 맑은 양심을 지니고 결코 "불의를 의로움의 자리"에 들여놓지 말라.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일을 분명히 밝히고" 그 일 가운데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입증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는 자기 혼자만의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갈 6:4). 인간이 기뻐할 수 있는 것외에는 어떤 것이든 얻지도 지니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고후 1장 12절을 참조하라.

 

(2) 명랑한 삶을 누려라.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가 노동한 일들을 번창하도록 해 주셨다면, 우리는 그 사업을 기쁘게 여기고 그 일이 주는 안락을 누려야 하며 그것을 무거운 짐처럼 여기거나 그 기쁨을 타인에게 넘겨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분복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우리 영혼의 몫이 아니고(이 생에서 자기 몫을 갖는 자들은 비참하다. 시 17:14 . 그리고 이 삶속에서 그 몫을 선택하고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자는 바보이다. 눅 12:19), 우리 몸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기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얻는 우리의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얻어질 만한 것을 취하는 것이고 그 취한 것을 가장 잘 선용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의 이유는 "무엇이 우리 뒤에 올 것인지," 어떤 자가 우리의 소유물을 차지하며, 또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 것인지를 아무도 우리에게 보여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고 나면 아마 우리는 우리 뒤에 일어나는 일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저 세상과 이 세상 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통신수단도 없다(욥 14:21). 저 다른 세계에 있는 자들은 전적으로 그 세계에 몰두하여 이 세계에서 되어지는 것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 가족이나 일반 대중이 "우리 뒤에 어찌될 지" 예견할 수 없다. "우리 뒤에 올 시대와 계절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염려를 억제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동기가 된다. 죽음은 이 생에 대한 최후의 작별이므로 우리의 앞에 있는 또 다른 삶에도 눈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모든 일이 때가 있음(전도서 3장)

 

1-13절, 시간과 영원

[1-8절] 천하에 범사가 기한[정한 때]이 있고 모든 목적[일]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포기할]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1절의 ‘기한’이라는 원어(제만)는 ‘정한 때’(BDB, NASB)라는 뜻이고, ‘목적’이라는 원어(케페츠)는 ‘기쁨, 목적, 일’(BDB)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에는 정한 때가 있고 하늘 아래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사람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출생하고 자기가 원치 않아도 죽음을 맞이한다. 씨를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사람을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병이나 사고로 갑자기 죽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되기도 한다. 집을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사람이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사람이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돌이 필요치 않고 오히려 장애가 되어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모아서 집을 짓거나 담을 세울 때가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안을 때가 있고 안아서는 안 될 때가 있다. 어떤 귀한 물건은 끝까지 찾을 때가 있고 어떤 것은 조금 찾다가 포기할 때가 있다. 어떤 것은 쓸모가 있어서 지킬 때가 있고 어떤 것은 쓸모가 없어 버릴 때가 있다. 어떤 천은 찢어버릴 때가 있고 어떤 천은 찢어진 부분을 꿰맬 때가 있다. 어떤 일에는 대의를 위해 잠잠할 때가 있고 어떤 일에는 사실을 증거하고 변명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큰 죄인이라도 사랑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가족이라도 미워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는 이웃 나라와 전쟁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경우는 화해해야 할 때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와 경우가 있다. 다니엘 11:27, 29, 35, “작정된 기한”(3번). 사람들의 개인의 삶도 그러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그러하다. 마가복음 1:15,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9-11절]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일하는 자는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는가? 사람의 일하는 수고는 물질적 유여함이라는 유익이 있지만, 결국 늙고 죽을 것이므로 영속적 가치와 유익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수고로운 삶을 사람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그가 창조하신 하늘과 땅, 산과 들과 바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따라 매우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 지나가는 세상, 늙고 쇠하고 죽고 마는 시간의 삶 속에서 장수(長壽)를 복으로 주셨고 또 영생을 사모하게 하셨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하시는 일들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 사람은 세상의 창조의 때나 세상의 종말의 때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출생의 때와 자기 자신의 죽음의 때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또 우리의 삶에서 많은 일들을 행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의 시작과 끝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장 지혜롭고 선하신 뜻대로 또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모든 일들을 행하실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빨리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의 참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원하신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 개인과 세계의 모든 근원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님 안에와 그의 말씀 안에 있다.

 

[12-13절]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본문은 수고로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가지 선물에 대해 말한다. 첫째는 기쁨과 즐거움이고, 둘째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수고로운 삶 속에서도 기뻐하고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복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은 물론 첫째로 영적인 즐거움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안과 즐거움에 있다(롬 14:17).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빌립보서의 주요 교훈은 기뻐하라는 것이다. 성도는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항상 기뻐하는 생활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 그러나 이 즐거움은 주 안에서 누리는 육신적 즐거움도 포함한다. 전도서는 이 사실을 여러 번 증거했다.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3:22,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8:15,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기독교는 쾌락주의도 아니지만 금욕주의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을 감사히 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수 있다. 바울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할 것이나 그것은 미혹케 하는 귀신의 가르침이며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다(딤전 4:1-5).

또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복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도록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며(엡 2:10), 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딛 2:14).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구주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다. 이것은 창조의 본래의 모습이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야 한다.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의 참 의미와 가치는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고 그의 말씀인 성경 배우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알자. 또 죄로 인해 참 지식을 잃어버렸던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을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과 현세의 복들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힘써 선을 행하자.

 

 

14-22절, 인생은 죽는 존재임

[14절]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세상의 허무함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그의 행하시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 곧 그가 창조하신 세상과 그 운행이 영원하고 그가 섭리하시는 일들도 그러하다. 욥기 23:13-15,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시편 33:11, “여호와의 도모[뜻]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생각]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사야 51: 6,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하시는 일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그는 거기에 무엇을 더할 지혜와 힘도, 자격도 없고 뺄 힘도, 자격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시요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는 전능자시요 인간은 보잘것없는 풀과 같은 존재이며,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순간, 그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존재와 그의 전지, 전능하신 섭리 앞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15절]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 세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은 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해 아래는 참으로 새것이 없다(전 1:9).

 

[16절]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세상에서 재판하는 법정은 법이 바르게 집행되어야 하며 공의가 행해져야 하는 곳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법에 맞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사회법에도 맞고 또 이성과 사리와 양심에도 맞고 거짓되지 않고 편벽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법정에도 불의와 악이 있다. 이것이 옛날부터의 현실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든 욕심, 이기심, 물질욕, 명예욕, 거짓된 본성, 악한 본성, 시기심, 미움, 남을 해치려는 마음 등의 이유로 법정에서까지 불의와 악을 행하는 것이다.

 

[17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도다.

본문은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말한다. 모든 일이 때가 있고,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8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정에 악이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의 필요성을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셔서 그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뜻이 있다고 말한다. 법정에서의 악과 불의, 억울함과 학대당함을 통해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도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며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19-21절]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사람이 짐승보다 낫지 않다는 깨달음은 그 둘이 동일하게 호흡하다가 결국 동일한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의 몸은 짐승의 몸과 똑같이 흙으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 사람도, 짐승도 다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창 2:7, 19; 시 104:29). 물론 인간의 혼(루아크)[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루아크)[호흡]은 땅으로 내려간다. 사람의 영혼은 짐승과 달리 불멸적이며(마 10:28) 하나님께 나아가 심판을 받아 영생이나 영벌을 받지만, 짐승의 호흡은 불멸적이지 않고 죽으면 없어진다.

 

[22절]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身後事)[죽은 후의 일]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자기 일’이란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다양한 직업과 책임과 취미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일들을 행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들과 교회에 주신 직분들과 은사들은 다양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권면하고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여러 은사들을 주셨다(롬 12:6-8).

 

모든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즐거워하며 행하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이다. 전도서 2:24는 사람이 수고하는 중에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복되다고 말했고, 3:12-13도 사람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주부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안일을 해야 한다.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히 손으로 집안일을 하는 자이다(잠 31:12, 13, 15, 27). 베드로는 장로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교인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권면하였고(벧전 5:2-3), 바울은 젊은 여자들이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일을 하라고 교훈하였다(딛 2:5). 또 바울은 성도들이 즐거움으로 헌금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교훈하였고(고후 8:1-3; 9:2), 또 종들이 단 마음으로 육신의 주인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엡 6:5-8; 딛 2:9-10).

 

사람이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즐거워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며(2:24) ‘하나님의 선물’(3:13)이다. 그가 죽은 후에 될 일을 보게 하려고 그를 다시 살려 데려올 자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 복인 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 속에서 항상 즐거워하며 일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를 의지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자. 이 세상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꽃과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세세토록 있다(벧전 1:24-25). 하나님 안에만 영원한 삶이 있다.

의를 행해야 하는 법정에도 불의가 있는 것을 볼 때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임이 분명하다. 또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다 죽으며, 이 점에 있어서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소망해야 한다.

사람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그것은 그의 분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무한 이 세상에서 무슨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전도서 3:1-11

 


1963년 11월 23일 금요일 낮 12시 30분,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시 한 복판에서 미국 대통령이 탄 오픈카를 향해 3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인기와 존경을 누리던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을 당한 것입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한 대통령의 호주머니에는 그 날 달라스에서 연설하기로 되어 있던 연설문이 있었습니다. 연설문 마지막에 “범사에는 때가 있다”는 전도서의 말씀을 강조하며, 지금은 미국이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파수꾼의 사명을 위해 국력신장을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어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다”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 연설문은 발표되지 못한 연설문이 되었고, 조국의 파수꾼이 되겠다던 그의 꿈도 끝나고 말았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의 “영원을 준비하라”는 설교 말씀을 듣습니다.

 

기도회 후에 그는 빌리 목사님에게 잠시 백악관에 가서 오늘 설교 중에 특히 “영원”에 대하여 궁금하다며, 좀 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고 요청합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감기가 심해 대통령께 감기를 옮기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다음에 기회를 주시면, 바로 달려가겠노라고 사양을 했습니다.

그 날 뉴스를 통해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의 접한 빌리 그래함 목사는 순간적으로 한 달 전에 백악관에 가서 영원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할 수 없느냐고 간청하던 대통령의 애절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그날 감기를 구실로 케네디 대통령과 “영원”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복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것을 일생 최대의 가장 큰 후회로 생각한다고, 그의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11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도 그리고 소박한 서민들에게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동일하게 주신 선물이 있는데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피조물로서 제한과 제약도 많은 연약한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셨을까요?

 

우리는 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첫째, 사람의 시간은 모든 것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3:11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때는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일 년 사 계절이 각각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겨울잠을 깨고 기지개를 펴는 새싹들의 몸짓이 봄의 아름다움이라면, 여름은 푸르른 신록으로 자연을 단장하고 우리를 우거진 녹음으로 초대하는 싱싱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고 쌓이는 가을의 거리에서 우리는 사색의 깊은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겨울은 온 천하를 순백으로 덮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꿈으로 가득 찬 동화속의 왕자와 공주의 계절, 그 아름다웠던 유년의 추억이 인생의 봄의 계절이라면, 사춘기와 청년기는 열정과 갈등을 함께 겪는 치열한 인생의 투쟁의 시간이지만, 그러나 진정한 땀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있는 인생의 여름이 있습니다. 무르익어가는 인생의 꿈과 좌절을 함께 수확하며, 이제 인생이 무엇인가를 경험을 통해 느끼는 인생의 무게가 아름다운 장년기가 우리의 인생의 가을입니다. 인생의 노년기는 긴 안식을 준비하는 계절이지만, 벽난로가 있는 포근한 통나무집에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완성된 인생을 노래하는 여유가 아름다운 우리가 다 동일하게 맞이해야 하는 인생의 겨울입니다. 이 모든 계절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면서, 그리고 또 인생의 사계절을 지나가며, 끊임없이 불평불만하며 무엇인가의 부족함에 허우적거립니다. 이것은 젊은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성공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기자가 한 재벌회장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소유한 부로 만족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놀랍게도 “아니오.”였습니다. 기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소유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 재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조금만 더.” 언제나 이 “조금만 더”가 우리를 미치게 하지 않습니까? 인생은 출세를 하고, 돈과 지위가 생긴다고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자인 파스칼은 “모든 인간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공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이 세상의 시간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제한된 시간 넘어 서서 저 시간의 건너편, 영원에 대한 갈망과 향수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갈망은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배고픔의 욕망은 먹을 것이 있으니까 배고파합니다. 목마름의 욕망은 마실 것에 대한 존재를 가정합니다.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사랑할 수 있는 이성이 있어서라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내세에 대한 동경, 저 영원에 대한 향수, 이것은 내세와 영원한 세상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중국 서안에 가면 유명한 진시황의 진시황릉과 병마용이라는 세계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진시황은 죽고 나서 내세에서도 자기 권력과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그가 남긴 흔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이 세상만으로 끝날 수 없는 저 세상에 대한 동경이 아니겠습니까?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내세는 있어야만 하는 당위의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든 것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는 저 영원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둘째, 시간은 모든 것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더 좋아지겠지’ 시간이 흘러가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는 계속 더 많은 것을 잃어버려져 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젊음을 잃어버리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건강도 잃어버리고, 마침내 목숨까지 잃어버립니다. 시간은 흘러가면서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겨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빼앗기는 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것이 잔인한 시간의 진실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2~8에 보면 28 나옵니다. 이 28개의 때는 다 짝을 갖고 있습니다. 14개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14개는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인생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긍정적인 것들이 부정적인 것들에 의해 무너진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죽음에 무너지고, 심은 것은 뽑혀집니다. 치료받다가 결국 죽고, 세운 것은 헐립니다. 웃다가 울고, 춤추다가 웁니다. 거둔 돌을 다시 던져야 합니다. 안았던 사람들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찾은 것을 다시 잃어버리고, 지키고 있던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꿰매었던 것은 다시 찢어집니다. 말하다가 다시 침묵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은 미움으로 바뀌고, 평화는 전쟁으로 종결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가수 최희준은 ‘하숙생’에서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고 노래했습니다. 저는 이 노래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는 노래로 전 세계로 수출해야 할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2절에서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라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너무 허무합니다. 베드로전서 1:24에서 인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왠지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내세라는 것은 이 세상 다음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 칸트가 말한 대로 당위의 세상, 없으면 안 되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잃어버린 것들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아팠던 어떤 모든 것의 치료를 위해서라도 내세와 천국은 반드시 있어야 할 세상입니다. 그러기에서 히브리서 9:27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기자는 심판을 통해서 우리가 직면해야 될 다른 세상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4:2~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은 영원한 처소에 대한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하나 잃어져 갈 때마다 우리는 더 영원을 향한 동경을 키워가야 합니다.

 

 

셋째, 시간은 불공평한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인생의 흔적은 우리에게 주름살을 남깁니다. 옛날에는 여인의 일생의 4단계가 소녀, 처녀, 아줌마, 할머니였는데, 요즈음은 성형술이 발달되어 소녀, 처녀, 아줌마, 보톡스 아줌마로 바뀌었습니다. 할머니는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얼굴의 주름살은 계속 없애도, 결코 없앨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마음의 주름살입니다. 이것을 상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상처를 간직하고 삽니다. 억울한 일, 배신당한 일, 사기 당한 일, 빼앗긴 일, 짓밟힌 일, 욕먹은 일, 학대당한 일, 매 맞은 일, 이 모든 상처가 오늘 우리 인생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전부라면 상처만 남기고 가는 우리 인생은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그러나 시간을 넘어 영원한 세계가 존재한다면, 천국이 존재한다면 인생의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는데 장애로 인해 이 땅에서 불편하게 사는 장애인들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인구의 10%가 즉 500만 명이 장애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운데 장애인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장애인 후보들입니다. 우리가 선진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은 이런 약자들이 보호받고 사랑받는 통합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위해서라도 천국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인생이 불공평합니까? 저는 천국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보면 두 가지 단어가 압도합니다. 하나는 치유이고 하나는 회복입니다. 천국은 약자들이 그리고 이 땅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치유 받고 위로받고 회복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천국 가서 제일 먼저 경험할 일은 바로 치유와 회복입니다. 요한계시록 21:4에 하나님께서 새 하늘 새 땅 천국의 커튼을 열어 천국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보여주십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십시오.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넘치지 않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면 주님은 먼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힘들지? 내가 다 알아.” 내 인생의 고통을 아시고 내 눈물을 씻겨주시며 이렇게 선포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5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병도, 고통도, 눈물도 없고, 이별도 없고 외로움도 없는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로워진 세상 모든 것이 회복된 새로운 세상,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 영원한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 세상이겠습니까? 아무리 이 땅의 현실은 어렵더라고 우리가 이 천국의 소망을 간직하고, 그 천국을 바라보며 우리 마음속에서 천국을 경험하며 살 수가 있다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났던 장애 시인 송명희 자매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 의사가 태아의 뇌를 집게로 잘못 건드려 평생을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낙심하여 자살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죽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죽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하루에 몇 시간을 목숨 걸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고 영혼에 비쳐오는 빛을 경험합니다. 거듭난 이후 그녀의 마음에 시가 탄생하고 노래가 깃들기 시작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한 그녀는 온몸을 비틀며 하나님이 마음에 불러 주시는 시를 받아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시가 “”라는 시입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나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그녀는 마치 공산품 제조기처럼 똑 같이 살아야 공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통해서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었기에, 그리고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었기에, 천국에서 받을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라고” 그녀는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웃는 게 다 기쁨이 아니며/ 우는 게 다 슬픔이 아니다/ 하나님은 슬픔으로 기쁨을 만드시며/하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다.”

 

오늘 전도서의 기자도 동일한 약속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는 바로 그 분,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는 분, 우리가 잃은 것을 찾게 하시는 분, 우리의 미움을 사랑으로 변케 하시는 분, 우리의 전쟁을 평화로 만드시는 분, 우리의 모든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시는 분, 그분이 이름은 치유자 하나님(여호와 라파)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시며, 우리의 꿈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는 그 영원한 나라 그곳이 천국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 영원한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 없으십니까? 그 영원한 처소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십니까? 그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신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이 시간에서 영원으로 향해 가는 우리에게 징검다리가 되십니다. 그 분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를 말하십니다. 요한복음 14:6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저 영원한 소망을 간직하고, 저 영원을 바라보며, 시간이 주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찬양하며, 걸어갈 수 있다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고 시간 저 건너편의 저 영원을 인해서 우리는 찬양과 감사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일로 생각하며 즐거움으로 하자.<김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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