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
야고보서 3:1-12
구약성경 이사야 6장을 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전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는 그 순간에 이사야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칩니다. 이사야 6:5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보는 순간에 자기는 입술이 부정하여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천사인 스랍이 나타나서 제단에서 벌겋게 달아 있는 돌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을 지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6:7입니다.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이제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런 일이 있은 다음 이사야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선지자의 사역이 입술의 거듭남, 즉 말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굉장한 특권을 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름 짓는 권세입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을 돌이라고 부르면 돌이요, 나무라고 부르면 나무요, 자기 자식을 낳아 아무개라고 부르면 그것이 이름이 됩니다. 이 말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은 문화를 만들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자기 문화를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언어를 허락하셨고 그 언어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인간과 대화를 하십니다. 얼마나 신비롭고 굉장한 은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에서 쓰여 지는 이 언어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만든 언어로써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이 언어로 서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언어, 곧 말은 인간에게 부여된 특권입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는 어떤 말이든 다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동시에 필요한 말만 해야 하는 의무도 있습니다. 말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큽니다. 말하는 자에게 자유가 있고 말 듣는 자에게 자유가 있어, 무슨 말이든 들을 수가 있되 듣고 안 듣고는 내 자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엄청난 인격적인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자의 자유와 듣는 자의 자유 사이의 그 긴장된 관계 안에서 인간됨의 존재가 나타납니다.
찬양도 말이요 저주도 말입니다. 감사도 말이요 원망도 말입니다. 모두가 말로 이루어지므로 말은 곧 그 사람됨의 표현입니다. 말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한마디의 말로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초상화를 그린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말 한마디를 할 때는 벌거벗은 내 인격을 내어 보이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말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잘못된 일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는 민수기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이 너무 어렵고 고달파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27~29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러시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가 죽고 싶다고 했으니 너희가 말한 그대로 죽여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말은 내가 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모두가 기도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내가 하는 말의 모두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원망을 사람에게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예전에 있던 교회에서 어느 어머니가 가출한 아들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저를 찾아와 하소연했습니다. 자기의 기도는 하나님이 절대 들어주시지 않는다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속상해 했습니다. 저는 더 듣기가 민망해서 한 가지 여쭤 보았습니다. “아주머니, 아들이 몹시 속 썩일 때,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없어지라고 말한 적은 없었나요?”
“많이 했지요. 나가서 죽으라는 말도 했지요.”
이 때 저는 그 어머니의 말이 아주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드렸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조심해야 합니다.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니까요.
어느 상인이 시장에서 지혜를 판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의 지혜가 바로 자기에게 있으니 와서 사 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지혜를 사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상인에게 돈을 지불하며 어서 빨리 말해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상인은 돈을 받아 챙긴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조심해”
말조심하는 것이 성공하고 행복하게 사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 만큼의 운명을 살 수 있습니다. 저주하고 사는 사람은 저주스럽게 살아가고 축복하는 사람은 복된 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도 “오래 살기 원하는 자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속에 언제나 축복과 감사와 찬양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은 그대로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36~37에서 예수님께서도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무익한 말이란 헬라 원문대로 보면, 쓸데없이 무책임하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한 말도 심판 날에 심문 받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말이 심판의 기준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망령된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자주 잊어버리고 원망하며 모세를 죽이겠다고 야단할 때 그는 견디다 못해 격분하여 반석 앞에서 이렇게 말하며 혈기를 부렸습니다. 민수기 20:10~11입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여기서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는 것은 그가 매우 혈기를 부렸음을 보여줍니다. 이 한 번의 실수로, 모세는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시편 106:33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망령되이 말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시인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일 년을 생각하며 곡식을 심고,
십 년을 생각하며 나무를 심고,
백 년을 생각하며 사람을 심고,
그리고 영원을 생각하며 말씀을 심으라.”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영원성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심방을 하다 보니 교인들 사이에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공책을 마련해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 앞에 내어놓고, 당신의 불평을 여기에 적을 테니 싸인 하라고 하였답니다. 자신의 말에 대해 분명하게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랬더니 불평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기록할 정도까지 아니라고 불평을 그만두어서 40년 동안 그 공책은 깨끗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불평은 무책임하고 쓸데없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불평은 문제 자체의 크기보다는 마음이 좁은 데서 생기는 부산물입니다.
야고보서 3:2입니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이렇게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까? 이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19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 말씀은 말을 할 때는 기도하고 깊이 생각한 후에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19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요셉을 의인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약혼자인 마리아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임신했습니다. 이 사실을 듣고도 요셉은 깊이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필경 마리아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조용히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도 말하지 아니한 그 한 가지만으로도 요셉은 진정 의인입니다. 말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결과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5~6입니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말은 불과 같습니다. 내가 성냥을 그어 그 결과로 많은 것이 탔을 때, 그래도 나는 성냥을 그었을 뿐이라고 무책임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때로는 말이 무섭기도 합니다. 말은 한 입에서 나오는데 듣기는 수십만 명이 듣고 또 전해집니다. 그러기에 문제가 됩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살기등등하여 뒤쫓아 다녔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피신 갔다가 빵과 칼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을 도엑이라는 사람이 사울에게 고자질하였고, 대노한 사울은 제사장과 그 일가족 85명을 죽였습니다. 물론 사울 왕도 나쁘지만 그들을 죽이도록 불을 지른 자가 누구입니까?
이 경우 도엑이 ‘나는 조용하게 말 한마디 한 것밖에 없다’고 발뺌을 할 수 있습니까? 그가 한 짓은 말 한마디이지만, 이 고자질 때문에 85명을 죽이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또한 말의 정확성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남에게 들은 말일지라도 책임 없이 전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한 말은 내 말이든 남에게 들은 말이든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들었다고 하면서 내 말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내가 말한 것은 전부 내 말입니다. 내가 한 말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제로 내가 보았어도 분명치 않는 일을, 몇 사람을 거쳐서 들은 이야기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함부로 말합니다.
말의 실천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고서는 바로 그 다음 날 나는 그를 도무지 모른다고 부인했던 일은 없습니까? 간다고 말했으면 가야하고 온다고 말했으면 와야 합니다. 내가 한 말은 그대로 실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거짓이 됩니다.
둘째, 말은 진실과 정직을 요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말 한 번한 것으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그들이 단지 그들의 목회자인 사도 베드로를 속인 것이 아니라 양심을 속였고 성령을 속였으며,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거짓말 한마디로 인하여 그 가문이 망하는 무서운 형벌도 받았습니다. 이것이 계명입니다. 우리는 계명 중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중요하듯이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의 중요성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의식 무의식 중에 하는 말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무의식중에 말했다고 가볍게 넘어가려고 하지만 사실 무의식 가운데 한 말이 참말입니다. 몰랐다고 해서 통하지 않습니다. 취중에 했다고 다 농담입니까? 화가 나서 흥분해서 얼떨결에 했다고 책임 없는 말일 수 있습니까? 경황 중에 한 말이라고 핑계할 수 없고 내가 한 말은 다 내 말입니다.
넷째, 덕을 세우는 말만 골라서 해야 합니다.
잠언 15:1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유순한 말은 분노를 쉬게 하지만 과격한 말은 분노를 증가시킵니다. 격분한 사람에게 내가 말함으로 그 격분이 반감되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내가 위로함으로 그 슬픔이 감해질 수 있도록 말하자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만 만나면 좋았던 기분이 나빠지고 찬물만 끼얹는다는 그런 덕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으로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입조심해서 덕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신중하게 골라서 해야 합니다.
어느 장모님이 사위한테 상당한 섭섭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위가 당신에게 어머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이 소원인데 늘 장모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어른이 원하시는 대로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의 어머님이면 곧 내 어머니요, 내가 사랑하는 자의 친구이면 내 친구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룻처럼 당신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요, 당신의 나라가 내 나라라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말은 잘 골라서 써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극장에서 음악회가 열렸는데, 막이 열려야 할 순간에 큰 모자를 쓴 할머니가 객석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을 사회자가 발견했습니다. 그 모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편을 겪자 사회자는 그가 모자를 벗어 주기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다가 시간이 촉박하여 마이크를 들고 지혜롭게 말했습니다.
“우리 극장에는 나이 많으신 어른께는 모자 쓰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 말을 하자마자 그 할머니는 모자를 벗었습니다. “할머니, 모자 좀 벗어 주세요.” 라는 말과 사회자가 한 말을 비교해 본다면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기왕이면 듣기 좋은 말로 재치 있게 하면 그 말의 효과는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나는 좋은 말을 듣기 원하면서 남에게는 기분 나쁜 말을 해서 되겠습니까? 특히 우리들의 말버릇 중에 고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좀 선택해서 보다 유순하고 부드럽고 유익하게 말할 수 없습니까? 상대방을 콕콕 찌르는 말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낫습니다.
다섯째, 입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축복과 위로, 칭찬과 격려하는 데만 쓰여 져야 합니다.
나이 오십이 넘으신 분들은 정말 이제부터 말조심해야 합니다. 앞으로 회개하고 고쳐가며 살아갈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덕스러운 말만 하다가 가야 합니다. 임종이 가까워 오는데 남의 욕을 해서 되겠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 한 분의 고백입니다. 오랫동안 부인 권사님이 치매에 걸려 상당한 기간 모두가 감동할 만큼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해줘도 밥상을 뒤집고 성질을 부리는 권사님에게 계속 참고 수발을 하다가 한번은 너무 힘이 들어 정색을 하고 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놈의 할망구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죽는게 났다. 다 고생이야”
그런데 그러고 난 며칠 뒤 할머니가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쳐 며칠 의식이 없다가 말 한마디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장로님은 그때 참지 못하고 그렇게 내뱉은 말에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릅니다. 한동안 자책을 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여러분은 후회되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은 주로 이런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를 위하여 복을 빌라.”
그런데 만약 그가 복 받을 사람이면 복을 받고, 받지 못할 사람이면 그 복이 내게로 돌아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복을 빌어야 합니까? 복 받지 못할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다면 그 복이 다 내게로 온다는 것입니다. 반대 경우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그를 저주했는데 그가 저주받을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저주는 내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평생 복을 많이 빌고 베풀어야 그 생애가 복됩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그 아픔이 바로 자신의 운명으로 되돌아옴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말한 대로 살아가고 그 생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은 축복과 찬양과 위로와 복음 전하는 데만 사용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거룩한 입을 다른 좋지 못한 일에 써서는 안 됩니다. 감사하라는 것도 명령이요, 찬송하라는 것도 명령입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 감사할 수도 있지만, 감사함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찬송함으로 찬송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온전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혀를 잘 길들여서 후회할 말을 하지 않고, 무의식중에라도 찬송과 감사와 축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 제단의 숯불로 입을 지져서 이제 남은 시간의 언어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사랑의 언어만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3장 (이영제 목사)
3:1-4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1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심판" krivma(크리마)은 재판을 통해서 내려진 판결에 따른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이 잘 못 가르쳤을 경우 그 책임에 따른 심판을 말함으로 선생 된 자에게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당시의 독자들이 '선생'이라는 직위와 권위, 명성에만 관심을 가지고 선생 되려한 것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고전12:8, 엡4:11에서도 감지된다.
2절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실수" ptaivomen(프타이오멘) "넘어지다, 죄를 짓다"의 이 단어는 모든 죄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다(약2:10, 벧후1:10).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ouj ptaivei(우 프타이에이)의 ouj(우) "...아니다"로 "실수"를 부정하는 것을 조건문으로 모든 사람이 실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온전한"(tevleio")은 죄가 없거나 결백한 의미에서의 온전함이 아니라 좀더 성숙해진 의미에서의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현대인의 성경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로 이해할 수 있다. "굴레 씌우리라"는 calinagwgh'sai(칼리나고게사이) "고삐잡는자가 되다, 재갈을 물리다"로 이 단어는 신약에서 같은 야고보서의 1:26의 '혀'와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어 여기서도 '말'과 연결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아 야고보의 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말을 통제할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전체를 온전히 지켜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3절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재갈" calinou;"(칼리누스)는 calinagwgh'sai(칼리나고게사이) "굴레를 씌우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재갈은 '고삐', '굴레'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말이나 소에 재갈을 먹여 그 몸 전체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뜻한다.
4절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고대 헬라 작가들에 의해서 말에 있어서의 재갈은 연상적으로 배의 키에 비유되어지곤 했다. 사공은 배의 작은 키로 큰배를 움직일 수 있다. "키" phdalivou(페달리위) "페달"은 힘의 근원을 말하는 뜻이기도 하다.
3:5-12 혀의 조심 5절 이와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작은 혀가 이울 수 있는 원대한 것도 있지만 이 작은 혀 때문에 큰 것을 이루지 못하고 불태워 없어지는 것이 되는 것을 말한다. "자랑하도다" megaucei'(메갈라우케이)는 "거만한 자랑, 과장하여 크게 말함"을 뜻하는 것으로 쉬운 말로 '허풍을 떠는 것'을 말한다. 야고보는 시편12:3의 '자랑하는 혀'를 말한 것이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나무" u{lhn(홀레)는 생명이 있는 경우에나 없는 경우 모두에 사용됨으로 숲이 우거진 곳이나 나무를 많이 모아놓은 목재소를 생각할 수 있다. 이 단어는 '나무'로 번역함보다는 '숲'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이다.
6절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야고보는 5절 하반절에서 이어져 '혀는 불'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평생을 거쳐서 자라난 숲이지만 한 순간에 불살라 없어지게 하는 것은 불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라 없어지게 하는 무용의 볼 때, 이 불은 분명히 지옥에서 난 것이다. 즉 생명을 죽이는 역할을 하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 자체가 악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지옥" genevsew"(게엔네스)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 게힌놈에서 나온 말로 '게힌놈'은 예루살렘 쓰레기 소각장으로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는 쓰레기 더미의 불을 말한다. 이 불은 마지막 날의 심판의 불로 자주 비유되어 왔다.
성경에서의 불이 처음 나타난 곳은 창19:24의 유황과 불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신 사건에서이다. 이 때부터 불은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마3:10, 12, 마5:22, 마7:19, 마13:30, 40, 눅3:9). 그리고 창22:6에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에서 나온다. 이 때는 하나님께 재물을 바치기 위해서 불을 가지고 가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지는 제사에 사용되는 거룩한 불이 되는 것이다(행2:3, 행7:30, 히1:7). 출13:22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기둥으로 보호하셨다.
7절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본 절은 다음절을 위한 예이다. "길들므로" damavzetai(다마제타이)는 현재형이며 "길들었거니와" dedavmastai(데다마스타이)는 현재완료형으로 인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다른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있는 것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창9:2-7, 행10:12). 이러한 권한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주신 권한이었었다(창1:28, 시8:6-8).
8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인간의 통제아래 있었던 여러 종류의 피조물들을 길들여졌는데 인간만은 예외였다. 즉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지 않는 죄인으로 제어하기 힘든 "쉬지 않는 악" ajkatavstaton(아카타스타톤) "억제할 수 없는"것이 되고 말았다.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죽이는 독" qanathfovrou(다나테포루) 죽음을 가져오는 운명적인 의미로 죽음의 근원이 됨을 시사한다. 이것은 '죽이는 독이 가득하구나'의 구약의 교훈들을 반영한 것이다(시140:3, 잠10:8, 잠11:9).
9절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야고보는 혀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최선으로 혀를 사용하는 것은 "주 아버지를 찬송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는 것 역시 혀가 하는 일이다. 롬10:9-10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도 혀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와 같이 혀는 죽고 살리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저주는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공통된 주제이다(창9:25, 49, 잠11:26, 잠26:2). 그러나 예수님은 저주를 금지하셨다(눅6:28, 롬12:14).
야고보는 인간의 모습이 이 두 양면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0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러한 양면성에 대해서 야고보는 "마땅치 아니하니라" ouj crhv(우 크레) '마땅하다' crhv(크레)에 ou(우) '아니다'로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11절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야고보는 적절한 예를 들어 한 입에서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다. "구멍" ojph'"(오페스)는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샘은 단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나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입에서도 동시에 두 가지를 하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지적한다.
12절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 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11절에 이어서 야고보는 또 한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의 시작이 mh;(메)로 의문 불변사로 부정하고 있어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 나무가 서로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7:16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하신 말씀과 같다.
3:13-18 세상 욕심과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 13절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야고보는 혀의 문제에서 1절의 선생의 책임으로 되돌리고 있다. Tiv"(티스) "누구"라는 단어로 새로운 전개를 하고 있다. "지혜" sofo;"(소포스)는 유대인들의 지식층 즉 랍비, 서기관, 교사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며 "총명" ejpisthvmwn(에피스테몬)은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야고보는 이러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고 해서 단순히 그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다해도 "선행" kalh'"(칼레스)으로 보여지지를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베드로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14절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시기" zh'lon(젤론) "열심, 질투"로 사용되는데 신약성경에서 때로는 선하게 때로는 악하게 나타난다. 긍정적으로 사용된 것은 요2:17에서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에서 "열심"으로 번역되었다. 고후7:7에서 바울을 위한 '열심'으로 한번 더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나쁜 열심 즉 "시기"로 나온다. 이 단어는 "독한"으로 번역된 pikro;n(피크론) "날카로운, 쓰라린"과 함께 사용되어 남에게 참기 힘들만큼 쓰라린 상처를 주고 있음을 말한다. 한자의 참을인(忍)자는 '칼도(刀)'에 '마음심(心)'을 사용하여 칼로 마음을 베어내는 것처럼 아프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참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5절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야고보는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분명히 세상적인 것과 하나님으로 내려온 지혜와 지식을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세상"은 하늘과 비교하여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상대적으로 사용된 용어이다(롬5:12, 고전15:40, 고후5:1).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죄인들이 있는 곳에 오셨다는 뜻이요 하늘의 거룩함을 뒤로 한 채 죄악 된 세상에 그 죄를 사해 주시러 오심을 말한다(마9:6). 그리고 이 세상에서 빛이 되라고 하신다(마5:14).
"세상적" ejpivgeio"(에피게이오스)는 고후5:1에서는 '땅에 있는'으로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세상'으로 나오는 kovsmo"(코스모스)와는 더 차별화 된 용어로 '세속'으로 번역되어도 좋을 듯 하다.
"정욕" yucikhv(프쉬키케) 또한 '영적'인 것과 대조되는 '세상적인, 육신적인'것을 뜻한다(고전2:14, 15:44, 46).
16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대조되는 구절이다. "요란"은 ajkatastasiva(아카타스타시아) "불안정, 무질서"로 무정부 상태와 같은 혼돈이며 "악한" fau'lon(파울론)은 "결함이 있는, 더러운, 사악한" 것으로 하나님의 온유와 화평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원문의 이 용어는 롬9:11, 고후5:10, 딛2:8에 나타난다.
17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16절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로 난 지혜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한다.
첫째 성결하고 "성결" aJgnhv(하그네)은 성적인 순결을 의미하기보다는 모든 악한 태도나 동기가 없음을 뜻하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의 용어이다. 이 단어는 고후11:2에서 '정결한 처녀'로 사용되었고 벧전3:2에서 '정결한 행위'로 번역되었다.
다음에 화평하고 "화평" eijrhnikhv(에이레니케)은 히12:11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로 평화와 화평을 가져오는 사람을 뜻한다.
관용하고 ejpieikhv"(에피에이케스) "너그러운, 절제, 온화한, 인내하는"의 뜻으로 하나님이 죄인 된 우리를 향해서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양순하며 eujpeiqhv"(유페이데스) "고분고분한, 순종할 준비가 된"의 뜻으로 목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어린양과 같은 성품을 의미한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긍휼" ejlevou"(에레오스)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눅1:54, 눅1:78에 나온다. 긍휼한 성품도 하나님께 롬9:23, 롬15:9에서 사용되었다.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편벽" ajdiavkrito"(아디아크리토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공평한"으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 것에 대해서 성결한 조건에 포함하고 있다(약2:1-13).
18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본 절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7: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와 일치한다. "화평" eijrhvnh/(에이레네)은 "번영, 고요, 안식"으로 '다시 하나를 이루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는 순간 이 '평안'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눅7:50, 눅8:48).
예수께서는 죄인 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화평케 하시려고 오심을 분명히 했다(요14:27, 요16:33, 롬5:1, 엡2:15, 살후3:16, 히12:14). 마10:34, 눅12:51의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의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문제가 아니요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나온 문제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화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벌어지는 세상 속에서의 영적 전투를 설명한 것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 및 성도들의 인내와 고난, 찬송과 기도 (0) | 2021.02.17 |
---|---|
낮춤과 높임의 신앙적 원리/ 물질만능주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0) | 2021.02.17 |
믿음과 행함/ 야고보서 2장 매튜헨리 주석 (0) | 2021.02.17 |
참 크리스찬인지 어떻게 아는가 / 조나단에드워즈 (0) | 2021.02.17 |
정말로 믿음이 자라고 싶은가?(약 1:2-4)/ 외 (0) | 2021.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