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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낮춤과 높임의 신앙적 원리/ 물질만능주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by 은총가득 2021. 2. 17.

낮춤과 높임의 신앙적 원리(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리라”(약 4:10)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신앙의 가장 큰 미덕이다. 겸손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주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다. 겸손은 하나님을 만난 자가 취할 당연한 자세이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하였으며, 예수를 만난 베드로 역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하였다.

 

이 모두가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의 표현들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주인이시고 우리들은 그분의 종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참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서의 우리들의 바른 위치를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종인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야고보서 4장 본문은 기도가 자신을 낮추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라고 가르쳐준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약 4:2-3)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영적 통로이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신다. 그런 기도의 통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것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 우리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목적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마귀이다. 그런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도 기도이다.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높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골이 깊으면 주변 산은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높여주시는 것은 당연한 영적 원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높여주시는 방법은 우리들에게 더욱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더욱 더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은혜는 우리들이 받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을 당연한 보상을 훨씬 뛰어넘는 사랑의 돌봄이며 베풀어주심이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이유는 그 높임을 바르게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영적으로 성숙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그분의 뜻을 바르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크게 높여주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높임을 결코 헛되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더욱 세심하게 자신을 돌보아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권면한다.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약 5:14)의 의미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제 블로그 글에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내용은 평범한 것인데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소개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때를 따라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신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런 은혜와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과까지도 주실 것이라는 일방적인 기대감을 갖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저의를 알듯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리고 많은 설교를 접하다 보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일까 헷갈리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감기에 걸렸을 때, 기도만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그냥 가벼운 감기니까 기도 없이, 병원 진료를 받고 처방된 약을 먹을까요? 물론 가장 속 편하고 신앙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약을 먹고 기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결국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진인사대천명’과 같은 것일까요? 인간으로서 내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일까요?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의 절대적인 무능과 무력함을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말들을 하는데요, 이 말은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의미가 아닐런지요?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눠서도 안 되고, 이 또한 양자 간의 균형이 필요한 것인지 애매합니다.

우문에 현답을 부탁드립니다. 매번 진솔한 답변 감사드리구요^^>

 

위의 댓글에 이런 답글을 보냈습니다.

 

<주신 질문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둘은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플 때 약을 쓰는 것은 일반계시적이라고 할 수 있고, 신유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특별계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갈등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약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치유를 기도하는 것이 정답이자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약을 먹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별개가 아님을 보여 주는 성경구절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기름을 바르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약 5:14).

여기에서의 기름은 감람유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병자를 위한 기름 바름은 거룩한 예식의 한 절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성경 내용으로 보아 치료를 위한 조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감람유는 그 용도가 다양합니다. 그 중 하나가 상비약 용도입니다.

성경시대에 감람유는 복통 진정제나 배변 설사제 등의 내복용으로도 사용되었고,

멍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외상용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이스라엘의 참혹한 시대상을 표현하면서 상처에 바르는 기름을 언급하였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

 

전도하러 나간 열두 제자들도 병자들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기름을 발랐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 6:13).

 

때로 상처의 치료제로 기름과 함께 포도주가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눅 10:34).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창 2:7).

삶이란 결국 흙으로 된 질그릇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바른 삶이란 흙의 요소와 생기의 요소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고후 4:16).

 

비록 우선순위가 속사람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무시될 수 없습니다.

병자를 위하여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야 할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권혁승 교수>

 

 

 

 

부자들에게 임할 고생이란?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약 5:1)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으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많은 부분이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후대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가난한 자는 무시되었으며 부자들의 착취의 대상이나 이용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런 부자는 지혜서에서 불의한 자의 동의어가 되고 말았으며(시 10:15-16; 14:20) 선지서의 많은 부분들 특별히 부한 압제자들에 대한 정죄를 서슴치 않았다(아모스).

 

그리고 이런 주제는 신ㆍ구약의 중간 유대 문학에 아주 현저하다(특히 에녹일서 94-105장). 특별히 신약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부의 위험성을 많이 경고하셨다. 거기서 이 세상에서의 위안은 다음 세상에서 울고 통곡함으로 대치될 것이라 하셨다(눅 6:24-25). 요한계시록 18:10-24에서는 큰 성 바벨론의 황폐를 인해서 울고 통곡할 세상의 상인들에게 길게 화가 있으라고 경고하고 있다. 또 마태복음 19:23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배경에서 이 세상의 부자에 대해서 성경이 어떤 축복이나 칭찬이나 위로와 같은 말을 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자라고 다 악하고 불의한가? 그렇다면 여기서 왜 부자를 정죄하는가? 하나님은 가난한 자만 사랑하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아니질 않는가? 부자를 일방적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 아닌가?

 

이상의 문제들을 하나씩 생각하면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먼저, 여기서 말씀하는 부자가 누구인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부에 대한 최초의 형태는 음식, 옷 그리고 값진 보석이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부자가 신자라면 그 정죄와 심판이 부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래서 여기 부자는 신자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그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신자들을 압제하는 사람이라 한다(비교, 2:6). 그리고 만일 그들이 유대인이었다면 그들은 성경의 영적 교훈에서 떠난 자들로 세상의 사람이 된 사람들일 것이다.1) 그러나 이런 견해는 문제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이 불신 부자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면 저들에게 아무 영향도 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을 보지 않으며 성경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여기 부자는 꼭 불신자만을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그의 동료 신자들의 약점을 자주 발견하였다(1:26; 3:13-17; 4장). 특별히 예배 때에 가난한 자와 부자 신자가 함께 있었고(2:1-9), 두 마음을 품은 자(약 1:8)나 헛되게 기도하는 자(약 4:3; 1:7)도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는 신자가 아닌 부자와 이기적인 신앙인 부자를 다 포함하였다(Rops, Dibelius, Meinertz, Feuillet, Plummer).2)

 

 

여기서 부자는 누가복음 12:34에 의하면 세상에 보물을 쌓아 두고 거기 마음을 빼앗긴 자를 가리켰을 것이다.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는 부자였으나 주님을 만나 구원받은 후에 세상의 재물에 두었던 마음이 자유를 얻어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되었고 그의 재물을 후하게 가난한 자들과 나눌 수 있게 되었다(눅 19:1-10). 이렇게 볼 때 여기 부자에 대한 심판은 모든 부자를 겨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런 부자들은 어떤 심판을 받게 되는가?
초대 교회는 임박한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사상이 강했고 그것이 저들의 신앙의 인내와 활력소가 되었다. 여기 부자들이여 울고 통곡하라는 말씀은 언뜻 보기에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은 회개가 아니라 심판에 대한 정죄일 뿐이다.

여기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멸망의 눈물이요 그들의 세상의 일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다.3) 그러므로 여기 고생은 부자들에게 임할 세상적인 일시적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날 그들에게 배정하실 정죄와 심판을 가리킨다.4)

마지막으로, 여기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5:1-6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데이빗즈(Davids)는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다섯 가지로 저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부자들의 부가 무가치하다 하였다. 저들은 불완전한 창고에 부를 쌓았다. 옷과 돈이 창고에 보관되어 있으나 좀과 도적이 해치고 훔쳐가 버린다(마 6:19-20). 가난한 자를 위해 나누지 않는 재물은 안전한 천국의 창고에 보관할 수 없다.

 

2. 저들은 마지막 심판 때 그들을 대적해서 증거할 복음을 순종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처럼 풍성한 소유로 문밖에 있는 거지를 돕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실패하였으므로 지옥의 불이 저들의 살을 먹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불의를 자행하였다. 저들은 가난한 품꾼의 품삯을 그날 지불하지 않았다(레 19:13; 민 24:14-15). 그것은 곧바로 품꾼과 품꾼 가정의 양식을 주지 않은 것과 같았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정죄하셨다(사 5:9-10).

 

4. 부자는 방종하였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처럼 날마다 연락하였다.

 

5. 부자들은 가난한 자와 의인을 압제하였다(무죄한 사람들). 그들은 정죄하고 살인하였다. 그들은 법정을 이용해서 가난한 자들을 간접적으로 죽였
다.5)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였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모든 재물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식해야 하며 그것들을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청지기처럼 가난한 사람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축복이기도 하다.


성도는 맹세를 못하는가?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약 5:12)

야고보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맹세하는 것을 정죄하셨다(마 5:33-37). 야고보는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게 하셨고 또 축복까지 하셨다(참고, 창 21:24; 신 6:13). 하나님 자신이 하시듯이 천사들도 맹세하였다(계 10:5-6).

그러면 우리는 맹세를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위 구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무엇보다도 라는 말을 앞에 두므로 독자들로 하여금 맹세하지 말라는 경고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다. 특별히 야고보는 구속하지 않는 맹세로 진술을 강화하는 유대의 관습을 반대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맹세ㅡ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 하는ㅡ는 구속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쉽게 번복하거나 책임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그 맹세가 무엇으로 한 것이든 결국은 하나님께 호소한 것이 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와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여기서 야고보나 산상수훈(마 5:34, 35, 37)에서 예수님이 맹세를 금하신 것은 구속력이 없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언제나 진실하게만 말하고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한 맹세도 있다. 하나님께 헌신을 서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그 서원을 지킬 마음과 거기에 드는 희생의 각오가 없이 하는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된다면 판사 앞에서나 검사나 배심원 앞에서 맹세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 법의 관례이기 때문에 예외가 있을 수 없으며, 공정한 판결을 위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한 맹세와 악한 맹세를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차이는 참된 것(거짓된 것), 선을 행하기 위한 것(악을 행하기 위한 것), 거룩한 것(불경스러운 것), 의미있는 것(헛된 것), 중요한 것들(하찮은 것들), 재판적인 것들(은밀한 것들)이다.1)

그러므로 신자는 선한 맹세는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도 그가 한 맹세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며 구속력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악한 맹세는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신자는 맹세와 상관없이 진실해야 하며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기도는 병든 자를 낫게 하는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나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 5:15,16)

기도와 병든 자의 치유는 그것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오용이나 오해로 인해서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별히 병든 자를 위해 기도를 했는데 낫지 않는 경우 그 책임을 병든 자의 믿음의 부족이나 죄로 돌려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본문은 어떤 빛을 던져 주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몇 가지 점에서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왜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서 교회의 장로를 청하라 했는가? 왜 장로는 기도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했는가? 기도를 하라고 하면서 왜 믿음의 기도, 의인의 기도를 강조하는가?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왜 죄를 서로 고하라고 하는가? 병과 죄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먼저 병든 이에게 왜 교회의 장로를 청하라고 하였는지부터 알아보자. 여기 교회의 장로는 오순절 이후에 나타나는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장로들은 신자들의 대표였다 (행 11:30; 21:18). 그들은 그들이 대표가 된 회중의 목회사역에서 지도력을 행사하였다(행 20:28; 벧전 5:1-4).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의 첫 선교 여행에서 각 교회에 장로를 임명하였으며 디도에게 그레데의 도시마다 장로를 임명하라고 가르쳤다(딛 1:5). 이런 배경에서 신자가 병들었을 때 그 당사자나 가족이 아니면 다른 성도가 교회의 대표인 장로(목사)를 청해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일종의 목회 사역이었다.

그러면 왜 장로를 청해서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데 기름을 바르면서 하라고 하였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여기서 야고보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기름에 있지 않고 기도에 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제이차적인 요인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여기 기름은 그 당시에 의약품으로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상처투성이가 된 사람에게 기름을 발라 주었다(눅 10:34). 또 12사도들이 첫 전도여행 때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6:13).

 

이렇게 야고보 사도 당시에 기름은 일반적인 의약품이었다. 그 밖에 성경에서 기름은 상징적 의미로도 쓰였다. 어떤 학자는 주님의 이름으로란 구절과 함께 기름이 나오는 것은 그 기름이 주 예수의 치유 능력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러나 야고보의 이 말씀은 기름으로 병자를 바르도록 사도적 명령을 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기름을 쓰지 않았으며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많은 경우에 기름을 쓰지 않고 병자를 치유하였다(3:6; 5:15-16; 9:34; 14:8-10; 16:18; 28:8-9).1)

 


그러면 기도와 기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병든 자를 위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기도이지만 기도하면서 약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약을 쓸 수 있는 근거는 그 약을 만들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약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다음으로 병과 죄와는 어떤 관계가 있길래 죄를 고하며 기도하라 하였는가?

아담으로부터 죄에서 병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유대인의 사상에서 일반적이었다. 이 사상은 신약에서도 거듭 언급되며(막 2:5; 요 9:2) 족장 시대와 그렇게 넓게는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그렇게 믿어지고 있다.2)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와 질병의 연계성을 부인하는 이가 더 많다. 그러나 본문은 죄와 질병을 연관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본문은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하여 모든 병이 다 직접 죄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성경적으로 보면 병은 죄의 결과 하나님의 징계로나 우리 자신이 어리석게도 음식을 잘못 먹어서 오기도 하지만(과음, 과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경우도 있다(요 9:2-3).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경우 그것이 그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도 아니라 그 안에서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역사 때문이었다.3) 그러므로 질병과 죄는 직접 간접으로 연관이 있다. 그래서 죄를 고하라 하였다. 그러나 모든 병이 죄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이 기도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병자를 낫게 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

믿음의 기도는 병자를 구원한다고 하였는데 구원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여기 구원(sozo)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신약에서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가리켰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영적인 구원을 야고보가 의도했다고 보고 14-16절은 육신적 건강보다 영적 건강의 회복에 대해 말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맥에 따르면 주로 육신적인 건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구원이란 말이 복음서에서 건강의 회복으로 쓰였으며 일으킨다는 말도 치유된 자의 육신적 기력을 기술하는데 쓰였다(마 9:6; 막 1:31; 행 3:7). 그러므로 침상에 누운 병자를 위한 장로의 기도가 주께서 그 침대에서부터 그 병자를 일으키도록 중재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뜻이다.4) 그러면 믿음의 기도란 어떤 기도인가?

 

믿음의 기도란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로 신뢰하는 기도요 하나님의 뜻의 완전함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포함한 기도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의 기도는 항상 매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무언의 인식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은 병자를 반드시 고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고후 12:7-9).

 

그러므로 그 신앙 즉 치유를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에 필요 불가결한 조건은 - 하나님의 선물인 이 신앙 - 치유가 하나님의 뜻일 때만 참으로 실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5) 이런 기도는 의인의 기도와 합치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과 조화되는 바른 관계에서만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엘리야처럼 효과있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의 신비이다. 그 뜻은 설사 우리가 병 낫기를 위해 바른 신앙의 기도를 했을 때라도 언제나 그 병이 낫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누가 죽음에서 사람을 구원하는가?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약 5:20)

야고보서는 인사나 축복 대신에 목회적인 관심으로 끝맺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서 분명하기 보다 모호하다. 예를 들어, 야고보 사도가 가리키는 죄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누가 죄에서 구원받게 되는가? 죄인인가? 그를 구원한 사람인가? 사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가? 죽음에서 구원받는다는 말은 어떤 죽음을 가리키는가? 영원한 죽음인가? 육신적인 죽음인가?

 

이 본문이 다른 서신과 상이하게 끝을 맺고 있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본문은 당시 전형적인 헬라의 편지형식과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당신의 편지는 요약(5:7-11), 맹세(5:12), 건강을 바람(5:13-18) 그리고 목적에 대한 언급으로 끝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므로 본문이 전체 서신의 목적에 대한 언급의 부분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1)

 

그러면 이제 위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하나씩 해답하기로 하자.

1. 여기서 죄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우선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나의 형제들이라는 말을 씀으로 신자들에게 주는 권면임을 알 수 있다. 19절에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한 것은 그 당시 살아 있는 그의 청중 중에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너희 중에 하나 즉 신자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죄인들은 그 중에서 거짓된 교리에 대한 어떤 행습에 빠진 자이거나 혹은 죄 많은 행습에 빠진 자를 가리킬 것이다.2) 그래서 진리를 떠난 자라 하였다. 여기서 진리는 좁은 의미로는 기독교의 교리를 가리키나 넓게는 복음에 포함된 모든 진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런 진리에서 떠난 자 곧 방황하는 자를 가리켰다.3)

 


2. 누구의 죄에서 구원받게 되는가?
죄를 지은 사람 혹은 진리를 떠나 방황하는 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를 돌아서게 하여 구원하는 사람인가? 본문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죽음에서 구원된 영혼은 확실히 범죄한 자의 영혼을 가리킬 것이다. 이에 대해 데이빗즈(Davids)는

 

(1) 그 죄인들이 덮여졌다는 사실은 죄인의 죄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2) 헬라어 본문의 어순은 죽음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죄인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다. (3) 사람이 그의 방황하는 길에서부터 돌아서는 바로 그 모습이 죽음의 위험에 처한 그 개인에 붙은 미혹(죄)임을 암시해 준다.4)


물론 구약의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가 만일 그들의 심판의 위험에서 그의 백성을 경고하는데 성실하면 그의 생명을 구원하리라고 약속하셨다(겔 3:21). 그러나 본문에서는 죄를 지은 자의 죄를 가 리켰다.

 

 

3. 사망에서 구원하리라는 말씀에서 죽음은 어떤 죽음을 가리키는가?
야고보서에서 죽음은 종말론적인 심판을 가리켰다(1:21). 그러므로 방황하고 있는 자는 이 심판의 위험에 처해 있는 셈이다.5) 여기 죽음은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이요 영원한 죽음이며 마지막 심판에 서 있을 정죄를 가리킨다(신 30:19; 욥 8:13; 시 1:6, 2:12 렘 23:12, 유 :23절, 계 20:14). 복음이 약속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영생이듯이 복음을 떠나 방황하는 타락한 자의 결국은 영원한 죽음이 그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한 자나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모르고 체험하지 못한 이름뿐인 신자들을 복음의 구원 진리로 인도하고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그의 영혼을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렇게 하는 우리가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복음의 축복에 일치하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시고 축복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용서받은 신자는 신자간 서로의 안녕을 위하여 함께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물질만능주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약5:1-6)

얼마 전 100억대의 재산을 가졌다고 알려진 한 자산가가 폭행사건을 일으켜 논란이 된 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식투자에 성공해서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 때문에 방송에도 출연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군산의 한 가요주점에서 종업원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하고, 이를 경찰에 신고한 시민까지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서에 연행돼서도 과격한 행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을 발로 걷어차고, “10억이면 너희들 모두 옷 벗길 수 있다”, “1억도 없는 것들이 나이만 먹어서.” 등의 폭언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폭행 그리고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검찰에 출석할 때, 수억대의 고급스포츠카를 타고 출두하여 논란이 됐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들을 짚어 보겠습니다. 우선 10억이면 자기를 연행한 경찰관 모두를 다 파면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경찰관에게 “1억도 없는 것들이 나이만 먹어서.”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돈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찰에 나올 때 수억대의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출두했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자기과시를 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의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돈을 최고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세태풍조를 물질만능주의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사회가 점점 이런 물질만능주의가 대세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많은 사람들이 돈이 곧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성공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돈이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이 있는 사람들은 당당하고 교만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위축되고 비굴하기까지 합니다.


과연 이런 풍조가 옳은 것일까요?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풍조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준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오늘 본문 1-3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여기서 부한 자들은 누구를 말할까요? 돈 많은 부자들 모두를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욥처럼 부자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한 자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물질만능주의에 깊이 물들어있는 부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돈은 많지 않아도 이런 물질만능주의 풍조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까지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한 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경고입니다. 자기가 손에 쥐고 있는 그 돈 때문에 울고 통곡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자랑하는 그 돈이 아무짝에 쓸모없게 될 때가 올 것이고, 그 돈이 자기 인생을 망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이런 물질만능주의를 따르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런 풍조에 휩쓸려 살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풍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 TV 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습니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자기가 태어났던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거센 강물이 바다로 흘러내려오는데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몸짓이 힘차보였습니다. 강을 거슬러 오르다 폭포를 만났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튀어 오릅니다. 어떤 녀석은 중간쯤에서 물살에 밀려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튀어 오릅니다. 그러는 중에 많은 연어들은 몸 여기저기가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소중한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연어처럼 물질만능주의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폭포 같은 거대한 장벽을 만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튀어 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 거대한 물질만능주의 물결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물질만능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안내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욕심을 버리라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문제의 부자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말세에”라는 상황입니다. 말세란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말세란 종말을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는 때를 말하거나, 역사적으로 한 나라나 공동체가 망하기 직전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상황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 부자는 계속 돈을 모으려고만 했다는 것입니다. 곧 죽을 상황 속에서도 계속 돈을 모으려고만 한 것입니다. 전쟁이 터져 곧 나라가 망할 상황 속에서도 계속 돈을 모으려고만 한 것입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 나갈 상황 속에서도 계속 돈을 모으려고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사람은 말세에도 돈을 모으려고 했을까요? 분명합니다.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이 사람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려야 할 때도 움켜쥐게 되었고, 포기해야 할 때도 붙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 19장을 보면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계명을 잘 지켜왔는데 이제 무엇을 더하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마 19:21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청년의 중심에 감춰져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바로 욕심입니다. 이 부자청년은 돈도 많으면서 계명도 잘 지켜서 사람들에게 칭찬까지 듣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도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영생까지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돈을 포기하라 하자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욕심 때문에 무엇 하나 포기해 본 일이 없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욕심을 떨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돈도 많고 계명도 철저하게 지켜온 이런 사람이 예수님께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 19:27을 보면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베드로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것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부자청년과 비교해 볼 때 능력면에서나 자질면에서 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적어도 욕심만큼은 떨쳐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욕심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과 하나님이 선택지에 올라있을 때 서슴없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버는 일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중 우선순위를 정할 때 사명을 우선순위에 손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돈을 바르게 벌라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부자는 돈을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벌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돈 버는 다양한 방법들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상상할 수도 없던 방법들을 찾아내서 손쉽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들이 과연 올바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국정치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부정축재’(不正蓄財)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르지 않게 재물을 쌓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정권 인사들 가운데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죄목이 바로 이 부정축재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까요? 돈을 바르게 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어도 다음 세 가지만큼은 지켜야 하겠습니다.

 

첫째, 법을 지켜야겠습니다. 돈을 벌 때 법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밀수를 한다든지, 짝퉁을 만든다든지, 생산지를 속인다든지 등등 법에서 금하는 일을 하면서 돈 버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신앙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피해야겠습니다. 돈을 벌 때 비록 법은 어기지 않았더라도 신앙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향락이나 도박과 관련된 일로 돈을 번다든지, 투기와 같이 건강한 사회 질서를 해치는 일로 돈을 버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돈을 버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억울하고 눈물 흘리고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삼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종업원이나 직원들을 착취하거나, 협력업체나 하청업체에 갑질이 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하려면 돈 벌 때도 잘 벌어야 합니다. 바르게 벌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잘 가려서 벌어야 합니다.



셋째, 돈을 잘 쓰라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이 말씀에서 사치하고 방종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사치하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소비를 지나치게 과하게 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방종하다는 말은 방탕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돈을 향락과 쾌락을 즐기는 일에 물 쓰는 쓰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이 말은 돈을 자신을 위해만 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살육의 날이란 종말론적으로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마음을 살찌게 하였다는 말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가축을 도살하기 위해 살찌우듯이 부자들이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도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 죄악과 쾌락에 빠져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부자들이 돈을 잘못 써서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부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돈을 잘못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나누지 못하고 베풀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물 쓰듯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는 무척이나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워렌 버핏은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이분이 남다른 안목으로 투자해서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남다른 기부로 사람들에게 나눔의 본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재산이 763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89조 원가량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은 거부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분의 삶은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사는 집은 60년 전에 약 3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3억 5천만 원에 산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는 곳은 대도시 번화가나 부자들이 사는 특별한 지역이 아닙니다.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중북부 네브라스카의 오마하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식생활도 참 소박합니다. 아침식사로 출근하며 2-3불짜리 햄버거를 주로 먹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기부하는 일에는 단연 최고입니다. 2006년 자신의 전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매년 1조 이상의 돈을 기부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해에만 기부한 돈이 3조 6천만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누적 기부액이 30조가 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워렌 버펫은 돈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멋진 부자인 셈입니다.

최근 신조어 가운데 ‘욘족’(YAWNS)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 영국의 한 언론이 2000년대의 엘리트 트렌드로 처음 소개하면서 한 때 이슈가 됐던 말입니다. 이 '욘족(yawns)'은 ‘Young And Wealthy but Normal’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비싼 명품 구입에 돈을 쓰기 보다는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는 대신, 자신들의 부를 자선사업 등에 사용하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런 욘족들의 등장은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런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오아시스와 같은 상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돈을 자신을 위해서는 필요한 소비만을 위해 쓰고, 나머지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돈이 많든 적든 돈을 자기만을 위해 쓰는 것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하는 또 하나의 비결입니다.

우리시대가 점점 물질만능주의에 깊이 물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점점 돈의 가치가 중요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돈의 위력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풍조 속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물질만능주의를 잘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욕심 특히 돈 욕심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돈을 바르게 벌고, 또 돈을 멋있게 써야 하겠습니다.

 

박봉수 목사(상도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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