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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부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 및 성도들의 인내와 고난, 찬송과 기도

by 은총가득 2021. 2. 17.

부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5:1-6)

 

1. 말세에 가져야 할 성도의 지혜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5: 1-3)

 

(1) 부자와 가난한 자

 

세상에는 항상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뒤섞여 함께 살아가고 있다. 부자는 인생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고통스런 삶을 이어간다. 그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인간들은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며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부자가 되는 것 자체로서 성공적인 삶에 대한 징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부자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들뿐 아니라 정신적인 무형의 부자들도 포함될 수 있다. 그들이 가진 무형의 소유물 역시 계량화될 수 있으며 자신을 위한 풍요로운 삶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들의 역사는 정해진 규준 없이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실하게 사는 인간들이라 해서 반드시 그에 적절한 삶의 결과가 따르는 것이 아니다.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사악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라 해서 가난한 삶에 머물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있어서도 그와 동일한 양상이 발생한다. 즉 이 세상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실하게 산 결과 부자가 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신앙에 따라 인내하며 성실하게 살기 때문에 도리어 고통스럽고 힘든 삶이 동반되기도 한다. 이는 역사적 형편에 처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상이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땅에서 부자가 되어 사느냐, 가난하게 사느냐 하는 것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빈부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성도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에서의 빈부에 따른 개인적 형편을 두고 인생의 성공과 실패여부를 평가하려 해서는 안 된다.

 

 

(2) 세상의 재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일시적인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결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인간들은 지극히 한시적인 기능을 하는 재물을 원하며 금과 은을 얻고자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그것이 저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재물들은 세상 안에서 썩고 만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의상은 좀먹어 못쓰게 되며 금과 은은 녹슬어 사라지게 된다. 그런 것들은 저들의 인생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삶에 대해 오해하도록 하는 걸림돌이 된다.

 

야고보는 인간들이 의지하며 삶을 윤택하게 하리라고 기대하던 금과 은이 녹스는 것이 저들에게 증거가 됨을 말했다. 그것이 저들의 궁극적인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들의 살을 해치며 갉아먹는 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그 점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 9-12)

 

바울은 부자가 되어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추구하는 자들을 언급하며 권면하고 있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이 위험한 까닭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런 것들을 의지하려고 하는 타락한 본능을 저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어 썩은 지팡이 같은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소유물들이 없으므로 아예 의지할 대상이 없는데 반해 부자들에게는 의지할만한 것들을 자기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이며 무형적인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금과 은을 비롯한 돈은 물론이며 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기술, 나아가 건강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명예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풍족히 가지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보장될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착각이 인생을 일시적으로 평안하게 해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도리어 시험과 올무가 될 우려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도 같다. 세상의 재물 곧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모든 것들이 언제든지 한꺼번에 사라질 수 있음을 실제적으로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들이 소유하고 있는 금은보석과 돈은 예기치 못하는 때 일시에 날아갈 수 있다. 나아가 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능과 기술 또한 단번에 사라질 수 있다.

 

세상의 물질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지탱하는 건강은 항상 보장되는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오늘 건강하던 사람이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아가 언제 어떤 심각한 사고를 당해 건강을 상실하게 될지 모른다. 인간의 앞에는 항상 건강을 박탈해 갈수 있는 위기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민감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함께 살아가는 주변의 이웃들이 당하는 형편들을 보며 그에 대한 인정을 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자기 자신에게 닥치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인간의 한계인 그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자들일 따름이다.

 

 

(3) 부자들에 대한 경고

 

야고보는 부자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금 부유하다고 해서 앞으로도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장래 저들에게 임할 무서운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저들이 소유하고 있는 많은 재물과 값비싼 의상과 금은 같은 보물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부유한 자들에 대해 강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어리석은 부자들은 저들이 마치 세상에서 성공한 것으로 여기며 인생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저들의 풍요로운 삶은 영원한 삶을 위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4,25)

 

예수님께서는 위의 본문 말씀 가운데서, 부자들이 세상에서 이미 충분한 위로를 받았음을 언급하고 계신다. 이는 그들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았으며 그에 대한 것들을 성취했음에 대한 지적이다. 즉 예수님은, 부자들이 세상에서 원하던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어 인생을 누릴 만큼 누렸음을 말씀하셨다. 나아가 타락한 세상에서 풍요로움을 누리며 배부른 것을 자랑하던 자들에게 저주하셨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이 말씀이 세상의 모든 부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세상의 풍요로움을 추구한 자들에 대한 평가이다. 하나님을 핑계 대며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위로를 받고자 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 대해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 세상의 부를 축적하며 그것이 마치 인생의 성공인 양 주장한 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눅16: 14)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비유’의 말씀을 주셨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19-25)

 

 

위의 비유 가운데는, 극명하게 차이 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삶이 배경이 되어 있다. 그 두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 둘은 나름대로 자신의 신앙을 기억하며 인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되어 좋은 집에서 값비싼 옷을 입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던 부자는 자기에게 그런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나름대로 감사하며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종교를 위한 헌금도 많이 하고 나름대로 구제를 베풀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을 알고 있던 인물로서, 타락한 세상에서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누렸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 부자를 성공한 인물로 여기며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의 삶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는 기본적인 의식주마저도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최악의 건강상태로 무가치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그를 경멸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부자와 주변 사람들은 온 몸에 헌데로 가득 찬 거지 나사로를 보며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불쌍한 인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저들의 삶은, 죽음 이후에 전혀 다른 양상의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다. 아브라함은 지옥 불에 빠져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부자에게 말했다. 그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던 자로서 세상의 풍요로움을 추구한 결과 이미 모든 것을 누렸다는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을 배반한 세상과 짝해 쾌락을 누림으로써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세상의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면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하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위로 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도하는 악행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세상에서 배부른 삶을 추구하고 누린 결과는 영원토록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 없다. 지혜로운 자들은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바를 올바르게 깨달아 그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말세에 대비할 일

 

불과 같은 맹렬한 심판을 앞둔 말세에는 진정한 가치에 대한 혼란이 증폭된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뿐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도 발생한다. 인간들은 저마다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며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런 위험한 풍조는 교회 내의 어린 성도들을 미혹하고자 하여 혼탁한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배도한 인간들의 억지 주장이 하나님의 진리를 억누르려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성과 경험에 익숙한 인간들은 자신의 종교적인 판단과 주장이 절대적인 양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기록된 성경 말씀을 거부하며 인간적인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감히 하나님을 조롱한다.

 

그들 가운데는 남 보기에 열정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자들도 많이 있다. 그런 자들은 종교적인 주장과 가시적인 행동을 앞세워 감히 하나님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입술로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섞어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의 종교적인 욕망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사역을 부인하며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 집착하게 된다. 사도 베드로는 말세가 되면 어떤 어지러운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3: 3-5)

 

말세가 되면, 인간들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성호(聖號)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내심으로는 그를 멀리하게 된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멸시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이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밀어내게 되는 것이다.

 

타락한 기독교는 급기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밖으로 내치기까지 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종교적인 취향에 따라 성경을 왜곡하여 인용하며 어린 교인들을 속이려 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최고의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따라서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원한 것들에 대해서는 일부러 애써 잊으려 한다. 종교 현실주의자들에게는 세상의 복을 추구하며 현세적인 만족을 취득하는 것이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그럴듯한 결과물들을 공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최대의 덕목이자 자랑거리가 된다. 교회의 재산이 많아 커다란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세상적인 인정을 받는 것을 흐뭇하게 생각한다. 즉 물량적인 것을 추구하며 성취하는 것을 최고의 성공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곧 개인을 넘어 교회의 집단적 차원에서 세상의 부자가 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에 대해 강한 경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것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기뻐하는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들을 지속하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하지만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그것이 마치 훌륭한 신앙인 양 착각하며 속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숙한 성도들은 교회 가운데 그런 세속적 물량주의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2. 평균케 하는 원리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약5:4-6)

 

 

(1) 부자의 위험한 폭리와 가난한 자

 

부유한 자들은 항상 가난한 자들로부터 부당한 폭리를 취할 우려가 있다. 설령 그것을 구체적으로 의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타락한 사회적 여건상 항상 그럴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의 경험에 빠진 부유한 자들은 저들이 부자가 되어 풍요롭게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동시에 가난한 자들이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점은, 부자들은 세상에서 상당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자들을 고용하거나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주지 않고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부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 물론 일손이 달릴 경우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들이 부자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으나 그것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노동을 시키고 그들을 위한 노임을 결정한다. 사람을 고용하는 입장에서는 충분한 노임을 치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고용주(雇用主)의 입장에서 그러할 따름이다. 사실 이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여간 신중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빈부를 초월해 성도들 간의 ‘평균적인 삶’에 대한 개념이 확고히 서있어야 한다. 즉 부자라 해서 더 많이 먹고 가난한 자라 해서 굶주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부자들에게 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교회 가운데 분명히 살아 있어야 할 정신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 13-15)

 

사도 바울은 물질적으로 여유로운 자들의 소유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의 부족함을 보충함으로써 평균케 해야 하는 점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그는 ‘평균케 하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내광야에서의 특별한 생활을 예로 들었다. 광야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생명을 유지했던 것이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살았던 저들에게는 빈부차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시내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처한 형편과 조건에 상관없이 일용할 양식을 필요에 따라 공급받았으므로 식량의 빈곤에 처한 자들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시대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져야 할 자세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계신다. 교회 가운데는 건강한 자와 병약한 자,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연세 많은 어른들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 등 모두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즉 건강하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좀더 분명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가정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가정에는 건강하고 유능한 식구가 있는가 하면 병약하고 무능력한 식구가 있을 수 있다. 노동력이 있어서 직접 돈을 버는 식구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가족들도 함께 생활하며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가정에서는 건강하고 노동력이 있는 사람은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늘 남은 것을 얻어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력이 있는 가족은 좋은 옷을 입고 나머지 가족은 값싼 옷을 걸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가족은 개인적인 능력에 상관없이 모두가 아무런 차별 없는 균등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공동체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오늘날 성숙한 교회 가운데는 성도들 간에 그 정신이 활발하게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기독교 공산사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가지는 지상에서의 삶의 원리는 바로 그와 같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내용 가운데서 원래의 교회 모습을 볼 수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2: 44,4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 32)

 

사도교회 시대의 이런 모습은 교회의 기본적인 정신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이와 동일한 정신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재산을 개인적인 소유만인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성숙한 성도들은 자신의 재산과 소유에 대해 항상 선한 청지기로서의 자세를 유지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교회 가운데 있는 게으르고 나태하고 부정직한 사람들을 배려하도록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불성실한 삶의 태도로 인해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자에 대해 교회가 책임질 일은 없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는 도리어 권징사역을 통해 책망함으로써 올바른 삶의 자세를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로 성장해 가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2) 살륙의 날을 앞두고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위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끝나게 된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윤택한 삶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으며 세상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즉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명예와 명성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일거에 무효화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대를 목전에 두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아 붓는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종교적인 열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허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야고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도살(slaughter)이 이루어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에 대한 비유를 말하고 있다. 짐승이 도살장으로 끌려가게 되면 그 생명은 끝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짐승은 여전히 자기 배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도살장에 끌려가기 전의 짐승이 배를 불리듯이 자기 욕심을 채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무지한 짐승을 비유로 언급하면서 욕망에 가득 찬 인간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은 잠시 후면 죽임을 당하여 고기 덩어리가 될 것인데도 앞뒤 정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리석은 짐승은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배부른 음식을 먹고는 만족스러워 한다. 나아가 죽을 것을 모르는 채 좀 더 많은 음식을 먹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야고보는 더러운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들을 곧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과 동일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방종하고 사치스럽게 사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의 풍요로움에 파묻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한심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땅에서 자신의 화려함을 통해 마치 성공적인 삶을 살기라도 한 것인 양 의기양양하다. 인간들의 그런 삶의 태도는 하나님을 떠난 무지한 소치(所致)에서 나온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 역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강조해 말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더러워질 것이라"(딤후3:1,2)

 

배도한 인간들이 세상에서 자랑거리를 만들고 즐거워할 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기독교 내부에 들어온 악한 자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과 돈을 사랑하며 자기 멋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괴롭힌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아가며 돈을 통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그런 사람들은 잘못된 긍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저항하는 교만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전수하는 부모들의 말을 거역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훼방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거부한다. 그들은 세속에 물들어 살면서 일시적인 풍요로운 인생을 즐기려 하는 것이다.

 

 

(3) 의인을 정죄한 자들

 

우리는 야고보가 본문 말씀 가운데서 ‘그 의인’(the righteous man, 약5:6)에 관련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매우 깊은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부자들을 책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가난한 품꾼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범죄와 연관되는 것으로 말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일반적인 경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두고 말한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성도들을 옆에 두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는 저들의 모습을 책망하고 있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심판날(살륙의 날)에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결과에 연관된다. 그전에 있었던 그런 자들의 이기적인 판단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죽이게 되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을 저항해 저지른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인’은 저들의 악행에 대항하지 않으셨다.

 

야고보가 본문 가운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악행을 저지른 인간들이 또다시 저들의 이기적인 욕망 채우기에 급급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저들을 심판하시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리셨지만, 악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3. 빈부 (貧富) 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말세에 처한 성도들의 처신

 

영원한 천국에 시민권을 두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빈부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와 전혀 다르다.

타락한 인간들은 세상에서 풍요롭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을 최대한의 복이라 생각하며 궁핍하고 가난한 것을 불행이라 여기거나 저주라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들은 세상의 물질들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그런 사고는 지극히 어리석은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할 때 그렇게 인식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도리어 복일 수 있으며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운 일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가난과 궁핍이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듯이 풍요와 부유함이 또 다른 형태의 징계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가난하게 되는 것은 징계이며 부유하게 되는 것을 축복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죄 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은 풍요롭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나려는 악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신31: 20). 일시적인 자기만족에 취해 영원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있으며, 부유하게 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이 세상에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단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종의 삶을 이어감으로써 참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통해 후손들에게 영원한 진리를 상속해 가는 것이 성도들에게 허락된 진정한 삶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물질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부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삶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잠언서 기자는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그 점에 대해 잘 드러내준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 8,9)

 

잠언서 기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게 적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런 삶을 살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차라리 부자가 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자 하는 잘못된 욕망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세상에서 풍요롭게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렇게 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성숙한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올바르게 성장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나치게 부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난하지도 않는 삶을 소망하며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부유하게 되어간다는 판단이 들면 그것을 줄이기 위해 힘써야 한다.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재산과 물질을 함께 나누어야 할 적절한 용처(用處)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말세가 되면 점차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다. 배도한 인간들이 득세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가고자 하는 성도들을 방해하게 된다. 그들은 어린 교인들 가운데 진리를 혼탁하게 함으로써 가치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 11)

 

말세가 되면 어리석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을 겪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살아간다. 그들은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려 그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게 된다. 말세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은 그런 분위기가 조장되어 가는 사실에 대해 여간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영원한 천상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참된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 배도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겠지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라 그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능히 승리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기록된 말씀에 의지하여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최상의 삶의 자세이다.

 

 

 

 

성도들의 고난과 인내(약 5:7-12)

 

1.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7-9)

 

 

(1) 인내의 지혜

 

타락한 인간들은 대개 성장하여 철이 들고 생각이 깊어지면서부터 점차 조급하게 살아간다. 인간이 조급하다는 것은 뭔가 불안하다는 의미이며 무엇인가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불안하지 않고 쫓기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점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따라서 도덕군자들은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상의 성도들에게는 세상적인 것을 통해 그럴 만한 여유를 부리기에 적합하지 않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평안한 삶을 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며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주님의 재림 때까지 길이 참으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는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달리 대처할 방안이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 단지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야고보는 이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열매를 수확하는 추수 때를 기다리는 농부를 예로 들고 있다. 농부들은 귀한 열매를 얻기 위해 땀 흘려 수고할 뿐 아니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며 곡식이 자라고 여물어가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에 관한 예를 들면서 성도들을 향해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 오래 참고 기다리도록 요구했다. 주님의 심판의 날이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모진 환란이 닥친다 할지라도 주님이 오시기까지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고보가 예수님의 재림과 그로 인한 심판을 열매 맺는 결실에 연관 지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완성을 의미하며 성숙과 성취를 의미하고 있다. 그 결실이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거뜬히 견디며 이겨나갈 수 있게 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유일한 소망과 결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인간들은 주님의 재림이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다. 나아가 기독교 내부에 스며들어온 배도자들은 2천년이 다된 지금까지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은 사실을 핑계 삼아 억지 반론을 펼지 모른다. 그러나 야고보는 임박한 재림 사실을 통해 성도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배도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실제적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해석한다. 그들은 세상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온갖 힘을 쏟으며 어린 교인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가운데서 믿음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 역시 그의 서신 가운데, 주님의 재림 시에 일어나게 될 상황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9,10)

 

 

불신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배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의도적으로 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어떤 조급한 사람들은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주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여 주께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의 재림이 늦추어지고 있다.

 

베드로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백성들 가운데 마지막 한 사람이 구원되면 재림하시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의 날은 도적같이 임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전혀 감지하지 못할 때 주님께서 재림하신다. 그 날에는 처음 창조되었던 하늘과 땅이 근본부터 크게 흔들린다. 하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뜨거운 불에 풀어져 사라지며, 땅에서 일어난 모든 악한 일들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2)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성도의 자세

 

야고보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이는 재림의 시기가 곧 도래하게 될 실제적인 사건이 되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는 주님의 재림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재림을 믿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게 되는 것이다(행1:11).

 

경험적인 인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여태껏 눈으로 직접 본적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임하게 될 사건을 막연하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제까지 오시지 않은 주님께서 오늘 갑자기 오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판단여부와는 상관없이 주님의 재림의 시기는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롬13:11)

 

예수님의 재림은 다른 모든 하나님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인간들과 논의한 결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어진다. 대다수 인간들이 주님의 재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그가 강림하신다. 예수님의 재림은 결코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인간들에게는 갑자기 일어나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리라는 사실을 전혀 예기치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재림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영원한 천국과 주님의 재림에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그의 재림을 간절하게 소망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재림 신앙을 철저히 관념화 하고 있다. 인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그의 재림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관념적으로만 믿는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는 하겠지만 당장 오늘밤이나 내일은 절대로 오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은 믿음이 되어 내주, 내달, 내년 안으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으며 앞으로 수년 내 혹은 자기 생애 중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그런 자들은 마치 긴 장대를 앞으로 내밀며 그 장대 끝에 달린 재림사상은 자기와는 실제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관념화된 재림사상’으로 칭할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을 지닌 성숙한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이 바로 눈앞에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현재와, 막연하게 미래로 밀려난 재림 사이의 기간에 인간의 욕망이 가득 채워지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내일, 혹은 내주, 내달, 내년에 오실 수 있다는 긴박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세상에 대한 불필요한 욕망이 끼어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소중한 소망이 된다. 모든 성도들이 그런 믿음을 굳건히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세상에 대한 욕망을 멀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서로 원망하지 말라”

 

야고보는 성도들 간에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무엇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는 악행이 발생한다 해도 아무런 감정적인 대응 없이 넘어가라는 의미인가? 우리는 이 말이 단순히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 가운데는 주관적인 원망과 불평이 있어서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이름만을 가진 종교적 집단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은 감히 하나님께 저항한다는 말과도 통하는 무서운 말이다.

 

그런데 무지한 인간들의 역사 가운데는 그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원망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저들에게 참된 재림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임박한 재림과 그로 인한 궁극적인 심판이 눈앞에 놓여있음을 깨닫는다면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세를 언급하며 그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시내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던 사건을 되새기며 그와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권면했다. 불신앙으로 가득 찬 저들의 악한 소행을 따르는 것은 멸망을 재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0,1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다양한 기적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원망한 것이 아니라 저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낸 모세를 원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관적인 욕망과 현실적인 불만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배도행위를 신약시대 성도들의 거울로 삼도록 당부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을 원망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저항하는 악행이 된다. 이는 결국 무서운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야고보가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요구했을 때 그 편지를 처음 받은 사도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시내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사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세를 당한 우리는 이에 관해 여간 신중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4)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심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바짝 다가와 문밖에 서 계신다. 야고보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 점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 가까이 서 계시니 세상에서의 환란과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신앙적인 삶은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문 앞에 서 계시는 심판주를 온전히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다.

 

구세주와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人子)가 문 앞에 이른 때를 분별하도록 요구하고 계신다. 이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역사상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그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이 있는 자들이 진정으로 복된 자들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막13:28,2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긴 겨울을 지나 봄이 되어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워온 줄 알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근한 무화과나무를 통해 그에 대한 원리를 볼 수 있듯이 주님의 재림도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다. 배도자들은 그 사실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저들의 실제적인 삶 가운데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마치 잎이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 채 긴 겨울을 지나는 나무가 생명을 지니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말세에 처한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더욱 민감한 자세로 기다리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제멋대로 대행하려는 과학주의자들의 행동은 세상의 끝이 가까워졌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두뇌를 자랑하는 자들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마저 극단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신학자들의 배도행위 역시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배도에 빠진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천상의 나라와 그에 속한 진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땅에 맞추어진 신학을 추구하기에 급급하며, 주님의 재림을 역사의 마지막에 실제적으로 일어날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배악한 현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말의 때가 가까워졌음을 더욱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 또한 종말에 연관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가운데 그와 연관된 기록이 나타난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육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항상 우리 옆에서 때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숙한 신앙인들은 항상 문밖에 계시는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인간들 편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들에 주된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문밖에서 두드리며 메시지를 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계시된 말씀을 통해 들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배도자들은 주님의 음성으로부터 귀를 막고 애써 이 땅의 것들을 추구하며 그에 집착하는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저들에게는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있으며 그것을 위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다. 그런 태도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결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참된 성도들은 문밖에 서계시는 주님을 온전히 기억하며 그의 뜻에 따르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요한은 문을 여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식탁을 나누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살게 되는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고 있다.

 

 

2. “선지자들을 본으로 삼으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0,11)

 

(1) 고난을 참은 선지자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어린 교인들은 그들이 유명하게 됨으로써 매우 큰 영예를 얻은 것으로 여긴다. 물론 믿음의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듯 세상적인 영예를 얻은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로부터 특별한 선택과 임무를 부여 받았지만 세상에서 명예를 얻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엄청난 고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환란과 고통을 동반했으며 그에 대해 인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에 관한 예들을 언급하면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신약시대의 사도들과 교회 역시 그와 동일한 삶 속에 놓여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 믿음의 선배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은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이 모진 핍박을 받았던 것은 단순히 ‘정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했기 때문이다. 배도자들 앞에서 진리를 선포할 때 핍박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시대의 사도들과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증거한다는 이유로 배도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므로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 저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는 어느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놀라운 상급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면 오늘날 우리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타락한 세상과 배도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그를 증거하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극도로 멸시하며 박해했다. 그런 세상이라면 오늘날 그의 백성들 역시 그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타락한 세상의 속성을 올바르게 깨달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2) 성도들의 본이 되는 선지자들

 

세상 사람들은 저들의 취향에 맞는 영웅들을 수없이 많이 만들어두고 있다. 그들은 그런 자들의 인생을 부러워하며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인생을 추구한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획득한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을 희망으로 생각하며 그런 인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명예를 얻은 자들이 성도들의 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도 성도들의 본이 될 수 없다. 설령 윤리적으로 인정받을 만하고 세상적으로 영예로운 지위를 차지한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본받으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남의 부러움을 사는 그들의 성공은 일시적일 뿐 아니라 도리어 인생에 방해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인물은 온전한 믿음의 선배들이다. 구약시대의 여러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이 우리의 본이 될만한 인물들인 것이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의 본이 되는 분들이다. 신약시대의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선배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들의 실제적인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세상적으로 부러워할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 가운데는 믿음으로 인해 모진 박해를 받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끔찍한 죽음에 처해진 인물들도 있다. 그들은 행복하고 안락한 가정생활을 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을 살았다. 그들은 비 진리에 저항해 맞서 싸웠으며 거짓 교사들에 대항해 피를 흘리기까지 투쟁했다. 그들의 몸은 이 세상에 있었으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세상에서 성공하여 세력을 펼치던 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역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본받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저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본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교회시대의 믿음의 선배들이다. 그들 이외에 우리의 본이 될만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3) 진정으로 복된 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저주 아래 놓여있음을 증언해 준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무지한 형편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최상의 값어치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저들의 삶 전체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목적을 추구하며 인생의 복락을 누리는 것을 최상의 복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니라 잠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모조품(模造品)에 지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것을 경험하며 스스로 속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모든 진리를 알아가게 된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생의 본질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도들은 그것이 곧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한다.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이다. 시편 기자는 그에 대해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시편 기자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영화를 누리는 사람을 복 있는 자라 규정짓지 않는다. 나아가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두고 복된 자라 말하지도 않는다.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지혜를 좇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꾀 많은 지혜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죄인의 길에 참여하지 않으며 그들의 그럴듯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성도들은 항상 여호와의 율법을 진실로 즐거워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율법 없이 진리에 연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알아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성도들은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복된 자들인 것이다.

 

 

(4) 욥의 인내와 결말

 

구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욥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자로 인정하셨다(욥1:1, 참조). 또한 욥은 동방의 왕과 같은 지위에 있던 부유한 자로서 백성들로부터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나아가 그는 아내와 많은 자녀들을 두고 있음으로 인해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간계에 의해 심한 고난을 당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특별한 구속사적인 사건과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특별한 구속사적 의미를 알려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욥은 엄청난 고난과 더불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받았다. 지위와 재산뿐 아니라 자녀들의 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욥에게 베풀어진 일반적인 축복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가운데는 욥과 그의 인내 및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야고보는 어려운 고난을 인내하며 견딘 욥에게 최종적으로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말했던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야고보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욥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저들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여전히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알기에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이다.

 

 

3. “맹세하지 말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

 

 

(1) 맹세하기에 부족한 인간

 

완전히 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능력을 배경으로 하여 무언가 맹세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만일 인간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교만한 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절대 맹세하지 말도록 요구하셨다. 구약성경에는 헛맹세를 하지 말고 합당한 맹세를 하면서 그것을 지키라고 명령했지만 주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는 역사적인 재림과 심판의 날을 소망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앞에서 인간들이 가진 모든 능력을 내려놓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37)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의 능력을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는 것은 교만함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더구나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에 연관된 것을 걸고 반드시 실행하겠다고 맹세하는 행위를 금지시키셨다. 하늘과 땅은 물론 예루살렘이나 자기 머리로 맹세하는 것도 못하도록 하셨다. 머리카락 하나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자,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무지에 빠진 인간이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대한 맹세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아가 자신의 신앙심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맹세한다면 지극히 유치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진리를 받아들여 순종하며 비 진리를 강하게 거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소중하다. 그것을 넘어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고 다른 대상물을 빗대어 맹세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발생하는 악한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교회적인 중요한 절차 가운데 하나인 공적 고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서약’이다. 즉 교회에서는 종종 공적인 서약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목사, 장로, 집사 등 직분을 받게 될 때 교회 앞에서 서약한다. 교회가 맡긴 직분을 자기의 욕망에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직분을 감당하겠다는 고백적인 선언이다.

 

또한 세례와 유아세례를 받을 때도 공적인 서약이 이루어진다. 세례를 받은 자로서, 혹은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의 부모와 성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공적인 고백이다. 우리는 그러한 교회적인 서약을 맹세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교회에서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서약은 개인의 맹세와 달리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로서 자신을 잘 지켜 보존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 이는 맹세가 개인적인 욕망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라면, 서약은 교회적인 질서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의미를 지닌다.

 

 

(2) 주관적 판단과 하나님의 정죄

 

인간들은 본성상 자기중심적이며 주관적 판단을 한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보편 이성을 가진 인간은 때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주로 가정과 가족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즉 가족을 위해 대신 생명을 내어놓고 진심으로 자기보다 가족을 아끼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자신의 욕망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정제되지 않은 타락한 인간들의 모든 주관적 판단과 행위는 욕망의 발산일 따름이다. 죄악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익힌 인간의 이성과 경험은 하나님을 위한 아무것도 생성해 내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 이외에 의지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5-7);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잠언서 기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할 뿐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을 의지하지 말도록 당부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를 믿고 순종할 때 그가 선한 길로 인도하시게 된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지혜를 배경으로 하여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는 죄악이다.

 

그러므로 잠언서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간의 그런 악한 심산으로부터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다. 모든 믿음의 선배들 또한 그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런 인생을 의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신뢰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4. 시대를 분별해야 할 교회

 

21세기의 현대는 세상이 끝나가는 종말의 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건실한 교회와 성도들은 마지막 심판과 연관되는 하나님의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인간들은 그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설령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인간의 지혜를 빗대어 비웃을 따름이다. 눈부신 첨단과학으로 인한 문명의 이기들과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풍요로움으로 인해 더욱 세상의 욕망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인간들에게 다행스럽거나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해가 되며 저주가 된다. 이는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더욱 멀리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앞으로 임하게 될 주님의 강림과 심판이 임하게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당황스러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재림에 대한 아무런 인식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내부에 들어와 종교 지도자 행세를 하는 사악한 배도자들이다. 그들은 배도의 길에 빠져 교회를 혼란케 하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의 가장 무서운 범죄행위는 순진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소경이 인도자가 된 비유로써 그에 대한 분명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15:13,14)

 

악한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이 임하게 된다.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적인 많은 용어들을 익히고 더 큰 소리로 하나님을 위해 살자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어리석고 연약한 자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속아 잘못된 길을 가게 된다. 이는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를 짓밟고 있는 실상을 보여준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의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는 그와 같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 자들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지도자들과 같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과 서기관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인 기득권층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린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틀에 내어 주었으며 그를 따르는 백성들을 핍박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마치 하나님을 위한 충성에 의한 행위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런 자들은 연약한 자들에게 거짓 가르침으로 선전하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 발생했던 그와 같은 양상은 그의 재림을 앞두고 유사한 모습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럴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과 배도자들로부터의 핍박을 각오해야 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해야 한다.

 

종말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욕망에 집착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지 분명한 응답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비단 개인적인 입장에서뿐 아니라 교회적인 관점에서 정리되어야 할 본질적인 문제이다. 인간들의 이성과 경험에 대한 의존도가 극에 달한 시대에 처한 교회는, 그에 대한 문제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인간들은 결코 이성과 종교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오직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며 경배할 수 있게 된다. 주님의 재림을 눈앞에 두고 있는 교회는 성도들 간에 욕망에 따른 불필요한 원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원망은 세상의 가치관들을 기준으로 하며 그것을 추구하고자 함으로써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인간의 관념에 가두지 않고 실제로 기다린다면 어떤 어려움이 당한다 할지라도 능히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이를 위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세에 처한 하나님의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신앙이다.

 

성도들의 기도와 찬송(5: 13-20)

 

 

1. 기도와 찬송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5:13)

 

(1) 기도하게 하라(let him pray, KJV)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교제를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교제의 의미 없이 혼자 상상적인 신을 염두에 두고 중얼거리는 것은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다.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의지를 기억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서 막무가내로 종교적인 억지를 부리는 것도 참된 기도가 아니다. 올바른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나름대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본질적인 반응은 상이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면 쉽게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고통스런 힘든 형편을 직면하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나름대로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그것을 지상의 삶에 연관 지어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현실의 고통을 넘기는 것을 최고의 희망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그에 대한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숙한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단순히 실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것은 현실에 집착하는 대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의 자세를 의미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가 교회를 향해, 고난 당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라’고 말한 것은 교회가 기도의 주체가 됨을 말해주고 있다. 즉 성도들은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의지에 따른 기도를 해야만 한다.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되풀이되는 종교적인 용어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참된 기도를 하는 가운데 살아가고자 애쓴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요구한 것은 그런 의미를 지닌다. 참된 기도 없이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험난한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없다.

 

 

(2) 찬송하게 하라(let him sing psalms, KJV)

 

야고보는 교회를 향해, 참된 즐거움을 소유하게 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배의 찬송은 종교적인 음악(Music)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음악적인 기교와 재능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장 중요한 방편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올바른 생각이 될 수 없다. 참된 찬송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마음 속 깊이 기억하는 가운데 그의 말씀에 온전히 참여하며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보통 인간들은 육감적인 즐거운 일들을 만나게 되면 그것을 자신의 현실적인 기분에 연관 지어 기뻐하며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으로 즐거운 일을 만날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안에서 그를 찬송하게 된다. 그 즐거움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여기서 말하는 찬송이 성경에 기록된 시편찬송(psalms)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자기 기분에 따른 종교적인 흥취를 돋우라는 말이 아닌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시편들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곧 진정한 찬송이 된다.

야고보서의 본문 가운데 기록된 ‘시편을 찬송하게 하라’(let him sing psalms)는 말 역시 기도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찬송의 주체가 됨을 말해주고 있다. 찬송은 개인 성도들의 종교적인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물론 찬송하는 성도의 감정이 소중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듭난 성도의 인격을 겸비한 거룩한 감정이어야 한다.

 

 

(3) 성도의 본질적인 교제

 

우리는 흔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주변의 다른 이웃들 없이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간들은 저들이 가지는 고유한 속성상 주변의 이웃과 더불어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가운데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불신자들의 사회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지만, 그 양상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라 하면서 다른 성도들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와 성도들의 기본적인 요건이라 할 수 있는 기도와 찬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성도들의 기도와 찬송 역시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연합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에 연관된 내용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6,17)

 

바울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상호작용에 관해 교훈하고 있다. 성도들은 서로 가르치며 서로 권면하는 가운데 여러 성도들이 더불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본질적인 교제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삶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더불어 하나님께 간구하며 찬양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서로 간 거룩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그것이 함께 교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성도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이다.

 

 

2. 병든 자와 교회의 장로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5:14-16)

 

(1) 병든 자의 자세와 그를 위한 장로들의 기도

 

야고보는 성도들 가운데 병든 자를 향해 특별한 권면을 하고 있다. 그것은 기도와 연관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점은, 야고보가 교회를 향해 편지하면서 장로들이 미리 알아서 병자를 찾아가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야고보는 교회에 속한 병든 자에게 교회의 장로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청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이는 장로들이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자발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 아니라, 병든 자가 교회의 장로들을 집으로 초청하는 것이 앞서 행해져야 할 일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로서 매우 중요한 직분자를 일컫는다. 즉 병든 자는, 소위 병 고치는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말씀사역을 맡은 장로들을 초청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 본문은, 교회의 장로들이 병든 자의 초청이 있지 않는데도 집으로 찾아가 기도하는 것이 합당한 절차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 사실은 병든 자에게 교회의 장로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병든 자의 올바른 교회관을 요구하는 것이며, 개인의 어려움을 교회에 맡기라는 요청이다. 이처럼 성도들은 질병을 비롯한 모든 어려움을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전적으로 맡기는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

 

야고보는 병든 자의 초청을 받은 장로들에게 그 병자를 위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도록 요구했다.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기름이 특별한 약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만족스런 답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외상(外傷)을 입은 경우라면 모르지만 내장(內臟)에 연관된 질병이라면 외부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 치료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데, 이는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기름을 바른다’는 사실은 다른 것들과 구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장로들이 실제로 병자에게 기름을 발랐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약효(藥效)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하여 맡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 특별히 명시된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도록 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도 기름을 바르고 병자를 치유하신 적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막6: 13).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병자에게 기름을 발랐다 할지라도 그것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항상 기름을 바르셨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는 기름으로부터 특별한 약효를 기대하셨던 것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자의 치유를 위해 기름을 바르는 행위에 의존할 필요가 전혀 없던 분이었다. 그는 질병 치료를 위해 특별히 효과적인 방편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적이 있으며, 야고보 또한 장로들에게 그 병자를 위해 기름을 바르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그것을 두고 '믿음의 기도‘라 표현했다.

 

그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병자를 위한 교회의 장로들의 기도가 죄의 용서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그 병든 자가 설령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용서받으리라는 점을 언급했다. 이는 장로들의 기도의 효력을 말해준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교회와 교회의 말씀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장로들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2) 죄를 서로 고백하라

 

야고보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질병과 연관 지어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는 성도들이 상호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이 과연 질병에 걸린 환자들끼리 따로 모여 죄를 고백하고 기도하라는 말인가? 만일 교회 내에 질병에 걸린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의를 기울여 유념해야 할 바는, 여기서 말하는 질병이 단순한 육체적 질병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회 가운데는 항상 고통을 겪는 병자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질병뿐 아니라 영적이며 정신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말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연약한 부분들을 서로 인정하며 자복함으로써 교회를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죄를 교회 가운데 드러내는 의미와 연관된다. 물론 이 말은 개인이 저지른 모든 구체적인 죄상들을 다른 성도들에게 낱낱이 드러내 밝히며 말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죄에 연약한 자기 모습을 고백적으로 드러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서로 간에 자신의 죄 된 모습을 고백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 교회 공동체를 위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순결유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을 통해 교회의 하나 됨이 드러나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교회 가운데 시행되는 성찬에 관한 교훈을 주며 그와 연관된 언급을 하고 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전11:29,30)

 

바울은 공적인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성찬에 관한 교훈을 주면서 약한 자와 병든 자 그리고 잠자는 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성찬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온전함과 하나 됨을 위한 본질적인 방편이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교회 가운데 속해있는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들을 일깨워야 한다.

 

우리가 위의 고린도전서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병든 자란 말이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에 걸린 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연약한 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영혼이 병들고 정신이 병든 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이런 연약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건강한 성도들이 그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 의인의 간구

 

야고보는 또한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a righteous man)은 교회의 장로들과 연관되며 또한 저들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본문이 말하는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될 때만 가능한 존재이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모든 형태의 기도가 반드시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종교적인 욕망에 의한 기도는 효력이 없을 뿐 아니라 신앙적인 의미 자체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염려케 하거나 욕되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잠언서 기자는 그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9)

 

잠언서 기자는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즉 올바른 기도는 인간의 욕망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룩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에 해당된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기도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지는 것이 기도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야고보는 본문 말씀 가운데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이, 종교지도자들이나 소위 기독교 위인들의 기도가 다른 일반 성도들의 기도에 비해 역사하는 힘이 더 크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인들의 정성 어린 기도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며, 열정적인 기도가 더 큰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또한 금식함으로써 최선을 다해 기도한다고 해서 더 큰 효력을 가져오거나 특별한 응답을 받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의인의 기도 가운데 역사하는 놀라운 힘이 드러나게 될 따름이다.

 

이는 사실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기도의 양식이나 외적인 형편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눈에 열정적으로 보이지 않고 적극적인 기도를 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조용한 기도를 들으신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의 자리에 서 있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의인의 편에 선 성도는 자기의 세속적인 욕망과 목적을 추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에 대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예수님의 이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 후 그 다음에 개인이 원하는 것들을 구하라고 하신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가장 적절한 것으로 채워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이다. 즉 참된 성도들이 구할 것은 오직 그의 나라와 의일 따름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인은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게 된다. 야고보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말한 것은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개념이다. 즉 인간들이 추구하는 욕망을 위해, 종교적 ‘의인’으로 분류된 어떤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채워주신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3. 엘리야의 기도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5:17-18)

 

 

(1) 선지자 엘리야와 이스라엘 민족

 

야고보는 의인의 기도를 말하면서 구약시대의 선지자 엘리야를 예로 들고 있다. 그는 엘리야가 우리와 동일한 성정(性情)을 지닌 인간임을 밝힘으로써, 엘리야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엘리야가 ‘의인’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모든 삶과 행동이 순결하고 무죄했기 때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에 순종하고자 하는 온전한 자세 때문이었다.

 

야고보는 의인이었던 엘리야의 기도를 언급하며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다.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아합 왕이 통치하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극도의 배도에 빠져 있을 때, 엘리야는 그들의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기근이 임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오늘날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채 세속화를 추구하며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한국의 기독교 조직이 멸망하도록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악한 죄에서 돌아서도록 기도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끝까지 배도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무서운 심판이 임하도록 간구하는 선지자 엘리야의 그 기도를 들어 응답하셨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땅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심각한 기근이 임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합 왕을 비롯한 배도에 빠진 자들로 말미암아 초래된 하나님의 징계였다. 그렇지만 아합은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엘리야를 향해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자라 말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고통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엘리야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왕상18:16-18)

 

엘리야와 아합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아합은 이스라엘 민족의 악한 왕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가운데 더러운 이방신 사상을 도입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다. 아합은 그렇게 하더라도 당시 주변의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 왕국과 민족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면 그것이 마치 백성들을 위한 것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불신앙적인 사악한 사고를 가진 아합 왕이었으므로 엄청난 흉년을 겪고 있는 중에 만난 선지자 엘리야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자라 몰아 부치게 되었다. 그는 그런 고통스런 환경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한 아합 왕의 더러운 죄악을 지적했다.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긴 것이 곧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이라고 말했다.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달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2)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단순한 그의 종교적 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지를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따라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기근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수년간에 걸쳐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인해 겪게 되는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백성들이라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만 했다. 고통 가운데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성숙한 참된 성도라 할 수 없다.

 

수년 간의 심각한 기근이 지난 다음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도록 하나님께 간구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살던 불신자들은, 기근의 고통이 심해질 때 회개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해져 갔다. 이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욱 큰 고통 가운데 신음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심한 기근이 끝난 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도록 엘리야가 간구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 되었다. 엘리야의 사역과 기도에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열왕기상17장과 18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징계를 요구하는 간구이든 용서를 위한 기도이든 모든 참된 기도의 응답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엘리야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자신의 욕망을 위한 기도를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달아 그 안에서 기도했던 것이다.

우리는 기도에 관한 모든 응답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도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리는 것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4. 돌이켜야 할 성도들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5:19,20)

 

 

(1) 일시적으로 진리를 떠난 자들

 

세상에 속한 인간들과 진리의 맛을 보고 배도에 빠진 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한다.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들에게 미혹되기 쉽다. 따라서 신앙이 성숙한 자들은 항상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명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에 익숙한 어린 성도들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인해 세상과 배도자들에게 쉽게 미혹된다. 그렇게 되어 그들은 일시적으로 진리를 떠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이면서 잠시 세상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진리를 떠난 자들이 근본적으로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인지 일시적으로 진리를 떠난 사람인지 관심을 기울여 살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배도에 빠진 것으로 보이는 자들을 복음 선포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배도에 빠져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지속적인 집착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복음을 선포하는 인내심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성숙한 교회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분명한 이단자들에 대해 어렵지 않게 분별해 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더 이상 성도들이 가까이 대해야 할 인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앙이 어린 성도들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복음전파라는 명분으로 저들과 가까이할 경우 배도자들 뿐 아니라 신앙이 어린 성도들마저 그에 대해 오해할 우려가 없지 않은 것이다.

 

 

(2) 죄인을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 가운데는 항상 어려운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 가장 안타까운 대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교회 안으로 들어왔던 성도들 가운데 다시 세상의 유혹을 받아 미혹된 길에 빠지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녀이면서 잠시 성도의 본분을 잃고 또다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미혹의 길에 빠진 죄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이 있다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성숙한 성도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도 배도자들의 유혹으로 인해 잘못된 길에 일시적으로 들어서 있는 자들이 많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그들을 찾아 깨우쳐 죄로부터 돌아서게 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교회에 주어진 임무이다. 비록 개인의 권면을 통해 그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공적인 사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올바르게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3) 성도의 견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게 되는 궁극적인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결정된 문제이다. 즉 인간이 태어나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구원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선택에 영원한 구원이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원래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파멸의 깊은 늪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한 사람씩 자신의 몸 된 교회로 불러내셨다. 그것은 인간들의 종교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는 범죄한 인간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에 의해 완전한 보장을 받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 자녀들을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기인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바는 구원과 사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나아가 인간의 구원과 사망은 하나님의 심판에 연관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로서는 개인의 궁극적인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사망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성숙한 교회는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분별력을 가지게 된다. 교회의 복음 선포가 항상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구원과 사망을 분리해내기 위한 구속사적인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를 통한 말씀 선포는 언약 가운데서 항상 이루어지며 주님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지속된다.

 

 

5.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

 

야고보는 편지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 공동체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통스럽고 힘든 형편과 즐거운 일들이 교차하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올바른 기도와 찬송을 이어가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는 고난을 당할 때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기도가 이루어져야 하며, 즐거운 경우에도 동일한 신앙의 자세로 찬송과 기도가 지속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나아가 성숙한 교회에서는 장로들의 사역을 통해 병든 자를 치유하고 연약한 자를 굳건히 세움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천국에 소망을 두고 함께 살아가게 된다. 그것을 통해 진리 안에 살아가야 할 성도들 가운데 일시적인 미혹에 빠져 잠시 동안 다시 세상에 빠진 자들을 교회 가운데로 불러들인다. 그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세우신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유지하는 일에 본질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모든 성숙한 교회는 타락한 세상의 유혹과 고통에 처한 성도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을 위해 교회의 직분자들은 최선을 다해 영원한 진리를 수호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써 지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속한 교회가 천상에 속한 거룩한 공동체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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