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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믿음과 행함/ 야고보서 2장 매튜헨리 주석

by 은총가득 2021. 2. 17.

매튜헨리 주석

 

가난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관심(야고보서 2:1-7)

 

야고보는 위의 구절에서 아주 부패한 습관에 대하여 책망한다. 야고보는 proswpolhfi,a - 즉 사람들을 대우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태도가 지닌 해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 준다. 이러한 해독은 초기의 기독교회에서도 자라나고 있던 악이었고, 오늘 우리가 사는 후대 사회에서도 기독교 국가들과 사회들을 부패시키고, 분열시키는 비참한 악이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다.

 

Ⅰ. 사람을 잘못 대우하는 죄에 대한 경고가 대체로 제시되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1절). 여기서 다음을 살펴 보자.

 

1.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이 충분하게 암시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진 자로서, 그것을 수락하고 받아들인 자이다. 그들은 이 믿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교리를 존중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통치에 복종하면서 모든 기대와 확신을 이 믿음에 걸고, 마치 보배처럼 믿음을 보존한다.

 

2. 야고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얼마나 영광스럽게 말하고 있는가! 그는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라고 부르는데, 이는 주님이 바로 그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의 형성을 나타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주가 되심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관계 맺고 일치됨으로 존경을 받게 될 것을 보여 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믿는다는 고백한 자들은, 그 영광 속에서 가장 가난한 신자들이 부자와 동등하게 참여하며 세상의 영광은 헛된 것이고 자신이 존경받기 위한 의도로 외적이고 세상적인 유익을 구하지 말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할 때에 인간에게 존경을 표시함으로 영광의 주님의 영광을 가로막거나 감소시켜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을 생각만 해도 이는 분명히 중죄임에 틀림없다.

 

Ⅱ. 이러한 경우에 대한 예가 여기에 기술되고 경계되어 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2,3절), 여기서 회당은 교회의 회중들 사이에 생기는 서로 다른 견해를 결정하기 위한 모임이거나 또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있을 때 그의 일을 결의하며 그 비난의 내용인 무엇인가를 조사하는 모임으로써의 의미를 지녔다. 그러므로 히랍어로 sunagwgh,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의를 행하기 위하여 모였던 그들의 회당과 같은 모임이었음을 나타낸다.

 

마이모나이즈는 말하기를(나도 렌톤 박사의 인용에서 발견하였지만) 유대인의 법률에는 가난한 자와 부자가 함께 자신의 문제를 변론할때에 부자만 앉고 가난한 자는 서거나 좀 못한 자리에 않도록 하지 않고 두 사람 다 앉거나 서게 하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규정이 야고보 사도가 말한 구절에 분명히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표현된 회당은 유대인들이 분쟁의 원인을 듣고 또 의를 실행하기 위하여 모였던 그들의 회당 모임과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 유대인의 회당 모임들에 대하여 책망과 중재의 기독교 회당 모임이 비교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말해진 회당이 그저 평범하게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모임으로써의 회당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하여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대로 그들에게는 죄라는 생각과는 상관하지 않고 사람의 지위와 출신 환경에 따라서 좌석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같은 습관을 통렬히 꾸짖는 야고보 사도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4절에 나타나 있는 "판단하는"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가볍게 넘겨 버리거나, 9절에 표현된 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다가는 율법을 범한 죄인으로 정죄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이제 실제의 예를 살피자. "너희 회당에" 입은 옷으로나 차린 용모로서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과(유대인의 회당의 경우처럼)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때에" 너희는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단지 좀 더 나은 외모와 출신 환경을 가졌다고 해서 편파적으로 대우하거나 잘못 판단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살펴 보자.

 

1.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 즉 부드럽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리고 가난하고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의 충성스러운 성도들을 가지고 계신다.

 

2. 신앙 안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가 모두 평등하다. 그 누구의 부유함도 그를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로 이끌지 못하며, 또 어떤이의 가난함이 그를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지도 못한다. 최고의 거룩하심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편파적으로 구별하지 않으시니 우리들 중 누구가 양심을 속이고 이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3. 세상적인 위대함이나 부요함을 치켜 올리는 지나친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에서 특별히 경계되어야 할 일이다. 야고보 사도는 그러한 무례함이나 무질서를 권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절바르게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 때때로 직위 여하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조금씩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으나 이같은 대우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진행에 영향을 주어서, 교회가 그 해가 할 일을 수행하며, 모든 비난을 참고 견디며, 경건을 도모함에 그 장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육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시온의 시민의 특성은 악한 자는 미워하고 주를 두려워하는 자는 높이어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만일 가난한 사람이 선한 사람일 때 그가 가난하다고 해서 그를 덜 칭찬해서는 안 되고, 만약 부자가 악인일 때(비록 그가 화려한 의복과 훌륭한 직업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이 부유함 때문에 그를 덜 책망해서도 안 된다.

 

4.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어떤 법칙을 따라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도록 허락된다면, 경건한 회당 안에서의 우리의 영혼과 행동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내부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타락하고 비열하면서도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 비록 초라한 의복을 입었을 망정 겸손하고 선하며, 하늘나라에 속한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외모로 판단하는 관점에서 볼 때 누가 그리고 옳다고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Ⅲ.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에 대하여 4,5절에서 볼 수 있다. 그 같은 행위는 불공평하고 불의한 일이며 가난한 자를 택하시고, (그들이 선한 사람일 경우) 영화롭게 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대항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멸시를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 이러한 죄 가운데는 부끄러운 편당심이 있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아니냐"(4절). 모든 사람에게 심각하게 제기되는 질문에 대하여 자기 양심을 따라 어떻게 실수없이 답변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여기에 주어졌다. 원본에 나타난 엄격한 표현에 의하면 이 질문은 "네가 차별하지 않느냐? 즉 이러한 차별 속에서 네가 거짓된 법칙에 근거하여 판단하여 계속해서 잘못된 책임이 네게 지고 있지 않은가? 법에 의하여 정죄된 불공정함의 책임이 네게 대하여 도전하지 않는가? 네 자신의 양심이 네가 죄 있음을 시인하지 않는가?"이다. 비록 대단히 타락한 상태에 빠져 있을지라도 우리가 고백을 하도록 양심에 호소하는 것은 크게 유익한 일이다.

 

2. 사람을 외모로 판단함은 우리의 생각속에 있는 악함과 불의 때문이다. 우리의 성격과 행동 방법들이 모두 편파적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흘러나오는 모체인 마음과 생각도 악하다. 따라서 "너희가 악한 생각으로 서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4절) 즉 너는 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불의한 부패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다. 네 속에 숨겨져서 네 판단에 작용하고 있는 사상을 발견하기까지 네 편파심을 추적해 보라. 그것이 분명히 악한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는 비밀리에 내적인 은혜보다 외적인 화려함을 더 좋아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 보이는 것들을 더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흉악함은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악이 폭로되기까지는 결코 참으로 그 완전한 모습을 분간해 낼 수 없다. 우리의 기질과 생활의 실수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생각속에 있는 악이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3.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커다란 죄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대하여 직접적으로 반대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5절)…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6절). 하나님께서는 너희들 중 아무도 존귀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늘나라의 후사로 삼으셨고, 너희가 따뜻한 말 한 마디도 없이 보살펴 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크고 영광스러운 약속을 주셨다. 이같이 행동하는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인 척하며 그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너희 속에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모든 관심으로 이런 일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너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선택된다는 것이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들의 가난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전제 조건이 된 것도 아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뿐이다"(마 11:5).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의 거룩한 경건을 존중하고 사모하게 권고하시되 그 경건의 외적인 화려함이나 세련됨이 아니고, 그 본질적인 가치와 미덕을 지니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을 택하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는 부요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로 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가난한 자가 바라야 할 소망이다. 선한 사업을 풍성히 해야 할 사람은 사실 부유한 재물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많이 가졌으면 가졌을수록 그 재물로 그만한 선한 사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작 믿음이 부요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 가운데 발견되고 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적게 가졌기 때문에, 미래의 더욱 부요한 세계에서는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지게 되리라는 기대를 믿으며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나아가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현재에는 가난할지 몰라도 하늘나라의 상속자라고 불리우며 상속자가 되기에는 충분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상속자라는 명칭이고, 또 앞으로 받게 될 말할 수 없이 풍부하고 큰 보상들이 축적되어져 있다. 다시 한 번 주시해야 할 것은 믿음이 부요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는 믿음은 영광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가르침 아래서 볼 때, 하늘은 왕국,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왕국이다.

 

우리는 1장 12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면류관에 관하여 읽었는데 면류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까지도 약속되어 있음을 여기서 알게 되었다. 그 면류관인 것처럼 하나님의 왕국도 영원히 계속되는 왕국일 것이다. 여기에 함께 제시된 이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이 믿음에 풍부하기만 하다면 현재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얻고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태도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알아야 한다.

 

4.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외모나 재산을 가지고 사랑을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큰 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부나 위대함에 따라 판단하는 일은 많은 악 영향을 끼치게 되며, 또 하나님과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6,7절). 부유함이 일반적으로 악과 병폐와 불경건함과 저주스런 행위의 자극제가 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너희가 견디어 내고 있는 재난들과 부와 권력과 세상적 명성을 지닌 사람들로부터 너희 믿음과 너희 하나님께서 받고 있는 비난을 기억하라. 이것은 너희를 끌어내리고, 너희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파괴하며 너희가 그로 인하여 불림 받은 그 귀한 이름을 더럽히기 위한 목적으로 너희에게 접근하여 너희의 죄가 마치 굉장히 크고 어리석은 죄로 보이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고귀한 이름이며, 그 이름을 힘입는 모든 사람에게 영광과 고귀함을 주는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의 법(야고보서 2:8-13)

 

야고보 사도는 외모로 사람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의 죄를 책망하며, 또 그 악이 그들을 정죄하기에 충분하리 만큼 거대하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이러한 과오가 어떻게 시정될 것인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복음 전파로써 이루어질 과업으로써, 꾸짖고 경계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모든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인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여기서 우리는

 

Ⅰ.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모든 태도를 바로 지도하기 위하여 주어진 법칙을 발견한다. "만일 너희가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8절). 야고보 사도가 가난한 자들에게 부자들을 멸시하도록 변론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의도가 남에 대하여 부당한 행위를 하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즉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미워하거나 무례하게 대해서는 안 되며,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성서가 우리의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대로 그들이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간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처럼 사랑하며, 이 법칙을 성실히 지키면 잘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하여 보자.

 

1. 그리스도인들이 지켜 나가야 할 법은 성경에 확정되어져 있다.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8절) 우리를 인도해야 할 것은 위대한 인간들도 아니고 세상적인 부유함도 아니며, 숙련된 사람들의 부패한 습관도 아니고 아직 진리의 성서뿐이다.

2. 성서는 이웃들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할 법으로써 우리에게 제시하는데, 오늘에 있어서도 그 법은 강력하게 실시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이 감소되기는커녕 그리스도에 의하여 더욱 존중되고 또 널리 전파되고 있다.

 

3. 이 법은 왕이 제정한 최고의 법으로써 왕 중의 왕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법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은 그처럼 존경받을 만한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상태는 억압되거나 구속되지 않은 자유의 상태로써, 이 상태가 이 법을 최고의 왕의 법으로 만들며 그들이 서로간에 행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규제를 이 법에서 받는다.

 

4. 이 최고한 법이 편파적으로 해석되어 이 법의 진정한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흉내내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그것이 인간들의 어떠한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변명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어떤 사람들이 부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게 된다면 그러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부자들에게 아첨과 편애하려 하며,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의 섭리대로 지위와 직책상 뛰어나게 하신 자들에게 특별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변론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주장하기를 그들이 자기들보다 못한 직책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에 관심을 갖는 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에 존경을 베푸는 것은 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돌보아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부당한 대우를 했을 경우에는 저들을 존경하는 행위가 자기들의 죄를 보상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Ⅱ. 이 일반적인 법은 특별한 법과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들 범죄자로 정하리라"(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든지 네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을 때 바라게 되는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가르쳐 주는 율법 중의 율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외적 조건에 따라서 교회를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너희의 행위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역기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율법과 함께 너희에게 내려주신 특별한 율법에 대하여 주시해야 한다.

 

이 율법으로 너희들은 내가 책임지워 준 일들에 대하여 지키지 못한 죄인으로 서게 "될 것이다. 이 법은 레위기 19장 15절에서 찾아 볼 수 있는대로,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이다. 더구나 바르게 설명되어진 최고한 법 그 자체가 그들을 정죄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법이 그들에게 가난한 자의 자리에도 있어 보고 부유한 자의 자리에도 있어 봄으로써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더 나아가서,

 

Ⅲ. 율법의 범위와 어느 정도까지 순종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최고한 법을 지켜야 하고, 한 특정 부분만 아니라, 이 법 전체를 다 중요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그들은 어떤 특별한 행위에 대한 이유로써 이 법의 한 부분만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910절)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생각될 수 있다.

 

1. 이것을 야고보가 서술한 경우를 참조하여 생각해 보자. 너희는 너희 이웃을 너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너희가 부자들을 존경했다고 변호하는가? 그러면 이와 똑같은 이유로 가난한 자들에게도 공평하고 마땅한 존경심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한 가지 점에서 저지른 잘못으로써 율법을 지켰다는 명분을 모두 망치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만일 그 하나에 고의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또 계속적으로 거치면서, 다른 조항들을 복종했기 때문에 그 잘못이 용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모든 조항을 범한 것이 되고 만다. 즉, 그는 율법의 선고에 의하여, 그가 책임있게 지켜 온 조항들까지도 범한 자로서, 그가 실제로 범한 죄와 똑같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모든 죄가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죄는 똑같이 입법자의 권위를 멸시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율법을 위대한 자에게 경고된 벌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선행이 우리의 악한 행동들을 대속한다고 생각하며 노골적으로 어떤 용서를 기대하는 행동이 얼마나 공허한 짓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2. 이제 먼저 서술된 것과는 또 다른 한 경우를 말해 줌으로써 위에 쓴 생각들을 좀 더 설명해 준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11절). 아마 어떤 사람은 간음이나 육체를 더럽히는 일에 대해서는 엄격하면서도 살인이나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 마음을 상케 하며 그들의 생활을 파괴하는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살인에 대해서는 몹시 두려워하면서 간음하는 일은 쉽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분부된 조항 이상으로 입법자의 권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같이 정죄하는 이유를 보게 될 것이다.

 

순종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를 살펴보아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될 때에 성립되는 것이고 불복종은 그것이 무슨 죄이든 간에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한 것으로써 정죄된다. 따라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한 가지 조항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모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권위를 모욕하는 것으로써 모든 조항의 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 따라서 너희가 이 오랜 율법을 바라보게 되면, 너희는 죄인으로 있게 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Ⅳ.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그리스도의 법대로 자신을 억제하고 처신하라고 제안한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12절). 이 말은 우리가 정당하고 공평해야 할 것만을 가르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까지도 베풀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부자들에게 천박하고 부당하게 굽실대는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해 준다. 이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복음은 하나의 율법이라 불리워진다. 복음은 한 법이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복음은 보상과 징벌이 첨부된 교훈을 지니고 있으며, 받게 될 위안과 함께 의무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선지자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시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희생당하시고 중재하실 제사장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다.

 

2. 이 법은 자유의 법이며, 따라서 이 법 아래서는 우리에게 멍에나 짐이 된다는 이유로 불평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복음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은 완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 법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모든 사물까지도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케 해 준다.

 

3. 우리는 모든 이 자유에 법에 의하여 판단되어져야 한다. 인간의 영원한 상황은 이 자유의 법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우리가 심판대 앞에서 정죄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구조의 손길이 펼쳐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복음이 옳게 인정한 사람에도 아무런 비난을 던지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므로 이 법은 우리에게 이 자유의 법에 의하여 곧 심판 받게 될 사람처럼 언행을 조심하도록 권고한다. 즉 우리는 복음의 시대에 와 있으며 복음의 의무를 인식해야 하고, 복음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대화는 복음의 대화가 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의 규정에 의하여 우리는 심판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복음에 의하여 심판 받게 되리라는 생각이 우리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에 특히 더욱 자비롭게 만들어야 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13절). 여기서 다음을 유의하라.

 

(1) 뉘우칠 줄 모르는 죄인에게 마지막 날에 오게 될 운명은 긍휼없는 심판이다. 그들이 마셔야 할 진노와 전율의 잔에 무슨 섞어 넣을 것이나 그 분노를 가라앉힐 것이라고 하나도 없고, 그 찌꺼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게 될 것이다.

 

(2) 지금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다.

 

(3) 긍휼을 베푼 사람들이 승리하는 경우도 있게 될 것이며 그들에게는 긍휼히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후손들은 마지막 날에 진노의 그릇이 아니면 긍휼의 그릇이 될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우리들이 마지막 날에 어느 편에서 발견되게 될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인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믿음과 행함(야고보서 2:14-26)

 

여기 2장의 후반부에서 야고보 사도는 자기들의 마음의 성향이나 삶의 진노는 그들이 고백하고 있는 거룩한 종교와 일치되지 않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공허한 신앙 고백만을 하면서 마치 그 고백이 자기들을 구원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과오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근거 위에 그들의 희망을 걸고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믿음만으로가 아니고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강조하여 증거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Ⅰ. 이 구절에서 발생하는 큰 문제는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을 어떻게 서로 조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인들과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상과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써, 그는 자주 강조하여 말하기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Amicae scripturarum lites, utinam et nostrae

 

─ 즉 성서에는 서로 다르게 보이면서도 이 부분과 저 부분이 아주 잘 일치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견해의 차이가 이처럼 쉽게 화해될 수 있다면 정말로 훌륭한 일일 것이다. 박스터는 말하기를, 다름 아닌 바울의 서신이 의미한 분명한 뜻과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과 야고보가 화해되기에 큰 난관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신앙 지상 주의자들이 주장하고 나선 일반적 견해가 박스터의 말 가운데서 발견되고 있고, 지식 있는 사람들이 야고보 사도의 동의를 얻기 위하여 생각해 낸 방법들이 많이 있지만 다음의 몇 가지만을 살펴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1. 바울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라고 말할때에, 그는 야고보가 말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행위를 말하고는 있으나, 또다른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인간들이 복음의 믿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모세의 율법에 복종하기 위하여 행한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한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를 한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로마서 10장의 앞부분에 분명하게 선언되어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복음에 복종하는 행위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는 건전한 믿음에서 생겨나는 적합하고 필요한 결과들과 열매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우리를 구원하고 의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대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그 확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교리에 반대되는 복음 이전의 율법의 어떠한 행위로써도 충분치 않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복음에 대한 믿음을 확장시키려 하고 있고, 야고보는 믿음에서 연유되는 참되고 필수적인 결과와 믿음의 역사함을 보여 줌으로써 마찬가지로 복음을 믿는 믿음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2. 바울은 야고보가 주장한 것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주장되고 제안된 선행에 대한 전혀 다른 사용법에 대하여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자기 행위의 공적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그들의 공적은 전혀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야고보는 믿음을 외치면서 그 믿음의 증거가 되는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들은 텅빈 공허한 고백만 하면서 그 고백이 자신을 충분히 의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러한 고백과 함께 선행의 필요성과 그 놀라운 중요성을 또한 알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한 조항을 다른 조항과 충돌시켜 그 일부분을 파괴해서는 안 되고, 또한 율법과 복음을 맞부딪쳐서 서로가 부서지게 해서도 안 된다. 복음을 외침으로 율법을 소홀히 여기는 자들이나, 율법을 강조함으로 복음을 소홀히 여기는 자들은 모두가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하여 나아가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그 믿음에서 생겨지는 열매가 또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3. 바울이 말하는 의인은 야고보가 말하는 의인과 좀 다르다. 바울의 의인은 우리들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입는 것을 의미하고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의로와지는 것이다. "네 행실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야고보는 말하였는데, 이는 네 행실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의 믿음이 의롭다는 것을 보여 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순전히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속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선행으로 인하여 인간들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임을 알게 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믿음을 설명할 때에, 그것을 "믿음의 역사"라고 하거나 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살전 1:3; 갈 5:6; 딛 3:8 그 밖의 많은 구절들)이라고 한 것을 야고보는 옳게 인정하고, 그것을 확고하게 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4. 의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의인의 시작에 대한 것이고 야고보의 설명은 그 완성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써 뿐이지만, 마지막 날에 우리의 의인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선행이 뒤따라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마 25:34)라고 주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Ⅱ. 이 구절들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있는 것들과 상충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므로, 이제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이 탁월한 구절들에서 특별히 더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도록 하자.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으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하자.

 

(1)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은 우리에게 참된 유익이 없을 것이다. 공허한 신앙 고백이 때로는 유익하게 보이며, 진실로 선한 사람들이 호감을 얻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수유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이 세상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은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 영혼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를 판단하여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아니면 해가 되는 것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은 마지막 날에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정죄됨과 파괴됨만을 가중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2) 어느 사람이 "믿음이 있다"는 말과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는 말은 서로 상이한 의미를 지닌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졌다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란 없기 때문에 야고보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본문의 의도는, 행함이 없는 주장이나 공론, 찬동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 따라서 본문은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입으로만 자기의 믿음을 자랑하지만, 이는 자기들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며,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빈약한 상태에 있는가를 속이는 일이다.

 

2. 사랑과 자선이 실제적인 원리이듯이 믿음도 실제적인 원리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배운다. 따라서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나 믿음은 모두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 인간은 자선의 행위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보이기를 무척 바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둠으로써 우리는 믿음에 합당하고 필요한 열매도 없이 믿음이 있는 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판단하게 될 것이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15-17절). 이와 같이 빈 말만 가득한 사랑이 당신이나 가난한 형제에게 무슨 유익을 줄 것인가? 당신은 이렇게 텅빈 말만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가? 당신은 사랑과 자비로움에 있어서 자신의 행위 없이도 할 바를 다 한 것처럼 여겼듯이 믿음의 고백에 있어서도 경건과 순종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17절).

 

 

우리는 텅빈 말로만의 믿음의 고백을 하기가 쉬우며, 또 그 고백만으로도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조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값싸고 손쉽게 믿을 수 있는 종교로써, 이러한 고백이 우리를 천국에까지 충분히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또한 자기들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것이다. 거짓 믿음은 거짓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증한 것이며 이 둘은 모두 참된 경건성에 대하여 죽은 상태에 있다. 당신들이 죽은 몸과 공허한 영혼 또는 공허한 마음과 행동 속에서 즐거워하며 만족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도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 만족하고 계셔야 할 것이다.

 

3. 우리는 행함이 없이 믿음 그 자체만을 자랑하는 믿음과 행함으로 증거된 믿음을 서로 비교해 보고 살펴봄으로써 이 비교가 우리 마음속에 주는 어떤 영향을 얻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여기서 받는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자만하는 위선자와 변론한다고 가정해 보라. "너는 믿음을 고백하고 네가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러한 자랑거리가 없으나 나를 변호해 줄 수 있는 행함이 있다.

 

이제 네가 할 수 있거든 행함이 없이 고백한 네 믿음의 증거를 내게 보이라. 그러면 나도 나의 믿음에서 연유된 행함을 너에게 보여 줌으로써 나의 믿음의 존재를 분명하게 증거해 보이겠다." 이것은 성경이 인간들에게 자기 자신들과 타인들을 판단할 때 하나의 본보기로 삼으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날에 이러한 증거를 따라서 심판하시리라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의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그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증명할 수 없는 일을 자만한 사람으로든지, 아니면 경건과 자비의 행위로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는 자로서든지, 어느 형태로든 드러날 것이다.

 

4. 여기서 우리는 헛된 공통적인 믿음과 지식에 지나지 않는 믿음은 사탄의 믿음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주시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야고보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여 선택한 믿음의 예는 모든 종교의 첫 번째 되는 원칙이다. "네가 무신론자들에 대하여 반대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며, 또한 우상 숭배자들에 대항하여 한 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면 잘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옳다. 그러나 네가 이런 상태에 머물러서 단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으로 속 내세운다면, 이것은 네게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믿고 떨기 때문이다(19절).

 

만일 네가 신조와 그에 대한 어떤 공론들을 단순히 동의함으로써 만족해 한다면 마귀들로 역시 그렇게 한다. 마귀들의 믿음과 지식이 단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떨게 만드는 데만 보탬이 되는 것과 같이 너의 공허한 믿음과 지식도 그러하리라." 떤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인한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히려 나쁜 결과로 씌어졌고, 사탄의 믿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사탄이 떠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다만 미움과 적대심에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우리의 신조를 되뇌이는 일만으로는 결국 우리가 사탄으로부터 구별되지 못하므로, 우리는 다만 복음이 지시하는 대로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고 그를 섬겨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사탄이 하지 않는 것들이며 할수도 없는 것들이다.

 

5. 우리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은 현재에서 심판 받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간주되어야 할 것을 배운다. "아아 허탈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절). a;nqrwpe kene. - 즉 허탈한 사람으로 Raca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같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그 말은 한 개인에게 씌어지거나 분노의 결과로써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서에서 사용될 의미는 선행은 하지 않고 믿음만을 자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대한 염오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고 비열한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영적인 생활을 증명하는데 필요한 모든 행위의 공허함 때문만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길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허한 믿음이 고백만을 하는 신자들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6. 우리는 여기서 의로운 믿음이란 행함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라합의 두 예로부터 배우게 된다.

(1) 첫 번째 예는 믿음의 조상이며 유대인들이 특별히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의롭게 됨의 으뜸가는 예로써 아브라함을 들 수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1절). 바울은 또한편 이렇게도 말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이 두 가지 견해는 히브리서 11장을 살펴 볼 때에 그 조화를 찾을 수 있는데 즉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들은 둘 다 야고보가 말하는 선행들을 동반한 믿음들이었으며 또한 의롭게 하며 구원하는 믿음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한 일로써 그가 진실로 믿었다고 증명되었다. 이러한 행실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건 속에 들리어졌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창 22:16, 17).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라고 기록되었다. 이 구절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구약성서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구약 성서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23절)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 되었다. 이러한 행동이 뒤따르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거룩한 하나님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과 특별한 사랑과 친교의 관계를 가지게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리어지고 그렇게 여겨진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가장 큰 영광이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사랑과 우정의 관계에 들어가서 되고) 믿음으로만은 아닌 것이다(24절). 즉 공허한 주장이나 고백 그리고 복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으로써가 아니고 선행이 뒤따르는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다. 위에서 야고보가 주장하는 바를 좀 더 보충 설명하기 위한 설명과 예증 외에도 우리는 여기서 기록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에서 많은 유익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아브라함이 받은 것과 같은 축복을 받고자 하는 자는 그의 믿음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아니한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만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2]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되는 행함이란 자기 부인의 행함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에 대한 행함이어야 하고(아브라함이 그의 독자를 제물로 바친 것처럼) 우리의 육신과 혈기를 만족케 하거나 우리의 흥미를 돋구는 행함, 그리고 우리 자신이 상상하거나 궁리해서 만들어낸 결과여서는 안 된다.

 

[3] 하나님을 위하여 경건하게 목표로 삼고 성실하게 결심하는 일은 마치 실제로 수행되어진 것처럼 하나님께 용납되어진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비록 실제로 아들을 희생 제물로 각을 뜨지는 않았으나, 그는 그의 아들을 드린 것과 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과 결심 속에서 전부 수행되어진 일이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완전히 수행되고 완성된 제사로써 받아들이셨다.

 

[4] 마치 믿음의 진리가 믿음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만들고, 믿음의 행위는 믿음을 완전에 이르도록 성장시킨다.

 

[5] 이같은 믿음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벗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참으로 믿는 영혼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안락하고 즐거우며 기쁜 일이다. 거기에는 하나의 뜻과 하나의 마음이 있을 뿐이며, 그리고 상호간의 만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믿는 자들을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고 그들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

 

(2) 행위를 통하여 그 자신의 믿음이 의롭게 되고 또 우리들에게도 본보기가 되고 있는 두 번째 예는 라합의 경우이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5절) 전자 아브라함의 예는 그 일생동안 훌륭한 믿음으로 유명했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후자인 라합의 경우는 믿음이 아주 보잘 것 없고, 한결 저속한 수준에 속하여 있으며 죄인이라고 지적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는 가장 강한 믿음이나 가장 보잘 것 없는 믿음이나 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이는 의로 여겨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주석자들은 본문에서의 기생이라는 말이 라합의 고유한 이름이라고 해석하고 또다른 주석자들은 단순한 호스테스이거나 아니면 정탐꾼들이 숨어들 수 있었던 주막을 지키고 있는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라합의 사람됨이 수치스럽게 알려져 있었던 것은 대단한 신빙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가 묘사된 것은 가장 악한 사람일지라도 이같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행위가 없을 때에 그의 믿음은 그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이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신실한 믿음으로 증명된 것은 그 생명의 위험 가운데서도 정탐꾼들을 맞아들이고, 또 다른 길로 그들을 나가게 하여 준 행위로써이다. 여기서 다음의 것을 살펴 보자.

 

[1] 죄인을 회개시키고 변화시키는 믿음이 놀라운 능력을 볼 수 있다.

 

[2] 실천하는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게 되고 이로 인하여 그의 자비와 은총을 얻게 된다.

 

[3] 큰 죄를 용서받을 때, 거기에는 마땅히 자기를 부인하는 위대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 라합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 백성의 유익을 자기 나라의 안전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겨야 했다. 라합의 이전에 지녔던 지식들을 버려져야 하고 이제까지 걸어온 삶의 방식은 전부 포기되어져야만 하며 의롭다 여김을 받기 이전에 자기 믿음의 표시가 되는 증거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라합이 의롭게 된 후에라도 그녀는 자신이 지녔던 이전의 특성들을 기억해야만 하는데, 이는 불명예를 들추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풍부하신 은혜와 자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비록 그녀는 의로와졌으나, 여전히 기생 라합이라고 불리운다.

 

7. 이제 야고보는 전체적으로 통털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영혼(Spirit)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이 말씀은 다르게도 읽혀지는데, 어떤 이는 "숨이 끊어진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라고 읽는다. 그리고 그들은 호흡이 생명에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이듯이 행함은 믿음에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라고 한다. 또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읽는다. "혼(soul)이 없는 육신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 또한 죽은 것이라." 그들은 혼이 떠난 몸이 아무런 행동도 없고 아름다움도 지니지 못한 단지 몸서리쳐지는 시체일 뿐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공허한 신앙 고백은 아무 소용없이 다만 몸서리쳐지는 불쾌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쪽의 극단으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 왜냐하면 아무리 선한 행동들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선행들을 뿌리와 원칙이 결핍되어 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되어지고 하나님께 대한 복종에서 되어지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용납 받을 것을 목적하여 이루어짐으로 선한 행실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2) 가장 그럴 듯한 믿음의 고백이라도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이것은 초록색의 잎새가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의 뿌리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믿음은 뿌리요, 선행은 열매이다.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다 소유하여야 할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한편이 없이 어느 한편만을 가지고도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우리가 믿음과 행동을 함께 지닐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언제까지나 이 두 가지를 함께 지니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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