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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정말로 믿음이 자라고 싶은가?(약 1:2-4)/ 외

by 은총가득 2021. 2. 17.

정말로 믿음이 자라고 싶은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연단과 시험과 유혹

한 간호사 초년병이 그 병원에서 가장 유명하고 노련한 외과의사의 큰 수술을 도왔습니다. 수술이 끝날 때쯤에 그녀는 수술에 사용한 12개의 솜뭉치 중에 11개만 회수 되었고 나머지 한 개는 아직 환자의 몸속에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의사는 열두 개 다 꺼냈으니 이제 봉합하면 된다면서 바늘과 실을 집어 들었습니다. 간호사는 “절대 지금 꿰매면 안 됩니다. 분명히 아직 하나 남아 있습니다. 환자의 안전부터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끝까지 우기며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자기 발밑에서 솜뭉치 하나를 꺼내 보이며 “앞으로 내 수술에 전속으로 도와 달라. 같이 열심히 잘해 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그녀의 성실성과 책임감을 시험해보려고 일부러 하나를 몰래 숨겼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신자에게 이런 방식의 시험을 허락할 때가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갈고 닦게 만들어서 정금같이 바꾸려는 시험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고난 가운데서 기도로 인내하면서 주의 율례를 깨달아 믿음이 한 단계 높아지게 하는 것은 연단(鍊鍛, Trial)이지 시험이 아닙니다.

예화에 나오는 시험은 문자 그대로 Test(試驗)입니다. 의사는 간호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현장에서 확인해보려고 문제 하나를 제출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신자에게 정말로 굳건한 믿음이 있는지 또 그 믿음을 실제로 삶에서 행사하고 있는지를 보시길 원합니다. 따라서 신자로 어떤 특별한, 주로 급하고 힘든 경우에 맞닥뜨리게 해서 즉각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것이 시험입니다.

비유컨대 연단은 학생이 밖에 나가서 놀거나 빨리 자고 싶은 유혹(시험이 아님)을 이겨내고 밤늦게까지 학기 내내 꾸준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해당됩니다. 시험은 그 공부한 실력을 중간시험, 기말시험, 입학시험 등을 통해 점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성경에 좋은 예들이 있지 않습니까? 욥에게 엄청난 재앙을 당하게 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음을 포기하는지 사단과 내기를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더러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든지 아니면 풀무 불에 던져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만들었습니다. 노년의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지 두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그 시험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통과하기까지는 길고도 힘든 연단의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믿음이 그토록 강해진 것은 아닙니다.

학생이 공부를 쉼 없이 해야 하듯이 신자가 믿음을 성숙시키는 것도 평생을 두고 이룰 과업입니다. 또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어려운 과제가 학생에게 주어지듯이 연단도 신자의 신앙연륜이 깊어질수록 더 무거워집니다. 한마디로 연단은 신자가 지닌 당장의 믿음에 비해 버거운 부하(負荷)가 걸리는 고난을 통해 주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겐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평생 끊이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성숙의 합격점에 완벽하게 다다를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온전하심 같이 신자도 온전하길 바라며 모든 신자의 인생을 끌어가는 것입니다. 또 신앙 성숙이 당신께서 보기에 어느 정도 성취된 단계마다 수시로 시험을 제시합니다.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반응하느냐, 아니면 세속적 인본주의적으로 접근하는지 여실히 드러나게 만드는 시험입니다.

거기다 신자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이 문 앞에서 우는 사자 같이 항상 웅크리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라면 배고파 죽을 지경인지라 그 덮치는 힘이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죄악으로 타락한 세상은 화려하게 치장하고서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자기 품에 안기라고 온갖 교태를 떱니다. 이는 또 다른 종류의 시험, 정확히 말해 유혹(誘惑-Temptation)입니다. 결국 신자가 싸울 영적전투는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을 잘 통과하면서 시험과 유혹을 잘 분별하여 시험에는 합격해야 하고 유혹은 물리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세포적인 신앙

간혹 예수를 믿으면 고난이 없어지거나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전도를 받을 때에 모든 수고와 짐을 덜어준다는 거짓 약속에 속았고 교회 출석 후에도 계속해서 기복주의적인 설교만 들어서 그렇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과 피조세계가 받아야만 하는 징벌인 고난이 신자라고 결코 비켜가지 않습니다. 아니 살펴본 대로 일생을 두고 연단을 통과해야 하며, 수시로 시험도 받아야 하며, 유혹은 단 한 시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신자의 일생은 세상 사람의 형편이나, 믿기 전의 자신과 비교해 오히려 더 고달플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경우 연단, 시험, 유혹을 믿음으로 구분 대처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믿음 자체가 없으니 그냥 자기 기분대로 삽니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기준 자체가 신자와 다르지만 성공은 자기 공로로, 실패는 남과 세상 탓으로 돌려 버리면 그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에겐 이 셋이 아예 적용되지 않습니다. 연단은 누구나 겪는 힘든 세상사요, 시험은 자신의 판단과 의지력을 자랑할 기회요, 유혹은 즐겁게 사는데 필수적인 오락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으니 그분이 그들 믿음을 성숙시키거나 시험해볼 근거라곤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사단 또한 가만 놔두어도 스스로 죄악의 노예가 되어 있기에 따로 유혹하고 훼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이 셋을 잘 분별하여 그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불신자는 고난이 닥치면 그저 힘들어서 속히 탈출할 궁리만 합니다. 신자마저 그런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응답해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 외에 영적으로 자란 것이 없습니다. 또 작은 환난을 이겨내었기에 다음의 큰 환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며 그렇게 된다고 해서 믿음이 성장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배짱이 는 것일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도리어 즐거워할 수 있어야 정말로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연단의 도착지가 믿음이 정금같이 변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환난이 닥치면 어서 빨리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그치면 기도자 스스로도 자신의 믿음이 자라고 있다는 인식은커녕 믿음을 자라게 하고 싶다는 소망마저 없는 셈이지 않습니까? 대신에 이렇게 열심히 잘 믿는데 환난을 주시는 하나님이 야속해지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환난을 허락했는지 그분의 뜻은 알려하지 않고 빨리 구해달라는 투정만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연단 중에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현재 겪는 고난을 연단으로 간주하지 않고 단지 고난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주시는 연단이라는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혹은 한 번이라도 그분의 뜻을 물을 것입니다. 그 대신 순전히 환난이라고만 간주하면 시급한 탈출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연단을 겉모습만으로 환난이라고 여기는 이유 또한 너무나 간단합니다. 신앙을 갖는 일차 목적이 자신을 안락하고 풍요롭게 만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범사를 자기를 힘들게 하는지 아닌지의 기준으로만 판단합니다. 자신에게 즐겁고 기쁜 일이 생겨서 육신적 정신적으로 아무 불편이 없으면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 반대가 되면 무조건 징계입니다. 신앙이 너무나 단세포적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주면 단번에 울음을 그치고 주지 않으면 마냥 우는 꼴입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믿음 자체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믿음이 자라는 것도 그분에 의해서입니다. 믿음을 소지하여서 자라게 하는 주체는 분명 신자이지만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에 혼자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자라게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만나는 사람, 사건, 환경 모두가 그의 믿음을 자라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그 가운데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방식이 바로 연단입니다.

따라서 연단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면 믿음이 자라지 않게 됩니다. 굳센 의지력으로 인내하고 어서 빨리 환난을 끝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연단을 통과하는 필요조건일 뿐입니다. 연단을 통해 믿음이 자라게 만드는 충분조건은 따로 있습니다.

바꿔 말해 열심히 뜨겁게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좋아진 표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뜨겁게 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며 믿음이 자란 한 증표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환난이 닥치면 신자라면 자연히 뜨겁게 기도하게 됩니다. 심지어 불신자도 천지신명에게 그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자랐다면 열심히 기도하는데 반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비유컨대 의사가 대학을 갓 졸업한 간호사더러 자꾸 아주 어려운 수술에 참여하라고 명하는 것은 연단입니다. 그런데 너무 정밀하고 어려운데다 시간도 오래 걸리는 수술인지라 “왜 나 같은 경험도 없는 자더러 이 고생을 시키지?”라고 의심과 불평을 잔뜩 품고 어서 빨리 수술아 끝나라고 참고만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본인의 실력은 자랄 길이 도무지 없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수술에 불려도 온갖 핑계 대면서 빠지려고만 할 것입니다. 그 유명한 의사와 개인적 교제를 나눌 기회도 점점 없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간호사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 같은 신참을 이렇게 큰 수술에 참여시켜 주다니 너무나 감사하고 큰 영광이다. 정말로 정신 바짝 차려서 하나에서 열까지 놓치지 않고 배워야지. 앞으로도 어떤 어려운 수술이라도 불러만 주면 절대 빠지지 말아야지.” 당연히 수술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고 정밀한 수술이라도 피곤한 줄 모를 것이며 실력은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범하는 신앙상의 가장 큰 오류는 종교적 행태를 취하기만 하면 바른 신앙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뜨겁게 하고 성경을 줄줄 외우면 신앙이 자란 표시거나, 신앙이 자란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세상 출세만을 위한 기도는 아무리 철야와 금식을 겸해도, 또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예수를 부인하는 자료를 찾으려는 비교 종교학적 연구라면 오히려 불신앙이지 않습니까?

재차 강조하지만 신앙을 갖는 목적이 자기 평안에만 둔다면 환난을, 그 대부분이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임에도, 어서 빨리 끝내달라는 기도 밖에 할 줄 모릅니다. 또 그렇게 기도해서 응답을 빨리 받아내면 믿음이 좋고 신령한 신자로 대우 받습니다.

처음 믿은 신자는 주로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또 그 응답도 비교적 잘 됩니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믿음부터 신자에게 확고하게 심어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두려워 말고 기도부터 시키려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생기고 나서도 기도하는 목적을 하나님이 문제 해결할 수 있는 분인지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면, 다른 말로 어서 빨리 환난을 끝내달라는 기도만 한다면 참으로 곤란하지 않습니까? 제게 믿음이 없으니 믿음부터 심어달라는 셈입니다.

기도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하나님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방식”이 되었던 반드시 문제가 해결된다고 신자 스스로 이미 전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신자가 자신의 계획을 멋대로 세워서 하나님을 그 일을 수행하는 종처럼 부려먹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떤 방식이 되었든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 없이는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단순히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만으로 기도해선 안 됩니다. 그분은 내가 원하는 때와 방식보다 분명 더 좋은 때와 방식으로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는 비결

하나님이 연단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문제를 당신께서 직접 해결해 주시기보다는 신자더러 그 자라난 믿음으로 문제에 당당하게 맞서 스스로 해결하라는 뜻이 됩니다. 신자 독단으로 온갖 현실적 방안을 다 동원해서 자기 힘으로 해결하라는 뜻은 물론 아니지만 말입니다.

인간 만사는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섭리 주관 통치하십니다. 그러나 신자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은 신자와 함께 그 문제를 처리해 나가면서 신자의 믿음도 같이 자라게 합니다. 신자더러 기도하도록 하고 또 기도한 후에 믿음으로 그 일을 이겨나가게 만드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신자가 스스로 행하는 것 같아도 당신의 궁극적인 계획과 전혀 상충하지 않게끔 인도하십니다. 신자에게 연단을 주신 당신의 목적은 신자가 바르게만 반응하면 완벽하게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올바른 기도를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먼저 그 기도 중에 문제 해결의 지혜를 심어주십니다. 아무리 환난이 중(重)해도 인내하는 힘을 주시고 또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도록 심령에 당신의 충만함으로 채우십니다. 나아가 당신만의 신령한 방안을 동원해서 단번에 상상도 못하는 은혜와 함께 고난을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는 기도응답방안이 당신의 크기만큼 질적 양적으로 무한대로 예비 되어 있습니다.

연단을 통해 믿음이 자라면 가장 먼저 세상의 어떤 풍파가 닥쳐도 요동치 않고 평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천국의 영광을 소망하여 하늘의 신령하고 거룩한 가치를 이 땅에 실현케 됨으로써 환난 중에 오히려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현실적 형편이 부요하든 궁핍하든 그리스도를 위하고 증거하는 소명에 붙들린 일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럼 환난의 모습을 띤 연단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를 열심히 해서 인내력을 키워야 합니까? 아닙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주신 연단이니까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불경한 마음을 가져선 안 되고 무조건 순종해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연단의 목적이 나를 자라게 하는 것이게 그 목적에 전적으로 동의하여서 감사함과 경외함으로 감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앞에서 비유한 간호사처럼 정말로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도 무엇입니까? 인내만 온전히 이루면 문제 해결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영어로 따지면 Test가 아닌 Trial(연단)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어지고 싶다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환난 중의 신자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은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정말로 믿음이 자라고 싶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라서 하나님 보시기에도 합당하고 기쁜 사람이 되고 싶은 소원이 진짜로 있다면 어떤 연단이 와도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당연히 인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자라게 해주시겠다는데 신자가 괴로워할 이유라곤 없어야, 아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초년병 간호사가 어려운 수술에 불려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윗, 모세, 사무엘, 바울, 같은 인물로 바꿔주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기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뻐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받은 고난이 너무 중해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과 그들이 고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락만 추구하기에 고통이 따른다면 자신이 그런 의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도 거절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구체적으로 미리 알아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러는 것은 그리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궁핍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진짜로 원하는지부터 먼저 정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자라게 하는 특별한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문제는 신자가 가진 근본 태도입니다. 진짜로 믿음이 자라길 소원하면, 믿음의 내용이 문제이긴 하지만, 자라게 됩니다. 또 정말로 소원하는 일이라면 그 이루는 방법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다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결국 조급증이 문제다.

작금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음으로 평생토록 하는 일이라고는 환난을 없애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어서 그러라고 독촉하는 것뿐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환난을 없앨 뿐 아니라, 환난도 주실 수 있고 사실상 그 환난을 주셨던 분인데도 그 사실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아니면 그런 진리를 알아도 항상 잊고 있거나 짐짓 잊으려 듭니다. 영적 전투의 첫걸음은 신자에게 환난이, 정확히는 연단이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정확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흔히 믿음으로 환난을 한 번이라도 잘 이겨내면 다음에 어떤 환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잘 견딜 것 같이 여깁니다. 아닙니다. 불안하기는 여전합니다. 그동안 믿음을 자라게 하기 위해 한 일이라고는 기도하여서 하나님이 해결해줄 때까지 인내한 것뿐인데 어떻게 자기 믿음으로 다음의 더 큰 환난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그저 힘들게 인내만 했던 이전의 과정을 이번에도 겪어야 하는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지금껏 환난 중에 기뻐해 본 경험이 전혀 없기에 다음 환난에 기뻐하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합니다.

어떤 중한 환난을 만나더라도 믿음으로 이겨내고 또 믿음이 자랄 수 있는 관건은 따로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확신하기에 가슴 설레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기에 당신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는 그 환난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더러 현실적 형편이 어떻게 되든 하나님의 영광부터 소원하게 되는 그 때까지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원리는 신자에게 닥치는 또 다른 영적도전인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을 이겨내는데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 말은 또 많은 신자가 이 둘에 대한 영적 반응에서 범하는 실수 또한 연단의 경우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이미 바뀐 근본 신앙 자세로, 방법이나 비결이 아닌, 대처하여 스스로 이겨내어야 하는데도 단순히 기도하고 말씀을 읽다보면 자연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쉽게 말해 신자의 눈앞에 닥친 시험과 유혹 그 자체를 하나님이 몽땅 없애주길 바랍니다. 또는 자신에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없다가 갑자기 생기거나, 약했지만 기도로 아주 강해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연단은 장기간에 걸친 훈련입니다. 시험과 유혹은 이미 눈앞에 닥쳐있는 당장 풀어야할 과제입니다. 시험은 하나님께로, 유혹은 사단에게 온 것만 다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평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연단이며,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시험과 유혹입니다. 시험과 유혹 그 자체로는 평소실력이 확실히 다져지기는 해도 없었던 실력이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이 시험 점수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 않습니까? 나쁠 때는 더 열심히 공부하여 다음에 잘 치면 됩니다. 최종 결과는 대학 혹은 취직 시험에서 결정됩니다. 벼락치기 공부로는 한두 번은 성공할지 몰라도 매번 그럴 수 없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시험과 유혹도 벼락치기 기도와 말씀으로 이기려드니 한두 번은 성공해도 패배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자연히 자꾸 내 믿음은 왜 이렇게 자라지 않는지, 혹은 하나님은 왜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지 등의 의심과 불만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

학생이 장기적으로 성실히 공부하여 한 계단씩 실력을 쌓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일단 시험만 끝내고 보려니 벼락치기 공부를 합니다. 신자도 같은 의도로 위급할 때만 기도하고 말씀 봅니다. 모든 영적 실패의 주범도 결국 조급증이라는 것입니다. 연단(고난)은 물론 시험과 유혹도 어서 빨리 벗어나고픈 열망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하면 하나님이 몽땅 빨리 없애준다는 맹신(?)에 빠져 있고, 또 얼마나 뜨겁게 오래 매달리는 기도를 할 수 있느냐가 믿음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적전투를 승리하는 비결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길은 정작 따로 있습니다. 강한 믿음보다 정확한 분별력입니다. 그 분별력 또한 평소 실력이지 벼락치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하나님께로, 유혹은 사단에게서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기대나 예상과는 반대입니다. 하나님께로 오면 당연히 풍요하고 좋을 것이며 사단의 경우는 반대라고 여기는 그 기대 말입니다.

유혹은 거의 매번 달콤하고 화려하고 풍성합니다. 그러니 유혹은 유혹이라고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미 넘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시험은 거의 매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드는데 문제는 포기해야 하는 쪽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통과하려면 주로 좋아 보이는 쪽을 포기해야 하므로 희생과 수고가 따르며 힘들고 아픕니다. 유혹과 시험의 이런 특성상 유혹에는 쉽게 넘어가지만 시험은 잘 이겨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둘 다 실패가 잦다는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선 하나님이 참 짓궂지 않습니까? 우리 죄의 본성이 생생하게 남아 있고 아직도 믿음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데도 너무 어려운 숙제를 매번 던져주지 않습니까? 조금 더 쉽게 금방 답을 알 수 있고 또 고통도 따르지 않는 시험을 주고, 유혹도 악한 냄새가 진동하도록 나타나주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면 시험도 유혹도 아닙니다. 믿음도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대학생이 되도록 덧셈 뺄셈만 하게 하면 오히려 학생이 더 신경질 낼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신자들이 그렇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공부해서 실력을 늘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대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초등학교 과정과는 천양지차가 나야 합니다. 시험과 유혹도 갈수록 더 어려워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에게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기분 내키는 대로 갖고 놀거나, 갈수록 고통을 주며 즐기는 새디스트는 결코 아니니까 말입니다.

시험과 유혹은 거의 동시에 유사한 모습으로 올 수 있으며, 때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건의 두 측면일 수 있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것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며, 시험을 통과하면 유혹은 벌써 멀리 떨어져 나가 있습니다. 욥기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함께 내기를 걸듯이 한 사건 안에서 시험과 유혹이 공존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시험과 유혹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해선 안 됩니다. 각각의 경우를 두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먼저 따져 봐야 합니다. 모든 경우의 수(數)를 대입하여 컴퓨터 시뮬레이션 하듯이 현실적인 결말을 예측 계산해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영적 전투를 살피고 있지 세상 출세를 믿음으로 쟁취하는 방법을 알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탄은 신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렇게 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풍성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하나님의 허락 하에 신자에게 보장해줍니다. 그러나 필연적이고도 분명한 결과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점차 그 삶과 인생에서 퇴색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시험은 그 정반대입니다. 비록 고통스런 과정을 겪어야 하고 때로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큰 희생을 치러야 하지만 자신의 영혼은 점점 더 새로운 생명력으로 활기차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경외, 사랑, 감사, 찬양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도 진지하며 충만하게 됩니다. 정말로 그분과 동행하는 것만이 삶의 최고 기쁨이요 인생의 첫째, 아니 유일한 목적으로 변합니다. 따라서 유혹과 시험을 만나면 자기가 선택한 어떤 대처방안이든 그 결말이 하나님과 자신이 더 친밀해지고 그분의 뜻이 실현될지 여부로 세심히 따져본 후에 실행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연단, 시험, 유혹, 어느 것이 되었던 영적 전투를 신자가 잘 치러낼 수 있는 관건은 하나뿐입니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있기에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그분의 거룩한 계획이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는지 여부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아니 그런 확신이 없으면 성령의 인도가 따르지 않습니다. 기도와 말씀도 아무리 신령하고 경건해도 일회성 종교행사로 그치게 됩니다.

신자란 그래서 예수를 믿은 직후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당연히 세상의 어떤 환난도 비록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충분히 감내하고 그분이 주신 소망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영적 전투에 실패하는 유일한 이유도 기도나 말씀에 등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전혀 높여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높여지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자신이야 어떻게 되던 교회가 연약해지고 성도가 실족하는 일에 염려가 가장 앞서지 않는다면 영적전투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박신 목사/http://www.nosuchjesus.com/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

시험이나 시련 자체가 즐거울 리 없다. 악한 의미의 시험이 아니라 선한 의미의 시험이나 테스트도 기뻐할 사람은 없다. 학생들이 시험만 없다면 더 공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시험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떻게 신자는 시험에 기뻐할 수 있는가? 시험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란 말씀은 학대를 쾌감으로 느끼며 살아가라는 말씀인가?

먼저, 여기 나오는 시험이 어떤 것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여기 시험이나 시련이란 헬라 말은 신약에서 두 가지 기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디모데전서 6:9대로 내적인 것으로 죄에 의해 유혹을 가리켰을 수 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다음으로, 이 말은 외적 시련 특별히 박해를 가리켰다(벧전 4:12). 그리고 몇몇 구절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다 포함하였다(마 26:41).1) 이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하였으니 그 시험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다 망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험을 만나거나 시련을 당해서 기뻐하라는 권면은 본문이 유일한 구절은 아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5:3-5 고난 중에 기뻐한다 하였고 베드로전서 1:6, 7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 하였다.

그러면 신자는 시험과 시련, 박해와 핍박을 즐거워하란 말인가? 신자는 이 세상에서 학대를 쾌감으로 느끼는 피학대 음란증 환자라도 되라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한마디로 `아니오' 이다. 신자에게도 시험이나 시련, 고통이나 박해는 하나도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는 사실 다 나쁜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사실상 죄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는 시험이나 박해를 기대하고 바라라는 말씀은 아니다.

여기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난다고 했는데 그 만난다는 말은 빠진다는 말이지 기다렸다가 맞이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질병(약 5:14)이나 재정적인 손실(약 1:9),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박해(약 2:6)에 빠지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또 누가복음 10:30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처럼 강도 만난 가련한 사람을 가리킨다.2) 그러므로 신자는 여러 가지 시험을 기다렸다 당하면서 그 시련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즐겁지 않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본문이나 다른 성경구절에서도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 의하면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므로 온전히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련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선하신 목적이 있음을 알고 그 목적을 실현하려고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련을 기쁨으로 대처해야만 한다. 이렇게 이 서신의 두 가지 주된 사상은 여러 가지 시련을 인내하는데 대한 상급이다.3)

따라서 여기서 기쁨은 연습 시간의 운동선수와도 같은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육상 선수는 큰 게임에서 승리를 내다보고 날마다 달리기의 어려운 고통을 참고 인내한다. 좋은 결과를 기대해서 기쁘게 참는 것이다. 오늘의 고통 속에서 성실하면 내일의 영원한 상급을 얻는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11-12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인 있다 하셨다.4)

그러므로 신자가 세상에서 환난 중에 기뻐하는 것은 환난 자체를 즐기거나 시련의 고통을 즐기는 학대에서 쾌감을 느끼는 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련과 환난을 통과한 후에 있을 신앙의 성숙, 신앙의 인격 그리고 주님 앞에 서서 받게 될 상급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1. Douglas J. Moo, James(IVP. 1988), p.59
2.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New Testament(Victor Books, 1983), p.820
3. James Adamson, The Epistle of James(Grand Rapids: Eerdmans, 1979), p.53


시험에 대한 교훈(약1:1-18)

 

인생에는 여러 시험이 있다. 멸망에 이르게 하는 유혹적인 시험이 있는가 하면 인생을 더욱 완숙하게 하는 목적적인 시험이 있다. 이런 시험들을 잘 이겨내어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야고보는 권면하고 있다.

 

1. 믿음의 시련(약1:1-4)

서신 서두에서 수신인과 발신인을 밝히고 있다. 서두에서 밝힌 발신인 야고보는 누구이며, 그의 호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신인인 12지파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여러 가지 시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믿음의 시련을 이겨낸 인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시험의 목적

이 서신의 저자는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자신을 형의 종(노예)이라고 한 표현은 그가 예수님을 육체의 형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철저히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서신의 수신인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이다. 마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하는 듯 하지만 이 당시에도 이미 12지파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메시야 시대에 회복되리라 예언된 이스라엘 12지파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발견한 것이라(렘3:18). 약1:2의 시험은 멸망케 하는 유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목적이 있는 시험이다. 이 시험의 목적은 성장시켜 주고 단련하게 한다. 이 시험의 결과는 인내이며 이는 인간을 온전케 한다.

 

2) 시험을 통한 교훈

이 서신은 어느 특정한 교회에 쓰여지지 않았다. 즉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오늘날에도 적용이 되어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오늘 우리에게 행한 주님의 서신인 것이다. 또 우리가 시험을 만났을 때일수록 원망, 불평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지혜를 구하라(약1:5-11)

 

시험을 당한 자에게 야고보는 지혜를 구하라고 한다. 그러면 어떤 지혜를 구해야 하는가? 지혜를 하나님은 어떻게 주시는가? 그리고 어떻게 지혜를 구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야고보는 낮은 자와 부한 자에게 각기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가?

 

1) 고난 속의 지혜

메튜 헨리는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올바르게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고난 속에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지혜도 아니며 배부름을 위한 어리석은 지혜도 아닐 것이다. 이런 지혜를 하나님은 아주 단순하게 주신다(약1:5). 그러나 조건은 있다.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약1:6,8). '두 마음을 품는다'는 의미는 두 주인을 섬기는 불충직한 하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6:24)에서 알 수 있다. 야고보는 가난한 자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를, 부한 자에게는 겸손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미천한 자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피로 산 귀한 존재이다. 부한 자는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팔레스틴에 불어오는 열풍에 금방 시들어 버리는 꽃의 화려함을 깨달아 삶을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2) 고난을 극복하는 지혜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고난에 처할수록 기도를 올바르게 해야한다. 무조건 고난을 피해 가려는 습성은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지혜롭게 이겨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어려움을 피해 다니고 순간 순간 잘 되려는 심정은 무속 신앙의 기복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이 세상 것을 자랑하지 않을 겸비함을 갖추어야 한다.

 

3. 승리의 면류관(약1:12-18)

시험에 관련한 내용이 두 번 반복되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시험받는 자가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 내부의 근본적인 죄성과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죄악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1) 욕심으로 인한 시험

시험, 시련을 이겨내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고대 세계에 면류관은 왕권을 의미하고 승리와 명예를 뜻하였다. 그러므로 시련 그 자체는 불행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영광에 이르는 길이 된다. 그러나 약1:13의 시험은 자기 내부의 욕심에서 나오는 시험이다. 이 내부의 욕심에서 나오는 죄성의 특징은 핑계이다. 아담과 하와가 각각 자기 죄에 대여 핑계를 댄 것처럼 욕심에서 비롯된 죄성은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시험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욕심에서 비롯된 죄의 심각성은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선하시고 거룩하시다(약1:17). 시험과는 관계가 없다. 이런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2) 욕심에 대한 책임

현대 자본주의 특징 중 하나는 소비자의 구매 충동을 유발하기 위해 욕심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나은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이기적 욕망에 빠지기 쉽다. 이런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타인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기를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욕심의 시험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고 한다. 이런 위기에 처할 때 우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인간이 시험을 피해 살아갈 수 는 없다. 다만 자신에게 닥치는 시험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이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것은 인간 내부에서 올라오는 욕망의 유혹이다.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돈, 섹스, 명예 등의 욕망을 좇아 살아가고 있다. 이 대열에 끼어들지 않으면 소외되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부모, 국가, 하나님 등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욕심이 죄를 낳고 결국에는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1. 야고보서에서 반대의 대상

① 야고보는 바울을 반대하였는가? 얼핏 보기에는 야고보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을 때 그는 롬3:28, 롬9:32, 갈2:16의 중심적인 바울의 진술들에 반대하는 변증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 바울이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밑받침하는 것으로 인용하였던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말씀인 창15:6의 주석에 비추어 야고보가 2:21 이하에서 자신의 명제를 변증적으로 전개하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인상은 더욱 밑받침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속이는 것이다. 롬3:28에 표현된 원리는 야고보에 의해 다루어진 표어와는 다른 말로 표현되었다. 롬3:28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가 없는 믿음을 통한 칭의를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변증은 바울의 명제가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된 표어를 향한 것이었다.

② 야고보는 이단저인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태도, 즉 하나님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형이상학적 이론이 되어버린 기독교에 직면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론을 너무도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 이상 행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확힌의 기독교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생겨날 수 있다. 그것은 지성주의를 통해 질식사하는 생명 없는 정통과 신앙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세상에 연합하여 살아가면서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 버리는 자유주의일 수도 있다. 야고보서의 저작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볼 때 그것은 두 번째 세대의 전형적인 문제였다. 더욱이 야고보의 출신이기도한 합리적인 전통에서 그것은 생소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항한 야고보의 변증은 신약에서 눅6:46에 나오는 말씀의 편집을 통해 마7:21과 같은 진술로 확대 해석한 마태와 가장 유사하다고 하였다

 

2. 야고보와 바울

① 야고보는 해이해지고 습관적이 되어버린 기독교인을 향하여 행위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들의 특권과 갈라디어서 3장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하는 유대주의화된 그들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즉 바울은 율법이라는 기독교 이전의 길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의 참진리를 피력하였다. 반면 야고보는 해이해진 기독교적 신앙을 향하여 살아 움직이는 실천적인 믿음을 강조하였다.

 

② 야고보가 자주 사용한 단어는 믿음으로, 이 믿음은 유대교적 바탕 위에 기독교적 행함이 있어야 된다고 말하였다. 반면 바울의 행함은 어떤 문맥과도 적합하지만 믿음과 관련해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이차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더 낫다. 바울에게는 믿음은 그 내용의 기능이었다.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도록 스스로를 허용하는 정도만큼 믿음을 가지고 있다. 믿음은 말씀의 창조였다(고후4:4,6). 믿음은 그 내용의 힘에 의해 사랑을 통해 역사하였다(갈5:6).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롬1:5)으로서만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행함'이라고 부른 것을 바울은 의의 열매 또는 성령의 열매(빌1:11 ; 갈5:22)라 불렀다. 때때로 바울은 이 열매를 행위라 지칭하기도 하였다(골1:10). 그러나 일반적으로 바울은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모세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의 행위에 대하여 행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야고보에게 믿음은 랍비신학에서처럼 다른 행위들과 나란히 있는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유형의 태도, 믿는 행위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유형의 태도가 그에 걸맞는 행실, 즉 행함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그토록 애써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위'라는 용어의 서로 다른 용법과 관련하여 바울에게 '행위'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야고보는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 부른 것을 '행위'라는 용어로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고보는 '행위'를 모세 율법의 의미로 말한 적이 결코 없었다.

 

③ 이러한 용어 사용의 차이를 알면 우리는 야고보와 바울간의 내용적이고 신학적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야고보가 행위에 관하여 말하였던 것을 바울이 의의 열매로 말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야고보에게 동의했을 것이다. 그에 걸맞는 행위를 통해 드러내 보여지지 않는 믿음은 의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고전6:9 ; 고전10:5-13). 물론 바울은 이 순종의 결여를 행함 없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순종이 없는 곳에 과연 믿음이 존재하는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본서의 저자는 1장 1절에서 밝힌 대로 야고보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야고보가 4명이나 등장하며 초대교회 안에서도 이 이름은 자주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10:3)와 사도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눅6:16)는 성경에 단 한번씩 언급되었으므로 일단 본 서의 저자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두 명의 야고보 예수의 12제자중의 하나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행12:2)와 주의 형제 야고보(마13:55, 행1:13, 고전15:7)를 본 서의 저자라고 보고 있다. 먼저 언급한 12제자 중의 하나인 야고보가 본서의 제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 행12:2에 A.D. 44년경 유대 분봉왕 아그립바1세(Herod Agrippa I, A.D. 39-44) 순교 당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본 서에는 바울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유대인 성도에게 믿음에 따른 행함을 강조하고 있어 바울의 선교(A.D. 46년 이후) 이전에 기록될 수 없는 내용이므로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불린 예루살렘 총의회 의장 격으로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활동한 야고보(행15장)로 볼 수 있다. 또한 행21:17-25, 갈2:12에 나타난 그의 실천적 신앙과 일치하고 있다.

이런 그가 1절에서와 같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한 것이다. 당시의 로마 제국의 통치아래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랑의 교재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권면한 교훈적 내용이 많아 '신약의 잠언'이라고도 불린다. 잠언과 유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심(약1:5, 잠2:6)
말에 대한 경고와 당부(약1:19-20, 잠29:20-21)
의의 열매(약3:18, 잠11:30)
세상 자랑에 대한 경고(약4:13-16, 잠27:1)
죄와 허물을 덮는 사랑에 대한 권고(약5:20, 잠10:12)

야고보서의 특수한 언어학적인 문체는 종종 수사학적인 의문법이나 생동적인 직유법(直喩法)과 생생한 예화, 상상적인 대화, 그리고 독자들을 전체 또는 그룹으로 보면서 끊임없이 설득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형제들아',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와 같은 표현들이 14회 나오고 '너희 죄인들아', '너희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죄인들아', '너희 부한 자들아'는 표현들은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주후 60년경에 저술되어 180년경에 번역된 후 특별히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헬라어 성경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96년 잠니아회의(the Council of Jamnia)에서 저작자 문제로 제외 되었으나 성도들 간에는 영감 된 책으로 계속 인정받아왔다. 그리고 그 후 A.D. 397년 제3차 카르타고 회의(Council of Carthage)에서 신약 정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후에도 잡음이 있었으나 칼빈은 이 책에 대해서 '나는 이론의 여지없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책을 배척할만한 이유를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흔히 야고보서를 행위만을 강조한 책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시련을 겪고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지키게 하기 위한 말씀이었지, 결코 믿음 없는 행함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이런 주제는 바울뿐만 아니라 베드로 그리고 예수님도 강조하신 것이다.

 

1:1 문안 인사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당시에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에비온파(Ebionites)를 생각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한 선상에서 언급하며 연결하고 있다. 야고보 !Iavkwbo"(야코보스)는 자신이 '종'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기쁨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야고보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서 난 친 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행15:13, 행21:18).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열두 지파'라는 표현은 믿음의 이스라엘을 표현하는 구약서부터 내려오는 용법이다(창49:28, 출24:4, 민1:4). 이스라엘 민족이 흩어지게 된 처음은 열 지파가 포로로 끌려갔을 때 아시리아 제국은 이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리시켰다. 그리고 이 제국이 멸망하게 되면서 더 멀리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번 예루살렘 멸망이후 팔레스틴 이외의 소아시아를 비롯해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믿음의 형제들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흩어졌다. 이런 집단을 통틀어 '흩어진 무리'(요7:35, 행2:5)라고 표현했다. 여기서도 크게는 흩어진 전체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나 가깝게는 스데반 순교 이후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1:2-4 시련을 이기라 2절 내 형제들아 ajdelfoiv(아델포이) "형제"로서 호격 2인칭으로 사용한 이 용법의 단어는 본서에서 15번이나 등장한다(약2:1, 14, 약2:1, 5, 약3:1, 10, 12, 약4:11, 약5:12, 19). 이는 수신자와의 같은 동족 안에서 따뜻한 사랑 애를 느끼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같은 형제로서 사용되었다(출2:11, 신15:2).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 peirasmoi'"(페이라스모이스)은 "시련, 도전, 역경"으로 내면적인 '시험'이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시련'(trial)을 말한다. 이러한 시련은 "여러 가지"로 계속해서 만나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이런 시련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은혜 역시 수 없이 풍부하게 나타난다(벧전4:10). "만나거든" peripevshte(페리핖토) "직면한, 둘러싸이다"로 사용되었다. 눅10:30의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즉 '시련'은 피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로 담대히 맡아 이길 것을 강조하고 있다.

 

3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련'을 만날 때 왜 기뻐해야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결론부터 말하자만 '인내'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현재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서 즉시에서 기쁨을 가지라는 것은 무모한 부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것은 인내를 만들어 믿음이 견고히 된다면 기쁨이 되는 것이다. "인내" uJpomonhvn(휘포모넨)은 "견고"로 변역해도 좋다. 즉 인내는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고 확실하게 다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롬5:4바울은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함으로 "인내"를 원인적인 위치에 두었으나 야고보는 "인내"를 시련의 과정을 거친 결과로 보고 있다. 이런 표현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저자들의 생각에 따라 바울은 시련을 중요시한 반면 야고보는 고난 자체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4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tevleion(텔레이온)은 '끝'을 말하는 tevlo"(텔로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끝까지 e[rgon(에르곤) "이루라, 수고, 행위"로 참고 견디라는 말이다. 이 단어는 '온전'으로 롬12:2, 고전13:10, 엡4:13, 약1:17, 25, '완전'으로 골2:28에 나온다.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온전" tevleioi(텔레이오이)는 "성년"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하는 것으로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 믿음이 온전한 어른과 같이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이 뜻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약1:5-11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 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고난을 성도에게 그 고난이 축복이라는 점은 즉시 깨닫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중에는 누구든지 지혜를 간구하게 된다. 어려움이 없을 때는 지혜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지혜를 요구하게 되는데 칼빈은 여기서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의 조명을 우리에게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후히" aJplw'"(하프로스) "풍성하게"는 '책망하지 않고', '인색함이 없다'는 뜻이 함축된 의미의 단어이다. 저자는 "꾸짖지 아니하시는"으로 독자들을 안심시키면서 구할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너무 자주 귀찮게 하거나 구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간절히 그리고 끈질기게 구할 것을 촉구하신 바 있다(마7:7, 눅11:9).

 

6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기도는 어떤 기도이든 간에 믿음으로 드려져야만 한다(마21:21, 막11:24). "의심" diakrinovmeno"(디아크리노메노스) 어근단어인 diakrivnw(디아크리노) "철저하게 분리하다, 구별하다"로 어떤 일을 놓고 실익을 저울질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성경 RSV는 '망설임 없이'로 번역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요동" rJipizomevnw/(리피조메논) "바람에 요동하는" 이리 저리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두 마음을 품은 상태를 말한다(행10:20).

 

7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본 절의 처음에 mh; (메)가 있음으로 문장 전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에 ga;r(가르)로 "그러므로, 왜냐하면"으로 연결되어 앞 절의 '요동하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8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 divyuco"(디프쉬코스)은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오는 단어로 야고보가 만들어낸 용법으로 보이며 이후에 교부 시대에는 이 단어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이 단어와 더불어 "정함이 없는" ajkatavstato"(아카타스타토스) "변덕스러운" 뜻으로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도 신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의 사람을 말한다. '두 마음'이란 '세상의 욕심'과 '하나님의 나라의 일'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음을 말한다.

 

9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낮은" tapeino;(타페이노)는 '굴욕감을 느끼는 초라한 신분'을 말하는 것으로 물질적으로나 세상의 신분이 종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동일한 시민이다(엡2:19). 아울러 세상의 신분에 매여 있는 자들에게 굴욕적인 사람을 살 것이 아니라 "높음" u{yei(휩세이)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적 자녀 됨의 신분을 말한다(요15:15, 계3:21).

 

10절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부에 대해서는 절대 자랑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요 궁극적으로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칫 물질과 세상에서의 신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착각하기 쉬운 것이 부한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는 이것을 경계할 것을 권면한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예수께서 "재리의 유혹"(막4:19)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성경에서 자주 사용된 표현으로 부자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됨을 일깨워 준다(시102:11, 사40:6, 7, 고전7:31, 벧전1:24).

 

11절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같이 쇠잔하리라 저자는 이사야 40:7-8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표현으로 인간의 짧은 생에는 '풀의 꽃'으로 시들어지는 연약성을 지적한다.


"뜨거운 바람" kauvswni(카우소니)는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시로코'라는 뜨거운 남동풍으로 이 바람이 불어오면 곧장 채소와 식물들이 말라죽곤 하였다(욥1:19, 눅12:55). 이 단어는 마20:12비유에서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더위"에도 사용되었다.

 

1:12-15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러한 용법은 성경에서 흔히 사용된 것(시1:1, 32:1, 잠8:32, 34, 사56:2)으로 예수께서도 사용하셨다(마5:3-11). "시험" peirasmoi'"(페이라스모이스)은 2절에서 사용한 "시련"과 같은 단어로 시험보다는 [시련]으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 본 절은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의 '시험'(temptation)과는 다른 뜻이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인정하심을 받은" dovkimo"(도키모스) "인정된, 입증된"의 뜻으로 3절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으며 금속물을 불에 단련시켜서 얻어낸, 제련된 것을 말한다.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은 통치자의 왕관이나 고전9:25의 상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대속 되고 이후에 부활하신 새 생명을 말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13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시험" peirazovmeno"(페이라조메노스)은 2, 12절에 나오는 '시련'(trial)과 다른 '유혹'(temtation)을 말한다. !Apo; qeou'(아포 데우)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의 근원, 시작점이 하나님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들은 시험을 받을 때 자신이 아브라함이나 욥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시험받는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시험을 허락하신 적은 있지만 하나님 자신이 악한 시험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2, 12절에서 말한 그런 시련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악한 시험을 만드시지도 않으셨으며 또한 그런 시험(유혹)을 하지도 않으신다. 아울러 하나님 자신도 그런 시험을 전혀 받지도 않는다.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그렇다면 이런 시험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욕심" ejpiqumiva"(에피뒤미아스) "악한 것에 대한 열망"(롬7:17-23, 갈5:16-21, 엡2:3, 살전4:5)으로 "미혹" deleazovmeno"(델레아조메노스)되기 때문이다. 이 뜻은 "함정에 빠지다"로 사냥할 때의 올가미나 함정, 낚시할 때 물고기를 유혹하는 낚시 밥에 물려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을 뜻한다.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야고보는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것을 비유하여 죄가 욕심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설명한다. "욕심이 잉태한즉"은 문학적인 표현이고 "죄를 낳고"는 의학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는 죄는 어떤 특정한 하나가 죄가 아니라 죄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생겨나게 되고 이것은 점점 커져서 결국은 사망에 이른다는 점진적 단계로 설명했다. "장성한즉" ajpotelesqei'sa(아포텔레시데이사) 성경에서 여기서만 언급된 단어로 야고보가 죄의 결과로 이끄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로 만들어 사용한 것 같다. 이 뜻은 "결국은 끝내다, 마치다"는 말로 RSV에서는 '종착역에 다다르면'이라고 번역했다. 표준새벅역과 현대인의성경은 '죄가 자라면'이라고 했다. 좀더 의역한다면 [죄가 성장하여 결국은] 또는 [죄가 성장한 끝은]이라고 해도 된다. "죽음" qavnaton(다나톤)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8:51)와 대조되는 말씀이다.

 

1:16-18 모든 것의 창조자요 증여자이신 하나님 16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 Mh;(메) "...하지 말라" 기본 불변사로 금지를 말하는 완곡 어법이다. "속지" plana'sqe(플라나스데) "방황하다, 빗나가다, 죄를 짓다"인데 같은 단어로 고전15:33, 갈6:7에 사용되고 '오해'(마22:29, 막12:24, 27)로 '미혹'(골6:9)으로도 사용되었다. 야고보는 "사랑하는" ajgaphtoiv(아가페토이)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한 위로와 간절함으로 권면한다.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선물" dovsi"(도시스)는 dovs(도스) "주다"(마6:11)에서 나온 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동을 말한다. 13절과 대조되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악한 것으로 시험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온전한 선물"이다. 온전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그분에게서 오는 것뿐이다(약3:15, 요3:31).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헬라어의 oujk e[ni(우카 엔)은 "전혀 아니다. ...이"로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e[ni(우카)는 직설법 현재형으로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러하시다는 뜻이다. 세상에 비추이는 태양과 달은 회전(자전과 공전)하면서 그림자가 나타나며 어두운 밤도 되지만 하나님은 참 빛이시므로 변화가 없으시다(말3:6, 요일1:5).

 

18절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를" hJma'"(헤마스)가 두 번 나오는데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뜻이다(엡1:4-5). 둘째는 초대교회 야고보 시대의 성도들에게 은유적인 표현으로 구약의 '첫 열매'(레23:10)가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처럼 드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법은 소중하고 먼저 흠 없이 드려지는 제물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뜻을" boulhqei;"(불레데이스) "의도하다, 결의하다"로 원문에는 이 단어가 본 절에 맨 앞에 나타난다. 이 뜻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단어이다(엡1:11, 벧전1:3).

 

1:19-27 성내기를 더디 하라 1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알거니와"는 원문에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게 나타난다. 하나는 $Wste(오이테)로 명령법으로 나오고 다른 사본은 #Iste(이스테)로 직설법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본을 따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개역성경의 "알거니와"는 #Iste(이스테)로 번역한 것이며, 현대인의성경은 '이것을 명심하십시오'로 $Wste(오이테)를 옮겼다. 우리는 두 경우를 모두 생각하여 수신자들이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다시 명령한다고 볼 수도 있다. 저자는 본 절에서 세 가지로 지켜야 할 것을 권면한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하나님의 말씀 듣는 일은 미룰 것이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들어야 한다.
말하기는 더디하며 말을 더듬거리라는 뜻이 아니라 짧은 생각에서 쉽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성급함을 경계해야 한다.
성내기도 더디하라 "성내기도" ojrghvn(올겐) "충동, 격노"로 생각 없이 충동적인 화냄을 말한다. 골3:8의 '분과'같은 단어이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20절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성내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며 고전13:4 '사랑은 온유하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야고보는 더렵혀진 옷을 벗어버림과 같이 "더러운 것" rJuparivan(흐뤼파리안) "불결한, 부도덕한" 악을 내어버리라고 권면한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기'(사64:9) 때문이다. "넘치는" perisseivan(페리세이안) "남은 것, 과다 량"을 말하는 것으로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흘러 넘치는 것과 같이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사1:18) 많은 상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고 난 후 이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히 속죄가 되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성내는 것'과 같은 죄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까지 모두 벗어 던져 버릴 것을 권면한 것이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도" lovgon(로곤) "말씀"이 이미 마음에 심겨졌다. "마음에 심긴"은 사람의 마음에 말씀이 떨어질 때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말씀을 받고, 뿌리가 내리고, 토양을 뚫고 나와 '성령의 열매'(갈5:22)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능히" dunavmenon(뒤나멘온) "할 수 있다"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지금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22절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원문에 본 절 처음에 나오는 Givnesqe(기네스데)는 "너희는 ...임을 확신하라"는 뜻이다. 말씀을 "듣는 자" ajkroatai;(아크로아타이)는 정기적으로 설교나 강의를 들었으나 제자가 되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약4:17).

 

23절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에 대해 은유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보는" katanoou'nti(카타노운티) '뚫어져라 쳐다보는'사람에 비유했다. 당시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어른어른 거리는 자신의 모습처럼 확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 것이다.

 

24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단순히 말씀을 듣고 간 사람은, 동으로 만든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이 자신의 모양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곧 잊어버린다. '잊다, 무관심하다' ejpelavqeto(에펠라테토)로 단순 과거형을 사용하여 처음부터 말씀에 큰 관심 없이 대충 듣고 곧 가서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25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본 절 처음에 oJ de;(호 데)로 24절을 가리키며 '그러나'로 대조하여 설명한다. "들여다 보고" parakuvya"(파라쿺토) '몸을 안으로 굽혀'인데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을 말한다. 어떻게 실제로 말씀을 적용할 것인가, 실천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말씀을 보는 자 이다.


"자유" ejleuqeriva"(엘류데리아스)는 "복음"을 가리킨다. 예전의 율법은 자유가 아닌 강제적인 법이었다. "온전한 율법"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 놓으신(렘31:33) 새로운 언약의 율법 즉 '복음'을 말한다.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경건하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본 절에서만 나오는데 qrhsko;"(드레스코스)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종교적인 의식에 빠져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던 것을 연상케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마16:6)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재갈 먹이지" calinagwgw'n(칼리나고곤)는 말을 나오는 데로 하는, 절제되지 않은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사29:13)와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para; tw'/ qew'/(파라 토 데오)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이다.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26절의 '경건'은 반대로 더러운 경건이라는 뜻이다. "고아와 과부"는 세상에서 제일 소외된 사람들로 언제나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나타난다(시68:5). 예수님과 과부와의 기사는 마12:42-43, 눅21:2-4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고 한 것과 눅2:36-37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늙었더라 ...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와 눅4:25-26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을 인용한 것과 눅7:12-13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의 나인성의 과부와 눅18:3의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기도의 열심을 촉구하는 비유에서 사용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도 우리를 요14:18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약속하셨다.<http://kcm.co.kr/bible/kor/jam1.html#jam01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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