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__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
신앙은 인생의 가장 뚜렷한 분기점이 됩니다.
신앙이야 말로 인생 전체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나를 추구하는 패러다임을 하나님을 추구하는 패러다임으로 바꿔 놓기 때문이죠. 그보다 더 큰 변화는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죠. 이 세상은 끝없이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우리 인간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변화의 목적은 나를 더 추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패션이건 예술이건 학문이건 지식이건 우리는 나를 추구하는 데 이 모든 것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 바른 신앙은 인간을 뿌리째 변화시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불가피하고 불가역적인 변화입니다. 내가 진정 누구인지를 아는 이 변화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잘 사는 법을 알게 됩니다. 정말로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 변회를 경험하기 전까지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잘 사는 길은 남보다 잘사는 것입니다. 의식주를 비롯한 물질적인 부와 번영의 축복을 기준으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수준,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언제나 조금 더 소유하는 데 관심이 많고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을 보면 그 순간 나의 만족과 기쁨도 사라지고 맙니다.
나 자신이 통째로 변하는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 바른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목적이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진 것과 내 손에 쥐어진 것을 비교해서 만족감을 추구하는 모습이 사라집니다. 절대적 기준 앞에 서게 되면 상대적 기준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인간과 인간의 비교는 덧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기준에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입니까?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잘 사는 것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첫 설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과거엔 사람들이 만나면 “식사하셨습니까?"가 인사였지만 지금은 “요즘 바쁘시지요?"가 인사가 되었습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무조건 빨리 가니까, 무조건 잘살기만 바라니까 너도나도 바빠졌습니다. 더 많이 바쁠수록 중요한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비록 속도가 느릴지라도 목적지를 향해 바로 가는 것이 제대로 가는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는 '무조건 잘되게'가 아니라 '바르게 되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남들 보란 듯이 하는 기도도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바르게'와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대표적인 종교 행위인 기도에 대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잘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바르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그리고 나 자신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기도를 배우지 않으면 기도하면서 더 악해질 수 있습니다. 기도에 위선이 끼이면 사람이 점점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 안 하는 사람보다 더 악할 수가 있고 더 못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___마 6:9
기도는 어떻게 시작합니까?
기도는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군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모르던 과거엔 천지신명에게 기도했습니다. 천지신명은 누구입니까? 대상이 불분명합니다. 나무나 돌이나 쇳조각으로 만든 우상에게 하는 기도는 그 대상이 제대로 듣는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오래 하고 많이 하고 반복해서 주문을 외웁니다. 흔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신념으로 하는 겁니다. 기도의 양과 응답의 수준이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동기가 잘못되면 정성을 더할수록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빠'입니다. 아람어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성 '아바'를 '파테르'라고 해석해서 오늘날 '파더' 즉 아버지'로 해석한 것인데 정확한 표현은 '아빠'입니다. 예수님은 '아빠'를 먼저 부르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이 아빠라는 호칭이야말로 예수님이 하신 기도의 독특한 표현이며, 이것이 예수님 전과 후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므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___롬 8:15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고,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이 아빠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목적__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끝은 우리가 순간순간 눈앞에 닥치는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___마 6:13
시험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시험(test)과 시련(trial)과 유혹(temptation)입니다. 여기서는 유혹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믿음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그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시련과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시험과 시련은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유혹은 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로 유혹합니다. 심지어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도 유혹하는 손길을 늦추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졸면 당합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당합니다. 그 모든 것이 시험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시험은 겪어야 하고 시련은 이겨 내야 하지만 유혹은 피해야 합니다.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___약 1:12-14
야고보는 시련을 견디라고 독려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나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시험과 혼동하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유혹당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사기꾼들은 이 욕심, 탐심을 기막히게 이용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외할머님이 한 냥짜리 금비녀를 빼주고 파카 만년필 50개를 얻어 오셨습니다. 물론 다 가짜지요, 속이 다 빈 것들인데 집에 와서 큰돈 벌었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1950년대 일인데 지금도 언론에 계속해서 비슷한 일들이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실소합니다.
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바르게 살기 위해섭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을 못 이깁니다. 악을 못 이깁니다. 바르게 기도하지 않으면 잘 살기 위해 기도하고,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기도하다 결국 바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 열심히 해도 바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유혹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악을 못 이기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는 기도는 하면 할수록 내 생각, 내 욕망, 내 나라, 내 뜻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는 기도의 틀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 반드시 이대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칫 이대로만 항상 기도하다가 이 주기도문조차 주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마지막 송영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이 고백은 누가복음에는 안 보입니다. 마태가 이 기도문이 예배 때 사용될 수 있도록 덧붙인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 송영을 기록하지 않았다 해도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하고 반드시이 송영을 드렸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송영을 통해서도 나의 나 된 것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어떤 것인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다음 말씀은 기도의 핵심을 다시 짚어 주시는 예수님의 강조점입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___마 6:14-15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형제와 자매 간에 다투는 것을 보고 타이르는 부모의 심경을 느낍니다. 제발 좀 다투지 마라. 제발 좀 서로 용서해라, 너희들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렇게 으름장을 놓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낍니다.
기도 왜 합니까? 여전히 잘 살기 위해서입니까? 예수님은 바로 살기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살기 위해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하고, 바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고, 바로 살기 위해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하고, 바로 살기 위해 유혹과 악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라고 다 알려 주신 뒤에도 후렴처럼 다시 말씀하십니다. 제발 서로 용서하고 살아라. 서로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서로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것이고, 서로 따지면 지옥을 경험할 것입니다. 서로 잘 살겠다고 기도하면 지옥을 만들 것이고, 서로 바로 살겠다고 기도하면 천국을 이룰 것입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
날마다 죄 용서를 간구하는 이유__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___마 6:12
여기서 '죄'의 원어를 보면 '빚'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란 하나님께 빚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하나님께 내 빚을 탕감 받았으니 나도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결단의 고백입니다.
죄 용서를 날마다 간구하는 것은 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합니다.
오늘날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의 대부분은 죄에 무감각해진 때문입니다.
죄가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또 내 죄가 타인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들 죄짓는데 어떠냐는 것이지요.
물론 크리스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서 받은 죄인,
용서가 필요한 죄인,
날마다 죄를 자각하고 죄로부터 돌이켜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죄에 무감각한 죄인과 구별됩니다.
그는 용서 받은 것을 알기에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는 자신이 용서 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관계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 가는 힘입니다.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동력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내가 용서 받는 전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를 자각하지 못할 때부터 용서 받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알고 나서 깨달은 사실입니다(롬 5: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___롬 8:1-2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죄에 민감해집니다.
죄에 민감할수록 아버지 사랑의 깊이를 더 깨닫습니다.
그 깊고 넓은 사랑을 위해 우리가 추구할 것은 더 많은 성취가 아니라 더 맑고 깨끗한 영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용서 받고 용서함으로써 우리가 죄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내가 받은 용서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받았기에,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을 몰아세우지 않겠다는 다짐인 셈입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
양식 문제에 대한 올바른 시각__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
주기도문의 전반부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기도에 이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후반부는 우리 모두의 현실 문제에 아빠가 관여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에 모든 종교인이 구하는 기도의 핵심은 '잘 사는것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잘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런 인간 간의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 기준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절대적 기준 앞에서 상대적 기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상대적 기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이게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속뜻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아는 사람들은 인간 사회의 기준과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목적지를 알면 빨리 가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가는 게 중요합니다. 내 목적지가 분명하면 바쁘게 사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무조건 바쁘게 살면서 그 목적지를 잃어버렸다면 죽어라 살다가 그냥 죽는 겁니다. 그야말로 어이없이 살다 가는 겁니다. 우리는 소유가 많으면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무것도 없이 잘산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난해서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가졌다고 다 행복합니까? 가진 사람들이 다 잘 삽니까? 재벌 2세, 3세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것을 보십시오. 갑질 횡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많이 가졌다고 해서 결코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사는 것과는 때로 한참
거리가 멉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___마 6:11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양식 문제는 소홀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양식 문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늘 문제 입니다. 그런데 이 양식 문제를 이해하는 시각이 제대로 사는데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편안하다고 해서 반드시 평안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숱한 전자기기와 생산품들은 우리의 편안함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모든 교통수단은 우리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편안하게 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휴가철에 다녀 보면 어떻습니까? 교통수단이 편안해서 평안합니까? 결코 평안하지 않습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엔 우리 모두가 조금 불편하게 살았습니다.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하기 위해 서울 시내 중앙우체국에 가서 국제 전화를 신청하고 기다렸다가 통화했습니다. 3분이 기본 통화 시간 이어서 전화 요금 아끼느라 할 말을 종이에 적어서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카톡으로 얼굴까지 보면서 공짜로 미국에
있는 자녀들과 통화합니다. 그렇게 편리한 세상이지만 자녀들과의 관계까지 평안합니까?
우리가 늘어난 소유 때문에 지불하는 대가는 계산할 수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의 소유에 만족하지 못 합니다. 세상은 일용하고 있는 일상의 것들보다 조금 더 가지라고 부추깁니다. 다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법이 없고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양식을 구하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능력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주용할 양식, 월용할 양식, 연용할 양식, 일생용할 양식을 얻는 데 모든 힘을 쏟습니다. 때문에 대박의 꿈을 안고 삽니다. 평생 먹을 것을 쌓아 놓고 즐기며 사는 것이 꿈입니다. 예수님이 소유가 늘어 창고를 늘려 짓는 부자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오늘 밤 너를 데려가면 그 소유가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조금 더 많은 것을 바란 결과 안식이 사라졌습니다. 양식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실은 돈 문제입니다. 내심으로는 맘몬을 갈망하면서 겉으로만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맘몬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는 두 사람을 보여 주십니다. 부자 청년과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부자 청년은 다 가졌습니다. 돈과 권력, 명예 다 있습니다. 단지 영생에 대한 불안만 해결되면 완벽합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에게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눠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이 청년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반면에 삭개오는 평생 맘몬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만난 즉시 맘몬을 버립니다. 재산의 반을 내놓고 자신이 빼앗은 것은 법적으로 두 배만 갚아도 되지만 네 배를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 집에 그 순간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선언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맘몬과 하나님 중에서 하나님을 택하겠다는 약속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거둘 때 일용할 양만큼만 가져갔습니다. 더 가져가 봐야 썩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이 독특한 만나를 주셨을까요?
첫째, 양식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공급자가 하나님 아빠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의 염려와 걱정이 사라집니다.
내가 벌어 먹고살아야 한다, 내가 버는 모든 것이 사장을 통해서 온다, 사람을 통해서 온다 하면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장이 월급을 준다고 믿는 사람과 하나님이 주신다고 믿는 사람은 인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믿으면 관계가 소중하고 사장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월급 액수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아빠에게서 받는 것은 월급이 아니라 사랑이고 그 돈은 내가 반드시 일한 상이 아니라 서로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태도는 양식 그 자체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안식입니다.
하나님 아빠가 나를 책임지시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내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은 안식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무한정 자신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끝없이 무장합니다. 일생 내가 먹을 것을 쌓는 것으로 모자라 자자손손이 먹을 것을 쌓느라 골몰합니다. 그래서 바쁘고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의 축복이 있고 겸손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의 말씀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 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___잠 30:8-9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바르게 사는 것을아는 사람입니다. 잘 사는 것이 많이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일상의 필요에 만족합니다. 하나님 아빠는 결코 인간의 탐욕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또한 하나님 아빠는 내 필요를 미리 아시기 때문에, 절대로 그 필요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믿음 안에서만이 안식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이 양식을 위한 일상의 기도는 결코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청원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필요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전반부는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고, 후반부는 이웃을 위해 간구하는 것입니다. 내 필요를 채우는 것만으로 세상은 유지되지 않습니다. 내 필요가 채워져도 안식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필요가 채워질 때 비로소 진정한 안식이 있고 참된 평강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기도는 따라서 하나님 추구와 공동체 추구가 병존합니다. 하나님 추구는 기도의 내연이고, 공동체 추구는 기도의 외연입니다. 분리할 수 없고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__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을 아빠로 호칭한 뒤 첫 번째로 하는 기도가 뭡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___마 6:9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만큼 친밀하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___마 6:10
우리가 구해야 할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임하도록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충만해지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내 나라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결국 내 나라를 이 땅에 세워 달라는 요구이지만, 그리스천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가 이세상 속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땅에서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제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겠다고 작정하면서 문제가 자꾸 양산되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은 결핍일니다.
하나님 노릇을 해보려고 마음먹는 순간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겠다고 마음먹지만 문제는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수난과 방법이 제한적이어서 불가피하게 모든 것이부족한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남의 것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족의 근원적인 증세가 불안이고,
부족한 것을 채워 달라고 서로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이 모든 시기와 갈등과 분쟁의 원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끌고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아담 이래 해결되지 않은 이 결핍의 문제, 탐욕의 문제, 각자가 내 나라와 뜻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의 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가장 먼저 내가 내 자리를 찾음으로써 이후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내가 내 자리를 찾는 일은
내가 내 힘으로 나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내가 내 자리를 찾는 일은
내가 누군가를 내 의지대로 바꾸어 놓겠다는 의지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내가 내 자리를 찾는 일은
모든 관계에서 나만 바뀌면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내가 내 자리를 찾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나부터 바꿔 주시도록 요청하는 일입니다.
이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고 하니님 나라가 임할 때 비로소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전반부입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
기도의 본질은 관계 맺기__나를 바꾸는 예수의
사도 바울은 '아빠 아버지'라고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똑같이 반복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___갈 4:6
바울은 아빠 곧 아버지, 원어로 '아바 호 파테르'라는 표현을 통해 신앙의 출발, 기도의 뿌리가 아빠와 아들 간의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빠와 아들은 어떤 관계입니까? 이 관계는 처음부터 거래 관계가 아닙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빠와 아빠를 신뢰하는 아들 사이에서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아들의 능력 때문에 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은 아빠가 내게 먹을 것을 주는 동안만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고받는 관계가 출발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빠와 아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아빠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들을 사랑합니다. 아들은 이 사랑 안에서 아빠를 아빠로 인식합니다. 아빠가 점점 내게 해주는 것이 없어질 때쯤이면 오히려 아빠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아빠를 오히려 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게 부자관계입니다. 기도는 이런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건강한 부자관계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이라서 더 잘해 주고 사람들이 없다고 해서 냉담하게 굴지 않습니다. 누가 있건 없건 아들은 아빠에게 늘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갑자기 사람들 앞이라고 어른처럼 군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아들은 또 아빠에게 같은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어제고 오늘이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면 아빠는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겠습니까? 왜 똑같은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아빠는 아들을 잘 알고 아들은 아빠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잘 안다는 이 친밀감이야말로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합니까? 잘 모르는데 무슨 부탁을 합니까? 부탁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낯선 사람에게 부탁하면 그 사람이 내게 되묻지 않습니까? “실례지만 누구시지요?" "나를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다는 것은 더없는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이 친밀감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밀감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 아빠는 더없이 친밀하지만 경외의 대상입다.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눈앞에서 형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아니라면 상의하고 의논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초월적인 분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빠지만 기도로 나아갑니다. 그분이 초월적인 분이기에 그 어떤 것도 기도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며 오직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미리 다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역설적인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뭘 원하는지도 아시고 내가 뭘 구할지 말하기도 전에 다 아신다면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며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란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에 따라 기도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
작성자 JOY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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