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비판하는 이유__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가 모든 사람의 신념이 된 것 같습니다. 좀 변했나 싶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제자리로 돌아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동창생을 만나면 나이 들어 얼굴은 변했어도 말투나 행동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어서 놀라곤 합니다. 신앙도 그럴 수 있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은데 10년, 20년 지나고 보면 언제 그런 때가 있었나 싶을 만큼 되돌아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의 중력 때문입니다. 세상의 중력은 어떤 신앙인도 다시 세상으로 사로잡아 올수 있을 만큼 강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이 왜 쑥쑥 자라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이거나 되돌이표가 되는지 알려 주십니다.
첫째가 재물 때문이고,
다음이 불안 때문입니다.
염려와 걱정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비판 속에서 살기 때문에 비판이 어째서 잘못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적인 비판 없이 개선될 수 있는 것이 대체 뭐가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딜 가나 비판을 하고 누구든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비판이 비난이 되고 심지어 고발과 고소를 하는 지경까지 가지 않습니까? 그 많은 비판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또 그토록 끝이 없는 법적 분쟁과 시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더 안정되고 갈등이 줄어든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분별과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조건입니다. 한겨울에 날씨가 추우니까 두꺼운 옷을 입어야겠다고 판단할 줄 모른다면 동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별과 판단을 근거로 그 사람을 옳다 그르다 하는 것, 즉 비판하는 것이 죄라고 알려 줍니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다니는 저 사람은 문제가 있다. 잘못됐다라고 비판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람을 볼 때마다 첫눈에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동시에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죄입니다.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이 죄입니다. 누군가의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고 비판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고나서 생긴 현상이 비판입니다. 이 현상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대홍수로 심판하셨겠습니까? 이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겠습니까? 인간의 판단이 비판으로 넘어가면 인간은 순식간에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이념의 광기란 무엇입니까?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왜 문제입니까? 인간의 생각과 이념을 절대선으로 놓고 유대인을 악으로 규정하고 부르주아를 적으로 규정한 것 아닙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___마 7:3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왜 비판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못 보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가 왜 남을 비판합니까?
내가 얼마나 흠이 많은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남의 작은 결점까지 들추어내서 비판합니까?
내 잘못은 작게 여기고 남의 잘못은 크게 여기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또한 내 잘못은 들보처럼 보아야 하고 남의 잘못은 티 정도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를 성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언제나 내 잘못에 민감합니다.
내 실수와 허물은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실수와 허물은 덮어 줍니다. 비난하는 사람의 특징은 반대지요. 남의 허물은 작은 것까지도 들추어내고 내 잘못,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은 아무리 커도 못 본 체합니다.
예수님은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왜 남을 쉽게 비판합니까? 위선자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 잘못이 들보 정도 크기인데 남의 티보다 작게 여기고 사는 삶의 태도가 바로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누구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이지요. 대제사장과 같은 전문 종교인들이지요. 그들은 실제 위세가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세분해서 규정하고 그 율법을 지켜 내느라 죽을힘을 다하는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구별했습니다. 그러다 지쳐서 못 지키면 어떻게 합니까? 지키고 있는 척하지요. 이게 위선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를 구별하겠다고 애쓰고, 내가 그렇게 구별되었다고 믿고, 다른 사람과 구별된 데서 비롯된 의식과 태도가 차별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구별된 삶은 일면 본받을 만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이제는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 해보겠다고 결단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친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 대충하겠다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존경할 만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렇게 결단했으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렇게 못 사는 사람 돕고 살면 됩니다. 그렇게 못사는 사람 품고 살면 됩니다. 그렇게 못 사는 사람 위해서 기도하고 살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너는 왜 이렇게 안 사느냐고 비판하고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다르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그 다르다는 사실을 차별의 근거로 삼습니다.
흑백 분규의 출발은 무엇입니까? 백인이 흑인더러 너는 왜 피부가 검은색이냐는 것 아닙니까? 인종차별이 왜 심각한 문제입니까? 한국인이 한국말 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일본인더러 당신 왜 한국말을 쓰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것은 차별입니다. 중국인들이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정착해 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배척하고 차별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죄인은
다름을 차별의 근거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차별하다가 위선 덩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
하나님만 판단하실 수 있다__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비리체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___눅 18:10-13
먼저 바리새인은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따로 서서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 내용은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내용이 세리처럼 불의하지 않고 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생활도 그들처럼 무절제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좀처럼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자신이 여간 대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성전 입구 먼 곳에서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냥 고개를 숙인 채 자기 가슴을 칩니다. 그리고 한마디 절규하듯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너무 잘 압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일 따름입니다.
복 달라고 할 체면도 없습니다. 이 세리는 자기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___눅 18:14
하나님의 평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누구를 의롭다 하십니까? 철저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입니까,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어 고개만 잠시 숙였다가 짧게 기도하고 떠난 세리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바리새인이 더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불의한 세리가 더 의롭다고 하십니다. 동의하십니까? 이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 잘 다니는 사람이 의롭습니까? 아니면 교회도 잘 안 다니고 헌금도 잘 안 하는데 어쩌다 한 번씩 와서는 울고 가는 사람이 의롭습니까? 우리가 판단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세리가 의롭다 하십니까?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세리가 어떻게 겸손할 수 있습니까? 그를 아는 누구도 그를 겸손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취급을 했습니다. 동족의 피를 갈취하는 악당으로 여겼고 교만의 극치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리가 겸손하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 잘 지키고 있다는 자랑과 사람들 앞에서 율법을 더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이겠다는 위선 때문에 그리고 그 자랑과 위선이 낳은 교만 때문에 낙제 점수를 받은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인, 종교 전문가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르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또 남을 끝없이 판단하고 그걸로 모자라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특히 목소리 크고 말 많은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위선과 교만이 남다를 가능성이 매우 큰 사람입니다.
그리나 실은 직업과 상관없이 지금 남을 비판하고 있다면 나는 위선자라는 것을 스스로 광고하고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 겸손하다고 말해도 속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저 사람 교만하다고 말해도 속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 생각일 뿐이고 그 사람들 판단일 뿐입니다. 겸손한지 아닌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죄 중의 죄입니다.
언론인 시절에 저는 스스로를 비판 전문가로 여겼습니다. 한눈에 사람의 결점과 상황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한 줄 알았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결점이 먼저 보이고 어디를 가도 문제점이 먼저 보였습니다. 문제점을 조목조목 발견하고 나열하는 게 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나서 제가 참 어이없이 살았다는 걸 알있습니다. 제가 탁월한 안목을 가져서 늘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제 눈의 들보가 안 보이고 남의 티가 잘 보여서 그랬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제안을 들여다보니 썩을 대로 썩어 있고, 그야말로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남 이야기 잘 안 하는 사람들은 안 보여서 얘기 안 하는 게 아니라 보여도 안 한 것이고, 그 결점 가려 주느라 침묵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___마 7:4-5
겸손한 사람은 결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습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___약 4:11
야고보가 철들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형님 예수에게 이렇게 충고했던 사람입니다. “형님, 갈릴리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이번 명절에는 예루살렘에 일찍 올라가서 자신을 좀 소개하고 알리세요. 시간을 왜 이러고 보내세요."
그는 예수님의 때를 자기 생각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나서 기도의 사람이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말합니다.
“서로 비난하지 마세요.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당신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스스로 판단하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간 것입니다. 대체 당신이 무엇이건대 이웃을 판단합니까?""
우리가 섣불리 이웃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한눈에 보면 그 사람 압니다.” 이게 교만입니다. 이게 죄 중의 죄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관계의 합이고 결과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살 수밖에 없는 이유, 그 사람이 지금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속속들이 다 알 수 없습니다.
인디언 속담에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신발을 신고 오리를 걸어 보라고 합니다. 사람은 남의 신발 신고 오래 못 걷습니다. 그 사람으로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과 같은 환경에서 지내 보지 않으면 죽었다 살아도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인디언의 어느 부족은 친구 집을 방문하면 아무 말 없이 친구가 생활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말없이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친구란
그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비판하지 않겠지요.
사람은 말 안 하면 잘 모릅니다.
말 없는 사람이 때로 오해 잘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척 보면 안다는 사람도 위태롭습니다.
자기 주장이나 편견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말해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적절한 말은 오해를 줄입니다.
진심을 나누는 대화는 다툼을 줄일 수 있습니다.
대화 안 해도 그만이라는 것이 교만이고,
상대방 얘기를 경청하는 것이야말로 겸손입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
남에게 비판 받지 않는 길__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
비판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비판하는 동안에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장해제이자 비판 중지입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가드를 내리는 것입니다. 미국에 왜 악수 문화가 생긴 줄 아십니까?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나라 여서 먼저 내가 빈손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가장 흔한 인사법이 되었지만 친밀하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 앞에서 무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도 무장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녀들이 보호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판하고 공격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해서 한순간에 담을 쌓습니다.
순식간에 공격 모드로 돌변합니다.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___마 7:1-2
예수님은 서두에 결론부터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비판 받지 않는 길은 먼저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비판하면 바로 그 기준으로 비판을 받게 될 것이고, 내가 사람을 헤아리면 그 헤아림의 잣대로 나도 헤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셰익스피어가 이 말씀으로 희곡을 한 편 썼습니다.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입니다. 엄격한 귀족 영주 안젤로가 불륜으로 아이를 낳은 클라우디오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그의 여동생 이사벨라가 사면을 탄원합니다. 이 탄원서를 톰 라이트(Tom Wright)가 《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에서 다시 인용합니다.
"누구나 한때는 잃어버린 영혼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장 잘 아시는 그분이 치료책을 찾아내셨지요. 만약 그분이, 심판대의 가장 정점에 계신 그분이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심판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비가 당신의 숨결을 통해 흘러나올 것입니다. 마치 새로 지어진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 탄원서를 무시하고 사형을 선언한 안젤로는 이사벨라를 향한 욕정에 사로잡혀서 오빠인 클라우디오의 목숨을 놓고 추한 속셈을 드러내며 유혹합니다. 이로써 겉으로는 엄격하지만 그 내부는 클라우디오와 다를 바 없는 안젤로의 본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단지 희곡 속의 얘기일 뿐입니까? 각종 종교단체에서 터져 나오는 성직자들의 성적 추문은 바로 이 얘기 아닙니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가 저지르고 있는 동일한 죄를 발견할 때면 흥분합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
매일 사랑의 씨앗을 심으라__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이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___롬 2:1
여기서 '판단'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비판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목마르는 동안은 세상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감에 시달리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의 여유에 대해 비판의 날을 거두지 못합니다.
사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내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해인 수녀의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는 참 솔직한 고백의 시입니다.
내 마음이 메마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메마르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메마르고 차가운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할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있습니다.
남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불안하고 답답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이
남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오늘
나는
내 마음 밭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씨앗 하나를 떨어뜨려 봅니다.
어떻게 비판하면서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날마다 내 마음 밭에 사랑이라는 씨앗, 믿음이라는 씨앗, 소망이라는 씨앗을 심으며 사는 것이지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___마 7:6
비판과 결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걸 설명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복음을 전할 때 신중한 분별과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유대인들을 비판하고 이방인에게로 간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___행 13:46
사랑은 분별을 뛰어넘는 분별입니다.
비판은 사랑이 없는 판단입니다.
더구나 비판은 인간의 한계와 죄성에서 자라난 독초와 같습니다.
그 독은 먼저 나를 중독시킵니다.
내가 말라 갑니다.
내가 죽어 갑니다.
비판을 계속해 보십시오.
내가 시들고 관계가 시들고 결국 파탄이 납니다.
교회가 잘못됐다고 비판하지 마십시오.
비판이 능사가 아닙니다.
만일 열심히 사는 동안 비판할 일이 생긴다면,
우리가 비판하는 그대로 살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가 비판하는
그 사람을 도우라고 주신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품고 기도하면 됩니다.
섬기면 됩니다.
비판의 제목이 우리의 기도 제목인 줄 알고 섬기면 됩니다.
저는 사실 기독교 비판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큰 그림으로 보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이 '이거 큰일났구나' 였습니다. 어린아이도 다 아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교회만 모른 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선적인 교회와 크리스천으로 인해 예수님이 싸구려 취급당하는 게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그러면 그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대로 사십시오.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사랑하는 방식대로 살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살아내기만 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새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조정민 -무엇이 성숙인가?
[작성자 JOY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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