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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매트 챈들러『완전한 복음』/ 맥스 루케이도, 팔복,

by 은총가득 2021. 1. 18.

매트 챈들러, 『완전한 복음』, 03 그리스도

 

1. 성경은 하나님을 주권적이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최우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물건이나 사람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하는 우리에게 진노하시는데, 지옥에서 영원히 의식적인 고통을 받는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 때문에 이 소식을(좋은 소식) 나쁜 소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2.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 때문에 구렁텅이가 있는데, 메워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부패를 드러내지만 고칠 수는 없습니다. 구덩이를 너무 깊이 팠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나올 수도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간섭)가 필요합니다. (구덩이에 빠진 나귀, 밖에서 흙으로 메워주면서 구덩이 높이를 올린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사랑과 인내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의 결과는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공의) 사이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피의 속죄로 구원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

4.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여시고 포도주 잔을 드시면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피를 만질 수도 없는 유대법에 의하면 사람의 피를 마시자는 예수님의 제안은 신성모독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잔을 옮겨달라는 예수님의 기도 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빰에 입맞추며 팝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창조물을 더 좋아하는 우리 마음속 예배의 문제를 알려줍니다.

 

 

5. 십자가는 하나님을 업신여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죽을 때까지 고문하는 공포 때문에 배반하지 못하도록 로마인들이 고안한 형벌이 십자가형입니다. 대제사장은 수세기 동안 제사 제도(어린양)를 통해 메시아를 죽이는 것을 연습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긴 것에 대해 로마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반응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진노를 담당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창조 이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만족스러운 제사

6.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 사역을 위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신적 아동 학대’라고 비판하는 학자나 작가가 있지만, 성부 하나님의 뜻에 성자 하나님이 순종하신 것(요10,18)이 아동 학대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형벌을 대속하는 구약의 피 제사와 연속성을 갖습니다.

 

 

7. 십자가는 기분 좋지 않는 주제이고 불쾌감을 일으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멜 깁슨 감독이 만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피범벅인 십자가가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미국의 가장 큰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터뷰도 합니다.

 

 

8.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피범벅인 십자가가 핵심입니다. 고전1,8의 말씀은 십자가를 어리석은 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즉 멸망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메시지를 미련하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율법에 이르지도 못하고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입을 수도 없습니다. 선한 형제와 선한 자매가 되는 것, 예수님을 위해 훌륭한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가 되는 것, 십자가와 대체하는 더 매력적인 것으로 십자가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9.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함이 아니라 우상숭배적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 치욕과 피, 살점, 끔찍한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한 쪽으로 치우고 다른 것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오순절의 은사주의와 칼빈주의자들의 튤립교리(칼빈의 5대 교리), 사회 정의를 중심 삼는 자유주의자들, 도덕적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모두 선하고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보다 더 중심되거나 소망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핵심적인 의도는 "피가 없이는 누구도 내게 올 수 없다. 누군가는 내 이름을 업신여긴 인류의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히9,22) 레위기에 의하면 성전에서 비둘기 두 마리나 양 한 마리, 염소 한 마리, 수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생기는 피의 강이 흐릅니다. 그리고 일 년에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로 바칠 숫양 한 마리를 잡는 한 번씩 속죄일을 지내야 합니다.

 

 

11. '진짜 거룩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시편24,3-4의 질문에는 "아무도 없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분,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들고 옛언약의 성취와 새 언약의 피를 마시라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구렁텅이를 자신의 살과 피로 메워주셨습니다.


 

폴 워셔, 복음, 2장 복음과 세상은 양립할 수 없다 summary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15,1)

 

  •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반응을 요구하고, 반응이 나타납니다. 고린도 교회는 적합하게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라
  •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다receive”라는 말이 복음과 연결될 때는 놀랍고 혁신적인 말이 됩니다. 첫째,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둘 중 하나를 받아들이면 다른 하나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면 세상을 거부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따르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히11,1;7;27:벧전1,8)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개인의 자율성과 자치권을 포기하고, 다수의 견해를 포기하고 핍박받는 소수의 ‘교회’에 합류하는 것이며, 믿음을 위해 온갖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단순히 영접 기도를 드리는 것을 넘어서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진리를 전폭적으로 수용합니다.
  • 둘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여기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합니다. 세상은 어떤 것 하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가르칩니다. 비상대책이나 대안, 분산투자, 여러 바구니에 나누어 담거나 등 뒤에 도망갈 다리는 남겨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거짓이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고전15,19)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 외에 다른 모든 것(특히 자아)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과 온전하신 사역만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 셋째 복음을 받아들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삶을 복종합니다. 오늘날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예수님은 원래 주인이십니다.(사람이 주인 시키고 안 시키고, 그런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주님께 철저히 복종하며 살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원하는 사람은 모든 자율성과 자치권을 복음의 주님께 기꺼이 넘길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합니다.
  •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가장 현명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주님은 길들여진 사자가 아닙니다.(C.S.루이스의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오는 아슬란처럼) 주님이시라면 무엇이든, 심지어 목숨까지도 사용하시겠다고 요구하실 권리가 있습니다.(복음의 위험성. 12,1) 복음의 위험성을 듣고도 주님을 영접, 받아들인 사람은 참으로 지혜로운 결정을 내린 사람입니다.
  • 넷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새로운 현실을 인식, 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삶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뀝니다. 복음으로 옛 삶을 대체합니다.(마16,25) 호수 중앙에 던진 작은 돌멩이처럼, 복음의 파장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장 바깥쪽까지 구석구석 퍼집니다.
  •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를 삶(생명)의 원천이요 유지자로 인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장신구가 아닙니다. 더 좋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하나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것도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빌3,7-8) ‘어려운 말씀’(요6,60)은 그리스도가 삶의 양념이나 보완물이 아니라 생명의 유지자,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 사막에서 생수를 내는 바위, 생명과 열매 맺을 능력을 공급하는 포도나무(요6,31-35:41:47-51;고전10,4;요15,5-6)라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외쳐야 합니다.(시34,8)

    복음 안에 서라
  • 고린도전서15,1은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받았다”는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가리키고, “서야 한다”는 복음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가리킵니다. 시편24편을 읽으면 세상의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시14,1:53,1) 인간의 심성은 죄 자체이며(렘17,9:4,14;롬3,13-14;사64,6;렘2,22), 저주와 정죄뿐, 어디에도 희망은 없습니다.
  • 모든 것을 체념하고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죄인은 성령의 조명과 거듭남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엡2,8-9;빌3,3;창15,6;갈3,6) 자기 의를 버리고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을 자랑하고 육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서다”라는 말은 “확신”, “결의”, “단호함”, “견실함”, “흔들리지 않음”, “변하지 않음”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도적 전통 안에서 “굳게 서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 안에 굳게 서서 조금도 물러나서는 안됩니다.
  • 성경의 모든 말씀과 교리가 중요하지만, 영원한 구원은 전적으로 복음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 원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경되거나 철회되지 않습니다.(골1,22-23) 악한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은 복음을 뿌리째 제거하려고 노력합니다. 믿음을 빼앗으려는 현혹의 말이나 믿음을 행위로 보완해야 한다는 율법주의, 문화에 맞춰 복음을 적절하게 고쳐야 한다는 주장, 비방자들의 비웃음에도 굴하지 말고, 복음을 받아야 하며 그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폴 워셔, 복음, 3장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 summary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15,2)

 

 

  • 기독교 교리들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위험하지만 사소한 몇 가지를 잘못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잘못 이해하면 모든 것이 결딴납니다.

    구원의 복음
  • 본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현재의 과정과 장래의 현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헬라어 동사는 현재 시제) “너희가 구원을 받는 중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원을 모두 포함해야 합니다.(롬8,28-30)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정죄함에서 구원하셨습니다.(과거) 이것은 회심의 순간에 일어나며, 칭의(롬4,20-22:5,1)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고 있습니다.(현재)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 시련과 환난, 축복과 훈육을 통해 그리스도인을 계속 변화시켜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이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데, ‘성화’입니다.(롬8,29) 그리스도인은 죄의 권세와 영향력에서 영원히 완전하게 벗어날 것인데(미래), ‘영화’입니다.
  • 일시적인 즐거움을 무한한 가치인 것처럼 붙잡는 이 시대에 구원이라는 복음의 가장 위대한 약속이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롬1,6:10,13) 믿음의 결국(결과)은 구원입니다.(벧전1,9)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법정 앞에서 범죄자요 범법자(엡2,1-3;롬3,10-19)였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교제를 나눕니다.
  • 그런데 요즘 영원한 구원의 약속만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복음이 실생활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에만 관심을 기울일까요? 첫째, 설교자가 더 이상 심판의 확실성과 지옥의 위험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한다면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현재의 ‘실제적인 필요’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육에 속한 사람들이기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은 내세보다는 현세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성화보다는 자존감이나 자기계발을 더 좋아하고, 현세의 최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 찾아다니지만,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치나 갈보리의 고난에 관한 가르침은 귀찮아합니다.
  • 그래서 비록 인기가 없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데,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영원한 구원이고, 우리가 죽어야 할 십자가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십니다’(계22,17)”라고 외쳐야 합니다.

    복음을 굳게 지키라
  • ‘성도의 견인’ 교리는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끝까지 완성하신다는 진리인데,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빌1,26) 그러나 이 교리 때문에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확신을 심어줍니다. 복음을 굳게 지켜야만 구원을 받습니다.(고전15,2)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마지막 날까지 보전하게 될 구원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분 안에 머무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육신과의 싸움에서 많이 실패하지만 믿음과 경건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인내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살아가는 동안 점점 거룩해진다면, 그의 회심이 사실이라는 명확한 증표입니다.
  • 예수님은 끝까지 믿음으로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24,13)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만, 대부분은 환난과 박해,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때문에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암시하십니다.(마13,21-22) 요한 사도도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들”(요일2,19)을 말합니다. 그래서 참된 회심과 거짓 회심을 구별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 특히 서구 복음주의 상황에서, 과거에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기도해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지만 믿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멀리하지도 않은 사람들은 이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들은 잠시 세상을 멀리했더라도 곧바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는 향기도 없고, 내면 변화의 외적 증거도 없고, 자녀에게 허락하시는 징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믿어보기로 결심했고, 진심을 다해 기도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믿음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회심 이후의 삶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육에 사로잡혀 있던 고린도 신자들에게 과거의 회심 경험을 다시 검토하라고 하지 않고, 현재의 삶을 깊이 성찰하라고 권고합니다.(고후13,5) 과거 하나님의 구원이 진짜인지는 현재 그 사역이 계속되고 있고, 또 마지막 때까지 지속되느냐에 따라 판별될 수 있습니다.
  • 잘못된(그릇된) 구원 확신이 이 시대의 가장 큰 병폐이자 교회의 증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걸림돌 가운데 하나입니다. 복음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참된 회심의 본질에 무지하며 사랑을 행해야 할 권징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 치명적인 거짓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당에 찾아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교인석이 서구 사회의 가장 넓은 선교 현장입니다.

폴 워셔, 복음, 6장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summary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롬1,16)

 

  1.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신학 용어를 꽤 광범위하게 정의하기 때문에 같은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똑같은 것을 말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복음에 대한 용어를 정의합니다. 첫째, 복음(the gospel) 앞에 정관사가 붙었는데, 바울 자신에게만 특별한 복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나 요한, 바울이 전한 복음이 모두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와 양식으로 복음을 말하는 요즘과는 다릅니다. 둘째, 특정한 문화에 속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각 문화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했지만 문화에 적합하게 만들거나 반감을 덜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기 때문에 항상 위험에 처했습니다. 셋째, 바울은 언제나 변함없는(모든 시대에 변함없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십 년이면 강삼도 변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세대에 따라 복음을 적절히 변형하거나 새로운 전달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임종할 때도 처음 사역할 때와 똑같은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바울의 가르침
  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과 바울이 믿고 전한 것에 연속성을 지닙니다. 예수님도, 바울의 복음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마5,45;막1,15;요3,16;행14,17;갈4,4;롬5,6-10) 예수님은 인간이 악하며 죄에 속박된 상태라고 가르치며(마7,11;요8,34;요3,20;마23,27:15,19), 바울도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타락한 인류 상태를 드러냅니다(롬3,23:3,10-18:3,19). 예수님의 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다고 가르치며(요3,18:36;눅13,1-5), 바울의 복음도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쌓이고 있다고 가르칩니다(롬1,18:2,5).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가 구원의 핵심이자 완성이라고 가르치며(눅24,26;마16,21;눅22,42;마27,46), 바울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합니다(고전15,3-4;고후5,21;갈3,10-13;롬3,23-26;고전1,23;롬1,1;고후5,14). 예수님과 바울은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며(막1,15;요5,24;눅13,1-5;요3,18-36;행20,21;엡5,6). 예수님은 참된 회심에는 진지하고 값비싼 제자로서의 대가가 뒤따른다고 가르치며(눅14,26;마16,24-25), 바울도 제자로서 따르는 철저한 삶을 요구합니다(고후6,14-18;롬6,11-14;행14,22;딤후3,12). 예수님은 모두 단지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구원의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치며(마7,21:7,16:19-20), 바울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깊이 성찰하라고 권고합니다(고후13,5;딤후3,5;딛1,16). 예수님과 바울은 미래의 심판과 지옥의 공포를 경고합니다(마25,41;눅12,4-5;롬2,5;갈6,7;엡5,6;살후1,7-9).
  3. 바울의 복음뿐만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들, 복음서 저자들, 다른 신약 성경 저자들의 증언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1,3)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복음은 하나입니다. 복음을 위해 복음을 더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을 버리고, 성경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전한 증인들의 대열에 서야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 팔복, 01장 신성한 기쁨

 

  • 국제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가수이며 뉴욕시티 오페라단 단장을 지낸 ‘비버리 실즈’(Beverl Sills)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오페라 클럽에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 인정을 받고 나서야 미국에서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두 자녀가 장애아이고, 집을 구입하고 이사하기 이틀 전에 모조리 불타 버립니다. 직업적으로도 거절을 당하고 개인적으로는 좌절을 당했습니다. 비통함의 씨앗이 자라고 원망의 뿌리가 내릴 수 있는 토양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평온합니다.
  • “수년 전 나에게 성공과 주위환경과 심지어 행복에 대한 선택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즐겁게 사는 것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걸을 알았습니다.”(성공과 주위환경, 행복에 대한 선택권은 없지만, 즐겁게 사는 건 선택할 수 있습니다)
  •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루게릭 병)에 걸려 45세에 죽음을 앞둔 글린은 자신의 장례식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계속 치유를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고쳐 주시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축복해 주셨어요.” “우리는 어떤 비극이든지 걸림돌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비극이 우리 가족을 비통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래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범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 뇌성마비 환자라서 생활에 큰 불편을 겪는 로버트는 그 질병이 초급대학에서 가르치는 일과 위험을 무릎쓰고 다섯 번이나 해외로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포르투갈 선교사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6년 동안 70명의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고, 그 중 한 사람인 로사와 결혼합니다. “나는 즐겁게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 가장 비참한 조건을 가졌으나 가장 즐겁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비참해야 했으며, 비통해야 했고, 분노를 끓이는 가마솥이 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 음침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제자를 끌어모으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따라 다닙니다. 어린아이들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을 피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이 사람을 따라가며 뛰어다녔습니다. 군중들은 비참한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몰려 들었습니다. 그는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할 때도 즐거워했고, 버림 받을 때도 즐거워했고, 배반을 당할 때도, 고문과 고통을 당할 때도 즐거워했습니다.
  • 예수님은 불합리해 보이는 즐거움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시련 앞에서 꺾이기를 거부하는 즐거움, 고통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즐거움, 영원이라는 반석에 뿌리를 깊숙이 내린 즐거움입니다. 신성한 기쁨”(Sacred delight)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성하고, 신성한 것은 하나님 것이니, 이 즐거움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 산상수훈에서 도무지 기뻐할 것 같지 않은 군중들에게 신성한 기쁨을 아홉 번이나 약속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박해를 받은 자에 대한 현대적 대상) 결핍의 상태(심령이 가난함) – 자만을 회개(애통함) - 스스로 지배하기를 그치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엎드린다(온유함) -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감사해 더욱 그리워한다(의에 주리고 목마름) - 하나님께 다가가 닮아간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긍휼히 여기는 자가 됨) - 우리 모습이 변화된다(마음이 청결함) -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화평케 하는 자) - 불의하게 고난을 당한다(의를 위해 박해를 받음)
  • 태도의 일시적 변화가 아니라 옛마음의 완전한 파괴이며 새로운 마음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결과에 영향받지 않는 기쁨을 가지고 계십니다. 환경이 훔쳐갈 수 없는 평화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유쾌한 기쁨이 있습니다. 거룩한 즐거움이며, 신성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고, 우리의 결정에 의해 기쁨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팔복, 02장 그의 산꼭대기

 

 

  • 책을 꼭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장의 주제가 유익할 것입니다. 미국은 서두르며 살아갑니다.(시간에 돈을 지불하는 예) 시간은 땅에서 가장 값진 상품이 되었습니다. 1965년 상원의 한 위원회에서는 미국은 미래에 매우 많은 자유 시간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1985년에는 컴퓨터가 사람이 해야할 일을 컴퓨터가 대신 해주고, 경제가 안정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주당 22시간을 일하며 38세에 은퇴할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73년 이래로 여가시간이 37% 줄었으며, 평균노동시간은 41시간에서 47시간으로 늘었습니다.
  • 소비자들의 욕구를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60년대의 개인주의가 80년대의 물질주의로 흐르면서, 기술의 진보로 얻은 자유시간에 사람들은 편안히 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일합니다. 욕구가 커지면서 우리 삶은 부풀어 올랐습니다.(예, 냉장고의 크기, 냉장고의 대수)
  •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쉼표에서 왜 쉬어야 하는지 모르는 나에게 ‘음악은 언제나 쉼표 뒤에서 더욱 감미로워지기 때문이란다’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놓쳐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문장을 너무 빨리 읽으면 안됩니다(천천히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만나기 전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만나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사람들과 마주치기 전에 거룩하신 분을 기억했습니다.
  • 집에 돌아와 가족과의 태풍이 지나간 후에야 컴퓨터 앞에 앉아 조용히 글을 쓸 수 있습니다. 30분 전만 해도 놀이방이던 곳이 지금은 글쓰는 공부방이 되고 성소가 됩니다. 매일 이런 시간을 갖고 싶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이 부르시지만 내가 듣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예산청구서와 마간시간 등을 뒤에 남겨두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를 부르시는 주님(마11,28)을 따라 산으로 올라갑니다.
  • 산 정상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 진리를 털어놓으십니다.(진리 한 문장들) 이 산꼭대기에 다녀온 사람들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와 (균형 맞지 않는 예산과 변경된 비행기 항로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입술가를 부드럽게 만드는) 평온함,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기쁨이 있습니다. 계곡을 견뎌내고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산에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 평생을 산에 오르는 생활을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였다. 병실에 빈 의자가 있었는데, “나는 저 의자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딸이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 베개 위에 머리를 둔 것이 아니라 침대 곁에 있는 빈 의자 위에 머리를 두었다고 합니다.
  • 의자를 곁에 갖다 놓은 사람으로부터 교훈을 얻으십시오. 음악 선생님과 쉼표의 교훈을 깨달으십시오. 왕과 함께 산꼭대기로 여행을 하십시오. 복잡한 이 세상으로 내려오기 전 심호흡을 할 때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임합니다.   <forwill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