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ter Brueggemann
Church Anew. DECEMBER 30, 2020
[Church Anew is dedicated to igniting faithful imagination and sustaining inspired innovation by offering transformative learning opportunities for church leaders and faithful people.]
12월 12일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5인치입니다.
아름다웠고 물론 조용히 왔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침체와 폐쇄는 나에게는 눈을 추억의 기회로 삼도록 초대했습니다.
잉그마르 베르그만의 "산딸기" (Wild Strawberries)와 다르지 않습니다.
Sledding on Art Hill | Cool places to visit, Places to go, Forest park
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전에, 성경의 작가들도 눈이 하나님이 주신 다목적 선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눈이 야웨의 통치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이는 세 개의 본문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
이사야 40-55장
이사야 40-55장은 고난 받는 주의 종의 노래이지만, 또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이 처음부터 주장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사야 40:8)
시의 주제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주제는 추방된 이스라엘의 해방과 복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컨대, 그 "말씀"은 "여기 너희 하나님을 보라!"(40:9)입니다.
또는 "너희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52:7)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 "말씀"은 심지어 바벨론 권력이 앞에 버티고 있고 바벨론 신들이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 46:1-2, 47:5-7), 하나님의 통치 및 하나님의 해방시키는 신의가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다는 수행적 선언 (performative declaration)입니다.
이사야의 시에는 권력의 영광송 (44:24-28), 구원을 확신하는 신탁 (41:9-10, 43:1-7), 바벨론의 오만함에 대한 도발적 공격(47:1-15)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해방시키는 언어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를 추가적으로 확증합니다.
그때, 그러한 증거는 역사적으로 중요시되는 문제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창조자가 보장하는 창조의 신뢰할 수 있는 규칙성에 호소하기 위해 역사적 과정을 벗어나야만 합니다.
이러한 시가 매듭을 지을 무렵, 55장에서 시인은 창조의 신뢰성에 유추가 가능한 표현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관련되어 있는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말씀을 어떻게 검증할지, 그 방법을 발견합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기까지,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사야 55:10-11)
The Sower - painting by Van Gogh
창조자가 보낸 비는 땅을 물로 적실 때까지 그만두고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창조자가 보낸 눈은 씨앗과 빵을 제공하게 될 새싹이 돋게 할 때까지 그만두고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눈은 신뢰할만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절하게 수행합니다.
눈은 애초부터 생성시키는 창조적 배열의 일부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8.22)
이사야에게 눈의 목적은 땅이 생명을 낳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은 눈이 땅에 물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눈은 그 자체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가치 없이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눈은 창조자의 의지에 따라 생명을 제공하는 과정에 신뢰할 수 있는 질서를 입증하여 줍니다.
따라서 이사야 55:10은 그러한 유추성 (analogue)을 소리내어 외치고 있습니다.
이사야 55:11에서, 시인은 눈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유추성은 하나님의 말씀이 눈처럼 믿음직스럽다는 것입니다.
눈은 창조에 걸맞는 적절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그 말씀에 걸맞는 적절한 목적이 있고 그것을 수행할 것입니다.
눈의 목적은 눈사람이나 눈덩이나 눈설매를 위한 것 이상입니다.
식량을 생산할 목적으로 땅에 물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그 목적을 성취한다면,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눈을 보세요!
여러분은 거기에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지에 대한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역사와 특정하게 관련되어 있는 창조에서 비롯되는 증거이다.
하나님 말씀은 포로 생활하는 이스라엘이 기대하고 믿을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어려움에 처한 모든 공동체와 절망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떨어져 나온 조각조각을 음미해 보십시오.
모든 조각들은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이 생명을 제공함에 있어서 신뢰할만하신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2]
욥기 38장
매우 다른 방식으로 욥기의 시인은 눈의 주제를 끄집어냅니다.
눈에 대한 언급은 창조주 하나님이 욥에게 빗발치게 쏟아붓는 질문에서 등장합니다.
욥은 자신이 창조 세계의 운영을 마치 예측 가능한 미적분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상상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업적이 어떤 산술적인 결과와 딱맞아 떨어질 것이라고 상상했었습니다.
회오리바람 속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계산이 어떠하더라도 그 계산법에 갇히거나, 제한을 받기를 거부합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욥에게 보야주기를 결심합니다:
계산을 통한 인간의 통제와 하나님의 자유 사이의 차이점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이다.
모든 인간의 가용능력이나 산술 과정을 뛰어넘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주장하기 위해, 욥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욥은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욥에게 보여주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야웨가 다스리는 세계에서 욥은 끝에서 두번째 자리에 있음을 하나님은 욥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 질문들은 욥에게 머리가 지끈거리게 빨리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응답도 용납되지 않게 됩니다 (38:4-37).
요구되는 대답은 겸손하게 만들려고 아예 작정되었습니다.
어디 있는가? …어디에서도 없습니다 (4절).
명령한 적이 있는가? … 아니요 (2절)
들어가보았는가? … 아니요 (11절)
따라서 우리는 눈을 참조하게 됩니다.
'너는 눈을 쌓아둔 창고에 들어가 보았느냐?
또는 우박을 저장해 놓은 창고를 보았느냐?
곤경한 때를 위해, 전투와 전쟁의 날에 쓸려고,
내가 저장해 두었다.
(욥 38:22-23)
시에서 단 하나의 연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들 구절들은 두 가지 질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22-23절에서 첫 번째 질문이 제기됩니다.
욥에게 묻기를, 그에게 창조자가 주재하는 거대한 눈과 우박의 저장고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지를 묻습니다.
물론, 요구되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에게는 접근이 허용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욥에게 눈과 우박이 분쟁, 전투, 전쟁의 시기에 대비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눈의 놀라움은 전투의 결과를 기울게 만들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심지어 출 9.13~35에 바로를 강타한 우박을 넌지시 비추어 보게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욥이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왕과 군대의 군사력조차도 비바람, 폭풍우, 눈비와 같은 요소들의 "자비에 달려" 있으며, 이들을 군왕이 통제할 수 없다.
24절에는 두 번째 질문이 제기됩니다.
빛의 근원과 동풍의 운명에 대해 묻습니다.
물론 욥은 눈과 우박에 대해 아는 것보다도 빛과 바람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모릅니다.
그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아는체하지만 웅장한 신비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욥에게 경이로움을 불러일으뿐이지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은 인간의 통제를 거역하는 하나님의 웅장하고도 감추인 신비를 증명합니다.
눈은 주권의 증거입니다.
이 주장은 물론 과학이 있기 이전의 수사적 표현입니다.
또는 더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거나, 우리가 과학 이후에도 통용되는 주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추론을 벌인 후에야, 일종의 영광송과 같은 경이로움 속에 남겨져있기 때문입니다.
(참조. William P. Brown, The Bible, Science, and the Ecology of Wonder and Wisdom’s Wonder: Character, Creation and Crisis in the Bible’s Wisdom Literature.)
따라서 다음 속담은 질문을 제기하는 창조자와 대답할 수 없는 욥 사이의 차이의 크기를 확고하게 단언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광이니라.
(잠 25:2)
발견해 내는 것은 과학의 당연한 일입니다.
왕들과 정부가 이를 후원합니다.
하지만 감추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작업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적 범위에서 볼때, 하나님의 방법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경외심을 가지고 곰곰히 생각해야 할 신비입니다.
Promethee enchaine (Prometheus bound).
Marble, reception piece for the French Royal Academy, 1762.
프랑스 조각가 니콜라 세바스체 아돔이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형상화한 조각,
독수리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경이로움을 증언합니다.
왕들은 욥과 더불어 하나님이 지으시고 다스리는 세계에서는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음을 알아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경이로움 앞에서 왕들은 욥과 더불어 잠시 멈춰서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님은 욥에게 매우 공격적인 질문을 제시하십니다.
이 질문들은 엘리후가 더 많이 제한을 가하여 반향시키고 있습니다.
엘리후의 표현은 회오리바람에서 들려오는 말보다 앞서가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창조세계를 목격하면서 경험한 전혀 뜻밖의 놀라운 경이로움을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욥 37.1)
Elihu
Painting by Arthur Ackland Hunt
그 다음에 창조의 경이로움을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욥 37.2-6)
목록에는 천둥과 번개, 눈과 비,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모든 경이로움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후에게 소름이 돋는 경험입니다.
엘리후는 다음과 같은 결론만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
(욥 27.13)
Psalm 137 in the Eadwine Psalter (12th century)
[3]
시 147, 148편
시편의 영광송 전승에 이사야와 욥의 시가 반향되어 있다 (어쩌면 예견되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시편 147편의 세번째 영광송 단락 (1-6절과 7-11절 이후)에는, 찬송시의 핵심이 펼쳐집니다.
정확하게 창조의 경이로움에 주목합니다.
그가 양질의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시 147.14b-18)
이제 이들은 하나님의 위엄 있는 주권을 증명하는 통상적인 주제가 됩니다: 눈, 우박, 바람, 물.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찬양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예배하는 이스라엘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찬양합니다.
기뻐 어쩔줄 모릅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세계를 기념하며 축하합니다.
이러한 영광송은 이스라엘에서는 이미 인정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욥에게서 더디게 배운 교훈입니다:
창조 세계에서 인간의 수용능력은 끝에서 두번째 자리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더디게 배워왔던 교훈입니다.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적인 태도를 취하고 상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인간 대리인 자격, 인간의 자유, 그리고 인간 기술은 다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마지막 진리가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송은 우리가 창조 세계에서 끝에서 두번째 자리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이미 준비된 확언입니다.
'Brokenhearted Psalm 147:3'
이러한 영광송은 서로 간에 놀라운 일을 합니다.
시 147편 14b-17에서 창조에 관한 가사들은 하나님이 눈여겨보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를 말해주는 시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습니다.
이들 구절에서 "주"는 "시온아, 너의 하나님"(1절)입니다.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신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주를 찬양하라 (할렐루야)!
(시 147.13-14a; 19-20).
세인트 조지 교회.
에티오피아의 암하라 (Amhara) 지역에있는 도시인 랄리 벨라 (Lalibela)에있는 11 개의 바위가 많은 단일 교회 중 하나이다.
교회는 나무, 돌, 박격포의 건축물이지만, 성소는 바위에 깎여져 있다. 벽에는 구에 있는 아부나 예마타(Abuna Yemata)와 요하네스 마에흐디(Yohannes Maechddi)에서 발견된 15세기 스타일의 음침한 색상의 사랑스러운 프레스코화가 몇 개 있다.
위의 그림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명예의 전당이다.
이스라엘의 영광송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항상 이중적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한 찬양은 이스라엘의 택함받음을 선뜻 보증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창조세계를 달리 강조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그 자체가 창조의 오직 유일한 초점이 될 수 있다는 어떤 생각도 배제합니다.
눈은 야웨가 주권적으로 생성시키시는 선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창조세계에서 특별하지만 자격을 갖춘 위치를 모두 증명하고 있습니다.
?
마침내 우리는 다음 시편에서 심지어 눈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여!
(시 148.5-10).
모든 생물이 창조주 앞에 경외와 경외와 경이와 감사하고 있다.
이때문에 눈이 찬양 중에 있는 기어다니는 것들뿐만 아니라 왕들과 왕자들과 나린히 함께 있다 (11절 참조)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놀라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이 하나님의 신뢰성 (사 55:10-11)과 하나님의 의문의 여지가 없는 절대주권 (욥 38장)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다른 많은 피조세계의 동반자들과 나란히 영원토록 끝나지 않는 피조물의 영광송으로 기꺼이 기뻐하며 되돌아갑니다.
결론
이사야와 욥기에 있는 이들 시에서 두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첫째, 이 두 명의 위대한 시인은 모두 다 6세기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하던 시대의 사람들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 그렇게 가정할 수 있다면, 이 시인들이 있던 자리는 은 신의 신뢰성(사 55)과 하나님의 주권 (욥 38장)을 목격하고 싶어했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역사에서 적절한 준거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준거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의 신뢰성과 주권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찾기 위해 역사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역사 자체가 신뢰할 수 없고 통제 불능으로 보일 때조차도,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어떤 진실을 확증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창조세계에 호소했습니다.
이 두 명의 위대한 시인들은 당연히 "자연 신학"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자연"을 하나님의 선한 통치의 영역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은 가장 괴롭고 당황스런 시기에, 우리의 통제나 설명을 찾기에 서두러기보다는, 이를 초월하여 살아있는 그러한 신뢰성과 주권에 호소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적 제의에 대해 한가지 다른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떠오릅니다.
누가 눈을 보고 그것을 신적 실재의 증인으로 보도록 인도하여왔을까요?
누가 눈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궁극성과 인간의 끝에서 두번째 위치에 대한 인식을 확신하도록 우리를 소환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을 관찰하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전혀 다르게 보고 주목하도록 하는 법을 가르치는 분들이었습니다.
예전적 전통에 젖어 있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교육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노력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눈을 볼 수 있지만, 오직 눈사람, 눈덩이, 그리고 빠른 썰매를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시인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뜻밖에 제시하는 놀라운 상상력이 전혀 다르게 주목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수용능력을 다시 형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큰 확신으로, 그들의 말을 믿으면서, 기꺼이 "눈이여 내려라, 눈이여 내려라, 눈이여 내려라!"고 말하거나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내리지 않는 따뜻한 기후에 살고 있는 여러분 중에도 소중한 독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추운 나라에 방문하여, 아름다운 증언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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