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습관은 영성이다 (You Are What You Love) (1
저주가 있는 모든 곳에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두루 퍼져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실 뿐만이 아니라,
만물을 구속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골 1.20의 풀어쓰기
문화 창조자로서 우리의 영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리스도의 몸에 몰입하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며 원동력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지향하도록 우리의 사랑과 갈망을 길러내는 상상력의 저장고이다.
진정한 문화 창조자로서 살아가려면, 상상력을 형상하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
잘 예배해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예배한다.
그런데 어쩌면 당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1장.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You are What you love):
예배하는 인간
제자도 (discipleship), 제자훈련을 다시 형성하기 위한 도발적 질문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기독교 제자도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던지시는 가장 예리하고 통렬한 질문이다.
무엇을 아느냐?
무엇을 믿느냐?
제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제자에게 하는 질문은 오히려 이렇다!
무엇을 구하느냐? (요 1.38)
무엇을 원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우리가 원하는 바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바람과 갈망과 욕망은 우리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하며, 우리 행동과 태도가 흘러나오는 근원이다.
제자도는 우리 마음을 정렬하는 방식,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거기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제자도는 앎과 믿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열망과 갈망의 문제다.
나를 따르라!
예수를 따라 하나님이 원하고 바라고 갈망하고 욕망하는 바에,
우리 자신의 갈망과 욕망과 바램을 조율하라는 초청이다.
하나님이 꿈꾸는 세상을 구하고 가꾸어 나가라는 징집 명령이다.
예수는 우리의 바람과 갈망과 욕망, 즉 사랑을 원하신다.
그릇된 작업가설에 근거한 제자훈련
주지주의적 접근:
지식, 정보, 기술의 습득에 주안점을 두는 제자훈련.
당신이 생각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
주지주의 접근은 데카르트가 만든 근대 사상에 근거한 제자훈련
"Cogit,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코기토 에르고 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코기토 에르고 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코기토 에르고 숨 ( 라틴어 : Cogito, ergo sum , 해석: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은 데카르트 가 방법적 회의 끝에 도달한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라틴어 명제 이다. 데카르트는 애초에 《 방법서설 》에서 이 명제를 프랑스어 로 썼지만( " Je pense, donc je suis "), 라틴어로 된 명제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 데카르트는 후일 《 철학 원리 》에서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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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제자도는 근대성 (modernity)에 잘 어울리는 제자를 만들어낸다.
이런 제자는 근대성의 먹이가 되기에 좋은 사람이 된다.
은행식 교육 모형
사상과 신념을 지성이라는 저장고에 쌓아두는 교육
지성의 제자도는 될 수 있어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제자도는 될 수 없다.
지식 습득을 무시할 수 없다. 간과할 수 없다. 가치 절하할 수 없다.
그러나 과대평가되어 있다.
정보 전달과 지식 습득을 통해 성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지식은 성품으로 저절로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인가?
습관의 힘이 핵심이다
지식과 행동의 간극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명쾌한 성경 강해와 정곡을 찌르는 교리 해설을 들었는데도, 화요일만 되면 나는 신앙의 실패자가 되어버리는가?
성경 지식과 신학 사상으로는 우리의 성품이나 습관이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가 아닐 수 있지 않는가?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주지주의가 아니라면, 반지성주의?
열정에 따라,
충동하는 변덕이나 본능, 욕구에 따라,
'좋게 느끼면 그대로 하라!'라는 원리를 받아들이면 되는가?
당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알코올 의존 중독자 재활 협회 (AA)
우리에게 지식보다 못한 것은 필요 없다.
그 이상이 필요하다.
습관의 힘을 인정할 필요가 절실하다!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9. και τουτο προσευχομαι ινα η αγαπη υμων ετι μαλλον και μαλλον περισσευη εν επιγνωσει και παση αισθησει
10. εις το δοκιμαζειν υμας τα διαφεροντα ινα ητε ειλικρινεις και απροσκοποι εις ημεραν χριστου
11. πεπληρωμενοι καρπων δικαιοσυνης των δια ιησου χριστου εις δοξαν και επαινον θεου
(빌 1.9-11)
바울 기도의 주제는 지식과 총명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지식의 전제조건이다.
사랑하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사랑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
인격의 중심과 근원이 지성이 아니라 마음이다.
현대 그리스도인을 위한 고대의 지혜
교회의 미래는 고대이다.
포스트모던 세계를 위한 기독교의 지혜를 찾으려면,
근대의 이성· 계몽· 진보 이데올로기를 숭배하지 않았던 고대인들에게 귀를 기울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 있도록 지으셨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평안이 없었나이다.
이 한 문장에
예배, 제자도, 그리스도인의 형성에 대한 접근 방식을 근원적으로 바꿔놓을 지혜가 가득 차 있다.
[1] 첫 번째 통찰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란 무엇인가?
(1) 인간은 그리스도에 의해 알려진 창조주에 의해, 그리고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다.
진정으로 온전한 인간은 우리를 지으신 분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
복음은 진정으로 온전한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길이다.
(2) 인간 됨 이란 무엇인가?
지식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역동적 피조물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지향하고, 무언가를 욕망하기 위해 움직인다 [telos].
[2] 두 번째 통찰
인간의 목적론적 지향의 중심은 마음이다.
우리의 갈망과 욕망의 근원이다.
마음 (heart)은 무엇인가?
가장 근원적 갈망을 떠받치는 버팀목이다.
세상에 대한 본능적이며 잠재의식적 지향이다.
갈망은 호기심이 아니라 목마름이다.
갈망은 풀어야 할 지적 수수께끼가 아니라, 살아남겠다는 몸부림이다.
Eros (concept) - Wikipedia
Eros (concept)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ros is one of the four ancient Greek terms that can be rendered in English as " love ". The other three are storge , philia , and agape . Eros refers to "passionate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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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근원적으로 에로스적 피조물이다.
흔히 말하는 에로스와 아가페의 이분법은 근대의 산물이다.
욕망의 선함을 포기하고, 근대 문화가 무질서하게 강탈하도록 방치하는 전략이다.
에로스는 피조물인 인간의 선한 특징인 욕망과 이끌림이다.
아가페는 바르게 질서가 잡힌 에로스이다.
즉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넘치도록 부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속량을 받은 욕망, 바르게 질서 잡힌 욕망이다.
당신이 욕망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
[3] 세 번째 통찰
우리는 우리를 만들고 사랑하시는 분을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이 궁극적 목적을 바르게 지향할 때에야, 비로소 안식을 누릴 것이다.
창조주 대신에 다른 존재를 사랑하면 할수록, 불안과 쉼 없음에 점점 더 사로잡히게 된다.
따라서 문제는 당신이 어떤 대상을 궁극적으로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욕망의 정향: 인간으로 존재하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말이다.
"당신은 돈을 걸어야만 한다.
당신에게는 걸고 싶지 않다고 걸지 않을 자유가 없다.
당신은 이미 이 내기에 참여하고 있다"
블레즈 파스칼
파스칼의 내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파스칼의 내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신론 개념 [보이기] 역사 [보이기] 논증 [보이기] 기타 [보이기] v t e 블레즈 파스칼 은 만약 이성을 신뢰할 수 없다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좋은「도박」이라고 주장했다. 파스칼의 내기 (Pascal's wager)는 블레즈 파스칼 이 주장한 기독교 변증론 이다. 목차 1 파스칼의 내기 2 파스칼의 내기의 한계 3 같이 보기 4 외부 링크 4.1 주요 문헌 4.2 개정 4.3 반대 파스칼의 내기 [ 편집 ] 파스칼의 내기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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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내기 - 나무위키
1 . 개요 2 . 설명 3 . 반론 4 . 여담 1. 개요 [편집] 프랑스어 : Pari de Pascal 영어 : Pascal's Wager 프랑스 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 이 제시한 그리스도교 변증법 . 2. 설명 [편집] 신 이 존재하지 않지만 신을 믿을 경우 (신 없이는 죽음이 끝이라는 가정 하에)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신이 존재하고 신을 믿으면, 다시 말해 옳은 선택을 했다면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반면 신이 존재하지 않고 신을 믿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죽음이 끝이라는 가정 하에) 얻는 것이 하나도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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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텔로스 (Telos)는 무엇인가?
우리가 원하는 바, 갈망하는 바, 욕망하는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이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왕국, 어떤 왕국 (나라)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 전망은 궁극성을 띤다.
특정한 형태의 좋은 삶을 지향한다는 것은 세상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한 특정한 전망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갈망이 우리의 방향을 설정하고,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휘한다.
왜 선택하는가?
충분히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전망이 우리 상상력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텔로스는 지성을 설득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매혹함으로써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배를 만들고 싶을 때, 사람들에게 목재를 모으리고 다그치며 과제와 일거리를 할당하지 말고,
다만 먼바다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을 일깨워주라"
셍떽쥐베리, 어린 왕자
당신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우리 삶의 엔진인 동시에 유도 장치와 같다.
사랑은 중력과 비슷하다.
의도된 자리에 있지 않는 사물은 불안하다. 제 자리를 찾으면 안전하다.
진정한 제자도는 우리를 불붙게 만들며, 우리 사랑의 중력을 바꿔 놓는다.
대안적 인간 모형
1. 우리 정체성의 무게 중심은 마음이다.
2. 우리 삶의 궁극적 텔로스는 좋은 삶을 누리게 될 어떤 나라에 대한 전망이다.
3.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에로스의 나침판: 사랑은 습관이다.
사랑은 잠재의식적인 욕망이다.
세상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지향으로서 사랑은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어떠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근원적 지향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1.12-14
미덕이 무엇인가?
미덕이란 좋은 습관이다.
좋은 습관은 선을 지향하는 내적 성향이다.
덕과 법은 반비례한다.
덕을 갖춘 사람일수록, 즉 성품 자체에서 흘러넘치는 선을 지향하는 내적 성향을 더 많이 갖추고 있을수록,
선을 강제하는 법의 위력이 덜 필요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도덕적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첫 번째 천성은 신체기관에 내장된 본성이다.
어떻게 그런 덕을 습득할 수 있을까?
덕은 습득은 알아서 습득되지 않고, 정서적으로 습득된다.
덕의 교육은 일종의 형성, 특정한 성향을 갖게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당신의 존재 안에 무의식적으로 새겨 넣는 것이다.
(1) 우리는 모방을 통해 덕을 배운다.
(2) 실천을 통해 덕을 습득한다.
사랑이 습관이라면, 모방과 반복적 실천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형성과 제자도에 대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마음의 눈금 조정: 사랑에는 실천이 필요하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갈망하는 바에 대한 에로스적 지향에 의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결정되고 통제되는 피조물이다.
제자도란 습관을 바로잡는 것이다.
즉 무엇을 "겨냥하느냐?"의 문제이다.
나의 사랑은 어떻게 조준되고 지향되는가?
우리가 반드시 올바른 방향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사랑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반드시 옳은 사랑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지향성은 비뚤어져 있다.
에로스의 나침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잘못된 방향을 알려준다.
잘못된 나침판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가?
상선 낸터킷 호와 증기선 먼로 호의 충돌사고
2도 차이 나는 나침판을 가지고 항해한 먼로 호 선장 에드워드 존슨의 잘못.
마음은 나침판이다.
에로스의 유도 장치와 같다.
어떻게 창조주를 '자북'으로 가리킬 수 있도록 정규적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어떻게 사랑하는지에 관한 습관을 형성하는 실천을 통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욕망의 교수법"
실천을 통한 습득
우리의 마음이 바르게 재조정되는 방식
우리의 사랑과 갈망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잘못 조정되는 방식
우리는 욕망을 배우기보다는 거기에 사로잡힌다.
온갖 종류의 문화적 주기와 반복은 욕망을 가르치는 의례이다.
특정한 형태의 왕국을 사랑하도록 암묵적으로, 은밀히 우리를 훈련시키고,
특정 형태의 선한 삶을 전망하도록 만들며, 또한 갈망하도록 가르친다.
In the Kingdom of Ice - Wikipedia
In the Kingdom of Ic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In The Kingdom of Ice: The Grand and Terrible Polar Voyage of the USS Jeannette ( Doubleday ), 2014, is a nonfiction book written by the author and historian Hampton Sides . The book tells the true story of the 1879?1881 arctic voyage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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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 지도는 정확한가?
성령이 주도하는 사랑의 형성은 무엇인가?
마음의 눈금을 재조정하고,
우리가 다른 문화적 실천을 통해 흡수한 모든 암묵적인 지향성을 버림으로써,
우리 사랑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믄화적 의례가 우리의 욕망을 형상하고 변형시키는, 사랑을 만들어내는 실천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바가 바로 우리다
당신이 근본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누구인가?
여기에 당신의 자기 이해와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핵심 신념과 열정이 달려 있다.
어떤 예전을 통해 당신은 궁극적 존재를 예배하는가?
즉 당신이 참여하는 예전이 바로 당신이 숭배하는 대상이 있는 곳이다.
수많은 문화적 예전들이 경쟁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인간 존재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어떤 실천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NFL Thanksgiving as a Cultural Liturgy of “God & Country,” Nationalist Militarism (James K.A. Smith)
언제나 그렇듯이 제임스 K.A. 스미스는 문화적 습관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통찰력이 있는 만큼 똑같이 시각이 분명하다.
오늘날 NFL의 추수감사절 게임은 워싱턴 포스트에 게재된 바와 같이,
미국이 '신과 나라'에 얼마나 집착을 하는지를 하나의 장관을 통해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문화의 습관, 전통, 제도를 일상적이고 비종교적인 일로 보는 반면,
제임스는 훨씬 더 위태롭다고 본다.
그들은 경쟁적인 의식,
즉 "종교적인" 성공자들이 우리의 예배를 위해 경쟁하고 우리의 사랑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형성하는 형성적인 것이다.
우리의 경쟁적인 문화 "예전"
(예: 여기서는 전통적인 NFL 추수감사절 경기,
또는 스미스의 다른 글에서는 예를 들어 소비주의를 위한 예배당으로서의 쇼핑몰 - 블랙 프라이데이와 상당히 관련이 있음)는
우리의 애정을 잡아당기고, 그 과정에서 우상들을 잘못 자리매김하는 변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세속적인 시대에, 우리의 종교적 충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소비, 자아, 국가라는 새로운 변화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수감사절이 여전히 종교적이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의견 불일치가 신성모독으로 취급될 때, 우리는 한 신전에 들어간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조차도 세속적인 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에 면역이 되지 않다.
… [우리는] 미국 시민 종교의 상태와 그것이 전통적인 종교 공동체를 수용하고 변형시키는 방식에 관한 것을 배운다.
…신민 종교의 이러한 예전은 은밀한 우상숭배의 방식이다…
[여기에] 거의 항상 나라와 국기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정에서도 정착시키는 본보기이다.
군대를 "분명히 실재하고 거의 신성시되는, 국가 신화의 구현"으로 식별하는 데 있어서 특히 통찰력을 준다.
군인들을 "자유의 제사장 (중재자)"이다.
스미스는 문화적, 세속적 관행을 취하여 종교적인 용어로 묘사하는 재주가 있다.
그는 그들을 예전적 의식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거의 묵시적으로 봉사한다.
묵시는 미래의 예측이 아니라 현실의 폭로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 사고 있는 사건들과 제도들이 진짜 무엇이고,
따라서 진정으로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공개하거나, 폭로한다.
Star Wars as Cultural Liturgy. “May the Force be with you.”
당신의 마음이 집착하고 신뢰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바로 당신의 진정한 신이다.
마르틴 루터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장 칼뱅
당신이 예배하느냐, 마느냐? 가 아니라 무엇을 예배하는가?이다.
우상숭배는 신학보다는 예전의 문제이다.
가장 매력적인 우상은 무지나 오해 또는 지적 창작물이 아니다.
방향이 잘못 잡힌 욕구의 산물이다.
인간은 예전적 동물이다.
인간은 예배로 사랑이 형성되는 피조물이다.
예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본질이다.
삶이라는 매일의 전장에서는 무신론이라는 것이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배하지 않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예배한다.
단지 어떤 대상을 예배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우리를 삼킬 것이다.
돈이나 물질
육체와 미모와 성적 매력
권력
지성
이런 형태의 숭배가 진짜 위험한 이유는?
그 자체가 사악하거나 죄를 짓는 일은 아니다.
이런 숭배가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빠져 들어간다.
우리는 디폴트 세팅 (default setting)이 된다.
데이비드 포스트 윌리스
디폴트 세팅 - 나무위키
1 . 개요 2 . 하이스코어 집계 에서 1. 개요 [편집] 오락실 게임에서 기본 설정을 의미한다. 공장에서 출하되었을 때의 설정 그대로를 의미하며 게임에 따라서 디폴트 세팅엔 차이가 나지만 대체적으로는 잔기2, 난도는 노멀 세팅이 대부분이다. 메탈슬러그 시리즈 의 경우 기본 잔기 2, 레벨 4, 타이머 60초가 디폴트 세팅이다. 에브리 익스텐드로 인해서 싱립되는 영구 패턴 의 경우 성립되는 기준은 바로 이 공장출하세팅 설정하에서 실현이 가능하느냐의 여부가 기준점이다. 공장출하세팅 하에서 실현이 가능하다면 영파가 성립되지만 디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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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통해서는 바로 예배로 나아갈 수 없다.
바른 인식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의도적으로 무의식을 재조정하는 것, 잘 예배하는 것, 하나님 나라에 조율된 예전에 몰입하는 것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무의식까지 사로잡고 방향을 재설정한다.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3.15-17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어떻게 아가페로 방향이 잡힌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진정한 기독교 예배의 실천이 우리의 사랑을 훈련한다.
예배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실천이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길러낸다.
진정한 기독교 예배가 본질적으로 우리가 몰입해 있는 경쟁하는 예전들,
은밀하게 우리의 사랑과 갈망을 사로잡고,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좋은 삶의 전망을 그릇되이 상상하게 만드는,
문화적 실천들에 대항적 형성 (counter-formation, counter-liturgy)이다.
제자도의 핵심은 예배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예배가 필요하다.
독서평
1. 한글 번역판의 제목 "습관은 영성이다"는 마켕팅을 위한 선전구호이다.
원저의 제목, "You Are What you Love: The Spiritual Power of Habit"의 부제를 살려서 부각시킨 광고카피이다.
"You Are What you Love"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다)는 일종의 패러디이다.
You Are What you (think, eat, read, wear, do,....)
이러한 종류의 "You are What You ...."는 정체성 (identity)와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즉 인간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일차적인 질문이 올바르게 던져질 때에, 이차적인 질문, '제자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제대로 나온다.
그러면 삼차적인 질문, '제자훈련이란 무엇인가?'가 맥이 잡히게 된다.
인간은 누구인가?
여기에도 수많은 선택지들이 놓여 있다.
Homo sapiens (지혜가 있는 인간), 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homo faber (만드는 인간), 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Homo Sacer (버려지고 죽어도 애도할 수 없는 인간), homo homini lupus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이다), homo digitalis (디지털 인간), 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
스미스는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닌 '예배하는 존재' (Homo liturgicus)로 본다.
제임스 스미스는 인간에 대한 주지주의 접근 방식이나 반지성주의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퀘도에 올려 놓고 인간을 이해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이다.
욕망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예배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무엇이라도 욕망하고 사랑하고 예배한다.
문제는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예배하느냐?'이다.
무신론자들은 자신은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틀렸다.
흔히 말하는 신을 숭배하지 않아도, 다른 무언가를 신으로 만들어 숭배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한다고 스스로 여긴다.
그런데 틀린 경우가 많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의 예전에 푹빠져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나침판
규칙적으로 나의 나침판이 극북 (예수,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이에 따라 재조정하고 방향을 제설정하는 조율이 필요하다.
2. 그렇다면 제자도는 무엇인가?
제임스 스미스는 기존 학국 교회에 많이 알려진 제자훈련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을 폭로한다.
주지주의적 제자훈련, 정보의 입력을 통해서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진정한 제자는 머리에 성경구절이나 교리를 꽉 채운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는 기술을 익힌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는 교회 또는 선교단체를 위한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는 교회 사역이나 선교단체 사역에 사용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진정한 제자는 예수와 같이, 하나님이 욕망하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전망하는 것에 자신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제자는 하나님을 욕망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전망하는 사람이다.
3. 그렇다면 제자훈련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제자훈련은 성경이나 교리의 지식 습득이나 정보 축적이 아니라, 습관의 훈련이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하다.
습관은 머리로 학습된지 않는다.
습관은 마음에 새겨진 것으로, 직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오랫동안 운전을 한 사람이나,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를 다뤄 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반복을 통해서 몸에 익혀 진다.
몸이 만들어진다.
메이저리그의 유명한 타자라도 몸이 만들어지지 않은 사람은 시속 150킬로미터 강속구를 칠 수 없다.
유명한 프로축구 선수라도 몸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경기감각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몸만들기, 경기감각 익히기가 필수적이다.
그러면 어디서 몸이 만들어지는가?
예배이다.
에배가 제대로 작동하면, 굳이 따로 제자훈련이 필요가 없다.
예배가 우선이고, 본질이고, 근본이다.
매주 반복되는 예배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몸만들기를 해야한다.
세상에 나가서 사탄이 주도하는 현실 속에 판판히 깨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
습관이 베여있지 않다.
예배에서 하나님 나라을 욕망하고 상상하며, 몸만들기를 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능력이 있게 살아갈 것이다.
제 2장에서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점검한다.
세상에 깔려있는 문화적 예전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요약
우리는 종종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라고 가정한다.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다("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더 형성된다.
그것은 더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제자도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제자도는 올바른 방향으로 사랑을 점화시키고 겨냥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디자인한 목표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겨냥된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
그래서 문제는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는 '이상적인 세계'의 비전이 무엇인지 시사한다.
그 비전은 우리가 사는 방법을 이끌어간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형성될까?
그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을 모방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한다.
그것은 사랑이 습관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을 형성하는 습관은 작고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의 방향을 바꾸거나 방향을 잘못 잡게 할수 있는 강력한 마음 교정기 (heart-calibrators)이다.
가장 형성적인 반복 습관은 우리가 매일 참여하는 예전들이다;
우리가 단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인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는 문화적 관행이다.
기독교 예배는 이러한 형태의 (변형) 형성적인 문화 예전에 대한 일종의 생사를 건 대항 형성 (a vital counterformation)이다.
주요 인용문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바로 그게 문제다. 기독교 제자도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인간 학습자를 지식과 아이디어를 위한 안전한 보관함처럼 취급한다.
단지 신념의 지적 수용함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있는 학습자라고 가정한다.
--심각한 제자도는 실은 마음의 제자도이다.
"제자도는 우리를 불타오르게 하여야 하고, 사랑의 "무게"를 바꿔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고, 사랑이 미덕이라면, 사랑은 습관이다.
이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세계 지향성,
즉 어떤 종류의 선한 삶을 지향하는 갈망과 욕망이 모방과 실천에 의해 형성되고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론과 적용
찾을 내용 (WHAT TO LOOK FOR)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숭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랑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바울이 빌리보서 1:9?11에서 정확하게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 존재는 어떻게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사람이 되는가?
토론을 위한 질문 (QUESTIONS FOR DISCUSSION)
1. 데카르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즉 인간을 "생각하는 사물" (res cogitans. p16)로 보는 견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어떻게 제자훈련을 경험한 것과 일치하거나 다른가?
2. "사랑하기 위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다"(p.21).
우리가 "알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나 어떤 무언가의 예를 들어보자.
3. 스미스에게 인간이 되는 것은
"움직이는 것,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 (on the move, pursuing something)" (p.23)이다.
삶의 방향이 결핍되어 있고, 목적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결코 온전하게 산다고 말할 수 없는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향하여 잘못된 방향을 설정하였던 경험이 있는가?
4. 스미스는 자신이 말하는 "제2의 천성"(p.35)의 예를 제시한다.
당신도 생각하지 않고 제2천성 역할하는 다른 예들을 들 수 있는가?
당신이 가진 제2의 천성으로 익힌 기술에 경탄하고 어떻게 하는지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는가?
5. 스미스는 우리의 욕망은 "배우기보다는 사로잡힌다" (caught more than they are taught)고 말한다 (p.42).
좋은 선생님, 코치, 음악 강사, 또는 부모님을 생각해보라.
교사로서 그리고 학습자로서 당신에게는 어떻게 이것이 공감이 가는가?
6.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졸업식 연설은
비록 월리스가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깊은 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p.45-47).
욕망과 예배에 대한 월리스의 토론은 어떻게 많은 청중들과 공감을 이룰 수 있었을까?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과 더불어 인간의 욕망과 예배를 논의할 때에,
월리스의 연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마무리 적용 (CLOSING APPLICATION)
스미스에 따르면,
예배는 "우리가 종종 몰입하는 경쟁하는 예전들을 거스르는 대항형성 (counterformation)"이다(p.45).
우리가 예배를 판에 박힌 일일상이고 따분하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자극적이고 영감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든지 간에,
스미스의 이해는 어떻게 예배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꿀 수 있을까?
당신은 스미스가 제안한 것이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여기고,
그의 제안을 반영하는 예배로의 부름이나, 입례송 (an introduction to a song)을
무엇으로 했으면 좋을지를 생각할 수 있는가?
응용 질문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진짜. 어떻게 아는가?
어떤 반복적인 습관이 당신의 삶에서 가장 형성적인가?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눈금 재조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고 실천할 수 있는가? blog.naver.com/lee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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