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의 창

사무엘 백이 해석하는 미켈란젤로의 하나님 형상

by 은총가득 2021. 1. 8.

사무엘 백 (Samuel Bak)이 해석하는 미켈란젤로의 하나님 형상

 

Michelangelo - Creation of Adam

cropped 17 % horizontally, 44 % vertically using CropTool with precise mode.

Wikimedia Commons

 

Samuel Bak, The Creation of Wartime III

사무엘 백은 까다로운 영역을 다루는데 있어서 달인이다.

그 증거는 그가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와 같은 친숙한 작품들의 자기 식으로 바꾸어서 사용하는 그림들에서 나타난다.

"전쟁 시간의 창조 2" ("In a Different Light" 시리즈로부터)에서, 사무엘 백은 미켈란젤로와 20세기 초현실주의자인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양쪽에서 과감하게 전용한다.

Rene Magritte - Wikipedia

Rene Magritt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Magritte" redirects here. For the asteroid named after the artist, see 7933 Magritte . Rene Francois Ghislain Magritte ( French: [??ne f???swa ?il?? ma??it] ; 21 November 1898 ? 15 August 1967) was a Belgian Surrealist artist. He became well know...

en.wikipedia.org

 

그는 시스티나 성당뿐만 아니라 냉장고 자석과 유치한 생일 카드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신의 손과 인간의 손 사이에서 어떤 감정이 차 있는 제스처를 취하여,

하나님의 힘, 자연, 그리고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데 사용한다.

여기서 사무엘 백은 폭파된 벽돌담에서 신을 부정적인 공간으로 표현하지만(마그리트의 투명한 새에 대한 암시),

, 미켈란젤로에 대한 언급은 단순한 실루엣으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다.

못으로 벽돌벽에 고정된 명판(名板: 사람·사건 등을 기려 이름과 날짜를 적어 벽에 붙여 놓은 물건)처럼,

오직 신의 손가락질만이 긍정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아담은 미켈란젤로의 포즈를 흉내내지만, 수감자의 삭발된 머리를 하고 감옥의 가운을 입고 지치고 허무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붕괴된 집 잔해, 불발된 폭탄, 빈 캔버스 속에 있는 완벽한 불협화음인 보라색 천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뒤로 젖힌다.

용감한 신세계는 없어, 이건.

자신의 이미지로 아담에서 사무엘 백은 아담 자신의 손의 거꾸로 된 캔버스를 신의 형상으로 대체하면,

분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구걸한다.

신은 단지 궁핍한 사람의 발명품일까?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무엘 백의 작품을 렌즈로 삼아,

600만 유대인 희생자들의 트라우마와 함께,

그의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씨름이 어떻게 성서의 죽음자들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는 지점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그의 강력하게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보고 듣고,

트라우마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살아질 수 있는지를 감상하라고 요구한다.

사무엘 백이 겪은 경험의 풍경에 주의깊게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아마도 처음으로 고통과 상실을 다루려는 성경 자체의 창조적 노력과,

아마도 왜 성경의 가르침이 예술에 그토록 중요한지, 이런 성스러운 본문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사무엘 백의 작품에서 그를 만나보고, 그가 그리는 것을 듣고, 성서의 목소리에 귀를 더 정확하게 맞추도록 하자.

 

파괴된 가구, 버려진 주방 기구, 황폐해진 신발, 임대 담요, 부서진 기둥 등 전쟁으로 파괴된 잔해에 싸여 있고,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더미 위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난민 한 명이 쓰러져 있다.

인간 세계의 폐기물들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로 사라진다.

그는 텅빈 실루엣으로 존재하는 미켈란젤로의 아버지-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오직 신의 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절단된 현수막이 구멍이 뚫린 벽에 붙어 있는 모습으로...

잔해 너머로 파괴의 전경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람과 신의 형상은 모두 포탄과 소총, 빈 벽, 캔버스, 두루마리, 책, 명판, 기도 숄로 덮인 밧줄로 묶인 십자가, 그리고 연기로 끈장식된 스카이라인으로 이루어진 틀 속에 있다.

 

Sistine Chapel

 

미켈란젤로의 신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질서 정연한 우주를 천장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그는 작은 파편들로 폭파되어 버련다.

그 신의 형상은 부서진 벽돌, 갈라진 나무토막, 하늘을 향해 짓문을 퍼붓는 화장장의 연기,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이중 요드(히브리 단어. 신체가 없는 하나님의 성경적 이름을 상징하는데, 도저히 언어로 형언할 수 없음을 뜻한다).

미켈란젤로의 아치형 천장이란 성스러운 공간에서 추방되어, 바로 이 하난밈은 벽, 약속, 언약, 어쩌면 도덕 그 자체를 깨어버리고, 전혀 다른 의미의 우주에 아담을 남겨둔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엘 백의 예술적 지형으로 비비고 들어가서, 주목하여 본다.

이 곳에는 친밀한 세계, 웅장한 풍경, 상징적인 서사들, 개인 유물들이 파괴되어 잠정적으로 재조립되어 있다.

사무엘 백은 기독교의 창조의 고전적 표현을 재전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전시의 창조 III> (Creation of Wartime III)은 사무엘 백의 그런 시도를 하였던 많은 그림들 중 하나이다.

파괴와 건설, 잠정적 생존, 보잘것 없이 미약한 회복의 장면들로 사무엘 백이 다시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 상상력은 시차 효과 (parallax effect. 視差: 관측 위치에 따른 물체의 위치나 방향의 차이)를 창출한다.

즉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서, 우리로하여금 전혀 다르게 심오한 지각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든다.

 

Parallax - Wikipedia

Parallax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is article is about the apparent displacement of an object viewed from different positions. For other uses, see Parallax (disambiguation) . This article needs additional citations for verification . Please help improve this article by adding citations...

en.wikipedia.org

 

우리의 초점을 세계의 창조에서 수선할 필요가 있는 세계로 전환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무엘 백은 우리에게 위태롭기 짝이 없는 "세상을 띁어고치는" 틱쿤 올람 (tikkun olam)을 재현하여 제공한다.

 

 

사무엘 백은 신동이었다.

빌나 게토 (Vilna ghetto)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그곳에서도 유일한 유대인 화가였고,

지금까지 70년 동안 그림을 그려온 야드 바셈 (Yad Vashem-예루살렘의 The World Holocaust Remembrance Center)에서도,

유일한 유대인 예술가이다.

(왼쪽 사진은 빌나 게토의 어린이들. 오른쪽 사진은 세계 홀로코스트 기억 센터)

사무엘 백은 개인사, 유대사, 기독교사, 서양미술사 등을 다함께 엮어,

그의 쇼아 체험과 생명에 대한 시각적 이야기 구술과 서사적 비전과 화장터 굴뚝의 그늘에서 살았던 삶을 일종의 패션으로 만들어낸다.

그의 서사적 태피스트리 (tapestry)는 역설, 아이러니, 역정형화 (reverse patterning)의 실타래로 짜여져 있다.

 

<전시의 창조 III>에서, "새로운 창조"는 묵시로 오점을 남기고, 황폐화는 신상의 표식 역할을 한다.

프리모 레비가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모든 사람에게 붙인 용어인 뮈셀만 (Musselman - 붕괴되어 가는 인간)은

새로 태어난 인간에게 붙이는 대용물이다

(Primo Levi. 유대계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작가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쓴 《이것이 인간인가》가 대표작이다).

책, 두루마리, 명판들은 기록되지 않은 채 놓여 있고,

캔버스는 도색되지 않은 채로 있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삶에 있는 죽음인지, 죽음에 있는 생명인지, 죽은삶인지 명확한 방향성을 나타내지 못한다.

사무엘 백은 태생부터 삶을 거처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구도가 더 이상 깔끔하게 진행되지 않는 파열된 이야기들의 잔해와 함께 작업한다.

삶과 죽음은 "더 이상 대립이나 대안이 아니라, 역사와 관련하여 자아를 보는 우리의 방식을 바꾸는 고통스러운 친밀감으로 공존한다."

삶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와 같은 예술과 고통은 동맹이다.

유대인 철학자이자 토라 번역가인 프란츠 로젠츠베이그 (Franz Rosenzweig)는 2차 대전의 생존자이다.

그는 "예술은 삶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동시에 사람들이 그것을 견디도록 돕는다"고 관찰하며 "잊지 않고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트라우마를 지우거나 상처를 가리기는 커녕, 예술은 "고통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구조화"함으로써 극복한다.

예술가는 자신이 고통받는 것을 말하려고 자신에게 사명이 주어졌음을 친히 알고 있다….

그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려 하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대변한다.

자신의 표현으로 그는 모순을 화해시킨다.

그 자신이 거기에 있고, 고통 또한 거기에 있다.

그는 고통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고 화해시킨다."

사무엘 백은 자신의 예술이 "고대 상처의 상처를 보호하면서도, 상처 자체가 감추고 있는 진실을 알기를 열망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로젠즈바이그의 말을 더욱 잘 파악하고 있는 용어로 반향시키고 있다.

사무엘 백의 관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고통의 서사적 자질과 지장을 초래하는 효과뿐 아니라, 예술가는 죽은 자의 증인을 감당해야 한다 한다는 자신의 의무감이다.

서사적 용어로,

그 상처는 "과거가 도달하여야 했었다고 간주하는 것을 영원히 변화시키고,

"생각하기 아주 힘든" 미래를 열어주는 결정적인 사건의 흔적을 표시한다.

"치명적인 질병 또는 부상, 어린이의 죽음, 전쟁, 강제 추방, 대량학살, 자연재해와 같은 재앙와 같은 부분이 남긴 상처는

개인과 지역사회를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자원을

고갈시켜버리고 겨우 간신히 챙길 것만을 남겨둔다.

 

 

사무엘 백의 아담처럼,

생존자들은 한 비평가의 용어인 '서사적 잔해' (narrative wreckage)

즉, 생명과 관련된 모든 일관성의 붕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존자의 도전은

남아있는 것을 수습하고 생존 가능한 잔재를 선별하며,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를 수리하고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재구축하는 몹시 힘든 임무에 관여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고통스럽다.

왜? 부분적이고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고통의 이야기는 빈번하게 다시 창아가야 한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청중, 새로운 인식, 그리고 이야기꾼의 변화하는 경험들은

그 이야기를 새롭게 정교하게 다듬고, 과거를 재해석하고, 미래를 다시 상상하기를 요구한다.

 

반복은 의미에 핵심이다.

사무엘 백만큼 이 점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회고적 반복과 개정의 대가인, 그는 쇼아의 서술적 잔해들을 다시 찾아가,

유대인의 삶과 서양 역사와, 인간의 본성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그는 빌나 게토로 다시 돌아간다.

그의 어린 시절, 바르샤바 게토, 포나리 숲에서 살해된 가족의 묘지, 성경, 위대한 예술적 거장들을

쇼아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시시때때로 다시 찾아가서 자신의 팔레트에 담아 둔다.

그는 애도하여야 할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그린다.

기억한다.

그리고 잠정적이지만은 한때 아름다웠던, 한때 생기가 넘쳤던 것을 다시 고쳐보려고 한다.

그는 목가적인 환영과 위안을 주는 소설 앞에 의심을 품고 서 있다.

그는 아이러니컬한 색으로,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세부적인 내용들을 엄밀하게 묘사하면서, 역설적 진리의 세계를 그려낸다.

 

이 역설적 진리의 세계는

한편으로 상처입고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증언을 감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서술적 잔해를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잔해를 수선하는

건설적인 작업을 착수하고 계속하여 관여하는 것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도전한다.

 

서사적 잔해의 시각적 해석이 아니라면, <전시의 창조 III>은 도대체 무엇인가?

미켈란젤로의 찬란한 천장은 폭력과 유혈이 난무하는 곳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천장이 투영하는 장엄한 우주도 그와 더불어 무너졌다.

자신의 이상적인 아담에 대한 비전은

신적 생명을 거의 접촉하려고 하고, 약속, 잠재력, 동반자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에 폭발해버린다.

완벽한 체격은 쇠약해진 형태로 변질된다.

아름다움은 산산조각이 난다.

하늘의 주관자들과의 연대는 비참한 고독에 길을 내어준다.

신조차 도망칠 수 없다.

신의 위엄 있는 현존은 말 그대로 증발해 쇼아의 연기 속에 사라진다.

상처의 원색적인 진실은 또 다른 이야기, 즉 수정된 프롤로그, 창세기에게 새로운 개막사를 다시 말하도록 강요한다.

성경의 목소리를 울리는 사무엘 백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태초에 홀로코스트가 있었느니라...."

사무엘 백은 미켈란젤로의 창조와 신의 섭리에 대한 비전,

즉 수많은 것이 성경 자체의 비전과 연관되어 있는 그 비전에 의심을 품고 살아간다.

사무엘 백은 심지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신적인 약속에 자신이 도전하여왔다고 자신에 대해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과 인문학의 학도로서,

사무엘 백이 성경에 논쟁을 벌이며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성경 자체의 복합적인 노력을 직감하고 있는건 아닌지 궁금하다.

즉 그는 성경이 서사적 잔해에서 무엇을 찾고 정리하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고,

파국적 재앙으로 인해 파열된 공동체를 수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흡수하는 듯하다.

성경 역시 생명의 참상을 고려하지 못하는 신학적 비전 앞에서 의심을 품고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고결한 성경은 밑바박에 훨씬 더 가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성경은 "상처 자체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충실하면서도 (while remaining true to the knowledge of the wound itself)", 인간 고통을 구조화하고 극복하도록 관리하고 있을까?

성경은 그 속에 등장인물과 과거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비밀들을 인식하라고 손짓하고 있지는 않는가?

 

사무엘 백의 화실을 통해 도서관으로, 성경으로, 그리고 이들 오래 전에 지나갔던 사람들의 묘지까지 따라가 보자.

 

Memorial, 1986 Samuel Bak Oil on Canvas 39 ¼ x 31 ¾″

 

I. 시내산 기억하기 (REMEMBERING SINAI)

사무엘 백의 '기억' (Memorial)에는 부서지고 짜깁기한 십계명 돌판이

한편으로는 깨어진 시내산 언약에 대한 시각적 은유와,

다른 한편으로 600만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묘비,

둘 다를 형성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죽은 사람들이 묻힌 곳을 표시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을뿐 아니라,

이집트의 속박에서 자신의 백성을 한때 인도했던 하나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두 돌판은 묘비가 짝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이 돌판들은 신의 부재와 사리진 사람들을 대신하여 증언하고 있다.

 

신적 이름의 의미를 나타내는 글자인 '이중 요드들'은 녹이 슬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절박하고 희망적인 신적 현존을 강요하는 듯하다.

하지만 오른쪽 돌판의 꼭대기에 수동으로 고정되어 있다.

백성들은 오직 흔적과 조각으로만 존재한다.

잘려나간, 대략 다시 잘려진, 다윗의 별은 돌판 퍼즐의 중심 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양은 돌 절단기와 철공예품의 유감스러운 예다.

여기서 20세기 유대인의 정체성은 역사적 파열 후에 다시 결합된다.

이 파열은 현재 잃어버린 자와 남은 자 모두의 정체성에 통합되어 있으며,

불안정하고 손상된 구조에서 지속적이지만 불안하게 응집되어 있다.

 

왼쪽 돌판의 숫자 6은 슬퍼하고 비난한다.

그 자리에는 쇼아에서 죽은 600만 명뿐 아니라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철조망과 강제 수용소 수의, 철재 받침대, 총알구멍 등 이 암호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희생자와 가해자들 모두에게는 뗄래야 뗄 수 없이 함께 묶어져 있다.

 

우리가 출애굽기 언약 서사(출 19-20, 31:18-34:35)로 되돌아가 보자.

우리에게는 친숙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10계명을 돌판에 새기는 장면이다.

 

사무엘 백은 이 장면을 염두에 두고,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성경 본문은 무엇을 기념하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마주치는 죽은 자의 영역은 무엇인가?

어떤 무덤이 표시되고 있는가?

어떤 독촉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법률, 규칙, 계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

살인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최고장은 불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언약, 계약은 당사자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며 서로를 신뢰할 때는 필요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문제가 거의 발견되지 않거나 전혀 발견되지 않는 세상에 응집력을 가져오려고,

계명들DL 시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계명들은 가치의 불평등으로 인한 차이가 있어서 충돌하고 있었던 고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 기풍을 조성하는 기능을 하는가?

그리고 공동체의 경험이 의심하고 불신할 수 있는 근거를 주었기 때문에,

이 계명들은 아마도 과도하게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신적 현존, 저작권, 권위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걸까?

 

출애굽 이야기는 심각한 공동체의 트라우마를 암시한다.

속박에서 구출해준 신을 형상화해야 한다는 백성들의 불안에 화가 난 모세가 친히 원판을 산산조각 내어버린다.

그 뒤로는 신의 손가락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끌로 새긴 두 번째 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 돌판들은 아마도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 어쩌면 휴전의 상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두 배로 실패한 책임과 신뢰의 짐을 짊어지고 폭력, 고통, 배신의 기억을 전달한다.

하나님이 현존한다는 징후가 필요한 불안정한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반응하는 불안하고 불안정한 신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제 많은 학자들은 십계명과 시내산에서의 대면의 틀을 형성하는 이야기, 즉 창세기부터 열왕기에 이르기까지 펼쳐지는 성경 본문 전부가 포로 후기에 구성되었다고 그 기록 연대를 설정하고 있다.

즉 한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들을 상상력을 가지고 신학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다.

이 공동체는 처음에는 앗수르에게, 그 다음에는 바벨론에게 패배를 당하고 강제 이주하고. 재건이라는 역경을 견디고,

페르시아 점령으로 인해 계속되는 경제적, 정치적 압박을 겪었다.

그 경험들은 표면적으로는 이집트 속박으로부터의 탈출을 읊고 있는 서사 (이야기 전개)의 틀 속에서 재구성되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통해 다른 트라우마가 살아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기원전 8세기 북부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기원전 732년-722년),

그리고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 주요 인구의 살육과 유배, 토지와 경제의 황폐화가

출애굽 본문과 그에 따른 언약적 동반자 관계의 비전을 생산하도록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는지를 반드시 물어봐야 한다.

 

언약을 고집하는 것은 언약이 명백하게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는가?

어쩌면 하나님의 지속적인 보살핌과 양심에 대한 백성의 신뢰가 산산조각 나는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서도 있는 것일까?

십계명 자체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필연적인 공식으로, 그들이 위반에 대한 벌칙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시민들을 징벌할 권한이 전혀 없는 제국적이고 지배를 받는 식민지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가?

그러한 문화적, 정치적 파탄 속에서,

우리는 낯선 제국적 가치의 압력에 대항하여 저항으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서사적 시도를 분별하고 있는가?

물론 앗수르에게 패배, 바벨론 망명, 그리고 그 후의 수세기 동안의 역경은 홀로코스트의 규모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대격변과 대량학살을 동일시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 위험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에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심오한 파열, 이스라엘의 신학적 토대에서의 깊은 단층선들을 감지한다.

이러한 파열과 단층들은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이야기꾼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서사적 자기표현의 윤곽을 재고하고, 재구상하도록 강요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에 이르기까지의 언약적 이야기는 이제 한편의 서사시로 재구성된다.

이 서사시는 그 동안 견디어 온 고통과 상실을 예술적이고 진실하게 공개할 뿐 아니라,

보다 실행가능하고 덜 순진한 속편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지도의 역할을 한다.

지배에 의해 강요된 정치적 규약을 흉내내면서,

이 상처입은 이야기꾼들은 아마도 제국 통치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란 전복적인 행위로서,

그리고 확실하게도 지배자에 대항하는 공동체를 규정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 살아가는 삶에 대한 구상을 비추어낸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서사적 잔해를 건져낸다.

식민지 하의 삶과 정체성을 구조화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해방 의지에 조심스러운 희망을 표현하면서,

사실상 하나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동시에, 이야기와 이야기꾼들은 하나님에게 인간과 같이 동일한 도덕적 기준에 대해 책임을 지우려고 한다.

"죽이지 말라"는 것이 인간 공동체를 위한 규칙처럼, 하나님에게도 많은 것을 상기시켜주는 최고장 역할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문화적 재앙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지배,

고통과 죽음의 지배, 공동적 과실 가능성의 인정, 포획자에 대한 반항적 저항,

그리고 잘못을 깨닫고 난 후에서 가지게 되는 바,

약속과 행동에 있어서 기대치보다 턱없이 모자라는 신에 대한 원만한 시각을 함께 예술적으로 엮어내는 이야기를 접한다.

 

Genesis, 1988 Samuel Bak

 

II. 창조를 재창조하다 (RECREATING CREATION)

 

우리가 <전시의 창조 III>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무엘 백의 창조 이미지는 창세기 읽기에 대한 유사한 질문과 해석 가능성을 제기한다.

 

1988년 작품인 <창세기> (Genesis)에서,

창조는 떠다니는 돌들과 더불어

깨진 병, 무작위 식기, 채우기 기다리는 성배, 먹어주기를 기다리는 조각 과일 등과 같은 문화 유물로 시작된다.

창조는 '무로부터' (ex nihilo) 시작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어떤 혼란스러운 우주의 잡물들로부터 시작되지도 않고,

오히려 방해를 받은 삶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듣는다.

"태초에 방해가 있었느니라…."

"땅은 형태가 없고 공하하며, 어둠은 깊은 곳의 표면에 드리워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의 표면 위에 운행하고 있었다"(1:2).

사무엘 백의 장면에서 빠져 있는 것은 깊은 곳 위에 새처럼 맴도는 하나님의 영이다.

대신 훼손된 인간 공동체의 잔해가 황무한 풍경 위에 매달려 있다.

창조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공동적 빅뱅에 해당하는 정상생활의 대격변으로 시작된다.

 

Bereshit Bara, 1995 Samuel Bak

Oil on Linen 32 x 39 ½″

?

<베레시트 바라> (Bereshit Bara. 태초에 창조하시니라)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파괴와 돌무더기는 문자 그대로 창세기 자체의 본문을 이루고,

건축 파편들은 창세기 창조를 시작하는 히브리 문자와 단어인 성경의 첫 단어인 베레싯 바라를 형성한다.

단어들이 잔해에서 구체화되고 있는가?

잔해로 되돌아가는가?

공동체적 구조들이 말로 만들어지는가? 말로 소멸되는가?

창조는 원상태로 돌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비창조 (un-creation)에서 부각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일까?

사무엘 백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창세기 첫장의 기억을 가장 많이 떠오르게 했을법한 역사적 위기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창세기 첫 장을 다시 읽게 한다.

창세기 1장은 고전 신학에서는 세상의 태동과 자연에 대한 선언적 진술로서 열심히 읽혀지고 있는데,

이것은 창조의 본질과 인간 조건에 대한 상당수 기독교 교리의 결정적 원천이다.

혼돈으로부터 등장하는 코스모스에 중점을 둔 근대 역사 비평적 탐구는

이 성경 이야기를 수메르 길가메쉬 서사시, 고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판 아트라아시스 신화와 같은

열등하고 경쟁적인 고대 근동 창조 신화에 대한 우월적 유일신론적 대응으로 판에 박힌 듯이 간주한다.

그렇지만 사무엘 백의 시각적 자극으로 인해,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창세기 1장을 보게 되는데,

이는 추방, 사망의 여정, 그리고 디아스포라에서의 고통을 구조화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야기로서 읽도록 초청을 받는다.

사무엘 백의 출애급 설명에 관한 그림처럼, 창세기 본문은 공동체의 격변에 대응하는 성처입은 이야기꾼들의 산물이다.

 

베레시트 바라 엘로힘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할 실 때,

" 땅/지구는 "형태가 없고 공허하였다 (tohu vbohu). 또는 더 좋은 표현으로는, "야생이었고 쓰레기"였다.

태초에 "세계의 핵심에는 임대가 있었다"

망명, 정복, 파괴, 살인, 포로, 역역

(corvees. 무보수 무자유 노동의 일종으로서, 제한된 시간, 대개 1년 중 특정 일수만큼 노동력을 징발당하는 것이다.

역역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조세의 일종으로 존재해 왔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벨론 정복과 추방 사건을 목격자로 증언한다.

그는 변칙적인 표현 토후 부보후(tohu vbohu)를 사용하여,

거칠고 황폐한 땅, 빛 없는 하늘, 흔들리는 산,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세상, 황량함을 묘사하고 있다.

태초 (bereshit)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창세기 이야기꾼 둘 다 토후 부보후(tohu vbohu), 파괴의 여파, 서사적 잔해를 너무 심오하게 직면하게 되어서,

심지어 하나님의 영도 친히 피난처를 찾아 망명 중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신을 "시공간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신으로 상상하기는커녕,

우리는 대신 시간과 공간과 땅과 인간의 동반자(아담)가 필요한 취약한 신을 상상하도록 초청받는다.

태초에는 이름 없는 자, 노숙자 엘로힘 (elohim)이 깊은 곳의 표면 위를 맴돌며 (창 1:2),

빛을 비출 자리도 없고,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사람도 없다.

홍수가 지나간 뒤에 방주에서 내보낸 비둘기처럼,

하나님은 발을 디딜 땅도 없고 끊임없이 맴도는 것을 끝낼 방법도 없다.

 

물질적인 것과 서술적 잔해를 조사하면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일하는 이 신은 유해를 차지하고 시간과 공간을 재정렬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며, 모임과 분리, 연결과 분열을 통해 "세상의 수선"에 효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신성한 자아를 넘어 한때 공허하고 쓰레기 같은 '토후 브보후' (형태도 없고 공허) 모습으로 지각과 질서를 확장하시고,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신다.

Creation (1999)

원래 이야기꾼들은 정말로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행동하는 것?

상실을 경험하고 그 상실을 구조하기 위해 행동하는 신(神)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아담)은 축소된 형태의 초월적인 주권자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그 이야기에 자리매김을 한다. 인간은 자신들을 창조하는 하나님처럼,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자신의 세계를 재정비하고,

보람과 번영을 이루며, 충만과 제압, 지배와 지배권을 갖는 하나님처럼 이야기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배에 대한 보편적인 허용을 제시하기는 커녕,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 마지막 위임명령은 힘없고 패배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어떤 특권적인 주권에 대한 면허가 아니라,

공동체에게 어떤 공간이라도 주장할 수 있는 공간을 되찾도록 격려하고,

스스로 장소를 개척하고, 타락한 세계 속의 집을 노력하여 화복하고,

줄어드는 인구를 보충하고, 감각과 삶을 공허하고, 생명력이 없는 공간으로 확장하도록 격려한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바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의 이미지 속에서 창조되고 창의적이다.

둘 다 고통에 대응하여 삶에 구조와 목적을 부여할 필요성에 직면하고 대응해야 한다.

 

하나님의 제안, "우리가 만들자 …" (1:26)는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널리 선언한다.

본문은 만들고 있다.

무엇을?

이러한 인간 공동체를 위해 창조하고, 자아를 실현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열매를 맺고 번성하는 것은 희망의 행위, 다시 상상하는 행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미래를 재창안하는 행위다.

그 후에 뒤따른 계보, 즉 족보들은 이러한 미래를 증언한다.

동시에 생존의 도구와 교육의 행위로서,

창조 이야기는 포로기 이후에 겪는 고난을 현재의 생존자들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구조화한다.

특히 미래 세대는 자신들의 생애 동안에 서사적 잔해를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를 배워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난을 구조화하는 창조 이야기는

이야기 세계 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그 세계를 초월하여 다중적인 기능을 하는 안식일 제정 (창 2. 2-3)로 우리를 데려간다.

안식일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라도 신성한 딜레마를 해결하여 쉼이 없이 안절부절 못하는 신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마침내, 맴도는 노숙자 신은 이제 끊임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사업을 멈추기 위해 제때에 걸터 앉아 쉴 수 있었다.

안식일은 이후의 제사장 문헌에서 더 완전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사장 문헌에서는, 종교생활의 구조가 세계의 창조와 나란히 병행하며,

제의적 질서가 하나님의 현존 장소인 성막을 위한 장소를 창출하고 보호하도록 고안되어져 있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공동 지붕 아래에서 생략되기도하고 함께 깃들기도 한다.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제사장 문헌의 저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조상 세대들,

즉 그들의 유대인 사망자들의 영역을 기억하도록 환기시킨다.

유배지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들 이야기꾼들은

제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예루살렘의 벽을 자시 수축하고, 성전을 재건하고,

그리고 유배, 고통, 죽음의 세대에 의해 전해진 이야기를 다시 들려준다.

 

따라서 이러한 상처 입은 이야기꾼들에게는,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와 그들이 만들고 유지하는 세상에 따라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현존의 여부가 달려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다.

안식일은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안식일은 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확보하는 방법으로서, 공동체를 통합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궁극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식민지화된 노동 생산력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행위로써, 안식일은 중요하다.

 

안식일에 공동체는 계급 제약 없는 삶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고,

세상의 어떤 면들을 고칠 필요가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의 창조 이야기를 뒤이어서 공동의 트라우마와 씨름하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이 따라온다.

이를 위해, 에덴 동산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며, 유배지의 고통을 구조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복잡한 고통의 진실을 드러낸다.

인간이 비난을 받을 가능성, 신적인 모호성, 그리고 모든 생물에 신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욕망의 신비로운 역할.

창세기 4장은 두 형제가 관련된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의 자유재량, 실패한 인간 형제애, 그리고 책임감을 지고 인간답게 살지 못한 신의 실패, 그리고 또 다른 망명이다.

노아의 이야기는 홍수로 유배지를 위장하고, 인간과 신의 폭력에 대한 곤혹스런 진실을 이야기하면서 이어진다.

바벨탑, 아브라함의 부름, 하갈의 기각, 야곱의 비행, 요셉의 사로잡힘, 그래서 유배를 다시 말하기에 이른다.

유배는 각기 제한적이고 부분적이지만, 되풀이되고 반복적이다.

하지만 모두 공동의 트라우마를 통해,

인간과 신의 고통의 진리를 말하고, 인간과 신의 비난을 받을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정확하게 일일이 지정하며,

죽은 자의 현존 속에서 살려고 노력한다.

그 동안 줄곧 미래에 무엇을 붙잡을지를 창의적으로 다시 상상하고 있다.

 

 

III. 십자가 처형과 위기 (CRUCIFIXION AND CRISIS)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무엘 백이 신약 성경, 그리스도, 기독교 신학과 예술적 대화를 나눈 부분에 눈을 돌려 보자.

또한 그 대화를 통해 제기된 질문도 다루고자 한다.

만약 사무엘 백이 미켈란젤로의 보편적인 아담을 그의 수많은 많은 일상적이고 특별하며 궁지에 몰린 아담으로 전복시킨다면,

그는 또한 서구 기독교와 예술 전통에 흐르고 있는 보편적 그리스도를 특정한 아이들의 얼굴과 모습

- 바르샤바 게토의 유명한 소년, 그의 살해된 어린 친구 사멕 엡스타인, 심지어 사무엘 백 자신 -으로

그 전통의 기반을 허물어버리고 있다.

서양 미술사에서 십자가 처형 장면은 인간의 고통을 묘사할 때에 오히려 영광을 누리는 특권적인 이미지이며,

기독교 신학에서 신의 사랑과 구원이 궁극적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장면은 사무엘 백의 바르샤바 게토 소년 그림에서 가장 도발적으로 거듭 되풀이하여 그 안정된 지위가 위협을 받는다.

Study I, 1995 Samuel Bak

 

사진 속 소년의 자세에 암시되어 있는 십자가 형태를 충분히 활용하여,

사무엘 백은 이 소년을 새롭고 다른 그리스도의 구상적 모습으로 재현한다.

이 그리스도는 수녀원의 문 밖에 서서, 기독교의 성소와 의식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 기득권층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의미와 더불어

십자가 선언하는 바 구원을 주는 능력에 대하여 도전을 한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Shoah)에서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예수는 어떤 구원을 베풀 수 있는가?

또는 에밀 파켄하임 (Emil Fackenheim)의 잊혀지지 않고 맴도는 용어로 질문을 던진다:

"십자가의 고통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희희낙낙하는 자들의 소리나 비엔나 왈츠의 선율에 아이들이 학살을 당한 그들 어머니의 고통과 비교할 수 있는가?"

“What are the sufferings of the Cross compared to those of a mother whose child is slaughtered to the sound of laughter or to the strains of a Viennese waltz?”

Emil Fackenheim - Wikipedia

Emil Fackenheim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is article possibly contains original research . Please improve it by verifying the claims made and adding inline citations . Statements consisting only of original research should be removed. ( January 2019 ) ( Learn how and when to remove thi...

en.wikipedia.org

 

사무엘 백은 어렸을 때,

물론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에 매료되고 감동받았기도 하였고,

카톨릭 수녀의 도움으로 빌나 (Vilna)에 있던 한 수녀원에 자신과 어머니가 은신하였다.

그 어린 샘 백조차도 다음과 같이 결국에는 결론을 내린다.

'전통적인 기독교 십자가 신학은 홀로코스트의 한 어린 아이에게 해 줄 말이 별로없을뿐더러, 심지어 그에 관해 할말이 거의 없다'

 

어떤 면에서는 나는 예수보다 운이 좋다고 느꼈다.

나치 수용소의 비참한 포로였던 죽은 아버지는 결코 만능인 척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달인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죽음을 확실하게 직면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끔찍한 환경에서 나를 구해주셨다.

나에 비해, 예수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기꺼이 보고 있으면서도,

"당신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탄원을 무시하고, 그가 십자가에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Crossed Out II, 2008

 

기독교 전통에서 세계 구원의 도구로서 아들의 죽음을 허용하고, 심지어 가능하게 하는 묵묵부답한 신은,

사무엘 백의 작품에서,

아무런 유익함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150만명의 아이들에게 쓸모없는 고통과 죽음을 허용하는 묵묵부답한 신이 된다.

위로 손을 들고 있는 그 게토 소년은 항복하고 애원하는 손으로, 무관심한 신도 나찌의 나쁜 짓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가족관계나 웅대한 보편적 계획에 대한 주장을 부정한다.

그리고 예수의 구원하는 고난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도록 만든다:

바로 무고한 인간의 유기, 고문, 처형이다.

 

실제로 <크로스 아웃 2> (Crossed Out II)에서, 사무엘 백의 아이는 십자가를 지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이중으로 겹겹이 싸고 있는 머리는 시신의 수의를 암시한다.

사진이나 화폭의 생력 기법을 통해, 사무엘 백의 어린 시절 경험에 의해 중재된,

바르샤바 게토의 잃어버린 소년은 전혀 다른, 이 세상의 모습으로 묘사된 그리스도 아이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거리에서 처형장으로 옮겨진 아이는 우리 앞에 서서,

자신의 몸통을 샌드위치로 만드는 나무 기둥을 가로로 짊어지고, 자신은 명확하게 표적이 되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신학적으로든 다른 척도로든 우리는 도착된 정의의 현장을 목격한다.

 

우리가 이 아이를 마주하고 우리가 예상하는 운명이 그에게 닥쳐올 때,

우리는 하나님만이 문제를 삼아야 할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사진 속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카메라 들고 있어?

우리가 저격수인가?

궁극적으로 이 아이를 지워버릴 무기를 우리가 들고 있는가?

우리는 전혀 감정이 요동하지 않는 구경꾼 (onlookers)인가?

꺼림직하게 여기는 구경꾼 (bystanders)?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관중 (spectators)?

폭력을 방해하기에는 전혀 준비되지 않거나 그럴 의사가 전혀 없는 관광객 (sight seers)?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려는 의사가 있는가?

 

묵묵부답인 신과 연루되어 있는 공동체를 향한 이러한 도전은 복음서들, 특히 마가복음에 면밀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발견 할 수 있다.

마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망연자실하여 실망과 불신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으로 급작스럽게 마무리하고 있다.

경쟁적인 바리새인이었던 마태나 로마를 의식하는 누가, 그리고 말이 너무 많은 요한과는 달리,

최소주의자 (minimalist. 되도록 소수의 단순한 요소를 통해 최대 효과를 이루려는 사고방식을 지닌 작가 또는 예술가) 마가는

예수의 끔찍한 고통에 대해 승리에 도취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이나, 제자들을 위로하려고 한때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의 모습,

예수의 무의미하고 끊임없는 고통에 의미를 귀속시킬 수 있는 등장 인물이 마가에는 전혀 없다.

서사적 결말로 남아 있는 것은 빈 무덤뿐이다.

그렇다. 흰 옷을 입은 그 신비로운 청년만이 남아있다.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누구도 찾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거나 잘될거라고 확신을 주는 이들도 아무도 없다.

 

마가는 급정거하기에 아쉬웠던지 결말에 한 장면을 덧붙인다.

그 이야기는 현장에서 자포자기한 듯이 두려워하고, 마치 위기에 처한 듯이 도망을 치는 세 명의 여인들을 묘사한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막 16.8).

"그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φοβο?ντο γ?ρ).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변칙적인 구절을 마크의 마지막 단어로 받아들인다.

비록 그 이후에 마가를 읽는 청중들은 그리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 가지 이상의 대안으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결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뱀을 손으로 다루는 것과 독을 마시는 것을 믿음의 표시로 제시하여 대중에게 인기를 얻은 내용도 있다.

이들 대안적 결말에 비친 고통과 고통은 충분히 탐구할 가치가 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절과 또 다른 정원을 위해 마련되는 뱀 같은 이야기다.

"그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은 모양새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문법적으로 주적절하다.

무엇을 수식하는지도 모를 전치사(gar)를 덩그런이 매달고 있다.

그래서 청중으로 하여금 덩달아서 매달리게 만든다.

하지만 청중들로하여금 소중한 생애 동안에 매달려온 여인들의 절망적인 경험을 언어적으로 문학적으로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단어나 해결책도 곧 마련되지 못할 듯하다.

그러나 본문은 문법적으로, 서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보류된 채로 남아있다.

 

마가의 이야기는 어떤 인간의 역사와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가?

일부 학자들이 추측하듯이,

마가 복음이 서기 68년에서 70년 사이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이 이야기는 신흥 기독교 공동체와 그 삶의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은 대격변의 순간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68년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가 황제로서 칭송을 받기 위해 반란 도성에 대한 포위 공격을 중단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가 마침내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고 도성을 유린하기 위해 파견되기까지 16개월의 기간이 흐른다.

이 16개월의 공백 기간 동안 마가복음이 편성되었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이때에 마가 공동체는 감질나게 애를 태우는 그릇된 유예 기간을 경험했다.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고 상상했다.

마가복음은 그들을 다시 현실을 돌아보도록 갑자기 거칠게 몰아붙인다.

그래서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도 암울한 그림을 제시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히브리 예언과 구전 조각들을 모아,

이야기꾼 마가는 메시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십자가에만 거침없이 매달리는 이야기를 한데 모아 놓았다.

그 전에 누구도 하지 않았던 최초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Carrying a Cross Samuel Bak

진퇴양난과 두려움의 흔적을 뚜렷이 드러내는 현재의 시점에서,

마가는 완전한 포기를 해야만 하는 임박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미리 알려준다:

거짓 예언자, 체포와 재판, 그리고 형제와 형제를, 아이가 아버지를,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배반하는 상황 (막 13: 5-37).

마가 공동체의 현재 경험을 예수님의 이야기로 투영하면서, 이야기꾼은 공동체를 당분간 준비시키고 있다.

이때는 인간적 도움도 신의 도움도 바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듯하다.

인내, 구원, 회복의 모든 수단이 의심스러울 때이다.

우화에나 나올법한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 (dominion)에 대한 종교적 기대는

마가 공동체의 죽은 자와 죽고 있는 자들의 통치에, 그리고 로마인의 손에 자신들이 당하게 될 고통과 죽음에 양보해야 할 때이다.

 

마가 공동체는 삶과 죽음, 즉 죽음의 삶 사이의 위태로운 순간에 붙들려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이 보이는 신에 의해 완전히 상실되고 버림을 받았다고 여겨기까지

인물과 그의 행동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마가복음 편집자나 마가의 이야기에 의존하는 후기 복음서 작가들은 이러한 결말과 경험을 그 이후로는 결코 다시 읊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삶을 강조하고 죽음을 과소평가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마가가 간직하고 있는 불안한 기억을 지워버릴 수 없다.

마가 공동체는 예수가 처형된 지 한 세대 반밖에 안 된 시기를 살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 강력한 후유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마가는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를 예상하고,

그의 공동체가 이제 티투스의 손에 종언을 고하게 된다는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예변적(proleptic) 이야기를 읊어주고 있다.

창세기와 출애급기 이야기꾼들이 바빌로니아 유배라는 재앙의 여파로 자신들의 공동 세계를 수선하고 있다면,

마가는 로마의 대재앙이 펼쳐지는 정초에 글을 쓰면서,

아직 더 많은 파괴가 임박했고, 그들이 겪을 고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무엘 백의 십자가에 못박힌 아이들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마가의 이야기도 뇌리에 떠나지 않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과 결백한 장면들을 대신에 투영하여,

자신만만한 유대교의 메시아 기대 앞에 암울한 의심을 표하고 있다.

사무엘 백이 우리의 시선을 이 한 아이의 죽음과 600만 명의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집중시키듯이,

마가는 그의 청중이 진실을 외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기다리는 섬뜩한 고통에 거듭 마주 대한다.

그리고 예수의 경험을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개인적인 사건을 예측할 수 있는 사건으로 재구성한다.

 

우리의 눈은 지평선이 아닌 땅 위에, 거창한 것이 아닌 무덤에 고정되어 있다.

우리는 사무엘 백의 십자가에 못박힌 소년들을 증언하고,

아이들을 파괴하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비난받을 가능성과 책임을 고려해 달라고 애원한다.

그렇듯이, 마가의 청중들 역시 다음과 같은 궁극적인 질문들로 압박을 받고 있다.

바로 이게 약속된 끝인가?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고통은 피할 수 없고, 선택할 여지가 없는 선택이 기다리고 있는 그 순간에,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은 마가의 예수처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사람들의 육체적 필요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그들은 자신이 억압을 받는 동안에도 동정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그들은 로마라는 적과 협력할 것인가?

그들이 살아왔던 대로 죽을 것인가?

그들은 겁에 질려 도망칠 것인가?

 

사무엘 백처럼 마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 결말은 너무 많은 것이 의구심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아는 독자들에게 세계를 고치는 마지막 행위를 남겨두고 마무리한다:

불완전한 문장, 빈 무덤, 두려움으로 마비되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로마에 파멸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공동체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혹자는 "마가 복음이 "영속적인 매력을 풍기는 부정의 역설에 너무 가혹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불평한다.

이러한 관찰소견에, 빌 플레허 (Bill Placher)는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의 불확실성의 시대에 특정한 호소를 하는 것이 마가의 이러한 특징들일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승리에 도취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복음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참상과 우리 안에 있는 의심들과 화해를 이루기가 더 어렵다.

마가는 자신의 첫번째 독자들에게 공을 넘기듯이, 우리에게도 넘기고 있다.

세 여인들은 침묵하며 도망가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를 이미 들었다.

우리의 삶과 증언으로,

그 이야기를 말하고 그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만들 수 있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사실상 성경이 독자와 청중들에게 이 세상을 수선하는 최종적인 행위를 떠맡겨버리고,

습관적으로 '우리에게 공을 넘긴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형체도 없고 공허함 (tohu vbohu), 배신당한 언약, 포로와 포위된 공동체, 깨진 약속, 방치된 집들, 버려진 도시들, 살해 당한 아이들, 실직자들, 대출 거부, 바닥난 예산, 난파된 경제, 아주 다루기 힘든 전쟁들, 그리고 사라진 꿈에 반응하는가?

그리고 휴머니스트, 독자들, 선생들, 청취자들, 시청자들, 다른 제국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주변에 널부러져 있는 잔해와 관련하여 자리매김을 할 것인가?

상처를 입은 자들과 동일시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들 중에 우리도 헤아려질 수 있을까?

사무엘 백의 시각 예술과 같이,

성경의 서사적 예술은 우리를 죽은 자의 영역으로 인도해 주고,

고통과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 증언을 하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본문의 구성에 의존하며 살아가도록 한다.

또한 본문의 해석과 차단에 계속하여 의존하여 삶도록 초청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점이 있다.

성경은 생명력이 없는 신학적 묘비가 아니다.

의심할 여지 없는 확실성을 제공하는 랜드마크도 아니다.

혹은 우리 세계관의 경계선을 그어주는 성당 천장도 아니다.

All roads lead to Ponary | Samuel Bak. An Arduous Road

오히려 사무엘 백의 작품처럼, 성경은 한계점을 표시한다.

성경은 묘하게 상흔을 남기고 있는 아름다움이 펼치고 있는 웅대한 경관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 곳에는, 과거와 현재, 고통과 가능성을 우리가 직면하고,

우리 주변에 널부러져 있는 파열과 잔해를 인식하도록 도전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보고,

진실하게 말하고,

그런 고통을 만드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책임질 일이 있음을 인정하고,

창조적인 노동, 그리고 틱쿤 올람 (세상의 수선)의 힘든 일과 예술작품에 종사하도록 도전한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휴머니스트들, 예술과 문학의 선생들과 학생들 모두, 무덤 파는 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우리에게 말하는 유령들 앞에 서 있다.

우리 선조들과 죽음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이 공을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매일마다 던지고 있다.

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너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셰익스피어와 미켈란젤로, 비코와 릴케, 모세오경의 저자와 마가 복음 저자, 테레사 수녀와 바르샤바 게토 보이, 로젠츠웨이그와 사무엘 백.

사실, 죽은 사람들은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우리에게 의무감을 갇도록 만들면서,

죄책감, 두려움,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따라다니면 괴롭히고 있다.

… 물론 우리는 그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어떤 부분에서 우리가 배역을 맡아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이야기 전개되어 감에 따라 어디에서 결말이 날지,

이야기가 담고있는 도덕성이 무엇인지를 전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소리를 지른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죽은 자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예술과 문학도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의심과 의문들로 가득 차 있는 가운데 있지만,

증언하고 진실을 만들어가고,

이 세상을 수리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Samuel Bak, The Creation of Wartime III

 

 

witness

 

 

Adam & Eve, 2000, crayon and oil on brown paper

 

Creation of War Time (Wartime)

Open Door (1999)

 

 

In Need of a Tikkun

 

 

Searching (1999)

 

 

<가지와 숲 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