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켈러의 기도'(11)/주기도문, 익숙한 데서 벗어나라
주기도문 속에 길이 있다.
인류 역사상 주기도문만큼 자주 되풀이되며 입에 오르는 성경구절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운 기도의 곳간을 여는 열쇠로 이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자원이 방치되다시피 하는 이유는 지극히 익숙하다는 사실이 한 몫 하는 것 같다.
어거스틴, 루터, 칼뱅 모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기도의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산상수훈의 골간을 이루는 주기도문을 최고의 본보기로 삼아 거기서 무얼 믿고 훈련할지 뽑아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칼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자녀로 입양되지 않는 한, 누가 감히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위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설명한다. 루터도 이 구절은 곧장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의도가 아니라 기도로 진행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의 처지를 되새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위치를 자각하려는 부름말이라고 보았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열방 가운데서 영화롭게 되시기를” 소원한다고 기도한다. 루터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온 세상 방방곡곡에 두루 퍼지며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한마디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을 드높여 드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요청하는 의미로 받아 들였다. 칼뱅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착하게 사는 차원을 넘어 늘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에 경이감을 품는 뜻이라고 한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어거스틴은 한사코 눈을 뜨지 않으려는 이에게는 사방이 암흑천지인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그분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인간고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창조주를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으므로 마땅히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두고 섬기면 영적, 심리적, 문화적, 심지어 물질적인 문제들이 줄을 잇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한다.
루터는 여기에 외면적이고 미래적인 관점을 보탰다. 천국의 삶(미래)은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될 것이므로 고통과 상처, 가난과 죽음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미래의 삶을 갈망하는” 간구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루터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고 진정 믿을 만한 분이시라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앉아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에게 복수하려 들게 된다고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한줌의 평화조차도 느낄 수 없다.
칼뱅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요컨대, 이 땅을 통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 지금까지 주기도문 앞쪽 세 구절에 담긴 간구를 살펴보았다.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은 하나같이 위치, 즉 이 세 가지 기원이 초반에 배치된 사실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다. 기도의 도입부는 모두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스로의 필요나 문젯거리가 기도를 지배하게 두면 안 된다.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주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이 온 천지에 드러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길 갈망하며, 온전히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염원하는 걸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찬양과 감사(하나님 중심)가 우선이다. 시선이 자신을 향하여 시야를 왜곡하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가짐을 치유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기도는 절반을 넘긴 셈이고 시각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쪽으로 바로잡히고 명쾌해졌으니, 이제 우리와 세상의 필요를 향해 흐름을 바꿔도 좋겠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어거스틴은 ‘일용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온전한 기도란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도 말고, 너무 부유해서 주님을 잊어버리지도 않게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30:8)라는 말씀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은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언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게 아니라...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 되는 것을 구하라”고 강조하며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크리스천들은 긍정적인 응답을 기대하며 필요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먼저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터는 이 기도에 사회적인 차원을 더했다. 누구나 빠짐없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면 경제가 활성화 되어야 하고, 취업률이 높아져야 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사업과 거래, 노동시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하루하루 끼닛거리를 앗아가는 악의적인 착취에 대적하는 기도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직결시켜 판단하신다. 이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스스로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상대를 용서하거나 편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는 쓰라린 상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뿐만 아니라, 원한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스스로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큼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구하는 위선과 마주칠 따름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어거스틴은 “이는 시험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시험에 끌려들어가선 안 된다는 기도다.”라고 한다. 실험하고 검증한다는 의미의 시험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성경은 고난과 환난을 심령의 숱한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서 더 건강한 자기 인식과 겸손, 참을성과 믿음, 사랑을 갖게 하는 도가니로 풀이한다.
칼뱅은 오른편과 왼편, 두 범주로 나누어 시험을 열거한다. 오른편에서 오는 시험은 부, 권력, 명예 따위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죄에 빠지게 몰아가는 유혹이다. 왼편에서 오는 시험은 가난, 수치, 멸시, 고통처럼 절망하게 하고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하고 분노에 차서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게 만드는 시험이다. 번영과 역경이 모두 쓰라린 시험이 될 수 있으며 제각기 주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과도한 욕구에 집중하며 살도록 유혹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
어거스틴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간구가 내면에 잔존하는 악에서 구해 주시길 간청하는 것이라면,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는 외부의 악, 곧 세상의 사악한 세력, 특히 호시탐탐 해칠 기회를 노리는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길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어거스틴은 이 부분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루터 역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지나간다. 그러나 칼뱅은 여기에 두는 게 타당하므로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크리스천은 결핍과 역경, 한계 따위에 깊이 들어갔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온전히 채워 주신다는 진리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 '팀켈러의 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11)-(파트3)기도를 배우다(4)
'팀켈러의 기도'(12)/기도란 무엇인가?
1) 기도는 의무이자 훈련이다.
기도는 좋든 싫든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규칙적으로, 꾸준히, 작심하고, 끈덕지게 드려야 한다. 피터 포사이스의 말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죄다.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깜짝 놀랄 만큼 공공연한 죄... 그렇다면 기도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심리는 죄의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죄라고 봐야 한다.” 설령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기도를 멈춰선 안 된다.
기도는 끈질겨야 한다. 바울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당부했다.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15:30). 애쓰고 힘쓰며 기도해야 한다. 요동치는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한사코 매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포사이스는 이렇게 적었다. “지금은 성령 충만하지 않아서 기도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기도하라” 기도에도 누적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기도는 고된 노동이며 종종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더러 기도하기 위해 한 바탕 씨름을 벌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날그날 하나님과 더불어 기도 시간을 가져야할 순간이 오면 마치 작당이라도 한 듯 온갖 것들이 길을 막아선다. 일단 기도를 시작한 뒤에도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 진땀을 쏟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나님은 평안하고 평온한 시간을 허락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시지만, 참고 씨름하며 기도하는 수준을 벗어났노라고 장담할 수 있는 크리스천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2)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더불어 거니셨다. 성경에서 누군가와 거닌다는 건 우정을 나눈다는 뜻이다. 함께 걷노라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마련인 까닭이다.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드리는 기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나누었던 더없이 소중한 경험, 즉 거리낌 없는 대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기도를 대화로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1)마음속에 주관적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을 기도로 보는 방식과 2)하나님이 주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보는 방식이다. 크리스천이 따라야 할 올바른 방향은 후자 쪽이다. 루터의 경우에서 보듯, 성경을 읽을 때마다 확신과 깨달음이 드는데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J.I.패커는 기도를 대화로 여긴다면 반드시 규칙적으로 깊이 있게 성경을 묵상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묵상은 성경 해석과 연구와 자유로운 기도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패커는 습관적으로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을 읽고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 무얼 알려 주는지 깊이 생각하며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찬양으로 이어 간다”면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이만큼 중요한 도구도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3)기도는 찬양과 고백과 간구가 어우러진 상호작용이다.
주기도문은 찬양과 경배로 시작해서(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필요를 채워 주시길 요청하고(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죄를 고백하고 내면의 변화를 간구한 뒤에(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베풀어 주신 은총(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물론이고 역경에 대해서까지 감사하는(뜻이 이루어지이다) 쪽으로 넘어간다. 주기도문과 시편 찬송, 성경의 기도서 등을 보면 이런 기도 ‘문법’또는 차원들이 하나같이 중요한 쓰임새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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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켈러의 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12)-(파트3)기도를 배우다(5)
'팀켈러의 기도'(13)/기도에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가?
1)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야 한다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참 아들이신 예수님이 헤아릴 수 없이 큰 희생을 치르셨고, 성령님이 거룩한 자녀의 신분을 내면에서 규정하신 덕분에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임을 가슴 깊이 인식하고 감사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주님의 거룩한 인격과 구원사역을 압축해 놓은 일종의 속기록이다.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행위는 더없이 고귀한 은혜를 입은 신분이 되었고 부르짖음에 주님이 귀 기울여 주심을 온전히 의식함을 상징한다. 마땅히 따라야 할 지침과 법규를 다 따를 수 없음에도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까닭은 이러한 기도 원리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2) 기도는 애정과 경외감이 공존하는 마음가짐이다
기도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기도의 특권 앞에서 갖는 경외감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나가는 일이 죽을 만큼 충격적이고 두려운 일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가까이서 보게 해 달라는 모세의 요청을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거절하셨다. 손으로 모세를 가려 목숨을 잃지 않게 지키시고 등 또는 지극히 일부분을 보게 하셨을 따름이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룩한 보좌에 다가갈 특권을 가벼이 얻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가늠할 수 없이 큰 대가를 치른 끝에 얻은 어마어마한 특전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 특권을 사용한다는 의미다. 기도와 묵상을 시작하지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얼마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짚어보아야 한다.
기도의 여러 신학적인 측면을 간략하게 더듬으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입양되어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음을 되새기라. 거룩한 대제사장이 하나님 우편에 서서 변호해 주시므로 담대하게 그 보좌 앞에 나갈 수 있음을 기억하라. 기도하게 이끄시고 도우시는 성령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음을 상기하라. 이러한 사실들은 마음을 준비시켜 기도하게 한다.
3) 기도는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대는 행위이다
오 할레스비는 기도를 ‘무력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마음과 정신의 상태’로 정의한다. “기도란 무력한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기도와 무력함은 떼어놓을 수 없다. 오로지 무력한 이만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세상에 의지할 이가 없으면 절망뿐”이라고 고백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기도할 수 없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무력해서 무얼 기도해야 좋을지도 모를 때 성령님이 도우신다고 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기도를 드린다는 건 자신의 참담한 실상이 앞으로도 변할 여지가 없어서 무얼 하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당시 누군가를 밥상머리에 초대한다는 말은 곧 친구가 되자는 제안과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밀한 교제를 나누자고 부르신다. 곧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기도는 예수님의 노크에 반응하는 행위인 것이다.
주님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제 힘으로 하나님을 찾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주께 갈 수 없다.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일깨우고 인도해 주실 때까지는 기도할 마음마저 먹지 못한다.
요컨대, 일단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하나님이 과연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 주님이 곁에서 무력함을 절감하게 하시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주시지 않는 한, 스스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무능력함을 느끼며 하나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극도의 무력감을 느낄수록 주님이 함께하시며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신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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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켈러의 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13)-(파트3)기도를 배우다(6)
'팀켈러의 기도'(14)/기도는 어떤 선물을 가져다주는가?
1) 하나님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기도는 형식과 관계없이(찬양, 고백, 감사, 간구 등) 세상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는 시선과 시각을 다시 설정하게 만든다. 기도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어떤 그림을 그리든 배경에 하나님을 두게 이끌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보다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고 두려움도 눈 녹듯 사라진다.
시편 73편에서 기도가 시선을 바꾸는 실례를 만날 수 있다. 기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거의 넘어질 뻔하였다. 자신은 온갖 어려움을 당하는데 악인은 날로 번성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게 무슨 유익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시편 기자는 곧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절) 여기에서 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은 ‘기도 한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기자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과 세상 역사를 움직여 가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기도 중에 시각이 세상 중심,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절) 나쁜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꿈속에서 그토록 심하게 여겼던 일들도 한낱 웃음거리로 바뀐다. 기도는 시선을 교정하고, 큰 그림을 보게 하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신세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보게 한다.
2)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이다.
크리스천이 되는 걸 흔히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표현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포도나무에 접붙인 가지와 같다는 뜻이다. 줄기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갈수록 분명하게 드러나길 기대하는 것이다. 기도 역시 그런 결과를 얻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J.I. 패커는 “기도는 에너지를 얻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무얼 두고 기도하든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 어김없이 영적인 각성과 기력, 자신감이 쉴 새 없이 공급된다. 청교도들은 기도를 심령의 바퀴에 기름을 칠하는 일이라고 불렀다.”
3)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려는 노력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저 내가 여기 있노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기도에는 특별한 의식,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외하는 의식이 속속들이 배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은 기도를 통해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이슈가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의 위대하심을 감각적으로 감지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게 아니라 마음에 거룩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걸 느끼게 된다.
윌리엄 거스리는 하나님의 임재란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감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으로 감지할 수 있는 부류의 음성이고 광경이라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기도를 통해 그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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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켈러의 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14)-(파트3)기도를 배우다(7)
'팀켈러의 기도'(15)/ 기도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1) 정직한 자기 인식
겸손한 마음 없이는 기도는 엄두도 낼 수 없다. 기도는 단순히 부족하다는 느낌을 넘어 자신과 극도로 솔직하게 마주서는 단계까지 이끌어가야 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
칼뱅은 “인간이 가진 거의 모든 지혜, 그러니까 참되고 심오한 두 부분, 곧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더 잘 아는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한층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거꾸로 자신을 더 확실히 파악하면 하나님에 관해서도 한결 명확한 깨달음이 생긴다.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부정한다면 필연적으로 주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느끼거나 보지 못한다.
2) 철저하게 신뢰하는 마음가짐
기도는 경외감과 친밀감이 한데 어울린 복합체다. 뿐만 아니라 순종과 끈기가 합쳐진 화합물이다. 어떤 기도를 드리든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손수 보내 주시는 선물을 따지거나 가리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도록 도와주시길 구하는 간구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들도 마음 깊은 데서는 아빠엄마만 아는 세상의 또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할 줄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엇이 최선인지는 하늘 아버지만이 알고 계시며 자녀가 구하는 대로 무조건 들어주시는 것은 파멸에 이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반면에 주님은 크리스천들에게 믿음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집중해서, 되풀이해 가며 기도하면 반드시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오 할레스비는 기도를 노동과 씨름으로 표현한다. 기도의 마무리는 늘 “그럴지라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이어야 하지만, 언제나 주님을 붙들고 벌이는 한바탕 씨름으로 시작해야 한다. 루터는 이처럼 무모하리만치 끈덕지게 조르며 기도하는 걸 일컬어 ‘하나님 공략’이라고 했다. 기도는 수동적이고, 차분하며, 조용한 행위가 아니다.
이처럼 상반돼 보이는 두 갈래 필수적인 마음가짐(철저하게 신뢰하며 믿음으로 소망하는)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찰스 호지는 순종과 끈기를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지적한다.
순종에 강세를 두면 지나치게 수동적이 된다. 이런 자세로는 소돔 성을 구해 달라며 하나님을 잡고 늘어졌던 아브라함,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던 모세, 역사를 주무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문을 제기했던 하박국 선지자와 욥처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매달리거나 논쟁을 벌이는 식의 기도는 드리지 못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인정하는 자세에 토대를 두지 않고 그저 끈기와 강청하는 기도만 강조하면, 원하는 응답을 받아내지 못할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겨 놓고 구체적인 것들을 구하지 않는다든지 주님의 뜻을 내가 조작해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극단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집요하게 구하는 끈기와 주님의 거룩한 뜻이 어디에 있든 그 지혜로운 판단을 기꺼이 인정하는 순종이 기도 안에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
3) 온 삶을 하나님 사랑에 굴복시키는 마음가짐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이것저것을 요구하는 기도를 시작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내게 꼭 필요한 건 하나님뿐임을 절감하지 못한다면 온갖 간구와 간청은 그저 또 다른 형태의 걱정과 욕심으로 변질될 수 있다. 기도를 간절히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애쓰는 갖가지 방편 가운데 하나로 여길 것이다.
칼뱅은 “기도하면서 주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된 것들을 구하는 건 우리들에게 남겨진 몫이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룩한 자녀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모든 것들을 공급받는 주요한 통로가 기도라고 한다.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이름을 믿을 길이 없다.
마지막 때가 오면 역사는 막을 내리고 성대한 잔치가 열릴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지금도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기도를 통해서다. 주석가들은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는 예수님의 초대를 기도하면서 주님과 교제하고 나누는 일로 해석한다. 메마르고 심지어 괴롭기까지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의 원천이다
* '팀켈러의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15)-(파트3)기도를 배우다(8)<하늘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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