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켈러의 기도'(16)/묵상, 기도로 들어가는 문턱
바쁘고도 각박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는 행동과다와 주의력결핍장애에 빠져있다. 속도가 떨어지는 성찰과 묵상은 실종된 기술쯤으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기도가 참으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되려면 규칙적으로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거룩한 음성을 듣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적잖은 크리스천들이 학구적인 자세로 성경을 공부한 뒤에 곧바로 기도에 뛰어드는 패턴으로 경건 생활을 꾸려간다. 하지만 성경 연구와 기도 사이에는 중간지대, 다시 말해 둘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깊이 체험하는 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지만 영적으로 더 깊이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상적인 경로는 바로 말씀 묵상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말이다. “묵상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빈약하고 차가워지게 만든다”
시편 1편은 간구가 아니라 묵상 자체이다. 유진 피터슨은 시편은 편집된 문서이며 그중 1편은 시편에 수록된 모든 노래의 도입부, 즉 채비를 갖추게 하는 일종의 준비기도라고 설명한다. 시편 1편을 상고해 본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나의 생각) 여호와의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다. 이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가르쳐 주는 불변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고도 확실한 약속의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기도에 앞서 하나님 말씀 묵상의 중요성에 대하여 명쾌하게 짚어주는 근거 구절이다.
* '팀켈러의 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16)-(파트4)기도의 깊이를 더하다(1)
'팀켈러의 기도'(17)/감사와 찬양이 먼저다
- 저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한다.
1) 위를 향한 기도 : 주님께 초점을 맞춘 찬양과 감사, 경외하는 기도
2) 안을 향한 기도 : 자기 성찰과 고백(회개), 친밀한 기도
3) 밖을 향한 기도 : 자신과 타인의 필요에 집중하며 간구하고 중보하는 기도
- 기도의 첫 단추/찬양
주기도문에는 찬양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찬양은 다른 종류의 기도를 자극한다. 하나님의 완벽하게 거룩하고 정의로운 성품에 관심을 쏟으면 쏟을수록 더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흠을 깨닫고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의 위엄을 더 깊이 실감하고 주님을 떠나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낄수록 더 서슴없이 그분께 나가 온갖 필요를 다 아뢰게 된다. 경외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은 다른 형태의 기도를 바로잡는다.
찬양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보다 앞서 나오므로 간구할 목록을 들고 주께 달려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넉넉히 가져야 한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는 데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며 다른 종류의 기도를 이끌어 내는 자극제다. 곧장 간구나 고백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기도 생활 전반에 걸쳐 찬양과 경배가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 찬양의 건강학
찬양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해로운 부분을 바로잡고 영적으로 건강한 내면을 갖게하기 때문이다. 멋진 작품을 보면 칭송을 아끼지 않는 것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태도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에 담긴 의미는 이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보다 훨씬 더 감탄과 칭찬을 받아 마땅한 분이라면, 주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는 “그저 깨어 있다는, 현실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사실을 반증할 따름이다. 그럴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식물인간에 다름이 없을 것이다.
C.S.루이스의 말이다. “비할 바 없이 겸손하며 균형이 잘 잡히고 도량이 큰 이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찬양하는 반면, 매사에 짜증을 내고 순응할 줄 모르며 불평불만을 일삼는 이들은 좀처럼 찬양할 줄 모른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비현실적이고 빈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주님은 넘치도록 우리를 사랑하신다거나, 무궁무진하게 지혜로우시다거나, 한없이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머리로 믿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추상적인 지식을 넘어서 삶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이어가려면 그런 사실을 찬양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도 칭송할 필요가 있다.
- 사랑을 쏟을 대상을 재설정하라
찬양과 경배가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치는 연유는 무엇일까? 세 종류의 기도(찬양, 고백, 간구) 가운데서도 유난히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사랑을 키워주기 때문일 것이다. 어거스틴은 무얼 사랑하느냐가 한 인간의 됨됨이를 말해 준다고 했다. 저마다 사랑하는 대상은 인간 본성과 행동의 토대를 이룬다.
인간이 세상에서 그릇된 행복을 추구하다가 사랑이 질서를 잃고 탈이 났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걸 사랑하거나 덜 사랑해야 할 걸 더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마주한 비참한 현실은 하나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유명한 기도를 남겼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마음에 안식이 깃들 수 없습니다” 여기에 담긴 뜻은 단순하다. 세상에서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기대의 무게가 상대를 무너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마음까지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자녀와 배우자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배우자가 기대만큼 지지와 애정을 보여주지 않을 때마다 분통이 터지고 좌절에 빠질 것이다. 상대방 역시 이쪽의 눈치를 보며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을 으뜸으로 소중하게 여기면 배우자를 제대로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인간 됨됨이의 뼈대를 다시 짤 수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고 높여야 한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찬양과 경배 말고는 그런 마음을 키울 방도가 없다.
- 감사의 중요성
불행한 사건들이 간구와 간청을 불러일으킨다면 행복한 일이 생기면 감사하고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솟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경우에 있어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면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죄의 본질인가? 그것이 그처럼 큰 문제인가? 맞다. 사실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다. 붙들어 주는 힘에 기대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삶을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정한다. 그랬다가는 주님께 매여서 제 맘대로 살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모든 걸 베풀어 주시는 분이 시키는 대로 허수아비처럼 움직이게 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마음에 도사린 죄, 감사할 줄 모르는 죄가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쥐고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데 집착하게 만드는 탓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의 깊이와 폭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좋은 일이 생기면 모두 제 수완으로 이룬 일이거나 적어도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 누리는 복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별 굴곡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도 그걸 의식하며 말없이 감사하고 고마워할 줄 모른다.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물론이고 제 삶에서 전능하신 주께 끊임없이 감사할 기쁨과 위안을 박탈해 버린다. 감사와 찬양은 기도의 첫 단추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팀켈러의 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17)-(파트5)이렇게 기도하라(1)
'팀켈러의 기도'(18)/고백과 회개는 필수이다
- 값없는 용서, 그리고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대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울34:6~7)
위 성경의 두 갈래의 서술은 기이하게만 들린다. 하나님은 용서를 베푸시지만 그와 동시에 너무도 거룩하셔서 죄와 악을 반드시 벌하신다는 것이다. 강렬하고 선명한 선언이지만 본문에는 그 둘이 어떻게 양립 가능한지 뾰족한 설명이 없다.
구약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트리는 사건의 연속이다. 그러한 불성실한 자세라면 주님의 축복을 누릴 자격을 박탈당하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여전히 신실하시며 뭇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회복시키시겠다는 말씀을 수없이 되풀이한다.
성경을 대하는 이들로서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순종을 전제로 하는 조건적인 관계인가? 다시 말해 거룩함과 의로움이 사랑과 자비에 앞서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주님은 벌하시는가, 용서하시는가?
신약성경은 위 구약의 수수께끼를 단번에 풀 해답을 제시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5~26)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므로 하나님과의 언약은 조건적인가, 아니면 의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라고 봐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원사역 덕분에 정답은 ‘둘 다’가 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인간의 불순종에서 비롯된 저주가 벗겨졌다. 주님이 온전히 순종하신 덕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이 언약의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신 까닭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수혜자가 되었다.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의로움을 보이시는 동시에 죄인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셔서 의롭게 여겨 주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컨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를 믿는 자들에게 무조건적 사랑(용서)의 수혜자가 되게 하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대속의 제물이 되신 덕에 이제는 그 어떤 죄도 우리를 저주의 그늘 아래로 끌어갈 수 없다는 의미인 동시에 하나님께 죄는 아들이라도 희생시킬 만큼 대단히 심각하며 끔찍한 일이란 뜻이기도 하다.
- 사랑하기에 돌이키는 자발적 참회
죄의 대가는 예수께서 치르셨다. 죄를 뉘우치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죄의 저주가 미치지 못한다. 이를 잊으면 고백이 복음적인 회개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혹하게 자책하는 식의 참회에 가까워진다. 선행이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 구원과 용납을 받고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입장은 회개의 본질을 바꿔 놓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누구나 어김없이 용서를 받는다. 어째서 그런가? 주님이 징벌을 대신 받으시고 온 인류의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다 갚은 빚을 다시 갚으라고 독촉하는 건 계약위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용서치 않으신다면 그 역시 의롭지 못한 처사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용서를 깊이 확신하고 안전감을 가지면 회개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죄를 용서받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방향으로 삶의 방향과 태도가 바뀌게 된다.
존 R.W.스토트는 죄를 고백한다는 말은 곧 죄를 등지고 결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백과 결별은 결코 분리되면 안 될 요소들이지만, 크리스천 중에 열에 아홉은 죄와 허물을 털어놓는데 그친다. 고백과 동시에 죄와 절연하고 마음을 돌이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단이 필요함에도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용납을 받았다는 사실을 토대로 전반적인 고백의 틀을 잡는다 할지라도, 내면으로는 더 이상 악이 삶을 휘두르지 못할 만큼 죄 때문에 슬퍼하고 못 견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노새는 주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명령에 순종한다. 다윗은 노새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 뉘우치는 회개의 방식을 거부한다. 대신에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죄인지 깨닫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사랑에 기대에 참회한다. 책임 전가가 끝나는 자리에서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듯, 진실한 뉘우침은 자기 연민이 끝나는 지점에서 비롯된다.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 자기 점검과 회개
고백은 이미 깨닫고 죄의식을 느끼는 잘못들에 관해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기도 생활은 삶을 점검하고 너무 둔감하거나 분주해서 깨닫지 못하는 죄가 없는지 검증하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면모를 규정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져야 한다.
루터는 규칙적으로, 심지어 날마다 십계명을 묵상하라고 권유했다. 여기에는 행동이나 마음가짐으로 계명 하나하나를 어떻게 범학 어기는지 깊이 생각하며 살피는 과정도 포함된다.
- 예수님은 얼룩을 지우실 수 있다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예수님은 커다란 돌 항아리를 기적의 그릇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이 돌 항아리는 율법에 정해진 정결의식을 치르는데 사용되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정결의식에서 물로 씻는 절차에는 몹시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다. 마땅히 살아야 할 바를 좇아 사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으며 모두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안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기 전에 죄의 먼지와 때를 깨끗이 씻어 내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손수 만드신 포도주를 그 항아리에 담으심으로써 예수님은 스스로 죄를 말끔히 정화시키고 최종적인 대속을 이루는 의식의 정점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멕베스>에서 멕베스 부인은 남편을 도와 살인을 한 후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손에 묻은 피를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뱉는다. “지워지지 못할까. 이 빌어먹을 핏자국들 같으니라고!” 그녀는 어떻게든 지워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자국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인류의 실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인간은 스스로 때가 묻은 것을 알고 느끼지만 심하게 자책하고 열심히 착한 일을 해도 뿌리를 뽑지 못한다. 자국은 도무지 지워질 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그러하시겠다고 확언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으로서는 지워버릴 수 없는 얼룩과 때를 말끔히 닦아 내셨다. 자책하면서 스스로 깨끗해지려 들거나 죄를 부정하고 살면서 정결하다고 믿는 헛수고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역사를 바라보며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또 돌아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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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켈러의 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18)-(파트5)이렇게 기도하라(2)
'팀켈러의 기도'(19)/하나님 뜻대로 간구하다
- 단순한 요청이 아닌 고된 간구
이 책의 저자가 분류한 기도의 세 가지 형식은 1)감사와 찬양(위를 향한 기도), 2)고백과 회개(안을 향한 기도), 3)간구와 중보(밖을 향한 기도)였다.
기도의 세 번째 형식인 간구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구하는, 지극히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형태의 기도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61:1~2) 아주 단순하고도 솔직한 형태로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고도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야고보는 말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간구를 일방적으로 무조건 나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여긴다면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 자칫하면 창조주가 우주를 움직이시는 방식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하게 된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하고 은혜가운데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잘못된 간구의 기도를 경계하는 이야기가 난무하다 보면, 역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가 지나치게 소심해질 위험이 있다. 도널드 블뢰쉬의 말이다.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고된 간구다. 하나님께 열심히 간청하는 몸짓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찬찬히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약속을 붙잡고 매달리는 일이다.” 바울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달라”고 요청했다. 예로부터 기도는 악이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을 거역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성경은 기도를 어둠의 세력에 맞서 영적인 싸움을 벌이는데 필수적인 무기로 꼽는다.(엡6:12)
그릇되게 구하거나 완전히 입을 닫아버리는 실수가 흔하다면 어떻게 구하는 게 올바르다는 말인가?
-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기로 작정하셨다.
야고보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6)고 했고, 장 칼뱅은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두 해 반 동안 하늘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고, 엄청난 비가 쏟아지게 했다. 기도의 초자연적인 힘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 좌우하신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기도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리저리 뒤틀 방도가 전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한 자녀들의 기도에 세상이 예민하게 반응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친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동시에 인간의 기도와 행동이 일정 부분 역사를 책임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인 신비’이다. 크리스천의 기도는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과 하나님의 지혜로운 계획은 주권적이며 어긋나는 법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어김없는 진리고 서로 충돌하지도 않으며 그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다.
하나님이 만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통제하고 움직이신다면 인간의 행위는 별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만사를 좌우하시고 인간의 행동은 오로지 무의미하다고 본다면, 기가 꺾이고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두려움을 몰아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사를 좌우하시는 것도 사실이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사실이라면 열심히 기도하고자 하는 의욕이 솟는다. 결국 주님은 자녀들을 위해 세워 두신 의롭고 선한 계획을 무산시키지 않을 것이다(엡29:11). 이것은 기가 막힌 진리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기로 작정하셨다. 기도의 힘이 통제하는 대로 일정 부분 세상이 움직이게 하신 것이다. 기도가 강력하며 영향력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요청하고, 불평하고, 조르라
1) 요청하기
자신과 남들의 필요를 아뢰는 통상적인 기도가 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영적이고 정서적인 영역에서부터 물질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상당히 넓다.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잘 처리할 명쾌한 정신과 힘을 얻기를, 다치고 병들지 않도록 지켜 주시길,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재정을 채워 주시길 기도하는 것과 중보(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세상을 향한 기도’)도 포함된다.
2) 불평하기
성경 전반에 걸쳐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시편에 나타난 이런 형식의 기도를 전통적으로 ‘애가’라고 부른다. 고통과 환란을 겪으며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힘겨운 씨름을 벌이면서 주님이 역사하는 방식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 한편,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달아 알고 현실을 견뎌 나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이들의 기도다. 이러한 기도를 J.I.패커는 ‘불평’이라고 부른다. 그는 “성경에서는 착한 이들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날 때, 그들은 마음껏, 그리고 시시콜콜 하나님께 불평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처럼 불평하는 기도를 지혜로 간주한다”고 말한다.
현대 크리스천의 사상과 관습 가운데 애통과 탄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현대종교들에 만연한 소비자중심주의적 면모 탓도 있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신앙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하나님을 스스로 세운 기준에 필요한 걸 마땅히 조달해 주어야 하는 존재 쯤으로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말랑말랑한 도덕주의가 예전부터 존재해 온 딱딱한 율법주의와 결합해서 불평을 기도의 백해무익한 요소로 보고 말끔히 지워버린 것이다. (성도가 마땅히 견지해야할 태도인 감사와 상충되는 불평이라는 개념은 나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패커는 이와 같은 태도를 오류하고 간주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분께 생각과 느낌을 모두 토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불평은 이처럼 새 생명을 얻은 이들이 교제하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데 없어서는 안 될 성분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크리스천들이 드리는 기도에 끊임없이 등장하게 마련이며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3) 조르기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는 유명한 예화에서 남편도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한 여인이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달라고 졸라대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라고 물으신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품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때를 끈덕지게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베드로는 말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한마디로 인간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실재 사이에는 별 상관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인간의 시간관념에 빗대는 것은 어른과 두 살배기의 의식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이 오래도록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기다리게 하신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의 타이밍을 파악하고 그 까닭을 가늠할 줄 아는 시각을 확보하자면, 일반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리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더러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하나님께 요청한 바에 제대로 응답을 받기 위해 먼저 변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끈질기게 기다리며 기도하면 뜻을 이루게 될 뿐 아니라 예전보다 훨씬 참을성 있고 평온하며 강인한 성품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일정에는 인간으로서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그분만의 특별한 뜻과 미덕이 담겨 있다.
- 응답받지 못한 예수님의 기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받아야 할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길 기도했다. 그러나 간곡한 요청은 기각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을 찾았지만 끝내 버림을 받으셨다. 죄인인 인간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분이다. 죄도 없을 뿐 아니라 원래 완전한 분이시고 또한 완전한 삶을 사신 분이다. 그럼에도 외면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에게나 합당한 처분을 예수님에게 내리셨다. 인류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 대신 내리신 것이다. 덕분에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성자에게나 합당한 대우를 우리가 받게 해 주신다(고후5:21).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기도가 죄인들의 기도마냥 거절당하심으로써 주님의 기도에나 어울릴 법한 응답을 우리가 받게 되었다. 크리스천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들으시고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답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에게 온몸에 전율이 흐르게 하는 복음이다. 죄 없는 예수께서 죄인인 우리가 받을 처우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다. 이후로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할 일을 예수를 믿는 일 뿐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이제 거절당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런 비유를 드셨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1~13) 예수님은 놀랍고도 강렬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죄에 물든 세상의 아버지도 당연히 자식이 행복하길 바라는데, 한 점 흠이 없으신 하늘 아버지는 거룩한 자녀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얼마나 더” 간절히 바라시겠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큼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깊은 분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죄에 깊이 물들어 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축복을 넘치도록 주실 수 있을까? 답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전갈과 뱀을 받으셨던 까닭에 우리는 아버지의 상에 앉아 만찬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은 우리 대신 침에 쏘이고 죽음의 독을 드셨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셨기에,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응답하신다.
* '팀켈러의 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19)-(파트5)이렇게 기도하라(3)
'팀켈러의 기도'(20)/매일 기도하라
- 날마다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 전통이다
사도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라고 권면하는 것은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뜻이다. 내내 우리에게만 들리는 감사와 기쁨의 노래가 흘러야 한다(골3:16~17). 이렇게 하루 종일 줄곧 이어지는 지속적인 기도로 마음의 습관을 삼아야 한다. 하지만 하루하루 규칙적인 훈련을 거듭하지 않고는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매일기도, 또는 일일기도는 오랜 옛날부터 있어 왔던 성경적인 관습이다. 다니엘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중세 크리스천들은 성무일도(聖務日禱)라는 것을 지켰는데(카톨릭에서는 아직도 지키고 있다), 이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공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날마다 어떤 식으로 기도하며 예배할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개인의 몫이다. 통상적으로 하루에 한 번 갖는 경건의 시간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 자주 기도할 필요가 있다. 루터는 하루에 두 번 기도하길 권했고, 칼뱅은 간단하게 자주(하루 5회) 드려야 한다는 쪽이다. 하루에 한번 이상 시간을 정하여 온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데에는 교단,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크리스천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정한 시간표를 고집해서는 안 되겠지만, 나로서는 하루에 두 번 기도하기를 권장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입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아침과 저녁에 기도하는 게 익숙하고 좋지만 가끔은 아침에 간구하며 얻은 깨달음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한낮에도 잠깐 짬을 내서 간단한 기도를 드린다.
매일기도는 더 성경적이어야 한다. 체계적인 성경 읽기와 연구, 절제된 본문 묵상 등에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매일 기도에는 묵상도 들어 있어야 하며, 광범위하고 온전한 경험을 기대하는 마음이 전반적으로 한층 더 깊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신령한 실재를 경험하고 더 깊은 경외감과 친밀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어둡고 캄캄한 심령으로 씨름하고 불평하는 과정도 더 깊이 체험해야 한다.
- (저자가 제안하는) 매일 기도의 양식(樣式)
1) 마음잡기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모은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기도와 관련해서 삼위일체 신학을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아들딸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중보자요, 변호사요,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주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신다. 성령님은 기도하게 하시고 그 간구를 도우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2분 정도면 충분하다.
2) 묵상
기도하며 하나님께 반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성경의 한 부분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며 그것을 기도로 들어가는 다리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진지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일은 크리스천으로 성장해 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마주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심도 있는 성경 공부에 쏟아 붓는 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묵상과 기도에 쓸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어쩌면 신경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3) 말씀기도
루터는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로이 기도하기 전에 ‘본문을 붙잡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묵상 그 자체가 기도는 아니다. 일종의 성찰이고 자신과 나누는 대화다. “내 영혼아,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부르짖으며 마음을 쏟는 시편 기자의 행동이 바로 묵상이다. 하지만 성경 본문에서 찬양과 회개, 갈망의 소재를 찾는 루터의 방식에 따르면 묵상이 기도로 연결될 수 있다.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검증된 대단히 중요한 말씀기도 방식이다.
루터는 주기도문을 가져다가 한 구절 한 구절 주님의 간구를 자신의 말로 바꿔서 그날의 관심사를 담아 기도하라고 권한다. 말씀과 기도를 연결한 탁월한 기법이라고 생각한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주신 포괄적인 기도 모델이기 때문이다.
4) 자유기도
자유기도란 그저 ‘기도로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은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건전한 지침들을 대부분 찬양과 감사, 고백과 회개, 간구와 중보라는 세 가지 기도 형식 사이에 균형을 지키라고 당부한다. 스스로 일정한 순서를 정해서 습관적으로 세 가지 형식을 다 섭렵하는 건 대단히 유익한 훈련이지만 지나치게 경직돼서는 안 된다.
5) 관상(contemplation ; 동양 종교의 ‘명상’과 유사한 개념)
관상이 무슨 뜻이냐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알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마음으로 감지하는 시간’을 가리킨다고 하고, 루터는 ‘하나님의 진리나 성품 가운데 어떤 면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하는 시간으로 풀이한다. 루터의 말이다.
“주기도문의 어느 한 대목을 좇아 간구하다보면... 왕왕 넋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남아 있는 여섯 가지 제목을 놓아 버린다. 그처럼 선한 생각들이 풍성하게 밀려올 때면... 절대로 억누르지 말고 조용히 경청해야 한다. 성령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순간인 까닭이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한마디가 우리가 드리는 수천 마디의 기도보다 월등히 낫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임하셔서 마음에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고 풍요롭고 밝은 깨달음을 주시면...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이라.”
그러나 이런 과정을 다 밟고 나면 어김없이 심령 가득 사랑이 넘쳐나고 성령님이 루터에게 하신 것처럼 새롭고 신기한 방식으로 생각의 지평을 열어주시리라고 가정하면 안 된다. 루터의 경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이 아니다. 영적으로 메마르다 못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기도를 시작하고 마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기도의 마지막 단계인 관상은 그저 ‘하나님과 관련해 가장 좋은 생각들을 떠올리고, 그러한 사실과 하나님의 성품을 아울러 찬양하며 감사하는 한편, 가까이 임하시고 주님이 정하신 때에 그 얼굴을 보여 주시길 간절히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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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켈러의 기도'(티모시 켈러 저, 최종훈 역) 독후요약(20)-(파트5)이렇게 기도하라(4)
'팀 켈러의 기도'/독후감
1. 서언(序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하여는 너무 모르고 있다. 아니, 내가 그랬었다.
나는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기도에 대한 책을 두어 권 읽은 적이 있다. 후안 카롤로스 오르티즈의 ‘기도하십니까’라는 책과 오할레스비의 ‘기도’라는 책이 그것인데 이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여 나의 생각과 함께 간단히 포스팅한 바 있다.
일전에 아내가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팀켈러의 기도’라는 책을 우연히 뒤적이다가 내용이 괜찮은 것 같아서 처음부터 찬찬히 읽게 되었다. 그동안 읽은 것을 요약하여 이미 20회에 걸쳐 내 블로그에 포스팅 하였다. 이 책의 저자는 티모시 켈러 목사이고, 역자는 최종훈이다.
이 책은 전에 읽은 두 권의 기도 관련 서적과 비교할 때,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은 자제하고 기도에 관련된 여러 고전의 내용을 분석, 비교하여 대체로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한 것이 특징이다. 마치 한 편의 논문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다소 딱딱한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었다.
이미 20회에 걸쳐 이 책의 내용 전체를 나름대로 요약한 바 있기에, 지금은 특별히 나에게 개인적으로 감명 깊게 다가온(동감하는) 내용을 나의 느낌과 함께 정리해 두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목적은 훗날 내가 읽고 현재의 감동을 잊지 않으려는데 있다.
2.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신비)인 동시에 간구(이성)이다.
기도에는 두 가지, 즉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만남’이라는 신비적 요소와 나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요청하는 ‘간구’라는 이성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어느 한 쪽이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거나 어느 한 쪽으로 치중하는 기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존 머리가 주장한 ‘이성적 신비주의’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기도의 신비라는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간구),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만남)’이라는 표현 역시 기도의 두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위 두 종류의 기도는 서로 상반되지 않으며 별도의 범주도 아니고, 기도는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요컨대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인 동시에 간구이다.
3. 기도는 말씀의 기초 위에서 드리는 것이다.
소견대로 하는 기도는 비극이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조지 휫필드는 첫 아들을 얻고 그가 잘 자라서 위대한 설교가가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고는 이를 하나님이 주신 감동으로 착각하고 아들에게 세례요한의 이름을 따서 존(John)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마침 엄마의 이름도 세례요한의 어머니 이름과 같은 엘리자베스(엘리사벳)였다. 휫필드는 수많은 교인들 앞에서 아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하나님이 장차 아기를 통해 큰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런데 생후 4개월이 지난 후 아기는 죽고 말았다.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슬기롭게 행동하는 길로 인도하시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성경을 읽지 않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기도는 사상누각이다.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건물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 반응한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말하자면 기도하기 전에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 후에 그 말씀을 바탕하여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성경부터 읽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마치 스펀지처럼 가끔씩만 물에 적셔 줘도 얼마든지 작업이 가능하다.
4. 신앙 위인들의 기도에서 기도를 배운다.
1) 어거스틴
고난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모범을 따라) 여건을 바꿔 달라고 기도하는 한편 견뎌 낼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의 방법이나 원칙 등 마땅히 기도할 바를 모르지만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된다.
2) 루터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묵상의 시간을 갖고 난 후에 기도로 들어가라. 또한 묵상 후에는 자유로운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주기도문을 자신에게 맞게 ‘변주곡’을 만들어 찬찬히 기도하라. 그리고 성경묵상이나 기도 중 선한 생각들이 샘솟는다면 다른 제목들은 잠시 미뤄두고 침묵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말씀에 근거해 있는 중이라면 내면의 (인간적) 느낌을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3) 캘빈
무엇보다도 확신과 소망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항상 옳으며 그것에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열심과 확신을 품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은 종종 자녀들이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은총을 베푸시는데 그 이유는 따로 구하지 않고 선한 것들을 받으면, 내심 스스로 똑똑하거나 열심히 일해서 얻은 열매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녀들의 소망을 무조건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므로 무엇이든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다. 당신의 계획에 따라 일의 결과를 조절하셔서 성도들의 기도가 허사로 돌아가지 않게 하시기 때문이다.
5. 주기도문 속에 길이 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공 예배에서 타성에 젖어 마구 외운다. 개인적으로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주기도문은 가장 훌륭한 기도의 본보기이다. 그냥 외우는 것이 아니라 찬찬히 뜻을 생각하면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자체로 큰 은혜가 되고 기도의 훈련이 된다. 개인적인 자유로운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라.
6. 하나님 뜻대로 간구하라.
간구는 하나님께 자신과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구하는 아주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기도의 형태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간구를 일방적으로 무조건 나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여기면 안 된다.
그런데 잘못된 간구를 너무 경계하다 보면 역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가 지나치게 소심해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 좌우하신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기도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리저리 뒤틀 방도가 전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한 자녀들의 기도에 세상이 예민하게 반응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친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동시에 인간의 기도와 행동이 일정 부분 역사를 책임지게 하신 것이다. 요컨대 크리스천의 기도는 대단히 중요함과 동시에(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 하나님의 지혜로운 계획은 주권적이며 어긋나는 법도 없다는 점이다.
7. 요청하고, 불평하고, 조르라.
요청은 자신과 남들의 필요를 아뢰는 통상적인 기도이다. 불평은 현실의 생각과 느낌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이다. 감사와 상충되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나쁜 것이 아니다. 조르기는, 예수님의 예화 즉, 억울한 일을 당한 여인이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달라고 졸라대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품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때를 끈덕지게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8. 응답받지 못한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받아야 할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길 기도했다. 그러나 간곡한 요청은 기각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을 찾았지만 끝내 버림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에게나 합당한 처분을 예수님에게 내리셨다. 인류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 대신 내리신 것이다. 덕분에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성자에게나 합당한 대우를 우리가 받게 해 주신다(고후5:21).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기도가 죄인들의 기도마냥 거절당하심으로써 주님의 기도에나 어울릴 법한 응답을 우리가 받게 되었다. 크리스천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들으시고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답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에게 온몸에 전율이 흐르게 하는 복음이다. 죄 없는 예수께서 죄인인 우리가 받을 처우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다. 이후로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를 믿는 일 뿐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이제 거절당하지 않는다.
9. 결언(結言)
이 책을 읽는 내내 기도의 방법론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나는 예수 믿은 지 50년이 되었고 나름대로 기도는 하고 있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부합하는지에 대하여 자신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전문가(목사님)들의 의견도 분분해서 정말 기도의 ‘왕도’는 없을까하는 목마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그 갈증의 상당부분이 해소된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깨달은 것은 과연 기도에 ‘왕도’는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였다는 점이다.
- 하늘나그네-
. ‘누구나 10kg 뺄 수 있다’(유태우 저)
나는 지금으로부터 5~6년 전에 유태우 박사가 쓴 ‘누구나 10kg 뺄 수 있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가르쳐 주는 체중 감량 요령의 핵심을 간추리면 대충 다음과 같다.
- 첫날 세끼를 완전히 금식한다.
- 둘째 날부터는 평소 먹던 음식 양에서 반으로 줄여서 먹는다.
- 아침, 점심, 저녁의 세끼 양이 항상 일정해야 한다.
- 식사는 최소 20분 이상 천천히 한다.
- 이렇게 하면 처음 3개월간은 매월 2kg씩, 나머지 3개월간은 4kg을 감량해서 6개월 만에 10kg을 감량할 수 있다.
당시 이 책이 가르쳐주는 방법대로 따라 했더니 2~3개월 만에 체중 5kg가 줄었다. 거의 부작용도 없고 내게는 딱 맞는 다이어트 방법인 것 같았다. 그대로 6개월을 진행하면 무리 없이 10kg을 감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나의 갑자기 얼굴이 수척해져서 불쌍하고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아내가 심하게 ‘방해’하는 바람에 일단 중단한 것이다. 이건 나의 의지 부족이 아니라 순전히 가정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체중을 좀 더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중 며칠 전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같은 저자(유태우 박사)가 쓴 ‘남자의 뱃살’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한권 주문했다.
2. ‘남자의 뱃살’(유태우 저)
책의 내용은 간단하고 분량도 얼마 되지 않아서 단숨에 읽었다. 다음은 이 책의 내용을 나의 나름대로 요약한 것이다.
1) 남자가 뱃살을 빼야하는 이유
중년 이후의 건강을 뱃살이 좌우한다. 중년의 남자가 잘 걸리는 병을 ‘안 아픈데 죽는 병’이라고 한다. 고혈압, 당뇨병, 콜레스테롤 등은 심장병, 뇌졸중의 원인이 되는 동맥경화를 유발한다. 그런데 뱃살은 이 같은 만성질환 없이도 동맥경화의 위험성을 높인다.
과거 70세 수명 시대에는 은퇴하고 몇 년 잘 놀다 보면 어차피 죽었다. 그러나 지금은 100세 시대가 되었다. 죽을 것 같지만 쉽게 안 죽고 오래 산다. 어차피 오래 사니 문제는 어떻게 오래 사느냐가 되었다. 뱃살은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는 요인이다.
2) 운동으로는 뱃살을 뺄 수 없다.
운동은 기를 쓰고 해도 적은 에너지밖에 소모할 수 없는 반면 음식은 아주 조금만 먹어도 많은 칼로리를 몸 안에 넣게 된다. 30분 걷기나 자전거타기, 15분 줄넘기나 달리기를 해도 소모되는 에너지는 고작 150kcal이다. 살 1g은 약 7kcal에 해당되므로 20g 정도의 체중감량 효과 밖에 없다. 운동은 건강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운동으로 살을 뺀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3) 골라 먹어 뺀 살은 쉽게 다시 찐다.
저칼로리, 다이어트 음식을 골라 먹으면 처음에는 좀 감량이 되는 것 같다가 다시 원상복구가 된다.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관장하는 ‘감정뇌’의 욕구 때문이다. 주위를 살펴봐도 음식 골라먹는 사람 중에서 체중 감량한 사람 거의 없다. 결국 골라먹기 효과는 운동과 마찬가지로 체중 유지 밖에 되지 않는다.
4) 체중 감량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고, 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례한다.
평생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사람은 평생 하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체중 감량은 평생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끝내고 일생을 정상 체중으로 사는 것이다. 3개월간 43kg를 뺀 사람도 있고 1개월에 25kg를 뺀 사람도 있다. 사람의 체중 감량에는 큰 제한이 없다는 뜻이고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례한다.
5) 하루 금식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체중 감량에 필수적이다.
현대인에게 맞는 금식은 단 1일 세끼의 금식이다. 세끼는 부작용 없이 누구나 할 수 있고 들인 노력에 비하여 얻는 효과가 매우 크다. 첫 끼 두 끼까지 힘들다가 세끼까지 금식하면 오히려 힘들었던 몸이 편안해지면서 머리까지 점점 맑아진다. 음식 먹기와 소화시키기에 분주했던 몸이 휴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끼니를 거르는 사람은 그 다음 식사를 과식하게 되지만 의도적으로 금식을 한 사람의 몸은 금식한 후에도 많이 먹게 되지 않는다.
특히 평소 회식 등으로 종종 과식을 하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1일 금식을 시행해보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과식하는 습관이 줄어들 뿐 아니라 과식이 원인이 되는 비만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 3일 이상의 금식은 단식원에 들어가거나 도움이 필요하지만 1일 금식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일상생활 속에서 하기 때문에 식습관을 바꾸는데 단식보다도 더 효과적이다.
6) 반식 훈련
(하루를 금식한 후에) 음식은 평소에 먹던 양보다 반으로 줄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유태우 다이어트의 핵심이다.) 반식훈련은 서양인의 다이어트와는 근본이 다르다. 반식훈련이 끝나면 위가 반으로 줄어든다. 이전에 먹던 양의 반만 먹어도 충분히 만족하게 된다. 보통 반식 2주 후부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1개월만 지나고 이전에 먹었던 양만큼 먹으면 배가 불편해 진다.
이러한 내 몸의 변화는 다시 위를 크게 하겠다고 선택하지 않는 한은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즉, 요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반식훈련은 평생 다이어트가 아니라 단 한 번에 끝내는 감량법이다.
7) 감량 속도
먹는 양이 줄어들면 내 몸은 그동안 쌓아놓은 기름(지방)을 갖다 먹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몸은 ‘쌓아놓는’ 몸에서 ‘갖다 쓰는’ 몸으로 바뀐다. 저장고에서 보급소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면서 감량이 시작되어 하루에 0.1~0.3kg 정도의 속도로 마지막까지 진행된다.(이렇게 해서 한 달에 감량되는 체중이 5kg 전후가 되는 것이다)
8) 배변량 감소의 문제
먹는 양이 줄어드니 배변량 역시 감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를 변비로 해석하면 안 된다. 전에 화장실 가던 습관대로 화장실에 가면 나올 것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힘을 주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변비이다. 감량훈련을 하는 동안에는 2주 정도 배변을 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변의가 느껴진다고 해도 그때 바로 화장실을 갈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의 느낌처럼 ‘윽, 싸겠다!’라고 할 때만 화장실로 가라. 화장실에 가서도 절대로 배에 힘을 주면 안 된다. 3분 정도 앉아 있어도 배변이 안 되면 그냥 일어나도 된다. 배변은 내 생각과 노력이 아니라 내 몸이 알아서 하는 기능으로 내버려 두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9) 물을 충분히 마셔라
감량훈련을 하는 동안 영양 결핍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 수 있으나 특별한 문제는 없다. 다만 물은 충분히 마셔야 한다. 하루 최소 3리터 이상은 마셔야 한다. 생수나 정수기 물과 같은 맹물이 좋다. 차로는 대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차는 칼로리는 없지만 내 몸의 물을 빼내가고 식욕뇌를 더 자극한다.
10)식사 시간은 30분 이상 끌어라
서양인은 입을 만족시키는 식사를 하는 반면 한국인은 배를 만족시키는 식사를 한다. 음식이 나오면 배가 찰 때까지 마구 먹는다. 그러다가 포만감을 느끼면 남보다 먼저 숟가락을 놓는다. 식사 시간은 10분이면 충분하다. 이것이 배를 만족시키는 식사이다.
서양인의 경우 음식의 종류는 몇 개 되지 않아도 식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3시간 걸린다. 맛을 즐기며 먹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에 바쁜 서양인이 빨리 먹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만든 것이 패스트푸드이다. 한국은 거의 모든 음식이 패스트푸드이다. 과거 못살던 시대의 생존 전략이었던 습관이 영양 과잉의 시대에 와서는 우리 몸을 망치는 식사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입이 만족하는 식사를 연습할 필요가 있다. 식사 시간을 30분 이상으로 잡으면 된다. 반드시 오래 씹으라는 것만은 아니고 첫술을 뜨고 마지막 수저를 놓기까지가 30분이 걸리면 된다. 그 시간 안에는 말을 많이 하든, 독서를 하든 TV를 보든, 식사도중 바람을 쐬든 상관이 없다.
11) 쓴 만큼이 아닌 쓸 만큼 먹기
상담자 대부분(직장인)의 경우 아침, 점심, 저녁의 식사량이 비율이 0:1:2~3이었다. 에너지를 소모한 만큼 식사로 이를 보충하는 것이다. 체중감량을 위해서는 쓴 만큼 먹는 식사 습관에서 쓸 만큼 먹는 습관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저녁은 줄이면서 아침을 늘여가는 것이다. 2주 정도만 훈련하면 충분히 바꿀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아침, 점심, 저녁의 비율을 1.3:1:1로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전작(‘누구나 10kg 뺄 수 있다’)과 후작(‘남자의 뱃살’)의 내용 비교
우선 위 두 권의 책의 내용을 간단히 비교해 볼 때, 첫날 하루를 금식하고 다음날부터 음식의 양을 반으로 줄여서 먹기를 권장하는 것은 거의 동일하다. 이 내용은 유태우 다이어트의 핵심이다.
그런데 전작은 아침, 점심, 저녁 세끼의 양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라는 것임에 반해 후작은 1.3:1:1로 아침 식사 권장량의 비중이 약간 높아졌다. 그리고 식사 권장 시간은 전작에서는 20분이었다가 후작에서 30분으로 늘었다.
또한 체중 감량 목표가 전작은 6개월에 10kg을 감량하는 것이었는데, 후작은 1개월에 5kg정도의 감량하는 것으로 단기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작은 남자, 그것도 중년 이상을 대상으로 쓴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어쩐지 전작의 속편 같은 느낌이 든다.
4. 결어(나의 경험)
5~6년 전, 당시 나의 체중 73kg에서 유태우 박사의 전작 ‘누구나 10kg 뺄 수 있다’라는 책을 읽고 다이어트를 시작하여 2~3개월 후에 68kg이 되었는데(이후 아내의 방해로 다이어트는 중단하였지만), 후에 1~2kg 정도 오르내리는 체중 변화가 있었으나 지금까지 5년 이상 거의 이 수준(68kg)을 유지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요요현상이 거의 없는 것이다.
유태우 다이어트의 방법 중 무엇보다도 내가 동의하고 강력히 지지하는 것은 체중 감량의 성패는 음식의 종류(열량)에 관계없이 먹는 음식의 절대량을 줄이는 여부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 얻은 결론이다.
나의 경험상 먹는 절대량을 줄이는 훈련은 한 달 정도면 충분한 것으로 기억한다. 하루 금식 후 약 1개월간 반을 먹으니 정말로 위가 축소되어져서 훨씬 적은 양을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여하튼 나의 경험은 분명하다.
- 양성룡/하늘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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