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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요한복음 서론

by 은총가득 2020. 11. 29.

요한복음 서론

1. 요한복음의 위치


신약성경 가운데 다섯 권의 책이 제목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요한문헌 (Corpus Johanneum)이라고 총괄된다. 요한문헌은 어휘와 문법에서는 상당한 일치성을 보여주지만, 내용과 장르에서는 엄청난 상이성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은 요한서신과 다르다. 요한서신은 서로간에 내용적인 차이를 보이면서도 외형적인 면에서 볼 때 서신이라는 문학양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요한일서는 도입부와 종결부에서 편지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본문에서 편지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요한복음은 요한계시록과 다르다. 요한계시록은 서신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묵시라는 장르에 속하기 때문이다. 요한서신이나 요한계시록과 달리 요한복음은 복음서의 성격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을 내용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관복음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을 세밀하게 비교해보면 일치뿐 아니라 차이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공관복음에 대한 요한복음의 의존설을 말하거나 독립설을 말하게 된다. 공관복음에 대한 요한복음의 의존설이든 독립설이든 문학적인 면 (순서와 어휘), 역사적인 면, 신학적인 관계에 기초를 두고 제시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일치에 근거하여 공관복음에 대한 요한복음의 의존을 주장하였다. 의존설에서 가장 큰 논란은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보충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대치하려는 것이냐에 있다. 보충설은 알렉산드리아의 Clement (150-210년경)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들에게서는 육적인 사실(ta. swmatika,)에 대한 기록이 치중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영적인 복음서 (pneumatiko.n euvagge,lion)를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Eus. HE 6,14,7). 그러나 지난 세기 초에 등장한 Windisch의 주장 이후로 대치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의 주장은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를 알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을 보완하거나 해석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 (세메이아 자료와 같은)에 기초하여 공관복음서를 대치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1938년에 Gardner-Smith에 의하여 요한복음의 독립성이 강하게 제시되었다. Gardner-Smith는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구전이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훨씬 떨어지고 오히려 요한복음은 독립적인 자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사이의 큰 차이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요한복음의 독립성에 강한 확신을 보이고 있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을 비교해 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단락의 길이이다. 공관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짧게 다루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길게 다룬다. 공관복음은 수난과 부활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개별적인 활동과 개별적인 말씀을 다소 헐겁게 연결하는 결합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이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깊이 다룸으로써 주제적으로 통일을 이루어 마치 단막극처럼 구성된 체계를 가진다. 공관복음의 기록은 단편적이지만, 요한복음의 기록은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공관복음이 작은 점으로 꾸민 그림과 같다면, 요한복음은 큰 면으로 처리한 그림과 같다. 공관복음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짧게 보고하는 일간지로 비유할 수 있고,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길게 진술하는 월간지로 비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이 한 사건을 길게 진술한다고 해서 쓸데없는 말을 만연체로 늘어놓은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각 진술마다 압축된 사상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예수의 활동기간에 대한 설명이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활동기간동안 한번의 유월절을 보고하지만, 요한복음은 세 번의 유월절을 언급한다 (요 2:13; 6:4; 11:55).



2.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복음이 초대교회에서 널리 읽혔다는 것은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다. 2세기 초에 Ignatius는 요한복음의 언어와 신학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요한복음이 소아시아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P52 (요 18:31-33,35-38)는 125년경에 이집트에서 작성된 파피루스이다. 그렇다면 이 당시에 이미 이집트에도 요한복음이 보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이 로마에도 보급되었다는 것은 2세기 초엽에 로마에서 활동한 Justin의 신학이 요한복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게 추론할 수 있다. 심지어 요한복음은 이단적인 집단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 동안 요한복음은 2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영지주의자인 Cerinthus의 작품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Epiphanius [+403], Panarion, 2,31). 요한복음이 이렇게 다양한 지역에서 널리 읽힌 이유는 그것이 사도 요한의 저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2세기 말에는 이 견해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레네우스는 "이후에 품에 안겼던 주님의 제자 요한이 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Adv. haer. 3,1,1; Eus. HE 5,8,4)고 말함으로써 요한복음의 저자가 주님의 제자 요한이라고 밝히고 에베소 저작설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교회사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예를 들면 200년경에 작성된 Muratorian Canon).


요한복음은 저자에 대하여 어느 정도 분명하게 진술한다. 첫째로 "우리"가 요한복음의 저술에 관련된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초두에도 등장하며 (1:14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evqeasa,meqa), 말미에도 등장한다 (21:24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oi;damen). 그런데 요한복음은 다시 "우리"에게서 "나"에게로 초점을 맞춘다 (21:25 "나는 아노라", oi=mai). "나"는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와 "우리"가 한 인물을 인지 ("안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와 "우리"가 인지하는 인물은 "그 제자" (o` maqhth,j)이다 (21:24). 요한복음의 기록과 관련하여 "우리"와 "나" 이전에 "그 제자"가 있다. "그 제자"에게는 두 가지 별칭을 부여된다. "그 제자"는 "증거하는 자" (o` marturw/n - 현재분사!)와 "기록한 자" (o` gra,yaj - 부정과거분사!)이다. "그 제자"는 증거자일 뿐 아니라 기록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제자"가 남긴 것은 증거와 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제자가 남긴 것을 "증거" (marturi,a)라고 요약하며 (21:24; 참조. 19:35), "나"는 그 제자가 남긴 것을 "기록된 책" (to. grafo,menon bibli,on)이라고 요약한다 (21:25; 참조. 20:30). 그렇다면 "우리"와 "나"는 "그 제자"가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진정한 기록자는 "그 제자"이다.

 



(21:24) "우리" "나" (21:25)

인지 ↘ ↙ 인지
"그 제자"
(21:24)

증거 ↓ 기록
예수 사건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기록자인 "그 제자" (21:24)는 앞 문맥으로부터 살펴볼 때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 (o` maqhth.j o]n hvga,pa)이다. 이 구절은 기록자를 예수 사건의 목격자적 증인으로 소개하여 익명성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요한복음이 사도적 선포로서 정경화 (Kanonisierung)되는 데 이바지한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 대하여 언급하는 단락의 끝 부분에 놓여있다 (21:20-25). 사랑 받은 제자의 단락은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 단락에는 먼저 예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사랑 받은 제자의 장래를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오고 (요 21:20-22), 이어서 사랑 받은 제자의 장래에 대한 잘못된 소문과 이것을 교정하는 내용이 따라온다 (요 21:23). 마지막으로 이 단락은 제자의 증거와 기록을 보증하는 내용으로 종결된다 (요 21:24-25).



요 21:20-25
요 21:20-22 (20, "제자" maqhth,j)
요 21:23 (23, "제자" maqhth,j)
요 21:24-25 (24, "제자" maqhth,j)



이 끝 부분은 사랑 받은 제자가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배신자가 누구인지 묻던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21:20). 이것은 사랑 받은 제자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하는 요 13:23-25을 지시한다 (참조. 19:25-27; 20:1-10; 21:1-14,20-24).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요한복음의 기록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예수께 사랑 받은 제자인 것이다. (최근에 M.Hengel은 요한복음이 학파에 의한 기록물이 아니라 개인에 의하여 저작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장로 요한에게 저작권을 돌리고 있다 (M.Hengel, 요한문서탐구, 대한기독교서회 1998 (= The Johannine Question)).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나다나엘이나 나사로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특히 후자는 요 11:3에 "당신이 사랑하는 [filei/j] 자"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랑하신 자"가 나다나엘이나 나사로라면 왜 익명으로 언급되어야 하는가 문제시된다. 또 어떤 이들은 이 명칭이 요한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구절에 의하면 이 명칭이 비역사적인 인물이나 가공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인물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의견은 성립되지 않는다. (E.F.Scott, The Fourth Gospel. Its Purpose and Theology, 1906, 144; R.M.Grant, HTR 35 [1942], 116).
해당구절들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누구인지 잘 드러난다. 첫째로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어 배반자가 누구인지 물었던 사람이다 (13:23; 21:20). 둘째로 이 사람은 베드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그에게 배반자를 알아내도록 머릿짓을 했고 (13:24), 그와 함께 빈 무덤으로 달려갔고 (20:2-10), 그가 장차 어떤 운명에 처할지 물었다 (21:20-23). 셋째로 이 사람은 예수께서 모친 마리아를 돌볼 것을 부탁한 사람이다 (19:26).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요 21장 전체 문맥을 살펴볼 때 시몬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두 아들, 다른 두 제자가운데 한 사람이다 (21:2). 이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진다. 처음 세 사람은 각각 분명한 이름과 함께 특이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 (시몬: 베드로; 도마: 디두모라고 불리는 자; 나다나엘: 갈릴리 가나에서 출신한 자). 시몬 베드로는 사랑 받은 제자와 여러 차례 구별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자연히 사랑 받은 제자로 여겨질 가능성이 없다 (13:23-24; 20:2-9; 21:20). 도마도 이미 13-14장에서 사랑 받은 제자 (13:23)와 구별되는 여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에 배제된다 (시몬 베드로 13:6,36; 도마 14:5; 빌립 14:8; 가룟인 아닌 유다 14:22). 더 나아가서 베드로와 도마 뿐 아니라 나다나엘도 모두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일 가능성에서 배제된다. 왜냐하면 사랑 받은 제자의 은닉성과 별명성에 비하여 세 사람은 모두 분명한 이름과 고유한 별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사랑 받은 제자와 달리 이름이 밝혀지며, 사랑 받은 제자와 다른 별명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두 사람은 완전히 익명으로 소개된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다른 두 사람" (a;lloi evk tw/n maqhtw/n auvtou/ du,o).

 

이 두 사람은 마치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부록처럼 언급되고 있다는 점과 아예 별명조차 부여하지 않을 정도로 익명으로 두려는 의도가 짙다는 점에서 사랑 받은 제자로 간주될 가능성이 없다. 이처럼 별명과 익명으로 언급된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세베대의 아들들" (oi` tou/ Zebedai,ou)이 있다. 이 표현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에 비하여는 익명성을 보장하면서도, 다른 두 제자에 비하여는 별명성을 표현한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오직 여기에 한 번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전제 없는 표현은 독자들이 이들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이 특정한 별명으로서 독자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과 동일한 경우이다. 사랑 받은 제자는 나이가 많도록 살아남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21:23) 세베대의 아들 중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이므로 (헤롯 Agrippa I, 41-44, 행 12:1-2) 자연히 배제된다. 게다가 사랑 받은 제자는 베드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베드로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사도는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 의하면 요한이다 (막 5:37; 9:2; 14:33; 행 3:1-4:23).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베드로와 밀접한 관계를 볼 때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요한이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랑 받은 제자는 당시의 관습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결례 요 2:6; 초막절 행사 요 7:37; 유월절 금지사항 요 18:28/19:31; 수전절 요 10:22; 사마리아인과의 관계 요 4:9),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며 (성전건축 기간 요 2:20;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를 멸시하는 것 요 7:35), 지리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다 (베데스다의 구조 요 5:2; 실로암 못 요 9:7; 프레토리움/박석/가바다 요 19:13; 베다니 요 1:28/12:1; 살렘 근처 애논 요 3:23; 가나 요 2:1/4:46/21:2; 수가 요 4:5; 그리심 산 요 4:21).

 


사랑 받은 제자는 숫자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돌항아리 여섯 개 요 2:6;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요 6:9;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나간 거리 25-30 스타디온 요 6:19; 마리아가 부은 향유의 값어치 300 데나리온 요 12:5; 예수의 장사를 위하여 사용한 향료의 수량 100 리터 요 19:39;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제자들이 바다로 나간 거리 20 페구스와 잡은 물고기 156마리 요 21:11), 인물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나다나엘 요 1:45; 니고데모 요 3:1; 나사로/마르다 (요 11:1; 말고 요 18:10) 목격자로서의 면모를 충실하게 보여준다.


3. 요한복음의 목적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관해서는 초대교회로부터 의견들이 다양하다. 그 의견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요한복음의 목적을 교회외적인 논쟁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180년경에 Irenaeus는 요한복음이 창조의 하나님과 구속의 하나님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의 Cerinthus를 대적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요한)은 이들을 반박하며 하나님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 이 분이 그의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다" (Adv. Haer. 3,11,1). 또한 Irenaeus는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일파인 가현설에 대한 논박을 목적한다고 생각하였다. 요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이나, 요 19:33-35의 목격자에 대한 언급은 예수께서 오직 현상적으로 출생하고 현상적으로 사망하였다는 영지주의 주장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세기 말에 Baldensperger는 요한복음의 주요기록목적가운데 하나는 세례자 공동체에 대한 논박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을 예수보다 열등한 인물로 평가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세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참 빛이며 (요 1:6-8), 성육신한 말씀이며 (요 1:15), 사죄자와 성령세례자이신 예수에 대한 증인이라고 증거한다 (요 1:29-34). 둘째로 예수께서는 빛이지만 세례자 요한은 등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증거하신다 (요 5:31-36). 셋째로 군중은 예수가 많은 이적을 베푼 반면에 요한은 아무런 이적을 베풀지 않았다고 증거한다 (요 10:40-42).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러한 열등증거를 통한 논박으로 초기의 기독교와 병행하여 존재하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믿음)을 기독교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Baldensperger의 견해는 이후에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큰 약점이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오직 전반부에만 기록을 하고 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후반부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기록되었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둘째로 요한복음의 목적을 다른 복음서들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알렉산드리아의 Clement (150-210년경)는 공관복음이 예수의 육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예수의 영적인 일들을 기록했다고 생각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요한복음은 영적 복음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목적을 공관복음 보충에서 찾는 것으로서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지난 세기 초에 Windisch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공관복음 대치에서 찾았다. 그는 요한복음이 대략 100년경에 시리아에서 또는 소아시아에서 동양적이며 헬레니즘적인 구속사상의 틀 속에서 사도 요한과 관련있는 팔레스타인의 전승을 사용함으로써 공관복음을 대치하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른 내용만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공관복음과 같은 내용도 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공관복음과 같은 내용에서 요한복음은 더 자세한 내용을 제공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을 보충하거나 대치하거나 하려는 것보다는 더 자세하게 (in vollendeter Weise) 예수께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묘사하려고 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셋째로 요한복음의 목적을 교회내적으로 찾는 것이다. Cullmann은 요한복음이 세례와 성찬에 대한 교훈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에 크게 관심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에서 성례와 관련된 여러 가지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요한복음은 성례전을 무시 또는 오용하는 태도에 대하여 공박하고 성례전을 바로 성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무리함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에 실제로 요한복음이 세례와 성찬에 대하여 바른 교훈을 제시하려고 했다면 공관복음처럼 더 직접적인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은 성찬과 세례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보여주지만 (성찬에 대하여 마 26:26-29; 막 14:22-25; 눅 22:14-20; 세례에 대하여 마 28:19),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입장이 나오지를 않는다.

 


요한복음은 자체적으로 기록목적을 밝히고 있다 (요 20:30-31). 요한복음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 기록이다. 여기에는 신앙의 목적성 (첫 번째 i[na 문장)과 생명의 목적성 (두 번째 i[na 문장)이 들어있다. 첫째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첫째 i[na 문장). 이 문장에는 pisteu,hte (prs. conj.)와 pisteu,shte (aorist conj)를 결정해야 하는 사본상의 문제가 있다. 후자에 의하면 요한복음은 불신자들을 믿게 하려는 선교적인 (evangelistic)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되지만, 전자에 의하면 요한복음의 목적은 신자들을 계속 믿게 하려는 교훈적인 (parenetic) 것이 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현재형과 부정과거형의 명확한 차이를 의심하는 견해들이 힘을 얻으면서 요한복음의 양면적인 목적을 주장하는 것이 경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선교적인 목적과 교훈적인 목적을 다같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요한복음의 구조

요한복음은 서론 (요 1:1-18)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유대인의 명절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명절에 대한 진술들은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되어 있다. 유대인의 명절가운데 요한복음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유월절이다. 요한복음에 유월절이 세 번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요 2:13; 6:4; 11:5) 모두 비슷한 표현으로 되어있다.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kai. evggu.j h=n to. pa,sca tw/n vIoudai,wn)
6:4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h=n de. evggu.j to. pa,sca h` e`orth. tw/n vIoudai,wn)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h=n de. evggu.j to. pa,sca tw/n vIoudai,wn)

그런데 유월절과 유월절 사이에는 초막절이나 수전절 같은 다른 명절들이 끼어 있다.

유월절 (2:13)
- 유대인의 명절 (5:1)
유월절 (6:4)
- 초막절 (7:2)
- 수전절 (10:22)
유월절 (11:55)
- 안식 후 첫날 (20:1)

먼저 요한복음은 첫째 유월절이 되기까지 서론 (요 1:1-18)에 이어 날짜를 하루씩 더하는 방식으로 예수의 등장을 설명한다 (1:19-2:12): "다음날" (th|/ evpau,rion 요 1:29), "다음날" (th|/ evpau,rion 요 1:35), "사흗날" (th|/ h`me,ra| th|/ tri,th| 요 2:1) "그 후에" (meta. tou/to 요 2:12).

 


서론 (1:1-18)
예수의 등장 (1:19-2:12)
세례자 요한과 유대인 (1:19-28)
세례자 요한과 예수 (1:29-34): "다음날" (1:29)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 (1:35-51): "다음날" (1:35)
가나 혼인잔치 (2:1-12): "사흗날" (2:1)
가버나움 체류 (2:12): "그 후에" (2:12)

 


요한복음은 첫째 유월절 이후에 (2:13-5:47) 예수께서 예루살렘/유다에서 (2:13-3:36), 사마리아에서 (4:1-42), 갈릴리에서 (4:43-54), 예루살렘에서 (5:1-47) 활동하신 것을 진술한다.



째 유월절 이후 (2:13-5:47)
예루살렘/유다에서 (2:13-3:36):
성전회복 (2:13-22):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루살렘으로" (2:13)
니고데모 (2:23-3:21):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2:23)
세례자 요한의 활동 (3:22-36): "그 후에 유대 땅으로" (3:22)
사마리아에서 (4:1-42): "사마리아를 통과" (4:4)
갈릴리에서 (4:43-54): "이틀이 지나 갈릴리로" (4:43)
예루살렘에서 (5:1-47):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루살렘에" (5:1)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둘째 유월절 이후에 (6:1-11:54)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6:1-6:61[7:9]), 예루살렘/베다니에서 ([7:1]7:10-11:53) 활동하시다가 에브라임으로 (11:54) 도피하셨다.

 


둘째 유월절 이후 (6:1-11:54)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6:1-6:61[7:9])
오병이어 (6:1-15): "그 후에 갈릴리" (6:1),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6:4)
갈릴리 바다 (6:16-21): "저물매 바다에" (6:16)
생명의 떡 (6:22-71): "이튿날" (6:22), "가버나움으로" (6:24)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59)
초막절 준비 (7:1-9): "이 후에 갈릴리에서" (7:1),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7:2), "갈릴리에" (7:9)
예루살렘/베다니에서 ([7:1]7:10-11:54)
예루살렘 방문 (7:10-13): "명절 중에" (7:11)
성전교훈 (7:14-36):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성전에서" (7:14)
성령교훈 (7:37-53):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7:37)
간음한 여자 (8:1-11): "예수는 감란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성전으로" (8:1)
성전교훈 (8:12-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8:20)
성전논쟁 (8:21-59)
소경치료 (9:1-41): "길 가실 때에" (9:1), "안식일이라" (9:14)
목자설교 (10:1-21)
수전절 설교 (10:22-39):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10:22)
예수의 피신과 나사로의 죽음 (10:40-42; 11:1-16): "요단강 저편" (10:40)
나사로를 살리심 (11:17-46): "베다니는" (11:17)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의 (11:47-53)
예수의 도피 (11:54):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11:54)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셋째 유월절에 (11:55-19:42) 베다니를 거쳐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을 당하신 것을 설명한다.

셋째 유월절 (11:55-19:42)
유대인의 유월절 방문 (11:55-57):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11:55)
옥합 향유 (12:1-11):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12:1)
예루살렘 입성 (12:12-19): "이튿날에" (12:12)
설교 (12:20-36)
유대인들의 불신 (12:37-43)
설교 (12:44-50)
만찬과 설교 (13:1-14:31): "유월절 전에" (13:1)
배신예고 (13:1-30)
새 계명 설교 (13:31-35)
제자들과 대화 (13:36-14:31)
베드로와의 대화 (13:36-14:4)
도마와의 대화 (14:5-7)
빌립과의 대화 (14:8-21)
유다와의 대화 (14:22-31)
노상의 설교와 기도 (15:1-17:26) "여기를 떠나자" (14:31)
노상의 설교 (15:1-16:33)
노상의 기도 (17:1-26)
수난
체포 (18:1-11):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동산이 있는데" (18:1)
베드로의 부인 (18:12-27): "대제사장의 집 뜰" (18:15)
빌라도의 심문 (18:28-19:16): "관정" (18:28)
예수의 죽음 (19:17-37): "골고다" (19:17)
예수의 장사 (19:38-42)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안식일 후에 부활하신 것을 설명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20:1-21:25).

예수의 부활 (20:1-21:25)
여자들과 제자들 (20:1-10)
예수 첫째 현현 (20:11-18): 아침 마리아에게
예수 둘째 현현 (20:19-23): 저녁 도마가 없는 제자들에게
예수 셋째 현현 (20:24-29): 팔일 후 도마가 있는 제자들에게
* 요한복음의 기록의 목적 (20:30-31)
예수 넷째 현현 (21:1-23): 그 후에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 결론 (21:24-25)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11:55를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분명히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예수의 사역초기부터 마지막 유월절 직전까지의 일을 기록한다. 후반부는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중심으로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신 것을 기록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시간으로 볼 때 예수께서는 셋째 유월절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2년 이상 활동을 했지만, 셋째 유월절을 전후로 예수께 주어진 시간은 2주간 남짓이었다.

"엿새 전에" "여드레 지나"
(11:55) (20:26)
------|---------------|-----------|---|---|-----
첫째 유월절 둘째 유월절 셋째 유월절
1년 1년 2주간

그런데 분량으로 볼 때 요한복음은 셋째 유월절 (11:55)을 중간쯤에 위치시킴으로써 셋째 유월절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2년 동안 예수의 활동을 위하여 절반 정도로, 셋째 유월절을 전후로 하여 2주간 남짓 일어난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위하여 절반 정도로 복음서를 할애하고 있다.

2년 11:55 2주간
--------------|--------------
11장 10장

이것은 요한복음이 예수의 마지막 유월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5. 요한복음의 문학적 특징



요한복음은 자주 앞에 언급된 것을 다시 언급함으로써 통일적으로 한 단락을 이루는 인상 (einen geschlossenen, einheitlichen Eindruck)을 준다: 2:23/4:45; 2:1-11/4:46; 3:1-12/7:50; 9:22 (7:13)/12:42; 11:49f./18:14; 7:33,36 (8:21)/13:33; 13:16/15:20. 역으로 말하자면 요한복음에는 반복되는 말 사이에 다른 내용을 삽입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문학적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삽입(interpolation)방식이다. 삽입방식에는 해석적 설명과 단절적 진술이 있다.



1. 단절적 진술로서의 삽입

요한복음에는 흐름을 단절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들이 자주 등장한다.

1) 문장 안에서

요한복음에는 한 문장 안에서 흐름을 단절시키는 삽입내용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19:31에는 주어 ("유대인들이" Oi` VIoudai/oi)와 동사 ("요구하였다" hvrw,thsan) 사이에 세 가지 삽입적인 내용들이 들어있다. 이 구절을 헬라어 어순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비일이므로, 안식일에 시체가 십자가에 남지 않도록, 그 안식일의 날은 크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요구하기를 그들의 다리를 꺾어 치워달라고 하였다" (Oi` ou=n VIoudai/oi( evpei. paraskeuh. h=n( i[na mh. mei,nh| evpi. tou/ staurou/ ta. sw,mata evn tw/| sabba,tw|( h=n ga.r mega,lh h` h`me,ra evkei,nou tou/ sabba,tou( hvrw,thsan to.n Pila/ton i[na kateagw/sin auvtw/n ta. ske,lh kai. avrqw/sin). 이 문장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2) 작은 문맥에서

요한복음은 작은 문맥에서 흐름을 단절시키는 경우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서론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언급은 두 번이나 삽입적으로 언급된다. 5절에서 빛에 대한 이야기는 10절에서 빛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사이 6-9절에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한 14절에서 충만에 대한 말은 16절에서 충만에 대한 말로 이어진다. 그 가운데 15절에는 로고스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거가 들어있다.


18:15-18에는 베드로가 등장하면서 18:18에서 베드로가 불을 쬐는 것으로 설명되고, 18:25에 다시 베드로가 불을 쬐는 것으로 설명되면서 주님을 부인한다. 그런데 그 사이 18:19-24에 주님께서 심문 당하는 장면이 들어있다.


3) 큰 문맥에서

요한복음에는 큰 문맥에서도 흐름이 단절되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갈릴리 가나는 예수께서 행하신 두 번의 표적 사건으로 연결된다. 첫째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이고 (2:1-11 ), 둘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료한 표적이다 (4:46-54). 그렇다면 그 사이에 들어있는 2:12-4:45는 일종의 삽입으로서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4:31에는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로 되어있고, 18:1에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셨다"고 되어있으므로 그 사이에 들어있는 15-17장은 예수께서 길 가는 중에 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해석적 설명으로서의 삽입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부활 사건 후에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확연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한다 (14:26; 16:13f.). 이 때문에 요한복음에는 부활 사건이 끝난 후의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해석하는 부가적인 내용이 자주 나온다. 부가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1) 번역어

요한복음에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또는 헬라어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o] e`rmhneu,etai (1:42; 9:7), o[ le,getai (또는 evstin) meqermhneuo,menon (1:38,41), o] le,getai (19:17; 20:16)이다.

2) 지시대명사

요한복음은 지시대명사 (tou/to와 evkei/noj)를 사용하여 신학적 해석을 보여주기도 한다 (2:21; 7:39; 11:51-52; 12:33).

3) 목적절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i[na 문장으로 설명하는 신학적 해석이 있다 (18:9; 18:32).

4) 구약인용

요한복음에서 구약성경의 직접인용은 자주 기독론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23/사 40:3; 1:51/창 28:12; 2:17/시 69:9; 6:31/시 78:24; 7:42/삼하 7:12; 미 5:2; 12:13/시 118:25-26; 12:14f./슥 9:9; 12:34/삼하 7:16; 시 89:37; 12:39f./사 6:10; 13:18/시 41:9; 15:25/시 35:19; 19:24/시 22:18; 19:36/출 12:46; 민 9:12; 시 34:20; 19:37/슥 12:10). 아래의 내용을 참조하라.

5) 회고적 진술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장 명확하게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신학적 해석은 회고적인 진술이다 (2:22; 12:16; 20:9).

6) 저자와 관련된 진술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가적인 내용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요한복음의 저자와 관련된 진술들이다 (19:35; 20:30-31; 21:24-25).


6. 요한복음의 신학

1. 신학적 의도성

요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면에서 어떤 신학적인 의도성이 발견된다.
첫째로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표적들이 나온다. 공관복음서에는 대략 29개의 이적들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요한복음은 단지 세 가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신하의 아들 치료 요 4:46-54; 오병이어 요 6:1-13; 바다 위를 걸으심 요 6:16-21). 이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없는 다섯 가지의 이적들을 보고한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적 요 2:1-11; 베데스다 연못의 치료 요 5:1-9; 소경의 치료 요 9:1-7; 나사로의 살리심 요 11:1-44; 이적적인 어획 요 21:1-14).
둘째로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담화들이 나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3:1-21),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4:7-26), 38년된 병자를 치료한 후 유대인들과의 대화 (5:19-47), 오병이어 표적 후 유대인들과의 대화 (6:25-65), 초막절 논쟁 (7:1-38), 목자설교 (10:1-18), 고별설교 (14-16장). 공관복음에 나오는 비유는 요한복음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선한 목자 (요 10:1-18)와 포도나무 (요 15:1-6)라는 테마는 공관복음에서도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완전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셋째로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나는... 이다" 말씀이 나온다. 생명의 떡 (6:35), 세상의 빛 (8:12), 양의 문 (10:7,9), 선한 목자 (10:11), 부활/생명 (11:25), 포도나무 (15:1), 길/진리/생명 (14:6).

2. 성경관

요한복음에서 인용되는 구약성경은 율법, 선지서, 시가서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 율법가운데 창세기, 출애굽기(또는 민수기), 신명기의 사용이 눈에 두드러진다 (요 1:51[창 28:12]; 6:31[출 16:15]); 19:36[출 12:46/민 9:12]; 8:17[신 17:6; 19:15]). 레위기는 직접인용에 사용되지 않았다. 요한복음은 사무엘을 사용한다 (요 7:42[삼하 7:12]; 요 12:34[삼하 7:16]). 특히 요한복음은 선지자들 가운데 이사야를 애호한다(1:23[사 40:3]; 6:45[사 54:13]; 12:38[사 53:1]; 12:39f.[사 6:10]).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이사야(VHsai 요한복음에서 구약성경이 사용된 방식은 농도가 옅은 것부터 진술하면, 언어와 신학에서 병행을 이루는 것, 유대교의 규칙, 관습, 명절 등에 대한 언급, 가능한 암시, 사실적 암시, 확실한 암시, 그리고 직접인용이다. 직접인용은 세례자 요한,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 무리들, 그리고 요한복음서를 기록하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에 의하여 인용되었다. 요한복음에서 구약성경은 칠십인 역과 히브리어 성경이 병행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인용에 자유로운 변형이 시도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대한 요한복음의 유연성을 강하게 증거한다.


요한복음에서 구약성경의 인용을 도입하는 방식은 상당한 다양성 때문에 유명하다. 그러나 도입형식을 분류해보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인용도입형식이 없는 경우 (요 1:51[창 28:12); 12:13[시 118:25-26]; 요 12:34[삼하 7:16; 시 89:37]), 둘째로 gegramme,non evsti,n 또는 e;stin gegramme,non 형식 (2:17[시 69:9]; 6:31[시 78:24]; 6:45[사 54:13]; 10:34[시 82:6]; 12:14f.[슥 9:9]), 셋째로 ei=pen h` grafh, 또는 h` grafh. ei=pen(le,gei) 형식 (7:38[unde?]; 7:42[삼하7:12; 미 5:2]; 19:37[슥 12:10]), 넷째로 성취인용 형식 ( i[na h` grafh.[o` lo,goj] plhrwqh/|[teleiwqh/|])(요 12:38[사 53:1]; 13:18[시 41:9]; 15:25[시 35:19]; 17:12[인용없음]; 19:24[시 22:18]; 19:28[시 22:15]; 19:36[출 12:46; 민 9:12; 시 34:20]).


요한복음의 구약성경 인용은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사실들을 반영한다. 무엇보다도 요한이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그 자신이 구약성경에 매우 익숙하다는 것을 입증할 뿐 만 아니라 자신의 복음서가 구약성경에 의하여 확증되는 복음서라는 것을 확신하는 자의식을 보여준다. 이것은 요한복음을 읽는 처음 독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사실이다. 요한복음의 독자는 구약성경에 매우 익숙한 상황에 있었을 것이며, 요한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을 타당한 일로 여겼을 것이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요한복음의 구약성경 인용에는 어떤 변증적인 목적이 들어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때때로 요한은 구약성경을 사용하여 유대교를 공격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했다고 주장되기도 하며, 때때로 요한은 구약성경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를 예고하는 구약성경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쐐기를 박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구약성경 인용에는 이런 방어적인 변증의 목적 뿐 아니라 적극적인 교훈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요한이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두 가지 교훈적인 목적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요한은 구약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구약성경은 전체적으로 예수와 그의 사건에 대한 예고이다" (Die Schrift insgesamt ist Vorank ndigung Jesu und seiner Geschichte).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고로서 기능을 한다. 따라서 요한은 구약성경에서 예수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였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 의해서만 정확하게 이해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로 구약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정확하게 해석된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성경을 파악하는 진정한 열쇠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약성경에 대한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이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교훈적 목적은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재해석하였을 뿐 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약성경을 재해석하였다. 요한은 예수를 발견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으로 되돌아갔고, 구약성경을 발견하기 위하여 예수에게로 되돌아갔다. 구약은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이며, 예수는 구약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이다.


이렇게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여 요한은 구약성경이 그리스도를 지시하고 있다는 확신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1:45; 5:39; 5:46f.). 요한복음에 의하면 구약성경의 주요한 인물들은 모두 예수를 지향한다. 아브라함은 예수의 날을 보았고 (8:56), 모세는 예수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5:46f.), 이사야는 예수의 영광을 보았다 (12:38). 실제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들과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 때문에 구약성경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예수의 일도 알지 못한다 (2:22; 12:16). 그래서 제자들은 심지어 예수를 육체적으로 만나고 있으면서도 구약성경을 알지 못하는 한 예수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3. 기독론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예수는 로고스로서 하나님과 동일하다 (1:1). 그는 태초에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로고스이신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 그의 영광은 창세 전에 누렸던 하나님의 영광이며 (1:14; 17:5),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분은 예수밖에 없다 (1:18). 이것은 아주 고차원적인 기독론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기에 (10:30,38), 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한 기능이 강조된다. "나의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하시고 나도 일한다" (5:17). 기능적으로나 존재적으로나 예수는 하나님과 한 분이시다.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성때문에 예수는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고백된다. "도마가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8; 참조. 요일 5:20).


요한복음에는 인자라는 표현이 13번 나온다 (1:51 3:13; 3:14; 5:27; 6:27,53,62; 8:28; 9:35; 12:23,34bis; 13:31).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교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1:51). 인자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밀접하게 연결된 예수의 참 모습에 관한 주요한 그리스도론적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외에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어느 정도 일련의 순서를 따라 묘사되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3:13)로 묘사된다. 인자는 땅에 존재하기 전에 하늘에 존재하던 분이다. 이것은 인자의 존재에 관련하여 단지 공간성을 말할 뿐 아니라 시간성도 말하려는 것이다. 선재적인 시간과 공간이 연결되어 표현된다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 6:62). 그런데 인자는 본래 선재하시던 분이지만 세상에 오신다. 그래서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3:13)이다. 인자는 분명하게 혈육을 가진다.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 (6:53). 이것은 인자의 비하를 의미한다. 인자의 비하는 그의 죽음에서 잘 나타난다. 인자는 높이 들리게 될 것이다 (8:28; 12:34). 그러나 비하하여 수난당하는 인자는 결국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간다" (6:62). 요한복음은 이것을 가리켜 인자의 영광이라고 부른다 (12:23; 13:31).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선재하시던 분으로서 세상에 와서 수난을 당하고 승귀하시는 분으로 설명된다. 특이하게도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서와는 달리 인자가 미래의 영광 중에 오실 분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물론 인자의 심판권세에 대하여는 언급된다 (5:27).


요한복음에서 로고스 기독론은 구약성경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로고스는 구약성경적 단어 ( 시 33:6; 107:20)의 그리스적인 의역이다. 로고스 사상이 구약 (아마도 칠십인 역)에서 출원했다는 것을 몇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어휘가 동일하다. 요한복음의 "태초에"라는 첫 말들은 틀림없이 창세기의 "태초에"라는 첫 말들을 사용한 것이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에서 머릿말을 빌어씀으로써 내용까지도 사용했다. 둘째로 내용이 동일하다. 요한복음은 로고스의 창조참여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구약을 이용한 것이다. 칠십인역 구약에서 말씀은 창조와 관련이 있다 (창 1:3,6,9). 특히 시 33:6에 말씀의 창조적인 기능에 대하여 요약되어 진술된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졌다" LXX 32:6).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로고스 기독론은 오랫동안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로고스 기독론은 요한복음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로고스가 요한복음의 본론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로고스 사상은 기독교 외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예를 들어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는 태초에 있어 만물을 지배하며 인간의 이성 안에 현재하는 비인격적이고 범신론적인 세계법 (세계혼 Weltseele)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것은 로고스라는 동일한 용어를 가지고 있지만 로고스가 역사와 인류에 개입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요한의 로고스 개념과는 관계가 없다. 로고스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Philo에게서도 발견된다. 필로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구약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같은 인물들과 동일시된다. 필로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현상세계의 원형인 이상세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de opificio mundi, 24f.). 특히 필로는 로고스가 이상인간, 원인간(原人間),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로부터 모든 경험적인 인간들이 발원하여 타락하였다고 생각한다. Bultmann은 요한복음의 로고스 사상의 기원을 영지주의에서 찾는다. 영지주의에서 로고스는 신과 인간 사이의 신화적인 중간자이다. 그러나 Bultmann의 이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약점을 가진다. 첫째로 자료적인 측면이다. 기독교 이전의 자료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 이후의 자료들이라도 기독교 이전의 사상을 반영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둘째로 내용적인 측면이다. 영지주의에서 로고스는 "시간적으로 인간이 되었지만 언제나 단지 신화적이며 가현설적인 범위에서 그러하고, 결코 역사적이며 실제적인 성육신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Hermas 문학에서 (Corpus Hermeticum)는 로고스가 누스 (Nous), 원인간인데 구원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Hermas신화에서 로고스의 인격화가 언급되지만 범신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알레고리하고 철학적인 해석에 근거한다. <조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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