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선재하신 말씀으로서의 신성과 증인들 요한복음1장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그리스도
요한은 법정 증거의 형식을 따라 예수의 선재하신 신성과 동시에 그의 육신을 입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헬라 플라톤 철학과 영지주의 초기 단계의 육신을 거부하는 사상을 배격하고 히브리적 대속 제사의 개념을 따라 예수의 대속적 죽음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1. 선재하신 말씀이 육신으로 오심(1-18절) 1) 말씀과 창조 1절의 '태초에'는 '곧 하나님이시니라'와 함께 말씀의 선재하신 신성을 강조한다. '말씀'으로서의 예수의 선재적 신성은 헬라적 배경에 있는 청중들이 플라톤 철학적 범주를 사용하여 영원한 구원을 현재 지상에서 예수가 보여 주고 있음을 가르치는 좋은 접촉점으로 사용되었다. 1,2절의 '하나님과 함께'는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위일체론적 표현으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3절의 '말미암아'는 예수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신적 중재자였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예수는 창조의 중재자일 뿐만 아니라 새 창조의 중재자도 되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4절의 '생명'은 예수 안에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해 준다(창2:7). 5절의 '비취되'는 현재형으로서 저자 당대의 독자들에게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창조의 그림(창1:2,3)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타락한 마음속에 말씀의 빛이 비춰짐을 말한다. 10-12절의 문맥으로 볼 때 '깨닫지 못하더라'는 계시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심 6절의 '났으나'는 요한이 창조된 존재인 것을 가리키고 1절의말씀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계시니라'와 대조된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말3:1)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7절에서 '증거'가 두 번 반복된 것은 요한의 사역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증거'와 '믿게 하려 함'과 밀접하게 연결된다(요20:30,31). 8절에서 요한이 '이 빛', 곧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잘못된 믿음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선재하신 영원한 존재가 어둠의 세상에 온 것을 가리킨다. 10절에서 첫 세상은 물질 세상을, 둘째 세상은 물질 세상과 인간 사회를, 셋째 세상은 인간 사회만을 가리킨다. 11절의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은 예수의 창조주 되심을 가리키며 동시에 예수를 세상에 알려 줄 목적으로 창조된 유대인조차도 예수를 거절함을 암시한다. 11절의 '영접지 않음'과 12절의 '영접'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이다. 첫 12장은 유대인에게 거절되심이 초점이고, 13장 이후 나머지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영접받음이 초점이다. '주셨으니'는 13절의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예수의 초월적인 영광 '우리'는 요한을 포함한 그의 공동체를 가리키며 동시에 후대 모든 신자들을 암시한다. 15절의 '전에 말하기를'은 사도 요한이 친히 메시야의 신분을 알기 이전의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잘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의 선재하신 신적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16절의 '우리'는 요한과 그이 교회를 가리킨다. '충만'은 14절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을 연상케 한다. 성도의 '받는 것'은 12절의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과 대조된다. 율법으로 정죄된 것을 인식하는 자들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와 진리를 받을 수 있다. 18절의 '하나님'에 정관사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보다는 그의 신성을 가리킨다. 모세는 그의 영광의 나타남을 보았으나 그의 신적 본질을 보지 못했다.
2. 요한의 증거(19-34절) 1) 요한의 자기 부인 이제부터 예수에 대한 증거가 시작되는데, 19절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는 법정 심판의 맥락에서 시작된다.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은 것은 당시 메시야가 곧 올 것이라는 기대가 널리 퍼져 있음과 요한이 엄청난 사역을 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0절의 '나'가 강조되어 자기의 그리스도 됨을 부인하고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jEgw; oujk eijmi; oJ cristov"에고 우크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로서 그리스도의 등장이 가까움을 암시한다. 21절의 '엘리아냐'(말4:5)와 '그 선지자냐'(신18:15), 그리고 22절의'누구냐'고 직접 묻는 것은 분명히 요한의 사역이 메시야적 종말론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요한과 그 메시야적 사역에 대한 적대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2) 내 뒤에 오시는 그이를 소개 24절의 '바래새인들'은 그들의 의식적 종교활동의 전제를 가지고 25절의'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의 근거를 메시야적 신분과 연결시켜 대답하려는 것이다. 원래 세례는 이방 개종자들에게서 이방 문화의 오염을 제거하는 상징행위이다. 26절의 요한이 '몰로 세례를 주'는 것은 27절의 '오시는 그이'와 함께 종말론적 메시야 등장의 표시로 해석된다.
3)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하나님의 아들 29절의 '보고'는 요한의 증거의 확실함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예수의 묵시적 신분과 죄를 위한 대속적 희생을 강조한다. 30절의 '먼저 계심'은 그의 선재한 신성을 강조한다. 31절의 '물로 세례를 주는' 이유는 32절 이하와 같이 그를 이스라엘에게 공적으로 나타내려는 것이다. 33절의 '내려서…머무는'는 둘 다 현재 분사로 구약 선지자들에게 잠깐 머문 것과 구별된다. 요한의 물 세례는 죄를 용서할 것을 약속하는 소극적 측면이 강하다면 성령 세례는 하나님 안의 새 생명을 부여하는 적극적 측면이 강하다. 34절의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는 법정 증거의 양식을 보여 준다.
3. 첫 제자들의 증거(35-51절) 1) 안드레의 증거와 베드로를 얻음 35절 이하에서 요한이 자기 두 제자에게 예수의 '하나님의 어린양' 되심을 증거하고 37절에서두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것은 요한이 메시야 사역을 철저히 준비한 것을 보여 준다. 38절의 '랍비' 호칭은 더 이상 요한의 제자이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어디계시니이까'는 무엇을 구할지 알지 못하고 당황하는 질문이다. '그날 함께 거하니'는 41절의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40절의 두 사람 중 나머지 하나는 요한일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와의 첫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41절의 '메시야'는 안드레의 이해에 의한다면 당시 유대의 메시야적 기대와 같이 정치적 메시야 정도일 것이다. 42절의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는 단순히 예수에 대한 증거만으로는 부족함을 암시한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는 예수의 신적 초자연적 통찰력을 암시한다.
2) 빌립의 증거와 나다나엘을 얻음 43절의 '갈릴리로 나가려'하신 것은 유대지역에서 요한으로부터 확실한 증거를 얻고 그의 첫 제자들까지 얻었기 때문이며 46절의 '나사렛'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만나'는 우연한 만남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편에서의 의도적인 만남을 가리킨다. 44절은 먼저 제자된 아드레와 베드로의 요청이 있었을 것을 암시한다. 46절의 '와 보라'는 친히 그와 함께 거하여 진지하게 대화할 필요성을 암시한다. 47절의 '참 이스라엘 사람'은 '나사렛'을 천시하는 그가 19절의 '유대인들'과 구별되는 것을 암시한다. 48절의 '아시나이까'는 예수의 초자연적 전지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49절의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은 시2:6,7을 반영하는 메시야 칭호이다. 51절의 '진실로 진실로'는 '너희에게'와 함께 요한이 서론을 요약하는 의의를 가진다. 본 절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 사역, 즉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함축한다.
영원한 말씀인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요1:1-13)
◈ 원문강해 ◈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심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소개한 본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일명 로고스(Logos) 송가라 불러지는 부분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창조적 지혜와 모든 존재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의 신적 존재와, 또 그 말씀이 마침내 이 역사의 현장에 친히 찾아오신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1. 영원한 생명과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1-5절) 1) 하나님의 말씀 ( jEn ajrch'/ h\n oJ lovgo", kai; oJ lovgo" h\n pro;" to;n qeovn, kai; qeo;" h\n oJ lovgo". 엔아르케 엔 호 로고스, 카이 호 로고스 엔 프로스 톤 데온,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1절) 태초에 해당하는 아르케(ajrch')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여성 명사 아르케(ajrch')의 단수 여격으로 '처음에'라는 뜻인데, 이는 시간의 출발점 이전의 때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말씀'에 해당하는 로고스(lovgo")는 본래 호머(Homer)의 글에서 의견을 말하기 위해'(말을)수집하다, 배열하다'등의 뜻으로 쓰여진 말에서 유래되었다. 흔히 '이성, 말'을 뜻하는 말로 간주되나(A.T.Robertson), 여기서는 관사 호(oJ)가 붙어 '그 말씀'으로서 성육신 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표현하시며(나타내시며),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으로서의 선재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말들은 에이미(eijmiv이다)의 미완료 과거 3인칭 단수인 엔(h\n계시니라)과 결합하여 말씀이 태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또 지속적으로 그 말씀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즉 말씀은 태초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Bernard, Hendriksen, Albert, Calvin). 이런 그리스도의 선재성은 구약의 잠8:22-31에서도 암시된다. 한편 프로스 톤 데온(pro;" to;n qeovn하나님과 함께)이란 말에서 전치사 프로스(pro;")는 '∼와 함께'라는 전치사(h\n엔, metav메타, mapav파라, suvn쉰)와 같은 반면 프로스는 동적인 공존을 의미하고 있다. 즉 서로간에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였음을 가리키는 삼위일체의 교리임을 알 수 있다(J.Calvin).
2) 만물의 창조 (ou|to" h\n ejn ajrch'/ pro;" to;n qeovn. pavnta di j aujtou' ejgevneto, kai; cwri;" aujtou' ejgevneto oujde; e{n. o} gevgonen 후토스 엔 엔 아르케 프로스 톤 데온 판타 디 아우투 에게네토 카이 코리스 아우투 에게네토 우데 헨 호 게고넨;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2,3절) 만물을 뜻하는 판타(pavnta)는 관사 없이 사용됨으로 인하여 현재에 국한된 전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에 존재하는 전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이 되다'를 뜻하는 기노마이(givnomai)의 3인칭 단수 과거인 에게네토(ejgevneto되었으니)와 결합하여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말씀을 통하여' 창조 사역을 담당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롬11:36골1:16). 잠8:22-31에서는 지혜에 의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전1:24,31).
3) 말씀안에 있는 생명 (ejn aujtw'/ zwh; h\n, kai; hJ zwh; h\n to; fw'" tw'n ajnqrwvpwn: kai; to; fw'" ejn th'/ skotiva/ faivnei, kai; hJ skotiva aujto; ouj katevlaben. 엔 아우토 조에 엔 카이 해 조에 엔 토 포스 톤 안드로폰 카이 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 카이 헤스코티아 아우토 우 카텔라벤; 그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4,5절) '생명'에 해당하는 조에(zwh;)는 본문에서 정관사 없이 사용되어 주로 영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요3:15요일5:12).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임을 뜻하고 있다. 특히 엔(h\n있었으니)은 에이미(eijmiv이다)의 미완료 과거 3인칭 단수로 지속적으로 있어 왔음을 암시한다. 본문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주 안에 만물을 지으시고 유지하시고 계심을 암시해 준다. 또한 본문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본질을 '빛이라'라는 뜻의 엔 토 포스(h\n to; fw'")라는 말로 인간들과 연결 시키고 있다. 토 포스(to; fw'")는 중성 명사와 정관사의 결합형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에게 계속 빛으로 역사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한편 '깨닫지'에 해당하는 카텔라벤(katevlaben)은 '굳게 잡다'를 뜻하는 카랄람바노(katavlambanw)에서 파생된 제2부정 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로서 '이해하다, 깨닫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사람들은 죄악된 세상 속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하였다는 것을 본문은 가리키고 있다.
2. 빛을 증거하러 온 자(6-8절) 1) 보내심을 받은 자 ( jEgevneto a[nqrwpo" ajpestalmevno" para; qeou', 에게네토 안드로포스 아페스탈메노스 파라데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6절) '보내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아페스탈메노스(ajpestalmevno")는 '파송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포스텔로(ajpostellw)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메시지나 어떤 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를 의미하나,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사용하던 용어이다(사6:8). 그런데 이말이 완료 수동형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보내심을 받아 사역하였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한 '났으나'에 해당하는 에게테노( jEgevneto)는 '발생하다'를 뜻하는 기노마이(givnomai)에서 파생된 제2부정 과거 중간태 직설법 3인칭 단수로서 요한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와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리켜 주고 있다. 한편 '∼에게서'를 뜻하는 전치사 파라(para;)는 1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 사용된 전치사 프로스(pro;"∼와 함게)와는 대조되고 있다. 즉 전자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 반면 후자는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곧 요한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단순한 사역자임을 말해 주고 있다.
2) 빛에 대한 증거 (ou|to" h\lqen eij" marturivan, i{na marturhvsh/ peri; tou' fwtov", i{na pavnte" pisteuvswsin di j aujtou'. 후토스 엘텐 에이스 말튀리안 히나 말튀레세 페리 투 포노스 하나 판테스 피스튜소신디 아우투;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위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7절)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의 목적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먼저 '증거에 해당하는 말튀리안(marturivan)은 목적격 여성 단수로서 '보고들은 것을 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즉 그는 신기원을 이루는 예수의 사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오직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제한적인 사역만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또한 요한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로고 하는 데 있는데, 이것은 본서가 쓰여진 목적이기도 하다.
3) 빛의 증거자 (oujk h\n ejkei'no" to; fw'", ajll j i{na marturhvsh/ peri; tou' fwtov". 우크 엔 에케이노스 토포스 알르 히나 말튀레세 페리 투 포토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8절)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다른 요한의 사역에 대한 본질적 특성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요한이 이러한 관계 정립을 한 이유는 세례 요한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요한이 죽은 후 그의 임무를 알지 못한 채 하나의 당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행19:2). 따라서 당시의 초대교회로서는 이들을 교회의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문제로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9-13절) 1) 빛이신 그리스도 ( \Hn to; fw'" to; ajlhqinovn, o} fwtivzei pavnta a[nqrwpon, ejrcovmenon eij" to;n kovsmon. ... kai; oJ kovsmo" aujto;n oujk e[gnw.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 호 포티제이 판타 안드로폰 에르코메논 에이스 톤 코스몬…카이 호 코스모스 아우톤 우크 에그노;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9,10절) '참빛…있었나니'에 해당하는 엔 토 포스 토알레디논( \Hn to; fw'" to; ajlhqinovn)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는 참빛이시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참'(ajlhqinovn알레디논)은 거짓에 반대되는 '참'(ajlhqhv"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이란 의미와 함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말해 주고 있다(J.Calvin). '있었나니'( \Hn엔)란 에이미(eijmiv이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줄곧 있어 왔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각 사람'에 해당하는 판타 안드로폰(pavnta a[nqrwpon)은 어떤 집단이나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각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결국 한 인간에게 비추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참빛은 구약에서와 같이 한 국가, 민족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도들 개개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요한은 '알지'에 해당하는 에그노(e[gnw)는 '알다'를 뜻하는 기노스코(ginovskw)에서 파생된 제2부정 과거 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그런데 이 말은 후천적인 객관적 관찰로서 선천적이고 감각적인 지식을 나타내는 말과는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타락으로 인한 무지의 결과임을 의미한다.
2) 빛을 영접하는 자 (eij" ta; i[dia ... tevkna qeou' genevsqai, toi'" pisteuvousin eij" to; o[noma aujtou', 에이스 타 이디아…데 엘라본 아우톤…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 토이스 피스튜우신 에이스 토오노마 아우투; 자기 땅에 오매…영접하는 자…그 이름을 믿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11,12절) '자기 땅'에 해당하는 타 이디아(ta; i[dia)는 자기 자신을 뜻하는 형용사 이디오스(i[dio")의 중성 복수형으로 '자기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곧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거처이며, 궁극적으로 세상의 소유권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의미해 주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을 뜻하는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tevkna qeou' genevsqai)에서 '되는'에 해당하는 게네스다이(genevsqai)는 '되다'를 뜻하는 기노마이(givnevsqai)의 제2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 그분의 영적 자녀가 됨을 암시한다(롬8:15-17,29히2:11). 즉 구원으로 인한 신분의 변화가 영원가지 계속된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3) 하나님으로 난 자 (oi} oujk ejx aiJmavtwn oujde; ejk qelhvmato" sarko;" oujde; ejk qelhvmato" ajndro;" 호이 우크 엑스 하이마톤 우데 에크 델레마노스 살코스 우데 에크델레마토스 안드로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13절)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를 육적인 세대와 대조시켜서 이들이 영적인 자녀임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요한은 부정을 나타내는 우크 우데(oujkoujde;)를 사용하여 영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 세 가지 요인, 즉 혈통, 육정, 사람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육정(qelhvmato" sarko;"델레마토스 살코스)에서 텔레마토스는 델레마(qelhvma경향, 뜻기뻐하는 것)의 소유격이며, 살코스는 죄의 본성을 지닌 '육신'의 의미를 지닌 사륵스(savrx)의 소유격으로, 직역하면 '육신의 성향(기뻐하는 것)'을 뜻한다. 곧 1차적으로 성욕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성령의 뜻에 거슬리는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예수에 대한 서언적인 증언으로서 (Morgan, G.R.Beasley-Murray), 영원한 신적인 말씀에 대한 우주론적 서술과 세례 요한의 증거와 빛의 도래를 잘 묘사하고 있다(C.K.Barrett).
1.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1-5절) 1절의 '태초에'( jEn ajrch'엔 아르케)는 예수 안에서 인간이 시공을 초월한 존재와의 상면함을 의미하고 있다(R.Bultmann). 특히 본문에서 '태초'란 창1:1의 시공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보다 더 깊은 뜻으로서 영원 전의 뜻을 함축한다. 한편 '말씀' (oJ lovgo"호 로고스)이란 근본 '모음, 산출, 이성'등의 뜻을 갖으나 요한에 의해서 인격화되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은 '로고스'란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사도 바울에 의해서 묘사되어지기도 한다(골1:16). 그리고 구약에서는 잠8:22-33에 '지혜'라는 표현으로 언급되었다. 한편 철학자 필로는 로고스의 선재성을 가르치지 않았다(J.Bernord). 2절의 반복적인 언급은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① 다름아닌 바로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음, ② 바로 그가 모든 시대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심, ③하나님이신 말씀이 하나님을 추종하는 역설적인 장면 등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G.R.Beasley-Murray). '그가'(oJuto"후토스)는 요한이 강조하기 위하여 즐겨 사용한 말이며, 이를 통해서 셈어적 배경이 들어 있음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다(Burney, Black). 3절의 '만물이…지은 바 되었으니'는 2세기부터 창조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Raymond, E.Brown), 폴라드(Pollard)는 이 문장을 넓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구원사를 포함한 영원한 행위로 묘사하였다. 4절의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에서 생명이 라는 단어와 빛이라는 단어는 복음서에서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진 명사로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서 생명(요11:25)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강조하였다(C.K.Barret). 생명과 빛은 모두 묵시 문학적으로 함축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생명이 쿰란 종팡의 어휘들에서 특별히 자주 묘사된 것은 아니다(H.Braun). 5절에 대한 요한의 사상은 예수를 세상 속에 나타난 빛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두움도 이에 상응하는 윤리적 성격을 띠게 된다(S.Aalen).
2. 세례 요한의 증언(6-8절) 6절은 서언의 두 번째 부분의 시작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위임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는 모세(출3:10-15)나 예언자들(사6:8), 예수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헬레니즘적인 철학자도 마찬가지였다(C.K.Barrett). 7,8절의 '모든 사람'의 범위는 3절의 모든 만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영역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나, 혹자는 예수보다는 세례 요한의 말씀 선포로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은 세례자라기보다는 증거인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Raymond, E.Brown).
3.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세상의 반응(9-13절) 9절의 '세상에 와서'라는 구문이 사람과 빛 중 무엇을 수식하는 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① '사람'을 수식하면 '참빛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에게 빛을 준다'고 해석되는데, 초기 역본들(OL, Vulgate)과 헬라 교부들(Eusebius, Cyril of Alexandria, Chrisostom)그리고 현대 신학자(Burney, Schlatter, Bultmann, Wikenhauser)와 랍비 문서의 지지를 받고 있다. ② 이에 반하여 '빛'을 수식하면 '참빛이…세상에 왔다'고 해석되는데, 라틴 교부들(Tertullian)과 현대 주석가들(Lagrange, Braun, Duport, Macgregor, Boismard)등이 지지한다. 11절의 '자기 땅에 오매'는 예수가 자신의 소유지인 그의 고향(C.K.Barrett)으로 왔음을 암시하며, 로고스가 자신의 자연적 대응자인 피조물 세계로 왔음을 의미한다(Platon). 특히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그 율법은 그곳에서 거할 적합한 장소를 발견했던 것이다(J.Jervell).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신앙으로 받아 드릴 수 있는 것이다(Schweizer). 13절의 '혈통적으로나'(ejx ajimavtw'n엑스하이마톤)는 '하나님으로부터'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조로 쓰였다(C.K.Barret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태초에 계산 말씀(1-5절) 1절의 '태초에'는 복음의 말씀의 시작뿐만 아니라 또한 창조의 시작을 나타내어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말씀은 이미 있었음을 나타낸다(W.E.,Hull). 이것은 옛 창조의 기사와 새로운 창조 기사를 소개한다(Wilson). 이들 두창조의 사역에서 대행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F.F.Bruce). 말못하는 우상과는 다르게(왕상18:26-29시1153-8;합2:18,19고전12:2), 하나님은 항상 힘 있게 말씀해 오셨다(W.E.Hull). 구약에서 '말씀'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특별히 창조, 계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F.F.Bruce). 2절의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는 말씀과 하나님 사이의 적절한 구별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둘 사이의 동등성과(W.E.Hull)그들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F.F.Bruce). 3절의 두 부분은 첫 번째는 긍정적으로(∼되었으니), 두 번째는 부정적으로(∼없이는) 말한다. 이 이중 확언은 창1장의 가르침을 요약해서 말하는 것이다(F.F.Bruce). '된 것이 없느니라'는 만물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것의 존재도 하나님의 창조의 표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말씀의 활동으로서 창조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대화하시려는 하나님의 노력의 한 부분이다(W.E.Hull). 4절의 정확한 해석은 대단히 어렵다. 창조의 대행자로서 역할을 하신 말씀은 '생명'을 주는 자였다. 하나님의 선물로서, 이 생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는 빛이 되었다(8:12;12:46, W.E.Hull). 5절과 창1:2,3사이에는 분명한 병행이 있다. 하나님께서 빛이 어두움에 비치도록 하신 것처럼, 사람들의 빛인 말씀이 실수와 잘못의 어둠에 비춘다(Wilson).
2. 보내심을 받은 자 요한(6-8절) 6절에서 요한과 예수님과는 놀라운 대조를 보인다. 예수님은 말씀인 반면에 요한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prov"프로스) 친밀한 교제를 즐겼지만 요한은 그의 편'에서'(parav파라) 보냄을 받았다. 예수님은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있었다' (h엔). 이에 반하여 요한은 적당한 때의 한 시점에서 '존재하게'(ejgevneto에게네토)되었다(W.E.Hull). 7절에서 요한의 증거의 완전한 설명은 19-34절 이하와 그 후에 요3:27-30:5:33에 나타난다. 증거의 주제는 복음서 전체를 관통한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진리의 증거는 다중적이다. 다중의 증거의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려 함이다. 8절에서 요한은 자신이 '이 빛'(tov fw'"토포스)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빛'이란 정관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직역하면 '그 빛'으로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에 '관하여'(periv폐리) 증거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3.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빛(9-13절) 9절의 '참빛'은 모든 사람 위에 비추는 우주적인 빛으로 이제는 특별한 한 사람이 되었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도 항상 존재했던 그 빛이 이 역사의 한정된 시점에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것이다(.W.E.Hull). 10절의 '계셨으며'는 온 우주를 창조했던 그 대행자가 이제 지구 공간의 특정 지점을 점유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때 만들어진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 그는 '세상 안에서' 살았다(W.E.Hull). 11절에서 사람들은 빛의 오심을 거절하는데, 그것은 그가 만든 '세상'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모두에게 해당된다. 자연적 이성의 빛으로 살아가는 세상도, 신의 계시의 빛으로 살아가는 종교도, 세상의 참빛이 인간으로 구체화되었을 때 모두는 영접치 않았다(W.E.Hull). 13절은 성도가 중생하는 형태를 보인 것이다. 유전이나 인간적 노력을 통한 것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이다(W.E.Hull).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적 생명에 의해 새로이 그분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요3:1-6히2:11).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요한복음의 로고스
요한의 서문을 읽을 때 우리는 요한의 서언의 로고스를 어떻게 이해하며, 그 내용이 무엇이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가 로고스의 이해를 문제시할 때, 요한복음의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주시해야 한다. 이런 경우 두 개의 극단적인 견해가 있어 왔다. 즉 어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오로지 팔레스틴적이라고 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헬라적 종교 철학의 예로써 보려고 한다.
1. 헬라적 영향 볼트만(R.Bultmann)은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의 구속적 신화(Gnostic Redeemermyth)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도드(C.H.Dodd)는 요한복음을 필로(Philo)가 대표하는 헬레니즘의 이원론에 비추어 설명한다.
2. 유대주의적 영향 브라운(R.E.Brown)은 "신약성서 시대에 이미 헬라적 요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서와 유대의 사상적 근원을 더욱 강조한다. 그러면서 예수가 지금까지 왔던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것같이, 요한의 사상도 모든 것을 능가한다고 주장한다. 테니(Merrill C,Tenney)도 요한이 예수의 부활을 근거로 하여 이교도의 개념을 넘어서 새로운 철학을 시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3. 로고스의 의미 요한의 로고스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문제는 쉽지가 않다. 클라크(Gordon H.Clark)는 요한 서언의 로고스(요1:1,14)는 태초에 말씀, 도리, 가르침, 마음, 하나님의 지혜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 바로 자신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셨고 우리가 그의 은혜와 진리의 영광을 본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잠8:22-31).
4. 로고스의 내용과 결단 요한의 로고스의 내용은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으며, 인간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육신이 되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에 오실 때 빛과 진리와 계시로서 왔다는 것이다. 이제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 자체인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요한은 세례 요한의 증거(고백)과 자신의 기록 목적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함이며,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한다.
혈통의 개념(1:1-13) ◈ 세계배경 문화사 ◈
혈통(血統)은 가계(家系)의 계승(繼承)을 뜻하고, 부계 사회(父系社會)에서 가계의 계승은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혈통은 곧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부계 사회를 형성한 이래 아들들은 가계의 계승자로서 특별한 지위를 누려 왔다. 그것이 곧 남성의 지위가 여성보다 높아진 근본 이유이다.
근동/이집트 : 이집트에서 아들이 생긴다는 것은 노동력이 더 늘어난다는 의미 외에도, 가족을 부양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중요하였다. 또 아들은 가장인 아버지의 뒤를 계승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가정 내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자격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양/로마 :로마 사람들은 특히 혈연 관계를 중요시했다. 공화정 초기에는 가족의 장이 법적으로 가족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 중에 누구라도 벌로써 죽일 수가 있었다. 이 권한이 실제로 행사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시대가 흐른 다음에도 역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남편의 이름은 가계(家系)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노멘' 즉 미들 네임(middle name)으로 이것은 씨족 또는 가문의 유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스 :그리스안에서는 7세가 되면 교사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는데, 아버지는 교사에게 아이를 때리는 권한까지 주었다. 학교 교육은 읽기, 쓰기, 셈하기, 시, 노래 및 체육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모든 교육은 그들이 아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혜택이었다. 이렇게 교육받은 아들들은 성인이 되면 국가에 봉사함은 물론이고 한 가정을 이어갈 혈통의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였다.
동양/한국 : 한국 사회는 아버지 중심의 부계사회(父系社會)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지계 가족은 아버지가 가장이 되고, 아들은 그 후계자가 되었다. 한국의 가족 구조는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하는 수직선을 중심으로 상하 관계를 형성하였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출생했다는 보은관계(報恩關係)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절대적 상하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족 구조는 아버지와 아들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적 수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아들은 성장할수록 아들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즉 집안을 번영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장차 가문의 계승을 위해 그리고 집안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특히 집안을 계승할 의무가 장남에게 주어졌으므로 형과 동생과의 관계도 상하 관계를 이루었다. 상속 제도(相續制度)는 아들의 가족 안에서의 위치, 그 중에서도 장남의 위치가 어떠했나를 잘 보여 준다, 삼국 시대 이전 부여(扶餘)의 상속제도는 원칙적으로 장자 상속(長子相續)이었고, 제사 상속과 재산 상속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삼국 시대에 들어와 고구려에서의 왕위계승은 적자 상속(嫡子相續)이 원칙이었고, 신라에서도 장자에 의한 상속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렇듯 혈통이 아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남아선호 사상(男兒選好思想)이 일찍부터 나타났다. 아들이 없다는 것은 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교에서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여성의 잘못으로 이혼 사유가 되는 7가지 항목 중에 무자(無子), 즉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다. 불임여성들은 가계를 이을 수 없다는 불안감과 조상에 대한 죄책감으로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계보를 통해 사람 또는 한 가문의 흐름을 알 수 있으며(대상1:1-28), 예수그리스도의 혈통을 알 수 있고(마1:1-17눅3:23-28), 성경에 나타나 여러 선지자들의 가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계보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오직 믿음과 회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이 있을 뿐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빛을 영접하지 않은 백성(1:1-13)
말씀이시며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은 이 빛에 대하여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으며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세상이 죄악과 죽음의 어두움 속에 깊이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1. 빛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 사도 요한은 말씀으로 선재하셨던 그리스도가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을 비췄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여기서 어두움은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들을 가리킨다. 이 어두움은 죄악 세상이고, 죽음의 세계이며, 이는 사단이 지배하는 왕국이다. 따라서 사단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깨닫지 못하도록 무지와 불신으로 역사한다.
2. 빛을 알지 못하는 세상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그리스도가 세상 속에 오시자 그를 알지 못했다. 세상은 다만 그를 목수의 아들(막6:3)이나 미친 자(막3:21,22)로 알았으며,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사렛 이단(행24:5)으로 알았다. 심지어 그 제자들까지도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눅7:16), 정치적 메시야(막10:37행1:6) 쯤으로 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이해는 그의 영이신 성령의 조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3. 빛을 영접하지 않은 백성 참빛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땅인 유대 땅에 태어나셨으나 유대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그들은 사단의 도구로 그런 일들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1:1-13)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를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
1. 말씀으로 선재하신 그리스도 하나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때 세상은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세상은 이 모든 것들을 잃고 영적 어두움에 싸여 버렸다.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가들을 보내 주셨지만 이 어두운 세상이 그 말씀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2. 빛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직접 이 세상에 찾아오셨다. 죽음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기 위하여 빛으로 오셨다(마5:14). 빛은 생명이고 어두움은 죽음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서 죄와 죽음의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오는 자는 다 생명을 얻는다(요10:1020-31).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요3:19,20).
3.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자녀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고 하셨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복음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오신 것이고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 지대이다. 이제는 인간들이 그 앞에 찾아가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요1:14-24)
◈ 원문강해 ◈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거함
본문은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장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의 증거는 그 내용들을 한결같이 현재 시제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그가 증거한 예수님의 절대 신성이 끝날까지 영원한 현재적 사실로 전해질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1. 요한의 증거(14-18절) 1) 구속의 진리 (Kai; oJ lovgo" sa;rx ejgevneto kai; ejskhvnwsen ejn hJmi'n 카이 호 로고스 사륵스 에게네토 카이 에스케노센 엔 헤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4절) '육신'을 뜻하는 사륵스(sa;rx)는 보통 육체적 존재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sw'ma)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즉 전자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하고, 후자는 영혼과 반대되는 몸의 의미로서의 육신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육신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다(히4:15,A.Barnes).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현설(Docetism)을 반반할 수 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8:3) 오셨다고 증거하였다. 한편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뜻하는 에스케노센 엔 헤민(ejskhvnwsen ejn hJmi'n)에서 '우리 가운데'를 뜻하는 엔 헤민(ejn hJmi'n)은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은 '성막을 치다, 진치자, 거주한다'라는 의미의 스케노오(skhnovw)의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인 에스케노센(ejskhvnwsen거하시매)을 사용함으로 성육신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장막에 거하시는 것처럼 거주하셨음을 알게 한다
2) 요한의 외침 ( jIwavnnh" marturei' peri; aujtou ... o{ti prw'tov" mou h\n. plhrwvmato" aujtou' hJmei'" pavnte" ejlavbomen, kai; cavrin ajnti; cavrito": 요안네스 마르튀레이 페리아우투…호티 프로토스 무 엔…플레로마토스 아우투…카린 안티 카리토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5,16절)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계심이라(h\n엔)는 에이미(eijmi;이다)의 미완료 과거로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지속적으로 계셨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증거하여'에 해당하는 마르튀레이(marturei)는 마르튀레오(marturevw)의 현재 직설법 3인칭 단수로서 계속되는 동작을 강조해 주고 있다. 이것은 곧 예수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의미해 주고 있다. 그리고 '충만한'에 해당하는 플레로마토스(plhrwvmato")는 플레로마(plhvrwma)의 소유격 단수로 문자적으로 홍수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 둑이 차고 넘치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진리는 아무리 부어도 모자람이 없고 다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한편 '은혜 위에 은혜'를 뜻하는 카린 안티카리토스(cavrin ajnti; cavrito")는 안티(ajnti)가 주고 '∼위에'라는 뜻보다 '∼대신에'(눅11:11)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됨으로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암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부어지는 은혜의 풍성함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3) 은혜와 진리의 근거 (hJ Cavri" kai; hJ ajlhvqeia dia; jIhsou' Cristou' ejgevneto. ... monogenh;" qeo;" 헤 카리스 카이 헤 알레데이아 디아 예수 크리스투 에게네토…모노게네스 데오스;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독생하신 하나님, 17,18절)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는 것을 가리키는 에게네토(ejgevneto온)는 기노마이(givnomai되다, 발생하다)의 제2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이것은 곧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또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은혜와 진리는 율법처럼 수동적으로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을 통하여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결국 본문은 율법에 근거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째 흔드는 말씀임과 동시에 교회의 근거를 확실히 밝히는 말씀인 것이다. 한편 독생이신 하나님을 뜻하는 모노게네스데오스(monogenh;" qeo;")에서 모노게네스(monogenh;")는 '유일한, 단 하나'를 뜻하는 형용사 모노스(mono")와 '낳다'를 뜻하는 겐나오(gennavw)에서 파생되어 '민족, 자손'을 뜻하는 중성 명사 게노스(gevno")의 합성어로 유일한 혈통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적으로 '유일하게 태어난 하나님'이라는 의미로서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2. 요한의 공적 증거(19-21절) 1) 무리들의 첫 번째 질문 (o{te ajpevsteilan 팺ro;" aujto;n? oiJ jIoudai'oi ejx JIerosoluvmwn iJerei'" kai; Leuivta" ... Su; tiv" ei\_ 호테 아페스테일란 「프로스 아우톤」호이 유다이오이 엑스 예로솔뤼몬 이에레이스 카이 류이타스…쉬 티스 에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19절) '보내어'를 뜻하는 아페스테일란(ajpevsteilan)은 아포스텔로(ajpostevll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 3인칭 복수로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대거 요한에게 와서 질문을 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명실 상부한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와 지도자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 중 일부는 그를 메시야가 아닌가 하고 생가하기도 하였다(눅3:15행13:25).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위험이 되었던 까닭에 이들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한편 '네가 누구냐'(Su; tiv" ei\쉬 티스 에이)라는 말은 세례 요한의 정체뿐 아니라 그에게서 이단적인 요소를 찾아내어 사회적으로 매장할 명분을 찾으려 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2) 요한의 증거 (kai; wJmolovghsen kai; oujk hjrnhvsato, kai; wJmolovghsen o{ti jEgw; oujk eijmi; oJ Cristov". 카이 호몰로게센 카이 우크 에르네사토 카이 호몰로게센 호티 에고 우크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0절) 본문은 접속사 카이(kai)를 세 번에 걸쳐 병렬적으로 나열함으로 세례 요한의 진술이 진지하면서도 솔직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드러내어 말하고'를 뜻하는 호몰로게센(wJmolovghsen)은 '고백하다'를 뜻하는 호몰로게오(wJmolovgh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로서 그의 고백이 믿음의 확신으로 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곧 그가 자신의 사명과 임무를 잊지 않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요한의 고백 중 '나는'( jEgw;에고)이란 말이 언급된 것은 '아니라'(oujk eijmi우크 에이미)의 에이미(eijmi나는 ∼이다)가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덧붙여져 언급된 말로서 그 의미를 강조하는데 있다.
3) 무리들의 두 번째 질문 (Suv jHliva" ei\_ kai; levgei, Oujk eijmiv. JO profhvth" ei\ suv_ kai; ajpekrivqh, Ou[. 쉬 엘리 아스 에이 카이 레케이 우크 에이미 호 프로페테스 에이 쉬 카이 아페크리데 우; 네가 엘리야냐 가뢰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21절) 종교 지도자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답변은 '나는 아니라'를 뜻하는 우크 에이미(Oujk eijmi)인데, 이는 20절에서 대답한 '나는 아니다'를 뜻하는 우크 에이미 에고( jEgw;)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즉 20절에서처럼 강조형인 에고( jEgw;)를 사용하여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강한 부정은 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종교 지도자들이 인식한 엘리야가 아니라는 표현인 것 뿐이다. 이는 간결하고 무뚝뚝한 부인이기도 하다(A.T.Robertson). 사실 세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적 사명을 담당하는 자로서 예수께서도 인정을 하셨다(마11:1417:12).
3. 요한의 자기 증거(22-24절) 1) 무리들의 세 번째 질문 (i{na ajpovkrisin dw'men toi'" pevmyasin hJma'": 히나 아포크리신 도멘 토이스 펨파신 휘마스;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22절) 본문은 요한에게 찾아온 무리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대답하게'에 해당하는 아포크리신(ajpovkrisin)은 아포크리시(ajpovkrisi)의 여성 목적격으로 이들이 요한의 답변에서 만족할 만한 말을 듣지 못하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권위가 상당히 위축된 당시 유대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의 하수인들로서 요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2) 광야에서 외치는 자 ( jEgw; fwnh; bow'nto" ejn th'/ ejrhvmw/, Eujquvnate th;n oJdo;n kurivou, 에고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유뒤나테 덴 호돈 퀴리우;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23절) '외치는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보온토스(fwnh; bow'nto")는 서로 관사 없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일종의 감탄문으로 이사야가 했던 말을 요한이 직접 자신의 입을 통하여 대화체의 말로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소리'를 뜻하는 보온토스(bow'nto")는 원래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요한의 소리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본문과 관련하여 마태, 마가, 누가 등은 그들 자신이 본문의 내용을 사40:3의 인용으로서 세례 요한과 그의 사역에 관련시켜 언급하고 있다(마3:3막1:3눅3:4).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는 세례 요한 자신이 직접 이 말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한편 본문은 오늘날 참전도자는 권세자에게 아부하며 이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로 아첨하는 자가 아니라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곳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해 하는 심령을 찾아가 위로하는 복음의 열정과 불타는 사명감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3) 무리들의 정체 (Kai; ajpestalmevnoi h\san ejk tw'n Farisaivwn. 카이 아페스칼메모이 예산 에크 톤 파리 사이온;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24절) '보낸'에 해당하는 아페스탈메노이(ajpestalmevnoi)는 '파송하다'를 뜻하는 아포스텔로(ajpestallw)의 완료 부정사 중간태로서 이들을 보낸 자들의 권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당시 사제 직분의 대부분은 사두개인이 맡고 있었지만 그 일부만 바리새인이 맡았다. 요한에게 온 무리들은 바로 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파송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었음에 틀림없다(Hendriksen, Bernard).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말씀이 뛰어난 능력(14-18절)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oj lovgo" savrx ejgevneto호 로고스 사륵스 에게네토)라는 문구는 요한이 볼 때, 로고스가 이미 천적 인간이었기에 '인간'(a]nqrwpo"안드로포스)이라는 단어를 회피하였다(O.Cullmann). 볼트만은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과 신화와의 유사성을 지적하였다(R.Bultmann). '우리가 보니'(ejqeasameqa에데아사메다)에서 '우리'는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 증인들을 의미한다(Raymond, E.Brown). '보니'의 대상은 도성인신하신 예수라기보다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언급한다고 하는 주장(DeAusejo)도 있다. 15절의 '외쳐'(kekragen케크라겐)는 완료형으로 현재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이는 요한의 증거가 현재적 의미를 지녔음을 암시해 준다(Lucian).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라는 구문은 두 가지를 상기시키고 있는데, 첫째, 모세를 통한 옛계약의 은혜는 복음의 은혜로 바뀌어졌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개의 등급으로 적용될 수도 없다(C.K.Barrett). 둘째, 헬라어의 헬라어의 배후에는 아람어의 언어적 유희(Word Play)가 내포되어 있다. 즉 히스다 할라카 히수다(ar(w)s*lh arsj)에서 '수치'(arsj)의 자리에 '은혜'(ar(w)sj)라는 단어를 썼는데 번역자가 이를 감지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M.Black) 17절의 '은혜와 진리'의 강조점은 모세와 그리스도, 율법과 복음 사이의 대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은혜는 율법과 대립되는 것으로 바울의 표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J.Jervell). 17절을 편집적으로 이해하는 비평가들은 18절을 원래의 시적 표현으로 간주한다(De Ausejo, Bernard). '독생하신 하나님'(monogenh;"모노게네스 데오스)에 대하여서는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① 독생자 하나님(God the only son)이라는 견해(Irenaeus, Clement of Alexandria, Origen), ② 유일한 그 아들(the son, the only one)이라는 견해(Athanasius, Chrysostom, Latin Fathers), ③ 그유일한 아들(the only son)이라는 견해들(Tatian, Origen, Epiphanius)이다.
2. 세례 요한의 첫 번째 질문(19-24절) 19절의 '유대인들'은 예수와 세례 요한에게 대항하고 있는 유대교와 공적인 지도자들을 지칭할 때 요한이 흔히 사용하는 칭호이다(C.K.Barrett). 또한 유대인들은 종교적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으며, 요한이 이 칭호로 갈리리 사람들과 유대에 사는 사람을 구분하고자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C.Dekker). 혹자는 요한이 이 세상을 대표하기 위해 이 칭호를 사용한데 대한 역사적인 배경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Schnackenburg). 20절에 나타나고 있는 중복 어구가 세 번씩이나 긍정(드러내어 말하고), 부정(숨기지 아니하니), 다시 긍정(드러내어 하는 말)으로 연결된 사실은 아마도 요한의 편집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Raymond, E.Brown). 이에 반하여 이 문체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장중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주장도 있다(C.K.Barrett).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며, 전에 메시야였다는 주장을 강하게 부정하기 위하여 21절이 강조되어 있다(George, R.Beasley-Murray). 당시 요한의 제자들 중 하나가 세례 요한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O.Cullmann). 21절에서 요한은 묵시 문학적인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전승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자유롭게 다루고 있다(J.T.S. Series, 이에 반대 입장:C.H.Dodd).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세례자를 엘리야로 선언하고 있으나(마11:41막9:13), 요한복음서에서는 이 명령을 부인하고 있다(C.F.D.Moule). 요한은 아마도 공관복음 이전의 기독교 신앙 단계로 묵시 문학적 필요성에 따라 예수보다 먼저 온 자 중에서 엘리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인 것 같다(C.K.Barrett). '선지자(oJ profhvth"호 프로페테스)는 세례 요한이 이미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고(20절), 여기서 그리스도를 지칭하지 않았다(C.K.Barrett). 유대인들도 신18장에나오는 '선지자'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간혹 사용한 경우에는 선지자와 그리스도를 같이 여기지 않았다(.L.Morris). 이 용어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것은 사마리아인의 자료들에서 비롯되었다( F.J.Foakes Jackson, Kirsopp Lake). 그러나 비평가들은 요6:14의 선지자와 본문의 선지자를 동일시하여 그리스도로 이해하였다(Hahn). 23절의 세례 요한은 이미 정평이 난 어떤 인물과도 동일하지 않은 단순한 소리일 뿐이다(O.Cullmann). 특히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예언적 목소리를 발했다는 사실은 70인역(LXX)이 신약에 보다 적합하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Raymond, E.Brown).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상징 어법은 이방 신상을 경외하는 일과 군주를 방문하기 위하여 행진을 준비한다는 데에서 출원하고 있다(Grenfell, Hunt). 또한 B.C.3세기 때에 궁전 수비대의 우두머리의 방문을 준비하는 것으로 프톨레미 파피루스(Ptolemaic Papyrus)에 묘사되어 있다(Garofalo). 혹자는 이 동사가 인종적 또는 도덕적 의미로 당시에 자주 사용된 점에 요한이 매혹되어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E.D. Freed). 24절은 바리새파에서 보냄받았다고 하지만, 19절에서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서 보냄받았다고 소개되어 있기에 난해한 구문 중 하나이다(L.Morris), 이는 요한이 새로운 그룹을 도입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는 주장과(Bernard)과 일부 제사장들은 바리새파인들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Lagrange), 이 삽입 구절은 요한이 A.D.70년 이전의 유대교와 친숙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심각한 의구심을 제시하고 있다(C.K.Barret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육신이 되신 말씀(14절) 14절에서 대명사들이 처음으로 객관적 서술의 3인칭 그들에서 주관적 고백의 1인칭 우리로 바뀐다(요21:24요일1:1-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역설은 이 구절에 이르러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W.E.Hull). 신약의 어느 곳에서보다도 이 구절은 니케아 신조(A.D.325년)와 칼케돈 정의에서 공식화된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의 근거를 제공한다(F.F.Bruce, J.N.D.Kelly). '영광'은 성경의 신학적 어휘에서 가장 풍부한 단어 중의 하나로, 주로 권세를 잡고 계신 하나님의 가시적인 표현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위엄의 초점을 맞춘 임재로 빛난다. 그의 지상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목적과 신망의 새로운 깨달음으로 그들을 불러모으신 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셨다. '독생자'(monogenhv"모노게네스, D.Moody)는 '외아들'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아들 관계는 보통 출생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일차적 의미는 '그 종류의 단 하나'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은 인간으로서 독특하신 말씀인 하나님의 계시가 결여된 것이 아니라 자비, 은혜, 인자, 진실(출34:6,7시85:9,1089:14;108:4)이 충만했다는 것을 뜻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한없는 관대하심 속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것으로 인간이 받을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이다.
2. 요한의 증거(15-18절) 15절의 '나보다 앞선 것'은 특별히 강조적 용어로 표현되었다. 요한은 단순히 '그가 내 앞에 있었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나와 관계되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하셨다'를 말하는 것이다. 즉 '그는 나보다 절대적 우선권이 있다' 내지는 이것보다 더 나은 해석으로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는 이미 있었다'를 뜻하는 것이다(F.F.Bruce).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는 문자적으로 '∼과 교환으로', 혹은 '∼에 의해, 대신으로'이다(롬1:17고후3:18). 분명히 하나님은 항상 은혜의 하나님이시었다(W.E.Hull). 17절은 16절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구약시대에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시었지만, 반면에 신약 시대에 그의 변함없으신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주시었다. 그 차이점은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주는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내용의 본질에 놓여 있다(W.E.Hull). 18절의 '아버지의 품'에 대한 언급은 1절을 상기시킨다. 이 두 병행 구절 사이에서 예수님의 지상의 생애가 묘사되었기 때문에 본 구절은 구속의 포물선을 완성하신 높아지신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이제는 영광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 예수의 생애는 신적 숨기심의 독특한 드러남, 눈에 보이는 주석, 아버지를 나타내신 말씀이었다(요12:4514:9, W.E.Hull).
3. 광야에 외치는 자(19-24절) 19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전체를 말하지 않고 하나의 구체적인 특수 집단, 예루살렘의 종교적 기성 집단을 말한다. 그들은 산헤드린 내지는 성전 당국자들이었다(F.F.Bruce). 20절은 마10:32,33을 상기시킨다. 요한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자신을 부인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긍정적 확언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점차적으로 강조적이 되어 자기를 부인한다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21절)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확고하게 자신을 종말에 기대되는 종말론적인 인물과 결부시키지 않는다. 많은 유대인들은 다윗의 기름부음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사9:2-711:1-9)뿐만 아니라 엘리야(말4:5,6)와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5,18)를 열렬히 고대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전이나 혹은 그사이에 다시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다(막8:289:4, W.E.Hull). 21절에서 요한은 자신을 메시야급에 속하는 세 인물과 어떤 연관짓기를 거절했다(W.E.Hull).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는 요한의 응답은 예수님의 요한에 대한 대답에 비추어 볼 때 (마17:11-13), 우리에게 몇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어떤 면에서 요한이 엘리야라는 말이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가 엘리야가 아니라는 말은 개인이 세상에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가 엘리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의 부인은 이런 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엘리야의 능력과 심령으로 와서 말라기가 예언한 대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엘리야이다(,J.W.Stallings). 분명히 요한과 공관복음 저자들 사이에, 그리스도와 세례자 사이에 어떤 모순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L.Morris). 22절의 '누구냐'라는 질문들에 대하여 그는 계속하여 사람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떼려하였다. 이와 같은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 이러한 칭호들이 지칭하는 궁극적인 신망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W.E.Hull). 요한은 분명히 '종말론적'인물이었다. 그는 오실 자에 의해 이루어질 임박한 심판을 전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인기있는 종말론적인 어떤 인물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거절하였다(.F.F.Bruce). 23절에서 질문자들에 대해 요한이 말한 대답의 의도는 '만일 당신들이 선지자들의 신탁 가운데 내가 예언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당신들은 광야에서 주의 길의 예비를 요청하는 목소리라고 나를 확인할 것이다'를 나타내는 것이다F.F.Bruce). 그는 선지자나 메시야 같은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단지 소리이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을 말하는 것만 있을 뿐이다(L.Morris). 세례자의 한 가지 바람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는 것이었다(R.Schnackenburg). 24절의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들'은 그들 모두가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부분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F.F.Bruce, L.Morris, R.Schnackenburg).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필로의 로고스론
요한복음서의 저자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헬라주의적 유대주의 종교 철학자 필로는 그의 저서에서 로고스를 1,300회 이상 사용하고 있다. 그는 유대교와 헬라 철학을 연결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로고스 배경에는 유대교적 맥락과 헬라주의적인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그가 전생애를 알레산드리아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그의 저작에서 발견하는 일종의 종교적 고찰이 동시대의 특징적인 모습이었다는 것을 거의 확실히 한다.
1. 로고스의 인격성 필로의 로고스는 인격성이 모호하다. 그의 창조적 로고스는 창조자가 사용한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도구이다. 비록 그가 로고스에게 하나님의 형상, 중보자, 대제사장, 하나님의 장자, 천사장, 두 번째 하나님, 왕 등의 인격적 명칭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분히 구약의 인물들과 알레고리적 동일시에 불과한 것이다.
2. 로고스의 선재(先在)성 필로에게서는 로고스의 선재가 모호하다. 그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비록 '가장 오래된 최연장자'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해도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선재는 아니다.
3. 로고스의 구원론 요한복음의 서언은 로고스에서 생명과 빛 사이에 연결의 교리가 있다. 그러나 필로에게서는 구원론이 없기 때문에 그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4. 로고스의 성육신론 필로에게는 성육신의 교리가 없다. 그것에 관한 그의 사고가 희랍적인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한하고 불변하는 하나님과 물질적인 세계와의 연결을 로고스로 보았다. 그러나 요한의 해답이 훨씬 더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필로는 그 자신의 원리에 의해서 그 문제의 그리스도인적인 해답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필로는 말하기를 "세 종류의 삶이 있는데, '신적 삶'과 '탄생' 그리고 '첫째와 둘째의 혼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적 삶'은 우리에게 전승되지도 않았고, 멀리서부터 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요한의 이성은 필로의 로고스 개념이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라는 요한의 진술은 필로가 사색을 통해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간격을 성육신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었다.
은혜의 개념과 그 사례(1:14-24) ◈ 세계배경 문화사 ◈
일반적으로 '은혜'는 친절한 태도 및 찬성, 또는 호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은혜의 개념은 철학과 종교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일반 사회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을 받았을 경우에 은혜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은혜가 종교에서 사용되었을 때는 '일방적으로 베풀다'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근동/유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말에서 이 단어는 '호감' 또는 '유쾌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나, 호의나 친절에 대한 고마움의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으며 따라서 '감사'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렇게 감사의 의미로 쓰인 경우는 이집트의 파피루스나 기타 여러 곳에서도 '신들에게 감사'라는 글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신은 인간에게 은혜를 내리는 근원이었다. 은혜란 인간 자신은 성취할 수 없는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특별한 뜻으로서 신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무엇보다도 거저주는 선물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코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도 아니며, 어떤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유대인은 은혜간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며, 믿음과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신의 은혜란 신이 인간에게 접근해 올 때의 인격적이고 자비스러운 신을 묘사하는 표현 방법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이집트 : 이집트에서 '은혜'라는 말은 나일 강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쓰였다. 그것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은혜)'이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이집트인의 정치·사회·종교·학문·예술·교역 등 모든 분야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이집트는 지리적으로 연안 양쪽의 좁은 지대를 제외하고는 주위가 황막한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일 강은 이집트의 식수원으로서, 농사지을 수 있는 기름진 땅을 제공했으며, 아울러 정기적인 나일 강의 범람은 치수 관개(治水灌漑)와 토목 공사를 통해 강력한 전제왕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은혜라는 개념이 나일 강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서양/그리스 :그리스인들은 자기들 주위에 많은 신들이 존재하며, 인간의 여러 가지 소망이나 소원·목적을 성취하려면 신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신들의 존재를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인식했으며, 신들이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까이 존재한다고 여기면서 의지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의 모든 공식적 행사에는 신들에게 기도하고 원조(은혜)를 바라는 절차가 끼여 있었다. 결혼이나 새로 태어난 아기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가족 구성원이 죽어 장례를 치루는 경우에 그런 절차를 밟았다. 또한 신의 승인(은혜)이 없으면 농사도 잘되지 않으며, 육지나 바다를 통한 해외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줌으로써 인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양/한국 : 한국에서는 은혜와 관련하여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구렁이에게 잡혀 죽게 된 까치 새끼들을 구해 주었는데, 후에 그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에 까치들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어 자기를 구해 준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이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창6:8), 그리스도의 은혜(고후8:9), 구원의 은혜(딛2:11)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 없이 주시는 것이며(시84:11), 그리스도의 은혜는 자기 희생으로 인한(고후8:9) 은혜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런 은혜를 풍성하고 공평하게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 은혜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성도에 대한 세상의 질문(1:14-24)
사람은 무리 가운데 자신의 주체성과 정체성(identity)을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 주체성의 확신은 그 사람의 활동과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해줄 것이다. 세례 요한의 정체를 유대인들이 묻듯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성도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1. 너는 누구인가? '네가 누구나?' (19절)는 질문에 요한은 '숨기지 아니하며'(20절) 대답했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네가 누구냐고 묻는다. 이때 성도들은 떳떳하게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대답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대답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를 각오하고 자신의 본질을 밝혀야 한다.
2. 너는 무엇인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그 선지자냐'(21절)고 물었다. 그의 사명,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은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너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라고 끝없는 질문을 한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아니면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우리는 늘 자신의 삶의 사명과 의무를 미리 점검하며 '나는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3.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2절) 고 물었다. 세상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다. 특히 성도를 시험하려 할 때 사단이 곧잘 던지는 질문이다. 자신에 대해 과대 평가를 하거나, 과소 평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진정한 목사인가? 진정한 성도인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가? 라고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단과 세상의 질문에 믿음으로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하겠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성육신의 은혜(1:14-24)
우리 인간의 역사에 가장 큰 전무후무한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신이 인간으로 오사 이 세상에서 삼십여 년간을 지내고 가신 일처럼 경이스러운 일은 없다. 본문은 이러한 성육신의 은혜적인 의미를 증언해 주고 있다.
1.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은혜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절). 이 세상은 죄와 불완전과 불의와 모순으로 얼룩져 있다. 그와 같은 세상에 절대 거룩하시고 완전무흠하신 하나님께서 온전한 한 인간으로 오셔서 함께 생활하셨다는 사실 그 한가지만으로도 인간들에게는 큰 은혜다. 구약 시대에 성막과 성전에 한시적으로 임재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의 은혜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자 성육신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의 인격과 영광을 보여 주신 은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14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절). 어떤 종교의 비의로도, 또 철학적 탐구로도 알 수 없었던 창조주와 절대자 하나님을 볼 수도 또 온전히 알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과 영광을 온전히 보여 주시고자 몸소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이라고 했듯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행동은 곧 하나님의 인격과 그 행동이시다.
3. 율법을 초월한 구원진리를 주신 은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절)고 했다. 율법대로라면 범죄한 자들은 모두 죄값을 스스로 치루고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죄값을 자신의 몸으로 대속하고자 이 땅에 한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그것은 구속주의 모습이요, 은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29절)고 세례 요한이 증언한 것이 그 의미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또 다른 증거(요1:25-34)
◈ 원문강해 ◈
어린양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본문은 계속되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말하고 있다. 전반부(26,27절)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증언이고, 후반부(29-34절)는 오신 메시야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1. 요한의 고백(25-28절) 1) 무리들의 네 번째 질문 (Tiv ou\n baptivzei" eij su; oujk ei\ oJ Cristo;" oujde; jHliva" oujde; oJ profhvth"_ 티 운밥티제이스 에이 쉬 우크 에이 호 크리스토스 우데 엘리아스 우데 호 프로페테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데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25절) '세례주느냐'에 해당하는 밥티제이스(baptivzei")는 '씻다, 세례를 주다'를 뜻하는 밥티조(baptivzw)의 제1부정 과거 능동태 직설법 2인칭 단수이다. 그러나 '아니다'를 뜻하는 부정의 전치사 우크(oujk)와 접속하여 부정의 의문형을 만들고 있다. 즉 너는 세례를 줄 자격이 없지 않느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당시 정결과 성결의 의식을 수행하는 자는 오직 메시야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들이 하고 있었던 까닭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2) 요한의 증언 (jEgw; baptivzw ejn u{dati: mevso" uJmw'n e{sthken o}n uJmei'" oujk oi[date, 에고 밥티조엔 휘다티 메소스 휘몬 헤스테겐 혼 휘메이스 우크 오이다테;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6절) '나는'( jEgw;에고)이란 1인칭 대명사는 '세례를 주거니와'(baptivzw밥티조)가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덧붙혀 언급된 말로 그 의미를 강조해 주고 있다. 요한이 베푼 물 세례는 예수께서 행하실 불과 성령의 세례(마3:11막1:8눅3:16)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요한의 세례는 백성들의 심령을 깨끗게 하는 회개의 세례이기는 하였으나 진정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세례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의 길은 예비하는 요한의 사역에 대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물로'(ejn u{dati엔 휘다티)에서 많은 영역본들은 엔(ejn)을 수단으로 보아 본문을 한글 개역성경처럼 번역하나, NIV 난문주에는 엔(ejn)을 문자 그대로'∼안에'로 보아 '물 안에서'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이라는 의미의 휘메이스 우크 오이다테(uJmei'" oujk oi[date)는 10절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kovsmo" aujto;n oujk e[gnw코스모스 아우톤 우크에그노)와 의미상 동형을 이루고 있다. 즉 요한을 메시야로 착각하는 무리들의 영적 무지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들을 보낸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함 또한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지'(oi[date오이다테)란 현재 완료로서 부정사 우크(oujk못하는)와 지금 알지 못하고 있다는 현재성과 지속성을 함축하고 있다. 실로 이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로, 세상에 속한 자들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암시해 주고 있다(요8:44마3:7눅3:7).
3) 요한의 한계 (ou| oujk eijmi; 팫jgw;?]]]a[xio" i{na luvsw aujtou' to;n iJmavnta tou' uJpodhvmato". Tau'ta ejn Bhqaniva/ 후 우크 에이미 「에고」악시오스 히나 뤼소 아우투 톤 히만타 투 휘포데마토스 타우타 엔 베다니아;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 일은…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27,28절). '신들메'에 해당하는 휘포데마토스(uJpodhvmato")는 당시 유대인들이 도보 여행시 신었던 신발의 끈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풀다'를 뜻하는 뤼소(luvsw)는 '자유롭게 하다'를 뜻하는 뤼오(luvw)의 제1부정 과거 능동태 1인칭 단수로서 '내가 푼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곧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신발의 끈을 푸는 것을 노예들의 임무인데, 요한은 바로 그 노예의 직분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ejgw;?에고)이라는 1인칭 대명사는 강조적인 뜻으로 덧붙혀 언급되었다. 한편 '이 일은…에서 된 일이니라'를 뜻하는 타우타 엔(Tau'ta ejn)은 단순히 장소를 언급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지금처럼 이루어진 일은 저자인 요한에게 있어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과 아울러 이 글이 당시 유대의 상황과 지리에 익숙한 자의 기록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요한의 증언(29-31절) 1) 하나님의 어린양 ( jIhsou'n ejrcovmenon pro;" aujtovn ... [Ide oJ ajmno;" tou' qeou' oJ ai[rwn th;n aJmartivan tou' kovsmou. 예순 에르코메논 프로스 아우톤…이데호 암노스 투 데우 호 아이론 덴 하마르티안 투 코스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29절) '나아오심'에 해당하는 에르코메논(ejrcovmenon)은 '오다'를 뜻하는 엘코마이(e[rcomai)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나아오시는 분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말은 현재 시제로 표현하여 이 일이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말하고 있다. '보라'를 뜻하는 이데( [Ide)는 감탄사로서 이어지는 말과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는 문장을 종결하거나 서술하는 동사가 없다. 따라서 본문은 죄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대립 관계를 보여 주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러한 관계를 화목케 할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있다(Lenski). 한편 '어린양'에 해당하는 암노스(ajmno;")에 대하여 혹자는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상번제로 드리는 어린 양(출29:38), 속죄제로 드리는 어린 양(레4:32)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다(Reynolds, Barrett). 하지만 이 말은 고난받는 종에 대한 사53:7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구속 사역을 이루실 메시야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라고 보기도 한다(Bernard). 이는 행 8:32에 인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구약의 율법적 배경하에서 예시된 죄를 짊어지고 속죄하는 어린양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유대인들은 고난받는 메시야를 기대하지 않았으며(요12:39),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러한 것처럼 보였다(막9:32눅24:21). 그러나 성령의 사람 시므온은 고난의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으며(눅2:35). 본문에서 세례 요한 또한 고난받는 종으로서 메시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메시야의 예비자로서 세례 요한이 성령과 말씀에 따라(눅1:41,66,80:3:2) 그 사역을 충실히 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지고 가는'(ai[rwn아이론)은 현재 분사로서 지고 가시는 행위를 돋보이게 하는 말이되 그 현재성과 계속성을 함축한다.
2) 예수의 대한 증언 ( jOpivsw mou e[rcetai ajnh;r o}" e[mprosqevn mou gevgonen, o{ti prw'tov" mou h\n. 오피소 무 에르케타이 아네르 호스 엠프로스텐 무 게고넨 호티 프로토스 무 엔;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30절) '내 뒤에 오는 사람'에서 사람에 해당하는 명사 아네르(ajnh;r)는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는 안드로포스(avndropo")와는 달리 남성을 의미하고 있다. 이 말은 '우두머리'라는 의미를 지니며 장차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가 되실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한편 '계심이라'를 뜻하는 엔(h\n)은 에이미(eijmiv이다, 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 과거로서 같은 의미인 에이미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인 에스티(ejstiv가리킴이라)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전자가 영원 전부터 지속적으로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후자는 이미 이 땅으로 성육신하신 후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지금 계시는 (계속성)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요한의 이무 (kajgw; oujk h[/dein aujtovn, ajll j i{na fanerwqh'/ tw'/ jIsrah;l dia; tou'to h\lqon ejgw; ejn u{dati baptivzwn. 카고 우크 에데인 아우톤 알르 히나 파네로데 토 이스라엘 디아 투토 엘돈 에고 엔휘다티 밥티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1절) '나도'에 해당하는 카고(kajgw)는 카이(kai;)와 에고(ejgw;)의 합성어로서 '나 역시도'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에고(ejgw;)로 된 '나도'와 '내가'는 강조적으로 쓰였다. 그리고 '알지'에 해당하는 에데인(h[/dein)은 '알리다, 알다'를 뜻하는 오이다(oi|da)의 과거 완료 직설법 1인칭 단수인데, 이는 경험에 의한 지식을 뜻하는 기노스코(ginwvskw)와는 달리 주로 영적인 앎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도 처음에는 일반 사람과 같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나중에야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3. 성령의 사람인 그리스도(32-34절) 1) 예수께 임한 성령 (to; pneu'ma katabai'non wJ" peristera;n ejx oujranou', kai; e[meinen ejp j aujtovn: 토 프뉴마 카타바이는 호스 페리스테란 엑스 우리누 카이 에메이넨 에프 아우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2절). '하늘'을 뜻하는 우라누(oujranou)는 일반적으로 땅과 대치되는 창공과 우주를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처를 의미하고 있다(전5:2마5:16). 따라서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듯이 성령도 함께 계셨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리스도에게 임한 것은 죄에 대하여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과 그의 사역을 시사해 주고 있다(마10:16히4:15눅3:22). 공관복음에는 이러한 성령 강림을 본 주체가 예수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마3:13-17막1:9,10눅3:21,22), 본문에는 세례 요한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이미 독자들이 예수의 세례에 관하여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세례의 주체자를 세례 요한으로 옮겼다고 주장한다(Barrett). 그리고 불트만(Bultmann)은 이 사건이 예수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신분을 밝혀 주는 요한에게 그 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 요한의 고백 (kajgw; oujk h[/dein aujtovn, ajll j oJ pevmya" me baptivzein ejn u{dati ejkei'nov" moi ei\pen, 카고 우크 에데인 아우톤 알르 호 펩사스 메 밥티제인 엔 휘다티 에케이노스 모이 에이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33a절) '알지 못하였으나'를 뜻하는 우크 에데인(oujk h[/dein)은 '알다'를 뜻하는 오이다(oi|da)에서 파생된 과거 완료 직설법 능동태 1인칭 단수로 '과거에 알지 못하였다'는 뜻이며, 이는 곧 과거부터 알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알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부정을 나타내는 우크(oujk)와 합쳐져 세례 요한도 당시의 유대인처럼 예수를 메시야로 알지 못하였다가 지금 성령의 강림을 보고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3)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 jEf j o}n a]n i[dh/" to; pneu'ma katabai'non kai; mevnon ejp j aujtovn, ou|tov" ejstin oJ baptivzwn ejn pneuvmati aJgivw/. kajgw; eJwvraka, kai; memartuvrhka 에프 혼 안이데스 프뉴마 카다바이논 카이 메논 에프 아우톤 후토스 에스틴 호 밥티존 엔 프튜마티 하기오 카고 헤오라카 카이 메마르퀴레카;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 33b,34절). '그가'를 뜻하는 후토스(ou|tov")는 지시 대명사 남성 단수 주격으로 '이 사람은'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거룩한'을 뜻하는 하기오(aJgivw/)는 '성도, 천사'를 뜻하는 명사 하기오스(aJgivw/")의 중성 단수 여격으로 앞에 있는 명사 프튜마티(pneuvmati바람,기운,생명)를 한정하는 용법으로 사용되어 '거룩한, 신성한'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 사람은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는 자이다'라는 의미이다. 실로 세례는 영적인 정결의 필연성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다. 본문에서 '∼으로'(ejn엔)은 26절처럼 수단으로 볼 수도 있고, NIV 난외주에서처럼 '∼안에서'라고 할 수도 있다. 한편 '∼이심을'(ejstin)은 에이미(eijmiv이다)의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서 현재의 계속성을 함축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계속되는 요한의 증거는 공관복음서의 자료들을 수정시켰는데, 그 이유는 세례자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에 제동을 걸기 위함이었다(F.E.William). 특히 본문을 통해서 요한은 예수가 비록 시간상으로는 세례자의 뒤를 따르고 있지만, 그 사람은 실제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령을 소유한 자로서 자기보다 앞선 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C.K.Barrett, B.M.F. Van Iersel).
1. 요한과 바리새인들(25-28절) 25절의 '또 물어 가로되' (kaiv hjrwvthsan카이 에로테산)란 구문은 21절의 표현과 동일하며, 이는 요한의 편집상 중복된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Raymond, E.Brown). '세례'는 당시 유대주의에 새로운 행동이 아니었고, 타종교에서 회심하여 인준받는 공식적인 의식이었다(L.Morris). 이는 정결에 대한 상징적인 의식으로서 메시야 왕국에 들어 가기 위한 표시로도 간주되었다(J.Bernard). 겔36:25에 의하면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정결케 할 것이며'라고 언급되었는데, 이는 예언적인 말인 것이다(슥13:1). 이에 반하여 개종자의 세례는 이 시기 만큼 오래 전부터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다(G.F.Moore, T.W.Manson). 혹자는 본문의 요한은 레위적 특징을 가진 종말주의자였다고 생각했으며, 아마도 요한은 레위적 반차를 쫓는 메시야를 대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E.Stauffer). 26,27절의 히나(i}ua)는 '선함' 또는 '명령하다'라는 단어가 선행할 때에만 그 문장에서 사용되나, '악하다' 또는 '금지하다'와 같은 동사와는 결코 함께 사용되지 않는다(Abbort). 요한은 이 구절을 직설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의 문장의 이면에 아람어의 토대가 깔려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Burney). 28절의 '베나니'(bhqaniva메다니아)에 대해서는 ① 이는 예루살렘 근방에 위치한 도시가 아니고,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요단 강 건너편의 지역이라고 주장한다(Raymond, E.Brown, Heracleon). ②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까이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이곳은 예루살렘성에 인접한 곳이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P.Parker, H.Greenlee). ③ 요단 강 건너편에는 베다니란 곳이 없기 때문에 이를 '베다바라(Bathabara)'라고 판독해야 하며, 이 도시는 탈무드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Origen). ④ 오리겐의 지적은 오보(misinformed)에 기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D.Potter). ⑤ 베다니(Bethany)는 바타네아(Batanaea)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W.H.Brownlee)는 등 여러 가지 입장이 분분하다.
2. 세례 요한과 예수(29-34절) 29절이 구약성경에 근원을 두고 있는 점은 확실하지만 그 배경이 과연 무엇인지는 불투명하다(C.K.Barrett). 한 마리의 어린 양이 과연 메시야적 칭호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불확실하나, 요한이 예수를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확실하며, 이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에 대한 암시를 보여 주고 있다(G.Vermes, G.Delling). 또한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주의 종에 대하여는 본 절에서 아람어를 잘못 오역하여 명확하지 않은 문맥을 만들어 버렸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Burney, J.Jeremias). '어린 양'(ajmno"암노스)에 대한 아람어는 임메라(h;rma)로서 이는 '어린 양'을 의미하기도 하며, '말씀'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요한은 예수가 어린양이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선포를 하고 있는 것이다(A.Negoitsa, C.Daniel). 그러나 비록 임메라가 흔히 '말'(Speech)을 의미했다고 할지라도 그 단어가 곧 '말씀'(word)을 의미했을 것 같지는 않다(B.Gartner). 유월절 희생물에 관한 일반적인 언어는 어린 양이 아니라 '파스카'(Pascha)였다는 주장이 있으나(G.Buchanan, Gray), 유월절은 항상 희생 개념이 들어 있어야 하며, 종의 사상이 주된 개념이라는 주장도 있고(Vincent, Taylor), 사53장은기독교 이전 시대에는 메시야 사상과 전혀 연관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Rowley, H.W.Rovinson). 30절 '이 사람을 가리켜'(uJper; ou|휘페르후)는 '그분을 위하여'(Bernard)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그 사람 쪽으로'(Hyper)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다. 31절에서 저자인 요한이 이와 같은 구문을 구성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점은 이 복음서 배후에 아람어로 된 전승이 들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으며, 특히 연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L.morris). 32절의 '내가 보매'(teqevamai테데아마이)는 완료 시제로서 예수의 세례에서 발생한 성령의 함께하심이 아직도 유효하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 같다(Raymond, E.Brown). '비둘기 같이'(uoJ" peristera;n호스 페리스테란)에서 비둘기가 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첫째 견해는 창1:2에서 성령이 수면 위로 운행하시는 것은 새가 물 위로 날아가는 것을 연상케 하는데(신32:12절), 이러한 관찰은 유대교 전통에서 비롯되었다(Bernard). 두 번째 견해는 비둘기의 상징은 성령의 열매로서의 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A.Feuillet). 33절까지 요한이 예수를 인간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였는데(Chrysostom),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아직 어렸을 때에 그의 노부모가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엣센파(Essenes)에 의해 양육되었기 때문이었다(Godet, Brounlee, Josephus). 이에 반하여, 세례 요한이 무지했던 것은 성육신 이전의 예수에 대한 점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Origen). 34절은 저자 요한이 기독론 전체를 하나의 단순한 장면으로 편집하여 보여 주고 있으며, 이는 그의 천부적인 편집 소질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구절이다(Brown). 여기에서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재강조하며, 하나님 아들은 기적의 사역자이며 카리스마적인 능력을 가진 자로 적용되고 있다(Vernes, Hengel).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물로 세례주는 요한(25-28절) 25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 알고 싶어했다. 세례는 다른 종교에서 유대교로의 전향을 인정하는 정규적인 의식으로서 이방 문화의 오염의 제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적용되는 이유를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유대인에게 적용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방인들은 분명히 부정했고 정결의 필요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L.Morris).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화는 메시야 도래의 종말론적 표징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52:15겔36:25슥13:1에 근거하여 메시야와 그의 사자들이 세례를 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자신이 메시야, 엘리야, 그 선지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F.F.Bruce). 그렇다면 무슨 권세로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주는지 그들은 이유를 묻는 것이다. 요한은 분명히 그의 세례에 대하여 종말론적 중요성을 부여한다(마3:5-12,J.W.Stallings). 26절의 강조적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는 정결 의식의 한 방편으로 묘사되어진 것으로 보인다(겔36:25슥13:1). 27절에서 요한은 자신을 신들메를 푸는 자의 가치도 없다고 말한다(W.E.Hull). 그는 비교를 통하여 이 신비스러운 인물의 서열을 강조한다. 유대인 가운데 적용되는 말은 제자는 선생님을 종이 주인을 위하여 신발끈을 푸는 것을 제외하고는 봉사하듯이 기꺼이 모든 봉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L.Morris). 여기서 요한은 그가 전하는 그 인물은 그러한 위치의 사람이며,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는 것 같다(J.W.Stallings). 28절은 지리학적 주해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분명히 기자가 문학적,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밑받침하는 것이다. 결구는 요한의 진술을 거의 공술서같이 읽도록 한다(R.Schnackenburg).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증거를 법정에 제시하는 것과 같이 일치한다(J.W.Stallings).
2. 요한보다 먼저 계신 자(29-31절) 29절의 요한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서 드러내기 위해 물로 세례를 주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내려오심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요한의 전체 증거의 기초는 그의 거룩한 주장인 '내가 보고'(34절)에 의존한 것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예수님의 사역에 적용된 것으로 구약 신학의 주제들의 몇 개를 혼합하여 된 것이다. 유대교에서 양 혹은 염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이 있다. ① 매일 드리는 소제(출29:38-42)와 많은 특별한 경우의 기본적인 희생 제물(민28,29장;레1-7장)이다. ② 속죄일(민29:7-11레16:20-22)에 백성의 죄를 지는 희생물이다. ③제사를 위해 도살되어, 구워지고, 그런 다음 유월절 기념을 위해 먹히는 고기(출12:1-11)이다. ④ 백성의 슬픔과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말 없이 고난받는 종(사53)의상징이다. ⑤ 승리를 얻게하는 하나님의 양 데를 먹이는 묵시적 숫양(에녹서 90:38, 요셉의 언약)이다. 예수님은 양으로서(행8:32-35) 고난받는 종, 참된 유월절 희생(고전5:7), 흠 없고 점 없는 제물(벧전1:19), 죽임당하지만 승리하는 지도자이다(계5:6,12:7:14,17;17:14;22:1,3,W.E.Hull). 30절의 요한의 고백은 예수님이 앞섰다는 것이다(15절, F.F.Bruce). 증인으로서 자신의 제한된 역할을 확인한 그는 하나님께서 그보다 크신 자를 보내실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W.E.Hull). 31절에서 요한은 그의 청중들에게 '나도 그를(처음에)알지 못했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으로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그가 그를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J.W.Stallings). 약속된 표시를 목격하기까지 요한은 오실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세례 사역이 인자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신적으로 의도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F.F.Bruce).
3. 성령의 강림(32-34절) 32절의 요한의 메시야에 대한 증거로서 전체 사역은 이 구절과 그 뒤에 따라나오는 두 제자들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F.L.Godet). 엄숙함과 법정 형식은 요한의 증거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다(.J.W.Stallings). 물론 요한의 증거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요단강에서 나왔을 때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어디에서도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진술한 곳은 없다(F.F.Bruce). '성령이…머물렀더라'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성령이 임시적으로 선지자들에게 임했지만, 예수님께는 불변하게 머물렀다는 것(B.F.Westcott)과 이때에 성령이 먼저 예수님 위에 오셔서 성령이 그의 사역 나머지 기간 동안 머물렀다는 것(L.Morris)이다. 33절에서 요한은 그 순간에 오실 자의 정체를 알지 못했음을 반복하지만, 성령의 오심을 보자 그는 미리 지시받은 표징으로 알아보았음을 말한다. 이는 '오실 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자이다(F.F.Bruce). 여기서 요한과 예수님과의 대조됨을 볼 수 있다. 그 대조는 물과 성령이다. 요한의 물 세례는 성령의 참세례의 형상임을 나타낸다(J.H.Bernard). 요한의 물세례는 본질적으로 부정한 것을 씻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하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주는 것이다(L.Morris). 34절의 비둘기의 가시적인 임하는 장면을 보고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인정하였고, 동시에 천상의 소리에 의해 선포된 진리를 확증했다(f.F.Bruce). 즉, 요한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을 때 '사랑하는 아들'(마3:17막1:11눅3:22)로서 그를 인증하는 천상의 소리에 대한 그 자신의 증거를 나타내는 것이다(W.E.Hull).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하나님의 어린양
요1:29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구절은 인용의 근거가 문제시되고 있다. 이 구절이 구약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일단 분명하지만, 구약의 어떤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
1. 구약적 근거의 여러 해석 이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① 유월절 양으로 해석(출12장),②이사야 53:7의 어린양을 지칭, ③ 속죄제날 백성의 죄를 지고 가는 염소(레16:21,22), ④ 계19장의메시야를 지칭하는 양, ⑤ 창22장의이삭을 바치는 데 대한 암시라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지는 않다. 유대교의 대부분의 희생 제사나 소제 그리고 매일 드리는 번제는 어린 양을 제물로 하지만 이것이 속죄제의 성격을 띤 것은 아니다.
2. 다양한 해석에 대한 평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해석함에 있어서 '유월절 양'으로 보는 견해가 일단은 가장 무난하다. 특히 요18장유월절의 성만찬과의 연관성을 두고 생각할 때 그리고 고전 5:7의 바울의 증언과 일치하는 점을 볼 때 이 해석은 무시하기 힘들다. 그러나 유월절 양은 속죄의 기능이 없다는 점에서 이설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난점이 있다. 그리고 사53장의고난받는 주의 종에 대한 것이 아람어를 잘못 번역하여 '양'이라고 번역하였다는 견해도 있다(Burney). 즉 아람어 'talya'는 '어린양'뿐만 아니라, '종'도 의미한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종(ebed)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아람어는 talya가 아니라 ebda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묘사하는 것은 신약성서의 사상에서 매우 익숙한 것이다(행8:32벧전1:19계5:6).
3. 세례 요한의 증거 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수 있는 분이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분, 혹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위의 견해에 근거해 말할 수도 있으나, 또한 이 모든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구약에 예시된 '죄를 지고 속죄하는 어린양'을 언급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의 종류(1:25-34)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은 종교적 활동을 시작하면서 일정한 형태의 제물을 바치게 되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아니면 감사의 표현으로 신 앞에 헌물을 드리게 되었다. 종교에 따라 드리는 방식은 다르지만 대부분 동물이나 곡물을 드렸다.
근동/팔레스틴 :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희생제물로 드려진 것은 가축과 곡물이다. 나실 인이 드렸던 제물을 보면 1년된 어린 암양과 숫양을 드렸으며, 마을 공동의 속죄제를 위해서는 수염소로 바쳤으며, 제사장을 위한 제사 때는 수송아지를 드렸다. 그리고 바알 신의 장례식때 바쳐진 희생 제물을 보면, "각 70마리의 물소, 수소, 양, 수사슴, 산염소, 나귀들인데 이는 아낫(Anat)여신이 바친 희생 제물이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우가릿 문서에 나타난 희생 제물을 보면 , 큰소, 작은 소, 양, 숫양, 비둘기 등이 희생 제물로 쓰였다고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또한 페니키아인의 희생 제물 목록을 보면, 수소, 어린 송아지, 숫양, 염소, 어린 양, 새끼 염소, 어린 수사슴, 새, 야생닭, 물고기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희생 제물은 주로 1년된 것으로 바쳐졌는데, 메소포나미아 지역도 이런 짐승들 외에도 바베로니아의 제물을 보면 '포도주, 포도즙, 대추야자주, 꿀, 크림, 나물" 등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우가릿의 제물 목록에는 "기름, 밀, 푸성귀"등의 물품이 적혀 있다.
서양/로마 :로마인들은 각 가정에 가정 수호신을 모시고 있었다. 이들은 가정에 벽감(壁龕)이라는 신당을 만들어 놓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렸다. 이때 이들은 제물로 집에서 먹은 음식과 동일하게 차렸다. 로마인들은 주로 암소, 돼지를 바쳤다. 그러나 가난한 평민들은 값이 비싼 소나 돼지를 바칠 수 없으므로 비교적 값이 저렴한 수탉으로 대신하여 신에게 바쳤다. 이런 모습은 헤론다스의 「무언극Ⅳ」에 보면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바치는 제물과 기도문이 나타나 있다. 즉 "오소서, 이 수탉을 받으소서 제가 제사드리는 이 우리 집 담 위의 선포자를 받으소서!". 이렇게 바쳐진 희생 제물의 일부는 성전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먹었으며, 일부는 제물을 바친 자가 집안 식구들과 먹었다. 때로는 바쳐진 짐승의 가죽은 이윤을 목적으로 다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의 머리에 화관을 만들어 씌웠다.
동양/한국 : 당시 한국 사회에서 주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은 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삼국사기(三國史記)」이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편 유리왕(琉璃王) 19년(B.C 1년)조를 보면, 성 밖에서 제사지낸 돼지가 달아나자 왕은 탁리·사비라는 신하를 시켜 그 돼지를 잡도록 했다. 이들 신하는 돼지를 잡자 다리를 잘라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노하며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를 지낼 희생물을 어찌 상하게 할 수 있으랴?"라고 하며서 이들 신하를 구덩이에 던져 죽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제물로 바쳐질 돼지는 따로 구별된 장소에서 사육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 중국 사회는 당시 유목 문화와 농경 문화가 혼합되어 있던 사회였다. 농경 문화에서 소는 당시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따라서 제사의 제물로도 사용되었다. 상나라나 주나라 때에 소는 귀족들만이 희생 제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은 특별한 우리에서 사육되었다. 그리고 일반 양반들과 평민들은 소 대신에 돼지와 개를 제물로 바쳤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희생 제물을 보면 제사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즉 속죄제는 암염소,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소제의 경우에는 첫이삭과 고운 가루로 만든 것(fp2:1)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제물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며(출22:20), 온전하고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그릇된 증언자들(1:25-34)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증인에 대한 영원한 사표다. 그처럼 헌신적이며 충성된 증인은 성경에도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와 같은 참된 증언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단에게 미혹된 그릇된 증언자들이 있다.
1. 그릇된 내용을 증언함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뵙자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29절)라고 했다. 또 '내가…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34절)고 했다.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이 증언자의 기본적인 의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천사 중의 하나'로 증언하거나, '사회혁명가의 모범'으로 증언하거나, 또는 인간의 불행과 가난을 지고 가는 물질적인 구세주로 증언한다. 이와 같은 증언들은 모두 비성경적인 그릇된 증언들이다.
2. 그리스도보다 앞서려고 함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30절)고 요한은 증언했다.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주권을 늘 인정한 것이다. 주님이 나보다 항상 먼저 앞서시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참자세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보다 앞서 자신들이 영광받고자 하고, 주님이 명하지도 않은 일을 앞서서 하려고 한 것이다. 주님보다 자신이 으뜸되려고 하는 속성이야말로 사단의 교만의 본성을 닮은 것이 아니겠는가.
3. 알지도 못하고 다 아는 것처럼 행함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3절)라고 세례 요한은 거듭 고백한다(31절). 인간의 지혜로는 그리스도의 뜻과 권능과 섭리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믿음과 순종함으로 의지하고 충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떤이들은 자기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모든 것을 아는 양 떠벌린다. 영적 지혜의 교만은 사단의 한 속성임을 알자.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모본이 된 세례 요한의 사역(1:25-34)
성경의 역사에는 수많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과 사신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 중에서도 세례 요한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에 영원한 모범이 된 사람이다.
1.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처음 전하고 그들의 영혼을 뒤흔든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알았고 도 그리스도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20절)고 자신을 부인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한 것이다. 수많은 군중들의 흠모와 자기에게 돌아올 영예를 분토처럼 버리고 진실한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자리를 지킨 것이다.
2.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냄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31절)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천명했다. 성도들은 입술로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앵무새 전도인은 되지 말아야 한다. 세례 요한처럼 삶 전체로, 모든 일에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행해야 한다. 바울은 사도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라는 각오를 지녀야 한다.
3. 오직 그리스도만 인정함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보다 연배다. 여섯 달이나 앞서 태어났다(눅1:24-26). 또 천국 사역도 그리스도보다 먼저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리스도를 '나보다 앞선 분'으로 높이고 인정했다. 그분의 신적인 주권을 늘 인식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지닌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이처럼 매사에 주님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 또 어떤 공로를 세웠든지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라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요1:35-42)
◈ 원문강해 ◈
예수께서 처음으로 네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르게 된 사실과 함께 그 중 한사람이 제삼자를 데려오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예수의 첫 제자들이다.
1. 예수를 좇은 요한의 두 제자(35-37절) 1) 요한과 그의 제자 (Th'/ ejpauvrion pavlin eiJsthvkei oJ jIwavnnh" kai; ejk tw'n maqhtw'n aujtou' duvo, 테 에피우리온 팔린 에이스테케이 호 요안네스 카이 에크 톤 마데톤 아우투 뒤오; 또 이튼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5절)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을 뜻하는 아우투 뒤오(aujtou' duvo)에서 이미 한 사람은 안드레라는 것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익명의 나머지 한 제자는 누구인가? 여기에 대하여 로빈슨(Robinson)은 요13:23에 언급된 '사랑하시는 자'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를 본서의 저자인 요한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 언급된 자세한 상황(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직접 목격한 자만이 기술할 수 있는 관계로 미루어 사도 요한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사도 요한은 본서를 기술하는 데 있어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익명의 제자는 사도 요한일 가능성이 크다(Morris, A.T.Robertson).
2) 하나님의 어린양 (kai; ejmblevya" tw'/ jIhsou' peripatou'nti levgei, [Ide oJ ajmno;" tou' qeou'. 카이 엠블렙사스 토 예수 페리파툰티 레게이 이데 호 암노스 투 데우;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36절) 다니심에 해당하는 페리파툰티(peripatou'nti)는 '걸어 다니다, 교제하다'를 뜻하는 페리파테오(peripataew)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 중간태 단수로서 행위자가 강조된 말로서 특히 계속적인 행동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그의 복음을 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사역은 그의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데서부터 마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복음을 위하여 매진하셨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본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oJ ajmno;" tou' qeou'호 암노스 투 데우)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예수가 바로 이 세상에 만연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임을 당할 어린양으로서 구약에서 암시되어 온 메시야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3) 예수를 좇는 요한의 두 제자 (kai; h[kousan oiJ duvo maqhtai; aujtou' lalou'nto" kai; hjkolouvqhsan tw'/ jIhsou'. 카이 에쿠산 호이 뒤오 마데타이 아우투 랄룬토스 카이 에콜루데산 토 예수;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7절) '듣고'에 해당하는 에쿠산(h[kousan)은 '듣다'를 뜻하는 아쿠오(ajcouv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 자발적으로 예수의 말을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또한 '좇거늘'에 해당하는 애콜루데산(hjkolouvqhsan)은 '따라가다'를 뜻하는 아콜루데오(ajkolouqevw)의 제1부정 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서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에서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마8:1919:27;막6:1). 따라서 본문은 이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으로 헌신뿐만 아니라 예수의 고난에까지 참여하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결국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참제자의 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2. 예수의 첫 제자들(38-40절) 1) 예수의 질문 (Tiv zhtei'te_ ... JRabbiv (o} levgetai meqermhneuovmenon Didavskale), pou' mevnei"_ 티 제테이테…랍비(호 레게타이 메데르메뉴오메논 디다스칼레)…푸 메네이스; 무엇을 구하느냐…랍비여(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어디 계시오니이까, 38절) '구하느냐'에 해당하는 제테이테(zhtei'te)는 '바라다, 구하다'를 뜻하는 제테오(zhtevw)의 직설법 분사 능동태 2인칭 복수로서 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너희들이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씀으로 이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려는 동기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디 계시오니이까'(pou' mevnei"푸메네이스)라는 말로서 예수께 답하고 있다, 원래 이 말은 유대의 관용적 표현으로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오랜 시간을 가지면서 차분하게 예수와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Reynolds). 한편 이들이 예수를 향하여 말한 '랍비여'( JRabbi)라는 말은 '나의 존귀한 분'이란 의미를 지닌 아람어로, 주로 제자들이 그의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에 대한 이들의 영적 무지를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이들은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던 까닭에 예수를 스승으로만 알 뿐 그 이상의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말은 가롯 유다(마26:25,49막14:45)와 베드로(막9:511:21)등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다.
2)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 [Ercesqe kai; o[yesqe. h\lqan ou\n kai; ei\dan pou' mevnei 에르케스데 카이 옵세스데 엘단운 카이 에이단 푸 메네이;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산 데를 보고, 39절) '와 보라'에 해당하는 에르케스데( [Ercesqe)는 '오다'를 뜻하는 에르코마이( [ercomai)의 현재 명령법과 '보다'를 뜻하는 호라오(o;ravw)의 미래 직설법의 합성어로 요한의 제자들이 언급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말과 서로 상응하고 있다. 즉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오면 보게 될 것이란 말이다. 실로 이 말은 구원의 보장을 확답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보고'를 뜻하는 에이단(ei\dan)은 '보다, 알다'를 뜻하는 에이도(ei\dw)의 제2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 보았다는 사실을 단순히 나타내는 말이며,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 사실임을 의미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해 이들이 교회의 영원한 기초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었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믿고 평생을 주님의 제자로 살기로 각오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결단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3) 예수의 첫 제자 안드레 ( \Hn jAndreva" ... ajkousavntwn para; jIwavnnou kai; ajkolouqhsavntwn aujtw'/: 엔 안드레아스…아쿠산톤 파라 요안누 카이 아콜루데산톤 아우토;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안드레라, 40절) '좇는'에 해당하는 아콜루데산톤(ajkolouqhsavntwn)은 '동행하다, 따라가다'를 뜻하는 아콜루데오(ajkolouqhevw)의 제1부정과거 중간태 소유격 복수로서 안드레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중간태로서 그가 자신을 위해 따랐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안드레는 실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한편 저자는 다른 제자들의 이름에 대하여는 거의 침묵하고 있는 데 반해 안드레의 이름만은 유독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본서의 저술 당시 헬라 세계에 안드레의 존재가 미미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ynolds).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안드레가 예수의 첫 제자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안드레의 기쁨(41,42절) 1) 안드레의 전도 (euJrivskei ou|to" prw'ton to;n ajdelfo;n to;n i[dion Sivmwna kai; levgei aujtw'/ 휴리스케이 후토스 프로톤 톤 아델폰 톤 이디온 시모나 카이 리게이 아우토;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41a절) '찾아'를 뜻하는 휴리스케이(euJrivskei)는 '발견하다, 찾다'를 뜻하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단수이다. 그런데 이 말은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두고 샅샅이 찾아 헤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곧 주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가 예수와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제일 먼저 그의 형제와 더불어 그 은혜를 나누려 하였던 것이다(Tasker, Moffatt). 이러한 사실은 진실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한눈으로 볼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2) 메시야를 만남 (EuJrhvkamen to;n Messivan o{ ejstin meqermhneuovmenon Cristov": ... h[gagen aujto;n pro;" to;n jIhsou'n. 휴레카멘 톤 호 에스틴 메데르메뉴오메논 크리스토스 에가겐 아우톤 프로스 톤 예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41b,42a절) '만났다'를 뜻하는 휴레카멘(EuJrhvkamen)은 '찾다, 알아내다'를 의미하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 완료형 능동태 직설법 1인칭 복수로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메시야를 발견했다'(KJV, RSV, Living Bible)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구원(해방)을 사모하는 유대인들의 강한 메시야 기대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Reynolds). 여기서 이들이 말한 아람어 메시야는 헬라어로 '그리스도'(Cristov"크리스토스)로서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를 뜻하는 형용사 크리오(crivw)에서 파생된 것으로 '기름이 발리워진(자)'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말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위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을 함축하는 말로서 궁극적으로 메시야를 의미하게 되었다. 구약에서 대제사장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출29:6레8:10-13). 본문에서 안드레와 사도 요한은 그토록 소망하던 메시야, 즉 예수를 만난 그 놀라운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가 없어서 시몬에게 전하려 하였던 것을 가리키고 있다.
3)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 (ejmblevya" aujtw'/ ... ei\pen, Su; ei\ Sivmwn oJ uiJo;" jIwavnnou: su; klhqhvsh/ Khfa'" (o} eJrmhneuvetai Pevtro"). 엠블렘사스 아우토…에이펜, 쉬 에이 시몬 호 휘오스 요안누 쉬 클레데세 케파스(호 헤르메뉴에타니 페트로스);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2절) '보시고'에 해당하는 엠블렙사스(ejmblevya")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를 뜻하는 동사 엠블레포(ejmblevp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단수로 '자세하게 관찰하여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곧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난 것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고 있었다는 것과 아울러 이 만남이 매우 진지하고 직접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시몬인 베드로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장차 케파(Khfa'"게바)로 불릴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반석을 뜻하는 아람어 케파(apyKe)의 헬라역이다. 본문에서 '하리라'(klhqhvsh클레데세)란 칼레오(kalevw부르다)의 미래수동형으로서 '불려질 것이다'란 뜻이며, 예언적인 성격을 띤다(A.T.Robertson). 실로 이 말은 교회의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한 여려 요긴한 반석중의 하나가 될 것이란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데, 이름대로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적 약점들을 성령의 역사로 다 극복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1:15-25). 사도 바울은 베드로를 지칭할 때 갈2:7,8등을 제외하고 많은 경우 이 말로 묘사하고 있다(고전1:123:22;9:5;15:5;갈1:182:9,1,14).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과 마가복음의 설화에서 보여지는 특징적 차이점으로는 예수가 먼저 사람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의 증인들이었다는 점과 증인들이 그의 인격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묘사하였다는 점과 부름받은 자는 다른 종교와 소유물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Schweizer, C.K.Barrett).
1. 예수를 좇는 두 제자(35-39절) 35절의 '두 제자'중 한 사람은 안드레이고 다른 제자의 이름은 알 길이 없으나 전통적으로 이 사람을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으로 추정하고 있다(Raymond, E.Brown). 이에 반하여 다른 제자는 빌립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두 사람은 복음서에서 같이 등장하고 있으며, 같은 동네 출신이기 때문이다(Boismard). 요한이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음을 모든 복음서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 금식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규정이 있었고(막2:18눅7:29-33), 자기들만의 기도문이 있었다(눅5:3311:1, Raymond, E.Brown). 37절의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을 예수에게 보냈다는 내용 때문에 이 설화는 Q자료에 기초한 것으로 주장되었다(C.K.Barrett). 38절의 '무엇을 구하느냐'에서 요한은 사람들과 맞서서 그들의 의도에 도전하는 로고스-그리스도를 보여 주려 했을 것이다(Fenton). 이 표현은 아람어의 토대에 기초하고 있으며, 아람어 동사의 의미로 '무엇을 추구하다, 찾다, ∼을 원하다'로서 여기서는 둘 모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Boismard). '랍비'란 문자적으로 '나의 위대하신 자여'라는 의미이지만 요한은 '선생'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이러한 용례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Raymond, E.Brown). 39절의 '와 보라'는 문장은 유대 랍비 문헌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요한에게는 예수에게 오는 것이 중요하며, '보는 것'은 아는 것에 해당한다(Fenton). 유대인의 하루는 일몰에서 일몰로 끝나고, 밤과 낮을 12분할하였다. 이는 로마인들의 시간 개념과 동일하며, 이를 저자 요한이 따르고 있다(Westcott). 이와 반대로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은 모두 일출에서 다음 날 일출을 하루로 보았다는 견해와(P.Harvey) 새벽녘을 원시점으로 정하고 시간을 계산했다는 주장(Gepp, Haigh)도 있다. 시간이 십시쯤인 점에 대하여, 음유적 해석법에 의하면 10시는 완전수이기에 기독교 시대의 시발을 의미한다는 주장과(MacGregor, R.Bultmann), 저자 요한의 시간이 상징적이라는 주장도 있다(J.E.Bruns).
2. 안드레와 베드로에 대한 소개(40-42절) 40,41절의 '그가 먼저…'에 몇 가지 가능한 독법과 번역이 있을 수 있다 ① 프로톤(prw'ton먼저, 우선)이라는 형용사의 부사적 용법은 안드레가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그의 형제를 찾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이는 사본P66,75와 아보느(Abbott)에 의해 입증되고 지지되고 있다(Cullmann). ② 프로톤(prw'ton)은 주격 남성 형용사로서 '시나이티쿠스' (Sinaiticus,후대 헬라 사본)에 기록되었고, 안드레가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제자나 야고보를 찾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③ 프로이(prwiv)라는 이 부사는 다음 날 '이른 아침'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OL, OSsin 등의 사본의 지지를 받고 있다(Bernard, Boismard). ④ 타티안(Tatian) 사본과 OScar 등의 사본에는 이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메시야'라는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Raymond,E.Brown). '기름부음'이 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Raymond, E.Brown). 요한복음에서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인 언어들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메시야성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C.K.Berrett). 42절에서 요한은 '게바'라는 이름이 베드로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게바는 아람어로 케바(ap;'yKe바위)중 갈릴리 아람어에 근원하고 있다(Schlatter). 그러나 요한이 이 이름에 대한 해석을 하지 않은 것은 앞으로의 베드로 생애에 어떠한 해석도 입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Fitzmyer, C.Roth).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하나님의 어린양(35-38절) 35절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은 요한이 증거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W.E.Hull). 사실 요한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둘만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요한의 일행에 남았다(F.F.Bruce).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날처럼 그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로 주목하게 한다. 그는 다시 29절처럼이미 예수님께 대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칭호를 반복한다(F.F.Bruce).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요한이 말로 할 수 있는 것 이상, 즉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크신자'이며 '죄를 제거하실 분은 바로 그분이시다'를 나타내려는 것이었다(J.W.Stallings). 37절 끝부분은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 둘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말한다. 35절의 요한은 그의 제자 둘과 함께 서 있다. 이것은 소우주내에서의 요한의 사역이며 제자들에게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지시한다(J.W.Stallings). 그의 지시를 따라 그들 중에 두 사람이 예수님을 좇는다. 이것은 그들이 그의 추종자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F.F.Bruce). 38절의 '랍비'라고 그들이 사용한 말은 그들이 더 이상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크신 자의 제자라는 그들의 인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J.W.Stallings). A.D.1세기 랍비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적절한 과정의 랍비 훈련을 마친 선생으로서 서품된 사람에게 적용되었다(J.Newman, A.A.T.Ehrhardt).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교사로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 예의의 칭호로 사용되었다(F.F.,Bruce). 예수님을 따랐던 그 둘 중의 하나는 사도 요한이었다. 이 상황은 자신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다(B.F.Westcott, R.E.Brown, J.H.Bernard). '무엇을 구하는냐'는 예수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질문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말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기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그를 알게 되는 것이었다(F.F.Bruce).
2. 와 보라(39,40절) 39절의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와 보라고 대답하신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다. 그것은 제십시, 즉 오후 4시경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곳을 보았다. 마8:20에 비추어 본다면 그곳은 아주 미약한, 아마도 동굴이나 야영지였을 것이다(J.W.Stallings). 40절에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따른 다른 두 제자들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형제 시몬이다. 안드레는 당연히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시몬의 형제'로서 기억된다(J.W.Stallings, F.F.Bruce).
3. 베드로가 된 시몬(41,42절) 41절에서 안드레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행동은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과 사귀도록 하는 것이었다(F.F.Bruce). 안드레가 시몬에게 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은 중요하다(J.W.Stallings). 이 셈족 동사적 형용사는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는 신약에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와 요4:25에 두 번 언급될 뿐이다. 구약에서 그동사적 형용사는 이스라엘 왕(삼상16:6), 대제사장(레4:3)과 그리고 복수 형태로 선지자 역할의 족장들(시105:15)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기독교 시대의 메시야적 기대는 주로 왕적 형태를 취한 반면에, 실제 성취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지자, 제사장, 왕의 세 가지 역할에서 탁월한 메시야임을 입증하셨다. 안드레가 메시야라는 칭호를 가지고 의미했던 것을 확실하게 진술할 수 없다. 그가 이해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소중히 했던 그 당시의 형태들에 의해 채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그의 동료-제자들이 예수님을 점점 더 잘 알아감에 따라, 메시야와 그의 성취에 대한 초기 개념들은 예수님의 실제 성격과 사역에 의해 그의 생각 속에서 치환되었을 것이다(F.F,Bruce). 그러나 '메시야'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는 기대된 '이스라엘의 왕'과 '크신 자'를 나타내었다는 견해도 있다(J.W.Stallings). 42절의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마16:17에서는 '바요나 시몬'으로 단축되었다(F.F.Bruce). 또한 '게바'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반석'(마16:18)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W.E.Hull).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이름짓는 행위
1. 이름 짓는 능력의 의미 본문에 보면 예수가 시몬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는 사건이 나온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대상에게 본질을 규명하고 지배한다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에서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동물이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성행했던 동물 숭배에 대해 철저히 거부하는 심리를 엿볼 수 있다.
2. 아담의 '이름 지음'과 3중 사역의 성취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한 모형으로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아담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안식에 동참하였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며 감사하였다. 그리고 사물들의 이치와 본성들을 탐구하여 각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선지자적 사명이다. 또한 와의 사역이기도 하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 본성과 법칙이 다 규명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직의 수행과 통치권의 행사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3. 가인에 대한 아담의 태도 가인의 뜻은 '얻음'이다. 여기에서 아들을 얻은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아담이 자신을 닮은 아들을 얻었을 때 어쩌면 커다란 성취감과 영생에의 유혹을 받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얻음'에 대하여 심판하신다. 아벨의 등장이 그것이다. 본래 아담은 이름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능력(이러한 능력은 참으로 힘든 일 중의 하나이다. 사물의 속성에 대한 밝은 지식과 그것을 집약하여 표현하는 능력은 지혜 없이는 할 수 없다.)을 소유하고 있었으나(창2:29), 가인을 얻었을 때 그 총명함은 사라진 듯하다. 후에 아벨을 얻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아담은 세상에서 '얻음'의 무익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4. 마지막 아담 예수 그러나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고차원의 능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는 시몬을 보고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을 미리 꿰뚫어 보고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부여했던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간구하는 것들(1:35-42)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기 힘든 것들을 신에게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이 신에게 바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개인적인 안락함이나 혹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죽은 후에도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신에게 요구하는 인간의 소망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현실에 만족하는 자는 그것을 오래 누리는 것을 요구하는 반면, 그 위치가 불행한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근동/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대신 그들은 종교 생활에서 현세 생활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천체운행을 관찰하는 점성술이나 그 밖의 점복(占卜)에 의해 현세의 운명만을 예측해 보려고 노력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내세(來世)를 음산하고 비참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세적 향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고, 자연히 죽은 사람에 대한 장례는 박절하였다. 따라서 신에게 간구하는 것들은 현세적인 면이 강했다. 이집트 : 이집트 사람들은 현세에 살면서도 그들의 생각은 항상 죽은 후의 세계에 쏠려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건축은 '분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의 세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집트의 분묘는 마스터바(mastaba)라는 평탄한 형태로부터 계단식 모양을 거쳐 끝내는 삼각형의 피라미드로까지 발전하였다. 피라키드는 평균 2.5t의 석탄암 330만개이상을 높이 147m로 쌓아 올린 것이다. 이 피라미드안에는 내세(來世)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왕들이 미이라가 되어 누워 있는데, 이집트 사람들은 육체가 써지 않으면 영생불사(永生不死)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서양/그리스 :그리스인들에게는 무한(無限)과 영원(永遠)의 관념이 없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일체의 자연 현상을 신들에게 원인이 있는 것으로 돌리며 수많은 신들을 산악·삼림·초목·하천과 연관시키고, 또 지방마다 그 나름의 신들을 섬겼다. 또한 그리스 사람들은 신과 인간을 동일하게 파악했다. 즉 신과 인간은 외형상·속성상의 차이는 전혀 없고, 다만 신은 인간의 이상형으로서 불사(불사)란 점에서 인간과 다를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이 신을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난폭·잔인·교활·방탕하다고 묘사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대신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형상을 그리거나 만들어 완벽한 미(美)의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인들이 신에게 갈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중국 : 중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신에게 바라던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병장수(無病長壽)'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이불이나 옷등에 자주 쓰여졌던 문양이 '수(壽)'였다는 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동양인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무릉도원'이라는 곳은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 몇 년이나 되는 것이 하루도 안 되어 지나가며 그대로 늙지 않고 살 수 있는 세계였다. 불교 : 불교에서 사람들이 갈구하는 것은 도(道)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었다. 도교에서는 신선(神仙)이 되고자 하는 것이 또한 소망이었고, 이를 위해 사람들은 무심(無心)을 기본 자세로 도를 닦았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힘으로 다다를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자녀를 원할 때(창25:21), 생명이 위태로울 때(창32:11), 환난이 닥쳐왔을 때(대하33:13),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자 할 때, 하나님께 간구한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진솔한 간구에 대해 응답해 주심은 물론이요(시99:6), 성령과 구원까지 주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가 따르는 진솔한 간구를 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세상에 대한 주님의 질문(1:35-42)
'무엇을 구하느냐'(38절)는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최초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다. 올바른 목적의식은 올바른 사고의식과 행동 양태의 요람이 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올바른 목적의식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과 목적을 상실한 채 지내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끝없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1. 무슨 목적으로 따르는가? '무엇을 구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확고한 신앙의 목적도 없이 따르는 자들에 대한 일침이다. 타성에 젖은 무사안일한 신앙의식을 지닌 사람들, 또 맹목적으로 따르는 감정주의적 신앙인들은 냉철하게 이 질문을 자신들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먼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눅18:41)고 물으셨다. 목적없는 신앙 생활은 일종의 위기상황임을 알자. 그것은 주변에 의해 쉽게 변질되고 오염되고 유혹받기가 쉽기 때문이다.
2. 무엇 때문에 따르는가? 또 주님의 질문은 그릇된 목적을 지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된다. 성경은 분명히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딤전6:12),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6:14)고 했다. 죄로부터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국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3. 무엇을 구하여 사는가? 현대인들은 삶의 의미도 방향도 상실한 채 그저 기계적인 생활과 욕망으로 삶을 허비하고 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무목적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질문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라는 의미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기독교 확장의 기틀(1:35-42)
장강대하의 큰 강물도 그 출발점은 깊은 산속의 조그만 옹달샘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의 생성과 그 확장도 같은 원리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그리스도가 최초로 만나는 만남이 증언되고 있다. 이 내용은 기독교 확장의 기틀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교훈해 준다.
1. 선지자들의 희생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6절)라며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요한의 희생적 사역은 모든 선지자들의 사역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된다. 오늘 그리스도를 위해 연구하고 기록하고 예언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 구약의 선지자들로 인해 기독교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사역 '와 보라'(39절)는 세례 요한을 떠나 자기를 좇는 제자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제자를 모으고 가르치고 훈련시키사 그들로 최초의 기독교 성도, 선교사, 증인, 사도로 만드신 주님의 사역이 기독교 확장의 기틀이 되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3. 성도들의 증언과 희생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40절). 이 안드레의 전도와 증언으로 대사도 베드로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최초로 주님의 제자가 된 이는 안드레였으나 그는 겸손하게 베드로에게 수석 사도 자리를 내준 것이다. 안드레는 후에 '겸손한 성도'의 상징으로 선택돼 '차석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기독교의 확장과 성장은 이처럼 성도들의 증언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르심을 입은 빌립과 나다나엘(요1:43-51)
◈ 원문강해 ◈
제자들의 소명받은 신앙고백
본문은 예수의 공생에 제4일에 있었던 일로 경건한 나다나엘이 그리스도의 거룩성과 전지성을 체험한 뒤로 예수를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 빌립을 부르심(43-45절) 1) 빌립을 부르심 (kai; euJrivskei Fivlippon. kai; levgei aujtw'/ oJ jIhsou'", jAkolouvqei moi. 카이 후리스케이 필립폰 레게이 아우토 호 예수스 아콜루데이 모이;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3절) '만나'를 뜻하는 휴리스케이(euJrivskei)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 능동태 3인칭 단수로 적극적인 의지에 의한 만남을 의미해 주고 있는데 이는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이것은 곧 저자인 요한이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났던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좇으라'에 해당하는 아콜루데이( jAkolouvqei)는 '뒤좇다, 동행하다'를 뜻하는 아콜루데오( jAkolouvqevw)의 현재 명령법 2인칭 단수로 '예수를 당장 따르라'는 의미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은 '만나'(euJrivskei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levgei레게이)라는 두 개의 현재형 동사와 연결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당시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점, 즉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2) 나다나엘을 찾은 빌립 (h\n de; oJ Fivlippo" ajpo; Bhqsai>dav, ejk th'" povlew" jAndrevou kai; Pevtrou...euJrivskei Fivlippo" to;n Naqanah;l 엔 데호 필립포스 아포 베드사이다 에크 테스 플레오스 안드레우 카이 페트루…휴리스케이 필립포스 톤 나다나엘;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44,45a절) '뱃새다'(Bhqsai>dav)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갈릴리 호수 근처의 지방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저자인 사도 요한은 빌립의 고향을 단드레,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언급한 것은 누가가 말하고 있는 이두래(눅3:1)의 '뱃새다 줄리어스'(눅9:10)와 구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Lenski) 실로 이곳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오병이어의 기적(마14:13-21), 소경의 치유(막8:22-26)등을 위시한 많은 기적이 일어난 곳이다. 한편 나다나엘(Naqanah;l)은 갈릴리 가나 출신으로(요21:2).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이 주셨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히브리어 이름으로 오직 이곳에서만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나다나엘을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바돌로매(막3:18)와 동일시 하거나(Zahn, Meyer), 혹은 이름의 의미로 인하여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Hanhart)확실한 것은 아니고 단지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로버슨(A.T.Robertson)은 전자가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3) 빌립의 증언 ( }On e[grayen Mwu>sh'" ejn tw'/ novmw/ kai; oiJ profh'tai euJrhvkamen, jIhsou'n uiJo;n tou' jIwsh;f to;n ajpo; Nazarevt. 혼에그랍센 모위세스 엔 토 노모 카이 호이 프로페타이 휴레 카멘 예순 휘온 투 요셉프 톤 아포 나자렛;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나Td,나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5b절) 본문의 전반부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나타내 주고 있다. 여기서 '만났으나'에 해당하는 휴레카멘(euJrhvkamen)은 '발견하다, 찾다'를 뜻하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완료 직설법 능동태 1인칭 복수인데 이는 아주 강한 확신에 찬 음성으로 여태 만나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만났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즉 빌립은 예수야말로 구약이 예언한 참메시야로서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시킬 분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을 뿐 아니라 나다나엘에게 확신에 찬 음성으로 전도하였던 것이다.
2. 예수의 전지성(46-48절) 1) 나다나엘의 생각 ( jEk Nazare;t duvnataiv ti ajgaqo;n ei\nai_ levgei aujtw'/ 팷J? Fivlippo", [Ercou kai; i[de. 에크 나자랫 뒤나타이 티 아가돈 에이나이 레게이 아우토 [호] 필립포스 에르쿠 카이 이데;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와 보라, 46절) '나사렛(Nazare;t)은 나다나엘의 고향인 가나의 남쪽 13km 지점에 위치한 예수의 고향으로(마2:13-23),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소외된 갈릴리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시골이었다. 사실 갈릴리 지역만 해도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무식하고 교양 없으며 이방인과 스스럼없이 교제를 하는 까닭에 천박한 사람들로 여겨졌었다(A.Plummer).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던 나사렛 출신이야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다나엘로서는 메시야가 나사렛으로부터 왔다는 소리에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 말은 조롱조가 깃든 말이다(F.Reinecker, A.T.Robertson). 한편 이러한 나다나엘에게 친구 빌립이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와 보라'( [Ercou kai; i[de에르쿠 카이 이데)라는 말뿐이었다. 여기서 에르쿠( [Ercou)는 '오다'를 뜻하는 에프코마이(e[rcomai)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 2인칭 단수이다. 그리고 이데(i[de)는 '보다'를 뜻하는 호라오(o;ravw)의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볼지어라'를 의미하고 있다. 전자는 '지금 네 자신을 위해서 오라'는 뜻을 암시하고, 후자는 일회적인 발생 사건으로서 '단순히 보라'는 뜻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들은 빌립이 강권으로 나다나엘을 예수께 인도하려 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하지만 빌립의 이러한 강권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2) 나다나엘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kai; levgei peri; aujtou', [Ide ajlhqw'" jIsrahlivth" ejn w|/ dovlo" oujk e[stin. 카이 레게이 페리 아우투 이데 알레도스 이스라엘리테스 엔 호 돌로스 우크 에스틴;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7절) '참'을 뜻하는 알레도스(ajlhqw'")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 '아'(aj)와 '숨기다'를 뜻하는 란다노(lajnqanw)에서 파생된 레도(lhvqw)의 합성어로서 '숨김이 없는' 진실을 의미해 주고 있다. 그리고 '간사한'에 해당하는 돌로스(dovlo")는 '미끼, 속임수, 간계"를 뜻하고 있다. 따라서 두 반의적 수식어는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즉 그는 간교한 꾀를 잘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메시야의 소망을 기다리며 충실히 율법을 연구하는 자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진실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좋아하게 만든다, 따라서 성도라 함은 먼저 모든 종교 행위에 무흠해야 하겠지만 참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해야 될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3) 예수의 전지성 (Povqen me ginwvskei"_ ajpekrivqh jIhsou'" kai; ei\pen aujtw'/, Pro; tou' se Fivlippon fwnh'sai o[nta uJpo; th;n sukh'n ei\dovn se. 프로 투 세 필립톤 포네사이 온타 휘포 텐 쉬켄 에이돈 세;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8절) '보았노라'에 해당하는 에이돈(ei\dovn)은 '보다, 알다'를 뜻하는 호라오(o;pavw)의 제2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 1인칭 단수로 단순히 '보았다'는 일회적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았다'를 뜻하는 예지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의 뜻까지 포함하고 있다. 즉 나다나엘을 자신의 제자로 삼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관찰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전에'를 뜻하는 프로(Pro;)가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는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를 뜻하는 온타 휘포 텐 쉬켄(o[nta uJpo; th;n sukh'n)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예수께서 나다나엘 마음의 은밀한 부분까지 다 알고 계셨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결국 본문은 그 마음에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 그리고 마음에 간교함이나 허식 없이 항상 순결한 영혼을 유지하는 자에게는 진정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신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3. 나다나엘의 신앙 고백과 영접(49-51절) 1) 나다나엘의 답변 (ajpekrivqh aujtw'/ Naqanahvl ... su; ei\ oJ uiJo;" tou' qeou', su; basileu;" ei\ tou' jIsrahvl. 아페크리데 아우토 나다나엘…쉬 에이 호 휘오스 투 에우 쉬 바실류스 에이 투 이스라엘; 나다나엘이 대답하되…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49절) '대답하여'에 해당하는 아페크리데(ajpekrivqh)는 '∼로부터'를 뜻하는 아포(ajpov)와 '결정하다, 판결하다'를 뜻하는 크리노(krivnw)로부터 합성된 아포크리노(avpokrivnw)의 제1과거 직설법 중간태 3인칭 단수로서 행위자 자신을 강조하며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를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곧 나아다엘이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예수의 답변에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하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나다나엘이 말한 '이스라엘의 임금'(basileu;" ei\ tou' jIsrahvl바실류스 에이 튜 이스라엘)이란 표현은 예수의 왕적 신분을 나타내 주는 말로서 그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실 이스라엘의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었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스라엘의 이런 메시야관은 시2편에 잘 나타나 있다.
2) 예수의 칭찬 ( {Oti ei\povn soi o{ti ei\dovn se uJpokavtw th'" sukh'" pisteuvei"_ meivzw touvtwn o[yh/. 호티 에이폰 소이 호티 에이돈 세 휘포 카토 테스 쉬케스 피스튜에이스 메이조 투톤 옵세;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0절) '이보다'를 뜻하는 메이조 투논(meivzw touvtwn)에서 메이조(meivzw)는 비교급으로서 나다나엘이 지금까지 체험한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의 능력보다 더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곤경해서 구할 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그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였다. 한편 '믿느냐'(pisteuvei"피스튜에이스)라는 말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의 순수한 믿음에 대하여 칭찬을 하고 있다(Reynolds).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 다른 간사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단 한번의 예수의 이적에 그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는 순수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예수의 거룩성 ( jAmh;n ajmh;n levgw uJmi'n, o[yesqe to;n oujrano;n ajnew/govta kai; tou;" ajggevlou" tou' qeou' ajnabaivnonta" ... ejpi; to;n uiJo;n 아멘 아멘…톤 우리논 아네오고타 카이 투스 앙겔루스 투 데우 아나바이논타스…에 피 톤; 진실로 진실로…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51절) '열리고'에 해당하는 아네오고타(ajnew/govta)는 '위로'를 뜻하는 아나(ajna)와 '열다, 펴다'를 뜻하는 오이그누니(ojignoumiv)의 합성어인 오노이고(ojnoivgw)의 제2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것을 말해 준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사역으로 그동안 죄로 인하여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며 또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란 축복을 아울러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진실로'를 뜻하는 아멘(ajmh;n)은 공관복음에 한 단어로 사용된 반면(마5:18막3:28눅4:2418:17), 본문에는 두 단어가 겹쳐서 사용되고 있다(요3:3-55:24;6:47). 이것은 예수가 참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로 풀이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43-46절) 43절에는 예수가 빌립을 만난 곳이 갈릴리인지 아니면 빌립의 동네 벳새다인지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된 사항이 없다. (Raymond, E.Brown). 만약 43절을본문속에 둔다면, 41절의 '먼저'(Bhqsai>dav프로톤)가 빌립을 지칭하게 될 수 있으므로 이 구절을 생략해야 한다(Schnackenburg). 44절의 '벳새다'(prw'ton베드사이다)는 가버나움으로 통칭되는 광범위한 지역 내에 있었던 것으로 막6:45을 풀이하며, 이는 요 12:21의 갈릴리 벳새다와 일치한다(Plini, Jeerome). 이에 반대로 66-70년의 전쟁시까지 갈릴리라는 지역명이 호수 주변까지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주장하는 자도 있다(C.A.Smith). 45절의 '나다나엘'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고, 요한의 의도는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이스라엘의 상징적 묘사로 나다나엘을 등장시켰다(V.Holzmeister). 이에 반대하여, 랍비 시므온 밴 나다나엘은 미쉬나를 가르치던 탄나(Tanna) 제2세 때 사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 중에 나다나엘이 있었을 수도 있다(C.K.Barrett). 그러나 이 본문은 역사적이라기보다는 변증적이다(C.H.Dodd). 선지자가 기록한 그 사람이라고 빌립이 주장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어느 구절도 상세하게 인용되어 있지도 않고, 오경에도 순수하게 메시야적인 구절도 없을 것이다(A.Edersheim). 46절의 '나사렛'은 구약성경이나 탈무드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다양한 신약성경의 전승의 흐름들은 나사렛이 예수의 고향임을 말하고 있다(G.Dalman). 흑자는 요7:52을 인용하면서 갈릴리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 없음을 강조했으며,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가 곧 메시야임을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였다(Boismard). 또한 그는 나다나엘이 숨겨진 메시야 이론의 증거를 무시하고 제시했다고 강조하였다(Boismard).
2. 참이스라엘 사람(47,48절) 47절의 '참이스라엘 사람'의 문자적 의미는 '참된 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알레도스(ajlhqw'")는 여기서 부사어로서 형용사 알레디노스(ajlhqinov")와 동등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 이름 중에 한 가치 있는'이라는 의미이다(R.Bultmann). 48절의 '무화과나무'는 때때로 랍비들이 율법을 연구한 장소로서 보이는데(Midrash Rabbah), 무화과나무를 율법에 비교하기도 하였다(Tal Bab Erubin). 따라서 아마도 나다나엘은 서기관이나 랍비였을 것이라는 전승이 주장되어 왔다(Raymond, E.Brown). 아마도 나다나엘은 이 나무 밑에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였고, 예수는 그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음을 확신시켰을 것이다(J.Jeremias). 또한 '어떤 나무 아래서'라는 질문은 매우 평범한 질문이며, 이는 '그것에 대하여 모두 나에게 말해 주겠습니까'를 의미하는 격언적인 표현에 불과하다(C.F.D.Mould).
3. 더 큰 일(49-51절) 49절에서 나다나엘이 예수에게 한 고백은 그의 세례 고백문을 반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세례 고백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Bornkamm). 50절의 예수의 질문은 의문문이라기보다는 서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나다나엘의 믿음은 오직 기적에 근거했을 뿐 근거가 매우 희박한 믿음의 소유자였다(C.K.Barrett). 51절에서 예수가 아멘을 가르침의 초두에 사용한 점은 매우 이상하고 진정적 회상을 불러 일으킨다(.D.Daube). 본 절은 야곱의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으나, 창세기와 요한복음 중 어디에나 천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치 않다(C.K.Barrett). 창28:12에 대한 팔레스틴 탈굼은 단순히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을 보려고 오르락 내리락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McNamara). 이에 반하여 천사들은 사람의 아들의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올라갔다가 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다시 내려왔다는 주장도 있다(Schnackenburg).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빌립의 나다나엘 전도(43-46절) 43절의 '갈릴리'는 유대 팔레스틴의 위쪽 주변의 커다란 이방 지역으로 문자적으로는 이방인의 범위, 외국인의 지역을 의미한다. 거기서 예수님은 벳새다 출신의 그리스식 이름을 지닌 빌립을 보셨다.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는 갈리리 호의 북동 해안의 매우 헬라화된 도시였다. '나를 좇으라'는 공관복음서에서 헌신의 부름의 핵심(막1:172:14;8:34;10:21)으로 그것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귀착된다. 그것은 제자직을 지적, 감상적, 행동적 용어에서보다는 오히려 관계적 용어로 정의한다. 그는 숙고할 아이디어, 경험할 분위기, 이를 과제가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사람이었다. 성경의 법이나 성전 의식 대신에, 예수님은 감히 자신을 하나님께 이르는 원천으로 동일시한다. 게다가 그이 부름은 미래 대면이었다. 따름은 한도가 없고 역동적인 순례이지 폐쇄적이며 정적인 위치는 결코 아니다(W.E.Hull). 44절의 '한동리'라는 말은 그들 두 사람이 빌립에게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했음을 나타낸다. 빌립이 예수님을 따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그는 그랬을 것이다(J.W.Stallings). 45절의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근처 출신의 유대인(요21:2)으로 그는 요한복음서에서만 나타난다. 예수를 '모세가 율법에…기록한'의 내용과 동일시하는 것은 신18:15-18(신34:10)에 기록된 모세 같은 선지자임을 특별히 암시하는 것 같다(W.E.Hull). 46절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지역적으로 이웃 도시들 사이에 경쟁이 있기 때문에, 나다나엘은 근처의 나사렛에 대한 가나의 경멸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는 나사렛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의 아들이 성경의 약속대로 예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신중한 성경학도들처럼 행동했다. 빌립은 46절의 나다나엘에 대한 맞대응에 대하여 '와 보라'는 효과적인 대답을 한다(W.E.Hull).
2. 참이스라엘 사람(47,48절) 47절에서도 42절처럼 예수님은 그가 초자연적 지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인다(R.Schnackenburg). 나다나엘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자신의 기원을 경시했던 이 사람을 칭찬하였다. 예수님은 그를 구약 종교의 참된 구체화로 보았다(W.E.Hull). 48절의 '무화과나무 아래'는 하나님의 법을 연구하는데 영적으로 대단히 이상적인 조건들(미4:4슥3:10,W.E.Hull)이며 '사람의 행방과 동기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나타내는 것이다(C.F.D.Mould). 나다나엘은 아마도 그곳에서 명상을 하고 영적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F.F.Bruce).
3. 더 큰 일(49-51절) 49절의 '하나님의 아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왕'(시2:7)과 연결된 칭호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가장 큰 선생님(랍비)이 된 것이다(W.E.Hull, J.W.Stallings). 이 말은 신약에서 이곳을 제외하고 단지 세 번만 사용되었다. 마27:42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조롱받아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요구받는다. 막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적으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요12:13은 예루살렘을 입성하면서 다중적인 의미로 이러한 단어들로 환영받는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왕이었다. 중간기에 메시야는 신적 통치의 특권을 집행하는 것으로서 생각하게 되었다. 나다나엘은 그에게 공개적으로 최고의 어휘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50절의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이것보다 더욱 확신적인 증거-가나의 혼인잔치 이적-를 장래에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J.W.Stallings). 51절의 '인자'는 구약의 후반부에서 발전하였다. 예수님은 이 칭호를 벧엘의 야곱의 꿈의 기사와 유사하게 연결시켰다.(창28:12).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인자 자신이 사다리였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시의 인간적 통로임을 주장했다(W.E.Hull).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야곱과 예수의 비교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른다' 예수의 장엄한 문투인 이 단언 형식은 요한복음에 20회나온다. '너희에게' 대신 '네게'로 되어 있는 것이 5회 더 나온다. 이 용어는 장엄한 선언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예수의 말'의 특징적인 어법이다. 이 말의 사용을 통하여 예수의 권위와 예수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능가하는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2. 천사들이 한 일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이라는 구절은 창28:12의 야곱의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천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창28:12에 대하여 팔레스틴 탈굼은 "주의 앞에서 나온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했으며, 그들은 야곱을 보았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단순히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을 보려 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여기서는 천사들을 수반하고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함이 좋다.
3. '인자 위에' '사람의 아들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했다는 표현을 창28:12에서는 천사들이 '사다리' 위아래로 오르락 내리락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문법적으로는 '그'의 위로 오르락 내리락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요한복음은 사다리를 사람의 아들로 대치시킨다. 천사들의 움직임은 위의 세상과 아랫 세상과의 접촉을 보증한다. 원시적인 묵시문학 사상에 의하면 사람의 이들은 천적인 존재로서 마지막 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하늘과 땅 사이의 교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요한은 원초적이고 원형적이며, 천적인 인간에 관한 보다 초기의 사변으로 돌아감으로써, 그리고 성육신의 의미를 숙고함으로써 사람의 아들인 예수 안에서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의 단순한 종말론적인 접촉이 아니라 영원한 접촉을 본다. 사람의 아들은 천상과 지상 모두에 있다(요3:13). 그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내려왔지만(요6:27,53), 그의 영광으로 다시 올라갈 것이다(요6:62). 그러나 이런 올라감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요3:148:28;12,23,34;13:31). 이제 중요한 것은 벧엘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격이다.
당대인이 생각하는 하늘의 개념(1:43-51) ◈ 세계배경 문화사 ◈
하늘은 그 자체에 부여된 신격으로 인하여 우주를 창조한 초월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즉 신들이 거처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또한 비를 내리게 하여 모든 작물의 수확을 책임지는 존재로 성정(聖定)되었다.
근동/팔레스틴 : 이스라엘의 경우, 넓은 의미로 하늘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우주'의 바다 상층을 뜻한다. 그러므로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간주되었으며, 아카드어와 아랍어에서는 하늘과 어근을 같이하는 용어들이 환유법으로 사용되어 '비'를 의미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에서 하늘은 또 좁은 의미에서 땅의 천장, 혹은 덮개를 의미했다. 즉 하늘은 우주의 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주의 바다를 가로질러 쳐 있는 막으로 묘사되었다. 이 막은 다양하게 표현되었는데,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하늘이라는 개념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 자료와 호머의 작품 속에서도 하늘을 '철로 된 하늘'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하늘의 막을 뜻하는 단어가 '라키아'인데 이것은 금속을 두들겨서 길게 핀 것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은 메소포타미아의 자료들에서도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우주의 공간은 천막처럼 뻗쳐 있거나, 혹은 휘장처럼 내려 있는 기다란 은천이나 옥양목으로 묘사되었다. 「사자의 서」에서 하늘이 '피부'로 표현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하늘을 겉옷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밤하늘을 '알록달록한 겉옷'이라고 한 것이 그 보기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에타나 신화를 보면 그들 최고의 신인 아누는 가장 높은 3층에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아울러 당시 근동 지역 사람들은 일정한 형태의 기둥이 있어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고 믿었다.
서양/그리스 :그리스에서 하늘은 제우스 신이 거처하는 곳이며, 천사들이 사는 곳, 나아가 신 자체, 신의 의지·신의 섭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푸른 하늘은 신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이고, 구름은 신의 옷이며, 빛은 신의 연고, 별은 신의 눈으로 불리기도 한다.
로마 :로마 사람들에게 하늘이 주는 것은 신이 주는 것이고, 하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신을 두려워 하는 것을 뜻하며, 하늘을 두고 하는 맹세는 신에 대한 맹세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그리스와 로마에서 하늘은 신과 동일한 개념으로 쓰였으며, 최고의 행복과 기쁨·아름다움이 있는 낙원으로 상징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늘은 극한, 극도,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키며, 빛과 만물의 근원지라고 생각하였다.
동양/중국 : 유교에서 하늘은 도덕성의 감시자, 화복의 주제자로서, 모든 사람들의 공로와 과실에 근거하여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을 각각 내림으로써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불교에서의 하늘은 윤회의 한 과정으로서 육도(六道)중의 하나에 속하는데, 천계가 상위의 것이지만, 이때의 천계는 인간의 자율적 사고인 고해(苦海)가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성불에 이룰 수 없으므로 인계보다 못한 개념이다. 도교의 하늘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서, 옥황상제가 주재한다. 여기서 옥황상제는 시공을 초월하여 인과에 얽히지 않고 영원히 절대 자존(自尊)한다. 그리고 천하의 제후들을 다 조회하고, 인간 제왕의 수명부(受命符)를 관장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이곳으로 돌아간다는 관념이 형성되어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하늘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늘은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히1:10-12벧후3:10). 그리고 그곳에 거하는 이들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 천사들, 주의 백성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늘에는 기쁨과 위로, 영광, 안식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가야 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편견의 내용과 결과(1:43-51)
앙드레 지드는 말하기를 '편견은 문명을 떠받치는 기둥이다'라고 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그릇된 견해를 조금씩은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 말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46절)고 한 말 속에서 우리는 그릇된 선입관과 편견의 단면을 볼 수 있다.
1. 지역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속한 동네다. 유대인들은 변방 지역 갈릴리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고 했다, 그만큼 이방 외세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며 반란이 많았던 지역이어서 그 지역을 '이방의 갈릴리'(마4:15)라고 부른 것이다. 그릇된 선입관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큰 피해를 당하고 있다.
2. 사람에 대한 편견 편견 중에 가장 좋지 않은 것이 사람에 대한 것이다. 그 사람의 전력이나 출신 성분 또는 학력, 직업을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나 가능성을 그릇되게 판단하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나사렉 고향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막6:3)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당하기도 했다. 편견이란 '엉터리 지식'이다. 알기는 알되 그릇되게 아는 것이기에 무지보다 더 무섭다.
3. 편견의 결과 편견의 결과와 영향은 언제나 폭력과 갈등을 낳는다. 주님도 동네 사람들에 의해 폭력을 당한 일도 있다(눅4:28,29). 단체의 갈등, 민족간의 반목도 편견에 의한 예가 많다. 편견은 사단이 뿌린 불행과 죄악의 한 씨앗임을 알자. 그래서 성경은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정죄한다. 그리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고'(롬3:12)라고 함으로써 불신앙도 편견의 일종으로 죄악시하고 있다. 넓은 마음, 넓은 눈으로 세계를 보자.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주께서 성도에 대해 아시는 것(1:43-51)
나다나엘은 본문 외에는 성경에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주님의 제자다. 그래서 사름들 가운데 그를 상징적인 인물이나, 또는 바돌로매와 이명동인(異名同人)의 제자로 보기도 한다. 그와 같은 미미한 제자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읽을 수 있다.
1. 성도들의 단점을 아심 주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홀로 않아 있던 것을 아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빈정댄 것도 알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의 성급한 성격의 단점보다도 그의 속에 있는 장점을 칭찬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주님은 성도들의 연약한 단점을 아신다. 아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 단점을 감싸주시고 용서하시며 성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2. 그의 형편을 아심 주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아신다고 했는데 이는 성도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알고 계시다는 증거다. 성도의 괴로움도, 애로도 알고 계시며 성도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쓸 것을 미리 공급해 주시고 우리가 기도하면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이다.
3. 그의 장래를 아심 우리가 가장 기뻐해야 할 일은 주님은 우리의 장래까지 이미 아시고 계시다는 점이다.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절)고 하셨고 하늘이 열리고 주님이 하늘의 천사와 교통하는 것도 보리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비천하고 땅에 속해서 고난받고 있으나 주님의 눈에는 우리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영광과 존귀를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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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을 드렸다.
근동/팔레스틴 :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희생제물로 드려진 것은 가축과 곡물이다. 나실 인이 드렸던 제물을 보면 1년된 어린 암양과 숫양을 드렸으며, 마을 공동의 속죄제를 위해서는 수염소로 바쳤으며, 제사장을 위한 제사 때는 수송아지를 드렸다. 그리고 바알 신의 장례식때 바쳐진 희생 제물을 보면, "각 70마리의 물소, 수소, 양, 수사슴, 산염소, 나귀들인데 이는 아낫(Anat)여신이 바친 희생 제물이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우가릿 문서에 나타난 희생 제물을 보면 , 큰소, 작은 소, 양, 숫양, 비둘기 등이 희생 제물로 쓰였다고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또한 페니키아인의 희생 제물 목록을 보면, 수소, 어린 송아지, 숫양, 염소, 어린 양, 새끼 염소, 어린 수사슴, 새, 야생닭, 물고기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희생 제물은 주로 1년된 것으로 바쳐졌는데, 메소포나미아 지역도 이런 짐승들 외에도 바베로니아의 제물을 보면 '포도주, 포도즙, 대추야자주, 꿀, 크림, 나물" 등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우가릿의 제물 목록에는 "기름, 밀, 푸성귀"등의 물품이 적혀 있다.
서양/로마 :로마인들은 각 가정에 가정 수호신을 모시고 있었다. 이들은 가정에 벽감(壁龕)이라는 신당을 만들어 놓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렸다. 이때 이들은 제물로 집에서 먹은 음식과 동일하게 차렸다. 로마인들은 주로 암소, 돼지를 바쳤다. 그러나 가난한 평민들은 값이 비싼 소나 돼지를 바칠 수 없으므로 비교적 값이 저렴한 수탉으로 대신하여 신에게 바쳤다. 이런 모습은 헤론다스의 「무언극Ⅳ」에 보면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바치는 제물과 기도문이 나타나 있다. 즉 "오소서, 이 수탉을 받으소서 제가 제사드리는 이 우리 집 담 위의 선포자를 받으소서!". 이렇게 바쳐진 희생 제물의 일부는 성전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먹었으며, 일부는 제물을 바친 자가 집안 식구들과 먹었다. 때로는 바쳐진 짐승의 가죽은 이윤을 목적으로 다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의 머리에 화관을 만들어 씌웠다.
동양/한국 : 당시 한국 사회에서 주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은 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삼국사기(三國史記)」이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편 유리왕(琉璃王) 19년(B.C 1년)조를 보면, 성 밖에서 제사지낸 돼지가 달아나자 왕은 탁리·사비라는 신하를 시켜 그 돼지를 잡도록 했다. 이들 신하는 돼지를 잡자 다리를 잘라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노하며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를 지낼 희생물을 어찌 상하게 할 수 있으랴?"라고 하며서 이들 신하를 구덩이에 던져 죽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제물로 바쳐질 돼지는 따로 구별된 장소에서 사육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 중국 사회는 당시 유목 문화와 농경 문화가 혼합되어 있던 사회였다. 농경 문화에서 소는 당시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따라서 제사의 제물로도 사용되었다. 상나라나 주나라 때에 소는 귀족들만이 희생 제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은 특별한 우리에서 사육되었다. 그리고 일반 양반들과 평민들은 소 대신에 돼지와 개를 제물로 바쳤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희생 제물을 보면 제사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즉 속죄제는 암염소,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소제의 경우에는 첫이삭과 고운 가루로 만든 것(fp2:1)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제물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며(출22:20), 온전하고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그릇된 증언자들(1:25-34)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증인에 대한 영원한 사표다. 그처럼 헌신적이며 충성된 증인은 성경에도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와 같은 참된 증언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단에게 미혹된 그릇된 증언자들이 있다.
1. 그릇된 내용을 증언함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뵙자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29절)라고 했다. 또 '내가…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34절)고 했다.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이 증언자의 기본적인 의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천사 중의 하나'로 증언하거나, '사회혁명가의 모범'으로 증언하거나, 또는 인간의 불행과 가난을 지고 가는 물질적인 구세주로 증언한다. 이와 같은 증언들은 모두 비성경적인 그릇된 증언들이다.
2. 그리스도보다 앞서려고 함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30절)고 요한은 증언했다.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주권을 늘 인정한 것이다. 주님이 나보다 항상 먼저 앞서시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참자세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보다 앞서 자신들이 영광받고자 하고, 주님이 명하지도 않은 일을 앞서서 하려고 한 것이다. 주님보다 자신이 으뜸되려고 하는 속성이야말로 사단의 교만의 본성을 닮은 것이 아니겠는가.
3. 알지도 못하고 다 아는 것처럼 행함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3절)라고 세례 요한은 거듭 고백한다(31절). 인간의 지혜로는 그리스도의 뜻과 권능과 섭리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믿음과 순종함으로 의지하고 충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떤이들은 자기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모든 것을 아는 양 떠벌린다. 영적 지혜의 교만은 사단의 한 속성임을 알자.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모본이 된 세례 요한의 사역(1:25-34)
성경의 역사에는 수많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과 사신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 중에서도 세례 요한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에 영원한 모범이 된 사람이다.
1.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처음 전하고 그들의 영혼을 뒤흔든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알았고 도 그리스도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20절)고 자신을 부인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한 것이다. 수많은 군중들의 흠모와 자기에게 돌아올 영예를 분토처럼 버리고 진실한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자리를 지킨 것이다.
2.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냄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31절)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천명했다. 성도들은 입술로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앵무새 전도인은 되지 말아야 한다. 세례 요한처럼 삶 전체로, 모든 일에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행해야 한다. 바울은 사도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라는 각오를 지녀야 한다.
3. 오직 그리스도만 인정함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보다 연배다. 여섯 달이나 앞서 태어났다(눅1:24-26). 또 천국 사역도 그리스도보다 먼저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리스도를 '나보다 앞선 분'으로 높이고 인정했다. 그분의 신적인 주권을 늘 인식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지닌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이처럼 매사에 주님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 또 어떤 공로를 세웠든지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라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요1:35-42)
◈ 원문강해 ◈
예수께서 처음으로 네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르게 된 사실과 함께 그 중 한사람이 제삼자를 데려오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예수의 첫 제자들이다.
1. 예수를 좇은 요한의 두 제자(35-37절) 1) 요한과 그의 제자 (Th'/ ejpauvrion pavlin eiJsthvkei oJ jIwavnnh" kai; ejk tw'n maqhtw'n aujtou' duvo, 테 에피우리온 팔린 에이스테케이 호 요안네스 카이 에크 톤 마데톤 아우투 뒤오; 또 이튼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5절)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을 뜻하는 아우투 뒤오(aujtou' duvo)에서 이미 한 사람은 안드레라는 것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익명의 나머지 한 제자는 누구인가? 여기에 대하여 로빈슨(Robinson)은 요13:23에 언급된 '사랑하시는 자'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를 본서의 저자인 요한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 언급된 자세한 상황(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직접 목격한 자만이 기술할 수 있는 관계로 미루어 사도 요한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사도 요한은 본서를 기술하는 데 있어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익명의 제자는 사도 요한일 가능성이 크다(Morris, A.T.Robertson).
2) 하나님의 어린양 (kai; ejmblevya" tw'/ jIhsou' peripatou'nti levgei, [Ide oJ ajmno;" tou' qeou'. 카이 엠블렙사스 토 예수 페리파툰티 레게이 이데 호 암노스 투 데우;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36절) 다니심에 해당하는 페리파툰티(peripatou'nti)는 '걸어 다니다, 교제하다'를 뜻하는 페리파테오(peripataew)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 중간태 단수로서 행위자가 강조된 말로서 특히 계속적인 행동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그의 복음을 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사역은 그의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데서부터 마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복음을 위하여 매진하셨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본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oJ ajmno;" tou' qeou'호 암노스 투 데우)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예수가 바로 이 세상에 만연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임을 당할 어린양으로서 구약에서 암시되어 온 메시야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3) 예수를 좇는 요한의 두 제자 (kai; h[kousan oiJ duvo maqhtai; aujtou' lalou'nto" kai; hjkolouvqhsan tw'/ jIhsou'. 카이 에쿠산 호이 뒤오 마데타이 아우투 랄룬토스 카이 에콜루데산 토 예수;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7절) '듣고'에 해당하는 에쿠산(h[kousan)은 '듣다'를 뜻하는 아쿠오(ajcouv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 자발적으로 예수의 말을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또한 '좇거늘'에 해당하는 애콜루데산(hjkolouvqhsan)은 '따라가다'를 뜻하는 아콜루데오(ajkolouqevw)의 제1부정 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서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에서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마8:1919:27;막6:1). 따라서 본문은 이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으로 헌신뿐만 아니라 예수의 고난에까지 참여하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결국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참제자의 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2. 예수의 첫 제자들(38-40절) 1) 예수의 질문 (Tiv zhtei'te_ ... JRabbiv (o} levgetai meqermhneuovmenon Didavskale), pou' mevnei"_ 티 제테이테…랍비(호 레게타이 메데르메뉴오메논 디다스칼레)…푸 메네이스; 무엇을 구하느냐…랍비여(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어디 계시오니이까, 38절) '구하느냐'에 해당하는 제테이테(zhtei'te)는 '바라다, 구하다'를 뜻하는 제테오(zhtevw)의 직설법 분사 능동태 2인칭 복수로서 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너희들이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씀으로 이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려는 동기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디 계시오니이까'(pou' mevnei"푸메네이스)라는 말로서 예수께 답하고 있다, 원래 이 말은 유대의 관용적 표현으로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오랜 시간을 가지면서 차분하게 예수와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Reynolds). 한편 이들이 예수를 향하여 말한 '랍비여'( JRabbi)라는 말은 '나의 존귀한 분'이란 의미를 지닌 아람어로, 주로 제자들이 그의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에 대한 이들의 영적 무지를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이들은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던 까닭에 예수를 스승으로만 알 뿐 그 이상의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말은 가롯 유다(마26:25,49막14:45)와 베드로(막9:511:21)등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다.
2)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 [Ercesqe kai; o[yesqe. h\lqan ou\n kai; ei\dan pou' mevnei 에르케스데 카이 옵세스데 엘단운 카이 에이단 푸 메네이;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산 데를 보고, 39절) '와 보라'에 해당하는 에르케스데( [Ercesqe)는 '오다'를 뜻하는 에르코마이( [ercomai)의 현재 명령법과 '보다'를 뜻하는 호라오(o;ravw)의 미래 직설법의 합성어로 요한의 제자들이 언급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말과 서로 상응하고 있다. 즉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오면 보게 될 것이란 말이다. 실로 이 말은 구원의 보장을 확답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보고'를 뜻하는 에이단(ei\dan)은 '보다, 알다'를 뜻하는 에이도(ei\dw)의 제2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 보았다는 사실을 단순히 나타내는 말이며,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 사실임을 의미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해 이들이 교회의 영원한 기초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었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믿고 평생을 주님의 제자로 살기로 각오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결단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3) 예수의 첫 제자 안드레 ( \Hn jAndreva" ... ajkousavntwn para; jIwavnnou kai; ajkolouqhsavntwn aujtw'/: 엔 안드레아스…아쿠산톤 파라 요안누 카이 아콜루데산톤 아우토;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안드레라, 40절) '좇는'에 해당하는 아콜루데산톤(ajkolouqhsavntwn)은 '동행하다, 따라가다'를 뜻하는 아콜루데오(ajkolouqhevw)의 제1부정과거 중간태 소유격 복수로서 안드레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중간태로서 그가 자신을 위해 따랐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안드레는 실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한편 저자는 다른 제자들의 이름에 대하여는 거의 침묵하고 있는 데 반해 안드레의 이름만은 유독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본서의 저술 당시 헬라 세계에 안드레의 존재가 미미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ynolds).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안드레가 예수의 첫 제자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안드레의 기쁨(41,42절) 1) 안드레의 전도 (euJrivskei ou|to" prw'ton to;n ajdelfo;n to;n i[dion Sivmwna kai; levgei aujtw'/ 휴리스케이 후토스 프로톤 톤 아델폰 톤 이디온 시모나 카이 리게이 아우토;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41a절) '찾아'를 뜻하는 휴리스케이(euJrivskei)는 '발견하다, 찾다'를 뜻하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단수이다. 그런데 이 말은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두고 샅샅이 찾아 헤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곧 주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가 예수와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제일 먼저 그의 형제와 더불어 그 은혜를 나누려 하였던 것이다(Tasker, Moffatt). 이러한 사실은 진실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한눈으로 볼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2) 메시야를 만남 (EuJrhvkamen to;n Messivan o{ ejstin meqermhneuovmenon Cristov": ... h[gagen aujto;n pro;" to;n jIhsou'n. 휴레카멘 톤 호 에스틴 메데르메뉴오메논 크리스토스 에가겐 아우톤 프로스 톤 예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41b,42a절) '만났다'를 뜻하는 휴레카멘(EuJrhvkamen)은 '찾다, 알아내다'를 의미하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 완료형 능동태 직설법 1인칭 복수로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메시야를 발견했다'(KJV, RSV, Living Bible)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구원(해방)을 사모하는 유대인들의 강한 메시야 기대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Reynolds). 여기서 이들이 말한 아람어 메시야는 헬라어로 '그리스도'(Cristov"크리스토스)로서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를 뜻하는 형용사 크리오(crivw)에서 파생된 것으로 '기름이 발리워진(자)'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말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위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을 함축하는 말로서 궁극적으로 메시야를 의미하게 되었다. 구약에서 대제사장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출29:6레8:10-13). 본문에서 안드레와 사도 요한은 그토록 소망하던 메시야, 즉 예수를 만난 그 놀라운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가 없어서 시몬에게 전하려 하였던 것을 가리키고 있다.
3)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 (ejmblevya" aujtw'/ ... ei\pen, Su; ei\ Sivmwn oJ uiJo;" jIwavnnou: su; klhqhvsh/ Khfa'" (o} eJrmhneuvetai Pevtro"). 엠블렘사스 아우토…에이펜, 쉬 에이 시몬 호 휘오스 요안누 쉬 클레데세 케파스(호 헤르메뉴에타니 페트로스);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2절) '보시고'에 해당하는 엠블렙사스(ejmblevya")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를 뜻하는 동사 엠블레포(ejmblevp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단수로 '자세하게 관찰하여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곧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난 것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고 있었다는 것과 아울러 이 만남이 매우 진지하고 직접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시몬인 베드로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장차 케파(Khfa'"게바)로 불릴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반석을 뜻하는 아람어 케파(apyKe)의 헬라역이다. 본문에서 '하리라'(klhqhvsh클레데세)란 칼레오(kalevw부르다)의 미래수동형으로서 '불려질 것이다'란 뜻이며, 예언적인 성격을 띤다(A.T.Robertson). 실로 이 말은 교회의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한 여려 요긴한 반석중의 하나가 될 것이란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데, 이름대로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적 약점들을 성령의 역사로 다 극복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1:15-25). 사도 바울은 베드로를 지칭할 때 갈2:7,8등을 제외하고 많은 경우 이 말로 묘사하고 있다(고전1:123:22;9:5;15:5;갈1:182:9,1,14).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과 마가복음의 설화에서 보여지는 특징적 차이점으로는 예수가 먼저 사람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의 증인들이었다는 점과 증인들이 그의 인격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묘사하였다는 점과 부름받은 자는 다른 종교와 소유물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Schweizer, C.K.Barrett).
1. 예수를 좇는 두 제자(35-39절) 35절의 '두 제자'중 한 사람은 안드레이고 다른 제자의 이름은 알 길이 없으나 전통적으로 이 사람을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으로 추정하고 있다(Raymond, E.Brown). 이에 반하여 다른 제자는 빌립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두 사람은 복음서에서 같이 등장하고 있으며, 같은 동네 출신이기 때문이다(Boismard). 요한이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음을 모든 복음서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 금식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규정이 있었고(막2:18눅7:29-33), 자기들만의 기도문이 있었다(눅5:3311:1, Raymond, E.Brown). 37절의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을 예수에게 보냈다는 내용 때문에 이 설화는 Q자료에 기초한 것으로 주장되었다(C.K.Barrett). 38절의 '무엇을 구하느냐'에서 요한은 사람들과 맞서서 그들의 의도에 도전하는 로고스-그리스도를 보여 주려 했을 것이다(Fenton). 이 표현은 아람어의 토대에 기초하고 있으며, 아람어 동사의 의미로 '무엇을 추구하다, 찾다, ∼을 원하다'로서 여기서는 둘 모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Boismard). '랍비'란 문자적으로 '나의 위대하신 자여'라는 의미이지만 요한은 '선생'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이러한 용례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Raymond, E.Brown). 39절의 '와 보라'는 문장은 유대 랍비 문헌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요한에게는 예수에게 오는 것이 중요하며, '보는 것'은 아는 것에 해당한다(Fenton). 유대인의 하루는 일몰에서 일몰로 끝나고, 밤과 낮을 12분할하였다. 이는 로마인들의 시간 개념과 동일하며, 이를 저자 요한이 따르고 있다(Westcott). 이와 반대로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은 모두 일출에서 다음 날 일출을 하루로 보았다는 견해와(P.Harvey) 새벽녘을 원시점으로 정하고 시간을 계산했다는 주장(Gepp, Haigh)도 있다. 시간이 십시쯤인 점에 대하여, 음유적 해석법에 의하면 10시는 완전수이기에 기독교 시대의 시발을 의미한다는 주장과(MacGregor, R.Bultmann), 저자 요한의 시간이 상징적이라는 주장도 있다(J.E.Bruns).
2. 안드레와 베드로에 대한 소개(40-42절) 40,41절의 '그가 먼저…'에 몇 가지 가능한 독법과 번역이 있을 수 있다 ① 프로톤(prw'ton먼저, 우선)이라는 형용사의 부사적 용법은 안드레가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그의 형제를 찾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이는 사본P66,75와 아보느(Abbott)에 의해 입증되고 지지되고 있다(Cullmann). ② 프로톤(prw'ton)은 주격 남성 형용사로서 '시나이티쿠스' (Sinaiticus,후대 헬라 사본)에 기록되었고, 안드레가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제자나 야고보를 찾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③ 프로이(prwiv)라는 이 부사는 다음 날 '이른 아침'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OL, OSsin 등의 사본의 지지를 받고 있다(Bernard, Boismard). ④ 타티안(Tatian) 사본과 OScar 등의 사본에는 이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메시야'라는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Raymond,E.Brown). '기름부음'이 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Raymond, E.Brown). 요한복음에서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인 언어들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메시야성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C.K.Berrett). 42절에서 요한은 '게바'라는 이름이 베드로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게바는 아람어로 케바(ap;'yKe바위)중 갈릴리 아람어에 근원하고 있다(Schlatter). 그러나 요한이 이 이름에 대한 해석을 하지 않은 것은 앞으로의 베드로 생애에 어떠한 해석도 입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Fitzmyer, C.Roth).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하나님의 어린양(35-38절) 35절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은 요한이 증거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W.E.Hull). 사실 요한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둘만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요한의 일행에 남았다(F.F.Bruce).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날처럼 그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로 주목하게 한다. 그는 다시 29절처럼이미 예수님께 대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칭호를 반복한다(F.F.Bruce).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요한이 말로 할 수 있는 것 이상, 즉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크신자'이며 '죄를 제거하실 분은 바로 그분이시다'를 나타내려는 것이었다(J.W.Stallings). 37절 끝부분은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 둘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말한다. 35절의 요한은 그의 제자 둘과 함께 서 있다. 이것은 소우주내에서의 요한의 사역이며 제자들에게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지시한다(J.W.Stallings). 그의 지시를 따라 그들 중에 두 사람이 예수님을 좇는다. 이것은 그들이 그의 추종자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F.F.Bruce). 38절의 '랍비'라고 그들이 사용한 말은 그들이 더 이상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크신 자의 제자라는 그들의 인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J.W.Stallings). A.D.1세기 랍비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적절한 과정의 랍비 훈련을 마친 선생으로서 서품된 사람에게 적용되었다(J.Newman, A.A.T.Ehrhardt).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교사로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 예의의 칭호로 사용되었다(F.F.,Bruce). 예수님을 따랐던 그 둘 중의 하나는 사도 요한이었다. 이 상황은 자신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다(B.F.Westcott, R.E.Brown, J.H.Bernard). '무엇을 구하는냐'는 예수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질문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말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기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그를 알게 되는 것이었다(F.F.Bruce).
2. 와 보라(39,40절) 39절의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와 보라고 대답하신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다. 그것은 제십시, 즉 오후 4시경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곳을 보았다. 마8:20에 비추어 본다면 그곳은 아주 미약한, 아마도 동굴이나 야영지였을 것이다(J.W.Stallings). 40절에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따른 다른 두 제자들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형제 시몬이다. 안드레는 당연히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시몬의 형제'로서 기억된다(J.W.Stallings, F.F.Bruce).
3. 베드로가 된 시몬(41,42절) 41절에서 안드레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행동은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과 사귀도록 하는 것이었다(F.F.Bruce). 안드레가 시몬에게 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은 중요하다(J.W.Stallings). 이 셈족 동사적 형용사는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는 신약에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와 요4:25에 두 번 언급될 뿐이다. 구약에서 그동사적 형용사는 이스라엘 왕(삼상16:6), 대제사장(레4:3)과 그리고 복수 형태로 선지자 역할의 족장들(시105:15)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기독교 시대의 메시야적 기대는 주로 왕적 형태를 취한 반면에, 실제 성취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지자, 제사장, 왕의 세 가지 역할에서 탁월한 메시야임을 입증하셨다. 안드레가 메시야라는 칭호를 가지고 의미했던 것을 확실하게 진술할 수 없다. 그가 이해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소중히 했던 그 당시의 형태들에 의해 채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그의 동료-제자들이 예수님을 점점 더 잘 알아감에 따라, 메시야와 그의 성취에 대한 초기 개념들은 예수님의 실제 성격과 사역에 의해 그의 생각 속에서 치환되었을 것이다(F.F,Bruce). 그러나 '메시야'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는 기대된 '이스라엘의 왕'과 '크신 자'를 나타내었다는 견해도 있다(J.W.Stallings). 42절의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마16:17에서는 '바요나 시몬'으로 단축되었다(F.F.Bruce). 또한 '게바'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반석'(마16:18)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W.E.Hull).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이름짓는 행위
1. 이름 짓는 능력의 의미 본문에 보면 예수가 시몬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는 사건이 나온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대상에게 본질을 규명하고 지배한다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에서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동물이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성행했던 동물 숭배에 대해 철저히 거부하는 심리를 엿볼 수 있다.
2. 아담의 '이름 지음'과 3중 사역의 성취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한 모형으로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아담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안식에 동참하였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며 감사하였다. 그리고 사물들의 이치와 본성들을 탐구하여 각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선지자적 사명이다. 또한 와의 사역이기도 하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 본성과 법칙이 다 규명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직의 수행과 통치권의 행사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3. 가인에 대한 아담의 태도 가인의 뜻은 '얻음'이다. 여기에서 아들을 얻은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아담이 자신을 닮은 아들을 얻었을 때 어쩌면 커다란 성취감과 영생에의 유혹을 받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얻음'에 대하여 심판하신다. 아벨의 등장이 그것이다. 본래 아담은 이름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능력(이러한 능력은 참으로 힘든 일 중의 하나이다. 사물의 속성에 대한 밝은 지식과 그것을 집약하여 표현하는 능력은 지혜 없이는 할 수 없다.)을 소유하고 있었으나(창2:29), 가인을 얻었을 때 그 총명함은 사라진 듯하다. 후에 아벨을 얻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아담은 세상에서 '얻음'의 무익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4. 마지막 아담 예수 그러나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고차원의 능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는 시몬을 보고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을 미리 꿰뚫어 보고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부여했던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간구하는 것들(1:35-42)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기 힘든 것들을 신에게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이 신에게 바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개인적인 안락함이나 혹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죽은 후에도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신에게 요구하는 인간의 소망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현실에 만족하는 자는 그것을 오래 누리는 것을 요구하는 반면, 그 위치가 불행한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근동/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대신 그들은 종교 생활에서 현세 생활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천체운행을 관찰하는 점성술이나 그 밖의 점복(占卜)에 의해 현세의 운명만을 예측해 보려고 노력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내세(來世)를 음산하고 비참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세적 향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고, 자연히 죽은 사람에 대한 장례는 박절하였다. 따라서 신에게 간구하는 것들은 현세적인 면이 강했다. 이집트 : 이집트 사람들은 현세에 살면서도 그들의 생각은 항상 죽은 후의 세계에 쏠려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건축은 '분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의 세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집트의 분묘는 마스터바(mastaba)라는 평탄한 형태로부터 계단식 모양을 거쳐 끝내는 삼각형의 피라미드로까지 발전하였다. 피라키드는 평균 2.5t의 석탄암 330만개이상을 높이 147m로 쌓아 올린 것이다. 이 피라미드안에는 내세(來世)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왕들이 미이라가 되어 누워 있는데, 이집트 사람들은 육체가 써지 않으면 영생불사(永生不死)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서양/그리스 :그리스인들에게는 무한(無限)과 영원(永遠)의 관념이 없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일체의 자연 현상을 신들에게 원인이 있는 것으로 돌리며 수많은 신들을 산악·삼림·초목·하천과 연관시키고, 또 지방마다 그 나름의 신들을 섬겼다. 또한 그리스 사람들은 신과 인간을 동일하게 파악했다. 즉 신과 인간은 외형상·속성상의 차이는 전혀 없고, 다만 신은 인간의 이상형으로서 불사(불사)란 점에서 인간과 다를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이 신을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난폭·잔인·교활·방탕하다고 묘사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대신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형상을 그리거나 만들어 완벽한 미(美)의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인들이 신에게 갈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중국 : 중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신에게 바라던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병장수(無病長壽)'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이불이나 옷등에 자주 쓰여졌던 문양이 '수(壽)'였다는 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동양인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무릉도원'이라는 곳은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 몇 년이나 되는 것이 하루도 안 되어 지나가며 그대로 늙지 않고 살 수 있는 세계였다. 불교 : 불교에서 사람들이 갈구하는 것은 도(道)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었다. 도교에서는 신선(神仙)이 되고자 하는 것이 또한 소망이었고, 이를 위해 사람들은 무심(無心)을 기본 자세로 도를 닦았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힘으로 다다를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자녀를 원할 때(창25:21), 생명이 위태로울 때(창32:11), 환난이 닥쳐왔을 때(대하33:13),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자 할 때, 하나님께 간구한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진솔한 간구에 대해 응답해 주심은 물론이요(시99:6), 성령과 구원까지 주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가 따르는 진솔한 간구를 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세상에 대한 주님의 질문(1:35-42)
'무엇을 구하느냐'(38절)는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최초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다. 올바른 목적의식은 올바른 사고의식과 행동 양태의 요람이 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올바른 목적의식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과 목적을 상실한 채 지내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끝없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1. 무슨 목적으로 따르는가? '무엇을 구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확고한 신앙의 목적도 없이 따르는 자들에 대한 일침이다. 타성에 젖은 무사안일한 신앙의식을 지닌 사람들, 또 맹목적으로 따르는 감정주의적 신앙인들은 냉철하게 이 질문을 자신들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먼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눅18:41)고 물으셨다. 목적없는 신앙 생활은 일종의 위기상황임을 알자. 그것은 주변에 의해 쉽게 변질되고 오염되고 유혹받기가 쉽기 때문이다.
2. 무엇 때문에 따르는가? 또 주님의 질문은 그릇된 목적을 지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된다. 성경은 분명히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딤전6:12),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6:14)고 했다. 죄로부터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국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3. 무엇을 구하여 사는가? 현대인들은 삶의 의미도 방향도 상실한 채 그저 기계적인 생활과 욕망으로 삶을 허비하고 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무목적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질문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라는 의미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기독교 확장의 기틀(1:35-42)
장강대하의 큰 강물도 그 출발점은 깊은 산속의 조그만 옹달샘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의 생성과 그 확장도 같은 원리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그리스도가 최초로 만나는 만남이 증언되고 있다. 이 내용은 기독교 확장의 기틀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교훈해 준다.
1. 선지자들의 희생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6절)라며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요한의 희생적 사역은 모든 선지자들의 사역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된다. 오늘 그리스도를 위해 연구하고 기록하고 예언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 구약의 선지자들로 인해 기독교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사역 '와 보라'(39절)는 세례 요한을 떠나 자기를 좇는 제자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제자를 모으고 가르치고 훈련시키사 그들로 최초의 기독교 성도, 선교사, 증인, 사도로 만드신 주님의 사역이 기독교 확장의 기틀이 되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3. 성도들의 증언과 희생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40절). 이 안드레의 전도와 증언으로 대사도 베드로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최초로 주님의 제자가 된 이는 안드레였으나 그는 겸손하게 베드로에게 수석 사도 자리를 내준 것이다. 안드레는 후에 '겸손한 성도'의 상징으로 선택돼 '차석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기독교의 확장과 성장은 이처럼 성도들의 증언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르심을 입은 빌립과 나다나엘(요1:43-51)
◈ 원문강해 ◈
제자들의 소명받은 신앙고백
본문은 예수의 공생에 제4일에 있었던 일로 경건한 나다나엘이 그리스도의 거룩성과 전지성을 체험한 뒤로 예수를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 빌립을 부르심(43-45절) 1) 빌립을 부르심 (kai; euJrivskei Fivlippon. kai; levgei aujtw'/ oJ jIhsou'", jAkolouvqei moi. 카이 후리스케이 필립폰 레게이 아우토 호 예수스 아콜루데이 모이;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3절) '만나'를 뜻하는 휴리스케이(euJrivskei)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 능동태 3인칭 단수로 적극적인 의지에 의한 만남을 의미해 주고 있는데 이는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이것은 곧 저자인 요한이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났던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좇으라'에 해당하는 아콜루데이( jAkolouvqei)는 '뒤좇다, 동행하다'를 뜻하는 아콜루데오( jAkolouvqevw)의 현재 명령법 2인칭 단수로 '예수를 당장 따르라'는 의미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은 '만나'(euJrivskei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levgei레게이)라는 두 개의 현재형 동사와 연결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당시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점, 즉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2) 나다나엘을 찾은 빌립 (h\n de; oJ Fivlippo" ajpo; Bhqsai>dav, ejk th'" povlew" jAndrevou kai; Pevtrou...euJrivskei Fivlippo" to;n Naqanah;l 엔 데호 필립포스 아포 베드사이다 에크 테스 플레오스 안드레우 카이 페트루…휴리스케이 필립포스 톤 나다나엘;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44,45a절) '뱃새다'(Bhqsai>dav)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갈릴리 호수 근처의 지방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저자인 사도 요한은 빌립의 고향을 단드레,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언급한 것은 누가가 말하고 있는 이두래(눅3:1)의 '뱃새다 줄리어스'(눅9:10)와 구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Lenski) 실로 이곳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오병이어의 기적(마14:13-21), 소경의 치유(막8:22-26)등을 위시한 많은 기적이 일어난 곳이다. 한편 나다나엘(Naqanah;l)은 갈릴리 가나 출신으로(요21:2).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이 주셨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히브리어 이름으로 오직 이곳에서만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나다나엘을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바돌로매(막3:18)와 동일시 하거나(Zahn, Meyer), 혹은 이름의 의미로 인하여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Hanhart)확실한 것은 아니고 단지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로버슨(A.T.Robertson)은 전자가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3) 빌립의 증언 ( }On e[grayen Mwu>sh'" ejn tw'/ novmw/ kai; oiJ profh'tai euJrhvkamen, jIhsou'n uiJo;n tou' jIwsh;f to;n ajpo; Nazarevt. 혼에그랍센 모위세스 엔 토 노모 카이 호이 프로페타이 휴레 카멘 예순 휘온 투 요셉프 톤 아포 나자렛;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나Td,나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5b절) 본문의 전반부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나타내 주고 있다. 여기서 '만났으나'에 해당하는 휴레카멘(euJrhvkamen)은 '발견하다, 찾다'를 뜻하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완료 직설법 능동태 1인칭 복수인데 이는 아주 강한 확신에 찬 음성으로 여태 만나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만났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즉 빌립은 예수야말로 구약이 예언한 참메시야로서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시킬 분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을 뿐 아니라 나다나엘에게 확신에 찬 음성으로 전도하였던 것이다.
2. 예수의 전지성(46-48절) 1) 나다나엘의 생각 ( jEk Nazare;t duvnataiv ti ajgaqo;n ei\nai_ levgei aujtw'/ 팷J? Fivlippo", [Ercou kai; i[de. 에크 나자랫 뒤나타이 티 아가돈 에이나이 레게이 아우토 [호] 필립포스 에르쿠 카이 이데;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와 보라, 46절) '나사렛(Nazare;t)은 나다나엘의 고향인 가나의 남쪽 13km 지점에 위치한 예수의 고향으로(마2:13-23),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소외된 갈릴리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시골이었다. 사실 갈릴리 지역만 해도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무식하고 교양 없으며 이방인과 스스럼없이 교제를 하는 까닭에 천박한 사람들로 여겨졌었다(A.Plummer).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던 나사렛 출신이야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다나엘로서는 메시야가 나사렛으로부터 왔다는 소리에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 말은 조롱조가 깃든 말이다(F.Reinecker, A.T.Robertson). 한편 이러한 나다나엘에게 친구 빌립이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와 보라'( [Ercou kai; i[de에르쿠 카이 이데)라는 말뿐이었다. 여기서 에르쿠( [Ercou)는 '오다'를 뜻하는 에프코마이(e[rcomai)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 2인칭 단수이다. 그리고 이데(i[de)는 '보다'를 뜻하는 호라오(o;ravw)의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볼지어라'를 의미하고 있다. 전자는 '지금 네 자신을 위해서 오라'는 뜻을 암시하고, 후자는 일회적인 발생 사건으로서 '단순히 보라'는 뜻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들은 빌립이 강권으로 나다나엘을 예수께 인도하려 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하지만 빌립의 이러한 강권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2) 나다나엘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kai; levgei peri; aujtou', [Ide ajlhqw'" jIsrahlivth" ejn w|/ dovlo" oujk e[stin. 카이 레게이 페리 아우투 이데 알레도스 이스라엘리테스 엔 호 돌로스 우크 에스틴;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7절) '참'을 뜻하는 알레도스(ajlhqw'")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 '아'(aj)와 '숨기다'를 뜻하는 란다노(lajnqanw)에서 파생된 레도(lhvqw)의 합성어로서 '숨김이 없는' 진실을 의미해 주고 있다. 그리고 '간사한'에 해당하는 돌로스(dovlo")는 '미끼, 속임수, 간계"를 뜻하고 있다. 따라서 두 반의적 수식어는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즉 그는 간교한 꾀를 잘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메시야의 소망을 기다리며 충실히 율법을 연구하는 자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진실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좋아하게 만든다, 따라서 성도라 함은 먼저 모든 종교 행위에 무흠해야 하겠지만 참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해야 될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3) 예수의 전지성 (Povqen me ginwvskei"_ ajpekrivqh jIhsou'" kai; ei\pen aujtw'/, Pro; tou' se Fivlippon fwnh'sai o[nta uJpo; th;n sukh'n ei\dovn se. 프로 투 세 필립톤 포네사이 온타 휘포 텐 쉬켄 에이돈 세;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8절) '보았노라'에 해당하는 에이돈(ei\dovn)은 '보다, 알다'를 뜻하는 호라오(o;pavw)의 제2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 1인칭 단수로 단순히 '보았다'는 일회적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았다'를 뜻하는 예지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의 뜻까지 포함하고 있다. 즉 나다나엘을 자신의 제자로 삼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관찰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전에'를 뜻하는 프로(Pro;)가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는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를 뜻하는 온타 휘포 텐 쉬켄(o[nta uJpo; th;n sukh'n)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예수께서 나다나엘 마음의 은밀한 부분까지 다 알고 계셨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결국 본문은 그 마음에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 그리고 마음에 간교함이나 허식 없이 항상 순결한 영혼을 유지하는 자에게는 진정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신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3. 나다나엘의 신앙 고백과 영접(49-51절) 1) 나다나엘의 답변 (ajpekrivqh aujtw'/ Naqanahvl ... su; ei\ oJ uiJo;" tou' qeou', su; basileu;" ei\ tou' jIsrahvl. 아페크리데 아우토 나다나엘…쉬 에이 호 휘오스 투 에우 쉬 바실류스 에이 투 이스라엘; 나다나엘이 대답하되…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49절) '대답하여'에 해당하는 아페크리데(ajpekrivqh)는 '∼로부터'를 뜻하는 아포(ajpov)와 '결정하다, 판결하다'를 뜻하는 크리노(krivnw)로부터 합성된 아포크리노(avpokrivnw)의 제1과거 직설법 중간태 3인칭 단수로서 행위자 자신을 강조하며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를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곧 나아다엘이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예수의 답변에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하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나다나엘이 말한 '이스라엘의 임금'(basileu;" ei\ tou' jIsrahvl바실류스 에이 튜 이스라엘)이란 표현은 예수의 왕적 신분을 나타내 주는 말로서 그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실 이스라엘의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었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스라엘의 이런 메시야관은 시2편에 잘 나타나 있다.
2) 예수의 칭찬 ( {Oti ei\povn soi o{ti ei\dovn se uJpokavtw th'" sukh'" pisteuvei"_ meivzw touvtwn o[yh/. 호티 에이폰 소이 호티 에이돈 세 휘포 카토 테스 쉬케스 피스튜에이스 메이조 투톤 옵세;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0절) '이보다'를 뜻하는 메이조 투논(meivzw touvtwn)에서 메이조(meivzw)는 비교급으로서 나다나엘이 지금까지 체험한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의 능력보다 더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곤경해서 구할 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그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였다. 한편 '믿느냐'(pisteuvei"피스튜에이스)라는 말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의 순수한 믿음에 대하여 칭찬을 하고 있다(Reynolds).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 다른 간사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단 한번의 예수의 이적에 그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는 순수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예수의 거룩성 ( jAmh;n ajmh;n levgw uJmi'n, o[yesqe to;n oujrano;n ajnew/govta kai; tou;" ajggevlou" tou' qeou' ajnabaivnonta" ... ejpi; to;n uiJo;n 아멘 아멘…톤 우리논 아네오고타 카이 투스 앙겔루스 투 데우 아나바이논타스…에 피 톤; 진실로 진실로…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51절) '열리고'에 해당하는 아네오고타(ajnew/govta)는 '위로'를 뜻하는 아나(ajna)와 '열다, 펴다'를 뜻하는 오이그누니(ojignoumiv)의 합성어인 오노이고(ojnoivgw)의 제2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것을 말해 준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사역으로 그동안 죄로 인하여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며 또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란 축복을 아울러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진실로'를 뜻하는 아멘(ajmh;n)은 공관복음에 한 단어로 사용된 반면(마5:18막3:28눅4:2418:17), 본문에는 두 단어가 겹쳐서 사용되고 있다(요3:3-55:24;6:47). 이것은 예수가 참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로 풀이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43-46절) 43절에는 예수가 빌립을 만난 곳이 갈릴리인지 아니면 빌립의 동네 벳새다인지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된 사항이 없다. (Raymond, E.Brown). 만약 43절을본문속에 둔다면, 41절의 '먼저'(Bhqsai>dav프로톤)가 빌립을 지칭하게 될 수 있으므로 이 구절을 생략해야 한다(Schnackenburg). 44절의 '벳새다'(prw'ton베드사이다)는 가버나움으로 통칭되는 광범위한 지역 내에 있었던 것으로 막6:45을 풀이하며, 이는 요 12:21의 갈릴리 벳새다와 일치한다(Plini, Jeerome). 이에 반대로 66-70년의 전쟁시까지 갈릴리라는 지역명이 호수 주변까지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주장하는 자도 있다(C.A.Smith). 45절의 '나다나엘'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고, 요한의 의도는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이스라엘의 상징적 묘사로 나다나엘을 등장시켰다(V.Holzmeister). 이에 반대하여, 랍비 시므온 밴 나다나엘은 미쉬나를 가르치던 탄나(Tanna) 제2세 때 사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 중에 나다나엘이 있었을 수도 있다(C.K.Barrett). 그러나 이 본문은 역사적이라기보다는 변증적이다(C.H.Dodd). 선지자가 기록한 그 사람이라고 빌립이 주장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어느 구절도 상세하게 인용되어 있지도 않고, 오경에도 순수하게 메시야적인 구절도 없을 것이다(A.Edersheim). 46절의 '나사렛'은 구약성경이나 탈무드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다양한 신약성경의 전승의 흐름들은 나사렛이 예수의 고향임을 말하고 있다(G.Dalman). 흑자는 요7:52을 인용하면서 갈릴리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 없음을 강조했으며,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가 곧 메시야임을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였다(Boismard). 또한 그는 나다나엘이 숨겨진 메시야 이론의 증거를 무시하고 제시했다고 강조하였다(Boismard).
2. 참이스라엘 사람(47,48절) 47절의 '참이스라엘 사람'의 문자적 의미는 '참된 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알레도스(ajlhqw'")는 여기서 부사어로서 형용사 알레디노스(ajlhqinov")와 동등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 이름 중에 한 가치 있는'이라는 의미이다(R.Bultmann). 48절의 '무화과나무'는 때때로 랍비들이 율법을 연구한 장소로서 보이는데(Midrash Rabbah), 무화과나무를 율법에 비교하기도 하였다(Tal Bab Erubin). 따라서 아마도 나다나엘은 서기관이나 랍비였을 것이라는 전승이 주장되어 왔다(Raymond, E.Brown). 아마도 나다나엘은 이 나무 밑에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였고, 예수는 그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음을 확신시켰을 것이다(J.Jeremias). 또한 '어떤 나무 아래서'라는 질문은 매우 평범한 질문이며, 이는 '그것에 대하여 모두 나에게 말해 주겠습니까'를 의미하는 격언적인 표현에 불과하다(C.F.D.Mould).
3. 더 큰 일(49-51절) 49절에서 나다나엘이 예수에게 한 고백은 그의 세례 고백문을 반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세례 고백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Bornkamm). 50절의 예수의 질문은 의문문이라기보다는 서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나다나엘의 믿음은 오직 기적에 근거했을 뿐 근거가 매우 희박한 믿음의 소유자였다(C.K.Barrett). 51절에서 예수가 아멘을 가르침의 초두에 사용한 점은 매우 이상하고 진정적 회상을 불러 일으킨다(.D.Daube). 본 절은 야곱의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으나, 창세기와 요한복음 중 어디에나 천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치 않다(C.K.Barrett). 창28:12에 대한 팔레스틴 탈굼은 단순히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을 보려고 오르락 내리락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McNamara). 이에 반하여 천사들은 사람의 아들의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올라갔다가 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다시 내려왔다는 주장도 있다(Schnackenburg).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빌립의 나다나엘 전도(43-46절) 43절의 '갈릴리'는 유대 팔레스틴의 위쪽 주변의 커다란 이방 지역으로 문자적으로는 이방인의 범위, 외국인의 지역을 의미한다. 거기서 예수님은 벳새다 출신의 그리스식 이름을 지닌 빌립을 보셨다.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는 갈리리 호의 북동 해안의 매우 헬라화된 도시였다. '나를 좇으라'는 공관복음서에서 헌신의 부름의 핵심(막1:172:14;8:34;10:21)으로 그것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귀착된다. 그것은 제자직을 지적, 감상적, 행동적 용어에서보다는 오히려 관계적 용어로 정의한다. 그는 숙고할 아이디어, 경험할 분위기, 이를 과제가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사람이었다. 성경의 법이나 성전 의식 대신에, 예수님은 감히 자신을 하나님께 이르는 원천으로 동일시한다. 게다가 그이 부름은 미래 대면이었다. 따름은 한도가 없고 역동적인 순례이지 폐쇄적이며 정적인 위치는 결코 아니다(W.E.Hull). 44절의 '한동리'라는 말은 그들 두 사람이 빌립에게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했음을 나타낸다. 빌립이 예수님을 따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그는 그랬을 것이다(J.W.Stallings). 45절의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근처 출신의 유대인(요21:2)으로 그는 요한복음서에서만 나타난다. 예수를 '모세가 율법에…기록한'의 내용과 동일시하는 것은 신18:15-18(신34:10)에 기록된 모세 같은 선지자임을 특별히 암시하는 것 같다(W.E.Hull). 46절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지역적으로 이웃 도시들 사이에 경쟁이 있기 때문에, 나다나엘은 근처의 나사렛에 대한 가나의 경멸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는 나사렛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의 아들이 성경의 약속대로 예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신중한 성경학도들처럼 행동했다. 빌립은 46절의 나다나엘에 대한 맞대응에 대하여 '와 보라'는 효과적인 대답을 한다(W.E.Hull).
2. 참이스라엘 사람(47,48절) 47절에서도 42절처럼 예수님은 그가 초자연적 지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인다(R.Schnackenburg). 나다나엘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자신의 기원을 경시했던 이 사람을 칭찬하였다. 예수님은 그를 구약 종교의 참된 구체화로 보았다(W.E.Hull). 48절의 '무화과나무 아래'는 하나님의 법을 연구하는데 영적으로 대단히 이상적인 조건들(미4:4슥3:10,W.E.Hull)이며 '사람의 행방과 동기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나타내는 것이다(C.F.D.Mould). 나다나엘은 아마도 그곳에서 명상을 하고 영적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F.F.Bruce).
3. 더 큰 일(49-51절) 49절의 '하나님의 아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왕'(시2:7)과 연결된 칭호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가장 큰 선생님(랍비)이 된 것이다(W.E.Hull, J.W.Stallings). 이 말은 신약에서 이곳을 제외하고 단지 세 번만 사용되었다. 마27:42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조롱받아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요구받는다. 막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적으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요12:13은 예루살렘을 입성하면서 다중적인 의미로 이러한 단어들로 환영받는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왕이었다. 중간기에 메시야는 신적 통치의 특권을 집행하는 것으로서 생각하게 되었다. 나다나엘은 그에게 공개적으로 최고의 어휘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50절의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이것보다 더욱 확신적인 증거-가나의 혼인잔치 이적-를 장래에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J.W.Stallings). 51절의 '인자'는 구약의 후반부에서 발전하였다. 예수님은 이 칭호를 벧엘의 야곱의 꿈의 기사와 유사하게 연결시켰다.(창28:12).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인자 자신이 사다리였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시의 인간적 통로임을 주장했다(W.E.Hull).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야곱과 예수의 비교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른다' 예수의 장엄한 문투인 이 단언 형식은 요한복음에 20회나온다. '너희에게' 대신 '네게'로 되어 있는 것이 5회 더 나온다. 이 용어는 장엄한 선언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예수의 말'의 특징적인 어법이다. 이 말의 사용을 통하여 예수의 권위와 예수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능가하는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2. 천사들이 한 일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이라는 구절은 창28:12의 야곱의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천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창28:12에 대하여 팔레스틴 탈굼은 "주의 앞에서 나온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했으며, 그들은 야곱을 보았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단순히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을 보려 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여기서는 천사들을 수반하고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함이 좋다.
3. '인자 위에' '사람의 아들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했다는 표현을 창28:12에서는 천사들이 '사다리' 위아래로 오르락 내리락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문법적으로는 '그'의 위로 오르락 내리락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요한복음은 사다리를 사람의 아들로 대치시킨다. 천사들의 움직임은 위의 세상과 아랫 세상과의 접촉을 보증한다. 원시적인 묵시문학 사상에 의하면 사람의 이들은 천적인 존재로서 마지막 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하늘과 땅 사이의 교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요한은 원초적이고 원형적이며, 천적인 인간에 관한 보다 초기의 사변으로 돌아감으로써, 그리고 성육신의 의미를 숙고함으로써 사람의 아들인 예수 안에서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의 단순한 종말론적인 접촉이 아니라 영원한 접촉을 본다. 사람의 아들은 천상과 지상 모두에 있다(요3:13). 그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내려왔지만(요6:27,53), 그의 영광으로 다시 올라갈 것이다(요6:62). 그러나 이런 올라감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요3:148:28;12,23,34;13:31). 이제 중요한 것은 벧엘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격이다.
당대인이 생각하는 하늘의 개념(1:43-51) ◈ 세계배경 문화사 ◈
하늘은 그 자체에 부여된 신격으로 인하여 우주를 창조한 초월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즉 신들이 거처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또한 비를 내리게 하여 모든 작물의 수확을 책임지는 존재로 성정(聖定)되었다.
근동/팔레스틴 : 이스라엘의 경우, 넓은 의미로 하늘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우주'의 바다 상층을 뜻한다. 그러므로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간주되었으며, 아카드어와 아랍어에서는 하늘과 어근을 같이하는 용어들이 환유법으로 사용되어 '비'를 의미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에서 하늘은 또 좁은 의미에서 땅의 천장, 혹은 덮개를 의미했다. 즉 하늘은 우주의 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주의 바다를 가로질러 쳐 있는 막으로 묘사되었다. 이 막은 다양하게 표현되었는데,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하늘이라는 개념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 자료와 호머의 작품 속에서도 하늘을 '철로 된 하늘'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하늘의 막을 뜻하는 단어가 '라키아'인데 이것은 금속을 두들겨서 길게 핀 것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은 메소포타미아의 자료들에서도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우주의 공간은 천막처럼 뻗쳐 있거나, 혹은 휘장처럼 내려 있는 기다란 은천이나 옥양목으로 묘사되었다. 「사자의 서」에서 하늘이 '피부'로 표현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하늘을 겉옷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밤하늘을 '알록달록한 겉옷'이라고 한 것이 그 보기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에타나 신화를 보면 그들 최고의 신인 아누는 가장 높은 3층에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아울러 당시 근동 지역 사람들은 일정한 형태의 기둥이 있어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고 믿었다.
서양/그리스 :그리스에서 하늘은 제우스 신이 거처하는 곳이며, 천사들이 사는 곳, 나아가 신 자체, 신의 의지·신의 섭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푸른 하늘은 신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이고, 구름은 신의 옷이며, 빛은 신의 연고, 별은 신의 눈으로 불리기도 한다.
로마 :로마 사람들에게 하늘이 주는 것은 신이 주는 것이고, 하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신을 두려워 하는 것을 뜻하며, 하늘을 두고 하는 맹세는 신에 대한 맹세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그리스와 로마에서 하늘은 신과 동일한 개념으로 쓰였으며, 최고의 행복과 기쁨·아름다움이 있는 낙원으로 상징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늘은 극한, 극도,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키며, 빛과 만물의 근원지라고 생각하였다.
동양/중국 : 유교에서 하늘은 도덕성의 감시자, 화복의 주제자로서, 모든 사람들의 공로와 과실에 근거하여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을 각각 내림으로써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불교에서의 하늘은 윤회의 한 과정으로서 육도(六道)중의 하나에 속하는데, 천계가 상위의 것이지만, 이때의 천계는 인간의 자율적 사고인 고해(苦海)가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성불에 이룰 수 없으므로 인계보다 못한 개념이다. 도교의 하늘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서, 옥황상제가 주재한다. 여기서 옥황상제는 시공을 초월하여 인과에 얽히지 않고 영원히 절대 자존(自尊)한다. 그리고 천하의 제후들을 다 조회하고, 인간 제왕의 수명부(受命符)를 관장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이곳으로 돌아간다는 관념이 형성되어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하늘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늘은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히1:10-12벧후3:10). 그리고 그곳에 거하는 이들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 천사들, 주의 백성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늘에는 기쁨과 위로, 영광, 안식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가야 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편견의 내용과 결과(1:43-51)
앙드레 지드는 말하기를 '편견은 문명을 떠받치는 기둥이다'라고 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그릇된 견해를 조금씩은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 말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46절)고 한 말 속에서 우리는 그릇된 선입관과 편견의 단면을 볼 수 있다.
1. 지역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속한 동네다. 유대인들은 변방 지역 갈릴리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고 했다, 그만큼 이방 외세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며 반란이 많았던 지역이어서 그 지역을 '이방의 갈릴리'(마4:15)라고 부른 것이다. 그릇된 선입관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큰 피해를 당하고 있다.
2. 사람에 대한 편견 편견 중에 가장 좋지 않은 것이 사람에 대한 것이다. 그 사람의 전력이나 출신 성분 또는 학력, 직업을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나 가능성을 그릇되게 판단하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나사렉 고향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막6:3)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당하기도 했다. 편견이란 '엉터리 지식'이다. 알기는 알되 그릇되게 아는 것이기에 무지보다 더 무섭다.
3. 편견의 결과 편견의 결과와 영향은 언제나 폭력과 갈등을 낳는다. 주님도 동네 사람들에 의해 폭력을 당한 일도 있다(눅4:28,29). 단체의 갈등, 민족간의 반목도 편견에 의한 예가 많다. 편견은 사단이 뿌린 불행과 죄악의 한 씨앗임을 알자. 그래서 성경은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정죄한다. 그리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고'(롬3:12)라고 함으로써 불신앙도 편견의 일종으로 죄악시하고 있다. 넓은 마음, 넓은 눈으로 세계를 보자.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주께서 성도에 대해 아시는 것(1:43-51)
나다나엘은 본문 외에는 성경에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주님의 제자다. 그래서 사름들 가운데 그를 상징적인 인물이나, 또는 바돌로매와 이명동인(異名同人)의 제자로 보기도 한다. 그와 같은 미미한 제자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읽을 수 있다.
1. 성도들의 단점을 아심 주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홀로 않아 있던 것을 아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빈정댄 것도 알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의 성급한 성격의 단점보다도 그의 속에 있는 장점을 칭찬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주님은 성도들의 연약한 단점을 아신다. 아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 단점을 감싸주시고 용서하시며 성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2. 그의 형편을 아심 주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아신다고 했는데 이는 성도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알고 계시다는 증거다. 성도의 괴로움도, 애로도 알고 계시며 성도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쓸 것을 미리 공급해 주시고 우리가 기도하면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이다.
3. 그의 장래를 아심 우리가 가장 기뻐해야 할 일은 주님은 우리의 장래까지 이미 아시고 계시다는 점이다.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절)고 하셨고 하늘이 열리고 주님이 하늘의 천사와 교통하는 것도 보리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비천하고 땅에 속해서 고난받고 있으나 주님의 눈에는 우리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영광과 존귀를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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