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은 1세기말경에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가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즉, 사도 요한은 그 당시
의 구체적인 독자들을 위하여 복음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그 당시 사람들의 상황을 어느 정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단지 그 당시의 수신자들에게만 주어진 인간적인 책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그 후에 오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과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읽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지 하나의 인간 역사를 다루는 책이 아니요 하나
님의 아들의 복음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 복음서를 주
시기로 예정하셨으며, 이를 위해 사도 요한을 준비시키셨고 때가 되매 그를 통해 이 복음서를 기
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요한복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복음이며 사도 요한은
그 하나님의 복음을 기록하는 데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즉, 이 복음서의 ‘제1 저자’(auctor
primarius)는 하나님이시며 사도 요한은 ‘제2 저자’(auctor secundarius)이다. 오늘날 신학이 ‘제
1 저자’를 무시하고 이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성경의 ‘제1 저
자’가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무시할 때 우리는 성경을 그저 호머의 일리아드
나 오딧세이처럼, 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오델로처럼 한낱 인간의 작품으로 읽게 되는 오류
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복음이 요한 당시의 ‘일차적 수신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또한 ‘오
늘날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무시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고문서나 역사서가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교훈으
로 주어진 책이며(롬 15:4),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이것은
성경이 역사 속에 주어졌지만 역사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그 당시의 언어와 관습과 문화 가운데 주어졌지만 또한 그 당시의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의미와 교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에도 그 당시(1세기말)의 언어와 사상, 배경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어떤 면에서, 하
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서 명료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믿음으로 읽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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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해되며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런 . 점에서 꼭 그 당시의 시대 배경을 다 알고 난 연후
에라야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그런 주장은 신자들의 일상 경험에도 반
한다. 사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구약이나 신약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별다른 이해가 없는 상황에
서도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으며, 또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살아간다. 따라서 하나님
의 말씀인 성경을 학자들의 연구의 결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엘리트주
의이며 학적 권위주의이다. 그것은 평신도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결과를 초래하
고 만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의 언어나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성경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오늘
날 적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별히 성경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자들에게는 성경이 기록된
그 당시의 배경이나 사상을 아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 요한복음의 기록 배경
요한복음의 저자 곧 제2 저자가 사도 요한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록 오늘날의 수많은 학
자들이 사도 요한의 저작자 됨을 의심하고 여러 가지로 다르게 말하고 있지만, 요한복음 자체의
증거(20:2,3, 19:15,16, 21:20, 21:22-24 등)와 고대 교회 저술가들의 증거로 볼 때 사도 요한이
저작자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지 아니하고 요
한복음 기록 당시의 상황과 기록 목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몇몇 고대 교회의 증거들을 살펴보
고자 한다.
2세기 후반에 살았던 이레네우스(Irenaeus)는 그의 유명한 「이단논박」(Adv. Haer. III,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후에 주의 품에 의지하여 있던 주의 제자 요한은, 그가 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 때에, 자신이 직접 복음서를 출판하였다.” 또한 폴리크라테스(Polycrates)
도 “주의 품에 의지하던 요한이 … 에베소에 잠들었다”고 증거한다(Eusebius, Hist. Eccl.
V,24,3). 따라서 요한복음은 1세기말에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있을 때에 쓰여진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
그러면 요한복음은 어떤 의도로 쓰여졌을까? 이에 대해 우선 요한복음 자체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곧 독자들이 이 복음서를
읽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또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
다. 여기서 ‘믿다’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것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믿게 되는 것(영접, 회심)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믿고 있는 사람이 계
속적으로 잘 믿는 것(곧 의지, 신뢰)을 말하는 것인가? 전자의 경우라면 이 복음서는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요, 후자라면 신자들을 위한 것이 된다. 원어상으로 살펴볼 때 ‘믿다’라는 동사의 시상
(時相)이 아오리스트(aorist)으로 되어 있으면 전자의 것을 지지하고, 현재 시상이라면 후자의 것
을 지지하게 된다. 그런데 사본상으로 전자의 독본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후자의 독본을 가지
고 있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사본의 수나 비중을 따져볼 때 전자 곧 아오리스트 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우선적으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
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믿어서 생명을 얻게 하려고”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것은 물론 이미 믿고 있는 사람은 이 복음서를 읽을 수 없다거나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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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미 주님을 믿고 있는 사람도 이 복음서를 . 읽으면 그 믿은 바 예수님에 대해 더욱 분명히
알게 될 것이고 그 믿음이 견고하게 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일차적 기록 목적이 소아시아 주변의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이었다면, 그 당시 소아시아 사람들의 상황을 어느 정도 고려하고서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
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 자체가 모든 시대와 모든 상황에 통용되는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도 요한이 어느 정도는 그 시대 독자들의 상황을 고려했을 것으로 생
각된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주요한 개념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골라서
그 당시 주변의 배경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3. 요한복음에 나타난 주요 개념들
1) 말씀(로고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말한다(1:1-3). 이처럼 예수님을 ‘말씀’(로고스)으로 부
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왜냐하면 ‘로고스’란 말은 그 당시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친숙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영지주의 사상, 스토아 철학, 필로의 사상,
유대교와 구약 성경 등 그 당시의 여러 배경과 사상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과연 여기서 어떤 의미로 ‘로고스’란 단어를 사용하였을까? 이 단어의 배경은 무엇일
까?
먼저 요한복음 서론(1:1-18)의 로고스는 구약 성경의 ‘다바르’(말씀) 또는 ‘토라’(율법)일 것이
라는 가정을 생각해 보자. 구약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cf.
창 1:3, 6, 히 11:2). 이것은 요한복음 1:3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를 잘 설
명할 수 있다. 또한 4-5절에서 ‘생명’과 ‘빛’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도 구약에서 증거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그러나 C. H. 다드에 의하면, 요한복음 서론에서 로고스의 개념을 구약 성경의 ‘말씀’이나 ‘율
법’으로 이해할 때 두 가지 난점이 있다고 한다(C. 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53, p.273). 그것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는 구절(1절)과 “말씀이 육신이 되셨
다”는 구절(14절)이라고 한다. 하나님에 의해 말해진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사상은 구약 성경에
서는 찾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다드는 지혜 문학에서 그 배경을 찾아보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다드의 성경관
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지혜 문학이란 잠언과 솔로몬의 지혜서, 그리고 시락의
지혜서 등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잠언은 구약 성경이 아니란 말인가? 왜 잠언은 따로 떼어서 외
경과 같은 부류에 집어넣었는가? 오늘날의 현대 신학자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다드
에게도 뚜렷한 정경관이 없으며, 구약 성경도 그저 하나의 인간의 작품 곧 유대인들의 작품으로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구약 성경에서 배경을 찾을 때도 사실은 구약과 유사한 유대
랍비들의 문헌 사이를 자유로이 드나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다드의 견해를 계속 살펴보기로 하자.
위의 지혜 문학들에 보면 지혜가 인격화되어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잠 8:22,30,35, 지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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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락 등 따라서 요한복음의 9:2, 7:20,26, 24:6,8 ). 서론은 소위 ‘지혜’ 학파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한다(Dodd, p.275).
그러나 다드는 “그 말씀(로고스)은 하나님이셨다”는 진술에 대한 좀 더 분명한 배경은 알렉산
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의 로고스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예수님 직전에
살았던 필로는 스토아 철학을 따라 이 로고스를 둘로 나누어 이해했다. 곧 사람에게는 ‘내재적 로
고스’(logos endiathetos)와 ‘표출된 로고스’(logos prophorikos)가 있다고 보았다. ‘내재적 로고
스’는 마음속에 있는 이성적 생각(the rational thought in the mind)을 말하고, ‘표출된 로고스’
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말(the thought uttered as a word)을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
적 로고스에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로고스는 하나님의 생각, 그의 영원한 지혜를 뜻한다. 이것
이 후에 형태가 없는 비실재적인 물질로 발출되었고, 그것으로부터 실재적이고 합리적인 우주를
만들었다고 보았다(Dodd, p.66).
물론 필로는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교의 신관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이나 그것의 일부
를 신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에 반대하였다. 필로는 로고스를 하나님과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로고
스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보았다(p.66). 우주의 질서와 의미는 초월하신 창조주의 생각을 나타
낸다. 그러나 필로에게서 로고스는 단지 우주에 나타난 의미나 계획만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창
조적 능력이었다. 이 창조적 능력(로고스)을 통해 우주가 생겨나고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
각일 뿐 아니라 또한 행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점이 바로 필로에게 있는 히브리적 요소라
고 말할 수 있다(p.277). 이러한 로고스는 또한 신적 통치의 매개자였다(p.68). 로고스는 ‘만물의
통치자이며 운행자’이며(De Cher. 36), 세상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들의 사환’이다(Quod Deus
57). 로고스는 또한 세상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도 매개자가 된다(De Vit. Mos. II,134).
다드는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요한복음의 서론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로고스란 단어가
요한복음의 서론 외에서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다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필로적 의미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필로의 로고
스 사상과 유사한 로고스 교리의 실체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나타나 있다고 결론짓는다
(p.279). 따라서 요한복음의 서론에 나오는 로고스는 스토아 철학에 나오는 바와 유사한, 그러나
필로에 의해 조정된, 그리고 또한 다른 유대인 저술가들에 나타나는 지혜 개념과 유사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우주 속에 있는 이성적 원리이다. 그것의 의미와 계획과 목적은 신
적인 인격으로 생각되어졌으며, 그 인격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이 계시되고 활동하셨다.”(p.280)
그러나 우리는 다드처럼 필로의 로고스 개념이 요한복음 서론의 ‘말씀’(로고스)의 배경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하는 ‘말씀’과 스토아 철학 또는 필로가 말하는
‘로고스 사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당시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스토아 철
학에 익숙해 있었으며, 그리고 혹 필로의 사상을 접해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이것은 의문이다),
사도 요한이 그러한 스토아적, 필로적 개념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데는 무리
가 따른다. 이러한 무리는 다드가 요한복음 1:1에서 ‘관사 없는 하나님’(theos)과 ‘관사 있는 하나
님’(ho theos)을 구별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여기서 전자(theos)는 필로의 ‘로고스’(logos)
를 가리키고, 후자(ho theos)는 ‘신성의 원천’(Fons deitatis)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관사가 있
고 없고에 따라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옛날에 오리겐이 범한 바와 같은 실수를 다시 범하는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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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오리겐은 그의 요한복음 주석 에서 관사 ( 「」있는 하나님은 성부를, 관사 없는 하나님은 성자
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문법적으로 오류임이 이미 밝혀졌다. 여기 1절에서 “그 말씀은 하나님이
셨다”(qeo;" h\n oJ lovgo")에서 ‘하나님’(qeov")에 관사가 붙지 않은 것은 이 단어가 그 문장에서 술어
(predicate)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Colwell의 법칙).
C. H. 다드나 그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의 근본적인 잘못은 요한
복음의 ‘말씀’(로고스)을 기본적으로 스토아-필로의 사상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한 데 있다. 그
들은 스토아-필로의 사상 배경에서 ‘로고스’ 개념을 먼저 설정해 놓고서 이 개념이 어떻게 ‘예수’
에 들어맞는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갖가지 어려운 설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스토아 철학의 비인격 로고스가 결코 인
격체 예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필로의 경우는 스토아적 로고스 개념이 구약의 배경을 거치
면서 많이 수정되기는 했지만, 그 기본 구도에는 여전히 스토아적 한계가 남아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복음 서론의 ‘말씀’(로고스)을 바로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의 모든 사고의 틀
을 바꾸어서 인격체이신 ‘예수님’에게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 요한은 지금 여기서
어떤 신적 원리를 가리켜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ent
Christ)를 가리켜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여기서 어떤 추상적 원리나 개념을
가지고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에 나타나시고 그와 함께 계셨으며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며 손으로 만져 보았던 그 인격적 예수님을 토대로 하여 그의 복음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오셔서 증거하시고 역사하셨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예수님은 이 땅
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래서 태초부터 계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 곧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요한은
여기서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선재하신)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우리는 요한복음에 많이
나타나는 비유와 상징의 사용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을 가리켜 ‘빛’이라고 했을
때(요 1:4,5, 3:19, 8:12 등) 이것은 상징이다. 이것은 ‘빛’의 속성 중 어떤 것이 예수님의 어떤
면을 나타내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 범주 내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빛’이라
는 물체를 가지고서, 예를 들어 광양자(光量子)가 어떻게 예수님이 되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면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다. 또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라고
했을 때에도(요 15장), 어떤 사람이 포도나무를 보고서 그것이 예수님이라고 믿고 그 앞에 절하
고 숭배한다면 그것은 바로 미신이요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우리의 관계
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설명하시면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영양을 공급받아 과실
을 맺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잘 붙어 있어야만 풍성한 과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비유
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 곧 ‘태초부터 계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서론에 나타나는 ‘말씀’(로고스)에 대
해 우리는 처음부터 인격적인 예수님, 곧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한다.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할 때에도 무슨 스토아적인 ‘표출’(prophorikos) 사상을 생각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천지창조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도 하나님의 생각이 이제 ‘표출’되고 ‘구현’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선재하신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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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요한이 여기서 ‘말씀’으로 불렀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단어들이 많이 있었지만 ‘말씀’으로 비유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
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이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확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약 성경과 그 가운데 있는 요한복음도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
님이 제1 저자이심을 생각할 때 그 배경은 아무래도 구약 성경이라고 생각된다. 다드처럼 잠언을
제외한 구약이 아니라 잠언을 포함한 구약 성경이 그 배경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곧 창세기
1장과 시편 33장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는 구절들과
잠언 8장에 있는 바와 같이 ‘인격화된 말씀/지혜’가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은 한 인격체의 뜻과 사상을 전달하는 도구, 곧 계시의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
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자로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내셨기 때문
에(요 1:18, 12:45, 14:9 등),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Revealer) 되시는 예수님을 비유로
지칭하는 데 있어서 ‘말씀’은 좋은 단어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요한복음 서론의 ‘말씀’의 배후에는 이미 이 세상에서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셨
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이러한 구속사적 사실들이 요한복음의 배후에 놓여 있으며, 사도들에게 직접 생명의 말씀을 증거
해 주신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계시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1-2) 요한복음
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요한이 이 땅에 오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경험
하였으며, 또한 그를 이 세상에 증거하다가 나이 많아서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오던 1세기
말에 기록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요한복음은 어떤 철학
자의 책상 앞에서 ‘로고스’ 철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요 복음 전도자였던 사도 요
한이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기록한 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
는 안 된다.
2) 영생
다음으로 요한복음에서 아주 빈번히 나타나고 있는 ‘영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영생’은 곧
‘영원한 생명’인데, 간단히 줄여서 그냥 ‘생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도 우리로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요 20:31).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요
10:10).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생명’ 또는 ‘영생’의 개념은 무엇일까?
먼저 유대교에서 ‘영생’의 개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Dodd,
pp.144-146). 첫째로, ‘무한히 연장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에녹
10:10). 둘째로, 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는 ‘죽음 후의 삶’으로서 무한히 지속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열두 족장의 증언, 솔로몬의 시편 등). 셋째로, ‘이 세대’와 대비되는 ‘오는 세
대에서의 삶’의 개념이다. 오는 세대에서의 삶은 단지 무한한 시간의 지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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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적인 면도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4에즈라 7:12-13, 8:52-54).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구약 성경에 있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주로 외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개념이며, 그 문헌들 중에는
신약 성경보다 늦은 것들도 많이 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어떤 것이 도리어 신약 성경과 기
독교인들에 의해 영향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헬라주의 사상(헬레니즘)에서는 ‘영생’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플라톤은 ‘영원’을 무시간
적인 것(無時間性)으로 이해했다. 피조된 세계에는 시간성이 작용한다. 그러나 영존하는 본질에는
시간이 없다. ‘였다’와 ‘일 것이다’는 시간의 양태이고 영원한 본질에게는 ‘이다’만이 해당된다. 이
러한 플라톤의 영생 개념을 필로가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생명은 시간이 아
니라 영원이라고 말한다. 영원은 시간의 원형(原型, archetype)이며, 영원에는 과거나 미래도 없
고 오직 현재뿐이다(Qoud Deus 32). 이런 맥락에서 그는 신명기 4:4의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
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주석한다. 필로는 여기
서 ‘오늘’이란 ‘끝이 없고 다함이 없는 영원’을 뜻한다고 말한다(De Fuga 57).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이러한 무시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영생은 시간적인 영속성을
배제하지는 않으나(예를 들어 4:14, 6:35, 49-51, 11:25-26 등), 단순히 양적으로 무한히 지속
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축복으로
서의 질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36 등). 이 영생은 꼭 미래에, 사후(死後)에라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영생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영생의 현재성이 많이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5:24에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생을 얻었고’라고 되어 있는 부
분은 원어상으로는 현재형이다. 곧 현재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생’이 무엇이냐에 대해 예수님께서 친히 답변해 주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이란 ‘시간이 없
는 것’(Plato, Philo)도 아니요 ‘시간이 무한정 연장되는 것’만도 아니다. 하나님 없이 육신적으로
오래 산다고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식물인간의 상태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
요 저주가 될 것이다. 따라서 참된 생명 곧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기계적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
격적인 앎, 곧 그분을 마음에 모셔 들이고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 왜냐하면 영생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요 1:4, 14:6 등).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고, 그렇지 않은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요 3:36).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마르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다(요 11:24). 이것은 마르다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 생각을 따라 영생을 종말론적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예
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곧 부활에 대해 그리고 영생에 대해 교
리적으로만 생각지 말고 곧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만 생각지 말고, 지금 인격체로서 그 앞에 다
가와 계시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영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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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멀리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자에게 곧바로 주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 이라고 하셨다 “ ” .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문제되
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부활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 그리고 무릇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자기 안에 영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 더 이상 멸망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키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하여 영생을 누리고 있으며, 비록
그의 몸이 죽는다 해도 그의 영혼은 죽지 아니하며 오히려 천국에 가서 주님과 더불어 더욱 풍성
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육신의 죽음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사실상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곧 ‘부활이요 생명’이
시며 믿는 자 안에는 이 주님의 ‘부활과 생명’이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4. 끝맺는 말
우리는 이상에서 요한복음이 그 당시의 여러 철학과 사상들이 뒤섞여 있는 1세기말의 독자들
가운데 어떻게 쓰여졌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1세기말에 살았던 요한은 그 시대, 그 상황 가
운데서 그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용어들을 사용하였지만, 그 내용은 그 당시 철학이나 사상에
서 채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채우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스스로 무슨 사상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
이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들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20세기말을 살아가
는 우리들도 비록 다른 시대와 상이한 문화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서 다른 언어들과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전하는 내용은 여전히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채
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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