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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요한복음 11장 캐논주석 및 원어 강해

by 은총가득 2020. 11. 30.

 

 

요한복음 11장

 

나사로를 살리심과 예수를 죽이려는 결정

요한복음11장 생명과 부활이신 주

 

본장은 예수의 마지막 7번째표적으로서 이전 여섯 표적들의 절정이다. 두 표적은 해설과 설화로, 다음 네 표적은 표적을 보충하고 해석하는 담화 설교들과 연결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이 예수의 죽음을 알리는 예비종 역할을 한다. 예수는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실 것이다.

 

1.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님의 시간 지체(1-16절)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질병

1절의 '나사로'는 신약의 여기서만 언급이 된다. 그는 병자이다. 그의 두 누이는 마리아와 마르다이다. 두 누이는 여기와 눅 10:38이하에서 언급된다. 마르다가 언니였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리아가 먼저 언급된다. 2절의 '마리아'는 주께 향유를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기던 자로서 확인된다. 3절의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는데, 예수님과 그 가정 사이의 유대 관계가 매우 밀접했음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4절의 나사로의 '병'은 인간적인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병이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사로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병의 궁극적인 문제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다.

 

2)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을 믿게 하심

5절의 '사랑하시더니'는 요한의 기억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모두를 사랑한 것이다. 개별적인 언급은 그가 한사람 한사람 사랑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6절의 '이틀을 더 유하시고'는 주님의 지체를 나타내는데 주께서 거기서 지체하신 이유는 타당하다. 그것은 그의 사랑을 더 확연하게 보이기 위함이다. 7절의 '이후에' '다시'라는 이중의 시간표는 지체한 것에 강조를 하는 것이다. 이틀 후에 비로소 예수님은 행동을 하신다. 8절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인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는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유대 땅으로 가지고 초대하신다. 9절의 '열 두시'는 하루 전체를 나타낸다. 10절의 '밤에 다니면...실족하느니라'에는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있다. 그가 실족하는 이유는 그가 빛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다. 11절의 '잠들었도다'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신자들의 죽음이 잠자는 것으로 나타남을 드러낸다. 12절의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는 예수님의 청중들이 그가 한 말을 오해하는 것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경우이다. 13절의 내용은 요한이 그 상황을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의 죽음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14절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는 그 행동이 이미 일어났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15절의 '기뻐하노니'는 주께서 이 상황을 즐거움으로 생각하심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것을 재앙으로 여길 이유가 없다. 이미 예수님께서 하실 것을 알고 있고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16절의 '도마'는 제자들 가운데 대변인으로 보통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이 문제에 선봉으로 나선다.

 

2.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17-37절)

1) 마르다의 믿음을 보충하여 완전케 하심

17절의 '이미 나흘이라'는 나사로의 죽음을 확증케 한다. 18절에서 베다니와 예루살렘이 가까운 것은 19절에서와 같이 많은 유대인들이 당시의 경건 관습 대로 위로하기 위해 여행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두 장도의 가까움은 이차적으로 나사로의 죽음이 예수의 죽음과 유사하며 준비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20절에서 마르다의 행동은 마리아와 달리 상중에 있는 사람이 취하는 정상적인 동양적 애도의 태도를 벗어난 것으로서(욥2:8,13겔8:14) 마르다의 열정적인 헌신적 믿음을 보여 준다. 21절의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과 22절의 '이제라도'는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능력에 대한 마르다의 믿음을 보여 준다. 23절의 '다시 살리라'는 마르다의 이해처럼 24절의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현재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적 부활을 강조한다. 여기서 생명은 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아버지와의 파괴되지 않는 교제를 말한다. 27절의 '세상에 오시는'는 예수의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암시이다.

 

2)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들

28절의 '가만히'와 '선생님'은 마르다의 위대한 신앙 고백과 대조되는 행동과 고백이다. 29절의 '급히 일어나'는 순종은 예수의 부르는 권세를 강조한다. 30절의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는 마리아가 부름에 순종하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31절의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므로 초점이 곡하는 상가집에서 예수에게 집중된다. 32절의 '그 발 앞에 엎드리어'는 마리아의 슬픔이 더 심화된 것을 보여 주고 동시에 마르다에 대한 가르침과 마르다의 고백이 효과 없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33절의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는 나사로의 죽음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예수의 분노하시는 반응이다. 34절의 '그를 어디 두었느냐'는 예수의 질문은 35절 이하에서 무리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만난다.

 

3) 죽음에서 생명으로

38절의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는 예수께서 표적을 행하시는 동기를 보여 준다. 39절에서 예수의 표적을 행하라는 명령은 위대한 신앙 고백자 마르다의 회의의 반응을 만난다. 40절에서 예수는 마르다의 이론적 믿음을 실천적인 믿음으로 수정, 창조하신다. 41절의 '돌을 옮겨 놓으니'는 예수의 명령하는 권세를 강조한다. '아버지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자기 계시이다. 41절의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는 것과 42절의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알았나이다'는 이미 표적을 행하기 이전에 아버지와 신적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준다. 이미 이 기도가 무리들에게 표적이 되어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43절의 '큰 소리'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강조하고 종말의 심판자의 목소리를 예고한다(5:28). 44절의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는 새 생명으로 부활한 현장감을 보여 준다.

 

3. 나사로의 부활에 대한 여러 반응들(45-47절)

1) 부활의 표적을 통해 예수를 믿은 유대인

45절의 '많은 유대인'은 기적을 보고 믿었지만 그러한 최소한의 믿음도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 준다. 46절의 '바리새인들에게 가서…고하니라'는 47절 이하의 적대적인 반응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하신 부활의 기적이 그들에게까지 전파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암시하고 있다.

 

2)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

47절의 '공회'가 소집되고 '많은 표적'과 48절의 '모든 사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파되는 복음의 효과를 강조한다.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와 49절의 가야바의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은 공회가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야 운동가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암시한다. 51,52절에 의하면, 50절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는 독자들에게 대제사장으로서의 속죄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요한의 의도를 내포한다. 53절의 '이 날부터'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고소하는 것이 결정적인 모의 결과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54절이하에서 예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기까지 한다.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때를 주관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죽은 나사로에 관한 소식(요11:1-16)

 

◈ 원문강해 ◈

 

죽은 나사로에 대한 예수의 태도

 

사람들이 죽을 병이라고 생각할 때 예수는 그 반대로 생각했으며, 제자들이 유대로 가는 것을 반대했을 때 예수는 자신의 빛되심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생각과 경영이 사람들의 그것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안목과 생각도 사람들의 그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1-4절)

1) 병든 나사로

(ti" ajsqenw'n, Lavzaro" ajpo; Bhqaniva" oJ ajdelfo;" Lavzaro" hjsqevnei.티스 아스데논 라자로스 아포 베다니아스…마리암…호 아델포스 라자로스 에스데네이;어떤 병든 자가…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마리아는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1,2절)

본문 서두에 개역성경의 번역에서 생략한 데(dev그런데)는 앞 장과의 간격을 보여 준다(Vince수, Westcott). '나사로'(Lavzaro"라자로스)는 히브리어 엘르아자르(rz:x:l:a,)에서 유래되었으며, '하나님은 나의 도우심'이란 뜻이다(T.Whitelaw). 다른 복음서들은 나사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본서에 나사로가 살아 있었거나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A.Barnes).

나사로가 살았던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 약 3km에위치한 것으로 알려진다. 알레입사사(ajleivyasa붓고)는 문자 그대로 '기름을 붓는다'는 의미이다. 이와 달리 성부가 성령으로 성자에게 기름 부음을 나타낼 땐 크리오(crivw기름 붓다)를 사용한다(Trench).

2절의 '병든'(njsqevnei에스데네이)이란 미완료 과거로서 나사로가 오래 전부터 병든 상태로 지내왔음을 암시한다. 본문은 예수께서 11장을 통해 발생되어질 사건의 장소를 보여 주고 있으며, 이 인물이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임을 2절의 부연 설명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2) 예수께 온 전갈

(ajpevsteilan ou\n aiJ ajdelfai; pro;" aujto;n levgousai, Kuvrie, i[de o}n filei'" ajsqenei'. 아페스테일란 …프로스 아우톤…퀴리에 이데 혼 필레이스 아스데네이;예수께 사람을 보내어…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3절)

퀴리에(Kuvrie주여)는 나사로와 그 누이들이 예수를 향해 부르던 일반적 호칭일 것이다. 이 호칭을 통해 예수와 이 가족들이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W.Hendriksen). 또한 이데(i[de보고서)는 상황의 급박함을 알려 주는 표현으로서, 일반적으로 주의 집중을 요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W.Bauer). 본문에서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강한 요청을 암시한다. 필레이스(filei'"사랑하시는)는 이성적인 거룩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가페(ajgavph)와는 달리 자연적인 사랑, 친구간에 맺어진 사랑을 뜻하며, 예수와 나사로가 인간적인 깊은 교제를 통해 우정을 나누고 있었음을 암시한다(J.C.Ryle). 특히 이는 2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으로서 예수님께서 현재에도 계속 사랑하신다는 뜻을 함축한다.

나사로의 가족들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우선적으로 예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것은 예수가 그를 고칠 수 있다는 병고침에 대한 확신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청하는 자세는 본받을 만한 신앙의 태도이다.

 

3) 예수의 기이한 선언

(Au{th hJ ajsqevneia oujk e[stin pro;" qavnaton ajll j uJpe;r th'" dovxh" tou' qeou'하우테 헤 아스데네이아 우크 에스틴 프로스 다나톤 알르휘페르 테스 독세스 투 에우;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4절)

프로스 다나톤(pro;" qavnaton죽을)은 문자적으로 '죽음까지 이르는'이란 뜻이다. 독사스데(doxasqh영광을 얻게)는 부정과거 수동형으로서 '영광되게'라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신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이다(J.Jeremias). 예수는 준비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자기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휘오스 투 데우(uiJov" tou' qeou'하나님의 아들)는 문자적으로는 태생의 소유격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직접 낳은 아들'을 뜻한다(H.W.Smyth).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이신 신성의 예수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2. 시간을 지체하시는 예수(5-10절)

1) 이틀을 더 유하심

(hjgavpa de; oJ jIhsou'" th;n Mavrqan kai; th;n ajdelfh;n aujth'" kai; to;n Lavzaron. e[meinen ejn w|/ h\n tovpw/ duvo hJmevra":에가파 테호 예수스 텐 마르단 카이 텐 아델펜 아우테스 카이 톤 라자론 …에메이넨 …뒤오 헤메라스;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이틀을 더 유하시고, 5,6절)

에가파(hjgavpa사랑하시더니)는 3절의 '사랑하시는'의 필레오(filevw)와는 달리 아가파오(ajgapavw사랑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가 자신들을 친구간의 사랑인 필레오(filevw사랑하다)하고 있다고 표현하였으나, 예수께선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신적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이다. 또한 이 단어의 시제는 미완료 과거로서, 일회적 사랑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적인 사랑을 나타내 예수께서 사랑하신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선 왜 이틀을 더 유하셨을까? 사랑하는 그 마음은 아마 급히 달려가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선 사람들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들어 나사로의 부활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시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더 큰 영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께선 준비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F.L.Godet, Holtzmann).

 

2) 유대로 다시 가시려는 예수

( [Agwmen eij" th;n jIoudaivan pavlin. JRabbiv, nu'n ejzhvtoun se liqavsai oiJ jIoudai'oi, kai; pavlin uJpavgei" ejkei'_아고멘 에이스 텐 유다이안 팔린…랍비 뉜 에제툰 세 리다사이 호이 유다이오이 카이 팔린 휘파게이스 에케이;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7,8절)

랍비(JRabbi랍비여)라는 칭호는 위에서 나사로의 누이들이 '주여'(kuvpie퀴리에)라고 부른 것과 사뭇 대조적으로 보인다.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를 향해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뉜(nu'n방금도)은 4개월 전을 의미한다. 앞 장은 12월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지금은 유월절 근처의 4월이기 때문이다(J.H.Bernard). 8절의 '하였는데'(toun에제툰)는 기본어 제테오(zhtevw찾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찾았는데를 의미하는 것으로, 계속적으로 찾았음을 암시한다.

본문을 통해 유대인들이 예수를 직접적으로 대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돌로 치려했다는 제자들의 증언이 본문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본문에 나타난 자신의 말씀처럼 다시 유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3) 세상의 참빛

(ejavn ti" peripath'/ ejn th'/ hmevra/, ouj proskovptei eja;n dev ti" peripath'/ ejn th'/ nuktiv, proskovptei, o{ti to; fw'" oujk e[stin ejn aujtw'/.에안 데 티스 페리파테 엔 테헤메라…우 프로스코프테이…에안 데 티스 페라파테 엔테 뉘크티 프로스코프테이;사람이 낮에 다니면…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실족하느니라, 9,10절)

프로스코프테이(proskovptei실족하지)는 '장애물을 보고 피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Liddle & Scott). 포스 투 코스무 투투(fw'"tou' kovsmou touvtou이 세상의 빛)는 자연적인 발광체로서의 태양빛을 의미한다.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는 '그 사람이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뜻을 함축한다. 여기에서 '없는'(oujk e[stin우크 에스틴)은 에스틴이 현재 직설법이므로 계속해서 없는 상태를 암시한다. 이런 구조는 예수가 '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의미 깊은 암시를 던져 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빛을 보면서 걸으면 실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이신 예수를 바라보면서 걸을 때 죄의 걸음으로 실족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는 12절에서 '빛을 보지 못하므로'가 아닌 그 안에 없는 고로 '즉 빛이신 예수를 그 안에 모시지 않으므로'라고 표현한 것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3. 나사로의 죽음(11-16절)

1) 잠들은 나사로

(Lavzaro" oJ fivlo" hJmw'n kekoivmhtai, eijrhvkei de; oJ jIhsou'" peri; tou' qanavtou aujtou'. ejkei'noi de; e[doxan o{ti peri; th'" koimhvsew" tou' u{pnou levgei.라자로스 호 필로스 헤몬 케코이메타이 …에케이노이 데 에독산 호티 페리테스 코이메세오스 투 휘프누 레게이;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1-13절)

케코이메타이(kekoivmhtai잠들었도다)는 완료 수동태형으로서 '잠들고 있는' 과정적 묘사가 아니라 이미 완전히 잠든, 즉 완전히 죽어버렸음을 뜻한다. 성경에선 대개 죽음을 잠에 비유하곤 한다. 그 이유는 이 두 가지의 상태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W.Hendriksen). 또한 본문에선 주님께서 나사로의 부활을 염두에 두시고 특별히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소데세타이(swqhvsetai낫겠나이다)는 '병이 완쾌하다'라는 뜻이다.(W.Bauer). 특히 미래 수동형인 본문의 시제는 나사로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회복될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유대인들은 환자의 깊은 잠을 쾌유의 징조로 받아들였다.

13절의 구조는 '예수는…저희들은…'이라는 대칭적 구조를 띠고 있다. 에케이노이(ejkei'noi저희는)는 앞의 예수와 대조적인 모습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본문에 나타나는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들의 못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예수의 뜻을 오해하고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지금의 우리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2) 나사로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예수

(Lavzaro" ajpevqanen, i{na pisteuvshte, o{ti oujk h[mhn ejkei':라자로스 아페다넨…히나 피스튜세테 호티 우크 에멘 에케이;나사로가 죽었느니라…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14,15절)

히나 피스튜세테( i{na pisteuvshte믿게 하려)는 히나( i{na)라는 접속사와 피스튜세테(pisteuvshte)라는 부정과거가 연합된 말로서 목적성을 띠며 '전적인 신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무엇을 믿도록 하고자 하셨던 것일까? 아마도 예수 자신이 바로 약속된 메시야이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시고자 했을 것이다. 그뿐아니라 제자들이 장차 십자가에서의 고난 이후에 일어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예수께선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죽음이 이제 자신에 의해 정복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구체적 증거를 보여 주시기를 원하셨으며, 그것들을 통해 제자들에게 지금과 장래에 믿음을 심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3) 디두모의 말

(Qwma'" oJ legovmeno" Divdumo" toi'" summaqhtai'", [Agwmen kai; hJmei'" i{na ajpoqavnwmen met도마스 호 레고메노스 디뒤모스…아고멘 카이 헤메이스 히나 아포다논멘 메트 아우투;디두모라 하는 도마가…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16절)

본문에 나타나는 카이 헤메이스(kai; hJmei'"우리도)는 1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로 강조적인 표현이다. 아고멘(legovmeno"가자)은 1인칭 복수 동사로 동사의 사용만으로도 표현 가능한 것을 굳이 1인칭 복수 대명사를 더 사용하여 특징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H.W.Smyth).

'디두모'(Divdumo"디뒤모스)는 헬라어이며 '도마'(Qwma'"도마스)는 히브리어로서 그 의미는 '쌍둥이'로 동일하다.

본문에서 도마가 주와 함께 죽으로 가자고 한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문맥적으로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 도마가 예수의 고난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기에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도마는 죽음이 존재하는 곳이라 할지라고 예수가 가시는 곳이라면 저희도 같이 가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요한복음 중에서 가장 큰 기적의 설화이지만, 매우 평범하고도 간결한 사실적인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다(C.K.Barrett). 이 본문의 핵심은 예수는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의존함으로서 스스로 생명을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본문에 제시된 마르다와 마리아는 원문 형태의 이야기에는 언급되어있지 않으며(Wilkins), 나사로와 두 자매 사이의 형제 자매 관계는 매우 조작적이다(R.E.Brown).

 

1. 사건에 대한 도입(1-6절)

1절의 '나사로'(La;zaro"라자로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엘르아자르(gw;[;a,)의 단축형인 르아자르(rw[l)이며, 이는 신약 시대에 널리 알려진 형태의 이름이나, 공관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R.E.Brown). 또한 두 자매와 나사로는 갈릴리 사람이었으며, 두 자매 중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로 이해할 수 있다(Hengsten-berg).

2절의 '향유를 주께 부은 자'라는 설명적 서술 내용은 편집자에 의해 삽입된 것들이며, '주'(kuvrion퀴리온)라는 용어는 예수의 사역시 3인칭으로서술하였으나 요한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R.E.Brown). 이처럼 요한은 이 구절을 통해서 막14:3-9의 향유를 부은 설화적 내용과 본문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언급한 것이다(R.Bultmann).

3절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라는 단순한 표현은 나사로가 사랑받는 제자였다는 주장에 대한 아무런 근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C.K.Barrett).

4절의 '위하여'(uJpe;r휘페르)는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며, 이에 대한 해석은 문맥에 따라서 하는 것이 극히 당연하다(W.Bauer). '하나님의'(tou' qeou'투 데우)는 파피루스 초기본(P66, P45)과 콥틱 역본에서 생략되거나 대체 되었으며, 본 절과 25절에서만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R.E.Brown).

5절의 예수가 세 사람을 사랑한 사실과 '사랑하시는 자'(3절)와는 큰 관련성이 없고(De Wetter), 4절은 아마도 끼어 든 내용인 것 같으며(A.H.W.Meyer), 5절은 6절을 준비하는 구절이 아니다(B.Crusius). '사랑하시더니'(hjgapa에가파)의 표현은 3절의 '사랑하다'(filei'"필레이스)라는 단어를 대신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미 3절에서언급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Tittmann, Wetstein). 또한 마라아가 나사로로부터 떨어져 있기를 요청받지 않은 이유는 마리아가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하여 매우 상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임의적으로 고찰한 자도 있다(Hengst).

6절에서 '이틀'을 지체한 이유는, ①예수가 나사로를 나흘 동안 죽은 채 있도록 했다는 입장과, ②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주의 재림의 약속이 지체되었기에 이 상황과 연관지어 '주가 곧 올 것이며, 부활의 소망이 있을 것'임을 상기시키고자 했다는 입장, ③예수가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난 것은 타인의 설득이 아닌 본인의 자의적 결단이었음을 알려 주고자 요한이 이렇게 서술했다는 것 등의 주장이 있다(C.K.Barrett).

 

2. 출발을 위한 예수의 권유(7-11절)

7절의 '그 후에'(e[peita meta; tou'to에페이타 메타 투토)의 표현과 같은 동음어의 부사적 표현은 짧은 시간적 간격을 암시한다(요11:112:12;19:28, J.H.Bernard). 예수가 나사로를 고의적으로 죽도록 방치한 것은 다시 그를 살리기 위함이셨고(W.Baur), 이 설화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의 초점은 '예수의 지체'문제이다(Bretschneider, Strauss, Weisse, Gfrorer, Baur, Hilgenfeld).

8절에서의 '지금'(nu'n뉜)은 '막, 당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비록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으며(H.A.W.Meyer), 이는 매우 고전적인 어법 중 하나이다(C.K.Barrett).

9절의 예수의 표현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자신의 대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으므로 두려운 위험에서 아직 안전하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②10절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종말이 오기 전에 허락된 시간을 사용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Jansen, Maldonatus, Corn, a Lapide, Wolf, Heumann, Maier, B.Crusius).

10,11절의 '친구'(fivlo"필로스)는 아마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용어인 것처럼 보인다(W.Bauer). '잠들다'(koi;ma'sqai코이마스다이)는 신약성경과 후대 기독교 문헌 속에서 신자들의 사망을 지칭하는 데 흔히 사용된 용어이다(Ignatius, Clement, Hermas).

 

3. 나사로에 대한 예수의 설명(12-16절)

12절의 '잠들다'(kekoivmhtai케코이메타이)에 대한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된 세속 문학이나 70인역(LXX)에서는 죽음에 대한 미사여구로, '잠들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제자들은 그 언급을 이해하지 못했다(R.E.Brown). 이에 반하여 혹자는 이 표현은 저자 요한이 하늘과 세상에 대하여 혼동을 일으킨 결과이며, 분명히 요한의 대실수라고 주장하였다(R.Bultmann).

13,14절에서의 '잠들어 쉬는 것'(hJ koivmhsi" tou' u{pnou헤 코이메시스 투 휘프누)라는 표현은 매우 서툰 어법이지만, 분명하기도 하다(C.K.Barrett). '죽었다'(ajpeqanen아페다넨)라는 단순과거 동사가 셈어에 있어서 완료형에 해당하므로, 이 사실은 셈어의 완료형처럼 '금방 일어난 사실'에 대한 단순과거형이 되는 것이다(Black).

15,16절의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의 이름은 히브리어로서 초기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A.H.W.Meyer), 그의 이름은 '두려움과 불신앙'을 지칭하기도 하고(Chrysostom, Euth, Zigab), '산앙과 불신앙의 이중성'(Hengstenberg)을 나타내기도 한다.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병든 나사로를 관망하는 예수(1-6절)

1절의 '어떤 병든 자'는 완곡 어법으로 표현되어 후에 병든 자가 '나사로'임을 지적한다(F.Rienecker). '나사로'(Lavzaro"라자로스)의 어원은 히브리어 엘르아자르(rw:[:l]a})로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도우셨다'이다(G.R.Beasley-Murray). '베다니'는 요1:2810:40의 베뢰아 지방의 베다니와는 다른 장소로 예루살렘 동쪽 3km 지점인 감람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D.A.Carson), 현재는 엘-아지리예(El'Azariyeh)로 '나사로'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F.L.Godet).

2절에서 '마리아'에 대해서는 요12:1-8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먼저 상세히 소개한 이유는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이 요한의 독자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C.K.Barrett).

3절의 '사랑하시는'(filei'"필레이스)의 표현은 나사로를 가리켜 '사랑받는 제자'라는 뜻(G.R.Beasley-Murray)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는' 나사로임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아야 한다(V.C.Pfitzner).

4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는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식의 영광이 아닌, 나사로의 창조와 구원의 능력을 의미한다(L.Morris).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는 이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안에서 계시되는 사건을 통해 만인에게 드러낸다(D.A.Carson).

5절의 '사랑하시더니'는 예수께서 평소에 나사로의 남매들을 사랑하였음을 밝혀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적극적인 행동을 기대하게 하는 요한의 서술 형식이다(L.Morris, V.C.Pfitzner).

6절의 '병들었다'는 표현은 이미 나사로가 죽었음을 알리는 완곡적인 표현으로(J.H.Bernard), 이런 견해는 39절에서 나사로가 죽은지 4일째로 기록하여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떠났다는 진술에서 이미 죽었음을 밝히고 있다(C.K.Barrett). 즉 예수님의 부활도 3일 후에 이루어짐으로 그 영광을 지극히 높인 것처럼 나사로의 죽음도 이를 예시한 영광임을 드러내기 위한 예수님의 처사로 해석해야 한다(J.R.Hill).

 

2. 유대로 다시 들어가시는 예수(7-10절)

7절의 '유대로 다시 가자'는 예수님의 사역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음을 암시한다(F.L.Godet).

8절에서 제자들이 유대 땅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행위임을 주장한다(R.L.Fredrikson). '돌로 치려'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되는 시점인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함을 알린다(D.A.Carson). 동시에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관계가 아주 심각한 상태에 빠져있음을 암시하여 그의 죽음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말한다(F.E.Gaebelein).

9절에서 예수님의 활동 시기를 '낮'으로 표현하여 아직은 사역의 때임을 암시해 주며 연상케한다(C.K.Barrett). '이 세상의 빛'은 암흑을 벗어나, 역경과 사망을 이겨낼 것이며, 이 세상을 정복하지 못할 시기가 곧 올 것임을 예시한다(G.R.Beasley-Murray).

10절에서 '밤'은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원수들의 활동 시간이기에 숨어 있어야 함을 지적한다(W.Hendriksen). 즉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암흑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한다(V.C.Pfitzner). '빛이 그 사람안에 없으므로'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큰 빛이 주어지지 않으면 인류는 살아갈 수 없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C.K.Barrett).

 

3. 나사로에게 가시는 예수(11-16절)

11절의 '잠들었도다'는 죽어 있는 상태를 완곡하게 언급하여 강조한 것이다(R.E.Brown). 후대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죽음을 '잠들다'로 표현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L.Morris). 이를 예수님이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초자연적인 인식에서였다(F.L.Godet). '깨우러 가노라'는 죽음 후에 있을 부활을 암시하여 성도의 부활을 주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스스로 그리고 있다(C.K.Barrett).

12절은 제자들의 무지를 드러낸 구절로 나사로의 죽음을 하나의 과정으로 바라본 예수님의 이해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F.E.Gaebelein). '낫겠나이다'는 병으로부터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F.Rienecker).

13절은 예수님의 시각과 제자들의 이해 차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D.A.Carson). 이런 언급은 요하의 의도적인 묘사로 제자들의 영적인 무감각을 신랄하게 지적한 것이다(C.K.Barrett).

14절의 '밝히'는 '감추인 사실을 공개하여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Newman), 제자들에게 있어서 불분명한 사실을 명백하게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배려를 볼 수 있다(L.Morris).

15절은 나사로를 방치해 둔 이유가 자신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보여 그들의 신앙을 신장시키는 데 있음을 말한다(R.L.Fredrikson). '기뻐하노니'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에서 더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음을 보시고 기뻐하심을 표현한 것이다(W.Hendriksen). 즉 부활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이 견고해짐을 의미한다(D.A.Carson).

16절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는 도마의 말은 유대로 다시 가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나사로처럼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식하고(V.C.Pfitzner), 예수님의 제자 된 도리로 함께 죽기를 각오한 충성스런 모습을 보인다(F.E.Gaebelein). 이 부분은 도마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기록된 것일 수 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하다(C.K.Barrett).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죄에 대한 실제적 형벌

 

낙원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경고하신 형벌은 사망이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인 전인으로서의 인간의 죽음, 곧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죽음이 죄를 통해 세상에 들어왔으며(롬5:12),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롬6:23) 말한다. 죄에 대한 형벌에 육체적 죽음이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여기는 그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영적인 죽음

죄가 이미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어거스틴(Augustine)의 주장은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그 의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래 가지고 있는 죄악된 상태와 조건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이지만 동시에 경고된 형벌의 일부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이같은 분리는 죽음을 의미한다. 살아 예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영적인 죽음은 죄책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염을 의미하기도 한다. 죄는 언제나 인간을 부패시키는 일종의 영향력이며 우리 죽음의 일부이기도 하다.

 

2. 삶의 고통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초래되는 삶의 고통도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가 된다. 죄는 인간의 삶 전체를 교란시킨다. 이것으로 인간의 참된 삶의 조화가 파괴되고 저주스러운 분열된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인간은 해체의 상태에 들어가면 이때 아주 독초와도 같은 고통이 뒤따른다.

 

3. 육체적인 죽음

몸과 영혼의 분리도 또한 죄의 형벌이 일부이다. 주께서 형벌을 경고하실 때 이 점을 염두에 두셨던 것은 다음의 본문을 보면 분명하다. '너는 흙이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이 주장은 롬5:12-21고전15:12-23의 바울의 논증에서도 분명해진다. 교회의 입장은 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하여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형벌이라는 것이다.

 

4. 영원한 죽음

이 죽음은 영적인 죽음의 절정이며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속박이 제거되고 죄로 인한 부패가 완성된다. 인간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다. 이것은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다.

 

 

촌의 행정 단위(11:1-16)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 사회의 규모가 점점 커짐에 따라 행정 개편이 요구되었다. 이전에는 주로 중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행정이 왕권 강화에 따라 지방까지 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시급하였던 것이다. 지방의 단위를 설정함에 있어서는 주로 인구 수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양 / 중국 : 중국의 옛기록에 보면 우물을 중심으로 집단 생활을 영위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초기의 촌 단위는 주로 우물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구획을 정했을 것이다. 이러한 단위가 모여 촌읍이 되고 촌읍이 모여 성시(成市)가 되었다고 한다. 읍의 단위에 대해서는 「설문」에 설명하고 있다. 즉 "옛날에 9명의성인남자가 거주하는 조직 단위는 정(井)이고, 사정은 읍(邑), 사읍은 구(丘)가 되는데 그를 허(虛)라고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중국은 한 대에 이르러 지방 행정구역을 군(郡)ㆍ현(縣)ㆍ향(鄕)ㆍ리(里)로 개편하였다. 리에는 약 100여명의인구가 살았으며 둘레는 토벽(土壁)으로 둘러싸여 여문이라는 문을 통해 출입하도록 했다. 리 안에는 다시 호(戶)와 가(家)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수 개의 리가 모여 향이 되고, 여러 개의 향이 모여 현이 되고, 여러 현을 합하여 군이라고 했다. 리는 리장, 향은 삼노, 현은 현령(縣令), 군은 군태수가 임명되어 다스리게 하였다. 향 이하의 관리들은 현령이나 군태수의 명령을 받아 향과 리를 다스렸으며, 대부분 그 지역 사람들이 많았다. 향ㆍ리는 동성동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주고 공동 생활 단체였다.

 

한국 : 당시 한국 사회는 중앙 집권적인 정치체제를 채택하고 있었기에 지방에까지는 왕권이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정치력이 지방을 통치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鄕)이나 촌(村)의 경우는 지방 호족들이 자치적으로 다스렸을 것이다. 촌내의 질서 유지는 주로 유교적인 관습에 위한 위계 질서가 확립되었다. 중앙에서 가까운 촌은 지방 관청에 속하여 지방 관청의 지배를 받았으나 여전히 촌장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수서( ^)」의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전국을 다섯 개의 방(方)으로 나누고 각 방에는 10개의 군(郡)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즉 백제는 전국을 동ㆍ서ㆍ남ㆍ북ㆍ중방으로 구분하여 지방을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 / 로마 :로마는 공화정 시대 때 정복 전쟁으로 획득한 지역에 총독을 세워 다스리게 하였다. 로마는 지방을 속주로 만들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 속주는 자치 도시들이 모여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치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이 없었고 다만 세금을 내었다. 특히 로마의 라티움 공동체의 단체를 중심으로 지방 행정이 이루어졌다. 로마는 B.C.25년에 이집트와 아프리카 지역을 복속하여 속주로 만들었으며, A.D.6년에는 유대 지역을 속주로 만들어 통치하였다. 로마는 속주 지역의 촌 행정 단위는 기존의 위계 질서를 유지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 촌은 성읍으로 불렀다. 이러한 성읍 중에서 성경에 가장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 여리고 성읍 등이다. 그 당시는 방백이나 시민회의의 처리를 받는 고대 도시 국가의 행정을 따랐을 것이다. 성경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읍은 우물의 확보와 외부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좁은 지역에 성벽을 두른 형태였는데 약 25,000-40,000㎡의 규모였다. 또한 가나안 땅 정복 후 그 지역에 대한 지파별로 분배와 관련되어 촌락이 구분된 것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가 직접 방문한 구체적인 촌락의 예만도 18회나 된다. 어떤 때는 예루살렘에서 190km나 되는 성읍까지도 방문하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마15:21).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성읍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깨달았던 것처럼 우리도 참하나님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죽음과 허무(11:1-16)

 

수전절에 예루살렘에서 당한 박해를 피하여 요단 강 동편에 계시던 예수께서는 베다니 마을에 사는 마리아의 집으로부터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으로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질병으로부터 시작되고 그것은 사단의 지배권 아래서 진행된다.

 

1. 병든 나사로

'나사로'는 예수께서 '친구'라고 할 만큼 남다른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에는 대개 그의 집에 유하셨기 때문이다(마21:1726:6;요12:1-8). 그 나사로가 병들어 죽음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로병사의 삶의 궤도를 밟는다. 이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 온 인간의 삶의 질서로서 모두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2. 나사로의 죽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은 곧 '죽음'으로 이행되었다. 예수의 신적 전지성이 그것을 아신 것이다. 나사로의 집의 비탄에 빠져 있었다. 왜 인간들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죽음이 '소멸'이고, '단절'이며, '망각'이기 때문이리라. 그 '죽음'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을 깨닫게 되고, 체념에 버리는 데 슬픔의 근원이 있다.

 

3. 죽음과 허무

자연 과학적으로 보면 '죽음'은 '해체'이다. 부패 과정을 거쳐 육체는 각기 분자로 해체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허무'를 인간에게 안겨 준다. 이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만 가능하다.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을 때 '생명'이 된다. 그리스도안에서만이 참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죽음을 삼키므로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생명의 수여자 그리스도(11:1-16)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는 나사로를 병들어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아버지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

인간에게 질병이란 아무도 원하지 않는 비극의 씨앗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 '비극'이란 없다. 인간의 고통뿐만 아니라 죽음, 그리고 피조물에게 어떤 상황이 발생될지라도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있다. 비록 인간의 질병이나 죄악까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와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하루 일을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섭리하신다.

 

2. '죽음'이란 '잠드는 것'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고 표현했다. '잠들었다'는 것은 깨어나는 것을 전제로 한 휴식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살아 있는 자(불신자)를 '죽은 자'(눅9:6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잠자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가 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산자와 죽은 자의 영원한 분기점이신 것이다.

 

3.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당신이 '생명'이라고 하셨다. 그의 생명에는 죽음이 없다. 따라서 그는 모든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자이다. 그는 죽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요단 강 동편에서 베다니 마을로 오셨다. 그것을 '깨우러 간다'고 하셨다.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 잠에서 깨어나 '부활'하게 되며, 그 후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깨어나기 위하여 잠자는 것처럼 죽음은 부활하기 위한 삶의 한 과정인 것이다.

 

베다니에 오신 예수(요11:17-37)

 

◈ 원문강해 ◈

 

마르다와 마리아와 말씀하시는 예수

 

예수를 알고 또한 믿는 사람들도 온전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확고한 믿음을 요구하셨다.

 

1. 예수를 맞이하는 마르다(17-24절)

1)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

(tevssara" h[dh hJmevra" e[conta ejn tw'/ mnhmeivw/. polloi; de; ejk tw'n jIoudaivwn paramuqhvswntai텟사라스 에데 헤메라스 에콘테엔 토 므네메이오…폴로이 데 엑 톤 유다이온…파라뮈데 손타이;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많은 유대인이…위문하러 왔더니, 17-19절)

스타디온 데카펜테(stadivwn dekapevnte5리)는 약 2마일정도의 거리이며, 스타디온(stadivwn)은 헬라의 거리 척도로 약 192m이다(F.Rienecker). 엘렐뤼데이산(ejlhluvqeisan왔더니)은 과거 완료 시체로서 이미 사람들이 다녀갔음을 보여 준다. 이 시제는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확인하고 조문을 한 연후에 예수께서 방문하셨음을 확실하게 만든다. 파라뮈데손타이(paramuqhvswntai위문하러)는 '충고하다'의 의미도 지니는데, 당시의 풍습은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르고 3일은엄격히 그리고 4일은가볍게 상을 치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J.Josephus). 그러나 위문은 보통 70일 정도까지 계속되었다(Lightfoot).

예수는 많은 시간들을 지체한 후에 베다니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사로서의 죽음을 슬퍼하고 돌아간 많은 유대인들은, 후에 그가 실제로 죽었었음을 확인한 수많은 증인들이 되었다.

 

2) 예수께 나온 마르다

(Maria;m de; ejn tw'/ oi[kw/ ejkaqevzeto. 마르다…휘펜테센 아우토 마리암 데 엔 토 오이코 에카데제토;마르다는…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0-22절)

에카데제토(ejkaqevzeto앉았더라)는 단순묘사가 아닌 유대인의 전형적인 애통의 모습으로서(겔8:14), 상을 당한 뒤에 의자나 침대 등을 엎어두고 '앉아서 우는 것'을 뜻한다(Edershein). 특히 이는 미완료 과거로서 계속적으로 앉아 있었음을 암시한다. 개역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나, 21절 원문에서는 퀴리에(kuvrie주여)라는 표현이 먼저 나오고 있다. 즉 마르다는 예수를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른 후에 22절의신앙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이테세(aijthvsh구하시는)는 '부탁한다'는 뜻으로, 은연 중에 예수가 하나님께 간청하면 들어주실 거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마르다가 비록 예수를 '주여'라고 불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메시야로 인정한 신앙 고백적 호칭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께서 무언가 하실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며, 예수께 곧장 달려나가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3) 예수와 마르다의 대화

( jAnasthvsetai oJ ajdelfov" sou. ...Oi\da o{ti ajnasthvsetai ejn th'/ ajnastavsei ejn th'/ ejscavth/ hJmevra/.아나스테세타이 호 아델포스수…오이다 호티 아나스테세타이 엔 테 아나스타세이 엔테 에스카테 헤메라;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3,24절)

아나스테세타이( jAnasthvsetai살리라)는 미래형으로 단순한 생명 소유가 아니라 활기차게 벌떡 일어서는 운동력을 묘사한다(W.Bauer).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생명을 얻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활기찬 원동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리라는 것까지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르다는 앞의 대화에서부터 계속해서 '믿는다'라는 말 대신에 오이다(Oi\da아나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불완전 현재 완료로서(F.Rienecker), '알고 있다'라는 뜻이다. 마르다의 신앙 상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할만한 믿음의 상태는 아직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과 마지막 날의 부활에 대해서는 확실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바탕하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믿음으로 진일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25-31절)

1) 예수의 선언

( jEgwv eijmi hJ ajnavstasi" kai; hJ zwhv: oJ pisteuvwn eij" ejme; ka]n ajpoqavnh/ zhvsetai, kai; pa'" oJ zw'n kai; pisteuvwn eij" ejme; ouj mh; ajpoqavnh/ eij" to;n aijw'na: 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카이 헤 조에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 칸 아포다네 제세타이 카이 파스 호 존 카이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 우 메 아포다넨 에이스 톤 아이오나;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25,26절)

본문은 에고 에이미( jEgwv eijmi나는…이니)라는 강조적 구문에 그 초점이 있다. 즉 에이미(eijmi나는∼이다)가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에고( jEgwv나는)라는 1인칭 대명사가 언급되어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자기 선포의 형태로서(H.W.Smyth), 예수 자신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동시에 본문의 구조는 예수를 통해서 죽은 자들에게 부활이,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에겐 생명이 주어진다는 확장적 구조이며 부활에서 더 넓은 영역인 생명으로 확대되어 포괄적 구조를 띠고 있다(Vincent). 에이스 에메(eij" ejme나를)를 직역하면 '내게로'로 표현할 수있다. '살겠고'(znvsetai제세타이)는 미래형이다. 한편 오다(Oi\da아나이다)라는 대답에 반해 예수는 피스튜에이스(posteuveo"믿느냐)라고 믿음에 관해 질문을 하신다.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동시에 단순 지식이 아닌 믿음을 마르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마르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묻고 있는 질문일 것이다.

 

2) 마르다의 고백

(ejgw; pepivsteuka o{ti su; ei\ oJ Cristo;" oJ uiJo;" tou' qeou' oJ eij" to;n kovsmon ejrcovmeno".에고 페피스튜카 호티 쉬 에이 호 크리스토스 호 휘오스 투 데우 호 에이스 톤 코스몬 에르코메노스;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7,28절)

마르다는 드디어 에고 페피스튜카(ejgw; pepivsteuka;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그 앞에 퀴리에(kuvpie주여)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이때의 '주여'라는 부름은 앞에서의 호칭과는 사뭇 다른 의미일 것이다. 또한 이 대답에서는 에고(ejgwv내가)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특징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H.W.Smyth), 동사 페피스튜카(pepivsteuka;믿나이다)도 현재 완료형을 사용하여 확실히 믿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F.Rienecker).

마르다가 고백한 믿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교회의 터전을 세우신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매우 유사하다.

28절의 '선생님께서'로 번역된 부분이 사마리아역에선 '우리의 주인께서'로 표기되어 있다.

 

3) 예수께 나아가는 마리아

(hjgevrqh tacu; kai; h[rceto pro;" aujtovn. oiJ ou jIoudai'oi oiJ o[nte" met j aujth'" ejn th'/ oijkiva/ kai; paramuqouvmenoi aujthvn, ijdovnte" th;n Maria;m o{ti tacevw" ajnevsth kai; ejxh'lqen, hjkolouvqhsan aujth'/, dovxante" o{ti uJpavgei eij" to; mnhmei'on i{na klauvsh/ ejkei'.에게르데 타퀴 카이 에르케토 프로스 아우톤…호이 운 유다이오이…에콜루데산 아우테 독산테스 호티 휘파게이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 히나 클라우세 에케이;마리아가…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유대인들은…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29-31절)

타퀴(tacu;급히)라는 표현은, 앞에서 마르다가 곧 나가 예수를 맞이한 것처럼 두 자매가 예수에 대한 순종이 얼마나 즉각적이고 절대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부사이다(J.C.Ryle).

반면에 예수의 행동은 에티(e[ti그저)라는 말로 대표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예수가 이틀을 더 유한 것도 너무 늦었는데 베다니에 와서까지도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들지 않을 수가 없다(W.Hendriksen). 그러나 사실은 마리아를 불러내어 곧장 무덤으로 가시고자 하셨음을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예수께서도 속으로는 매우 급하셨을 것이다. 어려움과 문제들에 부딪힐 때 예수께서 시간만 허비하고 응답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생각은 불신앙이 초래한 오해인 것이다.

 

3.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32-37절)

1) 마리아의 원망 섞인 고백

(Kuvrie, eij h\" w|de oujk a[n mou ajpevqanen oJ ajdelfov".퀴리에 에이 에스 호데 우크 안 무아페다넨 호 아델포스;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2절)

에페센(e[pesen엎드리어)은 간절히 간구하는 행동이(Liddle&Scott). 마리아는 2절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겸손히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예수에게 눈물로써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마리아의 호소도 마르다의 호소와 마찬가지로 퀴리에(Kuvrie주여)라는 호격으로 시작하고 있다. 개역성경이 단순히 '주께서'라고 일괄 처리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두 자매는 '주여'라는 호칭으로 말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본 절의 '주께서'란 원문에는 없으나 퀴리에(Kuvrie주여)라는 말대신에 언급되니 말인데, '계셨다면'(h\"에스)이 2인칭 단수 동사이므로 굳이 주어를 말한다면 '당신께서'로 표현할 수 있다. 본문에서 사용된 가정 구문인 에이(eij∼더면)와 안(a[n하였겠나이다)은 단순한 가능성이 표현이 아니다. 이 구문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확실한 설명에만 사용되는 가정 구문이다(H.W.Smyth). 마리아는 예수를 어떠한 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간주했었음을 알 수 잇다. 그러나 그녀도 그의 언니와 마찬가지로 아직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2) 눈물을 보이시는 예수

(ejnebrimhvsato tw'/ pneuvmati kai; ejtavraxen eJautovn...ejdavkrusen oJ jIhsou'".에네브리메사토 토 프튜마티 카이 에타락센 헤아우톤…에다크뤼센 호 예수스;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3-35절)

에네브리메사토(ejnebrimhvsato통분히)는 마음의 심한 동요나 분노로 인하여 그 격렬한 감정이 목소리나 신체의 흔들림 등을 통해 표출되는 상태를 말한다(Strachan). 또한 에타락센(ejtavraxen민망히)은 '자극적이거나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W.Bauer). 예수께서 이렇게 통분히 여기신 것은 사랑하시던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범죄한 인류를 지배하는 죄와 사망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통분히 여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J.Calvin, Olshausen). 에다크뤼센(ejdavkrusen눈물을 흘리시더라)은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H.W.Smyth). 참고로 눅19:41에서 쓰인 클라우오(klauvw울다)는 소리가 들리는 정도로 우는 것을 말한다.(J.V.McGee).

예수께서도 이렇듯 울고 웃으시는 인성을 지니신 분이셨음을 본문은 잘 드러내고 있다.

 

3) 유대인 사이에 오간 말

(oiJ jIoudai'oi, [Ide pw'" ejfivlei aujtovn....poih'sai i{na kai; ou|to" mh; ajpoqavnh/_호이 유다이오이…이데 포스 에필레이 아우톤…우크 에뒤나토…포이에사이 히나 카이후토스 메 아포다네;유대인들이…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36,37절)

'사랑하였는가'(ejfivlei에필레이)는 미완료 과거로서 예수께서 친구간의 정으로 지속적으로 사랑하셨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있었던 직접적인 반문들은 바로 죽음의 문제에 직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점을, 그들의 많은 수군거림 중에서 본문이 유독 메 아포다네(mh; ajpoqavnh죽지 않게)라는 표현만을 기록하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은 뜨게 한 것과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 그외의 많은 이적들을 행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목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이적을 갈구했다. 때문에 죽음에 대한 승리는 어쩌면 메시야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요구되는 이적이었을 것이다. 바로 사람들의 갈급해 하는 심령에 기적의 생수를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예수가 나사로에게 가기 위해 베다니에 도착하여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을 서술한 설화로서, 17-27절에서는 마르다가 예수를 맞아들이고 있으며, 28-33절에서는 마리아가 영접하고 있다(R.E.Brown). 그러나 마르다에 대한 요한 신학은 후대에 첨가된 것을 사용하였기에(R.Bultmann, Wilkens),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C.H.Dodd).

 

1. 마르다가 예수를 맞이함(17-27절)

17,18절의 '이미 나흘이라'(h[dh hJmevra"에데 헤메라스)에서 '이미'라는 부사가 빠진 사본들이 많고, 위치에도 다양함을 보이는 이유는 필사자의 분류 형태에 기인하는 것 같다(R.E.Brown). 랍비들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은 신체 주위에서 3일 동안 배회하나 부활의 희망은 없다고 하였다(StB, II).

19,20절의 '위문하러'(paramuqhvswntai파라뮈데손타이)라는 단어는 파라칼레인(parakalei'n)과 파라뮈데이스다이(paramuqhvswntai)라는 용어로 대신 사용되기도 하는데(요11:19,31살전2:115:14) 이 말은 죽음과 완전히 상반된 의미로 사용된다(C.K.Barrett).

21,22절의 '주께서'(kuvrie퀴리에)라는 칭호는 B, OSsin, Sin(cur), 바티칸(Vaticanus) 사본 등에서 생략되었는데, 이는 부주의했기에 빠진 것 같다(R.E.Brown). 여기에 알라(ajllav)라는 전환구가 없는 것을 보아, 아마도 마르다의 발언은 마음속으로 확신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Grotius).

23,24절에서 '다시 살리라'(jAnasthsetai아나스테세타이)는 표현은 예수가 나사로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되, 천국에는 변형된 몸으로 갈 것을 언급한 것이다(Hengstenberg). 또한 여기에서 사용된 이 용어는 요한의 독특한 어법으로서 요20:9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R.E.Brown).

25절의 '생명이요'(hJ zwhv헤 조에)라는 구문이 P45, OL, OSsin과 오리겐, 키프리안 사본에 생략되어 있으며, '부활'(ajnavstosi"아나스토시스) 뒤에 '생명'(zwhv조에)은 전자가 후자의 배경이 됨을 의미할 뿐이다(Luthardt, Ewald).

26절의 '죽음'(ajpoqavnh아포다네)을 '육체적 죽음'으로만 이해하는 비평가들이 있는 반면에(R.Bultmann, Largrange, Hoskyns), 이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의 의미를 '영적인 삶 또는 영생으로 이해하는 자도 있다(J.H.Bernard).

 

2. 마리아가 예수를 맞이함(28-33절)

28,29절에서 예수가 과연 마르다를 시켜서 마리아를 불러오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그 이유는 본문에 이러한 부탁이 기록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Brucker, Tholuck, Hengstenberg).

30,31절에서 예수가 마을에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28절에서 마르다가 조용히 말했던 바와 같이 예수의 도착 소식을 널리 퍼지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R.E.Brown, 8절). '생각하고'(dovxante"독산테스)라는 단어가 P66과 많은 사본에서는 '말하며'(saying)으로 대치되어 서술하였다(R.E.Brown). '무덤에'(eij" to; mnhmei'on에이스 토 므네메이온)에서의 에이스(eij")는 헬리니즘적 그리이스어에서는 '∼을 향하여'를 뜻하는 프로스(prov")와 에피(ejpiv) 등의 전치사의 용법으로 사용되었다(A.T.Robertson).

32,33절의 '통분히 여기사'(ejta;raxen에티락센)의 표현은 요13:21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둘의 표현은 현재에도 사용되는 그리이스어의 용어이며, '매우 강하게 동요를 일으키다'라는 의미를 지닌 원래 아람어적 표현의 변이체이며(Black), 고대 교부들의 요한 인용 구절에서나 또는 다른 그리이스어적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Boismard, EvJean).

 

3. 예수의 눈물(34-37절)

34절에서 요한은 의도적으로 '와서 보옵소서'(e[rcou kai; i[de에르쿠 카이 이데)라는 문체를 사용하여 예수의 초청은 빛과 생명이지만 사람들의 초청은 암흑과 죽음뿐임을 대조하여 암시해 주고 있다(Lightfoot).

35절의 '눈물'(dakruvein다크뤼에인)이라는 단어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눈물(klaivein클라이에인)과는 다른 눈물이다. 이 단어가 본 절에서 단순과거형으로 사용된 것은 '문득 눈물을 보이다'라는 의미를 함축해주기 위함일 것이다(Sanders).

36,37절에서 유대인들의 표현은 다양했으며,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와서 눈물흘리는 자가 어떻게 생존 당시 나사로를 사랑했겠는가? 와 예수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 아니라(Luthardt), 조문의 증거적 눈물이었다(H.A.W.Meyer)라는 표현들이 많았을 것이다.

37절의 표현은 매우 사악한 속셈이 내포되어 있다는(Theophylact, Euth, Zigabenus) 주장에 강한 반기를 드는 비평가들도 있다(Lucke, De Wette, Tholuck, Maier, Ewald, Gumlich). 또한 공관복음에 기록된 소경의 치유 사건에 대한 호소는 죽은 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전혀 암시하지 않으며(Strauss), 이러한 호소는 부적절한 표현이다(De Wette).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마르다와 대화하시는 예수(17-23절)

17절의 '나흘'이란 죽은 날의 언급은, 사람의 영혼이 죽은 후 3일 동안은 주위를 맴돌다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4일째 되는 날에 결국 떠나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랍비들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나사로의 죽음이 확실시 된 상태임을 뜻한다(Strack-Billerbeck, D.A.Carson).

18절에서 지리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음을 지적하며(C.K.Barrett), 나사로의 죽음에 조문하러 온 무리들 중 다수가 예루살렘에서 왔음을 암시한다(W.Hendriksen).

19절의 '위문하러'는 '위안'이라는 뜻으로(F.Rienecker), 조문에 대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습관을 묘사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Strack-Billerbeck)로 예수님의 방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암시한다(D.A.Carson).

20절은 외향적인 마르다와 내성적인 마리아의 성격으로 나타난 결과로 이해해야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적인 행동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F.L.Godet, L.Morris).

21절의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은 마르다가 예수님의 사정을 이해하는 처사로 보는 것보다는(W.Hendriksen), 도움을 구했을 때에 빨리들어 주시지 않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비난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J.R.Hill).

22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즉 나사로가 무덤에 있을지라도(C.K.Barrett)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어(G.R.Beasley-Murray) 나사로에 대한 소망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임을 고백한다(R.L.Fredrikson).

23절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마르다의 생각을 부활 신앙으로 전환시킨 것이다(L.Morris).

 

2. 부활과 생명으로 계시하신 예수(24-27절)

24절은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교리적 진술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린다(F.E.Gaebelein). '마지막 날 부활'을 믿는 신앙은 바리새파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른 진술로(C.K.Barrett),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예수님의 의도를 엿보고자 하는 표현이다(W.Hendriksen).

25절의 '부활이요 생명'은 사망을 이기고 영원히 사는 것, 영원한 것임을 의미한다(V.C.Pfitzner). 이는 '나는∼이다'(ejgwv eivmi에고 에이미)는 '여호와로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출3:14) 표현을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생명인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낸다(L.Morris). '믿는 자'가 의미하는 바는 영원한 생명이 미래에만 얻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도 주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G.R.Beasley-Murray).

26절의 '영원한 죽지 아니하리니'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으로(D.A.Carson),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전달하는 신적 권위를 지닌 '중개자'로 생명의 근원인 자신을 드러내는 말씀이다(G.R.Beasley-Murray).

27절의 '주여 그러하외다'라는 마르다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마16:16)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W.Hendriksen), 메시야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어 '세상에 오시는' 구원자임을 나타낸다(L.Morris).

 

3. 마리아의 슬픔을 함께 한 예수(28-37절)

28절의 '가만히'는 마르다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소동이 일어나 마리아와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한 처사로 해석된다(V.C.Pfitzner). 물론 예수님의 안전에 대한 배려도 포함한다(G.R.Beasley-Murray).

29절은 마리아의 반응이 '급히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하여, 예수님에 대한 도움과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인다(F.L.Godet).

30절은 같은 장소에 계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마르다가 은밀히 행한 것을 반영한 것인지(C.K.Barrett), 아니면 나사로의 무덤이 더 가깝기에 마리아를 밖에서 만나기를 원하셨는지(W.Hendriksen)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둘다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L.Morris).

31절에서 곡하는 것은 당시 죽은 자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이 차원에서 예수님을 이해했다.

32절의 '엎드려'는 내향적인 마리아의 행동이 슬픔으로 인하여 마르다보다는 감정적이고, 격동적이었음을 보여 묘한 대조를 이룬다(C.K.Barrett). 그러나 예수님께 한 말씀의 내용은 마르다와 동일하다. 이는 요한의 서술 형식이 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쓰는 습관에서 주어진 것이라 하겠다(L.Morris).

33절의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비난이 섞인 화난 상태이면서도 심연에서 나오는 깊은 동정심이 섞여 나타난 심리적 상태이다(R.E.Brown).

34절의 '그를 어디 두었느냐'는 나사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를 묻는 인위적 행동을 지적하기 위한 질문으로 이해된다(V.C.Pfitzner).

35절의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울음소리 없이 눈물만 흐르는 것으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다(C.K.Barrett).

36절에서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로 나타나(W.Hendriksen), 예수님의 인간성의 진실함만 인정한다(F.E.Gaebelein).

37절에서 유대인들의 말은 마르다(21절)와 마리아(32절)와 유사한 것으로서 요9:6,7의 사건을 보고서 한 말인 것 같다.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부활의 성격

 

1. 삼위 하나님의 사역

부활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한 위를 특정하게 표현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고만 말한다(마22:29고후1:9).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부활은 '성자의 사역'이라고 일컬어진다(요5:24,25,28,29;6:38-40,44,54;살전4:16). 또한 성령님의 사역으로도 지칭된다(롬8:11).

 

2. 육신 혹은 신체적 부활

바울 시대에 부활을 영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딤후2:18). 그리고 오늘날에도 영적 부활만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령은 몸의 부활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고전15:20,23)요,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골1:18계1:5)라고 불린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 백성의 부활이 주님께서 겪으신 부활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었으며 백성들의 부활도 그와 같을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속은 몸을 포함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롬8:32고전6:13-20). 성경에 의하면 몸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 의인과 악인의 부활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악인의 부활을 부인하였다고 한다. 멸절설과 조건적 불멸성의 교리는 양자 모두 그 교리의 어떤 부분에 있어서 경건치 않은 자의 부활은 부인하고 그들이 없어진다고 가르치는데 많은 신학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였고 또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런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이 악한 자의 부활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 된 생각이(단12:2요5:28,29행24:15계20:13-15). 이와 동시에 악인의 부활이 성경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4. 또 다른 의미의 부활

혹자는 성도들의 부활과 죄인의 부활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전15:22을 인용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의 두 번째 '모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이라는 보편성을 가진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생명력 넘치는 연합에 의한 부활이나, 악인의 부활은 구속 사역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 인간에 내린 사형 선고에 대한 집행 유예의 필연적 결과이다.

 

 

당시 집의 구조(11:17-37)

◈ 세계배경 문화사 ◈

 

초기 인류는 마치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였으나 점차 짐승과 자연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가옥을 짓기 시작했다. 이와 아울러 난방 기술도 발전하여 추위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동양 / 한국 : 초기 한국 사회에서의 집의 형태는 지상 가옥으로 그 구조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고구려 같은 경우에는 부경이라는 곡식 창고가 집집마다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각 가정에는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나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에는 데릴 사위 제도가 있었는데 여자의 집 존채 뒤에 서옥(書屋)이라는 집을 지어 거기서 머물게 했다고 하는 기사가 있다. 당시 이런 집의 구조를 보면 방과 부엌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러한 집의 구조를 보면 방과 부엌이 있고 양쪽에 두 개의 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자들은 이런 집에서 기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일반 서민들에게까지도 두 개의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구당서(舊唐書)」의 '고구려'조에 보면 "고구려에는 가난한 자가 많았는데 이들은 겨울에는 긴 굴을 만들고 밑에 부을 때어 따뜻함을 얻는다'라는 기사가 있다. 즉 겨울에는 화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과 같은 아궁이를 사용한 난방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백제의 부여 부소산성의 집 자리 유적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가옥이 발견되면서 점자 온돌 장치를 갖추게 됨을 알 수 있다. 신라 지역 등지에서는 온돌의 사용과 아울러 마루를 널리 갖추었다. 즉 방과 방 사이에 마루를 놓고 방 옆에다 부엌을 만들어 사용했던 것이다.

 

중국 : 중국의 가옥 형태 중 특이한 것은 말뚝 가옥이다. 이 가옥은 말뚝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 판자를 얹은 후 건축한 집의 구조이다. 「사기(史記)」의 '봉선서'에 의하면 "한무제가 신선을 영접하기 위하여 높이 100미터에 달하는 높은 대를 세운" 가사가 있는데 이런 가옥의 형태는 일반 서민의 집이 아니고 귀족이나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집이다. 또한 중국인들은 가옥의 치장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설원」의 '반질'편에 보면 "…궁의 벽은 눈부신 그림과 조각으로 되어 있고, 전당은 수를 놓은 비단으로 덮여 있고, 금ㆍ옥의 보석으로 장식되었다"라는 기사에서 그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서주의 「선부산정」에 보면 "왕이 주에 계시고 각 방을 칠 장식하시다"라는 기사도 있어 당시 가옥에 대한 치장의 일면을 알 수 있다.

 

근동 / 팔레스틴 : 근동 지역에서는 주로 돌과 진흙으로 지은 집에서 거주하였다. 가옥의 구조는 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뜰이 나오고 더 들어가면 두 개의 작은 거실이 나온다. 그 중 하나는 침실로 쓰였으며 침실 앞에는 부엌이 자리잡고 있다. 지붕은 돌판을 이용해 덮었고 지붕 위를 평평하게 만들어 이용할 수 있게도 하였다. 2층 집도 있었으며 화로도 사용하였다. 벽은 석회로 칠했으며 간혹 채색도 하였다.

 

성경적 접근 : 팔레스틴의 원시 가옥은 석회동굴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유사시에는 그와 같은 굴로 대신했었다(삼상13:6히11:38). 유목 시대, 즉 광야 시대에서는 장막에 거했으나 가나안 정착 이후에는 흙과 돌과 나물로 된 집에 살게 되었다. 가난한 서민들은 진흙 벽돌로, 부자들은 대리석을 석회로 바른 집에 거했다. 이스라엘 서민들의 집은 거의 4000년 동안 그 구조에는 변화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담으로 두른 앞마당 그리고 마루로 된 방으로 되어 있다. 조금 높은 층에서는 가족이 살고 낮은 마루층은 가축들이 먹고 잔다. 조금 여유가 있는 집은 가족이 자는 방, 짐승이 자는 방, 곳간으로 나뉘어 있다. 부자들은 이와 같은 마당과 가옥이 여럿이 있는 집에 산다. 행랑채를 따로 짓고 부인들이나 아녀자들이 살기도 했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절망의 세계(11:17-37)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이 세상에 대한 묘사가 있다. "'회의의 성'이라고 불리는 성이 있는데, 그 소유자는 절망이라는 이름의 거인이었다"라고 되었다. 본문 나사로의 죽음을 둘러싼 베다니 마을의 분위기는 죽음의 권세 아래 절망으로 가득찬 세계의 단면을 보여 준다.

 

1. 죽음을 극복치 못하는 세계

'나사로가 무덤에 있는지 이미 나흘이라'(17절)고 성경은 말씀한다. 죽은 지 나흘이면 유대인들에게는 소생의 희망이 사라진 때다. 그들은 죽은 후 3일 동안만 영혼이 그 육신 곁에 떠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6:2에는 '여호와께서…우리를 살리시며 제3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라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되어 있다.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운명속에 있는 세상이기에 절망이 왕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2. 참된 위안이 없는 세계

많은 사람들이 남은 자매를 위안하려고 왔으나(19절) 참된 위안자는 없었다. 죽은 자를 사려낼 수 없으매 어떤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이 세상에는 인간의 위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비극과 불행의 상황이 너무 많은 것이다. 참위안자 되시는 그리스도와 단절된 세계에는 참된 위로와 위안이 없기에 절망이 물결친다.

 

3. 신앙이 없는 세계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20절). '앉았다'는 것은 무기력함과 망연자실함을 표현하는 말이다. 며칠 전만해도 활기가 넘쳤던 마리아가 지금은 주님을 맞을 마음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이 점이 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이요, 절망의 요인이다. 인간의 사랑과 행복을 잃는다해도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언약과 권능을 믿을 수만 있다면 인생은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있는 신앙이 결여된 삶, 그것이 곧 절망의 세계인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죽음과 절망의 세계에 대한 교훈과 질문(11:17-37)

 

베다니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러자 그 절망의 분위기가 희망의 분위기로 반전이 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1. 다시 살리라

절망에 빠진 자매를 본 주님의 첫 마디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는 것이다. 죽음이란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영겁의 길도 아니요, 사멸되는 것도, 또 소멸되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성도들은 유념해야 한다. 죽음은 영원한 삶으로 진입하기 전 잠시 쉬는 휴식의 기간임을 알자. 결국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부활할 것이다.

 

2. 부활과 생명인 나를 믿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고 주님은 물으신다. 죽음만 아는 세상 사람들, 죽음을 인생의 절대 권력자요, 가치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아니다. 여기 죽음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생명의 근원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실체를 가르쳐 주는 가치다. 우리는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지혜로운 삶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이다.

 

3. 그를 어디두었느냐?

예수께서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신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 어디서 죽느냐가 중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느냐 밖에서 죽느냐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다. 주님이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세계에서 잠들도록 노력하자.

장차 주님의 부활의 손길이 머물 수 없는 영원한 지옥의 세계에 내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멸망과 죽음에 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는 우리 영적인 현주소를 묻는 질문이다.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요11:38-46)

 

◈ 원문강해 ◈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성자 예수의 권세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신의 명령으로 죽은 자를 살려낸다. 이 사건을 통해 생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소유한 성자 메시야로서의 권위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성자의 권위와 능력은 죽음을 이겼으며, 그것을 구체적인 부활로서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1. 무덤에 가시는 예수(38,39절)

1) 돌로 막은 무덤

( jIhsou'" ou\n pavlin ejmbrimwvmeno" ejn eJautw'/ e[rcetai eij" to; mnhmei'on. h\n de; sphvlaion, kai; livqo" ejpevkeito ejp j aujtw'/.예수스 운 팔린 엠브리모메노스 엔 헤아우토 에르케타이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리도스 에페케이토 에프 아우토;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돌로 막았거늘, 38절)

팔린(pavlin다시)은 예수께서 얼마나 크게 마음이 상하셨는가를 알게 한다. 33절의 통분하셨던 이유가 인간에 대한 죄와 죽음의 지배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면, 본문의 '통분히 여기심'은 죽음에 종속된 인간들이 예수를 통해 죽음에 승리하고자 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비꼬려고만 하기 때문이었다. 에페케이토(ejpevkeito막았거늘)는 완료 수동 형태로서 이미 나흘 전에 굳건하게 닫혀진 상태임을 보여 준다.

본문의 상황은 인간의 상황을 잘 묘사한다. 인간은 이미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존재들이며 죄라는 굴 속에 놓여 있고 그 입구를 죽음이라는 큰 돌이 막고 있는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예수께선 돌로 막힌 인간들의 현주소를 보시며 답답해 하셨을 것이다.

 

2) 예수의 명령

(levgei oJ jIhsou'", [Arate to;n livqon. 레게이 호 예수스 아랕 톤 리돈;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니, 39a절)

아라테( [Arate옮겨 놓으라)는 '옮겨 놓다'는 의미와 더불어 '위로 끌러올리다, 제거하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W.Bauer). 또한 이 명령은 부정과거 시제로서 권위적인 명령을 표현하는 용법이다(J.H.Bernard). 레게이(levgei가라사대)는 현재 시제로서,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향해 이 명령을 말씀하고 계심을 보여 주며,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H.W.Smyth). 또한 돌을 지칭하면서 톤리돈(to;n livqon그 돌)이라고 관사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는 바로 지금 나사로의 죽음을 변할 수 없는 기정 사실로 만들고 있는 무덤의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제거해 버리라고 명령을 하고 계신다.

예수는 본문을 통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무덤을 막고 있는 '그 돌'을,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을 나타내는 '그 돌'을 지금 당장 치워 버리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3) 마르다의 대답

(Kuvrie, h[dh o[zei, tetartai'o" gavr ejstin.퀴리에 에데 오제이 테타르타이오스 가르 에스틴;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39b절)

본문은 예수의 명령에 대답하는 마르다의 불신앙을 보여 준다. 이것은 비단 그녀뿐 아니라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죽은 지'(teteleuthkovto"테텔류테코토스)는 현재 완료 분사로서 이미 죽어서 현재 계속적으로 죽은 상태로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테타르타이오스(tetartai'o"나흘이)는 이미 나흘째 날이 되었음을 나타내며,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너무나도 예수를 서글프게 만든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선포하셨으나, 사람들은 '주여, 사람들이 죽음에 굴복한 지가 벌서 수천 년이나 되었사오니 이제는 죽음에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라고만 대답하기 때문이다. 마르다가 내뱉은 호칭인 퀴리에(Kuvrie주여)는 여러 뜻으로 사용될 구 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는 절대자를 부르는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마르다와 우리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주여'라고 불러야만 할 것이다.

 

2. 예수의 기도(40-42절)

1) 믿으면 보리라

(levgei aujth'/ oJ jIhsou'", Oujk ei\povn soi o{ti eja;n pisteuvsh/" o[yh/ th;n dovxan tou' qeou'_레게이 아우테 호 예수스 우크 에이폰 소이 호티 에안 피스튜세스 옵세 텐 독산 투 데우;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40절)

개역성경은 소이(soi너에게)를 생략하고 뒤에 포함시켜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문은,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이다. 예수께선 너희들이 아니라, 바로 '너'에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가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개개인 각자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본문에서 에안 피스튜세스(eja;n pisteuvsh/"네가 만일 믿으면)의 목적어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과연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그 해답은 이미 앞에서 계속적으로 선포되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에 승리하는 부활과 생명의 메시야이며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 이 믿음의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독산 투 데우(dovxan tou' qeou하나님의 영광)는 문자적 의미인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란 뜻 이외에도, 죽음과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과 빛이 나타나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2) 예수의 감사

(Pavter, eujcaristw' soi o{ti h[kousav" mou.파테르 유카리스토 소이 호티 에쿠사스 무;…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1절)

아노(a[nw우러러 보시고)는 당시의 일상적인 기도의 모습이다(눅18:13). 파테르(Pavter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른 것은 예수께서 하신 모든 기도들의 공통점이다. 예수는 주기도문에서도(마6:9), 겟세마네의 기도에서도(마26:39)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성을 나타내며 나아가 이 호칭은 하나님과의 존재적인 일체성을 보여 준다(W.Hendriksen).

에쿠사스(h[kousav"들으신 것을)는 부정과거로서 '들으신' 사실 자체를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기만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들으신 기도에 대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은 예수의 기도대로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3) 나사로를 부활시키시는 목적

(dia; to;n o[clon to;n periestw'ta ei\pon, i{na pisteuvswsin 디아 톤 오클론 톤 페리에스토타 에이폰 히나 피스튜소신;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나이다, 42절)

1인칭 단수 동사인 에데인(h[/dein알았나이다)의 주체로서 1인칭 대명사 에고(ejgwv내가)를 삽입함으로써, 예수는 '내가'라는 자기 자신을 강조한다. 아쿠에이스(ajkouvei"들으시는 줄)는 현재형이다. 즉 아버지께서 '항상'(pavntotev판토테) 들으시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부터의 행동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지금 듣고 계심이 모여서 계속 듣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예수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표현될 수 있다. 현재였던 과거와 조금 후의 현재일 미래에도 하나님 아버지는 기도를 듣고 계신다.

본문에선 구체적인 믿음의 내용이 제시되었다.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 즉 아버지와 아들이 원래 한 장소에서 한 분이셨으며 지금 아버지의 생명과 빛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 예수의 기도를 통해 밝혀진 믿음의 내용인 것이다.

 

3. 나사로를 살리심(43-46절)

1) 죽은 자에 대한 명령

(kai; tau'ta eijpw;n fwnh'/ megavlh/ ejkrauvgasen, Lavzare, deu'ro e[xw.카이 타우타 에이폰 포네 메갈레 에크라우가센 라자레 듀로 엑소;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고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3절)

포네 메갈레(fwnh'/ megavlh큰 소리로)는 헬라어로는 '놀라운 음성으로'로 번역될 수도 있고, 시리아역에서는 '높은 음성으로'라고 번역되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큰 소리로 부르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지, 마력이나 주문에 의해서 혹은 유대 지도자들의 지적처럼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권세를 힘입어서임을 분명히 알리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J.C.Ryle).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신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이 살아난 것에 그 의미가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죽음에 정복당한 온 인류를 향해 무덤에서 나오라고 부르실 당당한 선포의 전주곡이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무덤 가운데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이후에 예수께선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불러 주실 것이다. '무덤에서 나오라'라고 말이다.

 

2) 살아나는 나사로

(ejxh'lqen oJ teqnhkw;" dedemevno" tou;" povda" kai; ta;" cei'ra" keirivai", kai; hJ o[yi" aujtou' soudarivw/ periedevdeto. levgei aujtoi'" oJ jIhsou'", Luvsate aujto;n kai; a[fete aujto;n uJpavgein.엑셀덴 호 테드네코스 데데메노스 투스 포다스 카이 타스 케이라스 케이리아이스…레게이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 뤼사테 아우톤 카이 아페테 아우톤 휘파게인;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4절)

성경은 분명히 호 테드네코스(oJ teqnhkw;"죽은 자가)라고 현재 완료 분사로 기록하고 있다.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이미 완전히 죽어 지금 죽은 상태로 계속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거시다. 사람들이 보기에 죽은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죽은 그 사람에게 예수는 명령했고, 그 명령에 따라 죽음에 둘러싸여 있던 그 사람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또한 원문에선 아우톤(aujton그를)이란 표현이 '풀어 놓아'와 '다니게'의 앞에 두 번 나온다. 즉 예수께선 풀어서 다니게 할 대상으로서의 그에게 관심을 크게 보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푸시고자 했던 고리는 시체를 둘러싼 베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죽음의 고리였으며, 예수께선 진정으로 관심 있었던 것은 이적이 아니라 바로 그(인류)를 자유케 하는 것이었다.

 

3) 유대인의 두 가지 반응

(Polloi; ou\n ejk tw'n jIoudaivwn,...ejpivsteusan eij" aujtovn: tine;" de; ejx aujtw'n ajph'lqon pro;" tou;" Farisaivou" kai; ei\pan aujtoi'" a} ejpoivhsen jIhsou'".폴로이 운 엑 톤 유다이온…에피스튜산 파리사이우스 카이 에이판 아우토이스 하 에포이에센 예수스;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45,46절)

에이판(ei\pan고하니라)은 동일한 예수의 이적을 대하는 두 가지 부류의 행동 반응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하나의 진리에 대해서도 이렇게 서로 다르게 행동했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의 죄된 모습이 적절히 반영된 모습이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진리와 비진리,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이 외의 많은 대조를 가운데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본문은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의 나사로에 대한 기적 설화는 장차 예수의 죽음을 암시해 주는 요한의 의도가 발전한 형태이며, 초대교회의 복음의 전승에 기초를 두고 유래한 것일 수도 있다(R.E.Brown).

 

1. 예수의 명령(38-40절)

38절의 '통분히 여기시며'(ejmbrimwvmeno"엠브리모메노스)의 의미가 마음이 단순히 상하거나 슬픈 마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불신앙이라기보다는 충분치 못한 신앙 때문에 예수가 격분한 것이다(C.K.Barrett).

39절에서 마르다의 신분은 앞에서 언급된 마르다와 좀 다르다. 따라서 20-29절까지에 제시된 마르다는 제2차적 자료에 의해 기록된 인물로 보인다(R.Bultmann).

그러므로 본 절에서는 그 인물에 대한 재고를 보여 주고 있으며, 후기 Koridethi 사본들 속에는 '그녀의 신분' 묘사가 생략되어 기록되었다(R.E.Brown).

40절의 '네가 믿으면'(pisteuvsh"피스튜세스)과 같은 표현은 간접 화법에서 의존형 가정법을 기원형으로 변화시키는 어법으로서, 고대 그리이스어에서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고 헬레니즘 세계에서 사라져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C.K.Barrett).

 

2. 예수의 기도와 기적(41-44절)

41절의 '눈을 들어'(hjren tou;" ojfqalmouj"에렌 투스 오프달무스)는 예수의 기도 모습으로서 유대인들의 습관에 따라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한 땅을 마주보고 기도했을 것이다(S.B.II, E.Peterson). 그러나 예수의 간구와 감사는 하나로 섞어졌다고 예상할 수 없으며(Merz, Tholuck), 기도 이전에 감사가 항상 선행한다고는 볼 수 없다(Hengstenberg).

42절의 진위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많다. 특히 이 구절은 요한 자신이 조작한 허구이거나(Dieffenbach, Bertholdt), 기도의 모본을 제시하기 위한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적 반영이거나(J.Weisse), 단순한 허위 기도문이거나(F.C.Baur), 이 설화의 논점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예수의 입에 집어넣은 것(De Wette, Bruckner)이거나 그리스도를 신격화시키기 위한 작업일 것이다(D.Strauss, Scholten). 따라서 예수는 하나의 마술사가 아니며 자신의 능력으로 사역하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적 인간이 아닌 것이다(R.Bultmann). 특히 요한이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기도는 복음서 저자의 핵심들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Loisy).

44절의 '베로 동인 채'(keirivai"...soudarivw케이리아이스 수다리오)라는 표현은 매우 희귀한 어법으로서(R.E.Brown) 파피루스에서 보여 주는 '붕대'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랍비 문헌에서는 시신의 손과 발을 싸는 천조각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Shabbath 23,4). '나오는데'(ejxeh'lqen엑셀덴)의 표현은 나사로가 헝겊에 의해 온 수족이 다 둘러싸였던 모습을 상기시켜 주며, 이는 고대 이집트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Olshausen, De Wette, B.Cruisius, Maier).

 

3. 기적을 목격한 유대인들의 반응(45,46절)

45절이 '많은 유대인'(polloi; JIoudaiwn폴로이…유다이온)들은 '이 마리아의 집에 왔었던 많은 유대인들'을 의미하며(J.H.Bernard), 요한은 이 구절을 통해서 전반적인 내용을 먼저 언급하고 난 후, 그 내용을 한정시키는 독특한 그의 어법을 나타내고 있다(C.K.Barrett).

이에 반하여 본 구절은 하나의 느슨한 문장으로서 마리아의 집에 왔던 '모든'(all)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석하는 비평가들도 있다(R.E.Brown, Lindars).

믿음으로 인도하는 계시의 단회성을 의미하는 '그가 행한 일'(o{ ejpoivmsen호 에포이에센)을 유대인들이 믿었다는 사실과 46절의 '그가 행한 것들'(a{ ejpoivhsen하 에포이에센)은 구별되어야 하며, 그 이유는 후자는 특별한 의미가 없으며 모순되고 잡다한 행동들을 묘사한 표현이기 때문이다(Fenton).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요한의 문장은 매우 간결하여 중요한 사실을 적절하게 기록하여 사건의 전말을 이해시킨다. 이런 단순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수와이 특별한 관계와 예수의 메시야로서 생명의 구주 되심을 선포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1. 무덤 앞에 선 예수(38-40절)

38절의 '무덤에 가시니'는 일반적으로 매장하는 장소로 묘지 혹은 공동묘지를 가리키는 일상적인 용어이다(L.Morris). '굴'은 '동굴'을 가리키는 단어(B.M.Newman)론 도적 떼의 소굴이나 쓰레기를 매립하는 구덩이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L.Morris). 그러나 이곳에서는 무덤으로 사용되는 자연 동굴 혹은 바위를 파낸 인위적인 동굴로(C.K.Barrett), 수평돌로 입구를 막아 놓은 동굴 무덤으로 후에 예수님께서 장사된 동일한 형태의 무덤을 말한다(G.R.Beasley-Murray).

39절의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의 매우 간결하고 절박한 요청(W.Hendriksen)은 마르다로 하여금 믿음의 위기에 서게 한다(F.E.Gaebelein).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로 고백한 이유는 나사로의 죽음이 이제는 더 이상 생명하고 연결된 어떤 소망도 없는 것임을 예수께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데 있다(G.Dalman). 이러한 표현은 극의 상황을 절망으로 최대 고조시켜 긴장감을 팽배시키는 의도를 지닌다(C.K.Barrett).

40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마르다의 주저하고(J.R.Hill), 나사로의 죽음에만 집중되어 있는 심정을(F.L.Godet) 이미 전에 약속한(4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 보게 하여(R.L.Fredrikson) 예수님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신앙의 요구와 하나님의 영광된 표적으로 나사로의 죽음을 대하게 한다(D.A.Carson).

 

2.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41-44절)

41절의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행위는 유대교의 관습에서 비추어 볼 때에 기도하는 자세임이 틀림없다(E.Peterson). '내 말을 들으신'이란 고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과 연합으로(R.H.Fuller)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과 연합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드러낸다(G.R.Beasley-Murray).

42절의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는 마치 예수님의 기도가 유대인에게 보이는 외식적인 것(A.Loisy)으로 오해하게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다르지 않는 하나님께 종속된 권위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D.A.Carson).

43절의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놀랍고도 간단한 말씀(F.Rienecker)은 이미 죄악으로 죽음 안에 있는 세상을 재창조하는 능력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선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L.Morris).

44절에서 장사된 나사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이 큰 의미를 담고 있는 표적 중의 제일됨을 강조하는 목적을 지닌다(E.C.Hoskyns). 따라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명령이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J.R.Hill).

 

3. 유대인들의 반응(45,46절)

45절의 '많은 유대인'은 그동안 예수님을 적대시한 자들이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믿음 안으로 들어온 현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F.L.Godet).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고히 인정하는 바탕에 서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W.Hendriksen).

46절의 '어떤 자'는 45절의 '많은'과 비교되어 예수님을 배격하는 자들이 비록 소수이지만 그 반감은 상대적으로 더 거세지고 있음을 암시한다(F.E.Gaebelein). '바리새인들에게…고하니라'는 유대 사회의 공식적인 단체를 통해서 적대시하는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처리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였음을 뜻한다(D.A.Carson, L.Morris).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일위에 이성이 연합된 결과

 

1. 신성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창조와 성육신 교리는 항상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이든지간에 신성은 성육신에서 하등 근본적 변화를 겪지 않았음이 주장되어야 한다. 이는 또한 신성은 송사받지 않음, 곧 고난과 죽음에 처할 수 없고 무지에서 자유롭고 연약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신성이 육신을 취했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 성육신 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성육신의 결과인 삼중교류

먼저, 속성간의 교류를 살펴보면 신인 양성의 모든 속성들이 이제는 인격의 속성이 되었고 따라서 인격에 귀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위격은 전지전능, 전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비애와 제한된 지식과 능력의 소유자요, 인간적 결점과 비참에 얽매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양성의 상호 침투가 일어나서 신성이 인성화되고 인성이 신성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업적과 사역의 교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특히 그 사역의 최종 결과가 신인적 성격을 편다는 의미이다. 이를 분석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동력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의 부활되지 않는 인격적 주체이며 구속 사역은 이성의 협력에 위해 이루어진다. 세 번째는 은사 또는 은혜의 교류이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이 처음 존재할 때부터 모든 부유하고 영광스러운 각종 은사로 치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신적 로고스의 인격과 연합하는 은혜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성은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이 고양되며 찬미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범죄 불가능성이 있다.

 

3. 신인은 기도의 대상

연합의 또 다른 결과는 양성으로 현존하시는 중보자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예배의 명예(honor adorationi's)는 인성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며 단지 본질상 경배받을 만한 신적 로고스와의 연합 때문에 인성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배의 대상과 근거를 구별해야 한다.

 

 

종교에서 감사에 대한 의식(11:38-46)

◈ 세계배경 문화사 ◈

 

종교에서 감사에 대한 의식은 주로 주기적인 기간을 정해 놓고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감사 의식 때는 많은 제사물을 헌물하고 국가적인 축제일로 정해 온 나라 백성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겼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국민간의 단합은 물론이요, 국가의 안정과 사회적인 질서, 개인의 축복이 신에게 있음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서양 / 그리스 :그리스의 도시 국가 중에 하나인 아테네는 약 30여종에달하는 종교적 의식이 있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디오니시아제라는 가미 축에 의식을 들 수 있다. 이 감사의 제전은 주로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행하여졌다. 지역에 따라 의식의 내용이 다르지만 대부분 돼지를 희생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다.

이런 감사의 의식은 대(大)디오니시아로도 불리었으며 해마다 3월 말경에 5일동안거대한 감사 의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아폴로 신에게 바치는 제의 의식도 있다. 즉 아테네 시민들은 여름이면 헤카톰바이아라고 불리우는 희생 제의를 드리는데 이때 약 백 마리의 황소 머리를 바친다고 한다. 그리고 아테네의 도시 수호신인 판 아테나이아에게도 매년 감사의 의식과 아울러 신을 찬양하는 행사가 있다. 또한 4년마다 주기적으로 그녀의 생일에 감사 의식을 행하였다. 한편 봄에는 디아지아라는 감사 의식을 통해 제우스 신에게 드렸다.

 

아메리카 / 인디언 : 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인디언들 중에는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 인해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를 행하였다. 또한 사냥을 할 때에도 일정한 의식을 행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다 신에게 드리는 감사의 표시와 보호의 기원이었다. 또한 추수기가 되면 추수한 곡물을 신에게 바치고 감사의 축제를 성대하게 열었다. 이를 통해 부족간의 단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동양 / 한국 : 한국 사회에서는 예로부터 제천의식(祭天儀式)이 행해지고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의 '예맥(濊貊)' 조에 보면 "항상 10월에는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하여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이라 한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삼한 사회에서는 추수가 끝나고 나면 국가적인 감사 제천의식을 거행하여 하늘과 태양신에게 감사를 들리는 한편 부락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였다. 고구려에도 이와 같은 하늘에 대한 감사 의식이 있다. 이를 동맹(東盟)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에 제사드리는 한편 국정을 논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즉「위지(魏志)」 '동이전'에 보면 "고구려 나라 읍락(邑落)의 남녀들이 밤에 모여 창악(唱樂)을 하였고, 귀신ㆍ사직ㆍ영성에서 제사하기를 즐겼으니 이름을 동맹이라고 하더라"라는 기사가 있다. 즉 고구려인들은 귀신과 사직신에게 감사의 의식을 행한 다음 남녀노소가 모여 음주가무를 날이 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후한서」의 '동이전'에도 전하고 있다. 이러한 동맹 의식은 원시적 종교 형태이며 민속 의식으로 성장하여 고구려인들을 하나로 묶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성경적 접근 : 감사(Thanksgiving)는 기독교 신앙의 골간이다. 구약성경 시편의 핵심 교훈은 '여호와께 감사하라(시118:1)'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 행위는 이 감사심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에 대한 종교적 의식은 구약에서는 각종 절기와 제사로 표현된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은 하나님의 영육간에 베푸신 은총에 대한 대표적인 감사 축제 절기다. 그외 감사 의식으로는 감사 제사들을 통한 봉헌과 서원이 있었다.

신약에서는 감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대명사로 정착되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고 전한다. 감사는 성도의 신앙의 힘이요, 찬송과 기도의 제목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반(反)신앙적 속성(11:38-46)

 

빛이 밝을수록 반대로 그 그림자는 더 어두운 법이다. 죽은 지 나흘되는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그리스도의 사역 중 가장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이적이다. 그와 같은 사역을 전후하여 사람들의 반신앙적인 속성들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 주님의 인격과 권능을 의심함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38절). 주님의 통분하심은 앞 절 어느 불신자의 비난 때문이다. 그는 주님이 나사로는 살릴 수 없었다고 비난했다. 나사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과 생명의 권능을 의심한 것이다. 반신앙, 불신앙의 원조는 이와 같은 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온전히 신뢰치 않고 의심, 비판하는 데서부터 인류는 타락하게 된 것이다.

 

2. 현실만 중시함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시는 주님의 명령에 마르다는 죽은 지 이미 오래인지라 부패되었으니 소용없는 짓이라고 판단한다(39절). 그의 신앙의 눈은 그리스도의 권능으로부터 멀어지고 오직 부패된 오라비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신상이란 현실의 형편과 타산을 초월해야 진정한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현실만 중시한다.

 

3. 표적을 본 후 믿으려고 함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마르다에 대한 주님의 책망이다. 주님도 믿음으로 행하셨다. 자신의 기도를 아버지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믿고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적을 행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선 믿고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선 보고 믿으려고 한다. 그러나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무리가 많은 것을 보라(요11:47-53). 믿음이란 하나님의 인격과 그 가치관에 대한 동의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자.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나사로 부활 이적의 교훈(11:38-46)

 

나사로의 부활을 다룬 본문은 주님의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기 며칠 전에 행하신 이적이다(요12:1). 이 이적으로 인해 주님의 메시야성이 확연하게 유대땅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만큼 나사로의 부활 이적은 우리 성도들에게 삶의 풍성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생명의 권능을 교훈해 줌

'나사로야 나오라!'(43절)하시는 주님의 호령에 부패된 시체가 되살아났다. 이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미든 자는 죽어도 살겠고'(25절)라는 주님의 증언에 대한 현실적 증거가 된다. 이와 같은 주님의 언생 속에서 우리는 죽음을 능히 이기시는 생명의 창대한 권능과 성도를 죽음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기필코 되살리시는 주님의 사랑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우리도 훗날 주님의 호령 소리고 인해 모두 부활될 것이다.

 

2. 기도의 권능을 교훈해 줌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41,42절). 주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위한 기도대로 아버지께서 응답해 주신 것을 온전히 확신하셨던 것이다. 의심 없는 확신의 기도가 죽은자를 살리는 역사를 일으켰다. 우리도 수많은 삶의 난제와 위기를 당하지만 주님처럼 진리와 사랑 안에서 믿음과 확신으로 기도하는 생활은 어두움의 세력을 이기는 삶이 될 것이다.

 

3. 믿음의 권능을 교훈해 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 '부활'이라는 개념은 현 세상에는 없다. 죽으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부인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여러 가지 이성의 판단과 인본주의의 인습을 믿음으로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 결과 부활의 영광을 맛볼 것이다. 노아처럼 산 위에다 배를 만드는 믿음의 권능이 있어야 종말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의 시작(요11:47-57)

 

◈ 원문강해 ◈

 

예수에 관한 유대 지도자들의 의논

 

생명의 주를 죽이고자 하는 구체적인 모의가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알지도 못했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되는 결과들과 눈앞의 현상에 얽매여 죄악을 범하기에 열심을 내었던 것이다.

 

1. 대적자들의 의논(47,48절)

1) 논의의 시작

(sunhvgagon ou\n oiJ ajrcierei'" kai; oiJ Farisai'oi sunevdrion...Tiv poiou'men쉬네가곤 운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호이 파리사이오이 쉬네드리온…티 포이우멘;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7절)

쉬네드리온(sunhvgagon공회)은 사두개파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의 장로, 서기관들 총 72명으로 구성된 유대교 최고의 기관이다. 세메이아(shmei'a표적)는 단순한 '이적'이란 의미와 아울러,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에 의해 선지자나 혹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특별한 이적에 대한 자칭이기도 하다(W.Bauer). 포이에이(poiei'행하니)는 현재 시제로서 '지금 행하고 있으니'가 정확한 의미이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특히 나사로의 부활이 보여 주고 있는 현재적인 기적 증거들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드디어 임재하였다는 사실, 즉 온 인류에 구원의 기쁜 소식이 들리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기쁨이 아니라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아이러니하고도 슬픈 결과이다.

 

2)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걱정

(eja;n ajfw'men aujto;n ou{tw", pavnte" pisteuvsousin eij" aujtovn에안 아포멘 아우톤 후토스 판테스 피스튜수신 에이스 아우톤;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48a절)

아포멘(ajfw'men두면)은 아피에미(ajfi{hmi가게 하다, 보내 버리다, 포기하다)의 1인칭 복수 동사이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들, 즉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명하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면'이라고 언급하는 내용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언행을 방치해 두면 폭동과 무질서의 근거가 된다고 여겼다.

 

3) 정복됨의 걱정

(kai; ejleuvsontai oiJ JRwmai'oi kai; ajrou'sin hJmw'n kai; to;n tovpon kai; to; e[qno".카이 엘류손타이 호이 로마이오이 카이 아루신 헤몬카이 톤 토폰 카이 토 에드노스;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들을 빼앗아 가리라, 48b절)

톤 토폰(to;n tovpon땅)은 정관사가 함께 쓰여 '그 땅'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땅은 아마도 성전을 뜻할 것이다(행6:13,14).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장소가 바로 성전이었기에, 성전을 '그 땅'이라고 불렀다. 구약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은 '그 땅'에서 예배를 드리고자 이스라엘의 흙을 나귀에 싣고 본국으로 돌아갔다(왕하5:17). 토 에드노스(to; e[qno"민족)는 대대로 내려온 아브라함이래의 유대 민족만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을 지칭하면서 정관사를 더불어 사용하여 '그 민족'이라고 하였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지도자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아니라 외모와 빼앗길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욕을 또 다시 당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생명의 하나님께 진정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이 계신 모든 곳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성전이 더 중요했으며, 신령한 이스라엘보다는 혈육적인 이스라엘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어리석음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들었고 나아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2.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49-53절)

1) 가야바의 말

(Kai>avfa"...ei|" a[nqrwpo" ajpoqavnh/ uJpe;r tou' laou' 카이아파스…에이펜 아우토이스…헤이스 안드로포스 아포다네 휘페르 투 라우카이 메 홀론 토 에드노스 아폴레타이;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49,50절)

'가야바'(Kai>avfa"가이아파스)는 A.D.18-36년까지 18년 동안 대제사장의 직위에 머물러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통치자가 임명하는 임명제로 바뀌어 대제사장이 어느 정도의 임기를 마치면 수리고 바뀌게 되었다(Josephus).

홀론 토 에드노스(o{lon tov e[qno"온 민족)는 '유대 민족 전체'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란 의미이다(H.W.Smyth). 쉼페레이(sumfevqei유익한)는 현재형으로서 즉각적인 유익함이 있음을 보여 준다(W.Bauer).

대제사장의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백성들을 위해 죽는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대제사장조차도 알지 못했다. 본문에 나타난 대제사자의 말은 흡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 그 말의 의미

 

( jIhsou'" ajpoqnhv/skein uJpe;r tou' e[qnou"...kai; ta; tevkna tou' qeou' ta; dieskorpismevna sunagavgh/ eij" e{n.예수스 아포드네스케인 휘페르 투 에드누스…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51,52절)

아프 헤아우투(ajf eJautou'스스로 함이)는 문자 그대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라는 의미이며 이것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부터'라는 의미를 내포한다(A.H.Chase). 테크나(tevkna자녀)는 '어린아이'라는 의미이며, '하나님의'(tou' qeou'투 데우)라는 수식어가 붙음으로써 '하나님이 낳으신'이란 의미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로 직접 삼으신 자들을 본문은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피값으로 산 자녀들에 대한 특별한 지칭일 것이다.

본문은 또한 혈통적인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피로 값주고 사신 모든 사람이 진정한 이스라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유대이들을 의식적으로 제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유대인들과 흩어진 이방인 중의 자녀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3) 모의의 시작

(ajp j ejkeivnh" ou\n th'" hJmevra" ejbouleuvsanto i{na ajpokteivnwsin aujtovn.아프 에케이네스 운 테스 헤메라스 에불류산토 히나 아포크테이노신 아우톤;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3절)

테스 헤메라스(th'" hJmevra"이날)는 정관사 테스(th'")가 있으므로 '그 날'을 뜻한다. 그러므로 유대인 지도자들이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접한 바로 '그 날'로부터 모의를 시작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죽음이 극복되고 생명의 주가 사망에서 승리한 바로 그 날로부터 생명의 주를 죽음으로 내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에불류산토(ejbouleuvsanto모의하니라)는 '단순히 계획했다'는 의미보다는 '결의했다'는 의미를 가진다(Liddle&Scott).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죽음을 극복했던 그 기적의 날에, 부활고 생명의 주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다시 죽음의 권세 아래로 굴복하기를 즐겨하였으며 오히려 생명의 주까지도 죽음 아래 굴복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아들들처럼 행동했다.

 

3. 위험을 피하시는 예수(54-57절)

1) 에브라임에 거하심

( jIhsou'" oujkevti parrhsiva/ periepavtei ejn toi'" jIoudaivoi"...eij" jEfrai;m legomevnhn povlin, kajkei' e[meinen meta; tw'n maqhtw'n.예수스 우케티 파르레시아 페리에파테이 엔 토이스 유다이오이스…에이스 에프라임 레고메넨 폴린 카케이 에메이넨 메타 톤 마데톤;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54절)

우케티(oujkevti다시…아니하시고)는 '더 이상…하지 않았다'는 강조적 부정어이다(W.Bauer). 예수께선 자신의 대적자들인 유대인들에게 다시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 지역을 벗어나셨고 몸을 사리셨다. 이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다가올 고난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불필요한 위험을 자청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의 시간은 하나님의 예정과 경륜 속에서 정해진 '때'가 있기에 예수는 그 죽음의 '때'를 기다려 합당한 방법에 의해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 혼자만이 숨었던 것이 아니었다.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은거하면서 그들을 훈련하고 양육했을 것이다. 이 열둘 중에는 후에 예수를 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느 장소에 있든지, 어느 상황에 처해서든지 예수께선 그냥 계시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늘 찾으셨던 것이다.

 

2) 유월절이 다가옴

( \Hn de; ejggu;" to; pavsca tw'n jIoudaivwn, kai; ajnevbhsan polloi; eij" JIerosovluma ejk th'" cwvra"엔 데 엥귀스 토파스크 톤 유다이온 카이 아네베산 폴로이 에이스 예로솔뤼마 에크 테스 코라스;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5절)

학니소신(aJgnivswsin성결케)은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를 드리기 전에 자신의 죄들을 도말하여 온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그래서 유대의 남자들은 대체로 유월절 일주일 정도 전에 미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었다(Lightfoot).

아네베산(aJnevbhsan올라갔더니)은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된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예루살렘보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갔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기에 모든 영혼들이 우러르고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올라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큰 명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고 계신 제사가 무엇인지, 또 이번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어떤 제사를 준비하고 계신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3) 예수를 잡으라는 명령

(ejzhvtoun ou\n to;n jIhsou'n...ti" gnw'/ pou' ejstin mhnuvsh/, o{pw" piavswsin aujtovn.에제툰 운 톤 예순…티스 그노 푸 에스틴 메뉘세 호포스 피아소신 아우톤;저희가 예수를 찾으며…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56,57절)

'찾으며'(ejzhvtoun에제툰)란 3인칭 복수 미완료 과거로서 그들이 계속적으로 찾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 메(ouj mh;아니하겠느냐)는 부정어가 이중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에 '결코∼아니한다'의 강한 부정적 표현법이다(H.W.Smyth).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의 대적자들이 예수께서 명절에 올라올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유대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은 꼭 예루살렘에 올라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급박했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생명을 내거는 모험일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결코 올라오지 않을 것이지에 대해서 대적자들은 의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은 대적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명절을 순전히 지키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생명의 주를 잡는 덫으로 계획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저자 요한의 서술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이중 일부분은 초기 전승에 기초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요한의 창작품임을 관찰할 수 있다(C.K.Barrett). 특히 47-53절은나사로 설화에 대한 부록으로서 전승에 요한이 첨가한 부분으로(X.Leon-Dufour, C.H. Dodd), 예수의 체포에 대한 정당한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Lindars).

 

1. 산헤드린 논쟁과 가야바의 발언(47-50절)

47절의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tiv poiou'men티 포이우멘) 다음에 의문 부호를 붙여야하며, 본문의 호티(o{ti)는 '∼ 때문에, ∼이므로'라고 번역해야 하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라는 뜻이 아니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에 다른 해석으로 '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걸까?'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이 구절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 '지금 나는 ∼에 대하여 뭘해야 하나?'라는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Schlatter, Lagrange).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할 수 있는 자는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뿐이었는데, 본 절은 '바리새인들'(farisai'oi파라사이오이)이 공회를 소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요한은 유대인 단체에 관하여 상세하게 구분하는 시도에 큰 관심이 없었다(C.K.Barrett).

48절의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에서는 요한의 반의법적 표현이 두드러져 있으며, '로마인들이∼가리라'라는 표현은 로마인들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허구적 표현을 제시했을 뿐이다(Strauss, Weisse). 본문의 번역을 지지하는 비평가(Hoskyns, Haenchen, Becker)에 반하여,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성지와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RSV, NEB, JB, GNB, R.Bultmann, J.H.Bernard, Sanders, Schnackenburg). '그 땅'(to;n tovpon톤 토폰)은 '나라의 도시'(Ewald, Godet, Chrysostom)로서 예루살렘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신12:5), 산헤드린과 온 성직자들의 거주지(H.A.W. Meyer)로 볼 수도 있고, '성전 자체'(Maldonatus, Lucke, De Wette, Maier, B.Crusius, Hengstenberg, 요4:20행6:137:7)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49절의 '그 해 대제사장 가야바'(kaiavfa" ajrciereu;"카이아파스 아르키에류스)라는 기록은 저자인 요한이 팔레스틴의 관습에 무지했음을 입증하는 일례로서, 소아시아의 이교도 대제사장들처럼, 당시 대제사장은 매년마다 바뀌게 되었다(R.Bultmann, Bretschnei-det, Strauss, Schenkel, Scholten). 이에 반하여, 비록 예수 당시의 대제사장직은 로마식에 의존했으나, 전통적으로 유대 대제사장직은 종신직이었다(민35:25)고 주장되기도 한다(R.E.Brown).

50절의 '유익한 종'(sumfevrei쉼페레이)의 대상이 '너희들에게'(uJmi'n휘민)로 기록된 사본은 P45, P66, B, D 사본 등이며, '우리들에게'(hJmi'n헤민)로 된 사본은 Q, l, W, sin, pesh 사본 등이다. 또한 a 사본에는 인칭 대명사가 생략되어 있다(C.K.Barrett). 이 구절은 정치적 현명을 요구하고 있으며, 한 사림이 그 민족의 유익을 위하여 희생함으로 정치적으로 얻은 결실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를 제시야 주고 있다(R.Bultmann). 이에 반하여 본 구절은 권력과 영광에 대한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되기도 하였다(Schnackenberg, G.R.Beasley-Murray).

 

2. 가야바의 발언에 대한 해석과 살인 음모(51-54절)

51절의 '그 해의'(tou' ejniautou' ejkeivnou투 에니아우투 에케이누)에서 '그'(ejkeivnou에키이누)는 P66, 베자 사본에서 생략하였으며, '그 해의'를 전부 생략한 사본들도 있다(P45, OSsin, OL). 이 표현은 대제사장을 강조해 주는 어구(H.A.W.Meyer)가 아니고, 기교상 '말하자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De Wette). 또한 이 어구는 가야바가 백성을 위해 일년에 한 번 드린 희생 제사보다 더 크고 총체적인 희생 제사가 드려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Tholuck, Luthardt).

52절의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ta; tevknatou' qeou'타 테크나 투 데우)는 유대 문학에서 메시야 시대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틴으로 모이게 될 것을 의미하였으나(사43:5렘23:2,3,Philo), 저자 요한은 산재해있는 기독교인들이 마지막 날에 모이게 될 것을 예상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체인 교회로 모여들게 될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C.K.Barrett). 그리스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된다는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씨앗'(spermatiko;" logo"스페르마티코스로고스)이라는 신념과 영지주의적 용어와 잘 부합하고 있다(Hilgenfeld, Luthardt, Messner, Weiss). 53,54절의 '에브라임'(Jefpaivm에프라임) 동네에 대한 확실한 위치를 알수 없으며, 베자 사본에는 샴프레인(Samfoupein)으로 기록되었는데, 셈어의 와전된 어형으로 추정된다(C.K.Barrett, R.E.Brown).

 

3. 예수와 유월절(55-57절)

55,56절의 '많은 사람이'(polloiv폴로이)에 대하여 혹자는 85,000명이나 125,000명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으며(J.Jeremias), 예루살렘에 기거한 인원 25,000명을 합하면 100,000명 정도였을 것이다(R.E.Brown). 그러나 역사가 요세푸스 2,500,000명으로 추산하였다(josephus, WasVI). '성결케 하기 위하여'란 당시 유태인들이 유월절을 정식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몸을 깨끗이 해야 하는 관습에서 기인한다(민9:10대하30:17,18). 이들은 유월절(무교절)을 지키기 위해서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모였다 한다(C.K.Barrett).

56절의 '너희 생각에 어떠하뇨'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는 그가 오지 아니 할 것으로 생각지 않느냐?'라는 의미로서 '오지 아니하다'를 현재형으로 해석함으로 매우 부정적인 답변을 유도하고 있다(Hartung, Lucke, Ellendt).

57절은 당시 최고 사법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 체포를 명한 사실을 보여 준다.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산헤드린 공회의 모의(47,48절)

47절의 '대제사장들'은 대개 사두개파 사람들이었고(W.Hendriksen), '공회'는 산헤드린 공회로, 유대교이 법정 기관으로 유대 사회의 전통을 보수하는 곳이다(C.K.Barrett). '많은 표적'은 예수님의 메시야 됨을 뜻하는 기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기적들을 의미한다(F.L.Godet). '우리가 어떻게 하겠는냐'는 예수의 많은 표적들 앞에서 무력하게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질타하는 의미를 지닌다(F.Rienecker).

48절에서 '저를 믿을 것'이라는 내용은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군중들의 신앙을 지적한다(L.Morris). '땅'은 넓게는 예루살렘 도시를, 좁게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C.K.Barrett), '민족'은 유대 국가를 가리켜(V.C.Pfitzner), 예수를 통한 민중 봉기를 일으킬 요소가 유대인들의 신앙 가운데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는 표현이다(F.E.Gaebelein).

 

2. 가야바의 뜻하지 않는 예언(49-52절)

49절의 '그 해'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해'임을 강조한 것(W.Hendriksen)으로, 가야바의 예언이 뜻하지 않게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낸다(D.A.Carson). '가야바'는 A.D.18년에 로마 행정관인 그라투스에 의해 임명받았으며, 36년에 수리아의 총독이 비테리리우스에 의해 파면당했다(W.Hendriksen).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는 아주 모욕적이고 무례한 언사로(V.C.Pfitzner) 다른 공회원들을 무시하는 거만스런 태도를 보여 준다(josephus).

50절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에서 가야바가 주장하는 바는 군중들이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믿고 있기에 로마가 온 유대를 쳐 민족적 아픔이 되기 전에 예수를 죽여 희생을 최소화시키자는 것이다(C.K.Barrett, G.R.Beasley-Murray). 이는 가야바가 로마를 예수보다 더 경계하고 있어 예수의 죽음을 백성을 위한 죽음으로 해석하였지만(L.Morris), 이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 되기도 한다(R.L.Fredrikson). '너희에게 유익한'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보혜사가 오셔 성도에게 유익하다(요16:7)는 진술로 이해될 수 있다(C.K.Barrett). '생각지 아니하는도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다른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을 지적한다(F.L.Godet).

51절의 '스스로 함이 아니요'는 타인의 강요가 아인 이중적인 암시를 나타내는 말로 본인이 의도하지 않는 다른 의미를 타자가 이해한 것을 말한다(F.E.Gaebelein). 이는 계시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반대적인 인물을 통해서도 가능함을 보여 준다(C.K.Barrett). '그 해'는 가야바로 인해 주어지는 예수님의 수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F.L.Godet).

52절에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를 덧붙여 해석한 요한의 저의는 사43:5렘23:3,3겔34:1236:24의 예언을 이루는 것(G.R.Beasley-Murray)으로,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이방인들을 하나님 나라로 모아, 그의 자녀가 되는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하는 예수님으로 묘사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D.A.Carson). '하나가 되게'하는 것은 '한' 교회를 의미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모든 민족이 하나가되며,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는 사실을 가리킨다(W.Hendriksen). '미리 말함이러라'는 예언을 뜻하는 말로서(F.Rienecker), 랍비 문헌에 자주 나오는 자신의 의도와 지식과는 상관없이 말하는 예언을 의미한다(Strack-Billerbeck).

 

3. 공회의 모의와 예수의 피신(53,54절)

53절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예수를 죽이기로 한 공회의 결과를 제시한다(C.K.Barrett). 이는 예수님을 옹호하는 백성들의 반대를 무릅쓴 정치적인 판단임을 알 수 있다(J.R.Hill).

54절의 '여기'는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를 지칭한다(L.Morris). 공회의 위협이 유대 지방에 퍼졌음을 의미한다(G.R.Beasley-Murray). '에브라임'은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F.L.Godet), 이곳으로 예수님께서 피하신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약속한 결정의 때가 이르지 않아 '그 때'를 기다리시기 위함이다(W.Hendriksen).

 

4. 마지막 유월절의 다가옴(55-57절)

55절의 '유월절'은 세 번째로 공식화된 유월절이지만, 요5:1에 나오는 축제를 포함하면 예수님께서 네 번째로 맞는 유월절이 된다(D.A.Carson). '성결케 하기 위하여'는 민9:9-11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월 절기 의식에 따르는 행위로 보통 6일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한다(G.R.Beasley-Murray). '시골'은 일반적으로 '마을'을 뜻하지만(B.M.Newman), 유대 전지역을 비롯한 모든 지방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C.K.Barrett).

56절의 '예수를 찾으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마다 예수를 붙잡으려는 유대인들의 행동을(요5:187:44:20;10:38) 다시 한 번 고발하는 표현이다(G.R.Beasley-Murray). 이는 유대인들이 지닌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암시하는 요한의 문학적 기교이다(D.A.Carson). '성전에서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교리 논쟁을 벌이는 공공 장소로 삼았음을 언급하여(C.K.Barrett), 구원의 감격을 나누는 축제보다는 원수를 처형하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에 집착하는 유대인의 모순을 상반시킨다(L.Morris).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는냐'에는 '예수께서 이번 유월절에는 올라 오실 수 있겠느냐'라는 강한 의문을 지닌 질문이다(W.Hendriksen).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이 내린 예수님 처형 선고가 전국에 퍼져 있으며, 동시에 상당히 위협적이었음을 은근히 뽐내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R.L.Fredrikson).

57절은 산헤드린 공회의 명령이 합법적인 것임을 재차 강조한 것으로(F.E.Gaebelein), 공회의 우월성을 나타내면서도(W.Hendriksen), 아직까지 예수님의 행적을 알 수 없는 그들의 긴장감을 엿보게 하는 표현이다(V.C.Pfitzner).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신약성서 시대의 유월절

 

시대와 사회의 변화는 이스라엘 전역에 그 영향을 끼쳤다. 유월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스도 예수 당시까지 이 축제는 약간의 변화를 겪었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의식을 행하기 위해 그곳을 찾고 있다. 이는 그 도시뿐만 아니라 순례지에도 상당한 유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유월절에는 많은 양의 과일과 술이 필요했다. 성인들은 유월절에 네 잔의 술을 마셨다. 축제 때에는 올리브, 포도, 그리고 주위의 밭에서 나온 곡물들로 만든 술이 소비되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600년동안예루살렘에서는 수많은 유월절 양이 바쳐졌으며 이 행사는 점차 가족적 축제이기보다는 순례자의 공동 축제로 변하였다.

 

1. 의식

유월절 의식의 처음 몇 부분은 장엄하고 경건했다. 그러나 나머지 기간에는 즐거운 의식이 진행되었다. 가장 좋은 음식과 술을 장만하여 즐겁게 먹고 마셨으며, 현대의 풍습처럼 여행자들은 마음껏 쇼핑을 즐겼다. 율법은 그러한 경우에 자유롭게 물건을 사도록 권장하고 있다(신14:26). 강세를 보인 사업은 향우 산업이었다. 여성들은 아름다운 것과 백색아마포를 사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 향연은 어는 정도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2.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처음부터 세상의 죄를 짊어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묘사되었다(요1:36).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어 희생 제물로 드려짐으로써 그의 역할을 완전히 수행하셨다.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유월절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을 관련지어 생각하는 데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두 사건의 날짜를 병행시키는 것에서 야기되는 갈등이 무엇이건 간에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돌아가셨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사실이다(고전5:7). 예수님께서는 뼈를 꺾지 않은 유월절 양으로서는 자격을 갖추셨다(출12:46민9:12시34:10요19:36).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의 모든 기준에 꼭 들어맞지 않더라도 이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당시 대표적인 민족들(11:47-57)

◈ 세계배경 문화사 ◈

 

부족연맹체 단계를 극복하지 못한 당시에는 다른 부족들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성립시키는 일이 흔하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생한 지역마다 각기 문명을 이끌었던 중심 민족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후에 나타난 국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근동 / 팔레스틴 : 당대 근동 지역에서 수메르(Shumer)인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문명을 발달시킨 최초의 민족이다. 근동 지역에 토기, 문자, 법전 등 여러 가지 문화 유산을 남겨 놓아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수메르인 다음으로 등장한 셈족(Semmites)은 언어학적으로 셈어를 구사하는 민족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으로 바벨로니아인 또는 악카드인(Akkad)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함께 오리엔트 문명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던 이집트는 B.C.332년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하였으나, 그들은 그리스인이면서 이집트의 종교와 풍습을 중요시하면서 통치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그리스와 이집트라는 전혀 다른 문화권 안에 있었던 두 부족이 여러 갈등을 제거하고 단일 민족으로서 결합하게 되었다. 한편 B.C.14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부터 팔레스틴 지역으로 이주한 히브리인의 한 부족인 유대인이 셈인과 더불어 근동 지역에서 양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양 / 로마 :로마인의 조상은 움브리아인, 라틴인, 삼나움인으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원주민 이외에 그리스인, 사르데냐인, 페니키야인과 함게 카르타고인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다. 그 가운데 소아시아에서 유입된 에트루리아인들은 수공업, 건축, 문자 등 로마인들에게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로마는 기원 전후로 유럽 전체뿐만 아리나 아프리카와 근동 지역까지 정복하였다.

 

동양 / 중국 : 당시 중국의 민족은 상당히 다양하다. 그 가운데 대륙을 중심으로 농사에 주로 종사했던 한(漢)민족과 몽고, 만주 평원의 초원지대에서 가축을 기르면서 살았던 북방 유목 민족이 가장 큰 민족 단위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유목 민족은 소위 '오랑캐'로 불리면서 중국 대륙의 한민족들의 적대 대상이었다. 중국의 역사는 이 두 민족간의 대결과 화합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 한 민족은 B.C.202년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유방이 세운 나라 명칭으로 중국의 정치ㆍ사상ㆍ문화면에서 모범을 이루어 민족 명칭으로 변화한 것이다.

 

한국 : 당시 우리 민족은 여러 부족의 이합집산(離合集散) 과정을 통해 단일 민족에 의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중국의 오래된 역사서의 하나인「사기」에는 우리 민족의 근원을 예(濊)와 맥(貊)이라는 부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 알려진 바로는 예맥은 중국의 한(漢)나라 때부터 한반도 북부의 고구려, 부여, 동예를 지칭하는 민족 명칭으로서 한반도 남부의 한(韓)족과 함께 동일한 뿌리를 가진 족속이라고 한다. 다만 분포 지역의 차이에 따라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 대표적인 민족들은 구약에서는 가나안 족속, 이집트 민족, 바벨론과 페르샤 민족들이었다. 그외 앗수르 민족도 성경의 중심 민족인 히브리족과 연관된 민족이다. 신약의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 민족과 관련된 민족은 로마인들인데 이들은 유대 민족의 지배가로 군림하였다. 그 다음 유대 변방 지역에 집단 이주해 온 헬라 민족들이 도시를 형성하여 살게되었다. 유대인들도 그들의 문화에 외적으로 동화는 되었으나 내적으로는 철저한 종교적 민족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우리 민족(요11:48)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순수한 히브리 혈통을 지닌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가리킨다(빌2:5). 율법대로 할례를 받고 유대교 신조를 따른 히브리인을 그들의 민족으로 여겼으며 이방 앗수르인과 혼혈인 사마리아인을 배타시한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드러난 어두움의 실체(11:47-57)

 

나사로를 부화시킨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온전하게 드러낸 증표였다. 그러나 바로 그날부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없애려고 작정한 것이다. 거짓과 악은 반드시 그 실체를 드러낸다.

 

1. 메시야 표적에 대한 역반응으로

그들은 전부터 끈질기게 표적을 요구해 왔었다. 즉 메시야로서의 표적,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을 수 있도록 확실한 표적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이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표적을 보여 주시자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47절) 없애야 하겠다는 것이다. 사단에게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이 확실하게 드러나면 그 본의도 확실하게 드러낸다.

 

2. 메시야에 대한 적개심으로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48절). 즉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주님이 되시고 왕 노릇하시는 것을 볼 수가 없다는 뜻이다. 종교적인 주권과 주체를 주 하나님께 넘겨 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사단의 욕심이 아닌가.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고 주님이 지적하신 뜻이 그 뜻이다. 사단에게 속한 종교인들은 적그리스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이단자들, 사이비들, 몽상가들이 많다.

 

3. 악을 선으로 위장하는 기만술로

그들은 로마의 권세로부터 민족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그러나 실상을 자신들의 교권 유지와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또 사단적인 질투심으로 인해 무고한 예수를 죽이려는 것이다. 오늘도 '진리 고수를 위하여', 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라는 식으로 명분을 앞세우고 불법을 자행하며 이웃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자들이 많다. 기만의 천재인 사단에게 속한 자들의 거짓된 수법에 속지 말자.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악을 선으로 이용하시는 하나님(11:47-57)

 

이 세상의 풍조는 늘 하나님과 그 섭리를 대적해왔다. 주님의 영광이 들어나자 주님을 죽이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긴급 회의가 그 증거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이용하여 구속의 경륜을 이루신다. 악도 하나님의 지혜를 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1. 악인을 구속의 도구로 활용하심

타락한 종교 지도자의 수뇌인 가야바 대제사장은 예수를 죽이는 거시 유대 민족과 종교 수호의 유익이 된다고 발언했다(50절). 그러나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예언이 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멋있게 예언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쓸모없는 악인을 구속의 도구로도 활용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다 주의 사역자로 자처해서는 안된다. 훗날 주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7:23)라고 외면당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2. 유대 민족의 반역을 이용하심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 되게'(52절) 하신다고 했다. 예수는 유대교의 반역으로 인해 죽으셨다. 그리고 초대 교회도 유대교의 핍박으로 인해 전세계로 흩어졌다(행8:1). 그러나 반역과 핍박으로 인해 십자가의 대속 사역과 온 세계의 교회 설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저희가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롬11:12)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3. 십자가의 고난을 대속의 수단으로 이용하심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51절). 종교지도자들의 살인 모의는 결국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기 위한 회의가 되고 말았다. 그들의 악한 계획으로 인해 대속적 죽음의 사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광대하시다. 누구도 그 섭리를 훼방하거나 대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원어 강해

 

 

요 11:1~16 죽은 나사로에 관한 소식

죽은 나사로에 대한 예수의 태도


사람들이 죽을 병이라고 생각할 때 예수는 그 반대로 생각했으며, 제자들이 유대로 가는 것을 반대했을 때 예수는 자신의 빛되심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생각과 경영이 사람들의 그것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안목과 생각도 사람들의 그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1-4절)

1) 병든 나사로
(ti" ajsqenw'n, Lavzaro" ajpo; Bhqaniva" oJ ajdelfo;" Lavzaro" hjsqevnei.;티스 아스데논 라자로스 아포 베다니아스…마리암…호 아델포스 라자로스 에스데네이;어떤 병든 자가…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마리아는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1,2절)
본문 서두에 개역성경의 번역에서 생략한 데(dev;그런데)는 앞 장과의 간격을 보여 준다(Vince수, Westcott). '나사로'(Lavzaro";라자로스)는 히브리어 엘르아자르(rz:x:l:a,)에서 유래되었으며, '하나님은 나의 도우심'이란 뜻이다(T.Whitelaw). 다른 복음서들은 나사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본서에 나사로가 살아 있었거나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A.Barnes).
나사로가 살았던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 약 3km에위치한 것으로 알려진다. 알레입사사(ajleivyasa;붓고)는 문자 그대로 '기름을 붓는다'는 의미이다. 이와 달리 성부가 성령으로 성자에게 기름 부음을 나타낼 땐 크리오(crivw;기름 붓다)를 사용한다(Trench).
2절의 '병든'(njsqevnei;에스데네이)이란 미완료 과거로서 나사로가 오래 전부터 병든 상태로 지내왔음을 암시한다. 본문은 예수께서 11장을 통해 발생되어질 사건의 장소를 보여 주고 있으며, 이 인물이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임을 2절의 부연 설명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2) 예수께 온 전갈
(ajpevsteilan oun aiJ ajdelfai; pro;" aujto;n levgousai, Kuvrie, i[de o}n filei'" ajsqenei'. ; 아페스테일란 …프로스 아우톤…퀴리에 이데 혼 필레이스 아스데네이;예수께 사람을 보내어…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3절)
퀴리에(Kuvrie;주여)는 나사로와 그 누이들이 예수를 향해 부르던 일반적 호칭일 것이다. 이 호칭을 통해 예수와 이 가족들이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W.Hendriksen). 또한 이데(i[de;보고서)는 상황의 급박함을 알려 주는 표현으로서, 일반적으로 주의 집중을 요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W.Bauer). 본문에서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강한 요청을 암시한다. 필레이스(filei'";사랑하시는)는 이성적인 거룩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가페(ajgavph)와는 달리 자연적인 사랑, 친구간에 맺어진 사랑을 뜻하며, 예수와 나사로가 인간적인 깊은 교제를 통해 우정을 나누고 있었음을 암시한다(J.C.Ryle). 특히 이는 2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으로서 예수님께서 현재에도 계속 사랑하신다는 뜻을 함축한다.
나사로의 가족들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우선적으로 예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것은 예수가 그를 고칠 수 있다는 병고침에 대한 확신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청하는 자세는 본받을 만한 신앙의 태도이다.

3) 예수의 기이한 선언
(Au{th hJ ajsqevneia oujk e[stin pro;" qavnaton ajll j uJpe;r th'" dovxh" tou' qeou';하우테 헤 아스데네이아 우크 에스틴 프로스 다나톤 알르휘페르 테스 독세스 투 에우;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4절)
프로스 다나톤(pro;" qavnaton;죽을)은 문자적으로 '죽음까지 이르는'이란 뜻이다. 독사스데(doxasqh;영광을 얻게)는 부정과거 수동형으로서 '영광되게'라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신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이다(J.Jeremias). 예수는 준비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자기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휘오스 투 데우(uiJov" tou' qeou';하나님의 아들)는 문자적으로는 태생의 소유격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직접 낳은 아들'을 뜻한다(H.W.Smyth).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이신 신성의 예수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2. 시간을 지체하시는 예수(5-10절)

1) 이틀을 더 유하심
(hjgavpa de; oJ jIhsou'" th;n Mavrqan kai; th;n ajdelfh;n aujth'" kai; to;n Lavzaron. e[meinen ejn w|/ hn tovpw/ duvo hJmevra":;에가파 테호 예수스 텐 마르단 카이 텐 아델펜 아우테스 카이 톤 라자론 …에메이넨 …뒤오 헤메라스;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이틀을 더 유하시고, 5,6절)
에가파(hjgavpa;사랑하시더니)는 3절의 '사랑하시는'의 필레오(filevw)와는 달리 아가파오(ajgapavw;사랑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가 자신들을 친구간의 사랑인 필레오(filevw;사랑하다)하고 있다고 표현하였으나, 예수께선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신적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이다. 또한 이 단어의 시제는 미완료 과거로서, 일회적 사랑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적인 사랑을 나타내 예수께서 사랑하신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선 왜 이틀을 더 유하셨을까? 사랑하는 그 마음은 아마 급히 달려가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선 사람들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들어 나사로의 부활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시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더 큰 영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께선 준비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F.L.Godet, Holtzmann).

2) 유대로 다시 가시려는 예수
( [Agwmen eij" th;n jIoudaivan pavlin. JRabbiv, nu'n ejzhvtoun se liqavsai oiJ jIoudai'oi, kai; pavlin uJpavgei" ejkei'_;아고멘 에이스 텐 유다이안 팔린…랍비 뉜 에제툰 세 리다사이 호이 유다이오이 카이 팔린 휘파게이스 에케이;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7,8절)
랍비(JRabbi;랍비여)라는 칭호는 위에서 나사로의 누이들이 '주여'(kuvpie;퀴리에)라고 부른 것과 사뭇 대조적으로 보인다.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를 향해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뉜(nu'n;방금도)은 4개월 전을 의미한다. 앞 장은 12월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지금은 유월절 근처의 4월이기 때문이다(J.H.Bernard). 8절의 '하였는데'(toun;에제툰)는 기본어 제테오(zhtevw;찾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찾았는데를 의미하는 것으로, 계속적으로 찾았음을 암시한다.
본문을 통해 유대인들이 예수를 직접적으로 대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돌로 치려했다는 제자들의 증언이 본문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본문에 나타난 자신의 말씀처럼 다시 유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3) 세상의 참빛
(ejavn ti" peripath'/ ejn th'/ hmevra/, ouj proskovptei eja;n dev ti" peripath'/ ejn th'/ nuktiv, proskovptei, o{ti to; fw'" oujk e[stin ejn aujtw'/.;에안 데 티스 페리파테 엔 테헤메라…우 프로스코프테이…에안 데 티스 페라파테 엔테 뉘크티 프로스코프테이;사람이 낮에 다니면…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실족하느니라, 9,10절)
프로스코프테이(proskovptei;실족하지)는 '장애물을 보고 피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Liddle & Scott). 포스 투 코스무 투투(fw'"tou' kovsmou touvtou;이 세상의 빛)는 자연적인 발광체로서의 태양빛을 의미한다.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는 '그 사람이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뜻을 함축한다. 여기에서 '없는'(oujk e[stin;우크 에스틴)은 에스틴이 현재 직설법이므로 계속해서 없는 상태를 암시한다. 이런 구조는 예수가 '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의미 깊은 암시를 던져 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빛을 보면서 걸으면 실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이신 예수를 바라보면서 걸을 때 죄의 걸음으로 실족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는 12절에서 '빛을 보지 못하므로'가 아닌 그 안에 없는 고로 '즉 빛이신 예수를 그 안에 모시지 않으므로'라고 표현한 것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3. 나사로의 죽음(11-16절)

1) 잠들은 나사로
(Lavzaro" oJ fivlo" hJmw'n kekoivmhtai, eijrhvkei de; oJ jIhsou'" peri; tou' qanavtou aujtou'. ejkei'noi de; e[doxan o{ti peri; th'" koimhvsew" tou' u{pnou levgei.;라자로스 호 필로스 헤몬 케코이메타이 …에케이노이 데 에독산 호티 페리테스 코이메세오스 투 휘프누 레게이;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1-13절)
케코이메타이(kekoivmhtai;잠들었도다)는 완료 수동태형으로서 '잠들고 있는' 과정적 묘사가 아니라 이미 완전히 잠든, 즉 완전히 죽어버렸음을 뜻한다. 성경에선 대개 죽음을 잠에 비유하곤 한다. 그 이유는 이 두 가지의 상태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W.Hendriksen). 또한 본문에선 주님께서 나사로의 부활을 염두에 두시고 특별히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소데세타이(swqhvsetai;낫겠나이다)는 '병이 완쾌하다'라는 뜻이다.(W.Bauer). 특히 미래 수동형인 본문의 시제는 나사로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회복될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유대인들은 환자의 깊은 잠을 쾌유의 징조로 받아들였다.
13절의 구조는 '예수는…저희들은…'이라는 대칭적 구조를 띠고 있다. 에케이노이(ejkei'noi;저희는)는 앞의 예수와 대조적인 모습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본문에 나타나는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들의 못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예수의 뜻을 오해하고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지금의 우리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2) 나사로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예수
(Lavzaro" ajpevqanen, i{na pisteuvshte, o{ti oujk h[mhn ejkei':;라자로스 아페다넨…히나 피스튜세테 호티 우크 에멘 에케이;나사로가 죽었느니라…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14,15절)
히나 피스튜세테( i{na pisteuvshte;믿게 하려)는 히나( i{na)라는 접속사와 피스튜세테(pisteuvshte)라는 부정과거가 연합된 말로서 목적성을 띠며 '전적인 신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무엇을 믿도록 하고자 하셨던 것일까? 아마도 예수 자신이 바로 약속된 메시야이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시고자 했을 것이다. 그뿐아니라 제자들이 장차 십자가에서의 고난 이후에 일어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예수께선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죽음이 이제 자신에 의해 정복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구체적 증거를 보여 주시기를 원하셨으며, 그것들을 통해 제자들에게 지금과 장래에 믿음을 심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3) 디두모의 말
(Qwma'" oJ legovmeno" Divdumo" toi'" summaqhtai'", [Agwmen kai; hJmei'" i{na ajpoqavnwmen met;도마스 호 레고메노스 디뒤모스…아고멘 카이 헤메이스 히나 아포다논멘 메트 아우투;디두모라 하는 도마가…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16절)
본문에 나타나는 카이 헤메이스(kai; hJmei'";우리도)는 1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로 강조적인 표현이다. 아고멘(legovmeno";가자)은 1인칭 복수 동사로 동사의 사용만으로도 표현 가능한 것을 굳이 1인칭 복수 대명사를 더 사용하여 특징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H.W.Smyth).
'디두모'(Divdumo";디뒤모스)는 헬라어이며 '도마'(Qwma'";도마스)는 히브리어로서 그 의미는 '쌍둥이'로 동일하다.
본문에서 도마가 주와 함께 죽으로 가자고 한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문맥적으로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 도마가 예수의 고난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기에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도마는 죽음이 존재하는 곳이라 할지라고 예수가 가시는 곳이라면 저희도 같이 가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요 11:17~37 베다니에 오신 예수

마르다와 마리아와 말씀하시는 예수


예수를 알고 또한 믿는 사람들도 온전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확고한 믿음을 요구하셨다.

1. 예수를 맞이하는 마르다(17-24절)

1)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
(tevssara" h[dh hJmevra" e[conta ejn tw'/ mnhmeivw/. polloi; de; ejk tw'n jIoudaivwn paramuqhvswntai;텟사라스 에데 헤메라스 에콘테엔 토 므네메이오…폴로이 데 엑 톤 유다이온…파라뮈데 손타이;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많은 유대인이…위문하러 왔더니, 17-19절)
스타디온 데카펜테(stadivwn dekapevnte;5리)는 약 2마일정도의 거리이며, 스타디온(stadivwn)은 헬라의 거리 척도로 약 192m이다(F.Rienecker). 엘렐뤼데이산(ejlhluvqeisan;왔더니)은 과거 완료 시체로서 이미 사람들이 다녀갔음을 보여 준다. 이 시제는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확인하고 조문을 한 연후에 예수께서 방문하셨음을 확실하게 만든다. 파라뮈데손타이(paramuqhvswntai;위문하러)는 '충고하다'의 의미도 지니는데, 당시의 풍습은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르고 3일은엄격히 그리고 4일은가볍게 상을 치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J.Josephus). 그러나 위문은 보통 70일 정도까지 계속되었다(Lightfoot).
예수는 많은 시간들을 지체한 후에 베다니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사로서의 죽음을 슬퍼하고 돌아간 많은 유대인들은, 후에 그가 실제로 죽었었음을 확인한 수많은 증인들이 되었다.

2) 예수께 나온 마르다
(Maria;m de; ejn tw'/ oi[kw/ ejkaqevzeto. ;마르다…휘펜테센 아우토 마리암 데 엔 토 오이코 에카데제토;마르다는…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0-22절)
에카데제토(ejkaqevzeto;앉았더라)는 단순묘사가 아닌 유대인의 전형적인 애통의 모습으로서(겔8:14), 상을 당한 뒤에 의자나 침대 등을 엎어두고 '앉아서 우는 것'을 뜻한다(Edershein). 특히 이는 미완료 과거로서 계속적으로 앉아 있었음을 암시한다. 개역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나, 21절 원문에서는 퀴리에(kuvrie;주여)라는 표현이 먼저 나오고 있다. 즉 마르다는 예수를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른 후에 22절의신앙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이테세(aijthvsh;구하시는)는 '부탁한다'는 뜻으로, 은연 중에 예수가 하나님께 간청하면 들어주실 거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마르다가 비록 예수를 '주여'라고 불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메시야로 인정한 신앙 고백적 호칭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께서 무언가 하실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며, 예수께 곧장 달려나가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3) 예수와 마르다의 대화
( jAnasthvsetai oJ ajdelfov" sou. ...Oida o{ti ajnasthvsetai ejn th'/ ajnastavsei ejn th'/ ejscavth/ hJmevra/.;아나스테세타이 호 아델포스수…오이다 호티 아나스테세타이 엔 테 아나스타세이 엔테 에스카테 헤메라;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3,24절)
아나스테세타이( jAnasthvsetai;살리라)는 미래형으로 단순한 생명 소유가 아니라 활기차게 벌떡 일어서는 운동력을 묘사한다(W.Bauer).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생명을 얻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활기찬 원동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리라는 것까지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르다는 앞의 대화에서부터 계속해서 '믿는다'라는 말 대신에 오이다(Oida;아나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불완전 현재 완료로서(F.Rienecker), '알고 있다'라는 뜻이다. 마르다의 신앙 상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할만한 믿음의 상태는 아직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과 마지막 날의 부활에 대해서는 확실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바탕하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믿음으로 진일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25-31절)

1) 예수의 선언
( jEgwv eijmi hJ ajnavstasi" kai; hJ zwhv: oJ pisteuvwn eij" ejme; ka]n ajpoqavnh/ zhvsetai, kai; pa'" oJ zw'n kai; pisteuvwn eij" ejme; ouj mh; ajpoqavnh/ eij" to;n aijw'na: ;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카이 헤 조에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 칸 아포다네 제세타이 카이 파스 호 존 카이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 우 메 아포다넨 에이스 톤 아이오나;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25,26절)
본문은 에고 에이미( jEgwv eijmi;나는…이니)라는 강조적 구문에 그 초점이 있다. 즉 에이미(eijmi;나는∼이다)가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에고( jEgwv;나는)라는 1인칭 대명사가 언급되어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자기 선포의 형태로서(H.W.Smyth), 예수 자신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동시에 본문의 구조는 예수를 통해서 죽은 자들에게 부활이,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에겐 생명이 주어진다는 확장적 구조이며 부활에서 더 넓은 영역인 생명으로 확대되어 포괄적 구조를 띠고 있다(Vincent). 에이스 에메(eij" ejme;나를)를 직역하면 '내게로'로 표현할 수있다. '살겠고'(znvsetai;제세타이)는 미래형이다. 한편 오다(Oida;아나이다)라는 대답에 반해 예수는 피스튜에이스(posteuveo";믿느냐)라고 믿음에 관해 질문을 하신다.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동시에 단순 지식이 아닌 믿음을 마르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마르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묻고 있는 질문일 것이다.

2) 마르다의 고백
(ejgw; pepivsteuka o{ti su; ei oJ Cristo;" oJ uiJo;" tou' qeou' oJ eij" to;n kovsmon ejrcovmeno".;에고 페피스튜카 호티 쉬 에이 호 크리스토스 호 휘오스 투 데우 호 에이스 톤 코스몬 에르코메노스;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7,28절)
마르다는 드디어 에고 페피스튜카(ejgw; pepivsteuka;;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그 앞에 퀴리에(kuvpie;주여)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이때의 '주여'라는 부름은 앞에서의 호칭과는 사뭇 다른 의미일 것이다. 또한 이 대답에서는 에고(ejgwv;내가)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특징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H.W.Smyth), 동사 페피스튜카(pepivsteuka;;믿나이다)도 현재 완료형을 사용하여 확실히 믿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F.Rienecker).
마르다가 고백한 믿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교회의 터전을 세우신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매우 유사하다.
28절의 '선생님께서'로 번역된 부분이 사마리아역에선 '우리의 주인께서'로 표기되어 있다.

3) 예수께 나아가는 마리아
(hjgevrqh tacu; kai; h[rceto pro;" aujtovn. oiJ ou jIoudai'oi oiJ o[nte" met j aujth'" ejn th'/ oijkiva/ kai; paramuqouvmenoi aujthvn, ijdovnte" th;n Maria;m o{ti tacevw" ajnevsth kai; ejxh'lqen, hjkolouvqhsan aujth'/, dovxante" o{ti uJpavgei eij" to; mnhmei'on i{na klauvsh/ ejkei'.;에게르데 타퀴 카이 에르케토 프로스 아우톤…호이 운 유다이오이…에콜루데산 아우테 독산테스 호티 휘파게이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 히나 클라우세 에케이;마리아가…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유대인들은…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29-31절)
타퀴(tacu;;급히)라는 표현은, 앞에서 마르다가 곧 나가 예수를 맞이한 것처럼 두 자매가 예수에 대한 순종이 얼마나 즉각적이고 절대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부사이다(J.C.Ryle).
반면에 예수의 행동은 에티(e[ti;그저)라는 말로 대표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예수가 이틀을 더 유한 것도 너무 늦었는데 베다니에 와서까지도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들지 않을 수가 없다(W.Hendriksen). 그러나 사실은 마리아를 불러내어 곧장 무덤으로 가시고자 하셨음을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예수께서도 속으로는 매우 급하셨을 것이다. 어려움과 문제들에 부딪힐 때 예수께서 시간만 허비하고 응답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생각은 불신앙이 초래한 오해인 것이다.

3.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32-37절)
1) 마리아의 원망 섞인 고백
(Kuvrie, eij h" w|de oujk a[n mou ajpevqanen oJ ajdelfov".;퀴리에 에이 에스 호데 우크 안 무아페다넨 호 아델포스;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2절)
에페센(e[pesen;엎드리어)은 간절히 간구하는 행동이(Liddle&Scott). 마리아는 2절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겸손히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예수에게 눈물로써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마리아의 호소도 마르다의 호소와 마찬가지로 퀴리에(Kuvrie;주여)라는 호격으로 시작하고 있다. 개역성경이 단순히 '주께서'라고 일괄 처리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두 자매는 '주여'라는 호칭으로 말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본 절의 '주께서'란 원문에는 없으나 퀴리에(Kuvrie;주여)라는 말대신에 언급되니 말인데, '계셨다면'(h";에스)이 2인칭 단수 동사이므로 굳이 주어를 말한다면 '당신께서'로 표현할 수 있다. 본문에서 사용된 가정 구문인 에이(eij;∼더면)와 안(a[n;하였겠나이다)은 단순한 가능성이 표현이 아니다. 이 구문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확실한 설명에만 사용되는 가정 구문이다(H.W.Smyth). 마리아는 예수를 어떠한 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간주했었음을 알 수 잇다. 그러나 그녀도 그의 언니와 마찬가지로 아직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2) 눈물을 보이시는 예수
(ejnebrimhvsato tw'/ pneuvmati kai; ejtavraxen eJautovn...ejdavkrusen oJ jIhsou'".;에네브리메사토 토 프튜마티 카이 에타락센 헤아우톤…에다크뤼센 호 예수스;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3-35절)
에네브리메사토(ejnebrimhvsato;통분히)는 마음의 심한 동요나 분노로 인하여 그 격렬한 감정이 목소리나 신체의 흔들림 등을 통해 표출되는 상태를 말한다(Strachan). 또한 에타락센(ejtavraxen;민망히)은 '자극적이거나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W.Bauer). 예수께서 이렇게 통분히 여기신 것은 사랑하시던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범죄한 인류를 지배하는 죄와 사망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통분히 여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J.Calvin, Olshausen). 에다크뤼센(ejdavkrusen;눈물을 흘리시더라)은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H.W.Smyth). 참고로 눅19:41에서 쓰인 클라우오(klauvw;울다)는 소리가 들리는 정도로 우는 것을 말한다.(J.V.McGee).
예수께서도 이렇듯 울고 웃으시는 인성을 지니신 분이셨음을 본문은 잘 드러내고 있다.

3) 유대인 사이에 오간 말
(oiJ jIoudai'oi, [Ide pw'" ejfivlei aujtovn....poih'sai i{na kai; ou|to" mh; ajpoqavnh/_;호이 유다이오이…이데 포스 에필레이 아우톤…우크 에뒤나토…포이에사이 히나 카이후토스 메 아포다네;유대인들이…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36,37절)
'사랑하였는가'(ejfivlei;에필레이)는 미완료 과거로서 예수께서 친구간의 정으로 지속적으로 사랑하셨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있었던 직접적인 반문들은 바로 죽음의 문제에 직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점을, 그들의 많은 수군거림 중에서 본문이 유독 메 아포다네(mh; ajpoqavnh;죽지 않게)라는 표현만을 기록하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은 뜨게 한 것과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 그외의 많은 이적들을 행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목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이적을 갈구했다. 때문에 죽음에 대한 승리는 어쩌면 메시야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요구되는 이적이었을 것이다. 바로 사람들의 갈급해 하는 심령에 기적의 생수를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이다.

 

요 11:38~46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성자 예수의 권세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신의 명령으로 죽은 자를 살려낸다. 이 사건을 통해 생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소유한 성자 메시야로서의 권위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성자의 권위와 능력은 죽음을 이겼으며, 그것을 구체적인 부활로서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1. 무덤에 가시는 예수(38,39절)

1) 돌로 막은 무덤
( jIhsou'" oun pavlin ejmbrimwvmeno" ejn eJautw'/ e[rcetai eij" to; mnhmei'on. hn de; sphvlaion, kai; livqo" ejpevkeito ejp j aujtw'/.;예수스 운 팔린 엠브리모메노스 엔 헤아우토 에르케타이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리도스 에페케이토 에프 아우토;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돌로 막았거늘, 38절)
팔린(pavlin;다시)은 예수께서 얼마나 크게 마음이 상하셨는가를 알게 한다. 33절의 통분하셨던 이유가 인간에 대한 죄와 죽음의 지배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면, 본문의 '통분히 여기심'은 죽음에 종속된 인간들이 예수를 통해 죽음에 승리하고자 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비꼬려고만 하기 때문이었다. 에페케이토(ejpevkeito;막았거늘)는 완료 수동 형태로서 이미 나흘 전에 굳건하게 닫혀진 상태임을 보여 준다.
본문의 상황은 인간의 상황을 잘 묘사한다. 인간은 이미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존재들이며 죄라는 굴 속에 놓여 있고 그 입구를 죽음이라는 큰 돌이 막고 있는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예수께선 돌로 막힌 인간들의 현주소를 보시며 답답해 하셨을 것이다.

2) 예수의 명령
(levgei oJ jIhsou'", [Arate to;n livqon. ;레게이 호 예수스 아랕 톤 리돈;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니, 39a절)
아라테( [Arate;옮겨 놓으라)는 '옮겨 놓다'는 의미와 더불어 '위로 끌러올리다, 제거하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W.Bauer). 또한 이 명령은 부정과거 시제로서 권위적인 명령을 표현하는 용법이다(J.H.Bernard). 레게이(levgei;가라사대)는 현재 시제로서,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향해 이 명령을 말씀하고 계심을 보여 주며,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H.W.Smyth). 또한 돌을 지칭하면서 톤리돈(to;n livqon;그 돌)이라고 관사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는 바로 지금 나사로의 죽음을 변할 수 없는 기정 사실로 만들고 있는 무덤의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제거해 버리라고 명령을 하고 계신다.
예수는 본문을 통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무덤을 막고 있는 '그 돌'을,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을 나타내는 '그 돌'을 지금 당장 치워 버리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3) 마르다의 대답
(Kuvrie, h[dh o[zei, tetartai'o" gavr ejstin.;퀴리에 에데 오제이 테타르타이오스 가르 에스틴;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39b절)
본문은 예수의 명령에 대답하는 마르다의 불신앙을 보여 준다. 이것은 비단 그녀뿐 아니라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죽은 지'(teteleuthkovto";테텔류테코토스)는 현재 완료 분사로서 이미 죽어서 현재 계속적으로 죽은 상태로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테타르타이오스(tetartai'o";나흘이)는 이미 나흘째 날이 되었음을 나타내며,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너무나도 예수를 서글프게 만든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선포하셨으나, 사람들은 '주여, 사람들이 죽음에 굴복한 지가 벌서 수천 년이나 되었사오니 이제는 죽음에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라고만 대답하기 때문이다. 마르다가 내뱉은 호칭인 퀴리에(Kuvrie;주여)는 여러 뜻으로 사용될 구 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는 절대자를 부르는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마르다와 우리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주여'라고 불러야만 할 것이다.

 

 

2. 예수의 기도(40-42절)

1) 믿으면 보리라
(levgei aujth'/ oJ jIhsou'", Oujk eipovn soi o{ti eja;n pisteuvsh/" o[yh/ th;n dovxan tou' qeou'_;레게이 아우테 호 예수스 우크 에이폰 소이 호티 에안 피스튜세스 옵세 텐 독산 투 데우;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40절)
개역성경은 소이(soi;너에게)를 생략하고 뒤에 포함시켜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문은,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이다. 예수께선 너희들이 아니라, 바로 '너'에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가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개개인 각자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본문에서 에안 피스튜세스(eja;n pisteuvsh/";네가 만일 믿으면)의 목적어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과연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그 해답은 이미 앞에서 계속적으로 선포되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에 승리하는 부활과 생명의 메시야이며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 이 믿음의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독산 투 데우(dovxan tou' qeou;하나님의 영광)는 문자적 의미인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란 뜻 이외에도, 죽음과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과 빛이 나타나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2) 예수의 감사
(Pavter, eujcaristw' soi o{ti h[kousav" mou.;파테르 유카리스토 소이 호티 에쿠사스 무;…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1절)
아노(a[nw;우러러 보시고)는 당시의 일상적인 기도의 모습이다(눅18:13). 파테르(Pavter;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른 것은 예수께서 하신 모든 기도들의 공통점이다. 예수는 주기도문에서도(마6:9), 겟세마네의 기도에서도(마26:39)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성을 나타내며 나아가 이 호칭은 하나님과의 존재적인 일체성을 보여 준다(W.Hendriksen).
에쿠사스(h[kousav";들으신 것을)는 부정과거로서 '들으신' 사실 자체를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기만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들으신 기도에 대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은 예수의 기도대로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3) 나사로를 부활시키시는 목적
(dia; to;n o[clon to;n periestw'ta eipon, i{na pisteuvswsin ;디아 톤 오클론 톤 페리에스토타 에이폰 히나 피스튜소신;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나이다, 42절)
1인칭 단수 동사인 에데인(h[/dein;알았나이다)의 주체로서 1인칭 대명사 에고(ejgwv;내가)를 삽입함으로써, 예수는 '내가'라는 자기 자신을 강조한다. 아쿠에이스(ajkouvei";들으시는 줄)는 현재형이다. 즉 아버지께서 '항상'(pavntotev;판토테) 들으시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부터의 행동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지금 듣고 계심이 모여서 계속 듣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예수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표현될 수 있다. 현재였던 과거와 조금 후의 현재일 미래에도 하나님 아버지는 기도를 듣고 계신다.
본문에선 구체적인 믿음의 내용이 제시되었다.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 즉 아버지와 아들이 원래 한 장소에서 한 분이셨으며 지금 아버지의 생명과 빛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 예수의 기도를 통해 밝혀진 믿음의 내용인 것이다.

3. 나사로를 살리심(43-46절)

1) 죽은 자에 대한 명령
(kai; tau'ta eijpw;n fwnh'/ megavlh/ ejkrauvgasen, Lavzare, deu'ro e[xw.;카이 타우타 에이폰 포네 메갈레 에크라우가센 라자레 듀로 엑소;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고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3절)
포네 메갈레(fwnh'/ megavlh;큰 소리로)는 헬라어로는 '놀라운 음성으로'로 번역될 수도 있고, 시리아역에서는 '높은 음성으로'라고 번역되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큰 소리로 부르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지, 마력이나 주문에 의해서 혹은 유대 지도자들의 지적처럼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권세를 힘입어서임을 분명히 알리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J.C.Ryle).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신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이 살아난 것에 그 의미가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죽음에 정복당한 온 인류를 향해 무덤에서 나오라고 부르실 당당한 선포의 전주곡이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무덤 가운데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이후에 예수께선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불러 주실 것이다. '무덤에서 나오라'라고 말이다.

2) 살아나는 나사로
(ejxh'lqen oJ teqnhkw;" dedemevno" tou;" povda" kai; ta;" cei'ra" keirivai", kai; hJ o[yi" aujtou' soudarivw/ periedevdeto. levgei aujtoi'" oJ jIhsou'", Luvsate aujto;n kai; a[fete aujto;n uJpavgein.;엑셀덴 호 테드네코스 데데메노스 투스 포다스 카이 타스 케이라스 케이리아이스…레게이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 뤼사테 아우톤 카이 아페테 아우톤 휘파게인;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4절)
성경은 분명히 호 테드네코스(oJ teqnhkw;";죽은 자가)라고 현재 완료 분사로 기록하고 있다.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이미 완전히 죽어 지금 죽은 상태로 계속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거시다. 사람들이 보기에 죽은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죽은 그 사람에게 예수는 명령했고, 그 명령에 따라 죽음에 둘러싸여 있던 그 사람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또한 원문에선 아우톤(aujton;그를)이란 표현이 '풀어 놓아'와 '다니게'의 앞에 두 번 나온다. 즉 예수께선 풀어서 다니게 할 대상으로서의 그에게 관심을 크게 보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푸시고자 했던 고리는 시체를 둘러싼 베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죽음의 고리였으며, 예수께선 진정으로 관심 있었던 것은 이적이 아니라 바로 그(인류)를 자유케 하는 것이었다.

3) 유대인의 두 가지 반응
(Polloi; oun ejk tw'n jIoudaivwn,...ejpivsteusan eij" aujtovn: tine;" de; ejx aujtw'n ajph'lqon pro;" tou;" Farisaivou" kai; eipan aujtoi'" a} ejpoivhsen jIhsou'".;폴로이 운 엑 톤 유다이온…에피스튜산 파리사이우스 카이 에이판 아우토이스 하 에포이에센 예수스;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45,46절)
에이판(eipan;고하니라)은 동일한 예수의 이적을 대하는 두 가지 부류의 행동 반응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하나의 진리에 대해서도 이렇게 서로 다르게 행동했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의 죄된 모습이 적절히 반영된 모습이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진리와 비진리,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이 외의 많은 대조를 가운데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본문은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

 

요 11:47~57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의 시작

예수에 관한 유대 지도자들의 의논


생명의 주를 죽이고자 하는 구체적인 모의가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알지도 못했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되는 결과들과 눈앞의 현상에 얽매여 죄악을 범하기에 열심을 내었던 것이다.

1. 대적자들의 의논(47,48절)

1) 논의의 시작
(sunhvgagon oun oiJ ajrcierei'" kai; oiJ Farisai'oi sunevdrion...Tiv poiou'men;쉬네가곤 운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호이 파리사이오이 쉬네드리온…티 포이우멘;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7절)
쉬네드리온(sunhvgagon;공회)은 사두개파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의 장로, 서기관들 총 72명으로 구성된 유대교 최고의 기관이다. 세메이아(shmei'a;표적)는 단순한 '이적'이란 의미와 아울러,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에 의해 선지자나 혹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특별한 이적에 대한 자칭이기도 하다(W.Bauer). 포이에이(poiei';행하니)는 현재 시제로서 '지금 행하고 있으니'가 정확한 의미이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특히 나사로의 부활이 보여 주고 있는 현재적인 기적 증거들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드디어 임재하였다는 사실, 즉 온 인류에 구원의 기쁜 소식이 들리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기쁨이 아니라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아이러니하고도 슬픈 결과이다.

2)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걱정
(eja;n ajfw'men aujto;n ou{tw", pavnte" pisteuvsousin eij" aujtovn;에안 아포멘 아우톤 후토스 판테스 피스튜수신 에이스 아우톤;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48a절)
아포멘(ajfw'men;두면)은 아피에미(ajfi{hmi;가게 하다, 보내 버리다, 포기하다)의 1인칭 복수 동사이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들, 즉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명하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면'이라고 언급하는 내용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언행을 방치해 두면 폭동과 무질서의 근거가 된다고 여겼다.

3) 정복됨의 걱정
(kai; ejleuvsontai oiJ JRwmai'oi kai; ajrou'sin hJmw'n kai; to;n tovpon kai; to; e[qno".;카이 엘류손타이 호이 로마이오이 카이 아루신 헤몬카이 톤 토폰 카이 토 에드노스;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들을 빼앗아 가리라, 48b절)
톤 토폰(to;n tovpon;땅)은 정관사가 함께 쓰여 '그 땅'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땅은 아마도 성전을 뜻할 것이다(행6:13,14).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장소가 바로 성전이었기에, 성전을 '그 땅'이라고 불렀다. 구약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은 '그 땅'에서 예배를 드리고자 이스라엘의 흙을 나귀에 싣고 본국으로 돌아갔다(왕하5:17). 토 에드노스(to; e[qno";민족)는 대대로 내려온 아브라함이래의 유대 민족만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을 지칭하면서 정관사를 더불어 사용하여 '그 민족'이라고 하였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지도자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아니라 외모와 빼앗길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욕을 또 다시 당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생명의 하나님께 진정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이 계신 모든 곳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성전이 더 중요했으며, 신령한 이스라엘보다는 혈육적인 이스라엘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어리석음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들었고 나아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2.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49-53절)

1) 가야바의 말
(Kai>avfa"...ei|" a[nqrwpo" ajpoqavnh/ uJpe;r tou' laou' ;카이아파스…에이펜 아우토이스…헤이스 안드로포스 아포다네 휘페르 투 라우카이 메 홀론 토 에드노스 아폴레타이;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49,50절)
'가야바'(Kai>avfa";가이아파스)는 A.D.18-36년까지 18년 동안 대제사장의 직위에 머물러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통치자가 임명하는 임명제로 바뀌어 대제사장이 어느 정도의 임기를 마치면 수리고 바뀌게 되었다(Josephus).
홀론 토 에드노스(o{lon tov e[qno";온 민족)는 '유대 민족 전체'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란 의미이다(H.W.Smyth). 쉼페레이(sumfevqei;유익한)는 현재형으로서 즉각적인 유익함이 있음을 보여 준다(W.Bauer).
대제사장의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백성들을 위해 죽는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대제사장조차도 알지 못했다. 본문에 나타난 대제사자의 말은 흡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 그 말의 의미

( jIhsou'" ajpoqnhv/skein uJpe;r tou' e[qnou"...kai; ta; tevkna tou' qeou' ta; dieskorpismevna sunagavgh/ eij" e{n.;예수스 아포드네스케인 휘페르 투 에드누스…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51,52절)
아프 헤아우투(ajf eJautou';스스로 함이)는 문자 그대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라는 의미이며 이것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부터'라는 의미를 내포한다(A.H.Chase). 테크나(tevkna;자녀)는 '어린아이'라는 의미이며, '하나님의'(tou' qeou';투 데우)라는 수식어가 붙음으로써 '하나님이 낳으신'이란 의미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로 직접 삼으신 자들을 본문은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피값으로 산 자녀들에 대한 특별한 지칭일 것이다.
본문은 또한 혈통적인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피로 값주고 사신 모든 사람이 진정한 이스라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유대이들을 의식적으로 제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유대인들과 흩어진 이방인 중의 자녀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3) 모의의 시작
(ajp j ejkeivnh" oun th'" hJmevra" ejbouleuvsanto i{na ajpokteivnwsin aujtovn.;아프 에케이네스 운 테스 헤메라스 에불류산토 히나 아포크테이노신 아우톤;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3절)
테스 헤메라스(th'" hJmevra";이날)는 정관사 테스(th'")가 있으므로 '그 날'을 뜻한다. 그러므로 유대인 지도자들이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접한 바로 '그 날'로부터 모의를 시작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죽음이 극복되고 생명의 주가 사망에서 승리한 바로 그 날로부터 생명의 주를 죽음으로 내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에불류산토(ejbouleuvsanto;모의하니라)는 '단순히 계획했다'는 의미보다는 '결의했다'는 의미를 가진다(Liddle&Scott).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죽음을 극복했던 그 기적의 날에, 부활고 생명의 주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다시 죽음의 권세 아래로 굴복하기를 즐겨하였으며 오히려 생명의 주까지도 죽음 아래 굴복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아들들처럼 행동했다.

3. 위험을 피하시는 예수(54-57절)

1) 에브라임에 거하심
( jIhsou'" oujkevti parrhsiva/ periepavtei ejn toi'" jIoudaivoi"...eij" jEfrai;m legomevnhn povlin, kajkei' e[meinen meta; tw'n maqhtw'n.;예수스 우케티 파르레시아 페리에파테이 엔 토이스 유다이오이스…에이스 에프라임 레고메넨 폴린 카케이 에메이넨 메타 톤 마데톤;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54절)
우케티(oujkevti;다시…아니하시고)는 '더 이상…하지 않았다'는 강조적 부정어이다(W.Bauer). 예수께선 자신의 대적자들인 유대인들에게 다시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 지역을 벗어나셨고 몸을 사리셨다. 이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다가올 고난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불필요한 위험을 자청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의 시간은 하나님의 예정과 경륜 속에서 정해진 '때'가 있기에 예수는 그 죽음의 '때'를 기다려 합당한 방법에 의해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 혼자만이 숨었던 것이 아니었다.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은거하면서 그들을 훈련하고 양육했을 것이다. 이 열둘 중에는 후에 예수를 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느 장소에 있든지, 어느 상황에 처해서든지 예수께선 그냥 계시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늘 찾으셨던 것이다.

2) 유월절이 다가옴
( Hn de; ejggu;" to; pavsca tw'n jIoudaivwn, kai; ajnevbhsan polloi; eij" JIerosovluma ejk th'" cwvra";엔 데 엥귀스 토파스크 톤 유다이온 카이 아네베산 폴로이 에이스 예로솔뤼마 에크 테스 코라스;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5절)
학니소신(aJgnivswsin;성결케)은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를 드리기 전에 자신의 죄들을 도말하여 온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그래서 유대의 남자들은 대체로 유월절 일주일 정도 전에 미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었다(Lightfoot).
아네베산(aJnevbhsan;올라갔더니)은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된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예루살렘보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갔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기에 모든 영혼들이 우러르고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올라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큰 명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고 계신 제사가 무엇인지, 또 이번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어떤 제사를 준비하고 계신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3) 예수를 잡으라는 명령
(ejzhvtoun oun to;n jIhsou'n...ti" gnw'/ pou' ejstin mhnuvsh/, o{pw" piavswsin aujtovn.;에제툰 운 톤 예순…티스 그노 푸 에스틴 메뉘세 호포스 피아소신 아우톤;저희가 예수를 찾으며…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56,57절)
'찾으며'(ejzhvtoun;에제툰)란 3인칭 복수 미완료 과거로서 그들이 계속적으로 찾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 메(ouj mh;;아니하겠느냐)는 부정어가 이중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에 '결코∼아니한다'의 강한 부정적 표현법이다(H.W.Smyth).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의 대적자들이 예수께서 명절에 올라올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유대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은 꼭 예루살렘에 올라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에수께서도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급박했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생명을 내거는 모험일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결코 올라오지 않을 것이지에 대해서 대적자들은 의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은 대적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명절을 순전히 지키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생명의 주를 잡는 덫으로 계획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