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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

화산폭발로 도시 전체가 화석이 되어 버린 폼페이

by 은총가득 2020. 10. 22.

화산폭발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석이 되어 버린 폼페이

 

 

폼페이는 이탈리아의 남부지방의 주요도시로 나폴리로부터는

남서쪽으로 23Km 떨어져 있으며 기원전 6세기 경에 도시가 형성됐다.

 

기원전 3세기부터는 로마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으며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으나 퇴폐적이고 방탕과

향락이 최고조에 달했던 타락한 도시였으며

화산폭발 당시에는 2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폼페이는 3Km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처져 있었고

도로는 돌로 포장되어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인도와 마차길로 분리되어 있었다.

게다가 상, 하수도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종말의 서막이었는지 서기 62년에 큰 지진으로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는데 복구도 채 끝나지 않은 시점인

서기 79년 사진에서 보이는 베수비오 산이 거대한 화산폭발을 일으켜

도시 전체가 한순간에 가스와 5~6m 두께의 화산재로 덮이면서

모든 것이 매장되는 폼페이 최후의 날을 맞이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의 능선은 그저 순하게 보이는데

폭발은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와 심판이었을까?

 

 

 

매표소를 통과하면 제일 먼저 맞게 되는 전경으로 집에서 사람들이 곧 나올 것만 같다.

 

 

폼페이는 화산폭발 후 거의 1500년이 흐른 뒤인 1549년 수로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1592년에는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으나 명목상 발굴이었지 약탈이었다.

 

아름다운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은 프랑스로 반출했고

일반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1861년에서야 폼페이의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었고

현재는 전체 유적의 4/5정도가 발굴된 상태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아치형의 건축을 무척 좋아했었던 듯하다.

어딜 가든지 수로의 기둥 등에서도 아치형 건축물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폼페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것은 당시의 건축기술이 매우 발달했슴을 보여준다.

 

12세기 초에 건설된 앙코르와트도 당시에 아치형의 건축기술이 없어서

회랑의 지붕이 아치형이 아닌 투박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순천 선암사 승선교의 홍예도 아름다운 자랑거리 임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화산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지붕들이 무너져 내렸고 기둥들 만이 남아 있었다.

 

 

주피터(제우스)신전

 

중앙광장에서 북쪽으로 베수비오산을 향해 주피터(제우스)신전이 세워져 있다.

주피터신전 왼편에 식품 시장이 있고, 라리의 신전이, 그 옆에 베스파니아누스의 신전이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현재의 법원역할은 하는 재판과 상업의 집행자리인 바실리카와

선거를 위한 코미튬, 공공건물인 세개의 시청 건물이 있다

 

 

 

바실리카 옆에는 아폴로신전이 있고, 아폴로신전 옆에는 곡물창고가 있다

 

 

 

이제 중앙광장에서 2천년 전 그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요즘 상가건물의 셔터문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에 문은 미닫이였을까? 셔터형태였을까?

 

 

 

횡단보도 야광표시석

 

좌 : 인도와 마차길이 분리된 도로 중간에 돌을 둠으로써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줄이도록 유도하여 사람들이

길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기막히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됐다.

우 : 어두운 밤에 길을 안내하는 야광표시석

 

 

 

역시 지붕은 없다.

 

 

 

여기는 바닥의 타일과 벽이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 있다.

 

 

 

급수대

그런데 수도꼭지는 그 시대의 유산은 아니겠지?

 

 

 

 

 

 

 

홍등가

그시절 퇴폐와 향락이 극에 달했던 타락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집

 

 

 

 

성을 매매하고 탐닉했을 돌침대

그런데 침대의 길이가 1m 50cm 정도로 짧다.

아마 그 시대 사람들의 평균신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우리나라도 고궁이나 고택들의 방과 문이 작은 걸로 봐서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신장은 계속 크는 쪽으로 진화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두 장의 사진 중 왼편은 바닥에 그려진 사창가로 가는 길 표시고

우측사진 역시 친절하게 홍등가로 가는 표시로 벽에 조각되어 있다.

 

아래 좌측 사진도 홍등가 표시며 우측은 건물 외벽에 돌이 삐죽 나와 있는데

이것 역시 사창가를 표시하는 것으로 당시 그들의 너무나 노골적인 표현에 경악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학설로는 고대 로마에서는 남근이 부와 행운의 상징으로 여겼기에

우리네 부적처럼 가게 주인들이 상가 주변에 조각을 했을 거라는 설도 존재한다고......

 

 

 

상수도관으로 그 당시에 이런 설비를 갖췄다니 이것 또한 경이롭다.

 

 

 

 

 

 

 

 

 

 

 

 

 

이곳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많은 항아리와 도기류, 착유기 등이 있는데

그릇 중에는 먹다가 토사물을 받을 용기까지 있다고......

 

그런 용기까지 준비해 놓고 먹도 토하고 또 먹고 했다니

당시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기술을 발달시켰으면서

왜 그렇게 미련한 짓들을 했을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추하면 그럴 수 있을까?

 

 

 

 

폼페이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일순간에 갑자기 멸망하였기에 고대 로마의 건축, 문화 ,생활상 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박물관이 되었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폐허의 미학"이 아닐런지?

이상은 "폐허에도 분명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나의 철학!!

 

 

 

출토된 대리석 조리기구들로 맷돌, 냄비, 빵굽는 틀 등이다.

냄비는 지금도 전골냄비로 써도 충분할 듯!

 

 

 

화산 희생자의 캐스트

 

위와 아래의 사진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석고로 재현한 것이다.

화산폭발 때 생성되는 화산재가 사람을 완전하게 덮어 오랜 시간이 흘러

화산재가 단단하게 굳어지는 반면 화산재 내부의 시신은 썩어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에 석고를 채워넣어 폼페이 사람들의 최후의 모습을 되살려낸 것이다.

 

 

특히 아래 사진은 화산폭발시 가스가 분출되는 극한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몸부림치는 안타까운 장면이다.

 

 

 

화산 폭발 시 가스와 증기로부터 얼굴을 손으로 보호하려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마부의 모습(좌), 개(우)

 

 

 

 

 

 

 

아마 가이드가 세신(때밀이)용 침대라고 설명을 했던 것으로......가물가물

 

 

목욕탕의 벽과 천장 조각

 

 

 

이 무늬는 목욕탕 내부의 습기로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아래로 흘러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개인 사물함

 

 

 

 

 

욕조

 

 

 

 

 

 

 

 

 

주방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조리가 가능해 보인다.

 

 

"개조심" 표시

 

 

 

 

 

 

 

 

 

 

 

당시의 공동묘지

 

 

우물

 

 

 

당시 최고의 주택지

고딕 성당 중 세계 최대 규모인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

 

 

 

이태리 여행의 마지막 날 대미를 장식할 고딕양식 건축의 걸작 라노 두오모에 갔다.

밀라노 두오모는 1386년에 착공하였으나 건축 과정에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면서

무려 6백년 가까이 공사를 한 끝에 1951년에서야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태리 사람들이 우리와 성향이 비슷하다고들 하는데

세계최대, 세계최고 좋아하는 거는 정말 비슷하다.

 

 

 

 

두오모(Duomo)의 원래의 뜻은 반구형의 지붕, 천장을 뜻한다.

보통 돔(Dome)경기장으로 부르는 실내경기장의 돔(Dome)이다.

 

그러나 두오모는 대성당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고 밀라노 대성당처럼

돔이 없지만 지역의 중심에 있고 가톨릭 주교가 계시는 성당을 두오모라 부른다.

 

 

 

 

대성당에서 가장 높은 곳인 109m의 첨탑 위에는 황금색의 성모 마리아상이 있고

하늘을 찌를듯한 135개의 첨탑 위 하나하나에는 성인들의 조각상이 있으며

3천개가 넘는 입상이 외관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당시 로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로크나 르네상스 양식보다 알프스 북쪽에서 발달한 고딕 양식 영향을 받았고

밀라노 두오모 역시 고딕 양식을 받아들여 지어졌다.

 

 

 

 

그런데 수 백년 전에 이런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슴을 그저 경탄하고

겉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만 할 수 있을까?

 

현대화된 장비도 없었을 그 시절에 목숨을 걸고 높은 곳에서

일에 매달려야했을 이들은 생략하고 결과물에만 환호할 수 있을까?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할텐데 종교지도자들을 위해 존재했

중세 암흑기의 결과물인 대성당을 보며 한순간 화려함에 넋을 잃지만

한편으론 위압적이고 결코 인간친화적이라고 할 수 없슴도 인정해야겠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거늘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해야 한다고 호도하는

요즘 우리나라 권력과 어쩜 그리도 비슷할까?

 

아니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썩은 권력층을 위해

존재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리라.

 

 

 

두오모의 왼쪽은 공사 중이었는데 여기에도 전광판을 설치해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대성당의 뒷면 역시 화려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으나 거대한 건물 전체가

위풍당당하고 화려하기만 해서 오히려 눈 둘 곳이 없다.

담백하고 고졸한 맛도 있으면 더욱 좋으련만......

 

 

 

비또리오 에마뉴엘레 2세 조각상

 

 

 

 

대성당의 내부로 들어갔다.

그런데 경비원이 우릴 막아서더니 성당 안에 있는 티켓 부스로 가라고 했다.

뭔 영문이지 모르지만 일단 티켓부스로 가니 카메라 한 대당 2유로 씩을 내라고 했다.

 

4유로를 주니 놀이동산에 가면 손목에 묶어주는 입장권처럼 생긴 띠를

카메라 스트랩에 묶어주는데 결국 2유로로 사진촬영권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오모 내부를 돌아다니다보니 우리처럼 스트랩에 묶고 다니는 이들과

그냥 통과했는지 아무런 표식도 붙이지 않고 사진을 찍는 이들이 혼재해 있었다.

 

돈을 낼때 놓고 온 모자를 찾으러 티켓 오피스에 갔더니 그 때는 경비원이 없었다.

역시 어딘지 조금 허술한 이탈리아의 한 단면이었다.

 

 

 

 

 

대성당의 웅장한 중앙 제대

 

 

 

진중하게 기도하고 있는 두 분을 담았다.

 

 

 

 

 

 

 

파이프오르간

 

 

 

 

 

 

 

 

대성당의 우측

 

 

 

성당의 규모가 크다보니 고해성사를 받는 장소도 많았다.

 

 

 

PARADOSSO(역설)

Stone, 300×122×140cm, 3400Kg

 

 

 

 

 

 

 

 

 

 

 

 

산 바르톨로메오

예수 12제자 중 한 분으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성인

 

 

 

스테인드 글라스도 역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성당 바닥의 대리석 모자이크

 

 

 

성당 지하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두오모 광장 앞에 있는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는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쇼핑 아케이드다.

(사진은 구글 어스에서 빌렸슴)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는 십자모양의 건물로

천장 중간에 유리지붕을 얹었고 그 유리를 통해 자연채광을 한다.

 

그리고 갤러리아에 입주해 있는 모든 상점들의 간판은 통일을 해서

상점의 간판은 검정색 바탕에 황금색 글씨로 된 간판만을 허용한다.

 

 

 

 

"갤러리"는 자연채광되는 장소라는 말의 어원으로

통상 유리지붕이란 뜻이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갤러리아 중심의 바닥에는 성난 황소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황소의 성기에 발 뒷굼치를 대고 세바퀴를 돌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다.

우측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돌았던지 아예 파였다.

 

 

 

 

 

 

 

 

 

라 스칼라좌 방향의 갤러리아

 

 

 

 

프리다 본점과 7성급 호텔

1층에는 프리다 판매점이 있고 2층부터는 27개의 객실이 있는 초호화판 7성급 호텔이 있다.

 

 

 

 

 

 

 

밀라노 시청과 라 스칼라좌 방향의 갤러리아 출입구

 

 

 

라 스칼라좌

클래식 애호가로서 익히 들어왔스칼라극장을 직접 봐서 좋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공연을 한 편도 보지 못하고 간다는 게 아쉬웠다.

 

라스칼라좌의 외관이 화려하지 않고

예전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 정도로 평범해서 놀랐다.

그러나 라스칼라좌는 파리,비엔나와 함게 세계 3대 오페라하우스로 꼽히며

거장들은 모두 이 무대를 거쳐갔고 성악가들이라면 꼭 서 보고 싶은 꿈의 무대이기도 하다.

 

 

 

라 스칼라좌 건너편이자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입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상 아래에는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소풍을 나온 듯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아이들 사진을 찍다가 정작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상은 놓쳤다.

 

 

 

앉아서 도를 닦는 아이

도를 아십니까?

 

 

 

예쁜 아이의 빵을 먹는 모습마저 예쁘다.

 

 

 

빵을 먹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싱그러운 미소를 날려줬다.

   blog.daum.net/justbig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재에 묻혀 사라졌던 폼페이는 1700여 년이 지난 1748년 나폴리 왕 카를로스 3세에 의해 발굴이 되면서 조금씩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직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고대 로마 전성기의 풍요롭고 화려한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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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Basilica, 공회당)

바실리카는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 집회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외벽이 무너진 채 남아있는 코린트 양식의 거대한 기둥들이 바실리카의 규모를 말해준다.

 

 

 

포로(Foro, 공회장)

폼페이 유적 중 가장 큰 광장인 포로는 폼페이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으로, 주위에 정치와 경제, 종교, 행정 등을 담당한 공공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