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검투사와 맹수의 포효와 관중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는 콜로세움
때마침 이탈리아 여행을 가기 직전에 EBS-TV에서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방영했는데
이미 봤던 영화지만 다시 보고 갔더니 콜로세움의 감동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매표소를 지나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는 끝까지 가는 통로,
요즈음 우리가 이용하는 스타디움들의 형태와 시스템이 비슷했다.
이곳 콜로세움에서도 여행사가 사전 인터넷 예약을 한 덕에
대기시간 없이 입장할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드디어 콜로세움의 내부로 들어섰는데
이 거대한 구조물은 2쳔년의 세월이 믿겨지지 않을만큼 완벽했다.
콜로세움은 라틴어로 "거대하다"라는 뜻을 지녔고 서기 72년에 짓기 시작해서
불과 8년만인 80년에 완성된 원형경기장으로 말 그대로 거대했다.
원래 이곳은 인공연못이었으며 흙을 채워 경기장을 건설했는데
요즘도 이런 규모의 건물을 지으려면 4~5년 이상 걸릴텐데
돌과 점토만 사용해 걸출한 건축물을 남겼다니 경이롭다.
콜로세움은 바깥둘레 527m, 높이 57m로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로 모든 관중이 퇴장하는데 불과 15분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콜로세움은 2000년 세월동안 지진과 많은 전쟁을 겪었으면서도
아직까지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고대 로마의 뛰어난 건축기술에 어찌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콜로세움은 지진에 의해 무너지기도 했으며 석재를 교회 건축에
사용하기 위해 반출하여 지금은 반쪽이 사라진 형태로 남아있다.
이탈리아에서도 문화유적과 골동품의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가 발달한 것이
불과 이백 년 정도밖에 안되었다니 그 이전의 반출행위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1층에는 검투사와 맹수들을 수용하는 작은 방들이 있고
그 위에 나무판자를 덮고 모래를 깔아 경기장으로 사용하였다.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와 맹수가 싸우는 잔인한 현장이었지만
당시 로마 사람들은 황실, 귀족, 평민 모두 그것을 보며 즐겼다고 한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 이슈에 불만이 있는 계층과
세력들의 욕구를 해소시킬 창구가 필요했을 테니 통치의 수단이었을게다.
요즘 극도로 상업화된 스포츠처럼......
그리고 거기에 함몰돼가는 우리네 대중처럼......
그리고 405년에 이르러서야 오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잔혹한 경기는 중단되었다.
콜로세움에는 십자가도 보이는데 이곳이 순교성지임을 보여준다.
건설초기기에는 물을 채워 모의해전을 공연하기도 했으나
방수작업을 하고 물을 채웠다가 물을 빼고 건조시키는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나중에는 모의해전 전용경기장을 다른 곳에 지었다.
2천 년 전에 방수작업과 건조작업을 했다니 이 역시 놀라울 따름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콜로세움은 완전한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 구조물임을 알 수 있다.
벽을 이루고 있는 건축자재 및 형태
사실 가이드가 설명을 해 줬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콜로세움의 외벽은 아치와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한 번씩은 들어 봤던 느낌의 건축양식인
1층은 드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 등 각기 다른 양식으로 올려졌다.
그 이유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공동운명체임을 정치적으로 선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천년 전에도 로마는 피지배층에게 정치적 제스처라도 쓸 줄 알았다는 얘기인데
엄연히 세금으로 시행하는 보편적복지도 매도하는 우리네 현실과 비교하면 씁쓸하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콜로세움 서쪽에 있는 이 개선문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기 312년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문이다.
높이는 21m이며 벽면의 부조는 황제의 업적과 전쟁장면 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파리의 개선문도 이 문을 본 떠 세웠다.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 세계사 시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대해
배운 것이 기억나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전쟁도 잘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콜로세움에서 내려다 본 개선문
콜로세움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언덕입구
개선문 옆에는 마차투어도 있었고 광장에는 로마시대복장을 한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들과 사진을 찍을 때는 사전에 정확하게 흥정을 해야 한다고.......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언덕, 캄피돌리오 궁전, 베네치아광장 | 이탈리아
벤츠승합차로 이동하며 본 로마의 주요 유적Ⅰ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을 관람한 후의 일정은 여행사의 옵션상품인 벤츠투어였다.
여행사 직원이 타여행사는 1인당 60유로를 받는데 우리는 50유로만 받는다고 자랑을 했는데
자유여행이 아닌 우리들로서는 그나마 짧은 시간에 로마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상품이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팔라티노언덕과 대전차경주장을 조망할 수 있는 도로변의 언덕이었다.
팔라티노언덕은 로마에 있는 일곱 개의 언덕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으로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웠다는 전설의 무대이며 로마의 시초라고 한다.
기원전 8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해서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이후 부유한 로마인들의 고급주택지가 됐으며 황제의 별궁과 황궁의 저택도 있었지만
로마가 몰락한 이후에는 폐허로 변했다고 하니 권력과 세월의 무상함이여~~
이상은 옛 노래 황~성옛터가 떠 오르는 팔라티노언덕에서 느낀 감상이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으니 렌즈로 당겨 보았다.
팔라티노언덕의 좌측 모습
팔라티노언덕의 우측 모습
팔라티노언덕과 우리가 서 있는 언덕 사이에는 고수부지처럼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영화 "벤허"가 생각나는 대전차경주장이다.
요즘으로 치면 F1경기장이랄까?
진실의 입
이곳이 바로 아름다운 성당과 하수구 뚜껑의 팔자가 뒤 바뀐 주객이 전도된 공간이다.
팔라티노언덕과 대전차경주장을 뒤로 하고 간 곳이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 누님이 나온 장면으로 유명해진 "진실의 입"이었다.
"진실의 입"은 입에 손을 넣고서 거짓말을 하면
입을 닫아 손목이 잘린다는 무시무시한 전설로 유명하다.
"진실의 입"은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새긴 원형석판으로
원래는 로마시대의 하수구 뚜껑이었다고 하니
하수구도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는 지혜를 가진 이탈리아인들...
정말로 대단하다!
진실의 입은 코스메딘 싼타 마리아 성당의 입구에 있는데 보통은 줄서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입에 손을 넣었다 빼고는 손목이 잘 있나 확인해 보고
잘 붙어 있으면 씨~익 웃으며 기념사진 한 장 박고 휑~하니 가버렸다.
그러나 이 코스메딘 싼타 마리아 성당이야말로 단아한 모습을 지닌 성당으로
로마에 있는 중세 성당 중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성당에는 7층 높이의 로마네스크양식의 종탑이 있고
모자이크 바닥과 대리석 장식이 아름다웠다.
성당 내부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보고 온 직후라서 그런지 더욱 작게 여겨졌고
성당 내부는 웬지 신령스러운 느낌이 느껴졌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라
천주교 성당이 아닌 성공회나 정교회처럼 느꼈다고들 했다.
또한 1유로를 내면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데 코인이 없다고 하자
이탈리아 남자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break"를 외쳤다.
난 남자 그것도 장년의 남성인테 작업을 거는 것은 아닐테고
이탈리아 사람들 유쾌하고, 장난기 많고, 수다스럽고....
아뭏든 즐거운 시간들이었고 시간이 없어서 내려가지는 못했다.
베스타신전
코스메딘 싼타 마리아 성당 길 건너편에는 베스타신전이 있다.
포로 로마나
포로는 공공광장이란 뜻으로 영어 Forum의 어원이다.
지금은 무너진 돌덩이와 기둥 몇 개만 남은 폐허로 보이지만
원래는 정치, 종교, 상업 등 시민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들이
모여 있던 고대 로마 시민들의 생활중심지였다.
기원전 1세기 시저 시대부터 아우구스투스가 기초를 닦은 후
공회당과 여러 신전, 원로원, 상점 등이 들어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잠깐 여기서 시저(영어)=카이사르(라틴어)=카이사로스(그리스어)
=카이저(독일어)=세자르(프랑스어, 터키어) 모두 같은 사람이다
다들 아는데 나만 몰랐던 건가?
또한 지리적으로도 팔라티노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의
낮은 지대에 위치하여 사람들의 자연스런 교류장소가 되었고
주변에는 목욕탕, 체육시설, 도서관 등이 있어 로마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제정시대가 되어 공회당의 기능이 쇠퇴하면서 정치활동의 중심이
황제의 궁전이 있는 팔라티노언덕으로 옮겨 지면서 포로 로마노는 쇠퇴했다.
우리도 옛날부터 보면 고급주택은 평창동, 장충동처럼 높은 지대에 있었고
서민들은 여름에 맨날 침수되는 낮은 지역에 산 이치와 똑 같다.
전면에 보이는 남아 있는 8개의 큰 기둥이
주피터의 아버지인 땅과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그 뒤에 빼꼼히 보이는 것이 셉티마우스 세베레스 개선문이고
개선문 뒤의 건물이 원로원, 신전 기둥 옆의 가는 기둥이 포카황제 기념원주
포로 로마노는 팔라티노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의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캄피돌리오광장으로 가는 길
언덕에서 포로 로마노를 잠시 내려다 보는 것으로 답사를 마쳤다.
포로 로마나는 우리의 폐사지처럼 기둥들과 무너져 내린 돌 무더기만 존재할 뿐이어서
기초지식을 갖고 가던지 훌륭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할 유적지였다.
저 뒤로 콜로세움이 보인다.
팔라티노 언덕
현재 로마시장의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세나토리오궁
캄피돌리오광장으로 가는 길의 두 건물을 연결하는 다리가
베네치아에 있는 탄식의 다리와 모양이 흡사하다
캄피돌리오 광장
캄피돌리오는 Capital의 어원으로 이곳이 로마의 중심이었슴을 알 수있다.
광장은 1538년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하였고 1세기 만에 완성되었다.
양 옆의 건물들은 콘세르 바토리궁과 누오보궁인데
현재는 고대 로마 유적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은 황제자리를 혈통계승한 오현제의
마지막 로마 황제이자 "명상록"의 저자인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이며
정면 건물은 12세기경 고대 로마의 폐허 위에 세워진 세나토리오 궁으로
현재는 로마시장 집무실과 시의회로 사용하고 있다.
거의 천 년된 건물을 수리해 가며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어떤가?
관공서 건물을 수족관처럼 요상한 모양으로 신축하는 붐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에너지 효율이 떨어진다고 난리부르스를 떠는 꼴이라니......
보이는 건물이 누오보궁이며 바닥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있는데 평면에서는 느낄 수가 없다.
글 아래에 구글어스의 위성사진을 캪쳐해서 꽃무늬와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꼬르도나타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 중에 꼬르도나타라는 이 계단도 하나 꼽힌다.
원근법 때문에 사람의 눈은 먼 곳을 보면 폭이 좁아 보인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소실점 원리를 적용해 두 선의 간격이 좁으면 좁을수록
바라보는 이로부터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점에 착안해 가장 꼭대기에 있는
계단의 폭을 가장 넓게 설계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을 조금씩 줄이도록 설계했다.
또한 이 꼬르도나타 계단은 높지 않게 만들어 멀리서 보면
단순한 오르막 길로 보이며 마차도 쉽게 오을 수 있도록 설계를 했다.
구글 지도의 위성사진을 보면 광장의 꽃무늬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고
아울러 계단 아래와 위의 폭에 대한 느낌이 제대로 전달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누오보궁과 콘세르 바토리궁도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고
건물 뒤 쪽의 거리가 더 멀어지게 설계하여 착시현상의 완성도를 높였다..
미켈란젤로는 600년 후에 생겨날 인공위성의 존재를 미리 알았을까?
양 옆의 조각상도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게 크게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착시현상을 일으키도록 하였다니 미켈란젤로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였던 셈이다.
이번 답사지는 베네치아광장과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으로
정면사진과 맘에 드는 컷이 없어서 위키피디아 영문판에서 차용했다.
이곳은 1870년 이탈리아 통일의 업적을 이룬 영웅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기념관과 광장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무솔리니의 집무실이었고
무솔리니는 2층 발코니에서 광장의 군중에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베네치아광장은 로마시내의 주요 도로가 만나는 요지라서
차가 가장 많고 복잡한 광장 중 하나라고 한다.
계단 위 중앙에는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우뚝 솟아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동,서 로마로 분열된 후
도시국가시대를 거치는 지난한 세월을 보내고 1870년에서야 겨우 통일을 완수했다.
그런데 남부와 북부의 경제력 차이와 인종적 갈등 등을 이유로 분단을 거론하는
몰지각한 정치집단과 이들을 추앙하는 닭과 쥐 같은 백성들이 존재한다고 하니
지하에 있는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들으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참나! 글을 쓰다보니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닐세 그려......
역시 이곳도 패키지상품이라 기념관 안에는 입장하지 않고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건축물인 판테온으로 갔다.
우리 일정을 정리하자면 콜로세움을 보고 팔라티노언덕과 대전차경주장을 조망 관광하고
진실의 입이 있는 코스메딘 싼타 마리아 성당은 흘낏 보고 포로 로마노 역시 언덕에서 잠시 내려다 본 후
캄피돌리아광장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다시금 확인하고 베네치아광장의 북적임을 확인했다.
로마 주요 유적 벤츠투어Ⅱ
판떼온(판테온)
그리스어로 "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을 가진 빤떼온은
기원전 27년 아그리빠가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웠다*
*-판은 헬라어로 '모든'이라는 뜻 , 만신전이라고도 함
판떼온이 지어지기는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받기 전의 일이니
여기서 "모든 신들"이라 함은 분명히 다신교를 일컸는 말일게다.
서기 80년에는 큰 불이 났는데 125년에 하드리누아스황제에 의해
재건되어 기둥이 없이도 현재까지 2천년 동안이나 잘 보존되고 있다.
터키 이스탄불 아야소리아박물관과 함께 석조 돔으로는 서계최대규모라고.....
돔은 건물전체 높이의 정확하게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내부 원의 지름과 천정의 높이가 똑같이 42.3m로 균형을 이룬다.
기둥없이 두께 6m의 벽체 만으로 받쳐져 있고
무게를 견디기 위해 위로 갈수록 벽의 두께를 얇게 만들었다.
빤떼온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으며 오로지 돔 가운데에 뚫린 지름 9m의
둥근 창으로만 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혀주며 습도까지 조절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공기 흐름으로 인해 창으로 비가 들이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요즘엔 비가 조금은 들어와서 비올때는 일부를 막는다고 한다.
빤떼온에는 이탈리아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통일의 영웅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움베르토 1세 등이 묻혀 있으며
라파엘로가 죽기 전에 빤떼온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하여 그의 유해도 안치되어 있다.
가운데 사진이 라파엘로의 무덤이고 왼쪽에 그이 흉상이 있다.
판떼온의 옆 모습
---이하 사진은 위키피디아에서 사진을 차용했슴을 밝혀둔다---
판떼온과 오벨리스크의 야경
우리가 갔을 때 오벨리스크 주변에 관광객이 너무 많아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던 야경과 오벨리스크 모습을 이 사진 한방으로 해소했다.
근데 이 오벨리스크는 또 어디서 훔쳐온겨? 아님 약탈해온겨?
구글어스 3D 사진으로 정면 상단에서의 모습을 캪쳐했다.
판떼온의 왼쪽 모습
콜론나광장의 중앙에 있는 이 기둥은 높이 42m로
서기 176년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전승을 기념해 세워진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황급하게 찍어서인지 화이트밸런스가 이상하다.
분명히 옅은 회색으로 보였는데......
뜨레비(트레비)분수
우리가 로마에 갔을 때는 2015년 밀라노엑스포 준비로 여러 곳에서 한창 공사 중이었다.
출발 전에 알고는 갔지만 그래도 가장 실망을 안겨 준 곳이 바로 뜨레비분수였다.
아쉬운 나머지 평상시 모습의 사진을 위키피디아에서 차용해 왔다.
뜨레베분수는 바로크양식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로마에서 가장 멋진 분수로 손꼽힌다.
배경은 폴리궁전의 벽면을 절묘히 이용하여 개선문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으며 건물의 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트리톤 상의 맨 위쪽 네 명의 여인은 사계절을 상징하는 여신이고,
트리톤 상 옆의 두 여인은 건강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이라 한다.
현재 공사 중인 모습
가이드말로는 청소를 하면서 저 큰 구조믈을 면봉으로 하나하나 닦고 있다고 한다.
처음엔 웃었지만 문화재를 보호하려면 그리해야 마땅하지 않을런지......
뜨레비(Trevi)란 삼거리란 뜻으로 세 개의 길이 모인다는 뜻에서 유래하며
1732년 교황 클레멘스 13세가 주최한 분수설계공모전에서
우승한 니콜라 실비 작품으로 그의 사후인 1762년에 완공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한 때 15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야 했기에 14개의 고가 수로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물이 풍부해지고 도시 곳곳에 분수가 많이 만들어졌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가 되어 교황들에 의해 상수도를 전면
수리하게 되고 새로운 수도를 개발하여 물의 공급을 원활히 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새로운 분수들을 세웠는데 그 중 최고의 작품이 바로 뜨레비분수다.
뜨레비분수에 동전을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 너머로 던져 한 번에
위쪽으로 들어가면 로마로 다시 돌아 온다는 얘기가 있는데
나에게는 던질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으니 뜨레비분수의
제대로의 모습과 야경을 보기 위해서 다시 와야겠다.
이 사진으로 조개는 확인되지 않지만 바다의 신 넵튠이
큰 조개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조각은 브란치의 작품이다,
좌측은 반인반어의 트리톤이 격동의 바다를 상징하는 거친 말을 잡고있는 형상이다.
우측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하는 말이다.
뜨레비카페
오드리 누님이 머리하고 "잘 나왔냐"고 물었다는 전설이 있는 미용실은
현재 자취를 감췄고 누구는 아이스크림가게로 누구는 가방가게로 바뀌었다고 한다.
스페인광장
프랑스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137개의 계단이 1725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광장에 스페인대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은 스페인광장과 계단이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는 돈주고도 이름을 뺏겼으니 무지 억울할 듯하다.
스페인계단은 로마를 대표하는 젊은이들의 데이트장소면서
여름밤에는 유명 디자이너들의 패션쇼가 열리곤 한다고......
스페인계단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 누님이
계단을 내려가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으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스크림은 물론
어떠한 음식물섭취도 금하고 있다고 한다.
계단 아래쪽에 있는 바로크양식의 난파선 모양의 분수는 건축가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의 아버지인 삐에뜨로 베르니니가 제작한 것으로
떼베레강에 홍수가 났을때 배가 이곳까지 떠내려왔던 것에
착안해 물에 가라앉는 배 모양의 분수를 만들었다.
분수의 물은 위 아래 두 군데에서 흐르는데 위쪽에서 나오는
물은 사람만이 마실 수 있으며 아래의 고인 물은 말이 먹는 물이다.
메~롱
공사 중이라 못봐서 약오르지~롱......
계단위의 삼위일체 성당은 프랑스의 수도회에 의해 세워졌으며 우리가 갔을 때는 공사 중이었다.
그래서 기아자동차 광고만 실컷 보고 왔다.
공사장 차단벽에도 광고판을 설치하고 있으니 이태리사람들 장사 수완이 대단하다.
밀라노 두오모 역시 공사 중이었는데 거긴 아예 전광판까지 설치해 놨더군
스페인계단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길인 콘도띠거리는
로마에서 가장 비싼 명품숖들이 모여 있는데 이태리가 패션 강국임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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