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소스 고고학 박물관 앞에 다다랐다.
에페소스 박물관 입장권.
박물관의 첫 전시관 안내.
이 박물관은 에페소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로마 시대 당시의 상류층 저택에서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에페소스 유적의 대부분이 로마 시대의 것인 만큼.
기원전 4세기의 극작가, 메난드로스(Menandros, 기원전 342~292) 흉상.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재위 161~180) 흉상.
서기 2세기의 아르테미스 여신상.
왠지 남성같은 느낌을 준다.
로마 전성기이자 에페소스 전성기인 1~2세기경의 정교한 유물들.
정교한 부조가 돋보이는 석관.
역시 2세기의 작품.
사실적인 인물과 동물 묘사가 눈길을 끈다.
왼쪽은 로마 병사인 듯하고 오른쪽은 그와 맞서 싸운 야만족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 대리석 조각품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선다.
조각품 전시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비중있는 작품.
요런 모양으로 있었다고 한다.
섬세한 옷주름의 인물상들.
대부분 목이 날아가버린 인물상과 대좌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수하로, 에페소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뤘던 장군 리시마코스(Lysimachos, 기원전 360~281) 두상.
기원전 300년경의 작품이란다.
에페소스의 중심대로 쿠레테스(Curetes) 거리에서 출토된 서기 2세기의 작품, 에로스(Eros)와 돌고래.
출토된 동전들.
모양을 보아하니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를 새긴 것 같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의 옆모습이 새겨진 동전.
쇠퇴기였던 3세기의 황제 갈리에누스(Gallienus, 재위 260~268)가 새겨진 동전.
사랑을 나누는 에로스와 프시케(Psyche) 상.
서기 1세기 작품.
가면을 손에 든 에로스 상.
전시실은 야외로 잠시 이어진다.
바닥 모자이크.
깨끗하게 재현한다면 현대에 활용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한 디자인이다.
쿠로스(Kouros).
아르카익 시대(기원전 8~6세기)에 유행한 나체의 직립 남성상을 뜻하는 것으로
항상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밀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야외 전시는 그리스-로마 유물이 아닌 터키의 전통을 설명하는 공간이었다.
이 지방의 전통 생활 방식을 재현한 듯한 전시공간.
이 지역이 이슬람화된 이후인 서기 1232년에 제작된 아랍어 비문.
이전 시대의 그리스어 비문과 대비된다.
다시 로마 시대의 석관과 비석이 서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옛 무덤의 다양한 형태를 묘사한 그림들.
기원전 6세기~기원후 3세기 사이의 무덤 출토 유물.
시대를 너무 길게 잡은 거 아닌감.
이제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과 관련 있는 전시실로 들어왔다.
멀리 아르테미스 상이 보인다.
이곳 에페소스의 명물로 수많은 순례자를 모았던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의 복원모형.
신전 내부는 요렇게 생겼다.
신전 정면에서 바라보면 저렇게 내부의 여신상이 투시되어 보인다.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은 황소의 고환이라고도 하고 여성의 젖가슴이라고도 한다.
둘 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나톨리아의 지모신(地母神) 신앙과 결합하여 이곳 소아시아 지역에서 크게 숭배되었다고 한다.
전시실 반대편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던 또다른 아르테미스 여신상.
다음 전시실에서는 서기 3~4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 신전에 있던 부조들을 전시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부조 일부.
근데 에페소스 유적에서 하드리아누스 문은 기억이 나는데 신전은 어디였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신전에 있던 조각상들이 나온다.
독특한 외모를 지닌 도미티아누스 황제(Domitianus, 재위 81~96) 두상.
셋 다 황제의 두상인데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왼쪽의 콤모두스 황제(Commodus, 재위 180~192)상 뿐이다.
뭔가 색다른 분위기가 풍기는 부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만들어진 파르티아(Parthia) 관련 기념물 부조란다.
파르티아에서 만들어진 부조란 소린가, 아니면 대 파르티아 전승비 같은 기념물이란 소린가.
비잔틴 시대 초기에 파괴된 바실리카 동측면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 아내 리비아(Livia) 황후의 석상.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부부상에 관한 안내.
제국의 기독교화에 따라 동시대에 많은 조각상 파괴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분명히 무슨 제단의 기단부를 장식하던 부조들인데...
이 정교한 부조가 어디를 장식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제단의 복원상상도인데, 페르가몬 아크로폴리스의 제우스 제단이 생각나는 구조다.
박물관 출구와 기념품점.
따가운 오후 햇살을 그대로 받아내며 박물관 서쪽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 터로 향하는 길.
아르테미스 신전을 가리키는 이정표.
일군의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는 아르테미스 신전에 도착했다.
아르테미스 신전 안내문.
앞서 설명했듯, 이 지역의 토착 지모신 신앙이 그리스 신화와 결합하여
아르테미스 숭배가 탄생했다는 기원전 7세기에 건축이 시작되어 장장 120년 세월에 걸친 공사 후 기원전 550년에 완공되었다는 이 신전은
지름 1.2m, 높이 18.4m의 이오니아식 원기둥이 무려 127개나 사용되었고, 그 규모가 아테네 파르테논의 2배에 달할 정도로 웅대하여
고대 서양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혔을 정도라고 한다.
263년 고트족의 침입 때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다가 로마 말기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던 흔적도 있다고 하나
이후 철저히 파괴되고 석재는 이곳저곳으로 반출되어 현재는 원래 형태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상태로 전락했다.
유적 입구에서 바라보는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
그나마 남아 있던 석재들을 현대에 끌어모아 자리만 표시해 둔 듯한 모습이다.
이 원기둥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여러 기둥의 토막들을 한데 모아서 1973년에 쌓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당시의 웅대한 원기둥을 상상하기에 좋은 재료다.
원기둥 외에는 전혀 감흥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폐허로 변한 상태였다.
고대의 땅의 여신이 자리했던 성소에는 물웅덩이가 생겨 버렸다.
본래의 석조 기단부일까.
우기에는 연못으로 바뀔 듯한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
고대 유적의 지면은 현대의 지표면보다 낮은 까닭에 생기는 현상이다.
이제 진짜든 아니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석재들이 그 옛날 아르테미스 신전의 바닥돌이라고 상상하련다.
기단부 석재들과 유일하게 솟아 있는 원기둥.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와 바라보는 여러 시대의 유적들.
구체적으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아르테미스 신전, 비잔티움 시대의 성 요한 교회,
셀주크 투르크 시대의 아야술룩 성채, 그리고 14세기 오스만 투르크 시대의 이사베이 모스크가 한눈에 보인다.
3천년 역사가 눈앞에서 살아 숨쉬는 현장임을 알고 보면 감회는 남다르다.
성요한 교회
성 요한 교회 입구.
예수의 제자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소스에 와서 살다가 이곳에서 죽었는데
기독교 초기부터 순례 코스의 하나였으며
4세기에는 그 무덤 자리에 최초의 성 요한 교회가 세워졌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Justinianus, 재위 527~565) 때인 536년에 새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하여 565년에 완공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이다.
기독교에서는 초기의 가장 중요한 교회 중 하나인 '에베소 교회'로 알려져 있다.
마치 성채를 들어서는 듯한 성 요한 교회 입구.
성 요한 교회 입장권.
매표소에서 유적 안으로 들어가는 길.
여기는 교회 본당과 상관 없는 곳인데 마치 성채처럼 생겼다.
입구의 거대한 성문도 그렇고 이곳이 한때 성채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입구를 들어서면 현재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교회 유적이 펼쳐진다.
최근에 복원된 듯한 원기둥들이 늘어선 주랑.
실내였는지 중정이었는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바라보는 풍경.
대리석재와 벽돌재가 나뉘어 보이는데, 본래는 저 벽돌 벽체도 겉면은 대리석이 덮고 있었을 터이다.
바닥 모자이크 일부가 복원된 것을 보니 여기는 실내 혹은 회랑 공간이었을 것이다.
교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이곳이 바로 성 요한, 세례 요한의 무덤이다.
예수도 이 사람에게 세례를 받았다.
다소 깔끔하게 복원된 아치형 문이 보이는 성당의 뒷쪽 공간.
본래 교회의 평면도이다.
전형적 동방정교회 모습을 하고 있다.
가로 110m, 세로 140m였단다.
교회의 동서 장축을 길게 잡아 보니 교회의 거대한 규모가 실감난다.
정면 벽이 가장 안쪽의 후진이다.
한쪽에는 대리석 바닥이 깔린 작은 욕조 같은 것이 있었다.
요한이 세례자였던 만큼, 세례하던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정도 남아 있는 것은 그래도 규모가 컸던 건물이라는 얘기다.
소아시아가 이슬람화하지 않았으면 혹 지금까지 남아있었을지도.
튼튼한 대리석 벽면 상당수는 복원된 것이다.
유적 뒤쪽에는 작은 휴식공간 같은 곳이 있었다.
아하, 이것이 성 요한 교회의 본래 모습이구나.
그 시대의 교회들은 모습들이 대개 비슷해 보인다.
이스탄불의 소피아 대성당과 유사한 느낌이다.
현재는 군사지역이라 들어갈 수 없는 교회 뒤편 셀주크 투르크 시대의 성채.
아야술룩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늘에서 잠시 몸을 쉬며 바라보는 성 요한 교회 모형과 유적.
뒤쪽 언덕에서 바라보는 교회의 수많은 원기둥들.
교회 너머 셀축 시가지 일부가 보인다.
그리고 아래에는 이사 베이(??sa Bey) 모스크가 자리하고 있다.
이 도시의 중심 사원은 이 언덕 위에서 저 언덕 아래로 옮겨간 것이다.
서측에서 바라보는 교회 유적.
지붕으로 보호되고 있언 유적.
지붕으로 보호되고 있던 건물 안의 성화를 찍었는데
본의 아니게 셀카가 되어 버렸다.
이 바닥 타일도 꽤 중요한 것인가 본데 내 눈에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교회에서 바라보는 아야술룩 언덕의 성채와 셀축 시가지.
자그마한 셀축 시내 전경.
이 사진에 보이는 것이 셀축 시가지의 거의 전부이다.
교회 유적을 나와 고고학박물관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
한낮 땡볕에 행인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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