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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

세포리스 (Sepphoris)

by 은총가득 2020. 11. 16.

세포리스 Sepphoris

 

 

세포리는 히브리어로 칩포리이며, 이름의 뜻은 ’(bird)이다. 아마도 새가 횃대에 앉아 있는 것처럼 이 도시가 큰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세포리스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신약 시대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 그곳은 갈릴리 속주의 주도였기 때문이다. 일단 세포리스의 역사를 살펴보자.

1908, 1931, 1980년대에 고고학 발굴을 해본 결과 여호수아 시대의 도기는 물론 페르시아 시대의 것까지 발굴되었다. 그래서 일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세포리스는 기원전 7세기 고대 앗수르가 요새화한 도시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포리스의 명성이 절정에 달한 것은 로마 시대였다.

 

세포리스는 기원전 2세기 이전까지 문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기원전 104년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왕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aeus)가 이 도시를 통치하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통치자 라티루스(Lathyrus)가 공격했지만, 정복하지 못했다. 이로 보건대 하스모니아 왕조 때 세포리스는 갈릴리 지역의 중요한 행정 중심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4년 폼페이가 도착함으로 세포리스는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55년 시리아의 로마 총독 가비니우스(Gabinius)는 갈릴리를 유대와 구별하고 세포리스를 갈릴리 속주의 주도로 삼았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44)는 이두매인이었던 안티파터(Antipater, 헤롯 대왕의 아버지)를 팔레스타인 지역의 통치자로 삼았다. 안티파터는 아들 헤롯(헤롯 대왕)을 갈릴리 지역 통치자로 세웠다. 안티파터가 죽자 헤롯은 기원전 44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 왕으로 임명받았으며, 사마리아, 갈릴리, 베레아, 갈릴리 바다 동쪽과 동북쪽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하지만 임명되자마자 그 지역을 모두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땅을 침략했던 파르티아인들을 물리쳐야 했기 때문이다. 헤롯 대왕은 기원전 3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온전히 그 땅을 통치할 수 있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 대왕은 기원전 39-38년 겨울에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세포리스를 정복했다.

기원전 4년 헤롯 대왕이 죽자, 헤롯 대왕의 아들들, 아켈라오(Achelaus), 빌립(Philip), 안티파스(Antipas)가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지역을 나누어 물려받았으며, 안티파스는 세포리가 있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되었다. 이렇게 안티파스가 갈릴리를 물려받는 동안 세포리스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도행전 5:37에 언급된 유다라는 반란자가 세포리스를 차지했다. 로마 황제는 시리아 로마 총독 바루스(Varus)에게 보복을 명령했고, 그는 세포리스를 정복하고 불태웠으며, 주민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 전투에서 바루스는 무려 2,000명의 반역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 후 헤롯 안티파스는 세포리스를 재건하고 요새화하였으며, 그곳을 갈릴리 속주의 주도로 삼았으며, 이곳에 거주했다. 이때 세포리스는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로 변모해서 요세푸스는 세포리스를 갈릴리의 장식품(장신구)”(ornament of Galilee)이라고 불렀다. 갈릴리 속주의 주도가 된 세포리스는 자연스럽게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지중해 해변(서쪽)에 있는 프톨레마이스(Ptolemais, 구약 시대의 악고[Acco])에서 동쪽에 있는 갈릴리 바다로 연결되는 무역로가 세포리스를 거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 도로는 서남쪽에 있는 므깃도(Megiddo)와 지중해 해변의 가이사랴(Caesarea) 그리고 동남쪽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구약 시대의 벧산[Beth-shan])과 연결된다.

 

기원후 66년에 시작된 제1차 유대인 반란(66-70) 때 세포리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의 로마 군대에 항복하고 받아들임으로 살아남았다. 1차 반란 이후 도망친 많은 유대인들이 세포리스에 정착했지만, 바르 코흐바가 이끌었던 제2차 유대인 반란(기원후 132-135) 때에 반란을 일으킨 증거는 발견되지 않아서 세포리스 사람들이 2차 반란 때 참여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그 후 세포리스는 이름이 디오카이사레아(Diocaesarea)로 바뀌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제우스와 카이사르의 도시이다.

 

기원후 2-3세기에 세포리스는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 로마인들이 함께 거주했다. 랍비 유다(Judah)는 이곳에서 미쉬나(Mishnah)를 편집했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세포리스는 유대교를 배우는 아카데미의 본산지가 되었다. 또한 기독교 교부이며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에 따르면 이곳에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으며, 5-6세기에는 자체 감독을 소유할 정도로 기독교가 융성했다.

세포리스에 가면 제일 먼저 십자군 시대의 성채(Citadel)를 만나게 된다. 성채 꼭대기에 올라가면 세포리스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특별히 거대한 로마식 극장을 보게 되는데, 극장은 반원형이며, 대략 4,000-5,000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성채 바로 옆에 3세기 로마 시대 거주지 건물이 있는데, 그 집에는 수조와 화장실을 비롯해서 식당(triclinium, 3면에 눕는 안락의자가 붙은 식탁이 있는 식당)이 있다. 이 식당 바닥에는 28가지 색깔의 150만 개의 돌로 만들어진 큰 모자이크가 있는데, 목자들(Shepherds), 포도 밟기(Grape-Treading), 선 운반인 행렬(Procession of Gift-Bearers), 흥청거리는 사람들의 행렬(Procession of Merrymakers), 만취한 헤라클레스(The Drunkenness of Herakles), 술 마시기 내기(The Drinking Competition), 디오니수스(Dionysus), 유쾌하게 떠들썩함(Merriment), 디오니수스의 목욕(The Bathing of Dionysus), 어린 디오니수스의 교육(The Education of Young Dionysus), 디오니수스와 아리아드네의 결혼식(The Wedding of Dionysus and Ariadne), 승리 행렬(Triumphal Procession)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자이크 가운데 매우 아름답고 활기가 넘치는 여인이 있는데, 학자들은 이 여인 모자이크를 갈릴리의 모나리자”(Mona Lisa of the Galilee)라고 부른다.

이 거주지를 나와 아래로 내려가면 유대교 회당(세포리스 북쪽)을 만나게 된다. 회당 바닥에는 일곱 단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가 있다.

 

첫 번째 단은 화관 옆에 있는 두 마리 사자(Two Lions Flanking a Wreath). 이것은 하나님께서 회당과 공동체를 보호하심을 나타낸다. 모자이크의 사자들은 설교단 베마 옆에 위치해 있어서 수호자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단은 건물의 정면과 메노라들(Architectural Facade and Menorahs)이다. 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단과 함께 성막, 성전, 회당을 나타낸다. 2-4번 단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희생제사와 매일 번제를 재개하는 구속을 갈망함을 나타낸다.

세 번째 단은 성막에서 아론의 성별(The Consecration of Aaron in the Tabernacle)이다. 이는 성막 봉사를 위해서 아론을 성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출애굽기 29장을 반영하고 있다. , 아론, 뿔이 달린 제단, 놋 물두멍 등이 그려져 있다.

 

네 번째 단은 매일 번제, 떡상, 초실절 바구니(The Daily Offering, Shewbread, and The Basket of First Fruits)이다. 이 단은 세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왼쪽에는 매일 번제와 관련된 다양한 물건들, 즉 양, 기름, 고운 가루 등이 나온다. 중간에는 다리가 세 개 있는 상에 떡 12개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바구니에 일곱 가지 처음 열매들이 담겨 있다. 바구니 양쪽에는 두 마리의 새가 매달려 있다. 떡상과 초실절 바구니와 매일 번제는 성전이 파괴되기 전 축복과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과 함께 이 단은 성전을 재건하고 풍요로움을 누리는 구속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섯 번째 단은 황도대(The Zodiac)이다. 이 모자이크는 사각형 안에 동그란 황도대가 들어 있는 모습을 띠고 있다. 사각형의 네 코너들은 사계절을 뜻하고, 여인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황도대의 중앙에는 질주하는 말이 이끌며, 바다로부터 떠오르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전차를 담고 있다. 하지만 헬리오스의 모습은 없다. 로마-비잔틴 예술에서 전차를 타고 있는 헬리오스는 세상의 통치자인 황제를 뜻하지만, 이 회당 모자이크에 나오는 태양 전차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전차를 둘러싸고 있는 계절, 달들(months), 천체는 자연과 우주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나타낸다.

 

여섯 번째 단은 이삭의 결박(The Binding of Isaac)이다. 창세기 22장의 내용, 즉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바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모자이크는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왼쪽은 모리아 산 밑에 아브라함의 두 종이 나귀를 묶어놓고 기다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오른쪽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바치려 하는 모습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무에는 양의 머리가 묶여 있다. 이상하게도 나무 밑에는 작은 발과 큰 발 두 짝이 그려져 있다. 창세기 22장에는 나오는 않는 모습인데, 유대교의 미드라쉬는 이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에 나아갈 때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모자이크는 아브라함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시고 보호하신다는 약속을 나타내고 있다.

 

일곱 번째 단은 천사의 아브라함과 사라 방문(The Angel's Visit to Abraham and Sarah)이다. 이것은 여섯 번째 단과 함께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 약속을 나타낸다.

이외에 세포리스의 남북을 관통하는 로마 도로, 즉 기둥이 있는 카르도가 있는데, 이 도로에 깔려 있는 돌 중에는 메노라가 새겨져 있는 돌이 있다. 이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한 집이 나오는데, 집의 바닥에도 엄청난 크기의 모자이크가 있다. 이 모자이크는 나일 강을 묘사하고 있어서 이 집을 나일 강 집’(The Nile House)이라고 부른다.

성경에 세포리스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포리스가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곳이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에서 서북쪽으로 도보로 한 시간 정도에 갈 수 있는 거리, 즉 약 5km 정도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헤롯 안티파스는 세포리스를 재건하고 있었다. 목수(실제로는 석공)였던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아마도 세포리스에 가서 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학자이며 고고학자인 제롬 머피 오코너(Jerome Murphy O’Connor)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헤롯 대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가 되돌아올 때 나사렛에 정착한 이유가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무서워서는 물론 세포리스에서 쉽게 일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포리스에 가보신 적이 있었을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세포리스에서 일하던 아버지 요셉을 따라가거나 만나기 위해 세포리스를 방문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책망하시고 저주하실 때 사용한 외식하는 자라는 표현 때문이다. ‘외식하는 자를 가리키는 헬라어 휘포크리테스는 극장에서 배우의 연극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예수님이 자라신 나사렛은 매우 작은 마을이어서 극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런 용어를 사용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 요셉을 따라가거나 요셉을 만나기 위해서 세포리스를 방문해서 거대한 로마식 극장을 보고 알았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 성경 구절

마태복음 6:2, 5, 16; 7:5; 15:7; 22:18; 23:13, 15, 23, 25, 27, 29; 24:51; 마가복음 7:6; 누가복음 6:42; 12:56; 13:15; 사도행전 5:37

 

세포리스 모형도. 중앙에 로마 극장이 보인다.

로마 극장 뒤에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왼쪽은 로마 시대 거주지이며, 오른쪽은 십자군 시대 성채이다.

 

십자군 시대 성채. 이 꼭대기에 올라가면 세포리스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

 

세포리스 극장. 4-5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로마 시대 거주지 지하 수조. 빠지지 않도록 철 뚜겅을 만들어 놓았지만 내려다볼 수 있다.

 

로마 시대 거주지의 화장실.

 

로마 시대 거주지의 식당. 거대한 모자이크가 있다.

 

로마 시대 거주지 식당 모자이 가운데 있는 여인상. 학자들은 이를 "갈릴리의 모나리자"라고 부른다.

 

세포리스 회당. 회당 자리에 현대식 건물 지붕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세포리스 회당 바닥에 있는 모자이크. 이 모자이크는 모두 7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포리스 회당 바닥 모자이크 1단: 화관 옆에 있는 두 마리 사자.

 

세포리스 회당 바닥 모자이크 2단: 건물의 정면과 메노라들.

 

세포리스 회당 바닥 모자이크 3단: 성막에서 아론의 성별.

 

세포리스 회당 바닥 모자이크 4단: 매일 번제, 떡상, 초실절 바구니.

 

세포리스 회당 바닥 모자이크 5단: 황도대.

 

세포리스 회당 바닥 모자이크 6단: 이삭의 결박.

 

세포리스 회당 바닥 모자이크 7단: 천사의 아브라함과 사라 방문.

 

세포리스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카르도.

 

카르도 돌에 새겨진 메노라.

 

카르도 남쪽에 있는 '나일 강 집'(The Nile House) 모자이크.

[출처 hesed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