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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가복음 6장

by 은총가득 2020. 10. 19.

고향에서 배척 당하신 예수 (막 6:1-6)

 

 

1. 고향을 방문하신 예수님(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좆으니라(1)."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거점으로 해서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동안 사역을 하던 가버나움을 떠나서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1).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은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약 20마일(약 31-32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2.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2-3)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2)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요셉유다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3)."

예수님은 고향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회중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놀라운 가르침)을 었었느뇨?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2) 그들은 어려서부터 예수님의 가족들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교훈과 권능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식으로 랍비들에게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가르침과 능력을 베푸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이며 목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자녀를 부를 때에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자녀"로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불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두 가지 가능성을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부친인 요셉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천한 과부의 아들이라는 멸시의 뜻으로 부르기 위해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마을에는 지금도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후에 예루살렘 교회 장로가 됨)와 유다(유다서의 저자), 요셉시몬, 그리고 그의 자매들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3). 그러므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뛰어난 설교를 하고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도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2-3).

3.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심(4-6(상)-)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4),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5), 저희의 믿지 않음이상히 여기셨더라(6(상)-)."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또 능력을 보고도 배척하는 것 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게 마련이다!(4)"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고향에서 존경과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와 함께 자라고 생활하면서 그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고향 사람들은 선지자가 신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특별한 이적을 행해도 고의로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선지자의 개인 신상에 대해서 잘 알수록 더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얻었을 때에 모세를 비난한 사람은 모세를 가장 잘 아는 형 아론과 누이인 미리암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의 고향에서도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고, 또한 예수님께서 신적인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인간적인 배경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불신으로 인해서 나사렛에서 큰 이적을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단지 몇 명의 병자들만 안수해서 고쳐주셨고 그 외에 다른 이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5). 예수님은 환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불신하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능력을 행하시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게는 능력을 숨기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그 능력을 나타내려면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녀는 무력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우리가 이 음성에 믿음으로 응답하면 지금도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셨습니다(6). 나사렛 사람들은 마음을 닫고 주님의 권위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사렛에 더 이상 머무르시지 않고, 그곳을 떠나신 후에 다시는 그곳에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앙이 예수님의 역사를 중단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배척과 반대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복음 전도자들이 경험할 배척과 반대를 미리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삶을 통해서 제자들도 장차 이러한 반대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좋은 것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없으면 이미 얻은 축복도 잃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즉시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고 믿음을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회복하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까운 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뜨겁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특히 모태 신앙이나 오래 믿은 사람들이 복음과 주님에 대해 무감각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습관적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곳에서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들은 더욱 더 주님을 배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면서 배척과 배신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들도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와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들과 의인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도 반대와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게 되면, 의인의 대열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하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가장 주님을 가깝게 섬기는 사람들이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
2.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3.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반대를 받는 것은 의인의 대열에 참여하는 일이다.

 

12제자의 갈릴리 전도 (막 6:6-13)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신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배척하게 되자, 예수님은 그곳에서 더 이상 사역을 하지 못하시고 고향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나사렛 사람들은 천국 복음을 듣는 특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 전도 여행을 하셨습니다. 이 전도 여행은 세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세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될 것입니다.

◎ 12 제자의 파송과 세례 요한의 죽음 ◎ (6:6(하)-31)

(막 6:6(하)-31)에는 12제자의 파송과 보고, 그리고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마가는 세 번째로 샌드위치 기법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12제자의 파송 이야기와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사건 사이에,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삽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샌드위치 형식의 기사는 1) 세례요한의 시대가 이미 끝났으며, 2)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을 중신으로 하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세 번째 갈릴리 전도여행(6(하)-)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6(하))..."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신 후에 또 다시 갈릴리 전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6(하)). 이 전도 사역은 예수님의 세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이었습니다(막 1:14, 39 참조). 이 전도 사역의 결과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12제자를 사역에 참여시키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각 지역으로 나누어서 파송하셨고, 제자들은 전도 사역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2. 12제자의 파송(7-8)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 씩 둘 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7),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8),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9)..."

예수님은 사역이 확장됨에 따라 자신과 사역을 함께 할 12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으며(1:16-20), 또한 세금을 걷고 있는 세리를(레위) 부르셨습니다(2;14).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나머지 제자들도 부르셨습니다. 이제 주님 곁에는 복음을 위해서 특별히 선택을 받은 12명의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3:13-19).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복음전파, 축사, 치유 등)을 지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과 동행하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게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직접 복음 사역에 투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두 명씩 짝을 지어서 보내셨습니다(7). 예수님께서 전도 사역을 위해서 두 명씩 짝지어서 파송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재판을 열 때에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요구했습니다. 율법은 한 명의 증인으로는 재판을 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의 증인들을 보내실 때에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또한 복음 전파는 한 명보다 둘이 한 팀을 이룰 때에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두 명이 팀을 이루게 되면 서로 의지할 수 있으며, 하나가 약해질 때에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7). 복음 전파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을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으며, 따라서 귀신들은 제자들의 말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복음 전도자들에게 사단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러한 권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주어지는 권세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영들과의 영적인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믿음으로 행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들은 전도하는 동안 필요한 모든 의식주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은 신발과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양식과 자루, 몇 푼의 돈, 그리고 밤이슬을 피하기 위한 여벌의 옷조차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8-9).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3.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와 거절하는 자의 운명(10-11)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10). 어느 곳이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11)..."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그들을 영접하는 자와 거절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각 마을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을이 그들을 영접하면 그들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거처를 제공하는 곳에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러야 했습니다(10). 예수님은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서 미리 각 마을마다 그들이 머물 곳을 예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한 마을이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그곳을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이 천국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4. 제자들의 전도 사역(12-13)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12),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13)."

제자들은 예수님을 명령을 따라 각 지역으로 가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귀신들을 쫓아냈으며 수많은 병자들을 기름을 발라서 고쳤습니다(12-13).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제자들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사단의 권세를 효과적으로 제어하면서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파송되었기 때문에 그 말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의 권능이 이 땅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선포할 때에 성령님은 그들의 말에 신적인 권세를 부여하십니다. 전도할 때에 일어나는 축사와 치유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과 몸과 정신을 모두 온전케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제자들을 선교 동역자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성도들은 성숙해지면 복음을 듣는 단계에서 전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2. 복음 전파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며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3. 복음 전파자는 하나님께서 의식주를 채워 주실 것을 믿고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막 6:14-16)

 

(막 6:14)이후로 예수님의 사역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그 전환점이 된 것은 세례 요한의 순교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동안 사역하셨던 갈릴리를 떠나서 이방인의 땅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인 사역에서 소수의 제자들을 훈련하는 개인적인 사역으로 사역을 전환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 훈련에 대한 내용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후에 계속해서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영적인 무지함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적인 소경과도 같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은 영적인 소경과 같았던 제자들의 눈을 밝혀주는 신호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훈련의 결과로 마침내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 대한 훈련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베드로의 고백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간 동안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는 일에 사역의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1. 헤롯왕의 평가(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14)...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16)."

3번에 걸친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사역12제자의 선교 활동의 결과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갈릴리 전 지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당시에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티바스에게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과 말타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헤롯 대왕이 죽은 후에 (주전 4년-39년) 갈릴리베뢰아에서 분봉왕(로마의 허락을 받아 일부 지역을 다스린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공동묘지였던 디베랴를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무덤을 부정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을 격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세 오경은 시체와 접촉하는 일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공동묘지였던 디베랴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후에 헤롯 안디바는 로마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 황제였던 아구스도(Augustus)는 그에게 왕실 칭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심 많은 안디바는 계속해서 로마에 왕실 칭호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그는 39년에 분봉왕에서 해직되어 국외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가 복음에는 그를 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로마의 인정과는 달리 그 지역에서 왕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을 헤롯이 죽였던 세례 요한이 부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반대하면서도 그를 의인으로 생각했던 정치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죽인 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기적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부터 공개적으로 사역을 개시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살아 있을 때에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요 10:41 참고). 그러나 예수님은 백성들 앞에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을 박해했던 정치인들은 죽은 세례 요한이 더 큰 능력을 가지고 부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죽은 후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2. 그는 엘리야다! (15(상))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15(상))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세례 요한은 살아있을 때에 예수님을 가리켜서 "장차 오실 그 분"으로 소개했습니다(막 1:7). 말라기는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말라기가 예언한 "하나님의 언약의 사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께서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언약의 사자)라는 추측을 낳게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을 통해서 널리 퍼져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3. 그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다(15(하))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15(하))"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역사를 통해서 이미 수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구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본 백성들은 이러한 선지자가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을 선지자,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와,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전에 있었던 선지자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옛 선지자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4. 예수님은 누구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대로 부활한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는 8장에서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보내주신 메시야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으로 직접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5.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가?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많은 견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세계 3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가난한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정치권에 대항하고 스스로 몸을 던진 인권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생"이나 "훌륭한 도덕주의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임을 당하신 메시야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가 바로 이 신앙고백 위에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건물도 이러한 신앙 고백이 없으면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인정하는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주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신앙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2.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
3. 주님을 바로알고 고백하는 문제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기초가 된다.

 

세례 요한의 죽음(막 6:17-29)

 

 

1. 세례 요한의 투옥(17-18)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17),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18)."

헤롯 안티바스는 아라비아의 왕 아레타스 4세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자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가 동생(빌립)과 이혼한 것을 보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 정실 부인이었던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안티파스는 동생과 이혼한 헤로디아와 재혼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친동생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동생의 아내와 결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일은 간음 행위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왕의 보복이 무서워서 아무도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세례 요한이 궁전을 찾아가서 안티파스의 부정을 지적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범이 되어야 할 왕이 앞장 서서 율법에 금한 일을 한 것은 큰 죄라고 지적했습니다. 안티파스도 자신이 율법을 어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확산되어서 정치적인 타격을 입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세례요한을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때에 나바티안이 유대를 침공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은 민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군사를 보내서 세례 요한을 체포하여 투옥시키도록 명했습니다.


2. 헤로디아의 원한과 헤롯의 보호(19-20)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19),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20)."

그러나 헤롯이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 헤로디아의 음모로부터 의로운 요한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이 자기를 정죄하는 말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안티바스는 그 소식을 듣고 그녀가 요한을 해치지 못하도록 세례 요한을 체포해서 감옥 깊숙한 곳에 가두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체포해서 가두었지만 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헤로디아의 음모로부터 요한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감옥에 가두어 보호해주었습니다. 헤롯 안티바스는 세례 요한의 책망을 달게 받았지만, 요한의 말을 실천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고민하며 번민했습니다.

3. 세례 요한의 머리를 주소서!(21-25)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21),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22),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23)..."

마침내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헤롯은 자기 생일이 되자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연회를 열었습니다. 헤롯은 그 연회에 행정부에 속한 고위 관리들과, 천부장들(1000명을 거느린 로마 장교들), 그리고 갈릴리에 사는 상류 인사들을 초청했습니다. 헤로디아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세례 요한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그때에 자기 딸을 연회에 보내서 춤을 추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딸인 살로메는 14-15살 정도 된 소녀였습니다. 이때에 그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그녀가 결혼을 했었다면 그녀의 남편이 여러 남자들 앞에서 자기 아내가 몸을 노출하면서 관능적인 춤을 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로메의 관능적인 춤은 헤롯과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을 크게 만족시켰습니다. 그리고 흥에 겨운 헤롯은 축하객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녀에게 최상의 상을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21-23).

4.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24-28)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24),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25),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26).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베어(27)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28)."

왕의 약속을 받은 살로메는 즉시 어머니(헤로디아)에게 가서 왕에게 무엇을 구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미리 계획한 대로 딸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서 달라고 지시했습니다. 살로메는 모친의 말대로 헤롯에게 가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24-25). 헤롯 안티바스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 말을 듣고 술이 확 깨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 요구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로메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신하들앞에서 공개적으로 맹세한 것을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26). 그는 의지가 박약했기 때문에 남의 눈치를 많이 봤습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는 의를 지키는 일보다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시위병 하나를 감옥에 보내서 세례 요한의 머리를 베어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시위병은 즉시 그 명령을 듣고 감옥에 가서 세례요한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살로메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살로메는 그 머리를 받은 후에 그 머리를 또 다시 자기 어머니인 헤로디아에게 갖다 주었습니다(27-28). 이렇게 해서 간교한 헤로디아는 자신을 정죄하던 세례 요한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에게 곧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5. 세례 요한의 장사(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29)."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은 곧 요한의 제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왕궁에 가서 선생님의 시체를 거두어다가 정중하게 장사를 지냈습니다(29). 헤롯은 그 후에 이 일로 인해서 계속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즈음에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가지 능력과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부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헤롯은 헤로디아와 재혼하기 위해서 정실 부인이었던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을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레타스 왕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아레타스 왕은 자기 딸이 당한 모욕을 보복하기 위해서 군대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주후 36년에 아레타스 왕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헤롯 안티바스를 공격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안티파스는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헤롯의 참패가 의로운 요한의 말을 거부하고 그를 죽인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이방인의 손을 빌려서 동생의 아내를 취하고 의인을 죽인 헤롯 안티바스의 죄를 갚으셨습니다.


6. 복음의 새로운 시대

세례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안티바스의 영토인 갈릴리를 벗어나서 다른 지역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때부터 공개적인 사역을 절제하고 개인적으로 제자를 훈련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신 후에 그들을 직접 전도하는 일에 참여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을 자주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그들에게 복음을 위임하려고 하셨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세례 요한의 시대가 끝이 나고,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 이 사건의 의미 ◎

1. 지도자의 간음 행위는 하나님이 극히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지도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2. 참 선지자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3. 선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갈등 속에서 살게 된다.
4. 세례요한의 시대가 끝나고 주님과 사도들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12제자들의 전도 보고(막 6:30-34)

 

1. 제자들의 파송 보고(30)

"사도들예수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30)"

제자들은 전도 사역을 위해서 각 지방으로 흩어졌다가 성공적으로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들이 행한 일을 보고했습니다(30).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전도 사역을 보고한 곳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아마도 그곳은 가버나움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가는 전도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12제자를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보내심을 받은자"란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고 각 지역에 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파송되었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리어졌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 파송된 "선교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한적한 곳으로 가심(31-32)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31). 이에 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32)...."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오는 무리들은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 조차 없이 빠쁘게 사역을 해야만 했습니다(31).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잠시 한적한 곳(광야)으로 가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한적한 곳을 찾는 것"은 휴식 외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가는 중대한 위기 때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이 바빠져서 하나님보다 일에 빠질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한적한 곳(광야)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셨으며, 이를 통해서 다시 영적인 힘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한적한 곳에서 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들은 한적한 곳에서 식사도 하고 또 휴식하면서 영적인 힘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후에 광야에 있는 시내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또한 엘리야도 이세벨로 인해 좌절하고 낙심했을 때에 광야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서 새 힘을 회복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일에서 벗어나서 때때로 광야의 시간을 갖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광야의 시간이 없이 일만 하게 되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힘과 저항력을 잃어버리고 사단과 효과적으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쁠 수록 더 한적한 곳을 찾아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3. 광야에서 쉬게 하심(32-34)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33).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해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34)."

예수님의 일행이 배를 타고 떠나갈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걸어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방향으로 따라갔습니다. 배보다 그들의 걸음이 더 빨랐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이 가려고 하시는 곳에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3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이 헤메며 갈급해 하는 영혼들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곳에서도 쉬지 못하고 다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34).

4. 나는 선한 목자라!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참된 지도자"가 없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목자를 잃은 양 떼"처럼 이리 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한 목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방황하다가 짐승의 밥이 될 것입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후계자를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이 되지 않게 했습니다(민 27:17).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정해주셨습니다. "여호수아""예수"는 둘 다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수"(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주신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에스겔 선지자도 바벨론에 포로의 몸으로 가서 보니, 포로로 살아가는 유대 백성들이 "목자 잃은 백성"처럼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이익을 좇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서 나아갈 목표나 비젼도 없이 방황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서 거짓 목자들을 제거하고 친히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겔 34:5,24).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선지자들이 예고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그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장). 예수님은 다른 지도자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목자"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안위보다 자기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은 로마에 거액의 돈을 주고 그 자리를 샀으며, 대제사장이 된 후에는 그 돈을 보충하기 위해서 탐욕으로 백성들을 탈취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자기 배만 채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주변에는 잃은 양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목자를 발견한 수많은 굶주린 영혼들이 예수님 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목자를 잃고 흩어진 양 떼"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인도하기로 약속된 "선한 목자"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이익을 채우기에 급급했지만,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백성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포기하셨습니다.

5.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은 자기 양을 아셨고 주님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지도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선한 목자"를 찾는 굶주린 영혼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선한 목자가 있는 교회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가 있는 곳은 굶주리고 방황하면서 사단에게 상처를 입고 헤메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목자를 잃고 헤메고 있는 양은 없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혹시 이러한 영혼들이 있다면 바로 지금 주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를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거절하지 않고 영접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굶주린 영혼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 가르침을 듣고 평안과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분주한 일을 떠나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곳에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파송된 선교사들이다.
2. 성도들은 때때로 한적한 곳에 가서 영적인 힘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주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목숨까지 주신 참된 목자가 되신다.

 

 

5병 2어 (막 6:35-44)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35-38)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것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35),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6)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37)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38)...."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하는 제자들을 잠시 쉬게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누가는 이곳이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벳새다 율리아 근처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눅 9:10). 그러나 그곳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수많은 백성들로 인해서 예수님의 일행은 휴식하려던 계획을 취소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을 보고 휴식하지 못하고 다시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계속되었으며 시간이 오래 흘러서 날이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날이 저물어 가는데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서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고 무리들을 촌과 마을에 보내서 먹을 것을 구하게 하기를" 제안했습니다(35-36). 이러한 제자들의 제안은 당시 상황에서 매우 합리적인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음식을 주라!"고 말씀하셨0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남자만해도 5천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일 떡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광야에서 200 데나리온이 넘는 떡을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37).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가 받는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00데나리온은 노동자가 200일, 약 8개월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만일 노동자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하면 200일 임금은 약 1000만원이나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모인 사람이 남자만 5천명이었다면,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쳐서 최소한 1만명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000만원 어치 빵을 사도 한 사람당 1,000원어치 정도의 빵밖에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인원보다 헐씬 더 많았다면 각 사람에게 돌아가는 빵은 더욱 더 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광야에서 그 많은 빵을 구할 수 없다고 한 말은 합리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에 아무 반응을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떡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38). 제자들은 무리들에게 가서 조사해 본 후에 지금 그들에게 있는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소금에 절여 굽거나 말린 것)밖에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급히 도보로 따라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음식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 음식을 조금 준비해 온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예수님을 기다리거나 말씀을 들으면서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그 음식을 먹어버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들이 조사할 때에 남은 음식이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보고는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음식이 없다고 기도하던 외침과 비슷했습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13,22)

 

2. 축사하시고 음식을 나누어주심(39-41)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39),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40).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매(41), 다 배불리 먹고(42),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43),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4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식사할 수 있도록 무리들을 "푸른 잔디 위에 무리를 지어 앉히라!"고 지시하셨습니다(39).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리들을 "50명씩", 또는 "100명씩" 무리를 지어 잔디에 앉혔습니다(40). 이러한 대형은 식사 분배와 야영하기에 적합한 대형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각 지파 별로 야영하던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떡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 떡을 잔디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41).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떡과 물고기를 놓았다"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떡과 물고기를 제자들 앞에 떼어 놓아 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기도한 것은 양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광야에서 옛 이스라엘을 먹여주신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먹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기근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은 3년 반 동안 엘라야를 먹여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또 다시 굶주린 백성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든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42).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필요를 풍족하게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음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거두었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남은 음식을 거두었던 바구니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가는 가지로 엮은)바구니였습니다. 마가는 그때에 제자들이 거둔 음식이 "12바구니"나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3).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그 날 음식을 먹은 사람은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44). 모인 무리들은 50명, 또는 100명 단위로 떼를 지어 앉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 수를 계산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주변에 있던 가버나움이나 벳새다의 인구가 약 2-3,000명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 숫자는 매우 큰 숫자였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제자들이 어디에서 그 많은 떡과 물고기를 구했는지 알지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 떡을 받아서 전해준 제자들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지신 신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안식을 주셨습니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음식을 나누어주는 일로 인해 피곤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주님의 신성 앞에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책망하셨습니다(6:52, 8:17-21). 예수님과 제자들을 좆아온 무리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듣고 음식을 먹으면서 천국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 앉아서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며 우리 생명을 보존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3.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도 주님의 신성을 깨닫지 못했다.

 

바다 위를 걸으심(막 6:45-52)

 

1. 기도하러 산으로 가심(6:45-46)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4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으로 가시다(46)."

예수님께서는 5,000명을 먹이신 후에 즉시 무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리를 돌려보내는 동안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에 있는 벳새다로 가도록 지시하셨습니다(45). 예수님께서 군중을 급히 해산시킨 이유는 광야에서 음식을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강제로 왕을 삼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러한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급히 제자들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을 분리시켜서 이적이 일어난 과정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리들을 모두 돌려보내신 후에, 기도하시기 위해서 혼자 가까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46).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한 일이 세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1) 안식일에 행한 이적을 본 무리들이 흥분해서 주님을 찾아왔을 때(1:35-39).
2) 5병2어의 이적을 보고 무리들이 흥분했을 때(6:45-).
3) 최후의 만찬 후에 겟세마네의 동산에서(14:26-42).
위에 언급된 세 경우는 모두 다 밤이었고, 군중이 열광했으며,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앞둔 때였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은 세 가지 시험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을 찾으신 세 가지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3가지 시험과 비슷합니다. 이 세 가지 사건에서 사단은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유혹했습니다.
1) 이적을 통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 것.
2) 경제를 제공해서 인기를 얻을 것!
3) 십자가를 피하고(사단에게 절하고) 타협할 것!
예수님은 이러한 유혹을 받을 때에 영적인 위기를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위기를 극복하시기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의 삶을 통해서 사단과의 공격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2.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6:47-48)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47),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은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48)..."

제자들이 탄 배가 바다 한 가운데에 있을 때에 예수님은 혼자 남아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47). 예수님께서 사단과 싸우고 있을 때에 제자들은 강한 북풍으로 인해 방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바람을 이겨보려고 힘을 다해서 노를 저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악한 세력들이 제자들이 탄 배를 공격하여 그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과 영적 전쟁을 하사는 동안, 제자들이 탄 배도 바람과 풍랑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4:35, 6:45, 9:14). 그러나 마침내 예수님은 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강력한 북풍을 인해 제자들이 힘들게 노를 젓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밤 사경쯤 되어(로마식 시간계산: 새벽 3시-6시 사이)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48).

그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탄 배를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지나치려고 했다"는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현현(나타나심)을 묘사할 때에 종종 '지나가신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그 앞에서 지나가셨으며"(출 33:19,22), 엘리야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도 그를 "지나가셨습니다"(왕상 19:11). 또한 욥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그가 내 앞으로 지나가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으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8,11)."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나가신 일은 모두 영적인 위기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지나치시려고 한 것도 고난 중에 있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안심시키는 주님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6:49-50)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49),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50)."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바다 유령이 나타난 줄 알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소리를 쳤습니다(49). 유대인들은(예를 들면 탈무드) 밤의 영들이 사람들에게 재난을 가져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물귀신들이 바다에서 항해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두운 바다 위에서 바다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50).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모세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과도 같습니다. "나는 여호와라!"(출 3:14). 하나님은 종종 두려워하는 자녀들에게 나타나셔서 "안심하라. 나는 여호와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시 115:9, 118:5, 사 41:4,13, 43:1, 44:2, 51:9 등). 마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단이 사나운 폭풍을 몰아치게 하여 제자들을 괴롭게 할 때에, 예수께서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위로해주시고 또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려움이 찾아 올 때에 당황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4. 이적을 본 제자들의 마음(6:51-52)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51),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 졌기 때문이라(52),"

예수님은 이 말을 하신 후에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강하게 몰아치던 바람이 순식간에 잔잔해졌습니다(50). 예수님은 날뛰는 사단을 잠재우신 것처럼, 미쳐 날뛰는 바람과 풍랑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연을 주관하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홍해를 가르시고 자기 백성을 걸어서 건너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가로 막는 바람과 폭풍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51). 그들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는 순간 바람이 잔잔해지는 것을 보고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5병2어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52). 예수님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성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영적으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5.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햇빛과 비를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를 좇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안은 종종 가려있어서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금방 좌절하면서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이 흔들리고 약할 때에,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돕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눈을 열어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게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풍랑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풍랑이 아니라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며,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주님은 영적인 위기 때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다.
2. 주님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3. 우리는 주님을 모실 때에 평안을 회복할 수 있다.

 

병자들을 고치심 (막 6:53-56)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기적 사건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일곱 번째 기적 사건, 즉 병자들을 치료해 주신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게네사렛에 도착하다(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53)..."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후에 배에 올라가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6:51). 제자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갈릴리바다의 동북쪽에 있는 벳새다를 향해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한 맞바람에 부딪혀서 남쪽으로 흘러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게네사렛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53). 게네사렛의 비옥한 벌판은 갈릴리 바다 서해안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곳의 길이는 약 4.8km정도 되었으며, 예수님 당시에 이곳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2. 모여든 사람들(54-55)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즐 알고(54),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침상 채로 메고 나아 오니(55)..."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에 오실 줄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배에서 내리는 예수님의 일행들을 알아보았습니다(54). 게네사렛은 베드로의 집이 있는 가버나움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이적과 가르침에 대한 소문은 이미 게네사렛에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1:28). 그러므로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타신 배가 자기 마을에 온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에 오신 소식은 즉시 각 동네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55).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얼마 있지 않아서 수많은 병자들과, 그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이 환자들 중에는 중풍병자처럼 기동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자들은 사람들이 침상 채로 메고 왔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침상에 매고 온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3.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 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56)."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도시나 마을, 또는 촌을 막론하고 수많은 병자들로 붐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옷이라도 만지기를 원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가 나은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옷에 손을 대는 사람들을 모두 치료해 주셨습니다"(56). 그러나 그들이 나은 것은 예수님의 옷을 만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나은 것은 그 마음에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믿음을 가지고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돌려보내시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말 한 마디에 병이 낫기도 했고(백부장), 주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 믿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신실함을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서 준비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주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놀라운 선물들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네사렛 동네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열광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력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단으로 인해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그 마을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기적을 보고 열광할 때마다 영적인 위기를 느끼시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백성들이 기적을 보고 열광하는 것을 보고 갈릴리 지방을 떠나 이방인의 땅(두로와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주님은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온 몸까지도 온전하게 치유해 주신다.
2.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1)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2)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능력을 받게 하는 통로가 된다.
3. 주님은 사람들이 복음보다 이적에 사로잡힐 때에 그들을 떠나가신다. <최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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