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사와의 논쟁(1) (막 7:1-13)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기적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계속해서 7장에 나오는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2:1-3:6)에서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의 충돌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2:1-3:6). 마가는 7장에서 또 다시 예수님과 율법사들의 충돌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율법관과 예수님의 율법관이 어떻게 달랐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논쟁 사건은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시기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열광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에, 즉시 그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1. 바리새인의 비난(1-5)
"바리새인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1),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2).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3),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었더라(4).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5)"
"참된 경건"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견해와 달랐습니다. 본문에서는 "참된 정결"이 무었인지?에 대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간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가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에서 파견한 바리새인과 율법선생들은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서 갈릴리에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제자들 중에 몇 사람이 '불결한 손'(씻지 않은 손)으로 식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1-2). 마가복음의 독자들은 유대 관습을 잘 모르는 로마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그들을 위해서 유대인들의 관습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제물을 잡았기 때문에 그 손에는 항상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갈 때에 성소 앞에 놓인 물두멍에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일부 율법학자들은 일반 백성들도 거룩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 백성들에게도 손씻는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반 백성들도 손을 씻는 것이 의무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사하기 전에 항상 물로 손바닥과 손가락을 씻었습니다(3). 그들은 시장에 갔다오면 반드시 물로 손을 씻어야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잔과 주발과 놋그릇까지도 물로 씻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4).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나 그릇을 씻지않고 음식을 먹으면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율법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손과 그릇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의 유전을 어기고 부정한 손으로 먹나이까?(5)"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교사들이 정한 규례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이 정한 규례가 율법의 기본 정신에서 벗어나면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 차이로 인해서 율법사와 예수님 간에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답변(6-8)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6).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7).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8)."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사 29:13 참조)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사야는 입으로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백성들을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사야의 책망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율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소위 "울타리 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할라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법이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해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이 규례를 지켰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흠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6-8).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교회 앞에 아름다운 돌로 성경책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할머니들이 돌 성경책 앞에 와서 절을 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돌 성경책은 우상숭배를 조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만든 법은 항상 타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든 규례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서 항상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3. 계명과 유전 사이의 갈등(9-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9).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10).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11),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12),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13)..."
예수님은 율법사들이 사람이 만든 계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주변에서 이 일을 증명하는 한 가지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부모님을 존경하고 나이가 들면 경제적으로 돌볼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부모님을 멸시하는 자녀는 사형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규례를 가지고 부모 공경의 정신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들이 만든 법에는 "고르반" 제도가 있었습니다. '고르반'은 성전에 드려진 재산을 말합니다. 이렇게 성전에 드려진 것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할 때에 그는 그 재산에 대해서 "고르반"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그 재산은 교회의 재산이 되어서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당시에 사람들에게 부모공경의 의무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습니다. 사람들은 부모님을 모시는 일이 귀찮아지면 부모님을 돌볼 재산에 대해서 "고르반"을 선언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자녀들이 그 재산에 대해서 "고르반"을 선언하면 그 서원을 취소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녀는 부모님을 모실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면 부모님을 모시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해치고 하나님의 계명을 무너뜨리는 법은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전통이라는 울타리에 갇혀서 사랑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떠나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이 하나님과 이웃사랑의 정신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 이 교훈이 주는 의미 ◎
1. 참된 정결은 외식이나 형식 보다 내적인 정결함에 있다.
2. 모든 하나님의 법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있다.
3. 사랑의 정신에 벗어 나는 규례를 만들어 죄없는 형제를 괴롭히면 안된다
율법사와의 논쟁(2) (막 7:14-23)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율법사 사이에 일어난 논쟁 사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들이 인위적으로 규정한 음식 규례 문제에 대해서 율법사들과 첨예하게 대립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율법사와 예수님의 논쟁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1.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 사람을 부정하게 한다(14-16).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14).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15),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16)..."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서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결"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진실해서 정직하게 듣고 판단하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음식)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부패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16). 그러므로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부패한 죄의 성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모세의 정결법을 폐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마음에 악한 생각을 가득 채운 채로 손을 씻고 정결하게 되었다고 가르치는 외식주의였습니다. 우리가 부정하고 음란한 마음을 품고 탐욕을 좆으면서 손만 씻으면 정결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부정축재 하고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면서 교회에서 거룩한 척 하는 사람들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속으로 온갖 부정한 생각을 하면서 손을 씻어도 깨끗해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너희도 깨닫지 못하느냐?(17-19(상))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18)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19(상))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유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습니다(17).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조차 자신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적인 면에서 다른 무리들과 차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가는 곳곳에서 제자들의 영적인 둔감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6:52, 7:18, 8:14-2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은 배에 들어가서 소화된 후에 다시 뒤로 배설되기 때문입니다(18-19(상)). 우리가 손을 씻는다고 해서 우리 영혼이 정결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3.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19(하)-23)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19).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0)."
예수님은 "모든 식물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은 정결합니다.후에 이러한 예수님의 선언은 교회 안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모세율법은 먹어야 할 음식과 먹으면 안되는 음식이 규정했으며, 부정한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는 정결 예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된 후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이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 서신의 곳곳에 이 문제들이 언급된 것을 보면, 당시에 교회에서 이 문제가 큰 논쟁거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14:14, 갈 2:11-17, 골 2:20-22 등). 어느 날 베드로는 욥바에 있을 때에 지붕에서 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율법에서 금한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율법에서 금한 부정한 짐승들을 먹을 수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그때에 성령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여기에 나오는 부정한 짐승들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부정한 민족으로 간주했지만,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그들을 정결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환상을 통해서 이러한 베드로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정한 짐승들도 정결한 짐승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21),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3)."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부정하게 만듭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근본 요소들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있는 "악한 생각들"이 속에서 나와서 우리를 부정하게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정하게 만드는 "악한 생각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6개의 복수 명사와 6개의 단수 명사).
* 악한 행동을 나타내는 6개의 복수명사
가. "음란들"(포르네이아이): 부정한 성적 행위들
나. "도적질들"(클로파이): 남의 것을 부당하게 취함.
다. "살인들"(포노이): 인격을 모독하고 해를 입힘.
라. "간음들"(모이케이아이): 결혼한 사람의 부정한 성적 행위
마. "탐심들"(플레오넥시아이): 음욕, 또는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는 일들.
바. "악독들"(포네리아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위.
* 악한 성향을 표현하는 6개의 단수 명사
가. "속임수"(돌로스): 타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간교한 속임수나 배신 행위
나. "음탕"(아셀게이아): 공개적인 비도덕적 행위.
다. "흘기는 눈"(옵달모스 포네로스):
'남을 멸시하는 눈", 또는 "질투심으로 남의 소유를 바라보는 눈".
라. "훼방"(블라스페미아): 하나님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나 행동
마. "교만"(휘페레파니아): 자기를 남보다 높이는 행위
바. "광패"(아프로쉬네): 어리석음: 영적, 도덕적으로 몰지각한 일.
하나님이나 지혜로운 길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고 말을 해도 깨닫지 못함.
예수님은 이러한 악한 행위와 악한 성향들이 우리 마음에서 나와서 우리를 부정하게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 크게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과 외식으로 정결 규례를 지켰지만, 예수님은 마음므로 정결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면 하나님 앞에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식은 우리를 더럽게 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있는 부정한 생각들이 우리를 부정하게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으면 자신들이 정결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씻어도 마음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이 나와서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은 손을 씻고 의인이 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은 자기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합니다(시 51편).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고의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더 이상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시고, 갈릴리를 떠나서 이방인의 마을로 향하셨습니다.
◎ 이 가르침이 주는 의미 ◎
1. 진정한 정결은 좋은 의복이나 손을 씻는 형식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2. 진정한 정결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얻게 된다.
3. 우리 속에는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수많은 악한 생각들이 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 (막 7:24-30)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서 이방인의 땅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서 이방인의 땅(두로와 시돈)으로 가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계속된 가르침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마음 문을 열지 않고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이 완고한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선민으로 간주하고 이방인은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바리새인들을 떠나서 이방인의 마을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가는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마을에 가셔서 하신 세 가지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로는 바알 숭배의 본고장으로 엘리야 때부터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수로보니게(시리아에 속한 베니게) 여인은 저주받은 가나안 후손이었고, 선택받지 못한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을 외면하시고, 오히려 죄인들을 찾아가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1. 이방 여인의 방문(24-26)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24).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25),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구하거늘(26)..."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서 북서쪽으로 약 20리쯤 떨어진 베니게(현재의 레바논)의 항구 도시인 두로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을 찾으신 이유는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들을 미래의 전도자들로 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셔서 은밀하게 행동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이미 그곳에도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곳에 오신 소식이 곧 알려지게 되었습니다(24). 그곳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가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엎드렸습니다(25). 그 여인은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이방인)이었고, 수로보니게(수리아에 있는 베니게) 족속이었습니다. 마태의 기록에는 그녀가 가나안 여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5:22). 가나안 족속은 노아 때에 저주받은 함의 아들, 즉 가나안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바리새인들의 가치관에 따르면 가장 부정하고 저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여인을 고쳐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딸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26).
2. 자녀와 개(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
그러나 처음에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녀들에게 줄 음식을 개들에게 줄 수는 없다"고 단호히 대답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대답은 그녀에게 수치감과 모멸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이렇게 냉담하게 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선교 계획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후에 제자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냉담하게 대하신 것은 지금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이며, 아직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통해서 장차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하기를 원하셨습니다(마 28:18-20). 그러므로 예수님은 전도 사역을 위해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에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마 15:24).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냉담하게 대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제자들의 훈련에 집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서 이방인의 땅에 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제자들을 복음 사역자로 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갈릴리 사역을 정리하시고 이방인의 땅으로 오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공개적인 사역을 확대하지 않고 제자 훈련에 집중하기를 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처움에 그녀에게 냉담하게 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27).
3) 여인의 믿음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녀에게 냉담하게 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메시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과 비슷하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우상과 다르다는 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선택받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분명히 구별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치유를 위해서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섬기는 것과는 다른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가 진실로 유일한 참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를 "개"로 취급하시면서, 그 여인을 이스라엘인과 분명하게 구분했을 수도 있습니다.
3. 놀라운 믿음의 반응(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
그러면 그 여인은 이러한 주님의 대답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과연 그녀는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을까요? 일단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했습니다(주여 옳소이다마는...). 그녀는 분명히 자신이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하면 개 같은 존재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이었고 또한 저주받은 가나안의 후손이었습니다. 또한 지금은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풀 때가 아니고 제자들을 훈련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주님께 요청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딸이 귀신들려 고생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예수님께 귀신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딸을 위해서 작은 은혜라도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개들도 자녀들이 식사할 때,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지 않습니까?(28)."
4. 여인의 요청이 이루어짐(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29),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30)."
예수님은 그녀에게 구원을 받을 믿음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믿음이 있음을 확인하시고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로부터 나갔다!"고 선언하셨습니다(29). 예수님은 이방 여인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주님을 거부하던 종교지도자들은 떠나시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은 영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은혜로 덮어 주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 돌아가서 자기 딸로부터 귀신이 나간 것과, 자기 딸이 평화롭게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29-30). 예수님은 오래 교회 생활을 한 사람이라도 교만하고 주님을 거부하면 그를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도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 오는 사람을 거부하는 법이 없습니다. 바로 지금 주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문제를 아뢰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시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주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버리고 그들을 떠나가신다.
2. 주님은 자기 부족을 인정하고 자비를 구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3.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할 수 있다.
<최영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7:27)
이 말씀은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는 이방 여인의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다.
마가에 따르면 그 여인은 수로보니게 사람이요 마태에 따르면 가나안 여인이었다(마 5:21-28). 본문의 의미는 어렵지 않다. 그리스도안에 집중된 축복은 먼저 자녀들 즉 유대인들에게 제공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 기회가 유대인에게 먼저 주어져서 그 떡(예수님의 사역)으로 완전히 만족된 후에야 이방인들에게도 제공될 수 있다는 것이다(마 22:1-10; 행 13:44, 48; 18:6; 롬 1:17).1)
그러나 딸의 귀신을 내쫓아 달라는 이방 여인의 간절한 청원에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거절하신 주님의 냉정한 대답에 현대인들은 누구나 아연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 아니신가? 복음서의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과 친절 그리고 동정의 주님으로 나타나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런 과격하고 무정하고 사납기까지 한 예수님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본문을 마태복음과 연관시켜 자세히 살펴봄으로 그런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다.
1. 마가와 마태는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이 가혹
하고 무정한 사건이었을 경우 그들의 복음서에 삽입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복음서에 본문을 포함시킨 것을 보니 본문은 저들이 묘사
한 사랑의 그리스도와 모순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요 20:30-31; 21:25).
2.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이방 여인은 결코 그녀의 소원을 단념하지 않았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대답이 부정적인 것이어서 반응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
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과 대화를 지속하였다. 우리 생각과 다르게 예수님의 대답은 그녀의 반응에 도전하는 수수께끼같은 것
이었을 것이다.
3. 예수님의 대답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개의 단어에 있다. 그러나 그 단어들은 사실상 그렇게 사납고 무정한 말이 아니다.
그 첫째가 개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개라는 헬라어는 쿠나리아( λυνάρια)로 동양의 개들 예컨대 주인이 없고 사나우며 쓰레기통을 뒤져 먹는
더러운 개를 가리키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그렇게 보았으나 여기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의미의 개를 의미하셨다.
그것은 작은 개(Puppies) 즉 강아지를 가리킨다. 주인의 상 밑에서 먹는 사랑스런 애완용 개를 가리킨다.2)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의역해서 사랑스
런 가족에 대한 표현으로 작은 딸로 말하기도 한다.3)
그 두 번째는 첫째 즉 먼저라는 말이다. 이 말은 먼저 유대인이 먹고 다음에는 이방인도 먹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결코 주님과 대화를 중지시킬 수 없었던 기대와 희망을 주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여기 본문의 대화가 있기 전에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과 이미 대화를 하고 계셨다. 본문은 그 대화의 중간에 말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 한 구절로 예수님의 전 행동을 평가하는 것을 옳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 본문에는 어조나 스타일이나 제스처들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다.4)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이 예수님의 사랑의 생애와 가르침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본문은 결코 예수님이 이방인을 무시하셨거나 그들에게 무정하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마침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그녀의 딸을 고쳐 주셨다(7:29). 그렇다면 예수님의 응답은 오히려 수로보니에 여인에게 보다더 지속적이고 깊은 신앙으로 유도하기 위한 자극제였다고 볼 수 있다. 제1세기의 헬레니즘의 세계에서는 많은 기적을 행해서 인기를 얻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님을 그런 사람의 하나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미신이나 마술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믿음에 대한 반응에서 제공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그 여인 앞에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더 하셨다. 비교의 풍자는 새로운 호소를 유발하기 위해 계획되었다.5) 실제로 이 여인은 더 간절히 예수님께 호소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청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들어 주셨던 것이다
주
1. William Hendrkisen, The Gospel of Mark. p.299
2. R.C.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Mark's Gospel. p.303
3. J.A. Alexander, The Gospel According to Mark(The Banner of Truth Trust, 1960), p.198
4. Robert H. Stein, Difficult Passage in the Gospel(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84), pp.107-109
5. William L. Lane, The Gospel of Mark(Eerdmans, 1984), p.262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 (막 7:31-37)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인의 마을로 가셔서 행하신 세 가지 사건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고쳐 주신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1. 데가볼리 지역으로 가심(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31)..."
예수님은 두로에서 귀신들린 딸을 고쳐 주신 후에 시돈 땅으로 가셨습니다. 시돈의 베니게 공화국은 두로에서 북쪽으로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해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돈을 경유하여 다시 남동쪽에 있는 데가볼리(갈릴리 남동쪽의 10개의 헬라 도시)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그곳을 지나서 갈릴리호수 동쪽 지역으로 가셨습니다(31)(복음서 지도 참조: http://biblenara.org/map.htm ).
2.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고쳐 주심(32-35)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32),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대시며(33),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34).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지더라(35)."
그 때에 사람들이 귀가 먹고 말하기 어려운(모길라론: 말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안수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32). 그는 들을 수가 없었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만큼 더듬거렸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부분 혀에서 발작이 일어나서 안면 근육까지 일그러졌습니다. 아마도 그는 어떤 사고(질병의 후유증이나 외상)로 인해 불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한 마디 말을 하는 데도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떠나서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에 항상 환자와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병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서 환자들이 먼저 자신을 신뢰하게 하시고 그 후에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가서 개인적으로 치료하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하는 대신에) 손가락을 그의 양쪽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어서 그것을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33). 예수님은 환자와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그의 귀와 혀를 고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시고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고통을 보시고 깊은 애정과 비통함을 느끼셨습니다. 이 모든 고통은 죄와 사단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독자는 로마의 성도였기 때문에 마가는 '에바다'의 의미(열리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34). 에수님은 그를 묶고있는 죄와 질병을 향해서 그로부터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 즉시 그의 귀가 열리고 그의 혀가 풀렸습니다. 이제 그는 분명히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35).
3. 무리들의 반응(36-37)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36),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며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37)."
예수님은 이 사건을 본 사람들에게 그들이 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경계할수록 더 널리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36). 예수님께서 이적 행한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이적을 행한 소식을 듣고 밀려오는 사람들로 인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 지장을 받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적을 보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 복음을 믿는 것을 더 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처음에 이곳에서 머물러 계시면서 제자들을 훈련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적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밀려오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본 군중들을 크게 놀라고 흥분하였습니다(37). 사람들은 그 환자를 데리고 올 때에 예수님의 안수와 축복을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듣고 말하게 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치유 능력이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직접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잘하셨다"(선한 일을 하셨다)고 반응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외식에 빠진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비교적 정직하게 평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더 많은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열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그 분이 좋은 일을 하셨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받던 이웃이 치유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일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메시야 시대가 올 것이며 그때가 되면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사 35:5이하). 마가는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와 벙어리 소년을 고친 일이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증거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마침내 약속된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형식적인 신자들을 떠나가십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진리를 거부하는 유대인을 떠나서 이방인의 마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첫 사랑을 잃고 외식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떠나가십니다. 외식에 빠진 사람은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고 싸늘하게 마음이 식어져 버립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부족해도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데가볼리 사람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가까이 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형식적인 종교 지도자들보다 정직한 마음을 가진 이방인을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도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면 우리에게도 자신을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고 해도 마음이 완고하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주님은 형식적인 신자들을 떠나시고 겸손한 영혼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2. 소경과 벙어리 소년을 고치신 일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였다.
3. 이사건은 주님이 메시아이며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최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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