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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가5장 - 샌드위치 기법 1

by 은총가득 2020. 10. 19.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막5:21-24,35-43)

 

1.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35-37)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시나이까?(35) 예수께서 그 하시는 말을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36),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37)..."

주님은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가던 길을 잠시 지체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잠시 지체하는 사이에 회당장의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회당장의 집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딸의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습니다(35). 그러나 주님은 그 말을 듣고 나서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 회당장은 주님을 찾아왔을 때에 주님께서 자기 딸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방금 눈앞에서 12년 된 혈루증 환자가 온전하게 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딸이 살아있다면 몰라도, 이미 죽었다면 주님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가 역경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면 낙심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용기와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38-39)


"회당장의 집에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38-40(상))."

주님께서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회당장의 집에서 장례 예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례의 초반에 보통 직업적인 사람들을 불러 슬픈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 아내가 죽으면 피리부는 사람과 애곡하는 사람을 한 사람씩 고용했습니다. 아마도 회당장은 사회적인 지위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애곡인들을 고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애곡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주님은 그 아이가 죽지 않고 잠을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38-39). 주님은 그 아이는 다시 살 것이므로 슬퍼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주님을 비웃었습니다(40(상)).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3. 달리다굼(40(하)-43)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사(40),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41).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42),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43)."

주님께서는 애곡하는 사람들을 모두 내어보내신 후에, 그 소녀의 부모와 세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40). 주님은 그 소녀의 손을 붙잡고 아람어로 "달리다굼"하고 외치셨습니다(41). 마가는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마가 복음의 독자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 성도들이었기 때문에 아람어를 번역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들은 소녀는 즉시 일어나서 걸어다녔습니다(42). 이를 지켜보던 소녀의 부모와 세 제자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놀랐다'는 말(엑키스테미)은 "크게 놀라서 정신이 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죽은 줄로 알았던 소녀가 일어나서 걸어다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정신이 나갔습니다. 주님은 부모와 세 제자들에게 방에서 일어난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신성을 방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신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신성을 가리우셨습니다. 주님은 꼭 필요한 다섯 사람에게만 자신이 메시아 되심을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녀가 살아나서 돌아다니게 되면, 주님께서 그녀를 다시 살렸다는 사실이 알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는 일을 잠시 유보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부활하신 후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이 만방에 나타낼 때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닫아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서 영적 소경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소녀의 부모에게 소녀에게 음식을 주어 힘을 회복하게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43). 그 소녀는 그 동안 죽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기운이 매우 약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사망의 세력과 맞서 싸우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인간을 죄에 빠지게 하고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지만, 주님은 십자가로 죄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망의 세력이 소녀의 가정을 덮쳤을 때 주님은 그 가정에 가셔서 사망을 물리치시고 생명과 기쁨이 넘치는 가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의 마지막 무기는 인간의 죄를 담보로 한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의 세력을 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장차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소녀에게 "달리다굼"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에게 도 "일어나라!"고 외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 그때에 소녀처럼 일어나서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다음과 같은 주님의 질문에 대해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혈루증 환자를 고치심(막 5:21-34)

 

1.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심 야이로의 딸(5:21-43)-샌드위치 구조-

 

≫ 참고: 샌드위치 기법에 대해서
본문에는 마가만의 특유한 문학적인 기법이 또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이야기 사이에 다른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이야기의 효과를 높이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마가는 이미 앞에서도 이 기법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이야기를 하면서(3:21-22, 31-35), 그 중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장면을 삽입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방법으로 유사한 두 사건을 함께 언급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배척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샌드위치 기법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한 이야기 사이에 긴 시간이 흐른 경우.
2) 긴장이 극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경우.
3) 중요한 유사성이나 대조를 통해서 주목을 끌기 위한 경우.

오늘 본문에서도 샌드위치 기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가는 야이로의 딸을 살린 사건(21-24, 35-43) 사이에 혈루증 여인을 고친 사건(5-34)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혈루증 여인을 고친 일을 야이로의 딸을 고치는 사건 사이에 삽입한 것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동안 많은 시간이 경과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마가는 비슷한 두 사건을 동시에 기록함으로, 주님의 치유 능력을 더욱 더 강조하기를 원했습니다. 마가는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도중에, 혈루병 환자의 치유사건을 삽입해서 곧 야이로의 딸도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2. 야이로의 간구(21-24)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21)."

주님께서는 갈릴리 동편 거라사 땅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하신 후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갈릴리 서편(아마도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주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갈릴리 동편에서는 주님이 떠나기를 요청했지만, 갈릴리 서편에서는 큰 무리가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주님께서 배에서 내려 바닷가에 계실 때에(21) 회당장 야이로가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회당장은 회당 건물을 관리하고, 예배를 책임진 평신도 관리로서 마을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신 주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주님 앞에 와서 겸손하게 엎드렸습니다(22). 그는 자기 딸이 죽게 되었으니 빨리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 살려달라고 주님께 요청했습니다(23). 당시에 손을 얹어 고치는 방법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치유 방법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주님께서 오시면 자기 딸이 나을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으 그의 요청을 듣고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수많은 무리들이 함께 에워싸고 밀면서 주님의 따라 이동했습니다(21-24).


3.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25-27)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25),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27)."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 중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도 끼어 있었습니다(25). 아마도 그녀의 병은 자궁에서 하혈을 하는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유출병 환자는 부정하게 간주되어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환자와 접촉하는 역시 부정하게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아무도 이러한 병자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여러 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병세는 낫지 않고 전보다 더 악화되고 말았습니다(26). 그 때에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것은 은밀하게 주님의 뒤로 다가가서 주님의 옷 가에 손을 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은밀하게 주님 곁으로 다가가서 주님의 옷가에 살짝 손을 대었습니다(27).


4. 병을 고친 여인(28-31)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28).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9).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30),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다 물으시나이까? 하니...(31)."

 

그녀는 주님의 옷에 손만 대도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28).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후에 몰래 빠져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녀가 주님의 옷에 손을 댄 순간, 그녀는 자기 병이 낫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녀가 주님의 옷에 손을 댄 순간 그녀의 몸에서 흐르던 피가 멈추고 말았습니다(29). 주님은 그 순간 자신의 몸에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30). 주님은 뒤를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30).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데, 누가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 고 대답했습니다(31). 제자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께서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일방적인 행동이 아니라, 상호간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와 대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미신적인 신앙을 가진 채로 돌려보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신 일을 드러내서, 그녀가 온전하게 되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5.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32-34)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32)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33),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주님은 질문을 하신 후에 무리들을 둘러 보셨습니다(32). 혈루병에서 나음을 받은 여인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용기를 내서 주님 앞으로 가서 엎드려 모든 일을 고백했습니다(33). 주님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녀가 나음받은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나은 것은 그녀가 주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사실을 그녀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 무슨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 속에 믿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녀를 고쳐주셨습니다.


6. 평안히 가라!
주님은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 말은 그녀가 질병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선언하신 것이었습니다(34). 그녀는 주님의 옷을 몰래 만진 일로 인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녀를 받으시고 주님께서 그녀가 나은 일이 합법적임을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육체를 고쳐 주셨을 뿐 아니라 그녀의 마음까지도 평안하게 해주셨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마음의 평안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질병을 치유 받은 사람이 그 마음에 근심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치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산송장같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소박한 믿음은 그녀를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다시 예배에 참여하고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죄는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사람을 분리시킨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적은 믿음을 보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치유는 육체와 영혼을 포함한 전인적이다.

 

 

간절한 믿음 (마가복음 5:25-34)

 


"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어떤 생물학자가 자연계의 생태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개미 한 마리가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벌레의 날개같은 것을 힘겹게 물고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개미는 조금 가다가 땅이 깊게 갈라진 곳에 도착하자 짐을 내려놓고 주위를 돌면서 상황을 살피는듯 하더니 물고 온 짐을 들어서 갈라진 틈에 다리를 놓고 절벽같은 그 곳을 건너간 후 다시 그것을 물고 가는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곤충에 불과하지만 그 개미에게서 우리는 교훈을 얻는다. 우리들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때가 흔히 있다. 직장과 사업장에서의 고민, 건강문제, 자녀문제, 부부갈등,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우리를 무겁게 하는 짐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짐들이 때로는 나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 도움이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런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2년 동안 하혈로 고생하던 한 여인은 온갖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하여 재산을 허비하면서도 무거운 질병의 짐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무거운 질병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하였고, 그 질병 때문에 예수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 간절한 믿음은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였다. 그와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현실적으로 직면한 무겁고 힘든 짐은 무엇인가?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고 판단되어지는 그 순간이야말로 그 짐들이 우리를 주님께로 연결시켜 준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을 가지게 한다. 그 간절한 믿음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1. 간절한 믿음은 세상에 소망이 없음을 깨달은 자에게 찾아온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6절)

이 여인은 자신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많은 의사들을 찾아 다녔고, 좋다고 하는 약은 다 써보았을 것이며, 가지고 있던 돈도 다 허비하였다. 모든 노력과 수고는 수포로 돌아가고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그녀에게는 오직 낙심과 절망만이 다가왔을 것이다. 이제는 이 세상 어느 것에도 바랄 것이 없고 자신도 포기해야 하는 순간까지 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가까이 접근하신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34:18). 하나님께 은혜 입을 사람은 좌절과 절망 가운데 빠지지 아니한다. 그에게 선한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녀의 발걸음을 예수님께 접근하도록 인도하셨다.

2. 간절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생긴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 . . ." (27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에게는 그 당시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예수 선생이라는 분이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소문이었다. 그 예수 선생이 자기 근처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소망이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에게는 "의의 소망(the hope of righteousness)"이 기다리고 있다(갈5:5-6). 이러한 소식이 바로 "복음(Good News)"이며 성령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갈5:5).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은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을 간절히 바라면서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하였다. 그처럼 이 여인이 접근한 예수님은 "곧 영광의 소망" 이다(골1:27).

인생에게 필요한 "의의 소망", 또는 "영광의 소망"은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사람들에게 전파되게 하신다(행전15:7). 그 멧세지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에게 전달된 것이며, 소망이 간절하던 만큼 그 여인에게 간절한 믿음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믿는 간절한 믿음을 통해서 찾아온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다(롬1:16).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확실히 믿기만 하면 그 복음을 통하여 소망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소망 때문에 간절한 믿음이 생긴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3. 간절한 믿음에는 믿음의 행동이 따른다

"....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7b-28절)

낙심과 실망 가운데 빠졌던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참 소망이 있다고 믿어지게 되면 그는 반드시 믿음의 행동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와 같은 소망을 가진 이 여인은 무리를 따라 예수님이 계신 현장으로 다가갔다. 거기는 복음이 있는 곳이요,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이었다. 그녀는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손을 뻗어 주님의 옷을 만지는 행동으로 옮아갔다. 그 여인은 몰래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지만 주님은 다 아시고 즉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반응하셨다. 이 여인은 가슴이 섬뜩했을 것이며, 그녀는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형편을 주님께 고백하였다. 그러자 주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라고 명령하셨고 그녀는 12년 동안 괴롭히던 무서운 질병에서 풀려나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가지고 돌아갔다. 우리가 간절한 믿음으로 행동하면 주님은 아시고 즉시 우리에게 반응하시고 우리를 고치시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증거하기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61:1).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은 "희생제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받기 위하여 번제물로 사용될 소를 끌고 제사장 앞으로 갔다. 그리고 소 주인이 그 소 머리에 안수한 후 잡아서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면 그 사람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았다. 소 주인이 그 소의 머리 위에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이다. 레위기 16장에서 산 염소를 광야로 보내기 전 그 머리에 안수할 때 기도한 것처럼(레16:21), 번제물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번제물에 손을 대는 것은 자신의 모든 불의와 허물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제물은 나의 죄와 허물을 위한 나의 제물입니다"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레위기 1:4에 보면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이 여인이 번제물처럼 십자가의 희생으로 드려질 예수님을 만진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의 행위였다. 그러한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은 확인해 주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라고 하셨다. 간절한 믿음의 행위는 육신의 병만 치료받을 뿐 아니라 죄사함과 영혼의 구원까지 얻는다.


 

예수는 왜 죽은 자를 잔다고 하셨는가?

(막5:39)

 

막5:39절에 보면 회당장의 딸이 죽는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5:39)

 

사람들은 죽은 회당장의 딸로 인하여 슬퍼하고 울고 있는데 예수는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셨다.(마9:24, 눅8:52)

 

그런가 하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에서 예수는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었도다”고 하셨고 누가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를 “자니라”고 했다.

 

잠을 잔다는 문자적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낮에 일하고 밤에 피곤하여 자는 잠이 있고 영적으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자를 잠을 잔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막5:39과 요11:11과 행7:60에서 말씀하고 있는 “잔다”라는 말씀은 분명히 사람의 육신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를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은 죽었다고 하는 인간을 왜 예수는 잔다고 주장하셨는가? 신구약 성경 속에는 이미 육신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에 있는 죽은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려내는 말씀이 있다.(왕상17장, 왕하4장, 막5장, 요11장, 행9장, 행20장) 그런가 하면 죽음을 보지 않고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로 승천한 에녹과 엘리야와 같은 사람도 있다. 예수께서 이미 죽어 있는 상태의 인간을 잔다라고 표현하신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는 육신의 몸을 입고 있었지만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신 분이시다.(막1:15)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눈에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눅17:21)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은 믿음의 행위로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본질적으로 믿음은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인 세계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참여하는 영적인 세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세계를 사람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적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면 깨달음보다는 한계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이성적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이 되어 버린다 철저하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영적으로 이해하고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은 사람을 잔다라는 표현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엡2:1에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인간의 상태는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라 죽은 상태로 보시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과 죄의 기준으로 생명과 죽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있는 상태이다. 처음 사람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창조하셔서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었지만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파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이 죄의 삯이고 죽음이다.

그러므로 현재 인간이 육의 몸을 가지고 살아 있다 죽어 있다 하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전혀 의미 없는 것이다. 주님의 생명과 죽음은 죄 있음과 죄 없음 또는 거룩과 비거룩으로 구분된다.

 

예수는 이러한 영적인 관점에서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에 영이냐 육이냐 즉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맺고 있느냐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느냐에 따라 살아 있다 죽어 있다로 간주하신다.

“잔다”라는 말은 죽었다 라는 말과 분명히 다르다. 자는 것은 겉보기에 죽은 상태인 것 같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보시기에 나사로와 회당장의 딸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모든 죽은 자의 상태를 잔다라고 하시지 않는다.

예수의 잔다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에 국한되어 있다.

 

즉 예수를 믿은 사람은 예수님 보시기에 살아도 살았고 죽어도 살아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살아도 죽었고 죽어도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육은 죽지만 영은 영원히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영혼 불멸성의 이론이 아니다. 예수의 잔다라는 개념은 그 사람이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안에서만 통용되는 말씀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사건이 바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이다.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무덤에 장사지낸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 확증하신 것이다. 나사로는 죽었지만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둘째 부활 때에 확연하게 드러날 일이다. 예수는 나사로를 통하여 나사로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마지막 재림하실 때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날 때 나사로도 잠이 깨듯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영적 관점에서 인간의 죽음을 볼 때 그리스도인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히2:14-15,마16:18)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도 산다. 주님은 육의 것으로 영적인 일을 가르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의 죽은 자에 대한 잔다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되고 예수의 부활은 주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는 잠자는 주안에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다. 예수의 산 영이 있는 사람은 죽어도 살아 있고, 살아도 살아 있는 영적 존재이며 예수의 산 영이 없는 사람은 살아도 죽었고 죽어도 죽은 자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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