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복음서 연구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

by 은총가득 2020. 10. 19.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

 

1. 들어가는 말


복음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 선포로 시작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닥쳐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막1:4-5)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 선포가 지상 예수가 행한 설교의 핵심(核心)이라는 사실은 대체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는 바이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등장을 세례자 요한의 체포(逮捕)와 연결시킨다. '파라디도미'(paradidomi-넘겨주다)는 본래 헬레니즘 세계에서 범죄자들에게 사용되는 법률용어(法律用語)인데, 원시그리스도교에서는 이 개념을 주로 예수의 고난과 재판을 나타내는 전문용어로 사용하였다. 제자들이나 교회의 영적 지도자(靈的 指導者)들이 당하는 고난을 나타낼 때에도 이 개념이 즐겨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기록함으로써, 앞으로 예수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예시(豫視)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가는 세례자 요한의 전기(傳記)를 쓰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이 무슨 이유로 어디에서 어떻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다. 요한의 순교(殉敎)에 관해서 마가는 6장에 이르러 비로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구속사적(救贖史的) 지평에서 이제 요한의 시대가 지나가고, 예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데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예수가 시험을 받은 후 세례자 요한의 체포소식을 듣고 곧 바로 갈릴리로 오신 것인지, 아니면 일정 기간 유대지역에서 사역을 하시다가(참조, 요1-3장) 갈릴리로 오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마가에게 중요한 것은 요한의 체포야말로 예수에 의해서 개막되는 새 시대의 태동(胎動)을 알리는 징조라는 사실을 증언하는데 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 선교의 거점으로 삼은 갈릴리는 어떤 곳인가? 로마 식민지 세력과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경제 정치적인 차원에서 이중 삼중으로 억압과 착취를 당하던 유대 기층(基層)민중들이 모여 살던 소외지역이다. 예수는 소외지역의 소외된 민중을 하나님 나라 선교운동의 기반(基盤)으로 삼기 위해서 갈릴리로 오셨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을 거점으로 삼아 주로 유대아 지역의 중산층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면, 예수는 유대의 기층민중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복음'(to euangelion tou theou)을 전파하는 거점으로 갈릴리를 택하였다. 하나님의 복음이 '하나님에 관한 복음'을 뜻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복음'을 뜻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예수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요한의 사역이 "죄 용서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baptisma metanoias eis aphesin hamartion)를 베푸는 것으로 국한되었다면,(막1:4)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인가? 마가는 '복음을 전하다'(euangelizesthai)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 대신 '복음을 선포하다'(euangelion keryssein)를 즐겨 쓴다.(13:10; 14:9) 바울의 전승에 따르면 원시 그리스도교에서 복음(福音)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고백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다.(고전15:3b-5; 롬1:3-4) 그러나 마가에 있어서 복음은 이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자신과 그가 선포한 기쁜소식을 뜻한다. 이러한 복음이해는 예수의 등단설교(登壇說敎)에 해당하는 누가복음 4장에 잘 나타나 있다 :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등단설교에서 복음은 자유와 해방을 핵(核)으로 하고 있지만, 예수는 단순히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공생애 삶 자체가 곧 복음(자유와 해방)의 내용을 구성(構成)한다.

15절에서 마가는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을 예수의 선포 형태로 증언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닥쳐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때(kairos)는 자연적인 시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역사개입(歷史介入)의 때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에 따르면 예수는 그의 공생애(公生涯) 벽두에 갈릴리에 등장한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는 순간이라고 증언한다.

'하나님 나라'(basileia tou theou)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왜 그런가? 아마도 마가 공동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개념은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친숙한 용어이었음에 틀림없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malkut shamaim)는 장소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왕권이 행사되는 곳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시45:6 ; 103:19 ; 145:10-13)

이러한 하나님 나라 개념은 한편으로 다윗왕조 전승에서 '다윗 메시아니즘'으로, 다른 한편으로 묵시문학적 전승에서 '인자(人子) 메시아니즘'으로 발전하였다. 다윗 메시아니즘에서는 다윗의 자손에서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외세의 압제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할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면, 다니엘서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인자 메시아니즘에서는 다윗 메시아니즘이 추구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해방의 희망을 포기하고, 천상적(天上的) 존재인 인자(hyios tou anthropou)가 돌연히 나타나 이스라엘 민중을 역사의 질곡(桎梏)으로부터 해방한다는 것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다.

정치적 메시아니즘 또는 인자 메시아니즘을 막론하고, 이스라엘 민중이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기존(旣存)의 세계질서와 가치관을 지양(止揚)하며, 동시에 전적인 새로움의 질서와 가치를 지향(志向)한다. 그것은 묵시문학에서 나타나고 있는 '두 에온'(Aon) 사상에 의해서 극명하게 표출된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카이로스에는 사탄이 지배하는 '낡은 에온'은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고, 놀라움과 산고(産苦) 가운데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 에온'이 동터오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식(Zeitbewußtsein)에 사로잡혀있었고, 그는 낡은 에온과 새 에온의 교차점(交叉點)인 '시간의 사이'(Zwischen der Zeit)에 서 있다고 마가는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인자 메시아니즘에 지평에서 예수는 갈릴리에 등장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 도래(到來)에 직면하여 그러면 인간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회개하라"(metanoiete)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일이다."(pisteuete en to euangelion) 메타노이아는 '메타'(다르게)와 '노에인'(생각하다)의 합성어인데, 직역하면 지금과 '다르게 생각하다'로 표현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 곧 기존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근원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적 정서에서 메타노이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근본적인 인생의 방향전환"을 뜻한다. 그것은 히브리어 '슈브'(shub)에 해당하는데, 슈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비뚤어진 관계를 바로잡는 것, 곧 원상회복(原狀回復)을 뜻한다.(렘3:12; 사9:13) 15절의 메타노이아는 이와 동일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생각의 바꿈을 뜻하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自己義)만을 추구해왔던 인간이 그동안의 삶의 방식을 깨끗이 청산하고, 이제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인간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돌이키는 일, 곧 회개(悔改)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는 일이다. 생각을 개방하고, 행동을 개방하고, 삶을 개방하는 일이다. 이러한 삶의 방향전환으로써의 회개는 하나님 나라 도래에 직면한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무엇인가? 복음을 믿는 것이다.(pisteuein) 복음은 예수가 선포한 기쁜소식인데, 그것은 곧 자유와 해방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믿음은 단순히 복음에 대한 지적(知的)인 승인(承認) 이상이다. 그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설교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전적인 위탁을 포함한다.

2.
그렇다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회개는 무엇을 내용으로 지니고 있는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한다.(눅3:8)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종말 때에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베어 불 속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그러자 무리가 묻는다. 어떻게해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요한이 대답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 세리들도 요한에게 와서 묻자 그가 대답한다."너희에게 정해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또 군인들이 묻자 요한은 대답한다."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해라."(3:11-13)

여기에서 회개의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이웃을 배려(配慮)하고 이웃과 연대(連帶)하는 삶에로의 방향전환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삶의 방향전환이야말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의 행태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3.
예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선교여행을 마치고 유대아 지역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한 사람을 만난다. 마태는 그를 부자 청년으로(19:22) 그리고 누가는 한 관원으로(18:18) 밝히는데 반해서 마가는 단순히 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예수 발 앞에 엎드려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묻는다. '선한 선생이여'(didaskale agathe)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예수를 이름난 라삐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영생(zoe aionion)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물음(15절; 23-25절)과 동일한 의미지평(意味地平)을 갖는다. 그러나 예수는 계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선한 분이 없음을 상기(想起)시키면서, 영생을 얻는 길로써 대인관계(對人關係)를 내용으로 하는 십계명 후반부를 제시한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 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19절)(참조, 신24:24; 레19:13) 이 계명들을 그는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한다. 그의 대답에 대해서 예수는 비판적으로 대꾸하지 않고, 사랑스럽게 여기면서 그에게 말한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0절) 예수가 그에게 지적한 '한 가지 부족한 것'(hen hysterei)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를 따르는 일'(akolythein)이다. 여기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Nachfolge)은 모든 소유로부터의 분리(分離)를 뜻한다.(막1:17-18; 2:14)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ptochos)에게 주는 적선(積善)행위는 하늘에 있는 보화를 얻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를 따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복음서 저자는 그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이 결론을 통해서 마가는 영생(永生)을 얻는 일,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소유(所有)의 관계를 첨예하게 대립시킨다.

영생과 소유 사이의 관계는 이어지는 23-27절에서 주제를 형성한다. 이상의 담론(談論)에 근거하여, 예수는 제자들을 둘러보면서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선언한다. 제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예수는 다시 한 번 반복하여 말한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kamelon)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본문에서 낙타를 '뱃줄'로 바늘귀를 '좁은 문'으로 해석한다면, 본문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해석이다.(참조, 마7:13-14/눅13:24) 낙타(kamelon)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큰 동물이고, 바늘귀(trymalia tes raphidos)는 가장 작은 것을 상징한다. 동물 가운데 가장 큰 낙타와 가장 작은 바늘귀를 대조(對照)시킴으로써 예수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현하고 있다. 재산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물(障碍物)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말씀에 제자들은 더욱 황당해 하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수군거린다. 예수가 말한다:"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다."(27절)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신앙고백형식이다.(참조, 창18;14; 욥42:2; 슥8:6; 대하14:10; 막14:36) 결론적으로 제자직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소유의 포기를 전제한다.

이 장면은 28-30절에서 베드로의 고백과 함께 제자직(弟子職)으로 확대된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마치 1장16-20절에서 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한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한 제자직은 가족과 소유의 포기(抛棄)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예수는 현존(現存)한다. 오는 세상에서 받을 '영생'(zoen aionion)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마가본문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 Q전승(눅14:26/마10:37)의 제자직에서는 "자기 목숨까지" 버릴 것을 요구함으로써 더욱 엄격한 조건이 제시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Q는 제자직의 조건으로써 머리둘 곳이 하나 없는 떠돌이 삶과 아버지의 장사지내는 것 조차도 거부된다.(눅9:57-60/마8:19-22)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영생을 얻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데, 회개로써의 제자직은 재산포기(Besitzlosigkeit)와 이웃과 연대적 삶(solidarisches Leben)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메타노이아

 

 

최 영

 

1. 들어가는 말

세계사에서 유래가 없는 가장 비범한 일이 약 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다. 우주 만물의 창조자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우리 인간의 역사 한 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비극적인 운명과 저주와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처리하고, 대신에 우리에게는 그의 생명과 의와 자유를 내어 주시기 위해 우리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죄와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던 이 세상에 용서와 해방, 화해와 평화, 그리고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던 전적으로 유일하고도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이 행위가 나사렛 사람 예수 안에서 일어났고, 이로써 인류 역사에서 다른 모든 사건들을 작아 보이게 하였다.

서기 2,000년은 인류 역사에 전혀 새로운 시작을 알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천년 단위의 세월을 세 번째 맞는 새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두 번째 밀레니엄(Millennium)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것은 천년에 한 번 있는 의미 있는 일이다. 지금은 천년에 한번 주어지는 은총의 때이고, '맘몬'의 세력에 사로잡혀 신음하고 있는 세계사의 방향을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어 종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되돌려놓아야 할 때이다. 이 카이로스적(kairos) 전환기에 서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우리 세대에 허락하신 이 마지막 기회를 선용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근본주의적 묵시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암흑 세계가 될 것이며,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마25:26)이란 호된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해방과 화해의 선교에 '하나님의 동역자'(고전3:9)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다. 우리는 헌신적으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언제나 '메타노이아', 곧 '방향전환'을 요구하셨다(막1:15). 메타노이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하며 철저한 방향전환과 거듭남을 요청하신 그 비밀이 무엇인가?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사렛 예수라는 한 가난하고 나약한 인간의 인간성 안에서 감춰진 상태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방향전환하지 않은 사람들의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 글에서 우리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춰진 모습으로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지막으로 이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인 바른 해명과 이해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인 '메타노이아'의 문제를 해명하려고 한다.

2. 하나님의 나라의 오심

마가에 의하면 예수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 대신에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늘'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를 꺼리는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흔히 사용하던 표현이다. 그러므로 마가와 마태는 예수의 메시지를 같은 모양으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모든 설교와 비유적 교훈의 주제도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의 공적 활동의 중심도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런데 신약성서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아무런 정의가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그 어느 곳에서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가 이 개념을 아무 데서도 정의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이 개념이 뜻하는 바를 익히 아는 것으로 전제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맞는 말은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전해 주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그 나라에 대해서 주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애타게 고대했던 하나님 나라를 친히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가 선포하고 친히 가져다주었던 하나님 나라, 예수 안에서 오신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구약의 예언자들과 묵시문학가들이 대망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구원과 자유의 총괄개념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낡은 "세계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세계의 존재를 전적으로 변화시키며 갱신시키는 하나님의 활동의 능력과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도 또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는 단지 예고되고 예시되었을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에서 말하고 일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말씀하는 것 안에서, 그리고 그가 말씀하는 것으로부터 현재적인 사건이 된다. 고향의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읽으시고 난 후에 그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한다(눅4:18-9). 그에게서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미래에서만 실현되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역사, 화해와 해방의 역사, 완전히 실현된 최종적, 결정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시작되었다. 예수 안에서 도래한 그 나라는 "복음서에서 바로 기쁨의 총체로서 즉 결혼 예식, 축제의 식탁, 그리고 추수와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잔치를 벌인다. 환성을 지른다. 춤을 춘다." 여기서 전혀 새로운, 유래가 없는 시작이 이루어진다. 눈먼 사람이 보게 되고, 저는 사람이 제대로 걸어다니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게 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눅7:22이하, 마11:5이하). 단지 예수의 말씀만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특히 그의 치유와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표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그렇게 이해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눅11:20). 수많은 세대가 간절히 고대했던 그때가 지금 다 된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이때를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눅10:23이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장차 이루어질 새 세계의 권능(히6:5)이 완전하게 드러났다. 이점에서 예수를 "'인격'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 (autobasileia)라고 표현한 오리겐(Origen)은 핵심을 지적했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역사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 한번 결정적으로 '육신이 되었다'. 그의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눅17:21) 있었고 또한 현존한다. 이와 같이 예수의 현존과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이 전적으로 동일시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예수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한다(참고, 마10:32-33). 예수를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반면,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3:18).

그러나 분명히 신약성서에는 소위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사이의 긴장이 보존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본문들이 이미 생생하게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어떤 본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명백하게 미래적 사건으로서, 그 나라의 도래가 마지막 날의 묵시문학적 사상과의 관련에서 기대된다고 말한다(참고 막13장). 신약성서 학자들이 미래적 종말론이냐, 또는 현재적 종말론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래적 표현방식을, 또는 현재적 표현방식을 결정적인 것으로 강조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로호만은 이런 양자택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신약성서의 종말론이 현재적-미래적 형식의 '이중적' 종말론임을 확인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현실성에 있어서는 현존하고 있지만, 그 최종적인 계시에 있어서는 아직 현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고 있고 현재를 온전히 규정하고 있다. 복음은 먼 미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미래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건이 되고 돌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지금을 하나님의 현재요 구원의 시간으로 깨닫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미래가 구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현재, 자신의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자신의 꿈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미래가 심판이다."

3.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복음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선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다(눅6:20).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된 이 가난한 자들은 누구인가? 몰트만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이란 "배고픈 사람들, 실직자들, 병자들, 낙심한 자들,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포괄"하는 집합개념이다. "그것은 예속되었고, 억압받으며 굴욕을 당하는 백성(ochlos)을 말한다." 가난한 자들은 병자들과 불구자들이며(마11:2-5), 할 일 없이 시내 거리와 골목에서 서성이는 자들이다(눅14:21-23). 그들은 슬퍼하는 사람들이다(눅6:21). 가난한 자들의 비참한 상황은 다음과 같이 충분히 묘사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속옷까지 빼앗아가고자 한다(마5:40). 가난한 자들은 가난 때문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삶과 내면의 삶까지를 부자들의 손에 맡기는 소외를 당한다. 한 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얼굴이 없는 자, 노동력, 인간 자본"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실패자, 실직자, 낙오자, 국외자, 추방된 자, 억압받는 자들이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 세상에서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들, 비인간화된 자들, 가진 것이라고는 알몸뚱이밖에 없는 그들에게 먼저 선포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영적인 가난을 수반하지 않는 물질적인 가난을 부정적인 상태로 이해한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눅6:20)고 선언한 누가와 달리 마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마5:3)고 선언한다. 마태와 누가의 이런 차이는 마태가 원칙적으로 영적인 가난에 관심을 가졌고 누가는 사회-경제적인 가난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차이는 이스라엘에서 '가난'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이 이중적 특징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 어느 하나가 없어져도 가난이라는 개념은 없어진다. 따라서 마태는, 한스 큉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누가에 의존해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누가는 마태 없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로 여김을 받았고,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주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예수는 칭찬했기 때문이다(눅19:8-9).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원칙적으로 가난한 이들 편이었다. 예수는 좀과 벌레가 갉아먹고 도둑이 훔쳐갈 수도 있는 재물을 쌓아 두며, 재물에 마음을 쏟는 부자들을 질타했다(참고, 마6:19-21). 예수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하며 결단을 촉구했다(마6:24). 재물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곳, 사람이 돈을 물신(物神), 즉 '맘몬'으로 섬기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너희 부요한 사람은 화가 있다"(눅6:24)는 예수의 불행선언이 내려졌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해 부자를 무시하고, 비천하고 치욕을 당한 자들을 위해 높고 힘있는 자들을 무시했다. 그와 같이 그는 "모든 가치들을 뒤엎으면서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다른 자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인정했다." 그는 낮은 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체계를 경멸한다. 그러나 예수가 밑바닥에 있는 자들의 편을 드는 것은 그들이 정의롭고 미덕을 지녔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미래와 역사를 짊어지고 있어서도 아니며 단지 자본주의 맘몬 숭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적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까지도 그들을 버린 자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부르짖을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리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요청을 그만두거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버렸을 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도움이 오기를 바라고 혁명이나 국가에서 도움이 오기를 바라게 될 때,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렘17:5)다면, 그들은 돈이 없다 해도 부유한 자의 대열에 끼게 된다. 부유한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안이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돈에서 충분한 도움을 얻고 돈에서부터 충분한 위로와 소망을 얻는다.

그런데 가난한 자의 반대 개념은 구약성서에 의하면 단순히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를 가난하게 만들고, 그를 희생시켜서 자기의 부를 꾀하는 '폭력을 행하는 자'이다. 부유한 자는 힘을 가지고 있다(참고, 눅1:46-54). 그는 곡식을 저장할 수 있고 그리하여 물가를 조작하고 올릴 수 있으며 이로써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 세리가 부자인 것은 그가 속이기 때문이요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증대하기 때문이다(눅19:1-10). 맘몬은 바로 이 부유한 사람들의 하나님이다. 맘몬은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는 불의한 영적 권세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권세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어디를 향하게 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마6:21). 맘몬은 사람을 얽매어 재물의 법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도록 사람을 예속시킨다. 그러므로 맘몬을 섬기는 자들은 맘몬의 속성을 닮을 수밖에 없고 불의한 자, 폭력을 행하는 자로 드러난다. 참으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막10:25). 이와 같은 엄격성을 고려해 볼 때, 제자들이 놀라면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서로 말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 그들은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부유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눅6:24). 이것은 복수의 칼을 가는 노예들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의의 선포이다. 그런데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은 은혜의 심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고 살게 하려고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심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불을 지나는 구원이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부유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것은, 단지 가난한 자들만이 아니라 맘몬의 노예가 되어버린 부자들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자기 만족적인 부유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가난을 의식하고, 재물로부터 내적으로 자유롭게 되어서 가난한 자들과의 친교에, 특히 그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가난하게 만든 자들과의 친교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나라는 비로소 그들에게 열려진다. 우선 '편파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된 복음으로서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힘있는 자와 무력한 자를,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가난의 친교에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4. 메타노이아를 통한 해방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예수는 이제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회개, 즉 근본적으로 인간 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는 그런 자세를 요구한다(막1:15). 맘몬에게서 "떨쳐 일어나"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전환하고"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된 주님이심을 "고백"하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결단이 요구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맘몬'을 선택하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예수 자신도 가족과 출세와 집과 고향을 버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가정적, 사회적 관계를 끊고 자기를 따르라고 불러내었다. 물론 세상 사람 모두에게 가정과 직업과 고향을 버리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가, 저마다, 자신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두느냐 이 세상적인 이익에 두느냐 하는 근본적 결단에 맞서게 한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과 인간의 죄악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 즉 사랑으로 그 세상과 타인에게 마음을 돌려야 한다. 예수는, 쿰란 교파처럼, 금욕적인 세계 현실로부터 도피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죄악의 세계 안에서, 죄된 인간을 위하여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라고 하였다. 단순히 세계를 부정적으로 거부할 것이 아니라 세계에 긍정적으로 헌신하라는 것이다(참고 마22:37-40). 세상 안에서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나날이 세상과 그의 이웃 안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과 그분의 요구에 언제라도 즉각 대응하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메타노이아와 직결되어 있다(막1:15).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히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 속에 앉아 있는 그런 외적인 수행이나 고행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전적인 내적 전환이요 전인적인 하나님에로의 '방향전환'을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또한 "복음의 신앙"과 관계되어 있다. 철저한 변화는 구원의 시대가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요, 철저한 신앙은 자기자신의 죄와 은총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수행할 자세를 표현하는 회개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점이 예수의 선포를 세례요한의 선포와 구별짓는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회개하도록 하는 반면에, 예수는 먼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선포하면서 회개를 권유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는 위협이나 재앙의 메시지가 아니라 구원과 평화와 기쁨의 메시지였고, 그것은 나쁜 소식(dys-angelion)이 아니라 기쁜 소식(eu-angelion), 곧 복음이었다. 이렇게 예수에게서 은총이 회개에 앞선다는 것을 칼빈은 인상깊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회개를 진심으로 할 수 없다... 누구든지 먼저 하나님의 은총을 알지 못하고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참으로 믿을 수도 없다."

칼빈에 의하면 회개는 믿음의 결과이다. 회개는 복음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하나님의 응징, 처벌, 진노에 대한 공포로 인해 일어나지는 않는다. 회개의 근거는 죄인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자비, 무한한 사랑에 있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던 둘째 아들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아온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그를 위해서 큰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 바로 그런 아버지가 하늘 아버지이심을 예수께서는 가르쳐주셨다(눅15:11-32). 따라서 회개는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발견한다. 삭개오는 그 자신에게 오늘 임한 구원이 너무 기뻤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인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아 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말한다(눅19:8). 죄 많은 한 여인은 예수의 자비하심에 감격한 나머지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값비싼 향유를 발라 드렸다(눅7:36-39). 누구든지 자신을 예수께 맡기고, 그의 나라를 믿고, 회개하고 그를 따르게 될 때, 이러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삶의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와 같이 회개는 결코 인간의 영웅적인 노력과 결단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음과 용서로써 믿음에서 나오는 새 출발인 회개를 가능하게 하신다. 회개는 복음의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잔치에 참여하는 것에서 일어난다(눅14:15-24). 여기서 초청된 자는 구원을 선사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즐길 수 있다. 하나님의 초청에 의해서 이제 각 사람은 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살기 시작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죽는 어떤 포기와 함께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향해 즐겁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적인 삶의 미래가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초대를 신뢰하고 떨쳐 일어나 방향을 전환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은 죽음과 억업과 악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생명과 의와 자유의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갖게 된다. 여기에 맘몬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있다. 그것은 맘몬의 권세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여 거저 주시는 삶을 실천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요청한 회개는 사적인 생활과 종교의 범주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회개는 인간의 모든 생활에 적용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회개는 영혼과 몸, 개인과 사회의 관계와 개인의 삶의 방식과 사회의 모든 조직을 포함한다." 회개는 그 경향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나라만큼 보편적이다. 따라서 죽음과 악의 세계에서 생명과 자유의 하나님 나라로 되돌아가는 회개는 개인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 종교적인 영역과 정치적인 영역으로 구분되어 이해되고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과 함께 전 사회의 구조적인 갱신과 혁명적인 변혁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새로운 천년은 어떠한 모습일까? 미래학자들은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의 자료들과 경향성을 가지고 미래로 외삽(外揷)한다. 그들은 경향성을 분석하고, 최대한 계산하고, 개연적 판단을 통하여 미래를 탐색한다. 그런 그들에게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일한 직선적 시간대 위에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는 미래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현재를 미래로 연장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억누른다.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란 없다. 그들에게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전망이 결코 나올 수 없다. 죄된 인간에게서 어떤 새로운 것이 나오겠는가?

'전혀 새로운 것'은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의 안에서 오셨고 지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저항할 수 없는 권능으로(막9:1) 낡은 세계 안으로 뚫고 들어와 구원의 사건을 일으킨다. 기존의 낡은 세계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세계의 존재를 전적으로 변화시키며 갱신시킨다. 예수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언하시며, 맘몬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떨쳐 일어나 방향전환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요구하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철저한 방향전환과 결단이다. 우리의 안일하고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삶의 태도를 떨쳐 버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생명과 자유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적인 책임과 헌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런 방향전환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죽음으로 내모는 맘몬의 세력에서 구해낼 수 있고 새로운 천년을 기대와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메타노이아와 하나님의 나라

전경연

 

 

 

동경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프린스턴 신학교를 거쳐 미국 보스턴신학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대학과 중앙신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이다.

 

 

1. 안내의 말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로 외친 설교의 말씀의 원형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으리라고 생각된다(마4:17) 그러나 초기에 전해진 다른 증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은 상세하고 미끈하게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펼치시려는 새로운 경륜을 이 말보다 더 간결하게 잘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난대로의 인간들, 아무리 종교로 무장하고 도덕군자로 자인하더라도 자신의 정체를 벗겨 보면 허물 많고 죄인인 자신밖엔 내보일 것이 없다. 20세기초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철학을 가르치면서 로마서 7장과 연관시켜 인간의 자아 분열을 풀어낸 유명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제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다'라는 기본적 판단으로부터 시작하는 종교는 그리스도교밖에 없다고 하였다([신앙론]). 이렇게 예외 없이 죄인인 사람들을 면대하여 예수께서는 "회개하라"고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왜 그같이 회개하기를 촉구하느냐 하는 것을 추궁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제 더 유예할 수 없는 한 현실이 달려오듯이 혹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이 덮쳐와서 사람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 죄와 잘못을 규탄하고 응분의 보응을 갚아줄 것이며 개개인이 그럴 뿐 아니고 인간 집단 전체가 그러할 때에 전체를 멸망시킬 대 참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1세기가 동틀 무렵의 사실이었지만, 1천 9백년의 종결이 가까워 오고 2천년이 시작되어 새 기원이 시작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고 투자하고 숨은 죄악으로 차 있다. 이런 세상을 향하여 『말씀과 교회』는 회개를 주제로 글을 위탁하였는데 이에 우리는 예수님의 절박한 운명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다시 읽으며 우리 자신을 반성할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소식은 예수께서 활동하신 목표요 그의 인격과 활동의 지표(指標)였다. 사실 이것 없이는 그의 생이 묘사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하면서 비유를 통하여 사람들이 농사짓고 집 짓는 일 장사하고 한 가정의 사환들을 관리하는 일, 어느 임금이 전쟁준비를 하는 광경의 단면을 제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의 초점에 주목시킨다. 예수께서 지시하는 내용이 바로 무엇인지 알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러한 노력이 신학의 역사가 될 만하다.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을 어떤 분이 새로 번역하여 그 제목도 한글화하려고 하여 "하늘가는 길"이라고 붙였더니 그것이 "저승가는 길"로 생각되어 팔리지 않은 일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 나라"는, 물론 뒤의 호칭은 하나님이란 명칭을 불경하다고 하여 쓰기를 피한 데서 왔지만, 이 개념들은 본래의 뜻과 달리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예수의 이 말씀에 대하여 그의 청중이 아무 질문도 하지 않은 것을 보아, 그들에게는 어떤 관념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복음서에 여러 모양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우리에게 개념탐구에 어려움을 자아낸다.

복음서에 사용된 양식을 유형적으로 개략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가까이 왔다(막 1:15와 평행구 ; 9:1 ; 눅 10:11 등). (2) 거기로 들어간다(막 9:47 ; 10:24와 평행구 ; 마 25:34). (3) 나타난다(눅 19:11). (4) 성장한다. 또는 위기로서 닥쳐온다(막 4:11, 25 ; 마 13:41 등). (5) 오기를 요청한다(마 6:10 ; 눅 11:2). (6) 잔치와 같다(막 14:25 - 평행구 ; 마 22:2 - 평행구). (7) 이스라엘의 역사의 요약이다(막 12:1-11). (8) 사람들 안에 있다(눅 17:21). (9) 선교의 말씀과 동일하다(마 10:7 ; 눅 10:9; 9:2,60). (10) 역설적 지혜교훈으로(마 5:3ff ; 막 10:14). (11) 제자들의 최고의 목표다(마 6:33과 평행 ; 19:12 ; 눅 9:62). 이 외에도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원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이 흥망성쇠를 겪은 왕국의 운명에서 얻은 경험이었다. 그것에 유비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자신들에 대한 왕의 지배에 적용해 생각하였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선험적으로 하나님 신앙이 그러한 표현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랍비들은 "야훼는 언제나 또 영원히 임금이시다"고 주석에서 말하기도 하였다. '나라'라는 말은 아람어로 영도나 국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왕권' 왕의 세력의 주체 등을 의미하였다(malkutha). 이미 구약성서의 곳곳에 이것이 나타난다(출 15:18; 사 52:7 ; 단 2:37; 4:3,17,34 ; 7:28,22,27 ; 시 103:19 ; 145:1,11-13 등). 대부분의 경우 이방 세력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그들의 하나님 신앙을 다시 찾기 위한 다짐이며 그 구호였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 유대인에게는 민간 기도문들이 몇 있었다. 그 가운데 18(개조)기도문이 있었다. 그들은 오전 9시와 오후 3시에 성전의 타종과 동시에 길에 있든지 시장에 있든지 서서 이러한 기도를 드렸다. 18기도문의 제14기원에 다음과 같이 있다.

"처음과 같이 우리의 심판자가 다시 되옵소서.

다시 시초 때와 같이 우리의 충언자가 되소서.

당신만이 우리를 다스리소서.

주여 당신은 찬양 받으시옵소서.

당신은 율법을 애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신국 신앙의 기본형태가 있다. 주후 80년 경 예루살렘 함락(70년)으로 와해되었던 유대교를 재건한 지도자 요카난 벤 자카이의 글에 랍비문서로서는 처음으로 '하늘 나라'라는 말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늘 나라의 멍에'와 '혈육의 멍에'를 대조시키고 앞의 것은 하나님 섬기는 생활을, 뒤의 것은 육신의 생을 위한 일로 대비시켰다. 또 하나 특이한 용법은 하나님이 그의 이름이나 의지의 계시를 통하여 그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 위에 행사하는 주권을 의미한 것이다. 그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심령에 자리잡은 현실이다. 셋째로 그것은 현재에 다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에 있을 것을 기대하고 또 기도로 요청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18기도문에 나타난 것과 같다. 넷째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계약관계를 지시한다. 다섯째로 그것은 한 투쟁적 사실을 지시한다. 곧 하나님께서 대적하는 세력에 간섭해 와서 그것을 정복하고 그것에 포로된 자를 해방하는 사실이다. 이 같은 랍비들의 사용법에 따라 이것이 예수께서 그 말을 사용하실 때의 청중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관념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말이 평속적으로 이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여러 경우에 그들의 생각을 비판하고 정정하려고 여러 가지 말로 바꿔 말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많은 비유를 말씀하셔서 이것을 해득시키려 애쓰셨다.

3. 회개의 요청과 묵시사상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소식은 다 밝혀낼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더라도 그것이 묵시문학과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구신약 중간시기에 박해와 죽음의 위협에 쫓기며 살던 율법 지키기에 생명을 걸던 경건한 유대인에게서 빛과 어둠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전을 벌이게 된 물결 속에 말려들고 있다는 신앙이 생겨났다. 이것이 이원론적 묵시문학 사고인데 세례자 요한은 그러한 신념에 젖어 있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설교가 요한의 설교와 일치되는 점은 그 종말론적 하나님의 행동이란 신념이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한 만큼 세계 심판자 하나님의 내림을 통고하면서 말한 것이 사실이다. 예수의 첫 설교도 그 점에서 요한의 설교를 닮았다. 회개의 요청은 하나님께서 내림하신다는 소식이 첫째로 요구하는 것이다. 묵시문학은 하나님의 내림의 위기는 낡은 시대를 끝맺고 새 시대를 실현시킴으로 에온(aeon-시대)을 일대 전환시키는 것이 그 요체였다. 이것이 묵시문학의 가르침의 줄거리다.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까 각자는 마음을 돌이키고 오고 계신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앞에서 우리가 고찰한 것 같이 인격적이고, 정복을 노리고 인간을 위협하는 죄의 개념과 평행되어 묵시문학의 에온의 전환이란 혁명적인 사건을 전제한다.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일을 하시려고 지금 찾아오신다. 그 새로운 경영에 우리는 전적으로 적응하고 인간 중심의 사고와 경영, 또 죄된 자기 자신의 뜻을 앞세워 관철하려는 의도를 철저히 극복해야 한다. 인간의 갱신은 인간이 스스로 인격이 되는 길에서 시작한다. 어떤 분위기, 어떤 강제, 의존심 같은 것이 철저히 배제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워진 한 책임적 인간이 되어서 자신과 공동체의 과거를 책임지고 "머리를 쳐들고"(????????????), 곧 닭이 목을 빼어들고 새 날을 부르는 것 같이 절실하게 깨어 일어서야 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나님 나라"의 모든 비밀은 "가까이 왔다" 또는 "가까왔다"는 서술 동사에 달려 있다. (1) 희랍어로 "가까이 왔다"(???????? ??????,〈현재완료〉마 4:17〈막 1:15〉10:7〈눅 10:9〉, 눅 10:11) "가까왔다"(????? ?????)눅 21:31〈막 13:29 ; 마 24:33-여기엔 주격이 생략되었다〉???????은 아라멕으로 재생할 수 있다. 그때 그것은 ????나 ????다. 이것은 '우리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경우에 적용된다. 또 '시간이 가까왔다' ??? ???? ????고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의 구원이 전보다 더 가까웠다(사 56:1, 롬 13:11) (2) 다른 계통의 말 '오다' '도착하다'(???????? 마 12:25 <눅 11:20>)도 있다. 이 낱말은 아람어 memaa에 해당하는 말로써 구약을 희랍어로 번역한 Theodotion이 도입한 것이다. (3) 나타나다(눅 19:11 ???????????? - ???? ????? 위경 바룩 묵시 39:7 ; '모세의 승천'(10:1) 등에 있다. 이 어휘가 정확히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위의 예 가운데 '나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과 같이 아직은 침입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순간 진입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까이 왔다'. 지금 왔지 않은가? 할만한 것이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제 전혀 다른 모양으로 일하실 것이라는 통고다. 그의 내림에 직면하여 죄된 현세에 집착하여 자기의 물질과 세력권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인간이 받을 심판과 제공된 새로운 기회에 대한 각성의 촉구다. 여기서 "복음을 믿어라"고 하는 말은 구약의 인용이면서도 헬라식으로 조금 변경된 것이라 생각되는데 예수께서는 이사야서 61장 1절의 뜻으로 말씀하는 것이라 본다. 어휘의 일치는 이사야 52장 7절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표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산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에서 더 잘 보여진다. 즉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하나님이 통치하신다하고 외치는 자의 포고를 듣는 것을 말한다. '믿어라'라는 말은 그 소식에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에게 믿음은 순종이었다. "회개는 순종에까지 이끌어야 한다. 하나님의 새 경영에 대해서 인격적 전환과 더불어 지성과 의지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고 낮아진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제는 하나님은 구름과 우뢰 속에서 말하시지 않고, 아무 외적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구박과 멸시를 받는 지극히 작은 자와 그에게 대한 사랑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오신다'는 소식은 이와 같이 우리의 사고와 존재의 대 전환을 요구하고 또 가난하고 병고에 시달리고 포로된 자에게서 솟아나는 말을 귀담아 들으라고 한다.

19세기의 신학의 대세를 이끌었던 A.릿츨(A. Ritschl, 1822-80)은 그리스도교는 두 중심을 가진 타원과 같은데 그 초점의 하나는 그리스도론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이 시대를 휩쓴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하나님의 나라란 의식을 다음과 같이 특징지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그들의 윤리적 공헌으로 세계에 대한 왕적인 지배를 실현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세계의 사표(師表)와 인도자가 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 이상(理想)도 제1차대전의 비참한 살상과 적대의 참변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드러낸 채 사람들로 하여금 환멸을 경험하게 하였다.

이 같은 신학의 새 기원의 스승 아래서 제2대의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들의 자의식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그의 책은 71페이지밖에 안되었지만, 그것이 끼친 영향은 다음 세기를 앞당길 만한 것이었다. 저자는 요한네스 봐이스(Johannes Wei?, 1863-1914)요, 책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설교"(Die Predigt Jesu von Reiche Gottes, 1892, 영역1971)였다. 그의 주장을 대략 적으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신국관념은 수많은 종말론적-묵시문학적 견해들과 뗄 수 없는 연관을 갖는 것 같이 보인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러나 지금 제기하는 질문을 합당하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가 의문이다."라고 하였다. 곧 대체 신학에서 종말론이나 신국 관념을 유용한 방향으로 사고를 전개하도록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질문이 일어나는 것은 대체 그같이 함으로써 그리스도교 본래의 본질적 특질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진지하게 꼭 그렇게 된다고 믿고 말씀하시는 데 반하여 사람들은 이를 정신화해서 "가까이 왔다"해도 그런 가르침으로 깜짝 놀란다든지, 내일 당장 종말이 오는데 재산을 다 팔아 버리고 가난한 자에게 줄 결심을 할만큼 '정신적으로' 행동하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현대에 영향을 많이 끼친 학자들 가운데 큄멜은 "약속과 성취"란 책에서 그러한 정신적 접근을 입증했고, 그 후 오랫동안 큰 인기를 얻었었으나 한 10년 후에 다시 쓴 논문 "예수의 선포 안의 접근기대"에서는 입장을 바꿔 예수의 신국접근의 통고는 문자대로 시간적 접근 기대였다고 하였다.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 때 그 하나님의 나라의 접근 통고가 결코 하나의 연극은 아니었던 것을 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 받으러 자리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강가에 널려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니 회개했다는 사실과 부합하는 열매를 맺으라고 권한다. 메타노이아란 말 자체가 인간 중추인 마음 또는 이성이나 기백인 vous를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라는 말이다. 비근하게는 당에 속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세계경영에 합류할 뜻으로 전환한다는 말이며, 사람은 개성으로서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허락 받고 있으나 철저히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는 무엇에 소속되고 구애받고 세상의 사물이나 세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그 같은 두 세력속에 끼어서 이율배반을 수시로 경험하게 된다.

오랫동안 묵시적 사고는 고대사람의 특수한 세계관이라고 판단하고 오늘날에는 우리의 실존에 부합하게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케제만은 묵시적 사고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모체라고 선언하여 불트만으로 지배받던 실존주의적 신학이 큰 위협을 받았다. 케제만(E.Kasemann)의 이 주장은 많은 진실성을 갖는다. 만일 예수께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그 날을 믿지 않았다면 주인이 언제 올는지 모르니까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말들이 실감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불교에서 염라대왕을 내세워 윤리행위를 권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이 학대받고 마침내 죽임을 당할 것을 믿은 것과 똑같이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말발굽에 밟히고 돌 하나도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을 것을 믿었다. 예수께서 묵시적인 종말을 믿으셨다는 것은 그가 죽임을 당하실 것을 각오하셨다는 것으로써 우리는 믿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세계의 종말이 밤에 도적이 집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이 갑자기 올 것을 믿었다. 그는 실제로 생애를 통하여 악과 싸우고 그 악의 공세가 마침내 세상에서 신앙의 공동체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서 투쟁하였다. 현대의 신학자 중에 와일더(Amos N.Wilder)는 예수의 종말론은 "그의 시대의 역사적 위기와 그 결과에 대한 상징이 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정신적 접근이거나 현재를 결단의 시간으로 하는 무시간적 소식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시간적 접근'을 기대한 것이라고 확신한 큄멜의 깨달음과 같다. 헬라시대로부터 '아킬레스의 화살'이란 수학 문제가 있는데 과녁을 겨누어 활을 쏘았는데 활의 행로(行路)를 전체의 반을 끊고, 또 그 반을, 다음에 또 그 반을 그렇게 계속 반을 구획하면 화살은 영구히 과녁에 도착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아무도 반박할 수 없게 된 문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가까이 옴을 아킬레스의 화살처럼 목표에 영구히 도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할 구실도 세울 수 있다. 구원의 역사가 한 점에서 묶여서 더 진행하지 못하는 사항으로 처리한다면, 현실적 인간은 죽고, 건설된 것은 모두 무너지고,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은 잊혀지고, 전에 죄인이던 사람들이 새 환경에서 조건이 변함에 따라 성공하고, 새 일들이 건설되고, 그 지역의 법률도 변하고, 아담이 타락한 후에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고살리라는 것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게 되고, 응보율도 전과 같지 않고, 예수께서 심각하게 고통 당하신 십자가상의 고난은 문명된 세계에서는 고대의 유물같이 된다든지 혹은 현대에는 계산에 넣지 않아도 좋은 사실이 돼 버리지 않을까?

위의 가정은 인간 문명이 세상을 또 인간의 본질을 개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사변적 우화다. 그리고 창세기 처음 몇 장의 이야기를 무의미한 신화로 무시하려는 시도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께 처음 사람 아담이 죄를 짓고 적대관계로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치료와 경험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은 유토피아의 요청이 아니라 병자를 고치고 악귀를 쫓아내고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는 치료의 힘이었다. 예수의 설교의 묵시적 미래 지양적 성격을 찾아낸 J.봐이스나 A.슈바이쳐나 R.오토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서에서 '비밀' 또는 '신비'(Mystery)란 말로 표시되었다는 것을 의미 있게 보았다. 그것은 결코 공식적 권력기구인 조직체가 아니라 비밀스럽고 곡식이 자라듯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성장하는 무엇이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이런 비밀이 사무쳐 있다. 그것은 한편으론 죄에 시달리는 세계와 인간을 치료하는 힘이고 다른 한편으론 작은 시작이 크게 되고 세상의 악이나 교지(巧智)가운데 사무친 영원한 것에 대한 지혜 또는 인간의 체험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군마를 탄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출동하는 군대였다면 한 때 그 물리적 힘을 가지고 큰 변동을 일으키기도 하였겠으며 또 쉽게 격파도 되고 패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고해 주는 차원 높은 세계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부자는 대금(大金)도 쉽게 말한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말씀을 잘 말씀하신다"고 그의 명상록에서 말했다. 부자는 큰돈이 유통하는 세계속에 왕래하며 적재(適材)적소에 맞춰 쓴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그의 말씀으로 만드셨고 또 움직여 가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틀림없이 잘 말씀하신다. 그의 아들도 말씀이다. 우리는 있는대로의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자연물에 사무친 비밀을 들춰내는 말씀을 통하여 깨달을 뿐이다. 그의 말씀의 훈련을 받은 성서교사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낡은 것을 꺼내듯이 그 비밀을 잘 뽑아낸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는 너무 넓고 깊어서 종말 이전의 사람에게는 비밀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들의 매일의 생활에서 죄에 시달리며 실패와 성공을 이루는 가운데 얻는 경험을 통하여 그 나라의 시민임을 자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심고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저절로 자라는 씨와도 같다(막4:26-). 우리는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마지막 푼전까지 갚지 않고는 해방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함로써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접근하심에 휩쓸린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밀이다. 그의 하나님 나라의 전망이 모두에게 명백한 것은 아니었으나 투쟁의 현실 속에서 고투하였고, 그는 다만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의 말씀 가운데 신국의 비밀이 스며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심으로 세상에는 투쟁이 있게 된다. 그것은 사람으로 세워질 이상적 나라는 아니었다.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찾는 자에게 만나지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이상적 나라는 아니다. 세상 나라는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의 생존을 넉넉히 이어간다. 천 사람, 만 사람이 희생되어도 그 주권을 세우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어둠의 아들들이 사실은 자기가 관할하는 일에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 하나님께서 계신가, 그가 진짜로 세계의 임금이신가 하며 의문시한다. 신약의 시대에도 그것을 물었다. 정의의 하나님은 주무신다고 생각하였다. 아무 표징도 없음으로 천둥이나 지진이나 하늘의 노을을 보고 혹시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표징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다. 신국의 표징으로써 요나의 표징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였다.

5. 회개하자

우리는 죄인이며 범람하는 우리 사회의 범죄들을 감축시킬 힘도 부족한 사람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급속한 내림에 대해서 즐겨 맞이할 만한 인간이 못된다. 때가 차서 세상의 악과 불신을 심판하시려는 분의 오심을 유화(宥和)시킬만한 의로움을 제시할 능력도 없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의 정통적 성서 용어 사용이나 하나님의 자비로 실현된 사랑의 업적을 쓸어버릴 만한 대척적(對蹠的)인 용어들을 쓰는 사람들이 종종 생겨나서 우리는 주님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신학을 토론한다는 사람 가운데는 자기들이 발견한 용어들을 주장하다 보면 그것은 성서의 근본 뜻과 크게 배치되지만 자기들이 최고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처하면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에는 아연 질색할 수밖에 없다.

『말씀과 교회』금년 봄호(240쪽 이하)에 홍근수 목사는 문익환 목사의 전집에 대한 서평을 실었다. 그가 칭찬하고 독보적이다, 예언자다 하는 말이 도저히 성서의 본래의 가르침과는 배치되며 반그리스도적 임에도 불구하고 들어 추대하는 양상은, 세상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없다는 듯한 자태도 보여서 문익환 목사를 "통일운동의 선각자요 선구자"라 부른다. 문 목사는 북간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별나게 민족주의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제지배 아래서는 매우 민족주의적 사고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민족주의에 매어있는 동안에 세계적인 그리스도교 고유의 사고의 창달에 후진적이었다. 문 목사를 통일운동의 선구자라고 하는 것은 종종 그 특징을 그가 38선을 넘어가서 김일성과 포옹 인사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라는 것으로는 판단력이 부족하다. 문 목사의 경우는 그가 친북사상을 가지고 민중이란 공분모로 통일운동을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문 목사가 그때 38선을 넘은 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전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공개해야 한다.

우리들의 문필 세계에는 너무 쉽게 하는 개념의 동치(同値)가 있다. 여기 적으면 다음과 같다.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고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고 또 그것은 "민중과 민족의 부활"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전집 3권 336쪽). 같지도 않은 것을 같다고 단언하니 그 논리를 따라갈 수 있는가?

홍근수 목사는 문 목사가 "한국 민족의 예언자"라고 평하였다(서평244쪽). 예언자라고 하니 어깨가 으쓱하겠지만, 한국 민족이 언제 한 종교신앙으로 결속되어 순교자도 내고 예언자도 내었는가?

다음에 1990년에 쓰여진 『히브리 민중사』를 김경재 교수는 "그의 '구약성서신학의 결산물'이라고 절찬했고" 홍 목사는 "그것은 그의 예언자에 대한 연구와 이해, 그리고 예언자적 삶의 실천이 절정에 이르러 이 책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리라"고 말한다. 가장 비그리스도교적인 글이 가장 훌륭하다는 훈장을 받았으니 심사원들이 그 같은 사상에 매혹되어 동류의 사상가들이 됐기 때문인가? 본 필자는 전집 11권을 펴서 문 목사의 글을 읽었다. 그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구약성서에서 맥박치는 하나님의 역사는 히브리 민중사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는 "문중사"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문중사란 말은, 아브라함 가정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형성사에 무관하다는 것이다. 문익환의 설명은 더 계속한다. 그 많은 하비루 신들 중에 하나가 모세를 보내어 하비루들을 종살이에서 건져내라고 했고 그가 야훼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중신학 전성시대에 독일의 학자들 중의 어떤 분이 하비루라는 말은 옛 토판이나 암벽에 나타났다고 하면서 노예민족으로 없어진 그런 민족을 지시하였다고 했는데, 그것을 출애굽의 이스라엘에 적용하여 설명한 사람들이 그 시대에 한국 구약학자들 가운데 90%는 있었다고 본다. 문 목사는 의기 양양하게 그것을 채용한다. 출애굽을 지도한 신은 하비루 신들 중의 하나다. 거기서 광야 유랑을 거쳐서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이스라엘사는 시작됐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은 다신교로부터 발전했다는 것이고 소설을 쓰는 것처럼 신의 계보까지도 제 마음대로 창작한다. 이스라엘사란 것이 이런 것이라고 하면 신학대학에서 왜 그런 것을 가르치고 있겠는가?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다"(마22:32)라고 하였다. 파스칼은 그의 명상록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문익환은 하나님도 성경에 구애받지 않는 초인간인가? 그는 거기에 덧붙여서 엘 샤다이(El Shaddai)신과 "조상의 하나님도 분리시킨다. 60년대에 구약학계에서 토론한 일이 있는 것으로써 족장시대의 하나님 칭호는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이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조상의 하나님"과는 별개의 신이 아닌가 하는 토론이 있었을 때 조금 들은 말을 문 목사는 이스라엘사에서 "문중사"를 이스라엘 역사를 구별하는 근거로 삼는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새 역사를 이루는 그것을 내어 던지고 성서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이러한 "민중사"를 "독보적인 연구"요 "한국 구약학계의 '주체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하기도 극단에 달하였다.

이 기술은 아무렇게나 던지는 말이 아니다. 밀려오는 기장에 대한 때의 내림도 이 사실에 대한 판단과 연관되었다. 우리는 임박하고 문 앞에 다다른 위기의 내림을 향하여 깊이 회개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릇된 옛 주장을 21세기에도 자랑하다가 수모를 당할까 두렵다. < 호주성산>

 

'4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4장 연구 - 비유 연구  (0) 2020.10.19
예수의 비유와 하나님 나라  (0) 2020.10.19
마가복음 , 장별요약  (0) 2020.10.18
마가복음 서론 및 개관  (0) 2020.10.18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  (0) 2020.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