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에 관해 우리가 보유한 기록 중에 가장 오래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다분합니다. 이 서신은 생생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전개 되는 글이어서 일반 독자와 성경학자가 똑같이 흥미를 느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권위 있는 것으로 평가될 문서들의 목록 작성을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아마도 주후 2세기 중반), 처음으로 선택되어 그 목록에 올라간 문서 가운데 마가복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그려 낸 네 개의 '정격적' 기록, 곧 권위 있는 초상 중 하나로 마가복음을 손꼽습니다.
마가복음과 다른 복음서들
마가복음은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복음서'라고 부르는 네 개의 저작 중 하나입니다. 마가복음을 올바르게 인식하려면 마가복음과 다른 복음서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정경에 해당하는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이 넷이 분명하게 공유하는 특징이 많기는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특유의 유사점이 상당하며, 특히 요한복음는 어느 정도 더 독특합니다. 신약학자 대다수의 신념에 따르면, 마가복음이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였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주요 자료로 사용했습니다.
신약의 복음서 넷을 하나로 묶는 특징은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그분을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을 제시하고 실행하도록 하나님이 지명하신 인물(메시아)에 대한 구약 약속의 성취라고 예수님을 서술합니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 주(Lord)와 같은 칭호를 사용하면서 시종일관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이러한 유형으로 예수님을 서술한 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예순미에 대한 믿음을 격려하고자 그분을 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역사 연구를 위한 증빙 설명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강조한느 것이 정경 복음서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와 족보가 없고, 가르침을 담은 자료량도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다른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누가복음)와 구별될 수 있습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마가복음을 흔히 마태복음의 축약본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인상이 생길 수 있었는지 쉽게 납득이 됩니다.
마가복음과 다른 공관복음서 사이에 주요한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이 세 복음서는 특정 측면에서 따져 볼 때 굉장히 비슷합니다. 공관복음서 사이에는 사건 순서와 말씀 배열에 차이가 있고, 각 복음서 곳곳에는 이 기본 내러티브 줄거리에 '끼어드는' 독특한 읽을 거리가 있지만, 마가복음은 전반적으로 세 공관복음서가 공유하는 예수님의 사역 내러티브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비록 학자들이 과연 마가복음이 가장 처음 기록된 복음서인지의 여부에 관한 질문을 논하기는 하지만, 명백히 마가복음은 '기본' 복음서 저작을 대표합니다.
마가복음의 정황
마가는 글을 시작하는 첫 절에서 자신의 저작을 '복음',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전하는 것과 연결 짓습니다. 마가복음의 집필 정황을 말할 때 우리는 초대 교회의 삶, 특히 설교하고 회심자들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소개하던 초대 교회의 정체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마가가 복음서를 집필한 까닭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바탕을 두고 탄생한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설교하고 가르치는 활동은 마가복음을 집필할 이유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마가복음에 담긴 실제 내용도 많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현재까지 수십 년 동안 학자들은, 초대 교회에 일찍부터 있었던 예수님에 관한 전승을 정경 복음서들 모두가 주로 구전으로 받아 사용했다는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각자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활용했을, 예수님에 관한 전승 유형을 기술하려는 복음서 연구 방식에 '양식 비평'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은 현재 우리가 가진 복음서에 있는 자료의 유형, 예를 들어서 기적 이야기, 비유, '선언 이야기' 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자료를 개별 단위로 분석해 교회가 그것을 전하고 사용하면서 자료 각각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길술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모든 사항에서 꼭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초대 교회에서 사용하고 전한 예수님에 관한 자료를 복음서에 담았다는 데는 모두 의견이 일치할 것입니다. 주로 이러한 자료가 예수님을 알리고 윤리적 사안들을 가르치며 다른 존요 집단과 논쟁하는 등의 문제에서 교회의 생명력이 유지되는 데 유용해기때문입니다.
이런 의견들이 마가복음의 일반적인 정황을 간략하게 알려 주지만, 초기의 이 특별한 기독교 저작이 왜, 언제, 어디서 생겨났는지에 관해 우리가 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을까요? 마가복음과 관련하여 답을 쉽게 얻을 수 없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저자가 이러한 유형의 정보를 직접적으로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서 자체에는 저자 이름, 기록 날짜, 저작 장소나 이유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에 대해 이와 같은 정보를 제공하려면 반드시 문서 자체를 철저히 검토하면서 간접적인 실마리라도 있는지 찾아야한다는 뜻이며, 누구든 미심쩍어 할 수 있으므로 그러한 실마리를 해석하려면 학문상의 정교함뿐 아니라 상당한 판단력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저작의 구체적인 정황과 관련해서 의견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여기서 대답을 제시하는 데 있어 잠정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적어도 주후 2세기 이후로 계속된 주장에 따르자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바나바의 친척인 요한 마가입니다.(행12:12, 25) 그는 로마에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어느 정도 바탕으로 해서 복음서를 썼습니다. 이 주장의 근거가 초대 교회의 전승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함에도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마가복음 14:51~52에서 거론하는 '한 청년'이 저자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 사건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가 문서 안에는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아주 이상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하겠지만, 아마도 가장 먼저 기록되었을 이 복음서를 누가 저술 했는지는 결코 분명히 알 수 없을 겁니다.
우선, 분명한 사실은, 원문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저자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 독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셈어(아람어와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듯이 보입니다. 나아가 저자는 셈어를 사용할 때면 잠시 흐름을 끊고서 그 언어가 들어 있는 구절을 해석해 줍니다. (막5:41, 7:11, 34, 10:46, 15:22, 35) 나아가 저자는 유대교의 관습과 종파 집단을 설명하는데, 이는 독자들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지 않으며 아마도 유대인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막7:3~4, 12:18, 14:12)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그저 일차 독자들이 어떤 사람이 아니었는지를 말해 줄 뿐이어서, 조금만 도움이 됩니다.
유일하게 도출해 낼 수 있는 긍정적인 결론은, 마가가 팔레스타인이 아닌 어딘가에 있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저작 장소를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폭넓은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진정 뜻하는 바는 마가복음의 역사적 정황을 보면 이방인 가운데서 기독교의 전파, 곧 처음에는 필시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였을 기독교 운동이 별개의 종교로 변하는 발전 상황이 나온다는 겁니다.
기독교 운동 초기 단계의 발전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정보는 신약의 바울 서신에 담겨 있으며, 몇몇 학자들은 마가복음과 바울의 저작 사이에 보이는 어휘와 주제상의 유사성을 다소 상세히 지적해 왔습니다. 여기서는 마가와 바울 사이의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을 설명하기보다는, 마가복음이 아마도 바울 서신 수신자들과 비슷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으며 주후 1세기에 더 넓은 그리스-로마 세계로 뻗어 나가던 기독교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저작 연대
마가복음 저작 연대에 대한 학문상의 논의는 주후 66~72년에 로마에 맞서 일어난 유대 반란과 관련해 이 책을 어느 시기에, 아니면 과연 유대 반란과 관련해 놓아야 하는지의 여부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마가복음 13:14~20은 구약에서 차용한 표현을 가지고 유대에서 일어날 엄청난 혼란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단9:27)
일부 학자들이 확신하기에, 그와 같은 예언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 구절은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함락시킨 사건(주후67~70년)을 언급하며 그 일 이후에야 예언 형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학자들에 따르면 마가복음은 아마 주후 70년이나 그 직후에 기록되었을 겁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구절의 출처가 예수님이 아니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어느 정도 분명하지 않은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은 예루살렘 정복 완료 직전에 쓰였다고 주장하면서 저작 연대를 주후 67~70년의 예루살렘 포위 기간 중 한 시기에 놓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하나님이 무력 파괴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리라는 예언을 유대 반란이 일어나기 대략 35년에서 40년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타당한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해당 구절의 세부 내용을 살표보면 사실상 그 예언이 유대에서 전쟁에 일어나기 전에 나오기는 했다. 그러한 세부내용에는 혼란을 분명한 말로 예언하지 않고, 구약의 예언 구절에서 차용한 단어로만 서술한다는 사실, 유대의 산으로 도망하라는 조언이 있지만 포위 당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산들은 이미 로마가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도망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사실 등이 포함됩니다. 이 학자들의 결론에 따르면 마가복음 작성 연대는 조금도 정확히 판단 내릴 수 없으며, 대체로 주후 50년에서 70년 사이의 어느 시간에 놓아야 합니다. 아마도 최선은 마가복음이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어느 것이든 결론이 나지 않는 듯이 보이며, 복음서와 주후 1세기 역사 전반에 관한 복잡다단한 견해를 기본으로 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석의 목적에 맞도록 하려면 마가복음이 주후 50년에서 75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해야 하겠습니다. 이보다 더 정확히 추정할 정도로 설득력있는 근거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누구이며 언제 쓰였는지를 직접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은 저작 목적 또한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목적에 대한 결론 역시 이 책에 담긴 내용을 면밀히 살핀 연구를 바탕으로만 내릴 수 있습니다. (눅1:1~4와 요20:30~31)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학자들은 저자가 이 복음서를 기록한 까닭을 밝혀내고자 마가복음에서 되풀이되는 사안들과 분량을 크게 차지하는 일들을 살펴봄으로써 책의 주제와 강조점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학문 활동을 흔히 '편집 비평'이라고 일컬으며, 이 활동이 밟는 절차의 정확한 성격에 따라서 '문학비평'이라고 부를 때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마가복음을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여 연구하기도 하는데, 같은 사건이 마가복음과 하나 이상의 다른 복음서에 공히 기록되어 있으면 비교 연구를 상당히 세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에는 복음서 대조표가 매우 도움이 됩니다. 알맞은 도구 가운데 하나가 스록모턴의 <복음서 평행 본문>으로, 처음 세(공관)복음서의 RSV 본문을 이용한 대조표입니다. 이 주석의 본론에서도 그와 같은 비교를 상세하게 많이 하겠지만, 여기서는 마가복음의 주요 강조검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강조하는 듯이 보이는 내용에서 저자가 글을 쓴 목적이나 계기를 늘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저자의 강조점과 주제에 관한 연구는 우리가 들여다볼 글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면에서 그 나름의 보람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와 강조점
사복음서 각각이 예수님에 관한 책이지만 그분에 대해 각기 특별한 내용을 말하므로, 마가복음의 주제와 강조점을 소개하는 내용은 특별히 이 복음서가 예수님에 고나해 강조하듯이 보이는 서술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금세 분명해지는 사실은 마가복음이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묘사한다는 겁니다. 첫 문장부터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에 어울리게 이 책은 예수님의 배경 관련 정보는 조각조각 부수적으로만 제공합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정보에 따르면,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고(1:9),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인데 남자 형제 넷에다가 몇 명인지 밝혀지지 않은 누이들이 있으며(6:1~3), 세례 요한의 사역에 호의적으로 반응하여 그의 손에 세례를 받았습니다.(1:9) 사실상 이것이 전부입니다.
정말로 만일 복음서가 마가복음밖에 없다면, 예수님의 지상 출생은 엄청난 불가사의였을 겁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탄생 내러티브와 비교할 때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해 상대적으로 침묵하는 것은 흔히 마가복음의 저자가 그와 같은 전승을 하나도 몰랐음을 시사한다고 이해됩니다. 그렇지만 이 견해와 반대 견해 모두 똑같이 그럴듯합니다. 저자가 탄생과 어린 시절의 전승을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자기 책에 그 내용을 담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완벽한 논거를 분명히 알지못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마가복음은 성인 예수님의 사역을 다루는 책이며 저자는 자신이 그분의 사역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 정도라면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식을 묘사하기에 충분하다고 간주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배경에 관한 정보 결여는 더 넓게 보면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라는 인물에 감도는 신비로운 분위긱와 잘 어울립니다. 책의 첫 문장에서 독자에게 예수님의 종교적 의의를 제시하기는 하지만, 저자는 시종일관 예수님을 만난 인물들이 그분을 이해하는 데 심각한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신비'와 '비밀'이라는 이러한 주제는 마가복음 연구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특징이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가복음이 '메시아 비밀', 곧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비밀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한 사람들에게는 가려졌고, 교회의 설교에서만 드러난다고 말해 왔습니다. 예수님이 비밀 유지를 계속 강조하시는 내용이 복음서 중에서도 마가복음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온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찬사를 보내는 귀신들을 조용히 시키셨고,(1:25, 34) 병이 나은 사람들에게 그 일을 퍼뜨리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며(1:44, 5:43) 제자들에게는 자신이 영광을 드러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8:27~30, 9:2~9) 특정 단락을 논하면서 보겠지만, 예수님의 비밀이라는 마가복음의 주제는 아마도 더욱 광범위하게 강조되는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 및 인격과 관련된 비밀의 일부분으로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비밀 유지라는 이 주제가 어느 정도로 예수님 자신의 행동에서 나왔으며 어느 정도로 마가나 마가의 전승에서 유래한 편집상의 강조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관련된 비밀 강조의 상당 부분이 이 책의 저자 때문에 생겼다는 견해 쪽으로 마음이 기웁니다. 비밀 유지라는 주제는 예수님이 정치적 열망이 담긴 새로운 운동의 메시아적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다는 억측을 방지하고자 하신 일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왕이라고 주장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이 로마인들에게 십자가형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5:26), 그분이 메시아되심을 주장하여 실제로 희망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셨음을 보여 줍니다.
비밀이라는 주제가 마가복음에서 그토록 두드러지는 이유에 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나는 그 현저함을 마가복음의 더 큰 주제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가복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 가운데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이 예수님의 핵심 사역이었고 다른 모든 사역은 -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등의 여러 기적조차도 - 예수님의 진정한 본성과 의미를 불완전하게 보여 주는 단서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아무도 대놓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라고 칭송하며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는 정보를 모르고 환호한다면 그것은 일이며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사람들과 제자들이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훨씬 더 많이) 당황스럽고 어리석기까지 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다른 이들의 대속물로 죽으심으로써(10:45)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예수님과 그 사역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비밀, 신비, 무리와 제자들의 우둔함을 강조하는 데는 신학적으로 심오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예수님은 대단한 권위로 행동하시며(1:27, 2:10, 28, 7:19, 11:15~19, 27~33) 심지어 죄를 용서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만 합당한 일까지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연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시며(4:35~41, 6:45~52) 귀신들에게 인정을 받으시고(1:24, 5:7), 하나님께 직접 인정을 받기도 하십니다.(1:11, 9:7) 이 모두에서 확고하게 나타나는 대로 마가복음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었으며 가장 위대한 사역이 낮아짐과 죽음인 그 인물이 사실은 예언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메시아, 곧 어느 범주에나 속하는 단순한 사람 이상이시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바로 이와 같은 관심 때문에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과 귀신 세력 간의 충돌을 강조합니다.(그리고 다른 복음서보다 더 강조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악한 권세들이 사람에게 휘두르는 지배력을 파괴하십니다. 이 직접 충돌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맞서는 권세들을 쫓아내는 분이자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책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에 관한 책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은 십작가 예수님의 핵심 사역일 뿐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모범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나중에 본문을 주석하며 살펴보겠지만, 특히 마가복음 8~10장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올 고난을 자기 본연의 임무로 설명하시면서 제자도는 자신의 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정의하신다(8:27~38) 마가는 복음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중심으로 한다고 강조하기 원했을 뿐 아니라, 제자도란 쉽고도 승리만을 거두는 삶이라는 개념을 바로잡기 원했습니다. 이 책에는 복음에 대한 심오한 신학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심오한 이해도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주요 강조점을 간단히 살펴보았으며, 이러한 주제들과 그 밖의 주제들은 실제 본문을 고찰하면서 더 충분히 논의하겠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기 전에, 독자가 마가의 집필 내용을 따라갈 준비를 더 잘하도록 문체상의 특징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유용하겠습니다.
마가의 문체
기본부터 시작하자면, 마가의 설명은 심하게 이야기체여서 동작이 빠르게 전개된다는 인상을 줍니다. 마가의 헬라어는 간결하고 투박한 문체로, '그리고'라는 단어로 이어진 단문을 많이 사용합니다. 마가복음과 다른 복음서들에 나오는 사건을 비교해 보면, 마가의 설명이 장황하면서도 구성은 덜 탄탄해 보인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뛰어난 솜씨와 저작 의도를 보여 주는 특정 기술을 실제로 이용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마가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는데 주로 애둘러서 암시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독자들이 그렇게 해도 알아차릴 정도로 구약을 충분히 잘 안다고 예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와 그의 독자들에게 구약은 성경이자 예수님이 하실 사역의 예언적 전조였습니다. 마가가 이갸기 하나를 다른 이야기 속에 감싸 넣는 식으로 두 이야기를 연결하는 경우가 몇 번 있는데, 이는 각각이 서로를 조명하는 역할을 하도록 이용하려는 의도입니다. 마가는 일관되게 주장하기 위해 이야기들을 한테 묶기도 하며(2:1~3:6에 나오는 갈등 이야기), 때로는 8~10장을 다룰 때 보여 주는 것처럼 자료를 대량으로 포함시킵니다.
무엇보다도 마가복음 구절들을 다른 복음서의 병행 구절과 비교해 보면, 저자가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전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마가는 신학적인 의도로 글을 썼으며 자기가 가진 자료들이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도록 작업했습니다. 마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인지하려면 독자는 본문을 면밀히 읽어야 하고, 그것에 합당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주석을 통해 독자들이 이러한 노력을 하는 데 필요한 도움과 격려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개관
1. 서론
모든 일은 그 근거를 지니고 있다. 세상 만사 근원이나 근거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우리 성도들이 귀하게 여기는 신약성경 중 복음서, 즉 예수그리스도의 전기도 마찬가지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들도 그 근거가 있다.
교회는 옛날 마가복음을 다른 세 복음서의 '원조'로 인정해 왔다.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기록한 최고의 복음서가 바로 마가복음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그 분량은 적지만 그 내용은 힘이 넘치고 신선하다.
2. 저자 문제
본 서의 저자가 베드로로의 수제자이며 사도 바나바의 생질인 '요한 마가'라는 사실은 초대교회 때부터 의심 없이 인정되었다. 소아시아 교회감독이었던 파피아스(Papias A.D. 140년)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마가복음이 마가가 베드로의 교훈을 토대로 그 복음서를 기록했으며, 그 기록은 아주 정확한 것이라는 언급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주후 150년경의 순교자 저스틴(Justine), 185년경의 이레나이우스(Irenaeus)도 마가가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였으며, 그의 교훈과 증언을 토대로 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증언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며,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탄생지인 마가 다락방의 집의 유복한 청년이었던 요한 마가가 본 서의 저자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 기록 연대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본 서는 복음서 중 가장 일찍 기록된 책이다. 따라서 그 시점도 주후 50년경으로 잡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주후 6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그 복음서들이 마가복음을 근거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복 복음서 기록 연대의 배경이 된다. 그러므로 본 복음서의 기록 연대가 주후 50년경으로 추정하는 것에는 보수적 신학자나 자유주의적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다.
4. 저작 장소
본 서가 기록된 장소는 대체로 '로마'라고 인정하고 있다. 본 서가 기록될 시절에 마가는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에 의해 로마로 가게 되었으며(딤후4:11),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서 활동했다(벤전5:13). 초대교부들도 본 서를 마가가 로마에서 기록했다고 증언했는데, 이레나이우스와 클레멘트가 대표적이다. 그리므로 마가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방인 신자를 위해 제국의 심장부 로마에서 본 서를 기록한 것이다.
5. 배경과 동기
본 서의 기록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본 서의 기록 동기와 목적을 파악하는데 중요하다. 장시 유대 본토는 거의 약탈에 가까운 로마 제국의 세금 정책으로 인해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방인 교회들도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해 환난과 순교를 당하고 있었다. 이에 사도들은 점차 사라져 갔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과 교훈을 실제로 체험한 성도들도 희귀해져 간 것이다. 그러므로 내·외적으로 역경에 처한 교회에 신앙적 격려를 해줘야 했으며,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훈을 기록하여 남겨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본 서는 하나님 아들이신 메시야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고난받는 삶을 사셨으며 끝내는 하나님의 의와 권능으로 승리하사 부활 승천하게 외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할 목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특징
1) 이방인(로마) 성도를 위한 복음서
본서가 유대 본토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특히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록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본 서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한다. 본 서에는 유독 라틴어에서 출처된 언어가 많다. 그리고 본 서만이 로마 교회 성도인 루포를 언급한다(막15:21). 그리고 핍박과 순교에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당시 로마 교회가 당면하고 있던 고난적 정황과 부합된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대교의 풍습과 지리를 따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막1:5 막7:3,4,11).
2) 사역과 행동 중심의 복음서
본 서에는 '즉시, 그리고'라는 말이 50회 이상 나타나며 그리스도 예수의 행동과 사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본 서에 예수의 비유가 4회만 언급된 것을 보더라도 본 서가 예수의 행동과 사역 중심의 복음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색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는 라틴 계열 성도들의 취향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3) 사실적인 묘사의 복음서
본 서에는 약 150여 회나 역사적 현재 용법이 나타난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 일어나고 있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본 서의 특징이다.
어떤 신학자는 본 복음서를 '정열의 삶의 복음서'라고 칭한다. 예수와 그 전도단이 음식 먹을 틈도 없이 사역했다는 사실을 두 번씩이나 언급한 것은 본 복음서밖에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7. 내용 개관
Ⅰ. 종의 출현(1-3장)
1. 종의 출현(1:1-13) 2. 사역의 시작(1:14-2:12) 3. 대적의 시작(2:13-3:35)
Ⅱ. 종의 사랑과 사역(4-7장)
1. 사랑의 가르침(4:1-34) 2. 사랑의 사역들(4:35-7:37)
Ⅲ. 종의 가르침(8-10장)
1. 대적자에 대한 가르침(8:1-26) 2. 제자에 대한 가르침(8:27-10:52)
Ⅳ. 종의 배척(11-15장)
1. 예루살렘 입성(11:1-26) 2. 배척당하는 종(11:27-15:47)
Ⅴ. 종의 승리(16장)
1. 종의 부활(16:1-18) 2. 종의 승천(16:19,20) |
[연구1] 종의 출현(1장-3장)
마가복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가를 보여 준다. 당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힘 없이 죽은 사람은 큰 죄인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서의 1장 처음부터 저자는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증거들과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 권위를 보여 주고 있다. 막2:1-3:6에서는 유대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승리하시고 막3:7 이하에서는 열두 제자를 새로운 지도자들로 세우신다.
1. 예수님의 신적신분과 전능하심(막1장)
저자는 십자가에 못박혀 처절하게 죽으신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원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누구에 의해서 증거되었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1) 예수님의 신적신분
복음이란 원래 황제의 어명이나 황제의 행차에 대한 소식을 말했다. 그러나 저자는 가이사가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참으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황제이심을 선포한다. 복음은 바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는 데서 시작한다. 이 진리는 구약에 예언되었고 당시 신적 권위의 회복자 세례 요한에 의해 증거되었으며,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하나님에 의해서 친히 증거되었다. 심지어 사단과 들짐승과 천사들에 의해서까지 증거되었다.
2) 예수님의 신적능력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구원자가 될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 신분 때문이다. 그의 신적 신분은 제자들을 부르는 명령과 그들의 즉각적 순종,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의 말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며 그외 많은 치유와 축귀들, 특히 그런 능력을 통해 많은 무리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치유 불가능한 문둥병자를 고침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 신분과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다.
2. 죄를 용서하고 안식일을 주관하는 권세(막2:1-3:6)
앞 문단에서의 병자를 치유하고 축귀하신 신적 능력은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역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신적 능력을 보여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어떻게 확인시켜 주셨는가?
1) 죄를 용서하는 신적권세와 죄인의 친구되심
막2:10의 '인자'는 단7:13 이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종말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실 것이 예언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용서하는 신적 권세를 지니셨다. 그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중풍병까지도 고쳐 주셨다. 그리고 죄용서받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 그들의 완전한 도덕적·사회적 회복까지 시도하신다.
2) 형식과 의식을 파괴하고 실체를 보여 주심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는 것은 아직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 혼인 잔치의 신랑이심을 증거하고 더 이상 금식하지 말고 메시야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즐길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안식일날 메시야 시대의 풍성함과 강건함을 보여 주어야 하므로 배고픈 상태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고, 손마른 사람같이 병든 자들이 있어서도 안됨을 강조하고 있다.
3. 열둘을 세우심과 용서받지 못할 죄(막3:7-12)
이제 예수님이 치유하고 축귀하는 메시야적 능력은 많은 무리들에게 베풀어져야 했다. 예수의 메시야적 능력은 어디에 전해졌는가? 많은 무리들에게 예수님의 능력은 어떻게 베풀어졌는가?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무슨 죄를 범하는 것인가?
1) 예수님의 인자와 열두 사도 임명
갈릴리의 큰 무리와 유대 예루살렘, 이두매, 두로, 시돈 등의 허다한 무리들이 몰려드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매우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이 많은 무리를 치유하고 가르칠 열두 사도들을 세움이 매우 절실하게 되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어 그의 가르침을 받아 그대로 살아야 한다. 둘째, 여기서 전도할 내용을 믿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받아야 한다.
2) 불신 방해자들을 물리치심
예수님의 치유와 축귀 그리고 그것이 함축하는 죄용서의 사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게 되었다. 심지어 친척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당시 신학자들인 서기관들은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의 능력의 참근원은 귀신이라고 성령의 사역을 훼방한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 어떻게 사단의 사역일 수 있느냐고 반박하고 자신의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고 경고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으신 것은 믿음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마가복음은 이 걸림돌을 극복하도록 돕는다. 예수님은 죽기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능력을 행하셨으며, 특히 죄를 용서하는 신적 권세를 가지셨고, 열두 제자들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백성을 창조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음이 암시된다. 믿는 성도들은 자주 고난을 당한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려는 자는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연구2] 종의 사랑(4장-7장)
예수님의 신적 권세는 큰 무리들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소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확장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적 말씀과 행동들을 통해 부정한 마음을 깨끗케 하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을 이어가도록 훈련받고 있다.
1. 하나님 나라의 비밀(막4:1-5:43)
본문은 큰 무리가 예수님의 치유와 축귀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모였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친 내용이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는 왜 비유로만 말씀하셨나? 제자들에게는 왜 비유를 해석해 주셨나?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누가 시작했는가?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증거물은 무엇인가?
1) 하나님 나라 비유와 그 해석
예수님은 무리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만 말씀하셨다. 농부가 씨앗을 뿌린다고 해서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거나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거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들은 열매맺지 못하고 좋은 땅에 떨어져야만 결실할 수 있다. 땅이 좋을수록 더욱 많이 결실할 것이다. 무리들은 이 비유를 듣고 좋은 땅이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할 정도로 헌신된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세상에서의 어떠한 유혹도 이겨내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길 부탁하신다. 제자들 안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작게 시작한 하나님 나라는 머지않아 완성 될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오래참고 낙심하지 않음이 필요하다.
2)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큰 광풍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 등 자연까지 지배하는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은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했다. 예수님은 영적 존재들에 의해서까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특히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로 확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가까이 있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능력은 열두 해 된 혈루병 걸린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낫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고치기까지 한다.
2. 배척하는 무리와 제자들의 사역(막6:1-56)
본문은 예수께서는 비웃고 배척하는 무리들 앞에서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하여 사역을 계속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배척하고 믿지 않는 무리들 앞에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배척하는 자들을 떠나신 후 특별히 관심을 두신 사역은 무엇인가? 제자들은 앞으로 어떤 위험적 기적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만을 절대 믿고 살아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 열두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함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과 권세 있는 가르침들은 때때로 무리들의 배척을 받기도 했다. 특별히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다. 예수님은 믿지 않고 배척하는 자들에게 아무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중에 소수의 병인을 고치며 표적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많은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그 사역을 잇게 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둘씩 훈련시키셨다. 제자들은 회개하라 전파하며 예수의 소문은 헤롯 왕에게까지 들리게 되었다.
2) 기적을 통해 제자들을 훈련시킴
예수님은 복음 사역에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하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은 큰 무리를 친히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메시야적 능력을 보여 주시면서 앞으로 제자들이 해야할 사명과 능력을 암시하셨다. 그리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그치게 하는 신적 능력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친히 가르치고 치유하기도 하셨고, 제자들을 통하여 행하기도 하셨다.
3. 부정한 자들을 깨끗케 하심(막7:1-37)
본문은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과 함께 무엇이 부정한가에 대해 논쟁하시고 정말 부정한 자들로 여겨졌던 자들을 고쳐 주시는 내용이다. 유대인들은 무엇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부정한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예수님은 부정한 자들을 어떻게 하셨는가?
1) 손을 씻기보다 마음을 씻어야 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형적이고 의식적인 부정에 집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대표적인 외식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무리들을 가르치셨고, 나중에 다시 제자들에게 마음의 문제를 더 깊이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율법의 참의미를 가르치심으로 유대 지도자들을 능가하고 구약 율법을 능가하는 권위를 보이신 것이다.
2) 부정한 자들을 깨끗케 하심
유대인들은 율법을 왜곡한 장로의 유전을 따라 예수님과 논쟁하는 한편 부정한 자들은 간절하게 깨끗해지길 간구한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딸을 위해 간절히 간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딸의 더러움을 고침 받는다. 가까이 있어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고 멀리서도 치유받는 자들이 있다.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 하는 제자들의 삶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날, 즉 죄로 가득 찬 이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배척하는 무리들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복음은 손을 씻는 등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서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요구한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연구3] 종의 가르침(8장-10장)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치유와 축귀 등 메시야적 표적을 보이셨다. 이제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받으신다. 예수님은 정치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평생 모든 백성을 섬기고 그들을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죽으셔야 했다. 참된 제자들은 모든 사람의 섬기는 종이 되어 그 길을 걸어야 한다.
1. 예수님의 메시야적 표적과 그 반응들(막8:1-26)
본문은 예수께서 7개의 떡덩어리와 생선 두어 마리로 4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무리들에게 베푸셨으나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는 내용이다. 4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무리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가?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어떤 깨달음을 주는가?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1) 4천명을 먹이신 의의
예수님은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진하지 않길 원하셨다. 4천 명을 먹이신 것은 출애굽할 때의 만나를 연상케 함으로 예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메시야이심과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무한한 사랑을 무리들에게 깨닫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서 앞으로 그들이 감당해야할 사명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불신앙으로 인해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명을 깨닫게 해주려고 무리 앞에서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바리새인들도 이 기적의 의의를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만을 간구한다.
2)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도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떡이 없음에만 관심을 두고 예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지 말 것을 경계하시고 제자들에게 5천명을 먹이신 기적과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상기시키며 예수님만을 의지할 것을 교훈해 주신다. 또한 특별히 소경을 보게 하심으로 제자들도 영적눈을 떠서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확실히 믿을 것을 촉구하신다.
2. 예수님의 신분과 사명(막8:27-9:32)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신앙고백을 받고 예수님의 사명을 가르치신 내용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제자들은 왜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가?
1)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하나님 나라 경험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백을 묵인하시며 자신의 사명, 즉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라 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하는 제자의 사명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산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게 된다.
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유대인이 생각하는 정치적 그리스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 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신앙과 무능함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농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참된 믿음은 기도를 통해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을 알게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능력의 기도보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깨닫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을 암시하셨다.
3. 참된 제자가 되려면(막9:33-10:52)
본문은 누가 참된 제자인가를 구체적인 실례 속에서 가르치신 후 마지막 세번째 예수님의 사명과 제자들의 사명을 가르치시는 내용이다. 누가 참된 제자들인가? 제자들은 무엇에 사실을 가지고 있나? 유대 지도자들과 무리들은 무엇에 사심을 가지고 있나?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제시하는가?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명은 무엇인가? 제자들의 사명은 무엇인가?
1) 누가 참된 제자인가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토론하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그 사명을 오해한 결과이다. 참된 제자는 뭇사람을 섬기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기까지 섬겨야 한다. 참된 제자는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고 서로 화목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예수님을 시험했으나 예수님은 모세 이전의 창조법에 따라 그들의 인도인 간음을 금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어린아이들의 태도는 잘못된 정치적 메시야 사상, 즉 사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대조를 보인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보다도 재물에 우선 순위를 둠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할 제자도를 가르치신다.
2)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명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마지막으로 세번째 자신의 메시야적 사명과 그 운명을 열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는 고난을 당하고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이 마지막 예언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와 요한은 참된 제자로서 행하지 않고 허영에 불타 있다. 결국 나머지 열제자들이 분을 일으키자 예수님은 다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참된 제자임을 가르치시고 자신을 그 모범으로 제시하신다. 또한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그들의 영적 눈이 떠지기를 원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표적들을 많이 경험했음에도 바리세인들과 다름없이 백성들을 먹이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옳지만 스스로 고난의 길에 동참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참된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를 믿도록 하는데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연구4] 종의 배척(11장-13장)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무리들에게 공적으로 계시하셨다. 그리고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은 먼저 성전의 부패를 지적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성전과 이스라엘 그리고 천지의 멸망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예수의 그런 예언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인자의 영광과 심판의 날을 준비하기 위해 복음 전파와 그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
1. 성전의 기능을 대치하시는 예수님(막11:1-26)
본문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성전의 본질적 기능인 죄용서를 회복하는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기록한 내용이다. 예수님은 어떤 메시야이신가? 이스라엘은 먼저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가? 이스라엘의 죄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은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1) 입성하여 성전의 멸망을 경고하심
예수님은 참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무리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다윗의 나라' 등으로 예수님의 참된 메시야 되신 신분을 인정하고 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의 메시야적 사명을 암시하셨다. 그는 정치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겸손히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죄의 원천이 되는 성전을 모두 둘러보시고 다음날에는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기 위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2) 성전의 본질적 기능
전날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예수님은 이제 성전의 구체적인 부패 상황들을 강도의 굴혈로 요약하신 후 성전의 본질적 기능처럼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신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메시야적 행위를 막고 오히려 죽이려고 모의한다. 예수님은 다음 날 아침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고 특히 성전의 본질적 기능이 믿음의 기도를 강조하면서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과 직결됨을 가르친다.
2. 유대지도자들을 대치하는 예수님의 권세(막11:37-12:44)
본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또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권세를 보여줌으로써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수정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무슨 권세로 성전을 소란케 하셨다.? 유대 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체포할 수 없었나?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을 교정해 주신 내용은 무엇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산헤드린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무슨 권세로 성전을 소란케 하는 행동을 했는지를 질문한다. 예수님은 당시 참선지자로 여겨졌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 것을 상기시키고 약한 농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 자신의 그 동안의 모든 선지자들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다시 증거하였다.
2) 유대지도자들과의 논쟁과 참된 제자도 제시
유대 지도자들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몇 사람을 파송하여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질문한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스스로 분별하여 행동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진퇴양난의 시험을 통과하신다. 또한 사두개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기초하여 부활이 없음을 주장할 때도 모세의 율법에 부활이 있음을 증거해 보이셨다. 그리고 첫 계명을 묻는 서기관에게 첫 계명과 둘째 계명이 밀접히 연결된 것을 깨닫게 하셨다. 이러한 유대 지도자들의 공격은 예수님의 질문 공세를 통해 전환된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단지 다윗의 자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시고 다윗조차도 그리스도를 주(주님)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서기관들의 외식이 과부의 가산을 착취하는 데까지 이르게 됨을 고발하고 구차한 중에서 최선을 다하는 참된 제자도를 가르치신다.
3. 성전파괴와 종말론적 제자도(막13:1-27)
본문은 예수께서 성전 파괴가 다가올 종말의 시각이며 인자의 오심이 종말의 절정이 될 것이므로 제자들에게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제자들은 성전 건물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보여 주었나? 종말이 가까 올 때 제자들은 어떤 미혹을 당하게 되는가? 그리고 제자들은 어떻게 종말을 준비해야 하는가? 종말의 절정은 무엇인가?
1) 성전파괴와 종말론적 제자도
제자들은 성전 안에서의 예수님의 행위와 가르침이 성전 파괴와 연관된 것을 알지 못하고 성전 건물의 웅장함에 관심을 가진다. 예수님은 마침내 성전 파괴를 예언하신다. 특별히 수제자들이 성전 파괴의 때와 정조에 대하여 질문하자 예수님은 일반적인 종말의 징조들을 가르치면서 먼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고취시킨다. 그리고 종말을 준비하며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다.
2) 인자의 재림과 종말론적 제자도
종말의 절정은 전무후무한 환난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택한 백성이 땅 끝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일 것이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 수 있듯이 여러가지 종말의 징조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온 줄 알고 항상 깨어 각각 맡겨진 사무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성전은 죄용서를 선언하는 기능을 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은 멸망할 것을 말씀하시며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함으로 죄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성전이 파괴된 후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말한 것으로 인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인자로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연구4] 종의 승리(14장-16장)
죄인들이 예수님을 강제로 체포했거나 죽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친히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죽음인 것을 밝히셨다. 예수님은 심문과 고난, 죽음은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을 보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에서 고난당하고 살 수밖에 없는 성도의 유일한 소망이셨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복음을 전파하며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된다
1. 대속의 죽음을 준비하심과 제자들의 태도(막14:1-52)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인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를 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나? 예수님은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무엇의 상징으로 말씀하셨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셨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가?
1) 대속의 죽음
예수님이 성전을 떠난 후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것을 계획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매우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다. 유월절날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 떡과 포도주를 통해 자신의 죽음이 언약을 맺는 수단으로 대속의 죽음인것을 설명하셨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여는 방법이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잇는 것은 그가 죽음을 통해 먼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고 그곳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이다.
2) 기도로 준비 못한 제자들의 도망
예수님은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셔서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언하신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든 제자들은 부인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겟세마네에서 필사적으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기도하지는 않는다. 결국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유대인에게 잡혀가지만 이 사실은 이미 예언된 일이었으므로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을 내어 주신 것에 불과하다.
2. 심문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음심(막14:53-15:47)
본문은 예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심문당하지만 그 고난과 죽음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되신 권세가 강조되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왜 유대인에게 심문당하고 고난당하셨나? 예수님은 왜 이방인에게 심문당하고 고난당하셨나?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장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하는 구절은 어디인가?
1)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심문당하심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심문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집에 모인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 마침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한 것을 근거로 삼기로 정한다. 이 주장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정치적 메시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결정되었으며 군병들에게 고난을 당한다. 예수님이 이방인에게 고난받고 죽으신 것은 그들의 죄인 됨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덧입을 수 있음도 암시해 준다.
2)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죽음과 장사됨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여 죽임을 다하셨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짐으로 예수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임을 암시한다. 또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말들은 사실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말씀들이 대언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크게 소리지르시고 운명하심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장엄한 죽음을 암시한다. 존귀한 공횡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싼 후 바위 속에 판 무덤에 장사한 것은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 것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암시한다.
3. 부활하심과 제자들의 사명(막16장)
본문은 부활의 현장이 먼저 신실한 여인들에게 확인된 사실과 부활의 복음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꾸짖으신 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맡기시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 현장은 누구에게 가장 먼저 목격되었나? 제자들은 부활의 복음을 왜 믿지 않았나?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셨나? 예수님은 부활을 목격한 자들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는가? 예수님은 언제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1)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
예수님의 부활하심도 이미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부활의 현장은 신실한 여인들까지도 심히 놀라게 한다. 이 부활의 사실은 제자들까지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부활이 우리 복음의 핵심이 된다. 사망을 이기신 예수의 권세를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잃는 자만이 이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2)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함께하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음식을 먹이시며 그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고 바로 이 부활의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이 사명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복음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하늘에 올라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곳에 항상 함께 역사하신다.
예수님은 명하시지 않았다. 그의 흘린 피는 우리를 대신하여 흘리신 피요, 우리가 죄용서받은 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는 언약의 피였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현장은 비참함만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대함이 서려 있었다. 특히 그의 부활하심은 계속 불신하고 배신한 제자들까지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쁜소식이 되었다. 우리는 십자가 뒤에 부활과 승천의 영광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고 즐겁고 담대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는 참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cafe.daum.net/scdnc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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