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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심상범

by 은총가득 2020. 10. 28.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뱃세다 소경의 두단계 개안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벳새다 소경의 두 단계 개안(8:22-26)

 

글쓴이 : 심상법 교수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앞 단락에서 살펴본 대로 제자들은 반복된 많은 이적들을 보았음에도 그것의 진정한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8:2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는 여기서 철저하게 눈 먼(보지 못함, 깨닫지 못함, 알지 못함, 둔함, 기억치 못함의 표현들을 유의하라)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상황 가운데 마가는 지금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이 사건(8:22-26)을 통해서 제자들의 영적 눈(깨달음)이 점진적으로(2 단계로) 열려지는 것을 제시한다.

 

8:22-26절의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 기사는 공관복음서들 중에 오직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특이한 이적사건이다. 이 기사에 묘사된 대로 예수님은 한 소경을 두 단계로 치유하셨다.



마가복음에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여리고에서 거지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신 사건(10:46-52)과 더불어 두 번 기술되는데 이것은 마가 특유의 ?이중적 기술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소경을 고치신 사건 외에도 마가복음에서의 이중적 기술은 ?먹이심?의 이적 기사가 두 번 나오며 심문 기사도 베드로의 심문과 예수님의 심문이 샌드위치 기법을 통해 두 번 나온다. 마가 특유의 ?이중적 기술?에 대한 자세한 예들과 그것의 논의에 대해서는 Nierynck의 을 보라). 특별히 이 이적사건은 우리가 앞으로 관찰하는 대로 전후의 단락(혹은 마가복음 전체)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기술된 것으로 마가의 특별한 의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마가복음을 연구하는 학자들(Johnson; Best; Uuelich; Van Iersel; Stock; 등등)은 이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 이적기사가 복음서 내에서 갖는 구조적 의미 즉 마가복음 내에서의 그것의 기능과 역할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 구조적-문학적 이해

 

제자들의 영적 무지와 따름(following)의 실패는 마가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중심된 논의가 되어왔다.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의 ?따르라?(follow me)는 초기의 명령에 어느 정도 잘 순종했다 할지라도(1:16-20; 2:14-15; 참고. 10:28), 제자들은 계속되는 예수님의 많은 이적들을 보고도 그것들의 진정한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4:10, 13, 41; 6:37, 52; 7:17; 8:4, 14-21). 특히 마가복음의 바다(항해)기사들(sea[-voyage] narratives)은 제자들의 이러한 무지와 불신앙과 두려움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4:40; 6:50-52; 8:17-21). 제자들은 바다(항해)의 상황에만 들어가면 무지와 불신앙과 두려움의 모습이 드러났고 여기에 예수님의 책망은 항상 따가웠다.

불신앙으로 인해 무지와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의 이러한 바다 항해의 장면들은 아마도 마가의 공동체(청중)가 직면한 환난과 수난 중의 복음전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지 모른다(Malbon 1984, 1993). 그 중에 마지막 바다(항해)기사 막 8:13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22?벳새다에 이르매?, 14(?<>?을 유의하라)과 막 8:14-21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가 극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지적은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이적들, 특별히 ?급식이적?에 대해 제자들의 몰이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의 모습은 철저하게 눈먼 소경의 모습과 같았다. 8:17-21의 예수님의 혹독한 책망은 이점을 잘 반영한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예수님의 반복된 책망들,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2), 알지 못하고 둔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망을 만나게 된다. 결국 제자들은 여기까지 따라 오면서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눈먼 소경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고 본문은 암시한다.

 

제자들의 이러한 눈먼 모습 가운데 이제 마가는 소경을 두 단계로 고친 벳새다의 특이한 이적사건을 소개함으로써 제자들의 영적 개안이 점진적으로 되어짐을 암시하고 있다(Guelich 1989:430 ff). , 마가는 지금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이 사건(8:22-26)을 통해서 제자들의 영적 눈(깨달음=제자도)이 점진적으로(두 단계로) 열리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그 다음 기사(8:27-9:1, 특히 27-33)인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질문과 제자들의 인식과 관련하여 잘 제시된다. 특별히 이 이적사건은 앞으로 나타나는 마가복음의 중심 단락인 ?? 단락(8:27-10:52)의 서론적 예시(Johnson)나 혹은 앞 단락과 중심 단락을 잇는 연결고리(Van Iersel)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마가복음 전체의 메시지에 쐐기를 박는 중심(Stock)이 되기도 한다.

 

마가복음에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8:22-26; 10:46-52)??(eye)에 대한 언급(8:18), 그리고 ?본다?(see)는 단어(4:12; 8:18; 8:23, 24[2x], 25; 9:1; 9:9; 10:51, 52; 15:39)의 언급은 마가복음에서 자주 언급되는 귀(ear)와 들음(hear), 귀머거리를 고치신 이적들과 같이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인 ?깨달음?, ?제자도?와 관련된 일종의 상징적 의미 군들로 나타난다(Shim 1994:109-110). 이들 사건들과 단어들은 예수님의 전 사역 특히 전반부의 이적 사역(1-8)과 후반부의 수난 사역(8-16)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이점에 대해 존슨( Jonhson 1979:379)?8:22-26에 나오는 두 단계의 치유 과정에 대한 묘사는 마가가 눈멂과 눈뜸의 주제를 잘 제시하기 위해 복음서의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복음서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해 주는 상징적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고 진술하였다(참고. Guelich 1989:431). , 두 단계로 소경을 고치신 이 사건은 마가복음의 전반부(주로 이적기사들)와 후반부(주로 수난기사)의 의미를 잘 연결(병합)해 주는 역할을 한다.

 

2. 장면 이해

 

1) 배경: ?벳새다에 이르매?(22)

 

6:45에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벳새다로 가도록 하신 주님의 의도가 이제야 이루어지게 된다. 사실 벳새다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한 항해의 목적지는 광풍으로 인해 게네사렛(6:53)에 도착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곳을 거쳐 두로 지경(7:24)과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다(7:31). 거기서 그들은 달마누다 지경으로 나아갔고(8:10), 또한 거기서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서(8:13) 마침내 목적지인 이방지역인 벳새다에 이르게 된다. 공관복음에서 이 벳새다는 고라신과 함께 예수님의 이적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의 장소로 언급되고 있다(11:21; 10:13). 아마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거기서 고치신 후에 그를 마을로 다시 돌려보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벳새다로 제자들을 보낸 항해기사는 무지와 둔함으로 끝맺고 있다(6:52). 결과적으로 이 항해는 광풍으로 인해 성공적으로 그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이적들을 보았지만 눈먼 소경처럼 그 모든 일들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8:17-21). 드디어 제자들을 가도록 한 그 목적지 벳새다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홀로 보낸 항해의 목적지인 바로 이 곳 벳새다는 어떤 의미를 가진 장소였을까? 이점에 있어서 독자는 ?과연 어떤 일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을 이 곳 벳새다로 가라고 하였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의 개안(開眼)을 암시하는 사건이 아닐까? 마침내 이들 눈먼 제자들은 이곳 벳새다에 이르렀고, 여기서 한 소경이 그의 소경된 상태에 대하여 고침(개안)을 받았다.

 

2) 인물들: 사람들, 소경,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

 

이 사건에 나오는 인물들로는 벳새다의 (마을)사람들과 한 소경(22), 그리고 이 곳에 도착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27)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장면)의 주된 참여자는 예수와 소경(사건은 이들 두 사람 간의 대화에 집중)이며 마을사람들과 제자들은 이 사건의 의미를 비추어주는 일종의 배경과 같다.

 

3) 장면분석

 

이 사건의 장면을 간단하게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면 1: 마을에서 사람들과 소경 그리고 예수님(22)

장면 2: 마을 밖에서 예수님과 소경(23-2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마을)에 이르렀을 때, 마을사람들이 한 소경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 고쳐주시기를 구한다(장면 1). 여기에 예수님은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특이한 방법으로(?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이 소경을 두 단계의 과정을 통해 치유하시는데(장면 2) 이 사건의 핵심은 두 단계의 치유와 함께 두 사람 간의 대화에 있다.

 

3. 주해

 

예수님은 지금 그 당시 이적을 베푸는 사람들(miracle workers)의 치유방법(?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을 택하여 이 소경을 고치심으로써 이 치유가 이적적 사건임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안수 후 특이하게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심으로써 그의 개안상태를 점검하셨다. 소경의 개안상태(단계)는 본문에 나타난 대로 첫 번째 안수 후 소경은 사람들을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불완전하게) 보았고 두 번째 안수 후에는 만물을 밝히 보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소경을 고치신 사건을 기술한 이 짧은 기사에서 ?본다?(βλεπω/?ραω)라는 단어가 6(23, 24[3], 25[2])이나 언급되고, 그리고 ??(ομμα/οφθαλμο?)이라는 단어가 2(23절과 25) 반복된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소경이 이적적으로 치유되었다는 사실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안의 상태와 그 치유단계에 이 이적사건의 의미를 집중하고 있다(이점에 있어서 두 번째 안수 후에야 소경이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언급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 은혜로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소경이 점진적으로 (특이하게) 개안되어짐을 보여줌으로써 소경과 같은 제자들의 (영적) 이해상태가 앞으로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짐을 암시해 준다(23절의 ?무엇이 보이느냐??의 질문과 29절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질문의 병행적 의미). 이점은 그 다음 단락에서의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해)을 통해 잘 알 수 있다(Matera 1989).

 

1) 성경에서 소경을 고치신 이적의 일반적 의미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눈먼 자를 고치신 이적사건이 복음서에 자주 언급되는데 여기서 소경은 죄로 말미암아 영적 눈이 멀게 된 인간을 상징한다. 이 영적 눈멂은 인간의 힘(교양과 지식)으로 치유될 수 없다. 오직 메시아가 오심으로 치유되는 메시아의 사역을 가리킨다(35:5-6).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미래를 참되게 보지 못한다. 아니 본다고 하여도 굽게, 왜곡되게 본다. 결국 성경에서 소경은 죄 아래 있는 삶, 흑암의 나라에 있는 인생을 가리킨다(참고. 1:13). 그러므로 눈먼 인생을 바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세상의 빛(9:5)이시고, 어두움의 그늘진 세상에 사는 흑암의 백성들에게 큰 빛(9:1; 4:16)이시다. 이와 같이 예수는 자신을 화목 제물로 주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의 구주이시며 목자가 되셨다. 그가 우리의 손을 붙잡고 영원한 천국으로 낙오 없이 데리고 가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길에 빛 된 성경(주의 말씀)이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119:105). 이와 같이 빛 되신 주님의 인도를 받고(주님과의 교제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따라 사는 자는 ?세상의 빛?이 된다(5:14; cf. 19:8; 119:9).

 

2) 마가복음에서의 의미: 두 단계의 점진적 개안(開眼)을 중심으로

 

소경 => 1 단계: 나무 같은 것들(사람들)이 걸어감을 봄(8:24)

2 단계: 만물을 밝히 봄(8:25)

 

두 단계의 치유는 예수님의 이적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한 번만에 안되니까 두 번 해서 되었다고 해서)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목적을 지닌 치유절차였다. 마가복음에서 이와 같은 두 단계의 시력회복은 제자들(마가의 독자들)이 두 단계로 신앙의 눈이 밝아짐(제자도를 의미)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제시된다{(Best 1986:3-4; Guelich 1989:430): 8:17-21(소경된 상태) ->8:27-38(반쯤 개안) -> 죽음과 부활 후에(확실히 앎)}.

이와 같은 두 단계의 개안은 특별히 마가복음에서 제자들(마가의 공동체[우리])의 영적 깨달음(제자도)의 두 단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은 베드로의 모습 가운데 잘 나타난다. 결국 두 단계의 개안은 마가의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제자도)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8:27-38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신분에 대한 이해와 제자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첫 번째 단계: 나무와 같은 것들이 걸어감

 

많은 이적 기사들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여기에 베드로는 놀랍게도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고 고백하였다. , 이제 베드로는 소경과 같은 영적 이해의 상태(8:17-21)에서 예수님의 이적 사역들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고백 후에 곧바로 주어진 인자의 고난에 대한 예언(8:31)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하였다(8:32. 여기서 ?간하매?는 원래 ?책망하다?[rebuke]의 의미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수난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반복되는 수난에 대한 예언들(8:31; 9:12, 31; 10:33-34, 45)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책망과 부인과 저주의 길을 간다. 그는 이적을 베푸는 능력의 그리스도는 이해하였지만 수난의 그리스도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주님에 관한 수난의 삶(8:31)과 주님(복음)을 따르는 수난의 삶(8:34-38)은 아직 베드로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교훈이었다. 이점은 마가의 공동체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의 모습이 아닐까?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이적에 대한 신앙은 어느 정도 바르게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수난에 대해서는, 수난의 주님에 대해서는, 수난의 삶에 대해서는 베드로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늘 넘어진다. 사실 이것은 마가의 청중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이적적 능력을 믿는 능력의 신앙이 중요하다. 그러나 섬김과 봉사의 길을 가는 수난의 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밝히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반쪽 진리를 안 것이라 할 수 있다.

 

- 두 번째 단계: 만물을 밝히 봄

 

마가복음에서 보는 대로 베드로는 메시아의 수난의 길에 대해서 ?책망/저주/부인?의 반응을 취하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9:9. 즉 베드로의 회복 후[14:28; 16:7]) 그는 수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수난예언이 있은 후 베드로는 주님을 책망하며 주님께 수난이 찾아온 후에는 주님을 멀찍이 따르고 부인, 저주한다.

 

결국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참다운 고백은 수난기사의 끝에서 한 이방인인 백부장을 통해 제시되어졌다(15:39). 여기서 백부장은 예수의 죽음(?그의 운명하심?)을 보고 ?예수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였다. 마가의 스토리 안에서 처음으로 수난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야 할 길임이 비로소 올바로 고백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능력과 함께 수난의 이해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 중에 마가복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1-8)이 왜 수난의 길을 가야 하는가?(8-16)가 마가의 메시지의 핵심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수난(가장 비참한 저주의 십자가)을 받으셨다?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이고 기독교의 능력이며 기독교의 권위로서 이것은 신자의 삶에 각인되어져야 할 메시지다(참고. 고전 1-4). 여기에 인생의 질문은 ?아니 어떻게??가 아니다(이 경우는 영원한 신비이다). ?왜 그렇게 하셨나??이다(이 경우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적적 능력의 주님만 찾는다. 물론 능력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이적적 능력의 주님을 만난 후에 수난의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 성숙(maturity)은 시련과 수난(suffering)을 통해 형성된다. 금의 제련도, 욥의 인내도, 아브라함의 신앙도, 모세의 지도력도, 다윗의 중보자로서의 언약적 왕 됨도, 시련을 통해, 수난을 통해 정금 같이 나온 것이다(11장의 신앙의 사람들의 모습은 시련[수난] 속에서 보여진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수난의 삶이 요구될 때(8:34-38) 과연 우리는 어떠한 자세와 삶을 취하는가?

 

신앙을 싸구려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축복과 번영의 길)로만 가려고 하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좁은 길(수난의 길)로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치유와 번영의 신학과 삶만 추구하지 봉사와 수난의 신학과 삶은 없다. 모두들 신비한 능력 가운데 비상, 비약하려고만 하지 수난의 길로 또박또박 걸어가려고 하지 않는다(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삶[22장의 아브라함]).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은사 모임, 치유 모임에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인다. 그러나 의의 길, 봉사의 길, 수난의 길, 곧 자기를 포기한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한다는 설교와 삶에는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돌아간다(참고. 10:21-22).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오는 때에는 다 도망치고 없었다.? 여기에는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도 주님의 수난 앞에 뿔뿔이 흩어졌고 도망쳤다.

 

마가복음의 스토리는 1-8장은 이적기사가 주로 나오고, 8-16장은 수난 기사가 주로 나온다. 이것을 통해 어떤 신학자들은 마가복음은 영광의 신학과 수난의 신학이 서로 상반된다고 주장하면서 마가의 공동체 내에는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는 이단의 무리들과 수난의 신학을 주장하는 바른 무리들이 있었는데 제자들의 모습은 전자의 무리를 보여주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모습)은 후자의 무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복음서 내의 두 단락의 상충된 모습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사실 두 단락이 상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8장에서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주님(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10:45) 무능하게 수난, 섬김의 길(잡혀 돌아가심)을 가신다(8-16)는 복음을 일관성 있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이니라?(8:34).

 

4. 나가는 말

 

결론적으로 마가복음을 통해 우리는 능력의 신앙과 더불어 수난의 신앙을 추구해야 함을 주지해야 한다. 복음전파는 강력한 능력으로 나타나야 하지만(6:1-13) 그러나 섬김과 수난 속에 의의 길로 걸어가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세례 요한의 삶을 보라[6:14-29]). 이것은 교회에 기고를 통한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와 함께 수난과 희생이 따르는 봉사전도(service evangelism)가 수반되어야 함을 말해 준다. 최근의 ?밥 퍼주는 사역?은 하나의 큰 귀감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여호와 라파(치유), 여호와 닛시(승리), 그리고 여호와 이레(준비)의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한다. ,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91:1) 능력의 삶이 필요하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과 실행)를 위해 섬김과 수난의 길을 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마가복음에서 관찰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의 사역이 비인간적인 세력들(귀신들, , 자연의 파멸적 힘)에 대해서는 힘으로 제압하지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모습으로 대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삶은 이 악한 세대 가운데 언제나 불리하게 취급되며 수난이 따른다(8:38).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야 한다. 크리스천의 삶에 수난을 우회하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수난의 신학과 신앙과 삶은 크리스천의 제 2 단계의 성숙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각처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날 뿐 아니라 수난과 희생이 동반된 사랑과 섬김과 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참고문헌>

Best, E 1970. Discipleship in Mark: Mark 8:22-10:52. SJT 23:223-237.

Guelich, R A 1989. Mark 1-8:26.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Johnson, E S 1979. Mark viii. 22-26: The Blind Man from Bethsaida. NTS 25:370-383.

Malbon, E S 1984. The Jesus of Mark and the Sea of Galilee. JBL 103/3:363-377.

------ 1993. Echoes and Foreshadowings in Mark 4-8: Reading and Rereading. JBL 112/2:211-230

Matera, F J 1989. The Incomprehension of the Disciples and Peter's Confession. Biblica 70:153-170.

Shim, E S B 1994.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according to Mark: A Narrative Reading. Unpublished D Th Dissertation, University of Stellenbosch, South Africa.

Stock, A The Method and Message of Mark. Wilmington: Michael Glazer.

Van Iersel, B 1989. Reading Mark. Edinburgh: T & T Clark.

http://cafe.daum.net/koinedata/d0j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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